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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소리
문학광장 〈문장의소리〉는
2005년부터 시작된 문학 라디오입니다.
2024년 새롭게 개편된 〈문장의소리〉는
연출 유계영 시인, 진행 우다영 소설가, 구성작가 문은강 소설가가 참여합니다.
문학집배원
그 순간을 꽤 선명히 기억한다. 백영중학교 건물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학교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는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야구부 아이들이 기합을 외치며 트랙을 돌고 있었고, 담장 근처 등나무 그늘에는 늦은 시간까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방송부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중이었다. 야구부 애들이 나아갈 때마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그 그림 같은 배경 안으로 달음박질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하늘색 컨버스화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이제는 회색에 가까워진 흰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눈이 시린 걸까. 양손으로 두 눈을 비벼 보있다. 눈은 여전히 시렸고, 눈앞에는 믿기 힘든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기운이 무성한 6월의 학교에 내리는 함박는. 그것은 그 해의 녹지 않는 첫눈이었다. 때아닌 함박눈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눈송이를 손으로 받고, 고개를 쳐든 채 방방 뛰며 팔을 휘저었다. 건물 안의 아이들은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진풍경은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현관에 서서 팔을 뻗어 떨어지는 눈 한송이를 받았다.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그 결정체는 꼭 모형처럼 딱딱했으며, 차갑지 않았다. 차갑지 않은 눈이라니. 이게 정말 눈이 맞을까? 눈송이는 높은 기온과, 내 체온에도 녹지 않았다. 6월 충순, 초여름이었고, 등교 직전 뉴스에서 본 기온은 27도를 웃돌았다. 결정체의 모양이 일반적인 눈송이와는 달리 불규칙적이었다. 그리고 훨씬 밝게 반짝였다. 꼭 진짜 눈을 흉내 내어 만든 모형처럼. 그런데 곧 눈송이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 주위로 불그스름한 반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가려움이 밀려들었다. “아, 따가워.” 소리가 나는 곳을 좇았다. 운동장과 이어지는 계단에 앉아 있던 두어 명이 건물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머리와 체육복에 묻은 눈들을 털어 낶다. 그들의 몸에서 떨어지는 눈은 눈이라기보다는 조금 입자가 큰 모래알 같아 보였다. 잔 우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박처럼 차갑지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녹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쌓였다. 맨 처음 따갑다고 외쳤던 단발머리가 둥얼거렸다. “왜 이렇게 따갑지? 이거 뭐야? 나 새우 먹어서 알레르기 반응 올 때 꼭 이러는데.” “내 손도 그래. 이 두드러기들 뭐야? 징그러워.”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등이 온통 붉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하늘 곳곳을 수 놓은 하얀 점들이 보였다. 눈송이들은 조명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정신 팔려 잇던 나를 깨운 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였다. 제일 먼저 뛰쳐나왔던 1학년 아이 한 명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 바닥을 구르고 잇었다. 황토색으로 물든 하복 교
