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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조우리 - 듀엣
듀엣 조우리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날부터 시작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말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이니까, 난 열여덟이었고 그 애는 열일곱이었죠. 따지고 보면 고작 몇 달 터울일 뿐이긴 해도 엄연히 내가 언니거든요. 그 애는 끝까지 한 번도 날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지만요. 왜 그랬을까. 아마 우리 사이가 정말 자매처럼 가까워지는 것만은 원치 않았던 모양이지요. 어쩌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요. 원래의 내 성격이라면 깍듯이 예의를 차리라고 한 소리 했을 거거든요. 그런데 왜인지 그 애에게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내 어깨에 손을 올려도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 두게 되었으니까. 그날, 장 선생님이 서울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서는 가회동 우리집으로 그 애를 데려왔지요.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어요.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오만하게도 그때까지 난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어나 한 번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란 없었지요. 누구나 날 보면 예쁘다고 칭찬하기 일쑤에, 내 스스로 느끼기에 제법 똑똑하기도 했으니까요. 노래야 두말할 것도 없고, 춤도 물론이고요. 그래서 장 선생님이 내가 혼자서는 데뷔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도무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내가 어디가 못나고 무엇이 부족해? 왜 혼자서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 거야?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장 선생님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고는 밤새 뒤척이면서 혼자 속앓이만 해댔거든요. 그런데 그 애를 보니까 알겠는 거예요. 나에게 부족한 건 바로 저 애였구나. 그러니 이젠 됐다. 다 됐어. 안심이 다 되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었죠. 난 네가 있으니 됐다고. 난 너만 필요하다고. 우리의 첫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이었어요. 아뇨. 그 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어지간히 긴장을 했던 모양이죠. 그저 내 손을 한번 꽉 쥐고 말더군요. 아주 세게.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그 애가 들어오던 순간이 생생해요. 한여름이었지요. 날이 무더워서 마당에서 기르던 화초들이 축축 처지니까 살림을 봐주던 순천댁 아주머니가 사방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거든요. 순천댁 아주머니는 부지런하긴 해도 손끝이 야무진 편은 아니에요. 화단과 화분에만 조심히 물을 뿌리는 게 아니고 숫제 사방에 던져대듯 하니 마당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는데, 먼저 들어온 장 선생님이 철퍽 소리가 나게 물웅덩이를 밟고는 새로 맞춘 모시 양복이 다 상하게 생겼다며 투덜거렸더랬죠. 그러거나 말거나 순천댁 아주머니는 계속 물을 뿌려대고 그 바람에 마당 한구석엔 작은 무지개가 피어났어요. 난 대청마루에 앉아 킥킥 웃기만 했지요. 아마 수박도 먹고 있었나. 그때까진 장 선생님한테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었으니까,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퍽 재미났죠.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들어와. 누가 또 와요? 내가 이야기했잖아. 수희는 솔로가 아니라 듀엣을 해야 한다고. 무슨 시스터즈니 하는 거, 정말로 하신 말씀이었어요?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정미래 - 굳은 모양을 보면
굳은 모양을 보면 정미래 여상길 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새가 그냥 새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참새라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새. 그런데 여상길 씨가 대뜸 직박구리네요, 했다. “네? 직박구리요?” “작년 봄인가. 웬 새 한 마리가 요 안으로 휙 들어오더니 안 나가고 버티더라고요.” 여상길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마우스를 딸깍거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의 모니터를 보았는데, 바탕화면에 무언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가 기계적으로 새 폴더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우지, 오목눈이, 동고비… 내 시선은 아랑곳없이 그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새 폴더(N)’를 클릭했다. 공교롭게도 직박구리라는 이름의 폴더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두 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황량한 오피스 빌딩 안에서 그 텃새가 대체 뭘 먹고 1년 넘게 연명했나. 그리고 여상길 씨는 어떻게 그게 직박구리라는 걸 알았나. 조류학자도 아니면서. 설마 매일 저렇게 새 폴더를 만드는 것도 다 조류의 학명을 외우기 위한 학습 활동의 일환이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 새가 어느 층 타일 위에 배를 깔고 퍼져 있는 걸 목격했다. 영락없이 죽은 것 같았지.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명복을 빈다, 직박구리. 속으로 삼가 조의를 표하려던 찰나 녀석이 꽁지깃을 살그머니 털었다. ✹ 몇 해 전, 내가 맡고 있던 슈팅 게임의 한 맵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진 적이 있다. 공들여 설계된 전장, 그 살풍경을 평화로이 가로지르던 비둘기. 그 사이에서 누군가 찾아낸 것이다. 지면에 내려앉은 비둘기를 밟으면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을. 