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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오웅진 -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작성일 2026-08-01 댓글수 2상세보기 -
비평박상현 -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작성일 2026-08-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이은지 -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작성일 2026-08-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오경진 - 사라짐을 위한 유희
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배민정 - 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배민정 한때 유행했던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말은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발생한 ‘불운한 사건들’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키워드였다. 마음에 드는 이성은 꼭 짝이 있고, 오랜만에 찾은 목욕탕은 정기 휴일이라는 식의 노랫말1)처럼 불운은 개인의 일상 속 ‘재수 없는 우연’에서부터,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회적 재난, 전염병, 범죄까지 아우른다. 이런 예기치 못한 불운을 맞닥뜨렸을 때, 개인이나 집단은 늘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왔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원인을 규정함으로써 고통을 위로받고, 같은 불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사건들을 문제화하고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특정 장치들을 동원한다. 가령 불운의 원인으로 초자연적 힘을 내세워 단숨에 공동체의 균열을 봉합하는 것이 ‘주술’이라면, ‘신정론(神正論)’은 사건의 원인을 사회 구조와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해 집단의 성찰과 개혁을 도모한다. 한편, ‘보험’은 사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피해 손익 측정과 보상 계약을 통해 신속한 사후 처리를 꾀한다.2) 이처럼 정치는 예상치 못한 불운을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통치 기술을 활용한다. 서로 다른 해법이 경합하는 정치의 장에서 시스템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는 통제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또한 제도적 일상 안으로 안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상실감과 두려움은 어떤 제도적 규범이나 보상금으로도 온전히 메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가 불운한 사건을 공적으로 의미화하여 체제의 정상화를 선언할 때, 문학은 그 수면 아래 방치된 개인의 실존적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정치의 공백과 마주한다. 이 공백 안에서, 크고 작은 불운에 빠진 시적 화자들은 그 불행을 계기 삼아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 구조를 감지하고, 새로운 주체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즉 화자들에게 있어 불운은 역설적으로 체제에 길들여진 존재들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주체화의 과정인 셈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불운의 대처법을 통해 제도화될 수 없는 고통이 시적 언어로 복원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 한 남자가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들어선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남들보다 적은 이발비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왜 자신만 만 원을 받느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숱이 없어서 금방 한다고.”(민구, 「거울 속의 신」,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아침달, 2021) 개인의 의지나 노력 바깥에서 마주하는 원치 않는 상황을 ‘불운’이라 한다면, 이 시의 화자는 불운한 사람이 맞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호감 가는 외모 조건 중에 적은 머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이은지 -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이은지 1. 인간됨의 성찰에서 자동화된 소외로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인간됨을 기술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조정하며 견인해왔다. 타자기 이전에, 손글씨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도구이자 기술이었던 언어의 발생에서부터 그러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가 1772년 발표한 논문 는 당대 철학계의 주류 담론이었던 언어의 신적 기원론과 동물적 기원론을 모두 부정하며 신과도 동물과도 무관한 인간 고유의 성질로부터 언어가 유래했음을 증명한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고정된 본능을 발현하며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각인된 본능의 맹목적인 발현으로 벌집을 짓는 벌이나 거미줄을 치는 거미와 달리 인간은 “동물의 기술적인 능력에 뒤처져” 있기에 오히려 “자신을 비추어 볼 영역을 찾을 수 있고, 자신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1) 종의 본능에 따른 반응이 아닌, 각각의 고유한 개체가 세계에 대해 갖는 느낌을 표현하고 또 표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언어를 탄생시킨다. 자기 외부의 대상을 식별하고, 사물과 사물을 구분 짓고, 이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여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자아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러한 자아로 이루어진 타자와의 집단적, 사회적 교류를 형성하며 그로부터 습득한 것들을 세대를 이어 전수함으로써 인간은 더욱 인간이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발현되는 이러한 인간됨의 사슬은 동물적 본능과 달리 고정되지 않는다. “구분을 많이 짓고 그것들을 서로 정돈할수록 그의 언어는 더 정돈”2)되며, “언어의 지속적인 형성” 속에서 “삶의 모든 상태는 성찰을 통해 발전적인 통일체가 된다.”3) 즉 인간에 의해 발명된 언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을 거듭 새롭게 발전시키며 인간의 일부이자 핵심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수록 인간의 인간됨이 발전하는 한편, 언어 또한 고도화된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련”4)된다고 했을 때 이는 언제나 기술 자신에도 해당한다. 기술은 자신이 투여된 대상 혹은 영역에서의 생성과 더불어 기술 자신에서의 생성 또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무한히 순환하며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기술과 그 기술을 적용시키는 인간 사이에는 하나의 복잡한 피드백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의식은 변화된 기술을 요청하고, 변화된 기술은 그 의식을 변화시킨다.&r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서희원 - 고독의 정치경제학
