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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24

12월호
12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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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3.12.01
우리가 알던 뜨거운 점

우리가 알던 뜨거운 점 박소민 오늘은 제때 오려나. 율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렸다. 태양 흑점을 보고 싶다는데 네 시 넘어서야 시민천문대 중앙관측소 문을 열어젖히고 저 왔어요, 손까지 흔들며 활짝 웃는 조그마한 어린아이. 아마도 나이는 열두 살쯤. 요즘은 초등학생도 수업이 늦게 끝나나. 율은 이 시간에 오면 해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몇 번씩 재차 일러준 적 있었다. 내일은 꼭, 삼십 분만 일찍 오라고. 아이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났고 저기 해가 떴는데 왜 안 돼요? 아직 쨍쨍한데, 또랑또랑하게 물어 왔다. 율은 정말 미안한데 친구야, 그게 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저기 봐, 구름에 다 가렸잖아?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가리켜야 했다. - 별은 싫어? 조금만 기다리면 별이 뜨는데. - 내일 또 올게요. 아이가 오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율에게는 미련 없이 되돌아 나가는 매일의 뒤통수가 켜켜이 쌓였다. 아이가 눌러 쓴 캡 모자의 색, 어느 날은 빨간색이었다가 다른 날은 노란색, 두 개를 섞은 주황이었다가 또 검정이 되는 동안 율의 마음도 덩달아 거뭇거뭇 타들어갔다. 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너인데 내가 네 머리에 매일 달리 뜨는 해를 보는구나······ 싶어서. 언젠가 한번 아이를 불러 세워 물었다. - 밤에 오지 않고 낮에 오는 이유가 있어? 보통은 별이 더 인기가 좋은데. 태양은 매일 뜨니까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을 텐데. 아이는 눈썹 아래까지 푹 내려쓴 캡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 매일 떠 있으니까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거예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건 율도 마찬가지였다. 율은 아이가 올 때마다 잊지 않고 꼭 질문을 한 개씩 했다. 사람 한 명 없이 발길이 뜸한 낮, 율은 아이를 떠올렸고 묻고 싶은 것을 입안에서 돌돌 궁굴렸다. 아이의 이름은 가원이었다. 캡 모자 안에 머리카락을 쑤셔 넣고 다녀서 풀어헤쳤을 때의 길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삼촌과 단둘이 살고 있으며 유독 동그란 뒤통수 때문에 본명보다 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이 가, 이름이 원이에요. 실은 정가원이라는 걸 알고도 율은 모른 척해 주었다. 매일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율은 원에 대해 한 줌의 이야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삼촌. 다섯 시 넘어 땀으로 얼룩진 체크 남방, 허겁지겁 달려 들어와 무릎 높이에서 손바닥을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는 낮고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혹시 요만한 아이 정가원이 오늘도 다녀갔나요, 물어 왔는데 원의 진짜 이름도 이렇게 알게 된 거였다. 네, 집에 간다고 하던데요. 율이 안심시키면 그는 숨을 고르며 실례가 많습니다,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율은 그런 그에게서 풍겨 오는 과장되지 않은 깍듯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말을 거는 법이 없다시피 한 율도 왜인지 원과 그의 삼촌에게만큼은 입을 열게 되었다. 삼

소설 2023.12.01
보리수나무 아래

보리수나무 아래 윤대녕 1 며칠 전 종편방송을 시청하다 나는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략 십 년 만이었다. 〈그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다소 긴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봄에서 여름까지 지방 곳곳을 옮겨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다. 봄여름을 그렇게 보낸 뒤 가을에는 고향인 강화도로 돌아가 아버지의 농사를 도우며 지낸다고 했다. 과거 연희동 술집에서 만났을 때 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으니 지금은 오십대 초반일 거였다. 촬영 당시 그는 충청도 공주의 어느 산자락의 움막에서 지내며 밤꿀을 채취하고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했으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시냇물 속에 이끼를 머금은 채 고요히 잠겨 있는 돌을 떠올렸다. 더불어 강화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화도 고려궁지 아래 있는 한옥 성당을. 한옥 성당 마당에 서 있는 보리수를. 2 당시 나는 서대문구 연희동의 오래된 주택 이층에 세 들어 살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와 만나게 되었다. 영화감독인 매형의 소개로 술자리에서 합석한 적이 있었다. 매형은 옆 동네인 연남동에 독립 프로덕션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희동 단독주택에 방을 구해 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만나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게 되었고 어떤 날은 낯선 사람들이 중간에 합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매형의 지인들로 대개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연희동 음식점 거리에서 연남동으로 넘어가려면 굴다리를 통과해야 하는데, 굴다리로 진입하기 직전 오른쪽 골목 안에 야식포차집이 숨어 있었다. 매형과 나는 거기서 만나곤 했다. 그날은 왜 매형과 만났던 것일까? 늘 그렇듯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건 초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정도였다. 3 매형과 누나가 따로 지낸 지 십사 년이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 만나는 일도 없이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집을 나간 것은 누나였다. 종로에 있는 보습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던 누나는 어느 날 짐을 꾸려 홀연히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후 두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관계를 지금껏 유지해 오고 있었다. 홍어찜을 앞에 두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터에 밤 열 시쯤 매형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병주냐? 너 그동안 어디 있었길래 통 연락이 없었어? 그래, 조만간 한번 보자. 뭐, 지금? 매형이 잠시 통화를 멈추고 후배가 만나자는데 합석을 해도 되겠냐고 내게 물어 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기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기에 나는 적당히 일어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로부터 약 삼십 분 뒤에 나타난 사내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언젠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사극에 출연했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방송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매형한테 들은 바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

소설 2023.12.01
낫과 밤

낫과 밤 김경욱 글이 써지지 않는 밤에는 낫을 들고 나갔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베란다 창고에 낫이 있었다. 지구 반대편부터 끌고 온 캐리어를 집어넣다 발견했다. 열네 시간 훌쩍 넘는 비행으로 내 몸뚱이마저 낯설었지만, 물음표 모양으로 희번덕거리는 그것은 낫이라 불리는 물건이 분명했다. “하진 씨, 이게 뭐예요?” 아내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반말하지 않기. 서로의 이름 부르기. 그게 유일한 결혼 조건이었다. 부부간에 요요, 해서 애가 들어서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지켜 온 혼인 서약이었달까. “보면서 물어요?” 하진 씨는 베란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웬 거냐고요.” 내가 고쳐 물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빠뜨렸나 봐요. 일부러 연락하기 애매해서 그냥 뒀어요. 가져갈 거면 가지러 오겠죠.” 낫을 맨 안쪽으로 밀어 넣고 창고 문을 닫았다. 주말농장에서 썼는지 산소 벌초에 썼는지 몰라도 낫의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 하진 씨가 고르고 계약한 아파트였다. 이사도 하진 씨 혼자 했다. 재건축 얘기가 도는 단지였다. 이미 확정 단계라 했던가. 상관없었다. 내게 있어 집이란 밤을 새워 글 쓰는 곳을 뜻하니까. 나 자신을 코너로 몰아넣을 두 개의 벽만 있으면 되니까. 이곳은 세상의 구석, 나의 북극점, 나의 두벌식 자판, 나의 저장하기. 부동산 계약서에도 대법원 등기소에도 올리지 못할 나만의 주소. 번지수가 어떻게 되든 노트북을 펴는 자리가 바로 나의 집이다. 맞다. 나는 작가다. 지금껏 쓴 책이라야 장편소설 한 권뿐이지만. “집주인이 갑자기 들어와 살겠다네요.” 하진 씨가 이사할 집을 급히 구해야 한다고 전화했을 때 나는 열두 시간 시차 너머에서 노트북 화면만 노려보던 참이었다. 미국 북동부의 한 주립대학에서 운영하는 국제창작프로그램 지원 자격은 오직 책 한 권. 나를 위한 레지던시 같았다. 어느 날 화재 경보에 놀라 잠옷 바람으로 레지던시 숙소를 뛰쳐나가면서도 나는 노트북부터 집어 들었다. 몸만 빠져나온 외국 작가들이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너, 작가 맞구나.” 그런 영어는 못 알아들을 수 없다. 일간지 기자 출신 작가라면. 작가 두 글자 앞에 군더더기처럼 붙곤 하는 수식어가 못내 거슬리던 사람이라면. 중학생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운 특파원이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 보도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대학도 불문과에 갔다. 방송국에 서너 번 떨어지고 신문사로 방향을 틀었다. 틀어진 건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부부 소리를 들으며 붙어 다니던 여자친구와도 졸업하자마자 헤어졌다. 사귀는 동안에도 왜 사귀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건 제대하자마자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에서 여자친구가 마실 막걸리

