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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37

2025년 1월호
2025년 1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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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5.01.01
오경보

오경보 김슬기 청포수영센터 아쿠아로빅 새벽반 6월 마지막 수업 일이었다. 회원들은 수업 20분 전부터 이미 샤워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몸을 풀고 기다리는데, 담당 강사는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경보는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했다. 길게 통화 대기음이 이어지다가, 이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경보는 쉬지 않고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고 또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경보 씨는 쓸데없이 이런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사무용 의자에 앉아 긴 하품을 하던 미경이 핀잔을 주었다. 미경이 보기에 강사의 펑크는 예견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벌써 알아차렸다고 덧붙였다. 미경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미리 아는 것일까. 경보도 나름의 예견을 해 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매일 아침 강사에게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던 술 냄새를 떠올렸다. 술을 좋아하면 그럴까요. 경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경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술이 문제가 아니죠. 경보 씨도 퇴근하고 술을 마시는데 지각은 안 하잖아요. 경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경이 말에 리듬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들은 뺀질뺀질할 수밖에 없어요. 센터에서 일하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이나 지각 따위 하지 않은 경보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노랫말. 경보는 알아들은 척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의 오랜 회원인 김금자가 맨발로 경보와 미경이 앉아 있는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맨발이 바닥에 닿을 때 찹찹찹, 재촉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투명 가림막 앞에 선 김금자의 눈이 수영모 때문에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진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경보는 알아차리기 힘들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까는 편을 택했다. “회원님. 아무리 급해도 슬리퍼는 신고 나와야지. 바닥에 뭐라도 있어서 발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나 그러면 마음 아파.” 미경은 센터의 주 고객인 중년 여성들을 잘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유리할 때는 반말을, 불리할 때는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유불리가 애매할 때는 그것들을 적절히 섞을 줄도 알았다. 김금자는 나긋한 말투로 강사의 행방을 물었다. 미경은 또 한 번 강사의 행방과는 전혀 상관없을 김금자의 발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사님이 요 앞 사거리에서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미경의 뻔뻔한 거짓말에, 경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김금자는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안타까워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럼, 우리 미경 씨가 오늘 아쿠아로빅 수업 좀 해 주면 되겠네. 키도 크고, 늘씬하고··· 미경 씨가 딱 맞구먼.” “잘생긴 남자 강사님들만 보시다가, 제가 가서 이리 흔들고 저리

소설 2025.01.01
비비안의 딸들

비비안의 딸들 유호민 “금고 좀 비워 놔. 곧 갈게.” 남편의 전화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통화에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집 어디에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고민할 여유는커녕 필요조차 없이, 결정의 순간이 떠밀려 왔다. 금고 속에 있던 수천 장의 종이를 상자에 옮겨 담으며 희빈 씨를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번 학기 수업이 시작하던 날이었다. ‘나는 xxx xxx xxx xxx 이다’ 화이트보드에 그렇게 쓴 강사가 돌아서서 수강생들을 마주 봤다. “나는, 여러분에게 시 쓰기를 가르쳐 줄 수 없는 시인 김인하, 입니다.” 구립 도서관의 초급 시 창작반 첫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다음 순서는 자기소개였는데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한 문장으로’라는 단서를 붙이자 강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강사는 나를 지목하고,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초급 시 창작을 여덟 번째 수강하는 대치동 쌍둥엄마, 입니다.” 수강생 몇 명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저렇게 소개하시면 만년 초급을 못 면하십니다.” 강사의 말에 폭소가 터졌다. 팔 년 전 시 창작 강의가 처음 열렸을 때, 강의실을 휘익 둘러본 그는 나를 회장으로 찍었다. 평균 연령 60세쯤 되는 강의실에서 그중 젊고, 그리고 반듯해 보이는 내 인상 때문일 터였다. 뭔가 민망해서 “회장은 다른 분이 하시고 저는 총무 할게요,” 했더니 그는 선선히 “그럼 총무 하세요,” 했지만 그걸로 끝, 나는 회장 없는 만년 총무가 되어 수업을 보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거였다.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신입회원들을 한 명씩 지목해 나갔다. 대부분은 이름과 나이를 밝히는 소심한 자기소개, 일부는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하고, 한두 명은 나름 참신한 시도를 하다가 괴상망측한 결과가 되곤 하는데, 희빈 씨는 그중 마지막에 속했다. 정확히 기억은 못 하지만 비 오는 사막에서 꼬리 잘린 전갈 황 희빈,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거였다. 잠깐 뜨악한 정적이 흘렀다. 강사는 곧 “황 희빈 씨, 잘린 게 아니라 숨긴 것 같은데요?” 은근히 추어 주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수업이 끝난 후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시어머니가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식사 준비는 식당에 주문해 둔 요리를 포장해 오는 걸로 끝냈다.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은 따로 있으니까. 삶이 편안해지는 요령 1호는 새로 산 비싼 물건들은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 더 중요한 팁은 숨겨야 할 물건은 가격만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새로 산 가방과 친정어머니와 같이 갔던 여행 사진 액자를 들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남편 양복들 아래에 있는 금고. 가정용치고 꽤 큰 금고의 문짝을 열자 세 개의 서랍이 드러났다. 서류와 통

소설 2025.01.01
막내를 찾습니다

막내를 찾습니다 곽재민 작정하고 도망친 사람의 자리는 깔끔하다. 이를 토대로 우린 이틀간 연락이 되질 않던 막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욕설이 들려왔다. 막내는 얼어 죽을 년이었다가, 차에 치어 콱 죽어 버렸으면 좋을 년이 됐다가, 찢어 죽일 년이 됐다. 잠자코 선배들의 욕을 듣던 왕작가 님은 요즘 막내들은 버틸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며 따지듯이 얘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작가 님은 무안했는지 내게 면죄부를 내려 줬다. 막내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요즘 것들에 묶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혹시 너는 막내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니. 나는 몰랐다고 답했다. 혹시 숨겨 주는 거라면 너도 다를 게 없는 거 알지. 나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것도 못 버티면서 어딜 방송계에 발 들이려 해. 선배들은 방송작가 블랙리스트에 막내의 이름을 올리겠다며 윽박질렀다. 고작 23살짜리 사회 초년생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내게 발언권은 없었다. 도망치는 걸 도와줬다간 네 이름도 오르게 될 거야. 가족도 아닌데 연좌제라니.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리스트는 방송작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으레 블랙리스트가 그렇듯 내용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업무 강도가 어땠는지, 막내가 얼마나 버티다가 도망치게 됐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선배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던 몇몇 일화가 적힌 채 방송계에 떠돌게 될 뿐이다. 그렇게 박제된 작가들은 취업 시장에서 기회가 제한되곤 한다. 작가들이 최대한 구설수 없이 일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방송업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이런 것도 알려 줬어야 하나. 하지만 방송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추잡한 부분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싫었다. 선배, 이거 해석해 봐요. 나 어시민 못살메, 이추룩 조꼬띠 이서도 못 사는디. 이걸 어떻게 알아먹어요. 조만간 베네수엘라어 해석하라고 시킬 것 같아요. 세전 180만 원 받으면서 이런 일을 해야 돼요? 함께 일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막내는 내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영상을 문서화하는 프리뷰 작업은 막내의 일이었다. 얼마 전, 제주도 해녀들의 방언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할 때 막내의 투정이 더욱 격해졌다. 비품을 채우러 다이소에 들르거나 커피 심부름하는 것보다도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그런 기본적인 업무를 할 줄 알아야 메인작가도 되는 거라 다독였지만 막내는 거듭 하소연했다. 이런 잡무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선배 대단하다. 이런 짓을 몇 년씩이나 하면서 어떻게 버텨요? 정신병 오겠네. 나는 잠자코 투정을 들어줬다. 나까지 이런 것도 못 하냐며 핀잔을 줬다간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 같았으니까. 어르고 달래며 막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체크해 주는 일. 그게 서브작가의 잡무였다. 그러던 지난 월요일 아침, 작가 팀 톡방이 잠잠했다. 보통이면 막내의 현황 보고

소설 2025.01.01
가드를 올려요

가드를 올려요 양지예 월요일 출근 지하철에 이현은 용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좋아하는 구석 자리 좌석이었다. 이어폰을 꽂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현을 훑어보던 눈치였다. 까끌까끌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자른 왜소한 남자. 이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스마트폰에 무선 이어폰을 연결했다.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언제인가 눈이 마주쳤는데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사람과 마주 앉은 적도 있었다. 노인 여성 한 명, 중년 남성 한 명. 이현 쪽에서 시선을 먼저 돌린 후에도 이현에게 고정되어 있던 두 시선. 지금 생각해 보니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은 꼭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른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수천수만의 사람 중 단 둘뿐이었는데도 기억에 선명했다. 두 번 모두 이현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낯선 역에서 내려야 했다. 어김없이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내리는 사람 없이 타는 사람만 늘었다. 건너편의 까까머리 노인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현의 시선에는 앞에 선 고등학생이 배 쪽으로 멘 백팩만 들어왔다. 백팩에 얹힌 스마트폰에 고정된 안경알과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이현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어폰에서는 출근 때마다 듣는 ‘직장인 필수 영문장 섀도잉’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되는 유튜브 영상은 지하철에 타서 듣기 시작하면 갈아타는 역에 도착할 즈음 끝났다. 광고 건너뛰기▶| 를 누르려다 이현은 알고리즘이 추천한 다른 영상을 잘못 누른다. 보통은 광고가 흘러가게 두는 편이었다.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광고 음악에는 졸음이 달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더 큰 이유는 앉아서 출근하는 때보다 서서 출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만원 지하철에 선 채 가방이나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려면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주위 승객 여러분, 아주 잠깐만 이만큼의 영역에서 제 팔꿈치를 좀 휘두르겠습니다. 나서서 승낙을 구할 수 없기에 적당한 때를 노리는 요령과 눈치까지 필요했다. 앉아서 가면 민폐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이 약간의 공간을 확보해 주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실수로 누른 영상은 어젯밤에 시청하던 발톱 치료 영상이었다. 이현의 알고리즘은 비슷한 영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균과 얽힌 나머지 안으로 파고들다 파고들다 이윽고 시커멓고 누렇게 되어 버린 발톱이 주인공인 영상들이었다. 증상이 심한 사람은 색이 변한 정도를 넘어 자라나는 발톱을 내리누를 정도로 두껍게 쌓여서 발톱이 웃자란 조개껍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린 사람은 달라도 영상의 흐름은 거의 비슷했다. 소독약을 뿌린 다음 작은 드릴처럼 생긴 도구로 발톱을 갈아 낸다. 휘날리는 빵가루 같은 각질들을 닦아 내고 가끔은 니퍼를 이용해 커다란 발톱 덩어리를 잘라 내기도 한다. 잘라 낸 발톱 아래에는 각화된 살과 균이 융합해 불규칙적이고 축축한 구조체를 이루고 있기 마련이었다. 피고름이 고여 있을 때도 있

