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문학평론 2024년 여름호(제191호)
한국 전래동화 연구가 손동인의 중⋅장편 동화 특성
1. 펼치며
손동인(1924~1992)은 경남 합천 출신으로 동화작가, 시인, 수필가, 소설가 등으로 활동한 문학가이면서 교육자, 학자이다. 평생 그가 쓴 작품으로 동화가 120여 편, 시가 80여 편, 수필이 370여 편, 소설이 90여 편 되었고, 한국 전래동화 연구 논문도 47편이나 남겼다.1)
이 중에서 손동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역은 당연히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첫 출발은 시문학 분야로서, 1950년 《문예》지에 시 「누나의 무덤가에서」, 「산골의 봄」, 「별리」가 차례로 서정주, 김영랑, 모윤숙의 추천을 받아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51년에는 소설 「5분 전」 등을, 수필 「청산서」 등을 발표하고, 1952년에는 ‘한국아동문고 현상 모집’에 동화 「잃어버린 누나」가 당선되어 드디어 동화 창작에 깊숙하게 첫발을 들여놓았다. 1957년에 첫동화집 『병아리 삼형제』, 1960년에 두 번째 동화집 『꽃수레』을 출간한 뒤 1968년 인천교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에 온 힘을 쏟았다. 동료 교수였던 문학평론가 문광영은 “그는 항상 동심 속에 살아왔다. 동료 교수나 학생들이 말하듯 훈훈하고 도량이 넓은 인간성 못지않게 어린이 세계를 잘 이해했고, 또 그들의 꿈과 이상이 무엇인지 잘 진단하였다”고 하면서 “70~80년대 20여 년의 대학 강단 생활에서 원숙미가 넘치는 창작활동은 물론 연구 업적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정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훈도(訓導)라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인천교대 교수까지 이어진 그의 교직 생활 속에서 동심의 DNA가 잘 발현된 영역이 바로 동화 창작과 전래동요 연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를 아동 문학 작가로 자리매김 하게 하였는데, 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의 대상이며, 주체자인 아동에게 쏟는 열정이 문학작품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진정한 아동 사랑이, 시인으로 등단하여 성인문학으로 출발한 그를 아동 작가로 변신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생활 혁명이요, 생의 전기(轉機)가 되었다.
-정화숙의 「손동인론」 중(14쪽)에서-
창작동화 못지않게 그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우리 고유의 전래동화 채집과 그 연구, 나아가 어린이를 위한 전래동화 독자의 저변 확대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 중(645쪽)에서-
정화숙의 글에서 그의 동화 창작은 ‘교육의 대상이며, 주체자인 아동에게 쏟는 열정’이 그 바탕이라고 하였고, 문광영의 글에서도 그가 심혈을 쏟은 한국 전래동화 연구도 ‘어린이를 위한 전래동화 독자의 저변 확대’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정화숙이나 문광영처럼 손동인의 작가 정신 중‘진정한 아동 사랑’과 ‘어린이’를 애써 강조한 이들도 있지만 이재철처럼 ‘그는 처음부터 아동의 편에 서서 아동적 안목으로 아동을 파악하고, 그 바탕 위에서 아동문학을 구축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성인적 위치에서 성인적 목적의식에 의하여 아동문학을 하려는 것이었다’고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한계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이도 있었다.
손동인 생전에 발간한 동화집으로는 『병아리 삼형제』(1957), 『꽃수레』(1960), 『버들강아지』(1980), 『하늘을 나는 코스모스』(1982), 『까치고동 목걸이』(1985), 『마음속의 꽃초롱』(1986), 『앙 누구하고 놀지』(1987), 『가장 귀한 커튼』(1987), 『언덕 너머 햇살이』(1989), 『하늘에 뜬 돌도끼』(1989),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1991), 『광화문의 노랑나비』(1991) 등 12권이다. 사후에는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학원출판사, 1994), 『풀안경』(금성출판사, 1999), 대표 동화선집 『은행잎 훈장』(지경사, 2002) 등이 간행되었다. 동화집 『꽃수레』로 제1회 부산시 아동문학상(1960), 논문 「한국 전래동화의 작중 사건고」로 제3회 이주홍 아동문학상(1983), 단편 동화 「옹달샘가의 지옥새」로 제6회 한국불교아동문학상(1988), 장편소설 「언덕 너머 햇살이」로 제24회 소천아동문학상(1990), 중편 동화 「하늘에 뜬 돌토끼」로 대한민국 문학상(1990) 등을 수상하였다.