제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유저의 캐릭터를 등에 태우고— 버그였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걸 전략으로 삼았다. 새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멀리 있는 적들을 탕! 탕! 신나게 쏴 죽였다. 버그가 패치된 날, 개발팀에선 그 폐허에 ‘새를 밟지 마시오!’라는 벽보를 곳곳에 붙였다. 누구에겐 빤하게 잘못된 오류가 또 누구에게 가서는 더없이 괜찮은 전술이 되었던 순간. 나는 그때 세상일이란 게 참 모호하고, 또 그래서 이상하게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경한 감각에 휩싸였더랬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픈캠프’를 휘—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이 주 40시간을 버티는 것. 그것이 이곳, 오픈캠프의 최종 퀘스트였다. 열린 야영지라니. 듣기에는 그럴듯했다.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같기도 한 게. 하지만 사실은 권고사직이 난무하는, 구조조정과 생존 사이의 막간 스테이지일 따름이었고… 오픈캠프로 발령이 난 넉 달 전에. 인사팀의 안내에 따라 변경된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가장 먼저 보인 건 누군가의 휑한 정수리였다. 포니테일로 묶인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에 따라 애처롭게 달랑거렸다. 보아하니 사내 네임드 여상길 씨였다. 이미 한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나일선 - Midnight Coffee Club
Midnight Coffee Club 나일선 광학적 미디어의 역사는 사라짐의 역사이고 그것이 이제 내게도 사라질 자유를 주고 있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찾는 사람에겐 보여, 목소리, 믿고 있기 때문에 들려, 쓰는 일보다 더 하고 싶었던 건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일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써야 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 그런 걸 소설이라 불렀지.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현실과는 점점 멀어져 어느 순간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사람과 만날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건 그 갈망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열심히 찾았기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말해야만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라거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것 같아. 그게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었으니까.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우리가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라고 말하는 순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이제 네가 내 앞에 있었고 우린 함께 있으니까, 모두가 포기한 질문들 앞에서 목소리는 내게 말했지. 더는 아무것도 찾지 않아서 들려, 더는 믿지 않기에 보여, 모든 감정이 다 지나가고 난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잃어버릴수록 무언가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어디서든 혼자일 수 있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 듣는 방법을 몰랐기에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내게 말해주었지. 오랫동안 서로를 생각한다는 건 연결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RB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은 꼭 나를 위한 것 같다. 읽고 있으면 항상 그와 커피를 마시거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꼭 RB가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그에겐 소설이 있었고 나에겐 무엇이 있나? 나중에 보니 노이도 나와 같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쯤 봤을 때 노이는 패밀리 레스토랑 윙키스에서 RB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를, 극장에서 청소를 하는 나를, 주크박스를 차에 싣는 나를, 묘지 근처를 산책하는 나를, Noodle Express에서 팟타이를 포장하는 나를 봤다고 했다. 그중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노이의 기억 속에는 있었고 그런 게 좋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가 어쩌면 더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전에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 노이를 본 적이 있고 그때는 이름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언젠가 노이와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노이는 RB의 소설이 좋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김정우 - 제(祭)