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서희원 1. 메피스토펠레스는 많은 것을 말했다. 2025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장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등장하는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는 홍차 티백 꼬리표에 달린 하나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평생 괴테를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티백 문장의 진위와 출처를 찾던 도이치에게 젊은 연구자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1) 스즈키에게 이러한 감탄을 이끌어낸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흥미롭게도 『파우스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담기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오래 간직해도 좋을 의미 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인이라면 『파우스트』의 서사를 역노화와 건강,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삶의 열망을 잃은 학자 파우스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절망, 즉 내면을 가득 채운 지적 충만, 육체와 재산의 결핍을 통해 계산하면 대략 오십 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늙었고,/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젊도다.”2) 이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마녀의 부엌으로 그곳에서 파우스트의 육신을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젊음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역겨운 액체와 신뢰하지 못할 마술이 탐탁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한 좀 더 좋은 방법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다른 책에서 읽은 자연요법을 소개한다. 좋아요! 그건 돈도 안 들고, 의사나 마술도 필요 없는 요법이지요. 당장 저 바깥 들판으로 나가셔서, 괭이로 갈고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하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고, 가축과 더불어 가축으로 살면서, 추수할 밭에다 몸소 거름 주는 일을 약탈이라고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최선의 요법이니, 팔십 고령에도 당신을 젊게 유지해 줄 것이요! (1권 115쪽) 메피스토펠레스가 알려주는 자연요법은 대체의학이나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심신의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그런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서사는 두 가지 지식의 충돌이 생성하는 긴장감을 통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철학”, “법학”, “의학”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최선재 -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최선재 1. 두 개의 기이함 처음 이유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등단작인 「빨간 열매」(『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가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췌되었던 때다. 아버지의 화장한 뼛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자 아버지가 나무의 몸으로 부활하고, 이웃 남자의 어머니-나무와 아버지가 결합하여 “빨갛고 작은 열매”(29쪽)를 낳는 이야기는 당시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럽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은, 나무가 된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물.”이라고 아버지가 말을 걸자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15쪽)기만 할 뿐이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듯한 천연덕스러움은 이유리 소설을 다른 작가의 소설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해설에서 소유정 평론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유리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 있다”1)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유리 소설의 독특한 리얼리즘이기도 하며, 현실과 매우 흡사한 세계에 환상이 삽입되어 독자를 낯선 감각에 빠뜨린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환상’과 ‘기이함’ 중 어느 것으로 부를지 고민했다.2) 비현실적 사건과 대상에 집중한다면 환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환상을 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까지 아울러 기이함이라 부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빨간 열매」를 읽고 당황했던 것은 잠깐 놀라고 마는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려는 기이함은 앞서 말한 기이함과 다시 구분 지어야 한다.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은 독자에게 불편하고 해소될 수 없는 문제로 남지 않는다. 기이함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이 따뜻함과 발랄함을 전하는 주된 이유이며, 독자 역시 기쁨과 편안함, 소설적 상상력이 빚어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독자가 명료하고 만족스러운 감상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잘 유지되고 발전하는 줄 알았던 인물 관계가 갑작스레 재검토되고 파멸의 예감까지 남길 때, 독자는 이유리 소설에서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기이함을 느낀다. 전자가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감상으로서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두 기이함은 작품에서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유리 소설의 균열이자 징후라 할 수 있다. 2. ‘나’와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기이함 사실 이유리 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특징은 또 있으니, 거의 모든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이은지 -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1)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이은지 1. 