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잇는 아픔
- 작성자 우재영
- 작성일 201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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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아픔
하근찬의『수난 이대』를 읽고
‘수난 이대’는 전쟁으로 빚진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아픈 기억, 어쩔 줄 모르며 아들을 기다리는 행동,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내던지는 듯한 투박한 말투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저미게 만들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는 핑계로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가운데, 역사가 만들어낸 한 가족의 비극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수난 이대’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아픔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근찬은 소설 내적으로 이러한 아픔을 두 가지 상징물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이 소설의 오프닝과 엔딩에 일관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는가? 좋은 작품은 오프닝과 엔딩이 잘 짜여 있다. 작가가 그만큼 오프닝과 엔딩에 신경을 썼다는 것과 그 작은 부분들에 비교적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소설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하근찬 작가가 애초에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공통어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용머리재’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말았다.’ (하근찬,『수난이대』) 이것이 오프닝에서 용머리재가 사용된 문장이다. 이는 주인공인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단숨에 넘을 만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매듭짓는 문장이기도 한 엔딩 문장을 살펴보자.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근찬,『수난이대』)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즉, 이 자연물, 용머리재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두 ‘용머리재’의 의미는 상반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특히 엔딩 문장의 용머리재가 더욱 그러하다. 오프닝에서는 주인공 혼자 등장하지만, 엔딩에서는 아들도 함께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는 주인공인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넘은 후지만, 엔딩에서는 용머리재를 아직 넘지 않았다. 오프닝에서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넘고 혼자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시련과 고비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 엔딩에서 박만도는 막 외나무다리를 건넌 직후, 아들과 함께 용머리재를 올려다보는 입장이다. 이는 그들이 함께 수난을 극복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견뎌내야 할 또 다른 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이 소설에서 핵심 소재로 다뤄진 ‘외나무다리’를 살펴보자. 박만도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던 적이 있었던 외나무다리와, 아들과 함께 힘을 합쳐 건넌 외나무다리가 등장한다. 물에 빠졌을 적에는 술김에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못했기에 어려움을 극복해내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엔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외나무다리에 다다르자,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업히고 고등어를 든다. 서로의 장애를 극복하고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수난 이대가 극찬 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주인공에 따라 달라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6·25 전쟁 직후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에 각각 초점을 맞추고 보면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징용에 끌려 나가 한쪽 팔을 잃었고, ‘아들’은 6·25 전쟁에 참전하여 한쪽 다리를 잃었다. 시대적 배경이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대, 아들은 남북전쟁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을 그린 수많은 작품들과는 다르게, ‘수난 이대’는 억지로 짜 맞추려 하지 않고 주인공을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함으로써 두 시대를 담아냈다. 두 시대를 2대에 걸친 한 가족의 비극으로 담아낸 것이다.
하지만 ‘수난 이대’의 아픔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 아픔이 현재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일제 강점기 시대는 위안부를, 남북전쟁은 남북분단의 결과를 낳았다. 위안부 문제와 남북분단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자, 수난이다. 이는 아직까지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앞으로 우리가 꼭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수난 이대’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한 가족에게 수난이 대물림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수난이 또 다른 수난을 낳아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이 현대 사회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해 준다는 점은 ‘수난 이대’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또한 슬픔을 담담하게 풀어쓰는 하근찬 작가의 특유한 문체가 더 먹먹한 감동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도 하나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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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스텔지아
- 2026-09-16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인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안락사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것을 말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 생명 보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는 실제 인물인 라몬 삼페드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메나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물론 편집과 음악까지 직접 맡았으며, 한 사람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라몬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작품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라몬은 사고 이후 오랜 시간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라몬의 삶을 따라가며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몬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 수 있는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라몬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개념은 대사로만 설명되지 않고 영화 속 단 하나의 상상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압축된다. 푸치니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가 흐르는 가운데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를 달려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카메라는 그의 시점이 되어 갈리시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날아간 뒤 훌리아와 입을 맞춘다. 영화 전체에서 라몬의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장면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실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 장면을 라몬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으로 설명했으며,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의 몸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것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라몬이 되찾고 싶어 하는 자유가 걷고 뛰는 신체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을 인간의 자유로 인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 역시 개인의 의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라몬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며 일상적인 행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이러한 삶을 살아온 라몬에게 고통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고,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 자체가 고통
- 시유레
