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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34

2024년 10월호
2024년 10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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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10.01
청의 자리

청의 자리 이준아 윤의 기침소리가 아침부터 요란했다. 목을 억지로 긁어 가며 끌어내는 기침이라 답답함이 해소되기는커녕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침을 꼴깍 삼키고 싶게 만드는 소리였다. 상담이 잡힌 날이면 윤은 꼭 그런 식으로 불필요한 소음을 일으키며 단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다 목쉬겠어, 그만 좀 하지, 단이 타박이라도 할라치면 윤의 눈썹은 단박에 가파른 산등성이가 되었다. 단은 그 성질 사나워 보이는 눈을 흘기며 티가 나게 중얼거리곤 했다. 방구석 호랑이 주제에. 하지만 그날의 단은 윤에게 단 한 마디의 반기도 들 수 없었다. 윤의 상담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윤이 아닌 단이 환자인 날이었다. 그러니까 윤의 불안이 단에게서 기인한 날이었다. 하다 하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단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일이 종종 있나요?” “글쎄요, 흔한 케이스라고 말할 순 없겠네요.” “이유가 뭘 까요?” 의사는 그건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보자며 그날의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차근차근, 이라니,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입장 차이가 이처럼 분명하게 갈릴 말도 없을 거라고 단은 생각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20대에게 모니터를 거부하는 증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배울 만큼 배운 저 의사 놈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단은 의사씩이나 되면서도 충분히 젊기까지 한 그 태평한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마지막 질문이 우선이었다. “저 혹시, 지인 추천 할인 같은 건 없나요?” 의사는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처방전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음, 죄송해요. 그런 건 없어요.” 단이 진료실 문을 나서려는데 여전히 모니터에 고개를 박은 그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보탰다. “두 분이 자매시니까, 설윤 환자 분 세션 예약해 놓은 거 설단 환자 분이랑 서로 양도는 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처음 증상을 느꼈던 곳이 하필이면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낀 단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출입문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객차에서 의지대로 방향을 바꾸기란 대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전부 게워낼 것 같은 얼굴로 주변을 밀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승객들은 짜증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서로에게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렇게 가까스로 생긴 공간으로 단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다른 쪽 손바닥에 들린 단의 휴대폰에선 알고리즘이 충실하게 골라 준 30초 내외의 짧은 영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플랫폼 자판기에서 물 한 병을 결제해 해갈하며 숨을 돌리자 메스꺼움은 곧 가라앉았다. 역시 마지막 하이볼은 마시는 게 아니었어, 단은 지난밤의 객기를 후회하며 남은 다섯 정거장은 도보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뚱이를 겨우 일으켜 긴 계단을 올랐건만 손이 허전했다. 자판기 옆

소설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소설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소설 2024.10.01
튤립이 있는 식탁보

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소설 2024.09.01
슬픔은 나의 힘

슬픔은 나의 힘 문진영 침대에서 겨우 빠져나와 커튼을 걷자 어슴푸레한 빛이 방 안에 드리운다. 고양이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는 사뿐히 침대 아래로 뛰어내린다. 나는 거실로 나가 이번에는 소파에 드러눕는다. 고양이는 곧바로 내 가슴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엎드리더니 골골거리기 시작한다. 소리들이 들려온다. 근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 아랫집 세탁기가 웅, 웅, 하고 돌아가는 소리. 지금 나는 평화로운가. 권태로운가. 판단하지 못하겠다. 주영은 두 달째 부재중이다. 어젯밤 주영의 책상 앞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구석에 놓인 일력이 주영이 떠난 날짜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일의 날짜와 요일, 그리고 문장 하나가 적혀 있는 일력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 장 한 장 뜯어내기 시작했다. 거기 적힌 문장을 읽고, 종이를 구겨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구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 들여다본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의 탄생은 슬픔의 탄생이다. 장자의 말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문장에 나는 온 마음으로 동의했다. 과연, 나는 한 시절을 사람의 모양을 한 슬픔과 함께 살았으니까. 그렇다면 잔디는? 한때 우리 — 주영과 나 — 는 잔디가 고양이의 몸을 가진 기쁨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니었다. 잔디도 슬픔이었다. 잔디는 함부로 만지는 걸 싫어했다. 여간해선 울지 않았고 골골거리지도 않았다. 말이 쓸데없이 많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 몸을 비비고, 시도 때도 없이 꾹꾹이를 하는 이 작은 얼룩 고양이는 아직 이름이 없다. 나는 천천히 녀석을 쓰다듬는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너도 슬픔이구나. 너를 슬픔이라고 부를까. * 엄청 웃기는 꿈을 꿨어. 그날 아침 샤워 부스에서 나온 주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뭐가 웃겼는데? 내 물음에 주영이 기억 안 나,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꿈속에서 깔깔 웃다가 잠에서 깼는데, 실제로도 소리 내서 웃고 있었다고 주영은 말했다. 그렇다는 걸 깨닫는 순간 섬뜩했고 기분이 나빴는데, 언제인지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고. 그런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불쾌한 기분보다는 그 꿈이 정말로 웃겼다는 것,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진심으로 깔깔 웃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음. 내 생각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데. 네 뇌가 너를 보호······ 주영은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켰다. 내 말끝은 드라이어의 소음 속으로 순식간에 휘말려 들어갔다. 듣기 싫다는 뜻. 주영은 내가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되는 일에 꼭 의견을 덧붙이고 가르치려 든다고 힐난하곤 했다. 나도 그게 좋지 않은 버릇이라는 걸 알았지만 잘 고쳐지지

소설 2024.09.01
행복한 소설가

행복한 소설가 임현 1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제일 많다는 것이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까지 더하면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근대 문학의 출발이 무엇이냐? 자기 고백 아니냐? 그러므로 그것은 핍진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많은 소설가들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개연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소설이 잘 써진다고 말하는 소설가를 나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분명 주변에 부러움을 살 만한 재능이었는데도 아무도 그런 자랑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소설이 써지지 않을 만한 이유는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행복한 소설가는 대개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소설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한 인물은 러시아의 대문호가 아니라 어느 늦은 밤 만취한 대한민국 출신의 선배 소설가였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쓰려 한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 괴로움에 대해 토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다고 징징대는 동안 기어코 완성하게 되는 것도 다름 아닌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종로구 세종로 소재지의 조도가 낮은 호프집이었고 지하실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유독 심했던 곳으로 기억한다. 안주 메뉴로 한치를 굽고 쥐포도 굽고 제육볶음과 어묵탕 등을 조리하는데도 좀처럼 그 눅눅하고 고린 냄새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무얼 씹고 삼켜도 다 비슷비슷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일간지에서 주관하는 문학상 뒤풀이 자리가 줄곧 이어지던 것이었으나, 정작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미 가고 없었다. 마지막 지하철 운행 시간은 한참 지났고 오히려 첫차를 기다리는 편이 더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런 탓에 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남았는데, 무엇보다 함께 자리한 여남은 사람들 중 그 이야기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원고 마감할 시간에 이러고 있으니까 못 쓰는 거잖아요. 근데요, 형. 많이 취했어요? 그거 먹는 거 아니에요.” 주문한 먹태 대신 자꾸 나무젓가락을 씹으려는 선배를 말리며, 나는 나름대로 이 불쾌한 냄새의 발원지를 추적해 보기도 했었다. 고정식으로 설치된 의자와 테이블은 혼자 앉기에는 넉넉하고, 둘이 앉기에는 비좁았는데 어떻게 앉아도 허리가 불편했다. 닦는다고 말끔하게 닦이진 않을 것 같은 지용성 얼룩이 벽마다 눈에 띄었고, 주방의 내부 구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상태가 어떨지는 대강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곳마다 오래 밴 냄새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환풍기 탓인가. 주기적으로 세척을 해주지 않으면 화재의 위험이 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불이 나도 벌써 여러 번은 났을 만큼 먼지투성이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뭐랄까, 그런 뜬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술만 마시면 진지해지는 선배의 주정을 가만 듣고 있기가

