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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푸른사상 | 2024년 가을호(제50호)

어둠의 틈새에서 ― 지금의 시들이 하려고 하는 일

김지윤 문학평론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과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2년 시와시학상을 수상했고, 쓴 책이 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와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피로의 필요』를 출간했고, 학술·비평서 (공저) 『한국 현대문학의 쟁점과 전망』, 『요즘비평들』외 다수의 저작이 있다.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겨울은 끝과 시작이 동시에 있는 계절이다. 한 해가 끝나고, 다음 해가 시작되는 사이에 놓여 있는, 눈 덮인 풍경 같은 여백의 계절이다, 그래서 상실과 희망이 공존하며, 되돌아보고 변화를 꿈꾸게 되는 때 이기도 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2024년의 시들을 돌아보면, 삶의 신산함과 세상의 황폐함을 노래하는 시가 많아졌음을 느낀다. 물론 시는 늘 인간사의 그늘과 세상살이의 고됨을 이야기해오기는 했지만 유독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이 두드러지고, 기후위기와 AI, 포스트휴먼 시대의 불안, 종말론적인 시대관 등이 드러난다. 2024 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평의 내용에서도 최근 창작되는 신인들의 작품에서 전세 사기, 택배노동, 청년 문제(경향신문), 모델하우스, 면접 스터디-구직, 쓰레기-잉여(문화일보, 한국일보) 등 매우 구체적인 현실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위기 등 을 생각할 때 지금의 시에 드리우는 그늘은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비록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시들이라고 해도, 이 시들은 희망이 소멸했다고 여기는 좌절과 무기력보다는 다른 세상 으로 진입할 틈새를 찾는 노력에 더 가까워 보인다.


1.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시선


    최근의 시들에서 환경위기에 관한 몇몇 작품들이 주목된다. 나는 2년 전에 쓴 다른 글1)에서 문학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후위기를 알리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도록 환경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들의 ‘악덕’을 고발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저리로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은 우려스럽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사실 이 ‘임박해 있는 위험’을 초래한 것은 어떤 악덕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이며 모든 사람은 목격자인 동시에 공모자다. 기후위기는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고, 자신이 일조했음을 체감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 위기를 초래하는 데 가담했다는 혐의에서 자신을 제외시키고 싶어 한다. 또한 그렉 개러드의 지적2)처럼 종말론적 수사학은 환경 위기의 주범과 원인이 단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단일하고 임박한 ‘환경 위기’ 



개념 내에 매우 다양한 환경 문제를 결합”3)해버리며 본질적인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곤 한다. 공포스러운 종말론적 이야기는 위기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게 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환경적 실천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오히려 문제를 단순화하여 가볍게 소비되는 것으로 전락시킬 위험도 있다.

    그런데 최근의 환경위기를 다루는 시들은 좀 더 다양한 시각과 사안에 대한 깊고 다층적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최근 발표된 서윤후의 「비산화」(『현대시』 2024

년도 10월호)이다.

    “기후위기에서 구해주세요 팻말에 그려진/북극곰 이마 위로 반짝이 별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서는/중학생의 운동화 코//회전축 하나가 내 안경에 빗금을 긋고 지나갈 때/목이 말라 숨길 수 없을 때/사람들은 약속한 적 없이 하늘에 대해 떠든다”라는 부분을 보자. “기후위기에서 구해주세요”라는 팻말에 북극곰이 등장하고, 중학생이 반짝이 별 스티커를 붙이는 장면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장식적이거나 피상적임을 암시한다. 시인은 기후 문제에 대한 대중의 대응이 진지함보다는 형식적이고 단순한 ‘퍼포먼스’에 그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회전축 하나가 내 안경에 빗금을 긋고 지나갈 때”라는 묘사는 시간의 흐름이나 환경 변화가 우리에게 무심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을 상징한다. “회전축”은 회전하는 어떤 움직임이나 힘을 의미하며, 지구의 자전축, 혹은 지구와 자연의 순환과 같은 거대한 시스템을 상기시킨다. 안경 위에 빗금을 긋는 모습은 이런 거대한 변화가 화자의 일상적 시야를 가로지르며, 기후위기로 인해 느껴지는 불안감이나 불가피한 현실이 스쳐감을 의미한다. 개인의 사소한 순간과 중대한 위기가 교차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 「비산화」의 돋보이는 대목이다. 안경에 빗금을 긋고 지나가는 움직임은 한 사람의 시야를 잠시 가로막는 일에 그치지 않고, “회전축”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통해 이것이 개인을 넘어선 거시적 힘과 연결된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또한 중학생의 “운동화 코” 같은 사소한 디테일과 지구적 위기를 교차시키며 기후위기가 개인적 일상 속에 불쑥 침투하여 그 영향력을 느끼게 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빗금을 긋는 행위는 흔적을 남기거나 무언가를 갈라놓는 동작이므로, 생태적 위기로 인해 생겨난 균열을 의미하는 동시에 화자의 무심한 시야를 깨뜨리고 화자 내면에 변화의 흔적을 남기는 결정적인 순간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약속한 적 없이 하늘에 대해 떠든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공허한 말만 반복하며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 상황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환경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심각성을 실감하지는 못하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적 인식은 자기 자신조차 예외로 두지 않는 엄중한 성찰을 요구한다. “북서태평양에 사는 틀링기족은/빙하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대/그 위에 서서 험담이나 거짓말은 하지 않는대/얼음은 진실에 가깝대//사람은 녹아갈 때마다 넘어지곤 해/맞아, 사실 지어낸 말이야/드라이기로 젖은 머리 말리며 하던 이야기/차가운 농담이 이름에 박혀 시려오면”이라는 부분은 더욱 분명하게 시인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빙하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표현은 흥미로운데 자연, 특히 빙하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생명과 의식을 지닌 존재로 상정되는 생태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틀링기족(Tlingit)은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주로 미국 알래스카 남동부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북서부 연안 지역에 거주한다. 그들이 빙하 위에서 거짓말하거나 험담하지 않는다는 언급은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얼음은 진실에 가깝다”는 구절처럼, 빙하는 기후변화의 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현실은 기후위기의 가시적 결과인데, “사람은 녹아갈 때마다 넘어지곤 해”로 이어지면서 빙하가 녹는 사실과 인간이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 역시 기후위기로 인해 겪는 불안정성 앞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운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세의 위기와 인간문명의 취약성은 빙하가 녹아내리는 과정과 은유적으로 연결된다. 

