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241

시
문장의 시선 더보기네버랜드 탈출기 ― 김희준론1) 최다영 1. 신(新) 아카이브 프로젝트 선행 평론에서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듯 “근원이나 태생에 대한 감각”이나2) “원형 회귀본능”을3) 말하지 않고서는 김희준의 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현상의 내밀한 원인을 해명하거나 김희준의 시적 작업이 내포한 고발과 대항 의식을 읽어 내기엔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키워드이기도 하다. 수록작이기도 한 ‘사기(史記)꾼’이라는 제목은 충실한 아키비스트(archivist)이자 교란하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상반된 함의를 모두 내포한다. 혹은 아키비스트의 본령이 트릭스터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史記)꾼’으로서 김희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와 성서, 동화 등 무수히 집적된 공동체적 기억의 편린을 환상적으로 중첩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비틀고 왜곡하는 지점에서 김희준만의 원형적 이미지가 접속 면의 틈을 찢고 출현한다. 그의 시의 근간을 형성하는 태(胎)가 익숙한 공통의 근원 서사에서 발생했을지언정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성교와 번식, 근친과 식인의 모티프는 공포스러운 재생 감각으로 연결되며 그만의 개인적 이미지로 일관되게 수렴하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언급대로 이미지가 생물학적 필연성의 산물이라면, 김희준이 강박적으로 봉합하고자 한 거대 명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종교,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방법을 경유하여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며 종의 계승을 보존해 왔다. 출생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종의 운명 앞에서 이를 추상화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또 사회적 집단 기억을 대를 이어 계승함으로써 두려움을 봉합하고 파토스를 안정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희준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개발하고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동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며 등장했다. 김희준에게 있어 기원을 더듬는 일은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을 축조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때 감지되는 건 신화와 동화의 알레고리 이면에 자리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 의식이며 더 나아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2. 재생하는 네버랜드 김희준의 시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주로 ‘소나기’이지만 때로는 “불”이기도 하고(「인류도감」) “아이”이거나 “유성”(「백색소음」), “사내”(「페스티벌」), “밀도 높은 당신” 혹은 “저녁”(「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테트리스 적응기」), &ld
새로움의 경제 2(2) 강동호 1. 새로움의 역설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중들도 입을 다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등물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 『즐거운 학문』1) ‘새롭다’라는 말은 대개 ‘다르다’ 혹은 ‘최근에 생산되었다’라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로 통용되곤 한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상의 특징적 차이를 지시하고, 그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기호에 해당해서일 것이다. 시장(market)은 이러한 ‘기호 가치’로서 새로움이 이견 없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시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일컬어 ‘새로운 자동차’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해당 자동차가 여타의 자동차들과 다르며, 상대적으로 최근에 출시된 신상 모델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자동차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매력과 구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새로움은 해당 제품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될 한층 차별화된 만족과 유용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difference)의 기제는 새로움이 일종의 비교적 가치라는 점을, 나아가 차이의 비교 우위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발전·진보·개선 등의 시간적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최우선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2)는 바우만의 진단처럼,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차이의 경제(economy of difference)이다. 차이적 가치 혹은 가치로서의 차이야말로 교환·거래를 활성화하는 매혹의 원천이자,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원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차이의 경제는 예술 작품의 미학적 의의를 규명하는 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예술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판별하고, 원본성·독창성·창의성 등의 이름으로 작품의 새로움을 조명하려는 제도적 장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차이의 논리를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새로움과 차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이 번역한 ‘반려(종)-되기’에 대해 김영삼 1 한국문학의 숲을 지배했던 우세종으로서의 퀴어 서사는 면역 정치의 배제성(팬데믹)과 죽음 정치(차이 나는 존재에 대한 절멸을 기획했던 정치 기술)의 강박을 거쳐 새로운 관계성의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젠더 권력의 신화에 맞서 퀴어적 친연성에 주목했던 김지연의 서사가 동성 연대(또는 소수자 연대)의 친밀성이 모종의 불안으로 인해 균열되는 순간으로 그 시선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에 없는 소리』와 『조금 망한 사랑』1)의 변별 지점은 김지연의 서사가 퀴어적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불안의 원인이 다르다는 데 있다. 