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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봄호(제18호)

문학과 인간학의 접경 ㅡ 김재홍의 비평 세계

이성천 문학평론

이성천은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2년 <중앙일보>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비평집으로 <시, 말의 부도(浮圖)>, <위반의 시대와 글쓰기>, <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 등이 있다. 제10회 젊은 평론가상(한국문학평론가협회)과 제17회 시와시학 평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및 계간 <시와시학> 주간으로 활동 중.

1.

 김재홍의 비평은 예외 없이 두 개의 투명한 ‘고전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시란 무엇인가, 또 문학하는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쩌면 소박하기만 한 이런 그의 비평적 물음은 의외로 두 가지 측면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김재홍의 이 물음 속에는 시(시적인 것)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사유의 요청이 역설적으로 담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시(문학)와 철학의 본질적 친연성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실천적 과제가 복합적으로 부여되어 있다. 그의 문학 비평은 “시란 개인적인 나의 삶에서 시작되어 사회·역사적 삶을 거쳐서 마침내 영원의 지평으로 열려가는 인간 탐구의 길”라는 일종의 예술철학을 상정하면서, 종국에는 지금 여기의 문학과 우리들 인간의 정체성을 질문의 형식을 통하여 재차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그의 비평관은 첨단과학과 고도 산업화 사회의 역기능과 부작용의 개연성이 점점 더 커져가는 21세기의 “새로운 불투명성”(하버마스)의 시대, 감각체계의 발랄함과 현란함을 최적의 문예 미학적 가치로 승인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보면 자칫 둔감하거나 시대와 동떨어진 문학적 행보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김재홍은 오히려 단호하다. 단호했다. 그의 비평적 견해는 최소한 이 문제와 관련해서만큼은 최신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감각들’에게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할 생각이 없다. 인간 정신의 분열적 징후와 욕망의 자기 정당성이 적극적으로 피력되는 시대일수록, 한편에서는 시가 우리 삶의 정신적 위안으로 작용한다는 저 낡은 고전적 명제의 당위성, 더 나아가 시(예술)와 인간(학)의 규범 철학적 기능과 역할이 필연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문학비평이 인간학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단계이기도 한 이 대목에서 그는 비평이 시의 기원적 성격을 망각할 때, 시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수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대재앙이 될 것임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 것이다.

 문학비평가의 사회적 소임은 무엇보다도 예술의 정신사적 가치 혹은 인간학적 층위를 보존, 실천적 계승과 발전시키는 일에 있다고 확신하는 이 같은 김재홍의 비평 정신은 196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한국 현대시 은유형태 분석론」이 당선된 이후부터 지속된다. 그간에 그가 상재한 『한국전쟁과 현대시의 응전력』(평민사, 1978), 『시와 진실』(이우출판사, 1983), 『한국현대시인연구』(일지사, 1986), 『현대시와 역사의식』(인하대출판부, 1988), 『카프시인비평』(서울대출판부, 1990), 『현대문학의 비극론』(시와시학사, 1991), 『한국현대시인비판』(시와시학사, 1994), 『한국현대시의 사적탐구』(고려대출판부, 1997), 『김재홍비평집』(동학사, 1999), 『현대시와 삶의 진실』(문학수첩, 2002), 『한국현대시인연구 2』(일지사, 2007) 등의 주요 저작들이 시학(poetics)과 인간학(anthropology)의 중층적 층리 또는 그것의 도드라진 구성물로서 “생명사랑·인간사랑·자연사랑·자유사랑·평등사랑”의 시(詩) 정신으로 어김없이 구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

