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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서수 -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양안다 - 딸깍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노대원 -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곽재식 -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김진선 -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작성일 2026-07-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최예솔 - 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 정영수 「지평선에 닿기」(2016년 7월호 수록) 최예솔 최근 나는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작년 7월에 처음으로 한 문단 정도를 써두었고 그 후로는 내내 생각만 하다가 올해 3월과 4월을 거치며 20매, 50매, 90매로 늘어났다. 매번 소설을 쓰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소설은 결코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흘러가지 않는다? 써지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획대로는 되지 않는다.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했느냐면 도대체 소설적인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건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라는 어느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처럼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소설이…… 소설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또 괜찮은 일일까? 지금까지의 나는 보통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소설을 생각했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본 일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야 읽는 사람으로 작동하는 나는 ‘즐겜러’처럼 그냥 ‘즐감러’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내가 모든 게임을 마냥 즐겁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모든 소설을 마냥 즐겁게 읽지는 않는다.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 불편하기 때문에 좋고 어떤 소설은 하염없이 생각나기 때문에 좋고 어떤 소설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좋다. 사실 소설은 ‘즐겁다’기보다는…… ‘이상하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나라는 독자가 소설에 바라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는 삶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하고 또 합리적인 삶. 매사에 지루한 동시에 절절매는 삶. 나는 그런 것을 인간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삶은 그다지 소설적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삶은 매일같이 씻고 먹고 자고 입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잠들기 싫어하며 잠들고 일어나기 싫어하며 일어나고. 출근을 앞둔 휴일에는 미리 울적해졌다가 일하기 싫어하며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 잠깐 웃기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슬프기도 하다. 그것의 반복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반복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소설은…… 거창하지 않은 소설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엔 일상으로 끌어내려지는 소설. 이건 나라는 독자에 한정되어있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왜냐하면 내가 그다지 거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에 오래 골몰하는 사람은 아니다. 저게 뭐야. 그런 생각으로 잠시 멈추기는 하지만 금방 잊고 다른 일을 한다. 내게는 멈추는 마음과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적당히 섞여 있고 가끔은 더 오래 멈추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으니까 어
작성일 2026-06-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임가영 - 게임과 작가
[편집위원 기획-Game & Writer] 게임과 작가1) 임가영 예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림이 좋다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다는 이유로 예술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현대미술’이 좋았다. 더 정확하게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경계 설정에 관여하는 시도들이 좋았다. 더불어 ‘작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다. 위대한 창작자의 숙련된 솜씨와 천재적 재능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을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관객이나 독자들에게 창작의 공을 돌리는 시도들이 공감이 갔다. 말하자면 나는 ‘저자의 죽음’을 목격하기 위해 현대미술을 택했다. 예술을 하기 전 나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었고, 처참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관심이 갔던 과목이 ‘정치철학’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때까지 나는 그림을 그려(웹툰 어시스턴트와 게임 캐릭터 원화가) 돈을 벌고 있었는데, 한 번도 나 자신을 창작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내 그림에서 예술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미대를 들어갔고,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들에 대한 작업을 하기 위해 애썼다. 