소설 2023.12.01
밤의 반만이라도

밤의 반만이라도 이선진 그 겨울, 우리는 어두워지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빛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전맹인 네 엄마 덕택에 너희 집 불은 대개 꺼져 있었고, 나는 활동보조사로 일했던 새엄마를 따라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갈 때마다 몸이 훅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언덕 경사로에 위치해 입구만 지하에 나 있을 뿐 반대쪽에서 보면 엄연한 지상층이었는데도 동네 사람들은 너희 집을 반지하 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못 살아.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있어!” 한번은 불이 켜져 있음에도 새엄마가 이렇게 말했고, 나도, 너를 낳고 기른 미수 씨도, 아무도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바로잡지 않았다. 오직 너만이 작지만 모두에게 충분히 가닿을 법한 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아줌마 얼굴이 제일 어두워 보여요!” 비밀스러움. 네겐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그건 네가 너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비밀을 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비밀이 없는 것이 오히려 너를 비밀스럽게 만들었다. 너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말을 슈퍼에서 파는 백 원짜리 싸구려 불량식품처럼 스스럼없이 입에 올렸다. “우리 엄마는 시각장애인이고, 얘네 엄마가 일주일에 세 번 우리 집에 활동 보조하러 와!” 하고 속사정을 훤히 내보였다. 그때 이미 너는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나머지 한쪽 눈의 시력도 서서히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마치 네가 잃어버린 게 몽당연필이나 연필 꽁지에 달린 지우개인 듯 굴었다. 그래서 어려운 친구를 도와줘야 한다는 지령을 받은 반 애들은 도움 받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저자세를 취하지 않는 너를 겉돌곤 했다. 그러니까 너로 말할 것 같으면 학교에서 선생님이 둘! 하고 외쳤을 때 언제나 짝 없이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셋! 하고 외쳤을 때 언제나 짝 없이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넷! 하고 외쳤을 때 언제나 짝 없이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는 둘과 셋과 넷밖에 외칠 줄 모르는 얼빠진 선생에게 “근데 있잖아요, 왜 하나! 하고는 안 해요?”라고 요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아주 잠시, 나로 인해 둘이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만져 봐도 돼?” 아무도 너와 짝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 우리가 처음으로 짝이 된 날, 너는 한시도 가만두지 않아 빨갛게 부르튼 내 입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무렵 반 애들의 책상에는 기다란 세로선이 그어져 있었고, 누군가 그 선을 넘으려 들 때마다 금, 하고 말했다. 금 넘으면 죽어! 초짜처럼 소리 높이는 대신 최소한의 말만 간추렸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못해 안달 난 아이들. 나는 ‘5쾌’라고 적힌, 칠판 위에 삐뚜름하게 걸려 있는 급훈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쾌, 상쾌, 통쾌, 경쾌. 여기까지는 유추 가능했는데 딱 하나가 빠졌다. 삐뚠 게 내가 아니라 액자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만져 봐

소설 2023.11.01
나의 다비드

나의 다비드 임순옥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꽃이 불 켠 양초처럼 서서 가루를 흩뿌렸다. 노랗고 분분한 것이 보이지 않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책방 곳곳에 악착같이 흔적을 남길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수건에 물을 적셔 책꽂이와 창틀을 닦아냈다. 눈이 따끔거렸다. 각막을 닦아내면 노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았다. 미닫이문을 열었다가 닫았는데 신경을 끊어 놓을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수꽃이 소스라쳐 송화 가루를 무더기로 날려버렸을지 모르겠다. 근처 씽크대 공장에서 합판을 자르는 전기 톱날이 내는 소리였다. 씽크대 공장에 육십이 넘은 남자와 젊은 인부가 일하는데 이 달부터 오가는 길에 인사를 하고 지낸다. 가루 날리는 수꽃들처럼 이들도 악착같이 톱날을 드는 것이다. 늙은 남자가 이틀 전 어둑해질 무렵, 책방에 와서 손주 녀석이 게임을 좋아하는데 읽을 만한 책이 있냐고 물었다. 한번 같이 오라고 했더니 같은 동네에서 일 년 넘도록 지켜봤는데 오전에 책방 문 여는 걸 못 봤다며 퉁박을 놓았다. 씽크대든 책이든, 손님이 있건 없건, 물건 파는 집은 부지런해야 한다고 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오후 한 시에 문을 연다 했더니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슬쩍 대답을 피했다. 노인이 넌지시 가게 세를 물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전기 톱날이 내는 소리처럼 카랑했다. 요즘 나는 오전에 의류 쇼핑몰 건물 청소를 하고 있다. 오전 6시 출근해서 1, 2, 3층 매장에 청소기를 돌리고 밀대로 바닥을 닦는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화장실 물청소까지 하고 나면 겨울에도 작업복 상의에 땀 얼룩이 졌다. 계단 신주를 닦고, 바닥에 붙은 껌을 벗겨낼 때는 브래지어를 탈의한다. 한 번 벗고 보니 땀 차고 옥죄는 속옷을 고집할 까닭이 없었다. 10시까지 청소 일을 마치면 책방에 와서 샤워를 하고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한 시에 책방 문을 연다. 그날 매출은 2만 2천 원, 팔린 책은 노인이 고른 동화책 두 권이 전부였다. 매출 0이 될 뻔한 날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다. 덕분에 씽크대 공장 노인과 제법 길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은 이 동네 가게 세가 싼 편이라 했다. 그렇죠. 그래서 인수할 수 있었죠. 나는 속엣말을 했다. 노인은 꼿꼿한 자세로 책방을 휘 둘러보더니, 부엌까지 딸린 1층 상가가 보증금 3천만 원에 월 35만 원이면 거저라고 했다. 거저라뇨, 대출금과 월세 때문에 목이 메는데. 나는 그 순간 진짜 목구멍에 찰떡이라도 낀 것 같았다. 딸 같아서 하는 이야기니 고깝게 듣지 말라며, 그래도 책 팔아서 운영비와 월세가 빠지고 생활비가 나와야 장사를 하는 거다, 아니면 빚더미에 앉기 십상이니 큰 손해 안 볼 때 접는 게 상책이라 했다. 생선가게는 생선이 귀한 데서 하고 책장사는 책이 귀한 데서 해야지, 책방 코앞에 도서관이 생겼는데 장사가 되겠냐고 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냉큼 받아쳤다. 도서관에서 책 대출 하는 사람들이 책방에 와서 책을 사더라고 말이다. 사실 길

