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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31

2024년 7월호
2024년 7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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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소설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소설 2024.07.01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소설 2024.06.01
안개가 시작된다

안개가 시작된다 김본 대관령에 간다는 건 여름휴가가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언니와 원규 오빠는 스키 동호회에서 만났다. 겨울이면 두 사람은 스키를 타러 대관령에 갔고,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여름에도 가기 시작했다. 결혼 후에는 아예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원규 오빠의 회사 일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대체로 7월 마지막 주면 휴가가 시작되었다. 휴가 전주에 원규 오빠는 내게 전화를 걸어 언니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평창까지는 자기 차로 함께 가자고. 사실상 그건 제안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오빠가 전화하기 전부터 나는 기차표를 예매해둔 상태였다. 슬기가 너 바꿔 달라고 난리다. 슬기는 막 네 살이 된 나의 조카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오빠는 난처하게 웃었다. 진정으로 곤란하다기보다 즐거움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다. 내가 슬기와 통화하는 동안 오빠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슬기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힌 채로 기다릴까. 아니면 슬기의 귀에 휴대전화를 대주고 있으려나. 평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오빠는 반쯤 장난으로 내 운전에 훈수를 두었다. 오빠, 나도 면허 있어. 내가 응수하자 오빠가 그럼 다음번에는 운전해서 오라고 했다. 세대 등록 해놔야겠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상상했다. 다음번을. 오빠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차를 끌고 입장하는 모습을. 누구도 나를 막아서지 않고, 내가 그곳의 세대원이 아니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 상황을. 제한 속도를 초과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뜬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평창에 가까워지자 안개가 자욱했다. 눈앞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7백 미터 방면 평창IC라고 적힌 표지판을 막 지나쳤을 때, 계기판에 타이어 공기압이 낮다는 경고문구가 떴다. 급하게 차를 갓길에 세우고 살펴보았지만 육안으로는 구별이 가지 않았다. 오빠는 뒷좌석에 앉은 슬기를 안심시켰다. 실 구멍인가 보다. 운전석 쪽으로 빙 돌아온 오빠가 말했다. 여분 타이어 챙겨올걸. 큰집에 있으려나? 오빠가 말하는 큰집이란 이모의 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빠는 연구소에서 제공해 준 숙소 ― 오빠가 슬기와 함께 사는 아파트 ― 도 언니네 집, 이라고 불렀다. 마치 그곳이 언니의 소유이고 오빠와 슬기가 잠시간 얹혀사는 것처럼. 이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인가 싶어서 잠시 긴장했다. 그러나 오빠는 보험사에 연락할 테니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돌아와 운전석 문을 닫았다. 뒷자리에서 슬기가 잠금장치를 잠갔다 풀었다 장난을 쳤다. 출발하기 전 전체 잠금을 설정해 놓아서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문득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리면서 고속도로 한복판에 슬기가 쏟아지는 상상을 했다. 이모, 밝은데 어두워. 도로 양쪽으로 솟아오른 산 주위가 뿌옜다. 안개 때문에 그래. 내가 속삭였다. 안개가 뭐야? 슬기가 물었

