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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미주 - 잃어버린 귀가
잃어버린 귀가 정미주 산속을 헤매다 한쪽 귀를 두고 왔다 가지가 없는 앙상한 나무들은 비슷해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종의 탄생을 기원하는 실험은 계속된다 나도 모르는 심장을 건너뛴 박동1)처럼 남은 귀는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좋을 텐데 멀어져도 열렸다 닫히는 신호를 보내는 기관이 있다고 미신을 계속 믿어도 될까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어도 산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이 잠들지 않는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데려다줄게 밤이 깊었지만 맨 발로 열을 식히려는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혀가 짧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딱따구리 같기도 하고 앵무새 같기도 한데 너는 어떤 것 같아 나는 목탁을 두드리며 늘 때리기만 하는 사람 같아 눈을 감지 못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 작은 구멍의 어둠이 옅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사는 동안 듣기만 하는 다른 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밤이 있어 산을 찾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듣기만 하는 내이가 그곳에 있다고 말해야지 작은 어류의 아가미가 귀로 바뀐다고 해도 이제는 믿을 수 있다 1) Jacques Audiard 감독,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4상세보기 -
시정미주 - 붉은 커튼이 있는 만찬의 밤
붉은 커튼이 있는 만찬의 밤 정미주 커튼 뒤에 숨겨 둔 연인을 볼 수 없어 크게 실망했어요 당신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놓친 요리가 무엇인지 맞추었을 텐데요 우린 식탁보 아래 얼굴을 숨기고 당신의 요리를 기다렸을 뿐인데 그래요, 우리는 여럿이 아니면 얼굴을 보이지 않죠 얼굴이 불콰해질 때까지 기다렸어요 메뉴판을 쾅쾅 울리며 웨이터를 다그쳤지요 목이 없는 얼굴들이 식탁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 여전히 우리가 아름다운가요 수치심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감정인가요 우리는 모든 상징을 사랑하는 존재들 목 뒤로 흐르는 불협화음에 당신의 칼질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길 바라는 마음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디어 마이 디어 알고 있다면 우리의 부정을 부정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짜여진 대본이라는 것을 당신은 눈 감을 때까지 알지 못하겠죠 잠들지 않아도 눈 감으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먹으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 우리는 왜 인류인가요 짐승이면 안 되나요 아름다운 생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웨이터가 회전하는 사람이라면 환생을 위해 그를 숭배하겠어요 우리는 모든 것을 지불할 수 있고 그는 떠나는 관성이 없는 사람 내기는 무게가 없고 노름은 패배만 있다지만 우리는 당신을 벗어날 수 없어 먹고 먹으려고 당신을 찾아왔어요 붉은 휘장을 걷어줘요 우리는 요리하는 모습조차 욕망하는데 놈의 연인을 보려고 마음이 큰 대가를 치렀는데 디어 마이 디어 아직도!! 식전주가 안 나왔는데 왜!! 놈은 요리만 하고 있나요 상징이 게임이 된다는 것을 놈은 부정하고 우리는 한가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들 본문이 있는 텍스트를 누가 부정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해부하고 해체당하고 있지만 놈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안타깝게 무너지는 우리의 친절을 감싸 안아주세요 주저앉아 최선을 다하려는 우리의 배려를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왜 모두가 행복해야 되나요 사랑받는 철학자를 보았어요 제대로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사람 우리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완벽한 교육이란 태어난 마을을 벗어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것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것이 인류라는 것 머리가 어지러워요 깨지지 않는 편두통은 완벽한 요리를 기다리는 머리들의 연산 당신은 어디까지 계산하고 있나요 맛과 멋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지만 이 악연이 당신과 우리의 심장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드는지 죽어가는 동물의 애간장을 느끼려는 인간의 역사가 거만하다고요 사랑스럽고 가련한 당신의 희생양을, 발견된 적 없는 귀를 가진 바닷속 분홍 돼지를 이제.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5상세보기 -