소설 2024.09.01
욕조 안의 볼드모트

욕조 안의 볼드모트 권혜영 내가 아홉 살이고 동생이 여섯 살이던 무렵, 우리 가족은 매일 밤 차를 타고 항아리 바위가 있는 계곡에 갔다. 집에서 차로 20분은 달려야 나오는 곳이었다. 산마루의 고갯길을 여러 번 넘으며 비포장 도로 옆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실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계곡 주변 바위의 형질이 급변하는 지점이 나타났다. 세차게 흐르는 물 사이로 솟은 기암괴석들에는 하나같이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걸 지리학 전문 용어로는 포트홀이라고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항아리의 입구처럼 홈이 패었다고 해서 항아리 바위라고 불렀다. 바위 가운데에 물이 고인 구멍에는 올챙이나 송사리가 서식했고, 물이 마른 구멍에는 이끼 낀 자갈돌들이 쌓여 있었다. 우리 집의 볼드모트는 항아리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는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열심히 챙겨보다가 붙이게 된 아빠와 엄마의 별명이었다. 물론 우리끼리 뒤에서 남몰래 부르는 호칭이긴 했지만. 어쨌든 볼드모트는 민물고기를 잡는 행위로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볼드모트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영농후계자였다. 그런데 농사일엔 소홀하고 밤마다 물고기를 잡는 데만 혈안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아도 단순한 취미생활이라기에는 어딘가 병적으로 집착한 구석이 있었다. 한밤중에. 집 앞 냇가도 아닌. 자동차로 20분을 달려야 나오는 산골짜기를 밤마다 출근했던 것이다. 볼드모트는 그렇게 매일 거센 물살을 헤치고 수심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곳으로 향했다. 볼드모트가 양동이 한가득 물고기를 잡아오는 동안, 벨라트릭스와 나와 동생은 자동차 문을 잠그고 계곡 입구에서 기다렸다. 벨라트릭스는 앞좌석에 앉아 ‘Now’와 ‘Max’ 같은 빌보드 최신 팝송 믹스 테이프를 듣곤 했다. 어린 동생은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가져온 책을 읽고 싶어서 조명을 켜달라고 졸랐지만 벨라트릭스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깜깜한 도로 위에서 불을 켜면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될까 걱정되어 그러는 건 아니었고, 자동차의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그러는 거였다. 나는 할일 없이 벨라트릭스가 틀어 놓은 2000년대 초반 히트 팝송을 들으면서 시커먼 계곡 아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가끔씩 차들이 고갯길 사이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날 때마다 묘한 긴장과 흥분을 했다. 테이프가 A면을 훑은 다음 까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B면으로 뒤집힐 즈음이면 볼드모트가 돌아왔다. 볼드모트가 손전등을 들고 물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면 희미했던 불빛이 점점 커지다가 계곡 입구의 갓길을 환히 밝혔다. 그때마다 눈뽕을 당한 나는 팔을 들고 이마에 차양막을 쳤다. 볼드모트는 양동이 속 자신이 잡아온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비추며 자랑했다. 동자개, 꺽지, 쏘가리, 모래무지, 메기. 기억력이 별로인 내가 지금껏 그때 잡혔던 어종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볼드모트가 하도 우쭐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세뇌당한 탓이 크다.

소설 2024.08.01
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전예진 나는 작년 가을에 태어났다. 세진이 막 취업 준비를 시작한, 피딱지의 말처럼 영 좋지 않은 시기였다. 오른쪽 코 안쪽에 몸을 늘어트린 피딱지는 세진이 한동안 코 파기를 멈춘 시절을 전설처럼 이야기했다. 피딱지의 말에 따르면 세진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코 파는 습관을 고쳤다. 고등학생 때 밤샘 공부를 하다 가끔,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코를 후비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코 파는 습관은 세진의 대학 졸업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학창 시절보다 3밀리미터 더 기른 무자비한 새끼손톱과 함께. 우리 중 누구도 피딱지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피딱지는 세진의 손길에 조금씩 뜯어졌지만, 남은 손으로 피와 이물질을 그러안아 매번 되살아났다. 피딱지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촐싹거리며 점막을 두들겨댔다. 우리는 점막을 타고 울리는 피딱지의 말을 들었다. 피할 길이 없으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무릇 코딱지는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 실린 먼지와 세균을 거르며 생겨나는 존재다, 이 말이야. 이 한몸 바쳐 비강을 지키는 역할이라는 거지. 그러려면 세진의 몸과 마음에 들어오는 이물질을 걸러 줘야 해. 공기에 바이러스가 있다? 그럼 잡아야지. 세진이 악몽을 꾼다? 그것 또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일이야. 피딱지는 사람의 목소리도 낼 수 있었다. 비강 안쪽을 향해 소리치면 세진은 잘못 들은 소리나 이명 정도로 생각하고 애꿎은 귀를 후볐다. 기껏해야 늦었으니 일어나라, 자전거 조심해라, 같은 짧은 말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코딱지가 말을 한다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적어도 막 태어난 나에게는 코 아래 입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엔 혀가 돌아다닌다는 말만큼이나 놀라웠다. 피딱지는 심지어 아주 희미하지만 냄새도 맡는다고 했다. 콧속에 오래 살면 그럴 수 있다고,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듯이 오래 버텨낸 코딱지는 냄새를 맡게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피딱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들었다. 피딱지가 하는 모든 말이 흥미로웠다. 그러다 몇 번의 대학살을 겪었다. 친하게 지내던 코딱지들이 몇 초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 나는 더 이상 아주 작은 코딱지가 아니었고 피딱지의 말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노인의 잔소리로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피딱지는 말했다. 삶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또 중요한 존재인지. 그날 오후 피딱지는 새끼손톱에 뜯겨 나갔고 그 말은 피딱지의 유언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많은 코딱지들처럼 나도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른 이들이 쫓겨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콧구멍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털에 맺힌 먼지와 이물질을 싸잡아 몸집도 불렸다. 마침내 콧구멍과 비갑개 사이, 그러니까 콧구멍 가장 안쪽 천장에 자리 잡았을 때쯤 내 몸은 우리의 숙적 새끼손톱보다 두 배는 컸다. 어느새 나는 오른쪽 콧구멍에서 가장 크고 오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코끝에 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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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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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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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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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류수연 1. 대문자 K의 시대 200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핵심은 ‘한류, K-wave’라는 말로 귀결된다. 1990년대 후반 일본과 대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한류라는 용어는, 벌써 그 연원이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결과 오늘의 우리는 한국에서 생성된 모든 콘텐츠가 그 자체로 세계화되는 시대, 말 그대로 대문자 K가 지향을 넘어 실재가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싸이와 방탄소년단(BTS), 영화 , 그리고 OTT 플랫폼 드라마 까지. 이것은 2010년대 이후 한류를 대표하는 콘텐츠들이다. 그 인기의 정도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어떤 결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K-컬처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뉴미디어였다. 주지하다시피 K-콘텐츠는 코로나19 이후 시작된 디지털 플랫폼 산업의 확장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으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싸이와 방탄소년단, 그리고 의 성과는 SNS와 OTT라는 뉴미디어 산업의 영향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때때로 K-컬처의 성공은 매우 드라마틱한 이벤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K-컬처가 전 세계의 주류적 대중문화의 하나로 인정되기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 속에 완전히 스며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세대라는 시간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과를 얻어내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열정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2024년 오늘의 우리는, 바야흐로 대문자 K를 붙인 많은 것들이 하나의 유행처럼 전 세계를 관통하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토록 화려한 성공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대문자 K라는 문화가 만들어낸 뜻밖에 ‘낯섬’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류의 유행을 단순히 한국 문화의 승리로 치부하는 것에는 커다란 모순이 존재한다. 대문자 K의 출처는 분명 Korea이지만, 그것이 글로벌 대중에게 향유되는 순간 더 이상 한국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문자 K 문화의 글로벌 유행은 대중문화의 소비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오랫동안 대중문화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그리고 그러한 미국 문화에 내포된 서구 근대성이라는 보편성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음을 시사한다(조영한, 「한류와 팝 글로벌리즘」, 『황해문화』 115, 2022 여름, 27쪽).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대문자 K의 시대는 때때로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자신과는 이질적인 도플갱어를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대문자 K로 지칭되는 모든 문화는 역설적으로 그 출발점인 Korea, 그리고 한국인에게 가장 낯선 풍경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대문자 K의 가치를 발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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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 소설’1) 리라이팅을 통해 생각하는 근대 소설(novel)의 변화 김미정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는 그것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낙진이 잦아들 즈음, 변형된 지형지물과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무늬는 다시 새로운 지층을 이루고, 그것은 또 다른 소용돌이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훗날 교정되어야 할지 모를 오류에마저 몸을 내맡겨 보는 일이 어쩌면 비평의 일이다. 1. novel 혹은 근대인의 인식 체계 이 글은 지금 소설(novel)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어떤 소용돌이의 체감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양식이 모두 동일할 리는 없다. 그 양식을 무어라 부르건 거기에는 늘 각 시대의 인식·정서 체계가 구조화되어 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야기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때의 소설은, 한 세기 이전에는 ‘literature’나 ‘novel’과 같은 말로 막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의 낯선 문학 양식이었고, 한자문화권에서는 그것을 두고 설왕설래하며2) 각고의 번역의 노력을 통해 제도화한 것이다.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 연구가 주목한 것도 이러한 제도로서의 문학에 대한 것이었음도 잠시 덧붙여 둔다. 그렇다면 근대적 이야기 장르로서의 소설에 담긴 인식·정서의 체계란 무엇일까. 그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고 간단히 적을 수도 없다. 이 글에서는 ‘인식 체계로서의 소설’만 생각해 본다. 이때 주목하는 것은 우선 소설 속 서술자, 곧 앎(인식)을 독점해 온 주체의 자리다.3) 달리 말해, 텍스트 안에 구조화된 재현 주체/대상의 역학이 이 글의 관심이기도 하다. 서술 시점이나 그에 따른 리얼리즘적 묘사란 근대 소설의 핵심이다. 이것은 예컨대 근대 회화의 소실점, 원근법의 발명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과 묘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주체/객체(=서술자/서술대상·객관세계)의 도식이었다. 소설에 구조화된 근대적 인식 체계란 바로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서술자의 문제란 소설의 세부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대표·재현·표상 원리에 상응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이미 소설을 소설로 성립시켜 온 그 인식 체계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유동하고 있는지는 폭넓게 질문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래 독자-작가 모두 질문한 것은 예컨대 ‘누가 말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즈음부터의 독자-작가는 리얼리즘적 시선 너머에 은폐된 화자의 존재를 질문했다. 객관을 표방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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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서

