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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호

문장웹진 vol.254 2026년 6월호

[6월호를 열며] 최근에 저는 어느 자리에서 한 편의 단편소설을 소개했습니다. ‘사실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바로 (모든 것은/이) 이상하다, 라는 것입니다.’ 고백을 하며, 이것은 참 이상한 소설이라고, 이 소설을 쓴 작가님은 삶의 이상한 순간과 감각들을 포착하여 참 잘 쓰는데, 그것이 너무나 좋다고 말이죠. 이상한 봄을 보냈습니다. 몇 주 전 친구가 제게 한 출판사 앞에서 만나자고 하기에 거기 볼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나갔더니 만나자마자 다른 목적지로 향하기에 ‘그럼 왜 거기서 만나자고 한 거죠’ 물었더니 그냥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또 며칠 전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주인분이 제가 집에 없는 줄 알고 통로 페인트와 방수 작업을 하여서 종일 집 밖에 나가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전주에는 오랜 친구와 만나고 헤어지는 길에 왠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직감이 든 적도 있었고, 그 이틀 뒤부터 돌연 무언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느라 일주일 내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운 것이 아니라 눈물이 흐른 것이었는데, 그 둘은 몹시도 다른 거라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진짜 이상한 일들은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초여름입니다. 이른 여름이 오면 왜인지 낯선 기분이 되어 조금 전까지 봄이었던 시간에 대해서, 다가올 한여름에 대해서, 그 후의 늦여름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상학적으로 이런 나날은 너무 짧을 것이기에 모두들 제게 순간을 즐기라고 말해주지만, 지난 것들과 다가올 것들을 지금 생각하는 일은 이상하고도 재미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생각하다 결국 글로 쓰게 되는 일이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한 줄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싶을 때도 있고요.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여름으로 가는 무성한 어느 날들에 문장웹진 6월호와 함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ㅡ 이주란 소설가 외 문장웹진 편집위원 일동 2026년 6월호 ⓒ 정김소리 6월호 표지 그림 작가의 말 “어제의 볕은 덜 마른 흔적처럼 머물러 있는데, 내일의 바람은 저만큼 날아오르고 있다.” 문장웹진 2026년 6월호 목차 구분 작가 제목 시 강상헌 친구 똘추 코어 강은진 집 생선이 왔어요 김세희 한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한 것보다길거나 같을 수 없다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박은형 오동꽃 슬기로운 깁스 생활 배선옥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풍랑경보 전호석 빛고리 한밤과 낡은 사도들과 정미주 붉은 커튼이 있는 만찬의 밤 잃어버린 귀가 단편소설 김정우 제(第) 민병훈 용4 최미래 킬링 파트 최형경 프롬프트의 딸들 평론 이은지 [연재]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서희원 고독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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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6.06.01
용4 민병훈

용4 민병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너머로 은빛 알루미늄 패널들이 보인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공사 중이고, 나는 밀리오레 건물 12층에서 그것을 늘 아래로 내려다본다.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만 채워지는 비정형의 패널들을 보며 완성된 모습을 상상한다. 거대한 우주선이 되어 사람들을 싣고 날아가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일을 그만둔 사람은 유니폼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색이 뭐야, 갈치 같잖아. 나는 창밖으로 태양 빛에 반사되는 패널과 거울 속 유니폼을 번갈아 본다. 무전기를 챙겨 탈의실을 나선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용1이 용14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야, 대답 안 해? 같은 층에 배정받은 용13이 대신 다급하게 대답한다. 배터리 교체 중입니다. 용15부터 용1까지, 수신 상태를 체크하고 현재 위치를 보고한다. 무전을 할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 차례에서 나는 발음을 조금 흘린다. 용5니까. 용5가 될 때까지 삼 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경륜 경기를 송출하는 브라운관의 전원을 켠다. 희망나눔 전자카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창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기 위해 항상 우리보다 더 일찍 도착해 줄을 선다. 객장에서도 건축 현장이 보인다. 커다란 크레인이 패널을 지붕에 안착시킬 때 금속성의 타격음이 무전기의 노이즈와 함께 겹쳐 들려온다. 용1이 개장, 이라고 소리친다. 또 왔어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용9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한다. 가면 난리 친다. 멀리 있어. 폐장 직전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는 의자를 던지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보안요원이 그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쫓아낼 때까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은 손수건을 건네며 내게 참을성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잘 참아야 돼. 침을 닦자 손수건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약 있는지 확인해. 생수통에 소주를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약이라고 부른다. 식당가에서 밥을 먹다가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몰래 컵에 따라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은갈치 같은 새끼들. 우리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하곤 그날은 객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9를 불러 그가 앉은자리를 확인하라고 말한다. 노란 걸 마시던데요. 건물 앞에서 아침에 무료로 나눠준 음료일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본부에서 직접 기획한 행사였다. 계속 주시하라고 말한 뒤 객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OMR 구매표와 컴퓨터 사인펜을 손에 쥔 사람들이 고개를 젖혀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배당판이 움직인다. 단승과 연승, 복승과 쌍승의 배당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화면에 표시된다. 이번 경기는 쌍승식 역배당에 배당률이 높게 형성된 것 같다. 이제 곧 바닥에는 베팅에 실패한 경주권이 쌓일 것이다

