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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28

2024년 4월호
2024년 4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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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04.01
원형극장

원형극장 고은경 부유하는 청춘의 페르소나. 그를 수식할 때 곧잘 쓰이는 말이었다. 초미세먼지가 서울 전역을 뒤덮은 지 닷새째였다. 우리는 지하철역 앞에서 만났다. 두이는 마스크 끈을 최대한 당겨써서 눈 밑이 도드라진 모습이었다. 결막염에 걸린 그녀의 눈이 빨갰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크고 돌출돼 보였다. 그녀가 쓴 마스크도 내 것보다 큼지막했다. 뭐가 저렇게 커 하고 생각하다 두이의 얼굴이 내 얼굴보다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보다 키가 크고 얼굴은 작은 두이. 나보다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는 두이. 아무 옷이나 툭 걸쳐도 자신만의 아우라를 풍기는 그녀였다. 신경 써서 입어 봤자 어딘가 촌스러운 나와는 달랐다. 오늘도 두이는 언뜻 부조화한 느낌의 후드 티와 체크 스커트를 입었지만 꽤나 멋스러웠다. 싸구려 시계조차 두이의 손목에 둘러져 있으니 빈티지해 보였다. 공연 시작까진 이십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포근한 날이 반갑지 않다고 시시덕대며 우리는 극장을 향해 걸었다. 두이가 예매한 연극이었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발레든 재즈 콘서트든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보는 것이 우리의 공동 취미이자 최고의 호사였다. 두이는 라이브 연주가 있는 카페에서 피아노를 쳤고 나는 백화점 행사 매대에서 자잘한 액세서리를 팔았다.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대형 공연을 관람할 때면 적잖이 부담이 됐지만 어릴 때부터 계속해 온 습관 같은 것이라 그만두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다른 부분에서 소비를 아꼈다. 옷과 가방, 비싼 화장품 같은 물건들을 거의 사지 않은 덕분에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냄새지?” 두이가 물었다. “코 막힌 거 알잖아.” 나는 비염이 심해 냄새를 잘 맡지 못했다.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하고, 구려.” 아까보다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공기가 뿌옇다 못해 누런빛을 띠었다. 두이는 그 공기에서 냄새가 난다며 툴툴거렸다. 찌푸린 얼굴을 보자 가면의 뚫린 곳으로 튀어나온 코처럼 기억 하나가 불거졌다. “초등학교 때 기억나? 우리 연극했던 거. 두이 넌 왕이었고 난 요리사였잖아.” “그래, 기억나. 근데 네가 왕 아니었나?” “아냐. 내가 던진 닭다리가 네 얼굴로 날아갔었어.” “맙소사, 그랬지. 그 기름진 게 내 뺨을 맞혔었어.” “애들이 어찌나 웃어댔는지. 그런데도 넌 눈 하나 깜짝 안 했어. 내 사과를 받으면서 구린 느낌을 생생하게 얼굴로 표현했지. 그때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무슨 생각?” “두이는 큰 인물이 될 거야.” “큰 인물은 개뿔.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 전깃줄에 까마귀 떼가 앉아 있었다. 먼지구름을 몰고 온 전령들처럼 촘촘하고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까마귀 너머 멀찍한 곳에선 신축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렇게 먼지

소설 2024.04.01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김나현 1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룸 안에서 그 냄새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결국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수프는 메인 재료가 양파와 토마토가 맞나 의심이 들 만큼 동그란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돼지고기에 붙은 비계 때문이거나 양파를 볶을 때 버터가 들어간 탓인 듯했다.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야.” 제 맛?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에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엄마의 기분에 따라 혹은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수프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면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땐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곤 했다. 여유랄 게 없을 땐 몇 조각의 고기만 들어간 야채수프에 가까웠다. 그 수프는 마녀 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이어트 음식으로 각광받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다른 집 엄마들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특기로 내세울 때, 엄마는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주력으로 삼았다. 깊은 맛의 토마토 수프, 따뜻한 쌀밥,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특별히 다른 반찬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수프에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냉장고 안의 남은 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넉넉히 넣고 끓일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수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종종 그것을 토마토가 들어간 양파 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가 먹어 본 어떤 수프도 엄마가 만든 수프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웃들이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엄마의 장기이자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그 수프가 이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방 안에 겹겹이 쌓인 냄새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떤 냄새든 밀폐되면 지독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방 후드의 환풍기를 켜고 침대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시자 어딘가 모르게 매캐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웃집에서 흘러온 담배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공기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로변 오피스텔은 어쩔 수 없었다. 미세먼지가 있든 없든 주위는 옅은 안개에 휩싸여 흐릴 때가 많았다. “그만 내려와. 상이나 펴.”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엄마와 마주 앉으니 다섯 평 원룸이 꽉 차는 듯했다. 받침대에 냄비를 내려놓은 엄마는 할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편안히 수프 맛을 음미하기에는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내심 마음을 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집보단 낫지 않아?” 그 집은 방충망에 벌레가 자주 들러붙었다. 작은 날벌레도 아니고 엄지만 한 크기였다. 그게 집으로 날아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주택의 2층집에 딸린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부엌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여긴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부엌도 딸려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줄곧 말이 없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에는 그 돈을 갖고 겨우 이런 곳밖에 구

소설 2024.04.01
알파벅스

알파벅스 이원석 사라진 마을의 이름은 소몽笑夢이었다. 소몽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유속과 깊이가 적당한 계곡이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관광지로, 몇몇 주민들은 일찍부터 부업으로 관광객들을 재워 주며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촬영과 유명 연예인의 방문이 화제가 되어 마을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관광객이 늘어나며, 생업과 부업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개조해 전문적으로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동종 업계 종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자신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소개받은 집에서는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작은 보답을 하는 일종의 중개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동안 그들의 사회적 유대감이 혈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규모 민박집이 성행하던 어느 날 ‘물꼬리 펜션’이라는 이름의 첫 대형 독채 펜션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 안전한 보안과 차량 픽업 서비스 등은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나 젊은 세대 단체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읍에 하나 있는 2금융권 은행에는 대출 상담을 받는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하여 소몽리는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에 휩쓸렸다. ‘물꼬리 펜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른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독채 펜션이 생겨났고,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펜션 단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를 이어 펜션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외지인이 지은 펜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주민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해마다 늘어 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사회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름 한철 외지인들이 쓰고 간 돈으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박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여름이면 집과 집 사이로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다. 산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의 부주의한 행동도 골칫거리였다. 술을 먹고 입수하는 외지인은 해마다 몇 명씩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곳에 억지로 들어가 뱀에 물리거나 말벌에 쏘여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 부덕한 업주들이 성수기 숙박 요금을 지나치게 올려 받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상으로, 외지인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범죄의 빈도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이래서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혹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가장 먼저 그런 것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법.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 그러나 영특한 아이들은 어른들

