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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26

2024년 2월호
2024년 2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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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02.01
복숭아 심기

복숭아 심기 서고운 물줄기는 맹렬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시장 주차장이 있던 자리에 주상복합이 들어선다고 했고, 한창 땅을 파던 중에 수맥을 건드렸다. 수천 년 넘게 땅 아래를 누볐을 지하수가 터졌다. 5미터가 넘는 높이의 물기둥 주위로 서른다섯 가구가 대피했다. 공사는 중단되었지만 물을 멈추기는 어려웠다. 시장은 잠정적 휴업에 들어갔다. 동네 전체가 거대한 아쿠아리움이 된 듯 보였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자매의 빌라 아래로도 물줄기는 선명하게 보였다. 금정은 어제와 똑같은 모양으로 베란다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니.” 은정의 부름에 금정이 초점 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우리 집은 괜찮을 거야. 은정은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 물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금정과 살림을 합치면서 겨우겨우 이사를 마친 지 석 달도 되지 않았다. 자매는 말없이 잠시간 같은 곳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너는 몰라.” 금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를?” “자꾸 죽는단 말이지.” 금정은 무언가 심기를 좋아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달걀 껍데기를 말리고 빻아서 흙에 뿌렸다. 작은 바질 모종을 키워 꽃을 피우고 씨를 털어내 바질 2세를 만들기도 하고, 레몬의 씨앗을 하나하나 파내서 심기도 했다. 아보카도를 먹고 나선 아보카도 씨앗을, 사과를 먹고 나선 사과 씨앗을 심었다. 타일 바닥에는 흙이 버적버적 밟혔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정원은 아니었다. 금정은 풀을 키워냄으로써 구원을 찾으려는 듯 아등바등 씨를 파내고 심고 물을 주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엄마 바질의 잎은 하루가 다르게 축축 늘어졌다. 쑥쑥 자라나던 아기 바질들은 생장을 멈추고 점차 검어졌다. 사과 싹은 손가락 하나만큼 자라더니 갑자기 말라 죽어버렸다. 물을 너무 안 주었나. 아니면 많이 주었나. 뭘 해도 탈이 나는 게 제 모습 같다며 금정은 풀이 죽었다. 금정 역시 점차로 말라 가는 듯했다. 일까지 그만두고 집 안에만 처박힌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갔다. “이상해.” “뭐가?” “다들 죽는다니까.” 죽는다니? 은정의 마음 한쪽이 따끔해졌다. “키우다 보면 좀 시들 때도 있는 거지. 겨울이잖아.” 금정은 푸석해진 레몬 잎사귀를 차례로 쓰다듬으며 도리질했다. “너는 시간이 어제보다 오늘 더 빨라진 걸 못 느끼겠니?” 금정은 어느새 복숭아 화분을 붙잡고 은정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두 달 전 복숭아를 먹고 나서 만든 화분이었다. 복숭아 씨앗은 단단한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어서 신발장을 뒤져 찾아낸 망치로 두들겨야 했다. 그렇게 꺼낸 뽀얀 속씨를 손바닥 크기의 화분에 심었다. 한 달 만에 아주 작은 싹이 트더니 이제 손가락 두 마디쯤 자라났다. “어쩌면 중력이

소설 2024.02.01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 이예린 1. 오늘 시애는 다시 이십대가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덜 깬 채로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어제 본 뉴스가 떠올랐다. 오늘부터 만 나이가 도입된다고 했다. 다음 달이 시애의 생일이므로 겨우 보름 남짓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이십대였다. 이십대라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고, 사실 그건 서른이 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시애뿐 아니라 갑자기 한두 살씩 어려진 사람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겠지. 모두 다 같이 어려지니 대단한 이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시애는 까먹지 않으려 애쓰듯 새로 부여받은 제 나이를 몇 번씩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하면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이 되어 새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처럼. 이불을 개고, 짧게 스트레칭 하려는데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애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일곱 시도 안 되었는데······. 어젯밤 엄마는 시애에게 일찍 일어나 할머니 아침 식사 좀 차려 드리라고 신신당부했다. 시애는 알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불가능하리라는 걸 알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꼭두새벽에 일어났고, 단둘이 있을 때면 할머니가 시애의 식사를 챙겼다. 평소에 전적으로 엄마에게 주방을 맡기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할머니에게는 그게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시애가 할머니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했더라도 잠귀가 밝은 할머니에게 칼과 도마를 금세 빼앗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시애가 주방에 들어서면 불안해했다. 목이 말라서 냉장고 문만 열어도 무얼 하느냐고 추궁하듯 캐물었다. 그러면 시애는 ‘물 마시려고요.’ 하고 이유도 모른 채 자꾸 변명했다. 할머니의 그런 태도는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역할과 영역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에 가깝다고 시애는 늘 생각했다. 할머니는 압력밥솥 앞에서 주걱을 들고 서 있었다. 시애가 나오자 조급해졌는지 재빨리 밥솥 추를 빼는 게 보였다. 뚜껑에서 김이 요란하게 올라왔다. 시애는 아침 인사를 한 뒤 냉장고로 향했다. 엄마가 만들어 둔 밑반찬들을 꺼내 하나씩 식탁에 올렸다. 수저도 나란히 놓고,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가 할머니 자리에 두었다. 국은 없었다. 엄마는 시금치를 넣고 된장국이라도 끓여먹으라고 했지만, 할머니가 그냥 먹자고 해서 냄비를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었다. 시애는 평소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와 단둘이 있는 날엔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혼자서 드시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것 좀 먹어 봐, 엄마가 맛있게 무쳐 놨어.” 할머니는 자꾸만 나물을 먹어 보라며 반찬 통을 시애 쪽으로 들이밀었다. 대부분 당신이 하천가나 뒷산에서 캐온 것들, 혹은 시장에서 싸다며 한보따리씩 사온 것들이었다. 시애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열심히 집어 들었지만 쉬이 넘기지는 못했다. 참나물, 취나물, 미나리, 방풍나물에 씀바귀··&midd

소설 2024.02.01
십일월이 지나면

십일월이 지나면 정선임 1 어느 것이든 참여해야 했다. 노래자랑, 볼링, 농구, 윷놀이, 탁구, 축구. 루시아가 줄줄이 나열하는 단어들이 생소했다. 이런 종류의 선택과 마주한 것이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대학 신입생 시절 이후 처음이지 않을까. 소영은 손을 들까 말까 움찔거리다 고개를 돌려 대식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대식은 윷놀이를 일찌감치 골랐다.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입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소영은 욱신거려 오는 왼쪽 발목을 주물렀다. “노래자랑과 축구만 남았습니다. 아직 정하지 않은 보호자님?” 망설이는 사이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노래자랑만은 피하고 싶어 소영은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축구라고 해봐야 테이블 게임기였다. 소영과 동시에 누군가 손을 들었다. “김해숙 마리아 보호자님과 윤대식 요한 보호자님, 축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사람도 파란색 줄로 된 보호자용 명찰을 목에 걸었다. 명찰에는 정민재, 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소영은 자기소개를 할 때부터 민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보호자와 함께하는 5박 6일 교육 프로그램은 요양원 입소 전 절차였다. 이곳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다른 병이 아닌 암이어야 했고 혼자서도 거동할 수 있어야 했다. 보호자가 교육 프로그램에 동행해야 한다는 규정이 제일 까다로웠다. 스무 명 정도 새로 입소하는 환자들의 보호자는 대부분 배우자였다. 보호자로 자녀가 동반한 경우는 소영과 민재뿐이었다. 60대도 어리다는 소리를 듣는 곳에서 그들은 가장 젊었다. 휴가철도 아니고 연휴도 없는 11월 평일에 엿새간 시간이 되는 40대가 얼마나 될까. 다른 입소자와 보호자들이 착한 딸, 아들이라고 칭찬했지만 내심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영도 민재가 궁금했으니까. 요양원은 충북 청주 시내에서 떨어진 마을 근처에 있었다.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터라 기도하는 곳도 마련되어 있었다. 단점은 거의 없었다. 공항 근처여서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무엇보다 다른 요양원보다 가격이 저렴해 신청자가 꽤 많았다. 소영은 여름이 시작될 무렵 대기 신청을 걸어 두었다. 그사이 왼쪽 발목이 골절됐고 수술을 받았다. 통깁스와 목발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걸을 때면 절룩거렸고 오래 걸으면 부었다. 자리가 생겼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물리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 상태였으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환자는 물론 보호자에게도 세 끼 식사가 영양식으로 제공된다는 블로그 후기를 훑어보면서 공기 좋은 곳에서 쉬고 오는 셈 치자고 좋게 생각했다. 일 년 전, 대식이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소영은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대식이 수술을 받고 입원한 며칠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일상을 지켰다. 간병인을 구했고 오빠와 나눠서 비용을 보탰다. 그럼에도 대식은 소영을 끊임없이 호출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간병이라는 몫을 짊어지게 된 사례를