 김재홍의 196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 「한국 현대시 은유형태 분석론」이라고 했거니와, 이는 김재홍 초기 연구의 한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 장르에서 은유의 가치론을 파악하고 이를 텍스트 해석의 주요 방법론으로 도입하고자 한 이 글은 1985년에 발표된 『한국 현대시 형성론』에 이르기까지 분석방법론상의 연계성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김재홍 연구 작업의 전기 대표작으로 평가받아 온 「한용운 문학연구」(1982)도 시집 『님의 침묵』에 나타난 은유의 형태를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접근 방법론 층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차이가 있다면,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한 이 연구는 역설의 구조 및 이미지 분석 방법마저도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장르 이론을 점검하며 대상 텍스트의 종합적 면모를 견지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萬海文學에 대한 연구는 生涯史 또는 思想的 偏向性으로 인해 다분히 비본질적 傾向에 치우쳐 왔다. 佛敎를 이해하고 近代史의 社會思想적 전개과정을 알면 萬海 詩가 저절로 해명되리라는 發想法도 없지 않았다. 기왕의 硏究들은 詩集 『님의 沈默』을 獨立運動이나 佛敎思想과의 等價物 혹은 代置物이라고 생각하여 『님의 沈默』을 釋名하는데 佛敎나 또 다른 思想을 引用하기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자유로운 想像力과 獨自性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문학연구」는 그 자신으로 하여금 “구조분석이론의 효용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계기”2)로 작용한다. 만해의 전기적 사실과 일제강점기의 시대 역사적 배경, 불교사상과 관련된 예술철학에 관한 복합적 이해 없이는 만해문학의 총체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그는 판단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후속연구가 「한용운의 문학과 사상」(1985)으로 이어진 것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만해사상이 내포한 자유· 평등· 평화·민중·생명·사랑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탐색한 이 논문은 향후 김재홍 문학세계의 기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재홍의 문학비평은 형식 차원의 구조주의적 접근방법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차츰 창작주체의 역사의식과 시적 응전력, 리얼리즘 미학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시와 진실』(이우출판사, 1983), 『한국현대 시인 연구』(일지사, 1986), 『현대시와 열린 정신』(종로서적, 1987), 『현대시와 역사의식』(인하대출판부, 1988), 『카프시인비평』(서울대출판부, 1990) 등의 저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책들은 모두 문학과 사회의 함수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성을 보유한다. 이러한 김재홍 비평의 ‘방향 전환’은 일단 197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학계의 중심부로 진입한 문학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시와 철학의 본질적 친연성에 관한 문제의식과 시 장르의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실천적 과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 시기 이후 그의 비평은 시(시적인 것)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90년대를 경유하여 이천 년대에 이르기까지 김재홍의 문학비평은 “나의 문학이 지향해 온, 또 지향해 나아갈 세계는 바로 이러한 생명, 사랑, 자유의 시학”3)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한다. 그리하여 이후 그의 비평은 철학으로서의 문학 혹은 문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저 오래된 비평의 ‘접경’적 사유에서 감행된다.


 소월시의 진면목은 그의 시가 ‘생각하는 시’로서의 측면, 즉 철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인식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할 것.

 시인들의 시어에 관한 끈질긴 천착과 노력이야말로 문화사적인 면에서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적 자존심 확립운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현실을 비판하고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당위적인 일인 만큼 어디까지나 시의 본령에 충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종현의 시는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다시 출출세간으로 나아가는 구도행의 실천이자 살아있음의 징표.

 올바른 비평정신과 참다운 역사의식이 깊이 있는 정신세계와 연결되고 탁월한 예술정신으로 형상화될 때 비로소 역사 속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위대한 시와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4)


 만해와 소월, 지용과 석정, 미당과 혜산 등이 동행하는 이 글들에서 김재홍의 비평적 견해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한국 현대 형이상학 시의 계보학적 진원 지대에 위치한 이들 문학의 공과(功過)를 통해 시의 본령으로서의 정신사적 의의와 가치를 추출해볼 수 있다는 것, 정신사적 측면에서 시의 본령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역사의식을 매개할 때 견인될 수 있다는 것, 이들의 시는 제각각의 방식으로 형식 미학을 충족시키며 동시대의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생생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는 점, 그러나 다만 아쉽게도 미당의 일부 시편들은 “올바른 비평정신과 참다운 역사의식이 깊이 있는 정신세계와 연결되고 탁월한 예술정신으로 형상화될 때 비로소 역사 속에 영원히 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김재홍 비평의 선명한 방향성, 다시 말해 그의 비평적 글쓰기가 동시대의 역사철학적 이념과 그것의 미학적 실천을 동시에 문제 삼고 있음을 암시하는 이 글들은 한국현대시사에 등장하는 주요 시인들을 꾸준히 호명하면서도 문학비평의 현재성(현장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 서 주목된다. 이전 그의 평론집 제명들이 마치 예고라도 하듯이 김재홍은 “한국현대시의 사적탐구”(1997) 통해 “현대시와 역사의식”(1988)의 조합이라는 “시와 진실”(1983)의 현재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재홍 비평의 현장성 및 현재성은 한국문학사 전체성의 차원, 즉 문학사의 세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그것의 부분적 재구성을 통해 변함없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후 그의 비평적 행보가 한국근현대시사의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접목을 통한 통합의 차원, 즉 해방공간을 거쳐 산업화 시대의 “문학 분계선 위에서” 참여시와 민중시의 계보학적 탐사로 이어질 것을 진단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3.

