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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39

2025년 3월호
2025년 3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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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5.03.01
파 프롬 홈

파 프롬 홈 강지원 데이팅 어플에서 매칭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재이는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주고받는 대화의 간격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게,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적절한 간격을 터득한 것 같았고 민주와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머리 길이나 성향을 묻는 등 소상한 신변잡기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주고받은 일상 사진으로 추측건대 취향도 대강 비슷한 것 같았다. 민주는 취향을 가늠하기에 가장 보편적인 질문으로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각자의 별 다섯 개짜리 영화와 이런저런 퀴어 영화를 나열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아가씨〉와 〈캐롤〉에 대해서는 서로 비슷한 감상이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는 감명 깊었고 언젠가 그런 영화처럼 대단한 인연을 만나길 바란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감과는 다소 동떨어진··· 여느 판타지 영화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재이가 덧붙였다. 그런 건 이제 〈아이언맨〉 시리즈처럼 보는 거죠. 여러모로 호기심이 동하는 사람이었다. 화면 속 인력이 민주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얼마 전, 전 여자 친구인 보영을 만난 참이기도 했다. 헤어지고 한 달 만에 연락을 하더니 이사할 적 챙기지 못한 짐을 가져다주겠다며 대뜸 선언한 것이다. 이제 와서 대체 뭘? 뾰족한 말이 불거졌으나 그것을 부러 꺼내어 겨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버려 달라며 부탁해도 보영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탓에 속수무책이었다. 얼굴 보고 대화도 할 겸. 보영의 연락에 마지못해 응하고서는 근처 역 이름을 말했다. 간만에 본 보영의 얼굴은 어딘가 누추하고도 조촐한 몰골이었다. 두고 왔다던 짐만 챙길 심산이었는데··· 정작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뭔가 헛헛하네. 간소한 세간을 보자마자 보영이 중얼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면 그럴 수도 있지. 곧 눈치를 살피며 수습했다. 기껏해야 다섯 평일 방은 냉전을 치르는 동안 급하게 구한 곳이라는 걸, 함께 살던 집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형편에 맞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전 여자 친구 앞에서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현관 앞에 짐을 둔 보영이 머뭇거렸다. 돌이키기에는 지나치게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거운 찬장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다 냉장고에 처박아 두었던 맥주캔을 대접했다. 1인용 좌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안부와 근황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듬성듬성 이어 갔다. 내밀한 공간은 마음가짐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싸구려 가벽 너머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앞집 커플이 주고받는 욕설 따위가 들렸다. 밤만 되면 불거지는 것들이었다. 씨발! 한 번 더 욕설이 떨어지자, 보영은 놀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앞에 커플이 사는데, 자주 저래. 민주는 별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다. 너는 저게 괜찮아? 보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동

소설 2025.03.01
이름 쓰기

이름 쓰기 문지혁 1 1994년 봄에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배중학교는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로, 작고 아담한 운동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아마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업 중에 갑자기 앞문이 열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지요. 문지혁, 나와. 저를 호명한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머리가 꽤 많이 벗겨진 데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 때문에 〈개구쟁이 스머프〉에 등장하는 ‘가가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었지요. 본업은 음악 교사였습니다. 주무기는 끝을 다듬은 하키채였고요. 당시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과거형과 과거 완료형의 차이를 가르치던 영어 선생님이 말을 멈췄습니다. 졸던 아이들이 눈을 떴습니다.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를 손으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앞문으로 곧장 나가야 할지, 아니면 뒷문으로 돌아 나가야 할지를 두고 아주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업 중인 영어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복도로 나가 뒷문을 닫자 학생주임 선생님도 앞문을 닫고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저는 우리가 교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교무실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교무실에 가는 것을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장 혹은 부반장이었고 전교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심부름을 비롯한 다양한 용건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 드나들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네가 문지혁이구나. 용무를 마치고 나면 몰랐던 선생님도 제 초록색 명찰에 새겨진 하얀 이름을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도감 속에 나오는 동물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처럼요. 이번엔 무슨 일일까? 교실이 있던 3층에서 교무실이 있는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름이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아주 급박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했죠. 이를테면 상을 받는다거나, 학교 대표가 되었다거나, 당장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거나··· 그것이 나쁜 일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으로 겨우 열넷인 소년에게 세계란 그토록 단순하고 안온하며 순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소설 2025.03.01
빛의 한가운데

빛의 한가운데 정이현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안희는 몇 해 전 이토록 모순적인 마음을 미령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은 미령에게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령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진심, 나도. 어깨에 얹힌 타인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안희와 미령은 경쟁하듯 토로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안희의 아들과 미령의 딸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와 상관없이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 아이들이 진급할 때마다 안희와 미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제 몇 년째, 라고 헤아리곤 했다. 10년이 되던 해에 내년엔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겠다고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그럼 발가락으로 세면 된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올해 초, 안희의 집에 놀러 온 미령이 귤을 까려다 말고 갑자기 한쪽 양말을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카운트를 시작하자면서 맨발을 꼼지락댔다. 그녀만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희를 웃겨 준 사람은 없었다. 또 없을 것이다. 언니가 늘 귀엽게 봐 주니까. 미령은 안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안희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령과의 관계에서 안희는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미령이 상대방에게 지금 친구랑 노는 중이라고 말했던 때부터인 것도 같았다. 그런 말들은 연장자가 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쪽에서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린다. 안희가 보기에 미령은 근사한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면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안희는 미령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가 열렸다. 3월 초, 아직 스웨터 아래 히트텍을 벗기 힘든 날씨였다. 안희는 두꺼운 머플러를 동여매고 그 속에 얼굴 절반을 파묻은 채 강당으로 갔다.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으로 이어지는 긴 인사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학생부장이 연사로 나와 학교 폭력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그가 열변을 토했다. 행사가 끝나자 안에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참석자는 전원 여자였다. 그런 곳엔 언제나 엄마들뿐이었다. 교정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느슨한 원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희는 곤혹스러웠다. 동네에서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알게 된 얼굴들도 꽤 눈에 띄었지만, 그들과 자신이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 형성되고 있는 그 원에 쓱 끼어들 만한 숫기도 의지도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

소설 2025.03.01
오토매틱 블루베리

오토매틱 블루베리 구소현 1 치와와를 닮은 거대한 구름이 서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귀에 꽂혀 있던 에어팟을 뺐다. 빠른 비트로 귓가를 울리던 테크노풍의 음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차단됐던 주변 소음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철근 골조와 청록색 유리,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는 뼈대와 같은 구조물을 외부에 노출한 하이테크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그녀는 콘택트렌즈나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백화점 정문 앞은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6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 20분. 택시 앱이 켜져 있어 확인해 보니 택시를 이미 부른 상황이었다. 지한은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크기가 다양한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택시는 6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구글을 켜 도착지로 설정된 장소를 검색했다. ‘다이버’라는 가게였는데, 검색해 보니 마포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최근 주고받은 문자와 메신저 대화창을 훑어보며 ‘다이버’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를 찾았다. 남자 친구였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택시가 그녀 앞에 도착했다. 차가 오래 정차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바로 탑승했다. 그녀는 택시에 타자마자 창문부터 내렸다. 내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15분 뒤였다. 택시 기사는 핸드폰에 사이버 렉카 유튜버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짜 뉴스 영상을 틀어 놓고 운전을 했다. 지한은 에어팟을 다시 끼려다 말고 잠시 바라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뒤졌는데, 일회용 알코올 솜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회용 알코올 솜 포장지를 뜯어 곧장 에어팟과 자신의 귀를 닦기 시작했다. 에어팟에서 더러운 게 묻어 나온다거나,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알코올 솜을 모두 사용했다. 2 지한이 도착한 곳은 벽면이 거대한 수족관처럼 물로 채워져 있어, 마치 수중에서 식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블루베리가 가득 올려진 피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이 가게의 주메뉴라며 남자 친구가 미리 주문해 둔 음식이었다. 하얀 모차렐라 치즈에 콕콕 박혀 있는 보라색 과일을 보자마자 그녀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음에도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지한아. 무슨