소설 2026.06.01
킬링 파트 최미래

킬링 파트 최미래 연애는 그리워할 연에 사랑 애.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야. 그리움을 팍팍 집어넣어야 한다. 상대와 눈 맞추는 와중에도 나는 네가 그리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더 자세히. 연애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연애의 주라고 여겨지지만 그게 아니야. 심적인 친밀감, 동경, 흠모. 왜 그리워할 연이겠어. 연애 감정은 거기에서 온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하지만 정말 성적 매력을 뺀 연애가 가능할까? 일반인이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백진주는 진정으로 연애를 즐겼던 자신의 한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망상에 젖었다. 얼굴과 직업 등 개인 신상을 드러내고 출연하는 방송 특성상 연애 프로그램의 진짜 연애는 다른 출연자들이 아닌 시청자랑 하는 거였다. 방송 나온 후에 인플루언서로 전향해서 공동구매하고 유튜버하고. 끼 발산하면서 돈까지 쓸어 담으면 얼마나 좋아.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텐데. 민숙 님, 갑갑하네. 짜증 난다고 티를 그렇게 내면 안 되지.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천진하되 차분하게 찔러넣어야지. 상대 눈 제대로 맞추고. 카메라는 절대 의식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려 센 척하거나 기분 나쁜 티 내면 조지는 거지 뭐. 백진주는 참으로 답답했다. 민숙이라는 닉네임의 참가자 때문이었다. 민숙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남성 참가자들에게 데이트 선택을 받지 못하면 표정과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서슴지 않았다.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카메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애교 섞인 말투와 윙크 등 플러팅도 마구 해댔다. 으 어떡해. 백진주는 그런 민숙의 행동 하나하나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민숙이라도 되는 듯 대리 수치심을 겪었다. 엄마도 연프 나가 봐. 요즘엔 돌싱 특집이 더 인기 많더라. 근데 민숙 저 여자는 진짜 이상하다. 저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치? 소파에 옆으로 누워 뻥튀기를 먹으면서 서준은 민숙의 언행을 평가했다. 남자 출연자의 머리숱과 직업, 여자 출연자의 명품 아이템을 줄줄이 읊고 점수를 매겼다. 앞머리를 내면 더 귀여울 거라는 둥 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백진주는 서준을 멍하니 바라본 후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사춘기가 빨라졌다지만 무슨 초등학생이 이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딸이 낯설었다.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옆으로 작은 링 귀고리가 반짝였다. 방송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된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한 마디 짜증 없이 컨디션이 좋았다. 좋겠지, 그럼. 보름 동안 방문을 잠그고 울기만 해서 쟁취한 건데.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진작에 보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춤을 배우면서 점점 더 되바라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은 나아졌으니까. 백진주는 덮어놓았던 걱정과 불안이 올라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컨디션 조절은