손동인에 대한 연구는 인간론을 비롯하여 전래동화, 창작동화, 수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 석사 학위 논문으로는 정화숙의 「손동인론 -수필 작품에 나타난 의식 세계와 장르 확대와 실험을 중심으로」(인천교대, 2001), 오정희의 「손동인의 『병아리 삼형제』 연구」(경남대, 2013) 등 2편이고, 작품론으로는 장호의 「손동인론」(《횃불》 2월호, 1970), 이재철의 「손동인론」(『한국아동문학작가론』, 1988),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한국현대아동문학 작가・작품론』, 1991), 문광영의 「고 손동인의 문학적 삶과 동화세계」(《아동문학평론》65호, 1992 겨울호) 등이 있으며, 인간론으로는 김계곤의 「인간 손동인 上, 下」(《광장》1989. 3월호, 4월호) 등이 있다. 이 중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은 동화 영역과 단편소설 영역으로 나누어 각각 문학적 특성을 깊이 있고 알차게 분석한 점, 자료적 가치가 큰 손동인의 창작동화 목록까지 첨부한 점에서 특히 눈에 들어왔다.
정화숙은 그의 석사 논문에서 중요한 수필 몇 편 속에 나타난 인간관 등 의식 세계 분석을 통해 시, 소설, 동화의 문학세계를 조망하였는데 손동인의 의식 세계를 아동과 순수세계에 대한 지향, 희망적 미래지향 의식 등 다섯 가지로 나누면서 인간 형성의 명제에서 동화가 지닌 교육적 효용성이나 정신적 효용을 매우 중요시한 것이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의식이라고 분석하고 손동인의 동화의 특성은 다분히 성인적(成人的)인 위치에서 성인적 목적의식이 반영된 동화, 대부분 아동의 외적, 표면적 일상생활에 초점을 둔 생활 동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또 오정희는 그의 석사 논문에서 첫동화집 『병아리 삼형제』의 26편 동화를 대상으로 어린이의 발달 특성과 인지 발달 단계를 고려하여 작품 속 인물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①순수 동심으로 현실 세계의 인식을 깨닫는 어린이, ②주변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는 어린이, ③설화적 상상을 통한 대행 경험하는 어린이, ④가족 해체 등 불행한 삶을 극복해 나가는 어린이 등으로 나누어 보았다. 장호는 「손동인론」에서 그의 동화 주인공의 유형을 우는 아이, 자라는 아이, 착한 아이로 요약하였다. 이재철은 그의 동화 특징으로 첫째 대부분 생활 동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 둘째 의도적인 교화성이 드러난 점, 셋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개성이 단일하다는 점 등으로 분석하였다. 문광영은 손동인 동화 세계의 특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첫째 동화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불우한 어린이, 불행한 어린이로 일관하고 있으며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개척해 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져 있고, 둘째 자연에 대한 눈물이나 사랑, 감격, 기쁨으로 이어지는 따스한 인간애의 눈물로 점철되어 있어 감동을 주고 있으며, 셋째 대부분의 동화가 스토리 중심의 생활동화 형태를 취하고 있고 환상적인 세계보다는 현장성, 현실적 세계에 치중한 교훈적인 의도가 깔려있다고 분석하였다. 앞의 연구자들의 평가를 요약하면 손동인의 동화문학은 첫째 생활 동화 형태를 보이고, 둘째 자신의 불행을 극복해 가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셋째 의도적인 교훈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고에서는 한국 전래동요 연구가로서 손동인의 면모를 살펴보고, 중요한 5편의 중⋅장편을 대상으로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특성을, 6.25 전쟁 등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 상징적인 인물화 제시, 입체적 구성 방식 도입, 다양한 예화 및 비유담 삽입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자세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2. 한국 전래동요 연구가 손동인