소설 2024.04.01
흉통

흉통 김이설 놀라지 말고 들어. 엄마의 첫 마디에 고개를 들고 허리를 세웠다. 책상 위에는 가맹운영신청서, 가맹점 운영계획과 자기소개, 가맹개설자금축적주계좌잔고 등의 서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하루에 검토해야 할 지원자 서류는 끝이 없었고, 서류 심사 후 면접자와 점주 선정은 매일 누적되었다. 전화벨 소리와 통화하는 목소리, 조심성 없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딸깍거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까지 사무실은 분주했다. ㅡ 은수야, 듣고 있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ㅡ 듣고 있어. 말해. 큰 숨을 들이켠 후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ㅡ 엄마가 며칠 병원에 입원했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는 원망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 잠깐만. 나는 조용히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부장과 이야기를 하던 서 과장이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전화기 너머 멀찍이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아니, 거기 말고. 그 안쪽에! 다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대꾸. 전화 끝내고 해줄게,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니잖어! 그사이 나는 옥상에 마련된 휴게실로 들어갔다. 카페의 야외 테라스처럼 꾸며 주로 흡연실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세밑의 공기가 매서웠다. ㅡ 그래서? 병원에서는 뭐라는데? ㅡ 네 아빠가 갑자기 안방을 정리한다고 다 들쑤시고 있다. 왜 저런다니. ㅡ 엄마. ㅡ 그래, 알았다고. 그저께 엄마가 혈변을 눴어. 그래서 네 아버지랑 응급실로 갔는데, 이것저것 검사하더니 입원시키더라고. 거기서 또 뭘 검사하라고 해서 다 검사받고. 어제 퇴원했어. 엄마는 내 질문과 상관없이 자기가 준비한 대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새해가 되면 엄마 나이 일흔여섯. 사십대 때 큰 병 앓은 이후로 별다른 잔병치레 없이 이제까지 잘 버텨 준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나는 담배를 꺼냈다. ㅡ 은수야, 듣고 있지?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오빠가 은수야 시간 있니? 라고 묻는 것보다, 동생이 언니 지금 바빠? 라고 묻는 것보다 무서운 말이 엄마가 건네는 놀라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만큼 놀랄 이야기라는 뜻. ㅡ 직장암이래. 그런데 어쩐지 놀랍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당황하고, 경황없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진행되었대?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너무 사무적인 말투였나. 잠시 뜸을 들이던 엄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ㅡ 많이. 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제야 엄마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홍보팀 직원 둘이 내게 눈인사를 하고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 과장이 어깨를 툭 친 건 막 엄마와 전화를 마친 후였다. “심각한 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눈은 못 속이는데. 분명 무슨 일 있어. 오빠가 또 속 썩여? 아니면 동생? 석훈 씨는 아닐테고.” 한 팀

소설 2024.03.01
상속

상속 김유담 너는 길 건너편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냥 건너오라는 손짓을 해도 너는 꼿꼿이 서서 녹색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유령이 저렇게까지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편에서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너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네 모습이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 같았다. 나는 미니스커트에 가죽 코트를 걸쳐 입고 부츠를 신은 네 모습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법정에 가는 옷차림치고는 좀 요란하다 싶기도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최대한 후줄근하게 입는 게 낫지 않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너는 옷차림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아차차 하고 깨닫는다. “안 늦었지? 강남은 올 때마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긴장돼.” 원래 키가 큰 편인 데다 굽 높은 부츠까지 신은 네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잠깐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사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했다. “밥, 어디서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반갑다는 인사 대신 내가 꺼낸 말이었다. “이 근처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맛집 있어. 거기 가보자. 서초동에 해운대암소갈비 분점이 있더라고. 해운대에서 먹었던 갈비를 여기서 먹을 수 있다니, 설렌다. 고기 괜찮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너는 앞장서 성큼성큼 걸었다. “괜찮아?”라고 묻지 않고, “괜찮지?”라고 묻는 것은 네 아버지의 질문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괜찮제?”였다고, 기억한다. “갈비는 좀 헤비하지 않나? 간단한 걸로 먹어. 사실 나 점심 생각도 없어.” 너를 좇아가며 네 뒤통수에 대고 내가 말했다. “중요한 날이잖아, 든든하게 먹고 들어가자.” 너는 뒤돌아선 채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재판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미리 만나 밥을 같이 먹자고 한 건 너였다. 너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떼를 쓰듯 말하는 너를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아버지들끼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너와 나는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다. 서로의 집을 격의 없이 오갔고, 계절마다 같이 나들이를 다녔다. 매년 봄 진해에 가서 벚꽃을 봤고, 여름이면 남해로 휴가를 다녀왔으며, 가을마다 가야산 단풍 구경을 빼먹지 않았다. 겨울에는 무주에 가서 스키도 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명소를 찾고,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너의 아버지 지론이었다. 네 아버지는 좋은 것을 누려 왔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너희에게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내 아버지는 학교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축이었고, 네 아버지는 그 학교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너의 조부는 부산 지역에서 이름난 유지

소설 2024.03.01
나경

나경 박서영 누구나 나경을 지난다. 도약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 수만 개의 지향이 도로 위로 얽히고 오래된 주택들은 암시처럼 골목을 밝힌다. 머무는 것만이 그곳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꿈을 이루지 않고 다만 꾸기만 한다. 나는 한때 나경에서 지냈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출장이 있어 남쪽 도시로 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다. 딱딱한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불편하게 자다 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꿨다. 수면을 통제하는 신체 스위치가 눌리듯 저절로 눈이 뜨였다. 버스는 차체의 백색소음이 옅게 깔려 있을 뿐 고요했다. 드문드문 앉은 승객들은 자거나 핸드폰을 보며 각자 할일을 했다. 나는 창문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산들이 석양을 등진 채 서로 엉기듯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늘을 덮은 탓에 화재라도 입은 것처럼 새까맸다. 나는 버스 맨 앞 상단의 모니터를 봤다. 현재 지나는 위치가 명시되어 있었다. 남과 북의 한가운데, 나경이었다. 나는 이제 나경으로 가지 않는다. 그곳에 있던 외할머니도 십 년 전에 죽었고 몇 없던 친척들도 다른 도시로 떠나버렸다. 나경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곳이다. 이 말을 처음 해준 이는 내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인 장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남자 교사였고 초임이었다. 인구가 4만 명인 나경군에서 4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학교로 부임하고 싶어 했는데, 그러려면 시골에서 오 년을 근무해야 한다고 했다. 시골은 인기가 없고 도시는 인기가 많아서다. 나는 그렇게 불평하는 그의 어투를 매일 듣고 완벽히 외웠다. 목소리와 음의 높낮이까지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교실의 장 선생님 책상에는 스테인리스 전기포트가 있었다. 그는 조회 시간마다 전기포트로 끓인 물을 육개장 사발면에 부었다. 면이 다 익을 때까지 늘어지게 하품하고는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면박했다. 나는 맨 앞자리였다. 다 익은 라면을 장 선생님이 후루룩 소리 내며 먹는 광경을 정면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아무 때나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배가 고팠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 나경으로 이사한 건 내가 열 살 때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언니의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경리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살가죽이 일정 부분 돌처럼 굳는 피부병을 앓았다. 돌처럼 굳은 표피는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언니가 머문 자리마다 조밀한 입자가 남았다. 그것은 까말 때도 있었고 하얄 때도 있었다. 정확한 병명은 병원에서도 모른다고 했다. 엄마는 밤마다 때수건으로 언니의 피부를 벅벅 벗겨냈다. 돌이 떨어진 부분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 위로 병원에서 받아온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랐다. 병원에서 면봉으로 바르라고 했지만 엄마는 그냥 맨손이었다. 그러다가 부아가 치밀어 오르면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나게 언니 등을 내리쳤다. 씨팔. 대체 어떤 귀신한테 씌어서. 언니는 학교에 다닌