미술 갤러리 안에서 카레를 끓여 나눠 먹거나 지역의 경찰과 청소년이 다 같이 둘러앉아 청소년 범죄율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작품들을 리서치하고, 이러한 참여형 미술을 둘러싼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그랜트 케스터(Grant Kester)의 담론적 논쟁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어렴풋이, 나는 그게 내가 원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고 역량이 되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인 듯했다. 저자의 죽음이라는 말을 믿고 예술을 시작했는데, 저자는 좀처럼 죽지 않았던 것 같다. 한 교수는 술자리에서 내게 “너는 아직 작가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작가는 ‘자기 일을 책임지고 해낼 수 있는 사람, 혹은 그에 준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중심점’처럼 느껴졌다.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준 다음 그 과정을 포트폴리오에 잘 기록해서 다음 전시 기회를 얻어낼 수 있는. 다른 교수는 작가가 에고가 강하고 별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작가가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대미술은 일종의 폰지 스킴(Ponzi scheme)처럼 나를 가짜 약속으로 끌어들였던 걸까? 아니면 나는,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을(아무리 이런저런 반작가적 실천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나 담론이 존재한다 해도 결국 제도는 안정적인 창작자–수용자 모델 속에서 지속되며, 이것은 사실 ‘저자의 죽음’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 같은 걸)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박서련 - 모르면 죽어
[편집위원 기획 – Game & Writer] 모르면 죽어 박서련 근황 얘기에 영 소질이 없다. 웃길 의도가 없었는데 상대를 박장대소하게 하거나 전혀 어두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소재로 분위기를 망치거나. 요즘은 게임도 그렇게 재미 있지가 않아요. 최근에는 이 말을 좀 자주 했다. 별생각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한 거지만 듣는 분마다 놀라셔서 내가 더 놀랐다. 헉 진짜요? 서련 씨가요? 작가님이요? 그게 그렇게 의외이실까, 약간은 머쓱해하다가 내가 한 말이 왠지 ‘요새 밥도 맛이 없어요’처럼, 그러니까 중증 우울증 환자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음을 조금 의식하곤 했다. 그럼 이제 여가 시간에 뭘 하세요? 요즘엔 뭐가 재미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게임을… 합니다. 안 하는 게 아니고요 재미있지는 않아도 그냥… 해요. 전보다 게임 하는 시간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습하듯 덧붙이곤 최근에 삭제한 어떤 게임을 떠올린다. 영주가 되어 한 도시국가를 경영하고 연맹의 일원으로서 왕국 간의 전쟁에 참전하는 콘셉트의 모바일 게임이었는데, 삭제하기 직전 확인한 플레이 타임은 대략 700시간 정도였다. 작년 이맘때였나, 한국인 유저가 별로 없을 때 시작해서 다국적 연맹에 가입했고 이따금 인도네시아에 사는 여성 연맹원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이런 게임에서 아시안 여성 게이머를 알게 되어서 좋아요. 나도 그래요. 연맹원들에게 내가 한국인 여성인 것을 밝히고 받은 메시지는 대체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나요?’ 같은 것이었고, 그 사람과 내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대화도 내가 잘 모르는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역시 크게 관심 없는 멤버가 탈퇴했다는 소식에 대한 거였다. 상대방이 아주 슬퍼했기에 나는 그 주제에 그리 관심이 없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 며칠 후에 별다른 개연 없이 그 사람이 다른 왕국(이 게임에서 ‘왕국’은 서버를 의미한다)으로 이주했다. 뒤따라 이주할 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없으니 더는 이 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들었다. 내가 떠난 후에 나의 성은 연맹 내 등급이 차츰 떨어진 후에 연맹에서 자동 탈퇴될 거다. 그러면 연맹 사냥터 인근 개꿀 자리에 위치한 내 성이, 연맹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물처럼 여겨질 거다. 그럼 연맹원들이 내 성을 공격하겠지. 성이 충분히 데미지를 입으면 왕국 내 랜덤 위치에 자동 이동하게 되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한 일주일 걸리려나? 길면 2주? 이 게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기 직전 나는 전투력 1억을 막 넘긴 상태였다. 축하해, piupiu. 아이디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연맹원이 연맹 채팅 채널에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내 성의 전투력이 그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내 성을 공격할 때 연맹원들은 애를 좀 먹으려나? 아니겠지, 우리 연맹에는 일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김승일 - 게임에 대한 글
[편집위원 기획 – Game & Writer] 게임에 대한 글 김승일 1. 내 친구랑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담배를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담배를 끊자고, 운동도 열심히 해보자고 각오를 다진다.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뇌신경에 게임을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기계가 나올 거다. 그 기계로 VR MMORPG를 해야 한다. 적어도 그게 나올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아직 해보지 않은 게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작품도 아직 내가 읽지 않은 작품이다. 그래서 시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직접 아직 없는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게임을 만드는 모임도 만들었다. 셋이서 10년 동안 게임을 구상하기로 했다. 10년 후에 무조건 게임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10년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미루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원래 ‘베이퍼웨어 프로젝트’였다. 