가정 최지은 우리는 말이 없다 낳은 사람은 그럴 수 있지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동생을 나눠 가진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저녁상 앞에서 생각한다 죽은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이 완성된다 싹이 오른 감자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푸른 감자 엄마는 그것으로 된장을 끓이고 우리는 빗소리를 씹으며 감자를 삼키고 이 비는 계절을 쉽게 끝내려 한다 커튼처럼 출렁이는 바닥 주인을 모르는 손톱을 주웠다 나는 몰래 그것을 서랍 안에 넣는다 서랍장 뒤로 넘어가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랍을 열면 사진 속의 동생이 웃고 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우리가 눈 감으면 우리를 보러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있었다 -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창비, 2021)
정오가 되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 위에 떠올랐다. 슬슬 직장인들이 몰려와 테이크아웃을 해 갈 시간대인데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런 땡볕에 에어컨도 안 트는 카페에 올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유리와 함께 카페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늘어져 있었다. 평택호 바로 앞 관광단지라는 특성 때문에 원래가 직장인보다는 뜨내기손님이 더 많은 가게였다. 단골도 별로 없다. 주변에 같이 장사하는 가게 사장님들 외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라 버스나 지하철을 탈 필요가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테이블에 반대쪽 볼을 갖다 댔다. 테이블에서 올라오는 찬기로 얼굴이 조금은 시워해져서 이러고 있으면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점장님은 이러고 누워 있는 우리를 보고 나무늘보가 따로 없다고 잔소리를 하시지만. 볼을 바꿔 대려고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던 스킨답서스 화분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순간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킬 정도로 놀랐다. “부점장님,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로 놀란 것도 오랜만이었다. 소리가 들린 것 자체가 오랜만이긴 했다. 지난달 초에 한 번 듣고 이번 달에 처음 듣는 거니까 얼추 두 달 만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유리가 불안해할까 봐 다시 테이블에 볼을 갖다 대고 누웠다. 누운 채로 점장님이 있는 포스기 쪽을 향해 물었다. “점장님, 저희 화분 몇 개만 더 뺄 수 없을까요?” 카페 내부에는 보이는 자리마다 화분이 깔려 있다. 어스프레소는 대대적으로 친환경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펼치곤 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없는 커피 브랜드로도 유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스틱 제로가 아니라, 여기 평택 에코시티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신소재 플라스틱만 사용한다는 뜻이지만 신소재 플라스틱은 일반 플라스틱과 달리 금방 썩는다는 특징이 있으니 크게 다른 말은 아니다. 평택이 신소재 플라스틱 시번 사용 도시, 에코시티로 지정된 지 이제 10년째였다. 평택 구도심 아래쪽, 평택호 인근 지역이 에코시티로 지정된 이후 시티 내에서는 사용하는 플라스틱 양에 제한이 없어졌다. 신소재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만큼 탄소 배출도 타 지역보다 20퍼센트까지 더 가능하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공장이나 기업의 본사가 에코시티로 이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스프레소의 본사만 해도 에코시티 내에 있었다. 그러니까 가게 내부에 가득한 화분은 어스프레소의 친환경 브랜드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어스프레소 사장님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게 내 업무 환경을 저하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점장님에게 매일 우리 화초 좀 몇 개만 빼자고 말해도 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점장님이 말했다. “명색이 에코시티인데, 초록이 좀 많아야 보기도 좋지 않니?” 초록, 저도 참 좋아하는