소설 2024.03.01
킨츠키 클래스

킨츠기 클래스 신주희 유리 조각을 주워 그 애의 집으로 갔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 피아노 레슨 중인 그 애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집의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자유다. 예컨대, 그 애가 아끼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그 인형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거나. 침대에 눕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눕고 싶다면 그래도 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 애의 침대가 좋았다. 늘 좋은 냄새가 나고, 귀여운 만화 캐릭터 시트가 깔려 있는, 나로서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앙증맞은 침대였으므로. 나는 그곳에 누워 차마 피아노곡이라 말할 수 없는 도, 미, 솔, 솔, 솔을 들으며 끝끝내 무엇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가 된다. 길에서 주워 온 유리 조각을 꺼내 햇빛에 비춰 본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그 애의 매끄러운 피아노에 깊은 흠집을 내버리기로. * 수업 준비는 늘 최고이면서 최악이었다. 나는 매일 산산조각이 난 접시나 찻잔, 사발을 들고 온 수강생들에게 그것은 복원 중일 뿐 아직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기를. 끈기를 가지고 다음 수업 예약을 꼭 해주기를. 나는 구차함을 떨쳐내며 테이블 위의 수업 계획서를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 지난 수업과는 조금씩 다르게 이어 붙인 문장들 사이에서 틈이라는 글자가 내 시선을 붙잡는다.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 중 하나인 킨(金) 츠기(継ぎ)는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틈을 금으로 이어 붙인다는 뜻으로 파편의 경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살려서 사물의 일상성을 회복시키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작업입니다. 나는 틈을 메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내게 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 고작 틈,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망이나 좌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나는 비관을 포기한 사람으로 서른 중반까지 사모님으로 살았지만 마흔이 된 지금은 누군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 꽤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남편의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자 집 안 곳곳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다. 죽고 싶을 만큼 처참했다. 동시에 처절하게 이를 악물고 살아남고 싶기도 했다.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일처럼, 눈앞에 던져진 모든 것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끝내 이혼과 재산 분할, 양육권 분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시간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깨뜨려 본 사람은 안다. 한번 깨진 것은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뒤로 알 수 없는 허기가 나를 집어삼켰다. 공포스러울 만큼 왕성한 소화력과 끝이 없는 식사. 순식간에 불어난 몸이 거대한 틈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틈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항상 정리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적