관습화된 젠더 권력의 얼굴 없는 폭력이 전자의 불안이라면, 소수자끼리의 관계성 파괴 또는 연약한 주체들 간의 관계 위기가 후자의 불안이다. 김지연의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은 이러한 불안의 감정이 연약한 주체들이 새로운 관계성의 레시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오류와 마주하게 했는지에 대한 보고이자, “우리는-(모두)-여기에-함께-있지만-하나가-아니고-똑같지도 않”2)은 연약한 주체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김지연의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누락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유하여 공동체에 공동 거주하고 있는 모든 우리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때 김지연 소설의 미덕은 혐오와 차별에 얽힌 ‘차이 없는 반복’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돈, 불안, 사소한 균열, 약자다움의 감성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직면했다는 데에 있다. 2 확장된 의미에서 김지연의 소설이 퀴어적인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연약한 주체’(주변화, 성차화, 인종화되면서 상징적 자격이 박탈되는 ‘소문자 인간’)들이 경험하는 장면들을 서사화하기 때문이다. ‘대문자 인간’이 생산한 관습과 경계선들을 들춰내고 폭파하면서 그것의 패권을 의문으로 대상으로 만들고 그러한 세계의 문법이 모종의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문제 삼을 때, 김지연의 소설은 퀴어적이고 때로 그것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사유가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조금 망한 사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동성-이성에 얽힌 관계성을 더 이상 전경화하지 않으면서, 세계와 직접 부딪고 있는 소문자 인간들의 삶의 지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전진하고 있는 듯하다. 끝끝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반려종은 ‘불안’이라는 것, 그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서툴기 이를 데 없는 사랑과 이별이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겪은 연약한 주체들이 그 빚의 청산 유무와
새로움의 경제2 (1) 강동호 1. 일전에 나는 「문학의 경제학–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라는 글에서,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적 관점을 모색하기 위해 ‘문학의 경제’라는 다소 생경한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1) 당시 내가 경제(economy)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문학 작품의 가치’(문학성)가 측정·평가·유통되는 과정을 ‘경제적 현상’에 비유했던 까닭은, 문학 작품을 생산·소비하는 데 관여하는 남다른 교환(exchange)의 원리 및 체계가 상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 역시 경제적 교환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일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교환은 시장에서의 행위를 지시하는 제한된 단어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value)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제란 특정한 가치 위계 내부의 가치들을 거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는 그중 한 부분이다.”2) 누군가가 특정 행위를 시도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비용(cost)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요소(물론 이때의 비용은 금전적 비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가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주체에 의해 어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행위의 선택을 통해 얻게 되는 가치의 편익이 지출된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가 행위의 동기이자 목적이면서 동시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그에 대한 기대가 교환 주체 사이에서 어긋난다면, 거래는 즉각 중단되고 더 이상 유의미한 교환 행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한 가치를 거래하는 교환의 네트워크는 삶의 국면들에 광범위하게 편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환을 원활하게 하고 정당화하는 경제적 원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거래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일상에서의 대화, 사회적 의례의 실천, 문화적 재생산, 심지어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행위에서도 우리는 특정한 가치들의 거래 현상, 즉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2.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교환의 양태를 이해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고유한 경제적 체제들을 변별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욕망의 경제(프로이트), 선물의 경제(마르셀 모스), 숭고의 경제(리오타르), 구별의 경제(부르디외), 권력의 경제(푸코) 등과 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다채로운 행위를 관통하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측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파사칼리아의 거울 ―배수아 소설과 음악들 인아영 최초의 소리 배수아의 신작 단편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나온다.1) 스스로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므로 아마 무언가를 추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추적하려는 것일까. 살인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간 살인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과 발자국?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비극? 그런데 그는 “뭔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232쪽). 그에게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없다. 대신 그는 뭔가를 보기를 원한다. 