소설 2024.06.01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정대건 1 얼마 전 오랜만에 박진수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인간의 변화에 대해 냉소적인 편이었다. 게다가 나이가 이제 삼십 대 후반이 되었다면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많은 것이 굳어져서 더욱 변화의 가능성이 적다고 여겼다. 진수와 나는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만나 무척 가깝게 지냈던 시절이 있었지만, 현재는 책을 출간하면 건네주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글을 쓰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진수와 나는 읽는 사람이 많건 적건 꾸준히 글을 쓰자고 서로를 독려했다. 그런데 출간 소식도 아닌데 모처럼 만난 그는 내게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진정한 짝을 만났어. 천 퍼센트 확신해. 네가 쓴 문장처럼, 현실은 우리의 비루한 상상력을 앞서는 것 같다.” ‘현실은 늘 우리의 비루한 상상력을 앞선다.’ 내가 이 문장을 쓸 때는, 낙관적인 기대보다 현실은 늘 가혹하다는 의미로 쓴 문장이었다. 그런데 진수는 이 문장을 반대의 의미로 인용했다. 자신이 행복에 대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상상보다 더 영화 같고 믿기지 않는 완벽한 짝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거였다. 그렇게 확신에 찬 진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기했다. 내가 아는 그는 불안형과 회피형의 전형을 모아 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은 결코 선의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고 만다고 불신하는 쪽이었고, 나는 그 때문에 그를 나와 비슷한 부류라고 여겼다. 예비 신부인 민영은 아주 밝고 안정적인 성격의 회계사라고 했다. 뜻이 맞은 두 사람은 만난 지 100일 만에 이미 상견례도 마치고 예식장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불신과 불안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와 관련된 명확한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SNS에서 한창 성인 애착유형 테스트가 유행이었다. ‘연애란 것은 안정형과 안정형이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사연 만들기 모임’1)이라는 SNS를 보고 우스갯소리처럼 넘기지 못하던 그였다. 불안형이라고 결과가 나온 그는 술자리에서 그 얘기를 하며 진심으로 분개했다. 2살까지 형성된 애착 유형이나 12살까지 형성된 성격으로 사람을 설명한다는 게 결정론처럼 느껴져서 싫다는 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20대와 30대 동안 숱하게 불안정한 연애를 반복하며 많은 사연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너 여친이 안정형이면 안정형하고 만나지 뭐 하러 불안형을 만나?” 내 물음에 진수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런 생각 자체가 불안형들이나 하는 생각이래. 안정형은 그런 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좋으면 만난다고 하더라고.” 진수는 민영과 자신이 얼마나 천생연분인지 강조하며 일화를 들려주었다. 친구가 별로 없어서 예식장이 텅 비는 것을 걱정하는 그에게 친구가 없는 외톨이는 오히려

소설 2024.06.01
용서

용서 장진영 박정상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병문안하는 사람처럼. 교복 차림으로 미루어 보건대 박정상은 고등학생이었다. 과일 바구니도 무리해서 샀을 것이었다. 인디핑크 색깔의 광택 없는 종이로 고급스럽게 포장된 과일 바구니 안에 애플망고가 대여섯 개 담겨 있었다. 마치 크고 탐스러운 알 같아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박정상은 마르고 키가 컸으며 자신의 기다란 팔다리를 어떻게 가눠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큰 키 탓에 눈을 내리깔았는데 거만함보다는 주눅 든 모습에 가까웠다. 과일 바구니를 든 오른손은 안정적으로 허벅지 부근에 떨구어졌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왼손은 불안스레 허공을 맴돌았다. 기타를 치는지 오른손만 손톱이 길었다. 처음에 부모님은 박정상이 누군지 몰랐다. 떨떠름하게 현관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문을 연 사람은 아빠였다. 잡상인이거나 종교인이겠거니 싶었다. 그럼에도 문을 열었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스스로 놀랐다. 심지어 안전고리도 걸지 않았다. 앞으로 아빠는 그 이유에 대해 자주 생각할 것이었다. 박정상이 “안녕하세요. 저는 박정상입니다.”라고 말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거울을 보고 여러 차례 연습한 것 같은 동작이었다. 아빠는 박정상이 누군지 몰랐다. 초면이었고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지 알 것도 같았는데, 아슬아슬하게 참아 내는 재채기처럼 그 앎을 흘려보냈다. 아주 잠깐의 평화를 위한 안간힘이었다. 박정상이 자신을 박태섭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자 아빠는 기절했다. 허물어지듯 넘어진 게 아니라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통나무 모양으로 뒤로 쓰러졌다. 퍽, 하고 전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박정상은 움찔했지만 정면을 바라본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듯했다. 엄마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기절했던 아빠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몸은 그대로였지만 눈은 번쩍 뜨였다.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에서 비롯된 초인적인 힘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저 장하나가 아빠의 가슴팍을 밟고 지나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하나는 외부인인 박정상의 발 냄새를 곰곰이 맡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아직 쓰러져 있는 아빠의 손바닥에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때려 달라는 뜻이었다. 장하나의 동생 장하다는 스탠드형 에어컨 위에서 식빵 자세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닐 수도 있었다. 장하다는 사시였다. 아빠는 자신이 왜 현관 바닥에 큰대자로 뻗어 있는지 알아차리느라 한참 헤맸다. 그러던 중에 식칼을 든 엄마를 발견했다. 아빠는 엄마와 박정상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달려들다시피 엄마를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엄마가 저지를지 모르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엄마가 “왜 이래!” 소리치며 몸을 마구 흔들어 댔다. “놔! 아니니까 놓으라고!” 몸싸움이 격해