제(祭) 김정우 한밤에 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이는 여동생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으나 안부는 서로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암 4기로 투병했다는 사실과 날이 밝으면 발인한다는 것.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삼일장 중 이틀이 지났다는 것. 그래도 장남이니 이제라도 내려와 보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녀는 그런 말을 장례식장의 소음 속에서 이어갔다. 나는 주소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에도 전화를 끊었다. 어느 도시로 가야 할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 있을 만한 곳은 남쪽 끄트머리의 신도시였다. 광역시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한 뒤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야 나타나는 그곳은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면서 언덕 지형이었다. 소각장과 원자력발전소와 농공단지가 신도시의 입구에 모여 탄내나 분진 냄새를 게워냈다. 몇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농공단지와 공동묘지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곧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명문 대학교의 분교가 이전해올 것이라는 말은 노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경전철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십수 년째 무성할 뿐. 실상은 버스 배차 간격마저 멀어서 젊은이들은 취업과 동시에 그 고인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십오 년 전에 그곳을 떠나왔고 젊은 사기꾼 소리를 듣다 전과가 몇 개 생겼으며 카지노에서 일하고 도박판에서 구르다가 부동산 투기로 운 좋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그 도시에 돌아간 적 없었다. 그 도시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냄새가 배어 있는 곳.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자주 하늘이 때 타고 콧구멍에 까만 먼지가 끼는 곳. 원자력발전소가 언제 터져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법하며 송전선로가 사방을 꺼멓게 두르고 있어서 투기꾼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 공장을 닫고 파산한 뒤 대리운전 혹은 일용직 노동이나 전전하며 살았을 아버지에게나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간략히 짐을 꾸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도시가 장례를 치르기에 꽤나 편리한 곳이라고 여겼다. 병원과 장례식장은 물론이고 화장장과 공동묘지 심지어 절간까지도 차를 타고 움직이면 십여 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의 슬로건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해도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희망적인 문장이었다. 차라리 ‘죽음이 쉬운 곳.’ 정도가 도시의 입구에 걸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관 뚜껑을 덮듯 트렁크를 닫았다. 날이 밝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네 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그렇게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차 안이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회전 진입로를 통해 올라갔다. ‘환영합니다.’라고 벽에 프린팅된 글자들이 거꾸로 감기고 새벽빛이 주차장 입구로 틈입해왔다. 눈에 빛이 닿으니 시야는 잠시 암전되고 미시감이 들었다. 이 순간 나는 스무 살 같기도 하고 서른다섯 살 같기도 하며 불혹을 넘어선 것 같기도 했다. 앞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 같았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4상세보기 -
소설최형경 - 프롬프트의 딸들
프롬프트의 딸들 최형경 AI 프로그램에 갈색 가죽 가방을 든 이십 대 여자의 반신 사진이 만들어졌다. 민정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카리나의 얼굴형과 장원영의 눈매, 제니의 입술을 닮았다. 단추 두 개를 푼, 하얀색 셔츠 의상도 마음에 들었다.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영상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은 영상 프롬프트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 속 여자가 아래 대본을 읽게 해줘. 저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AI 모델입니다. AI 패션 룩북 만드는 법, 이제 어렵지 않습 작성을 멈췄다. 사진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민정은 여자를 다시 살폈다. 갈색 가죽 가방이 눈에 띄었다. 로고가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숄더백이었다. 민정은 인터넷에 접속해 샤넬 시즌 백을 검색했다. 캐비어 가죽에 금장 샤넬 로고가 가방 덮개에 붙은 천이백만 원짜리 샤넬 백 이미지를 저장했다. 민정은 다시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이미지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이 샤넬 백 이미지를 첨부하고 프롬프트를 썼다. 여자의 가방을 첨부된 이미지와 같은 걸로 바꿔줘. AI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민정은 프로그램 화면과 시간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이의 하원 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 새 게시물을 올리고 장도 봐야 했다. 뿌연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았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다가 오류가 났다는 알림창이 떴다. 민정은 다시 엔터를 눌렀다. 몇 분 뒤 완성된 이미지를 보니 가방 뚜껑의 샤넬 로고가 찌그러져 있었다. 한숨이 났다. 민정은 작업을 그만두고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닫히자 민정이 작업을 하던 부엌 식탁 너머로 생활동화 전집이 보였다. 거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백 권의 책들은 민정이 작년 삼 개월 할부로 팔십오만 원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민정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오늘 분의 쇼츠는 오늘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 민정은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작업 창을 켰다. 민정이 AI 강좌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을 시작한 건 딸 때문이었다. 자라나는 아이 아래로 돈은 쉼 없이 들어갔다. 