소설 2025.02.01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그즈음 유자는 자주 암벽 공원을 찾았다.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다. 넓은 공원 한 곳에 높은 암벽을 세우고, 예쁜 색깔의 조약돌 같은 돌들을 색색이 박아 놓았다. 사람들이 그 돌을 손으로 잡고 발로 짚으며 올라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몇 달 가까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즈음에는 거의 매일 공원을 산책했음에도 암벽은 늘 아무 방해 없이, 아무 매달리는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 고개를 쳐들어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대체로는 그녀뿐이었다.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안전 요원 없이 등반을 금지한다는. 아마도 특정한 날에만 운영을 하는 시설인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을 산책하는 시간은 그 특정한 때의 밖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 특정했을지도. 그녀는 ‘특정’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즈음에는 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험한 말을 많이 듣게 된 탓일 수도 있었고, 그 말들을 그릇 씻듯이 좀 씻어 버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에는 벤치가 있었다. 잔디밭 바깥에 있는 벤치가 아니라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들어가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조경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 후에도 가끔씩 잔디밭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암벽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 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 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가끔씩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암벽 앞을 지나갔다. 개도 사람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암벽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암벽 사진을 찍으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올렸던 사람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는 지나치게 좋은 자리, 혹은 지나치게 나쁜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가 그런 사람이거나. 그렇다고 해서 일어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딱 그곳에 앉았을 때만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소박하고 희미한 저항. 낯간지럽고 귀여운 의지‧‧‧.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 사람이면, 아직도. 유자는 그 벤치에 앉아 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생각하다 보면 타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장기 말도 생각하게 됐다. 그녀는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다. 달리는 말을 본 적은 있었다. 제주 어디 해안에서였는데, 곧 폭풍이라도 몰아칠 듯 어둑한 해변을 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유자는

소설 2025.02.01
쌍두몽(雙頭夢)

쌍두몽(雙頭夢) 구병모 굴속에 두고 온 겨울잠이 나를 엄습한다. 한순간 새의 노랫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그것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지 내 몸속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바람과 모래와 나무 사이에서 닳아 가는 의식이 육(肉)의 허물을 벗겨 낸다. 소리만이 텅 빈 몸속에서 진동한다. 한 마리의 새는 광막한 하늘에서 탈각된 가피(痂皮)일 뿐이다. 정처 없던 사고는 짓이겨져 새의 몸을 살찌우고 그 날개 아래 영원히 유폐된다. 나는 내 존재에 그어진 선명한 취소선 두어 줄을 느낄 수 있다. * 시간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살갗마다 앉은 흉터 아래를 탐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 집담회에 모인다. 이는 기억의 회의라고도 하고, 기억 세미나 혹은 기억의 제의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기억이 열리는 나무 밑에 둘러앉아 나무 열매를 따서 나눠 먹고—그 씨앗은 다시 땅속에 묻는다, 그것이 무엇으로 열리든지, 그대로 흙의 일부가 되더라도—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몸짓을 유지한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이는 체온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축축한 땀이 차오르는 타인의 손바닥을 신경 쓰는 이는 참석이 불가하다.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혹은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쩌면 이미 휘발되어 떠나간 지 오래여서 창궐하는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며 약탈할 몸을 찾는 기억을,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그러므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단순 건망증이 있는 이들, 빈지 워치 시대의 보편적인 디지털 중독자들, 인지증 진단을 받은 이들. 최초의 기억 집담회가 자생적으로 싹텄을 때는 인지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위한 나눔과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약간의 포즈, 실제로 기억 증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암송하고 (틀리거나 일부 구절을 건너뛰어도 좋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 속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누군가는 40년 전 자기가 입었다던 삭기 일보 직전의 배냇저고리를 공개하면서 여밈 부분에 묻은 얼룩의 기원을 상상하여 들려준다. 상상은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좌우로 기우뚱하는 고개들. 기억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변형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상상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웬만큼 도움이 되리라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처음 문턱을 넘을 때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흔히 있는 최면 센터일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마음 다스림을 빌미로 삼은 장삿속. 유쾌한 기억,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왜곡된 기억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번드러운 말로 시선을 끌고 기억전시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림과 소조(塑造)와 글로 기억 구조물이라는 것을 세워다가 춤, 노래, 연주, 꽃 무엇으

소설 2025.02.01
관종들

관종들 김혜진 정해는 남편 영기에게 가져다줄 전복죽을 포장해 오는 길에 그 애를 봤다. 추운 날이었다. 한겨울은 아니지만 제법 겨울이라고 할 만한 공기가 아파트 단지 내의 풍경을 빠르게 바꿔 놓는 중이었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는 여름내 노인들이 점거하다시피 애용하던 팔각 정자에 누군가 두고 간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찌그러진 음료 캔, 지저분한 돗자리, 마른 낙엽 같은 것들과 나란히 놓인 아이의 모습이 이상한 방식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건 날씨에 비해 얇은 아이의 옷차림 탓인지도,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표정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정해의 성격 탓이 컸다. 그녀는 그런 사람을,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해는 아이에게 다가갔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 뭐 하니, 여기서? 아이의 자그마한 코가 빨갰다. 동생 기다려요. 동생이 어디 있는데? 집에요. 집에? 그럼 집에 있지 왜 나와서 기다리니?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녀는 알아보았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단속하듯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아이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어렸다. 그건 그녀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완강하게 입을 다문 아이를 간신히 관리사무소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전복죽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정해는 냄비에 죽을 데우며 (남편 영기는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 아이 생각을 계속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냄비를 태울 뻔했다. 애가 혼자 정자에 있었다고? 이 날씨에? 며칠 전, 대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영기는 숟가락으로 죽을 맥없이 휘젓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평생 설비업자로 일한 그는 재주에 비해 늘 아쉬운 대우를 받았지만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정해는 바로 그 점(소박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둔함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이 그의 삶을 고만고만하게 만들었다고, 더 높이 도약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여겼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뭔가를 수리하고 복구하고 바로잡는 것에서 그가 큰 희열을 느낀다는 걸 알았으니까.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가 그런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맞다. 그에겐 뭐든 고칠 수 있다는 자신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은 그에게선 이제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해는 그가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다만 자신감 하나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정해는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은 저물어 있었다. 정해는 아이가 입고 있던 얇은 바지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 구멍이 숭숭 뚫린 슬리퍼 같은 것들을 떠올렸고 미안함을 느꼈다. 아이를 떠넘기듯 관리사무소에 맡기고 돌아올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뭔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어서였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봐. 누가 와서 애를 데려갔는지. 영기가 재촉했고 정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곧바로 연락하지

