글틴10대 감성쟁이
명예의 전당
-
시 세상 끝에서는 거울이 마른다월장원 선정
한 남자가 나에게 와 말했다"거울이 마르는 거 본 적 있어?"거울이 마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아뇨 거울이 저수지도 아니고 어떻게 말라요?"그러자 남자는 자신이 간 모험에 대해 이야기하며거울이 마르는 법에 대해서 말해주었다남자는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서 끝없이 걸었다언젠가 도착하고 싶은 그 세상의 끝을 향해그는 걷고 또 걸었다다리가 저려도 걷고 다리로 못 걸을 거 같으면팔로 걸으면서 쉼 없이 끝없이 계속 걸었다그렇게 끝없이 걷자 그는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하지만 세상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 어떤 사람도 어떤 식물 어떤 짐승도어떤 건물도 어떤 사물도 어떠한 구름도저 지평선 안으로는 없었다남자는 이렇게 열심히 왔지만 아무것도 없자실망하며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거울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거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마치 평소 세상을 비추전 저수지가 마른 것처럼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고그때 남자는 깨달았다고 한다자신이 무엇을 이토록 끝없이 찾았는지이 말을 한 남자는 곧바로 가보겠다고 하고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작성일 2024-04-11 작성자 바리스타작가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16상세보기 -
시 사우론의 눈월장원 선정
사우론의 눈경수는 미나를 본다 미나는 은우를 본다 은우는 진수를 본다 진수는 현규를 본다 현규는 동하를 본다 동하는 진주를 본다 진주는 진수를 본다 진수는 대준을 본다 대준은 민지를 본다 민지는 준수를 본다에어포스원 조던 반스 아디다스 나이키 리북 뉴발란스 컨버스 퓨마 크록스 자라 유니클로 폴로 나이키 톰브라운 스톤아일랜드 스투시 아디다스 언더아머 아미 꼼데 샤넬 루이비통 노스페이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본다 죽을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
작성일 2024-04-11 작성자 김백석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158상세보기 -
감성&비평 그냥, 사람은 그냥, 사랑으로부터 -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월장원 선정
나는 ‘사랑’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사람’이란 단어 역시 좋아한다. 꽤나 뜬금없는 말이지만 나는 사랑과 사람이란 단어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랑의 받침을 바꾸면 사람이 되고. 사람에서 또 받침을 슬며시 바꾸면 다시 사랑이 되고.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사랑이란 감정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나는 사랑 없이는 성숙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아직은 성숙한 사람이 아닌 한낱 고등학생인데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열심히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밟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글은 섣부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만 있다면 그냥, 사람이 되기에.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내게 있어 사랑과 사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욱 잘 알려주었다.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꽤나 단순한 이유였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지금은 떠났지만 유독 책에 열정적인 선생님이 있었고 그 선생님과 나는 꽤나 친한 사이였던 것 덕분이었다. 자연스레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조교와 같은 역할을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 책과의 연은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과의 연이 이리 오래 갈 줄은 몰랐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도 보고, 생기부도 채울 수 있겠다는,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아시기라도 하셨는지, 아마 너 이 책을 보면 평생 기억할 걸?, 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앞으로의 내 미래를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사람」에 대해 말하기 앞서, 이 책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홍은전 작가의 삶, 그니까 작가님이 노들야학 (장애인 야간학교)에서 활동하며 쓴 글을 이어붙인 글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장애인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은 적이 없었던 탓에 이 책이 더욱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만 다룬 것이 아닌, 홍은전 작가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월호, 젠더, 아이 등 사람에 관한 이야기뿐만이 아닌 동물의 문제들도 다양하게 다루고 있지만. 