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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33

2024년 9월호
2024년 9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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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4.09.01
슬픔은 나의 힘

슬픔은 나의 힘 문진영 침대에서 겨우 빠져나와 커튼을 걷자 어슴푸레한 빛이 방 안에 드리운다. 고양이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는 사뿐히 침대 아래로 뛰어내린다. 나는 거실로 나가 이번에는 소파에 드러눕는다. 고양이는 곧바로 내 가슴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엎드리더니 골골거리기 시작한다. 소리들이 들려온다. 근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 아랫집 세탁기가 웅, 웅, 하고 돌아가는 소리. 지금 나는 평화로운가. 권태로운가. 판단하지 못하겠다. 주영은 두 달째 부재중이다. 어젯밤 주영의 책상 앞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구석에 놓인 일력이 주영이 떠난 날짜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일의 날짜와 요일, 그리고 문장 하나가 적혀 있는 일력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 장 한 장 뜯어내기 시작했다. 거기 적힌 문장을 읽고, 종이를 구겨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구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 들여다본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의 탄생은 슬픔의 탄생이다. 장자의 말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문장에 나는 온 마음으로 동의했다. 과연, 나는 한 시절을 사람의 모양을 한 슬픔과 함께 살았으니까. 그렇다면 잔디는? 한때 우리 — 주영과 나 — 는 잔디가 고양이의 몸을 가진 기쁨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니었다. 잔디도 슬픔이었다. 잔디는 함부로 만지는 걸 싫어했다. 여간해선 울지 않았고 골골거리지도 않았다. 말이 쓸데없이 많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 몸을 비비고, 시도 때도 없이 꾹꾹이를 하는 이 작은 얼룩 고양이는 아직 이름이 없다. 나는 천천히 녀석을 쓰다듬는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너도 슬픔이구나. 너를 슬픔이라고 부를까. * 엄청 웃기는 꿈을 꿨어. 그날 아침 샤워 부스에서 나온 주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뭐가 웃겼는데? 내 물음에 주영이 기억 안 나,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꿈속에서 깔깔 웃다가 잠에서 깼는데, 실제로도 소리 내서 웃고 있었다고 주영은 말했다. 그렇다는 걸 깨닫는 순간 섬뜩했고 기분이 나빴는데, 언제인지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고. 그런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불쾌한 기분보다는 그 꿈이 정말로 웃겼다는 것,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진심으로 깔깔 웃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음. 내 생각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데. 네 뇌가 너를 보호······ 주영은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켰다. 내 말끝은 드라이어의 소음 속으로 순식간에 휘말려 들어갔다. 듣기 싫다는 뜻. 주영은 내가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되는 일에 꼭 의견을 덧붙이고 가르치려 든다고 힐난하곤 했다. 나도 그게 좋지 않은 버릇이라는 걸 알았지만 잘 고쳐지지

소설 2024.09.01
행복한 소설가

행복한 소설가 임현 1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제일 많다는 것이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까지 더하면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근대 문학의 출발이 무엇이냐? 자기 고백 아니냐? 그러므로 그것은 핍진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많은 소설가들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개연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소설이 잘 써진다고 말하는 소설가를 나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분명 주변에 부러움을 살 만한 재능이었는데도 아무도 그런 자랑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소설이 써지지 않을 만한 이유는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행복한 소설가는 대개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소설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한 인물은 러시아의 대문호가 아니라 어느 늦은 밤 만취한 대한민국 출신의 선배 소설가였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쓰려 한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 괴로움에 대해 토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다고 징징대는 동안 기어코 완성하게 되는 것도 다름 아닌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종로구 세종로 소재지의 조도가 낮은 호프집이었고 지하실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유독 심했던 곳으로 기억한다. 안주 메뉴로 한치를 굽고 쥐포도 굽고 제육볶음과 어묵탕 등을 조리하는데도 좀처럼 그 눅눅하고 고린 냄새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무얼 씹고 삼켜도 다 비슷비슷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일간지에서 주관하는 문학상 뒤풀이 자리가 줄곧 이어지던 것이었으나, 정작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미 가고 없었다. 마지막 지하철 운행 시간은 한참 지났고 오히려 첫차를 기다리는 편이 더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런 탓에 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남았는데, 무엇보다 함께 자리한 여남은 사람들 중 그 이야기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원고 마감할 시간에 이러고 있으니까 못 쓰는 거잖아요. 근데요, 형. 많이 취했어요? 그거 먹는 거 아니에요.” 주문한 먹태 대신 자꾸 나무젓가락을 씹으려는 선배를 말리며, 나는 나름대로 이 불쾌한 냄새의 발원지를 추적해 보기도 했었다. 고정식으로 설치된 의자와 테이블은 혼자 앉기에는 넉넉하고, 둘이 앉기에는 비좁았는데 어떻게 앉아도 허리가 불편했다. 닦는다고 말끔하게 닦이진 않을 것 같은 지용성 얼룩이 벽마다 눈에 띄었고, 주방의 내부 구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상태가 어떨지는 대강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곳마다 오래 밴 냄새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환풍기 탓인가. 주기적으로 세척을 해주지 않으면 화재의 위험이 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불이 나도 벌써 여러 번은 났을 만큼 먼지투성이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뭐랄까, 그런 뜬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술만 마시면 진지해지는 선배의 주정을 가만 듣고 있기가

소설 2024.09.01
욕조 안의 볼드모트

욕조 안의 볼드모트 권혜영 내가 아홉 살이고 동생이 여섯 살이던 무렵, 우리 가족은 매일 밤 차를 타고 항아리 바위가 있는 계곡에 갔다. 집에서 차로 20분은 달려야 나오는 곳이었다. 산마루의 고갯길을 여러 번 넘으며 비포장 도로 옆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실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계곡 주변 바위의 형질이 급변하는 지점이 나타났다. 세차게 흐르는 물 사이로 솟은 기암괴석들에는 하나같이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걸 지리학 전문 용어로는 포트홀이라고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항아리의 입구처럼 홈이 패었다고 해서 항아리 바위라고 불렀다. 바위 가운데에 물이 고인 구멍에는 올챙이나 송사리가 서식했고, 물이 마른 구멍에는 이끼 낀 자갈돌들이 쌓여 있었다. 우리 집의 볼드모트는 항아리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는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열심히 챙겨보다가 붙이게 된 아빠와 엄마의 별명이었다. 물론 우리끼리 뒤에서 남몰래 부르는 호칭이긴 했지만. 어쨌든 볼드모트는 민물고기를 잡는 행위로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볼드모트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영농후계자였다. 그런데 농사일엔 소홀하고 밤마다 물고기를 잡는 데만 혈안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아도 단순한 취미생활이라기에는 어딘가 병적으로 집착한 구석이 있었다. 한밤중에. 집 앞 냇가도 아닌. 자동차로 20분을 달려야 나오는 산골짜기를 밤마다 출근했던 것이다. 볼드모트는 그렇게 매일 거센 물살을 헤치고 수심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곳으로 향했다. 볼드모트가 양동이 한가득 물고기를 잡아오는 동안, 벨라트릭스와 나와 동생은 자동차 문을 잠그고 계곡 입구에서 기다렸다. 벨라트릭스는 앞좌석에 앉아 ‘Now’와 ‘Max’ 같은 빌보드 최신 팝송 믹스 테이프를 듣곤 했다. 어린 동생은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가져온 책을 읽고 싶어서 조명을 켜달라고 졸랐지만 벨라트릭스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깜깜한 도로 위에서 불을 켜면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될까 걱정되어 그러는 건 아니었고, 자동차의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그러는 거였다. 나는 할일 없이 벨라트릭스가 틀어 놓은 2000년대 초반 히트 팝송을 들으면서 시커먼 계곡 아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가끔씩 차들이 고갯길 사이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날 때마다 묘한 긴장과 흥분을 했다. 테이프가 A면을 훑은 다음 까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B면으로 뒤집힐 즈음이면 볼드모트가 돌아왔다. 볼드모트가 손전등을 들고 물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면 희미했던 불빛이 점점 커지다가 계곡 입구의 갓길을 환히 밝혔다. 그때마다 눈뽕을 당한 나는 팔을 들고 이마에 차양막을 쳤다. 볼드모트는 양동이 속 자신이 잡아온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비추며 자랑했다. 동자개, 꺽지, 쏘가리, 모래무지, 메기. 기억력이 별로인 내가 지금껏 그때 잡혔던 어종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볼드모트가 하도 우쭐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세뇌당한 탓이 크다.

소설 2024.08.01
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전예진 나는 작년 가을에 태어났다. 세진이 막 취업 준비를 시작한, 피딱지의 말처럼 영 좋지 않은 시기였다. 오른쪽 코 안쪽에 몸을 늘어트린 피딱지는 세진이 한동안 코 파기를 멈춘 시절을 전설처럼 이야기했다. 피딱지의 말에 따르면 세진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코 파는 습관을 고쳤다. 고등학생 때 밤샘 공부를 하다 가끔,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코를 후비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코 파는 습관은 세진의 대학 졸업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학창 시절보다 3밀리미터 더 기른 무자비한 새끼손톱과 함께. 우리 중 누구도 피딱지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피딱지는 세진의 손길에 조금씩 뜯어졌지만, 남은 손으로 피와 이물질을 그러안아 매번 되살아났다. 피딱지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촐싹거리며 점막을 두들겨댔다. 우리는 점막을 타고 울리는 피딱지의 말을 들었다. 피할 길이 없으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무릇 코딱지는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 실린 먼지와 세균을 거르며 생겨나는 존재다, 이 말이야. 이 한몸 바쳐 비강을 지키는 역할이라는 거지. 그러려면 세진의 몸과 마음에 들어오는 이물질을 걸러 줘야 해. 공기에 바이러스가 있다? 그럼 잡아야지. 세진이 악몽을 꾼다? 그것 또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일이야. 피딱지는 사람의 목소리도 낼 수 있었다. 비강 안쪽을 향해 소리치면 세진은 잘못 들은 소리나 이명 정도로 생각하고 애꿎은 귀를 후볐다. 기껏해야 늦었으니 일어나라, 자전거 조심해라, 같은 짧은 말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코딱지가 말을 한다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적어도 막 태어난 나에게는 코 아래 입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엔 혀가 돌아다닌다는 말만큼이나 놀라웠다. 피딱지는 심지어 아주 희미하지만 냄새도 맡는다고 했다. 콧속에 오래 살면 그럴 수 있다고,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듯이 오래 버텨낸 코딱지는 냄새를 맡게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피딱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들었다. 피딱지가 하는 모든 말이 흥미로웠다. 그러다 몇 번의 대학살을 겪었다. 친하게 지내던 코딱지들이 몇 초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 나는 더 이상 아주 작은 코딱지가 아니었고 피딱지의 말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노인의 잔소리로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피딱지는 말했다. 삶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또 중요한 존재인지. 그날 오후 피딱지는 새끼손톱에 뜯겨 나갔고 그 말은 피딱지의 유언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많은 코딱지들처럼 나도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른 이들이 쫓겨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콧구멍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털에 맺힌 먼지와 이물질을 싸잡아 몸집도 불렸다. 마침내 콧구멍과 비갑개 사이, 그러니까 콧구멍 가장 안쪽 천장에 자리 잡았을 때쯤 내 몸은 우리의 숙적 새끼손톱보다 두 배는 컸다. 어느새 나는 오른쪽 콧구멍에서 가장 크고 오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코끝에 붙은