소설 2023.11.01
현숙, 지은, 두부

현숙, 지은, 두부 정소연 현숙은 구포동을 정착지로 골랐다. 연고지는 아니었다. 애인과 헤어지고 나니 더 이상 서울에 살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현숙과 애인의 관계를 알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큰 도시의 익명성이란 때로 얄팍했다. 현숙은 한 번 더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 소문이 되고 소문이 낙인이 되는 경험은 이미 했다. 애인은 실수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인정하지 않을 잘못을 했다. 구포역은 현숙이 KTX를 타고 하나씩 내려 둘러본 역 중 거의 마지막에 있었다. 작지만 깨끗한 기차역이었다. 역 주위에는 대형 카페 체인, 편의점, 김밥집 따위의 편의시설이 적당히 들어서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조성된 생태공원이 도보거리에 있었다. 현숙은 공원에 가보았다. 보호자가 미는 휠체어를 타거나 보행 보조기를 천천히 밀며 산책하는 노인,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보호자, 모자, 토시, 스카프로 중무장하고 경보를 하는 중년 여성들이 제각기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느리게 일하고 조금씩 벌면서 자리 잡고 나이 들어 가기에 좋은 동네 같았다. 영업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오피스텔에 살면서 돈을 모아 바로 옆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집을 마련하고(여기까지가 공인중개사가 그려 준 미래였다), 거기서 최대한 오래 버티다가 근처의 요양병원에 여생을 맡기는 삶(이쪽은 현숙이 지향하는 미래였다)이 가능해 보였다. 딱 적당한 동네였다. 서울에서 충분히 멀었고, 충분히 도시였고, 충분히 느렸다. 현숙은 구포역에서 십 분 거리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보증금 오백만 원에 월세 삼십오만 원이었는데, 주방과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어림없는 금액이었다. 현숙은 근처 신도시 주민을 주 고객으로 하는 프리랜서 펫시터로 정착했다. 다른 사람들이 출장, 여행, 야근, 건강상의 이유로 돌보지 못하는 고양이와 개들을 대신 돌보는 일이었다. 가슴에 액션캠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구형 휴대전화를 달고, 주인 없는 빈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고양이의 화장실을 치우고 사료를 주었다. 낚싯대를 흔들거나 캣닢이 든 장난감을 던져 주며 고양이들과 놀았다. 현숙은 고양이를 조금 더 좋아했지만, 현숙의 생계를 유지해 준 것은 고양이보다는 개 돌봄이었다. 산책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퇴근이 늦어서, 건강상의 이유로 반려견 산책을 나서기 어려운 보호자들이 산책 돌봄 신청을 하면, 현숙은 개를 데리고 나가 생태공원을 걸었다. 때로는 줄을 쥐고 헉헉대며 개를 따라 뛰었고, 때로는 개를 유모차에 싣고 천천히 걸었다. 발바닥을 닦아 주고 집에 돌아와 물을 마시며 그날 만난 고양이와 개들의 돌봄일지를 썼다. 종일 사람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서울에 남아 있을 옛 애인, 평소 만나지 않음으로써 단체 채팅방에서는 서로 그럭저럭 문명인다운 명절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원가족, 한때는 일주

소설 2023.11.01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최미래 눈꺼풀 위로 햇살이 드리웠다. 나는 감은 눈 안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요즘에는 낮이고 밤이고 쉽게 졸았다. 하지만 막상 작정하고 자려고 하면 깊은 수면에 들어가지도 꿈을 꾸지도 못했다. 얕고 미지근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아 내가 잠 속으로 향하는 어딘가에 머물고 있구나.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까지의 시간은 참 길고 아득해. 둘러볼 풍경도 없고.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가만히 기다리는 기분이야. 기다린다는 건 무언가 내 앞에 당도할 때까지 버티는 것.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유지하는 것. 나는 나조차도 뭔지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림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데서 안도한다. 걱정을 내리누르는 적당한 어둠. 좋다. 영원히 헤매도 괜찮을 만큼. 그런 생각을 멈추지 못하면서 졸음 그 자체를 누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20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오후 5시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퇴근을 앞둔 직장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은근슬쩍 가방을 챙기거나 퇴근 시간까지 업무를 끝내기 위해 바빠지기도 할 것이다. 몇 개월 전의 나였다면 하루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한 사람처럼 뭐라도 하기 위해 조급해질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일을 해치우기 위해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토록 아름답게 늘어지는 저녁 해를 그때는 누리지 못했고, 오후 5시는 이제 내게 서라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이불을 침대에 잘 개어 놓고 방과 거실을 오가면서 간단한 정리 정돈을 했다. 서라가 아침에 벗어 놓은 잠옷은 세탁 바구니에, 머리띠나 인형 같은 건 작은방에 대충 집어넣었다. 방 두 개가 딸린 아담한 집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 정도 평수의 집에서 혼자 살기를 원했다.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일상. 어떻게 보면 반의반 정도는 이루어진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희망사항에서 더욱 멀어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이 집은 거실, 침실 할 것 없이 아기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가 있는 집 특유의 포근하고 찌뿌둥한 냄새는 이상한 자책감을 일으켰다. 나는 완전히 깨어나기 위해 슬슬 걸으며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 마시고 머리를 묶었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는 동안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 속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라와 얼굴을 맞댄 이 여자는 아마 서라의 엄마일 것이다. 모녀는 선한 눈매와 작은 입술이 꼭 닮아 있었다. 내가 당신의 아이를 돌보고 있어요. 나는 당신 없는 이 집에서 돈을 개꿀로 벌고 있어요. 당신은 어디 있어요? 여자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답이 없었다. 서라야. 안녕히 가세요, 소리 내어 말하면서 배꼽 인사 할까? 유치원 선생님은 서라를 가뿐하게 안아 버스에서 내려 주었다. 서라는 두 손을 공손하게 배 위에 얹고 허리를 숙인 뒤 내 옆에 섰다. 이모님 보셨죠? 서라가 아직도 말을

소설 2023.11.01
피서

피서 한은형 1 기온이 낮고 습하지 않은 곳을 찾아 한여름의 홋카이도 시베츠로 떠나는 여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추운 나라에서 계속 살았다면 피서를 가는 일은 없었겠다고 베라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베라에게 피서란 더운 여름이 배경인 소설에나 존재하는 말이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여름은 일 년 중에 가장 날씨가 좋을 때여서 누리기 바빴고, 추위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지는 겨울에 ‘쿠르가우스’, 그러니까 피한(避寒)을 떠났다. 피서라는 뜻도 함께 있었지만 베라에게 쿠르가우스는 피한이었다. 베라에게는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떠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공동으로 쓰는 다차에서 피한을 할 때는 몰랐던 몽글몽글한 공기를 한겨울의 피한지에서 느꼈다. 다차가 추웠던 건 아니다. 과한 난방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지만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좀약 냄새가 나는 공용 이불을 덮고 자는 건 피한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석탄을 활활 태우는 게 아니라 시간대가 다른 곳으로, 대기 중의 온도가 다른 곳으로 가야지 피한이라고 베라는 납득할 수 있었다. 집에서 싸온 마르코프차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이나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러시아의 당근 김치. 가 아니라 따뜻한 도시에서 불가리아나 조지아의 음식처럼 이국적인 걸 먹어야 했다. 다차의 개어져 있는 이불에서는 시베리아횡단열차 3등석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던 공용 이불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베라는 피서가 처음이었다. 베라의 여정은 한대앞역에서 당고개행 열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열차는, 그리고 열차 안의 베라는 동작역을 지나 이촌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지점이면 4호선 당고개행 열차가 동작역을 지나 이촌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베라는 여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생활을 꾸린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자동차와 열차가 의좋게 달리는 느낌을 주는 이 구간이, 한강이 보여 가슴이 트이는 이 구간이, 석양이 질 때 특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 구간이 베라는 좋았다. 하지만 동작대교 위라는 건 알지 못했다. 동작대교 위의 열차가 통과하는 부분이 연속적인 하늘색 아치로 감싸여 있다는 것도. 달팽이집에서 나와 몸을 길게 늘이는 달팽이의 몸처럼 이때 그녀의 표정은 잠시 녹녹해지곤 했다. 서울의 풍경이 신기해서는 아니었다. 그럴 시기는 지났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보이는 간판들을 모두 읽었다. 금정삼성쉐르빌 ··· 한우만 ··· 토끼와 여우 ··· 김밥천국 ··· 장어마을 ··· 마을이나 고을, 집을 접미사로 붙여 만드는 식당 이름에 이제 익숙해졌고, 김밥천국처럼 이름을 보면 가격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하는 건 다른 문제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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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3)