나는 장애인이라는 그냥,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 싶다. 1. 장애인이라는 이름의 사람. 일단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나의 할아버지가 장애인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선천적 장애인이 아닌 후천적 장애인. 장애를 얻게 된 사정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할아버지가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그 시절, 일본 군인에게 총을 맞아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는 것도, 거동이 불편한 탓에 걸으시다 그만 크게 넘어져 장애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도. 꽤나도 아닌 많이 어두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그러한 사정과는 달리 밝은 사람이었다. 늘 산책하시는 걸 좋아하여 매일같이 할머니가 끌어주는 휠체어를 탔고, 카페에 가 언니와 내게 줄 과자를 구경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동 휠체어를 탄 이후에는 할머니 없이 혼
작성일 2024-04-11 작성자 난바다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9상세보기 -
소설월장원 선정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불은 켜지지 않을 거야
*(1)층계참은 차갑기만 하다. 항상 그랬지만.센서등이 켜질까 조마조마한 건 아직도 그렇다. 이젠 불이 켜진다고 해도 맞거나 하진 않지만.조금 어렸을 때는 궁금했었다. 혹시 저 불빛은 내 생각이라도 읽는 걸까. 분명 몸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환해지던 문가. 그와 동시에 날아오던 책. 볼펜. 마우스. 크고 아프고 많은 뭔가들. 그때만 유난히 일관되었던 감정선. 나한테 온 몸으로 보내던 축객령. 이 짓거리도 이제 육년째다.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면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들은 자장가랑 다를 바도 없다. 아마 내가 아는 유일한 자장가가 혀 아래에서 뾰족하게 튕겨오는 억센소리밖에 없어서겠지. 기억나는 부분을 불러볼 수도 있다. 이놈, 애새끼, 시발, 개새끼. 가끔은 안무도 있었고 그때 그사람 입에선 어김없이 단내가 났었지.어쨌거나 내가 탈 엘리베이터는 아니다. 내 몸은 항상 땅바닥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으니까. 무기력하게. 비참하게. 구차하게. 어렸을 때 한번쯤은 그 속에서 천사가 나와 나를 구원해주는 상상을 해봤던 것 같다.몸은 분명히 컸는데 닫힌 현관문의 크기는 똑같다. 똑같은 크기의 절망. 똑같은 크기의 단호함.구역질이 난다. 그사람도 내가 자기 지갑 속에 놓여 있던 빳빳한 오만원 두 장과 잔돈 천 오백원을 도둑질하지 않았단 거 쯤은 알 거다. 애초에 그런 뻔한 짓을 왜 해?그냥 이유를 찾고 싶었던 거겠지. 인생을 송두리채 가져가 버린 도둑놈을 세상에서 없애고 싶었던 거겠지, 점차 작아지고 투명해져서 결국 센서등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무의식이였겠지, 막연한 생각이지만.사실 센서등의 불이 켜진다는 게 곧 살아있는 걸 의미한다니, 그만큼 웃긴 소리도 없다.어쨌든 죽은 사람을 그 아래다 가져다 놓으면 불이 켜지진 않겠지만.눈 앞이 뿌얘져 온다.*(2)꿈 속의 나는 혼자 집에 있어. 혼자 집에서 빵 봉지를 뜯고 있어. 보들보들 부들부들 맛있는 빵. 뜯기는 어렵지만 맛있는 빵. 어디서 가져왔더라? 아무래도 상관없지. 빵 먹어야 응? 엄마 올 시간이다.나는 엄마를 마중하러 엘리베이터로 나가.기다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 기다리면 엘리베이터에서는 엄마가 내리겠지. 음음, 음. 내리겠지. 엄마가 오면 엄마를 꼭 안아줄 거야.엄마가오면오면오면..와! 엄마가 나와.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어. 엄마가 웃으니까 세상이 따라 웃어. 아마 나한테는 엄마가 세상이니까 그렇겠지.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가. 집, 집, 집. 혼자 있을 땐 슬펐는데 이젠 안 그래. 엄마가 있으니까.밤이 되니까 우리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와. 어? 빵이다. 아까 미처 못 뜯었던 빵이 신발장 앞에 있어. 엄마한테 뜯어달라고 해야겠어.마트로 가는 걸까? 아님 놀이터에? 사실 어디로 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엄마랑 있으니까. 난, 엄마랑 있어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해.조금 기다리니까 엘리베이터가 와. 행복해.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같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행복해. 엄마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졌어.이제 엘리
작성일 2024-03-19 작성자 강완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331상세보기 -
소설 황구월장원 선정
