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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임솔아「멍」

멍 임솔아 더러워졌다. 물병에 낀 물때를 물로 씻었다. 투명한 공기는 어떤 식으로 바나나를 만지는가. 멍들게 하는가. 멍이 들면 바나나는 맛있어지겠지.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언젠가부터 어린 내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닌다. 꺼지라고 병신아, 아이는 물컹하게 운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멍든 얼굴을 구긴다. 구겨진 아이가 내 앞에 있고는 한다.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나를 안아준다. 구겨진 신문지로 간신히 창문의 얼룩을 지웠다.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7)

2025.05.08
유연희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일각고래의 뿔』

이건 뭐지? 백이 무언가를 골똘히 본다. 상아로 만든 보검 같다. 아 그거? 진열장 안의 장검 같은 상아를 보고 민혜가 반긴다. 그게 바로 일각고래의 뿔이야. 유니콘의 뿔이라고. 내일 데지마 상관에 가서 보려 했는데 여기도 있네. 그녀가 좋아라 한다. 술이 깨는 모양이다. 유니콘의 뿔? 나도 다가간다. 이거 엄청 비싼 거예요. 민혜가 속닥거린다. 일각고래의 뿔은 소문으로만 들었다. 정확히는 뿔이 아닌 이빨이지만, 북극에 사는 고래의 어금니가 상아처럼 길게 튀어나온 것이라고 했다. 북극 고래는 유빙을 뚫어 숨을 쉬고 먹이를 잡고 적을 물리치니 어금니를 작살처럼 변형시킨 것이란다. 뿔이 아니라 작살인데? 백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작살 잡는 시늉을 해 보인다. 정말 작살과 흡사하다. 포수들의 작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포수는 작살로 먹이를 잡고 경쟁자를 물리쳐 숨을 쉬니 작살이 맞다. 와, 손이 근질근질하네. 백이 작살의 손잡이 부분을 진열장 위에서 가늠하며, 꼭 맞네. 지난번에 내가 잃어버린 바로 그 작살이잖아, 하고 능청을 떨자 민혜가 받아준다. 그래? 그럼 이거 우리 거네? 우리가 가지고 가야겠네. 카운터의 주인이 여차하면 달려올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거 수컷이죠? 민혜가 불쑥 내게 묻는다. 작살을 맞고 도망 온 동족을 보고 고래들이 궁리했을 거예요. 우리도 이런 게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수컷의 이빨을 이렇게 단련시킨 거죠. 아주 오랫동안, 그야말로 이를 갈면서 말이에요. 암컷은 새끼를 잉태하고 종족을 보존해야 하니까 제외시킨 거고요. 과연 솔피 강의 동생다운 추리다. 내 이도 어딘가 근질거리는 것 같다. 더글더글. 나도 이를 갈아본다. 아래윗니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갈아본다. 고래도 손이 있으면 인간처럼 도구를 만들었을 거다. 손이 없으니 자신의 신체 중 가장 강한 이빨, 어금니에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어머, 저거 좀 보세요. 민혜가 내 팔을 톡 친다. 진열장 속에 누워 있던 작살 뿔이 들썩거린다. 마치 내게 응답하는 듯이. 어? 백도 신기해한다. 카운터의 주인 여자가 바닥으로 스르르 내려앉은 게 그다음이다. 벽에 걸린 액자가 들썩이고 천장의 고래 모형도 부르르 몸을 떤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지진이에요! 백의 외침에 민혜의 눈이 팽팽해진다. 아니다. 고래가 작살을 본뜬 게 아니고 인간이 일각 고래의 뿔을 보고 모방했을 거다. 아니면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도구가 우연히 일치했거나. 백이 잽싸게 출입문 쪽으로 달아나고 민혜가 얼결에 따라가다 나를 돌아본다. 아아. 이빨 하나로 남은 고래야. 어찌하여 너는 지구 반대편의 이 먼 나라, 작은 항구까지 흘러와 뿔 하나로 이리 누웠느냐. 전생을 이빨 하나에 처연히 담고 말이다. 장생포의 작살잡이가 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자, 발밑이 고래 등처럼 움찔거린다. 유연희, 『일각고래의 뿔』 (강출판사, 2022), pp.31~34

2025.04.17 천운영
한번쯤 그래 보고 싶었어, 다르게 살아 보고 싶었어 | 임유영「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꼈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는 반달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2025.04.05
김성중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화성의 아이』