소설 2024.08.01
미싱링크

미싱링크 지혜 네 동생을 데려와. 엄마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 동생이 될 뻔한 존재는 오래전 엄마의 뱃속에서 사산했고 그 사실에 나는 아무런 혐의가 없는데. 이름도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건 본능일까 재능일까? 엄마는 사랑의 능력을 타고난 걸까 단지 사랑할 존재가 필요했던 걸까? 나는 엄마가 시게루,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잠시 머물뻔했던 아빠의 이복형제의 아들에 대해 종종 말하고 싶어했던 마음에 대해 알고 있다. 정작 엄마는 시게루를 만난 적도, 그가 사는 곳에 가본 적도 없었으면서. 나는 엄마가 만난 적 없는 아이를 그리워하듯 시게루라는 실존 인물 ― 그는 나고야의 한 전자상가 사장이 되었고 얼마 전 결혼을 했다 ― 을 주기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를 끝끝내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엄마는 모르고 나만 아는 기억에 대해 언젠가 발설하고 싶은 마음을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가 회사에서 승진하며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셋집 ― 아빠 쪽 먼 친척의 소유였던 ― 을 떠나 도시 외곽의 넓고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지은 지 오 년쯤 된 아파트는 당시 손에 꼽게 비싼 집이었고 고급 자재와 세련된 인테리어, 빌트인 가구 ― 요즘 말로 ‘옵션’이라 불리는 ― 가 놓인 점을 자랑하며 요란하게 광고를 해댔다. 세 개의 방과 거실, 기역 자 싱크대가 놓인 부엌과 두 개의 베란다가 있는 정남향의 아파트에는 오래된 피아노와 십자 장롱, 족보가 놓인 커다란 장식장이 제 자리인 듯 거실과 방 한구석을 장승처럼 차지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재건축을 앞두고 철거를 기다리는 와중에 호러 유튜브를 찍거나 퇴마를 한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컬트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아빠에게는 무리를 해서라도 아파트로 이사 갈 이유가 있었다. 오랜 노력 끝에 엄마는 임신 사 개월에 접어들었고 산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마른 몸은 난산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절대 안정. 그게 당시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납작한 배를 문지르며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분명 아들일 거야.” 엄마는 커다란 거북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꿈을 꿨다고, 그건 분명 아들을 낳는 꿈이라고 말했다. “그럼 나는?” 나는 줄곧 궁금했던 나의 태몽 ― 물을 때마다 답이 바뀌던 ― 에 대해 다시금 물었다. “넌 향긋한 과일 밭에서 온갖 열매를 따 먹는 꿈이었지.” 과일? 고작 열매 먹는 꿈이라고? 나는 엄마의 빈약한 상상력과 취향에 비웃음이 났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곤 했다. 당시에는 병원에서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게 불법이었지만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파란 옷을 준비하시면 좋겠네요”라든가 &ldquo

소설 2024.08.01
여름 손님입니까

여름 손님입니까 이주혜 호텔 출입구에 향이 타오르고 있었다. 향은 호텔 안과 밖의 경계인 회전문 안에서 온종일 흰 연기를 피워 올렸다. 향이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고 맨 마지막으로 손님을 배웅했다. 문이 돌고 돌면 향도 돌고 돌았다. 시작과 끝이, 손님과 주인이 향과 함께 돌고 도는 어지러운 호텔이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9층 방에 올라가 암막 커튼을 열어젖히자 저 아래 묘지가 보였다. 회색 묘비가 빽빽이 들어찬 작은 묘지였다. 호텔이 자리한 골목에는 묘지를 품은 절과 숙박업소들과 카페가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었다. 호텔 바로 옆에도 절이 있었는데 호텔 방에서 묘지가 내려다보일 줄은 몰랐다. 산 자들의 세계와 망자들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포개진 도시였다. 어쩌면 호텔 입구에 피워 놓은 향은 투숙객들만을 위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호텔에 예약해 둔 저녁 식사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외출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꼭대기 층의 온천탕부터 다녀오기로 했다. 옷장에 비치된 유카타로 갈아입고 수건을 챙기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방문에 외시경이 따로 없어 큰 소리로 누구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뜻밖에 한국어가 들려왔다. 손님입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더니 큼직한 나팔꽃 무늬 유카타를 입은 백발의 노부인이 서 있었다. 부인은 묘하게 낯이 익으면서 기이하게 낯선 인상이었다. 어느 일본 영화에서 사랑하는 맏아들을 사고로 잃고 둘째 아들과 조용히 불화 중인 엄마 역의 배우와도 닮았고 어떤 드라마에서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을 지극히 사랑해 전남편 곁에 두고 온 첫째 딸을 외면하는 엄마 역 배우와도 비슷했다. 사실 두 배우는 주로 맡아 온 캐릭터도 풍기는 인상도 달랐는데, 왜 문 앞에서 빙그레 웃고 있는 노부인을 보고 두 배우를 동시에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부인이 한국어로 말했다. 그만 갈까요? 투숙객을 온천탕까지 안내하는 직원인가 보다 생각하며 부인을 따라갔다. 그런데 호텔은 내가 지금 온천탕에 가려고 준비 중인 걸 어떻게 알았지? 나도 모르는 사이 안내 서비스를 신청했던가? 체크인 때 데스크 직원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되기는 했다. 주로 영어로 대화했는데 그가 사용하는 영어와 내 영어는 같은 언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부인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는데 종종걸음 같으면서도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보폭은 아주 좁은데 상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부인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부인은 내가 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천천히 12층 버튼을 눌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어디서든 서두르는 법이 없군. 버스든 엘리베이터든 나만 못 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없나 봐. 이렇게 생각하는데, 부인이 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가려고 하면 가게 됩니다. 온천탕은 아담했다. 탈의실에 로커가 따로 없어 비치된 대바구니에 옷을 벗어 두어야 했다. 부인은 탈의실까지 따라와 내

소설 2024.08.01
부활

부활 백온유 0 세주가 다시 나타난 건 반년 만이었다. 그 애가 신용카드를 훔쳐 달아난 후 내가 분실신고를 하기까지는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세주는 370만 원을 사용했다. 그 돈을 지금까지 분할해서 갚고 있는 내게 이번에는 현금 500만 원을 빌려 달라 찾아온 것이었다. 세주는 오만 원 권이 아닌 만 원 권으로 준비하라고 문자를 보냈고, 나는 퇴근하는 길에 ATM기가 있는 편의점에 들러 100만 원을 뽑았다. 세주는 화분 밑에 있던 열쇠를 용케 찾아내 나보다 먼저 내 집에 들어와 있었다. “지금 당장 가능한 건 이 정도야. 더 이상은 나도 힘들어. 미안해.” 내 눈앞에서 돈을 세어 본 세주는 피식 웃더니 서늘하게 뇌까렸다. “이럴 줄 알았어. 너는 항상 말로 때우려 하지.” 미안하다는 얘기말고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그렇게 하나마나한 말을 건넨 후에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세주는 내 얼굴에 돈을 던지며 악을 썼다.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한 척하지 마. 정말 미안하면 네가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되지. 무책임한 건 네 엄마를 닮은 거지? 네가 멀쩡하게 사는 건 다 내가 봐줘서야. 신랄하게 나를 모욕하다가 어느 순간 퓨즈가 꺼진 것처럼 잠잠해진다. 감정의 낙차가 너무 커서 당혹스러울 때가 많지만 세주의 감정 변화를 따라 동요해서는 안 된다. 감정이 새어 나가지 않게끔 최대한 웅크린 채 일관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잠시 혼자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세주는 곧 이성을 되찾았는지 침착한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근황을 얘기했다.(돈은 한 장 한 장 다시 주워 봉투에 담아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오늘 알코올중독 집중치료센터에서 퇴원했다고. “사실 강제 퇴소 당한 거지. 내가 치약 튜브에 몰래 술을 넣어 갔거든. 정말 필요할 때 한 모금 마시려고. 안 들킬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 검사할 줄은 몰랐네. 이번에는 정말 포기하지 않기로 아빠랑 약속했는데 실망이 컸나 봐. 내 전화를 안 받아. 이제 아버지도 포기한 거겠지, 나를.” 나는 세주가 술을 마신 게 아닌지 의심했다. 언젠가부터 세주는 취했을 때보다 취하지 않았을 때 더 횡설수설했다. 오늘의 세주는 발음도 또렷했고 나를 마주 보는 눈빛도 차분한 편이었다. 세주의 상태를 가늠하듯 그 애를 살피다가 거실 테이블 아래에 빈 술병이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돼. 아버지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어. 아버지는 그때 그 꼴을 보고도 나랑 내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었어. 너희 엄마랑 너희 가족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겠지.” 삶에서 위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근원을 나와 내 어머니로 지목하는 세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느낀 바대로