테이블 위에서 이소 1. 그날 내가 이태원에 갔었으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나는 신촌에 있었어. 이태원이 아니라. 그건 정말이지, 놀랍도록 가혹한 일이야. [······] 기억나? 프놈펜 숙소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생중계로 봐야 했던 그날. 나 자꾸 그날이 생각나.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잖아.1) 참사는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거야. 이렇게 잊히기만 한다면 말이야. 석이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2)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석이와 동이와 혜란은 대학교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위해 떠난 프놈펜의 한 학교에 있었다. 세 사람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속했던 세계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 “대상 없는 배신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3)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말을 고르기 어려웠다. 그때의 석이에게 세월호 사건을 “이런 일들”로 묶거나 “세계 곳곳”의 참사와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뉴스와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그때, 석이는 모든 비교를 거부했다. 그들이 일하는 학교의 학생이 한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2010년 꺼삑섬 축제에서 일어난 압사 사건에 관해 말하자, 석이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라고 선을 그었고, 세 사람 모두 “우리조차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캄보디아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죽음”4) 따위와 비교하는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이후, 석이는 완전히 달라진다. 석이에게 세월호와 이태원과 꺼삑섬은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러니까 10년이 흐르는 사이, 세월호는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무리 충실한 토양학자라 해도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순 없다. 토양학자는 숲의 흙 일부를 추출하고 분류하여 테이블 위에 올려 둔다.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얼마만큼의 변형과 생략을 감수하고서라도 유사도에 따라 다른 사건과 함께 배치되고 비교된다. 이 과정이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특히 모든 유가족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에게는, 적어도 어떤 유가족에게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게 사건은 다른 사건의 중요한 참고문헌이 되어 주기도 한다. 2005년, 백 명이 넘는 승객들이 사망한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가 ‘사고의 사회화’를 위한 “유가족의 사회적 책임”5)을 주장하며 정부와 JR서일본을 상대로 10년간 투쟁한 기록에는 대구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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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기획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기획 2024.10.01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기획 2024.09.01
소설의 피로

[에세이] 소설의 피로 양지예 노엘 갤러거의 무대를 보며 음악가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그의 젊은 시절 방황하던 경험과 더불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여인에 대한 곡이다. 노래는 발표한 지 삼십 년 가까이 되어 가고 무대 위 머리 희끗희끗한 노엘 갤러거에게서는 이제 방황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이 흥겨울 정도다. 아련한 원곡의 분위기 역시 세월을 따라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편곡을 입었다. 음악은 어떻게 나에게 올까. 일단 누군가 곡을 쓰고 발표해야 한다. 청자인 나는 플랫폼을 통해 음원을 감상하거나 드물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앨범을 사기도 한다. 음악가에게는 다른 홍보 방법도 있다. 대중음악가라면 뮤직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하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때로는 음악과 관계없는 방송이나 행사에도 출연하는데,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역시 주는 새 노래 홍보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신곡은 끊임없이 피로(披露)된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할까.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수만 번은 반복하여 들었을 그 노래를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음악가는 본인 노래의 첫 청자다. 작곡에 참여하지 않는 가수라 하더라도 비슷하다. 곡이 만들어지는 영감의 그 순간부터 완성 후 녹음 과정까지 좋은 기억도 싫은 기억도 낱낱이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갈등뿐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창작자 홀로 만드는 음악이란 없다시피 하다. 사람이 여럿 모였는데 과정이 언제나 매끄러울 수는 없다. 드물게 하늘이 내려 준 노래가 어려움 없이 착착 완성된다 한들 매끈한 표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기 마련이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아름답기만 한 창작의 과정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겉보기를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 어렵지 않다. 그저 포장 기술이다.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포장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실 다지기보다는 포장 기술을 익히는 쪽이 빠르다. 포장이 어렵다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피땀눈물을 삭제해 버린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바라기만 하면 매끈한 성취가 이뤄질 듯한 환상을 듣는 이에게 심어 주는 요령을 수많은 표어와 마케팅 서적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요령을 활용하면 가수도 어렵지 않게 싫어하는 노래를 즐거운 듯 피로해 보일 수 있을 터다. 삼사 분 정도 꾹 참아내면 그만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화려한 메이크업과 현란한 조명은 혹시 드러날지 모르는 굴곡을 감추는 역할을 남몰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감정은 가라앉기 마련이다. 설령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해도 반드시 그렇다. 싫어하던 노래를 부르던 중에 즐거운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기억은 뒤섞이면서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날것이던 감상은 무뎌지고 희미해진다. 뜨거울 만치 처절하던 열정도 냉정하게 식는다. 이 변화는 눈에 띈다. 음악에는 피로될 때마다