소설 2024.02.01
그중 하나

그중 하나 정은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문을 열었다. 실수였다. 올 사람도, 올 물건도 없었다. 음식 배달도 하루에 한 번 시킬까 말까였다. 뒤늦게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새까만 구둣발이 문 사이에//문틈 사이로 끼어든 후였다. 구둣발은 그녀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순간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였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건 사고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한편 누가 먼저 문을 열었는지 짚고 넘어가려 할 터였다. 그녀는 그 어떤 교훈의 사례도 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데요. 저도 신을 믿지 않습니다. 뭘 살 돈도 없어요. 뭘 팔려고 온 게 아닙니다. 구둣발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한낮의 복도는 조용했다.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은 관처럼 길고 좁은 원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사는 사람은 많아도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올 사람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구둣발은 말만 전하고 가겠다고 받아쳤다. 다음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다. 구둣발은 시간이 없다며 딱 잘랐다. 문밖에서 말하라고 하자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면서 문만 열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결국 문을 열었다. 구둣발은 신고 있는 구두처럼 옷이며 가방, 손에 든 패드까지 온통 검은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해 보였다. 내일이라도 금방 잊을 만큼 흔한 얼굴이었다. 구둣발은 패드와 그녀를 번갈아 본 다음, 약속대로 간단하게 말했다. 죽어주십시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달려가서 구둣발을 밀어내고 문을 잠그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몸은 움츠러들기만 했다. 구둣발은 흉기를 꺼내거나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물었다. 왜 절 죽이려고 하세요? 저는 죽이겠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살인은 위법입니다. 죽어달라면서요? 어디까지나 권고입니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라면 모를까 죽어달라니, 권할 만한 사안도 아니었고 부탁치고는 무례했다. 하다못해 정수기 판매사원만큼의 정성은 있어야 하지 않나. 구둣발은 그녀에게 미안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정수기 판매사원들은 언제 어디서든 정수기의 과학적 구조며 필터의 효능 등 정수기의 장점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듣다 보면 집에 정수기 한 대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약정 기간과 위약금, 싱크대를 뚫고 일정 주기로 필터 점검이 필요하다는 건 계약 이후에서야 알았다. 제가 왜 죽어야 하나요? 당신이 왜 살아야 합니까?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둘러댈 거리가 없었다. 즐겨 보던 드라마는 오래전에 끝났고, 다니던 회사는 망했다. 사귀던 사람과는 헤어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삶은 단순했다. 늘 둘 중 하나였다. 일하거나 일하지 않거나, 눈을 감거나 뜨거나. 중학생이었을 적 그녀는 변호사를, 고등학생이 돼서는 동시통역사를 꿈꿨다. 둘 다 돈

소설 2024.01.01
그 개와 혁명

그 개와 혁명 예소연 태수 씨는 죽기 전까지 통 잠을 못 잤다. 수면제를 먹고 진정제를 먹어도 한두 시간 토막잠만 잤다. 늘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부리나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태수 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 태수 씨. 태수 씨는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면 꼭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 봤다. 꿈속에서 황천길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랬다. 그즈음 스마트 워치에 기록된 내 하루 수면 시간은 길어 봤자 세 시간이었다. 태수 씨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하다고. 그러면 나는 태수 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병원은 꼭 두 손바닥을 반듯이 펼쳐 놓은 것처럼 정확한 대칭 구조였다. 양 복도 끝 쪽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그 중심에는 각각 디귿 자 형태의 데스크가 있어 간호사들이 상주했다. 태수 씨와 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그 병원 복도를 밤새도록 돌았다. 종종 가래 뱉는 소리도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울었다.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태수 씨는 꾸벅꾸벅 졸았다.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고모는 나보고 나서지 말라고 했다. 희준에게 모든 걸 맡기라고. 나는 그런 고모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더한 것도 견뎠는걸요. 엄마까지 나를 말렸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직접 완장을 차고 장례식장을 지켜야 했다. 그게 태수 씨와 한 약속이었으니까. 태수 씨는 기억도 하지 못할 약속. 사경을 헤매며 해낸 약속. 태수 씨가 건강할 때, 나는 늘 돌아오는 제사 때마다 태수 씨와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태수 씨는 할아버지가 기함을 한다며 반바지도 못 입게 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늘 엄마 몫이었다. 나는 불필요한 인습이라고, 하다못해 태수 씨에게 당신 아버지 제사면 직접 과일이라도 놓으라고 소리를 쳤지만, 태수 씨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당신은 그걸 응당 받아들일 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태수 씨는 분명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니었나. 나는 분명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 씨의 모습을 좋아했던 것인데. 나는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다. 장례식 직원 몇몇이 와서 말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삿대질을 하고, 사촌동생인 희준의 어깨를 밀며 쫓아냈다. 그러는 사이, 해서는 안 될 말들 혹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해야만 했던 말들이 오갔다. 특히 할머니에게. 그렇게 술을 될 때까지 드시고 여기까지 와서는 더 할 말이 있으세요? 있냐고. 네가 그러고도 태수 씨 엄마야? 엄마냐고. 그래, 나 엄마 딸이다. 그럼? 태수 씨 딸은 아니냐? 내가 닮기는 누굴 닮아. 우리 집에 그럼, 유자 말고는 계집밖에 더 있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 첫 조문객이 왔다. 엄마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며 이름을 불렀다. 성식이 형. 태수 씨와 엄마는 모 대학 사학과 85학번이었는데, 만날

소설 2024.01.01
케이크 들어갈 자리

케이크 들어갈 자리 나규리 사무실에 들어서자 백열등이 켜졌다.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 같이 박수를 쳤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에선 서로의 생일에 전등을 껐다가 켜며 박수를 치는 문화가 생겼다. 품앗이 성격을 띤 소소한 이벤트를 이미 예상했던 나는 준비한 대로 놀라는 리액션을 보이며 자리로 이동했다. “장 대리 생일 축하해.” 팀장이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고 동료들이 거들었다. 책상에는 작은 꽃다발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3년 전부터 회사는 직원들의 기념일을 전문업체에 의뢰해서 관리했다. 야근하면 한밤중에야 집에 갈 텐데 케이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이런 복지가 처음 생겼을 때는 동료들과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지만, 부서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각자 케이크를 들고 귀가하게 됐다. 별수 없이 탕비실 냉장고로 갔지만 넣을 자리가 없었다. 바로 옆에 안이 들여다보이는 음료 냉장고로 시선을 돌렸다. 음료가 빠진 공간을 잘만 치우면 얼추 자리가 나올 것 같았다. 위 칸의 음료를 이리저리 옮겨 보았지만, 케이크가 들어갈 공간은 생기지 않았다. 잠시 서서 망설일 때 소모품 정리 담당자가 채워야 할 음료가 담긴 카트를 끌며 다가왔다. 곤란한 얼굴이었다. 케이크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은혜에게서 청첩장을 돌릴 식당을 확인해 달라는 문자가 왔다.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민재의 가게 링크를 보냈다. 단체 예약전화를 하며 결혼식도 알리고, 정신없었던 근황을 겸사겸사 말할 참이었다. 민재를 생각하자 그의 냉장고가 떠올랐다. 민재의 메탈 냉장고라면 분명 이런 케이크를 몇 개는 넣고도 남았을 것이다. 최소한 한 상자 정도는 들어갈 자리가 있을 텐데······. 케이크를 책상 모퉁이에 두고 업무를 시작했다. 서늘한 날씨 덕분에 쉽게 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투명 셀로판 너머로 자꾸 눈길이 갔다. 마치 민재의 부재중 전화처럼 은근히 신경 쓰였다. 늦깎이 복학생 민재는 졸업 후 바로 창업을 했다. 덕분에 나는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식당에서 용돈 벌이를 할 수 있었다. “준성아,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 “뭔데요? 아우 눈 매워.” “냉장고에 항상 이만큼의 자리는 꼭 비워 둬.” “왜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민재는 양파를 까던 내 옆에 서서 상반신을 냉장고로 기울인 채 속을 뒤졌다. 그는 요리할 때를 제외하고는 냉장고 속 식재료를 뒤지고 정리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혜성과 파혼한 이후에는 그 일이 강박적으로 변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직 생기지도 않은 무언가의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고집이 사치스럽게 보였다. 그는 열심히 고깃덩이를 옮기려고 치우는가 싶더니 결국 원래 자리에 다시 뒀다. 그의 행동이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지금