소설 2024.08.01
등에 쓴 글자

등에 쓴 글자 천운영 그녀는 발가락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발바닥 오목한 아치 부분에 저릿한 느낌이 올 때까지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가 활짝 펴기. 몸의 좋은 기운은 바로 그 오목한 곳에 모였다가 나간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스트레칭으로 잠기운을 지우고 나면 맞추어 놓은 알람이 울린다. 오전 일곱 시. 그녀를 깨우기 위해 알람이 있는 게 아니라, 알람을 끄기 위해 그녀가 일어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두유 만들기. 전날 불려 놓은 검은콩에 호두, 아몬드, 단백질 분말, 오트 우유와 물 한 컵을 넣고 돌리면 두 잔 분량이 나오는데, 한 잔은 아침에 먹고 남은 한 잔은 저녁 식후에 마신다. 콩 불린 물은 따로 담아 머리 감을 때 헹굼 물로 쓴다. 두유가 완성되기까지 15분. 아침상을 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식사는 가볍게. 한 끼 분량으로 담아 놓은 채소 스틱과 아보카도 반 개, 달걀 두 개. 채소는 색과 식감을 고려해 조화롭게 구성하고, 달걀은 현미유를 사용해 프라이를 하거나 수란으로 먹는다. 입안에서 완전히 가루가 되고 곤죽이 될 때까지 적어도 오십 번 이상 씹어 넘긴다.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소화기가 약해 생긴 오랜 습관이다. 배변은 하루 한 번 아침 식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물 내리기 전에 꼭 변 상태를 확인하는데, 색이나 냄새 단단한 정도가 아주 좋으며, 가끔은 그녀가 먹는 양보다 배출되는 변의 양이 더 많아 보일 때도 있다. 체중계에 올라가 보지 않아도 몸무게는 이십 년째 변함이 없다. 건강보조제는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들로 두어 가지 유행을 따라가지만, 단백질만큼은 꼭 산양유 초유 단백질로 넉넉히 쟁여 두고 먹는다.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외출 준비를 마치면 열 시 반. 집에서 노인복지관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 수업은 11시부터 시작된다. 월요일 수요일은 줌바댄스와 밴드 스트레칭. 화요일 목요일은 노래교실. 수강생은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선정하는데, 다섯 강좌 지원에 셋 성공했으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실버 줌바댄스는 40명 선발에 지원자가 123명이었다. 점심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는다. 일반 5천 원, 65세 이상 4천 원, 기초생활수급자 무료. 그녀가 천 원 할인을 받은 지는 삼 년 남짓이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반찬 구성이 다양하고 맛도 좋아 인근 주민들에게 인기가 좋다. 특히 막 무친 겉절이가 그녀의 입맛에 맞는다. 주 고객층은 70세 이상 남성들로 일찌감치 몰려와 줄을 서는데, 그들을 가리켜 ‘집에서 밥도 못 얻어먹고, 혼자서는 해먹을 줄도 모르는 불쌍한 노친네들’이라고 빈정거린 사람은 노래교실 선생이다. 그날 배운 노래의 흥으로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라는 말로 수업을 마무리하는데, 그녀는 그날 배운 노래는 그 시간에 바로 잊어버린다. 노래를 부른다고 흥이 나는 것도 아니고, 흥을 내려고 춤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오후에는 아쿠아리움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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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류수연 1. 대문자 K의 시대 200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핵심은 ‘한류, K-wave’라는 말로 귀결된다. 1990년대 후반 일본과 대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한류라는 용어는, 벌써 그 연원이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결과 오늘의 우리는 한국에서 생성된 모든 콘텐츠가 그 자체로 세계화되는 시대, 말 그대로 대문자 K가 지향을 넘어 실재가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싸이와 방탄소년단(BTS), 영화 , 그리고 OTT 플랫폼 드라마 까지. 이것은 2010년대 이후 한류를 대표하는 콘텐츠들이다. 그 인기의 정도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어떤 결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K-컬처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뉴미디어였다. 주지하다시피 K-콘텐츠는 코로나19 이후 시작된 디지털 플랫폼 산업의 확장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으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싸이와 방탄소년단, 그리고 의 성과는 SNS와 OTT라는 뉴미디어 산업의 영향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때때로 K-컬처의 성공은 매우 드라마틱한 이벤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K-컬처가 전 세계의 주류적 대중문화의 하나로 인정되기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 속에 완전히 스며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세대라는 시간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과를 얻어내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열정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2024년 오늘의 우리는, 바야흐로 대문자 K를 붙인 많은 것들이 하나의 유행처럼 전 세계를 관통하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토록 화려한 성공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대문자 K라는 문화가 만들어낸 뜻밖에 ‘낯섬’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류의 유행을 단순히 한국 문화의 승리로 치부하는 것에는 커다란 모순이 존재한다. 대문자 K의 출처는 분명 Korea이지만, 그것이 글로벌 대중에게 향유되는 순간 더 이상 한국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문자 K 문화의 글로벌 유행은 대중문화의 소비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오랫동안 대중문화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그리고 그러한 미국 문화에 내포된 서구 근대성이라는 보편성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음을 시사한다(조영한, 「한류와 팝 글로벌리즘」, 『황해문화』 115, 2022 여름, 27쪽).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대문자 K의 시대는 때때로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자신과는 이질적인 도플갱어를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대문자 K로 지칭되는 모든 문화는 역설적으로 그 출발점인 Korea, 그리고 한국인에게 가장 낯선 풍경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대문자 K의 가치를 발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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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 소설’1) 리라이팅을 통해 생각하는 근대 소설(novel)의 변화 김미정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는 그것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낙진이 잦아들 즈음, 변형된 지형지물과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무늬는 다시 새로운 지층을 이루고, 그것은 또 다른 소용돌이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훗날 교정되어야 할지 모를 오류에마저 몸을 내맡겨 보는 일이 어쩌면 비평의 일이다. 1. novel 혹은 근대인의 인식 체계 이 글은 지금 소설(novel)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어떤 소용돌이의 체감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양식이 모두 동일할 리는 없다. 그 양식을 무어라 부르건 거기에는 늘 각 시대의 인식·정서 체계가 구조화되어 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야기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때의 소설은, 한 세기 이전에는 ‘literature’나 ‘novel’과 같은 말로 막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의 낯선 문학 양식이었고, 한자문화권에서는 그것을 두고 설왕설래하며2) 각고의 번역의 노력을 통해 제도화한 것이다.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 연구가 주목한 것도 이러한 제도로서의 문학에 대한 것이었음도 잠시 덧붙여 둔다. 그렇다면 근대적 이야기 장르로서의 소설에 담긴 인식·정서의 체계란 무엇일까. 그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고 간단히 적을 수도 없다. 이 글에서는 ‘인식 체계로서의 소설’만 생각해 본다. 이때 주목하는 것은 우선 소설 속 서술자, 곧 앎(인식)을 독점해 온 주체의 자리다.3) 달리 말해, 텍스트 안에 구조화된 재현 주체/대상의 역학이 이 글의 관심이기도 하다. 서술 시점이나 그에 따른 리얼리즘적 묘사란 근대 소설의 핵심이다. 이것은 예컨대 근대 회화의 소실점, 원근법의 발명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과 묘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주체/객체(=서술자/서술대상·객관세계)의 도식이었다. 소설에 구조화된 근대적 인식 체계란 바로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서술자의 문제란 소설의 세부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대표·재현·표상 원리에 상응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이미 소설을 소설로 성립시켜 온 그 인식 체계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유동하고 있는지는 폭넓게 질문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래 독자-작가 모두 질문한 것은 예컨대 ‘누가 말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즈음부터의 독자-작가는 리얼리즘적 시선 너머에 은폐된 화자의 존재를 질문했다. 객관을 표방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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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서

