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236
시
문장의 시선 더보기‘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lsquo
실패의 의지 - 최근 퀴어 가족 서사에 관하여 박민아 1. 내부의 외부 - ‘그런 것은 없다’ 행동심리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원숭이들이 불평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실험을 통해 드 발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불평등보다 ‘평등’이라는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실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일정한 행동의 수행을 요구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왼쪽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고 오른쪽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준다. 같은 행위의 결과로 오이만을 지속적으로 전달받은 왼쪽 원숭이는 오이를 거부하거나 급기야 오이를 집어던지며 분노한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 ‘평등’이 인간종에게만 있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그런데 그보다 이 실험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불평등한 보상 체계에 분노하는 왼쪽 원숭이가 아니라 오른쪽 원숭이의 반응에 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오른쪽 원숭이는 불공정한 보상 체계를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만약 평등에 대한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이라면, ‘불평등’에 대한 전통 역시 그에 못지않게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불평등 구조에서 수혜의 당사자는 평등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른쪽 원숭이에게 이 게임의 불공정성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보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한 무엇일까. 만약 이후에 두 원숭이가 경쟁을 통해 포도를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경쟁에서 패했을 때 오른쪽 원숭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김보영의 SF소설 「얼마나 닮았는가」2)에서는 ‘성차별이 없다고 가정되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사고실험’을 보여 준다. SF에서 ‘사고실험’은 “만약?”을 질문하고,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 또는 사회적 규범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3)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유로파용 보급선은 성차별에 대한 정보값이 입력되지 않은 ‘일종의 폐쇄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내 문제 상황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온 구조 신호에 응답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신념의 충돌이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면, (여성) 의체에 인격을 탑재한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의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지위에서 발생하는 취약성과 그에게 가해지는 남성 선원들의 폭력이 두 번째 층위에 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진압해야 할 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종의 이유에 의한 선내 폭동에의 감지
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소수자 시민권의 기획과 해외 이민의 상상력 오혜진 ‘탈조선’이라는 모험과 자기 계발의 윤리 2015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헬조선’ 담론은 계급 세습이 고착화된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수저론’과 결합하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됐다. 잘 알려졌듯 이 담론은 한국사회를 더는 진보의 기획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태된 미개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젊은 세대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또한 단호히 거절한다. 헬조선 담론과 함께 부상한 ‘죽창론’ 역시 ‘리셋’에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파괴의 제스처에 가깝다고 해석된다.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2)는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 자조의 정동이 주조한 헬조선 담론을 발 빠르게 포착해 선동적인 대중 서사로 가공한 사례다. 전작들에서 ‘자살’(『표백』, 2011)과 ‘덕질’(『열광금지, 에바로드』, 2014)을 통해 “저항하는 잉여”3)로서의 청년 형상을 부조한 바 있는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해외 이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한다. 다만 그가 모종의 “도발”4)을 의도한 것과 달리, 독자들에게 이미 ‘탈조선’의 상상력은 불온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차원의 ‘노오력’을 요하는 규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정황을 제시한다. 하나는 ‘평범한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등시민”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싫어서』, 44쪽)라는 진단이 ‘홍대 나온 20대 후반 여성’ ‘계나’의 자기인식이다. 즉 계나는 학벌과 외모,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의 할머니가 새벽에 폐지를 줍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고 회고함으로써 ‘폐지 줍는 할머니’의 형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자 비참한 미래로 의미화한다.5) 다른 하나는 소수자들이 연대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기억하는 사람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최의진 1. 기억 당신이 나의 일상에서 멀고, 당신의 고통을 내가 곁에서 함께 겪을 만큼 가깝지 않다면, 당신이 기억난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지나면 어느덧 제삼자가 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먼발치에서 살아왔다는 것. 