소설 2024.12.01
다른 겨울

다른 겨울 최유안 음습한 바람이 무리의 발소리를 갑작스레 가뒀다. 육중한 무게가 계단을 수시로 눌러 내리는 탓인지 천장에 붙은 낡은 철제 안내판 한쪽이 불규칙하게 덜컹댔다. 거, 애도 있는데 앞으로 자꾸 밀지 마시고. 신경질적인 영어에 앞쪽 무리에 끼어 있던 몇이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녀 한 쌍이 눈치를 보며 그의 주위를 빙 돌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빠져나가는 지하철 입구를 올려다봤다. 나 말고도 작은 소요에 신경 쓴 사람이 더 있었는지 고개를 튼 방향에 시선이 여럿 뒤섞여 있었다. 출구 끄트머리 너머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남자가 안정을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츄러스 먹을까?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가 신이 나는지 까르륵 소리를 냈다. 빨간 털모자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두 돌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 소리에 힘이 난 남자가 끙 소리를 내며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같은 줄에 서서 걷는 남자와 내 뒤로, 수십 명이 굴리는 발걸음이 코뿔소 떼처럼 광광거렸다. 계단참에 짧은 치마 차림의 여자가 카메라를 들고 멈춰 섰다. 사람들이 그를 피해 둥글게 호를 그리며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구도로 앵글을 잡았다. 한데 몰려 있던 찬바람이 안쪽으로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지하철 입구가 아랑곳없이 사람들을 쏟아냈다. 단어들이 하얗게 내뿜는 입김을 타고 구슬처럼 흘러나와 공기 중에 분사됐다. 북적이는 관광객 틈에는 한국인도 여럿 섞여 있었다. 깔깔거리는 소리에 익숙한 단어들이 튀어나와 저마다의 파동으로 멀어져 갔다. 누군가는 여행을 오기 전에 유럽에서 동양인 경멸이나 무시가 빈번하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했고, 여긴 그나마 괜찮아, 하는 자조 섞인 말도 들렸다. 게다가 지금이 연초보다 더 멋질 게 분명해, 하고 아직 마주하지 않은 새해 풍경을 확신하기도 했다. 불안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불가해한 미래를 정당화하는, 인간은 오만하다. * 간간이 부는 시린 바람 사이로 빵 굽는 냄새가 옅게 났다. 멀리 성당 종소리가 아득했다. 걷는 행위에 극심한 피로를 토로하는 나를 배려해 희용과 혜미는 속도를 조절하며 앞장섰다. 희용은 오른편에, 혜미는 왼편에 있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탓에 희용은 약간 비틀린 채 서서 인도와 차로를 번갈아 걸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거칠게 희용의 옆구리를 밀치며 지나갔다. 앞서간 아이를 멈춰 서 바라보는 희용의 곧게 선 뒤통수가 홧홧해 보였다. 희용을 치고 지나간 아이 뒤로 비슷한 또래의 아이 둘이 장난치며 뛰었다. 뒤따라 어른 몸집만 한 아이가 달려들더니 희용의 어깨를 치고 지났다. 희용의 귀에서 에어팟이 빠져나와 바닥에 내리꽂혔다. 아, 씨. 희용은 포장된 도로 위를 굴러가는 에어팟을 주워 올리며 멀리 아이들을 바라봤다. 벌써 저만치 뛰어가는 중이었다. 얼굴을 구긴 희용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던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내가 물었고 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는 목소리가 걱정스러웠는지, 에어팟

소설 2024.12.01
흑건(黑鍵)

흑건(黑鍵) 임희강 요셉이 정수용을 만난 건 약 두 달 전의 일이다. 요셉은 좁은 골목의 치킨 가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치킨집 바로 오른쪽에는 50년 전통의 순두부 가게가 있었다. 치킨집의 왼쪽엔 50년 전통의 순두부 가게 사장의 아들이 운영하는 아구찜 가게가 있었다. 그 외에도 갈비찜, 감자탕, 굴보쌈과 족발을 파는 가게가 차곡차곡 잘 맞춘 블록처럼 쌓여 있는 골목이었다. 두 사람이 지나기도 빠듯한 골목에는 서로 다른 음식에서 사용한 간마늘과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예스럽고 한국 음식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누가 봐도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요셉은 가진 옷 중 가장 깔끔한 재킷을 챙겨 입고 치킨 가게로 출근했다. 치킨 가게 사장은 바로 요셉의 이모부였다. 가게를 인수할 때 내부에 있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를 보고 이모부는 놀고 있던 요셉을 불러 연주를 부탁했다. 요셉이 가장 좋아하는 연주곡은 〈흑건〉이었다. 〈흑건〉은 쇼팽의 에튀드 G Major. Op.10 No.5를 말한다. 백건반이 아닌 흑건반으로만 주요 선율이 이뤄져 있어서 ‘흑건’이란 별칭이 붙었다. 어느 대만 영화에 메인 테마곡으로 등장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곡이었다. 〈흑건〉의 박자는 비바체였다. 대단히 빠르지만 급한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점에서 프레스토 박자와 구분된다. 프레스토를 사용하는 곡으로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Flying of bumblebee)〉이 있다. 요셉이 생각하기에 그 곡은 손가락 훈련 곡에 지나지 않았다. 우아함을 따지자면 〈흑건〉이 훨씬 우세하다. 요셉은 품격을 잃지 않는 선에서 경쾌하게 연주를 이어나갔다. 건반에 묻어 있던 기름때가 손에 묻으며 쩍쩍 소리가 났다. 연주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점에서 요셉에겐 특권처럼 여겨졌다. “제대로 밟을 줄 아는군요.” 연주가 끝났을 때 정수용이 다가와 말했다. 페달을 다루는 스킬을 알아봐 주는 손님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요셉은 그가 말을 걸어온 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가게에서 말을 거는 사람은 십중팔구 취객이었다. 요셉은 처음 연주를 했을 때 60대 남성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는 이미 옆 가게에서 지인들과 굴보쌈에 소주 6병을 해치우고 넘어온 상태였다. 등산복 차림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반갑진 않았지만 연주를 알아봐 준 것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요셉이 인사를 하려고 그의 곁에 다가갔을 때 남성은 몸을 휘청거렸고 그대로 바닥에 뒹굴었다. 요셉은 이후 손님과 대화를 삼갔다. “시끄럽지 않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요셉이 수용에게 말하곤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가게는 피아노 연주를 듣기 위해 찾는 곳은 아니다. 요셉이 소리가 증폭되는 뎀퍼 페달 대신 소리를 줄이는 시프트 페달을 밟은 이유다. 손님들은 치킨 가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 준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소리가 너무 커

소설 2024.12.01
이수정 - 제브라다니오

제브라다니오 이수정 수돗물 소리에 가려 자경은 영수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용케, 도배란 단어는 건질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작은 방을 도배할 때가 됐다고 말했을 터였다. 자경은 대꾸 없이 싱크대 한쪽으로 가 요리책 사이에 낀 상가 전화번호부를 꺼내 들었다. - 마음에 안 드는군. 돌아서 가는 영수의 등에서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주체가 누군지 바로 짚이지 않았다. 자경일 리 없었다. 로라가 쓸 방의 도배를 새로 하자고 한 사람도 자경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이 말도 했다. 열세 살 아이를 놓고 쓸 비유는 아니었다고 금방 후회는 했다. 도배한 지 얼마 안 된 방에 도배를 또 하게 생겼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자경은 불만이 없었다. 아주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긴 했다. 같은 말을 되뇌고 또 되뇌는···. 땀 찬 고무장갑을 힘겹게 벗으며 자경은 그 말을 또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그 말은 늘 존댓말로 나왔다. 별일 아니에요. 아기가 시간을 뛰어넘어 열세 살이 되어 나타나는 것뿐이에요. 출근하고 오전 내내 문자 한 줄 없다가 영수는 점심나절에 이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문자로 말하기엔 긴 내용이란 뜻이어서 이메일을 열 때 자경은 숨이 한번 깊게 쉬어졌다. 다행히, 도배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제 물잡이만 끝나면 되니 당신도 하나 골라 봐. 베타, 몰리, 비파, 보티아, 네온테트라, 프리스텔라···. 적도 가까이에 있는 이국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그 속에서 얼핏 ‘로라’를 본 것 같아 자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모니터에 바짝 댔다. 맨 끝의 ‘엔젤피쉬’ 덕분에 그게 다 물고기 이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영수는 자경에게 물고기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건 영수가 로라하고만 나누는 이야기였다. 정말 어쩌다 자경더러 할 때도, 로라 엄마와 이혼하기 전에 길렀던 구피 이름을 로라가 알더라는 식으로, 여지없이 로라가 등장했다. 고작 두 해 같이 산 부녀의 취미가 희한하게도 같다고 말할 때면 참는데 안 된다는 듯 영수의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일요일 저녁마다 부녀가 나누는 화상통화에서 영상으로만 보는 로라가 자경은 가끔 가상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로라가 곧 이 집에 살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실감 안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라는 물고기를 골랐을까···. 티브이 옆에 들인 수조는 영수가 로라를 위해 준비한 환영 선물이었다. 수조가 차지하고 앉은 자리에는 원래 장식장이 있었다. 삼 년 전, 신혼집을 꾸밀 때 영수가 고른 소파는 사방 각이 분명해 자경이 점찍은 고풍스러운 장식장과 어울리지 않았다. 드물게 길었던 대화 끝에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소설 2024.12.01
반감기