    “지어낸 말”과 “차가운 농담”이 시적화자의 이를 시리게 하는 것은, 기후변화와 같은 심각한 주제를 회피하거나 거짓으로 왜곡하고, 가벼운 농담으로 치환해버리는 인간들의 행위가 결국 인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기후위기의 현실을 섬세하게 형상화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 허영을 기반으로 하는 ‘그랜드 스탠딩’4)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단순히 환경 문제나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다루는 시, 혹은 왜곡된 형태의 환경적 종말주의에 머무르는 시가 아니며 개인에게서 시작되는 실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올바름’을 왜곡하거나, 가볍게 소비해버릴 수 있는 것으로 변질시켜 오용하는 그랜드 스탠딩에서 비롯된 피상적이고 공허한 대응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현실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게 보여준다. “목이 말라 숨길 수 없”는 갈증에 집중하며 지금의 시는 기후위기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나가고 있다.


2. 상상해야 할 것들은


    오늘날의 상상력은 실리를 얻고 즉각적인 효용을 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지평이 협소해져가고 있다. 이것이 문명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치명적 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상실과 불모의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 잘 드러난 P. D. 제임스의 소설 『사람의 아이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은 2027년 원인 불명으로 전 세계의 인류가 불임 상태가 되고 미래세대가 실종되니 예술적 창조도, 변화도 모두 멈추어버린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그려내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이제 우리가 새롭게 상상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조원의 「신작」(『푸른사상』 가을호, 2024)은 일상적 경험과 파괴적 상상을 교차시키고 있는 시로, 상상력의 한계를 다루면서 그 바깥을 향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을,/내가 어떻게 상상하냐고 //딸기 웨하스를 한입에 쑤셔 넣다가 부서졌다/입을 크게 벌렸는데/불만이 터져 나왔다//부스러기를 다 털어내기엔 시간이 필요하고,/얼마나 상상하면 도착할 수 있니?”라는 부분을 보자. 