 김재홍 생전의 마지막 비평집 『생명․사랑․평등의 시학 탐구』는 일관되게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켜 보인다. 저자가 “나로서의 님을 통해서 나를 배우면서,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의 의미와 가치란 어디에 놓여지는가를 탐구하는 천로역정의 길”5)이라고 부르는 그 지점은 각각 “한국시의 형이상 탐구”, “문학 분계선 위에서”, “한국시 자유인의 계보”, “한국시의 지성과 사랑” 등 네 개의 경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 그 경로의 초입에 이정표처럼 세워져 있는 문구들, 즉 각각의 주제문들은 김재홍의 비평이 가닿으려는 궁극의 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고은의 문학작품들을 관류하는 정신이나 의식의 체계를 문학사상이라 불러볼 때, 그의 문학사상은 대략 자유사상․평등사상/민족사상․민중사상/통일사상․진보사상/생명사상 및 평화의 철학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p.274.

 (김지하의 문학은) 무엇보다도 민중적 정신을 민족적 양식으로 통합하여 민중적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개척하고 이것을 사랑의 철학, 평화와 생명의 사상으로 이끌어 올린 공적이야말로 가히 혁혁하다고 할 것이다. p.338(괄호는 필자).

 그렇다면 과연 그의 모더니스트 시정신으로부터 이러한 역사의식의 시로의 전환이 외발적인가 혹은 내발적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스트 김수영이 4.19를 기점으로 하여 현실참여 시인으로 변모한 사실과 김규동의 이러한 문학정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p.349.

 이성부의 비판적 현실인식은 그것이 내재한 윤리의식의 건강성으로 인해서 능동적인 사회의식 및 역사의식으로 그 지평을 확대해 가고 있는 데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p.359.


 인용 글에서 김재홍이 고은, 김지하, 김규동, 이성부 등의 작품 분석을 통해 다다른 “문학 분계선”은, 다름 아닌 “역사의식과 민중의식” 및 “민족의식과 평등의식”이 쉴 새 없이 생성/분출되는 지점이다. 김재홍의 비평을 이끄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항인 <시(詩)정신>의 분화된 형태, 또는 그 자신이 “정신이나 의식 체계”로서의 “문학사상”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책의 어느 곳을 들추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김재홍에게 있어 시정신의 발현 양상과 문학사상의 유무 여부는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김재홍이 이른바 ‘사상성’을 내장한 작품들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높은 점수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를 향한 비판적 주제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하거나 그러한 정신 태도를 보이는 문학에 관하여 대체로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비판적 현실인식”과 사상성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문학에 대해서도 비평적 관심을 끊임없이 열어두고 있다. 그보다도 거듭 강조하지만 김재홍의 비평은 “깊이 있는 정신세계”가 “탁월한 예술정신으로 형상화될 때”, “정치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이 유연하게 결합할 때, 비로소 거기서 “위대한 시와 시인의 모습”6)을 긍정적으로 현상한다. 인용 글에 덧붙여진 몇몇의 세부적 평가들은 이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가령, 모순된 현실 정황과의 치열한 대결의식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주제의 작위성이나 인물의 상투성을 지니고 있다는 한계점을 내포한다”거나, “방대한 창작량과 호한한 작품세계에 따르는 비슷비슷한 내용이나 표현, 비유, 이미지가 자주 발견되며 어법적인 무리나 시상의 부자연스러움이 나타나는” 작품에 대해서는 김재홍의 비평은 여지없이 비판의 칼날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다.