- 2026-09-07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2번, 책으로 1번 봤다. 영화로 봤을 때의 감동이 더 컸기 때문에 영화로 비평을 쓰려한다. 마지막을 어기의 이야기로 장식하기 위해 누나인 비아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하겠다. 비아는 가족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다. 그녀도 물론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지만 온 가족의 관심이 안면기형을 갖고 있는 동생한테 쏠리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고 꿋꿋하게 참아냈다. 비아가 뭐라고 하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할 걸 알기에 짐이 되지 않으려 늘 노력했다. 비아도 아직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인데 투정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녀가 안타까웠다. 성숙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렇지만 비아의 행동이 옳은 행동일까? 맞다, 아니다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비아 혼자 그 모든 상처를 짊어지는 것은 가족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짐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큰 문제는 비아의 친구 미란다와의 일이었다. 미란다는 비아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는데 그러다 보니 비아의 가족과도 잘 알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란다는 여름 캠프를 갔다 오더니 비아를 피하게 된다. 비아는 당황했고 나 역시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그러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유가 나온다. 미란다는 부모님의 이혼 등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다, 캠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비아의 따뜻한 가족(어기 포함) 이야기를 마치 자기 가족의 이야기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자신에게 동생을 위하는 희생적인 누나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사람들의 동정을 얻으며 결핍을 채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비아를 마주하기 부끄럽고 미안해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미란다의 행동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미란다는 비아의 화목한 가족이 부러웠던 것이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비아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해봐도 좋겠다. 물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도, 잘한 선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비아에게 말하고 사과했으면 됐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란다에게는 그 방식이 최선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보면 어떨까? 미란다도 그저 가족의 사랑이 고팠던 미숙한 아이였으니까. 둘의 화해는 학교 연극에서 이루어진다. 미란다가 주인공을 맡고 그 대역을 비아가 맡았다. 미란다가 객석에 온 비아의 가족을 본 후, 비아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며 무대에 서게 해 줬다. 비아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미란다의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미란다는 여전히 그들과 잘 지내기를 바란 것 같다.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던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친구의 가족을 소재로 삼아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미란다가 현재, 주인공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이 한 번도 가족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비아에게 자리를 넘기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 캔디
- 2026-08-30
서론1) 탐구 배경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이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질문에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묻는다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카뮈의 소설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알베르 카뮈처럼 나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나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욕망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남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위에 소설을 쓰는, 아니 글을 쓰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노트북에 초고는 쌓여만 갔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무의미했다. 학교 내에서는 백일장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예행사가 아예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고립된 무인도에 갇혔다.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소설은 나의 생각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문학에 대한 교류를 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겪던 차에 나는 온라인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소설을 쓰기 보다는 작품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토론을 하던 중 어떤 사용자가 민음사 책의 표지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그려진 한 외로운 노인과 안개. 나는 그 사진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김승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민음사는 원래 외국 문학 전집만 발행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문학도 나오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로 구매했다. 그리고 첫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문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모범답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문체보다도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세계였다. 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난 '자기세계'의 개념 이후 현대인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멸망해가거나 몰락하는 인물은 분명 무언가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세계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김승옥 작가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답을 절대 정해주는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만 하더라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질문만 던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칸트도 인간 존엄성에 따른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항상 소설을 애매하게 끝낸다. 의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범죄에 연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서는 그저 마을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생각을 하며 끝이 난다. 소설 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김승옥은 이런 애매한 상황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 노스텔지아
- 2026-08-23
유사한 소재와 다른 서술 조세희의 문학세계가 투쟁과 서늘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윤흥길의 문학 세계는 다정함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부는 “꼭 죽여.”로 끝난다면 윤흥길의 『장마』는 “모든 걸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니까. 또한 난장이의 딸은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사람을 증오하는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철거민 입주 권리를 산 사람이다. 연작에서는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권력자를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권력의 폭압에 대한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윤흥길은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입주권을 구매한 엘리트층의 권씨라는 인물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상황을 묘사한다. 권씨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기리면서 정장과 구두를 신고 공사장에 출근한다. 권씨가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짓는 태도나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구매한 점에서는 전형적인 경제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일 구두를 닦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조세희의 작품들이 드러낸 사회적 모순은 결국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권씨처럼 연민하게 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 있다.