    시적화자는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에 도달할 수 없음을 자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의 제약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갈망과 좌절을 안에 품고 있다. 딸기 웨하스처럼 평범하고 사소한 경험조차 “부서지고” “불만이 터져 나오는” 식으로 묘사되며, 현실을 부수고 싶은 파괴적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부스러기는 단순히 웨하스의 물리적 잔해를 넘어, 통제하려 했던 세계나 기대가 예기치 못하게 깨지고 흩어진 파편을 비유하고 있다. 당연히 “부스러기를 다 털어내기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나가 부서진 후에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얼마나 상상하면 도착할 수 있니?”라는 질문은 ‘이후의 세계’에 당도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 상상은 파탄의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며, 현실 너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권으로/문짝이 떨어지고 해바라기 액자마저 깨”진다는 표현에서 “북상하는 태풍”은 안정된 질서를 뒤흔드는 혁명적 에너지의 상징이다. 떨어진 문짝은 기존의 경계를 상징한다.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내부의 안정을 단속하는 존재다. 하지만 태풍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문이 떨어지는 순간, 경계는 붕괴된다. 문이 떨어진 자리에는 먼지가 일어, 경계 너머의 세계와 새롭게 맞닥뜨리게 된다. 태풍이 지나가면 남는 것은 “쓸어내야 하는 것”들, 즉 부서진 것들의 잔해와 흩날리는 먼지다. 먼지는 파괴의 부산물일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가시적 형태다. 깨진 액자는 과거와 기억을 담고 있던 틀이 산산조각 난 상태를 상징한다. 액자가 깨질 때, 그 안에 담긴 이미지도 찢어졌겠지만 먼지와 함께 흩날리는 파편들은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처럼 태풍, 떨어진 문짝, 깨진 액자, 먼지는 모두 기존의 안정된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여는 상징이 된다. 먼지는 재창조를 위한 파괴의 흔적을 가장 미세하게 남기는 증거물이다. 크고 단단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흩어지는 부서짐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혁명적 변화의 은유로 읽힐 수 있다. 기존의 형태가 부서져 분해되고, 그 잔해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새로운 공간과 접촉할 때 먼지는 쌓인다. 

    “강풍이 더 많은 먼지를 몰고 오니까/깨진 물체와 부유하는 티끌뿐이라서” 시적 화자는 청소기나 “문틈을 모두 막는” 시도로 대응하지만, 결국 “발바닥이 바닥을 잃었다”면서 낡은 세계가 이제 효용을 다하였음을, 더 이상 발 딛고 나아갈 곳이 없음을 선언한다. 이어 시적화자가 “상상 밖의 집”을 상상하는 과정은 역설적이다. 화자는 그저 ‘집’이 아닌 초현실적이고 불가능한 공간을 꿈꾸는데, 그 속에 현실과 연결된 기묘한 디테일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거꾸로 매달린 박쥐를 쓰다듬”는 장면이나 “아치형 창문으로 매일 신선한 피가 도착하는 아침”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상상을 재구성한다. 일상과 환상의 충돌로 인해 탄생한 혼종적 세계다.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할 때 현실의 요소들이 상상에 침투하며, 마치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 흥미롭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는 “잡스러운 날씨 한입에 쑤셔 넣고 투명 테이프만 엑스자로 붙인 고층아파트//이런 뻔한 창문들”은 상상과 현실의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시적화자가 처한 현실적 환경이 상상력을 제약하는 상황을 표현한다. 이쯤에서 시의 제목이 「신작」이라는 점을 다시 환기하게 되는데, 새로운 작품이나 창작을 의미하는 ‘신작’이라는 말에서 현실과 상상의 괴리, 창작 과정의 어려움, 시인이 현실 속에서 느끼는 제약 등에 대한 내적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시적화자가 초현실적인 공간을 꿈꾸고 상상력의 빈곤을 언급하는 것처럼, 시 제목인 「신작」은 창작의 자유로움과 제한적인 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비유적 표현일 것이다. 창작은 하나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지만, 현실의 제약이나 상상력의 빈곤 속에서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작」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새로움, 혁신을 나타내기도 하고 창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겪는 제약이나 갈등, 그것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을 강조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시는 상상력과 현실의 갈등, 현대인의 내적 불안과 갈망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적 경험과 초현실적 상상을 엮어내며 독자로 하여금 “상상할 수 없는 집”의 가능성을 스스로 탐색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할 수 없는 집”, ‘상상하고 싶은’ 집, ‘상상해야 하는’ 집은 무엇인가?


3. 찾아야 할 것은


    권박의 「어여쁘겠다」(『현대시』, 2024년도 10월호)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그 빛으로 무언가를 비추어보며 “어여쁘겠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 만든 글자로/어여쁜 바늘을 추모한 사람에 대해//짓겠다/어여쁜 사람이....( ).....될 때까지/짓겠다//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사랑을/얼굴을/이런 시는 그만 찢겠다/짓겠다/내내/어여쁘겠다//적당한 말은 아니지만/어여쁘겠다/꺼진 밤, 멈춘 밤,/부러진 바늘의 밤,//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하늘에/불꽃 튀긴 전신주 젖은 전선들/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 있다//모든 되는 신은 불구不具하면서 불구不拘하므로//어여쁘겠다”(「어여쁘겠다」 전문)라는 전체 시에서 ‘어여삐’와 ‘어여쁘다’는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어여삐 여기는 사람”과 “어여쁜 바늘” 같은 표현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나 이를 잃어버린 상실감을 드러낸다. 이 시는 언어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불완전성과 부조리함을 성찰한다. ‘바늘’은 무언가를 엮는 역할을 하는데, 마치 단어와 문장을 엮어 작품을 만드는 창작행위처럼 보인다. 그런데 “부러진 바늘의 밤”이라고 하니, 이제는 무력해진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는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불꽃 튀긴 전신주”와 “젖은 전선들”은 불안하고 위태하며 파괴적인 환경을 형상화한다.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는 인간 존재의 분열과 상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인간의 본질이 위협받는 장면을 그려낸다. 