반감기 이기호 1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현명한 내 제자가 불쑥 이런 말을 건네왔다. “교수님, 혹시 여유자금 좀 있으세요?” “여유자금?” “1300만 원쯤······ 더 있으면 더 좋구요.”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자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연구실 원목 테이블 등고선 무늬를 제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얘가 진짜 문제가 있네. 나는 제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속으로 단정지었다. “돈은 뭐하게?” “교수님, 자유롭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하아.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제야 제자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때문인가, 유독 흰자위가 깊어 보이는 눈이었다. 성우정. 그게 그 친구의 이름이었다. 검정고시를 본 후 22살이 되던 해 대학에 입학했고, 주민등록상 거주지인 서울 목동을 떠나 학교 앞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원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던 3학년 친구. 1학년 땐 학과 행사에도 종종 얼굴을 비추고, 따로 스터디나 소설 동인 활동에도 참여하는 듯했으나, 2학년 1학기 때부터는 영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강의 시간은 물론 기말고사 기간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받았고, 그건 2학년 2학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은둔의 랜선 종결자 과 친구들은 성우정을 그렇게 불렀다. 줄여서 ‘은랜종’. 학교에선 잘 볼 수 없었지만, 랜선에선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동기, 가끔 게임 아이템도 쏴 주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전자책이나 영화 파일을 후배들 커뮤니티에 공유해 준 뒤 바람처럼 사라지는 선배, 학과 홈페이지가 모바일 버전과 PC 버전 사이에 버그를 일으켰을 때도 말없이 자취방에서 말끔하게 해결해 준 학과 조교의 구원자.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아무나 랜선 종결자라는 호칭을 얻을 순 없는 법. 성우정이 ‘은랜종’으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학년 2학기 때 있었던 압수수색의 영향이 컸다. “교수님, 우정 선배 압수수색 당한 거 아세요?” 나는 그 소식을 강의 쉬는 시간, 학생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듣게 되었다. “압수수색? 뭐 그것도 무슨 은어야?” “아니요. 진짜 압수수색.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된.” 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솔직히 나는 좀 놀랐다. 이건 내 경험 밖의 일이었으니까. 갑자기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니, 걔가 무슨 일 때문에······?” 내가 그렇게 묻자, 바로 난리가 났다. 누구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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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함께 읽기1) 이성민 1.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역사 속에서의 위치 상실로,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시대”2)의 지배적 징후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이전과 같은 역사적 방식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임슨의 어법을 따르자면 포스트모던 감각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를테면 깊이의 상실과 역사성의 쇠퇴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간예술의 통일성 와해가 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시간성의 와해 이후의 예술, 즉 공간성이 점점 더 지배적인 문화 논리가 되는 예술 형식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부터 읽어 내고 있다.3)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을, 완전히 균질해져 버린 탈역사의 공간 내부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는 이제 방향감각과 목적(telos)을 상실한 채 무한한 패스티시만이 잔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 같다. 상술한 시대감각을 하나의 전제로서 미리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4) 물론 각 개인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좌표 위를 점유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월가 점령 이후의 ‘신냉전’ 시대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질문하는 위치는 그러한 3인칭 좌표의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나의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 실존의 1인칭 관점에서 올바르게 보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이 속해 있는 1인칭 좌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려 할 때, 그런 시도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며 미궁으로 좌초되고 만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의 연쇄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데,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가뭄이 선물시장의 원두 가격 상승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신의 불가해한 변화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연기(緣起)는 축자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위치, 내가 나아가는 하나의 화살표, 나를 형성하는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은 지구 전체와의 공동 실존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구를 실존의 토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지구 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감히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말했듯 올바르게 본다는 것의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나 자신의 실존, 나의 시공간이 속하지 않는 담론의 역사, 실존과 담론 바깥에 있는 실재적인 것의 작용을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존-담론-실재의 이음새를 엮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살게 하는 무한한 연쇄의 무게 앞에서 사유는 한없이 무기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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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김설원 「팔월극장」 김유림 1. 불가능한 연출 정상과 비정상 사회를 구분하긴 사실상 어렵다. 기준을 찾는다면 역사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 시점으로 소환될 때 의미가 있다.1) 역사에 내재한 의미는 비정상과 정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 헤겔은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집적된 현상을 추론하고 검증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절대정신’에 이르기를 주문한다.2) 절대정신은 역사 변증법을 거쳐 ‘앎에 이르는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자유의지’와 동일한 의미로 억압을 벗어날 때 실현된다.3) 문학을 포함한 예술, 철학 등 인문학이 역사를 검증하려는 노력도 자유의지, 주체적인 인간의 실존을 강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현 평론가는 ‘문학이 억압하지 않지만,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4)라고, 적시한 바 있다. 이는 문학이 결코 유희적이거나 감상적 산물이 아닌 억압당하는 인간의 실존을 복기하는 장르임을 알린다. 김설원5) 작가의 단편소설 「팔월극장」6)은 2024년 현진건 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비정상 시대를 밀도 있게 다루면서도 미학적인 감응이 풍부한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4‧19 역사를 덧입혀 주목된다. 「팔월극장」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화자 영진을 중심으로 연기자를 꿈꾸는 윤희,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영진의 엄마와 여동생이 등장한다. 영진은 엄마, 여동생과 함께 지방 도시에서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 인쇄물 제작업체에 취업하지만 ‘생존 활동’에 불과한 일에 회의를 느끼고 직장을 그만둔다. 직장을 그만둔 영진의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 여부가 물음으로 확증된다고 밝힌다.7) 영진은 육체 보존 목적뿐인 삶에 왜? 라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푸코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행위를 심지어 ‘예술 행위’로 규정했다.8) 영진은 육체만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학원에서 연출 전공 강좌를 수강하고 운 좋게 영화제작사에 들어간다. 영화(제작, 연출)에 매진하지만, “성질이 더욱 고약해진 ‘가난’과 마주쳐야 했다.” “자부심이랄지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한숨과 카드 빚만 늘어 가는 생활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25쪽) 영진은 물질이 지배하는 비정상 시대에 억압당했다. 생활고에 엄마의 죽음이 포개지면서 영화감독의 꿈은 와해 될 상황에 직면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여동생이 문자메시지로 임종 소식을 알렸다. 새벽 한 시가 막 넘어선 때였다. 휴대전화에 찍힌 부고를 보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맥주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부주의로 내 어깨를 슬쩍 건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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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응답

시대와 응답* ― 한강과 90년대 문학의 (비)정치적 감수성에 관하여 최진석 1. 감수 능력과 문학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에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한국의 소설가 한강.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여러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통의 참화를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올린 문학적 성취에 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 즉 광주의 역사로부터 4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계엄이 재연되었다는 점에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사태의 정치·사회적 후폭풍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아끼자. 지금은 한강의 문학적 성취가, 더 정확히 말해 ‘노벨상 수상’보다는 작품 세계를 통해 표현해 낸 ‘문학적 울림’으로서의 성취가 어떤 토대에서 나온 것인지, 작가 개인의 재능을 넘어서 어떤 시대사적 배경으로부터 발아한 것인지 묻는 것이 더욱 유익할 성싶다. 만일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 재능에 전적으로 기인했다면 우리는 그에 더 보탤 말이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한강으로 상징되는 한국문학의 ‘높이’나 ‘폭’을 운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뿌리를 내린 문화적 감수성의 토양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감수성이란 묻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여러 지표를 선택하고 분류하는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감수성을 정의하고 실체로서 규정짓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실증성이 신뢰의 유일한 담보물이 되는 우리 시대에 주관성과 모호성으로 둘러싸인 이 감각의 구성물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쩌면 감수성이란 실물을 통한 증명의 문제라기보다 그에 다가서는 자가 감수(感受)하여 공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경험은 아닐까?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글쓰기를 실천해 온 한강과 그의 시대는 이 같은 공감적 경험의 지평선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70년대생 작가들은 9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문학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70년생 한강의 경우 93년에 시로, 94년에 소설로 등단했다. 그럼, 9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알다시피, 그 시기는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이며, 민족‧민중문학으로 대변되던 이전의 흐름과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문학이 모습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시적인 사회‧정치적 의제가 문학장에서 빠져나가고 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문화의 시대’가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1) ‘서태지와 아이들’, ‘무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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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예술’, 전통, 세계화