소설 2025.02.01
빙점을 만지다

빙점을 만지다 강보라 직선으로 뻗은 도로 양편으로 수확을 막 끝낸 포도밭 풍경이 길게 이어졌다. 열매는 없으나 여전히 무성한 포도나무들이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잎에 묻은 햇살을 털어 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그 아래 연필로 그은 밑줄처럼 도드라진 도로의 색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현기증이 났다. 속도를 높이자, 열린 창틈으로 캘리포니아의 온기가 밴 가을바람이 스몄다. 알맞게 식은 목욕물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지금 이 바람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저 단조로운 풍경에 잠겨 익사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가라앉았던 마음에 가벼운 상승감이 일었다. 같은 풍경이 지루하게 반복되어 졸음에 빠진 운전자들이 자주 사고를 일으킨다는 29번 고속도로에서 그처럼 시적인 문장으로 생각을 간추린 스스로가 뿌듯했다. ‘익사’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있잖아. 나 여기서 사고 낸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으응, 신음한 양미가 잠결에 몸을 뒤치며 웅얼거렸다. “···뭔 마음.” “경치가 너무 단조롭잖아.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멎을 정도로. 이대로 계속 달리면 저 풍경 속에 익사할 것 같지 않아?” “···오빠 취한 거 아니지.” 조수석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양미가 “춥다, 최 기사 창문 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를 향해 돌아누운 양미의 입술 안쪽에 검붉게 말라붙은 와인 얼룩이 보였다. 취해? 내가? 어이없어 내쉰 한숨에 눈앞의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렌터카로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세 곳을 연이어 방문한 오늘, 취해 가는 양미 옆에서 묵묵히 최 기사의 본분을 다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양미의 가르침대로 ‘오로로로’와 ‘퉤’를 반복하며 맥주잔만 한 타구통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양미는 그 많은 시음용 와인을 뱉지도 않고 족족 받아 마셨다. 입술을 조붓하게 오므리고, 입에 머금은 와인을 혀끝으로 ‘오로로로’ 굴리며 그간 부지런히 익힌 지식을 뽐냈다. 2019년에는 작황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2020년산 샤르도네랑 비교하니 미네랄의 질감이 확실히 다르네요. 와인 메이커의 선택이 달라서만은 아니겠고, 역시 수확 직전의 기후의 차이가 가장 크겠죠? 의례적인 미소로 와인을 따라 주던 에듀케이터들이 양미의 남다른 질문에 “굿 퀘스천”, “이그젝틀리” 감탄하며 이전보다 한층 깊이 있는 설명을 이어 갔다. 양미의 열정에 감동해, 시음 프로그램에 없는 귀한 와인을 서비스로 내어준 에듀케이터도 있었다. 뭐 한편으로 신기하기는 했다. 에듀케이터가 와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면 내 혀끝에서도 두엄처럼 비옥한 땅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양미가 정향과 육두구 향이 난다고 하면 정말로 와인에서 정향과 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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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들

악녀들 서은영 1. 악녀 선언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분명 상대를 향한 경고성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 말에 겁을 먹기보다는 ‘두고 보면 네가 어쩔 건데’라는 류의 무시로 응수되는 경우도 흔하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게다. 가만있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그런 발언이 필요한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들 조용히 응수하면 될 일이다. 곧 이 발언은 자신의 분함과 억울함을 행사할 방법을 좀처럼 찾을 길 없는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말이자, 그런 약체의 다짐이다. 그러나 복수는 하고 싶지만 복수의 길은 요원하고, 현실의 나는 힘이 없다. 대신, 고구마를 먹고 목구멍이 꽉 막힌 현실의 나와는 달리 통쾌한 복수혈전을 실현하는 그녀들이 있다. 바로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들이다. 악녀들은 버릇처럼 되뇐다. ‘이번 생엔 기필코 살아남겠다’고.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의 악녀판 버전이다. 달라진 나를 보여 주겠다는 결기이자 나의 독기를 끌어올리는 주문으로 들린다. 2010년대 이후 여성들은 웹콘텐츠 소비에서 굳이 악녀들을 소환했다. 일종의 ‘악녀-되기’의 선언이다. 될 게 없어 악녀가 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다. 악녀가 되지 않으면 사회적 죽음, 혹은 실존적 죽음이 도사리는 비정한 세계를 경험했기에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악녀 선언은 로맨스 판타지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일상툰인 〈퀴퀴한 일기〉에서는 “니가 애매한 나쁜 년이라 마음이 무거운 것이야. 더 나쁜 년이 되도록 하여라”고 조언하고, 〈쌍년의 미학〉에서는 말 그대로 ‘쌍년-되기’를 충고한다. 일련의 악녀 선언이 페미니즘이 재발화된 2015년 이후 본격화했다는 점은 여성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정립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 목소리들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현현된 것이 바로 악녀이자 #악녀물이다. 악남(惡男)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악녀 선언은 흥미롭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레제프나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의 아버지, 〈재혼황후〉의 하인리를 우리는 악남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폭군이자 패륜아 같은 이들은 악인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악남이라 호명하지 않는다. 그들을 명명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역대급 영지설계사〉의 김수호가 빙의한 인물 ‘로이드 프론테라’도 악남이 아니라 ‘개망나니’일 뿐이다. 악남은 없다. 악녀만 있을 뿐이다. 악녀란 일찍이 남성들을 위협하는 여성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상한 것임을 안다. 악녀의 대척점에 겨우 개망나니가 존재하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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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안지영 1. 그날 광화문에서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너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사관이 여기 있었네”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고 너는 그것이 팔레스타인 대사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옆에서 너의 말을 들은 친구는 말했다. “아 여기, 그 우크라이나 대사관이야. 그, 전쟁 난 곳 있잖아.” 너는 “아” 하고 잠시 멈칫하다 말 잇기를 그만두었다. 사실을 정정하는 너의 말이 친구를 비난하는 투로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쌓여 왔던 너의 분노를 잘못된 대상을 향해 터뜨릴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비극의 무게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1)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집단 학살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느린 죽음(slow death).2) 트위터에 팔레스타인 관련 소식을 팔로잉하며 너는 거의 매일 폭격받는, 울면서 호소하는, 폭탄에 맞아 피 흘리는, 기아로 온몸에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신생아에 가까운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하얀 천에 쌓인 시신들. 학교, 병원, 재활센터를 공격하며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도 제지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의 절망.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경악하다가 어느 때는 담담하게 스크롤을 올리다 어느 순간에 울음이 터져서 창을 닫고. 그러다 다시 켜서 그걸 다시 보고 기도했지만 결국 깊은 무력감에 빠졌었다. 어쩌면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상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바닥, 절대 악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의 막막함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고 난 이후 다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너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이다. 아니, 너는 그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너는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학하듯이 그것들을 보며 끊임없이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팔레스타인 문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 계엄이 선포된 이후,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영상을 보았다. 헤드폰을 끼고 바닥에 누워 네, 다섯 번을 반복해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죽은 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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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딜레마