안전의 방향 (3) 홍성희 * 2023년 가을 『자음과모음』에서 기획한 좌담은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1)라는 제목으로 지면에 발표되었다. ‘여성의 것’이라는 소유격을 가정하게 된 최근 문학장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좌담은 작가와 작품이, 현실 세계와 작품 속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최근의 경향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2021년에 발표된 박서련의 「그 소설」과 김보경의 「실종」을 2023년의 지금 다시 중요하게 읽게 되는 것은, 어떤 논의의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패턴을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라는 의문문의 맥락에서 문학과 현실을 분리하거나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데에는 어떤 면에서 마찬가지로, 안전을 향하는 방향성이 거듭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언어로써 창작할 때는 수많은 기제들 속에서 내적 검열을 하고 그 안에서 대결하며 나오는 것이 결국 내 창작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6년 이후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식하게 함으로써, 내가 쓰고 재현하고 있는 언어들이 이 세계의 오염된 언어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어디에서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했다고 봐야죠. 이건 아주 유의미한 전환이었고, 한국 문학의 새로운 장소를 열어 줬다고 여깁니다.(35) “문학적 현실을 실제 현실의 연장으로 간주”하여 “인물들에게 실제 현실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도덕성을 강요”(34)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우려 섞인 입장을 드러내는 발언들에 이어, 하재연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가능하게 한 ‘전환’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정리하고자 한다. 하재연의 발언에서 2016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전환’이란 현실 세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문학 창작에 ‘검열’이 작동하게 만드는, 그렇게 모든 언어가 동질해지도록 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검열’이라는 단어 대신 ‘어려움’이나 ‘갈등’과 같은 표현을 선택한다. ‘전환’을 이해하는 언어가 ‘검열’이 될 때 초점은 문학적 현실과 실제 현실, 문학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의 밀착을 ‘강요’하는 문학 ‘외부’ 현실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을 ‘어려움’이나 ‘내적 갈등’과 같은 언어로 소화할 때 초점은 창작자 혹은 문학의 ‘내부’ 동력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적 움직임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문학의 언어를 현실의 언어와 분리하여 “안전하고 안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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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 송종원 1. 문제는 가족이야 지난 회차에서 김민정의 시에 쓰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1)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보자.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에 실린 해설의 가장 뒤에는 이런 문장들이 있다. “지금 내게는 그저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한 시인의 머릿속에 이토록 끔찍한 이미지들이 미친 듯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이 여자의 악몽들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창문 밖을 바라보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정문을 나와 마구 거리로 쏟아지고 있다. 햇살이 총총, 가득하다.”2)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이야말로 비평이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이 고담준론을 늘어놓을 때 작품과 독자 사이에는 장벽이 생기고 비평가와 작가 사이에 불신이 형성된다. 비평이 자상해지는 순간 독자는 문학 작품 곁으로 다가오고, 작가는 비평가와 협업에 흥미를 느낄지 모른다. 각설하고. 인용에서 질문과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이장욱은 저 질문의 답으로 ‘학교’를 의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사실 그는 해설 중반에 악몽의 발신처를 한번 짚고 넘어간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시집에 대해 말하면서 이 시집에 담겨 있는 가족 풍경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들끓는 거리와 세상과 내면의 악몽이 발원하는 곳이면서, 그 악몽들이 압축되어 있는 곳이다.”3) 나 역시 가족을 지목하고 싶다. 모든 가정마다 해골이 하나씩 있다고 했던가. 문제는 김민정이 그린 가족 속의 해골이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에 있다. 담배 피우다 담배 먹은 엄마가 글쎄 날 염통 속에서 건졌다지 뭐예요 아마도 연기가 매콤해서 내가 재채기를 했나 봐요 훌쩍거리는 내 콧소리를 듣고 주먹을 입에 넣어 바람 빠진 럭비공 같은 염통을 턱 하니 뽑아냈다나요 (···중략···) 난 가끔 엄마의 목구멍에 미끄럼틀이 깔려 있는 건 아닐 까 속 깊이 플래시를 비춰 보곤 해요 그러나 심심해지면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져 보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죠 줄줄이 총살당한 죄인들처럼 고개를 늘어뜨린 바나나나무들이 죽기 전에 참 많은 바나나를 흘려 놓았거든요 만일 엄마가 봤으면 기를 쓰고 다 주웠을 텐데 그럼 나도 다 까먹고 배 터져 죽었을 텐데······ 참, 엄마의 애기집 속에는 아직 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 하지만 난 걔를 좋아하지 못해요 바나나 나라에서 바나나씨로 날아온 걔가 내 탯줄까지 쪽쪽 빨아먹고는 십여 센티 장딴지로 혼자 굵어 갔거든요 나가 나가 당장 우리 집에서 짐 빼 그 아인 살색 샤프심처럼 삐쩍 곯은 날 염통까지 단번에 걷어차 버렸어요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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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2)

안전의 방향 (2) 홍성희 * 문학에게 현실로부터 안전한 자리가 약속될 때, 문학은 스스로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문학에게 현실과 분리된 자리를 배당한다는 것은 비단 문학이 그리는 세계가 현실 세계의 재현일 뿐 실제 그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이 재현하는 세계와 문학이 재현을 수행하는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될 수 있다고 여길 때, 그러한 단절 감각은 문학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문학이 문학으로서 쓰이고 읽히고 유통되는 제반 사정을 별개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태도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 태도로부터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거듭 시작된다. 예술로서 ‘작품’ 자체로 존재하는 문학에 관해 말할 때 문학은 사람‘의’ 창작물로서의 문학으로부터, 쓰고 편집하고 옮기고 읽고 교육하고 배우고 흡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문학에 대한 경험 및 관념 혹은 문학의 역사적 작동 방식으로부터 오롯이 분리된 자리에 있는 것으로 선언된다. 문학에 문학의 태생적 조건과 시간적 위치와 수행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리를 쥐어 주는 그러한 언명은 다만 문학의 미적 가치를 알아보고 가꾸어 나가며 보존해 가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무관’에 관한 감각은 모든 문학 텍스트의 조건과 위치와 역할들이 작동하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장, 제도로서의 문학을 미적 산물로서의 문학과 분리시킴으로써 진정 문학적 가치를 음미하게 하는 ‘문학’을 상정하여 긍정한다. 한 텍스트의 ‘문학’적 면모를 말하는 일은 그것이 문학으로 유통되는 장의 생리에 대해 말하는 일과 반드시 유관할 필요는 없으며, 두 작업이 상호 호환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라는 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유의미한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위치를 긍정하게 한다. 반면 두 작업이 때로 상충되는 감정과 판단에 도달한다면 그 괴리의 책임은 ‘문학’이 아닌 곳에 있으며, ‘그들’의 ‘몰이해’는 그러한 조건에서 이해할 만한 것이자 ‘문학’의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만일 ‘문학’과 문학 사이의 간극이 문제적으로 여겨지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문학은 때로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현실, 정치, 목적, 의도, 혹은 편협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렇게 바라보는 태도에 관해 문제점을 논의하려는 시도는 ‘문학’의 존재적 배경이나 도구적 조건에 관한 비본질적 논의로서 비판되고 배척될 수 있다. 문학과 ‘문학’ 사이에 용인되는 간극은 나아가 문학인으로서 창작자의 태도나 언행을 비판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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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송종원 0. 낚였던 비평(가)들 밤마다 나는 어항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요 들리거든요 금붕어들의 반짝거리는 수다 이리 와, 이리로 와서 우리랑 함 께 뻐금거려보자 우와, 정말로? 나는 주걱으로 죽어라 내 입술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밤마다 학의 긴 부리 끝에 한 꿰미로 똥구멍에서 주둥이까지 한 큐에 꿰여버리고 마는 금붕어들 매일 나는 새로 산 금붕어를 삶아 어항 속에 풀어두어요 때때로 플라스틱 금붕어들이 산란하기도 한답니다 -「열쇠魚」 전문1) 아마도, 자신의 시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힌트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와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인의 첫 시집을 ‘엽기’ 코드에만 너무 집중해서 읽은 듯도 하다. 제목의 “열쇠魚”는 재치를 부려 숨겨놓았지만 ‘열쇳말’, 말 그대로 키워드를 말한다. 그러니까 시집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쇳말이 이 시에는 쓰여 있다. 우선 “어항”은 어장(語場)이기도 하다. 더 좁혀 말하면 시인이 쓰는 시의 장일 수도 있겠다. 시인은 거기서 금붕어들의 수다를 적어놓는다. 금붕어라는 단어 안에 ‘금어(禁語)’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는 것을 보면 금지된 말들을 시 속에 부려놓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알다시피 김민정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하는 것들을 자주 시 속에 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금붕어에 대한 연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금붕어를 자조적으로 썼을 때 그것은 망각의 맥락을 지닌다. 살면서 겪어온 것들 중에서 속된 말로 우리가 자꾸 까먹는 것을 시인은 까발린다. 시인이 입이 아프도록 까발린 말들은 사실 아픔의 언어고 어떤 죽음과도 연결된 언어였을 것이다.2) 하지만 시인의 어항에 ‘학’이 찾아와 큰 부리로 저 풀어버린 금어들을 한 덩어리로 꿰어 죽음으로 만들어버린다. 학의 학살. 눈치 빠른 이라면 이 학이 그 ‘학(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를 읽어내기도 전에 지식의 편견으로 시를 대하는 사람들, 그래서 시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둬버리는 이들에 대한 독설이라고 볼만도 하다. 풀어보면 작품의 언어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작품의 평가를 먼저 내린 자들에게 반성하라는 항의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시인이 지목하는 무리 안에는 당연히 비평가가 들어 있을 것이다. 시인은 비평가들의 오해에 자신의 시가 잠식당할까 그에 질세라 산 금붕어들을 구워삶아 어항에 다시 푼다. 때때로 거기에 가짜 금붕어들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저 가짜 금어들은 살아있는 언어를 살려두기 위해 시인이 비평가들에게 던진 일종의 미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 미끼는 미래파를 긍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 중 어디로 흘러갔을까? 1. 동물화하는 시로서의 미래파? 2000년대 한국 시단을 말하며 누군가는 20005년을 기점으로 2000년대의 시단은 둘로 나뉜다는 흥미로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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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1)

