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4년 3월호(제411호)
종교적 신성과 그로테스크 미학 ― 이재훈 시의 중층적 상징체계와 발생론적 메커니즘 (상)
1. 여섯 가지 상징체계와 발생론적 질서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재훈은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종교적 신성에 대한 기억과 도시적 현실의 환멸 사이에서 생기는 고통을 묵시록적 상상력과 신화적 상상력으로 견디며 유목적 몽유의 어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시 쓰기의 한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 타락한 인간 세계에서 경건한 이상 세계를 염원하는 시적 지향성은 주체를 고뇌하며 방랑하는 순례자로 형상화하면서 이재훈의 시적 여정을 견인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순례의 드라마는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서 종교적 경건에 대한 긍지가 자조와 냉소의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슬픔의 감응과 소멸의 상상력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에서는 벌레의 형상을 통해 소리의 환각을 타고 세계의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하강의 상상력으로 전개하면서 뿔과 짐승의 피로 표상되는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 연장선에서 네 번째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에서는 시적 주체가 도륙과 생존의 투쟁으로 점철된 세상을 방랑하면서 눈물의 슬픔을 기도와 묵상의 언어로 정화시켜 무한으로 상승하고자 하며, 다섯 번째 시집『돌이 천둥이다』에서는 감각과 정신의 방랑을 돌의 형상에 고정시키고 고요와 침묵을 통해 내적 응시의 언어로 응결시킨다. 2)
이재훈 시에 대한 중요한 선행 비평의 고찰로서 종교적 상상력이 구축하는 유목적이고 묵시록적인 풍경, 도시의 사막을 걷는 몽유의 상상력,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르키소스와 말에 대한 자의식(유성호), 도시적 삶의 한 가운데에서 제약들로부터 벗어나는 은신, 제3의 눈으로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을 종합하려는 결의, 실존적 퇴행을 통해 소멸이 슬픔을 지나 도달하는 신명의 성소聖所(조강석), 어둠의 음향학으로 이룩하는 숭고의 광산학, 세계의 어두운 지층을 수직으로 파고 들어 상승시키는 숭고한 삶, 세계의 폭력을 견디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는 식물적 능동(장은수), 걷기의 시학이 가지는 감정과 사유, 생명이 스스로를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는 전환과 비약, 경직된 육체의 기록이자 현실의 자리로 읽어야 하는 관념의 흔적(송종원)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선행 비평의 견해 들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해석적 관점을 보충하기 위해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를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시적 무의식 속에 잠재된 상상력의 발생론적 메커니즘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재훈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상징체계들을 정치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는 ‘종교적 신성’과 ‘도시적 현실’이라는 양극적 대비 항만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중층성과 복합성을 내포하는데, 이것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시 세계의 실재에 근접하는 관건이 된다. 필자는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를 크게 신 혹은 무한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신성’, 어머니로 표상되는 ‘근원적 모성’, 나무와 새로 대변되는 ‘원초적 순수자연’, 역동적 생명력과 야수성으로 표현되는 ‘원시적 생명의 역동성’, 재귀적 자아 폐쇄성과 성적 욕망의 이율배반성으로 표출되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 타락한 현대 도시의 욕망으로 드러나는 ‘도시적 현실’ 등의 여섯 가지 층위로 세분하고자 한다. 이 여섯 가지 층위로 구성되는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에서 시적 구조화 원리의 중핵을 이루는 ‘종교적 신성’과 ‘그로테스크 미학’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잠재된 발생론적 메커니즘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2. 이교도의 비밀, 어머니라는 실재, 나르키소스의 오욕五慾
첫 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섯 번째 시집『돌이 천둥이다』에 이르기까지 이재훈의 시는 시적 형식과 내용의 양 측면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변모를 동반하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이동되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이재훈의 시는 유목적 몽유의 어법으로 묵시록적 상상력과 신화적 상상력 및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펼치는 모습을 통해 일관성과 연속성을 유지해 왔다. 지금까지 제기된 선행 비평의 견해 들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적 관점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형상화된 시적 특이성보다는 내면적으로 잠재된 상상력의 발생론적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이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 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 「빌딩나무 숲」 전문(1 : 16~17)