창원 조성래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속속들이 모든 먼 곳을 다 알고 모든 먼 곳을 파악하고 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전지하신 하느님께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성모마리아······ 파티마 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 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선 엄마도 죽고 나도 죽고 끔찍한 날 피해 자리를 비킨 동생도 죽고 모두 죽어서 죽고 나서 웃고 있었다 모두 지난 일이라는 듯 모두 지나야 했던 일이라는 듯······ 그러나 그건 나 혼자서 듣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홀로 죽을 것이며 나는 여전히 어떤 현실들에 마비된 채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닐 것이다 —시집 『천국어사전』(타이피스트, 2024)
도경이 사는 곳은 용희가 익히 경험해 본 장소였다. 대학 시절 같은 과 동기의 자취방이 꼭 저랬다. 여름에 동기의 자취방은 주변에 햇빛을 가려 줄 만한 큰 건물이 없어 작은 냉장고에 몸을 쑤셔 넣고 싶은 집으로 탈바꿈했고,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는 동면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뼈 시리도록 반성케 하는 집으로 변모했다. 도경의 집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가림막 하나 없는 여름 한낮의 옥탑방은 재난 지역으로 선포해도 무방했다.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상쾌한 가을밤이 내려앉았을 때 옥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캔 맥주가 손에 들려 있으면 더 좋았다. 용희는 옥탑방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경에게 캔 맥주 한 박스를 몰래 사다 주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용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언덕길을 내려다보았다. 도경이 검은 봉지와 막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서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경이 용희를 알아보는 데 쓰인 10초는 용희에게 머나먼 북극의 바다를 두어 번 갔다 오는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 당황한 용희는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경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지구에 커튼을 쳐 드릴게요!” 도경은 입을 벌린 채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용희는 도경의 집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지난 5년간 얼핏얼핏 그려 왔던 일이, 지난 이틀간 문득문득 상상했던 순간이 눈앞에 당도했다는 기쁨에 용희는 이마에서 얼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잊은 채 자신의 심장 소리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 날뛰는 소리는 아니었다. 용희는 심장이 악보 없는 음악에 홀려 무작위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천문대를 찾았을 때 광활한 우주를 탐사하며 느꼈었던, 거대하고 두려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측불가능한 불안함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을 떨던 때의 심장 소리였다. 그때, 도경이 옥탑방에서 나와 유리컵 두 개와 감자칩을 담은 그릇을 평상에 내려놓았다. 도경은 평상에 편하게 앉더니 검은 봉지에 든 맥주 세 병을 꺼냈다. “병맥주 한 병을 마셨을 때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제 제 주량이에요. 더 마시면 정신 줄 놔요.” 용희는 물었다. 그런데 왜 세 병을 샀느냐고. “술이 술을 부르니까.” 용희는 빙긋 웃었다. 도경은 용희의 컵에 맥주를 따른 후 자신의 컵을 스스로 채웠다. 건배 없이 도경이 먼저 맥주를 들이켰다. 용희도 마셨다. 도경이 말했다.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었다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r