기획 2024.09.01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심완선 ‘제일 좋아하는’ 하나를 꼽아 보라는 질문을 종종 듣는다. 작가님은 제일 좋아하는 SF 소설, 작가, 영화, 게임이 뭐예요? 하나만 골라 본다면? 그럼 나는 시야의 한쪽 구석을 노려보며(사람이 고민에 빠질 때 흔히 나오는 얼굴이라고 들었다) 고심하는 표정을 짓곤 한다. 답변은 대체로 이렇게 흐른다. 너무 어려운데요.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가 있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은데. 조건을 조금 바꿔서 대답할게요. ‘제일 처음 읽은’이나 ‘제일 여러 번 본’ 아니면 ‘최근 접한 것 중에서’라면 말할 수 있어요. ‘최애’(최고로 애정을 쏟는 대상)가 확고한 분야가 아닌 이상 나의 1순위가 무엇이라고 내세우기는 정말 어렵다. 적어도 나는 적잖이 갈팡질팡하는 편이다. 게다가 솔직히, 남들이 듣기에 그럴싸한 이름을 대고 싶다는 욕망도 약간은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할 때는 체면을 차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너무나 쉽게 대변한다. 예를 들어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인셀’(비자발적 독신의 약어로, 주로 인터넷 하위문화와 여성혐오 및 적개심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혐의를 산다. 은 상당히 대중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레즈비언 영화의 고전 명작이 되어 가는 중이다. 영화사를 말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건 꽤 젠 체하는 발언 같다. 아니면 평범한 씨네필의 발언이거나. 만약 누가 를 말하면 나는 ‘흠······’ 하며 잠시 의심을 품을 테고, 를 말하면 슬쩍 거리를 둘 것이며, 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여상하게 넘어갈 것이다. 아, 히치콕, 취향을 적당히 가릴 만한 무난하고 점잖은 대답이죠. 물론 진심으로 히치콕을 좋아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요. 나는 영화를 매우 드물게 보는 사람이지만 무난하고 점잖게 주워섬길 만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기는 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를 봤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상영시간 내내 커피와 담배가 줄창 나오거든요. 전 비흡연자고 그때는 커피도 거의 안 마셨는데 스크린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중독되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는데 촬영 방식이나 분위기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죠. 아, 을 뒤늦게 봤는데 말이죠. 거기 나오는 대사들이 따로 떼놓고 보면 유치하도록 낭만적인 게 많잖아요. 그런데 상영관에서 실물을 마주하니 영화가 뿜는 그 분위기에 빨려들더라고요. 제가 몰랐던 세기말의 조각을 그제야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좋아하는 감독이라면, 저는 기회가 된다면 아이다 루피노가 찍은 영화를 모두 섭렵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배우는 버스터 키튼이 아닐까 싶네요. SF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걸 고르라면, 글쎄요, 는 분명 정교하게 만든 영화지만 아무래도 에 정이 갑니

기획 2024.09.01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에세이]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유진목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기로 적은 산발적인 산문을 정리하던 중에 어렴풋이 ‘불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불행은 나일까? 곧장 미간이 찌푸려졌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수기는 간결하고 가슴 아팠다. 타인의 이야기였다면 거기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정말로 불행하구나.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 순응했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마침표. 쓰는 행위는 시간을 보내는 고통스러운 방법 중 하나다. 글을 쓸 때면 자꾸만 손목시계의 초침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으면서도 글을 쓴다.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 공개한다. 그 역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벌인 일로부터 태연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온갖 괴로운 일들을 책에 쓰고서 태연하게 살아간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다. 나는 쓰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잊는다. 오로지 살기 위해 고통을 기억에서 지우듯이 그렇게 한다. 한때 내 전부였던 것들을 잊으려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잊고 난 후에 무엇이 찾아올지 알고 싶어서 쓰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온통 글을 쓰는데 쓰다가 느닷없이 나타나는 무엇과 맞닥뜨리고 싶다. 이 글은 바로 그때 끝날 것이다. 나는 내심 그때를 기대한다.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알맞은 때를 기다린다. 나는 내가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원래 모양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거울을 보며 자기혐오에 빠질 나를 생각하며 진저리를 친다. 불행에도 기쁨에도 공평하게 무감해지는 대신 불안을 적극적으로 견뎌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짐작과 가늠으로는 판단해 볼 수 없는 영역에 나의 불안이 있다. 지난 가을에는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11월의 후쿠오카는 여름의 끝자락 같아서 챙겨간 가을 니트들은 모두 캐리어에 넣어 둔 채로 반팔 티셔츠를 사서 입고 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돌아다녔다.(나는 항상 여행 옷을 챙기는 데 실패한다.) 9월에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이혼을 확정 받았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짧은 질의에 대답하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에게 손을 높이 들어 인사했다. 그날 밤에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소리 내 울었다. 10월은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11월이 되자 후쿠오카에 가고 싶었다. 남편과의 좋은 추억들이 있는 곳이었다. 도무지 혼자 갈 엄두가 나지

기획 2024.08.01
괴담의 시작과 끝

[에세이] 괴담의 시작과 끝 현찬양 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사백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그 두 배쯤 되는 부모들이 조회를 하듯이 서서 식순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지루해서 우리 반 교실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처음엔 얼룩인 줄 알았는데 점차 뚜렷해지면서 교실 창문 너머로 얼굴 같은 것으로 변했다. 얼굴 모양의 흰 얼룩인지 흰 얼룩 모양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반 누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하얘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눈은 움푹 들어가서 보이지 않고 얼굴의 윤곽은 뚜렷한데 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을 입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키를 보면 우리 또래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맞아? 나는 옆에 애를 손으로 쿡 찔러서 “저거 보이냐?”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약간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애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으아 저게 뭐야.” 그 소리에 주변이 일순 소란해졌다.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 그것을 보았다. “뭐야, 저게.” “누구 안 내려왔나 보네.” 같은 소리들로 시끄러워지자 단상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키자 담임은 우리 반 애들의 숫자를 세보고는 실장(우리 학교에선 반장을 그렇게 불렀다)더러 올라가 보라고 했다. 실장이 올라가서 귀신이 비치는 창문 너머에서 손을 엑스자로 그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실장은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귀신은 그곳에 있었다. 하얀 얼굴로 졸업하는 아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제야 선생은 제법 당황했는지 실장에게 유리창을 닦아 보라고 했다. “애들이 창문 너머로 분필 지우개를 터니까 그게 묻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창문을 닦으면 돼.” 그 말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장은 걸레를 가지고 가서 창문을 닦았다. 그래도 사람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엔 술렁였지만 졸업식이 진행되자 점차 귀신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햇빛이 반사된 것일 거라는 둥, 잘 닦이지 않는 얼룩일 거라는 둥,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가설들이 몇 가지 나왔으나 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무엇도 검증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과 친한 몇몇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서 사람 자살한 적 있어요?” 하고 직설적으로 물어 보았지만 물론 선생님들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찡그린 얼굴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을 뿐이다. 학생회장이 연설하고 동창회장이 연설하고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학년 부장 선생님까지 한마디씩 하고 나자 몇 명이 표창장을 받았다. 꽃다발을 수여하면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는 동안