‘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l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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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의지

실패의 의지 - 최근 퀴어 가족 서사에 관하여 박민아 1. 내부의 외부 - ‘그런 것은 없다’ 행동심리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원숭이들이 불평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실험을 통해 드 발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불평등보다 ‘평등’이라는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실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일정한 행동의 수행을 요구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왼쪽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고 오른쪽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준다. 같은 행위의 결과로 오이만을 지속적으로 전달받은 왼쪽 원숭이는 오이를 거부하거나 급기야 오이를 집어던지며 분노한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 ‘평등’이 인간종에게만 있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그런데 그보다 이 실험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불평등한 보상 체계에 분노하는 왼쪽 원숭이가 아니라 오른쪽 원숭이의 반응에 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오른쪽 원숭이는 불공정한 보상 체계를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만약 평등에 대한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이라면, ‘불평등’에 대한 전통 역시 그에 못지않게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불평등 구조에서 수혜의 당사자는 평등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른쪽 원숭이에게 이 게임의 불공정성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보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한 무엇일까. 만약 이후에 두 원숭이가 경쟁을 통해 포도를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경쟁에서 패했을 때 오른쪽 원숭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김보영의 SF소설 「얼마나 닮았는가」2)에서는 ‘성차별이 없다고 가정되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사고실험’을 보여 준다. SF에서 ‘사고실험’은 “만약?”을 질문하고,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 또는 사회적 규범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3)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유로파용 보급선은 성차별에 대한 정보값이 입력되지 않은 ‘일종의 폐쇄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내 문제 상황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온 구조 신호에 응답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신념의 충돌이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면, (여성) 의체에 인격을 탑재한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의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지위에서 발생하는 취약성과 그에게 가해지는 남성 선원들의 폭력이 두 번째 층위에 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진압해야 할 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종의 이유에 의한 선내 폭동에의 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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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소수자 시민권의 기획과 해외 이민의 상상력 오혜진 ‘탈조선’이라는 모험과 자기 계발의 윤리 2015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헬조선’ 담론은 계급 세습이 고착화된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수저론’과 결합하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됐다. 잘 알려졌듯 이 담론은 한국사회를 더는 진보의 기획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태된 미개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젊은 세대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또한 단호히 거절한다. 헬조선 담론과 함께 부상한 ‘죽창론’ 역시 ‘리셋’에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파괴의 제스처에 가깝다고 해석된다.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2)는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 자조의 정동이 주조한 헬조선 담론을 발 빠르게 포착해 선동적인 대중 서사로 가공한 사례다. 전작들에서 ‘자살’(『표백』, 2011)과 ‘덕질’(『열광금지, 에바로드』, 2014)을 통해 “저항하는 잉여”3)로서의 청년 형상을 부조한 바 있는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해외 이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한다. 다만 그가 모종의 “도발”4)을 의도한 것과 달리, 독자들에게 이미 ‘탈조선’의 상상력은 불온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차원의 ‘노오력’을 요하는 규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정황을 제시한다. 하나는 ‘평범한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등시민”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싫어서』, 44쪽)라는 진단이 ‘홍대 나온 20대 후반 여성’ ‘계나’의 자기인식이다. 즉 계나는 학벌과 외모,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의 할머니가 새벽에 폐지를 줍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고 회고함으로써 ‘폐지 줍는 할머니’의 형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자 비참한 미래로 의미화한다.5) 다른 하나는 소수자들이 연대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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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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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5.01.06
행복한 문학여행을 떠나요 - 노벨문학상과 한강 그리고 ‘문장의소리’

행복한 문학여행을 떠나요 - 노벨문학상과 한강 그리고 ‘문장의소리’ 최창근 지난해 12월 10일 광주광역시청에서 열렸던 ‘2024 광주에서 온 편지’ 행사에 다녀왔다. 한국 시간으로 그날 자정 스웨덴에서 시작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생중계로 보면서 광주시민들이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자리였다. 작가가 부른 노래도 흘러나왔고 작가의 작품으로 만든 시극도 공연되었다. 작품과 연계된 문학 강연도 풍성하게 열려서 시국은 비록 어수선했지만 그 와중에도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축제였다. 운명의 날이었던 10월 10일 작가의 수상 소식을 처음 접한 건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안무가가 연출한 춤 공연을 보러 청주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작가의 여고 동창이기도 한 극작가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강 노벨상!!”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고 정말 믿기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현실감각이 돌아오자 마치 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너무나 기뻤고 마음이 참 뿌듯했다. 작년 가을은 그 일로 내내 가슴이 설렜다.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예이기도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세계문학의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문학 전체가 상을 받은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실감이 안 나는 건 매한가지다. 작가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후 지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한강 작가가 가장 가까울 거라는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그 시기는 먼 훗날의 일이었고 이렇게 일찍 갑자기 받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작가와는 작은 인연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5년 5월 한국문화예술위원에서 그 당시에도 요즘과 마찬가지로 얘기되던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헤쳐 나가려는 방안의 하나로 사이버공간에 문학 종합 포털사이트인 ‘문장’을 창안했다. 문장 안에는 다양한 콘텐츠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터넷 문학라디오였고 나는 훗날 ‘문장의소리-행복한 문학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문학라디오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작가를 겸한 피디였다. 한강 작가는 ‘문장의소리’ 첫 방송의 초대 손님이었고 그 후로 진행까지 맡아 2005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9개월을 서울 합정동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게 됐다. 한 작가가 진행을 맡았을 때 프로그램 기획이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을 돌아가며 소개하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포함해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낭독해서 들려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한강 작가와 떠나는 세계문학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 협업해서 이미 노벨 문학 방송을 제작했던 건 아닐까. 그로부터 20년 후에 그 문학 방송의 진행자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천지의 기운이 도운 하늘의 뜻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획 2025.01.01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2025년 1월호부터 3월호 사이에 총 3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입니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책장 업고 튀어 - 2차 :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 3차 :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 《문장웹진》 2025년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ㅇ 일 시 : 2024년 11월 28일(목) 13:00~14:30 ㅇ 장 소 : 예술가의집 라운지룸(서울 종로구 동숭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ㅇ 참여자 - 사회자 : 이소(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참여자 : 곽선희(‘위즈덤하우스’ 편집자), 김은혜(문학웹진 ‘림’ 편집자), 이유리(소설가), 한영원(시인) 〈개회〉 이소: 반갑습니다. 저는 평론을 쓰는 이소입니다. 《문학과사회》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어요. 다들 어떤 책을 만드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유리: 저는 소설 쓰는 이유리입니다. 최근에 『비눗방울 퐁』이라는 소설집이 나왔습니다. 곽선희: 저는 ‘위즈덤하우스’ 출판사에서 ‘위픽’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곽선희 편집자라고 합니다. ‘위픽’ 시리즈는 단편소설 한 편이 책 한 권으로 만들어지는 기획이어서 오늘 종이책의 무게라든가 부피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고요. 오늘 자리에서는 좌담에 앞서 문구 덕후이자 전자책 편애자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영원: 저는 시 쓰는 한영원입니다. 『코다크롬』이라고 하는 시집을 썼습니다. 김은혜: 안녕하세요. 저는 열림원 문학웹진 ‘림’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김은혜입니다. 어제 마감이 끝났습니다. 조만간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이 나올 예정이고, 전시를 기획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소: 어떤 전시를 하시나요? 김은혜: 문학상 시상식과 전시를 접목시키는 기획을 하고 있는데요. 전시 기획은 처음이라 조금 떨리기도 합니다. 이소: 제가 미리 질문지를 드리긴 했는데, 꼭 해당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첫 질문은 ‘책과 공간’에 관한 것입니다. 책이라는 것이 부피가 크기도 하고 공간과 큰 연관이 있잖아요. 카페 같은 곳에서는 예쁜 책이나 시집을 인테리어 용도로 쓰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에게는 일과 관련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부피가 크다 보니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책을 모으시는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전부 다를 것 같아 궁금합니다. ‘집에 책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집에서 취향의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큼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기획 2024.12.01
자전거 도둑

[에세이] 자전거 도둑 장은진 나에게는 15년 된 자전거가 있다. 생김새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용 삼천리 자전거다. 분홍색 프레임에 분홍색 안장과 스테인리스 바구니가 달린, 작고 낮은 자전거. 본래는 엄마 거였는데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자전거 타는 게 자신 없다며 나에게 물려주었다. 그렇게 그것은 가족 공용이 아닌 내 개인 소유의 자전거가 되었다. 자전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배웠다. 그러나 내게는 배우기 과정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장면들을 찾아볼 수 없다. 보호 장비를 착용한 아이의 자전거가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모가 뒤에서 잡아 준다거나 흔들흔들 비틀대다 서너 번 정도 넘어지며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해 가는 모습들. 애초부터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부모를 가진 아이는 혼자서 자라고 혼자서 배우는 일에 익숙하다. 익숙하기에 그런 아이는 혼자 뭔가를 이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혼자 하게 내버려둔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걸 눈치로 알고 몸으로 단단히 익혀서다. 일테면 그것은 겨를 없는 부모의 아이라면 일찍부터 습득하게 되는 자립성이다. 눈치 있는 단단한 몸을 가졌기에 초등학생의 나는 자전거를 단번에 배웠다. 보호 장비도 없이. 뒤에서 잡아 주는 부모도 없이. 넘어지는 시행착오나 하나의 상처도 없이. 그것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패를 모르던, 완전무결한 성공이었다. 너무 식은 죽 먹기라 인생도 자전거 타기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시할 만큼 쉽게 이룬 건 인생을 통틀어 그때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전거를 탈 때의 기분은 절대 시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성공했을 때는 물론이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시시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지상에서 두 뼘쯤 떠올라 있는 몸과 발이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하늘을 난다고 생각했다. 새가 된다면 꼭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는 새가 아니므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새가 되는 기분이 시시해질 리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타도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전거가 시시할 수 없는 이유는 자가용 없는 나에게 특히 소중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름이나 전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몸의 에너지로 움직여서 환경에도 무해한 이동 수단. 차를 타기에는 가깝고 걷기에는 먼 거리일 때 자전거의 위력은 더 대단해진다. 애매한 거리에서 자전거는 나의 빠른 발이 되고, 애매한 거리인데 그것이 없으면 눈앞을 막막하게 해 필수품이 된다. 자전거는 부지런한 이동 수단이라서 그것을 애용하는 사람은 매사에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려면 멈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므로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내 주변만 봐도 게으르고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자전거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콜택시를 부른다. 추우니까, 더우니까, 비가 내리니까, 짐이 무거우니까란 핑계로. 게으른 사람에게 자전거는 쓸모와 필요가 약한 물건이라서 대개