양동이 이린아 그해 여름 양동이 속에 머리를 넣고 살았다 양동이는 늘 밖에서부터 우그러진다 우그러진 노래로 양동이를 펴려 했다 그때 나는 관객이 없는 가수가 되거나 음역을 갖지 못한 악기의 연주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잘 보세요, 얼굴에서 귀는 유일하게 찌그러진 곳입니다 보컬 레슨 선생이 말했다 가끔 내 목소리가 내 귀를 협박하곤 했다 세모 눈썹, 불타버린 미간을 펴며 귓속과 목구멍의 구조를 샅샅이 뒤지는 소리를 내려 했던 여름 노래, 그해 여름에 배운 노래는 반팔이었고 샌들을 신었고 목덜미에 축축한 바람이 감기는 그런 노래였다 양동이 속에서 노래는 챙이 넓은 모자를 뒤집어쓰곤 했다 골똘한 눈, 꺾인 손등으로 받치고 있는 청진의 귀를 향해 벌거벗은 노래를 불렀다 양동이 속에서 듣던 1인용 노래 허밍과 메아리의 가사로 된 노래를 우그러진 모자처럼 쓰고 다녔다 -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 (문학과지정사, 2023)
글틴
좋지 않은 독백을 읊을 때미치광이처럼 우리는 서 있고아스팔트는 이데아에서 본 몽당연필처럼 굴러가그것만이 진짜인 세계는 설마 있는 걸까?가슴속의 강을 토해내기 위해서 글을 썼을 뿐인데물고기와 눈을 공유할수록가슴은 찢어져 어린 날처럼안고 구애하고 소리지르고 사랑하고가루가 된 치즈를 바라볼 때 말랑말랑한폐허는 화음 속에 잠들어있어선생님 저는 더이상 질투하지 않아요제발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나도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살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죽겠다는 말은 끝까지 거짓말이었잖아환상적 피냐타두드려 두드려! 때려!듣지 못할 말만을 고막에 던지면 쏟아지는 반사광 속의 여름그래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단다 내가 이곳의 농담을 깨뜨린 거지?그러니 나는빈 방을 바라보고 싶었을 뿐인데달을 처참히 살해하고밀물과 썰물의 유해를 다듬어 허공에 징검다리를 놓았어서 있는 곳은 꼭 우주겠지너는 암흑물질의 장막을 가르고 암흑같은 숨을 쉬고 떨어지고 구르고 사슴과 폐허같은 바다에 서 있고 그런 거겠지애수서럽게 번지는 것 같아이데아가 진짜 있나요? 내 마음은 우울이 낳은 우울일 거야그게 아니라면 절대 이럴 리가 없어 찢어지게 아픈 심장을 쓸수록 서러워질 수는 없어아스팔트에 울퉁불퉁한 말을 갈았다자동차는 지나가고 있었다나는 마치소리가 갈라지는 골목같이하늘에 몸을 던지는 철새같이 말했다
밤, 난 어릴적부터 취침시간이 다가오는 그 자연스러운 시간의 움직임이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목사님의 설교가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으면, 항상 애들 보육을 담당하고 계셨던 선생님은 엄중한 목소리로, “얘들아, 이제 잘 시간이야” 라고 말하셨는데, 그때마다 난 그당시 보았던 마당을 나온 암탉 영화에서 마치 농부가 닭을 도살하는 순간이 온듯이 섬뜩했다. 마치 닭을 죽이는 농부에게 그 생명에 대한 어떠한 증오도 없지만 순전한 “필연”으로 인해 식칼을 들이대는 것처럼, 어린 내게 그 선생님의 목소리와 두 눈에서는 싸늘한 “필연”이 감도는 것 같았다. 잠을 자야만 한다는 필연. 모범생같이 굴면서도 몇가지 항목에는 누구에게도 내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었던 나는, 친구들 몰래 방에서 빠져나와 우선 잠깐 화장실 변기칸에 숨었고, 얼마 후 예배당 문을 열고 엄마아빠가 설교를 듣고 있는 자리 옆으로 슬금슬금 걸어가 결국 엄마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에 들곤 했다. 그때 든 잠은 정말 이슬처럼 달았다. 그렇다고 집에서는 잠을 자는게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거의 매일 어떻게 하면 부모님에게 한시간 더 늦게 잘 수 있도록 합의를 볼까로 머리를 짜냈다. 그런 궁리 끝에 작전이 승리하고 얻게된 그 자유시간 한시간은 내게 자유 그 자체였다. 그때는 그저 존재로 느껴온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 과거의 내가, 사실은 아직도 진행중인 내가, 조금 이해가 된다. 내게 잠은 죽음과의 동의어였다. 시간이 낮에서 밤으로 흐르며 자연스럽게 잠을 자지 않아서는 않되는 순간이 오는 것은 어찌보면 시간속 인생을 겪는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시간에 의해 죽지 않아서는 않되는 순간은 모든 인간에게 찾아온다. 마치 아무리 잠을 거부하고 싶어도 결국 엄마의 무릎에 기대어 잠에 빠지듯이 잠도, 죽음도, 우리에겐 그걸 거부할 수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있을 뿐, 사실은 둘 다 언젠가 우리를 결코 찾아올 방문객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극렬하게 잠에게 “아직, 깨어서 놀 일이 남았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마치 죽음앞에 아직 살아서 할 일이 남았다고, 애원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지금 시간은 12시 28분, 정확히 이분이 더 지나면 12시 반이 된다. 