소설 2024.05.01

끗 김학찬 1 크리스마스 선물은 컴보이가 좋겠습니다. 착한 어린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건 오직 현대 컴보이뿐이니까요. 컴보이는, 당신도 기억하실 겁니다. 벽돌을 치고 버섯을 먹는 슈퍼마리오를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게임기였으니까요(컴보이는 닌텐도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출시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자 외가에 있었습니다.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울지 않는 착한 일곱 살이었고, 컴보이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부터 슈퍼마리오 노래를 불렀습니다. 립스틱으로 화장실 거울에 ‘컴보이’라고 써두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도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혹시라도 할머니가 삼성 게임보이나 대우 재믹스를 사오면 피차 곤란해질 테니까요. 유치원 차석 졸업 예정이었던 저는 (분하지만 도저히 지영이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산타의 비밀 따위는 모른 척하며 크리스마스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머리맡에 놓인 컴보이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자의 웃음소리를 할머니에게 들려줄 계획이었습니다. 자고로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조잡한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려 있던 선물 상자는 고작 담뱃갑만 했습니다. 달랑달랑, 이상했습니다. 아무리 할머니가 골초라도 손자한테 담배를 선물로 주진 않을 텐데······. 저는 손을 떨면서 포장지를 풀었습니다. 휴, 다행히 담배는 아니었습니다. 포장지 안에 든 것은 화투花鬪였습니다. 화투와 슈퍼마리오는 형 동생 사이입니다(물론 화투가 형입니다). 1889년 화투 제작으로 시작한 닌텐도는 (슈퍼마리오는 8억 장이 넘게 팔렸습니다) 지금도 화투를 생산합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선물이 아주 어긋나지는 않은 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투로 하늘을 날고 불꽃을 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할머니는 전자오락보다 더 재미있는 걸 가르쳐 주겠다며 화투패를 챠르륵 펼쳤습니다. 화투를 알면 일 년 열두 달을 직접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속삭였습니다. 나이만큼 패를 섞고 (할머니는 예순일곱 번까지 패를 섞고 돌아가셨습니다) 짝을 맞추면 그날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분하지만 저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운명이라는 말이 저를 충동질했습니다. 만약 한 살만 더 많았거나 적었다면 할머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명에 비하면 만약은 부질없는 단어고, 화투점占과 민화투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금방 화투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화투점은 하루에 한 번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두 번 보면 반칙이니까요). 하루 종일 혼자 중얼거리며 화투를 (1인 2역으로) 치다 보면 스스로가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가뜩이나 엄마와 떨어져 있어서 심란한데, 자아정체성마저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소설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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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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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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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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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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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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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을 넘는 법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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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문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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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기획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기획 2024.07.01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기획 2024.06.01
두고 온 것들의 목록