우리 집에는 늙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언제 입양을 한 건지, 누군가 주워온 건지 그 개는 언제부턴가 그냥 이 집에 있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가 있나 싶겠지만, 그 개를 보면 이해할 것이다.내가 그 개를 문득 깨달았을 때, 그 개는 다 무너져 가는 방 한 구석에 퍼질러져 있었다. 얼굴에 진 주름은 세월을 겹쳐 빚은 듯 자글자글했으며 그것은 주로 콧잔등 근처가 그랬다. 귀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붙어 있었던 양 머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의 선을 따라 몸통을 내려다보면 그것은 정말로 뼈다귀에 가죽을 얹어 놓은 듯 갈비뼈뿐만 아니라 골반뼈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개는 잡종인지 무엇인지 견종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황구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이 무색하게 털 색깔이 빠져 점점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볼품없는 외모와 달리 황구의 눈은 세월의 바다를 머금은 듯 깊은 빛을 발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눈꺼풀이 절반까지 내려오고 눈꼬리가 축 처져 늙은 분위기를 더욱 증폭했다.황구는 그 상태로 바닥에 달라붙을 기세로 몸에 힘을 쭉 빼고 있었다. 그 개는 밥을 주어도 하루종일 질겅질겅, 껌을 씹듯이 입만 움직였고 아무데나 누런 변을 싸댔다.그 변의 형태가 정말 가관이었는데, 질척질척하게 온 사방에 눌어붙어 있어서 황구를 둘러싼 모습이 정말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그 개를 혐오했다.그 개를 싫어하는 것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온 사방에 문질러진 변을 볼때마다 아버지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고 어머니는 오만상을 쓰고 그것을 닦았다.한 번은 참다못한 아버지가 그 개를 죽이려 든 적도 있었다. 발로 밟고 차며 개가 피를 토할 때까지 때렸지만 그 개는 기어코 살아남아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폭력은 어머니의 중재가 있기 전까지 계속되었다.황구는 그럼에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는 알 수 없었고 부모님은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 개를 참기 힘들었지만 무시하며 살려고 했다.나에게 큰 문제는 오히려 개가 아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머리에 실내화 가방이 날아왔다. 나는 익숙한 그 타격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매일 나를 괴롭히는 놈들 둘이 보였다.“야, 조병신이. 너 오늘 꼬라지 아주 가관이다?”나는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몇 달이고 빨지 않아 기름때가 잔뜩 낀 옷이 내 시선을 억울한 듯이 마주했다. 네가 뭐라도 해 준거 있냐?잠시 옷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 나는 조용히 반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나에게 들려오는 욕설은 계속되고 있었다.1 교시가 시작되었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책상 안에는 썩은 우유가 있을 것이었고 자리에는 압정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압정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우유는 무시하기로 했다.그떄 내게 뭔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마 지우개 덩어리이리라. 덩어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는 주먹만 해졌다. 주먹만 한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지우개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퍽!나도 모르게 반응해 숙이고 있던 고개가 힘없이 책상
작성일 2024-03-19 작성자 김희수 좋아요 2 댓글수 1 조회수 254상세보기 -
수필 꿈과 사랑월장원 선정
요즘은 어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찰랑거린다고 느낀다. 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더 수많은 우회로들을 찾았다. 영화하고 싶다는 말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당혹으로 물들이는데 너무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특성상 그랬다. 내가 외고에 진학하게 된 것은 하나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이 의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십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다. 일월의 시작부터 일기를 쓰면서, 나의 꿈을 계속 소환해냈다. 꿈을 인지하게 되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알고 억지로 그랬다. 