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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명원 - 유품
유품 한명원 집에 낡은 호미 하나가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뿌리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시골 밭으로 향한다 마을 입구에 흰 수건이 나풀거리고 집들이 물방울무늬의 몸빼 바지처럼 보인다 겨우내 딱딱해진 땅을 톡톡 두드리면 쩍쩍 갈라졌다 솎아내고 씨를 뿌리다 잡초가 자라면 한 손에 잡초를 뿌리째 뽑아 어깨를 들썩이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꼬불꼬불한 이랑을 호미가 만지면 곡식은 잘 자랐다 곡식마다 습성이 달라 여름 내내 호미는 쉴 수가 없었다 잡초의 뿌리를 향한 집착은 손에 힘을 빼고 리듬을 타야 하기에 목소리가 쉴 때까지 노랫가락이 밭고랑에 머물렀다 호미 끝에서 계절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이제는 노을 속으로 사라진 호미 밭에는 키 큰 잡초만 무성하다 봄이 되면 나는 호미 닦는 버릇이 생겼다 내 머릿속 잡초를 뽑고 솎아내고 북 두드리며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한명원 - 굴러간다
굴러간다 한명원 어린 神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에서 깨어 자전거를 타고 젖은 음이 들리는 곳으로 달립니다 수많은 발자국 위를 바퀴는 굴러갑니다 골목도 굴러가고 지평선으로 달도 굴러갑니다 빈 벤치를 휘어서 돌자, 오르막이 보입니다 엉덩이를 들고 발에 더욱 힘을 주며 올라갑니다 마치 아르테미스 2호처럼 저 달의 궤도를 굴러가고 있는 적막을 어둠은 끌고 가겠죠 저수지 위, 안개가 밀려옵니다 물의 억양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감아가며 전진합니다 같은 자리를 몇 바퀴째 돌고 있으면 눈이 커지고 귀가 커집니다 발밑 노란 창포가 달을 삼켰다가 토해내는 소리가 들립니다 풀잎 위로 이슬이 떨어져 세상이 잠시 깨졌다가 다시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입니다 내리막길은 바퀴가 저절로 움직입니다 펄럭이는 옷자락보다 마음이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낯선 세계를 심벌즈 두드리듯 달리면 몸이 팽팽해집니다 바람이 옷을 헝클고 들어옵니다 고여 있던 녹슨 음이 방향을 찾아갑니다 길 잃은 어린 神은 어디쯤 있는 걸까요 구름 사이로 태양이 굴러갑니다 빛 위로 바퀴가 굴러갑니다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1상세보기 -
시한기옥 - 자괴감
자괴감 한기옥 우리 동네 치과의사 P는 친절하지 않다 어디 불편하세요? 짧게 묻고 말하지 않는다 본 떠온 이가 맞지 않는다고 굼뜨다고 치위생사에게 수시로 눈 치켜뜰 때면 매몰찬데 환자가 넘친다 내가 이제껏 봤다고 말한 건 보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고 안다고 믿었던 건 가짜일까 모호하고 어려워 안개 들어찰 즈음이면 쥐어짜듯 아 아 아 아 아..... 한 마디 던지고 말문에 대못을 박는다 나는 이제껏 알던 말들을 지우고 오롯이 P의 한 음절에 기대어 낯선 꿈인 듯한 곳을 헤매다 나오게 되는데 그때마다 내가 천근만근 아파 여기 왔었던가요? P가 만져준 이는 달라 여기 온다는 그들처럼 개운함과 안도감과 충만함에 빠진다 나도 선물처럼 뭔가 주고 싶어서 시집을 만지작거리다가 아 아 아 아 아..... 누구든 읽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P의 한 음절 같은 시 들어있나? 그런 시 한 편 얻을 날 올까? 생각에 이르면 다 쳐내야 할 말 잔칫집 같아서 내려놓게 된다는 걸 그는 모를 거다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한기옥 - 시를 모른다는 사람
시를 모른다는 사람 한기옥 웃을 때 새의 눈이 되는 남자 이마 위에 가을 새 열 마리쯤 기르는 남자 새 모이 사러가면 문조 안부를 묻거나 새가 탈 없이 자라게 하는 비밀 꾹꾹 눌러 담으며 벙글거리는 남자 대낮부터 술 푸는 날 잦아 옆집 사람이 손님을 맞기도 하는데 기다리다 보면 막막한 새의 얼굴로 앵무새 앞에 가 중얼거리다 어린애가 되는 남자 마누라랑 아들하고 헤어진 지 오래야요 새 파는 일로 먹고 산 지는 50년 됐죠 풍물 장 그의 가게 들러 돌아오는 날이면 늙은 새 한 마리 내 방에 따라와 밤늦도록 어둠 밀어 올린다 시요? 난 잘 몰라요 내 몸에서 새를 빼 내버리면 무너질 거예요 새가 나가버린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는 온 방 안을 돌며 종을 치듯 새 이야길 들려주는데 나는 내가 시 쓰는 사람이 맞는지 시에 대해 뭘 알기나 했던 건지 끝없이 물어보면서 캄캄해지는 것이다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옥빈 - 화물택배