조세희뫼비우스의 띠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_30p.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살기가 너무 힘들다.”아버지가 말했었다.“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 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_72p.(…)“로스 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줄 것이 있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올려 보여주마.” 집이 무너진다는 것. 지금은 죽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겨진 채 굳은 시멘트, 오랜 시간이 걸려 손수 지은 집, 집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숭늉을 먹는 식구들.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고유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 소멸하고, 빈터가 되고, 수몰되는 순간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 문순태의 『 징 소리』등 20세기 문학은 전통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어야 했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는 집과 고향과 거기서 쓰이던 언어의 붕괴가 한국 사회를 넘어서 세계의 섬과 숲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시선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고향과 언어를 ‘중앙’에게 빼앗기고 중앙이 만든 집에 살며 중앙의 언어를 쓰게 되는 것은 비단 소수 민족 사회뿐 아니라 도시적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다.남아
- Marllin Zero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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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안녕하세요? 우재영님, 반갑습니다.^^ 하근찬 작가의 단편 소설 「수난 이대」에 대해 쓴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 이 소설로 공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깐 감회에 젖었네요. 당시 문학 교과서에 이 작품이 실려 있었거든요.) 우재영님은 이른바 작품 감상에 있어서의 네 가지 태도(① 절대론적 관점(내재적 관점) ② 표현론적 관점 ③ 반영론적 관점 ④ 효용론적 관점) 중에서, ①에 해당하는 절대론적 관점에 입각해 이 소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글은 ‘용머리재’와 ‘외나무다리’를 중심으로 작품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대를 잇는 아픔」은 깔끔한 내재적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를 잇는 아픔」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하면 「수난 이대」에 대한 우재영님의 해석이 지나치게 모범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교과서에 쓰여 있는,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작품 감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기존에 제출된 해석과 구별되는 우재영님만의 독특한 시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감상&비평은 남들과 똑같이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 할 수 있는 말을 전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수난 이대」를 절대론적 관점으로만 읽지 말고, 나머지 세 가지 관점을 종합하여 분석해야 합니다. 예컨대 이 소설이 하근찬 작가의 등단작―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임을 고려해보면서, 1950년대 한국 사회에 짙게 깔린 휴머니즘 풍조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수도 있겠지요. 문제를 합리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애로 쉽게 덮어버리는 것이 휴머니즘이 가진 부정적 면 중 하나니까요. “이 작품이 약간 우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상처를 당한 이들이 상처를 준 역사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와 같은 「수난 이대」에 대한 또 다른 평을 우재영님이 눈 여겨 보셨으면 합니다. 이 점을 오래 고민해야 어디선가 봤던 작품평이 아니라, 우재영님만의 비평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수난 이대」가 실려 있는 책이 아주 많은데, 우재영님이 그 중에서 어떤 판본으로 읽었는지도 글에 써주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하근찬, 「수난 이대」, 『하근찬 선집』(하정일 편), 현대문학, 2011.’ 이런 식으로요. 중고등학교 때 훈련이 되어 있어야, 나중에 전문적인 글을 쓸 때 서지사항을 밝히는 일에 곤란을 겪지 않을 테니까요. 텍스트의 출처와 자기주장의 근거(인용 자료)를 제시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주세요. 그럼 우재영님의 또 다른 글 기대하겠습니다. (「대를 잇는 아픔」을 고쳐 써서 다시 올려주셔도 됩니다.) * 「대를 잇는 아픔」에서 수정해야 할 문장은 STICKMAN님이 댓글로 잘 지적해주었으므로 따로 코멘트하지는 않겠습니다.(STICKMAN님 고마워요!^^)
죄송합니다 처음에 우지영님이라고 잘못 썼네요.. 수정하려 하니까 안 된다고 뜨네요ㅠㅠ
안녕하세요 우지영님의 독후감 잘 봤습니다. 저도 나중에 하근찬 작가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비문과 오자를 쓸 때가 자주 있지만.. 감히 우재영님의 글에 지적을 해봅니다. ''수난 이대'는 전쟁으로 빚진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 하근찬이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고 해야 옳을 텐데, '수난 이대' 작품 자체가 썼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이 소설을 쓸 수는 없으므로 이 문장은 비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전쟁으로 빚졌다고 했는데 무엇은 빚진 것인지 나와 있지 않아 저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빚지다'는 말은 '남에게 돈을 꾸었다가 갚지 못하다' '신세를 지다'는 것밖에 없는데 무엇을 빚지고 무엇에 빚진 것인지 나와 있지 않군요. 물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빚졌겠지만요.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앞에 용머리재를 언급하는데 뒤에 용머리재가 또 나옵니다.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두 문장으로 나누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업히고 고등어를 든다' 제가 아는 고등어는 생선 고등어밖에 없습니다만.. 그 고등어가 진짜 생선 고등어인지, 그게 맞다면 왜 아들이 고등어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고등어와 관련된 말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을 직접 봐야만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난 이대가 극찬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수난 이대가 극찬받고 있다는 말은 그 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수난 이대가 극찬받고 있다고 미리 말해주어야 독자들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주인공에 따라 달라진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주인공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셨는데, 그 뒤로 '아버지와 아들에 각각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하셨기 때문에 주인공 박만도와 그의 아들, 즉 등장인물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 아니면 두 시대를 2대에 걸친 한 가족의 비극으로 담아냈다고 하셨는데 그럼 '가족'에 따라 시대적 배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주인공을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함으로써' 주인공을 부모로 설정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 박만도는 부모와 자식 둘 다 될 수는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수난 이대'는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다루는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 현대사도 다루는 소설인데, 우재영님은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함으로써 두 시대를 담아냈다'고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현대 사회와 연관지어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주인공에게' 녹여냈다는 것은 약간 말이 안 돼 보이지만, 분명 글 중반에 두 시대를 한 가족에 담았다고 하셨는데 끝부분에서 갑자기 말이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앞의 말과 부딪쳐 약간의 모순(모순이라고 해야 할까요?)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에 물음형으로 일관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냐고 하셨는데 두 번째에서는 그냥 살펴보자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에 용머리재를 설명하고, 두 번째에 외다리나무를 설명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어울릴 듯 합니다. 첫 번째에서 나온 오프닝과 엔딩 이야기는 그 전에 추가해도 어색할 게 없을 것 같고요. 꼭 그렇게 하란 법은 없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도 독후감, 감상문, 비평글 등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우재영님의 글을 읽다 보니 조언을 하게 됐습니다. 부족한 제가 감히 우재영님의 글에 지적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글 많이 쓰시고, 많이 활동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