소설 2024.01.01
다시 멀리서 보면

다시 멀리서 보면 김유나 1 고향집으로 운전해 가며 자경은 열두 통의 전화를 걸고 받았다. 전부 업무 관련 전화였으며, 내용은 미팅 시간과 날짜, PT자료 발송 같은 시한에 관한 것들이었다. 자경은 라디오를 끄고 규민 씨에게 전화를 걸어 수정된 일정을 정리해 공유해 달라고 말했고, 온에어 날짜가 닥쳐 다급하게 수정해야 할 사항은 제작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고객사와 직접 소통해 달라고 말했다. 토요일이었지만 규민 씨나 제작팀 담당자나 자경의 전화를 숙연한 목소리로 받았다.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상중喪中이라는 걸 알았다. 진짜 문제는 안 읽은 메시지 78개가 쌓인 카카오톡 채팅방이었다. 그중 절반은 자경이 따로 받은 외주 일감과 관련된 메시지였다. ‘저걸 또 언제 다 확인하고 답장하나.’ 심란해진 와중에 내비게이션에서 ‘교통상황이 바뀌어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는 멘트가 나와 자경은 차선을 변경했다. 터널을 통과하자 함께 달리던 차들이 오른쪽 IC출구로 빠져나가며 고속도로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지난 몇 년간 수십 번을 달리며 자경에겐 이미 익숙한 도로였다. 자경은 지금이 속도를 내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시원하게 밟을 수 있는 마지막 도로였다. 계기판이 시속 118을 가리켰고, 고향집은 가까워지는 동시에 자경에게서 영영 멀어지고 있었다. 자경은 소리도 내지 않고 눈을 끔뻑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길을 막아선 차들을 추월하면서, 1차로와 2차로를 가로지르며, 국도에 진입한 어느 순간 빗방울이 떨어져 와이퍼가 앞유리를 닦아내기 전까지. * 이직한 지 1년이 갓 지난 지금의 회사는 지난 12년간 자경이 다닌 종합홍보대행사 중 가장 규모가 작았다. 알고 지내던 대표의 제안에 연봉 하나만 보고 옮겨온 곳이었다. 체계가 없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부딪혀 보니 정도가 심했다. 자경의 직책은 브랜드마케팅팀 팀장이었으나 팀원 관리와 업무 분장은 물론 기획, 영업, 제작까지 손을 대야 했고, 급할 땐 외부에서 장비를 빌려 촬영과 편집까지 했다. 신입이 해야 할일과 실장이 해야 할일을 모두 하는 격이었다. “허 팀장, 바쁜 건 알겠는데 회의 때 말 좀 해라.” 모두가 떠난 회의실에서 대표가 말했다. 온라인에 기반을 둔 아웃도어 회사의 신상 방한화 기획을 엎고 원점에서 출발하자는 결론이 난 직후였다. 그날 자경은 대표와 직원들이 말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한 마디 잘못 얹었다가 일거리가 늘어나는 게 두렵기도 했고, 테이블 아래서 핸드폰으로 외주 일감으로 받은 로고 시안 피드백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대표의 말에 자경은 앞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카톡 프로필 사진 좀 상쾌한 걸로 바꿔. 그거 나 보라고 해놓은 거 아니지?” 대표님을 생각할 여유 같은 게 없다고 말하려다, 자경은 그냥 궁금해져 물었다. “버스터 키튼 모르세요?” “버스터 뭐? 밈이야?” 대표가