나 같으면 하루도 못 견뎠을 것 같은데······ 털 달린 짐승이라면 질색이니까. 벼룩까지 있는 개라면 더 싫고 저 깡통 로봇은 한눈에 봐도 수명이 다 됐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건 친근한 관계 속에 편안히 붙박여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것. 나아가 하나의 육체에 고정되어 형식이 통일되는 것이다. 다시 몸을 갖춰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내 소망을 들은 마야가 의아스러운 듯이 되묻는다. “너는 줄곧 혼자 지냈고 지금은 몸도 사라져 사념체 같은 상태인데. 그런 채로도 지구에 가보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 내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 ‘도움’이라는 말에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왜냐면 그게 우리 DNA에 새겨진 최종 명령이니까. 지구로 귀환하는 건 눈먼 동물의 본능 같은 거야.” 너무 대놓고 털어놓은 것 같아서 나는 좀 더 길게 덧붙였다. “게다가 지금은 분열 중인 세포처럼 불안정한 상태야. 줄곧 안정화의 방법을 찾았지만 요원했지. 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어. 시간의 바느질을 터득했기 때문인데 먼 거리를 이동하다 보면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지. 내가 죽인 사람들, 그건 사실 죽인 게 아냐. 만화경을 돌려 패턴을 바꿔놓은 거지. 라포르투나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을 운명이야. 난 그들의 미래에 잔인한 이미지만 살짝 덧씌운 것이고. 네 친구들이 돌처럼 굳어 있는 것도 잠깐 시간을 정지 시켜놔서 그래. 똥을 바르던 남자는 지금쯤 악몽에서 깨어났을 거야.” “갑자기 왜 솔직해지는 건데?” “난 너무 약해서 이제는 기생물이 되는 도리밖에 없어. 네가 내 피난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라이카는 벼룩을 네 마리 키워. 하지만 난 굳이······” “난 벼룩이 아냐! 네가 지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내가 왜 지구로 돌아가야 해? 여긴 가족과 친구가 있어. 키나 말을 들어보면 지구는 아주 형편없는 곳이던데 거길 뭐 하러 가?” 저 순진한 표정을 보니 잘만 구워삶으면 내 숙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면 너도 나처럼 여행자니까.” 네가 아는 모든 존재는 여행자고 너 또한 또 다른 세계와 모험을 갈망하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네 몸에도 나와 같은 유랑 벽이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라이카는 열 살이 되기 전에 실험견으로 뽑혀 우주로 보내졌어. 데이모스는 지구에서 화성으로, 화성에서 위성으로, 위성에서 다시 화성으로

2025.03.20 천운영
지나간 것들의 따뜻한 속삭임 | 조용우「세컨드핸드」

세컨드핸드 조용우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주스, 요 거트, 구름, 구름들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칙하다고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비슷하구나 하고 웃으며 구름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고 친구는 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 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일까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시장을 통과할 때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식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구름들 바깥에서 이곳을 무르게 둘러싸고서 매일 단지 다른 구름으로 떠오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지나쳐 걷는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오고 있다 -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

2025.03.06
문진영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햇빛 마중』 중 「북극의 여인들」

나는 여느 때처럼 카페 바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 하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 사람은 내가 있는 바로 그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순간, 기억났다. 그녀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시를 썼다. 문구점에서 스프링이 달린 천원짜리 연습장을 사서, 거기에 생각나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적었다. 낙서 같기도, 시 같기도 한 문장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수학 시간마다 숨기지도 않고 시집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등짝을 맞기도 했다. 수학 선생님은 한번도 누구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아이들이 우습게 볼 정도로 순한 분이었다. 그런 선생님을 그렇게까지 화나게 했다니. 하지만 수업 시간에까지 시집을 읽었던 건 시를 향한 나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내게 그것 외에는 흥미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국어 과목 숙제로 시를 써 가야 했다. 1학년 7반 담임이자 국어를 가르치던, 바짝 마른 몸에 단 한 번도 치마란 것을 입지 않았던 서른일곱 살 고영숙 선생님은 그날 내가 숙제로 제출한 시를 나도 모르게 도 대회에 출품했다. 그 시는 최우수상을 받았고, 나는 상금으로 MP3 플레이어를 샀다. 그리고 선생님께 드릴 선물로는 동네 빵집에서 파는 7천 원짜리 롤케이크를 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 걸까? 아무튼 그때 내가 쓴 시는 새벽 4시의 밤거리에 관한 시였다. 아무도 없는, 모든 게 정지된 듯한 밤거리에 관한 시였다. 아무도 없는, 모든 게 정지된 듯한 밤거리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관해 적었다. 그녀는 그때 나를 교무실로 불러 ‘너는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쓰는 게 어떠니?’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그냥 심심해서 써본 건데요’하고 대답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회한의 기미가 스쳤다. 나도 한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 그런 식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 백일장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시인 같은 것은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연습장에 낙서를 하고 있다. 마흔일곱 살 고영숙 선생님은 쟁반을 들고 잠시 카페 안을 둘러보더니, 내가 한쪽 끝에 앉아 았는 바 자리의 다른 한쪽으로 갔다. 자리에 앉아 머그 컵에 담긴 음료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문득 내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녀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찻잔을 들고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 정말 오랜만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가끔 내 생각을 했다고. 가끔 내 이름을 검색해보고, 신간이 나오면 사서 읽었다고. 나는 두 달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요? 그녀는

