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228
시
문장의 시선 더보기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박인성 ‘시성비’의 시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표현은 다소 정정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지나치게 빠르고 예술은 지나치게 느리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다. 그리고 시성비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은 바로 숏텀-피드백(short-term feedback)이다. 요구에 대하여 빠르게 응답하는 것, 입력(input) 대비 빠른 출력(output)을 도출하는 것. 이러한 경향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과정의 올바름보다는 과정의 빠름, 더 나아가 과정 자체가 생략되고 결과만 도출되는 것이야말로 수용자들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준다. 최근 숏텀-피드백에 대한 선호는 단순히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뛰어넘어서 디지털 시대에 대한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확장되는 중이며, 피드백의 지연을 직접적인 피해나 손해,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의 이득과 손실로 환원하는 소비자 감수성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숏텀-피드백에 대한 효능감은 빨라지는 것에 대한 체감보다 느려지는 것에 대한 역체감으로 두드러진다.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응답이 느리게 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며 손해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소비자 권리로 환원하여 자신이 정당한 권리에 비하여 그 결과를 누리지 못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피해자 정체성이 횡행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존의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왔던 고전적 가치들은 주로 롱텀-피드백에 속한다. 노력, 숙련, 취향, 성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경험적 가치는 점점 더 쇠락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경험을 압축하여 정리한 정보다. 유튜브의 요약정리 영상이 아니면 더 이상 책이나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는 플롯(plot)의 논리는 지나치게 느리고 효율적이지 않다. 롱텀-피드백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결과값에 대해서는 보장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롱텀-피드백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그동안 결과를 위해 쏟아부은 각종 정신적-물질적 투자의 무화(無化)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과정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로의 다양성이나 결과 이외의 성취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롱텀-피드백은 오늘날 너무나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실패를 하려면 빠르게 하는 것이 낫다. 조금 투자해서 빨리 실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숏텀-피드백에 천착하는 시성비 추구 경향은 글로벌한 보편 현상이다. 게다가 ‘빨리 빨리’ 문화를 통해서 원래도 더 빠른 것에 가치를 부여해 온 한국은 그중에서도 최첨단의 시성비 사회라, 더 나아가 ‘속도 전체주의’ 국가라 할 만하다. 한국은 6·25 이후 폐허에서부터 압축적인 경제적 성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듀나의 SF를 ChatGPT와 함께 읽다 노대원 한국 SF 계보에서 듀나라는 나비 효과 2024년은 듀나(DJUNA)가 창작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근본적으로 듀나의 SF 소설들은 1990년대의 PC통신에 기반을 둔 디지털 문학으로 출발했다. ‘기술적으로 포화된 사회의 문학’(로저 록허스트)1)이라는, SF에 관한 한 정의는 듀나의 SF에도 적절하다. PC통신 기술을 가능하게 한 한국 SF 팬덤의 본격화는 활발한 SF 아마추어 창작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듀나는 자신의 초기작을 “90년대 통신망 문화에서 자연 발생한 잡동사니”2)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PC통신은 독자가 곧 작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듀나가 그간 필명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해 왔던 것도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준은 “사이버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덴티티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3)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소설 동호회의 팬덤 문화는 듀나라는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기술적 · 사회적 맥락이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시절 등장한 많은 아마추어 SF 작가들이 모두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F 작가 이경희는 듀나의 초기 작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 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4) 이 점은 듀나 스스로 작품의 레퍼런스를 자주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초기 창작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영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듀나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이 위치한 계보와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창작의 전략으로 활용했다. 장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서 듀나의 SF 소설들은 ‘한국 SF 장르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5)이다. 듀나 SF에서 탈식민성은 서사의 소재와 내용과도 관련되지만, 특히 듀나의 초기작들에 집중한다면, 주로 영미 서구 문화에 기원을 둔 SF 장르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다시 쓰는 현지화 과정 자체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듀나 이후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SF 작가들은 한국 SF의 현지화(localization)와 진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PC통신 기술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으로 이어졌다. AI는 SF가 현실의 서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SF 장르는 한국의 문학적 우세종이 되었다. 