    “불구不具하면서 불구不拘”한 “신”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은 창조하는 자이므로 마치 전능한 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불완전한언어를 다루는 한계적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규율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시의 마지막에서 ‘어여쁘겠다’는말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약속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불완전성, 상실, 시적 화자의 내면적 갈등과 동경, 매혹, 희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권박은 자신의 지난 시집 『아름답습니까』(문학과지성사, 2021)에도 “아름답습니까”라는 질문을 새겨 넣었었는데, 이번에는 “어여쁘겠다”라고 미래의 가능성이나 바람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각주다. 권박은 하나의 시어에 여러 개의 각주를 달거나 본문보다 긴 각주를 다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각주를 활용해온 시인이다. 각주들과 함께 보면, 이 시가 ‘시’에 대한 메타시이며 창작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음이 더 분명해진다. 이 시의 첫 번째 각주에는 “훈민정음”이 있다. 훈민정음은 조선 시대 백성을 위하여 창제된 문자로서, 언어의 인간적 가치를 드러내며 ‘어여삐’라는 표현이 가진 언어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또한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글자와 언어를 만들었다는 창조적 행위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각주는 “유씨부인, 조침문”으로, 바늘을 통해 사람의 부재와 그리움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애도 문학의 예인 「조침문(弔針文)」을 언급한다. ‘어여쁜 바늘을 추모한 사람’은 옛 여성의 슬픔과 상실을 떠올리게 하고, 바늘은 아름다움과 애도를 동시에 상징하게 된다. 다른 하나의 각주는 한용운의 「님의 얼굴」에서 가져온 부분으로,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며 ‘님의 얼굴’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아름답다고 표현하는데, ‘어여쁨’이야말로 사실 표현할 수 없는 경지임을 나타낸다. 

    이원석의 「누구에게나 각자의 이야기」(『시로 여는 세상』 2024 가을호)는 정체성과 자유를 찾고자 하는 주체의 여정을 담고 있다. 시의 첫 연은 “나는 달려간다/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라는 고백으로 시작된

다. 이는 사회가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고정된 역할, 규범에서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려는 선언으로 들린다. 

    “해적왕이 될 거야/누군가에게 물들였다고 생각하는 너를 뒤로한 채/나는 대장장이였지/대장이 되고 싶진 않았지/두드리고 두드려서 치밀해지는 쇠/치밀하다 못해 집요해지고/집요하다 못해 지나치게 되는/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꺼지고/더 차가울수록 단단해지는 쇠를 만지고 싶었지/빛이 날 때까지 물을 뿌리고/숫돌에 문지르면서”라는 부분에서 화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해적왕”과 “대장장이”가 언급된다. 대장장이가 다루는 쇠는 단단함과 불완전함, 변화를 상징한다. “두드리고 두드려서 치밀해지는 쇠”는 시인의 자기 단련과 내면의 갈등을 상징한다. 시인은 두드려서 형태를 바꾸고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를 통해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성될 수 있음을 드러내려 하는 듯 보인다. 

    “해적왕” 역시 기존 질서나 규범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다. 세상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아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시는 중간에 “같은 구름은 없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한다. 형태가 자꾸 변하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보이곤 하는 구름은 다양성과 가변성을 나타낸다. 마치 계속 모습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는 “전혀 다른 곳에 서서/다시/앞으로 앞으로 엉뚱한 곳으로 발을 내딛는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계속되게 하려는 열망만 있다면 언제든 새롭게 다시 쓰여질 수 있다. 


    지금의 문학은 틈새를 찾고 있다. 그러나 암흑에 작은 틈이 생기고 스며드는 빛이 존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밝다고는 할 수 없으며, 희미한 빛을 찾았음에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황량한 사막과 같은 땅에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어 꽃이 피고 그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다 해도 지금 사막을 건너는 일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닿을 수 없는 꽃의 희미한 향기는 신기루처럼 길 잃은 사막 여행자를 지칠 때까지 걷게 만들 저주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향기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추구하고 욕망하는 기쁨을 준다. 시인들이 하려는 것은 그런 일이 아닐까. 사막에 길들여져 잎을 버리고 가시투성이가 된 선인장처럼 체념하고 걸음을 멈추는 대신, 자기 안의 열망을 믿고 모래바람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 1) 김지윤,「지구라는 크라잉룸-기후위기와 녹색계급의 시」,『현대비평』13(겨울호), 한국문학평론가협회, 2022.
  • 2) 그렉 개러드,『생태비평』, 강규한 역,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4년, 159~161쪽.
  • 3) 위의 책, 161쪽.
  • 4) 저스틴 토시, 브랜던 웜키의 책 『그랜드스탠딩: 도덕적 허세는 어떻게 올바름을 오용하는가』(김미덕 역, 오월의 봄, 2022)에 등장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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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전기화 미래를 짓는 애도의 서사