[에세이] 두고 온 것들의 목록 송진권 아, 참 세월 빠르다. 엊그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더이 벌써 나뭇잎이 우거지고 버찌가 익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옛 시인이 읊었던 아침에 삼단 같던 머리가 저녁이 되니 눈빛이구나 [조여청사 모성설(朝如靑絲 暮成雪)]이 실감이 나게 내 머리에도 벌써 이팝꽃이 만발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서 삐삐에서 시티폰으로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이젠 인공지능에 메타버스까지 점입가경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아직 나는 흐르는 물 위에 표시를 해놓고 칼을 구하고자 하니 미련퉁이고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로구나. 아침이면 잠결에 들려오는 나뭇가지 뚝뚝 꺾어 가마솥에 불 넣는 소리, 가마니 짜는 소리, 침을 뱉어 가며 아버지가 새끼줄 꼬는 소리, 와르르릉 가마솥 뚜껑 여는 소리,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아랫목에 묻어 둔 담북장 냄새와 메주 띄우는 냄새, 쥐가 뚫어 놓은 구멍으로 스며들던 냇내와 고구마 통가리에서 나는 흙냄새가 엊그제처럼 새삼 다시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도 되었는지 모르겠고 아침이면 학교 간다고 나서며 돈 달라고 손 벌리는 자식들 무서워 뒤꼍에 숨었다던 어머니의 마음 언저리에나 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나와 함께 살다가 어른이 되거나 도시로 나오면서 두고 온 것들의 목록을 하나씩 적어 보려고 한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듯이 아니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인형이나 장난감을 다락이나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하듯 읽어 주면 좋겠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시작된 강물은 물뿌렝이 마을을 지나고 무주 진안을 지나고 충북 영동을 거치며 내가 사는 마을 앞을 지나가면서부터 제법 큰 강물의 태가 나기 시작한다. 각지에서 나온 도랑과 시냇물이 합수되면서 나루를 만들고 철길과 다리를 만들면서 수레와 차가 다니고 물가에 사람 사는 마을까지 만들어 까치집처럼 둥둥산이로 지붕을 잇대어 집 짓고 돌담을 쌓고 사람들이 모여 산다. 곳곳이 산이라 앞을 봐도 답답하고 뒤를 봐도 첩첩한 산골 벽지 내륙의 한가운데 그나마 밭이라고 있는 것은 소도 쟁기를 끌다 구른다는 비탈이고 논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하늘바라기 천수답뿐인 궁벽한 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이 척박한 땅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 보려고 내 부모님은 눈만 뜨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뭐라도 물어들여야 살지 밥 먹는 입들 무섭다고 해 뜨기 전부터 해지고 난 뒤까지 몸뚱이 가루가 되도록 일을 했다. 어떻게든 새끼들만은 무골충이로 살지 말라고 한 몸 거름 되어 새끼들 밑으로 고스란히 밀어 넣고도 모자라 대대로 이어 온 전답까지 팔아 새끼들 밑에 거름으로 넣었다. 지금이야 태생이 뭐 그리 중요하진 않으나 시골에 눌러앉은 나는 곳곳의 자연부락들과 무슨 무슨 ‘골’이나 ‘티’, ‘미’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들의 내력을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여기 토박이라 하겠다. 다들 사는 형편이 비

기획 2024.06.01
자라요, 언제나요.

[에세이] 자라요, 언제나요. 권여름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나는 장편소설 초고를 쥐고 있어야 했다. 지난겨울,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의 처음, 중간, 끝이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처음 몇 줄을 썼다. 시작이 반이니 이미 절반을 쓴 것 아니겠냐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다녔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묻어 있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그전보다는 빠르게 장편소설 한 편을 뚝딱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편소설을 쓰는 데 장애물이 없겠냐만, 무엇을 만나더라도 씩씩하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일렁였다. 막 두 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고무된 소설가의 자기효능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더욱이 내게는 겨울 방학이 있지 않은가. 성긴 시놉시스를 촘촘하게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초고를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장편소설 출간 직후 크고 작은 일정도 서서히 마무리되면서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타이밍이 좋았다. 온 우주가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호기롭게 세 번째 장편소설을 시작하려던 겨울 방학, 두 돌짜리 조카아이가 우리 집에 왔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겨울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안해하는 동생 부부에게 아기의 짐을 건네받으며 나는 소설 쓸 시간을 계산했다. 순둥이 조카아이는 꼬박꼬박 낮잠을 자고, 저녁이 되어 8시 30분에 씻기면 바로 잠이 든다고 했다. 아이의 낮잠 시간과 저녁 9시 이후를 활용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이를 재우며 나도 함께 스르륵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카와 잠들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 온전히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조카아이가 잠든 사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기 전용 세제로 옷을 빨고, 젖병을 씻어야 했다. 아이가 여기저기에 숨겨 놓은 물건을 찾아 제자리에 놓으며 청소도 했다. 재채기 한 번에 아이의 코에서 누런 콧물이 입술까지 내려온 날부터는 더 분주해졌다. 아이는 밤에 통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깨어나 울었다. 주먹만 한 작은 얼굴 어디에 이렇게 많은 콧물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소아청소년과 병원의 대기 시간이 그렇게나 길다는 것, 예약 앱이 따로 있다는 것 등 새로 알게 된 것투성이였다. 아이를 낳고 길러낸 나의 자매들과 동료, 친구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나는 조카들이 많다. 특히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초등생 조카들은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고, 금요일은 대부분 우리 집에 와서 잔다. 조카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을 때는 내가 자주 놀러 간다. 주변 친구들은 나를 ‘조카 바보’라 부르며 나의 조카 사랑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 발 떨어져 그들을 지켜본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이틀 놀아 주는 것과 함께 지내며 먹이고 돌보고 재우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겨울 방학을 꽉 채우고, 2월 27일에 조카아이는 무사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함께 양육을 담