비평의 딜레마 ― 이론과 문학, 삶의 거리 최진석 1. 이론에 대한 저항 문학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나 스스로도 매번 고민하고 학생들과도 자주 토론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론의 효용에 관한 물음이다. 이를테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신비평, 맑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등, 문학비평 개론서나 문학 이론 입문서를 펼쳐 보자마자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의 홍수에 당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더구나 읽기도 어려운 외국 이론가들의 이름이나 전문용어, 특수한 개념 등은 몇 글자 읽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얼른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설마 이 많고도 복잡한 이론을 다 섭렵해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일까? 다른 한편, 저 무겁고도 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칼에 매혹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멋져 보이는 용어나 개념은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듯싶고, 단순한 감상을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니까. 실제로 어느 정도 길이 들고 나면, 마치 샐러드 먹을 때와 고기를 썰 때 사용하는 칼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떤 작품에는 이런 이론이 맞고 어떤 작품에는 저런 이론이 적절하다는 판단도 제법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문학비평에서 이론의 효용과 용법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이론이라는 도구가 손에 맞는 독서의 무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비평에서 이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문학 독서의 오랜 금언은 역시나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있고, 작품 자체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이나 통찰에 있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충실한 보조가 되어야 할 이론이 어쩌면 독서 자체를 집어삼키거나, 난해한 곡예에 올려놓는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그래서 어딘가에서는 이론을 멀리하고 작품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곧잘 듣지만, 그것이 문학 독서와 비평, 연구에 다가서려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론이라는 무기를 어디까지 신뢰하고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문학비평과 연구에서 이론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론은 꼭 필요할까? 아마도 비평과 연구라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같은 의문은 종내 풀릴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다시 돌아보는 것은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비평과 이론의 딜레마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설득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2.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의 역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1896~1982)은 청년 시절인 1910년경 ‘모스크바 언어학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젊은 시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같은 시기에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어연구회(OPOYAZ)’가 결성되었으며, 두 학술 모임은 후일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학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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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밖에서 삶

○○지역 밖에서 삶 김준현 * 최근 내가 살고 있는 읍내에 있는 지역특산물 홍보관에 대해 한 지역신문의 기사를 접했다. 2022년 12월 준공된 이 홍보관을 두고 “24억 원짜리” “공중화장실로 전락”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 기사의 제목은 다소 자극적일지언정, 내가 보고 겪은 그 건물에 대한 감상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이 홍보관은 완공이 된 이후에도 2년이 넘도록 개관을 하지 못했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홍보관 전망대가 바로 맞은편 아파트의 사생활을 침해할 뿐 아니라 건물의 붉은색이 반사되어 민원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2025년 1월 초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홍보관 건물은 여전히 주민들에게 별다른 효용이 없는 채로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저출산의 현실에서도 이 읍에는 꽤 많은 영유아들이 보인다. 주거 지구치고는 아파트 가격대가 인근 광역시의 학군이 발달해 있는 도심에 비하면 낮게 형성된 편이라 신혼부부 인구와 미취학 아동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도서관이 없다. 시(市)의 경계를 넘어 인근 광역시의 구립 도서관으로 가거나,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이십 분 정도는 가야 시립 도서관에 갈 수 있다. 몇 년간 무용지물이었던 저 홍보관이 지역특산물을 홍보하는 데 쓰이기보다는 도서관으로 쓰였을 때 이 지역에 더 많은 미래를, 어린이들의 삶에 조금 더 나은 뭔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나이브한 생각이 된다. 행정이 있고 적법한 절차가 있고 최초의 목적이 있어서 준공되었을 저 건물을, 한 개인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최근 일련의 정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시민이 시민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순진한 것임을 보여주는 현실. 이해 바깥의 것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현실. 단적이고 지엽적인 사례 하나를 가져오긴 했으나, 지방의 현실이 고답적인 구조나 형식의 쇄신을 도모하는 것-변화나 혁신을 꿈꾸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편리한 세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구가 줄어드는 소규모의 도시는 청년들의 정착을 위해 지원 사업을 펼친다. 재미있는 것은 일부 지원 사업의 대상이 애초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해 왔던 청년들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유입되는 청년들인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자체는 예술가 레지던스나 청년 창업 자금의 지원 등으로 손실되는 청년 인구를 외부로부터 충당하고 보완하려고 한다. 사람이 아니라 인적 자원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적 자원으로서만 유의미한 사람들이 과연 소속감을 느끼며 지방에 계속 머물지는 미지수다. “저런 놈팡이 같은 놈들이 나랏돈을 다 빼먹는다니까.” “멀끔하게들 생겼는데 어딜 봐서 놈팡이고.” “예술가라잖아. 맨날 놀고먹으면서 예술가랍시고 나랏돈 타 먹는 거다. 먼저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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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김지윤 1. 치유라는 폭력 “모두가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 거야 당신이 아프면··· 만일 당신이 낫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병에 걸린 것만 아니라면.” 다니엘라 올셰프스카의 시 「thirteenz」의 한 구절이다. 타인의 병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은 “빠른 쾌유를 빕니다”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은 가능한 한 빨리 치유되어야 하는 것,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병은 이상 징후이며,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상성과 수치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하지만 나을 수 없거나, 낫는 데 매우 오래 걸리는 경우라면 어떨까? 아픈 것이, 불완전한 것이 그냥 삶의 일부라면? 『눈부시게 불완전한』에서 장애 및 트랜스 활동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치유’라는 말에 숨어 있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 도전한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눈부신 불완전함’도 충분히 가능하다. 불완전한 상태나 질병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 누군가의 삶이라면 ‘치유’에 대한 기대를 들이미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난치병이나 낫지 않는 병은 ‘치유’를 전제하는 기존의 ‘정상성’ 서사를 거부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한계 앞에서, 완전성과 진보를 추구하는 사회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극복이라뇨, 받아들인 거죠.” 최은미 소설 『마주』에서 비활동성 결핵 판정을 받고 코로나 상황에 결핵 치료를 받는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극복이 아니라 수용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질병이 낫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은 삶을 선형적 발전 과정이 아니라 고통과 불완전성을 동반하는 상태로 바라보게 하며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최근 ‘치유’ 서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질병을 인식하기보다는 상처와 고통 자체를 존중하는 접근법이 강조되고 있다.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존재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계기로 인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질병은 생존뿐 아니라 공감과 공존의 문제와 연결되며 인간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편견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다. 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구조,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므로 사실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성찰은 새로운 윤리적 책임과 공감의 계기를 제공하며 질병에 부과되곤 하는 낙인과 배제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김은정의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 2022)은 한국의 역사, 정책, 제도, 문화 텍스트 등이 장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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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국가의 가장자리에서