소설 2024.03.01
손상

손상 지강숙 차가 안개를 헤치고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반쯤 열린 철문에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표지판 앞에서 민호가 머뭇거렸다. 방금 지나온 캠핑장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민호는 할 수 없이 철문 안으로 차를 전진시켰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니 샛길이 나 있고 길 끄트머리에 숨어 있던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편에는 미니버스 크기의 캠핑카 한 대가 서 있었다. 희수가 자세히 보려 차창을 내렸을 때,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차를 한쪽으로 몰았다. 희수는 차에서 내려 소나무 숲 건너 언뜻 보이는 캠핑장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차는 여기 두시고, 저어기 계곡 건너편이 조용할 거예요. 남자는 캠핑카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공터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맞은편에 간신히 텐트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였다. 희수는 준비해 온 카메라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캠핑카 앞에도 촬영 장비가 즐비한 것을 보니 남자 쪽도 놀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서로의 화각을 생각하면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희수와 민호는 텐트와 조리도구, 음식 재료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계곡을 건넜다. 번쩍. 캠핑카 앞을 지날 때,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희수는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물에 발을 디뎠다. 백화점의 캠핑 코너는 몇 개의 유명 브랜드를 빼고 대부분 비슷한 물건을 팔았다. 중소 브랜드의 경우에는 전주 매출에 따라 매대 위치가 정해지는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매니저들은 타사에 밀리지 않으려고 백화점에서 금지한 가매출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자신의 카드 한도로 모자라면 신입이나 수습 같은 말단 직원에게 구매를 강요했는데, 다음 달에 실적이 없어 취소를 못 하면 직원이 고스란히 빚을 떠안기도 했다. 희수는 말단 직원을 괴롭히는 대신 자신이 고생하는 편을 택했다. 밤늦게까지 트렌드를 분석하거나 캠핑 용품의 기능을 공부해 와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올렸다. 희수의 언변으로 타 매장에서 텐트를 산 고객이 환불을 받고 희수 매장에서 구매한 일도 있었다. 자산 규모가 미미한 업체임에도 희수의 매대는 작년까지 이벤트 홀 가장 좋은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했다. 매일 저녁 블로그나 유튜브로 유행 아이템을 살펴보고 설명할 말을 다듬는 일은 고단했다. 하지만 희수는 자신의 노력에 따른 보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희수도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신생 브랜드 P사의 공격적 마케팅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P사는 입점 행사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대의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희수가 봤을 때 기능 면에서 희수의 제품이 훨씬 뛰어났지만 고객들은 희수의 설명에 잠시 멈췄다가도 결정의 순간에는 P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희수는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고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대책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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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박인성 ‘시성비’의 시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표현은 다소 정정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지나치게 빠르고 예술은 지나치게 느리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다. 그리고 시성비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은 바로 숏텀-피드백(short-term feedback)이다. 요구에 대하여 빠르게 응답하는 것, 입력(input) 대비 빠른 출력(output)을 도출하는 것. 이러한 경향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과정의 올바름보다는 과정의 빠름, 더 나아가 과정 자체가 생략되고 결과만 도출되는 것이야말로 수용자들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준다. 최근 숏텀-피드백에 대한 선호는 단순히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뛰어넘어서 디지털 시대에 대한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확장되는 중이며, 피드백의 지연을 직접적인 피해나 손해,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의 이득과 손실로 환원하는 소비자 감수성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숏텀-피드백에 대한 효능감은 빨라지는 것에 대한 체감보다 느려지는 것에 대한 역체감으로 두드러진다.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응답이 느리게 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며 손해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소비자 권리로 환원하여 자신이 정당한 권리에 비하여 그 결과를 누리지 못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피해자 정체성이 횡행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존의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왔던 고전적 가치들은 주로 롱텀-피드백에 속한다. 노력, 숙련, 취향, 성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경험적 가치는 점점 더 쇠락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경험을 압축하여 정리한 정보다. 유튜브의 요약정리 영상이 아니면 더 이상 책이나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는 플롯(plot)의 논리는 지나치게 느리고 효율적이지 않다. 롱텀-피드백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결과값에 대해서는 보장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롱텀-피드백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그동안 결과를 위해 쏟아부은 각종 정신적-물질적 투자의 무화(無化)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과정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로의 다양성이나 결과 이외의 성취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롱텀-피드백은 오늘날 너무나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실패를 하려면 빠르게 하는 것이 낫다. 조금 투자해서 빨리 실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숏텀-피드백에 천착하는 시성비 추구 경향은 글로벌한 보편 현상이다. 게다가 ‘빨리 빨리’ 문화를 통해서 원래도 더 빠른 것에 가치를 부여해 온 한국은 그중에서도 최첨단의 시성비 사회라, 더 나아가 ‘속도 전체주의’ 국가라 할 만하다. 한국은 6·25 이후 폐허에서부터 압축적인 경제적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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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듀나의 SF를 ChatGPT와 함께 읽다 노대원 한국 SF 계보에서 듀나라는 나비 효과 2024년은 듀나(DJUNA)가 창작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근본적으로 듀나의 SF 소설들은 1990년대의 PC통신에 기반을 둔 디지털 문학으로 출발했다. ‘기술적으로 포화된 사회의 문학’(로저 록허스트)1)이라는, SF에 관한 한 정의는 듀나의 SF에도 적절하다. PC통신 기술을 가능하게 한 한국 SF 팬덤의 본격화는 활발한 SF 아마추어 창작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듀나는 자신의 초기작을 “90년대 통신망 문화에서 자연 발생한 잡동사니”2)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PC통신은 독자가 곧 작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듀나가 그간 필명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해 왔던 것도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준은 “사이버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덴티티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3)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소설 동호회의 팬덤 문화는 듀나라는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기술적 · 사회적 맥락이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시절 등장한 많은 아마추어 SF 작가들이 모두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F 작가 이경희는 듀나의 초기 작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 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4) 이 점은 듀나 스스로 작품의 레퍼런스를 자주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초기 창작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영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듀나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이 위치한 계보와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창작의 전략으로 활용했다. 장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서 듀나의 SF 소설들은 ‘한국 SF 장르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5)이다. 듀나 SF에서 탈식민성은 서사의 소재와 내용과도 관련되지만, 특히 듀나의 초기작들에 집중한다면, 주로 영미 서구 문화에 기원을 둔 SF 장르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다시 쓰는 현지화 과정 자체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듀나 이후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SF 작가들은 한국 SF의 현지화(localization)와 진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PC통신 기술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으로 이어졌다. AI는 SF가 현실의 서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SF 장르는 한국의 문학적 우세종이 되었다. 이 글은 일상화된 AI 시대에 30년 전 듀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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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김선오 · 안미린의 시를 중심으로 - 황사랑 1. 유령 문학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유령은 언제나 함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에게 저승의 풍경을 묘사하는 엔키두의 유령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선왕의 유령, 수많은 공포 영화와 게임까지 인간이 있는 곳에 유령이 등장하지 못하는 자리는 없다. 인간에게 유령은 죽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타자였으며, 죽은 자를 추모하는 관습을 만들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지금 한국 문학장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어떤 이유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며 이전 시기의 유령들과는 무슨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90년대까지 문학에서 유령은 대부분 한을 품고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문학에 등장하는 유령들에게서 미묘한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봉준은 자신의 평론집 『유령들』에서 유령을 “이미 죽었으나 충분히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유령”과 “살아 있으나 시체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로 구분하며 존재를 부정당한 후자의 유령들을 김이듬, 최금진, 안현미, 신해욱, 강성은 등의 시에서 발견해 냈다.2) 즉, 애도되지 못했기에 출현하는 유령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지만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어 계속해서 발화할 수밖에 없는 유령들이 출현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주체와 유령 타자의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김영찬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민석,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관심이 환상이 아닌 현실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포착했다.3) 90년대의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밀려난, 토대가 없는 환멸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을 기억할 때4) 2000년대의 유령 문학이 보여주는 현실로의 이행은 허무주의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신수정이 윤성희와 황정은의 소설에서 애도의 작업에서 벗어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5) 이제 유령은 환상이 아닌 현실적 타자가 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2020년대의 유령들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주목했듯 최근 소설에서 나타나는 유령들은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6) 인간과 다르지 않은 친근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경향은 시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강아지를 따라 움직이고 인간에게 말을 붙이며 인간과 같이 걷는 김선우의 “따스한 유령들”(「내 따스한 유령들」)이나 김리윤이 보여주는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사실은 느낌이다」) 유령, 그리고 강지이 시의 화자가 “유령과 나란히 서서/손을”(「캠핑 일기」) 흔드는 모습을 통해 유령이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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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4.1) 전망과 실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시영화cinéma de poésie 를 분석하며 시적인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 온 파솔리니는 이 영화에서도 무색무취의 광산 가스처럼 “아무런 [위기의] 기미 없이” 다가오는 파국을 우리가 감지하게 하기 위해 몽타주를 사용한다. 세계가 정상성을 위장하고 있음을 가리켜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태를 가시화하는 예술의 역량이란 우리에게 익히 익숙한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 대한 디디-위베르만의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은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증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 [······] provare는 (파솔리니가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을) 여러 가지 의미를 함께 모았을 때에야 가장 정확해질 수 있는 동사이다. provare는 (예를 들어 소박한 장미와 같은) 무언가 앞에서 요동치는 감정이라는 의미에서 분명 “겪다éprouver” 또는 “느끼다ressentir”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가 분노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기 위해” 여기에서 연결된 세계의 요소들에 관한 발견적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시험하다essayer”이고, “실험하다experimenter”이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 연역과 세계의 모종의 상태(1840년대 마멜리의 애국가와 1960년대 정치 시인 파솔리니의 글 사이 어딘가)로부터 축조된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낱말은 “증명하다prouver”를 뜻한다. 『이단적 경험』의 저자에게 시는 세계를 prova(시험) - 이는 또한 시간의 prova다 - 하는 양상 또는 양태화로서 증명을 뜻할 것이다. 한편으로 논증된 사유, 증거, 판단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 구어적이거나 시각적 형식 속에서 양태화되는 감정을 낳는 에세이essai 또는 실험이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영화 의 기획을 특징짓고 있다.2) 인용 글은 어느 시선집 서문에 파솔리니가 적은 문장을 디디-위베르만이 섬세하게 분석한 부분이다. 파솔리니는 자신의 시와 영화 사이의 등가성을 분석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여기에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Un certo modo di provare qualcosa이 [······]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적는데, 디디-위베르만은 이 문장에서 사용된 ‘겪는/시도하는provare’이라는 동사의 다양한 의미에 주목하여 파솔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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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3. 새로운 돌봄 공백 교사의 위기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래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제출되었다. 멀리는 1995년의 5·31 교육개혁에서부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 교육의 서비스화로 인해 서비스 수혜자와 공급자로 바뀐 학부모1)와 교사의 관계, 저출산 등이 심층적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교사의 위기가 사실상 여러 사안들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임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양한 방향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현 사태의 책임이 인기 예능 2)에 상담자로 출연한 오은영 박사의 교육관에 일정 부분 있다고 보고 한동안 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던 일과 앞서 언급한 여러 분석들이 사실은 교육 소비자이자 민원 제기자이자 ‘금쪽이’의 양육자, 그리고 그들이 길러낸 금쪽이들을 공통적으로 문제 대상으로 가리킨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물론 여기에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교사의 죽음에 주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정황들과 이를 교권침해의 주된 요소로 꼽는 교사의 목소리3)가 자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의들 틈에서 ‘맘충이 진상 학부모가 된다’는 말과 학교 및 가정 내 체벌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의견들이 큰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분석들이나 ‘괴물 부모’ 등과 같은 새로운 명명이 의도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혐오의 정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관련한 사유를 한여진의 다음 시를 통해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에 따르면 누수의 원인은 수십 가지나 되고 또 누수라는 것은 꼭 한 가지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쪽에서 새던 것을 잡으니 다음날에는 저쪽에서 새기도 하는 것이라서 결국 한번 발생한 누수는 지속적으로 모두를 의혹 속에 빠뜨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도 위층에 사는 사람도 다 같이 한마디씩 보태지만 물은 계속 흐르고 그런데 물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흐르는 것 자기소개가 흘러가고 그때 뒤늦게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합류하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안이했던 거죠 모두가 누수를 잡기 위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곳은 참 조용하군요 원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 울고 있었다 * 법률나무,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 서울문학, 2021. ― 한여진, 「조사」(『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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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 천선란의 『이끼숲』과 김초엽의 『파견자들』에 관하여 조윤정 1. 지하 도시의 건설과 세계의 배치 지하 건축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방식이다. 고대 도시에서 지하는 포도주 저장소와 같은 곳간, 카타콤(Catacomb)과 같은 무덤이나 도피처로 활용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하를 훨씬 다양한 형태로 점유하고 있다. 각종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이 지하 가로망이나 교통 시스템과 바로 연결됨에 따라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미래의 지하 공간은 현재의 우리 삶을 확장한,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지하는 고립의 프레임을 넘어 확장성과 입체성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하 공간은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빌딩들이 줄 수 없는 연결의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공간과 공간의 연결로 바라보게 해준다. 또한, 지상의 영향을 덜 받는 지하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환경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밀폐형 미래도시는 기후 위기에 따른 재해를 타개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적극적인 대안이다. 천선란과 김초엽의 최근 소설1)에 등장하는 지하 도시는 다시금 지하 공간을 도피처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두 작가의 소설에서 지하 도시는 고대와는 달리 인류 전체가 지하로 옮겨간 형국이며, 지상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곳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국가별 경계를 염두에 둔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지구라는 행성 단위로 사유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통제당하고 감시당한다. 『이끼숲』에서 하루에 한 알 복용해야 하는 “VA2X”(27)와 이마에 삽입된 “칩”(113)은 생명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파견자들』에서 인간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보호소로 위장한 연구소에 격리되거나 “실험체”(273)로 관리된다. 오늘날 기후나 면역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것에 대한 상이한 이해들에 다가가는 일을 앞당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은 세계라는 관념을 흔들고 인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성으로 관심을 돌린다. 행성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지정학적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지도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지도들의 경계선은 정복자의 노획물과 다름없으며 국경은 대개 전쟁이나 식민화를 통해 만들어졌다.2) 소설 속 지하 도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세계의 좌표들을 유예하거나 버림으로써 세계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전도되고 재설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 밖의 다른 행성이 아니라 오로지 지구 내에서 모두가 살아 나가야 할 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배치는 무생물로 존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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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4.02.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4차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연속좌담 '창작, 노동' 4차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4차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 ㅇ 일 시 : 2023년 12월 5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라운지 룸 ㅇ 참여자 : 서재진(시인), 정성우(소설가), 양기연(소설가), 임호균(미등단자), 채윤희(시인) 〈개회〉 서재진 : 저는 이번 기획 좌담에서 사회를 맡은 서재진입니다. 2017년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성우 : 저도 이번에 사회를 맡게 된 소설가 정성우입니다.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해서 현재 소설가로 활동 중입니다. 채윤희 : 채윤희입니다. 시를 쓰고 2022년에 동아일보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어서 기차 타고 왔습니다. (웃음) 양기연 : 저는 소설 쓰는 양기연입니다. 2022년도에 부산일보에서 등단했고 천안에 살고 있습니다. 임호균 : 저는 시 쓰는 임호균입니다. 등단은 아직 안 했고 2021년에 ‘같이 가는 기분’이라는 웹진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때부터 작품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재진 : 거주지는 어딘가요? 임호균 : 진천 살고 있습니다. 충북 진천. 정성우 : 다들 먼 데서 오셨네요. 서재진 : 성함이랑 거주 지역 간단하게 들어 봤고요. 최근 작품 활동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채윤희 작가님은 최근 쓰고 계시거나 관심 가진 소재 있으신가요? 채윤희 : 질문지를 공유 받은 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최근 쓴 것들을 보면서 반대로 내가 뭐에 관심이 있었지, 하고 유추를 해봤습니다. 밑에서는 전공한 사람도 적은 편이고 이렇게 모이려는 분들도 적고 직장을 병행하면서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모임을 가져도 지속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 혼자 쓰는 게 더 많은 것 같고. 주로 시선과 경계? 반복되는 표현들이 있더라고요. 마치와 것처럼. 그런 것들을 제가 자주 즐겨 쓰고 있다는 것을 뒤에서 알게 됐죠.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것도 써봐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양기연 : 저는 가장 최근에 디지털 소외 계층의 교통권 문제에 대한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들이 다 노인인데, 제가 노인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이번에도 노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습니다. 임호균 : 저는 최근 작품을 보니까 약간 기독교 색채가 들어간 작품을 많이 썼더라고요. 제가 기독교인이라 삶의 일정 부분을 반절 이상 차지해서 쓰다 보니까