소설 2024.01.01
북극성 찾기

북극성 찾기 염승숙 출근 첫날부터 ‘강’은 “나갑니다!”하며 양복 재킷을 걸쳐 입었다. “아, 저기, 변호사님.” 뒤따라가며 불렀지만 그는 발 빠르게 사무실에서 벗어났다. 나는 어쩐지 안도하며 주저앉듯 자리로 돌아왔었던가? 뭐부터 해야 하나 싶어서 망설이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한 바퀴 빙 돌았던가? 그러다 찬찬히 한 바퀴 더, 두 바퀴, 세 바퀴······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변호사 사무실에 취업하게 됐네, 싶어져서 휑한 사무실을 둘러보았었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올려 받는 수준이었지만 집에서 가까웠고,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 없어보였다. 면접-흡사 5분 면담과도 같았던- 때도, 강은 “제가 능력이 안돼서 사무장 둘 처지가 못돼요. 당분간은 주영 씨가 전화 받아주시고, 소소한 것들만 좀 도와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이력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저는 외근이 많으니까 식사 알아서 드시고, 아이가 네 시 반에 온다고요? 바로 퇴근하세요.”라고 말해주어서 그의 건조하고 따분한 표정에도 나는 감사했다. 태도는 딱딱한데 내용은 따뜻해서 뒤돌아서면 알쏭달쏭한 화법이었다. 나는 거의 온종일 혼자였다. 출근도 하기 전에 강으로부터 “전 오늘 부산 내려갑니다.”라는 메시지가 와있거나, 전날 밤을 꼬박 샜는지 퀭한 눈빛으로 퇴근하는 그와 사무실 문을 여는 동시에 마주친 적도 더러 있었다. “아, 책상 더러운 거 압니다. 치우지 마세요.” 나는 서류 한 장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환기를 시키고, 먼지를 털고, 밀대를 밀었다. 복사기에 용지를 채우고, 전기나 수도 납부 고지서를 챙기고, 탕비실 싱크대에서 컵을 씻었다. 문의 전화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아서 전화기의 코드가 뽑혀 있지 않나 확인했을 정도로 한가했다. 강이 휴대전화로 착신 전환된 기능을 풀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의 한 달이나 지나서야 서로가 알게 되었지만. 취업 관련해서는 ‘장’이 다리를 놓아줬는데, 그는 내가 사는 다세대주택 일층에서 ‘장 부동산’을 운영하는 부동산 업자였다. “사무실을 구해줬는데 사무원까지 구해달라니 이거 중개료를 또 받아 말아? 사모님 경력 살려보실 생각 없으신가 해서. 크게 할 일은 없답니다.” 장의 말에 이력서를 준비했다. 남편은 “그 되도 않는 염전밭에 왜 또 들어가려고 하냐.”며, 내년에 당장 아이 학교 보낼 걱정을 했지만 나는 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월급이 적다고 해서 ‘염전밭’이라는 의미였는데 세상 어느 염전밭도 ‘애엄마’를 잘 받아주지 않으니까. 이제 정말 아이 피아노 학원이라도 등록하려면 돈벌이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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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3. 새로운 돌봄 공백 교사의 위기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래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제출되었다. 멀리는 1995년의 5·31 교육개혁에서부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 교육의 서비스화로 인해 서비스 수혜자와 공급자로 바뀐 학부모1)와 교사의 관계, 저출산 등이 심층적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교사의 위기가 사실상 여러 사안들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임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양한 방향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현 사태의 책임이 인기 예능 2)에 상담자로 출연한 오은영 박사의 교육관에 일정 부분 있다고 보고 한동안 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던 일과 앞서 언급한 여러 분석들이 사실은 교육 소비자이자 민원 제기자이자 ‘금쪽이’의 양육자, 그리고 그들이 길러낸 금쪽이들을 공통적으로 문제 대상으로 가리킨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물론 여기에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교사의 죽음에 주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정황들과 이를 교권침해의 주된 요소로 꼽는 교사의 목소리3)가 자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의들 틈에서 ‘맘충이 진상 학부모가 된다’는 말과 학교 및 가정 내 체벌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의견들이 큰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분석들이나 ‘괴물 부모’ 등과 같은 새로운 명명이 의도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혐오의 정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관련한 사유를 한여진의 다음 시를 통해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에 따르면 누수의 원인은 수십 가지나 되고 또 누수라는 것은 꼭 한 가지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쪽에서 새던 것을 잡으니 다음날에는 저쪽에서 새기도 하는 것이라서 결국 한번 발생한 누수는 지속적으로 모두를 의혹 속에 빠뜨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도 위층에 사는 사람도 다 같이 한마디씩 보태지만 물은 계속 흐르고 그런데 물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흐르는 것 자기소개가 흘러가고 그때 뒤늦게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합류하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안이했던 거죠 모두가 누수를 잡기 위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곳은 참 조용하군요 원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 울고 있었다 * 법률나무,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 서울문학, 2021. ― 한여진, 「조사」(『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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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 천선란의 『이끼숲』과 김초엽의 『파견자들』에 관하여 조윤정 1. 지하 도시의 건설과 세계의 배치 지하 건축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방식이다. 고대 도시에서 지하는 포도주 저장소와 같은 곳간, 카타콤(Catacomb)과 같은 무덤이나 도피처로 활용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하를 훨씬 다양한 형태로 점유하고 있다. 각종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이 지하 가로망이나 교통 시스템과 바로 연결됨에 따라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미래의 지하 공간은 현재의 우리 삶을 확장한,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지하는 고립의 프레임을 넘어 확장성과 입체성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하 공간은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빌딩들이 줄 수 없는 연결의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공간과 공간의 연결로 바라보게 해준다. 또한, 지상의 영향을 덜 받는 지하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환경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밀폐형 미래도시는 기후 위기에 따른 재해를 타개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적극적인 대안이다. 천선란과 김초엽의 최근 소설1)에 등장하는 지하 도시는 다시금 지하 공간을 도피처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두 작가의 소설에서 지하 도시는 고대와는 달리 인류 전체가 지하로 옮겨간 형국이며, 지상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곳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국가별 경계를 염두에 둔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지구라는 행성 단위로 사유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통제당하고 감시당한다. 『이끼숲』에서 하루에 한 알 복용해야 하는 “VA2X”(27)와 이마에 삽입된 “칩”(113)은 생명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파견자들』에서 인간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보호소로 위장한 연구소에 격리되거나 “실험체”(273)로 관리된다. 오늘날 기후나 면역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것에 대한 상이한 이해들에 다가가는 일을 앞당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은 세계라는 관념을 흔들고 인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성으로 관심을 돌린다. 행성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지정학적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지도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지도들의 경계선은 정복자의 노획물과 다름없으며 국경은 대개 전쟁이나 식민화를 통해 만들어졌다.2) 소설 속 지하 도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세계의 좌표들을 유예하거나 버림으로써 세계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전도되고 재설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 밖의 다른 행성이 아니라 오로지 지구 내에서 모두가 살아 나가야 할 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배치는 무생물로 존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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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1)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1)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0. 복수극의 이면 고백하자면, 나 역시 〈더 글로리〉1)의 애청자였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송혜교 분)이 계획대로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의 딸 하예솔(오지율 분)의 담임교사가 되자 복수가 언제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기다리느라 초조했고, 가해자들의 삶이 하나씩 망가져 갈 때에는 온 마음으로 기뻤다. 살인, 폭력, 리벤지 포르노 등이 얽힌 그녀의 보복 과정에는 분명 잔혹한 데가 있었지만 이를 즐기는 데 내가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문동은의 복수에 쉽게 동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폭력이 어떻게 행해졌으며 또한 어떻게 방관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각각의 에피소드와 그녀의 몸에 여전히 선명한 상흔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앙갚음을 정당하게 여기게 하는 주요한 요소였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지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복수의 와중에도 그녀가 ‘올바른’ 선생님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만큼은 진심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명초 1학년 2반 담임으로 학생들 앞에 처음 선 그녀가 앞으로 이 교실에서는 부모의 직업과 재력과 인맥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더 좋은 옷과 차와 집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를 괴롭히지 말 것을 엄포할 때, 하예솔에게 어떠한 해도 직접적으로는 가하지 않으면서도 죄 없는 그녀가 결국 받게 될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때, 나는 이 복수를 더욱 응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동은의 모습은 드라마가 그와 대비되는 교사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더욱 돋보였다. 문동은의 고등학교 시절 담임으로 학교폭력을 방관하고 오히려 가해자 편에서 합의를 종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던 김종문(박윤희 분)과 자신이 교사로 부임한 초등학교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치마 속을 촬영하는 추정호(허동원 분)는 정확히 문동은과 대극되는 자리에 있다. 작가는 이 ‘올바르지 않은’ 교사들을 극 중에서 모두 처단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김종문은 자신을 둘러싼 추문으로 장학사가 되지 못할 위기에 처한, 역시나 교사인 아들(강길우 분)에게 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추정호는 하예솔의 친부인 전재준(박성훈 분)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맞는다. 2000년대 이전에 학창 시절을 보내며 교사의 물리적 · 언어적 폭력은 물론 젠더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이라면 이러한 결론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단죄가 이처럼 복수의 주요 에피소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이 복수극의 이면에는 교사와 학생 간의 오래된 위계 관계가 자리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런데 복수를 실행하기 위한 문동은의 주요 전략을 다시 세심히 살펴보면 이는 충분한 설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문동은이 박연진 딸의 담임이 되려고 노력한 것 자체가 교사와 학생만이 아닌, 교사와 학부모의 위계 구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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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김다솔 1. 이 유령은 그 유령이 아니다. 이 글은 한국 소설과 관련하여 “2020년대적인 유령적 상상력의 힘을 톺아보려는 시선”1)을 모색해 보고 싶다는 다소 거창하고 민망한 바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여기에는 최근의 소설들에서 대거 출몰하는 유령들을 향한 흥미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향한 비평적 관심에 이끌린 사정 역시도 함께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최근의 유령들을 유독 ‘인간적’2)으로 보거나, 그들이 현실에서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힘을 가졌다는 평가다. 논의에 앞서 결론을 먼저 밝혀 두자면, 그것만으로 최근의 유령들을 간단히 정리해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어떤 관점이든지 사태의 총체를 담지 못하는 필연적인 결여를 안고 있다는 통상적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20년대의 유령이 지닌 중요한 특수성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무언가의 이면, 즉 그림자로 나타나는 유령이 반드시 인간과만 관련된 것일 필요는 없다. 유령은 그 자체로 인간 아닌 무언가를 지칭할 때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던가. 특히 인류세 속에서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겪으며 비인간 전회라는 전환이 이미 당도했음을 절감하는 지금, 행위자로서의 비인간 존재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어 가려는 우리에게 유령은 오히려 인간-됨을 허무는 무언가로 접촉해 오는 듯도 하다.3) 또한 후자의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세계가 어떠한 인과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계기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자유롭게 유령과 접속”4) 중이며, 따라서 “그들의 삶을 특정하게 속박하고 규정하고 있는 듯한 사회에 대해 어떤 방식의 구체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것은 어려워 보”이기에 “자기위안과 무기력의 상태를 탈피”할 방법을 소설이 더 찾아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5)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비교 대상으로서 이전 시대의 한국 문학 속 유령과 환상의 경향을 논의하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여 현재의 유령들을 바라보기에 다소 문제적이다. 자신을 산 죽음의 영역으로 내몬 세계와 불화하고 적대하면서 상징계에 구멍을 내던 실재로서의 유령6)과 견주어 보았을 때, 작금의 유령들은 지나치게 연약하다는 것이다. 문제를 조심스럽게 확대해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비평의 위기를 논하는 평단의 상황과 함께 놓고 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인아영은 최근의 글에서 동시대 한국 문학 비평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진단, 즉 ‘무(無)비판’성과, 반대로 비판적 사고를 지식-권력의 기능으로 사용해 온 비평의 ‘과(過)비판’이라는 의견들을 검토하며 비평이 취해야 할 어떤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인아영에게 이러한 평가들은 사실상 “비판을 행위자들의 구체적인 실천이 아니라 주어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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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3)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는가 (3) 송종원 1. 문제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1회 차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말해두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이근화시의 기묘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인 듯 어느 맑게 개인 날에 시금치를 삶고 북어를 찢는다 골목마다 장미가 피어나고 오후에는 차를 마신다 어느 맑은 날에는, 낮잠을 자고 어김없이 목욕을 하고 나는 또 나인 듯이 외출을 한다 나는 나에게 다 이른 것처럼 클랙슨을 울리고 정말 나인 것처럼 상스럽게 중얼거린다 국부적으로 내리는 비, 어느 날엔가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빗방울은 말없이 떨어진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손등을 어깨를 훔쳐본다 -「지붕 위의 식사」 전문1)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른하게 쓰인 인상이다. 낮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외출을 하고, 그러다 간혹 욕설도 하고, 어딘가 스스로에게도 조금은 낯선 나의 모습에 집중 내지 도취되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기에 꽤 그럴듯한 ‘나’처럼 보인다. 만끽까지는 아니지만 나에 심취된 정황이 꽤나 선명하다. 그런데 이를 나르시시즘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성별이 누구의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정 성별에 대한 세계의 압박을 몰라 볼 때 자아의 빈곤 상태를 자아의 도취로 읽는 일이 벌어진다. 약간 우회하자면, ‘내’가 아니라 이 시에 쓰인 ‘날’에 대해 우선 주목해보자. 이 날은 어떤 날일까. 시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반복되는 ‘어느 맑은 날’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특별한 날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날은 내가 나에게 이를 수 있는 일이 특별히 허용된 날인 듯하며, 나의 생의 국부적인 날이고, 남의 몸이 되어가는 듯한 나의 몸을 감각하면서 나를 돌볼 수 있는 날이다. 거꾸로 다시 풀자. 평소 대부분의 나날은 내가 나에게 이를 수 없으며, 나를 돌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자아를 버리기를 요구받는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시의 화자를 한국사회의 20-30대 여성 정도로 간주해보면 우리는 의외의 진실을 마주한다. 한국에서 여성의 노동 생애를 비추어볼 때 젊은 여성들에게 일터는 점점 커지는 자기 소멸의 느낌을 맛보는 장소이다. 일터라는 공적 영역은 오랜 기간 남성이 정의 내리고, 남성이 지배하고, 남성의 권익을 유지해온 장소였다. 근대 자본주의가 확장해낸 수많은 일터에서 여성은 불청객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여성성’을 쩔쩔매며 관리해야 할 무엇으로 인식하게 된다.2) 같은 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류 남성성을 상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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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3)