안전의 방향 (1) 홍성희 * 안전하려는 마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김지연의 「먼바다 쪽으로」1)에서 ‘현태’는 누군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그의 불안 증세가 완화되길 바라는 ‘종희’는 생활을 정리하고 현태와 함께 도시 밖으로 이주한다. 현태가 위험을 느끼게 된 배경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도시에 남겨지고, 위험을 피하는 마음은 그렇게 ‘먼바다 쪽으로’ 가려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먼 바닷가에서도 현태는 무시로 공포에 휩싸인다. 멀어졌을 뿐 위험은 여전히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의 거리는 언제고 좁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태와 종희는 안전하려는 마음의 크기와 동일한 정도로 확고하게 이내 위험이 닥쳐올 것을 믿고, 그것을 기다린다. 현태는 그 불안이 형체를 입고 시꺼먼 모래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조개껍질을 열고, 열고, 또 여는 방식으로 스스로 위험한 인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두 사람에게 안전하려는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지키기 위해 기꺼이 위험해지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들의 그림자는 ‘먼바다 쪽으로’ 물을 가르며 계속 걸어 들어가고, 종국에 스스로 물속에 잠긴다. 이 소설에서, 혹은 세계에서 안전이란 아마도 그처럼 위험의 상대항이 아니라 위험과 이음동의어이다. 먼 바다를 향하는 현태와 종희의 이야기는 애초에 그런 조건 속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다세대 주택에서 담배를 태우고 발을 굴러 게임을 하고 기타를 연주하여 이웃들의 항의를 받는 현태에게 종희는 이웃들이 모두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특히 “아랫집 남자가 우릴 죽일 거”(218)라고 ‘농담’한다. “농담이어야 하지 않겠어요?”(219) ‘아랫집 남자’가 종희에게 건네는 또 다른 ‘농담’은 실질적이지 않지만 실질적인 위험으로 ‘아랫집’에 상주한다. 그 얼핏 안전한 ‘농담’들의 세계에서 공포와 불안은 이미 현태에게서보다 먼저 가동 중이다. 일상은 위험 위에 세워져 있으며, 다세대주택에서 모두는 기꺼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위험해진다. 독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것들에 이름을 붙”(227)이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개 줍기는 안전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조개의 이름은 종종 이것인지 저것인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이것과 저것이 선명하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오래 살면서 독이 있는 건 피해 주워 먹고 산 사람”(227)의 경험과 시간을 막연히 믿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떤 이름의 조개더미에건 시꺼먼 모래가 가득한 패각은 숨어 있다. 위험은 이름이나 직관으로 구분해내는 안전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가장한 모든 것의 내부에 있다. 어쩌면 정말 공포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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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윤재민 나를 박해하던 자들은 증오심을 온갖 수단으로 표출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적대감 때문에 정작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이 적대 효과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 감으로써 내게 언제나 새로운 타격을 입혀 고통을 지속시키고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만약 그들이 내게 희망의 빛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는 간계를 부릴 줄 알았더라면 지금도 거기에 나를 묶어 두었을 것이다. 가짜 미끼로 나를 또다시 그들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이어서 내 기대가 좌절되면 나를 새로운 고통으로 영원히 상처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쓸 수 있는 방책을 미리 다 써버렸다. 내게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음으로써 그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중략) 그 고통은 내게서 비명을 끌어낼지언정 탄식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며, 내 몸의 괴로움은 마음의 고통을 멈추게 해줄 것이다.1) 1. 1960s: 죽음 1953년, 전쟁포로(POW) 교환 현장. 명준은 그간의 방황을 끝내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남이냐 북이냐. 두 국가의 대변인들은 ‘조국 재건’에 일익을 담당할 인텔리 명준을 포섭하기 위해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북측 대변인은 앞으로 시행될 참전 용사(명준은 인민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연금 수령 대상자라 말하며 명준의 ‘귀국’을 설득한다. 남측의 대변인은 명준이 일반 국민 열 명에 상응하는 인재라 높이 평가하며 개인적인 조력을 해줄 것이란 제안으로 명준의 전향을 촉구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명준은 이 달콤한 제안을 물리치고 중립국을 택한다. 두 정부의 체제와 그것이 내세우는 가치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명준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에서의 대학원 생활과 월북 후 지식노동자 생활을 통해 두 체제에 대한 가치 평가를 이미 마친 상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전부를 던질 만한 가치와 의미가 한반도 어디에도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포로 교환협상장은 이를 확인할 마지막 순간이다. 남과 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양쪽이 명준에게 제시한 조건은 당시 국가가 일개 국민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모든 포로에게 안정적인 노후 대책(연금)이나 출세로까지 이어질지 모를 주류 사회 연줄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준이 ‘조국 재건’에 널리 쓰일 인재라 판단하기에 내놓은 조건일 터이다. 그러나 두 체제는 명준이 진정 갈구하는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가 원했던 건 노후를 책임질 복지나 공명심 같은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이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 가면서 살 수 있는 삶”2)이라는 관념적인 이상(idea)이다. 대책 없을 정도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름다운 영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의 서술 기조 전체에 드리운 명준의 ‘철학적 사색’과 간간이 내보이는 창작 시는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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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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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3.12.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ㅇ 일 시 : 2023년 10월 13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세미나1실 ㅇ 참 여 - 사회자 :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 참여자 : 민선(웹소설가), 이은선(소설가), 조대한(문학평론가), 황종권(시인) 〈개회〉 이병철 :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획좌담은 총 4회로 계획되어 있는데 다 학교에 계시는 분들이라서 어쩌면 이번 주제가 제일 민감할 수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학교의 구조적인 내용까지도 짚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 내어 좌담에 참여해 주신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 인사는 하셨나요? 여기 구면도 계시고, 이은선 작가님하고 황종권 작가님은 예전에 같이 근무하셨죠? 그리고 민선 작가님과 저는 지난 학기에 명지전문대에서 수업했고요. 그리고 조대한 작가님도 명지전문대 심화 과정 지금도 나오고 계시고. 그리고 또 이렇게는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이은선 : 이렇게 다 학연과 지연인가요. 너무 좋다. (웃음) 민선 : 혹시 혈연은 없나요. (웃음) 이병철 : 저랑 조대한 작가님이 다닐 때는 민선 작가님이 안 계셨고요. 민선 : 지금 재학 중이라서요. 이병철 : 한신대 강의 나가시지 않나요? 조대한 : 아 거긴 아니에요. 서울예대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병철 : 그렇군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지금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 하시는 일이랑 간략하게 근황이라든가 자기소개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대한 : 저는 문학 평론을 쓰는 조대한이라고 합니다. 문학 평론은 2018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대학 강의는 2020년부터 사이버 강사로 시작해서 대면으로 바뀐 지금까지 두 개 정도 대학의 문창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선 : 저는 글 쓰는 민선이라고 합니다. 제가 꼭 외자라고 이름을 말하는데요. 안 하면 못 알아들으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웃음) 저는 2019년에 처음으로 웹소설을 냈고요. 최근까지 3종 나왔고, 연말에 연재 오픈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학 강의는 올해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은선 : 저는 2010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요. 안양예고에서 7년,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3년, 한신대 문예창작과에서 7년. 고등학교, 문학관,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이랑 읽기를&mi