기획 2024.12.01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에세이]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이주라 역사 없는 사극 언젠가부터 사극과 시대극에서 역사가 사라진 지 오래다. 2000년대 초반 팩션(faction)의 열풍을 시작으로 역사적 자료는 상상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현대적 상상력을 덧입힌 트렌디한 드라마로 재탄생하였다. 영화 나 드라마 은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 줄짜리 기록에서 시작하였다. 역사적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극은 더 이상 역사적 고증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이 잘 되었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기준은 의미 없다. 역사극 자체가 역사적 허구이고, 이미 허구적 상상의 세계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가 있다고 해서 역사적 왜곡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중 수용자는 역사적 허구를 허구로 인지하고 있으며, 허구적 재현 속에서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 논쟁을 통해 문제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정보 검색을 통해 역사적 왜곡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판단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극을 볼 때 너무 고지식하게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했냐 아니냐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즘에 역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다른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팩션의 시대 이후로 최근 역사극 드라마들이 대부분 ‘한복 입은 로맨스’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음에 찜찜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잡아낼 수 없어서 아예 역사극을 보지 않는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재밌자고 보는 드라마 아닌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휴식의 시간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일 년 전쯤 방영한 ‘한복 입은 로맨스’를 보게 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이 자신만의 옷을 몰래 만들어 팔다가 타임슬립을 하여 21세기 한국에 오게 되고 거기에서도 한복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조선 시대 자신에게 닥쳤던 곤경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여주인공은 조선 시대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는데, 현대 한국으로 타임슬립해 보니 조선 시대의 인간관계가 똑같이 반복되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여주인공은 이 살인 사건에 숨겨진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다.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문제는 조선 시대로 돌아간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범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다. 이 범인은 덩치 큰 남자 하인으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온 여주인공 집 노비들도 이미 물리치고

기획 2024.12.01
하루와의 대화

[에세이] 하루와의 대화 양안다 #1 안다 : ‘××× ××××’라는 가제로 시집을 준비 중이야. 현시대와 ××××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접근했어. 마무리가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아마 몇 편을 새로 써서 교체할지도 몰라. 하루 : 혹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나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시 한 편을 살짝 보여줄 수 있어? 안다 : 가장 애착이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쓴 시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야. 뉴욕 헤럴드 트리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는 걸까. 아무도 우릴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레아, 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쳐다보지도, 손 흔들지도 않았잖아요. 나는 떠나기 싫어‧‧‧‧‧‧. 내가 마음이 변했다고 한 적 있나요. 그저 새 장갑을 사러 가겠다고 했을 뿐이에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가도 괜찮겠어요? 나는 광장을 걷다가도 꽃다발을 구매했다.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가득했고 온 도시가 불안으로 떠들썩했다. 레아는 어디 있는 거지? 이렇게 중요한 때에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날이 추우면 장갑을 끼면 되지만 폭염이 쏟아지니 손 가죽을 벗길 수 없더구나. 어젯밤의 꿈 얘기를 할 때에는 귀신들이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단다. 레아가 몸을 숨기고 있는 호텔에서. 복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항상 이런 식이다. 세상에는 문이 너무 많고 열쇠‧‧‧‧‧‧ 그것은 이빨이 너무 많다. “나도 노력했는데 바뀌지 않았다고요. 증오는 우리를 먹고살게 해 줄 수 있어요. 사랑, 사랑, 사랑, 이젠 다 지겹다고요! 위선자들!” 사건은 지난달 블랙 먼데이에 발생했다. 나무보다 더 많은 불이 숲에 있었다. 나무보다 더 많은 연기가 숲에 있었다. 숲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레아, 그날부터 너는 호텔에 오지 않았다. 삶이 끝난 뒤에 혁명이 성공하면 무슨 소용이야? 복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보고 싶나요? ‧‧‧‧‧‧손톱만큼. 듣고 싶나요? ‧‧‧‧‧‧샹송 조금. 중간에 자주 서지만 내일 오전이면 도착할 겁니다. 열차에서 내린 곳은 도시 외곽의 들판이었다. 폭염이 쏟아지는 어느 여름. 하염없이 걷다가 길을 잃을 뻔했지. 나는 머리끈으로 들꽃을 묶어 너에게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눈치채기를 바라면서. 이곳은 수질이 좋지 않나 봐요. 손등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요. 빈혈기가 도지고 신물이 올라오는데도 레아, 나는 너와 함께 끝없는 들판을 걸었다. 땀 맺히는 손등을 벅벅 소리 나도록 긁어대며. 쏟아지는 코피를 움켜쥐고. 새로 산 장갑인데 다 버려서 어떡해요. 흰 장갑이었던 것이 흰 꽃 사이로 내던져졌다. 레아는 맨손으로 나의 얼굴을 문질렀다. 들꽃으로 피를 닦아 주다가, 붉게 물든 손등을 핥다가, 주근깨가 들썩이도록 웃으며 레아가 말했다. &ldqu

기획 2024.12.01
류영진 - 작가의 창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작가의 창 - 손서은 작가 인터뷰 류영진 2023년 도서관 상주작가사업의 성과로 2024년 9월 24일부터 9월 30일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해외연수를 가게 됐다. 그곳에서 손서은 작가를 만났다. 손서은 작가는 2020, 2021 원주에서 상주작가를 지내고 2024년 9월부터 12월까지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예술네트워크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스웨덴에 가게 된 손서은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스웨덴에 살러 온 손서은입니다.” 유쾌하고 당찬 자기소개였다. 나는 살러 왔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손서은 작가는 말 그대로 3개월의 레지던스 기간 동안 관광객 마인드가 아닌 스톡홀름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말이라 했다. 상주작가 때 문학큐레이터에 실렸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도서관 직원들과 파티를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도서관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으니 도서관 식구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어디를 가든 그곳을 살아가려는 손서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레지던스 생활을 시작한 손서은 작가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강의는 두 번이었다. 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손서은 작가에게 두 번의 강의는 너무도 짧은 것이었다. 손 작가는 스톡홀름대학교의 한국학과 학생들과 짧은 소설 쓰기로 하고 싶어 했다. 일기식으로라도 좋으니 한국말로 글쓰기를 하고 싶고, 그들이 쓴 글을 봐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 친밀하게 만나길 원했다. 상주작가 기간에 ‘뭘 해서 사람들을 도서관으로 데려오지? 뭘 해서 책을 읽게 하지?’ 하는 기획자 마인드로 임했던 손 작가는 레지던지 작가로서도 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강의는 두 번이지만, 더 하고 싶고, 더 많은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글을 쓰며 그 속에 어울리고 싶어 했다. 이에 학교 측도 손 작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 준 것 같다. 레지던스 기간 동안 어떤 계획을 갖고 있냐는 질문에는 ‘계획은 없어요. 계획하지 않지만 공상할 뿐이에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학생들과 글쓰기 하고 싶은데, 글쓰기 하자고 하면 모일까?’ 걱정하던 차에 미래인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 40권을 보내 줬다고 한다. 강의 시작 전 책이 도착했고, 함께 한국어책 읽어 보자고 하니 학생들이 모였다고 한다. 덕분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자신의 책을 읽으며, 공상만 하던 글쓰기 단계로 갈 수 있었고. 나아가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획 2024.12.01
이상수 -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① - 스톡홀름과 쿨투어후셋도서관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① - 스톡홀름과 쿨투어후셋도서관 양정작은도서관 이상수 스웨덴까지의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인천에서 도하까지 10시간, 다시 스톡홀름발 비행기에 탑승하여 7시간을 더 날았다. 하늘길에서 20시간을 보낸 후여서인지 유럽의 공기는 달콤했다. 스톡홀름은 통나무(Stockar)와 섬(Holmar)의 합성어이다. 1255년 무렵 구시가에 통나무로 성을 쌓아 도시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13세기 중반 현재의 감라스탄 지역의 언덕 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요새를 만들고 도시를 형성해 발전시켰다. 방문하기 전, 이 도시는 내게 심리학 용어로만 존재했다. 1973년 8월,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고, 이때 인질로 잡혔던 한 여성이 강도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스톡홀름 증후군’이었다. 도서관 앞 광장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세르겔 광장은 퇴근하는 시민들로 붐볐다. 늘씬한 키와 금발의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이곳이 이국임을 실감케 했다. 남녀 모두 수수한 옷차림으로 큰 가방을 메거나 등에 진 사람들이 많았다. 왕궁과 의회가 있는 감라스탄, 철도와 지하철노선이 교차하는 센트럴역 등 스톡홀름의 모든 길은 이곳 광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쿨투어후셋도서관의 외관은 쇼핑몰처럼 보였다. 광장 분수 안에 세워진 자수정 탑 같은 조형물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차는 분수를 중심으로 돌아 나갔고 건물 앞에는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도시의 가장 중심에, 상업 시설이 아닌 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을 보니 이 나라에서 도서관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막 트램이 도착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쿨투어후셋도서관 내부 쿨투어후셋은 ‘문화의 집’이란 뜻에 걸맞게 공연장, 전시 공간, 6개의 도서관으로 이루어졌다. 한 건물에 6개의 도서관이 있다니. 안으로 들어서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체스판이었다. 스웨덴의 도서관이라면 반드시 마련된 공간으로, 체스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공원에서 바둑 두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와 달리 젊은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가 어울려 체스를 즐기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초록과 연두 그리고 오렌지로 채워진 가구로 인해 도서관이라기보다 서점 같은 분위기였다. 낮은 서가에 진열된 책과 빽빽하게 채워진 CD, 감각적인 책꽂이에서 고른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의자가 단연 눈길을 끌었다. 또한 꽂힌 책들이 잘 보이도록 세심