이 글은 일상화된 AI 시대에 30년 전 듀나의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김선오 · 안미린의 시를 중심으로 - 황사랑 1. 유령 문학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유령은 언제나 함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에게 저승의 풍경을 묘사하는 엔키두의 유령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선왕의 유령, 수많은 공포 영화와 게임까지 인간이 있는 곳에 유령이 등장하지 못하는 자리는 없다. 인간에게 유령은 죽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타자였으며, 죽은 자를 추모하는 관습을 만들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지금 한국 문학장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어떤 이유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며 이전 시기의 유령들과는 무슨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90년대까지 문학에서 유령은 대부분 한을 품고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문학에 등장하는 유령들에게서 미묘한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봉준은 자신의 평론집 『유령들』에서 유령을 “이미 죽었으나 충분히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유령”과 “살아 있으나 시체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로 구분하며 존재를 부정당한 후자의 유령들을 김이듬, 최금진, 안현미, 신해욱, 강성은 등의 시에서 발견해 냈다.2) 즉, 애도되지 못했기에 출현하는 유령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지만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어 계속해서 발화할 수밖에 없는 유령들이 출현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주체와 유령 타자의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김영찬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민석,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관심이 환상이 아닌 현실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포착했다.3) 90년대의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밀려난, 토대가 없는 환멸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을 기억할 때4) 2000년대의 유령 문학이 보여주는 현실로의 이행은 허무주의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신수정이 윤성희와 황정은의 소설에서 애도의 작업에서 벗어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5) 이제 유령은 환상이 아닌 현실적 타자가 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2020년대의 유령들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주목했듯 최근 소설에서 나타나는 유령들은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6) 인간과 다르지 않은 친근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경향은 시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강아지를 따라 움직이고 인간에게 말을 붙이며 인간과 같이 걷는 김선우의 “따스한 유령들”(「내 따스한 유령들」)이나 김리윤이 보여주는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사실은 느낌이다」) 유령, 그리고 강지이 시의 화자가 “유령과 나란히 서서/손을”(「캠핑 일기」) 흔드는 모습을 통해 유령이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4.1) 전망과 실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시영화cinéma de poésie 를 분석하며 시적인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 온 파솔리니는 이 영화에서도 무색무취의 광산 가스처럼 “아무런 [위기의] 기미 없이” 다가오는 파국을 우리가 감지하게 하기 위해 몽타주를 사용한다. 세계가 정상성을 위장하고 있음을 가리켜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태를 가시화하는 예술의 역량이란 우리에게 익히 익숙한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 대한 디디-위베르만의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은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증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 [······] provare는 (파솔리니가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을) 여러 가지 의미를 함께 모았을 때에야 가장 정확해질 수 있는 동사이다. provare는 (예를 들어 소박한 장미와 같은) 무언가 앞에서 요동치는 감정이라는 의미에서 분명 “겪다éprouver” 또는 “느끼다ressentir”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가 분노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기 위해” 여기에서 연결된 세계의 요소들에 관한 발견적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시험하다essayer”이고, “실험하다experimenter”이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 연역과 세계의 모종의 상태(1840년대 마멜리의 애국가와 1960년대 정치 시인 파솔리니의 글 사이 어딘가)로부터 축조된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낱말은 “증명하다prouver”를 뜻한다. 『이단적 경험』의 저자에게 시는 세계를 prova(시험) - 이는 또한 시간의 prova다 - 하는 양상 또는 양태화로서 증명을 뜻할 것이다. 한편으로 논증된 사유, 증거, 판단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 구어적이거나 시각적 형식 속에서 양태화되는 감정을 낳는 에세이essai 또는 실험이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영화 의 기획을 특징짓고 있다.2) 인용 글은 어느 시선집 서문에 파솔리니가 적은 문장을 디디-위베르만이 섬세하게 분석한 부분이다. 파솔리니는 자신의 시와 영화 사이의 등가성을 분석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여기에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Un certo modo di provare qualcosa이 [······]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적는데, 디디-위베르만은 이 문장에서 사용된 ‘겪는/시도하는provare’이라는 동사의 다양한 의미에 주목하여 파솔리니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3. 