잊으려 애쓴 적 없고, 오히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그 기억 곁에 항상 머물러 살지는 않았다는 것. 물론 이는 분명 망각과 구별되며, 머릿속 어딘가에 당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기억함’과 닮았으므로 우리는 때로 외부 요인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남’이나 ‘떠올림’을 다른 누군가 없이도 당신을 계속해서 내 안에 간직하는 ‘기억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4·3, 5·18, 4·16··· 혹은 제주, 광주, 팽목항···처럼 뭉툭한 날짜와 지명으로 적히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당신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기억함’이라 믿어 왔던 모든 순간은 다시 의심에 넘겨진다. 어디선가 당신의 이름을 마주치거나, 때가 되면 당신이 기억났지만, 그 이상으로 지속되지 않았던 기억의 공백들은 당신을 계속해서 기억하려는 의지가 내게 없었음을 짚고, ‘기억남’과 ‘기억함’의 사뭇 다른 무게를 증명한다. 매해 봄이 오면 세월호가 기억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넌지시 ‘기억함’으로 여겨 왔으나, 10년을 상실에 꿰뚫린 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기 위해 삶을 바쳐왔던 사람과 실제로 마주 앉자, 나는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기억한다 말하던 자리가 낯설고 무거워지는 것이 ‘나’1)와 당신의 끝이 되지 않도록, 문학은 ‘기억남’에서 ‘기억함’에 이르는 길을 놓는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작별하지 않는 ‘기억함’을 단지 당위와 윤리로 여기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하며, ‘기억남’이 몰고 오는 고통과 ‘기억함’이 품은 의지가 심장에 불을 켜는 삶 사이를 횡단한다. ‘기억남’은 어떻게 해야 ‘기억함’이 되는지, ‘나’가 ‘기억함’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나’에게 정말 이 길만이 유일한지. 2. 밀물과 썰물 소설의 1부를 이루는 축은 “그 도시의 학살”2)에 대한 책을 집필한 후, 그리고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아 오로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제주의 중산간으
셰익스피어에서 젠더를 끄집어낼 때 : 2024년 무대에 오른 셰익스피어 연극과 ‘칼 든 여자들’1)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여성혐오적’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소환하는 것 몇 차례 언론에서 보도될 만큼 올해 눈에 띌 만큼 빈번하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무대화됐다. 이 같은 흐름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2) 국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극보다는 비극이 선호되는 편이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은 사회 불안과 관련한 대중의 심리, 한동안 현장성이 강한 작품이 선호되면서 부차화되었던 ‘이야기성’의 복원, 중장년층 관객의 유입 등을 꼽았다.3) 복잡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소위 ‘성격 비극’은 주로 매체에서 활동하는 스타들의 연극 출연을 독려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배우 황정민이 셰익스피어의 사극 와 에 연이어 출연했고, 조승우가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이 공연될 예정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025년 봄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덴젤 워싱턴과 제이크 질렌할의 가 관객과 만난다. 이 글은 2024년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한 연극, 그중에서도 ‘젠더’ 문제를 전경화한 국내외 작품 3편에 대해 논의한다. 물론 셰익스피어 연극의 ‘여성혐오’가 논의된 것이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희비극을 가리지 않고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의 보수적 분위기와 조응한 가부장적 정서나 주제 의식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2000년대를 전후하여 몇 편의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다.4) 의 구성을 해체하여 그의 아내인 ‘레이디 맥베스’ 중심으로 재구성한 한태숙 연출의 심리극 (1998년 초연) 역시 일정 부분 원작에 대한 비판의식과 맞닿아 있다. 물론 오늘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연할 때 원작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셰익스피어 연극은 저작권이 진작에 소멸된 만큼 창작진의 초점과 문제의식에 따라 자유로운 각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성이 있는 문제를 다루며, 극장을 잘 찾지 않은 관객이 진입하기에 용이한 데다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한 셰익스피어의 연극, 그중에서도 국내 관객이 선호하는 극적 파토스를 조성하기에 적절한 비극이 빈번히 공연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 지면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국립극장 제작 (김미란 각색·연출_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24.6.13.~16.), 국립극단 제작 (정진새 각색·부새롬 연출_명동예술극장, 2024. 7.5.~29.), 그리고 어바인 대학(UC Irvine) 뉴스완 셰익스피어 센터(New Swan Shakespeare Center_이하 뉴스완 센터)5) 제작 Measure for Measure(adapted and directed by Beth Lopes_Ne
시는 음악을 듣는다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2020)를 톺아보며, 정원 1. 시를 읽고 때로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 허연의 경우, 그것은 감각의 왈츠와 같아 때론 휘몰아치고 때론 내리누르고 멈추게 하고 가만히 걷게 하는, 어떤 리듬을 통과하는 느낌이다. 허연이 빚어내는 각양각색의 파토스는 대개 화려한 색채를 지니고 있어 독자는 그 색채와 무늬에 매료되기 쉽다. 그러나 사실 허연의 시의 마력은, 감각의 형식을 재현하는 파토스가 리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는 문장은 ‘죽었다’와 ‘살았다’의 상반된 감각을 ‘교차’하고, 그와 비슷한 모양의 보안등이 ‘깜박’거리는 이미지와 불빛에 의해 ‘있다, 없다’ 하는 얼굴 반쪽의 이미지를 ‘중첩’하면서 감각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말하자면 감각을 ‘교차’하고, 이미지를 ‘중첩’시키면서 시의 음악성-리듬과 그 의미를 ‘증폭’하는 이 감각의 형식으로 하여금 허연의 시는 그 파토스를 분화(噴火)하고, 독자는 그러한 시의 리듬과 시집의 멜로디 라인에 자연스레 몸을 맡긴다. ‘자유시’ 개념이 들어온 이후로 이처럼 현대시는 나름의 개성적인 방식으로 음악성을 실현한다. 2009년 월간 『현대시』에서 기획한 ‘한국시의 리듬이 탈옥할 순간이 왔다’라는 제목의 특집은 현대시의 음악성-리듬에 관한 연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의 자유시 개념을 한층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김춘수는 “자유시에서의 자유란 이러한 운율로부터의 자유”1)라고 지적하면서 리듬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렇듯 운율과 같은 외연적인 음향 요소로부터 해방된 자유시는 대개 내연적인 방면에 핀트를 주는 건축적인 구조를 지향하면서 형식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해 왔다. 