문화와 국가의 가장자리에서 ―검열과 복종, 혹은 비평의 장소 최진석 1. 표류하는 현재, 폭력의 가시 2025년 1월 19일 현재, 한국 사회는 격랑 위를 떠다니고 있다. ‘선진국’이자 ‘문화국가’라는 호명을 받아들인 지 수년 만에 벌어진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계엄과 탄핵, 그에 대한 헌법적 판단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은 그 누구도 미래를 예단하기 힘든 불확정의 시간만이 흐르는 중이다. ‘현재’라는 좌표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에 놓일지 짐작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문학과 문화, 비평에 관한 이야기는 짐짓 사치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이든, 지금-여기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파도의 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예측할 수 없어도, 최소한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는 스스로에게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도착에 대한 기대나 불만, 감동이나 좌절, 혹은 두렵지만 새로운 출발도 가능할 테니까. 지금의 사태와 문학장(場)을 연관 지어 말한다면, 아무래도 2023년 6월 14일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문학과 출판 시장의 현황을 널리 알리는 국제적 행사의 홍보대사로 소설가 오정희가 위촉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와 블랙리스트이후(준)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개막일 행사장에서는 송경동 시인 등이 반대 의사를 밝히다가 강제로 끌려 나갔던 사건이 그것이다.1) 알다시피 오정희 소설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깊이 연루된 문인이었고, 그에 대한 분명한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금 한국문학과 출판을 대표하는 행사의 얼굴을 맡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2) 블랙리스트, 즉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의 불길한 기운이 다시 한국문학을 뒤덮으리라는 불안과 공포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돌아보면 최근 2년 사이에 문화예술 창작에 가해진 검열은 수없이 많다. 2022년 5월 13일 광주광역시의 ‘호명(呼名) 5‧18거리미술전’에서 보조금 지원사업의 취지를 빌미로 후원이 취소된 것이라든지, 같은 해 9월 26일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이 기획한 행사에서 가수 이랑의 노래가 배제된 것, 그로부터 며칠 후인 10월 4일 한국만화진흥원이 주최한 ‘전국 학생 만화공모전’에서 〈윤석열차〉의 의도를 문제 삼아 엄중 경고가 내려진 것 등이 그 출발점이다. 2023년에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비판하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취소되거나 지원 배제당했고, 2024년에는 도서관에 비치된 성평등·성교육·페미니즘 도서 2,528권 폐기되었으며, 영화진흥위원회의 차세대 미래 관객 육성 사업에서는 정치적 이념 문제가 조건으로 내걸리기도 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도, 최근의 시점까지 검열이 작동했음을 확인하기에 모자라지 않다. 하지만 곧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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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문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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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5.03.01
신년 기획좌담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차별 구성 -1차: 책장 업고 튀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일 시: 2024년 12월 7일(토) 17:30~19:30 ㅇ 장 소: 온라인 zoom ㅇ 참여자 -사회자: 김준현(소설가, 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참여자: 이지용(단국대학교 HUSS사업단 연구교수), 이명현(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염승숙(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어진(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웹문예학과 객원교수, 웹소설 작가 레고 밟았어) 〈개회〉 김준현: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은 국립목포대학교 김준현입니다. 먼저 이번 좌담의 기획 의도를 다시 짚어 보는 것을 통해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래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는 제도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다양한 ‘콘텐츠’, ‘웹’, ‘크리에이티브’ 관련 전공들이 두 학과 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문학 산실’인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는 점점 다른 교육 체계로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시대, 교육 현장에서 교강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한 체제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획 의도는 이러하고, 이러한 의도를 참가자 선생님들과 공유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맥락에서 제 소개를 드리면, 올해 4월부터 국립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 전 직장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웹문예창작학과였고요. 이 기획 의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야말로 학과의 이름에 ‘웹’이 들어가는 학과였습니다. 제가 올해 4월부터 일하게 된 국립목포대학교도 아마 국립대 최초로 문예창작에 웹소설, 웹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문예창작학과 학과장으로 3년 정도 있었고요.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이지만, 웹소설 특화를 표방한 학과에서 두 학기 정도 일한 셈입니다. 4년 정도를 소위 말해 ‘전통적인 문예 창작 교육’이 아닌 새로운 문예 창작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웹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데뷔는 2012년에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됐고, 패널로 초대받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드립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화면에 떠 있는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화면이 다를 텐데, 제 화면으로 보기에 제일 위에 떠 계신 분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명현 선생님이십니다. 이명현 선생님 자기소개를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명현: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과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는 이명현입니다.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2016년부터 근무했고,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고전문학

기획 2025.02.01
신년 기획좌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신년 기획좌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2025년 1월호부터 3월호 사이에 총 3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입니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책장 업고 튀어 - 2차 :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 3차 :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 《문장웹진》 2025년 신년 기획좌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ㅇ 일 시 : 2024년 11월 29일(금) 11:00~12:30 ㅇ 장 소 : 예술가의집 라운지룸(서울 종로구 동숭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ㅇ 참여자 - 사회자 :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 참여자 : 강백수(시인), 구현우(시인), 성현아(문학평론가), 송지현(소설가) 〈개회〉 이병철: 반갑습니다. 질문이 좀 추상적인데, 개떡같이 여쭤도 찰떡같이 대답해 주시는 분들이어서 큰 걱정은 안 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좌담 테마를 ‘연재 작가의 기쁨과 애환’이라고 지어 보았는데요. 작가들 중 연재하는 분이 굉장히 많은데, 연재를 한 번도 안 해 본 분도 많더라고요. 어떻게 해서 연재라는 시장에 진입 가능한가, 연재라는 글쓰기가 창작과의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분들이 꽤 많을 것 같거든요. 아무래도 문학적 글쓰기와 연재 지면을 염두에 둔 글쓰기가 결이 다르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기획해 보았습니다. 다들 연재를 해 보셨거나, 지금 하고 계신 분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소개, 그리고 현재 혹은 지금까지 어떤 연재를 해 왔고, 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지현: 저는 소설 쓰는 송지현이고요. 지금까지 《한국일보》에 매달 책 리뷰를 쓰고 있어요. 이번 주도 한 달이 돌아와서 써야 하는 주입니다. 강백수: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강백수입니다. 연재는 몇 번 해 보았는데요. 지금 현재는 《경북매일》이라는 매체에 사회와 문화에 대해 이병철 시인과 함께 연재하고 있습니다. 격주로 쓰고 있고요. 이전에는 《한겨레21》에 음식과 관련한 글을 연재한 적 있고요. 《웨딩뉴스》라는 매체에서 연애 관련 연재를 한 적도 있습니다. 성현아: 안녕하세요. 저는 평론 쓰는 성현아입니다. 저는 《경향신문》에서 매달 이라는 연재를 하고 있고요. 이전에는 《조선일보》에서 코너에 짧게 연재했었습니다. 구현우: 저는 시 쓰는 구현우라고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연재라고 할 만한 것은 《아이스크림에듀》라는 곳에서 청소년의 글쓰기를 도와주는 칼럼을 격주로 연재했던 것인데요. 그게 4~5년 전 일이라 조금 오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병철: 저는 《경북매일》에서 2015년부터 칼럼을 써 왔는데요. 2년간 매주 썼었고, 《경향신문》에서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 적이 있고요. 《조선일보》에 세계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경북매일》에서 강백수 시인과 격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또《머니투데이》에 월 1회 칼럼을 쓰고 있고, 《매일경제》에 이번 하

기획 2025.01.06
행복한 문학여행을 떠나요 - 노벨문학상과 한강 그리고 ‘문장의소리’