테이블 위에서 이소 1. 그날 내가 이태원에 갔었으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나는 신촌에 있었어. 이태원이 아니라. 그건 정말이지, 놀랍도록 가혹한 일이야. [······] 기억나? 프놈펜 숙소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생중계로 봐야 했던 그날. 나 자꾸 그날이 생각나.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잖아.1) 참사는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거야. 이렇게 잊히기만 한다면 말이야. 석이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2)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석이와 동이와 혜란은 대학교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위해 떠난 프놈펜의 한 학교에 있었다. 세 사람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속했던 세계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 “대상 없는 배신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3)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말을 고르기 어려웠다. 그때의 석이에게 세월호 사건을 “이런 일들”로 묶거나 “세계 곳곳”의 참사와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뉴스와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그때, 석이는 모든 비교를 거부했다. 그들이 일하는 학교의 학생이 한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2010년 꺼삑섬 축제에서 일어난 압사 사건에 관해 말하자, 석이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라고 선을 그었고, 세 사람 모두 “우리조차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캄보디아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죽음”4) 따위와 비교하는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이후, 석이는 완전히 달라진다. 석이에게 세월호와 이태원과 꺼삑섬은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러니까 10년이 흐르는 사이, 세월호는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무리 충실한 토양학자라 해도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순 없다. 토양학자는 숲의 흙 일부를 추출하고 분류하여 테이블 위에 올려 둔다.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얼마만큼의 변형과 생략을 감수하고서라도 유사도에 따라 다른 사건과 함께 배치되고 비교된다. 이 과정이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특히 모든 유가족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에게는, 적어도 어떤 유가족에게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게 사건은 다른 사건의 중요한 참고문헌이 되어 주기도 한다. 2005년, 백 명이 넘는 승객들이 사망한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가 ‘사고의 사회화’를 위한 “유가족의 사회적 책임”5)을 주장하며 정부와 JR서일본을 상대로 10년간 투쟁한 기록에는 대구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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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SF들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SF들 - 흄의 당구공과 천선란의 식물에 대하여 임지연 사고실험 SF의 매력 중 하나는 사고실험이다. SF에서 사용되는 외삽(外揷)은 과거와 현재의 익숙한 사실에 특정 가설을 투여하여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외삽을 통해 SF는 새로운 사고를 펼쳐내며 새롭고 낯선 세계를 예측하거나 대안적 세계를 재현한다. 인간의 합리성 속에 끼어든 비합리성 혹은 이성의 끝에 존재하는 비이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왜 불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를 SF는 다룬다. 나의 문제의식은 SF가 과학을 넘어서 비과학이 될 경우, 그것을 왜 좋은 SF라고 하지 않는가이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가 비인간 존재들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비인간 타자가 인간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존재와 인간은 어떻게 조우하고 서로 인정할 것인가? SF는 사고실험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 SF가 극단적인 사고실험을 함으로써 인간의 인식 능력 밖의 사물을 사유할 때, 과학 혹은 비과학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덜 과학적이고 더 대중적이어서 SF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덜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학을 합리적 법칙으로 제한할 때 가능한 말이지만 말이다. SF의 하위 장르로 하드 SF, 소프트 SF와 같은 구분법을 받아들일 때의 효용성 위에서 가능한 말일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하드코어 SF 작가나 철학적인 SF 작가 테드 창 정도의 이름을 거론할 때, 충실하고 세련된 SF 독자의 덕성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덜 과학적이거나 덜 철학적인 SF가 새로운 SF의 가능성을 열어 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되었다. 과학이 인간 이성의 최고치를 가리키는 지표라면, 하드 SF는 오히려 휴머니즘에 충실한 이야기가 아닐까? 외계인, 로봇, 사건의 지평선 등 지구 밖 이야기가 지적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인간을 넘어서는 비인간 존재들과의 낯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 가능한 지적 능력에 기대어 있다. 그렇다면 고도의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SF는 얼마나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낯선 비인간을 상상하게 하는 걸까? 그것은 우리가 과학의 숭고한 낯설음에 대해 과도하게 신뢰했기 때문은 아닐까? 과학적이라는 수사는 너무 많은 관대함을 허용하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 열광했던 TV 시리즈 , 나 한낙원의 『금성탐험대』는 과학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소녀의 덕성을 부여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어린이 공상과학소설의 범주에 드는 장르물이었다. 그저 소녀였던 나는 과학시대의 임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과학소녀처럼 그것들을 보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시들해졌는데, 중고등학생이 되자 그것이 공상과학이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더 세련된 문학소녀로 돌변했다. 문학소녀는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법. 공상과학소설은 상상력보다 급이 떨어지는, 덜 과학적인, 말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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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안보윤, 「수미」 정우주 1. 오늘날 한국문학장에서 돌봄이 뜨거운 화두라는 사실을 말하는 일은 이제 익숙히 합의된 현상이 되었다. 다양한 양상으로 돌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서사들에서부터 아예 돌봄을 키워드로 내세운 비평 특집들까지, 지금 돌봄의 외연은 빠르게 팽창하는 중이다. 이렇듯 돌봄 담론이 확장되는 흐름에는 특히 팬데믹을 지나오며 돌봄 공백의 문제가 수면화 되었고, 누구든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취약성을 절실히 체감하게 된 배경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돌봄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복수의 행위자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라는 점에서, 모두가 취약하므로 상호의존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관계적 가치와 자연스럽게 접속한다. 그런데 근래의 논의에서는 오히려 돌봄을 보편적인 사회 윤리로 치환할 수 없는 무언가로 지칭하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돌봄에서 연대나 윤리만을 찾기보다 그 속의 지난함과 불쾌함을 들춰내는 데 주목하는 작업1)이나, 상호적 돌봄을 이타성이나 선함이 아닌 미성숙한 두 존재가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로 정의한 목소리2) 등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끄럽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로써 돌봄의 불가능성에 방점을 둔 시도들이다. 다만 이처럼 돌봄의 관계가 지닌 온정적이고 친밀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갈등과 착취의 요소에 천착하는 일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돌봄이 바로 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돌봄은 철저히 사회구조적으로 배치된 역학관계에 토대를 두고 수행된다. 팬데믹 시기 이전부터 돌봄 노동이 가정 내 여성에게 전가되고 사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젠더 편향의 측면을 지적받으며 비판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음을 상기해 본다면, 현시점에 ‘돌봄 제공자가 돌봄 수혜자보다 권력의 우위를 점한다’는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를 역설하는 것은 그간 축적되어 온 페미니즘적 돌봄 논의에 역행하는 입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돌봄의 위태롭고 끈적끈적한 지점을 부각시켰던 앞선 비평들이 돌봄의 가치가 공동체적 연대의 이름으로 단순히 포섭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돌봄이 총체적 위기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처럼 쓰이진 않을지"3) 우려하는 관점들이 빠르게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돌봄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구태여 강조하는 행위 역시 돌봄 개념의 다층적인 결을 구분하지 않은 채 끝없이 확대되는 양태를 경계하려는 의식적 흐름과 맞닿는다. 무엇보다 돌봄은 사회학과 밀접히 결합한 실천의 영역이므로 구체성과 현장성이 중시되지만, 한편으로 지속되는 팽창이 상징하듯 돌봄에 내재된 의존과 책임이 교차하는 원리는 인접 의제와의 유의미한 연결 가능성을 가진다.4) 그렇다면 이제 돌봄을 확장하되,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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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숲에 머무를 수 없다면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수 없다면 이소 1. 십 년 전, 한국 문학은 세월호의 침몰을 ‘실재’이자 ‘사건’이자 ‘외상’으로 받아들였다. 잘 짜인 듯 보였던 상징질서가 찢기며 드러난 ‘실재’의 속살이자, 그 이전의 주체와 그 이후의 주체가 도저히 같을 수 없는 압도적인 ‘사건’이자,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외상’. 글을 쓰는 자라면 누구라도 사태의 ‘재현 불가능성’을 수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애도의 윤리에 복종하는 동시에 끝내 ‘애도 불가능성’을 증언해야 하는 이중의 난제가 되었다. 다른 글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이 무렵의 문학 비평이 출구 없는 폐허 위에 무릎을 꿇고 써내려간 ‘실재의 윤리’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품은 바가 없다.”1) 다만, 실재를 향하라는 부정성의 요구가 언제까지나 생생할 순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기에, 이제 그간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다시피 했던 작업들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출발했을, 얼마만큼의 반성과 얼마만큼의 결심을 담아 정성스럽게 쓰였을, 십 년 만에 도착한 한 평론가의 글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실재의 윤리’를 이야기하던 평론가의 반전 앞에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지만, 만약 그의 결론이 어떤 필연적인 경로 끝에 형성된 것이라면 이에 관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독을 막기 위해 그 글의 마지막 단락을 중략 없이 길게 인용한다. 십 년 전의 나는 몰랐던 것 하나를 이제는 알고 있다. 세상엔 쓰일 수 없는 문장이 있다는 것. ‘아이가 죽었다’라는 문장은 불가능하다. 한번 태어난 아이들은 계속 산다.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산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장소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곳을 마련한다. 아이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살게 하자는 말은 뻔한 말이다. 그런 말이 아니다. 기억을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공식 기억’과는 다른 ‘대항-기억’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 나는 ‘인공 기억artificial-memory’의 불가피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예술로 생성되는 인공 기억을 ‘art-ificial memory’라고 부르면 되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은 매우 허술해서 우리의 뇌 속엔 “기억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말, “생생한 감각적 심상과 강력한 감정이 동반되면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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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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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4.09.01
소설의 피로

[에세이] 소설의 피로 양지예 노엘 갤러거의 무대를 보며 음악가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그의 젊은 시절 방황하던 경험과 더불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여인에 대한 곡이다. 노래는 발표한 지 삼십 년 가까이 되어 가고 무대 위 머리 희끗희끗한 노엘 갤러거에게서는 이제 방황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이 흥겨울 정도다. 아련한 원곡의 분위기 역시 세월을 따라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편곡을 입었다. 음악은 어떻게 나에게 올까. 일단 누군가 곡을 쓰고 발표해야 한다. 청자인 나는 플랫폼을 통해 음원을 감상하거나 드물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앨범을 사기도 한다. 음악가에게는 다른 홍보 방법도 있다. 대중음악가라면 뮤직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하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때로는 음악과 관계없는 방송이나 행사에도 출연하는데,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역시 주는 새 노래 홍보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신곡은 끊임없이 피로(披露)된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할까.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수만 번은 반복하여 들었을 그 노래를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음악가는 본인 노래의 첫 청자다. 작곡에 참여하지 않는 가수라 하더라도 비슷하다. 곡이 만들어지는 영감의 그 순간부터 완성 후 녹음 과정까지 좋은 기억도 싫은 기억도 낱낱이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갈등뿐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창작자 홀로 만드는 음악이란 없다시피 하다. 사람이 여럿 모였는데 과정이 언제나 매끄러울 수는 없다. 드물게 하늘이 내려 준 노래가 어려움 없이 착착 완성된다 한들 매끈한 표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기 마련이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아름답기만 한 창작의 과정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겉보기를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 어렵지 않다. 그저 포장 기술이다.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포장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실 다지기보다는 포장 기술을 익히는 쪽이 빠르다. 포장이 어렵다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피땀눈물을 삭제해 버린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바라기만 하면 매끈한 성취가 이뤄질 듯한 환상을 듣는 이에게 심어 주는 요령을 수많은 표어와 마케팅 서적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요령을 활용하면 가수도 어렵지 않게 싫어하는 노래를 즐거운 듯 피로해 보일 수 있을 터다. 삼사 분 정도 꾹 참아내면 그만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화려한 메이크업과 현란한 조명은 혹시 드러날지 모르는 굴곡을 감추는 역할을 남몰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감정은 가라앉기 마련이다. 설령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해도 반드시 그렇다. 싫어하던 노래를 부르던 중에 즐거운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기억은 뒤섞이면서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날것이던 감상은 무뎌지고 희미해진다. 뜨거울 만치 처절하던 열정도 냉정하게 식는다. 이 변화는 눈에 띈다. 음악에는 피로될 때마다