기획 2024.01.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3차 〈문학 강연 시장〉

연속좌담 '창작, 노동' 3차 〈문학 강연 시장〉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3차 문학 강연 시장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3차 - 문학 강연 시장 ㅇ 일 시 : 2023년 12월 8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라운지 룸 ㅇ 참여자 : 유인혁(문학평론가), 김수희(용두어린이영어도서관장), 김승일(시인), 오한기(소설가), 이현진(와우북페스티벌 담당자) 〈개회〉 # Part 1 : 개회 및 자기소개 유인혁 :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유인혁입니다. 간단하게 오늘 모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2023년도 《문장 웹진》 기획좌담 ‘창작, 노동’ 4번째 시간입니다. 요즘 창작자들을 크리에이터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아는 창작자와 크리에이터라는 단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리에이터라는 말을 쓰면 전문가, 나아가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획좌담은 이렇게 생산자이자 노동자로서의 작가를 되짚어 보기 위한 의도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강연 시장입니다. 현재 강연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그리고 그 사이를 잇고 있는 여러 사람한테도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이자 산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강연 시장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가님 그리고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자분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제 소개를 다시 드리자면 저는 대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원으로 일하고, 특히 국책사업인 인문학 관련 연구 지원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인문학 대중화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요 몇 년간 작가나 영화감독 혹은 피디, 유튜버 등 다양한, 이른바 크리에이터들의 특강을 기획하고 운영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 삼아 오늘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각자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승일 : 네, 저는 김승일 시인입니다. 김수희 : 반갑습니다. 저는 서울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동대문문화재단 용두어린이영어도서관 관장 김수희입니다. 다양한 강연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한기 :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오한기입니다. 이현진 : 안녕하세요. 저는 와우컬처렉 대표 이현진입니다. 저희 회사는 서울 와우북페스티벌을 주최, 주관하고, 올해로 19회가 되었습니다. 북페스티벌은 매년 10월경에 열리고 토크나 강연 프로그램 30개에서 40개 정도 진행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올해 저희가 한 사업은 서울국제작가축제, 청소년인문교실사업 등으로 인문학과 문학 사업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기획 2023.12.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2차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ㅇ 일 시 : 2023년 10월 13일(금)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세미나1실 ㅇ 참 여 - 사회자 :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 참여자 : 민선(웹소설가), 이은선(소설가), 조대한(문학평론가), 황종권(시인) 〈개회〉 이병철 :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획좌담은 총 4회로 계획되어 있는데 다 학교에 계시는 분들이라서 어쩌면 이번 주제가 제일 민감할 수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학교의 구조적인 내용까지도 짚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 내어 좌담에 참여해 주신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 인사는 하셨나요? 여기 구면도 계시고, 이은선 작가님하고 황종권 작가님은 예전에 같이 근무하셨죠? 그리고 민선 작가님과 저는 지난 학기에 명지전문대에서 수업했고요. 그리고 조대한 작가님도 명지전문대 심화 과정 지금도 나오고 계시고. 그리고 또 이렇게는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이은선 : 이렇게 다 학연과 지연인가요. 너무 좋다. (웃음) 민선 : 혹시 혈연은 없나요. (웃음) 이병철 : 저랑 조대한 작가님이 다닐 때는 민선 작가님이 안 계셨고요. 민선 : 지금 재학 중이라서요. 이병철 : 한신대 강의 나가시지 않나요? 조대한 : 아 거긴 아니에요. 서울예대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병철 : 그렇군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지금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 하시는 일이랑 간략하게 근황이라든가 자기소개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대한 : 저는 문학 평론을 쓰는 조대한이라고 합니다. 문학 평론은 2018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대학 강의는 2020년부터 사이버 강사로 시작해서 대면으로 바뀐 지금까지 두 개 정도 대학의 문창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선 : 저는 글 쓰는 민선이라고 합니다. 제가 꼭 외자라고 이름을 말하는데요. 안 하면 못 알아들으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웃음) 저는 2019년에 처음으로 웹소설을 냈고요. 최근까지 3종 나왔고, 연말에 연재 오픈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학 강의는 올해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은선 : 저는 2010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요. 안양예고에서 7년,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3년, 한신대 문예창작과에서 7년. 고등학교, 문학관,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이랑 읽기를&mi