기획 2024.06.01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에세이]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 긴 시간의 미로를 살피는 시, 김행숙의 눈 양경언 장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냐고. 글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사이 답이 돌아왔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 진달래, 「[산 자들의 10년]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정치에 밀려난 과학, 아빠가 붙잡았다」 부분, 《한국일보》 2024년 4월 25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 아이들이 탔던 배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십 년 동안 분투 중이라는 장훈 님(‘4·16 안전사회연구소’ 소장)의 인터뷰를 읽다가, 불가능한 바람이 담긴 저 답변 앞에 오래 멈추어 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가능한가.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요청된다. 이뤄질 수 없으므로 간절해지는 것이다. 떠나간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고 안고 싶은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너를 마주하고픈 바람이. 죽은 남편과 아이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내내 애달팠다. 그런 바람이, 엄마가 당신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엄마, 죽은 아빠도 오빠도 살아 돌아오진 못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안타깝지만,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애당초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편이 나아. 나는 이편이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가. 그게 정말인가. 어째야 하는가. 참사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할수록 ‘벌어져선 안 됐던 사건’이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데, 내내 드는 저 불가능한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경을. * 김행숙의 소시집 『1914년』(현대문학, 2018)은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2018년에 발간된다. 2014년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의 시간이 시집 제목으로 소환되고 있으므로,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한 권의 시집에 ‘1914년’이란 이름을 부여한 셈이다. 누군가는 시가 품은 말들의 속성인 ‘애매성(ambiguity)’ ― 시어에는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어 다양한 갈래의 해석이 만들어진다는 특징 ― 에 기대어 먼저의 언급을 꺼릴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1914년’이라는 말 자체로부터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데 시집이 세상에 놓일 닻으로 굳이 2014년 4월 16일의 참사를 삼아야만 하나, 그러한 접근은 김행숙 시가 그간 벌여 왔던 시적 우주의 확장과 연결되지 못하는 해석을 낳지 않겠는가 하며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을 거란

기획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기획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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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07.24
레드피쉬

레드피쉬 박지음 노란 버스가 에너지 팜 앞에 멈췄다. 버스 앞의 팻말에 손자가 다니는 초등학교 이름이 보였다. 옥순은 원전 홍보를 위해 초등학교 학생들의 현장 체험학습을 유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옥순은 급한 마음에 버스 앞을 막아서서 양팔을 벌렸다. 버스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옥순이 버스로 다가갔다. 옥순은 숨이 찼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버스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옥순은 손을 떨면서 휴대폰으로 부위원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가수로 건너에 있는 일행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손수레 바퀴들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몰려든 집회자들이 가로로 길게 서서 버스를 막았다. 집회자들 옆에 철 드럼통, 흰색 관, 노란 드럼통 등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핵폐기물을 형상화한 집회 물품이었다. 상복을 걸친 집회자처럼 옹색해 보였다. -원전 반대 집회하는 지역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여기에 데리고 오시면 안 됩니다. 부위원장이 나서서 말했다. -이보세요. 저기 코앞에 마을이 있어요. 여기랑 저리랑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럽니까? 저 마을의 아이들인데 몇 걸음 걸어 들어왔다고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고요? 버스 기사의 말에 부위원장이 주춤하고 물러섰다. -내 손자도 여기 초등학교 다녀요. 난 내 손자가 원전 가까이 오는 거 싫습니다. 우리 손자 코피라도 흘리면 책임질 거요? 부위원장 옆에 서 있던 옥순이 말하자 물러서려던 집회자들이 한 발 다가섰다. 버스 기사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난 후 버스 기사는 집회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선생이 먼저 내리고 나서 아이들이 한 명씩 내렸다. 마치 작은 물고기 떼처럼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내리자마자 휴대폰으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 하나, 둘, 셋, 팔짝팔짝 제자리 뛰기를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친구의 얼굴을 마주 보며 깔깔 웃는 아이도 보였다. 왁자지껄한 와중에 옥순과 집회자들을 두리번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왕좌왕하는 틈에 버스는 슬며시 후진했다. 그 와중에 게임에 빠진 아이들은 휴대폰 화면에 눈을 박아 넣은 채 앞을 보지 않고 걷다가 친구와 부딪쳤다. 사탕을 까서 입에 넣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친구들과 껌을 하나씩 나눠 씹는 아이도 보였다. 선생이 깃발을 들고 소리쳤다. 자, 우리 반 모여요. 아이들은 대번에 말을 듣지 않았다. 보고 있는 옥순이 애가 탈 지경이었다. 삑. 삑. 삑. 귀청을 찢는 호루라기가 울렸다. 아이들이 하나씩 선생 앞에 모여들었다. 옥순은 손자 해상을 눈으로 찾았다. 그러고 보니 손자가 김밥을 싸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옥순은 잠시 잠깐 김밥까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당장 손자를 버스에 태워 돌려보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휴대폰에 코를 박고 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가 손자 해상이었다. 자, 다들 휴대폰 반납해요. 사진 찍으라고 걷지 않았더니 안 되겠네. 담임선생이 외쳤다. 해상은 뒷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게임을