기획 2024.09.01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심완선 ‘제일 좋아하는’ 하나를 꼽아 보라는 질문을 종종 듣는다. 작가님은 제일 좋아하는 SF 소설, 작가, 영화, 게임이 뭐예요? 하나만 골라 본다면? 그럼 나는 시야의 한쪽 구석을 노려보며(사람이 고민에 빠질 때 흔히 나오는 얼굴이라고 들었다) 고심하는 표정을 짓곤 한다. 답변은 대체로 이렇게 흐른다. 너무 어려운데요.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가 있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은데. 조건을 조금 바꿔서 대답할게요. ‘제일 처음 읽은’이나 ‘제일 여러 번 본’ 아니면 ‘최근 접한 것 중에서’라면 말할 수 있어요. ‘최애’(최고로 애정을 쏟는 대상)가 확고한 분야가 아닌 이상 나의 1순위가 무엇이라고 내세우기는 정말 어렵다. 적어도 나는 적잖이 갈팡질팡하는 편이다. 게다가 솔직히, 남들이 듣기에 그럴싸한 이름을 대고 싶다는 욕망도 약간은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할 때는 체면을 차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너무나 쉽게 대변한다. 예를 들어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인셀’(비자발적 독신의 약어로, 주로 인터넷 하위문화와 여성혐오 및 적개심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혐의를 산다. 은 상당히 대중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레즈비언 영화의 고전 명작이 되어 가는 중이다. 영화사를 말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건 꽤 젠 체하는 발언 같다. 아니면 평범한 씨네필의 발언이거나. 만약 누가 를 말하면 나는 ‘흠······’ 하며 잠시 의심을 품을 테고, 를 말하면 슬쩍 거리를 둘 것이며, 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여상하게 넘어갈 것이다. 아, 히치콕, 취향을 적당히 가릴 만한 무난하고 점잖은 대답이죠. 물론 진심으로 히치콕을 좋아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요. 나는 영화를 매우 드물게 보는 사람이지만 무난하고 점잖게 주워섬길 만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기는 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를 봤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상영시간 내내 커피와 담배가 줄창 나오거든요. 전 비흡연자고 그때는 커피도 거의 안 마셨는데 스크린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중독되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는데 촬영 방식이나 분위기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죠. 아, 을 뒤늦게 봤는데 말이죠. 거기 나오는 대사들이 따로 떼놓고 보면 유치하도록 낭만적인 게 많잖아요. 그런데 상영관에서 실물을 마주하니 영화가 뿜는 그 분위기에 빨려들더라고요. 제가 몰랐던 세기말의 조각을 그제야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좋아하는 감독이라면, 저는 기회가 된다면 아이다 루피노가 찍은 영화를 모두 섭렵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배우는 버스터 키튼이 아닐까 싶네요. SF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걸 고르라면, 글쎄요, 는 분명 정교하게 만든 영화지만 아무래도 에 정이 갑니

기획 2024.09.01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에세이]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유진목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기로 적은 산발적인 산문을 정리하던 중에 어렴풋이 ‘불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불행은 나일까? 곧장 미간이 찌푸려졌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수기는 간결하고 가슴 아팠다. 타인의 이야기였다면 거기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정말로 불행하구나.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 순응했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마침표. 쓰는 행위는 시간을 보내는 고통스러운 방법 중 하나다. 글을 쓸 때면 자꾸만 손목시계의 초침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으면서도 글을 쓴다.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 공개한다. 그 역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벌인 일로부터 태연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온갖 괴로운 일들을 책에 쓰고서 태연하게 살아간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다. 나는 쓰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잊는다. 오로지 살기 위해 고통을 기억에서 지우듯이 그렇게 한다. 한때 내 전부였던 것들을 잊으려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잊고 난 후에 무엇이 찾아올지 알고 싶어서 쓰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온통 글을 쓰는데 쓰다가 느닷없이 나타나는 무엇과 맞닥뜨리고 싶다. 이 글은 바로 그때 끝날 것이다. 나는 내심 그때를 기대한다.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알맞은 때를 기다린다. 나는 내가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원래 모양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거울을 보며 자기혐오에 빠질 나를 생각하며 진저리를 친다. 불행에도 기쁨에도 공평하게 무감해지는 대신 불안을 적극적으로 견뎌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짐작과 가늠으로는 판단해 볼 수 없는 영역에 나의 불안이 있다. 지난 가을에는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11월의 후쿠오카는 여름의 끝자락 같아서 챙겨간 가을 니트들은 모두 캐리어에 넣어 둔 채로 반팔 티셔츠를 사서 입고 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돌아다녔다.(나는 항상 여행 옷을 챙기는 데 실패한다.) 9월에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이혼을 확정 받았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짧은 질의에 대답하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에게 손을 높이 들어 인사했다. 그날 밤에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소리 내 울었다. 10월은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11월이 되자 후쿠오카에 가고 싶었다. 남편과의 좋은 추억들이 있는 곳이었다. 도무지 혼자 갈 엄두가 나지

기획 2024.08.01
괴담의 시작과 끝

[에세이] 괴담의 시작과 끝 현찬양 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사백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그 두 배쯤 되는 부모들이 조회를 하듯이 서서 식순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지루해서 우리 반 교실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처음엔 얼룩인 줄 알았는데 점차 뚜렷해지면서 교실 창문 너머로 얼굴 같은 것으로 변했다. 얼굴 모양의 흰 얼룩인지 흰 얼룩 모양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반 누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하얘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눈은 움푹 들어가서 보이지 않고 얼굴의 윤곽은 뚜렷한데 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을 입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키를 보면 우리 또래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맞아? 나는 옆에 애를 손으로 쿡 찔러서 “저거 보이냐?”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약간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애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으아 저게 뭐야.” 그 소리에 주변이 일순 소란해졌다.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 그것을 보았다. “뭐야, 저게.” “누구 안 내려왔나 보네.” 같은 소리들로 시끄러워지자 단상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키자 담임은 우리 반 애들의 숫자를 세보고는 실장(우리 학교에선 반장을 그렇게 불렀다)더러 올라가 보라고 했다. 실장이 올라가서 귀신이 비치는 창문 너머에서 손을 엑스자로 그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실장은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귀신은 그곳에 있었다. 하얀 얼굴로 졸업하는 아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제야 선생은 제법 당황했는지 실장에게 유리창을 닦아 보라고 했다. “애들이 창문 너머로 분필 지우개를 터니까 그게 묻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창문을 닦으면 돼.” 그 말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장은 걸레를 가지고 가서 창문을 닦았다. 그래도 사람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엔 술렁였지만 졸업식이 진행되자 점차 귀신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햇빛이 반사된 것일 거라는 둥, 잘 닦이지 않는 얼룩일 거라는 둥,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가설들이 몇 가지 나왔으나 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무엇도 검증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과 친한 몇몇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서 사람 자살한 적 있어요?” 하고 직설적으로 물어 보았지만 물론 선생님들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찡그린 얼굴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을 뿐이다. 학생회장이 연설하고 동창회장이 연설하고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학년 부장 선생님까지 한마디씩 하고 나자 몇 명이 표창장을 받았다. 꽃다발을 수여하면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는 동안

기획 2024.08.01
아홉수는 레벨업

[에세이] 아홉수는 레벨업 이나리 1. 한동안 웹소설을 많이 읽었다. 웹소설은 이천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인소’(인터넷소설)와 달리 핸드폰으로 보기 때문에 서사의 호흡이 색다르다. 일명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으로 불리는 특정 서사 조건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회빙환’이 최근에 유행하는 웹소설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가령 ‘환생’은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교리에서 나온 윤회전생의 개념으로 이미 친숙한 서사적 요소다. ‘회귀’는 또 어떤가. 오래된 영화 중에 (1993)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필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를 겪는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이라는 선택까지 시도하지만 반복되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필이 반복된 하루 안에 갇혀서 깨달은 것은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는 것. 그제야 필은 회귀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필에게 회귀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회귀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이 영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2004), (2017), (2018) 등은 타임루프물로 불리며, 반복되는 시간을 주인공이 겪는 형벌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웹소설에서 등장하는 회귀는 이와 다르다. 주인공이 겪는 ‘루프’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인생의 기회이고 다른 선택지다. 말하자면, 이미 오답 노트를 모두 작성한 주인공에게 문제 풀 기회를 다시 준 셈이다. 주인공에게는 이미 모범답안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을 더 행복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다. 큰 맥락을 보자면 ‘빙의’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읽었던 책 속으로 들어가 해당 등장인물에 빙의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의 독자로서 나는 이 ‘안전한 불확실함’에 빠져들었다.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빙환’의 요소들로 인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안전장치를 믿었다. ‘안전한 불확실함’이라는 이 모순적인 요구를 충실히 지켜주는 서사라니. 서사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확실하게 안전하기를 바라는 모순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내 현실이 팍팍할수록 그들의 안전한 모험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2. 미래를 안다는 것. 그건 인간사에서 항상 선망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미래를 알고자 한다. 알지 못한 상태로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는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중 하나는 선지자, 웹소설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지자를 찾는다. 하늘이 내린 신통한 능력을 발휘해서 미래를 예지해 주는 존재를