기획 2023.12.01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2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2회) 독서모임 〈생글〉 사회, 원고정리 : 연산 참여자 : 제이필, 나경, 이슬, 지현 책 : 강효진 『오늘도 나를 대접합니다』(구름의시간, 2022) 연산 : 저는 아직도 단풍과 눈맞춤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단풍 명소를 찾아가려니 사람과 자동차에 단풍의 고상함마저 안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사진과 tv 뉴스로만 감상하고 있습니다. 11월입니다. 오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오지 않을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늘 책을 읽으며 느끼고 감상을 말하고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통해 삶이 한층 더 윤택하고 지혜로웠으면 합니다. 독서에 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잠시 들어 보겠습니다. 제이필 : 독서, 책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내가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인터넷 공간에는 수많은 책이 숲을 이루고 있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탐색하고 요리조리 살펴보는 것이 즐거움만큼 고단함도 있었어요. 그런데 모임에서 매달 함께 읽을 책을 서로 토론하며 선정하니 큰 고민 하나가 해결되어 좋았습니다. 독서는 좋은 책을 찾아내는 과정과 수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현 : 책을 읽는 것이 서서히 즐거움이 되고 의무처럼 느껴집니다. 독서 습관이 자리 잡아 가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책을 읽는 것만큼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없어요. 오롯이 책에만 집중하다 보니 잡념도 사라지고 그 순간만큼은 걱정도 사라졌어요. 독서는 집중력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두 번 한 권 두 권 책을 읽다 보니 독서의 재미와 묘미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재미와 감동 그리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나경 :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이 독서의 시즌입니다. 저도 사실 독서는 가을에 하자, 가을만 기다리며 그때 책을 읽자, 가을을 핑계 삼았어요. 독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좋은 것 같아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 진정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계절보다 가을에 책을 읽으면 더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어 좋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어요. 독서는 계절이 아닌 개인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슬 :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 같아요. 관심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 같아요. 저도 한때는 시간을 핑계로 책을 가까이 두지 못했어요. 현대인의 일상은 누구나 분주하고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일상이 독서를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이유와 핑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을 시간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니면 무슨 요일 이렇게 저 나름의 독서 계획을 만들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통해 좋은 책을 알게 되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독서의 기술과 기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산 : 역시 훌륭하십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저도

기획 2023.11.01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1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포항 책방수북(제1회) 독서모임 〈생글〉 사회, 원고정리 : 연산 참여자 : 제이필, 나경, 이슬, 지현 책 : 차성환 『딸아, 행복했으면 좋겠다』(득수, 2023) 연산 : 한 달 만에 뵙지만 여전히 반갑네요. 추석 연휴는 다들 잘 보내셨는지요? 과식으로 고생하신 선생님은 안 계시겠지요? 음식 하느라 명절증후군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선생님도 당연히 안 계시겠죠? 벌써 일곱 번째 모임입니다. 오늘은 지난달에 말씀드린 대로 딸을 시집보낸 서른네 명 아버지들의 웃음과 눈물이 담긴 축사를 통해 아버지와 딸 그리고 가족과 가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결혼과 부부의 참 의미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과 말씀을 기대하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모임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려고 합니다. 4월 첫째 주 목요일에 시작한 우리 모임이 나에게 어떤 변화와 실천을 하게 하였는지 제이필 님부터 부탁드립니다. 제이필 : 벌써 일곱 번째에요? 정말 빠르네요. 저도 몇 개의 모임을 하지만 이 모임은 책과 글쓰기라는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라 기다리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숙제가 때로는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한 권의 책을 읽고 느낌을 단어와 문장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점점 수월하고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좋은 문장은 바른 문장으로부터, 독서는 가장 쉬운 글쓰기 방법이다,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경 : 사실 일상에서 스스로 어떤 책을 한 권 고르고 독서를 한다는 것은 늘 다짐이고 맹세에 그쳤지만 이 모임에 나오면서 의무감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책을 읽고 모임에서 느낌과 생각을 말하다 보니 말하는 요령과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토론을 통해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 모임은 절대로 결석하지 않을 겁니다. 연산 : 나경 선생님 오늘 공식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나경 : 네, 약속했습니다. 이슬 : 저도 솔직히 이 모임을 하기 전에는 책은 늘 우리 집의 또 다른 인테리어 역할에 그쳤지만 모임을 통해 집에 있는 책을 찾아 한두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 선정한 도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좋은 책을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후회도 많았습니다.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더 열심히 읽고 써보겠습니다. 지현 : 추석 연휴 잘 보내셨죠? 가정주부로만 살아오다 마음 편하게 책 읽고 글도 쓰는 이 시간이 너무 좋습니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 같아요.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저에게는 큰 행복이 되었습니다. 암튼 좋은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산 : 선생님들의 말씀에 저도 더 큰 용기와 희망이 생깁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알차게 준비하겠습니다. 자, 오늘 토론할 책부터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이 책은