 김재홍의 비평이 작품의 미학적 가치와 정신·사상사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탁월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다음의 발언들을 통해서도 견인할 수 있다.


 시는, 시정신이란 사랑이나 슬픔, 또는 양심이나 정의 등 근원적인 의미의 진실법칙에 바탕을 둔다. 그러기에 시는 순수한 것이고 가장 높은 정신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예술로서의 고귀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p.459.

 시에서 언어의 자유로움은 상상력의 자유로움을 의미하며, 이것은 결국 정신의 자유로움과 그 탄력성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p.499.7)


 인용문은 한국현대문학의 장에서 “자유인의 계보”를 구축하였거나 시의 외피를 “지성과 사랑”으로 감싸 안은 시인들에게 바쳐지고 있다. 조병화/김남조/천상병/조오현/정현종/신달자/문정희/김초혜/조정권/이가림/송수권/유자효 등이 그 구체적 대상일진대, 여기서 김재홍은 부세청연 선연선과(浮世淸緣 善緣善果)의 결실인 이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사랑과 우정의 마음을 그들의 다양한 시적 장치들과 주제의식을 경유하며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예들 들어 “조병화의 시는 사랑의 정감에서 시작하여 사랑의 철학을 지향해 감으로써 현대문명 속에 자동인형 기계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적인 체온과 향기를 일깨워 준 것”, “천상병의 시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연면히 이어온 진짜 자유인의 한 계보”, “정현종의 시에서 종종 발견되는 파격의 모습들은 단순히 기법적인 실험성을 넘어서 부정정신에 근거한 자유정신의 발현”, “(김남조)의 시는 긴장과 갈등의 격렬한 대립이자 고뇌의 고조”, “(김후란의) 시는 자연사와 인간사의 아름다운 만남을 주선”, “(유자효의) 시는 삶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회복 또는 새로운 희망을 예비” 등등의 평가는 그 세목별 근거로 놓여진다. 김재홍이 이러한 평가를 주동하게 한 일차적 요인이 문단사적 사제관계 및 선배 문인들에 대한 예우의 차원, 또는 그의 문우들을 향한 애틋함의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애써 부인하기는 다소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김재홍의 이 비평적 진단을 비단 그것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현명한 일도 못된다.

 기실, 김재홍 비평의 한 특성은 시인과 그들의 텍스트에 대해 다분히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그의 문학은 자주 시인들의 편에 서서 항상 그들의 전언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그들 삶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김재홍의 평론이 단순히 자신과 관계된 관록 있는 시인과의 손쉬운 타협을 청하거나, 불우했던 생애를 짊어졌던 시인들의 삶을 연민과 동정의 차원에서 비평 정신의 매개 없이 무분별하게 전달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문학은 문단의 ‘관록’ 앞에서 당당하고, 사소한 연민과 동정을 마주할 때 보다 냉정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일전에 그가 내린 현재진행형의 가혹한 평가들, “시로서의 전형성에서 비껴서 있다든가 구조적 긴장감이 다소 약하고 미적 견인력이 이완되는 경우가 있다는 비판”과 “새로운 도전과 모색을 시도해 나아가야 하는 하나의 운명적 시점에 처해 있는 것”이라는 내용들이 모두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시단의 대가급 시인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듭 상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차라리 이 부근에서 김재홍 비평의 궁극적 방향, 그가 애초에 “인간적·인류적 안간힘”으로 가닿고자 한 시(시인)의 진경 지대가 투명하게 내려다보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삶의 제반 현실적 문제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인간의 고유한 내면에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그 시(詩), 문학과 철학의 접경지역에서 사유하는 그 시인(詩人)들 말이다. 김재홍 식의 명명법으로 환기해보이면, “생명·사랑·평등”의 시정신이 내면의 도처에서 꿈틀거리는 그 <시와 시학>들 말이다.


4.