안전의 방향 (3) 홍성희 * 2023년 가을 『자음과모음』에서 기획한 좌담은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1)라는 제목으로 지면에 발표되었다. ‘여성의 것’이라는 소유격을 가정하게 된 최근 문학장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좌담은 작가와 작품이, 현실 세계와 작품 속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최근의 경향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2021년에 발표된 박서련의 「그 소설」과 김보경의 「실종」을 2023년의 지금 다시 중요하게 읽게 되는 것은, 어떤 논의의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패턴을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라는 의문문의 맥락에서 문학과 현실을 분리하거나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데에는 어떤 면에서 마찬가지로, 안전을 향하는 방향성이 거듭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언어로써 창작할 때는 수많은 기제들 속에서 내적 검열을 하고 그 안에서 대결하며 나오는 것이 결국 내 창작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6년 이후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식하게 함으로써, 내가 쓰고 재현하고 있는 언어들이 이 세계의 오염된 언어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어디에서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했다고 봐야죠. 이건 아주 유의미한 전환이었고, 한국 문학의 새로운 장소를 열어 줬다고 여깁니다.(35) “문학적 현실을 실제 현실의 연장으로 간주”하여 “인물들에게 실제 현실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도덕성을 강요”(34)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우려 섞인 입장을 드러내는 발언들에 이어, 하재연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가능하게 한 ‘전환’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정리하고자 한다. 하재연의 발언에서 2016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전환’이란 현실 세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문학 창작에 ‘검열’이 작동하게 만드는, 그렇게 모든 언어가 동질해지도록 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검열’이라는 단어 대신 ‘어려움’이나 ‘갈등’과 같은 표현을 선택한다. ‘전환’을 이해하는 언어가 ‘검열’이 될 때 초점은 문학적 현실과 실제 현실, 문학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의 밀착을 ‘강요’하는 문학 ‘외부’ 현실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을 ‘어려움’이나 ‘내적 갈등’과 같은 언어로 소화할 때 초점은 창작자 혹은 문학의 ‘내부’ 동력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적 움직임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문학의 언어를 현실의 언어와 분리하여 “안전하고 안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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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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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4.02.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4차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연속좌담 '창작, 노동' 4차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4차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 ㅇ 일 시 : 2023년 12월 5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라운지 룸 ㅇ 참여자 : 서재진(시인), 정성우(소설가), 양기연(소설가), 임호균(미등단자), 채윤희(시인) 〈개회〉 서재진 : 저는 이번 기획 좌담에서 사회를 맡은 서재진입니다. 2017년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성우 : 저도 이번에 사회를 맡게 된 소설가 정성우입니다.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해서 현재 소설가로 활동 중입니다. 채윤희 : 채윤희입니다. 시를 쓰고 2022년에 동아일보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어서 기차 타고 왔습니다. (웃음) 양기연 : 저는 소설 쓰는 양기연입니다. 2022년도에 부산일보에서 등단했고 천안에 살고 있습니다. 임호균 : 저는 시 쓰는 임호균입니다. 등단은 아직 안 했고 2021년에 ‘같이 가는 기분’이라는 웹진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때부터 작품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재진 : 거주지는 어딘가요? 임호균 : 진천 살고 있습니다. 충북 진천. 정성우 : 다들 먼 데서 오셨네요. 서재진 : 성함이랑 거주 지역 간단하게 들어 봤고요. 최근 작품 활동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채윤희 작가님은 최근 쓰고 계시거나 관심 가진 소재 있으신가요? 채윤희 : 질문지를 공유 받은 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최근 쓴 것들을 보면서 반대로 내가 뭐에 관심이 있었지, 하고 유추를 해봤습니다. 밑에서는 전공한 사람도 적은 편이고 이렇게 모이려는 분들도 적고 직장을 병행하면서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모임을 가져도 지속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 혼자 쓰는 게 더 많은 것 같고. 주로 시선과 경계? 반복되는 표현들이 있더라고요. 마치와 것처럼. 그런 것들을 제가 자주 즐겨 쓰고 있다는 것을 뒤에서 알게 됐죠.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것도 써봐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양기연 : 저는 가장 최근에 디지털 소외 계층의 교통권 문제에 대한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들이 다 노인인데, 제가 노인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이번에도 노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습니다. 임호균 : 저는 최근 작품을 보니까 약간 기독교 색채가 들어간 작품을 많이 썼더라고요. 제가 기독교인이라 삶의 일정 부분을 반절 이상 차지해서 쓰다 보니까