시·시조 2023.11.15
「폴리스퀘어」외 6편

폴리스퀘어 조원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오토바이의 기억, 12월 벚나무는 벽돌처럼 단단했다 악몽과 흉몽에 번갈아 머리를 처박히는 순간 도형이 어긋났다 발목 하나가 피의 양념 두르고 버스 정류장까지 튕겨 나갔다 보드를 잃은 조각들 변질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탑승하고 벚꽃 피기 전 입체 공간으로 전력 질주했다 헬멧 조각이 볼링공처럼 우뚝 선 가로수를 원 스트라이크 아웃시킬 때 봄이 찾아왔다. 빨갛게 육계를 벗어나 해체된 뼈를 온전히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회색 제복의 비둘기 구구구 사이렌을 울리며 회식을 즐겼다 강박 닫은 문이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닫은 문이 열린 문일 수도 있다 씻은 손에서 씻지 않은 손들이 태어난다 위쪽 구멍을 막으니 아래쪽 구멍이 뚫리고 신발, 배수구, 화장실, 혓바닥, 겨드랑이 귀신은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든다 아가미도 없는 것들이 불을 지른다. 신문을 읊는다. 쌍욕을 한다. 담배를 피운다. 노래를 부른다. 가래를 뱉는다. 음흉하게 웃는다. 입 냄새를 풍긴다. 이히히히 이승에서 저승까지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걸어서 십 분 정도? 도망가기 위해 기차표를 산다. 기차는 없고 기적소리만 귀를 짓누른다 불면과 불안이 한이불 덮고 집요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몸을 버려야 하나 마음을 버려야 하나 가스와 전기, 창문과 열쇠, 시계와 손수건, 서류 가방과 냉장고, 밥통과 수도꼭지, 핸드폰과 컴퓨터 사물의 소리가 저벅저벅 공기를 가른다. 눈을 뜬다. 감는다. 다시 뜬다 물질과 의식이 한바탕 접전을 벌인다 고독한 장애 혼자가 좋다 숟가락 고봉으로 떠서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미련하게 모자, 장갑, 신발 같은 거 파묻은 지 오래 거북이 새끼는 바다로 가기 전 갈매기에게 잡아먹힌다 앵무새는 반복어를 쓰다, 예민한 주인에게 목이 잘리고 당신은 느리거나 되풀이하는 걸 참지 못한다 속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으니까 발음이 맞지 않는 말로 걸음이 맞지 않는 발로 당신의 경직된 얼굴을 피해 간다 혀가 끊기는 밤에는 숟가락에 모래를 퍼 담는다. 목이 막힐 때까지 해파리처럼 너절한 몸으로 뛰어든 바다 당신들 모두 절벽이어도 좋다 혼자 부서지는 법을 아니까 모른 척 좀 하지 말라고 정말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나는 조수간만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의 권위가 권총보다 무섭다 한 방 쏠 때마다 출렁출렁 춤추는 포말 내 몸은 절벽에 부딪힌 파탄의 물방울이다 신혼 한 칸의 방이라도 장만하면 우리 결혼하자. 작은 방 두 개쯤 거뜬히 잉태할 수 있겠지 십 개월만 품으면 새끼 방들 줄줄 태어나고 문틀에 그네를 매달아도 우리의 방은 생명력이 강하여 튼튼하게 잘 자랄 거야 벽돌이 벽돌을 낳고 기둥이 기둥을 낳아서 초록색 지붕 환하게 비치면 넝쿨 아래 멍든 몸 숨기고 밤마다 키득키득 웃어보자 깜깜한 데서 당신과 나 상스러운 표정 지우고 개 같은 성질도 잠시 멈추고 씨앗이 문제인 거야? 밭이 문제인 거야?