기획 2024.08.01
아홉수는 레벨업

[에세이] 아홉수는 레벨업 이나리 1. 한동안 웹소설을 많이 읽었다. 웹소설은 이천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인소’(인터넷소설)와 달리 핸드폰으로 보기 때문에 서사의 호흡이 색다르다. 일명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으로 불리는 특정 서사 조건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회빙환’이 최근에 유행하는 웹소설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가령 ‘환생’은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교리에서 나온 윤회전생의 개념으로 이미 친숙한 서사적 요소다. ‘회귀’는 또 어떤가. 오래된 영화 중에 (1993)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필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를 겪는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이라는 선택까지 시도하지만 반복되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필이 반복된 하루 안에 갇혀서 깨달은 것은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는 것. 그제야 필은 회귀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필에게 회귀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회귀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이 영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2004), (2017), (2018) 등은 타임루프물로 불리며, 반복되는 시간을 주인공이 겪는 형벌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웹소설에서 등장하는 회귀는 이와 다르다. 주인공이 겪는 ‘루프’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인생의 기회이고 다른 선택지다. 말하자면, 이미 오답 노트를 모두 작성한 주인공에게 문제 풀 기회를 다시 준 셈이다. 주인공에게는 이미 모범답안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을 더 행복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다. 큰 맥락을 보자면 ‘빙의’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읽었던 책 속으로 들어가 해당 등장인물에 빙의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의 독자로서 나는 이 ‘안전한 불확실함’에 빠져들었다.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빙환’의 요소들로 인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안전장치를 믿었다. ‘안전한 불확실함’이라는 이 모순적인 요구를 충실히 지켜주는 서사라니. 서사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확실하게 안전하기를 바라는 모순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내 현실이 팍팍할수록 그들의 안전한 모험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2. 미래를 안다는 것. 그건 인간사에서 항상 선망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미래를 알고자 한다. 알지 못한 상태로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는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중 하나는 선지자, 웹소설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지자를 찾는다. 하늘이 내린 신통한 능력을 발휘해서 미래를 예지해 주는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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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09.29
카르마 라인

카르마 라인 여하정 처음에는 그것이 카르마 라인이라고 생각했다. 의미심장한 명명이었다. 지구의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가 업의 라인이라니···. 지상에서 했던 일들과 내뱉었던 말들과 발산했던 감정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의 경계에서 막상 탈출한다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모든 것은 돌아와야 마땅했다. 그런 불문율의 대기를 나는 당연한 듯 호흡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앎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푸른 하늘을 연상시키는 눈동자의 선임 교관 유리는 카르마 라인이 아니라 카르만 라인이라고 정색을 하며 정정했다. 그는 무언가 다른 사람들이 틀리거나 제대로 모르는 것들을 가르쳐 주는 데 큰 보람과 우월감을 느끼는 눈치였고 나에게는 그의 그런 점이 조금 귀엽게 보였다. 그가 카르만 라인은 미국 물리학자 카르만의 이름을 따라 지은 하늘과 우주를 가로지르는 경계선이라며 엄마의 칭찬을 기다리는 덩치 큰 아이처럼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의 기대에 반해 원래 알고 있었는데 말이 잘못 나왔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지금까지 당연히 카르마 라인이라고 여기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허물어뜨려야 하는 대공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엄연히 나의 카르마 때문이었다. * 그는 보기 드물게 성실한 채무자였다. 매달 나와 약속한 25일 마감 전 꼬박꼬박 오십만 원을 입금하고 내가 아닌 그쪽에서 입금 확인 전화를 먼저 해왔다. 한껏 주눅 들고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그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수습하는 듯한 느낌을 남겼다. 그러나 내용은 달랐다. 그건 엄격한 의미에서 자신만의 채무도 아니었다.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형의 인테리어 업체에서 함께 일했던 그가, 도산 후 어딘가로 도망간 형 대신 보증인으로 기꺼이 채무를 떠안은 것이었다. 그렇게 그 작고 온순한 남자와 나는 채무자와 채권금융기관 소속 직원으로 만났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나의 가장 규칙적이고 안전한 실적이었다. 모든 채무자가 그만 같았으면 나의 직장 생활은 한결 순조로웠을 것이다. 대부분이 돈을 빌렸을 때의 마음과는 달리 사정 때문이든 악의에서건 자신의 능력보다 채무가 버거워지면 자신의 존재부터 지우려 들었다. 세상에 돌려줄 것이 없을 때 그들은 작아졌다. 내가 채무 독촉을 하러 방문한 사업장이나 집 근처에서 마주친 그들의 표정은 대체로 의아함이었다. 그곳까지 찾아오리라 여기지 못한 방심에 허를 찔려서거나 생각보다 험상궂거나 우락부락하지 않은 채권자의 모습에 놀라서···. 그렇다고 그 마주침이 바로 채무 상환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돈을 갚을 수 없는 사정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그건 압박이라기보다 하나의 확인 절차에 더 가까웠다. 나는 그들의 돈을 받아낼 수 없었다. 다만 팀장 앞에서 그들의 돈을 받아낼 수 없는 절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헛걸음을 하곤 했다. 그런 만큼 내가 애써 찾아 나서기도 전에 나타난

소설 2024.09.29
소파어웨이 (So Fa,r Away)

소파어웨이 (So Fa,r Away) 오승현 그것은 소파였지만 더는 소파만이 아니었다. 어느 집이나 그렇듯 거실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구 소파가 이제 더 이상 가구도, 우리 집의 중심도 아니었다. 엄마와 나는 소파를 마주 보고 앉아 소파의 움직임을 가만히 주시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소파의 쿠션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느이 아빠 살아 있는 것 같아.” 엄마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나는 아빠의 엉덩이에 눌려 복원력을 잃은 저가 통가죽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미지근한 기운이 체온처럼 느껴졌다. “이게 아빠라는 거잖아. 말이 돼?”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소파가 아빠라니. 아빠가 사라진 지 약 2주가 지났다. 그러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아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약 2주 전이니까 얼추 그렇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담배를 피우러 갔겠거니 했다. 혹은 담배 후에 공식처럼 따라오는 급똥을 해결하러 화장실에 가 있으려니 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도 그다음 날 아침에도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술 처먹고 어디 떡시루 찾아 잠들었겠거니, 알아서 출근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엄마도 일주일이 지나자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서에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브륵. 익숙한 방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TV 소리인 줄 알았다. 브륵. TV는 꺼져 있는데 소리는 계속되었다. 브르슈욱. 소리며, 냄새며, 공기의 울림까지 모든 것이 아빠의 방귀였다. 그만 좀 하라고, 소파 찢어지겠다고 치를 떨곤 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집안 어딘가에 아빠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빠의 사운드가 생생하게 들릴 수 없었다. 소파의 아래, 뒤, 베란다 장과 창문 밖까지 샅샅이 뒤졌다. 엄마는 “코빼기만 보여 봐라, 내가 제사는 잘 치러 줄게!”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빠는 없었다. 아빠의 소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르륵 컥! 크르륵 컥! 소파 팔걸이를 베개처럼 베고 TV 보다 잠든 아빠는 성대가 짓눌려 꺽꺽대다가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번쩍 깨곤 했었다. 주말 낮에는 ‘벅벅’ 소리도 들렸다. 소파에 누워 무좀균이 훑고 간 발을 긁어 댈 때 나는 벅벅 소리는 “아빠 제발 좀!” 그만하라고 구박해야만 멈추곤 했었다. 발 긁는 소리에 으레 따라오는 허연 각질 가루도 소파 주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TV가 저절로 틀어지는 것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리모컨이 오작동한 것이라며 아빠의 개입을 부인했지만 리모컨이 소파에 얹어져 있을 때만 그러하며, 그 채널들이 아빠가 좋아하는 스포츠나 예능 채널이라는 것에 우린 결국 수긍했다. 이런 현상의 근원지는 소파였고, 소파는 아빠라는 사실을. 엄마는 소파에서 아빠를 꺼내려 했다. 주방에서 식칼을 가져와 소파의 가죽을 베면 그 안에 갇혀 있던 아빠가 몸을