기획 2024.01.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3차 〈문학 강연 시장〉

연속좌담 '창작, 노동' 3차 〈문학 강연 시장〉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3차 문학 강연 시장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3차 - 문학 강연 시장 ㅇ 일 시 : 2023년 12월 8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라운지 룸 ㅇ 참여자 : 유인혁(문학평론가), 김수희(용두어린이영어도서관장), 김승일(시인), 오한기(소설가), 이현진(와우북페스티벌 담당자) 〈개회〉 # Part 1 : 개회 및 자기소개 유인혁 :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유인혁입니다. 간단하게 오늘 모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2023년도 《문장 웹진》 기획좌담 ‘창작, 노동’ 4번째 시간입니다. 요즘 창작자들을 크리에이터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아는 창작자와 크리에이터라는 단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리에이터라는 말을 쓰면 전문가, 나아가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획좌담은 이렇게 생산자이자 노동자로서의 작가를 되짚어 보기 위한 의도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강연 시장입니다. 현재 강연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그리고 그 사이를 잇고 있는 여러 사람한테도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이자 산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강연 시장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가님 그리고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자분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제 소개를 다시 드리자면 저는 대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원으로 일하고, 특히 국책사업인 인문학 관련 연구 지원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인문학 대중화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요 몇 년간 작가나 영화감독 혹은 피디, 유튜버 등 다양한, 이른바 크리에이터들의 특강을 기획하고 운영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 삼아 오늘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각자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승일 : 네, 저는 김승일 시인입니다. 김수희 : 반갑습니다. 저는 서울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동대문문화재단 용두어린이영어도서관 관장 김수희입니다. 다양한 강연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한기 :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오한기입니다. 이현진 : 안녕하세요. 저는 와우컬처렉 대표 이현진입니다. 저희 회사는 서울 와우북페스티벌을 주최, 주관하고, 올해로 19회가 되었습니다. 북페스티벌은 매년 10월경에 열리고 토크나 강연 프로그램 30개에서 40개 정도 진행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올해 저희가 한 사업은 서울국제작가축제, 청소년인문교실사업 등으로 인문학과 문학 사업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기획 2023.12.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ㅇ 일 시 : 2023년 10월 13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세미나1실 ㅇ 참 여 - 사회자 :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 참여자 : 민선(웹소설가), 이은선(소설가), 조대한(문학평론가), 황종권(시인) 〈개회〉 이병철 :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획좌담은 총 4회로 계획되어 있는데 다 학교에 계시는 분들이라서 어쩌면 이번 주제가 제일 민감할 수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학교의 구조적인 내용까지도 짚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 내어 좌담에 참여해 주신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 인사는 하셨나요? 여기 구면도 계시고, 이은선 작가님하고 황종권 작가님은 예전에 같이 근무하셨죠? 그리고 민선 작가님과 저는 지난 학기에 명지전문대에서 수업했고요. 그리고 조대한 작가님도 명지전문대 심화 과정 지금도 나오고 계시고. 그리고 또 이렇게는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이은선 : 이렇게 다 학연과 지연인가요. 너무 좋다. (웃음) 민선 : 혹시 혈연은 없나요. (웃음) 이병철 : 저랑 조대한 작가님이 다닐 때는 민선 작가님이 안 계셨고요. 민선 : 지금 재학 중이라서요. 이병철 : 한신대 강의 나가시지 않나요? 조대한 : 아 거긴 아니에요. 서울예대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병철 : 그렇군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지금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 하시는 일이랑 간략하게 근황이라든가 자기소개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대한 : 저는 문학 평론을 쓰는 조대한이라고 합니다. 문학 평론은 2018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대학 강의는 2020년부터 사이버 강사로 시작해서 대면으로 바뀐 지금까지 두 개 정도 대학의 문창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선 : 저는 글 쓰는 민선이라고 합니다. 제가 꼭 외자라고 이름을 말하는데요. 안 하면 못 알아들으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웃음) 저는 2019년에 처음으로 웹소설을 냈고요. 최근까지 3종 나왔고, 연말에 연재 오픈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학 강의는 올해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은선 : 저는 2010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요. 안양예고에서 7년,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3년, 한신대 문예창작과에서 7년. 고등학교, 문학관,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이랑 읽기를&mi

기획 2023.12.01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2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2회) 독서모임 〈생글〉 사회, 원고정리 : 연산 참여자 : 제이필, 나경, 이슬, 지현 책 : 강효진 『오늘도 나를 대접합니다』(구름의시간, 2022) 연산 : 저는 아직도 단풍과 눈맞춤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단풍 명소를 찾아가려니 사람과 자동차에 단풍의 고상함마저 안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사진과 tv 뉴스로만 감상하고 있습니다. 11월입니다. 오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오지 않을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늘 책을 읽으며 느끼고 감상을 말하고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통해 삶이 한층 더 윤택하고 지혜로웠으면 합니다. 독서에 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잠시 들어 보겠습니다. 제이필 : 독서, 책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내가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인터넷 공간에는 수많은 책이 숲을 이루고 있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탐색하고 요리조리 살펴보는 것이 즐거움만큼 고단함도 있었어요. 그런데 모임에서 매달 함께 읽을 책을 서로 토론하며 선정하니 큰 고민 하나가 해결되어 좋았습니다. 독서는 좋은 책을 찾아내는 과정과 수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현 : 책을 읽는 것이 서서히 즐거움이 되고 의무처럼 느껴집니다. 독서 습관이 자리 잡아 가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책을 읽는 것만큼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없어요. 오롯이 책에만 집중하다 보니 잡념도 사라지고 그 순간만큼은 걱정도 사라졌어요. 독서는 집중력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두 번 한 권 두 권 책을 읽다 보니 독서의 재미와 묘미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재미와 감동 그리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나경 :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이 독서의 시즌입니다. 저도 사실 독서는 가을에 하자, 가을만 기다리며 그때 책을 읽자, 가을을 핑계 삼았어요. 독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좋은 것 같아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 진정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계절보다 가을에 책을 읽으면 더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어 좋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어요. 독서는 계절이 아닌 개인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슬 :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 같아요. 관심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 같아요. 저도 한때는 시간을 핑계로 책을 가까이 두지 못했어요. 현대인의 일상은 누구나 분주하고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일상이 독서를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이유와 핑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을 시간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니면 무슨 요일 이렇게 저 나름의 독서 계획을 만들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통해 좋은 책을 알게 되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독서의 기술과 기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산 : 역시 훌륭하십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저도

기획 2023.11.01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1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1회) 독서모임 〈생글〉 사회, 원고정리 : 연산 참여자 : 제이필, 나경, 이슬, 지현 책 : 차성환 『딸아, 행복했으면 좋겠다』(득수, 2023) 연산 : 한 달 만에 뵙지만 여전히 반갑네요. 추석 연휴는 다들 잘 보내셨는지요? 과식으로 고생하신 선생님은 안 계시겠지요? 음식 하느라 명절증후군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선생님도 당연히 안 계시겠죠? 벌써 일곱 번째 모임입니다. 오늘은 지난달에 말씀드린 대로 딸을 시집보낸 서른네 명 아버지들의 웃음과 눈물이 담긴 축사를 통해 아버지와 딸 그리고 가족과 가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결혼과 부부의 참 의미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과 말씀을 기대하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모임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려고 합니다. 4월 첫째 주 목요일에 시작한 우리 모임이 나에게 어떤 변화와 실천을 하게 하였는지 제이필 님부터 부탁드립니다. 제이필 : 벌써 일곱 번째에요? 정말 빠르네요. 저도 몇 개의 모임을 하지만 이 모임은 책과 글쓰기라는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라 기다리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숙제가 때로는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한 권의 책을 읽고 느낌을 단어와 문장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점점 수월하고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좋은 문장은 바른 문장으로부터, 독서는 가장 쉬운 글쓰기 방법이다,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경 : 사실 일상에서 스스로 어떤 책을 한 권 고르고 독서를 한다는 것은 늘 다짐이고 맹세에 그쳤지만 이 모임에 나오면서 의무감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책을 읽고 모임에서 느낌과 생각을 말하다 보니 말하는 요령과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토론을 통해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 모임은 절대로 결석하지 않을 겁니다. 연산 : 나경 선생님 오늘 공식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나경 : 네, 약속했습니다. 이슬 : 저도 솔직히 이 모임을 하기 전에는 책은 늘 우리 집의 또 다른 인테리어 역할에 그쳤지만 모임을 통해 집에 있는 책을 찾아 한두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 선정한 도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좋은 책을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후회도 많았습니다.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더 열심히 읽고 써보겠습니다. 지현 : 추석 연휴 잘 보내셨죠? 가정주부로만 살아오다 마음 편하게 책 읽고 글도 쓰는 이 시간이 너무 좋습니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 같아요.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저에게는 큰 행복이 되었습니다. 암튼 좋은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산 : 선생님들의 말씀에 저도 더 큰 용기와 희망이 생깁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알차게 준비하겠습니다. 자, 오늘 토론할 책부터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이 책은