기획 2023.12.01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2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2회) 독서모임 〈생글〉 사회, 원고정리 : 연산 참여자 : 제이필, 나경, 이슬, 지현 책 : 강효진 『오늘도 나를 대접합니다』(구름의시간, 2022) 연산 : 저는 아직도 단풍과 눈맞춤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단풍 명소를 찾아가려니 사람과 자동차에 단풍의 고상함마저 안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사진과 tv 뉴스로만 감상하고 있습니다. 11월입니다. 오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오지 않을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늘 책을 읽으며 느끼고 감상을 말하고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통해 삶이 한층 더 윤택하고 지혜로웠으면 합니다. 독서에 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잠시 들어 보겠습니다. 제이필 : 독서, 책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내가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인터넷 공간에는 수많은 책이 숲을 이루고 있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탐색하고 요리조리 살펴보는 것이 즐거움만큼 고단함도 있었어요. 그런데 모임에서 매달 함께 읽을 책을 서로 토론하며 선정하니 큰 고민 하나가 해결되어 좋았습니다. 독서는 좋은 책을 찾아내는 과정과 수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현 : 책을 읽는 것이 서서히 즐거움이 되고 의무처럼 느껴집니다. 독서 습관이 자리 잡아 가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책을 읽는 것만큼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없어요. 오롯이 책에만 집중하다 보니 잡념도 사라지고 그 순간만큼은 걱정도 사라졌어요. 독서는 집중력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두 번 한 권 두 권 책을 읽다 보니 독서의 재미와 묘미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재미와 감동 그리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나경 :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이 독서의 시즌입니다. 저도 사실 독서는 가을에 하자, 가을만 기다리며 그때 책을 읽자, 가을을 핑계 삼았어요. 독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좋은 것 같아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 진정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계절보다 가을에 책을 읽으면 더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어 좋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어요. 독서는 계절이 아닌 개인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슬 :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 같아요. 관심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 같아요. 저도 한때는 시간을 핑계로 책을 가까이 두지 못했어요. 현대인의 일상은 누구나 분주하고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일상이 독서를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이유와 핑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을 시간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니면 무슨 요일 이렇게 저 나름의 독서 계획을 만들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통해 좋은 책을 알게 되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독서의 기술과 기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산 : 역시 훌륭하십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저도

기획 2023.11.01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1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1회) 독서모임 〈생글〉 사회, 원고정리 : 연산 참여자 : 제이필, 나경, 이슬, 지현 책 : 차성환 『딸아, 행복했으면 좋겠다』(득수, 2023) 연산 : 한 달 만에 뵙지만 여전히 반갑네요. 추석 연휴는 다들 잘 보내셨는지요? 과식으로 고생하신 선생님은 안 계시겠지요? 음식 하느라 명절증후군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선생님도 당연히 안 계시겠죠? 벌써 일곱 번째 모임입니다. 오늘은 지난달에 말씀드린 대로 딸을 시집보낸 서른네 명 아버지들의 웃음과 눈물이 담긴 축사를 통해 아버지와 딸 그리고 가족과 가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결혼과 부부의 참 의미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과 말씀을 기대하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모임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려고 합니다. 4월 첫째 주 목요일에 시작한 우리 모임이 나에게 어떤 변화와 실천을 하게 하였는지 제이필 님부터 부탁드립니다. 제이필 : 벌써 일곱 번째에요? 정말 빠르네요. 저도 몇 개의 모임을 하지만 이 모임은 책과 글쓰기라는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라 기다리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숙제가 때로는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한 권의 책을 읽고 느낌을 단어와 문장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점점 수월하고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좋은 문장은 바른 문장으로부터, 독서는 가장 쉬운 글쓰기 방법이다,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경 : 사실 일상에서 스스로 어떤 책을 한 권 고르고 독서를 한다는 것은 늘 다짐이고 맹세에 그쳤지만 이 모임에 나오면서 의무감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책을 읽고 모임에서 느낌과 생각을 말하다 보니 말하는 요령과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토론을 통해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 모임은 절대로 결석하지 않을 겁니다. 연산 : 나경 선생님 오늘 공식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나경 : 네, 약속했습니다. 이슬 : 저도 솔직히 이 모임을 하기 전에는 책은 늘 우리 집의 또 다른 인테리어 역할에 그쳤지만 모임을 통해 집에 있는 책을 찾아 한두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 선정한 도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좋은 책을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후회도 많았습니다.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더 열심히 읽고 써보겠습니다. 지현 : 추석 연휴 잘 보내셨죠? 가정주부로만 살아오다 마음 편하게 책 읽고 글도 쓰는 이 시간이 너무 좋습니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 같아요.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저에게는 큰 행복이 되었습니다. 암튼 좋은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산 : 선생님들의 말씀에 저도 더 큰 용기와 희망이 생깁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알차게 준비하겠습니다. 자, 오늘 토론할 책부터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이 책은

기획 2023.11.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ㅇ 일 시 : 2023년 9월 7일(목)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세미나1실 ㅇ 참 여 - 사회자 : 한설(문학평론가) - 참여자 : 김희선(소설가), 신이인(시인), 윤치규(소설가), 이미경(극작가) 〈개회〉 한설 : 안녕하세요, 저는 평론가로 활동 중인 한설이라고 합니다. 《문장 웹진》에서 ‘창작’과 ‘노동’이라는 주제로 네 차례의 좌담을 기획했는데, 1회차인 이번 좌담은 작가라는 직업 외에도 문학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을 모시고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다른 일도 해요’ 정도의 소소한 대화를 예상하고 진행을 맡았는데, 《문장 웹진》의 역대 좌담을 살펴보니 등단제도를 비롯해 무거운 내용이 많더라고요. 진중함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제가 좌담을 잘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웃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나누고 좌담을 시작하면 좋을 듯합니다. ‘주업’과 ‘부업’이라는 이번 좌담의 주제를 생각해 다시 저부터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치과대학병원에서 구강병리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공부 중인 수련의입니다. 이런 자리에 오려면 연차를 써야 하는 직장인이기도 하고요. 반시계 방향으로 다른 분들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이인 : 어쩐지 늦게까지 이 자리가 비어 있어서 여기 위험한 자리인가 했는데 첫 번째 발화자의 자리였군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활동하는 신이인이라고 합니다. 문학 쪽 활동을 말씀드리면 2021년 《한국일보》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아직 신인이다 보니 발표할 지면을 받는 편이어서 2년 동안은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올해 초에는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이라는 시집도 한 권 냈습니다. 2년 동안 글만 쓴 건 아니고요. 문학 외적인 활동으로는 LUSH 알바생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굉장히 밝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물건을 세일즈하는 그런 이미지를 많이들 갖고 계신데, LUSH라는 브랜드에 대해서. 거기서 2년 동안 세일즈 파트타이머를 했고요. 직원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계속 파트타이머로 있고 싶어서. 최근에는 아디다스 코리아 판매직으로 이직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희선 :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김희선입니다. 원래는 약사로 일을 해왔고, 2011년 마흔

기획 2023.10.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3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장류진 『연수』(창비, 2023) 2023년 9월 6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드디어 마지막 3회 차 모임이에요. 오늘은 장류진 작가님의 소설집 『연수』에 대해 이야기 나눌 건데요. 단편집이다 보니 소설 하나하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한쑤 : 부담 없이 읽었어요. 전체적으로 작품이 너무 강하거나 무겁지 않고, 휙휙 책장을 넘기면서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주 깔끔한 소설이었어요. 다정 : 저는 여행 갈 때마다 책을 한두 권 들고 가요. 바쁜 업무 마치고 휴가 떠날 때 어떤 책을 가져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챙겼거든요.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가벼워서 그냥 흘러가는 내용도 아닌, 마음에 남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책이었어요. 굉장히 재미있게 보고 돌아왔어요. 숑숑 : 장류진 작가님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SNS에 올렸던 게 생각났어요. ‘작가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라고 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무 어둡진 않지만 이건 누구 얘기 같고 저건 누구 이야기 같아, 이렇게 이름 붙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점에서 예전 소설집들이랑 맥을 같이하는 느낌이었어요. 셔터맨 : 저는 진짜 오랜만에 소설집을 읽었어요. 마지막에 읽은 소설은 『기차와 생맥주』예요. 책 안에 소설파트도 있으니까. (웃음) 최근에는 실용서 또는 논픽션 위주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이 책도 사실 실제 이야기나 다름없는 스토리지만,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는데도 이질감이나 불편함이 없었어요. 제가 한번 책을 펴면 오래 읽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읽다가 자야지 하고 책장을 덮는데 (웃음) 한 꼭지를 다 읽고 시계를 보니까 30분이 흘러간 거예요.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지혜 : 단편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이야기 나눠 볼게요. 일단 이 책의 제목이자 처음 수록된 단편소설 ⌜연수⌟는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셔터맨 : 우리 모두 운전면허증을 가졌잖아요. 혹은 운전하고 있는 누군가의 차에 타본 경험이 있을 테니까 공감 가는 주제 같아요. 저는 이 책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을 때 ⌜연수⌟가 주인공 이름인 줄 알았어요. (웃음) 근데 책을 먼저 읽은 지혜 님이 ⌜연수⌟가 운전 연수의 '연수'라고 해서 더 읽고 싶더라고요. 운전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운전부심이 있잖아요. 소설 속에서는 어떤 운전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 하며 흥미롭게 읽었어요. 다정 : 저는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면허를 땄어요. 스타렉스를 운전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졸업하고 어린이집 교사가 되면서 잠자는 면허가 됐