기획 2023.11.01
연속좌담 ‘창작, 노동’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2023년 11월호부터 2024년 2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 2차 :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로서의 작가 - 3차 : 문학 강연 시장 - 4차 : 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설계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3년 기획 연속좌담 ‘창작, 노동’ - 1차 부업이 있는 작가, 본업이 있는 작가 ㅇ 일 시 : 2023년 9월 7일(목) 14:00~16:00 ㅇ 장 소 : 예술가의 집 세미나1실 ㅇ 참 여 - 사회자 : 한설(문학평론가) - 참여자 : 김희선(소설가), 신이인(시인), 윤치규(소설가), 이미경(극작가) 〈개회〉 한설 : 안녕하세요, 저는 평론가로 활동 중인 한설이라고 합니다. 《문장 웹진》에서 ‘창작’과 ‘노동’이라는 주제로 네 차례의 좌담을 기획했는데, 1회차인 이번 좌담은 작가라는 직업 외에도 문학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을 모시고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다른 일도 해요’ 정도의 소소한 대화를 예상하고 진행을 맡았는데, 《문장 웹진》의 역대 좌담을 살펴보니 등단제도를 비롯해 무거운 내용이 많더라고요. 진중함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제가 좌담을 잘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웃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나누고 좌담을 시작하면 좋을 듯합니다. ‘주업’과 ‘부업’이라는 이번 좌담의 주제를 생각해 다시 저부터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치과대학병원에서 구강병리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공부 중인 수련의입니다. 이런 자리에 오려면 연차를 써야 하는 직장인이기도 하고요. 반시계 방향으로 다른 분들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이인 : 어쩐지 늦게까지 이 자리가 비어 있어서 여기 위험한 자리인가 했는데 첫 번째 발화자의 자리였군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활동하는 신이인이라고 합니다. 문학 쪽 활동을 말씀드리면 2021년 《한국일보》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아직 신인이다 보니 발표할 지면을 받는 편이어서 2년 동안은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올해 초에는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이라는 시집도 한 권 냈습니다. 2년 동안 글만 쓴 건 아니고요. 문학 외적인 활동으로는 LUSH 알바생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굉장히 밝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물건을 세일즈하는 그런 이미지를 많이들 갖고 계신데, LUSH라는 브랜드에 대해서. 거기서 2년 동안 세일즈 파트타이머를 했고요. 직원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계속 파트타이머로 있고 싶어서. 최근에는 아디다스 코리아 판매직으로 이직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희선 :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김희선입니다. 원래는 약사로 일을 해왔고, 2011년 마흔

기획 2023.10.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3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장류진 『연수』(창비, 2023) 2023년 9월 6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드디어 마지막 3회 차 모임이에요. 오늘은 장류진 작가님의 소설집 『연수』에 대해 이야기 나눌 건데요. 단편집이다 보니 소설 하나하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한쑤 : 부담 없이 읽었어요. 전체적으로 작품이 너무 강하거나 무겁지 않고, 휙휙 책장을 넘기면서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주 깔끔한 소설이었어요. 다정 : 저는 여행 갈 때마다 책을 한두 권 들고 가요. 바쁜 업무 마치고 휴가 떠날 때 어떤 책을 가져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챙겼거든요.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가벼워서 그냥 흘러가는 내용도 아닌, 마음에 남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책이었어요. 굉장히 재미있게 보고 돌아왔어요. 숑숑 : 장류진 작가님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SNS에 올렸던 게 생각났어요. ‘작가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라고 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무 어둡진 않지만 이건 누구 얘기 같고 저건 누구 이야기 같아, 이렇게 이름 붙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점에서 예전 소설집들이랑 맥을 같이하는 느낌이었어요. 셔터맨 : 저는 진짜 오랜만에 소설집을 읽었어요. 마지막에 읽은 소설은 『기차와 생맥주』예요. 책 안에 소설파트도 있으니까. (웃음) 최근에는 실용서 또는 논픽션 위주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이 책도 사실 실제 이야기나 다름없는 스토리지만,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는데도 이질감이나 불편함이 없었어요. 제가 한번 책을 펴면 오래 읽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읽다가 자야지 하고 책장을 덮는데 (웃음) 한 꼭지를 다 읽고 시계를 보니까 30분이 흘러간 거예요.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지혜 : 단편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이야기 나눠 볼게요. 일단 이 책의 제목이자 처음 수록된 단편소설 ⌜연수⌟는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셔터맨 : 우리 모두 운전면허증을 가졌잖아요. 혹은 운전하고 있는 누군가의 차에 타본 경험이 있을 테니까 공감 가는 주제 같아요. 저는 이 책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을 때 ⌜연수⌟가 주인공 이름인 줄 알았어요. (웃음) 근데 책을 먼저 읽은 지혜 님이 ⌜연수⌟가 운전 연수의 '연수'라고 해서 더 읽고 싶더라고요. 운전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운전부심이 있잖아요. 소설 속에서는 어떤 운전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 하며 흥미롭게 읽었어요. 다정 : 저는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면허를 땄어요. 스타렉스를 운전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졸업하고 어린이집 교사가 되면서 잠자는 면허가 됐

기획 2023.09.01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2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수원 낯설여관(제2회) 사회, 원고정리 : 지혜 참여자 : 다정, 셔터맨, 숑숑, 한쑤 책 :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북스톤, 2022) 2023년 8월 6일 일요일 지혜 :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늘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책, 최민석 작가님의 여행지 창간호 『기차와 생맥주』입니다. 책과 어울리는 맥주와 간단한 주전부리를 준비했으니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눠요. 숑숑 : 사실 저는 이 작가님이 누군지 잘 모른 채 가벼운 느낌으로 후루룩 읽었어요.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 앞부분 절반 정도 읽다가 모임 날짜를 생각하면서 속도를 조절했어요. 너무 빨리 읽으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웃음) 그래서 한참 쉬었다가 다시 읽곤 했는데, 앞부분 같은 경우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최근 시작한 글쓰기 모임 '모서리 기록단'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근데 중간 정도 지난 다음부터 모서리 기록단 때문에 여행책 관련자가 돼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저는 늘 '이 책 때문에 나무가 베어질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든요. 근데 에세이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일기처럼 자유롭게 적히다 보니 이 책을 돈 주고 살 만한지, 나무를 베어내고 책으로 남겨 둘 만한지를 자꾸만 떠올려요. 저는 주로 여행을 통해 의미 있는 생각을 했고 또 그 부분에 대해서 얼마큼 숙고했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책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여행 에세이와 결이 일치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표지에 여행지 창간호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잡지를 읽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고요. 지루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을 때 읽으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책 같아요. 한쑤 : 아마 제가 여기서 책 읽는 양이 제일 적을 것 같아요. 독서 취향도 좁은 편이고요. 주로 소설을 많이 봐서 에세이나 산문집을 많이 안 읽었어요. 이번 여행 에세이 장르는 안 읽어 본 분야라 이런 책이 나랑 잘 맞을까 궁금했어요. 파주로 혼자 여행 갔을 때나 친구들 만나러 갈 때,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주로 읽었어요. 멀미를 안 하는 편이라 몰입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페이지에 비해서 챕터가 엄청 많아서 놀랐는데, 정말 술술 읽혀서 책장이 잘 넘어갔어요. 다양한 나라와 도시가 등장하고 책에 담긴 에피소드도 많아서 책 읽을 때마다 색다른 매력을 느꼈어요. 그리고 뒷부분에 픽세이(픽션+에세이)가 신기했는데, 경험만 나열한 게 아니라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재미있었어요. 어디까지가 직접 겪은 일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고요. 계속 읽다 보니까 픽세이가 모두 사실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혼란을 주는 요소가 재미있었어요. 여행 에세이니까 공간이나 배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듯이 묘사를 한다거나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적혀 있는 걸 기대했는데 그것과는 다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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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 2023.11.15
「폴리스퀘어」외 6편