근데 혹시 언젠가는 진짜로 게임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모임 이름을 ‘언메이드’로 정했다. 우리는 일단 우리가 만들 게임에 대한 글을 써서 책을 내기로 했다. 2.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도 좋다. 게임에 대한 글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에 대한 글은 게임을 죽이는 글이다. 게임을 죽여서 세상에 없는 게임으로 만드는 글이다. 나는 게임 방송을 딱히 즐겨 보지 않는다. 게임 방송은 게임을 죽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시청자가 게임을 직접 하는 대신 게임 방송을 본다. 그것도 게임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게임에 대한 글이라고 별다른 것도 없다. 내가 아직 해보지 않은 게임의 공략, 비평, 에세이를 읽으면 언제나 그 게임을 직접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글이 흥미로우면 흥미로울수록, 이상하게 게임을 실제로 구매하지는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게임의 근본적 재미는 직접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게임 방송의 시청자가 게임을 구매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클리어하는 데 100시간 걸리는 게임의 방송을 100시간 동안 시청한 시청자가 다시 100시간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게임을 구매할 확률은 확실히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 방송이 게임을 죽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방송이야말로 게임을 가장 생생하게 잘 전달하는 매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플레이하면 다양한 변수들이 생길 수 있지만. 어쨌든 게임 방송을 본 다음 게임을 하면 방송에서 본 것들을 똑같이 만날 수 있다. 오히려 게임에 대한 글이 문제다. 게임에 대한 글은 게임을 결코 생생하게 전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게임 에세이는 이미 서비스가 종료된 온라인 게임에 대한 글이다. 내가 오늘 원래 쓰고자 했던 글도 라는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 얘기였다. 시인은 추억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한다. 추억을 풀어놓으면 추억은 실제보다 단순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이태형 - 주사위 신의 가호가 당신에게 있기를
[편집위원 기획 – Game & Writer] 주사위 신의 가호가 당신에게 있기를 이태형 1. 게임 준비(Rule Book) 시내에 하나밖에 없는 완구점의 창고에 불이 났습니다. 전소된 창고에 다녀왔다는 아이들은 온전한 장난감을 몇 개씩이나 집어 왔다고 합니다. 당신도 친구와 함께 화재 현장을 향해 달려갑니다. 잔해 위로 중년의 여성이 울면서 욕설과 함께 타다만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집니다. 쥐 떼 같은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눈에 불을 켜고 온전한 물건을 찾습니다. 당신과 함께 온 친구는 망설임 없이 쥐 떼 무리에 합류합니다. 당신은 친구의 눈에서 평소와 다른 광기를 느낍니다. 광기가 당신에게 친구처럼 무리에 합류하라 명하며 그로 인해 당신이 얻을 혼돈의 기쁨에 대해 속삭입니다. 당신이 그 무리에 합류하기로 했다면 민첩(2)을 테스트합니다. 합류하지 않기로 했다면 의지(1)를 테스트합니다. ➜ 합류하기로 하고 민첩 테스트에 성공했다면 당신은 곰 인형 1개와 무작위 일반 물품 1개를 얻습니다. 당신에게 무법자 또는 생존자 특성이 있다면 추가로 지식(1)을 테스트합니다. 성공했다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핑계를 떠올립니다. 실패했다면 당신은 잠시 죄책감을 느낍니다. 정신력 1을 잃습니다. 무법자 또는 생존자 특성이 없다면 정신력 2를 잃습니다. 민첩 테스트에 실패했다면 당신은 여성이 던진 물건에 맞아 잔해에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오른손으로 잔불을 짚어 손에 화상을 입습니다. 체력 1을 잃고 화상 카드를 얻습니다. 힘(2)을 테스트할 수 있습니다. 테스트하기로 해서 성공했다면 무작위 일반 물품 1개를 얻습니다. 이 정도 화상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패했다면 손 골절 카드를 추가로 얻습니다. 무모하게 일어나려다 미끄러져 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손 골절이 있는 동안 당신은 한 손 보조도구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테스트하지 않기로 했다면 화상 카드를 뒤집고 즉시 지시를 따릅니다. 물품 획득 여부와 상관없이 시나리오 시트에 ‘불탄 창고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기록합니다. ➜ 합류하지 않기로 하고 정신력 테스트에 성공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친구는 당신과 그 자리에 함께 갔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신력 테스트에 실패했다면 광기가 여전히 당신도 합류하라고 귀에 계속 속삭입니다. 정신력의 최대치 1이 줄어듭니다. 당신은 가만히 서서 이 장면을 눈에 담습니다. 이 풍경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시나리오 시트에 ‘불탄 창고를 약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합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1890~1937)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인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를 기반으로 하는 보드게임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장소 조우’로 재구성한 글이다. 결과로만 본다면 물품을 2개나 훔치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불이익을 피하는 첫 번째 선택이 가장 좋은 판단 같아 보인다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3상세보기 -
기획최예솔 - 우아한 세계에서 현관 닫기