행복한 문학여행을 떠나요 - 노벨문학상과 한강 그리고 ‘문장의소리’ 최창근 지난해 12월 10일 광주광역시청에서 열렸던 ‘2024 광주에서 온 편지’ 행사에 다녀왔다. 한국 시간으로 그날 자정 스웨덴에서 시작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생중계로 보면서 광주시민들이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자리였다. 작가가 부른 노래도 흘러나왔고 작가의 작품으로 만든 시극도 공연되었다. 작품과 연계된 문학 강연도 풍성하게 열려서 시국은 비록 어수선했지만 그 와중에도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축제였다. 운명의 날이었던 10월 10일 작가의 수상 소식을 처음 접한 건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안무가가 연출한 춤 공연을 보러 청주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작가의 여고 동창이기도 한 극작가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강 노벨상!!”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고 정말 믿기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현실감각이 돌아오자 마치 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너무나 기뻤고 마음이 참 뿌듯했다. 작년 가을은 그 일로 내내 가슴이 설렜다.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예이기도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세계문학의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문학 전체가 상을 받은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실감이 안 나는 건 매한가지다. 작가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후 지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한강 작가가 가장 가까울 거라는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그 시기는 먼 훗날의 일이었고 이렇게 일찍 갑자기 받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작가와는 작은 인연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5년 5월 한국문화예술위원에서 그 당시에도 요즘과 마찬가지로 얘기되던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헤쳐 나가려는 방안의 하나로 사이버공간에 문학 종합 포털사이트인 ‘문장’을 창안했다. 문장 안에는 다양한 콘텐츠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터넷 문학라디오였고 나는 훗날 ‘문장의소리-행복한 문학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문학라디오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작가를 겸한 피디였다. 한강 작가는 ‘문장의소리’ 첫 방송의 초대 손님이었고 그 후로 진행까지 맡아 2005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9개월을 서울 합정동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게 됐다. 한 작가가 진행을 맡았을 때 프로그램 기획이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을 돌아가며 소개하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포함해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낭독해서 들려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한강 작가와 떠나는 세계문학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 협업해서 이미 노벨 문학 방송을 제작했던 건 아닐까. 그로부터 20년 후에 그 문학 방송의 진행자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천지의 기운이 도운 하늘의 뜻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획 2025.01.01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2025년 1월호부터 3월호 사이에 총 3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입니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책장 업고 튀어 - 2차 :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 3차 :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 《문장웹진》 2025년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ㅇ 일 시 : 2024년 11월 28일(목) 13:00~14:30 ㅇ 장 소 : 예술가의집 라운지룸(서울 종로구 동숭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ㅇ 참여자 - 사회자 : 이소(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참여자 : 곽선희(‘위즈덤하우스’ 편집자), 김은혜(문학웹진 ‘림’ 편집자), 이유리(소설가), 한영원(시인) 〈개회〉 이소: 반갑습니다. 저는 평론을 쓰는 이소입니다. 《문학과사회》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어요. 다들 어떤 책을 만드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유리: 저는 소설 쓰는 이유리입니다. 최근에 『비눗방울 퐁』이라는 소설집이 나왔습니다. 곽선희: 저는 ‘위즈덤하우스’ 출판사에서 ‘위픽’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곽선희 편집자라고 합니다. ‘위픽’ 시리즈는 단편소설 한 편이 책 한 권으로 만들어지는 기획이어서 오늘 종이책의 무게라든가 부피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고요. 오늘 자리에서는 좌담에 앞서 문구 덕후이자 전자책 편애자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영원: 저는 시 쓰는 한영원입니다. 『코다크롬』이라고 하는 시집을 썼습니다. 김은혜: 안녕하세요. 저는 열림원 문학웹진 ‘림’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김은혜입니다. 어제 마감이 끝났습니다. 조만간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이 나올 예정이고, 전시를 기획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소: 어떤 전시를 하시나요? 김은혜: 문학상 시상식과 전시를 접목시키는 기획을 하고 있는데요. 전시 기획은 처음이라 조금 떨리기도 합니다. 이소: 제가 미리 질문지를 드리긴 했는데, 꼭 해당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첫 질문은 ‘책과 공간’에 관한 것입니다. 책이라는 것이 부피가 크기도 하고 공간과 큰 연관이 있잖아요. 카페 같은 곳에서는 예쁜 책이나 시집을 인테리어 용도로 쓰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에게는 일과 관련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부피가 크다 보니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책을 모으시는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전부 다를 것 같아 궁금합니다. ‘집에 책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집에서 취향의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큼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기획 2024.12.01
자전거 도둑

[에세이] 자전거 도둑 장은진 나에게는 15년 된 자전거가 있다. 생김새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용 삼천리 자전거다. 분홍색 프레임에 분홍색 안장과 스테인리스 바구니가 달린, 작고 낮은 자전거. 본래는 엄마 거였는데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자전거 타는 게 자신 없다며 나에게 물려주었다. 그렇게 그것은 가족 공용이 아닌 내 개인 소유의 자전거가 되었다. 자전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배웠다. 그러나 내게는 배우기 과정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장면들을 찾아볼 수 없다. 보호 장비를 착용한 아이의 자전거가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모가 뒤에서 잡아 준다거나 흔들흔들 비틀대다 서너 번 정도 넘어지며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해 가는 모습들. 애초부터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부모를 가진 아이는 혼자서 자라고 혼자서 배우는 일에 익숙하다. 익숙하기에 그런 아이는 혼자 뭔가를 이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혼자 하게 내버려둔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걸 눈치로 알고 몸으로 단단히 익혀서다. 일테면 그것은 겨를 없는 부모의 아이라면 일찍부터 습득하게 되는 자립성이다. 눈치 있는 단단한 몸을 가졌기에 초등학생의 나는 자전거를 단번에 배웠다. 보호 장비도 없이. 뒤에서 잡아 주는 부모도 없이. 넘어지는 시행착오나 하나의 상처도 없이. 그것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패를 모르던, 완전무결한 성공이었다. 너무 식은 죽 먹기라 인생도 자전거 타기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시할 만큼 쉽게 이룬 건 인생을 통틀어 그때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전거를 탈 때의 기분은 절대 시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성공했을 때는 물론이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시시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지상에서 두 뼘쯤 떠올라 있는 몸과 발이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하늘을 난다고 생각했다. 새가 된다면 꼭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는 새가 아니므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새가 되는 기분이 시시해질 리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타도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전거가 시시할 수 없는 이유는 자가용 없는 나에게 특히 소중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름이나 전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몸의 에너지로 움직여서 환경에도 무해한 이동 수단. 차를 타기에는 가깝고 걷기에는 먼 거리일 때 자전거의 위력은 더 대단해진다. 애매한 거리에서 자전거는 나의 빠른 발이 되고, 애매한 거리인데 그것이 없으면 눈앞을 막막하게 해 필수품이 된다. 자전거는 부지런한 이동 수단이라서 그것을 애용하는 사람은 매사에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려면 멈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므로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내 주변만 봐도 게으르고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자전거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콜택시를 부른다. 추우니까, 더우니까, 비가 내리니까, 짐이 무거우니까란 핑계로. 게으른 사람에게 자전거는 쓸모와 필요가 약한 물건이라서 대개