기획 2024.12.01
이상수 -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② - 노르웨이 미래숲도서관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② - 노르웨이 미래숲도서관 양정작은도서관 이상수 노르웨이 미래숲도서관을 방문한 날, 공기는 서늘했다. 우리 일행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천천히 푸른 서가를 거닐었다. 숲을 도서관으로 만들겠다는 최초의 발상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스코틀랜드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은 한 세기 동안의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세계적으로 엄선된 백 명의 작가에게 일 년에 한 명씩 원고를 제출케 하고, 백 년 후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것이었다. 여기엔 나무를 심고 키우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외곽의 ‘노르마카’에 미래도서관 숲을 조성한 후, 가문비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다. 선정된 작품의 원고는 한 세기 동안 읽히지 않은 채, 오슬로의 공공도서관 ‘침묵의 방’에 각각 보관된다. 2114년이 되면 모든 원고의 봉인을 풀고 이 나무들을 베어 책으로 펴낸다. 2018년에는 한강 작가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오슬로에서 숲으로 가는 길, 홀멘콜렌 스키 점프대가 한 마리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비상을 꿈꾸고 있었다. 근처 호수에서 신을 벗고 발을 담그니, 한겨울 살얼음이 낀 동치미를 먹은 듯 청량감이 느껴졌다. 피오르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트래킹을 시작했다. 길섶엔 갈색빛의 버섯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촌락 같았다. 개미들이 가문비 나뭇잎을 끌어모아 고층 집을 지어 놓았다. 잘 익은 블루베리와 라즈베리가 장식처럼 붉었다. 퇴고하지 않은 초고의 숲은 뿌리가 땅 위로 자라고, 이끼가 그 위를 덮어, 또 다른 문장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새파랗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노르웨이의 하늘도 그에 못지않았다. 잘 뻗은 가문비나무가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숲에는 곳곳에 두 가지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붉은색은 스키 길을, 하늘색은 트래킹 길을 의미한다고 했다. 수문장 나무에 두 색이 함께 칠해진 걸 보니, 여기는 누구든 출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로 뻗어 오르는 가지는 내 어깨와 키를 맞추기도 했지만, 머리 위로 쑥 솟아오르기도 했다. 쑥쑥 자라 질 좋은 펄프를 생산할 것 같았다. 노르웨이에서 크리스마스트리는 반드시 가문비나무를 쓴다. 이 나무는 최대 오십 미터까지 자라며 수명은 수백 년이나 된다. 작년에는 칠십 년 된 이십 미터짜리를 런던시에 선물하기도 했다. 바이올린의 공명판으로는 그 나무가 최고라고 한다. 추위 속에서 고요히 자라는, 단단한 나이테 덕분이라고 한다. 장 지오노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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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2024.11.21
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신은수 등장인물 김우진. 이영녀. 오일삼. 윤심덕. 1925년, 늦은 저녁. 상성합명회사의 작은 사무실 안. 한쪽 벽면엔 업무 서류들이 쌓인 책장. 전화기가 놓인 책상에는 쓰고 있던 원고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사무실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김우진. 옆에 놓인 물컵과 약봉지. 김우진 하루하루 정말 미칠 지경이야··· 돈과 직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가꿔 이룬 것들이라면 애착이라도 있겠지만, 모두가 아버지 것들인데··· 난 그저 장남으로 태어난 책임으로 꼭두각시처럼 있는 거라고. 아무리 좋은 먹이를 매일 갖다 줘도··· 새장 속의 새가 행복하겠나. 지금 내 신세가 꼭 그래,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가 말이야. 이러다간 날개가 퇴화돼··· 어느 때부턴 나는 법조차 잃어버릴까 두렵다고. 약봉지를 힘겹게 뜯으며. 김우진 그래서 오늘도 쓰고 있다네. 이런 밤늦은 시간에 부친께서 앉힌 사장 역할이 끝나면, 나는 법을 잊지 않으려 말일세. 지금 쓰고 있는 것 말인가? 조선판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인데··· 잘 풀리지가 않아. 막바지 3막으로 가고 있지만, 과연 지금의 조선 현실서 착취 속에 사는 궁핍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간단 것이 가능한 얘기인지··· 써 본들 사람들이 보고도 공감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뭐라 했나, 윤심덕? 당황해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김우진 이보게,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고. 안 만날 걸세, 지금 윤심덕이가 어디 살고 있던 내 알 필요 없잖은가?! 그래, 그 추잡한 소문들을 여기서도 전부 다 듣고 있다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밖을 향해서. 김우진 밖에 누군가. (수화기에) 잠시만··· 급하게 원고들을 구석에 숨겨 놓으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오는 오일삼. 오일삼 접니다, 사장님. 김우진, 안도하는 표정. 오일삼 아! 전화 중이신데··· 불쑥, 실례했습니다. 김우진 (수화기에) 회사 직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잘 모르겠네··· 언제 완성될지는. 얘기했잖은가, 마지막 부분에 글이 막혔다고. 다 쓰면 우선은 자네가 있는 토월회 쪽으로 보낼 테니, 한번 읽어 보라고. 오일삼 하하하. 편하게 계속하십시오. 김우진 이영녀일세. 주인공 이름 그대로가

시·시조 2024.11.05
「직전의 양」외 6편

직전의 양 임지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만 좀 불러냈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양털로 옷도 이불도 해 입으면서 잠까지 덮어버릴 셈인가 봐 가을이 오면 확연하게 줄어든 몸무게에 양이 얼마나 어리둥절해하는지 모르면서 내가 아는 제일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양을 구십구만 구천 마리까지 셌지만 잠이 오지 않았대 세기를 그만두자 그제야 잠에 들었다지 좁은 방에 아침까지 불러 모은 양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지 이런 사정을 아는 동물 애호가는 양 대신 말, 소, 사자들을 불러 모았대 함께 있기에는 긴장감이 넘치는 사이라서 밤새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지 이런 얘길 들으면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해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컵이나 상자를 부르는 건 어때? 쌓아 올리기도 쉽고 무너지기도 쉬운 게 잠이잖아 쏟아진 잠 밑에 깔려 상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을 들여다봐 보면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이 그게 설마··· 양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한낮의 잎맥처럼 활짝 펴지는 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콘센트처럼 짜릿한 잠, 일주일째 닦지 않은 안경처럼 흐릿한 잠, 프라이팬 위에 터진 노른자처럼 중심이 없는 잠, 그런 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양을 부르고 좀비 소원 깨고 나니 좀 이상했습니다 욕구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졌습니다 더는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지각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걸까요? 하지만 저에겐 기분이라고 할 게 없어졌는걸요? 그래도 습관이라고 할 게 남아 있어 학교에 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있는 의자들 ㅂ ㅂ ㅂ ㅂ ㅂ 선생님이 소원을 적어 실내 나무에 걸라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소원이라 할 수 있나요? 연필 끝을 씹는 동안 준호가 시아를 깨물고 시아가 영재를 깨물고 나는 깨끗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있었습니다 진우를 더 이상 못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우는 사인펜도 잘 빌려주고 내 얘기에 많이 웃어줍니다 진우를 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벌써 어긋나버렸나 봅니다 진우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습니다 못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우는 하필 나를 만나서 숨을 몰아쉬면 진우는 깨물기 좋은 목덜미를 가졌고 아주 이상한 맛이 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소원은 정말 이뤄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 생긴 점 코 위에 점은 미인 점이라 부르고 손가락 위에 점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라죠? 입술에 점이 생기면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친구가 손에 샤프 점이 생겼다고 했을 땐 반투명한 점이 참 신기했는데 나도 없던 점이 생기길 바란 적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진짜 해내는 점