새로운 돌봄 공백 교사의 위기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래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제출되었다. 멀리는 1995년의 5·31 교육개혁에서부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 교육의 서비스화로 인해 서비스 수혜자와 공급자로 바뀐 학부모1)와 교사의 관계, 저출산 등이 심층적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교사의 위기가 사실상 여러 사안들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임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양한 방향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현 사태의 책임이 인기 예능 2)에 상담자로 출연한 오은영 박사의 교육관에 일정 부분 있다고 보고 한동안 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던 일과 앞서 언급한 여러 분석들이 사실은 교육 소비자이자 민원 제기자이자 ‘금쪽이’의 양육자, 그리고 그들이 길러낸 금쪽이들을 공통적으로 문제 대상으로 가리킨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물론 여기에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교사의 죽음에 주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정황들과 이를 교권침해의 주된 요소로 꼽는 교사의 목소리3)가 자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의들 틈에서 ‘맘충이 진상 학부모가 된다’는 말과 학교 및 가정 내 체벌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의견들이 큰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분석들이나 ‘괴물 부모’ 등과 같은 새로운 명명이 의도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혐오의 정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관련한 사유를 한여진의 다음 시를 통해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에 따르면 누수의 원인은 수십 가지나 되고 또 누수라는 것은 꼭 한 가지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쪽에서 새던 것을 잡으니 다음날에는 저쪽에서 새기도 하는 것이라서 결국 한번 발생한 누수는 지속적으로 모두를 의혹 속에 빠뜨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도 위층에 사는 사람도 다 같이 한마디씩 보태지만 물은 계속 흐르고 그런데 물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흐르는 것 자기소개가 흘러가고 그때 뒤늦게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합류하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안이했던 거죠 모두가 누수를 잡기 위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곳은 참 조용하군요 원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 울고 있었다 * 법률나무,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 서울문학, 2021. ― 한여진, 「조사」(『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전
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 천선란의 『이끼숲』과 김초엽의 『파견자들』에 관하여 조윤정 1. 지하 도시의 건설과 세계의 배치 지하 건축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방식이다. 고대 도시에서 지하는 포도주 저장소와 같은 곳간, 카타콤(Catacomb)과 같은 무덤이나 도피처로 활용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하를 훨씬 다양한 형태로 점유하고 있다. 각종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이 지하 가로망이나 교통 시스템과 바로 연결됨에 따라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미래의 지하 공간은 현재의 우리 삶을 확장한,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지하는 고립의 프레임을 넘어 확장성과 입체성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하 공간은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빌딩들이 줄 수 없는 연결의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공간과 공간의 연결로 바라보게 해준다. 또한, 지상의 영향을 덜 받는 지하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환경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밀폐형 미래도시는 기후 위기에 따른 재해를 타개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적극적인 대안이다. 천선란과 김초엽의 최근 소설1)에 등장하는 지하 도시는 다시금 지하 공간을 도피처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두 작가의 소설에서 지하 도시는 고대와는 달리 인류 전체가 지하로 옮겨간 형국이며, 지상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곳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국가별 경계를 염두에 둔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지구라는 행성 단위로 사유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통제당하고 감시당한다. 『이끼숲』에서 하루에 한 알 복용해야 하는 “VA2X”(27)와 이마에 삽입된 “칩”(113)은 생명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파견자들』에서 인간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보호소로 위장한 연구소에 격리되거나 “실험체”(273)로 관리된다. 오늘날 기후나 면역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것에 대한 상이한 이해들에 다가가는 일을 앞당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은 세계라는 관념을 흔들고 인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성으로 관심을 돌린다. 행성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지정학적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지도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지도들의 경계선은 정복자의 노획물과 다름없으며 국경은 대개 전쟁이나 식민화를 통해 만들어졌다.2) 소설 속 지하 도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세계의 좌표들을 유예하거나 버림으로써 세계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전도되고 재설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 밖의 다른 행성이 아니라 오로지 지구 내에서 모두가 살아 나가야 할 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배치는 무생물로 존재하는
문장웹진_콤마
아르코문학창작X문장웹진 더보기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