시전호석 - 한밤과 낡은 사도들과
한밤과 낡은 사도들과 전호석 나는 상위 버전에서 저장된 문서입니다 오목하고 정련된 글씨체입니다 아구창입니다 오지 않는 손님입니까? 말줄임표입니다… 조명이 답답하고 수사슴은 뜯어먹을 풀을 찾는 뿔 소매가 넓은 사람 헛기침을 자주 하는 사람 숙면을 취하지 못해요 죽고 싶어요(사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문제가 많아요 다들 그러지마는 요즘 가상 세계 같아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닌 거 같아 죽으면 다음 스테이지로 가는 게 맞나요? 별 끝에 닿을 것 같아 에너지가 넘쳐서 그 무엇도 구분할 수 없고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싶다 잔인하고 단순한 도구가 되고 싶다 피아노 건반 가장자리 건반이 되어 일 년에 한 번쯤 눌리고 청중들이 그 소리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스테이지에서 당신은 나를 조율하세요 풍족한 삶을 마다하지 마세요 차라리 무기물이었으면 좋았을 걸 무너지는 동상의 눈빛이 무너지지 않은 동상의 눈빛보다 많이 맑아요 그거 다 각도 차이인데, 감정이 그런거죠 전병을 주세요 사슴 먹이려고 파는 거 굶주리는 일이 제일 어색해 울다가 아무것도 못 하다니 악기는 우는 게 일이라서 좋겠다 준비된 슬픔을 꺼내두기만 하면 악기는 밥 안 먹어도 되는데 붉은 신호와 떠드는 사람들 이제 시작인데 뭐 하는 거지 뭘 해요 남은 건 남들뿐이야 나는 새가 된다 키위가 되어서 벨벳 바닥을 종횡무진한다 연주 준비를 마친 오케스트라 사이를 질주한다 만연하고 돌덩이 같은 문장을 구비하세요 지휘자의 당부였다 인공지능 모델이 탑재된 악기들이 스스로 연주되기 시작한다 관객석을 가득 메운 사슴들이 앞발을 들어 일제히 박수친다 다그닥 다그닥 기쁨과 슬픔 나는 단순한 것들이 좋았다 좋다는 말이 좋았다 보이는 성곽과 보이지 않는 성곽이 함께 좋았다 잠을 잔다 어긋난다 풀들이 그러하듯 자라라 악기가 그러하듯 울어라 사슴이 그러하듯 핥아 쉬지 말고, 핥아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전호석 - 빛고리
빛고리 전호석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빛고리들이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새벽 누가 버린 걸까 순례자들 무엇을 순례하나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쓸모없다면 순례입니다 구름이 밀려나는 모양으로 사람들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간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빛고리를 만들어 버리는 일 순례 그러니까 주저앉아 담배 피우는 거, 구경하면 악취를 생각해 보세요 거짓말과 권태를 극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함과 이상한 날씨가 계속되는 날들 음식이 썩고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코가 없으면 평온할 수 있습니다 눈이 없으면 빛고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 빛고리 모두들 다른 모양과 질감을 상상한다 길 위에는 응당 있어야 할 돌무더기 넝쿨 광포한 강줄기 주저하는 어떤 순례자 그리고 눈부신 빛고리 다시 시작하고 싶어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배선옥 - 풍랑경보
풍랑경보 배선옥 풍향기의 바람자루가 터질 것처럼 팽팽하다 갈매기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텅 빈 하늘 유리창을 긁는 바람을 마주하고 앉아 그 남자 잠자코 바지락만 깐다 출입문엔 사흘 가게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얼마 전엔 평생 손 익은 연장이었던 배를 팔았고 얼마 전엔 병실을 예약했다고 말하는 그가 증명사진 같다 한껏 설정 온도를 높인 온풍기에선 한여름의 공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의 어깨는 선착장 끝 바다에 반쯤 발을 담그고 선 가로등 같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배선옥 -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배선옥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나의 영토는 늘 우기였다. 날마다 비가 내렸고 풀들만 자라나 영토를 넓혔다. 