시·시조 2024.11.05
「모자의 줄」외 6편

모자의 줄 박소언 그리운 적막이 투명하게 걸려있다 마르지 못하는 목매단 모자 하나가 바지랑대를 하늘 높이 세우면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두 줄이 생긴다 젖은 옷가지들과 모자가 걸린 문이었으므로 하늘이 내린 경계에서 하루의 동거가 바짝 말라간다 맨살을 비비적거리는 살갑던 허공을 헤아려본다 두들기던 얼룩이 서성대다, 발버둥 치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맡긴다. 자리매김한 여분도 없이 넘나들다, 휘날리다, 사지가 갈리면 문을 닫고 눈을 감고 싶다 두 개의 집게에 물려 벼랑에 설 때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맥없이 자맥질하는 무지개를 동반한 비바람의 날들이 가까스로 씻겨나간다 바람 너머 저 홑청 속으로 얼비치는 아홉 살 여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등에 밥물을 잡는다 뒷산에 해가 걸리면,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매운 눈을 비비며, 육자배기 노랫가락에 아들 타령 늘어진 아버지가 ”아~ 신라의 밤이여” 털레털레 삽짝 문을 열고 갈지자로 휘청거린다 “아버지 내가 커서 아들 낳아드릴게요” 버스럭버스럭 벗겨내던 슬픈 말꼬리가 아들 없는 빈소를 기억하며 하얗게 운다 구멍 뚫린 양말이 늙지도 못한 채 유품처럼 마당가에 서 있는 빈 바지랑대 줄에 걸린 검정 두루마기가, 술 취한 혼잣말이 낮 그림자에 나풀거리며 자꾸만 손짓한다 흙 마당에 고꾸라진 짝 잃은 속디디미처럼 종종걸음하며 방향을 잃고 몸부림쳐대는 꼴이라니 옷가지 거두어간 자리에 방울방울 물음표만 걸리는 속알속알 느낌표만 걸리는 저 섬망 같은 세월을 하염없이 일으켜 세운다 허공 의자 한 사내가 높다란 허공 의자에 앉아 바람을 타고 있다. 창문에 매달린 꿈을 꾸며 리듬을 갈之자로 가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순간이다. 밧줄에 매달려 좌우로 흔들리는 난간에서 무거운 몸통을 거미처럼 붙여 놓고 사내는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빌딩 외벽에서 사내가 환상을 찾아 떠난다. 반짝반짝 별자리에 머물렀던 적 있었던가. 절벽 같은 유리창에 매달려 흔들흔들 안락의자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울렁울렁 목을 잡아당기던 밧줄에 맞춰 기어올랐을 벽과 빌딩 사이, 이곳저곳 희망에 꿰차고 앉아 날개를 달기도 했다. 높다란 저녁별 마주 보며 떨어지는 어둠에 하루치의 밧줄을 말아 잡아당겼다. 바람의 끝에서 홀로 앉아 있던 사내의 앉음새가 스르륵 풀어졌다. 핑 도는 어지럼증이 발아래로 튀어 오르자 사내는 그제야 허공 의자에서 내려오는 그때 유리창 아늑한 방안에서 아장아장 기어 나오는 아기가 두 손을 꽉 쥐고 까르르 웃는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포즈로 나는 그네 타기 놀이에 빠져든다. 은지화 애오라지. 손바닥만 한 딱지에 물고기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은물결 팔딱이다 헤엄치다 긴한 말들이 아로새겨진 활자 같다 꼬리꼬리한 비늘이 까르르 뒹굴면 깊은

시·시조 2024.11.05
「복선」외 6편

복선 윤인숙 참 이상하지 빨간 가운을 걸치면 몸에서 죽은 쥐 냄새가 나 유리 머리 폭탄 웃음 마음 바다 어느 쪽이 더 좋아 수족관에 손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손도 키우시나요 그럼 물도 매일 갈아 줘야겠어요 손톱에 물때가 낄 테니까요 깨진 유리 구겨진 웃음 진심으로 고마웠다니, 이런 환멸은 처음이야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리를 오므린다 온도가 중요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손바닥 얼룩같이 두 눈이 없어도 잘 느낄 수 있는 늪의 악어 알처럼 수국을 움켜쥘 때의 기분 모든 첫 중에 첫, 한 입 복숭아 수국을 손바닥으로 움켜쥘 때 무른 복숭아의 즙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거기를 만질 때 조금 젖을 때의 침이 꿀꺽 넘어가는 물고기가 찌를 물고 달아나는 산꼭대기 고사리 밭 층층나무의 향기 이끼 아래 바위 복숭아 살을 손으로 뭉개 봤다면 밀가루 반죽을 휘휘 저어 봤다면 끝물이라는 말 그 여름이 뜨거웠다는, 뼈의 화목 나무가 이름을 얻는다 적막이 가만히 가라앉고 있다 흰 항아리 한 줌 다섯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뼈의 화목 허공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밖은 따뜻하고 속은 부서지는 중 골목을 들어서며 느리고 크게 부르던 노래도 낡아, 노래뿐이다 기억은 가뭇없고 폭풍이 쓸고 간 듯 먼 길이 생겨나고 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풀이 풀의 어깨에 기대 흐느낀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갯짓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나무의 이름이 살갗 아래 새겨진다 얕은 밤 고개를 젖혔다가 퉤, 하고 누런 가래를 뱉을 때, 가래가, 누런 가래가 땅바닥에 ‘척’하고 달라붙은 거 같죠. 척하고 뭉개지는 거죠. 산산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발끝으로 쓰윽 뭉개지 말아요. 진득한 실이 달라붙을지도 몰라요 영원이 알을 슬어 놓을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도 꽃은 피니까요 어떤 순간도 영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든다는 걸 일깨워 주진 말아요 왜 그런지, 선명한 것은 가여워요 얕은 밤에 꿈은 무르익고 계절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슬금슬금 와버려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까요 전 언제나 지는 쪽이 더 좋기는 해요 숨 비 오고 라일락이 막 피려고 해요 꽃향기 비눗방울처럼 터져요 다정한 소문 같아요 향기는 몸이 없고 소문은 멀리 가고 비 오는 날, 오른손을 높이높이 볼륨을 올리고 몸을 흔들어요 온몸에 풍선 달고 가라앉는 배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요 아아 목 놓아 노래 불러요 꿈틀꿈틀 드디어 다른 몸이 되려나 봐요 괴로움은 역사가 짧아 우리 엄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춤으로 노래로 하늘로 하늘로

아동청소년문학 2024.11.05
「승강기 옆 나무의자」외 6편

승강기 옆 나무의자 한상순 전철 승강기 옆 쪼루루 나무 의자 네 개 저렇게 얌전한 척 앉아 있지만 난, 다 봤지. 사람들이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불끈 네 다리에 힘을 주는 걸 승강기 문이 열릴 때마다 함께 타려고 엉덩일 들썩이는 걸 한밤중엔 둘씩 짝지어 승강길 타고 오르락내리락 장난치고 놀지도 몰라 저 봐, 얼마나 놀았는지 엉덩이가 밴질밴질 윤이 나잖아. 상상이라는 아이 딱, 몇 초 만에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어. 구름 위를 날기도 하고 바다 위를 저벅저벅 걸을 수도 있지. 물론 110층 빌딩 벽을 맨손으로 오를 수도 있어. 물구나무로 뚜벅뚜벅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해. 늦잠을 잔 날은 휘리릭, 해리포터 빗자루를 타고 날면 되지. 숙제 안 한 날은 비둘기로 잠깐 변신, 숙제 검사가 끝날 때까지 창가에 앉아 꾸룩꾸룩 노래하면 돼. 이 아인 꼬리가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어. 도마뱀 꼬리처럼 뚝뚝 끊어지기도 하지. 하지만 금세 새 꼬리가 생겨나니 걱정 없어. 쉿! 비밀인데 나는 이 아이의 주인이야. 눈물 저금통 새해엔 저금통 하나 마련해야겠어. 눈물을 모으는 저금통. 어쩌다 울게 되면 주먹으로 씩씩 닦지 말고 저금통에 방울방울 모아야겠어. 방울방울 눈물방울 저금통에 담기면 할머니 눈에 인공눈물 대신 눈물방울 톰방톰방 넣어드려야겠어. 자꾸자꾸 태어나 자꾸자꾸 태어나 비 오는 날, 올챙이들이 차 앞유리창 연못에서 꼬물꼬물 자꾸자꾸 태어나 악어 입보다 큰 와이퍼가 입 쩍, 벌리고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자꾸자꾸 태어나 꼬물꼬물 자꾸자꾸 태어나 쓰읍-싹 쓰읍- 싹 와이퍼 괴물이 한입에 꿀떡꿀떡 삼켜버려도 자꾸자꾸 태어나 꼬물꼬물 자꾸자꾸 태어나 석수장이 석수장이 할아버지 망치 한 개, 정 하나로 툭,툭,툭,툭, 돌 껍질 벗기고 강아지를 꺼낸다. 양을 꺼낸다. 낙타를 꺼낸다. 어떤 때는 돌 속에서 부처님도 모시고 나온다. 이럴 땐 석수장이 얼굴도 마냥 부처님 얼굴이다. 공갈빵 소보루빵슈크림빵단팥빵단호박빵소세지빵소금빵 호밀빵소라빵바게트빵흑임자빵밤빵고구마빵완두앙금빵 빵빵빵들이 빵빵하게 이름을 걸고 빵빵하게 앉아 있다. 그 옆에 속없는 공갈빵 엉덩이에 바짝 힘을 주고 더 빵빵하게 버팅기고 있다. 누가 미루나무에게 노랠 시켰나 강가에 서 있는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파르르파르르 떤다 교단 위에 서서 노래 시험 보는 나처럼 파르르파르르 자꾸 떤다 저러다가 노랠 부르면 들으나 마나 나처럼 목소리도 파르르르 떨려 나올 텐데 도대체 누가 미루나무에게 노랠 시켰나