 한국 문단에서 김재홍은 성실한 문학 비평가이자 계간지 『시와시학』의 창간인으로 분명하게 기억된다. 1991년 겨울에 발기한 계간지 『시와시학』은 김재홍의 문학적 생애에서 반평생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동반자였던 이유는 일생의 신념이었던 시의 대중화 작업을 오랜 시간 함께 실천해온 상징적 기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김재홍에게 그것은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에게는 시”라는 서정정신을 주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더 없이 소중한 문학의 현장이자 통로였다.

 혹, 어쩌면 『시와시학』은 김재홍 스스로가 짊어진 ‘업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절에 시 전문 계간지를 창간하고 운영하는 일이란 결코 말처럼 쉬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심상』, 『시문학』, 『현대시학』 등의 월간지가 주류를 이루었던 시기에 계간지를 기획하고 30여 년 이상 운영하는 과정의 지난함이란 이루 다 말할 바가 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재홍과 『시와시학』을 향한 “시인보다 더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이 계시어 이 기우뚱거리는 시절 시와 시인을 한사코 지키는 이 계시어 여기 시와시학인지라”라는 일전 원로시인의 글귀는 분명 최대치의 축사이자 축원이었다. 하지만 “시인보다 더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이”의 운명이 결과적으로 가혹한 문학적 업보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종국에 그것은 행복한 저주의 아이러니라는 등식이 성립될 법도 하다.

 이렇듯 김재홍은 문학평론가이자 유력 잡지의 발행인으로서 입체적 삶을 건너왔다. 이는 그의 삶과 학문이 드물게 이론과 실천의 조합, 혹은 일상과 예술의 접경지대에서 구축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현대문학상과 만해대상을 비롯한 김달진문학상의 수상은 아마도 “시인보다 더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그에게 우리 학계와 문단이 보내는 최소한의 답례였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 시는 그 사람을 가졌다”라는 고 김남조 시인의 평가 역시 이 땅의 시와 시학을 위해 헌신한 평론가 김재홍을 향한 따뜻한 격려이자 위로였다. 하지만 일 년 전 그가 떠난 지금, 이제 우리 문학사는 슬픔을 뒤로 하고 저들 시인의 말을 어쩔 수 없이 수정해야 한다. “시인보다 더 시와 시인을 사랑했던” 문학비평가 김재홍, 한때 “우리 시는 그 사람을 가졌었다”라는 과거형으로.

  • 1) 김재홍, 『한용운 문학연구』, 일지사, 1982, 8쪽.
  • 2) 김창수, 「분석적 투시주의 시학의 도정」, 『서정시학』, 2015년 여름호, 98쪽.
  • 3) 김재홍, 『생명·사랑·자유의 詩學』, 동학사, 1999, 6쪽
  • 4) 김재홍, 『김재홍 문학전집』 제3권과 제7권, 국학자료원, 2020, <참조>.
  • 5) 김재홍, 「머리말」, 『생명․사랑․평등의 시학 탐구-한국현대시인연구3』, 서정시학, 2014.
  • 6) 같은 책, 159쪽.
  • 7) 같은 책, 4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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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천 ‘어제’를 봉합하는 거듭나기의 시(詩)