프락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대중에게 다소 신화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은둔과 고립은 창작을 위해 불가피한 존재 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절연하고 뉴햄프셔의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다가 사망한 J. D. 샐린저는 은둔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 “글쓰기와 명상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고립된 상황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명상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대중과 유명세를 철저히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필립 로스 또한 “매해 반 이상을 뉴욕에서 백 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농촌 지역”2)에서 보내며 철저히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3)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23세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한 직후 도시와 문단을 등지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집필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4)고 일갈한다. 가히 고독 예찬이라고 할 만한 그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나날을 거듭하다 보면”5)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고지 앞에 앉게 된다는 진술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소설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기 위한 방법으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6)는 증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자아를 안팎으로 일치시키는 데서 문장을 산출해내는 창작의 원리로 읽힌다. 극단적인 은둔과 고립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창작을 위해 일정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여하는 모습은 여러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루 몇 시간, 하루 몇 장의 꾸준한 집필은 자기 안으로의 철저한 고립을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스스로 변형하는 ‘자기 수행’과 같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lsq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박서양 -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3]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3) 박서양 1부에서는 「빈집」을 중심으로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들어가기 이전, 사적 공간에서 수행되는 ‘버림 노동’과 그 경계의 문제를 살피고, 『자작나무 숲』에서 할머니가 거주하는 쓰레기 집을 통해 쓰레기의 인접성과 배치의 정치성을 검토했다. 2부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손녀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개연성이 무엇을 서사로 승인하고 무엇을 배제하는지를 살피며, 그 과정에서 탈락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레기와 인접하게 되는지를 분석했다. 이제 연작의 마지막이 될 3부에서는 이러한 배제와 잔여를 가능하게 해 온 서사의 구조를 검토하며, 수직적 깊이에 기반한 개연성의 조직이 어떻게 흔들리고 수평적 배열로 전환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1. 개연성과 중심: 서사의 수직적 구조 주지하듯 개연성은 사건들이 인과적 필연성에 따라 조직되며 서사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원리다. 그러나 이 인과는 서사를 하나의 구심점에 수렴시키기 위해, 핵심을 향해 응집되지 못하는 요소들을 배제하고 제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과관계에 맞지 않는 사건은 이야기에서 제거되고,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 신체의 미세한 감각, 명확한 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충동들은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버려진다. 다시 말해 개연성은 서사 내부에서 질서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걸러내는 원리로 기능한다. 이때 서사의 개연성을 따르지 않는 것들은 언어화되지 못한 채 잔여로 남아 서사 바깥의 영역을 형성하고, 이는 매끄러운 서사 구조에 균열을 내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실재한다. 하지만 이때 무엇을 개연적인 서사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개연성의 원리는 때로 현실의 권력관계와 결합하여 특정한 인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불균등한 배치를 정당화하거나 재생산한다. 물질적 층위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배제가 일어난다. 더 이상 사용되거나 교환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쓰레기로 간주된다. 요컨대 서사의 구조에서 탈락한 경험과 물질의 층위에서 배제된 쓰레기는 세계를 하나의 중심으로 정리하려는 질서가 필연적으로 남기는 잔여다. 『자작나무 숲』에서 개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서사적 잔여와, 가치의 질서에서 배제된 사물(쓰레기)이 나란히 놓이며 공명하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배제의 구조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인물이 명확하고 일관된 동기를 가져야 하고, 뿌려진 복선은 회수되어야 하며, 결말은 갈등의 원인을 해명해야 한다는 소설 작법은 목적론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무엇이 이야기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쓰레기 집을 만들고 사체를 은닉하는 할머니의 행위나,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열정 속에서 부유하는 여성들의 궤적은 이 기준 앞에서 개연성이 결여된 것으로 처리되며, 괴담이나 소문으로만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이미진 - 끝에서 두 번째 폭력