어차피 늘 잔존하고 있던 것, 늘 나를 늦봄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던 것이 꿈이라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포부가 진짜 꿈을 말할 수 없어서 건져낸 다듬어진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쭉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던 그 순간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를 독대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 에서 셀린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연기자를 말하면, 부모님은 뉴스 앵커를 말하는 식으로. 나의 꿈을 돈벌이 가능한 직업으로 바꿔 버린다’고. 나는 셀린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 어쩌다가 무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꿈 꾸는 나를 왜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기보다도 그들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올바르게 기능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글쓰기를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반복하면서 나는 처음 나를 마주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성숙을 다시 끌어올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열넷 즈음으로. 언어화되는 치기들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던 때로.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어리숙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하는 나만 있었다. 나의 진심을 자꾸 의심하고, 왜를 묻는 과정은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하루종일 가라앉게 하는 일이었다. 최은영은 소설 에서 성숙은 그저 우리 환경에 익숙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기꺼이 마주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두 달은 조그만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여행지와 벌이는 다정하고 날카로운 밀회였다. 내가 가진 미성숙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꿈을 꿈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양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
작성일 2024-03-19 작성자 담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20상세보기 -
시 흑백영화월장원 선정
물음표가 없는 문장은정서가 된다비 오는 거리는 은유들로 가득하다모두들의 우산에는 저마다 찢긴 흔적이 있고우리는 뒤집힌 우산을 다시 뒤집으려 하지 않는다손 위로 손이 포개지지 않는 오후는슬픔이구나, 거리의 은유를 이해하며우리는 낡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영화 하나를 보았다그곳에선 포개지는 손이 있고맥주를 마시며 수화를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두 여자를 바라보는 창문 밖 아이가 우리를 뜻한다고 한다우리?내가 되묻자 화면은 순식간에 넘어간다 유구함을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저 영화는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 아닐까,누군가 묻는다면흑백영화가 언제부터 전통이었냐는 대답이 선회한다우리는 그 영화가 너무 지루해서잠에 들었다아무도 그 영화에 대해서 반문하지 않았고아무도 우리의 슬픔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오래된 정서는전통과 구분되지 않았다
작성일 2024-03-13 작성자 옥상정원 좋아요 4 댓글수 0 조회수 341상세보기 -
시 숲 속 민초 아이스크림 집의 창을 닦으며월장원 선정
내 집을 소개할게요죽어서도 똑같이 사는 곳이에요숲 속의 바람이 들지 않는땅의 민초 아이스크림에 살고 있어요우리 집에서 나는민초냄새는 흙과 풀의 믹서기 가는 냄새에요창문은 단 하나가 있어내 보금자리는 치약 향이 스며들어 있어요진한 박하사탕이내 몸에 가시처럼 박혀있어요옅밤의 달빛이라는 또다른 해가수직으로 우리 집을 비춰요내 친구는 그 뿐이다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지나가는 바람도 덮고 있는 벽돌의 곰팡이 냄새에 얼굴을 미역의 구부짐으로 바꾸어 지나가네요나는 조용한 하루가 너무 춤이나요아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그저 늦밤의 해를 바라볼 수만 있으니까창문에 손을 내밀어요그러면서 그들을 잘 볼 수 있게유리를 세탁기에 돌린 것처럼 깨끗하게 씻겨요그럼바람도 해도 달도날 지켜보겠죠?그 시선은 나의 사진 같아서모습과 현실이 다르게 보이네요
작성일 2024-03-13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87상세보기 -
감성&비평 천진은 영원하지 않다 (영화 <다음 소희>)월장원 선정