소설 2024.09.26
반지

반지 정빛그림 오전 일곱 시. 은색 스테인리스 식기세척기를 열고 유리잔과 머그잔, 타원볼과 접시를 비롯한 커트러리를 꺼낸다. 수진은 마른 린넨 수건으로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식기들을 다시 한번 싹싹 닦는다. 두 손으로 정성 들여 닦아야 남아 있던 얼룩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새것과 같은 상태에 가까워진다고 사장은 말했다. 정말 새것이 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을 내는 건 가능하다고. 누군가 썼던 식기를 재사용하는 것이므로 세심한 손길로 청결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직업윤리라는 말도 했다. “쉬워. 컵을 닦을 때 말이지, 그 일이 전부인 것처럼 하면 돼.” 사장은 사장이니까 그렇다 치고 수진은 알바로서 컵을 그렇게까지 닦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일회용품이 아니고서야 늘 새 식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샌드위치 하나 먹으면서 식기의 청결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손님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릇 정리를 할 때면 사장의 목소리가 은근한 힘을 발휘하면서 마치 이 일이 전부인 것처럼 열중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컵의 표면을 밀고 비비는 반복적인 노동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걸까. 반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수진은 그릇을 닦는 내내 반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지를 발견하자마자 주머니에 집어넣던 민첩함은 온데간데없고 희미한 양심만이 유령처럼 수진의 곁을 배회하고 있었다. ‘물건을 훔치는 건 명백하게 나쁜 짓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고… 평생 죄책감에···.’ 수진은 자신이 매우 착하고 도덕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 속 자신의 위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분수를 알고 행동한다고. 지각은 절대 하지 않고, 일찍 출근해서 약간 늦게 퇴근하는 걸 당연히 여기며 매사에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습관도 그런 태도에서 기인한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반지는. 반지는 주방의 가장 오른쪽 찬장의 맨 위 칸, 안 쓰는 그릇을 놓아두는 자리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장이 다도에 흥미를 잃고 그 쓰임이 점차 줄어들다가 아예 사라진 분청상감 다도 세트의 다관 안에 들어 있었다. 도대체 반지가 왜 그 안에 들어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저녁 느닷없이 시작된 대청소만 아니었어도 반지는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언젠가는 발견되겠지만 당분간은 아닐 것이고 그걸 발견하는 사람이 수진도 아닐 터였다. 수진은 곧 일을 그만둘 예정이었으니까. 다음 달… 혹은 다음다음 달에. 우식과 헤어져도 그만둬야 했고,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계속할 순 없었다. 결국 ‘일’은 터졌고 현재로서는 아무 증상도 없지만 몸은 원래 안 보이는 곳에서 더 격렬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어쨌든 사장이 잃어버린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는 지금 수진의 주머니에 들어 있다. 명동 신세계에서 이천 만원이나 주고 산, 클레리티 등급이 우수

소설 2024.09.26
올리브

올리브 최민우 전화를 받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을 때 윤정은 조수석에서 보라색 천에 덮인 새장을 막 꺼내던 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윤정은 두 손으로 새장을 받쳐 들었고, 나는 윤정이 따로 챙겨 온 쇼핑백을 들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나는 종종걸음으로 가서 현관문을 열고 윤정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아 주었다. “어디 놓으면 돼?” “저기 위에 두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컴퓨터 책상 뒤편 벽에 있는 허리 높이 정도의 책꽂이를 가리켰다. 직사광선을 바로 받지 않으면서도 어둡지도 않은, 충분한 광량과 온도가 보장되는 장소였다. 윤정이 새장을 책꽂이에 올려놓고 천을 걷었다. 우리는 박물관에 온 사람들처럼 말없이 새장을 바라보았다.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새 한 마리가 횃대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몸통은 진회색과 연푸른색이 섞여 있었고, 꼬리는 물감에 담갔다 꺼낸 듯 진한 붉은색이었다. “얘 이름은 올리브야.” 윤정이 말했다. “안녕, 올리브?” 올리브 색깔이 하나도 없는 올리브는 내 인사를 못 들은 척 고개를 날개에 파묻으며 뭉툭한 부리로 몸을 긁었다. “커피 마실래?” 내가 말했다. 캡슐 커피머신이 요란하게 돌아가는 동안 윤정은 갑작스럽게 부탁했는데도 올리브를 맡아 줘서 고맙다고, 휴가 여행에서 돌아오는 대로 곧장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돌보는 건 힘들지 않다. 하루에 한 번 물을 갈고 모이는 사흘에 두 번 채워 넣으면 된다. 온도는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외에 특별히 신경 쓸 일은 없다. 올리브는 알아서 잘 지낸다. 모이는 쇼핑백에 챙겨 온 정도의 양이면 한 달은 충분할 것이다. “휴가는 어디로 가?” “소금 호수.”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맞아. 가 본 적 있어?” “구글 어스로만.” 우리는 대학 동기 연말 모임에서 3년 만에 다시 만났다. 윤정은 뮤지컬 제작사에서 OTT 회사로 이직하여 영상 저작권과 계약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5년 전 나와 사귈 당시 품고 있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오래전에 내려놓았다고 했다. 모임 이후 우리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만나 같이 점심을 먹거나 영화를 보곤 했다. 윤정이 집까지 찾아온 건 다시 만난 뒤로 처음이었고, 나는 긴장감이 아랫배를 조이는 걸 느꼈으며, 식탁이 좁다 보니 앉은 자세를 바꿀 때 서로의 발끝이 스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애썼다. 그날 오후 같이 있는 동안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우리 사이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말을 꺼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화가 계속 미묘하게 어긋나는 바람에 결국 잘 다녀오라는, 올리브는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 말고는 하지 못했다. 윤정이 떠난 뒤 나는 윤정도 내 생각을 눈치챈 게