기획 2023.09.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2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2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북스톤, 2022) 2023년 8월 6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늘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책, 최민석 작가님의 여행지 창간호 『기차와 생맥주』입니다. 책과 어울리는 맥주와 간단한 주전부리를 준비했으니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눠요. 숑숑 : 사실 저는 이 작가님이 누군지 잘 모른 채 가벼운 느낌으로 후루룩 읽었어요.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 앞부분 절반 정도 읽다가 모임 날짜를 생각하면서 속도를 조절했어요. 너무 빨리 읽으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웃음) 그래서 한참 쉬었다가 다시 읽곤 했는데, 앞부분 같은 경우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최근 시작한 글쓰기 모임 '모서리 기록단'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근데 중간 정도 지난 다음부터 모서리 기록단 때문에 여행책 관련자가 돼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저는 늘 '이 책 때문에 나무가 베어질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든요. 근데 에세이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일기처럼 자유롭게 적히다 보니 이 책을 돈 주고 살 만한지, 나무를 베어내고 책으로 남겨 둘 만한지를 자꾸만 떠올려요. 저는 주로 여행을 통해 의미 있는 생각을 했고 또 그 부분에 대해서 얼마큼 숙고했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책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여행 에세이와 결이 일치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표지에 여행지 창간호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잡지를 읽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고요. 지루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을 때 읽으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책 같아요. 한쑤 : 아마 제가 여기서 책 읽는 양이 제일 적을 것 같아요. 독서 취향도 좁은 편이고요. 주로 소설을 많이 봐서 에세이나 산문집을 많이 안 읽었어요. 이번 여행 에세이 장르는 안 읽어 본 분야라 이런 책이 나랑 잘 맞을까 궁금했어요. 파주로 혼자 여행 갔을 때나 친구들 만나러 갈 때,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주로 읽었어요. 멀미를 안 하는 편이라 몰입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페이지에 비해서 챕터가 엄청 많아서 놀랐는데, 정말 술술 읽혀서 책장이 잘 넘어갔어요. 다양한 나라와 도시가 등장하고 책에 담긴 에피소드도 많아서 책 읽을 때마다 색다른 매력을 느꼈어요. 그리고 뒷부분에 픽세이(픽션+에세이)가 신기했는데, 경험만 나열한 게 아니라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재미있었어요. 어디까지가 직접 겪은 일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고요. 계속 읽다 보니까 픽세이가 모두 사실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혼란을 주는 요소가 재미있었어요. 여행 에세이니까 공간이나 배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듯이 묘사를 한다거나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적혀 있는 걸 기대했는데 그것과는 다르더라고요.

기획 2023.08.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1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1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안수민 지음, 이지현 그림 『플라스틱 인간』(국민서관, 2022) 2023년 7월 2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독서 모임 첫 책은 그림책 『플라스틱 인간』입니다. 혹시 이 책을 알고 있었거나 읽어 보신 분 계세요? 없군요. 오히려 더 좋아요. 책 읽은 소감을 가볍게 이야기하며 모임을 시작하면 어떨까요. 한쑤 : 처음 제목이랑 표지만 봤을 때, '그림책을 읽어 본 게 얼마 만인가' 싶어 약간 흥미로웠어요. 보통 텍스트만 있는 소설이나 산문만 봤는데 그림이랑 같이 있는 책이 선정되어서 재밌다고 생각했고요. 표지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알 것 같아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어요. 읽다 보니까 우리가 섭취한 미세 플라스틱이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하게 되는 스토리잖아요.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냈을까 궁금하다가도 책장을 넘기기가 점점 두려웠어요. 약간 기괴하기도 하고 엄청난 상상력에 감탄하다가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잔혹동화를 보는 느낌이에요. 실제로 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플라스틱 소비를 많이 하는지, 폐기물이 얼마나 나오는지 약간 소름 끼칠 정도로 피부에 와 닿아서 진짜 무섭게 느껴졌어요. 그림과 짧은 글이 이렇게 큰 임팩트를 주는구나 생각하니 책 선정을 너무 잘한 것 같아요. 다정 : 저는 책을 읽기 전에 저자와 그린이를 먼저 보거든요. 근데 그림 작가가 참여한 『수영장』이라는 그림책을 본 적이 있어서 반가웠고요. 주인공 이름이 제임스라 외국인 작가의 작품인가 했어요. 근데 저자 두 분 다 한국인이어서 왜 이름을 제임스라고 했을까 궁금했어요. 한국 이름을 쓰면 너무 현실 같은 이야기들로 받아들이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가상의 세계로 이입하라고 그런 설정을 한 건가, 이런 궁금증도 생겼어요. 대부분 플라스틱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들은 나중에, 2050년이 되면 플라스틱을 가득 먹은 물고기 같은 개체를 우리가 먹게 된다는 흐름이거잖아요. 그런데 플라스틱이 가득 쌓인 몸에서 새로운 플라스틱이 나온다는 연결이 새로웠어요. 내 몸에 플라스틱이 가득 쌓여 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고 자라서 나랑 동등한 입장 이상으로 더 세력화되고 인간을 누를 수 있다는 걸 지금의 현실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쓰레기 산이나 주변에 플라스틱이 가득 쌓여서 인간의 공간이 사라지는 현재를 떠올리니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오버랩 되기도 했어요. 어른이 봤을 때는 현실적인 모습이 떠오르고,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의 세계를 더 무궁무진하게 만드는 그림책 같아요. 숑숑 : 저는 이 책을 즐겁게 봤는데요. 내용이 즐거웠다기보다는 이런 시도, 이런 의도가 되게 재미있었어요. 첫 장을 넘기면 보이는 첫 문장이 덜컥 마음에 걸렸어요.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어." 지금 나타나는 어떤 일이 아니라는 의미잖아요. 제 기억에는 오래전 집집

기획 2023.07.01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3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살림 참여자 : 재재, 아리엘, 모아, 인애 책 : 정은, 『기내식 먹는 기분』(사계절, 2022) 창밖 독서모임 3회, 2023년 6월 9일, 지향집 살림 : 창밖 독서모임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여행’이라는 창으로 바라본 우리의 세계인데요. 정은 작가님의 여행 산문집, 다들 어땠어요? 재재 : 여행지에 대한 단순한 소개가 아닌 삶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부분, 예를 들어 “길을 걷는 순간만 삶을 살고 다녀와서는 그것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문장들이 참 좋았어요. 인애 : 저는 39, 40쪽 K한테 느꼈던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K는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작가는 고통을 참아내고 보상을 얻어낼 거라 생각하며 인내하면서 걷는데, K는 하루하루를 귀족처럼 대하면서 보내는 것? 모아 : 나도 거기에 밑줄 쳤는데. 재재 : “좋은 하루를 쌓아 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그 부분도 참 좋아요. 인애 : 이어지는 문장에서 작가님이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잘하려면 일단 자신을 대접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 K다.”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자신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는데, 어떠세요? 저는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질문으로 던져 보고 싶었어요. 다들 자신을 잘 대접하고 있나요? 재재 : 저는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전주로 이사 온 이후로 내 삶을 어떻게 하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지 연습하고, 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리엘 : 저는 식사할 때 잘 차려 먹는데, 그게 나를 대접하는 방법이에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서서 아무렇게나 먹고 치웠는데, 언젠가 내가 외적인 것, 시각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를 위해서 예쁘게 차려 먹어요. 모아 : 아리엘은 자신에게 초점이 잘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여서. 인애는 어때요? 인애 : 나는 나를 고통스러운 곳에 더 이상 집어넣지 않는 것 자체가 나를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리엘 : 34쪽에서 작가님이 “나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나를 던져 놓곤 했다.”라고 했잖아요. 여행지만 보더라도 순례자의 길, 인도, 현재 살고 있는 곳까지. 그러다가 35쪽에서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가진 것을 버리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고 해요. 고통이라기보다 자유로워 보여서 부러워요. 인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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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 2023.11.15
「폴리스퀘어」외 6편