2025.02.20 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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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흔적

무언가는 흔적을 남기지떼어버린 스티커 자리에 남은 누런 잔상하굣길 수많은 아이들의 발자국에 모래가 일고새하얀 학습지에는 너덜너덜한 회색 그림자가'생일 축하해!'라고 쓰인 교실 칠판에뿌연 분필 먼지들팔레트에 남겨진 물 자국과노트 한 쪽에 남겨진 재잘거림렌즈로 바꾼 지 오래인데없는 안경을 올려본다때로는흔적조차 남지 못한 것들을남몰래 그리워해 보기도 한다노릇노릇 익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꺼질 때까지

2025.06.10 우주물고기
당신이 이국

식도 가장 깊숙한 침묵에서 몸들이 떠밀려 나와요묵음을 발음하는 말더듬이는 식도에 구운 물고기들을 욱여넣으며 침묵과 동화되죠뼈를 발라내는 법을 모르시겠다고요?그렇다면 젓가락으로 물고기의 몸을 깨작깨작 헤집을 때,느글거리던 엄마의 침묵, 기억하시는 분 계시겠군요밥상머리 위에서 편식이란몸이 몸 안팎에 떠다니는 가시들을 걸러내지 못해서고,속상하신 건지, 할머니도 아닌데, 엄마는 자꾸만 틀니를 갈아 끼우시고,구운 침묵을 잘근잘근 씹는 내 이빨엔 이번엔 또엄마의 잇몸이 이갈이를 연발하는군요, 허공의 몸가시들을 깊숙한 침묵으로 희석하시는 분, 정말로 당신인가요?몸에서 뱉어낸 잔가시를 그릇 한쪽에 치워놓기란 칼로 허공을 가르기만큼 미묘해요허공에 가시가 박힌 날,가시는 어제와 다른 뾰족함으로 허공을 가르죠허공에 가시가 박힌 당신,찔린 시점에서 이미 당신이 아니에요목소리가 기원 없이 떨릴 수 있듯, 넝마가 된 당신의 살들이 공기 없이 펄럭일 수 있듯,여기는 바람이 닿지 않는 나라입니다몸을 삼켜 터진 풍선이며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몸이라깊숙히 팬 구멍들을 메꿔줄알약이 필요합니다당신이 이국입니다

2025.06.10 김예성
뒷걸음질 기피자

생일과 기일이 같다는 사실이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 이유는 사라져 가는 세계를 내가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순환적인 세계는 죽은 만큼만 태어나는 세계기도 하니까 모두가 일대일대응의 대체품이라면 나는 새로운 상실이 싫어 살아난 망자를 향해 달려갔을지도 몰랐다 어느 허구적인 선장이 글자 너머로 요구했다 뱃머리를 돌려라 나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는다고 책에게 소리를 지르는 기분이 되어 표지를 덮으며 다음 전개에게 용서를 구했다 빌렸으나 갚지 못해 선물로 생각해 버린 책 속에서 선장은 자꾸만 상실을 상실해 갔다 아무것도 돌리지 않는다고 악쓰는 내게도 소중한 채로 깨져버린 거울이 조각조각 남았는데 배 위에서 보는 햇살 아래의파도는 얼마나 많은 볕을 조각내며 유리를 삼켜냈을지 꿈꾸는 시체가 된 동행자들이 선장에게만 있지는 않았다