기획 2024.08.01
황당한 청탁

[에세이] 황당한 청탁 손세실리아 몇 해 전 일이다. 모 공공기관의 잡지 외주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편집 담당 아무개라 자신을 소개하곤 산문 청탁 건으로 연락했단다. 마침 산문집 준비 중이었고, 써야 할 글감이 몇 있어 흔쾌히 수락하곤 착실하게도 마감 날짜를 지켜 넘겼다. 언제 끝날지 모를 팬데믹 상황에서의 거리 두기, 인원 제한, 방역 등 여러 규제와 제약으로 인해 경영난에 허덕이는 책방카페 운영자로서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냈던 것인데 담당자로부터 게재 불가 통보를 받았다. 두려움에 처한 자영업자와 소시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을 만한 내용인지라 어리둥절했더니, 자신도 당혹스럽다며 사과하고선 기획위원들의 반대라서 하는 수 없단다. 이유를 묻자 제목 때문이라며, 재난지원금은 정부에서 지급했는데 어째서 돌아가신 시부가 지급한 것으로 표현했느냐는. 혹여 불온한 내용은 아닌가 상상할 수도 있어 간추려 말하자면, 공간 오픈 10년이 지나도록 번듯한 영업용 커피 기계도 없이 꾸려 오던 중, 코비드19 장기화로 인해 한가해진 틈을 타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중고 기계를 설치하며 겪게 된 일이다. 하는 김에 서가 리모델링도 감행했던 건데 빠듯한 형편을 알고 있다는 듯 작고하신 후 팔리지 않아 오래 비워 둔 시부님의 시골집이 처분돼 자녀 넷이서 공평하게 나눴다는 사연을 유산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재난지원금으로 비유했던 것. 실제로 그렇게 여겨지기도 했고. 생전에도 이과 성향이셨는데 여전하시구나 싶게 액수도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보다 처지가 더 어려운 이들에게 양도할까 하다가 유산이라기보다 어쩐지 시부님께서 보내 주신 재난지원금 같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주위에 휴업과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그나마 문을 열고 있는 가게도 대부분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듯한 분위기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보니 ‘어렵다’는 푸념도 금기어다. 오죽하면 천국에서 보내 준 재난지원금을 넙죽 받았겠나. (중략) 각설하고, 팬데믹이 아니었음 앞만 보고 내달렸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하다. 주위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는지 살피고, 미력하나마 챙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내 모습이 저승에 계신 시부님의 마음까지 흔들었을지도. - 졸저 『섬에서 부르는 노래』 중 「천국에서 지급된 재난지원금」 일부 은유를 팩트로 읽고 내린 결정이 어처구니없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구차해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며 실소하는 내가 이해심 많아 보였던 걸까? 최종 편집까지 열흘쯤 여유가 있으니 다른 글을 써준다면 기다리겠단다. 지면의 앞부분에 실리는 꼭지라서 비울 수 없다며. 담당자가 무슨 죄냐 싶어 수락했다. 비록 전화 통화와 이-메일로 나눈 대화였지만 내 글을 꼭 싣고 싶노란 그의 정중하고도 간곡함이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차피 책에 수록할 산문 한 꼭지가 더 생기는 거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손님 뜸한 가게의 며칠 매출 총액보다 원고료가 후했다. 이

기획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기획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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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24.09.05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1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1 김유림 김숨 「룸미러」 1. 길 위에 표류하는 인간 모빌리티는 시대를 읽는 키워드가 되었으나 문학과 연결고리는 느슨하다. 국내외적으로 『서유견문』, 『열하일기』 , 『오디세이아』, 『리어왕』, 『돈키호테』등 이동을 모티브로 천착한 세기의 걸작들은 넘쳐난다. 반면 모빌리티 인식을 기반으로 문학 작품을 사유한 사례는 미미한 편이다. 현대는 이동성이 범람하는 사회다. 다양한 이동 매체와 첨단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제외한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시대의 거울인 문학 분야에서도 이동 매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모빌리티 수행 과정에 천착한 문학 작품 해석은 시대의 재해석이며 사회를 관통하는 인식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더하여 문학과 다소 거리감이 있는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가치 추구는 문학 분야를 넘어 예술계 전반에 시너지 효과를 추동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김숨 소설 「룸미러」1)는 ‘길 위의 장르’2)로 교통 시스템이 사건의 주요 무대다. 도로에 범람하는 교통수단은 사회의 얼굴이다. 수백만 원 단위부터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자가용, 생계 수단인 물류 수송용 트럭, 관광버스, 배달 오토바이 등은 물신주의, 사회 계급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다. 소설은 집을 떠나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 중에 서사가 전개되어 이동 중에 결말에 이른다. 이때 이동 수단은 가족이 임시 체류하는 거소가 된다. 즉 집이 정주에 근거한 안정된 공간이라면 교통수단은 집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잠시 머무는 장소로 불안정한 공간이라 하겠다. 이동 중에 체류지는 사이 공간3)이다 사이 공간의 불안정성은 경제적 약자의 현실 삶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계 위기로 대별 된다. 「룸미러」의 사건은 어린 사내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화자는 아내다. 소설의 배경 공간은 자가용으로 가족의 이동을 모티브로 한다. 가족은 남편의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다. 외자식인 남편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어릴 적부터 가장 역할을 해왔고 친척 대소사까지 빠짐없이 챙긴다. 아내가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는 오롯이 남편이 책임지고 있다. 남편은 두 달 전에 직장을 옮겼다. 가장의 잦은 이직은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원인이다. 고용 불안은 가장의 심리 불안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불안 심리는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야근 중에도 집에 수시로 전화하여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잠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퇴근해 오면 잠든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티브이 볼륨조차도 낮춘다. 가장의 강박 행위는 가족이 차를 타고 이동 중에도 계속된다. 남편은 차선을 바꾸면서도 룸미러로 뒷좌석의 아이들을 흘끔 살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깨어나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의 두 눈동자가 흘끔 룸미러를

비평 2024.09.05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2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2 김유림 김숨 「막차」 1. 거친 일상으로 질주 현대는 고-모빌리티1)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 지구를 하나의 네트워크 체계에 편입한 이동 매체와 지리적 활동 범위를 넓힌 교통수단의 역할로 인해 ‘이동’은 단순한 움직임을 넘어 현대인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인식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2) 김숨 작가는 70여 편의 작품을 통해 서민들의 곤궁한 삶을 재현해 왔다. 특히 이동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흔들리는 약자들의 실존 삶을 기계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인간과 기계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인간과 사물의 동일체 의식은 예술적 감응을 넘어 AI와 공존 시대, 새로운 사유 확장의 논거가 될 것이다. 「막차」3)는 가족의 일상사를 모티브로 모빌리티 수행 과정을 재현한 작품이다. 소설은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죽음을 모티브로 천변만화 같지만, 알고 보면 제자리를 돌고 도는 인생 여정을 다룬다. 서사는 부부가 고속버스에 탑승하면서 시작된다. 소설 장르는 사회 계층의 구체적 현실로 부각 되는 인간관계의 불합리한 조건과 그 이면에 내재한 문제들을 형상화하는 장르다.4) 「막차」는 개인 가족사를 다루고 있으나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화자 순옥 부부는 아들로부터 며느리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순옥은 기우뚱 가라앉는 배에서 뛰어내리듯 외출을 서둘렀고 남편은 경황없는 와중에도 바지를 다림질하고 손수건까지 다려 외투 주머니에 챙겨 넣고서 집을 나선다. 순옥은 남편의 행위가 눈에 거슬렸으나 굳이 탓하지는 않는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결혼까지 했을 정도의 시간을 함께 사는 동안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코드는 뺏대요? 코드를 빼두는 거랑 꽂아두는 거랑 전기세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밥솥 코드는 뺐던가. 하루 이틀 비울 것도 아니고, 집을 나서기 전에 두루 둘러보지 않은 게 그녀는 뒤늦게 후회되었다. (13쪽) “어제오늘 손님이 달랑 한 명뿐이었다고요. 그것도 파마 손님이 아니라 염색 손님요. 그깟 염색을 해주고 얼마나 받는다고. 자반 한 손 사고, 달래 한 묶음 사니까 그 돈이 다 날아갑디다.” (「막차」 본문, 이하 쪽수만 표기, 19쪽) 순옥 가족이 처한 현실은 전기 요금이라도 아껴야 할 만큼 곤궁하다. 남편은 자신의 입성만 챙기는 무능한 캐릭터로 아내 순옥에게 생계를 의지하여 삶을 지탱해 왔다. 그동안 남성은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이 처해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주체로 여겨져 왔다. 반면 여성은 감정적이고 연약하며 보호가 필요한 순종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5) 「막차」의 화자 순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며 남편은 무위도식한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성 역할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가부장제의 변화를 아

시·시조 2024.09.04
「바다의 조각들」외 6편

바다의 조각들 이윤길 암막 커튼 장미 화병 곁에는 DGPS와 몇 장의 해도 그리고 바다를 조명하는 LED 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쓰가루해협을 통과하고 사흘이 지나도 나침반 방향은 여전히 북쪽을 부둥켜안았다. 선회창 앞으로 알류산열도가 스칠 듯 다가와서 천천히 멀어졌다. 묘박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파랑주의보가 발령되자 종생에 근접한 통신장의 주름이 깊어졌다. 수다스럽던 수평선이 퍼렇게 멍들기 시작했고 선장은 애정 하던 돈나무 화분에 아침의 절반을 토했다. 그것 또한 바다를 선택한 자의 운명이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밤, 갑판장은 구명정에 시동을 걸면서 생각했다. 브리지로 예리한 각도의 빗방울이 연거푸 날아들 때 파랗게 질린 실습항해사는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뱃머리에 버려졌다. 어느 선장의 신탁 나는 선택되었고 권력은 해신에게서 왔다. 뱃사람은 나에게 머리를 끄덕이거나 조아린다. 해류를 따라 떠다니며 아침이면 신천옹도 긴 깃을 펼쳐 경배의 문안을 올린다. 나는 고향을 떠나 태풍의 눈 밖을 기웃거리는 운명이다. 나는 날뛰는 어둠이나 고통으로부터, 흘수선으로 몰려드는 둔탁한 파도의 공포로부터, 축축한 선실에 등을 기댄 외로움으로부터 뱃사람을 지킨다. 나는 제비갈매기가 하염없이 허공에서 재잘거리듯 흔들리며 바다를 떠돈다. 나는 선장이다. 표류하는 사람들 몰려오는 파도의 거친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선원들은 어깨를 맞대고 따뜻함이 흥건하도록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러면서 늙어 갔다. 낡고 삐걱거리는 용골 위에서 숫양의 모가지를 자르는 상념은 무적이었으나 불면이 갯바위 갯강구처럼 부스럭거렸다. 오, 희망이 모두 빠져나간 표류여, 파도가 선실로 밀려들어 복숭아뼈를 적시고 발뒤꿈치 힘줄을 끌어당긴다. 만선에 매달렸던 너의 용기 나의 만용이, 우리들의 슬픔이 고통으로 가득한 선실 바닥을 뒹군다. 난파 붉은 섬광 아래에서 흔들렸다. 고막을 찢어대는 천둥소리가 목줄을 놓친 개의 이빨처럼 달려들었다. 9월 한낮인데도 번개의 칼날은 야만처럼 빛나서 구명의 비명을 이리저리 몸에 새겨 놓는다. 태풍은 스스로 죽음 곁을 배회하는 물의 손자이자 악마가 흔드는 공포의 회초리. 두려움에 사로잡힌 푸른발부비의 시퍼런 손이 깍지 껴 배를 봉인했다. 그러나 침몰은 날카로운 뱃길이 곡선으로 구부러지거나 뒤틀리며 꾸는 꿈, 먼저 수장된 선원들이 다가와 손나팔을 만들며 경고했다. 도망쳐 뱃사람의 이웃 병치매가리·노랑각시서대·연어병치, 장작으로 쓴 펭귄 대가리, 주방 개수대 곁에서 바스락거리는 새앙쥐, 기회만 생기면 불을 지르는 선원, 럼주로 꿈을 대신하는 궁핍한 해적, 몸 섞었던 마도로스에게 던지는 연민 또는 몇 개의 증오가 수장된 북양, 어머니가 걸어 놓은 석등 곁 연등과 풍경 좋은 카페의 마키아토 한 잔, 기쁨과 슬픔, 출항이나 귀항의 나침반이라든지 폭풍 그 밖에도 수많은 마르 파시피고 적도를 지났으나 뜨거웠던 흔적만 남았다. 몸을 식히려 폭풍