시·시조 2023.11.15
「잭 타르의 편지」외 6편

잭 타르의 편지 이윤길 시거의 푸른 연기에 싸여 포카를 치는 형제여. 바다는 뱃머리에 깃든 물결로 넘실거리고 바람은 리바이돈의 지느러미다. 뱃전으로 넘쳐 드는 파도로 삭구에 달린 목재블록이 밧줄과 함께 삐걱거린다. 용골이 부서지며 혈맥을 위협했다. 실습항해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침묵에 빠진 뱃사람들은 수장한 에드워드의 괴혈병은 이미 잊었다. 붉게 격노한 번개가 시에라 리온 강 벗어나자 선실로 날아들었다. 뱃전을 지배하는 것은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고 끊임없이 심장이 터지는 소리. 그러나 발가락에 힘을 주고 돛대 끝에 올랐다 사이클론의 공포와 결투했던 무용담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 형제여, 실러캔스 문신을 가진 내 형제여 면역의 문신 모리셔스 금발의 비키니를 이야기하면서도 흥분하 지 않았다. 파도는 높았으나 스웰 주기가 일정했으 므로 샤치 이빨을 벗어났다. 파도가 전혀 일지 않는 코코 킬링 섬 가까이에 가서는 곤한 잠도 잘 수 있 었다. 바람도 동남풍이었고 그 흔한 노무라깃해파리 도 보이지 않았다. 긴긴밤 인도양에서는 선장이 해 신과 흥정을 주고받듯 희망과 절망이 수평선을 스 쳤다가 사라지곤 했다. 찾아오는 바닷새도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의 아집과 만용이 툭툭 터져 온 바다 가 고요했다. 블루 홀 같은 배가 끝없이 출렁거렸다. 남적도에 매복했던 해마도 해류를 타고 멀어졌다. 전리품으로 끌려오는 한랭전선의 뒤를 따르는 적난운이 적군처럼 폭풍을 몰고 나타났다. 심연의 산호모래에선 꼬리 독침 노랑가오리가 얼굴만 내밀었다가 침잠했다. 운명에 위탁 당한 뱃머리는 파도 끝을 향해 치닫다가는 끝없이 바닥을 향해서 떨어졌다. 끌어 앉은 무릎 사이에서 한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바람을 받는 날, 사하린의 코르샤코프항에서 닻을 올리며 갑판의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처럼 무너지고 다시 또 무너지는 파도, 파도, 파도들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 바다는 무도하고 야만스러운 섬광 아래 하늘이 뒤틀리면서 시끄럽고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를 질 렀다. 평화스럽던 항해에 끼어드는 폭풍, 파도는 도망치는 뱃전을 후려쳤고 물보라에 쌓인 뱃머리 는 불행에 굴종하거나 악연에 순종했다. 천둥이 단 두대 칼날의 안쪽처럼 대서양 전역에서 빛났고 파 도는 싸우는 도사견처럼 흰 거품에 싸인 흰 이빨 을 번득였다. 녹슨 늑골의 비명을 집어삼킨 물짐승 일까. 선원들은 다 같이, 광기로 가득한 악마의 공 격을 방어했다. 깃털에 대한 유감 바다 위를 방황했을 뿐이지. 깃털은 허공을 장 악했고 나는 배를 탔지. 그때 나는 날개가 없었어. 강철 심장뿐이었어. 슬프게도 내려 쌓인 달빛이 무 겁다는 건 불행한 급소지. 깃털은 가벼움이야. 깃털 은 고요를 흩트리며 적막도 깨뜨리지, 내 항해에서. 내 머리를 혼돈으로 내려쳤지. 쭈그리고 앉은 머리 를 거듭거듭 내려치는 거야. 깃털이 쇠망치처럼··· 그건 끝없는 하이킥이었지. 한 방에 부어오른 뱃머 리가 얼마나 높이 솟던지. 내 눈물을, 거 봐

시·시조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시조 2023.11.15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시·시조 2023.11.15
「시간의 쪽방촌」외 6편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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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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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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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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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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