폴리스퀘어 조원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오토바이의 기억, 12월 벚나무는 벽돌처럼 단단했다 악몽과 흉몽에 번갈아 머리를 처박히는 순간 도형이 어긋났다 발목 하나가 피의 양념 두르고 버스 정류장까지 튕겨 나갔다 보드를 잃은 조각들 변질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탑승하고 벚꽃 피기 전 입체 공간으로 전력 질주했다 헬멧 조각이 볼링공처럼 우뚝 선 가로수를 원 스트라이크 아웃시킬 때 봄이 찾아왔다. 빨갛게 육계를 벗어나 해체된 뼈를 온전히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회색 제복의 비둘기 구구구 사이렌을 울리며 회식을 즐겼다 강박 닫은 문이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닫은 문이 열린 문일 수도 있다 씻은 손에서 씻지 않은 손들이 태어난다 위쪽 구멍을 막으니 아래쪽 구멍이 뚫리고 신발, 배수구, 화장실, 혓바닥, 겨드랑이 귀신은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든다 아가미도 없는 것들이 불을 지른다. 신문을 읊는다. 쌍욕을 한다. 담배를 피운다. 노래를 부른다. 가래를 뱉는다. 음흉하게 웃는다. 입 냄새를 풍긴다. 이히히히 이승에서 저승까지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걸어서 십 분 정도? 도망가기 위해 기차표를 산다. 기차는 없고 기적소리만 귀를 짓누른다 불면과 불안이 한이불 덮고 집요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몸을 버려야 하나 마음을 버려야 하나 가스와 전기, 창문과 열쇠, 시계와 손수건, 서류 가방과 냉장고, 밥통과 수도꼭지, 핸드폰과 컴퓨터 사물의 소리가 저벅저벅 공기를 가른다. 눈을 뜬다. 감는다. 다시 뜬다 물질과 의식이 한바탕 접전을 벌인다 고독한 장애 혼자가 좋다 숟가락 고봉으로 떠서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미련하게 모자, 장갑, 신발 같은 거 파묻은 지 오래 거북이 새끼는 바다로 가기 전 갈매기에게 잡아먹힌다 앵무새는 반복어를 쓰다, 예민한 주인에게 목이 잘리고 당신은 느리거나 되풀이하는 걸 참지 못한다 속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으니까 발음이 맞지 않는 말로 걸음이 맞지 않는 발로 당신의 경직된 얼굴을 피해 간다 혀가 끊기는 밤에는 숟가락에 모래를 퍼 담는다. 목이 막힐 때까지 해파리처럼 너절한 몸으로 뛰어든 바다 당신들 모두 절벽이어도 좋다 혼자 부서지는 법을 아니까 모른 척 좀 하지 말라고 정말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나는 조수간만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의 권위가 권총보다 무섭다 한 방 쏠 때마다 출렁출렁 춤추는 포말 내 몸은 절벽에 부딪힌 파탄의 물방울이다 신혼 한 칸의 방이라도 장만하면 우리 결혼하자. 작은 방 두 개쯤 거뜬히 잉태할 수 있겠지 십 개월만 품으면 새끼 방들 줄줄 태어나고 문틀에 그네를 매달아도 우리의 방은 생명력이 강하여 튼튼하게 잘 자랄 거야 벽돌이 벽돌을 낳고 기둥이 기둥을 낳아서 초록색 지붕 환하게 비치면 넝쿨 아래 멍든 몸 숨기고 밤마다 키득키득 웃어보자 깜깜한 데서 당신과 나 상스러운 표정 지우고 개 같은 성질도 잠시 멈추고 씨앗이 문제인 거야? 밭이 문제인 거야?

시·시조 2023.11.15
「잭 타르의 편지」외 6편

잭 타르의 편지 이윤길 시거의 푸른 연기에 싸여 포카를 치는 형제여. 바다는 뱃머리에 깃든 물결로 넘실거리고 바람은 리바이돈의 지느러미다. 뱃전으로 넘쳐 드는 파도로 삭구에 달린 목재블록이 밧줄과 함께 삐걱거린다. 용골이 부서지며 혈맥을 위협했다. 실습항해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침묵에 빠진 뱃사람들은 수장한 에드워드의 괴혈병은 이미 잊었다. 붉게 격노한 번개가 시에라 리온 강 벗어나자 선실로 날아들었다. 뱃전을 지배하는 것은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고 끊임없이 심장이 터지는 소리. 그러나 발가락에 힘을 주고 돛대 끝에 올랐다 사이클론의 공포와 결투했던 무용담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 형제여, 실러캔스 문신을 가진 내 형제여 면역의 문신 모리셔스 금발의 비키니를 이야기하면서도 흥분하 지 않았다. 파도는 높았으나 스웰 주기가 일정했으 므로 샤치 이빨을 벗어났다. 파도가 전혀 일지 않는 코코 킬링 섬 가까이에 가서는 곤한 잠도 잘 수 있 었다. 바람도 동남풍이었고 그 흔한 노무라깃해파리 도 보이지 않았다. 긴긴밤 인도양에서는 선장이 해 신과 흥정을 주고받듯 희망과 절망이 수평선을 스 쳤다가 사라지곤 했다. 찾아오는 바닷새도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의 아집과 만용이 툭툭 터져 온 바다 가 고요했다. 블루 홀 같은 배가 끝없이 출렁거렸다. 남적도에 매복했던 해마도 해류를 타고 멀어졌다. 전리품으로 끌려오는 한랭전선의 뒤를 따르는 적난운이 적군처럼 폭풍을 몰고 나타났다. 심연의 산호모래에선 꼬리 독침 노랑가오리가 얼굴만 내밀었다가 침잠했다. 운명에 위탁 당한 뱃머리는 파도 끝을 향해 치닫다가는 끝없이 바닥을 향해서 떨어졌다. 끌어 앉은 무릎 사이에서 한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바람을 받는 날, 사하린의 코르샤코프항에서 닻을 올리며 갑판의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처럼 무너지고 다시 또 무너지는 파도, 파도, 파도들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 바다는 무도하고 야만스러운 섬광 아래 하늘이 뒤틀리면서 시끄럽고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를 질 렀다. 평화스럽던 항해에 끼어드는 폭풍, 파도는 도망치는 뱃전을 후려쳤고 물보라에 쌓인 뱃머리 는 불행에 굴종하거나 악연에 순종했다. 천둥이 단 두대 칼날의 안쪽처럼 대서양 전역에서 빛났고 파 도는 싸우는 도사견처럼 흰 거품에 싸인 흰 이빨 을 번득였다. 녹슨 늑골의 비명을 집어삼킨 물짐승 일까. 선원들은 다 같이, 광기로 가득한 악마의 공 격을 방어했다. 깃털에 대한 유감 바다 위를 방황했을 뿐이지. 깃털은 허공을 장 악했고 나는 배를 탔지. 그때 나는 날개가 없었어. 강철 심장뿐이었어. 슬프게도 내려 쌓인 달빛이 무 겁다는 건 불행한 급소지. 깃털은 가벼움이야. 깃털 은 고요를 흩트리며 적막도 깨뜨리지, 내 항해에서. 내 머리를 혼돈으로 내려쳤지. 쭈그리고 앉은 머리 를 거듭거듭 내려치는 거야. 깃털이 쇠망치처럼··· 그건 끝없는 하이킥이었지. 한 방에 부어오른 뱃머 리가 얼마나 높이 솟던지. 내 눈물을, 거 봐

시·시조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시조 2023.11.15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시·시조 2023.11.15
「시간의 쪽방촌」외 6편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시·시조 2023.11.15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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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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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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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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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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