끝에서 두 번째 폭력 - 최은미의 「김춘영」과 현호정의 「달빛」 이미진 1. 오르페우스는 뱀에 물려 죽은 아내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 타르타로스로 내려갔다. 그의 슬픈 음악을 들은 하데스는 잔인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에우리디케가 햇빛에 안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소리를 따라 캄캄한 통로를 올라갔고, 오르페우스는 자기가 햇빛에 안착한 그 순간 비로소 그녀가 아직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영원히 잃었다.1) 팔레스타인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온 일본의 비평가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에서 탈 자아타르 포위와 학살 사건을 다룬 리아나 바드르의 소설 『거울의 눈(1991)』이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베이루트 교외에 있는 탈 자아타르 난민 캠프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온 사람들이 30년간 난민 생활을 하고 있던 곳으로,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레바논의 기독교도 우파 민병대에 의해 몇 개월간 지속적으로 파괴되었다. 『거울의 눈』은 이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작가가 7년에 걸쳐 인터뷰한 증언들을 토대로 집필된 소설이다. 오카 마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소설 중반부 돌연 등장했다 사라지는 ‘나’라는 인물이다. 그가 캠프 밖에서 안으로 잠입했다는 설정은 그간 비인칭의 시점을 따라 캠프 안의 상황에 몰입했던 독자에게 갑작스러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 거리감은 캠프 안의 전사 중 한 사람인 하산이 캠프 밖의 전사들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된다.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2) 오카 마리는 하산의 말보다는 캠프 밖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안의 사람이기도 한 ‘나’라는 인물이 놓인 이중적인 위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거울의 눈』의 작가가 왜 ‘나’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말이다. 『기억/서사』에는 또 다른 소설 발자크의 「아듀」도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귀부인이었으나 전쟁 중 처참한 일을 겪어 기억을 잃어버린 스테파니와 그녀를 사랑한 필립의 이야기다. 재회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스테파니를 보고 절망한 필립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그녀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고자 한다. 하지만 힘겹게 기억을 되찾은 스테파니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3) 2. 나는 쫓겨날 것이다.4) ‘사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건’을 온전히 말할 수 없으므로5)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의 이라는 챕터에서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를 역사가로 호명함으로써, 그에게 ‘상실 이후’의 임무를 부여한다. 오르페우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전철희 - 거짓을, 너에게
거짓을, 너에게 - 당신이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을 느꼈겠지만 차마 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전철희 1. 환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2005년에 출간됐다. 이 책을 처음 볼 당시 나는 애니메이션 (이하 으로 약칭)이 떠올랐다. 그때의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문학인들이 고담준론을 나누는데 초신성의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20년이 지났고 김애란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나는 등단을 했고 평론가의 책무가 비약과 과장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연식을 쌓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0년 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김애란의 작품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거두절미하자면 『달려라, 아비』의 주제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다. 이 책의 표제작 「달려라, 아비」는 편모가정에서 자란 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래전 가출했다.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1)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부양의 책무를 벗어던지겠다는 무책임성 내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딸은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아버지의 허접했던 인생이 폭로되지만 그럼에도 딸은 자신의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맹목적 ‘믿음’은 자기방어 기제의 산물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무능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패배자의 피가 흐름을 긍정한다는 뜻이고, 아버지가 금의환향해서 명예나 재산을 상속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가 이기적인 무뢰한이었다면 버려진 가족들로서는 그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불신과 미움은 본인을 병들게 하는 감정이다. 아버지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거짓된 믿음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라이너스의 담요로 유용하다. 당시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였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소녀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고 묻는다. 농담에 가까운 거짓말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진실을 말하려던 찰나 소녀는 잠이 들고 자신의 탄생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 소녀가 아버지의 답을 회피한 이유는 쉽게 짐작 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은 밋밋하고 초라하다. 남녀가 성관계를 할 때 정자가 난자에 착상과 수정을 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생물학적인 설명은 낭만적이지 않다. “부모님이 사랑해서 자식이 태어났단다”라는 말은 손발이 오글거리고 “너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단다&rdquo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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