1. 소월이 그러하듯, 황동규 시인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황동규는 1958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력 67년을 지나는 시인이다. 그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을 발표한 후 『풍장』(1995)을 거쳐 지난번 『봄비를 맞다』(2024)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여덟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000편에 거의 근접한 그의 시세계는 이번 근작 시편에도 등장하는 평론가 이숭원의 일전 언급대로,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꽃의 고요』 해설)이라고 일단 상징적으로 명명할 법하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지난 세월동안 시인이 꿈꾸며 가꿔온 삶의 시간들이 때로는 황홀한 감각과 사유로, 또 서늘하면서도 생기 있는 언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몸짓을 극서정시가 견인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황동규 시의 독특한 구성 원리이자 시세계 전반을 추동하는 극서정시는 단적으로 말해 ‘극’을 내장한 서정시이다. 시에 극적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반전이나 시적 자아의 깨달음과 거듭남 같은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시인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극서정시는 “극(劇)적 구조를 지니고 싶다”라는 시인의 선언적 문구가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표사에 실리면서 한국 시사에 본격적으로 등재된다. 이후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있었다』(2003), 『꽃의 고요』(2006)는 물론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편들은 극서정시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이전 그의 시가 ‘시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시’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의 말마따나 “명칭은 나중에 붙였지만,” “극서정시는 초기부터 있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령 황동규 시세계의 중심축을 떠받치던 일련의 사랑 시편은 기존의 전통 서정시와 달리 극적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들에서 ‘사랑(이야기)’는 극서정시 구조를 통해 새롭게 변주되고 그때그때마다의 정황적 의미를 획득한다. 데뷔작 「즐거운 편지」를 위시한 황동규의 사랑 노래는 재래의 수동적이고 추상화된 주제 영역을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사소’하고 ‘조그만’하며 ‘비리고’ ‘쨍한’ 극적 사랑의 계기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간 속에 비치는 시간’의 감지와 ‘홀로움(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의 정서, 그리고 세계의 필연성과 필연적으로 동행하는 우연성의 수용은 사랑주의자 황동규가 자신의 사랑 시편들과 함께 극서정시를 가동해온 의식/무의식의 흔적들이다. 아울러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여행(시)과 시인의 타고난 예술적 정열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여기에 죽음에의 선주(先走)를 감행하여 확보한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전환 사유와 선(禪)에의 깊은 관심은 그의 시에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 이렇듯 황동규의 시는 일상과 탈일상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시와 삶이 하나 되는 극적인 순간의 풍경을 연출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낯선 시선과 호기심으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의 진면목을 환하게 그려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황홀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풍경들을 노래하고 있다. 2. 황동규의 주요 시편들이 극적 구조를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이는 근작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그의 「벽오동」은 작품의 말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글귀를 위치시킴으로써 이즈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 같이 물드는가 했더니 벽오동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쁜데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다. 몸에 걸쳤던 것 낌새 못채게 털어버리고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서었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 아니겠나? 「벽오동」 전문 시 「벽오동」의 도입부에는 세 개의 나무가 등장한다. “은행, 벽오동, 벚” 나무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제목이 ‘벽오동’으로 제시된 이유는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쁘”고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유독 ‘벽오동’만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기 때문이다. “벽오동”만이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벽오동」의 시적 반전은 이 부근에서 준비된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와 같은 화자의 의도 섞인 물음은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의 상황 묘사로 일관했던 이 시를 급기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확인의 지대로 인도한다. 이때 10행의 접속 부사 “하지만”은 시적 자아가 겪는 거듭남의 여정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암시한다. 그 거듭남이란 “엇박자”와 정박자의 구분이 없는, 아니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자세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이 시는 평범한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리듬”과 “같이” 하지 않은 자연생명을 통해 시적 화자의 변화된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공존한다든가,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든가, 더하여 죽음은 삶의 시간에서 분리된 이원화된 공간이 아니라든가 등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저 찬란하면서도 심오한 구문이 간직한 모든 가능태의 해석들로 말이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색즉시공(色卽示空) 살기”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어지는 「시에 대한 단상들」에도 재차 변주되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령, 최근 시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렇다. “시 쓰는 일은” “우연 같은 우연, 우연 아니게 만나는” 길이고, “더 이상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을 때/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꿈틀”대는 순간이며, “명동 간다는 게 충무로역에 내렸”지만 가끔씩은 “그런 시가 생각보다 더 실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날것 보다는 제대로 익힌 시가 그래도” 좋겠으나 “익힌 날것도 있”다는 생각.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는 늘 1:1”이지만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쉬고 있는 곤줄박이”를 “안 본다 안 본다 하면서 더 보고 싶은 사람”처럼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생각 등등. 