2025.06.09 1712
소설 epilogue

그리하여 그들은 규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세웠다. 다행히 한동안은 구름이 끼어서 바로 탈수가 오거나 지쳐 쓰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규리는 다리로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초췌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눈으로 그녀를 매춘부라 욕하는 사람들과 언덕 아래의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거의 15분 동안 몰려있다가 점심을 먹거나 일을 하러 떠나갔다. 그녀가 죽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서(설령 그녀를 누가 도와서 살린다 해도 멀리 못 갈뿐더러 아마 금방 죽을 것이 분명해서) 아무도 그녀를 지키지 않았다. 그러자 한 소녀가(거의 다 해지고 몸에 맞지 않게 큰 옷을 보니 고아가 분명했다) 그녀가 매달려있는 십자가에 쪼르르 달려와 기대어 앉고는 감자를(아마도 훔쳐온 듯했다) 입으로 천천히 식혀 먹었다. 규리는 방긋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감자야?” ”네! 감자예요. 마을에서 가져왔는데 아직도 너무 뜨거워요.” ”그렇구나. 화상 입겠다, 옷으로 집어.” ”아, 네!” ”이름이 뭐니?” ”이름… 엄마는 나를 채희라 불렀어요.” ”아, 그렇구나. 채희…” ”언니는요?” 규리는 잠시 웃어 보이려다 숨이 막혔는지 잠깐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겨우 다시 아래를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나, 나는 규리야. 규리.” 채희는 이미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열심히 먹는 중이었다. ”아, 맞다, 채희라 그랬지?” ”네.” 아이는 이미 완전히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흠… 언니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네, 해봐요.” 아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감자에 열중한 채 씹다가 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더는 아래를 내려보지 않았다. “언니가 아빠, 아니 아빠가 아니지, 흠… 언니한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친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야. 이 이야기는,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았던 시절즈음에 있었던 일인데, 그 시절에 비놋이란 사람이 살았어…” 그녀는 그녀의 표현대로 그녀에게 사랑이란 걸 가르쳐준 어느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억나는 데로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그녀는 이야기가 끝날때 쯤엔 숨이 멎겠지하며 거친 숨을 삼켜가며 열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채희는 그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작에 먹던 감자를 먹어치워버리고는 곧장 잘려는 듯이 십자가에 기대어 누웠다. 그러나 허기 탓인지 눈을 멀뚱히 뜬 채 먼 산을 바라보며 그녀의 열변을 무심히 들었다. 어느새 이야기는 비놋의 죽음에 까지 다다랐다. “... 그러자 비놋이 꾸짖었어. “너, 너는 가증스러운 배신자야! 창녀같은 년,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 사람을 팔아 넘길수 있냐고!”채희는 가만히 그의 욕설을 앉아서 들었어. 그녀는 잠시 노을을 바라보다 대답했어. “네가 죽지 않아서 기뻐. 그뿐이야.” “아니!” “...” “넌 나를 가지고 싶을 뿐이야. 널 가지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 난 널 사랑하고, 오직 그럴 뿐이야! 내가, 내가 네가 죽는걸 그냥 지켜보고 있었어야 됐다는 거야? 아니, 난 너를 가지지 않겠어, 네가 감사하지 않다면, 나가! 나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치만

2025.06.09 기능사
수중발레공연

원형 야외 공연장 너는 가장 아래에서 공연을 한다 관객은 없으므로 너의 친구들은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 앉아있다친구들은 사각이 없고 너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너는 노래를 부르고너는 인형극을 하고너는 발레를 한다물이 침범한다발 끝에서 부터 물이 차오른다물에 잠길 친구들을 떠올리며 너는 슬픔을 공연한다 너는 말이 없다소리가 없는 세계다 그곳에는 악기가 없고 노래가 없고 친구들이 없다 너는 발레를 하고점점 더 슬퍼지고 슬퍼진다는 말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한때 친구라고 불렸던인형들이 떠오른다

2025.06.09 이형규
휴식의 풍경 - 죽은 건물 안에서

나는 시간을 포장하듯이 여유를 가지고 창밖을 보았다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쌓여가는 눈과 구름은 아주 오래도록 제자리에결코 끝을 보이지 않을 한 계절은 유휴 상태에 놓인 그 어스름을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천장에서 털어내는 먼지 알갱이들은 햇살을 받은 바다의 수면 위 별들처럼온화한 구름의 빛을 받아 자신들의 미약함을 밝히고 있었다모든게 흐릿한, 시간마저도 안개 너머로 흩어지는수없이 많은 파편들의 묘비 앞에서도창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나는 그 상태를 영원히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2025.06.09 히치콕
유토피아