아니, 그러나 그는 ‘눈먼’ 탐정이 아닌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뭔가를 보기 위해서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막대기’로, 그의 삼촌이 오래전에 쓰던 물건인데 “수맥의 파장이나 지하 단층의 미세한 진동, 특정 물질의 방사선 에너지”(226쪽)를 감지해서 살인자가 달아난 방향을 추적한다. 다른 하나는 ‘귀’로, 이 청각 기관을 통해 그는 사람과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 동물과 식물의 은밀한 상호작용, 이를테면 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감지한다. 눈먼 탐정은 ‘나’에게 말한다. “그 속삭임을 들어 봐”(239쪽). 배수아의 근작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의미를 가진 어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의미로부터 멀어져 은은하게 울리는 음향들로 가득하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언어라기보다는 음악.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미지근한 여름 강물 위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매미 울음, 오래된 동굴의 광물에 축적되어 있는 음향, 짙은 숲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호음, 끝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확실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웅성거림이나 속삭임, 파장이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들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거나,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거나, 되풀이되고 메아리치면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태는 장식이나 에두르는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구조물. 「눈먼 탐정」에는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체국 앞 우체통에 잠시 멈춘 여인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한 통의 편지를 재빨리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귀에는 최초의 소리가 산다. 묵직한 편지가 어두운 우체통 깊숙이 툭 하고 떨어지던 소리. (230쪽)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기억나는, 우체통 깊숙이 편지가 툭 하고 떨어진 후에도 오래오래 울리던, 어둠을 닮은 최초의 소리. (234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자신을 키워 준 젊은 여인이 바닷가 소나무숲에서 우체통에 은밀하게 넣은 편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기형도 시인학교 ‘시 합평반’: 서윤후 작가와의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이형초 ※ 전 에피소드가 궁금한 분은 큐알코드 또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EP2. 문학창작지원사업 링크 : https://url.kr/5xihvs ‘기형도 시인학교’는 (재)광명문화재단이 문학 분야의 인재 양성과 지역 문학의 진흥을 위해 운영한 프로그램이야. 올해(2024년 기준)로 2회를 맞는 ‘기형도 시인학교’는 많은 시민과의 만남을 위해 다양한 계층과 예술 장르, 장소 등을 고려해 9개의 프로그램을 구성했지. 강의는 창작 수준을 고려하여 ‘기초반’, ‘창작반’, ‘합평반’, ‘동시반’으로 개설했어. 또한 기형도 시인의 문학 정신을 알리고자 시민문화플랫폼 공간에서 ‘학교 밖 이야기’, ‘한 뼘 교실’을 진행했으며, 그림으로 느끼는 기형도 시인의 작품 전시회 ‘시:리즈’도 선보였어. 그중, 문장이는 ‘시 합평반’을 신청했어. 총 7회차의 수업으로 구성되었으며 강사진은 이수명 시인, 이소호 시인, 서윤후 시인이야. ▲참가 자격 1. 자신의 시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분 2. 시 창작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싶은 분 3. 시 쓰기를 사랑하며 등단을 희망하는 열의가 있는 분 ▲신청 방법 수강신청서 1부, 본인 창작시 1편, 이메일 제출 지정 양식 다운로드 : 기형도문학관 홈페이지 >교육 및 행사 > 예정 프로그램 이메일 : kihyungdomuseum@naver.com ▲선정 방식 기본기 및 충실성(20), 예술성 및 우수성(50), 기대 가치(30) ▲모집 인원 성인 15명 1~3회차는 강사별로 시 창작 강의를 하였고, 4~6회차는 그룹 합평, 마지막 7회차는 전체 합평 및 마무리 담화를 나누었지. 이수명 시인은 ‘시의 오해와 이해’를 주제로 시 창작 강의를 했어. ‘시에 대한 오해’, ‘시 쓰기에 대한 오해’에 대해 강연하며 이수명 시인만의 시론을 펼쳤지. 이소호 시인은 기형도를 비롯한 기성 시인의 작품을 낭독한 후, 수강생들과 함께 감상을 나눠 보는 시간을 가졌어. 또한 이소호 시인의 초고 작품을 읽고 문장을 지워보는 등 &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걸어서 책방 속으로 - 천안 지역 독립서점 소개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제가 주로 생활하고 있는 지역인 천안에는 구도심인 천안역을 중심으로 독립서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천안역에서부터 출발하여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들을 걸어서 구경해 볼 수 있어요. 수도권이나 중심지에 비해 상권이 발달하지도, 유동 인구가 많지도 않지만 오히려 주변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방향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독립서점들이 어떻게 각자의 특색을 살리며 운영 중인지 살펴보고자 직접 천안역에서부터 걸어서 독립서점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책방지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 천안역에서 출발, ‘책방 악어새’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버들로 22, 1층 SNS: 인스타그램 @crocodilebird.book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일전에 인터뷰 원고를 작성한 적이 있던 ‘책방 악어새’입니다. 천안역 1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책방 악어새’는 시와 동화를 주로 다루며, ‘문학인이 운영하는 독립서점’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곳이에요. 책방은 성욱현 작가와 조민주 작가가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욱현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후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으로, 202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책방 운영과 더불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조민주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현재 동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독립출간물 『친애하는 서로에게』를 썼고 성욱현 작가와 함께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방에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책방의 위치입니다. ‘책방 악어새’가 있는 천안역은 천안의 구도심이라서 이제는 상권이 매우 발달하거나 청년들이 자주 찾는 공간은 아니에요. 