소설 2026.06.01
프롬프트의 딸들 최형경

프롬프트의 딸들 최형경 AI 프로그램에 갈색 가죽 가방을 든 이십 대 여자의 반신 사진이 만들어졌다. 민정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카리나의 얼굴형과 장원영의 눈매, 제니의 입술을 닮았다. 단추 두 개를 푼, 하얀색 셔츠 의상도 마음에 들었다.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영상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은 영상 프롬프트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 속 여자가 아래 대본을 읽게 해줘. 저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AI 모델입니다. AI 패션 룩북 만드는 법, 이제 어렵지 않습 작성을 멈췄다. 사진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민정은 여자를 다시 살폈다. 갈색 가죽 가방이 눈에 띄었다. 로고가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숄더백이었다. 민정은 인터넷에 접속해 샤넬 시즌 백을 검색했다. 캐비어 가죽에 금장 샤넬 로고가 가방 덮개에 붙은 천이백만 원짜리 샤넬 백 이미지를 저장했다. 민정은 다시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이미지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이 샤넬 백 이미지를 첨부하고 프롬프트를 썼다. 여자의 가방을 첨부된 이미지와 같은 걸로 바꿔줘. AI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민정은 프로그램 화면과 시간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이의 하원 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 새 게시물을 올리고 장도 봐야 했다. 뿌연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았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다가 오류가 났다는 알림창이 떴다. 민정은 다시 엔터를 눌렀다. 몇 분 뒤 완성된 이미지를 보니 가방 뚜껑의 샤넬 로고가 찌그러져 있었다. 한숨이 났다. 민정은 작업을 그만두고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닫히자 민정이 작업을 하던 부엌 식탁 너머로 생활동화 전집이 보였다. 거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백 권의 책들은 민정이 작년 삼 개월 할부로 팔십오만 원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민정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오늘 분의 쇼츠는 오늘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 민정은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작업 창을 켰다. 민정이 AI 강좌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을 시작한 건 딸 때문이었다. 자라나는 아이 아래로 돈은 쉼 없이 들어갔다. 발달에 필수라는 국민 아이템부터 영유아 방문 수업, 유기농 식재료까지 성장에 좋다는 건 AI 결과물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생활동화 전집도 국민 아이템 중 하나였다. 판매 사이트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빌려, 두 돌에서 네 돌 사이에 생활동화를 읽히면 예의 바른 아이로 큰다고 홍보했다. 전집은 차례차례 줄 서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싸우지 말기 등의 주제로,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주인공들이 착하게 되는 스토리를 담았다. 하지만 민정은 딸을 옆에 앉혀놓고 전집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했다.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는 건 소극적인 태도 아닐까. 양보를 잘하면 착한 사람은 되지만 성공하긴 어렵겠지. 내 것을 지키려면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해. 민정은 생활동화를 읽을 때마다 혀 아래까지 차오른 불순한 마음을 딸 앞에서 삼켜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을 왜 가지게 되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큰 계기가 없었기 때문