폴리스퀘어 조원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오토바이의 기억, 12월 벚나무는 벽돌처럼 단단했다 악몽과 흉몽에 번갈아 머리를 처박히는 순간 도형이 어긋났다 발목 하나가 피의 양념 두르고 버스 정류장까지 튕겨 나갔다 보드를 잃은 조각들 변질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탑승하고 벚꽃 피기 전 입체 공간으로 전력 질주했다 헬멧 조각이 볼링공처럼 우뚝 선 가로수를 원 스트라이크 아웃시킬 때 봄이 찾아왔다. 빨갛게 육계를 벗어나 해체된 뼈를 온전히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회색 제복의 비둘기 구구구 사이렌을 울리며 회식을 즐겼다 강박 닫은 문이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닫은 문이 열린 문일 수도 있다 씻은 손에서 씻지 않은 손들이 태어난다 위쪽 구멍을 막으니 아래쪽 구멍이 뚫리고 신발, 배수구, 화장실, 혓바닥, 겨드랑이 귀신은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든다 아가미도 없는 것들이 불을 지른다. 신문을 읊는다. 쌍욕을 한다. 담배를 피운다. 노래를 부른다. 가래를 뱉는다. 음흉하게 웃는다. 입 냄새를 풍긴다. 이히히히 이승에서 저승까지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걸어서 십 분 정도? 도망가기 위해 기차표를 산다. 기차는 없고 기적소리만 귀를 짓누른다 불면과 불안이 한이불 덮고 집요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몸을 버려야 하나 마음을 버려야 하나 가스와 전기, 창문과 열쇠, 시계와 손수건, 서류 가방과 냉장고, 밥통과 수도꼭지, 핸드폰과 컴퓨터 사물의 소리가 저벅저벅 공기를 가른다. 눈을 뜬다. 감는다. 다시 뜬다 물질과 의식이 한바탕 접전을 벌인다 고독한 장애 혼자가 좋다 숟가락 고봉으로 떠서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미련하게 모자, 장갑, 신발 같은 거 파묻은 지 오래 거북이 새끼는 바다로 가기 전 갈매기에게 잡아먹힌다 앵무새는 반복어를 쓰다, 예민한 주인에게 목이 잘리고 당신은 느리거나 되풀이하는 걸 참지 못한다 속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으니까 발음이 맞지 않는 말로 걸음이 맞지 않는 발로 당신의 경직된 얼굴을 피해 간다 혀가 끊기는 밤에는 숟가락에 모래를 퍼 담는다. 목이 막힐 때까지 해파리처럼 너절한 몸으로 뛰어든 바다 당신들 모두 절벽이어도 좋다 혼자 부서지는 법을 아니까 모른 척 좀 하지 말라고 정말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나는 조수간만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의 권위가 권총보다 무섭다 한 방 쏠 때마다 출렁출렁 춤추는 포말 내 몸은 절벽에 부딪힌 파탄의 물방울이다 신혼 한 칸의 방이라도 장만하면 우리 결혼하자. 작은 방 두 개쯤 거뜬히 잉태할 수 있겠지 십 개월만 품으면 새끼 방들 줄줄 태어나고 문틀에 그네를 매달아도 우리의 방은 생명력이 강하여 튼튼하게 잘 자랄 거야 벽돌이 벽돌을 낳고 기둥이 기둥을 낳아서 초록색 지붕 환하게 비치면 넝쿨 아래 멍든 몸 숨기고 밤마다 키득키득 웃어보자 깜깜한 데서 당신과 나 상스러운 표정 지우고 개 같은 성질도 잠시 멈추고 씨앗이 문제인 거야? 밭이 문제인 거야?

시·시조 2023.11.15
「잭 타르의 편지」외 6편

잭 타르의 편지 이윤길 시거의 푸른 연기에 싸여 포카를 치는 형제여. 바다는 뱃머리에 깃든 물결로 넘실거리고 바람은 리바이돈의 지느러미다. 뱃전으로 넘쳐 드는 파도로 삭구에 달린 목재블록이 밧줄과 함께 삐걱거린다. 용골이 부서지며 혈맥을 위협했다. 실습항해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침묵에 빠진 뱃사람들은 수장한 에드워드의 괴혈병은 이미 잊었다. 붉게 격노한 번개가 시에라 리온 강 벗어나자 선실로 날아들었다. 뱃전을 지배하는 것은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고 끊임없이 심장이 터지는 소리. 그러나 발가락에 힘을 주고 돛대 끝에 올랐다 사이클론의 공포와 결투했던 무용담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 형제여, 실러캔스 문신을 가진 내 형제여 면역의 문신 모리셔스 금발의 비키니를 이야기하면서도 흥분하 지 않았다. 파도는 높았으나 스웰 주기가 일정했으 므로 샤치 이빨을 벗어났다. 파도가 전혀 일지 않는 코코 킬링 섬 가까이에 가서는 곤한 잠도 잘 수 있 었다. 바람도 동남풍이었고 그 흔한 노무라깃해파리 도 보이지 않았다. 긴긴밤 인도양에서는 선장이 해 신과 흥정을 주고받듯 희망과 절망이 수평선을 스 쳤다가 사라지곤 했다. 찾아오는 바닷새도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의 아집과 만용이 툭툭 터져 온 바다 가 고요했다. 블루 홀 같은 배가 끝없이 출렁거렸다. 남적도에 매복했던 해마도 해류를 타고 멀어졌다. 전리품으로 끌려오는 한랭전선의 뒤를 따르는 적난운이 적군처럼 폭풍을 몰고 나타났다. 심연의 산호모래에선 꼬리 독침 노랑가오리가 얼굴만 내밀었다가 침잠했다. 운명에 위탁 당한 뱃머리는 파도 끝을 향해 치닫다가는 끝없이 바닥을 향해서 떨어졌다. 끌어 앉은 무릎 사이에서 한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바람을 받는 날, 사하린의 코르샤코프항에서 닻을 올리며 갑판의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처럼 무너지고 다시 또 무너지는 파도, 파도, 파도들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 바다는 무도하고 야만스러운 섬광 아래 하늘이 뒤틀리면서 시끄럽고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를 질 렀다. 평화스럽던 항해에 끼어드는 폭풍, 파도는 도망치는 뱃전을 후려쳤고 물보라에 쌓인 뱃머리 는 불행에 굴종하거나 악연에 순종했다. 천둥이 단 두대 칼날의 안쪽처럼 대서양 전역에서 빛났고 파 도는 싸우는 도사견처럼 흰 거품에 싸인 흰 이빨 을 번득였다. 녹슨 늑골의 비명을 집어삼킨 물짐승 일까. 선원들은 다 같이, 광기로 가득한 악마의 공 격을 방어했다. 깃털에 대한 유감 바다 위를 방황했을 뿐이지. 깃털은 허공을 장 악했고 나는 배를 탔지. 그때 나는 날개가 없었어. 강철 심장뿐이었어. 슬프게도 내려 쌓인 달빛이 무 겁다는 건 불행한 급소지. 깃털은 가벼움이야. 깃털 은 고요를 흩트리며 적막도 깨뜨리지, 내 항해에서. 내 머리를 혼돈으로 내려쳤지. 쭈그리고 앉은 머리 를 거듭거듭 내려치는 거야. 깃털이 쇠망치처럼··· 그건 끝없는 하이킥이었지. 한 방에 부어오른 뱃머 리가 얼마나 높이 솟던지. 내 눈물을, 거 봐

시·시조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시조 2023.11.15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시·시조 2023.11.15
「시간의 쪽방촌」외 6편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시·시조 2023.11.15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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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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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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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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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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