중요한 점은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을 형식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정형적인 틀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에서이지, 형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한 편의 시가 지어지면 하나의 형식이 탄생한다. 그러니까 운율에서 벗어난 현대 자유시는 개척의 재평에서 생각보다 많은 잠재적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잠재성의 근거로 허연의 시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의 시가 가지는 특별한 음악성 때문이다. 그것은 음악의 음악성을 타진하면서 시의 음악적 효과를 강화한다. 음악의 음악성이란 곧 리듬이다. 멜로디나 하모니를 가지지 않는 음악은 있어도 리듬이 없는 음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음악성을 타진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리듬은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이다. “우
문장웹진_콤마
아르코문학창작X문장웹진 더보기[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 현장 방문 및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0회 에 방문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공존으로의 여정’이었어요. 이는 팬데믹과 기후 위기, 그 밖에 다양한 사회적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존이란 단순히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를 통해 내가 변화할 수 있으며, 나 역시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에서 출발해요. 문학과 예술, 자연과 인간,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장이 바로 이번 이었습니다. 20여 곳의 출판사가 참여한 만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도서 판매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기후 위기 등과 관련된 사회학 서적부터 다양성과 포용력을 주제로 한 동화책까지 다양한 도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업사이클링 굿즈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건물 내부에서는 제10회 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컬러링 체험존도 한창이었어요. 이외에도 에서는 다양한 포럼들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10월 12일 서교스퀘어에서 진행된 에 참여해 보았어요. 한국과 캐나다의 작가가 국경을 초월하여 ‘다양성과 포용’을 주제로 협업한 앤솔러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를 출간했으며, 기념행사와 책 판매를 이번 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번 앤솔러지에는 한국 작가 김멜라, 김애란, 윤고은, 정보라와 캐나다 작가 리사 버드-윌슨, 얀 마텔, 조던 스콧, 킴 투이가 참여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들은 에서는 박혜진 평론가가 진행을 맡았으며 김멜라, 윤고은, 조던 스콧, 킴 투이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의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의미와 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장 먼저 「판사님」이라는 단편소설로 엔솔러지에 참여하신 킴 투이 작가의 이야기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킴 투이 작가는 난민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사랑과 포용의 가치를 말씀하셨어요. “퀘백의 난민 캠프에 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는 아시안으로서 그게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선물 같은 하루,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문장서포터즈 배연주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선선해진 날씨가 마음을 사색에 잠기게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나에게는 ‘가을’하면 독서 말고 떠오르는 게 또 있다.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보이는 단풍으로 물든 마로니에공원. 약간 쌀쌀한 아침 바람 냄새. 외투를 입고 접수처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 나는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 참가할 때마다 가을이 왔다는 걸 실감한다.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올해 42회째로 개최됐다. 보도 자료를 보면 ‘미등단 여성이 참여 가능한 국내 여성 백일장 중 가장 오래된 대회’라는 수식이 붙어 있곤 하다. 그 의의를 빼고 보아도 백일장이 42회째 사라지지 않고 지속해서 열리는 건 크게 가치 있는 일이다. 42회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고지에 자신의 마음을 펼쳐 놓고 갔을까. 헤아려 보면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존재 자체가 문학계의 한 역사 같다. 나도 그 역사에 38회부터 함께 하고 있다. 올해까지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 5회 연속 참여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백일장이 열렸다. 백일장 당일 실시간으로 글제가 공개되었고, 시간 내에 원고지 형식 한글 파일에 글을 써서 제출했다. 친구를 만나러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노트북을 펴고 참여했던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었지만, 역시 백일장은 오프라인 현장에서 즐기는 게 더 좋았다. 2022년부터는 원래 역사대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진행 중이다. 백일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 구성과 이벤트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작년에는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이 신설되었고, 올해는 당일 프로그램 중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할 수 있는 ‘어린이 도슨트 투어’가 생겼다. 