이 시는 이재훈 시 세계의 전체적 구도를 압축된 형태로 제시하는 작품으로서 시 의식의 원형질을 담고 있다. 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기(1~6행), 승(7~11행), 전(12~16행), 결(17~20행)으로 이루어진다. 구성에 따르는 시상 전개는 ‘숲에 풍경이 없고 소리도 없으며 마네킹이 서 있음’(기), ‘어머니를 부르지만 내 목소리만 앉고 힘줄들을 만짐’(승), ‘자신을 만지고 나무에게 가며 새에게 말을 건냄’(전), ‘침묵만 있는 숲에서 이교도가 됨’(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1~6행)에는 시 의식의 원형질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 중에서 ‘도시적 현실’과 ‘원초적 순수자연’이 대비적 구도로 제시된다. 시의 기본 구도는 “빌딩나무”, “마네킹들” 등으로 대변되는 ‘도시적 현실’과 “나무”, “새” 등으로 대표되는 ‘원초적 순수자연’을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제목인 「빌딩나무 숲」이 암시하듯 ‘원초적 순수자연’이 부재하는 도시의 빌딩 숲에서 “풍경이 없”고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도 “소리내지 않는” ‘모조 자연’이 등장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현상 이면에는 시적 화자가 염원하고 추구하는 ‘원초적 순수자연’이 내재적 원형으로 상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도시적 현실’이라는 상징체계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가 염원하는 상징체계들 중 하나로 ‘원초적 순수자연’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소리”의 부재이다. 이재훈 시 전반에서 특별한 상징적 위상을 차지하는 ‘소리’는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 세계의 양태나 기운이 현실 공간에 희미한 흔적이나 기미를 전해주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소리”의 부재는 ‘도시적 현실’에서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 세계인 ‘원초적 순수자연’이 부재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승(7~11행)에서는 삭막한 현실에서 화자가 염원하는 또 하나의 상징체계인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 세계들 중에서 “나무”, “새” 등으로 대표되는 ‘원초적 순수자연’과 친연성을 가지지만 결이 다른 ‘근원적 모성’의 세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재훈의 시 전반에서 특별한 강도(intensity)를 가지고 핵심적 상징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육친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연의 원형’이나 ‘신화적 모태’이기도 하며 ‘종교적 신성’으로 향하는 계단이기도 하다. 육체성과 정신성, 공간성과 시간성, 가족과 자연, 신화와 종교 등의 교집합인 ‘어머니’는 자크 라캉의 개념에 의하면 기표를 곤란에 처하게 하는 실재의 일부(대상 a)에 해당하고,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에 의하면 명명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과 표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인 쇼즈chose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가 “어머니”를 “부르”지만 “침묵만 되돌아/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이 앉아 있”는 상황은 실재의 일부를 만나지 못하고 자아의 내부에 갇히는 상황을 제시한다. 화자는 밀폐된 내면 공간에서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이 앉아 있”는 자의식을 경험하고 “숲속”을 질주하고 “소리를 지르”며 통곡하지만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지는 자기 성애적 행위를 시도한다.
전(12~16행)에서는 화자의 자기 성애적 행위와 그 이후의 경과가 제시된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라는 문장은 ‘재귀적 자아 폐쇄성’을 동반하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가 대상을 향한 지향성으로 귀결되는 것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라는 문장은 화자의 지향성이 “나무”와 “새”로 대표되는 ‘원초적 순수자연’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나무”와 “새”는 “빌딩나무”, “마네킹들” 등으로 대변되는 ‘도시적 현실’뿐만 아니라 ‘나르시시즘적 자기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기(1~6행)에서 현실에 부재하는 내재적 원형으로 잠재화되었던 ‘원초적 순수자연’이 화자가 지향하는 대상으로 표면화하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은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가 가지는 폐쇄적 암울함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라는 구절은 자학에 가까운 자책이 어떤 결단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17~20행)에서는 화자의 자학적 결단 이후에 “아무도 없”고 “침묵”만 있는 “빌딩나무 숲”을 드러내고 “이교도가 되”는 모습을 제시하며 마무리한다. “빌딩나무 숲”으로 상징되는 ‘도시적 현실’은 화자가 ‘원초적 순수자연’, ‘근원적 모성’ 등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에 봉착하고 그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자학적 결단에도 불구하고 ‘부재’와 “침묵”의 공간으로 완강하게 화자 앞에 버티고 있다. 