화물택배 옥빈 기계부품 주문이 제주도 거래처에서 전화기 벨소리를 탔다 부품을 신문지로 포장하여 폐상자에 넣고, 알사탕 서너 개 거래명세표와 함께 동봉해 보냈다 알사탕, 바다를 건너 달달한 마음 정박하리라 며칠 뒤 뜬금없이 귤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쇠밥 먹고 사는 세상 찬 바람 부는 날 많지만, 위로가 뭐 별건가 달달함에 새콤함을 보태 온 크고 작은 귤들이 도란도란 가슴을 적신다 전화기에 짠한 귤향기를 태웠다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옥빈 - 고물
고물 옥빈 사무실 뒤 지하주차장에 허리춤 높이로 백관을 사각으로 용접하여 분리수거대를 만들어 놓았다 비닐, 플라스틱, 캔 3종의 폐자재 이름을 인쇄하여 코팅해 타이밴드로 매달았다 옆 가게와 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사용하며 달그락거리고 있다 늘 허기를 채우는 분리수거함에 작은 손수레를 끌고 억새꽃 머리를 한 할머니가 다녀가기 시작했다 캔만 가져가는 손수레가 짊어진 하루는 이미 찌그러지고 구겨졌다 수분이 비워진 가벼운 몸, 깡통 소리 들썩거리며 적막으로 가고 있다 캔 구역의 비닐봉지는 사흘이 멀다고 비워졌다 나는 캔을 더 바짝 찌그러트렸다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안지은 - 하우스 오브 피스
하우스 오브 피스 안지은 우리가 나눈 대화 사이에 홀로 남은 나는 오래도록 배회합니다. 버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를 보며 당신은 내게 말했죠. 구름이 부딪혀서 멍이 들면 먹구름이 된대요. 당신은 가죽을 뒤집어쓴 나무 같아요. 내가 보는 당신은 한 그루이지만, 가죽나무의 뿌리는 땅속에서 끝을 모르고 퍼져나가거든요. 옆으로, 옆으로. 버려진 땅에서 더 잘 자라는 나무. 나는 옆이 두려워요. 옆은 자꾸 나를 붙드니까 순환선만 타는 버릇. 손잡이를 잡지 않고 흔들리는 진동에 몸을 맡겨도, 무섭습니다. 순환하는 열차에도 종착지가 있다는 게. 나는 당겨야 열리는 문을 항상 밀어 보는 사람인데, 열차의 문은 언제나 미닫이. 영원히 한 방향으로 열리는 문. 영원 앞에 나는 자주 체해서, 당신의 문장을 조각냅니다. 조각난 문장을 계단처럼 밟으며 집으로 향해요. 평서형을 쓰지만 물음표가 가득하던 얼굴. 나는 그 표정을 잘 압니다. 나무는 바람이 불면 울거든요. 당신에게는 언제나 울 준비가 된 뿌리가 돋아나잖아요. 먹구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겨울이에요. 찬바람이 불어오면 눈빛으로 마음을 깎는 당신과, 먹구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여름이라고 생각하는 나. 나는 한여름에도 찬바람을 잘 느껴요. 고약한 계절. 뜨거운 혹한기는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습니다. 왜 제게 대답하지 않냐 물었죠. 신앙은 조용하지만, 영원하진 않아서 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넘어지지 않는 훈련. 쏟는 것은 쉬워도 주워 담는 것은 어려우니까. 내게 대화란 그런 거예요. 집에 가는 길은 길고, 길고, 길어지고, 그사이 무한히 증식하는 조각난 침묵. 집에 도착했음에도 나는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어요. 집에서도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라서, 내 방 창문에 비친 나와 눈싸움. 나를 붙드는 건 나. 환기가 필요합니다. 창문을 열면 쏟아지는 진눈깨비와 벽을 뚫고 번식하는 뿌리. 징그러운 평화.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1상세보기 -
시안지은 -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안지은 노을 지는 강변을 걷는다 각자의 보폭으로 네가 한 발짝 걸을 때 나는 두 발짝 걸어야 해 함께 걷고 싶으니까 기꺼이 두 발짝 너와 나는 애인이지만 우리가 될 수 없고 평온한 너와 숨이 차오르는 나 벤치에 좀 앉을래? 앉는 것은 나 혼자 너는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너와 눈을 맞추며 숨을 고르는데 샐쭉 웃는 너 왜 웃어? 너 따라 한 건데 널 바라볼 때의 내 표정을 나는 모르니까 네가 내 표정을 따라 해도 그것은 너의 것 강변에는 뛰는 사람들이 많고 내게 등을 돌려 어딘가를 응시하는 너 너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어 그게 바라보는 사람의 특권이니까 해가 질 때 가장 길어지는 그림자 너는 신발 끈을 묶다 나를 흘깃 보고선 안녕 짧은 인사 인사는 내게 그림자를 남기고 너는 안녕히 달린다 그림자를 뒤를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모르는 나의 표정은 너의 것 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걷는다 너는 내가 끝끝내 알지 못하는 나의 표정을 알고 있을까 달리는 사람은 너인데 여전히 숨이 가쁜 건 나 나에게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여서 두 눈을 감는다 맹신은 얼마나 허약한지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면 나는 감은 눈으로도 울 줄 아는 사람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1상세보기 -