발달에 필수라는 국민 아이템부터 영유아 방문 수업, 유기농 식재료까지 성장에 좋다는 건 AI 결과물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생활동화 전집도 국민 아이템 중 하나였다. 판매 사이트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빌려, 두 돌에서 네 돌 사이에 생활동화를 읽히면 예의 바른 아이로 큰다고 홍보했다. 전집은 차례차례 줄 서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싸우지 말기 등의 주제로,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주인공들이 착하게 되는 스토리를 담았다. 하지만 민정은 딸을 옆에 앉혀놓고 전집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했다.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는 건 소극적인 태도 아닐까. 양보를 잘하면 착한 사람은 되지만 성공하긴 어렵겠지. 내 것을 지키려면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해. 민정은 생활동화를 읽을 때마다 혀 아래까지 차오른 불순한 마음을 딸 앞에서 삼켜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을 왜 가지게 되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큰 계기가 없었기 때문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4상세보기 -
소설최미래 - 킬링 파트
킬링 파트 최미래 연애는 그리워할 연에 사랑 애.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야. 그리움을 팍팍 집어넣어야 한다. 상대와 눈 맞추는 와중에도 나는 네가 그리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더 자세히. 연애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연애의 주라고 여겨지지만 그게 아니야. 심적인 친밀감, 동경, 흠모. 왜 그리워할 연이겠어. 연애 감정은 거기에서 온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하지만 정말 성적 매력을 뺀 연애가 가능할까? 일반인이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백진주는 진정으로 연애를 즐겼던 자신의 한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망상에 젖었다. 얼굴과 직업 등 개인 신상을 드러내고 출연하는 방송 특성상 연애 프로그램의 진짜 연애는 다른 출연자들이 아닌 시청자랑 하는 거였다. 방송 나온 후에 인플루언서로 전향해서 공동구매하고 유튜버하고. 끼 발산하면서 돈까지 쓸어 담으면 얼마나 좋아.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텐데. 민숙 님, 갑갑하네. 짜증 난다고 티를 그렇게 내면 안 되지.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천진하되 차분하게 찔러넣어야지. 상대 눈 제대로 맞추고. 카메라는 절대 의식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려 센 척하거나 기분 나쁜 티 내면 조지는 거지 뭐. 백진주는 참으로 답답했다. 민숙이라는 닉네임의 참가자 때문이었다. 민숙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남성 참가자들에게 데이트 선택을 받지 못하면 표정과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서슴지 않았다.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카메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애교 섞인 말투와 윙크 등 플러팅도 마구 해댔다. 으 어떡해. 백진주는 그런 민숙의 행동 하나하나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민숙이라도 되는 듯 대리 수치심을 겪었다. 엄마도 연프 나가 봐. 요즘엔 돌싱 특집이 더 인기 많더라. 근데 민숙 저 여자는 진짜 이상하다. 저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치? 소파에 옆으로 누워 뻥튀기를 먹으면서 서준은 민숙의 언행을 평가했다. 남자 출연자의 머리숱과 직업, 여자 출연자의 명품 아이템을 줄줄이 읊고 점수를 매겼다. 앞머리를 내면 더 귀여울 거라는 둥 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백진주는 서준을 멍하니 바라본 후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사춘기가 빨라졌다지만 무슨 초등학생이 이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딸이 낯설었다.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옆으로 작은 링 귀고리가 반짝였다. 방송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된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한 마디 짜증 없이 컨디션이 좋았다. 좋겠지, 그럼. 보름 동안 방문을 잠그고 울기만 해서 쟁취한 건데.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진작에 보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춤을 배우면서 점점 더 되바라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은 나아졌으니까. 백진주는 덮어놓았던 걱정과 불안이 올라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컨디션 조절은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민병훈 - 용4
용4 민병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너머로 은빛 알루미늄 패널들이 보인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공사 중이고, 나는 밀리오레 건물 12층에서 그것을 늘 아래로 내려다본다.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만 채워지는 비정형의 패널들을 보며 완성된 모습을 상상한다. 거대한 우주선이 되어 사람들을 싣고 날아가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일을 그만둔 사람은 유니폼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색이 뭐야, 갈치 같잖아. 나는 창밖으로 태양 빛에 반사되는 패널과 거울 속 유니폼을 번갈아 본다. 무전기를 챙겨 탈의실을 나선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용1이 용14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야, 대답 안 해? 같은 층에 배정받은 용13이 대신 다급하게 대답한다. 배터리 교체 중입니다. 용15부터 용1까지, 수신 상태를 체크하고 현재 위치를 보고한다. 무전을 할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 차례에서 나는 발음을 조금 흘린다. 