소설 2026.06.01
제(祭) 김정우

제(祭) 김정우 한밤에 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이는 여동생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으나 안부는 서로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암 4기로 투병했다는 사실과 날이 밝으면 발인한다는 것.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삼일장 중 이틀이 지났다는 것. 그래도 장남이니 이제라도 내려와 보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녀는 그런 말을 장례식장의 소음 속에서 이어갔다. 나는 주소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에도 전화를 끊었다. 어느 도시로 가야 할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 있을 만한 곳은 남쪽 끄트머리의 신도시였다. 광역시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한 뒤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야 나타나는 그곳은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면서 언덕 지형이었다. 소각장과 원자력발전소와 농공단지가 신도시의 입구에 모여 탄내나 분진 냄새를 게워냈다. 몇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농공단지와 공동묘지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곧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명문 대학교의 분교가 이전해올 것이라는 말은 노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경전철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십수 년째 무성할 뿐. 실상은 버스 배차 간격마저 멀어서 젊은이들은 취업과 동시에 그 고인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십오 년 전에 그곳을 떠나왔고 젊은 사기꾼 소리를 듣다 전과가 몇 개 생겼으며 카지노에서 일하고 도박판에서 구르다가 부동산 투기로 운 좋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그 도시에 돌아간 적 없었다. 그 도시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냄새가 배어 있는 곳.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자주 하늘이 때 타고 콧구멍에 까만 먼지가 끼는 곳. 원자력발전소가 언제 터져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법하며 송전선로가 사방을 꺼멓게 두르고 있어서 투기꾼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 공장을 닫고 파산한 뒤 대리운전 혹은 일용직 노동이나 전전하며 살았을 아버지에게나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간략히 짐을 꾸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도시가 장례를 치르기에 꽤나 편리한 곳이라고 여겼다. 병원과 장례식장은 물론이고 화장장과 공동묘지 심지어 절간까지도 차를 타고 움직이면 십여 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의 슬로건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해도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희망적인 문장이었다. 차라리 ‘죽음이 쉬운 곳.’ 정도가 도시의 입구에 걸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관 뚜껑을 덮듯 트렁크를 닫았다. 날이 밝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네 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그렇게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차 안이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회전 진입로를 통해 올라갔다. ‘환영합니다.’라고 벽에 프린팅된 글자들이 거꾸로 감기고 새벽빛이 주차장 입구로 틈입해왔다. 눈에 빛이 닿으니 시야는 잠시 암전되고 미시감이 들었다. 이 순간 나는 스무 살 같기도 하고 서른다섯 살 같기도 하며 불혹을 넘어선 것 같기도 했다. 앞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 같았다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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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이은지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이은지 1. 프락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대중에게 다소 신화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은둔과 고립은 창작을 위해 불가피한 존재 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절연하고 뉴햄프셔의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다가 사망한 J. D. 샐린저는 은둔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 “글쓰기와 명상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고립된 상황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명상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대중과 유명세를 철저히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필립 로스 또한 “매해 반 이상을 뉴욕에서 백 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농촌 지역”2)에서 보내며 철저히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3)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23세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한 직후 도시와 문단을 등지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집필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4)고 일갈한다. 가히 고독 예찬이라고 할 만한 그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나날을 거듭하다 보면”5)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고지 앞에 앉게 된다는 진술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소설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기 위한 방법으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6)는 증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자아를 안팎으로 일치시키는 데서 문장을 산출해내는 창작의 원리로 읽힌다. 극단적인 은둔과 고립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창작을 위해 일정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여하는 모습은 여러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루 몇 시간, 하루 몇 장의 꾸준한 집필은 자기 안으로의 철저한 고립을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스스로 변형하는 ‘자기 수행’과 같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l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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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최선재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최선재 1. 두 개의 기이함 처음 이유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등단작인 「빨간 열매」(『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가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췌되었던 때다. 아버지의 화장한 뼛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자 아버지가 나무의 몸으로 부활하고, 이웃 남자의 어머니-나무와 아버지가 결합하여 “빨갛고 작은 열매”(29쪽)를 낳는 이야기는 당시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럽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은, 나무가 된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물.”이라고 아버지가 말을 걸자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15쪽)기만 할 뿐이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듯한 천연덕스러움은 이유리 소설을 다른 작가의 소설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해설에서 소유정 평론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유리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 있다”1)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유리 소설의 독특한 리얼리즘이기도 하며, 현실과 매우 흡사한 세계에 환상이 삽입되어 독자를 낯선 감각에 빠뜨린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환상’과 ‘기이함’ 중 어느 것으로 부를지 고민했다.2) 비현실적 사건과 대상에 집중한다면 환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환상을 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까지 아울러 기이함이라 부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빨간 열매」를 읽고 당황했던 것은 잠깐 놀라고 마는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려는 기이함은 앞서 말한 기이함과 다시 구분 지어야 한다.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은 독자에게 불편하고 해소될 수 없는 문제로 남지 않는다. 기이함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이 따뜻함과 발랄함을 전하는 주된 이유이며, 독자 역시 기쁨과 편안함, 소설적 상상력이 빚어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독자가 명료하고 만족스러운 감상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잘 유지되고 발전하는 줄 알았던 인물 관계가 갑작스레 재검토되고 파멸의 예감까지 남길 때, 독자는 이유리 소설에서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기이함을 느낀다. 전자가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감상으로서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두 기이함은 작품에서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유리 소설의 균열이자 징후라 할 수 있다. 2. ‘나’와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기이함 사실 이유리 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특징은 또 있으니, 거의 모든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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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정치경제학 서희원

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서희원 1. 메피스토펠레스는 많은 것을 말했다. 2025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장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등장하는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는 홍차 티백 꼬리표에 달린 하나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평생 괴테를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티백 문장의 진위와 출처를 찾던 도이치에게 젊은 연구자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1) 스즈키에게 이러한 감탄을 이끌어낸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흥미롭게도 『파우스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담기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오래 간직해도 좋을 의미 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인이라면 『파우스트』의 서사를 역노화와 건강,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삶의 열망을 잃은 학자 파우스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절망, 즉 내면을 가득 채운 지적 충만, 육체와 재산의 결핍을 통해 계산하면 대략 오십 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늙었고,/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젊도다.”2) 이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마녀의 부엌으로 그곳에서 파우스트의 육신을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젊음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역겨운 액체와 신뢰하지 못할 마술이 탐탁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한 좀 더 좋은 방법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다른 책에서 읽은 자연요법을 소개한다. 좋아요! 그건 돈도 안 들고, 의사나 마술도 필요 없는 요법이지요. 당장 저 바깥 들판으로 나가셔서, 괭이로 갈고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하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고, 가축과 더불어 가축으로 살면서, 추수할 밭에다 몸소 거름 주는 일을 약탈이라고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최선의 요법이니, 팔십 고령에도 당신을 젊게 유지해 줄 것이요! (1권 115쪽) 메피스토펠레스가 알려주는 자연요법은 대체의학이나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심신의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그런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서사는 두 가지 지식의 충돌이 생성하는 긴장감을 통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철학”, “법학”,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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