작년 세월호참사 희생자 10주기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월: 라이프 고즈 온」(장민경 연출)은 참사 유가족 유경근씨를 좇아가는 가운데,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한 다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품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중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와의 대화에서 인상적인 문답이 등장한다. “진짜 세월이 약인가요?”라고 묻는 유경근씨의 질문에, 약은 없다면서 “안고 사는 게 약이여”라고 답하는 배은심씨의 대답이 그것이다. 흔히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무뎌지고 잊히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배은심씨는 세월이 아니라 안고 사는 게 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시간의 풍화에 내맡겨 점점 무뎌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루는 일부로서 비통하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껴안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살게끔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형식이 필요해진다. 그 형식에는 상실과 끊임없이 새롭게 관계 맺는 역동적인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며, “집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물은 건 묻고 요구할 건 요구하는”1) 움직임,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안기고 그들을 안아주는 움직임이 요구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안고 정치로 나아가는 삶의 형식이라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세월호참사, 대구 지하철화재참사 등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로 구성된 ‘재난참사피해자연대’의 발족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겪은 참사를 여러분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고 불가피하게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곁으로 찾아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자 한다.” 그리고 4·16재단 부설로 문을 연 ‘재난피해자권리센터’는 피해자를 조력하는 한편 재난을 만드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점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렇듯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하고 사건에 관한 사회적 기억의 구성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또다른 재난참사의 피해자·유가족과 연대하며, 상실의 비통함을 우리 모두가 보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희망의 몸짓으로 전환해내고 있다.2) 그러므로 미래란 애도를 완수한 이가 비로소 맞이하는 삶의 다음 단계 같은 것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 열어젖히게 될 새로운 가능성이라 할 것이다.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온 재난참사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최근 소설에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거듭 마주할 수 있었다. 애도의 서사화가 거듭하여 창안되는 것은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한 문학의 필연적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례식장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어쩐지 딴청을 피우며 한참을 에둘러 걸어가는 이들의 발걸음에서(김채원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우산을 보며 세상에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뒷모습에서(최예솔 「토니」,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제대로 읽지 못할 책을 들고나와 길가에 놓인 소파에 앉는 마치 의례와도 같은 행위 속에서(윤단 「남은 여름」, 『현대문학』 2024년 12월호) 상실이란 과거완료의 사건이 아닌 남겨진 이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현재적인 것이 된다. 다만 짧은 소설의 형식에서 애도란 다소간 미학적인 것으로 완결되는 듯 보이기도 하기에, 좀더 긴 시간을 통해 애도를 수행하는 서사, 모순과 간극을 섣불리 메우지 않고 상실을 끌어안고 사는 삶의 버성김과 지난함까지 다루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그러한 서사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삶으로서 보여주었듯, 부정적 감정으로 치부되곤 하는 슬픔과 우울, 고통의 정동이 지닌 운동성을 새롭게 사유할 매개가 되어 어쩌면 인물들에게 미래를 지어 먹이려는 소설적 움직임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을 살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허기진 공동체에 애도의 감정과 연대의 상상력을 전하며 보살피려는 문학적 돌봄의 실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늦은 노력들의 형식 문진영의 소설 『미래의 자리』(창비 2024)는 ‘미래’라는 인물의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체 8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장마다 초점화자가 전환되며, ‘지해’와 ‘자람’ 그리고 ‘나래’ 세 사람의 내면 풍경과 그들이 통과하는 삶의 국면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소설은 미래의 꿈에 관하여 미래와 지해가 대화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꿈과도 같은 장 ‘0 미래’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1 지해’의 장에서는 해져 닳아버린 듯한 지해의 마음결이 도드라지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의 여파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2 자람’의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래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미래는 지해와 자람과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이자, 나래의 쌍둥이 동생이다. 미래의 죽음 이후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은, 미래의 죽음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소급하여 재현하지 않거니와 남겨진 인물들 역시 죽음의 순간 미래가 얼마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웠을지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남겨진 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전개되는 이 소설은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래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낼 뿐이다.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나름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세 사람이 미래의 자리를 되짚는 방식과 밀도 역시 상이하다. 