용5니까. 용5가 될 때까지 삼 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경륜 경기를 송출하는 브라운관의 전원을 켠다. 희망나눔 전자카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창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기 위해 항상 우리보다 더 일찍 도착해 줄을 선다. 객장에서도 건축 현장이 보인다. 커다란 크레인이 패널을 지붕에 안착시킬 때 금속성의 타격음이 무전기의 노이즈와 함께 겹쳐 들려온다. 용1이 개장, 이라고 소리친다. 또 왔어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용9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한다. 가면 난리 친다. 멀리 있어. 폐장 직전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는 의자를 던지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보안요원이 그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쫓아낼 때까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은 손수건을 건네며 내게 참을성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잘 참아야 돼. 침을 닦자 손수건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약 있는지 확인해. 생수통에 소주를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약이라고 부른다. 식당가에서 밥을 먹다가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몰래 컵에 따라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은갈치 같은 새끼들. 우리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하곤 그날은 객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9를 불러 그가 앉은자리를 확인하라고 말한다. 노란 걸 마시던데요. 건물 앞에서 아침에 무료로 나눠준 음료일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본부에서 직접 기획한 행사였다. 계속 주시하라고 말한 뒤 객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OMR 구매표와 컴퓨터 사인펜을 손에 쥔 사람들이 고개를 젖혀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배당판이 움직인다. 단승과 연승, 복승과 쌍승의 배당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화면에 표시된다. 이번 경기는 쌍승식 역배당에 배당률이 높게 형성된 것 같다. 이제 곧 바닥에는 베팅에 실패한 경주권이 쌓일 것이다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차현지 - 그만두기 연습
그만두기 연습 차현지 올리브는 무언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마다 적외선 치료기의 빨간 불빛을 떠올리곤 했다. 훈련이 끝나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대기실 벽 한쪽에 나란히 걸려 있던 길쭉한 원통형 기계의 전원을 켰다.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수화기를 들 듯 치료기를 한쪽 귀에 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염증으로 늘 귓구멍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뜨겁고 날카로우며 압력이 가득 차는 듯한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언젠가 잠수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손가락으로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씩 짚을 수 있을 만큼 수영장 바닥 가까이 내려가 잠영하던 중,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수경 너머로 연한 선홍빛 액체가 서서히 퍼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브의 오른쪽 귀에서 난 출혈이었다. 몸을 밀어 올려 수면 위로 향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올리브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지금처럼 수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즈음 올리브는 사춘기에 막 접어들었다. 하루에 많게는 반나절 가까이 물속에서 체력을 다 소진한 탓에 베개에 늘 침 자국을 잔뜩 내며 꿀잠에 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잠에 드는 것이 어려웠다. 누우면 자꾸 잡생각이 났다. 하계 수련회에 갈 때 버스는 누구랑 같이 타지. 정혜는 짝을 구했나. 왜 나는 단짝 친구 하나 없는 거지. 이게 다 수영 때문이야. 아, 수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금세 자정이 가까워졌다. 훈련하느라 올리브는 늘 혼자였다. 친구들이 모닝글로리에 가서 샤프펜슬을 살 때도, 삼삼오오 모여서 만화를 그릴 때에도 올리브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심지어 같이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이 샤워실에서 그녀를 못 본 척 짝지어 수영복 물기를 짜고 있을 때도. 넌 선수반 갔잖아, 이제 우리랑은 못 놀지. 그 애들이 샤워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올리브는 연신 샴푸질을 했다. 거품이 많아져 눈꺼풀에까지 흘려내려도 쓱쓱 닦아내면서.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 수영복의 물기를 짰다. 너무 많이 짜서 손아귀가 얼얼할 만큼. 됐어, 혼자여도 괜찮아, 까짓거.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하면서. 올리브는 물속에 있는 것보다 물 바깥의 생활이 더 갑갑했다. 레인 안에서 일렬로 쭉쭉 직진, 턴, 직진, 턴만 하면 되는 반복적인 훈련이 그리웠다. 오로지 숫자와 기록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사회적 교감 따위 없는 속 편한 물속이. 너무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면 올리브는 심야 라디오에 편지를 썼다. 직접 손 글씨를 쓰며 사연 받을 주소를 불러주던 디제이가 더듬더듬 영…등…포구…… 여의…도…동……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을 때면 올리브도 똑같이 편지지 봉투에 주소를 또박또박 적곤 했다. 사연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중학생은 너무 어리단 건가. 그래서 다음엔 대학생인 척 보내보았다. 봄이 되면 새내기 대학생들 사연을 자주 읽어주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성별과 직업을 바꿔가며 계속 사연을 보냈다. 우푯값이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공현진 - 보희