이처럼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글만 쓰고 끝나는 단순한 백일장이 아니라 참여자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행사이기도 하다. 올해도 사전에 열린 ‘제2회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의 대상 수상자 분을 개회식에서 뵐 수 있었다. 이재숙 님은 환한 미소를 띤 채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씀하셨다. 개회식이 끝나고 인터뷰를 요청드렸다. 제2회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 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마로니에공원에 오시면서 많이 설레셨을 것 같아요.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온라인 서핑하다가 우연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서로를 읽는 ‘시’간 속에 문장서포터즈 팅팅 삭막한 회색의 도시를 잊게 하고, 쉼을 허락해 주는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 시. 내가 사랑하는 자연과 시가 어우러지는 곳이 있다면, 내가 그곳에 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평창엔 깨끗한 날씨, 고요한 풍경, 그리고 시를 통해 소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가을, 각자의 시를 품은 그들은 그곳 대관령에 모여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찍어 주신 분의 작은 실수 덕분에 모두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소중한 순간 ‘어느 가을, 시가 내게 말을 걸었다’라는 이름의 이번 시 캠프는 서울의 책방 ‘풀무질’과 ‘초록길 도서관’, 그리고 평창의 책방 ‘선인장’이 협력하여 ‘문학주간 연계 권역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시를 매개로 점점 가을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때에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시 캠프에서 마주한 풍경과 가장 어울리는 색이 있다면 가을의 황금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게 가을의 빛깔은 단체 사진 속 사람들의 웃음에 담긴 따스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관령으로 출발하는 날, 태풍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아침의 바람은 유난히 세차게 불어왔다. 하지만 서울은 여전히 여름의 더위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목적지인 대관령에 도착했을 때, 서울에서 불던 바람은 대관령까지 나를 따라와 후덥지근한 늦여름을 어느새 선선한 초가을로 바꾸어 주었다. 그날 오후, 낭독회가 시작되기 전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책방 ‘선인장’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책방 밖에서는 강아지 방글이의 짖는 소리가 우리를 환영하는 듯 반갑게 들렸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의 대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방글이의 발톱이 나무 바닥을 탁탁 울리는 소리가 우리가 있는 공간을 부드럽게 메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분명 소란스러운 듯했지만 그 속에서도 생동감 넘치는 이 소리들은 낯선 장소에서의 긴장된 마음을 서서히 진정시켜 주었다. 문득 이번 낭독회에서 함께 읽을 김고니 시인의 시들 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시에 숨을 쉬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 외롭지 않다고.”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며칠 전, 잠 못 이루던 어느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문학주간2024〉 : 소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작가와 글틴의 진심 문장서포터즈 채미나 지난 9월 말, 종로에서 문학 주간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문학 주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016년부터 주관하고 있는 행사로, 문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향유 분위기를 조성하여 한국문학 진흥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프로그램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9월 28일에 개최된《고선경 시인/김멜라 소설가와 함께하는 ‘글틴이 뽑은 2024 오늘의 문학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종로까지 향하였습니다. 글틴은 글과 TEEN이 만나 붙여진 이름으로, 문학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과 소통을 연결하기 위해 2005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해 오고 있는 국내 유일한 청소년 온라인 문학 플랫폼입니다. 만 13세에서 만 18세라면 누구나 글틴 친구가 되어 글을 나눌 수 있답니다. 저의 첫 문학 지면이 되어 준 ‘글틴’에서 지금은 어떤 글틴러들이 활동하고 있는지, 요즘 글틴러들이 주목하고 있는 시인과 소설가는 누구인지 얘기를 들어 보고 싶었어요. 문학 주간은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 누가 보아도 문학 주간을 즐기러 온 듯한 사람들이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저는 마로니에 공원 한가운데서 ‘스핀오프’ 부스를 즐기는 글틴 친구들과 주임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글틴 친구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대화에 성실하게 참여해 주었습니다. 친구들을 따라 저도 스핀오프 부스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참여하였어요. 좋은 시 혹은 소설 일부의 구절에 구멍을 내어놓고, 참여자의 마음대로 구멍을 채운 뒤 SNS에 인증하면 인센스를 주는 행사였습니다. 친구들은 마로니에 공원 의자에 앉아 열심히 고민하며 저마다의 빈칸을 채웠습니다. 저 역시 그 열정에 힘입어 빈칸을 채우고 신경림 시인의 시 구절이 적힌 아름다운 인센스를 받았어요. 스핀오프 부스 옆에는 ‘올해의 한국 작고 문인’ 전시 부스도 함께 있었어요. 운문은 김소월 시인, 산문으론 염상섭 작가가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두 문인의 활동 기록들과 함께 옆 팻말에 시집과 작품집 소개가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어요. 혼자 팻말들에 적힌 글들을 읽으면서, 한국문학의 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런 문인들이 있기에 지금의 문인들도 있는 것이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