이러한 절대 고독과 절망적 상황에서 화자가 선택하는 최후의 존재적 모습이 “이교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교도(異敎徒, paganism)’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와 같이 유일신의 계시에 따라 기록되었다고 믿는 경전을 가진 종교가 경전을 갖지 않은 다른 종교도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시의 최종 행에 제시된 이 단어는 작품 전체에 ‘종교적 신성’의 세계가 은폐되어 있다가 은연중에 탈은폐되는 모습을 그 반대 측면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화자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이상 세계는 신과 무한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신성’의 층위’인데, 화자는 ‘원초적 순수자연’, ‘근원적 모성’과 함께 이 지향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도시적 현실’의 완강한 “폐허”에 부딪혀 변신할 수밖에 없음을 자학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이재훈 시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상징체계들과 시적 무의식 속에 잠재된 상상력의 발생론적 메커니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재훈 시의 주체는 “빌딩나무”, “마네킹들” 등으로 대변되는 ‘도시적 현실’에 환멸과 증오심을 느끼고 이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무”, “새” 등으로 대표되는 ‘원초적 순수자연’과 “어머니”로 표상되는 ‘근원적 모성’을 추구한다. 이 추구가 좌절되는 상황에서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의 ‘재귀적 자아 폐쇄성’에 봉착하고 그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자학적 결단에도 불구하고 ‘부재’와 “침묵”의 공간으로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도시적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이교도”로 변신시킨다. 필자는 이재훈의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이상 세계를 ‘종교적 신성’이라고 간주하고, ‘원초적 순수자연’, ‘근원적 모성’과 함께 이 지향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도시적 현실’의 완강한 “폐허”에 부딪힐 때 불가피하게 시도하는 변신이 동반하는 ‘자학적 고백’의 방식이 이재훈 시의 표면적 현상을 지배하는 ‘그로테스크 미학’을 발생시켰다고 해명하고자 한다. 이재훈 시의 주체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이상 세계인 ‘종교적 신성’은 이처럼 복잡다기한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경유해서 파괴적이고 자학적인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변신하고 둔갑하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쳐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세계를 냉소적 환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극단적인 비판과 파괴를 시도하는 동시에 자신을 책망하고 학대하면서 급기야는 자기 신체를 훼손하고 파편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
따뜻한 물 흐르는 동굴에서
서둘러 어둠을 껴입었지
찰박찰박, 어둠 사이로 붉은 등을 내비치는 탯줄
그 고요의 심지에 불을 댕기고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지
나는 말을 부르는 소리부터 배웠지
탯줄이 사위를 밝히고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나는 편자를 갈고 있었지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같았지
빛이 어둠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졌지
말이 내 앞에 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지
떨어지는 별에 맞을까 두려워 말에 올라탔지
어둠 속으로 달렸지
손엔 활이 들려져 있었고
다리가 말의 몸에 심겨졌지
말과 나는 한 몸이 되었지
그제야 예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어둠 속엔 많은 별이 있었지
십자가 없는 어둠,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
별을 보며 내 형상을 기억했지
가끔씩 구름에 가려 별이 안 보이면
활을 쏘았지 허공 속에서 비명이 들려왔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
그곳엔 조용한 잠도 없었지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 「사수자리」 전문(1 : 13~15)