보희 공현진 * 아이돌을 넘어 훗날 국제 영화제를 휩쓸며 글로벌 스타가 될 연습생 보희는 세 달 넘게 생리를 하지 않았다. 네 달이었나? 가물가물한 만큼 보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체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다. 두 달을 넘기기는 예사였고 반년 가까이 생리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다. 보희를 불안하게 하는 건 피 따위가 아니었다. 일주일 단위로 레벨 테스트가 치러졌고, 월말마다 방출과 잔류가 결정됐다. 노래와 춤 연습을 치열하게 하는 건 당연했다. 땀은 흘리되 먹지는 않아야 했다. 탄수화물이 극도로 제한된 식단을 유지했다. 습관이 되어 어렵진 않았지만 간혹 컵라면이나 순댓국 같은 게 불쑥 머릿속을 떠다니면 명상에 들어갔다. 소용없으면 밖으로 나가 달렸다. 가로수와 반짝이는 건물들과 주인을 앞지르는 개들을 지나며 달렸다. 토할 때까지 달렸다. 먹은 게 없어도 몸 안에서 쏟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몸 안에 들인 적 없는 것 같은 토사물을 확인하며 보희는 안도와 두려움을 느꼈다. 반신욕을 하며 두려움도 몸 밖으로 쫓아내고자 애썼다. 피곤도 근심도 없어 보이는 맑은 피부를 위해. 살면서 노력이 배신당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속상하고 억울해도 별수 없다. 세상은 노력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다행히 보희는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특별한 쪽에 속했다. 타고난 능력도 있었다. 아름다운 몸, 보희는 자신의 몸이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혹 몸을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 운운하는 이들도. 보희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잠시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엾게 여기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보희 역시 몸은 껍데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껍데기라 하여 왜 중요하지 않은가. 외면과 내면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보희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곤혹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열여섯 살의 보희는 특출나게 아름다웠다. 저녁이 되어 소속사 근처 샐러드 가게에 가면 가게 사장은 보희가 세계적 스타가 될 거라고 단언했다. 사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이 걸어오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수많은 연예인을 보았지만 보희가 뿜어내는 찬란한 빛은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얼굴에 아무것도 하지 마. 네 나이 때는 네가 얼마나 예쁜 줄 모르겠지만 말이야.” 보희는 소스를 뿌리지 않은 샐러드를 먹으며,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사장의 말에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보희는 모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얼마나 예쁜지. 보희는 꽤 객관적으로 자신의 외모와 매력을 판단했다. 자기 객관화가 상당했기에 자신감과 불안이 함께했다. 소속사에서 가상으로 데뷔 그룹의 조합을 짤 때마다 늘 그 안에 들어갔다. 대개 메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보희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자신을 망치지 않았다. 그런 어리석음으로 결국 이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김아인 - 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
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 김아인 1 산길의 고지를 넘자, 훅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권은 전조등을 상향으로 바꾸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밤 기온이 뚝 떨어지는 늦여름이면 곧잘 있는 일이었다. 권은 턱을 당기고 운전대를 단단히 잡았다. 좁은 2차선 도로에 굴곡마다 급커브를 도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늦은 새벽에 비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익숙히 오가는 길이라 해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권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시 반이었다. 이대로면 집에 들어가는 건 세 시나 되어서일까. 권은 어금니를 맞붙이며 나오는 하품을 흘려보냈다. 왠지 평소보다 몸도 찌뿌둥하고, 눈도 뻑뻑한 기분이었다. 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걸어가든 기어가든, 일단 굴러가곤 있다는 게 중요했다. 회사 차량─주행거리 36만 킬로미터의 다마스 트럭이 말썽을 피우거나, 도로가 끊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권은 눈살을 찌푸렸다. 축축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 깊은 곳에 얽혀있는 배관 속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지나갔다. 권은 그것이 뒤로 남긴 끈끈한 발자국을 되짚어 다시 한번 그 냄새와 습기를 떠올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걸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그 무게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2 권의 별명은 권이었다. 권. 태극권. 영춘권. 북두의 권. 사실 그가 다니는 곳은 주먹질과는 거리가 먼 유도 도장이었지만, 또래 아이들에겐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권이었고, 전혀 다른 곳에 가도 권이었고, 유도가 뭔지 알 만큼 아는 이들 사이에 속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권이었다. 