수필 2024.09.04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변명희 새벽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우리를 텃밭으로 데려갔다. 엷은 햇살을 안은 감나무 옆으로 블루베리가 익어가고, 서둘러 핀 과꽃들도 반가운 손짓을 했다. “누나, 이거 좀 먹어봐. 큰 놈이 맛있거든.” 방아깨비처럼 겅중거리던 동생이 엄지손톱만큼이나 굵은 블루베리 한 줌을 내밀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 한 쌍이 정답게 흘러가고 있었다. 세 살 터울인 우리는 늘 손을 잡고 다녔다. 나란히 기찻길을 걸어 큰언니 집에도 가고, 라면이나 건빵을 사러 점방에도 함께 다녔다. 동생이 자라면서부터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다니기도 했다. 마당에서 둘이 놀다가는, 해 질 무렵이면 남쪽으로 난 토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때면 어디선가 “들어와 밥 먹어라.” 부르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오누이의 시선 저쪽 끝에 그렁그렁 매달린 엄마에 대해서는 둘이 다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 같은 상처임을 그때도 알았다. 병석에 누워있던 엄마는 코흘리개인 우리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립고 외로웠을 열 살배기 동생을 이해하기에는 나도 철없는 아이였다. 엄마의 치마폭인 양 따라다니는 동생을 윽박질러 놓고는 몰래 친구 집에 가기도 했다. 어쩌다 손찌검으로 눈물을 쏟게 했던 기억은 금방 벤 생채기처럼 아팠다. 입시 준비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내가 본 둥 만 둥 까칠하게 굴어도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면서는 내 일에 급급해 동생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후로도 4년여간 외국에 나가 있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우체통에서 뜻밖의 항공우편을 발견했다. ‘누나 누나 누나’라고 반듯하게 쓰여 있는 카세트테이프였다. 한눈에 동생의 필체임을 알 수 있었다. 결혼하고 멀리 떠나온 후로 잊고 지내던 동생이 내 앞에 나타난 듯했다. 테이프를 든 손이 후들거렸다. ‘과꽃’ ‘오빠 생각’ ‘꽃밭에서’ 등의 노래가 담겨 있었다. 2절이 흐를 때는 목이 메었다.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 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마디마디 귀를 후비는 노랫말은 함께 노닥거리던 마당에서 동생이 훌쩍거리는 소리 같았다. 자주색 과꽃 뒤로 너울대던 나팔꽃도, 정답게 서 있던 해바라기도 아른거렸다. 엄마도 없는 어린 동생을 두고 떠나와 버렸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녔을까, 사춘기는 어떻게 보냈을까, 혹시 등록금이 필요한 건 아닐까···. ‘누나 누나 누나’라는 글자가 우렁우렁 메아리로 울렸다. 그리움이나 애틋함 같은 상투적인 단어만으론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뜰에는 밤새 스산한 바람이 감잎을

수필 2024.09.04
페이지 터너를 생각하며

페이지 터너를 생각하며 변명희 수술실 문이 열리고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나오더니 말했다. “ㅇㅇㅇ보호자님.” 사위가 총알처럼 일어나 문 앞으로 갔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라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잠시 후 담당 의사의 설명을 듣고 온 사위가 시술 경과를 전해 주었다. 두 달여를 긴장 속에 지냈다. 사위의 권고로 MRI를 찍어본 결과 딸아이가 이름조차 생소한 뇌 질환 판정을 받았다. 재차 확인을 위해 정밀검사를 할 때도 2박3일 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보통의 경우 추적관찰을 하지만 머릿속 꽈리의 크기나 모양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소견을 들었다. 방치하면 뇌출혈이나 관련 질환이 일어날 확률이 있는 고위험군에 속한다고 했다. 더욱이 시술 보다는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정이 어려웠다. 머리 부분이라 미세한 오차라도 있으면 다른 신경을 건드릴 수 있어서 큰 결단이 필요했다. 사타구니를 통해 머릿속 꽈리 안에 코일을 채우고 스텐트도 삽입할 거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이틀 전부터 입원하고 아침 일곱 시부터 시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석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밤잠을 못 잤는지 사위의 얼굴이 수척했다. 보호자 명패를 목에 건 그의 등이 초조함에 흔들리는 듯도, 긴장감에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는 듯도 했다. 동의서에 사인도 사위가 하고 남편과 나는 바라만 보았다. 불안하고도 생경한 상황에 모든 역할을 하며 간간이 여러 과정에 관해 설명해 주니 고맙고 든든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막중한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함과 무력감이 동시에 일었다. 딸내미의 삶은 이제 그들이 연주하고 우리는 객석의 관객이 된 것일까, 객쩍은 생각들이 스치며 피아노 연주회의 그녀가 떠올랐다. 화려한 의상의 피아니스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장했다.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잦아들 무렵 수수한 검정색 차림의 여자가 발소리도 없이 들어와 연주자의 옆에 앉았다. 피아노 소리는 홀을 가득 메우고 가끔 그림자 같은 여인이 악보를 넘겼다. 페이지 터너인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꽂히며 그 역할에 대해서 생각들이 오갔다. 아무도 페이지 터너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지만, 연주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조력자였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딸아이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일까 생각에 잠겼다. 시집을 보냈으니 당연한 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내 이성과 감성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입원 기간 내내 사위가 보호자 역할을 하며 딸아이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거쳐 닷새 만에 퇴원했다. 저녁에 마련한 식사 자리에서 사위가 오랜만에 먹는 밥이라며 제법 술잔을 기울였다. 의학지식이 없는 나는 막연한 걱정을 했지만, 사위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긴장이 풀렸을까, 평소와 달리 말수가 많아지고 상기된 모습이었다. 딸아이가 진단을 받은 후 관련 자료를 찾아 읽는다더니, 아는 만큼이나 걱정을