기획 2023.11.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ㅇ 일 시 : 2023년 9월 7일(목)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세미나1실 ㅇ 참 여 - 사회자 : 한설(문학평론가) - 참여자 : 김희선(소설가), 신이인(시인), 윤치규(소설가), 이미경(극작가) 〈개회〉 한설 : 안녕하세요, 저는 평론가로 활동 중인 한설이라고 합니다. 《문장 웹진》에서 ‘창작’과 ‘노동’이라는 주제로 네 차례의 좌담을 기획했는데, 1회차인 이번 좌담은 작가라는 직업 외에도 문학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을 모시고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다른 일도 해요’ 정도의 소소한 대화를 예상하고 진행을 맡았는데, 《문장 웹진》의 역대 좌담을 살펴보니 등단제도를 비롯해 무거운 내용이 많더라고요. 진중함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제가 좌담을 잘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웃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나누고 좌담을 시작하면 좋을 듯합니다. ‘주업’과 ‘부업’이라는 이번 좌담의 주제를 생각해 다시 저부터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치과대학병원에서 구강병리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공부 중인 수련의입니다. 이런 자리에 오려면 연차를 써야 하는 직장인이기도 하고요. 반시계 방향으로 다른 분들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이인 : 어쩐지 늦게까지 이 자리가 비어 있어서 여기 위험한 자리인가 했는데 첫 번째 발화자의 자리였군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활동하는 신이인이라고 합니다. 문학 쪽 활동을 말씀드리면 2021년 《한국일보》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아직 신인이다 보니 발표할 지면을 받는 편이어서 2년 동안은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올해 초에는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이라는 시집도 한 권 냈습니다. 2년 동안 글만 쓴 건 아니고요. 문학 외적인 활동으로는 LUSH 알바생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굉장히 밝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물건을 세일즈하는 그런 이미지를 많이들 갖고 계신데, LUSH라는 브랜드에 대해서. 거기서 2년 동안 세일즈 파트타이머를 했고요. 직원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계속 파트타이머로 있고 싶어서. 최근에는 아디다스 코리아 판매직으로 이직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희선 :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김희선입니다. 원래는 약사로 일을 해왔고, 2011년 마흔

기획 2023.10.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3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장류진 『연수』(창비, 2023) 2023년 9월 6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드디어 마지막 3회 차 모임이에요. 오늘은 장류진 작가님의 소설집 『연수』에 대해 이야기 나눌 건데요. 단편집이다 보니 소설 하나하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한쑤 : 부담 없이 읽었어요. 전체적으로 작품이 너무 강하거나 무겁지 않고, 휙휙 책장을 넘기면서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주 깔끔한 소설이었어요. 다정 : 저는 여행 갈 때마다 책을 한두 권 들고 가요. 바쁜 업무 마치고 휴가 떠날 때 어떤 책을 가져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챙겼거든요.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가벼워서 그냥 흘러가는 내용도 아닌, 마음에 남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책이었어요. 굉장히 재미있게 보고 돌아왔어요. 숑숑 : 장류진 작가님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SNS에 올렸던 게 생각났어요. ‘작가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라고 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무 어둡진 않지만 이건 누구 얘기 같고 저건 누구 이야기 같아, 이렇게 이름 붙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점에서 예전 소설집들이랑 맥을 같이하는 느낌이었어요. 셔터맨 : 저는 진짜 오랜만에 소설집을 읽었어요. 마지막에 읽은 소설은 『기차와 생맥주』예요. 책 안에 소설파트도 있으니까. (웃음) 최근에는 실용서 또는 논픽션 위주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이 책도 사실 실제 이야기나 다름없는 스토리지만,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는데도 이질감이나 불편함이 없었어요. 제가 한번 책을 펴면 오래 읽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읽다가 자야지 하고 책장을 덮는데 (웃음) 한 꼭지를 다 읽고 시계를 보니까 30분이 흘러간 거예요.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지혜 : 단편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이야기 나눠 볼게요. 일단 이 책의 제목이자 처음 수록된 단편소설 ⌜연수⌟는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셔터맨 : 우리 모두 운전면허증을 가졌잖아요. 혹은 운전하고 있는 누군가의 차에 타본 경험이 있을 테니까 공감 가는 주제 같아요. 저는 이 책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을 때 ⌜연수⌟가 주인공 이름인 줄 알았어요. (웃음) 근데 책을 먼저 읽은 지혜 님이 ⌜연수⌟가 운전 연수의 '연수'라고 해서 더 읽고 싶더라고요. 운전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운전부심이 있잖아요. 소설 속에서는 어떤 운전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 하며 흥미롭게 읽었어요. 다정 : 저는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면허를 땄어요. 스타렉스를 운전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졸업하고 어린이집 교사가 되면서 잠자는 면허가 됐

기획 2023.09.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2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2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북스톤, 2022) 2023년 8월 6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늘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책, 최민석 작가님의 여행지 창간호 『기차와 생맥주』입니다. 책과 어울리는 맥주와 간단한 주전부리를 준비했으니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눠요. 숑숑 : 사실 저는 이 작가님이 누군지 잘 모른 채 가벼운 느낌으로 후루룩 읽었어요.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 앞부분 절반 정도 읽다가 모임 날짜를 생각하면서 속도를 조절했어요. 너무 빨리 읽으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웃음) 그래서 한참 쉬었다가 다시 읽곤 했는데, 앞부분 같은 경우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최근 시작한 글쓰기 모임 '모서리 기록단'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근데 중간 정도 지난 다음부터 모서리 기록단 때문에 여행책 관련자가 돼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저는 늘 '이 책 때문에 나무가 베어질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든요. 근데 에세이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일기처럼 자유롭게 적히다 보니 이 책을 돈 주고 살 만한지, 나무를 베어내고 책으로 남겨 둘 만한지를 자꾸만 떠올려요. 저는 주로 여행을 통해 의미 있는 생각을 했고 또 그 부분에 대해서 얼마큼 숙고했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책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여행 에세이와 결이 일치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표지에 여행지 창간호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잡지를 읽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고요. 지루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을 때 읽으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책 같아요. 한쑤 : 아마 제가 여기서 책 읽는 양이 제일 적을 것 같아요. 독서 취향도 좁은 편이고요. 주로 소설을 많이 봐서 에세이나 산문집을 많이 안 읽었어요. 이번 여행 에세이 장르는 안 읽어 본 분야라 이런 책이 나랑 잘 맞을까 궁금했어요. 파주로 혼자 여행 갔을 때나 친구들 만나러 갈 때,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주로 읽었어요. 멀미를 안 하는 편이라 몰입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페이지에 비해서 챕터가 엄청 많아서 놀랐는데, 정말 술술 읽혀서 책장이 잘 넘어갔어요. 다양한 나라와 도시가 등장하고 책에 담긴 에피소드도 많아서 책 읽을 때마다 색다른 매력을 느꼈어요. 그리고 뒷부분에 픽세이(픽션+에세이)가 신기했는데, 경험만 나열한 게 아니라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재미있었어요. 어디까지가 직접 겪은 일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고요. 계속 읽다 보니까 픽세이가 모두 사실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혼란을 주는 요소가 재미있었어요. 여행 에세이니까 공간이나 배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듯이 묘사를 한다거나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적혀 있는 걸 기대했는데 그것과는 다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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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 2023.11.15
「폴리스퀘어」외 6편