나는 동그란 발뒤꿈치에 반짝이는 발톱을 가졌지만 그대에게 보여준 적 없다. 나의 발은 늘 목 긴 장화 속에 들어있어 때때로 맨발일 때도 진흙에 묻혀 있었다. 그대는 나의 발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므로 저녁이면 우물가에서 발을 닦으며 오래도록 네모난 발톱을 혼자 들여다보았다. 어느 날엔 밀입국자처럼 그대의 마음으로 스며들어본 적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때를 기다리며 오래도록 학습했던 지명은 이미 사라져 새로 생겨난 사거리에서 돌아갈 길 너무 까마득해 눈물지었지만 기왕에 그대는 그런 곳이려니 미워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다만, 사랑이니 하는 말은 붙이지 않기로 했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박은형 - 슬기로운 깁스 생활
슬기로운 깁스 생활 박은형 그만 환부를 뜯어내고 팔을 보살피기로 했다 그러자 선택형 관계 동작과 의무형 생활 동작이 동시에 면제다 부작용 같기도 하고 포상 같기도 하다 일조량 제로인 딸아이 서울 살림에 노란색 비닐 연(鳶)이 끼어 볕 노릇을 한다 길 건너 공원에 가야겠다 짧은 봄날을 붙드는 번 자리라도 얻는다면 쓸 만한 일인용 추억이 될 것이다 누가 매긴 슬픔의 광고 문안이 저리 얇을까 고치 같은 노파가 건네주는 공짜 전단지 아는 사람을 본 듯 인파는 멀찍이 비켜서 가고 금연 구역 현수막 밑 늙고 젊은 끽연가들 소나무 꼭대기에 비 새는 집을 얹는 까치 부부 구애란 단연 부풀리기지 깃털부터 세우는 비둘기 공원에는 각종 심취가 자못 버젓한데 고향 물가에 버려둔 정분인 양 만개한 도화 높다란 건물 사이 짧은 너의 분홍은 신이 젖먹이였을 때 잇몸에 착색된 신표(信標) 같아 자꾸 흘러버리는 내 안의 무언가를 누군가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바꿔치는 오늘 기분은 원래가 들키는 게 사명인 것처럼 문드러진 사랑을 다시 보살필 것처럼 바람도 없이 효율의 문제는 더욱 아닌 채로 제 한껏 들이친 타지의 봄날이 꾸려준 것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1상세보기 -
시박은형 - 오동꽃
오동꽃 박은형 채혈하는 동안에는 골몰할 딴생각이 필요합니다 재채기용 꽃가루 총성 세 발이나 허락 없이 구름 도어락을 눌러댔던 어제의 비밀 또한 달가운 딴생각의 후보군입니다만 사흘 내리 그 집 앞 우우우 난 아직 떠날 수 없*던 오동나무를 낙점합니다 휘영청 대낮의 월담을 마친 빈집지기 오동꽃 가지 끝 반쯤 오므린 연보라 손바닥이 수백 개 사방 백 리는 족히 틔울 종소리가 수만 개 빼돌린 정인처럼 꽃은 공중 높이 올라가 도심의 번듯한 청맹과니 빌라촌에 한갓진 봄날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악수도 고백도 심드렁한 시절입니다만 나는 빈집지기에게 기린 같은 흠모의 팔을 양껏 뻗어 보았습니다 채혈 양이 많으니 쉬었다 가라는군요 다 지고 사과 씨만치 남은 내 안의 미혹마저 꽃가루 총성 한 발로 못질해 둔다면 혹여, 사나흘 혼곤히, 오동 말쑥한 폐에 들었다 헤어질 수 있을까요 *노랫말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김세희 -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김세희 일광 삼성리 산8번지 일대가 신도시가 된단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사는 산8-2번지 땅 주인 박상용 씨는 그동안 자신의 땅만 보상 계획에 빠져 배가 아팠었다 그러던 중 고국의 신문에 산8-2번지가 도로에 흡수되게 되어 보상 계획 공고문이 실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골똘히 멀리서 온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주변 땅 주인들 산8-1, 산8-3 지그재그 산으로 오르는 번지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을 지그재그 떠올렸다 마당에 동그랗게 맺는 열매를 보다가 어떤 마음이면 요렇게 까매지는 걸까 했는데 산8-13번지에 블루베리 나무 1주, 무화과나무 1주, 사과나무 1주를 심어 놓은 사람은 계절마다 먹을 과일을 계획하는 사람 물통과 농자재를 치워 달라는 공고의 땅 주인도 알 것 같은 이름이다 박상용 씨는 뒤늦게 기쁜 소식이라는 조카의 말을 생각해 본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박상용 씨의 경계는 흐려지고 일광 구석진 땅 귀퉁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기억은 도로가 될 것이며 그의 것들을 밟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신호등이 설 것이다 공룡 뼈 같은 소식이구나 돋보기를 끼고 다시 신문을 본다 앞집 마당에 불이 켜지고 장바구니를 든 가족들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이웃은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다 그의 이웃은 일광 삼성리 산8-2번지 일대에서 사라졌다 현재 주소지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봉헤찌로구 반데이란 찌스기리 이 주소를 갖고 죽어도 될까 묻히지 않은 곳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을까 일광 무너져 내린 그의 집에 도로를 들이자 앞으로 밀고 들어온 트럭이 등 뒤로 빠져나가 버린다 뚫린 마음에 어떤 보상이 필요할지 대문이 있던 자리 우사가 있던 자리 발자국 남기러 가야 한다는 박상용 씨. 산8번지 일대 아파트가 다 세워지면 누가 돌아오나 마음 없는 마음이 지그재그 돌아오나 박상용 씨는 도로에 우두커니 서 있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김세희 - 한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한 것보다 길거나 같을 수 없다