그런 구도심 중에서도 ‘책방 악어새’는 건물이 꺾이는 골목에 작게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자리에 ‘책방 악어새’가 있는 것처럼 다수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들, 예술가, 사회적 약자 등을 배변하는 캐릭터가 바로 ‘악어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악어새는 몸은 새이고, 머리는 악어인 환상의 동물인데 악어 무리에도 새 무리에도 섞이지 못하는 캐릭터예요. 이런 악어새를 닮은 사람들이 편안하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우리에게 필요한 책 틈 사이: 전주 도서관의 틈 문장서포터즈 김주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 그 커다란 에너지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지요. 공간을 기획하고 채우는 모든 요소,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하나에 몰두하고 있다는 감각이 참 즐겁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전주 독서대전에서 가장 좋았던 점도 책과 독서가 매개가 되어 사람들을 같은 정서로 잇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주시는 2018년부터 독서대전을 개최하여 올해로 7회를 맞았는데요, 올해는 ‘가을, 책 틈 사이로’라는 슬로건을 주제로 전주 페스타라는 큰 축제 안에서 열렸습니다. 행사는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고, 저는 11일과 13일, 이틀 동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전주 종합경기장에 방문했습니다. 그중 11일에 참여했던 전주 책 문화 답사의 경험을 꼭 나누고 싶었어요. 저는 행사 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전주 도서관의 틈: 함께 걷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요, 전주 금암동과 서노송동 일대를 함께 걸으며 전주의 책 문화를 탐방하는 코스였어요.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 동안 걸을 생각에 걱정되기도 했지만, 중간에 자유롭게 중단할 수 있다는 안내를 보고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설렘과 기대가 걱정보다 크기도 했고요. 집결지인 전북여성가족재단에 도착하니 해설사님과 인솔 스태프분들이 기다리고 계셨고, 함께 답사를 진행할 참가자분들도 하나둘 도착했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어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봉사자도서관’입니다. 전주시자원봉사센터에 속한 건물이었는데, 예쁘게 정돈된 무지갯빛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화가와 떨어진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넓은 잔디밭이었고, 창가 쪽의 책상과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독서를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이 가진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도서관 내부는 넓고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봉사 관련 도서를 모아 놓은 코너가 기억에 남습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영풍문고 전주터미널점’입니다. 전주에는 대형 서점이 4곳 있는데, 영풍문고가 그중 하나입니다. 고속버스터미널 3층에 위치한 영풍문고를 짧게 훑어보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 거북바위 등 이동 중에 보이는 미래 유산을 쭉 훑으며 계속 걸었습니다. 그리고 ‘전주시립금암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중앙일보의 기부로 세워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 현장 방문 및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0회 에 방문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공존으로의 여정’이었어요. 이는 팬데믹과 기후 위기, 그 밖에 다양한 사회적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존이란 단순히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를 통해 내가 변화할 수 있으며, 나 역시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에서 출발해요. 문학과 예술, 자연과 인간,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장이 바로 이번 이었습니다. 20여 곳의 출판사가 참여한 만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도서 판매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기후 위기 등과 관련된 사회학 서적부터 다양성과 포용력을 주제로 한 동화책까지 다양한 도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업사이클링 굿즈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건물 내부에서는 제10회 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컬러링 체험존도 한창이었어요. 이외에도 에서는 다양한 포럼들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10월 12일 서교스퀘어에서 진행된 에 참여해 보았어요. 한국과 캐나다의 작가가 국경을 초월하여 ‘다양성과 포용’을 주제로 협업한 앤솔러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를 출간했으며, 기념행사와 책 판매를 이번 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번 앤솔러지에는 한국 작가 김멜라, 김애란, 윤고은, 정보라와 캐나다 작가 리사 버드-윌슨, 얀 마텔, 조던 스콧, 킴 투이가 참여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들은 에서는 박혜진 평론가가 진행을 맡았으며 김멜라, 윤고은, 조던 스콧, 킴 투이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의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의미와 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장 먼저 「판사님」이라는 단편소설로 엔솔러지에 참여하신 킴 투이 작가의 이야기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킴 투이 작가는 난민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사랑과 포용의 가치를 말씀하셨어요. “퀘백의 난민 캠프에 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는 아시안으로서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