영화는 생동하는 숨소리로 시작한다. 적막 속에서 들리는 숨찬 호흡 소리. 우리는 듣지 못하는 음악을 들으며 소희는 몇 번이고 춤을 춘다. 똑같은 구간에서 재차 넘어질 때에도 금세 털고 일어선다. 세상이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찰 때, 우리에게 그 속에서의 실패는 달가운 것이 된다. 아프겠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일어서 보라는 충고가 나를 견고하게 만드는 기운이 된다. 그렇지만. 꿈을 꾸고, 혹은 꿈은 거창하니까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잊고 있던 것 같다. 마음에 피어오르는 것들을 하나 하나 접는 지난하고 아픈 과정을 내색 없이, 어색함 없이 견뎌내는 것이 삶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내 주변에도 있고, 멀리에도 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의 일이었던 적이 없어서 나는 기어코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어설픈 자세로 엉엉 울게 되었다. 소희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울기보다도 화를 냈을 것 같다. 어쩌면 허무했을 지도 모르겠다. 종종 소희의 시선으로 장면들이 전환될 때면 애틋한 나의 지난 날이 그리워져 울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런 추측 마저도 오만한 것이 된다. 나의 사사로운 슬픔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이면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크게 들었던 마음은 슬픔과 허무함이었다. 영화는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진행된다. 소희가 죽기 전과 소희가 죽은 후가 그 경계이다. 관객인 나와 함께 생동하던 인물이 죽고 나서도 여전히 영화가 진행된다는 것이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부터 영화가 한 발짝 내 앞으로 더 다가왔다. 소희의 살아감을 볼 때 커다란 슬픔과 희미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슬픔, 모든 것을 어림짐작으로 넘겨 버리고 안전한 나의 삶에만 몰두했다는 슬픔, 말간 소희의 웃음에 배인 아름다움, 술 한 잔에 그날의 엿 같음을 일축시켜버릴 수 있다고 믿던 젊음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말이다. 소희가 손목을 그었을 때 새하얀 눈에 빠르게 퍼지는 선혈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리다가도 안심했다. 영화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삶은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이면서도 그 사실을 명징하게 짚어준다. 소희가 죽기 때문이다. 그 때에 나는 머리를 크게 맞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새차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런 것이었다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소희가 죽고 나서 영화의 화자는 유진에게로 넘어간다. 그녀는 형사과의 팀장. 유진이 사건을 파고들면서 서서히 예민해지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배두나 배우의 얼굴에는 세상을 무미건조한 무언가로 압축시켜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의 시간이, 그럼에도 모든 것을 지사적으로 바라보며 쉽게 괴로워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완고함이 있다. 그런 그녀가 숨어있던 진실들을 들춰내도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것은 없으리라는 사실이 아주 큰 허무함으로 다가왔다. 폭력이 시작점이 조그맣지 않다는 것, 소희와 준희, 은아, 동호와 태준.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작성일 2024-03-11 작성자 담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180상세보기 -
소설 땡이 아저씨월장원 선정
나는 임용고시에 도전한 첫해에선 낙방했다. 대학을 좋은 데에 나오고 하여 공부에는 썩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예상외로 난관이었다. 절치부심한 나는 집을 나와 고시원으로 향했다. 아예 시내가 먼 서울 변두리 지역의 고시원을 골랐고, 스마트폰도 없앴다. 내가 이사한 고시원은 건물이 낡고 방도 좁았지만, 방값은 다른 데보다 반이나 저렴했다. 애초에 그쪽 지역은 개발이 덜 된 곳이었다. 이사하고 첫날, 나는 하루치 공부를 다 하고 쉬고 있었다. 무엇이든 과하면 못쓴다고 공부 역시 하루 분량을 정해 그것보다 적지도 많지도 않게끔만 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는데 갑자기 방 밖이 소란해지는 듯했다. 뭔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살펴보니 건설직 노동자 여럿이 퇴근한 모양이었다. ‘자기들이 이곳 전세라도 냈나? 딴 사람들도 있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가서 따지려고 했지만 이내 참았다. 서울 변방의 작은 고시원에서 굳이 몇 안 되는 이웃들과 안 좋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다들 이곳의 주민들인 것 같았다. 회식을 하고 싶었으면 고깃집에 가지 고시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곧 있으면 잠잠해지겠거니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잠해지기는커녕 소란했던 소리가 아예 요란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다시 살펴보려 문을 반쯤 열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소주병을 여러 개 들고 공용 주방으로 가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이분들은 회식을 고깃집이 아닌 고시원에서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편하게 침대서 쉬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차라리 그들과 친해지진 못해도 낯이라도 익힐 겸 나가서 인사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섣부른 결정을 후회했다. 