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231
![2024년 7월호](/attachFiles/board/0031/20240626105533931.png)
시
문장의 시선 더보기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문장웹진_콤마
아르코문학창작X문장웹진 더보기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