은은한 조명을 켜놓고 모두가 잠든 밤에 타자기를 두드린다. 아침이 되면 아빠는 어김없이 내게 수면사이클을 어기면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를 말씀하실 것이고, 나는 항상 그랬듯이 그 잔소리에 담긴 아빠의 사랑을 귀찮아하면서도 조금은 감사해할 것이다. 나는 아직 잠이 그저 무서운 어린 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어린 내가 지금 내가 느껴야 하는 것을 앞당겨 느낀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과연 죽음앞에 당당한지, 아니면 비겁하게, 지금까지 죽어도 여한이 없을만큼 살지는 못했으니 다른 사람 찾아가라고 말하는 게 최선일지. 아이러니는 나는 부모님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죽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고 잠이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끌리기도 한
꽃은 여름날의 예고편이다.사랑만을 갈구하다사랑만을 잃어버린.하염없이 너를 보며사랑을 갈구하고웃음짓듯 사라지네푸른 색의 봄날은 우리가 기다려온 봄날은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랑방임주의와 마음 젊어지기난 태어날 때부터 초중고를 거쳐 우리나라가 저출산·고령화 사회라는 소리를 지겹게 들어왔다.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실린 출산율 감소 막대그래프, 통합사회에서 다산감사 감산소사..., 올해도 사회문화 기말고사에서 유소년 부양비, 노령화 지수를 계산하고 있는 나였다.OECD 국가 중 출산율 최하위, 2024년 가임기 여성 합계출산율 0.72명 대한민국. 다들 말한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사랑해 줘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니 왜 저출산을 해결 못하지? 몇 년 동안 뉴스에서 앵커들이 떠들어대는 저출산 소리가 난 싫증이 났다.난 장차 이 나라를 살아갈 청소년인데 어른들의 염세적인 볼멘소리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매번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내용. 우리나라가 저출산인 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있나? 아니면 어차피 망할 국가라는 숙명론적 태도에 취한건가?내가 지금 당장 애국심에 결혼할 수도 없고 애를 낳을 수도 없고 말이야. 저출산은 해결책도 없는 탁상공론처럼 느껴졌다.그래서 난 인터넷 창을 들락거리며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들과 문제점을 살펴보았다.죄다 돈얘기. 돈돈돈. 그놈의 돈. 자녀 양육 시 어려운 점도 돈, 출산율 감소 원인도 돈, 출산 장려 정책도 돈으로 해결, 죄다 돈이야기뿐이었다.대학입시 때문에 학원비로 부모님 등골을 빼먹는 나였기에 자녀를 양육하는데 돈이 너무나 많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사회생활도 하지 않고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고작 고등학생 따위가 미처 깨닫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른들은 왜 이렇게 돈에 매달려 살아갈까 의문이 들었다.그리고 애초에 저출산 문제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일까?정부의 출산 장려 지원 정책이 웃기다. 저출산 문제가 출산율 올리기에만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원금 혜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당연히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지원 혜택을 주는 것은 옳다.다만, 과연 이것이 유일한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이냐는 것이다.난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문제의 시작점을 찾았다.물론 비혼모도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녀를 낳기 위해서는 가정을 꾸려야 하고, 가정을 꾸리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연애를 해야 하고, 연애를 하기 위해서 사랑을 해야 한다.그래 사랑.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사랑에서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사람들이 아이를 가지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의 잘못된 인식이라 보았다.그래서 난 경제 교과서 34P에 나와있는 한 사상가의 말에서 해답을 찾았다.바로 애덤스미스, 내가 좋아하는 경제학자이다.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되는 이유는 인간은 그들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며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조절하는 자유시장경제만이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부는 오로지 국가의 치안과 안보만 신경 쓰는