시신혜정 - 우아
우아 신혜정 발음할 때 혀끝은 온순해진다 새 떼가 갈라놓은 하늘 그 공기의 밀도 사이 잠깐 하릴없어지는 허공의 시간 밤하늘 은하수가 갈라놓은 하늘 서두르지 않는 나무와 성급하지 않은 새와 조급함 없는 해 변함없는 별들의 운행 속 혀끝을 가만히 내려놓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 말은 또 얼마나 우아한지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신혜정 - 시간의 심연
시간의 심연1) 신혜정 여기, 사방이 닫힌 세계 입이 무거운 것들이 있다 안으로 언어를 가두고 긴 침묵이 키워낸 것들 찢기고 패이고 갈라지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흔적 사이로 입을 퇴화시킨 것들 영원이라 불러도 좋을까 신들의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 같은 우리는 모두 느슨히 엮였거나 엉킨 존재 멀리서도 보일 것이다 천천히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같은 속도로 멀어지던 기억 자꾸만 따라붙던 단단하게 뭉쳐진 채 그리고 입을 열면 벽, 벽일 것이다 목구멍 가득 돌덩이가 박힐 것이다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뭉쳐 하나의 존재로, 결국 사라진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1) 18세기 말 존 플레이페어가 스코틀랜드 ‘식카 포인트’에서의 지질학적 발견 앞에서 남긴 말. 그 발견이 현대 지질학의 ‘Deep Time’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마종기 - 제주도 이슬
제주도 이슬 마종기 얼마 전 한 열흘 제주도에 머물 때 눈을 반짝이며 노래하는 이슬들을 만났지. 몸통이 보통보다 작기는 했지만 누구를 기다리면서 안 기다리는 척하는 일찍 잠이 깬 그 눈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그 섬에는 내가 아는 친구가 많아서 그런가, 음악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죽은 화가도 있는데 이슬 때문에 깨끗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이슬 때문에 젖은 삶을 여미며 살고 있는 것인지 모두들 바람 속의 큰 바다처럼 살고 있었다. (중국의 삼오역기에는 1만 8천 년을 잠만 자다가 깨어난 반고의 눈물이 바로 이슬이라는데 자기 몸을 죽여 세상을 만들었다는 반고는 왜 세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울었을까.) (뉴질랜드에서는 생시에 눈치 보여 울지 못하던 아버지가 죽어서 자식 위해 밤새우는 눈물이 이슬이라는데. 그 이슬들 너무 많아 풀밭의 고사리가 모두 나무로 자라 숲이 되었다는데….) (그리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죽은 아들을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이 또 이슬. 이슬이 누군가의 눈물이라는 것은 전부터 알았지만 저 많은 제주도 이슬은 도대체 누구의 눈물이란 말인가.) 아침이 활짝 피어나기도 전에 도망가듯 말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슬이여, 이슬 앞에서 내 시는 할 말을 다 잊었지만 그건 원래 혼자서 떠돌던 내 피였고 꿈이었어. 힘들었던 일 어려웠던 시간 모두 지났다지만 그래도 눈물이 끝까지 나를 이끌어주기를. 더러워진 평생을 당신의 이슬이 늘 씻어주기를.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시마종기 - 간절한 안부
간절한 안부 마종기 요즈음도 잘 지내지? 건강하게 나들이도 자주 하고? 오랜만에 보내는 안부 메일에 답장이 당장 오면 반갑지만 어떤 친구는 한동안 소식이 없어 이 친구 게을러졌나, 할 수 없이 다시 메일을 보낸다, 어째 말이 없냐? 잘 지내지? 소식 알려라. 그래도 한 열흘 또 소식이 없으면 그때는 별안간 상황이 달라진다. 다시 메일 보내기가 망설여진다. 외면하고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나이 탓이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자꾸 겁이 나려고 한다. 행여 많이 아픈 건 아닌지 힘든 사정이 생긴 건 아닌지 몇 자리 남지 않은 내 친구, 그래, 메일도 보낼 필요 없으니 그냥 탈 없이 잘만 살아다오. 연락을 못한다 해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래, 그래도 좋으니까 그저, 제발.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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