이 시는 첫 시집의 서두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재훈 시의 전체적 상징체계를 응축하고 있다. 시적 주체가 “밤”-“잠”-“동굴”-“물”-“어둠”의 공간에서 “말”-“탯줄”-“소리”-“등불”을 경유하여 “빛”-“별”-“활”을 발생시킨 이후에 “어머니”의 세계에 귀착하는 모습을 상징의 연금술로 보여줌으로써 이재훈 시 세계의 의미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발단(1연 1~5행), 전개(1연 6~12행), 위기(1연 13~21행), 절정(1연 22~32행), 결말(2연)로 전개되는 서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구성에 따르는 시상 전개는 ‘밤에 말을 타고 잠의 동굴에 들어가 어둠을 껴입음’(발단), ‘탯줄의 심지에 불을 댕기고 말 부르는 소리를 배움’(전개),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말을 타고 어둠 속을 달리다 말과 한 몸이 됨’(위기), ‘별을 통해 자기 형상을 기억하고 말 위에서 견디다가 추락함’(절정), ‘어머니 배에서 말과 활 소리를 듣고 신神의 안부를 물음’(결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발단(1연 1~5행)에서 시적 화자는 “밤”-“잠”-“동굴”-“물”-“어둠”의 이미지 계열을 따라서 꿈속 환상의 세계로 진입한다. “밤이 되면 말을 타”고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는 “따뜻한 물”이 “흐르”고 “어둠”에 덮여 있다. “동굴”이 무의식의 심연을 상징한다면 “밤”과 “잠”은 이곳에 잠입하는 꿈속 환상의 통로이며 “물”과 “어둠”은 이곳의 속성인 모호한 신비성을 암시한다. 전개(1연 6~12행)에서는 “동굴”을 “탯줄”과 결부시켜 생명의 모태와 접속시키고 “불”, “휘파람”, “말을 부르는 소리” 등을 통해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융합하여 생명의 역동적 활기를 부여한다. 이어지는 위기(1연 13~21행)에서는 화자가 “빛”-“별”-“활”의 이미지 계열을 따라서 “말”과 “한 몸이 되”고 “예언의 소리”를 듣는 과정을 보여준다. “빛”으로 인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때 “별에 맞을까 두려워 말에 올라”타는 화자의 “손엔 활이 들려져 있”고 “다리가 말의 몸에 심겨”져 “말”과 합체되면서 “예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주목할 부분은 시적 화자가 ‘발단’에서 환상을 통해 무의식의 심연으로 진입할 때, ‘전개’의 환상 속에서 생명의 역동적 활기를 확보할 때, ‘위기’에서 활을 들고 어둠 속을 달릴 때에 공통적으로 “말”이라는 동물로부터 원동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말’이라는 동물은 ‘나무’, ‘새’ 등으로 대표되는 ‘원초적 순수자연’과는 결이 다른 ‘원시적 생명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말’로 표상되는 ‘원시적 생명의 역동성’ 층위는 이재훈 시의 주체가 ‘도시적 현실’의 삭막함을 견디면서 염원하고 추구하는 또 하나의 지향성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절정(1연 22~32행)에 이르러 화자는 “십자가 없는 어둠”의 “불안한 시간 속에서” “별을 보며” 자신의 “형상을 기억”하고 “활을 쏘”며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을 살다가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추락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별”이 “십자가”와 함께 시적 주체가 자신의 원형적 형상을 염원하며 추구하는 수직적 고양의 지향점인 반면 “활”은 “말”과 함께 “촛불의 위태로움”을 견디는 수평적 행위의 지향점이라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들 증에서 ‘종교적 신성’이 “별” 이미지의 연장선에서 수직적 고양의 지향점인 반면 ‘원시적 생명의 역동성’은 “활” 이미지의 연장선에서 수평적 행위의 지향점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지향성은 꿈속 환상의 통로를 통해 진입한 무의식의 심연에서 깨어날 때 추락하는 운명에 봉착한다.결말(2연)에서 화자는 추락 이후의 현실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꿈속 환상의 신화적 세계 혹은 종교적 세계의 흔적과 기미를 더듬는다.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댔지”에서의 “어머니”는 ‘육친의 어머니’에 가깝지만,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에서의 “어머니”는 ‘자연의 원형’이나 ‘신화적 모태’를 경유하여 ‘종교적 신성’으로 향하는 계단에 근접한다. 따라서 인용한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들 중에서 ‘근원적 모성’의 발생론적 위상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빌딩나무 숲」에서 “어머니”의 위상은 표면적으로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 세계들 중에서 “나무”, “새” 등으로 대표되는 ‘원초적 순수자연’과 친연성을 가지면서도 결이 다른 세계로 등장하지만, 「사수자리」에서 “어머니”의 위상은 환상을 통해 진입하는 무의식의 심연에서 깨어난 현실의 각성 상태에서 ‘자연의 원형’이나 ‘신화적 모태’를 경유하여 ‘종교적 신성’에 도달하는 연결고리로 등장한다. 앞에서 필자는 이재훈 시에서 ‘어머니’의 상징성을 ‘육친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연의 원형’이나 ‘신화적 모태’이기도 하며 ‘종교적 신성’으로 향하는 계단이기도 하다라고 언급했는데, 이 복수적 의미들이 가지는 공통분모 및 질서는 ‘도시적 현실’ 층위에서 ‘종교적 신성’ 층위로 상승하는 단계적 계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 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먼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1 : 18)