한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한 것보다 길거나 같을 수 없다 김세희 석 달에 한 번 만나는 남자는 말이 짧고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속속들이 나를 보여줘도 이러시면 곤란하다는데 곤란하다 삼각관계도 아주 그냥 모서리로 서 있는 상태 당신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지금 화내는 건가요 위험하다면서 위험한 사람 협박하는 거죠 피를 찍은 손가락을 내 입속에 넣어 준다 눈을 감는다 에그타르트 맛인가 고구마 고구마 맛이네요 삶은 고구마 고구마 말고 또 뭐냐고 다그친다 믿지 못해서 일어나는 전쟁 핵폭탄을 가져야 생기는 믿음 파 보면 다 나온다는 끈적한 관계도 굴러가지 않으면 한 면 위에 쌓일 거라고 말한다 저 남자가 섭섭한 건 아니고요 부도덕한 습관과 악당을 다스리는 분이시죠 석 달에 한 번 심판받는 위기 나쁜 몸 간디가 말하는 세 번째 사회악 양심 없는 쾌락의 결과쯤 구원은 죽기 전에 부탁해도 될까요 채혈한 자리에 붙인 뽀로로 밴드를 쳐다본다 1분 대화 다시 석 달 동안 만나지 못할 테지 약국 소파에 앉아 나쁜 것 나쁜 것 나쁜 것 중에 포카칩은 그나마 당류가 없다는 인스타그램을 보았다 야호 아파트가 하나밖에 없어서 우울한 살을 빼야겠다는 의지만 있는 악당 스타일 병원 홈페이지에는 끝까지 책임진다고 쓰여 있다 삼각관계는 셋 다 피가 터져야 하는데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강은진 - 생선이 왔어요
생선이 왔어요 강은진 이 동네에는 아직도 생선 트럭이 옵니다 갈치나 오징어를 팔아요 아마도 목요일 어쩌면 수요일 생선이 왔어요, 생선이, 우렁차게 확성기를 울리며 생선이 왔다고요 우리에게 생선이 가차없이 이름처럼 머나먼 빅토리아 케이크 같은 걸 녹여 먹고 있는 오후에도 창틈으로 방충망 사이로 암막 커튼을 들추고 막무가내로 할 말이 있다는 듯 자꾸 생선이 옵니다 일방적으로 온몸을 훑고 가는 이 비린내 나는 다정함 오래 전 그는 내 음식을 먹고 싶다며 자취방에 찾아왔어요 하필 온갖 비린 것들을 넣어서 해물탕을 끓여 줬죠 그는 연신 맛있다고 했지만 반도 먹지 않았어요 몇 번씩 비누로 씻고 맥주로 씻어도 손에서 비린내가 없어지지 않아서 나는 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요 우리는 말없이 눈을 감고 노래를 몇 곡 들은 후 헤어졌지요 비린내 때문이었어요 그랬어야만 해요 내 사랑은 비린 해물탕 같은 거였는데 이름도 멀고 마음도 머나먼 빅토리아 케이크가 되려고 수식어가 설탕처럼 가득 뿌려진 문장들 속에 얼굴을 가둬 놓고 라즈베리 오렌지 바닐라 버터밀크 실은 갈치 오징어 고등어 사라진다는 걸 믿지 않으면서 마치 사라질 수 있을 것처럼 오늘은 목요일, 아니 어쩌면 수요일 지도가 펼쳐지고 길바닥에 주소가 적힙니다 기어코 생선이 옵니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1상세보기 -
시강은진 - 집
집 강은진 하루에 두 번 파란 알약을 삼키다가 만져지지 않는 모든 것을 당신이라고 부른다 마주 선 거울과 거울이 끝없는 미로를 서로에게 새겨 넣으면서 조금씩 기억을 잃고 있다 여름마다 주황색 꽃이 피었다가 노랗게 떨어지던 나무가 있는 집 옆으로 빨간, 어쩌면 하얀, 어쩌면 빨갛고 하얀 오토바이가 세워진 작은 우체국이 있고 저녁 여섯 시, 아니, 다섯 시, 해가 지려 할 때, 어쩌면 해가 뜨려 할 때, 뒤꿈치 들어 올리는 소리와 끼이익 나무문 열리는 소리가, 어쩌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하루에 두 번 시동이 켜지던 오토바이 그 위에서 참새처럼 늙어간 배달부 보고 싶었고 보기 싫었고 가고 싶었고 가기 싫었던 나의 창백한 진창 딱딱한 잠자리에 누워 책상 아래 머리를 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보는 것이 좋았지만 밥 냄새에 자주 구역질을 하며 나는 거기서 조개껍데기가 자라듯 한 줄씩 얇고 고요하게 자라나 어른이 되기 전에 서둘러 떠났다 어째서 우리는 마주 보며 밥을 먹고 밥상을 엎고 서로 미워하는 방식으로 기억되려 했을까 내 기억은 당신이 낳았던 고아 내게 새겨진 미로에서 개처럼 헤맬 때 당신도 어딘가에 갇혀 있었을까 지금은 쓸모 없어진 우표들만 나뒹구는 텅 빈 방 오래전 죽은 아이들이 뛰놀고 기억을 잃기 위해 어쩌면 기억에 조금씩 더 다가가기 위해 하루에 두 번 파란 알약을 삼켜야 한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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