수필 2024.09.04
슈룹이 되어

슈룹이 되어 변명희 “저어~ 거기요, 조심하세요. 위험해요.” 일행 중 한 남자가 뛰어오더니 내게 던진 말이다. 친구들과 장난하며 강변 둑길을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질 수 있으니 안쪽으로 걸으라는 것이었다. ‘무슨 간섭이람.’ 생각하면서도 꼬리를 내리고 조신하게 걸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모종의 작정이라도 했던 것일까. 1983년 겨울 어느 날, 그는 공식적인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얼마 후 외국에 나가 살면서부터는, 그 나라의 관습대로 내 이름 뒤에 그의 성(姓)을 붙여서 썼다.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심리적으로도 의존적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점차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언어소통의 어려움도 있는 데다, 빵 한 봉지 우유 한 팩의 찬거리나 옷가지를 살 때도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녀야 했다. 철저하고 섬세한 성격의 그는 내가 운전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못했다. 어쩌다 내가 운전을 해도 쉬지 못하고 신경을 쓰니 점차 나는 운전석에 앉는 일이 뜸해졌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미국 중부에서 캐나다에 다녀올 때도 그는 지도를 외워서 혼자 운전했다. 하루는 16시간 가까이 운전하면서도, 맥도날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피로를 풀고는 다시 출발할 정도였다. 방향감각이 둔한 길치이다 보니 나는 여전히 동네 기사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는 혼자 외출하면 그가 지도를 그려주며 설명을 곁들이고, 수시로 확인을 했다. 지금까지도 기차표든 비행기 표를 내가 구입해 본 적이 없다. 터미널에서도 공항에서도 그는 표를 사고, 나는 뒤만 따르면 되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컴맹에다 기계치인 내게 해결사 역할은 당연하였다. 노심초사하는 그의 성격 탓에 완전 바보가 되었노라 불평도 하며 그럭저럭 살다가는, 얼마 전 느닷없는 태풍을 만났다. 그가 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병원에서 주는 보호자 명패를 내가 목에 걸었다. 눕고 일어나는 그를 부축해주는 것이 낯설었다. 며칠 동안 간이 침상에서 잠을 자는 것도, 링거 줄을 매단 걸대를 끌며 걷는 그의 옆을 지키는 것도 사뭇 어색하기만 했다. 물이나 휴지를 찾는 그를 보조하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고목에 붙은 매미지만, 이번에는 매미의 위세가 고목의 그것을 능가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 퇴원하는 날에는 원무과에서 정산은 그가 하고, 나는 보퉁이를 챙기며 서 있으니 역시 그편이 자연스러웠다. 제자리로 돌아온 풍경이었던 게다. 부산행 열차가 가을 벌판을 달리고 있다. 스륵스륵 지나는 황금색 조각 논들이 비단결이다. 2박 3일 일정의 업무상 여행을 계획하며 내게는 묻는 둥 마는 둥, 그이 혼자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무조건 함께 가자는 뜻으로 보였다. 뜻밖이었다. 가끔 동행하는 경우에는 먼저 내 의사를 묻고, 결정 장애를 가진 나는 이랬다저랬다 몇 번씩 번복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오래전 예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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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문장의 방 한 칸 ― 창작촌 탐방기 〈예버덩문학의집〉 편 이형초 안녕! 문똑이들! 나는 문장웹진의 숨겨진 자식 문장이라고 해. 글월 문(文)에 담 장(墻) 담장마다 나의 글을 새기라는 의미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셨지만 그래서 강원도 횡성에 있는 문학 창작촌으로 향하고 있어. 문장웹진 독자들의 열띤 삶을 보면서 나도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거든! 삼면이 주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숲과 들판이 아름답게 펼쳐진 흰 집! 한 시인의 개인 사유지가 창작촌으로 만들어졌다고 해. 어딘지 궁금하지? 날 따라와! 바로 〈예버덩문학의집〉이야! 내가 한 달간 묵을 창작촌을 소개할게. 이곳은 작가들과 작가지망생들이 훌륭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할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입주와 관련해서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상단의 QR코드로 접속해서 홈페이지를 살펴봐! 잠깐! 저 익숙한 뒷모습은?! 〈예버덩문학의집〉을 관리하는 대표이자 시인인 조명 작가님이셔! 선생님을 따라 창작촌을 둘러볼까? 입구로 들어오면 잣나무 숲속에 방강로 3개가 쭉 이어져 있고 오른쪽엔 주천강이 훤히 보이는 야외무대가 있어. 이곳에서 문학 특강, 연주, 연극, 낭독회 등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를 주최한다고 해. 참여 작가들에게는 소정의 활동비가 주어진다고 하니 문장이는 지금부터 낭독 연습을 시작할 거야! 안쪽으로 쭉 가면 주천강이 보이는 둥근 마당이 있는데 이곳을 ‘노을버덩’이라고 부른대. 입주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주천강과 노을을 바라보며 심신을 정화하고 싶을 때 문화쉼터로 활용된다고 해. 강물 소리가 들리는 노을버덩, 예쁘덩! 이곳이 〈예버덩〉 본관 입구야! 안으로 들어가 볼까? 입구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야외 테이블! 날씨가 좋으면 이 테라스에서 다 함께 식사해. 공동 도서관부터 둘러보자!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독서와 창작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이곳에서 작가를 초청해 특강을 하거나 소규모 작가와의 대화, 낭독회, 예버덩 워크숍을 주최하는 등 여러 가지 문학 프로그램을 연대. 문장이의 방을 소개할게! 입주하는 동안 개인 집필실에서 방해받지 않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어. 문장이가 오기 전에 이불도 깨끗하게 세탁해 주시고 방도 청소해 주셨어. 청소도구, 세면도구(샴푸, 린스, 비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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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도 새도 못 되지만 여기에선 그래도 괜찮아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악어도 새도 못 되지만 여기에선 그래도 괜찮아 - 독립서점 인터뷰 이유빈 천안역 1번 출구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 를 방문했습니다. 는 주로 동화와 시를 다루는 지역 독립서점으로, 책방 주인인 성욱현 작가와 조민주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의 경우, 다른 독립서점들과는 조금 다르게 지역 독립서점이자 청년 문학인이 운영하는 독립서점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인터뷰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해당 지역 출신이 아닌 문학인들이 지역에 정착하여 책방을 운영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성욱현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후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으로, 202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책방 운영과 더불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조민주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현재 동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독립출간물 『친애하는 서로에게』를 썼고 성욱현 작가와 함께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Interview 책방 악어새 대표 성욱현, 조민주] 분류 독립서점 지역 천안 SNS인스타 @crocodilebird.book 책방 운영진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성욱현 : 동화와 시를 쓰고 있는 제가 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립출간물 『친애하는 서로에게』를 썼던 조민주 작가에게 도움을 받고 있어요. 제가 글쓰기 강연이나 지원 사업 등을 주로 맡는다면, 조민주 작가가 디자인, SNS 관리, 커뮤니티 행사를 주로 담당해요. 특히나 책방 큐레이션의 경우, 동화는 제가, 시와 성인문학은 조민주 작가가 맡아주고 있습니다. 아기자기하게 책방이 꾸며져 있는데, 이것도 조민주 작가님께서 담당하셨을까요? 성욱현 : 네, 책방 안에 있는 그림이나 책 추천 문구 등은 전부 조민주 작가가 담당했습니다. 추천 문구는 보통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서 책 속의 글귀를 많이 가져와요. 책을 소개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의 방식 일부가 나에게 오는 일이자 그가 읽는 책을 나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잖아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잠깐, 『친애하는 서로에게』는 어떤 프로젝트였는지 궁금해요. 조민주 : 『친애하는 서로에게』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동기 사이인 황예솔 작가와 조민주 작가가 함께한 독립 출간 프로젝트입니다. 서간체로 서로를 ‘서&rs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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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위로를 만난 순간, 민바람 작가의 <낱말의 장면들>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아늑한 위로를 만난 순간, 민바람 작가의 -서점 카프카에서. 주은 안녕하세요. 한껏 온화해진 공기 탓에 잠깐 스친 바람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는, 초여름에 이야기를 보냅니다. 전주는 책의 도시라고 합니다. 다양한 색을 가진 독립 서점과 동네 책방, 그리고 도서관들이 도시 곳곳에 선물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올해 4월부터 8월까지, 동네 책방에서 다양한 작가를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기회로 6월 7일, 에서 민바람 작가님과 작가님의 우리말 에세이, 을 만났습니다. 서점은 7시에 진행되는 북토크를 위해서, 조금 이른 6시 30분부터 문을 닫았습니다. 평소에는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자리하던 공간에 북토크를 위한 의자들과 빔프로젝터가 놓여있었습니다. 몇 자리 안 되는 의자가 조금씩 채워지고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민바람 작가님은 북토크를 시작하며,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와의 첫 인연을 소개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범상치 않은 입구와 간판을 보고 끌려서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밟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마룻바닥 판자의 소리, 판자를 직접 칠해 꾸민 인테리어와 곳곳에 걸린 그림들, 또 세월과 따듯함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소품들. 작가님은 서점이 되기 전, 북카페였던 카프카의 모습을 그리듯이 묘사하며‘이 공간에서 조용히 쉬었다가 가는 것만으로도 치유될 것 같은, 안전지대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던, 사랑하는 공간에서 북토크를 하게 되어 행복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민바람 작가님이 쓰신 글의 온도는 작가님이 사랑하는 이 공간의 온도와 비슷합니다.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이라는 부제목에 꼭 맞게도, 들여다보고 낱말을 가만히 곱씹는 것만으로 내면을 차분하게 하는 따듯한 힘이 있습니다. 공간이 가진 다정하고 따듯한 정서가 작가님의 진솔하고 단정한 이야기와 꼭 맞아서 이 순간에 푹 빠지도록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은 순우리말의 단어들과 민바람 작가님의 글, 신혜림 작가님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우리말 사진 에세이입니다. 민바람 작가님은 차분한 속도로, 살아온 이야기와 함께 이 책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풀어놓았습니다. 문학과 말놀이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한국어 강사로서의 일에 몰입했던 순간과 무너졌던 순간, 그 과정에서 겪었던 성인 ADHD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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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님의 다정한 목격자 되기 − 우리가 작가님의 북토크에 계속 가는 이유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최진영 작가님의 다정한 목격자 되기 − 우리가 작가님의 북토크에 계속 가는 이유 배연주 삶에 활력을 주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가는 일. 아름다운 예술을 접하는 건 일상에서 이벤트가 되어 준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특정 예술가가 생기면 그 사람의 작품이나 공연을 계속 보러 간다. 소위 ‘덕질’을 하게 된다. 나는 공연도 전시도 좋아하지만 가장 오래된 덕질 분야는 소설이다. 공연을 보는 일이 짧은 시간 안에 폭발적인 즐거움을 준다면, 문학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여파를 남긴다. 읽으면서 마음에 남았던 문장도, 당시에는 와 닿지 않던 문장도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새로운 감동을 준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작품에 관한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 책 출간 직후뿐이다. 그래서 나는 북토크 소식이 들리면 꼭 찾아간다. 최근에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최진영 작가님의 북토크에 자주 다녀왔다. 얼마 전에 내가 또 최진영 작가님의 북토크에 간다고 하니 한 친구가 물었다. “같은 작가님 북토크 가면 항상 똑같은 말만 듣는 거 아니야?” 나는 곧장 아니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최진영 작가님을 좋아하게 된 계기와, 계속 북토크에 가는 이유에 대해 말이다. 1. 독자, 수강생, 팬 작가님의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2011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2주에 한 번씩 도서관 버스가 왔다.(지금 찾아보니 공식 명칭은 ‘이동도서관’이라고 한다.) 개조된 버스 내부 서가에 있는 책을 빌려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최진영 작가님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빌려 읽었다. 이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에 내가 침대에 거꾸로 엎드려서 책 읽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두꺼워서 오래 읽느라 어깨가 아팠던 기억이 있다. 14살의 나는 분명 ‘소녀’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실제로 내가 겪어 보지 않거나 알지 못해도, 감각으로 좋다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있다. 멋진 그림을 보면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 기술적으로 분석해서 설명할 능력은 없더라도 마음속에 박히는 것처럼. 가령 이런 문장들이 그랬다. ‘죽는 순간 공포나 고통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죽으면 끝이니까. 끝이란 걸 어떻게 아느냐고? 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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