이재철은 손동인에 대하여 ‘전래동화연구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이 방면의 채집과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문광영도 손동인을 칭하여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효시이자 전래동화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이런 역사적인 평가를 안겨준 전래동화 연구서가 바로 『한국 전래동화 연구』(1984)이다. 그는 이 연구서에서 전래동화를 민간 설화의 분신이며 동심을 가진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전래동화의 주제는 고대소설과 같이 권선징악의 도덕률과 인과응보의 인과율이라고 서술하였다. 이 연구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전래동화 100편을 사건의 성격을 중심으로 분석한 내용이 나오는데, 총 사건이 5,838건으로 1편당 평균적으로 약 58건 사건이 발생하며, 사건의 성격을 비애, 괴이, 권세, 애정, 희락, 정의, 희망, 부정, 지식 등 11개로 분류하였다. 이 중에서 비애가 19.4%(1,132건) 1위를 차지해 일반적으로 한국 전래동화의 특성인 비극적 슬픔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는 점을 통계적으로 밝혀내기도 하였다.
그는 1968년 인천교대 부임 직후 「한국 전래동화의 작중 등장물 성격고」(1969)을 비롯하여 「韓國 傳來童話의 作中 事件攷Ⅰ」(1970)~「韓國 傳來童話의 作中 事件攷 Ⅻ」(1983) 등 10여 편에서는 ①정신분석학적 견지, ②호랑이의 사건을 통한 성격 분석, ③작중 사건의 풍속, ④작중 사건의 배경, ⑤허언이나 기망 분석, ⑥위트나 유머 중심 등 다양한 주제로 한국 전래동요를 분석하였다. 또 경기도, 인천 지역 등을 학생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발로 뛰면서 직접 전래동화를 채집하여 「광주군 도척면의 전래동화」(1985), 「파주군 문산읍 전래동화」(1987), 「남양주군 진접면의 전래동화 연구」(1989), 「시흥시 일대의 전래동화 분석 연구」(1990) 등까지 20년 넘게 혼신의 힘을 다해 전래동화를 학술적으로 정리하였다.
전래동화 채집은 (인천교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매년 전국을 돌면서 특히 경기, 인천 지역 외진 곳을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답사, 토박이 주민들을 직접 만나 발굴하였다. 그리고 소멸 위기에 있는 전래동화를 채집 정리하여 학술적으로 분석 고찰한 논문만도 47편에 달하는데, 바로 『한국전래동화연구』(1984)는 이를 집대성, 체계화한 것으로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효시이자 전래동화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한 업적이라 평가된다.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 중(645쪽)에서-
손동인은 전래동화 채집 정리할 때 외부와 접촉이 없는 대대로 토박이들이 사는 곳을 대상으로 방언, 전래동화, 민요, 민속, 전설, 지명, 금기어 등 민속학, 국어학에 관련해 사료적 가치가 큰 분야를 포함해 연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여 어린이용 전래동화집 『민화와 전설』(1979), 『한국 전래동화』(1980), 특히 《창작과 비평사》에서 『한국전래동화집』(1980∼1982) 18권을 연차적으로 발간하였고, 『이상한 여우 수건』(1984)도 출간하였다.