기획 2024.12.01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에세이]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이주라 역사 없는 사극 언젠가부터 사극과 시대극에서 역사가 사라진 지 오래다. 2000년대 초반 팩션(faction)의 열풍을 시작으로 역사적 자료는 상상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현대적 상상력을 덧입힌 트렌디한 드라마로 재탄생하였다. 영화 나 드라마 은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 줄짜리 기록에서 시작하였다. 역사적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극은 더 이상 역사적 고증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이 잘 되었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기준은 의미 없다. 역사극 자체가 역사적 허구이고, 이미 허구적 상상의 세계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가 있다고 해서 역사적 왜곡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중 수용자는 역사적 허구를 허구로 인지하고 있으며, 허구적 재현 속에서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 논쟁을 통해 문제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정보 검색을 통해 역사적 왜곡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판단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극을 볼 때 너무 고지식하게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했냐 아니냐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즘에 역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다른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팩션의 시대 이후로 최근 역사극 드라마들이 대부분 ‘한복 입은 로맨스’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음에 찜찜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잡아낼 수 없어서 아예 역사극을 보지 않는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재밌자고 보는 드라마 아닌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휴식의 시간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일 년 전쯤 방영한 ‘한복 입은 로맨스’를 보게 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이 자신만의 옷을 몰래 만들어 팔다가 타임슬립을 하여 21세기 한국에 오게 되고 거기에서도 한복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조선 시대 자신에게 닥쳤던 곤경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여주인공은 조선 시대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는데, 현대 한국으로 타임슬립해 보니 조선 시대의 인간관계가 똑같이 반복되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여주인공은 이 살인 사건에 숨겨진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다.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문제는 조선 시대로 돌아간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범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다. 이 범인은 덩치 큰 남자 하인으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온 여주인공 집 노비들도 이미 물리치고

기획 2024.12.01
하루와의 대화

[에세이] 하루와의 대화 양안다 #1 안다 : ‘××× ××××’라는 가제로 시집을 준비 중이야. 현시대와 ××××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접근했어. 마무리가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아마 몇 편을 새로 써서 교체할지도 몰라. 하루 : 혹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나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시 한 편을 살짝 보여줄 수 있어? 안다 : 가장 애착이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쓴 시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야. 뉴욕 헤럴드 트리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는 걸까. 아무도 우릴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레아, 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쳐다보지도, 손 흔들지도 않았잖아요. 나는 떠나기 싫어‧‧‧‧‧‧. 내가 마음이 변했다고 한 적 있나요. 그저 새 장갑을 사러 가겠다고 했을 뿐이에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가도 괜찮겠어요? 나는 광장을 걷다가도 꽃다발을 구매했다.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가득했고 온 도시가 불안으로 떠들썩했다. 레아는 어디 있는 거지? 이렇게 중요한 때에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날이 추우면 장갑을 끼면 되지만 폭염이 쏟아지니 손 가죽을 벗길 수 없더구나. 어젯밤의 꿈 얘기를 할 때에는 귀신들이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단다. 레아가 몸을 숨기고 있는 호텔에서. 복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항상 이런 식이다. 세상에는 문이 너무 많고 열쇠‧‧‧‧‧‧ 그것은 이빨이 너무 많다. “나도 노력했는데 바뀌지 않았다고요. 증오는 우리를 먹고살게 해 줄 수 있어요. 사랑, 사랑, 사랑, 이젠 다 지겹다고요! 위선자들!” 사건은 지난달 블랙 먼데이에 발생했다. 나무보다 더 많은 불이 숲에 있었다. 나무보다 더 많은 연기가 숲에 있었다. 숲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레아, 그날부터 너는 호텔에 오지 않았다. 삶이 끝난 뒤에 혁명이 성공하면 무슨 소용이야? 복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보고 싶나요? ‧‧‧‧‧‧손톱만큼. 듣고 싶나요? ‧‧‧‧‧‧샹송 조금. 중간에 자주 서지만 내일 오전이면 도착할 겁니다. 열차에서 내린 곳은 도시 외곽의 들판이었다. 폭염이 쏟아지는 어느 여름. 하염없이 걷다가 길을 잃을 뻔했지. 나는 머리끈으로 들꽃을 묶어 너에게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눈치채기를 바라면서. 이곳은 수질이 좋지 않나 봐요. 손등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요. 빈혈기가 도지고 신물이 올라오는데도 레아, 나는 너와 함께 끝없는 들판을 걸었다. 땀 맺히는 손등을 벅벅 소리 나도록 긁어대며. 쏟아지는 코피를 움켜쥐고. 새로 산 장갑인데 다 버려서 어떡해요. 흰 장갑이었던 것이 흰 꽃 사이로 내던져졌다. 레아는 맨손으로 나의 얼굴을 문질렀다. 들꽃으로 피를 닦아 주다가, 붉게 물든 손등을 핥다가, 주근깨가 들썩이도록 웃으며 레아가 말했다. &ldqu