이 시는 이재훈의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이상 세계인 ‘종교적 신성’이 복잡다기한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경유해서 파괴적이고 자학적인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와 ‘재귀적 자아 폐쇄성’을 내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발단(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온몸에 둥지를 틀고,), 전개(어머 꽃피네,~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위기(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절정(나르키소스여 내 몸에~꽃피게 마소서), 결말(한밤중이 되면~기다리고 있는 나)로 전개되는 서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구성에 따르는 시상 전개는 ‘한밤중에 몸에 수선화가 피고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리며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림’(발단), ‘몸에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물든 수선화가 간지럽게 피고 옹골지게 핀 꽃대를 잡음’(전개), ‘에코가 메아리치고 흐느끼며 몸이 물기에 젖고 꽃들이 시들어감,’(위기), ‘나르키소스에게 몸에 오지 말라고 애원하고 꽃피지 않도록 간청함’(절정), ‘수선화가 한밤중에 몸에 피고 방 안의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림’(결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에 은폐된 내밀한 의미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시적 화자의 복잡하고 미묘한 어조를 세심히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어조가 동반하는 감응(affect)을 통해 자위행위를 하는 화자의 심리적 갈등, 즉 성적 욕망에 대한 매혹과 죄의식이 상충하는 이율배반성을 포착해야 한다. 화자는 ‘발단’에서 자기 몸에 피어나는 수선화의 모습을 객관적 관찰의 어조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해서 간지러움을 느끼는 몸의 감각에 반응하는 데로 나아간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문장이 객관적 관찰의 어조라면,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라는 문장은 자기 몸의 감각에 반응하는 어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전개’에서 “어머”라는 감탄사를 반복하면서 자기 “몸에 피는 꽃”에 “나르키소스의 영혼”을 개입하며 감응을 고조시킨다.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 맞추고, 시커먼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라는 문장은 자기 성애의 과정을 따라 진행되는 행위를 묘사한다.
‘위기’에서는 화자가 “아아”라는 감탄사를 반복하면서 자기 성애가 동반하는 흥분의 강도를 점층시킨다. “에코가 메아리치”고 “흐느끼”며 자신의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고 “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화자의 시선은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에 나타나듯 나르시시즘적 자기애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절정’에 이르면 화자는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오욕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라고 외치며 직설적으로 자기 몸에서 피어나는 나르시시즘적 성애를 불길하고 음산한 욕망으로 금기시한다. 이 외침은 발단-전개-위기의 시상 전개를 뒤집는 반전이자 전환인데, 필자는 이러한 과정 전체를 시적 주체가 경험하는 성적 욕망에 대한 매혹과 죄의식의 이율배반성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결말’에서 화자는 ‘발단’에서 보여준 객관적 관찰의 어조로 되돌아간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라는 문장은 시적 주체가 자기 성애의 행위가 마무리된 이후에 객관적 상황과 양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시적 기법의 측면에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발단-전개-위기의 시상 전개는 문장과 문장 간에 쉼표( , )를 찍고 절정-결말의 시상 전개에서는 문장 부호를 생략한 점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분석한 화자가 객관적 관찰과 주관적 감응의 정도를 어조의 차이로 표현한 것과 연동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화자가 시적 상황이나 대상과 가지는 심리적 거리 및 감응의 강도 차이를 쉼표( , )와 문장 부호의 생략을 통해 시각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다. 인용한 시가 보여주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애’와 ‘재귀적 자아 폐쇄성’ 및 ‘성적 욕망의 이율배반성’이 이재훈 시의 상징체계들이 가지는 발생론적 메커니즘에서 숭고한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적 신성’의 층위가 파괴적이고 자학적인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계속)- 오형엽 | 문학평론가. 본지 주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4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등단. 비평집으로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
- 2) 이재훈의 시집은『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벌레 신화』(민음사, 2016),『생물학적인 눈물』(문학동네, 2021),『돌이 천둥이다』(아시아, 2023) 등이 있다. 이 글에서 이재훈의 시는 이 시집들에서 인용하되, 시집은 제목 대신 출간된 순으로 번호를 달아 ‘(시집 번호 : 페이지 수)’로 출처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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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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