권이 유도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열여섯은 선수를 목표로 하고 운동을 시작하기에 이른 나이는 아니지만, 그에겐 소질이 있었다. 우선 신체적 조건이 좋았다. 체격이 크고, 힘과 유연성이 좋았다. 처음 찾아간 도장의 관장이 한 말에 따르자면 균형감각이 굳세고 순발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진짜 소질은 따로 있었다. 권은 상대 선수의 사전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거나 여러 파훼법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아도, 본능에 따라 승리를 위한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관장은 그걸 두고 재능의 영역에 있는 감각이라고 말했다. 머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이 그런 본능적인 감각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거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너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굼떠져. 알겠어? 그 순간의 판단을 믿고 바로바로 움직이라고. 너는 그게 맞아.” 권은 그 말을 따랐다. 그는 반년 만에 청소년부를 떠나 성인부에 들어가게 됐고, 일 년이 좀 더 지나선 체급과 나이를 통틀어 지역 내에 붙을 만한 상대가 없게 되었다. 다른 학교나 시설,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할 때도 주목받을 만큼 두각을 드러냈다. 관장은 권을 자랑스러워했고, 권도 자부심을 느꼈다. 추천으로 체육대학에 입학한 후, 권은 더 많은 시간을 유도에 쏟아부었다. 자잘한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김소라 - 모래 유원지
모래 유원지 김소라 할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매일 오후의 풍경이 그렇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발소리가 신호가 되었다. 저벅이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할아버지는 낚시 조끼 주머니에서 투명한 아스피린 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동그란 알약 두 개를 손바닥에 덜어내 입안에 톡 털어 넣고는 물도 없이 삼켜버렸다. 아주 보란 듯. 때때로 입이 말라 단번에 삼키지 못하면 얇은 입술에 힘을 주고 한참을 우물거려 침을 모았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닿았다. 그다음엔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닮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귀담아들을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한 것. 그러니까 대부분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 나는 모르는 사람들. 영영 소식이 끊긴 아들이라든가 단골손님이라든가. 또는 이 동네에 관한 것, 그리고 저 동네에 관한 것. 전파사 문 앞에 놓인 접이식 철제 의자가 할아버지의 자리였다. 앙상한 다리를 꼬고 구부정하게 앉아 주절주절, 내가 탈 마을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중얼거렸다. 말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내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이 대화가 아주 일방적이라는 것을 본인도 아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나는 늘 내버려두었다. 할아버지는 ‘결국’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 사실까지는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 줄 알아? 그러다가 결국엔 말이야. 결국 이렇게 된다구. 그 말버릇 때문에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다 아는 듯도 했고, 모르는 듯도 했다. 기대하는 듯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가 입을 뗄 때마다 나는 마지막을 기다리게 된다. 결국 어떻게 될까. 그 질문을 길잡이 삼아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를 기꺼이 따라가곤 했다. 천변을 따라 마을버스가 느리게 다가왔다. 이 버려진 동네는 물이 바짝 말라버린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알파벳 U자를 길게 늘여 놓은 모양으로 생겼다. 나와 할아버지는 가장 끝, 휘어진 부분의 막다른 곳에 살았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올망졸망한 단층 건물들을 굽어보는 유일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3층엔 내가 세 들어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에게 딱 알맞은,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이었다. 2층엔 건물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살았고, 1층엔 오래전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전파사가 문을 닫은 채 남아 있었다. 이 깊숙한 곳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승객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푸쉬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리고 내가 올라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오게 되어 있거든, 결국. 버스 유리창 너머로 할아버지가 뻐끔거렸다. 여전히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U자 모양의 천변길을 벗어나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지하철역이 나왔다. 단 두 정거장을 지나왔을 뿐인데 그 사이 풍경은 TV 채널을 돌린 것처럼 완벽히 바뀌었다. 고르게 망해버린 천변과 달리 지하철역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럴싸한 카페와 서점, 은행, 최신 휴대폰을 파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이서아 - 콧노래를 불러 줘
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작성일 2026-04-01 댓글수 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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