이렇게 그가 전래동화 연구에 집중하게 된 동기는 어디에서 연유가 되었을까. 첫째로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교육대학 교수로서 교육자의 뜨거운 사명감이 당연히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고, 둘째는 ‘소박한 예술성’이 깔려있는 전래동화 속에 ‘어린이의 호기 본능’을 자극하는 많은 사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손동인은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서문에서 전래동화의 성격, 전래동화와 어린이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전래동화는 동화문학이기에 그 속에는 소박하나마 예술성이 깔려있다. 그 예술성으로 미(美)까지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는 전래동화를 사랑하게 된다. 물을 것도 없이 예술의 본질은 미요, 미의 본질은 또한 쾌감이기 때문에, 사실의 나열인 역사보다도 이 쾌감으로 무늬를 놓은 전래동화를 더 즐기게 된다. (중략)
전래동화에서 권선징악이나 교훈성을 어린이의 호기 본능과 직결된 많은 사건을 통하여 전개시키기 때문에, 변전(變轉)을 좋아하는 아동 심리와도 부합된다. 어린이들이 만화나 추리 동화. 모험 동화를 좋아하는 것도, 다양한 이 변전에 동반한 호기 본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손동인의 『한국 전래동화 연구』 서문 중에서-
즉 ‘권선징악이나 교훈성’ 등 어린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교육의 합목적성이 전래동화에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가 한국 전래동화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전래동화의 사건 전개 속에서 ‘다양한 변전에 동반한 어린이의 호기 본능’ 때문에 전래동화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래동화를 예술적 ‘쾌감으로 무늬 놓은 동화’로 정의하고 어린이들이 그런 예술미를 맛보기 위해 전래동화를 더욱 즐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동인이 20여 년 인천교대 재직 기간 내내 전래동화의 채집과 연구, 전래동화집 발간 등 동화 창작뿐만 아니라 전래동화 연구에 몰입한 것은 ‘변전이 동반된 쾌감으로 무늬 놓은 전래동화’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정화숙도 ‘성인적 목적의식에서 바라본 그의 동화 세계가 자연스럽게 권선징악과 교훈성 및 적중성이 짙은 옛날 이야기인 전래동화로 변모되는 것은 자연스런 변신’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재철도 ‘손동인 동화에서 등장인물은 현실의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아동들의 여러 가지 미묘한 개성보다는 스토리의 전개에 필요한 개성만을 설정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그가 연구한 전래동화적인 등장인물의 성격과 유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전래동화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설화적 전개 경향은 1957년에 발간한 첫 동화집 『병아리 삼형제』에 실린 몇 편의 동화에 이미 나타나 있다. 오정희의 논문에서 언급한 ‘설화적 상상을 통한 대행 경험’이 그것인데, 「솔개와 황새」, 「올빼미와 꿀벌과」, 「병아리 삼형제」, 「도둑」 등 네 편의 동화는 초자연적인 사건 형태의 옛날이야기로서 교훈적 요소인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적인 주제와 유래담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하였다.
3. 손동인 중⋅장편 동화의 특성 몇 가지
손동인의 동화문학에 대한 여러 연구자료를 읽다 보면 그에 대하여 상당히 대조적인 평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문학평론가 문광영은 ‘손동인의 동화 세계는 교육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들의 꿈과 용기, 애틋한 정서가 살아 숨쉬고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펼쳐지며, 가슴 뭉클한 카타르시스적 교감을 맛보게 하고, 섬세한 언어, 리듬감을 살란 세련된 문장 구사’라는 손동인만이 지닌 독특한 문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극찬한 반면 문학평론가 이재철은 ‘작품의 의도적인 교화성(敎化性)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작품이 정경의 디테일 묘사보다는 사건 중심의 구성에 치중하여 때로는 줄거리의 진행에만 급급하는 인상까지 받기도 하고, 아동들의 개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짙으며, 그런 까닭으로 연령이나 성장도표현에 있어 더러 무리가 엿보인다’고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분명히 그의 많은 동화는 한편으로‘슬프고도 아름다운 감동적인 이야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너무 의도적인 교화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손동인의 동화문학에 대한 상반된 평가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동화가 가지는 감동성과 교화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양면적 가치 중 한 측면을 강조해 따로 언급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동화집 『버들강아지』(1980)의 「책 끝에」에 쓴 글이나 동화집 『하늘에 뜬 돌도끼』(1989)의 머리말에 쓴 글을 보면 모두 그가 추구했던 동화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수필집 『이 외나무 다리 난 우얄꼬』(198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화는 어린이의 가슴에다 사랑과 꿈과 정의와 용기와 진실을 심어주는 좋은 길잡이입니다. 