[문장웹진 다시 읽기] 우아한 세계에서 현관 닫기 ― 황인찬「현관을 지나지 않고」(2015년 10월호 수록) 최예솔 5월의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지독한 집순이라는 점이다. 내가 집을 사랑함에 있어서 계절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온이 오르고 꽃이 피고 온갖 가정의 달 행사로 거리가 북적거려도 나는 집에 있는 것이 좋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추우나 더우나 집이 좋다. 집은 언제나 집이고 나는 그 안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낀다. 바깥이 유독 불안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집에 있을 때, 거실 소파에 누워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깥의 내가 가짜라는 건 아니지만. 바깥의 나는 목이 늘어난 잠옷을 입거나 푹신푹신한 쿠션을 머리와 다리 아래에 각각 두 개씩 끼고 있거나 앞면이 어디든 관계없이 대충 이불을 휘둘러 덮고 있을 수 없다. 몇 시간 동안 누워서 소설만 생각(쓰지 않고!)할 수도 없고 내 베란다의 식물들을 가만 바라보거나 시든 잎을 잘라주면서 혼잣말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내게 불편한 일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집 밖의 나는 보통 불편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게 사실이라는 점이…… 가장 불편한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집(보다는 나의 집을 향한 사랑)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은 내가 이번에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시 역시 집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읽는 동안 가만히 집을 떠올리는 것이 좋았고 그게 내 집도 아닌 남의 집임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누구의 집인지도 모른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시가 그렇게 마냥 편안하고 좋고 재미있는 시였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현관을 지나면, 이 현관을 지나면, 불 꺼진 거실이 보이고, 낡은 소파가 보이고, 그 소파에 누우면 서늘한 기분이 들겠지 식탁이 보이고, 식탁보가 보이고, 빈 의자가 보이고, 의자의 네 발에 씌워 둔 테니스공이 보이고, 꽃무늬 벽이 보이고, 벽에 붙은 두 연인의 오래된 사진이 보이고, 낮은 탁자와 그 위에 놓인 빈 쟁반이 보이고, 낡은 유리장이 보이고, 유리장 안으로 그릇이나 항아리 따위가 보이고, 항아리의 흐린 무늬가 보이고, 유리장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많은 문들이 보이고, 불은 꺼져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너는 언제까지나 물을 틀어 두고, 그밖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현관을 지나면, 이 현관을 지나면, 물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마주하는 일이 자꾸 계속되겠지 현관을 지나면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이 집을 나가지 말자 ―「현관을 지나지 않고」 전문 「현관을 지나지 않고」에서 현관을 지나면 보이는(혹은 보이리라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화자의 상상을 따라간다. 화자가 그려보는 집 안의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집 안의 풍경이라고 해도, 혹은 내가 살았던 어느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허희 - 스스로 고른 빛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스스로 고른 빛 허희 1. 주어진, 선택한 이름 본명은 주어진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먼저 도착해 있다. 이름으로 불리고 거기에 반응하며, 어느 순간 명명된 내가 곧 나라고 믿으며 자란다. 그러한 점에서 본명은 숙명과 비슷하다. 삶의 첫머리에 놓인, 직접 쓰지 않은 나의 첫 단어. 반면 필명은 스스로 취한다. 이러한 선택이 자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대 정신, 언어 감각, 타고난 기질 등이 개입하니까. 그럼에도 마지막에 나의 의지는 남는다. 새로운 이름으로 한번 살아 보고 싶다는 미래형의 소망이 필명에 깃든다. 그래서 필명은 완성된 자아의 명패라기보다, 아직 닿지 못한 어떤 상태를 향한 선언에 더 가깝다. 그러기에 왜 필명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략 두 갈래의 답이 떠오른다. 하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나, 글 쓰는 나를 분리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라는 설명. 다른 하나는 본명보다 조금 더 문학적 자아를 추구한다는 낭만적 소명이다. 실제로 나의 경우 필명은 어떤가 하면, 그 두 지점 사이 생활의 편의와 문인-되기의 욕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기에 필명을 둘러싼 사정은 꽤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 이름 하나를 골라 자기 앞에 내세우려면 오랫동안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필명은 자기를 향한 해석의 과정이자,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장의 행로를 설정하는 제일 짧은 서문이라고 할 만하다. 내 필명은 ‘허희’다. 성은 내 본래 성인 양천 허씨의 ‘허’이고, ‘희’는 ‘빛날 희’다. 여기에는 극적인 계시나 비밀 따위는 없다. 다만 이러한 고민은 품었다. 필명으로 불릴 때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글쓰기의 윤리를 두 음절로 새겨야 하나. 따져 보면 필명의 두 음절 안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이어받은 것(계보)과 내가 갖고 싶었던 것(지향)이 나란히 들어 있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전적으로 주어진 것도, 온전히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 존재. 물려받은 것 위에 스스로를 덧쓰고, 선택한 것을 통해 과거를 다시 반추하며 산다. 반은 유산이고 반은 결심인 셈이다. 나는 이름이 한 사람의 캐릭터를 표상하는 한편으로,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고 여겼다. 운명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명은 애초에 그러려고 지은 이름이 아닌가. 사람들은 필명으로 나를 부르고, 나는 그 이름으로 원고를 보내고 서명한다. 호명이 누적될수록 필명은 실체화되고 힘을 갖는다. 필명이 가면과 다른 이유도 거기 있다. 가면은 상황에 따라 벗을 수 있지만, 오래 사용한 이름은 어느새 나와 일체화된다. 그러니까 필명은 나에게 자기를 감추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자기를 재발명하는 방법이었다. 필명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사적으로 고른 이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 어떤 날은 쓸 문장을 한
작성일 2026-04-01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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