잠깐만 나가서 인사만 하고 가려 했지만 그만 그들이 날 멋대로 앉혀 버리고 술까지 권하는 탓에 십 분, 이십 분으로 늘어져 버렸다. 앞선 십 분 동안은 괜찮았지만 내가 고시에서 떨어진 것을 말하니 인생 충고랍시고 자기들만의 철학과 경험을 마구 설파하는데 차라리 질 낮은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나온 게 후회스럽고 지루해 죽을 판이던 중에 그들 중 최연장자였던 남자가 난데없이 내게 “널 보니까 꼭 아들 생각이 나네”했는데 나는 그를 보면서 아버지 생각은 일절 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진 점잖은 분이셨다.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으니, 그들은 노름할 채비를 했다. 식탁이 비워지고 유난히 얼굴이 눌린 듯한 남자가 부직포를 꺼내왔다. “잠깐만, 땡이는 오고 시작해야지.” 판은 다 깔렸는데 갑자기 최연장자인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다들 그 말에 “암, 땡이는 와야지.”하며 순순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땡이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길 그 땡이란 작자는 자기들과 같은 노가다패는 아니지만 어쨌건 이 고시원에 묵는 이웃인데 섰다를 칠 때 유독 땡이 기막히게 잘 나와서 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십 분이 더 지난 후 그 땡이란 사람이 왔다. “땡이 아저씨 흥 다 식겄
작성일 2024-02-26 작성자 금안백 좋아요 2 댓글수 2 조회수 277상세보기 -
소설 이해월장원 선정
마지막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필연적으로 해주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애써 왔지만, 내 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해주였다. 작년 여름에 한 잡지사로부터 인터뷰 제의를 받았다. 문화예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였고 매달 한 명의 작가를 골라 심층 취재를 하는 식이었다. 이번 취재 대상은 나였다. ‘문학계의 떠오르는 신예’ 같은 제목으로 나갈 기사였다. 분위기는 좋았고 인터뷰도 매끄러웠다. 사실 소설가에게 들어오는 질문이란 어쩌면 뻔한 것이어서,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순조롭게 답할 수 있었다.“잠깐만요!”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기자가 나를 불러세웠다.“마지막 질문입니다. 소설가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지금까지 수십 번 답해왔던 질문이었다. 그날만큼은 달랐다.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붉은빛이 쏟아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기자의 얼굴이 물감을 칠한 듯 주홍색으로 타올랐다.“제가 바라는 건… 소설을 그만 쓰게 되는 것뿐입니다.”바로 그 순간이 내가 해주를 기억해낸 순간이었다. 어느 여름, 쓰레기통 속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한 날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지역에서 유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붙은 ‘문예 신동’이라는 딱지는 자라면서 나를 내내 따라다녔다. 8살 때 전국 대회에서 우승해 공중파를 탄 뒤로 나는 도 대회, 시 대회, 전국 대회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모든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동 나이대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내가 교내 문예 대회에서 2등상을 받았을 때 느꼈던 굴욕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더 치욕스러웠던 부분은 1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당히 1등을 차지한 주인공의 인적 사항은 종이 위에 휘갈겨 쓴 ‘HJ’가 전부였다. 학교에서는 방송으로 그를 찾았지만 문제의 ‘HJ’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떠밀리듯 주어진 금상을 받아들고 방송실을 나오며 이게 일종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교실 쓰레기통 속에서 문제의 소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종이 위엔 ‘이해주’라고 적혀 있었고 본능적으로 그 소설이 수상작임을 알았다. ‘HJ’는 이해주였다.해주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해주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애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할 부류임을 알았다. 멍든 뺨과 낡은 옷, 사나운 성격은 장벽처럼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해주는 반의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불행을 마치 갑옷처럼 걸치고 다니는 여자애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주말 동안 해주의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A4 여덟 장짜리 그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소설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소설을 읽고 나서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잠겨 엉엉 울었던 순간만은 명확하다. 해주의 소설에는 내게 없고 내 친구들에게도 없고 내가 읽어온 많은 소설가에게도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에 대해선 당시엔 몰