시·시조 2024.09.26
「드라이아이스가 녹는 방식」외 6편

드라이아이스가 녹는 방식 강신명 뜨겁다와 차갑다의 모호한 경계, 꿈이라 읽습니다 지난 계절의 입김이 서린 자작나무 숲에 섰습니다 소리 없이 구르는 얼음 알갱이, 고통으로 적당하게 숙성된 삶이 아득히 부푼 빛살로 쏟아집니다 투명한 가슴을 지닌 희디흰 소용돌이가 당신과 나의 간극을 이어 줍니다 이제 내가 가진 모든 부끄러움을 당신이라 부르겠습니다 불현듯 고인 호흡에 슬픔이 차오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길로 가로막힌 바깥의 일입니다 그것은 짙푸른 사해에 떠 있는 듯 내 안의 무게를 이겨 낸 기분 좋은 현기증입니다 때때로 엄습하는 이명 속에서 뼈에 박힌 소리를 기억해 내는 반쪽으로 쪼개진 심장입니다 손길 닿지 않는 곳에 멈춘 메트로놈처럼 당신을 다신 켤 수 없지만 차디찬 허기 가르며 메아리치는 낯익은 음표, 길게 잔가지 뻗은 햇빛, 비로소 바람 소리와 마주 앉습니다 자작나무에 걸린 겨울이 따가운 냉기에 데지 않게 얼음 안개를 허물고 있습니다 천년 빙설이 증발하는 막다른 길 위에서 한 겹씩 꺼내 덮은 당신을 태웁니다 빛은 어둠을 헤쳐 온 무수한 불꽃이므로 나는 새하얗게 물결쳐 날아오릅니다 오래도록 숨죽인 나를 지나, 잠을 위한 밤의 모노드라마 한밤중이었어요 여러 개의 얼굴이 있는 밤이었어요 밤과 밤사이에 잠이 숨어 있어 잠을 꺼낼 수가 없었어요 새벽으로 가는 디딤돌을 찾느라 침상을 다 헤집어도 잠이 안 보였어요 잠은 왜 보호색을 칠했을까요 잠도 잠이 달아난 밤이 두려웠을까요 적막을 이길 친절한 동행이 필요했나 봐요 나는 잠을 달래야만 했어요 밤의 매듭을 풀면 떠나지 못한 어제가 내일을 조립하는 오늘을 비웃었어요 불투명한 유리창 뒤로 감춰진 나와 행로를 이탈한 나를 보는 건 타인으로 묶인 잠들지 않는 겨울이에요 뾰족해진 밤이 수평을 집어삼켜서 나는 어둠 속 배경으로 존재하는 잠의 불안을 만지며 서성였어요 잠은 롤러코스터를 원치 않았을 거예요 잠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야겠어요 회전목마가 남긴 환한 웃음을 생각할게요 오르락내리락 천천히 눈을 맞출게요 잔잔해진 파문에 밤이 밤을 깔고 누웠어요 바람이 멈추고 출구가 보여요 생소한 내가 익숙한 나로 돌아와요 잠이 나란해진 나를 돌아봐요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라며 빛을 여닫는 잠의 블라인드를 따라 걷을 수 있는 어둠이라고 밤은 오직, 지금은 봄비 흩어졌다 모이는 저녁으로 봄은 시작되는 거야 빨강과 파랑이 섞일 때 오래 기다린 너로 스며드는 거야 세상은 온통 보랏빛 파문, 보라의 눈 속엔 무수히 많은 빛이 살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나만의 별이 양각되는 계절, 단 하나의 별자리로부터 아지랑이가 몰려들 때면 서쪽 창문에 걸린 수많은 행성 중 어떤 걸음이 나를 알아볼까 태동에 흔들리는 지상의 소리들이 한 편의 서사시를 완성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야 홀씨처럼 번지는 질문은 바람을 잠재우고 나는 어제를 건너온 몸을 씻어 내는 거야 거울 앞에 서면 누구나 봄