누군가 꿈꾸다 버린베어 문 자국이 아득한 세상을 아는가누군가 꿈꾸다 버린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고향을 아는가그 서러운 내음을 기억하는가목이 꺽여라 하늘만을 바라보는 이들에게꿈에서 깨라고, 깨라고숨이 멎어라 달리기만 하는 아이들에게이제는 보라고, 보라고우리들은 정처 없이 달린다우리들은 마구 달려간다실현되지 않는 꿈이야말로,현실을 가장 깊이 흔들어 놓기에오늘도 우리는 멈추는 법을 기꺼이 망각하고야만다.

2025.06.09 청개구리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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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25년 문학레지던시(협성마리나G7) 공고문

2025.03.12
공지사항 2025년 문학레지던시(호텔프린스) 공고문

2025.03.12
공지사항 2025년 문학레지던시(남이섬) 공고문

2025.03.12
공지사항 [해외레지던시참가지원] 2025년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 참가지원

※ 2025년 해외레지던시참가지원 추가공모 사업에 대한 공통 안내문입니다. 사전에 확인 후 세부 공고문 확인바랍니다. [해외레지던시참가지원] (문학)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 참가지원 1. 사업개요 ○ 사업명 :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Kyoto Writers Residency) ○ 사업기간 : 2025. 10월 중순 ~ 11월 중순 (1개월) ○ 사업장소 : 일본(Japan) - 교토(Kyoto) ○ 주요내용 : 오프닝 포럼, 클로징 이벤트 등 교토작가레지던시 개최 프로그램 참여 및 작가 개인 창작활동 수행 ※ 사업 세부소개 • 해외협력기관 :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Kyoto Writers Residency) • 홈페이지 : https://kyotowriters.org/ • 기관/사업소개 - 교토에 있는 대학의 문학 학자들과의 연계를 통해 2022년에 설립된 국제 문학 레지던시 - 전 세계의 작가 및 번역가들이 교토에 머물며 창작활동과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 • 세부 프로그램 - 레지던시 공식행사인 오프닝 포럼 및 클로징 이벤트 2회 ※ 모든 프로그램은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되며, 공개 행사에 한하여 영어-일본어 통역 진행 예정 2. 지원신청자격 ○ 문인(시, 소설, 아동·청소년 문학) - 시, 소설, 아동·청소년 문학 : 최소 1권 이상의 발간 실적이 있는 문인 ※ 그림책, 희곡, 비문학(에세이 등) 제외 - 영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자 ○ 선정자는 레지던시 공식 행사 필석 3. 지원규모 및 항목 ○ 참가 예술가 직접 지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선정자 보조금 지급/지원신청서 내 예산 편성) 구분 선정 인원 지원규모 자부담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 1인 (후보군 3~5인 내외) 100만원 내외 총 사업비(보조금+자부담)의 10% 이상 - 프로그램 참가를 위한 왕복 항공료(이코노미석 기준 실비 지원) ※ 비자 발급비, 현지 체재비 등은 참가자 개인 부담 - 회계법인 회계검증수수료 ※ 회계검증수수료는 문예진흥기금 지원신청 공통안내사항 내 가이드라인 참조 ○ 기타 지원항목(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번역가/제작업체 지급) - 문학 분야 작가키트 제작비 및 작품 번역비(시 15편, 소설 30페이지 내외) : 400만 원 ※ 작가키트 제작비 및 작품 번역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해당업체, 번역가에게 직접 지급 ○ 프로그램 참가비(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해외협력기관 지급) - 프로그램 참가비 : ¥430,000 ※ 숙박비, 일부 식사, 공식 행사 관련 통역료(영어-일본어), 프로그램 운영 등 각종 비용 포함 ※ 현지 체류 중 지급되는 현지 체재비 외 추가분은 참가자 개인 부담 ※ 해당 지원 내역은 해외협력기관과의 협의에 따라 조정될 수 있음 4. 제출서류 및 자료 (필수자료 총 3개) ※ 우편 및 방문 접수 불가 제

202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