작성일 2024-02-26 작성자 백산화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809상세보기 -
수필 꽃이 죽어버려서월장원 선정
'나의 소중한 벚꽃이 이내 죽어버렸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이 시를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벚꽃이 죽어버렸다가 아니라 시들었다고 표현해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에서 일말의 저항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꽃에게는 시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죽어버렸다고 표현한 것은 고의적인 꾸밈이었다. 그 시에서 벚꽃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여서 내 뜻이 잘 해석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표현을 벚꽃을 향해 치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가 너무나도 쉽게 부정당해버린 것 같아서 속으로 씩씩대며 줄을 긋다 그만 표현을 지워버렸다.여정의 끝을 의미하는 두 단어 '죽다와 시들다' 꽃에게 있어 무엇이 더 감각적인가를 두고 보아도 시들다가 좀 더 풍성한 이미지를 준다. 시들다라는 말은 소리 없이 서서히 그러나 우아하게 푸름에서 붉음으로 가다 끝내 어둠으로 장식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가진다. 그러나 죽다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육체로서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동족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외롭게 또 누군가는 행복하게...그리고 결말은 백골과 썩은 살덩이라는 다소 씁쓸한 잔해를 남긴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 탓에 죽다라는 말이 시들다라는 말보다 감각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행형으로 바꾼다면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들고있다는 푸름에서 붉음으로 죽다는 활력에서 침묵으로, 전자는 감각적이지만 후자는 추상적이다. 그리고 죽다의 추상을 시들다는 함께 가져간다. 죽다의 장점은 꽃의 끝맺음과 동물의 마무리를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것 진달래가 죽었다던가 지구가 죽어간다던가 어느 사물에 써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 죽다는 시들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꽃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시들다라는 표현을 쓰기로했다. 꽃에게 있어서 죽다는 섬세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꽃을 이용해 글을 쓸 때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싶어' 다소 오글거리는 발상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 함축하고 싶은 의미가 많기 때문이다.좋은 글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이해 되기 쉽게 쓰는 것, 둘째는 풍부한 표현을 쓰는 것, 셋째는 문장을 짧게 짧게 쓰는 것, 작가가 이것을 어기고 위험부담을 감수할 때는 그만한 가치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 시를 잘 쓰기 어려운 이유다. 내 의도를 드러내려 힘쓰다보면 이해 되기는 쉽지만 그만큼 표현상의 결점도 쉽게 남는다. 표현을 풍부하게 하려 힘쓰다보면 의도는 감춰지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느낌이 강해져 이해가 어려워진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의 중용을 지키는 것인데 이 중용이라는 것이 참 애매한 부분이라 시를 씀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하게된다. 그러나 나는 5년 전 기억 속에서 그 답을 찾아 낸 듯하다. 중용이란 작가에게만 중용이면 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어버렸다고 표현했다가 함축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으며 시들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면서는 되려 풍부
작성일 2024-02-26 작성자 식빵연필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15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