비평 2024.11.05
‘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하혁진 소설로 충분하다 2020년 여름,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설 속 그녀들은 더 이상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때마침 동명의 노래인 Taylor Swift의 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I`m not princess, this ain`t fairy tale. (···…) Now it`s too late for you and your white horse to come around.” 강화길은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에서 스위프트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이렇듯 변화를 경험한 그녀들은 왕자 대신 백마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속도와 방향을 직접 ‘선택’한다. 요컨대 그녀들은 선택이라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행위 주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들은 동화 바깥의 현실을 ‘살아간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 수록된 소설만큼이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작가의 말이다. 강화길은 마지막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작가의 말 297쪽). 이 의미심장한 선언 뒤에 감춰진 진의는 무엇일까. 두 페이지 앞으로 가 보자. “당시 나는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에, 그러니까 나를 향한 일부 비평에 대해 상당한 피로와 염증을 느꼈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글도 있었고, 그간 내가 여성으로서 받아 온 어떤 평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글도 있었다,”(작가의 말 293쪽). 이쯤 되면 ‘소설로 충분하다.’는 비장한 선언 뒤에는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운, 혹은 모른 채 지나쳐서는 안 되는,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평판들이 그녀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나’가 겹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다른 인터뷰도 함께 살펴보자. 실제로 이 소설을 쓸 때 이런저런 비평에 시달릴 때라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어요. 평가를 받는 일에 계속 시달리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비평적 언어와 내가 가진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쓴 소설을 보호하고 싶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지만 쓰는 과정에 깨달은 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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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학교 ‘시 합평반’: 서윤후 작가와의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기형도 시인학교 ‘시 합평반’: 서윤후 작가와의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이형초 ※ 전 에피소드가 궁금한 분은 큐알코드 또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EP2. 문학창작지원사업 링크 : https://url.kr/5xihvs ‘기형도 시인학교’는 (재)광명문화재단이 문학 분야의 인재 양성과 지역 문학의 진흥을 위해 운영한 프로그램이야. 올해(2024년 기준)로 2회를 맞는 ‘기형도 시인학교’는 많은 시민과의 만남을 위해 다양한 계층과 예술 장르, 장소 등을 고려해 9개의 프로그램을 구성했지. 강의는 창작 수준을 고려하여 ‘기초반’, ‘창작반’, ‘합평반’, ‘동시반’으로 개설했어. 또한 기형도 시인의 문학 정신을 알리고자 시민문화플랫폼 공간에서 ‘학교 밖 이야기’, ‘한 뼘 교실’을 진행했으며, 그림으로 느끼는 기형도 시인의 작품 전시회 ‘시:리즈’도 선보였어. 그중, 문장이는 ‘시 합평반’을 신청했어. 총 7회차의 수업으로 구성되었으며 강사진은 이수명 시인, 이소호 시인, 서윤후 시인이야. ▲참가 자격 1. 자신의 시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분 2. 시 창작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싶은 분 3. 시 쓰기를 사랑하며 등단을 희망하는 열의가 있는 분 ▲신청 방법 수강신청서 1부, 본인 창작시 1편, 이메일 제출 지정 양식 다운로드 : 기형도문학관 홈페이지 >교육 및 행사 > 예정 프로그램 이메일 : kihyungdomuseum@naver.com ▲선정 방식 기본기 및 충실성(20), 예술성 및 우수성(50), 기대 가치(30) ▲모집 인원 성인 15명 1~3회차는 강사별로 시 창작 강의를 하였고, 4~6회차는 그룹 합평, 마지막 7회차는 전체 합평 및 마무리 담화를 나누었지. 이수명 시인은 ‘시의 오해와 이해’를 주제로 시 창작 강의를 했어. ‘시에 대한 오해’, ‘시 쓰기에 대한 오해’에 대해 강연하며 이수명 시인만의 시론을 펼쳤지. 이소호 시인은 기형도를 비롯한 기성 시인의 작품을 낭독한 후, 수강생들과 함께 감상을 나눠 보는 시간을 가졌어. 또한 이소호 시인의 초고 작품을 읽고 문장을 지워보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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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책방 속으로 - 천안 지역 독립서점 소개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걸어서 책방 속으로 - 천안 지역 독립서점 소개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제가 주로 생활하고 있는 지역인 천안에는 구도심인 천안역을 중심으로 독립서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천안역에서부터 출발하여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들을 걸어서 구경해 볼 수 있어요. 수도권이나 중심지에 비해 상권이 발달하지도, 유동 인구가 많지도 않지만 오히려 주변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방향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독립서점들이 어떻게 각자의 특색을 살리며 운영 중인지 살펴보고자 직접 천안역에서부터 걸어서 독립서점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책방지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 천안역에서 출발, ‘책방 악어새’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버들로 22, 1층 SNS: 인스타그램 @crocodilebird.book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일전에 인터뷰 원고를 작성한 적이 있던 ‘책방 악어새’입니다. 천안역 1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책방 악어새’는 시와 동화를 주로 다루며, ‘문학인이 운영하는 독립서점’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곳이에요. 책방은 성욱현 작가와 조민주 작가가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욱현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후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으로, 202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책방 운영과 더불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조민주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현재 동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독립출간물 『친애하는 서로에게』를 썼고 성욱현 작가와 함께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방에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책방의 위치입니다. ‘책방 악어새’가 있는 천안역은 천안의 구도심이라서 이제는 상권이 매우 발달하거나 청년들이 자주 찾는 공간은 아니에요. 그런 구도심 중에서도 ‘책방 악어새’는 건물이 꺾이는 골목에 작게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자리에 ‘책방 악어새’가 있는 것처럼 다수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들, 예술가, 사회적 약자 등을 배변하는 캐릭터가 바로 ‘악어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악어새는 몸은 새이고, 머리는 악어인 환상의 동물인데 악어 무리에도 새 무리에도 섞이지 못하는 캐릭터예요. 이런 악어새를 닮은 사람들이 편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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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책 틈 사이: 전주 도서관의 틈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우리에게 필요한 책 틈 사이: 전주 도서관의 틈 문장서포터즈 김주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 그 커다란 에너지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지요. 공간을 기획하고 채우는 모든 요소,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하나에 몰두하고 있다는 감각이 참 즐겁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전주 독서대전에서 가장 좋았던 점도 책과 독서가 매개가 되어 사람들을 같은 정서로 잇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주시는 2018년부터 독서대전을 개최하여 올해로 7회를 맞았는데요, 올해는 ‘가을, 책 틈 사이로’라는 슬로건을 주제로 전주 페스타라는 큰 축제 안에서 열렸습니다. 행사는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고, 저는 11일과 13일, 이틀 동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전주 종합경기장에 방문했습니다. 그중 11일에 참여했던 전주 책 문화 답사의 경험을 꼭 나누고 싶었어요. 저는 행사 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전주 도서관의 틈: 함께 걷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요, 전주 금암동과 서노송동 일대를 함께 걸으며 전주의 책 문화를 탐방하는 코스였어요.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 동안 걸을 생각에 걱정되기도 했지만, 중간에 자유롭게 중단할 수 있다는 안내를 보고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설렘과 기대가 걱정보다 크기도 했고요. 집결지인 전북여성가족재단에 도착하니 해설사님과 인솔 스태프분들이 기다리고 계셨고, 함께 답사를 진행할 참가자분들도 하나둘 도착했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어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봉사자도서관’입니다. 전주시자원봉사센터에 속한 건물이었는데, 예쁘게 정돈된 무지갯빛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화가와 떨어진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넓은 잔디밭이었고, 창가 쪽의 책상과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독서를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이 가진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도서관 내부는 넓고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봉사 관련 도서를 모아 놓은 코너가 기억에 남습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영풍문고 전주터미널점’입니다. 전주에는 대형 서점이 4곳 있는데, 영풍문고가 그중 하나입니다. 고속버스터미널 3층에 위치한 영풍문고를 짧게 훑어보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 거북바위 등 이동 중에 보이는 미래 유산을 쭉 훑으며 계속 걸었습니다. 그리고 ‘전주시립금암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중앙일보의 기부로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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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 현장 방문 및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0회 에 방문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공존으로의 여정’이었어요. 이는 팬데믹과 기후 위기, 그 밖에 다양한 사회적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존이란 단순히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를 통해 내가 변화할 수 있으며, 나 역시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에서 출발해요. 문학과 예술, 자연과 인간,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장이 바로 이번 이었습니다. 20여 곳의 출판사가 참여한 만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도서 판매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기후 위기 등과 관련된 사회학 서적부터 다양성과 포용력을 주제로 한 동화책까지 다양한 도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업사이클링 굿즈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건물 내부에서는 제10회 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컬러링 체험존도 한창이었어요. 이외에도 에서는 다양한 포럼들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10월 12일 서교스퀘어에서 진행된 에 참여해 보았어요. 한국과 캐나다의 작가가 국경을 초월하여 ‘다양성과 포용’을 주제로 협업한 앤솔러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를 출간했으며, 기념행사와 책 판매를 이번 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번 앤솔러지에는 한국 작가 김멜라, 김애란, 윤고은, 정보라와 캐나다 작가 리사 버드-윌슨, 얀 마텔, 조던 스콧, 킴 투이가 참여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들은 에서는 박혜진 평론가가 진행을 맡았으며 김멜라, 윤고은, 조던 스콧, 킴 투이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의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의미와 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장 먼저 「판사님」이라는 단편소설로 엔솔러지에 참여하신 킴 투이 작가의 이야기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킴 투이 작가는 난민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사랑과 포용의 가치를 말씀하셨어요. “퀘백의 난민 캠프에 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는 아시안으로서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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