복도를 살금살금 걷다 침입자처럼조명이 켜진 곳은 몸이 알아서 피해 지나갔다발자국이 그리는 곡선은 어쩐지 시적이였다확신을 가지고 문을 당겼다 주인공처럼일종의 무대화장이였다 볼과 귀를 물들인 빨간 자국은갓길 눈사람이 낀 벙어리장갑을 탐내지 않기 위해서나는 일부러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약간의 눈이 쌓인 아스팔트에는 누가 제설제를 뿌려놓았다눈은 제설제 가루의 모양으로 둥글게 녹아있었다나는 녹은 눈을 보며약간은 넘칠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유독 더 긴 밤이다 입에서는 습기찬 한숨이 흘러나왔다조금의 아쉬움이 곧 미래에 대한 기약이라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그럼에도 나는 절대로 보일러 온도를 내리지 않았고밤이면 집이 주는 질식할 정도의 아늑함에 눈을 감았다그래서 내 장래희망은 성냥팔이 소녀보다는 산타였다 언제나나는 아무도 없는 밤 속에서 착한 할머니가 되겠다 다짐했다12월 달에만 산타를 믿는 동생이 떠올랐다친구에게 들은 건데, 산타하라아버지는 엄밀히 말하면 주거침입범이 아니냐고 따졌더랬다베란다형 아파트는 취향보다는 조금 더 개방적이긴 했지만그래도 겨울철이 되면 우리 모두는 붕어빵을 나눠먹고는 했다산타할아버지가 주거침입을 하는 세상에서는붕어빵 물가가 더 오르지 않을까?네개 단위로 파는 붕어빵을 이제는 나눠먹을 사람이 없어서약간은 더 추운 겨울인 것 같다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눈사람을 지나서 가로등을 지나서엘리베이터에 마음 놓고 누를 버튼이 이제는 하나밖에 없다는 게..녹기 시작한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모든 곳으로 전파시켰다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왔어?"라고 물었고나는 그 말 한마디가 주는 안정감에또 다시 한번, 단정성에보일러가 켜진 집이 주는 숨 막히는 온기에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외로움에단지 약간의 시간동안 슬펐다.
밤이 찾아온다나는 새벽에 있다.한 점 행해 가다가눈이 부신 밝음에 시려오는 맘, 창문.석양이 만드는 것은 쓸쓸함이 아닌벌건 빛깔의 추억내 눈에 오직 담겨오던 것은 밤이 아닌 낮어둠이 아닌 빛하늘에 떠있는 달삶은 몸부림이다.그 길은 동굴 속이다.검은 길을 걷던 와중에도 불을 붙이려던 노력이다.밤에만 보이는 별과 같고죽음을 향한 길 위 심는 꽃 한송이의 아름다움이다.찾아오는 밤을 앎에도 불구하고팔레트에는 물감이 줄지 않는다
오후는 기울어지고친구의 손을 잡은 채 억새 들판을 보았어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의 한숨반짝이는 옆얼굴들판은 누웠다가 일어나는 일그래야 하니까라고 말했어 일종의 연극과 같다고비어버린 서글픔을 안고 있으면예언은 우리를 어둠이 가는 곳으로 밀어버려백색광 아래 녹아내린 리듬너만이 가진 리듬을 쓰라고그랬지나는 지휘봉을 삼키고 싶은 마음으로기억이 버스로 이동할 때나는 울음을 새장에 가둬불이 꺼진 버스는 달려가고창틀에 이마를 기대었다가 (은유는 쉽게 내동댕이쳐진다)소란스럽지 않은 것은 오늘의 죄를 뉘우치세요덜컹거리는 버스 바닥에 누워 속죄하고 있으면영혼은 마치 지나가듯 보았던 파란 지붕 공장에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을 믿었던 날봄을 기다린다고 했었지 봄을 토하면서천사가 등 위로 악보를 휘갈기고가로등을 끌어안고 버틸 때 마침 밤이 엎질러져조명 아래서 우리는 노래하고발을 구르고 박수를 치고가슴을 들고 화음을 섞어거리에는 속수무책으로 버려진 너나팔을 불면서 인도했지 우울을 먹이려고강가에 가면바람이 긴 호흡으로 철새 무리를 기다린다나는 이것이 전부꿈이었으면겨울이 부풀고 있는 낮에 너를 보았어버스창은 스테인글라스로 갈라지고색색의 빛 아래서 가발을 벗었어음표가 성대를 때려도 너는 새장을 들고마침내 아가미가 축복처럼 내려미친 듯이 저주하는 신미끌거리는 허파마저 따귀를 때리고얼굴은여전히 알 수 없는 허물을 벗었고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어눈이 두려워 울고 있을 때면 안녕, 방백, 드디어,손쉽게 작별저는 슬프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환호)
문장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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