이 동화집이 여러분들의 가슴에다 이런 생명들을 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동화집 『버들강아지』의 「책 끝에」 중(218쪽)에서-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의 말처럼 어릴 때 얻은 감동이나 가르침은 늙어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감동이나 가르침을 많이 주는 동화를 어릴 때 많이 듣거나 읽은 사람은 커서도 결코 어릴 때의 그 고운 마음씨를 잃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동화집 『하늘에 뜬 돌토끼』의 머리말 중(5쪽)에서-
목자(牧者)는 피리를 불어 그들을 양달과 자양분이 넘치는 초원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런 초원의 하나에 문학의 꽃밭이 있다. 살벌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헤매는 아동들을 화사한 꽃밭으로 인도하자. 문학은 위대한 설득력과 무한한 가능성과 고귀한 인생을 가르쳐 준다.
-수필집 『이 외나무 다리 난 우얄꼬』 중(49쪽)에서-
손동인이 동화를 ‘사랑과 꿈과 정의와 용기와 진실을 심어주는 길잡이’라든지, ‘감동이나 가르침을 많이 주는 동화’라든지, ‘문학은 위대한 설득력과 무한한 가능성과 고귀한 인생을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을 보면 정의와 용기와 진실, 가르침, 설득력 등 동화의 효용성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화숙도 그의 논문에서 손동인은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고 호흡하고 이해하고 싶은 심정에서 순수 문학보다는 교육적 효용면에서 동화를 썼다고 하였다.
문학평론가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에 수록된 동화 목록(『한국현대아동문학 작가・작품론』, 672~676쪽)에 의하면 손동인은 생전에 단편 동화 115편 정도, 중편 동화 6편, 장편 동화 2편 등 총 120여 편의 동화를 창작 발표하였다. 손동인의 대표적인 단편으로는 1980년 그가 직접 언급한‘여러 동화 중에서 가려 뽑은 제3동화집’이라고 한 『버들강아지』에 실린 8편 중 단편 6편과, 사후 2002년에 간행된 손동인 대표 동화선집 『은행잎 훈장』에 실린 17편 등으로 「풀안경」, 「은행잎 훈장」, 「산골 아이들」, 「송아지는 무지개를 타고」, 「철둑길」, 「열 손가락 깨물어도」, 「박노인」, 「뻐꾹새」, 「빵을 먹는 줄장미」, 「사랑의 무지개 다리」 등 23편을 들 수 있다. 중편으로는 「남은 발자취」(1958, 이 작품은 1992년에 「사랑 끝에 오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재발표), 「엄마별 아기별」(1959), 「꽃수레」(1960), 「버들강아지」(1980), 「하늘에 뜬 돌토끼」(1987),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1991), 등 6편 정도이고, 장편으로는 《새벗》에 연재되었던 「언덕 너머 햇살이」(1984~1985),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1991) 등 2편이 있다. 그의 작품 발표 연도를 살펴보면 특히 중⋅장편 동화는 1980년 이후 왕성하게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손동인의 중편 3편과 장편 2편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중편 동화 6편 중에서 1960년대 이전에 창작한 「엄마별 아기별」 그리고 주인공 에스 강아지의 이야기로 주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따라갔다가 길을 잃고 다른 집에서 살다가 고양이와 함께 사건을 벌이는 「사랑 끝에 오는 것」, 골목대장 준이 등 학교 개구쟁이들이 각종 악행을 벌이다가 착한 행동으로 마무리하는 「버들강아지」 등 평면적인 구성을 보인 3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중편 「꽃수레」, 「하늘에 뜬 돌토끼」,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3편과 장편 「언덕 너머 햇살이」,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등 2편 총 5편의 중⋅장편을 대상으로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특성을 자세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중편 「꽃수레」는 아버지가 죽고 의붓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름과 얼굴을 전혀 친어머니를 찾아 직조공장, 과자공장 등을 뒤지다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하는 주인공 고아 석민의 이야기이고, 중편 「하늘에 뜬 돌토끼」는 