이렇듯 황동규에게 시는 고정불변의 규율과 법칙으로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유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시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맛보려”(「시가 사람을 홀리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드는 생감각의 집결지이고, 변화무쌍한 색(色)이자 공(空)의 세계다. 삶의 실제가 그러하듯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이치가 투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전이되어 황홀하게 펼쳐지는 구체적 장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앞문으로 들어가/뒷문을 찾지 못하는 시도 시다.” 그 시들 속에는 “무심히 돌다 뒤꼍에서 만나는/이끼, 환한 빛의 섬들”이 존재한다. “이크 밟을 뻔!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앉아 쉬고 있는 곤줄박이”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3. 아무래도 황동규의 근작 시편을 읽다보면, 노년의 시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노년은 많은 것들을 서서히 세상에 내려놓는 마음의 시간대다.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건으로 고지되듯이, 노년은 유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예고된 시간의 절차이자 필연의 변화이다. 감각기관의 퇴화와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 변화의 대표적 항목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이 필연적 변화의 끄트머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밤 꿈에 너와 나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어. 너 어제 세상 뜨고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네 빈소에 갈 때 현관서부터 가을비 추적추적 뿌렸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던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 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보다 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았다」 전문 「말이 너무 많았다」는 죽음을 경험한 시인의 차분한 언어들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어제 저녁” 가까웠던 이의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다녀왔다.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일 게다. “이제”, “어제”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현관서부터” “추적추적 뿌렸”던 가을비는 이런 화자의 공허한 심리상태를 우회적으로 반영한다.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라는 화자의 읊조림에는 ‘너’를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너와 나”의 “어제”와 “이제” 사이에는 느닷없는 죽음이 가로 놓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너’의 죽음을 처연한 슬픔의 분위기로 몰아가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을 부러 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시인은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을 모나지 않게 적재함으로써 “말보다 더한 말”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유도한다.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많았던 “어제”를 봉합하고 “이제”의 내 삶에서 ‘너’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기실 황동규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단절도, 우리의 현재와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인 계기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어제”의 일상적 시간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짧은 삶에 ‘그때그때마다’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 「말이 너무 많았다」가 ‘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말보다 더한 말”의 진실을 “이제”의 삶에서 환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 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전문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는 노년의 시인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모처럼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노년의 불편함에 난감해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교수가 치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세월의 늙음이 “지워버린” “그 말”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경험하는 노년의 불편함이란 당연히 기억력의 감퇴이다. “뇌혈관”의 노화가 야기하는 이런 불편함은 사실 “참 별일이다”라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즉시 요양원 보내”야 할 만큼 걱정스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낱말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매일 두세 번씩 만나”는 흔한 모국어라면 사태는 보다 심각하다. 그렇기는 하나 시의 화자는 이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국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듯하다.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음에도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영단어 “dementia”가 아니라 “치매”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분히 혼란스럽기는 하되, 이마저도 삶의 “별일”로 인정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워버린 말”의 사소함과 심각함 사이의 긴장감은 “별일은 참 별일이다”라는 시인의 무심한 독백으로 무리 없이 해소된다. 이 시가 노년의 불편함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소환하는 극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인에게 발생한 일종의 이중 언어(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쓴 시인 파울 첼란의 삶으로 이월되는 것이다. 특히 파울 첼란의 「죽음의 둔주곡」(Todesfuge)이 음악적 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 모티프의 반복·변형 구조를 취한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과거’ 시적 화자와의 친연성마저도 확보된다. “검은 우유가/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라는 시구가 전혀 어색하거나 새삼스럽지 않다. 이렇듯 황동규의 근작 시편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그의 시는 “밝고 생생한”(「프리지아」) 생명과 마주하고 실존의 삶을 향유하며 환한 생의 감각으로 세계를 노래한다. 만년에 들어서도 시인은 “어제”를 봉합하며 거듭나기를 꿈꾼다. 어쩌면 저 근작 시편들 뒤에서 시인은 속엣 말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년의 필연적 변화, 하지만 그 불편함과 난처함마저도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맛’이고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라고.

계간 청색종이 이성천 황동규죽음에의 선주극서정거듭남노년시 2025
송현지 대화의 기술 — 이혜원, 『고백의 파동』 (파란, 2024)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계간 현대비평 송현지 이혜원고백의파동대화경청지형학적비평 2025
남기택 타자의 외연 ― 이형권론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계간 현대비평 남기택 이형권감각공감타자환상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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