다만 미래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감정만큼은 모두가 공유하는 듯 보인다. 미래는 지해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자람에게 난생처음 오롯이 이해받았다는 기분을 선물해준 사람이고, 쌍둥이 언니 나래에게는 섬세하게 이해받는다는 느낌과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기억 속의 미래는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98면)고 누구보다 섬세하게 감각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지해와 자람, 나래가 고교 시절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던 미래는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 시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기록해나간다. 스무살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희열에 젖은 나래가 그 사건을 조금씩 자신에게서 밀어낼 즈음, 미래는 사건의 여진 속에 들어가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미래의 죽음 이후 지해와 나래는 조그만 징후라도 발견하고 싶어서, 미래의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싶어서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일기를 샅샅이 읽어나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래가 치열하게 통과했던 외로움과 슬픔, 기쁨을 각자의 방식으로 되짚는다. 자신의 살아 있음을 미안해하며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싶어하는, 자신이 누려온 삶의 여유로움에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혼란마저 있는 그대로 껴안고 기꺼이 자신을 더 큰 혼란과 열망 속으로 밀어넣는, 그리하여 “충분히 살아 있다”(175면)는 감각과 함께 삶의 아름다움 또한 생생하게 느끼던 미래의 시간은 장의 전환 지점마다 삽입된 미래의 일기를 통해 기록되어 독자들에게도 전해진다. 소설에서 지해와 나래를 절망에서 건져올리는 분명한 서사적 계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극적인 회복의 서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길 수 있지만, “삶 쪽을 향해 반짝이고 있는”(125면) 미래의 문장들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던 지해와 나래가 천천히 삶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은 충분히 개연적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보건대 ‘미래의 자리’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을 후회와 죄책감으로만 잡아끄는 수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때나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79면) 전하고 싶어 지해에게 건네는 자람의 자그마한 선물들과,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204면)라며 나래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지해의 마음에, 이렇듯 서로를 살피며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연결고리들마다 무한히 창안되는 장소에 가깝다. 소설은 그 연결고리를 미래와 남겨진 세 친구의 관계로만 한정하지 않고, 조금씩 보태어지고 때로는 끊어지며 유동하는 관계의 여러 모습을 통해 그려낸다. 지해와 엄마, 그리고 지해와 용이씨, 나래와 재원, 자람과 가족, 그리고 자람과 민서까지, 소설은 세 사람이 갖가지 연결과 만남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미래의 자리』는 남겨진 자들이 미래의 자리를 서서히 지워버림으로써 그 시절을 ‘극복’해가는 모습이 아니라, 이들이 미래의 흔적을 묻힌 채 상실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는 쪽에 가깝다. 세 인물의 이야기 모두 확실한 종결 없이 마무리되며 그 어디에도 미래의 자리에 대한 확고한 고정값이 부재하다는 점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미진한 느낌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미래의 자리를 섣부른 의미화로 고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숨탄것3)으로서 숨탄것을 끌어당기는 한 그 의미화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의지를 내포하는 듯 읽힌다. 예소연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현대문학 2025)는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 ‘석이’를 찾기 위해, ‘나(동이)’와 ‘혜란’이 캄보디아로 향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석이를 찾는 여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0년 전 대학시절 세 사람이 캄보디아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함께 보낸 시간과 이후 점점 멀어지게 된 세 사람의 관계에 관한 회고가 교차하며 삽입된다. 이러한 전개 가운데 세 사람의 우정의 역사뿐 아니라 ‘나’의 비틀린 마음,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 “보편적인 행운을 단단히 쥐고 있는”(10면) 듯 보이는 석이를 향한 날선 마음과 질투, 적의 같은 것들이 함께 끌려 올라온다. 회고조의 서술을 통해 간간이 드러나듯 석이를 찾는 여정이란 기실 ‘나’ 자신의 못난 마음을 마주보는 시간이자, 판단하기에만 급급했을 뿐 애써 이해하려고 해본 적 없는 석이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되짚어보려는 노력의 여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석이의 실종이라는 사건은 ‘나’와 혜란의 삶의 관성을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요청되었던 서사적 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실종과 같은 충격적 사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타자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굼뜬 노력이 시작된다는 점을 드러낸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석이를 찾기 위해 떠난 이들의 여정이 결국 석이를 만나지도 못한 채 결말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를 의미하기 어렵다. 오히려 석이와의 만남이 지연되는 것이야말로 석이에 대한 이해를 거듭 수정해나갈 기회를 허락하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엄마를 간병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된 삶에 시달리던 ‘나’가 이태원참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석이에게 공감하는 대신 “너 너무 격양되어 있어”(65면)라며 그녀를 제어하려 했던 기억은 서사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소환된다. 캄보디아행에서 ‘나’가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교육봉사로 캄보디아에 머물던 시기 한국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일과, 캄보디아인인 ‘삐썻’이 그 사건에 대해 위로하며 꺼삑섬에서 벌어진 압사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석이가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앞질러 단정한 일, 그리고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꾸벅꾸벅 졸며 이태원역을 지나치던 석이의 머리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일과, 이후 석이가 뒤늦게 삐썻을 찾아가 사과한 일들 사이의 희미한 연결성이다. 