시·시조 2024.09.26
원종혁 - 「소리를 지우고」외 6편

소리를 지우고 원종혁 철새가 떠난 안성천을 차지한 고요는 몸집 큰 기억을 닮았다 허공보다 멀리 있는 당신을 침묵으로 밀고 와서 어깨를 툭 치고 간다 모든 사라진 것들 뒤의 고요는 꽃처럼 피는데 창문을 열어두면 향기가 손을 내민다 물처럼 연해지는 마음에는 말보다 깊은 여백이 고여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성천을 다녀간 것들의 신발이 수북하다 바람이 물결을 건드리면 텅 빈 뼛속에서 스스로 노래가 흘러나오고 둑방 위에 길게 누운 빈 의자는 저녁이 어디쯤 왔는지 가늠하다가 혼자 울 때도 있다 허리가 반쯤 잠긴 물속에서 끼니를 잊은 갈대가 거품을 만드는 중인데 사실 저 갈대의 끼니는 바람이라는 소문도 있다 저 단단한 적막을 풀어쓰느라고 갈대는 자꾸 헛발을 내민다 목도리도마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대드는 것들일수록 허풍 가득한 걸 금방 들킨다 껍질을 훌훌 벗어 던지고 노랗고 붉은 몸을 드러낸 채 물속으로 느릿느릿 숨는다 여전히 꼿꼿이 세운 목에 자꾸 눈이 간다 안개 자욱한 굴속을 돌아다니는 목도리도마뱀은 언제 어디서 사람의 말을 배웠을까 당신의 갈지자걸음이 목도리도마뱀을 베낀 줄을 이제야 알겠다 주름 장식의 목을 우산처럼 펼친 변종 목도리도마뱀 입을 크게 벌려 몸집을 부풀리는 저 허세가 어쩌랴, 사람을 감쪽같이 베꼈구나 하늘문 외전 먼 길을 걸어 고단함 끝에 문 앞에 선다 마음속에 새겨둔 이름표를 되새기면 수험생처럼 가슴 벌렁이고 숨이 턱턱 막힌다 하늘문을 지나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하늘도 땅도 사람도 운다는 것인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신비로운 빛이 엑스레이처럼 마음을 투과하면 사자와 사슴이 기대고 낮아진 산들은 넓은 초원이 될까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바람에 날리는 파리 같은 목숨들 백 년을 달려와 자서전을 펼쳐 읽는다 문 뒤에는 누군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세상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것은 모든 목숨이 품고 있는 서사여서 어느 대목을 읽어도 다 똑같을 것이다 스치다 풍경은 저 혼자 그림이 된다 그림 속에는 수많은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보다 많은 내가 있다 빛바랜 후회가 마른빨래처럼 휘날리는데 여행지에서 만난 그가 손바닥에 적어 주던 숫자의 저녁이 가슴 한구석에 화살처럼 박혀 있다 막내아들 앞세워 흥을 키우시던 이별 여행 와락 안기는 늙은 아들을 민망한 듯 밀쳐내시던 거친 손 그때, 꽃잎처럼 후르르 떨어지던 당신의 눈물을 보았는데 풀피리 소리에 울컥하는 건 지워진 발소리가 겹쳐 들린 때문인지 쓸데없이 우는 풀벌레 소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림 속으로 걸어가는 낯익은 뒷모습 스며든다 저기서 기웃거리는 얼굴 누구인가 ? 그늘을 놓친 나무처럼 주름 깊은 껍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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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팅팅 중국에서의 한국 문학은 관련 연구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비주류 문학으로 여겨졌으며,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몇 년 동안 이러한 침체 상태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이제 한국 문학은 중국 내에서 작은 붐을 일으키고 있다.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이창동의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소지』, 공지영의 장편소설 『도가니』, 한강의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김애란의 소설집 『너의 여름은 어떠니』 등,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들은 중국 인터넷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지난해 소설가 김초엽은 제34회 중국은하상(1985년에 제정된 중국 공상과학소설계의 최고영예상) 시상식에서 ‘최고인기외국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졌고, 중국에서 초청받아 북토크나 문학대회와 같은 문학행사에 참석하는 한국 작가들도 많아지고 있다. 아울러 한국 문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목소리도 중국 독자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출판된 한국 문학 작품들은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사회 속 약자의 인권, 청년들의 생활 곤경, 그리고 여성과 같은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은 중국 독자들의 큰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문학이 자주 언급되는 요즘, 중국에서도 한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 동영상, 팟캐스트 등 새롭고 젊은 방식으로 한국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전파하고 있다. 그중 팟캐스트는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주로 2030 고학력 도시 청년들의 지식 공유,, 사회적 이슈 토론, 그리고 다원화된 시각의 탐구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중국의 팟캐스트 사용자 수는 2억 3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수는 여전히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 팟캐스트 플랫폼의 문학 콘텐츠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소통의 장이 되는 새로운 아지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 중, ‘운중전파’는 멀리 중국에 있는 청취자들과 국경을 넘어 함께 한국을 읽는 경험을 공유한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국 문학을 소개해 드리는 팟캐스트 &l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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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 문학예술 융합 인터뷰 : 포엠맥 편 채미나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잃을 게 없어요. 너무 겁먹지 마세요. 요즘 핫한 SNS인 인스타그램에서는 시가 유행이자 젊은 세대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시를 계속해서 읽던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시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한 하나의 흐름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소규모 문학 매거진 포엠맥(@poemmag)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안녕하세요! 우선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먼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포엠매거진이고, 인스타그램에서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소개할 것은 없습니다. 포엠맥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엄청 좋아했어요. 꾸준히 읽고, 혼자 쓰다가 독립 출판도 하고요. 시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전공은 패션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졸업하고 회사도 다녔지만 미련이 남더라고요. 시를 주제로 해서 콘텐츠화하고 싶다, 시의 매력을 더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퇴사하자마자 바로 포엠맥 계정(@poemmag)을 만들었어요.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저는 전에도 유튜버처럼 콘텐츠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자서도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카피라이팅, 큐레이션 등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원래부터 콘텐츠 제작 쪽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글을 쓰시다가 자연스럽게 넘어오신 걸까요? 처음에는 100% 쓰는 쪽에 더 가까웠어요. 스물부터 스물여덟까지 세 권의 시집을 독립 출판했어요. 처음의 꿈은 시인이었어요.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시인을 병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전업 시인은 힘드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저는 쓰는 쪽보다 사람들을 혹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더 적합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글 쓰는 것만큼 디자인과 마케팅을 좋아하거든요.(하하) 시에 전념하면 두 가지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총합해 본 것이 바로 포엠맥이에요. 저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더 애착을 갖게 되어요. 포엠맥을 운영하면서 좋았던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포엠맥을 운영하는 매일매일이 기뻐요.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도 즐겁고, 업로드 하였을 때 사람들이 반응을 남겨 주는 걸 보는 일도 즐거워요. 매 순간 행복하지만, 최근에는 열흘 정도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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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건 @너말고 '너’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궁금한 건 @너말고 '너’ 배연주 대화하다가 들으면 좋은 말 중 하나는 이거다. “요즘 읽은 책 중에 좋았던 거 뭐야?” 그 말을 들으면 30분은 떠들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질문 받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기보다 먼저 보여주고 싶다. 내가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청소년 장편소설 과 단편소설집 다. ‘가장 좋다’라고 무언가를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좋은 것에 순위를 매기고 기준을 정하는 건 힘들다. 그럼에도 두 책이 바로 떠오른 건 다시 읽고 싶어져서였다. 직장 동료들과 2~3주에 한 번 모여서 점심 독서모임을 하는데 같이 읽을 책을 내가 정할 차례였다. 나는 을 골랐다. 나도 다시 읽고 싶었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했다. 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면서 올해 읽은 책들 중 그 책들이 가장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걸 주변에 나누고 싶은 마음과 다시 읽으며 되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두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소재로 sns가 등장한다. 의 등장인물들은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과 DM으로 소통한다. 의 ‘나주’는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를 운영한다. 나도 주인공들처럼 두 소설의 리뷰를 sns 이미지 속에 담아 보았다. 먼저 인스타그램. 의 친구들이 쓰는 sns는 인스타그램으로 추정된다. 독서모임을 한 후에 생각했던 것을 썼다. 가상의 DM이지만 몇몇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내가 만약 실제로 저 게시물을 올린다면 oo이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하면서. 평소에도 내가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이나 스토리를 올리면 그 주제로 대화를 거는 친구들이 있고, 고등학교 시절과 친구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있다.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늘 다정함이 배어 있다고 느낀다. 인스타그램은 친구들과 소통하는 곳이니까 발랄한 느낌이 담겨 있다면 페이스북에서는 좀 더 사적이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잘 쓰이지 않는 sns. 내가 가끔 비공개로 일기를 쓰러 가는 곳. ‘나는 사실, 내가 참 싫다.’라는 소설 속 문장을 좋아하면서도 어쩐지 친구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페이스북 비공개 게시물로는 무람없이 올릴 수 있다. 아이디와 프로필 사진 이미지는 가상으로 만들었지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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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방 한 칸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문장의 방 한 칸 ― 창작촌 탐방기 〈예버덩문학의집〉 편 이형초 안녕! 문똑이들! 나는 문장웹진의 숨겨진 자식 문장이라고 해. 글월 문(文)에 담 장(墻) 담장마다 나의 글을 새기라는 의미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셨지만 그래서 강원도 횡성에 있는 문학 창작촌으로 향하고 있어. 문장웹진 독자들의 열띤 삶을 보면서 나도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거든! 삼면이 주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숲과 들판이 아름답게 펼쳐진 흰 집! 한 시인의 개인 사유지가 창작촌으로 만들어졌다고 해. 어딘지 궁금하지? 날 따라와! 바로 〈예버덩문학의집〉이야! 내가 한 달간 묵을 창작촌을 소개할게. 이곳은 작가들과 작가지망생들이 훌륭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할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입주와 관련해서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상단의 QR코드로 접속해서 홈페이지를 살펴봐! 잠깐! 저 익숙한 뒷모습은?! 〈예버덩문학의집〉을 관리하는 대표이자 시인인 조명 작가님이셔! 선생님을 따라 창작촌을 둘러볼까? 입구로 들어오면 잣나무 숲속에 방강로 3개가 쭉 이어져 있고 오른쪽엔 주천강이 훤히 보이는 야외무대가 있어. 이곳에서 문학 특강, 연주, 연극, 낭독회 등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를 주최한다고 해. 참여 작가들에게는 소정의 활동비가 주어진다고 하니 문장이는 지금부터 낭독 연습을 시작할 거야! 안쪽으로 쭉 가면 주천강이 보이는 둥근 마당이 있는데 이곳을 ‘노을버덩’이라고 부른대. 입주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주천강과 노을을 바라보며 심신을 정화하고 싶을 때 문화쉼터로 활용된다고 해. 강물 소리가 들리는 노을버덩, 예쁘덩! 이곳이 〈예버덩〉 본관 입구야! 안으로 들어가 볼까? 입구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야외 테이블! 날씨가 좋으면 이 테라스에서 다 함께 식사해. 공동 도서관부터 둘러보자!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독서와 창작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이곳에서 작가를 초청해 특강을 하거나 소규모 작가와의 대화, 낭독회, 예버덩 워크숍을 주최하는 등 여러 가지 문학 프로그램을 연대. 문장이의 방을 소개할게! 입주하는 동안 개인 집필실에서 방해받지 않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어. 문장이가 오기 전에 이불도 깨끗하게 세탁해 주시고 방도 청소해 주셨어. 청소도구, 세면도구(샴푸, 린스, 비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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