6.25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여한 할아버지가 철원 전투 중 미처 피난가지 못해 죽은 세호라는 아이의 손에서 돌토끼를 수습하여 전쟁이 끝난 뒤 세호의 부모를 찾아 다녔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1983년 KBS 남북 이산가족 찾기 때 세호를 찾는다는 사연을 발견하고는 주인공 손자 민이와 함께 연천에 내려가 세호의 늙은 부모에게 돌토끼를 전해준다는 이야기이며, 중편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은 쇠머리산 동굴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에게 6.25 전쟁 때 다리를 다친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 지훈이는 할아버지가 주신 괴상한 그림을 받고는 그 그림을 완성하여 6.25 기념 미술 전람회 특선을 받았으나 친할아버지임을 밝히고 멀리 떠나는 쇠머리산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우는 지훈이 이야기이다. 이 세 편의 중편 동화에서 「꽃수레」의 끝없는 고난의 주인공 고아 석민이, 「하늘에 뜬 돌토끼」의 6.25 전쟁 중 처참하게 죽은 세호,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의 풍비박산된 가정에서 온갖 수난을 당하는 주인공 지훈이 등을 통해 고난 극복의 교육적 효용성 측면에서 동화작가 손동인의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난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장편 「언덕 너머 햇살이」는 고아원에 사는 장난꾸러기 주인공 성규는 친구 흥렬이네 집으로 입양되고 고아원장 한테 문둥병 친어머니 비밀을 알고 난 후 흥렬이 아버지까지 따로 나서서 소록도를 방문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성규도 인천, 부평 등 나환자촌을 뒤졌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실제로는 남편 살인죄 누명을 쓰고 복역한 후 출소한 어머니를 고아원에서 상봉한다는 이야기이다.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는 흥남 철수 때 어머니와 헤어져 전쟁고아가 된 주인공 세호가 부산 희망고아원을 거쳐 서울에서 결혼과 함께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KBS 남북 이산가족 찾기 일을 도와주러 간 손자를 통해 함흥초 교사였던 세호 아버지를 찾는 제자를 만나고 베이징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참석하여 흥남에서 세호를 기다리며 살아온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직접 상봉하지 못하고 아시안게임 북한 팀 닥터로 참석한 사촌 동생을 만나 북한 가족 소식을 듣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두 편의 장편 동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언덕 너머 햇살이」의 온갖 고난 끝에 친어머니와 상봉하는 고아원에 사는 주인공 성규,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의 전쟁고아로 출발하여 대학교수로 성공하여 베이징에서 학술대회 발표자, 가족 상봉의 주인공이 된 세호 등도 중편처럼 고진감래의 교육적 효용성이 강조된 인물들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 6.25 전쟁 등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손동인의 중⋅장편 동화 5편에는 먼저 등장인물의 삶의 형태를 선명하게 알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드러나 있다. 문둥병(=한센병), 고아원(=보육원), 의붓어머니, 어머니 가출, 가정 폭력 등 6.25 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적 문제나 가정 문제가 작품의 배경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결국 희망이 없는 현실, 빈곤한 처지, 고아로서의 외톨이, 차가운 사회적 인식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 고아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나도 매정스럽습니다. 그리고 고아들을 아예 못된 아이들로만 보는 이 나쁜 버릇이,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옮아져 있다는 걸 난 오늘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44쪽)에서-
“흥, 오빠, 내가 고아라고 시부모가 결사반대하는 것 있지요? 그러니 어떻게 살아요? 고아인 것도 억울한데 고아 신분을 들고 나와 빌미를 삼으니, 그런 사람들의 괄시를 받아가며 산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내가 이혼을 제기했어요. 내가 무슨 통뼈라고 그런 십자가를 져요?”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82쪽)에서-