세월호참사와 꺼삑섬의 압사사고, 그리고 이태원참사 등의 사건들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고유한 역사정치적 맥락 위에 놓인 개별적인 사건들이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 의해 차이를 초월하여 특히 정동적 층위에서 연결될 수 있다. 이때의 연결이란 구체적 사건의 맥락을 지워 책임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연루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작동하는 쪽에 가깝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은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64면) 된다는 느낌으로, 고통과 무력감, 수치심과 우울의 정동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석이는 그 느낌으로써 주변의 사람들과도 연결되려 하지만, 정치색이 너무 짙다며 석이를 피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 역시 “크나큰 불행을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사람”(122면)처럼 느껴지는 석이를 부담스럽게 여겨 부재중전화를 외면하면서 석이가 자신에게 미칠 정동적 전염을 피하려 한다. 결국 캄보디아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야 석이의 마음을 상상해보게 된 ‘나’가 “석이가 하고자 했던 일을 할 것이다.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다”(125면)라고 다짐하게 되는 극적인 전회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렇듯 석이의 자리에 대신 서보려는 듯한 ‘나’의 포즈에 주목해본다면, 『영원에 빚을 져서』는 『미래의 자리』와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이야기를 끝맺게 되는 셈이다. 이는 『미래의 자리』가 장마다 초점화자를 전환하며 이야기를 독점적인 인물의 담론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피하는 한편 미래의 일기를 삽입함으로써 미래의 내면을 고유한 영역으로 보존하려 한 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는 두 소설의 결정적 차이, 즉 미래와 달리 석이는 잠시간 자취를 감추었을 뿐 분명 생존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나’와 혜란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인 게임의 주최자와도 같다는 점, 즉 두 사람이 삐썻의 도움을 받아 되짚게 될 여정을 한발자국 앞서 지나감으로써 그들이 지나올 길을 미리 마련해둔 것과도 같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석이가 하고자 했던 것을 하며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나’의 다짐은, 추후 ‘나’가 다시금 석이와 대면하는 가운데 부대끼게 될 시간을 괄호 안에 묶어둔 위에서만 가능한 일시적 봉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지만 불가결한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발견되는 얼마간의 비약을 동반한 실선의 연결감은 『미래의 자리』에서 그려내는 점선의 연결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남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두 소설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두 이야기에는 첫째, 죽음 혹은 실종으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진 ‘그녀’가 있다. 둘째, ‘그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녀 타인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자신을 성찰하던 사람이었다. 셋째, ‘그녀’의 마음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였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녀’의 마음을 더듬으며 헤아리려 한다. 그리고 이렇듯 뒤늦은 이해의 시도라는 것이 서사를 끌어나가는 소설의 전체적인 추동력으로서 작동한다. 세월호참사의 고통을 향해 뛰어들어간 미래가, 이태원참사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던 석이가 사라진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소설은 예민하게 타인의 고통을 청취하고 감응하며 세계와 불화하던 이들을 서사에서 가장 먼저 퇴장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조금쯤 둔감하거나 이기적인 덕분에 생존해 있는 자들의 서사를 상대적으로 많이 조명하는 가운데 이들로 하여금 사라진 자들에 대해 회상하게끔 한다. 이는 이야기에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재난참사의 당사자가 아니라 재난참사에 대해 섬세하게 공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 그러고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다루는 대신 그 사람의 상실 이후를 경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 이것은 몇 개의 겹을 걸친 ‘관찰자’의 위치에 선 인물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전략처럼 보인다. 사건을 직접 다루는 방식에 대한 큰 부담을 방증하는 듯한 이와 같은 서사전략에는 비판이 가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미래와 석이가 사라진 세계가 어떠한 혐의를 가지는가에 대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해온 미래와 석이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내면을 자세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 과연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상실 이후에서야 후회와 반성을 여실히 내비치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는, 사라짐을 택한 인물이 아니라 그 상실에 대해 곱씹는 자의 내면으로 서사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과 독자들 사이의 공감을 강화하고, 끝내는 독자들의 동질적 자기연민으로 이어지는 나르시시스트적 소설 향유를 강화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근래 한국소설과 소설 독자들의 주요한 경향성으로 누차 지적되어온, 예상 가능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텍스트의 읽기란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들 소설이 이러한 구도를 통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들 소설이 발생시키는 효과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읽는 방식에 대한 미세조정을 통해 같은 텍스트로부터도 서로 다른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읽는 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서사에서 진동하고 있는 운동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읽어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그려내는바, 남겨진 자들의 위치에서 상실을 돌아보는 일이란 매끈하게 자기를 완성하며 현상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작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 변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4)까지 품고 미래를 고민하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읽기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지지대로서 황정은의 근작 「문제없는, 하루」(『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를 세워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도 앞서 살핀 두 소설과 유사한 관계구도가 발견되고 있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일상과 노동의 감각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영인’과, 세계의 커다란 고통에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어쩌면 그래서인지 점차 고립되어가는 듯 보이는 ‘인범’이 등장한다.