폴리스퀘어 조원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오토바이의 기억, 12월 벚나무는 벽돌처럼 단단했다 악몽과 흉몽에 번갈아 머리를 처박히는 순간 도형이 어긋났다 발목 하나가 피의 양념 두르고 버스 정류장까지 튕겨 나갔다 보드를 잃은 조각들 변질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탑승하고 벚꽃 피기 전 입체 공간으로 전력 질주했다 헬멧 조각이 볼링공처럼 우뚝 선 가로수를 원 스트라이크 아웃시킬 때 봄이 찾아왔다. 빨갛게 육계를 벗어나 해체된 뼈를 온전히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회색 제복의 비둘기 구구구 사이렌을 울리며 회식을 즐겼다 강박 닫은 문이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닫은 문이 열린 문일 수도 있다 씻은 손에서 씻지 않은 손들이 태어난다 위쪽 구멍을 막으니 아래쪽 구멍이 뚫리고 신발, 배수구, 화장실, 혓바닥, 겨드랑이 귀신은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든다 아가미도 없는 것들이 불을 지른다. 신문을 읊는다. 쌍욕을 한다. 담배를 피운다. 노래를 부른다. 가래를 뱉는다. 음흉하게 웃는다. 입 냄새를 풍긴다. 이히히히 이승에서 저승까지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걸어서 십 분 정도? 도망가기 위해 기차표를 산다. 기차는 없고 기적소리만 귀를 짓누른다 불면과 불안이 한이불 덮고 집요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몸을 버려야 하나 마음을 버려야 하나 가스와 전기, 창문과 열쇠, 시계와 손수건, 서류 가방과 냉장고, 밥통과 수도꼭지, 핸드폰과 컴퓨터 사물의 소리가 저벅저벅 공기를 가른다. 눈을 뜬다. 감는다. 다시 뜬다 물질과 의식이 한바탕 접전을 벌인다 고독한 장애 혼자가 좋다 숟가락 고봉으로 떠서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미련하게 모자, 장갑, 신발 같은 거 파묻은 지 오래 거북이 새끼는 바다로 가기 전 갈매기에게 잡아먹힌다 앵무새는 반복어를 쓰다, 예민한 주인에게 목이 잘리고 당신은 느리거나 되풀이하는 걸 참지 못한다 속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으니까 발음이 맞지 않는 말로 걸음이 맞지 않는 발로 당신의 경직된 얼굴을 피해 간다 혀가 끊기는 밤에는 숟가락에 모래를 퍼 담는다. 목이 막힐 때까지 해파리처럼 너절한 몸으로 뛰어든 바다 당신들 모두 절벽이어도 좋다 혼자 부서지는 법을 아니까 모른 척 좀 하지 말라고 정말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나는 조수간만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의 권위가 권총보다 무섭다 한 방 쏠 때마다 출렁출렁 춤추는 포말 내 몸은 절벽에 부딪힌 파탄의 물방울이다 신혼 한 칸의 방이라도 장만하면 우리 결혼하자. 작은 방 두 개쯤 거뜬히 잉태할 수 있겠지 십 개월만 품으면 새끼 방들 줄줄 태어나고 문틀에 그네를 매달아도 우리의 방은 생명력이 강하여 튼튼하게 잘 자랄 거야 벽돌이 벽돌을 낳고 기둥이 기둥을 낳아서 초록색 지붕 환하게 비치면 넝쿨 아래 멍든 몸 숨기고 밤마다 키득키득 웃어보자 깜깜한 데서 당신과 나 상스러운 표정 지우고 개 같은 성질도 잠시 멈추고 씨앗이 문제인 거야? 밭이 문제인 거야?

시·시조 2023.11.15
「잭 타르의 편지」외 6편

잭 타르의 편지 이윤길 시거의 푸른 연기에 싸여 포카를 치는 형제여. 바다는 뱃머리에 깃든 물결로 넘실거리고 바람은 리바이돈의 지느러미다. 뱃전으로 넘쳐 드는 파도로 삭구에 달린 목재블록이 밧줄과 함께 삐걱거린다. 용골이 부서지며 혈맥을 위협했다. 실습항해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침묵에 빠진 뱃사람들은 수장한 에드워드의 괴혈병은 이미 잊었다. 붉게 격노한 번개가 시에라 리온 강 벗어나자 선실로 날아들었다. 뱃전을 지배하는 것은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고 끊임없이 심장이 터지는 소리. 그러나 발가락에 힘을 주고 돛대 끝에 올랐다 사이클론의 공포와 결투했던 무용담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 형제여, 실러캔스 문신을 가진 내 형제여 면역의 문신 모리셔스 금발의 비키니를 이야기하면서도 흥분하 지 않았다. 파도는 높았으나 스웰 주기가 일정했으 므로 샤치 이빨을 벗어났다. 파도가 전혀 일지 않는 코코 킬링 섬 가까이에 가서는 곤한 잠도 잘 수 있 었다. 바람도 동남풍이었고 그 흔한 노무라깃해파리 도 보이지 않았다. 긴긴밤 인도양에서는 선장이 해 신과 흥정을 주고받듯 희망과 절망이 수평선을 스 쳤다가 사라지곤 했다. 찾아오는 바닷새도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의 아집과 만용이 툭툭 터져 온 바다 가 고요했다. 블루 홀 같은 배가 끝없이 출렁거렸다. 남적도에 매복했던 해마도 해류를 타고 멀어졌다. 전리품으로 끌려오는 한랭전선의 뒤를 따르는 적난운이 적군처럼 폭풍을 몰고 나타났다. 심연의 산호모래에선 꼬리 독침 노랑가오리가 얼굴만 내밀었다가 침잠했다. 운명에 위탁 당한 뱃머리는 파도 끝을 향해 치닫다가는 끝없이 바닥을 향해서 떨어졌다. 끌어 앉은 무릎 사이에서 한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바람을 받는 날, 사하린의 코르샤코프항에서 닻을 올리며 갑판의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처럼 무너지고 다시 또 무너지는 파도, 파도, 파도들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 바다는 무도하고 야만스러운 섬광 아래 하늘이 뒤틀리면서 시끄럽고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를 질 렀다. 평화스럽던 항해에 끼어드는 폭풍, 파도는 도망치는 뱃전을 후려쳤고 물보라에 쌓인 뱃머리 는 불행에 굴종하거나 악연에 순종했다. 천둥이 단 두대 칼날의 안쪽처럼 대서양 전역에서 빛났고 파 도는 싸우는 도사견처럼 흰 거품에 싸인 흰 이빨 을 번득였다. 녹슨 늑골의 비명을 집어삼킨 물짐승 일까. 선원들은 다 같이, 광기로 가득한 악마의 공 격을 방어했다. 깃털에 대한 유감 바다 위를 방황했을 뿐이지. 깃털은 허공을 장 악했고 나는 배를 탔지. 그때 나는 날개가 없었어. 강철 심장뿐이었어. 슬프게도 내려 쌓인 달빛이 무 겁다는 건 불행한 급소지. 깃털은 가벼움이야. 깃털 은 고요를 흩트리며 적막도 깨뜨리지, 내 항해에서. 내 머리를 혼돈으로 내려쳤지. 쭈그리고 앉은 머리 를 거듭거듭 내려치는 거야. 깃털이 쇠망치처럼··· 그건 끝없는 하이킥이었지. 한 방에 부어오른 뱃머 리가 얼마나 높이 솟던지. 내 눈물을, 거 봐

시·시조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시조 2023.11.15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시·시조 2023.11.15
「시간의 쪽방촌」외 6편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시·시조 2023.11.15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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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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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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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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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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