기획 2024.12.01
류영진 - 작가의 창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작가의 창 - 손서은 작가 인터뷰 류영진 2023년 도서관 상주작가사업의 성과로 2024년 9월 24일부터 9월 30일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해외연수를 가게 됐다. 그곳에서 손서은 작가를 만났다. 손서은 작가는 2020, 2021 원주에서 상주작가를 지내고 2024년 9월부터 12월까지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예술네트워크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스웨덴에 가게 된 손서은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스웨덴에 살러 온 손서은입니다.” 유쾌하고 당찬 자기소개였다. 나는 살러 왔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손서은 작가는 말 그대로 3개월의 레지던스 기간 동안 관광객 마인드가 아닌 스톡홀름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말이라 했다. 상주작가 때 문학큐레이터에 실렸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도서관 직원들과 파티를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도서관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으니 도서관 식구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어디를 가든 그곳을 살아가려는 손서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레지던스 생활을 시작한 손서은 작가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강의는 두 번이었다. 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손서은 작가에게 두 번의 강의는 너무도 짧은 것이었다. 손 작가는 스톡홀름대학교의 한국학과 학생들과 짧은 소설 쓰기로 하고 싶어 했다. 일기식으로라도 좋으니 한국말로 글쓰기를 하고 싶고, 그들이 쓴 글을 봐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 친밀하게 만나길 원했다. 상주작가 기간에 ‘뭘 해서 사람들을 도서관으로 데려오지? 뭘 해서 책을 읽게 하지?’ 하는 기획자 마인드로 임했던 손 작가는 레지던지 작가로서도 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강의는 두 번이지만, 더 하고 싶고, 더 많은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글을 쓰며 그 속에 어울리고 싶어 했다. 이에 학교 측도 손 작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 준 것 같다. 레지던스 기간 동안 어떤 계획을 갖고 있냐는 질문에는 ‘계획은 없어요. 계획하지 않지만 공상할 뿐이에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학생들과 글쓰기 하고 싶은데, 글쓰기 하자고 하면 모일까?’ 걱정하던 차에 미래인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 40권을 보내 줬다고 한다. 강의 시작 전 책이 도착했고, 함께 한국어책 읽어 보자고 하니 학생들이 모였다고 한다. 덕분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자신의 책을 읽으며, 공상만 하던 글쓰기 단계로 갈 수 있었고. 나아가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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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학교 ‘시 합평반’: 서윤후 작가와의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기형도 시인학교 ‘시 합평반’: 서윤후 작가와의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이형초 ※ 전 에피소드가 궁금한 분은 큐알코드 또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EP2. 문학창작지원사업 링크 : https://url.kr/5xihvs ‘기형도 시인학교’는 (재)광명문화재단이 문학 분야의 인재 양성과 지역 문학의 진흥을 위해 운영한 프로그램이야. 올해(2024년 기준)로 2회를 맞는 ‘기형도 시인학교’는 많은 시민과의 만남을 위해 다양한 계층과 예술 장르, 장소 등을 고려해 9개의 프로그램을 구성했지. 강의는 창작 수준을 고려하여 ‘기초반’, ‘창작반’, ‘합평반’, ‘동시반’으로 개설했어. 또한 기형도 시인의 문학 정신을 알리고자 시민문화플랫폼 공간에서 ‘학교 밖 이야기’, ‘한 뼘 교실’을 진행했으며, 그림으로 느끼는 기형도 시인의 작품 전시회 ‘시:리즈’도 선보였어. 그중, 문장이는 ‘시 합평반’을 신청했어. 총 7회차의 수업으로 구성되었으며 강사진은 이수명 시인, 이소호 시인, 서윤후 시인이야. ▲참가 자격 1. 자신의 시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분 2. 시 창작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싶은 분 3. 시 쓰기를 사랑하며 등단을 희망하는 열의가 있는 분 ▲신청 방법 수강신청서 1부, 본인 창작시 1편, 이메일 제출 지정 양식 다운로드 : 기형도문학관 홈페이지 >교육 및 행사 > 예정 프로그램 이메일 : kihyungdomuseum@naver.com ▲선정 방식 기본기 및 충실성(20), 예술성 및 우수성(50), 기대 가치(30) ▲모집 인원 성인 15명 1~3회차는 강사별로 시 창작 강의를 하였고, 4~6회차는 그룹 합평, 마지막 7회차는 전체 합평 및 마무리 담화를 나누었지. 이수명 시인은 ‘시의 오해와 이해’를 주제로 시 창작 강의를 했어. ‘시에 대한 오해’, ‘시 쓰기에 대한 오해’에 대해 강연하며 이수명 시인만의 시론을 펼쳤지. 이소호 시인은 기형도를 비롯한 기성 시인의 작품을 낭독한 후, 수강생들과 함께 감상을 나눠 보는 시간을 가졌어. 또한 이소호 시인의 초고 작품을 읽고 문장을 지워보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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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책방 속으로 - 천안 지역 독립서점 소개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걸어서 책방 속으로 - 천안 지역 독립서점 소개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제가 주로 생활하고 있는 지역인 천안에는 구도심인 천안역을 중심으로 독립서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천안역에서부터 출발하여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들을 걸어서 구경해 볼 수 있어요. 수도권이나 중심지에 비해 상권이 발달하지도, 유동 인구가 많지도 않지만 오히려 주변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방향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독립서점들이 어떻게 각자의 특색을 살리며 운영 중인지 살펴보고자 직접 천안역에서부터 걸어서 독립서점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책방지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 천안역에서 출발, ‘책방 악어새’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버들로 22, 1층 SNS: 인스타그램 @crocodilebird.book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일전에 인터뷰 원고를 작성한 적이 있던 ‘책방 악어새’입니다. 천안역 1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책방 악어새’는 시와 동화를 주로 다루며, ‘문학인이 운영하는 독립서점’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곳이에요. 책방은 성욱현 작가와 조민주 작가가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욱현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후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으로, 202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책방 운영과 더불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조민주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현재 동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독립출간물 『친애하는 서로에게』를 썼고 성욱현 작가와 함께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방에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책방의 위치입니다. ‘책방 악어새’가 있는 천안역은 천안의 구도심이라서 이제는 상권이 매우 발달하거나 청년들이 자주 찾는 공간은 아니에요. 그런 구도심 중에서도 ‘책방 악어새’는 건물이 꺾이는 골목에 작게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자리에 ‘책방 악어새’가 있는 것처럼 다수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들, 예술가, 사회적 약자 등을 배변하는 캐릭터가 바로 ‘악어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악어새는 몸은 새이고, 머리는 악어인 환상의 동물인데 악어 무리에도 새 무리에도 섞이지 못하는 캐릭터예요. 이런 악어새를 닮은 사람들이 편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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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책 틈 사이: 전주 도서관의 틈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우리에게 필요한 책 틈 사이: 전주 도서관의 틈 문장서포터즈 김주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 그 커다란 에너지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지요. 공간을 기획하고 채우는 모든 요소,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하나에 몰두하고 있다는 감각이 참 즐겁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전주 독서대전에서 가장 좋았던 점도 책과 독서가 매개가 되어 사람들을 같은 정서로 잇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주시는 2018년부터 독서대전을 개최하여 올해로 7회를 맞았는데요, 올해는 ‘가을, 책 틈 사이로’라는 슬로건을 주제로 전주 페스타라는 큰 축제 안에서 열렸습니다. 행사는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고, 저는 11일과 13일, 이틀 동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전주 종합경기장에 방문했습니다. 그중 11일에 참여했던 전주 책 문화 답사의 경험을 꼭 나누고 싶었어요. 저는 행사 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전주 도서관의 틈: 함께 걷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요, 전주 금암동과 서노송동 일대를 함께 걸으며 전주의 책 문화를 탐방하는 코스였어요.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 동안 걸을 생각에 걱정되기도 했지만, 중간에 자유롭게 중단할 수 있다는 안내를 보고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설렘과 기대가 걱정보다 크기도 했고요. 집결지인 전북여성가족재단에 도착하니 해설사님과 인솔 스태프분들이 기다리고 계셨고, 함께 답사를 진행할 참가자분들도 하나둘 도착했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어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봉사자도서관’입니다. 전주시자원봉사센터에 속한 건물이었는데, 예쁘게 정돈된 무지갯빛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화가와 떨어진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넓은 잔디밭이었고, 창가 쪽의 책상과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독서를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이 가진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도서관 내부는 넓고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봉사 관련 도서를 모아 놓은 코너가 기억에 남습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영풍문고 전주터미널점’입니다. 전주에는 대형 서점이 4곳 있는데, 영풍문고가 그중 하나입니다. 고속버스터미널 3층에 위치한 영풍문고를 짧게 훑어보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 거북바위 등 이동 중에 보이는 미래 유산을 쭉 훑으며 계속 걸었습니다. 그리고 ‘전주시립금암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중앙일보의 기부로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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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 현장 방문 및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0회 에 방문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공존으로의 여정’이었어요. 이는 팬데믹과 기후 위기, 그 밖에 다양한 사회적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존이란 단순히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를 통해 내가 변화할 수 있으며, 나 역시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에서 출발해요. 문학과 예술, 자연과 인간,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장이 바로 이번 이었습니다. 20여 곳의 출판사가 참여한 만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도서 판매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기후 위기 등과 관련된 사회학 서적부터 다양성과 포용력을 주제로 한 동화책까지 다양한 도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업사이클링 굿즈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건물 내부에서는 제10회 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컬러링 체험존도 한창이었어요. 이외에도 에서는 다양한 포럼들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10월 12일 서교스퀘어에서 진행된 에 참여해 보았어요. 한국과 캐나다의 작가가 국경을 초월하여 ‘다양성과 포용’을 주제로 협업한 앤솔러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를 출간했으며, 기념행사와 책 판매를 이번 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번 앤솔러지에는 한국 작가 김멜라, 김애란, 윤고은, 정보라와 캐나다 작가 리사 버드-윌슨, 얀 마텔, 조던 스콧, 킴 투이가 참여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들은 에서는 박혜진 평론가가 진행을 맡았으며 김멜라, 윤고은, 조던 스콧, 킴 투이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의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의미와 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장 먼저 「판사님」이라는 단편소설로 엔솔러지에 참여하신 킴 투이 작가의 이야기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킴 투이 작가는 난민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사랑과 포용의 가치를 말씀하셨어요. “퀘백의 난민 캠프에 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는 아시안으로서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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