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그걸 보게 돼./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라는 인범과 “뭘 그렇게까지 해,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해”(244면)라는 영인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소설은 두 사람의 버석거리는 관계를 적나라하게 다룬다. 초점화자인 영인을 통해 독자들마저도 피로해지게끔 만들면서, 인범에게 전하지 못한 영인의 마음이 닳아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해져가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잔존하는 사랑과 끊어질 수 없는 이들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이 버성김과 부대낌을 재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음에도 태풍이 휩쓸고 간 날 인범에게 전화를 거는 영인과, 그 전화에서의 침묵이 마음에 걸려 영인의 집으로 찾아오는 인범에게는 서로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 오랜만의 만남 이후 해가 뜨는 것을 함께 보기 위해 나선 길에서, 그들은 터널 안에서 위험한 상태에 놓인 차량과 그 안의 노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영인은 터널 속 쓰러진 노인을 구하려는 인범을 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차들을 향해 제발 멈추라고, 그들을 믿는지 믿지 못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저 경적 울리는 일을 한다. 인범은 아직 영인의 곁에 생생히 살아 있으며, 영인은 불가피한 두려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다시,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와 같은 소설들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문제없는, 하루」 속 영인이 경적을 울려대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를 멈추어 세우는 일이 아닐까. 관찰자의 위치란 독자들을 안전한 곳에 위치시켜 위안을 주기 위해 설정되는 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당겨 연루시키기 위한 절박한 유인책에 가까워 보인다. 최선을 다해 상실을 쓰다듬어보려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에서야 그것을 수행하고 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멈추어 상실을 쓰다듬는 행위의 중요성을 역설하려 한다. 혹자에게는 이것이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기만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혐의를 안고도 그 태도를 취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타인의 상실을 그만의 사적인 경험이라며 지나치지 않고 곁에 멈춰 서서 그의 고유한 상실과 연루되는 삶의 형식을 감히 상상해내기 위하여, ‘우리’가 함께 상실한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가를 멈추어 되돌아봄으로써 지금-여기의 세계를 당연하지 않게 느끼기 위하여. 이로써 조금 다른 형태의 미래를 “지금-여기에서 밀어 올”5)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 도식화된 이해와는 달리, 관찰자의 위치란 사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부동하는 점으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덕지덕지 묻히고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더듬으며 때로는 침잠하여 간신히 기어나오지만 때로는 비약을 감행하는, 요란하고도 사나운 움직임에 가깝다. 지금의 한국소설이 그려내는 그 움직임이 독자들을 정동할 만큼 강력한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이렇게 바뀌어 던져지는 편이 온당할지도 모른다, 그 관찰자들을 관찰하려는 ‘우리’들은 정동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나와 동일한 상실을 경험하였기에 가능한 연결이 아니라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와 불가피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차이와 간극으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연결로 이어지는 형태를 상상해낼 수 있는가? 이는 곧 지금 들리는 작고도 또렷한 경적소리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귀 기울이고 멈춰 설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1) 영화에서는 간결하게 처리되었으나, 장민경 감독의 인터뷰(「“시간이란 약은 없다”···가족 잃은 고통 ‘안고 사는’ 이들이 손잡을 때」, 경향신문 2024.3.24)에서는 배은심 여사의 말을 빌려 그 의미가 좀더 자세히 풀린다. 배은심씨는 아들의 죽음 후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 2022년 타계했다. 2) 이태원참사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2024)에서도 이태원참사의 유가족들이 상실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길을 내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는 서술이 확인된다. 혹 이와 같은 진술이 재난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사회운동의 책임과 부담까지 지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정확히 기입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이 보다 강조되는 쪽이 온당하지 않은가 한다. 3) ‘작가노트’에 따르면 ‘숨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인 ‘숨탄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될 뻔했다고 한다. 이 표현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본문에서도 인용하여 사용했다. 4)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93면. 5)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24면.

계간 창작과비평 전기화 애도서사<세월: 라이프 고즈 온><미래의 자리><영원에 빚을 져서><문제없는 하루> 2025
이은란 백색 알레고리의 건축술 ― 『흰』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계간 푸른사상 이은란 한강알레고리엑스터시수행성『흰』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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