「언덕 너머 햇살이」에서 주인공 고아 성규가 반 아이들에게 도둑으로 몰린 사실이나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 시부모의 결혼 결사 반대 앞에 이혼할 수밖에 없는 고아 출신 수희의 참담한 현실은 고아에 대한 무서운 사회적 편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50~60년대 6.25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고아들 또는 보호자 없는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전국에 만들어진 어린이 복지시설 고아원은 1990년대 초반까지 고아들의 금품갈취, 절도, 폭력 등 범죄 같은 일탈 행위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초기 작품인 「꽃수레」를 제외하고 4편 중․장편 동화에서는 6.25 전쟁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6.25 전쟁 당시 전투 장면이 직접 그려져 있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6.25 전쟁터 부상으로 절름발이가 된 지훈의 쇠머리산 친할아버지, 베트남 전쟁 참전 중 왼쪽 눈을 실명한 지훈 아빠가 등장하고, 「언덕 너머 햇살이」에는 6.25 전쟁 상이군인이 된 흥렬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고,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1951년 1.4 후퇴 전에 이루어진 흥남 철수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하늘에 뜬 돌토끼」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과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3편은 6.25 전쟁과 함께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가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현대 한국의 굵직한 역사적 배경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
그 봉우리 하나를 놓고 매우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황새봉의 여기저기에 너무나 많은 포탄이 떨어져 흙과 돌이 날고 총알이 빗발처럼 퍼부어댔습니다. 온 산은 금방 불바다가 되었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목구멍까지 기어들어 왔습니다. 눈도 따가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습니다.
이 바람에 박기자네 전우들이 하나둘씩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갔습니다. 박기자는 이렇게 큰 전투는 처음이었습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소름이 끼치는, 참으로 무서운 전투였습니다.
-「하늘에 뜬 돌토끼」 중(163쪽)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비로소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중략)
“그 개성 근처의 어느 야트막한 고개에서 우리는 전투를 벌였어. 치열한 전투였지. 콩 볶듯이 기관총 소리가 나는가 하면,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나고, 간간이 터지는 대포 소리로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단다. 이 바람에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돌멩이가 날고, 흙먼지가 날아 그야말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5쪽)에서-
「하늘에 뜬 돌토끼」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치열했던 6.25 전쟁의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국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는 기관총 소리, 박격포 소리, 대포 소리 속에서 돌멩이와 흙먼지가 날아오르는 긴박한 전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이 두 장면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전투의 사실적인 모습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투의 모습이 아니다. 바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주인공 민이의 할아버지가 피투성이인 채로 돌토끼를 손에 쥐고 죽어간 세호의 시신을 보여주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는 하늘을 노려보고 죽은 아이도 보여주고 있다.
①어머니가 화장실을 찾아 떠난 얼마 뒤였다. 부두에 정박해 있던 LST의 둔중한 뒷문이 열렸다. 문을 두 개였다. 두꺼운 철판이 부두에 걸쳐졌다. 이와 동시에 줄을 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배에 오르려고 큰 혼잡을 이루었다. 호루라기를 불며 질서를 유지하려고 군인들이 애를 써도 피난민들은 막무가내였다.(22쪽)
②그동안의 서울 생활 중 세호는 4.19와 5.16의 정치 파동을 겪고 이제 <한일협정> 체결의 해를 맞이했다. 거리에는 연일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76쪽)
③그때 방송국에서는 벌써 한 달이 가깝도록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앞 광장과 벽에는 하얗게 사람 찾는 광고가 도배를 한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헤어진 혈육을 만나기 위해, 그 광장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92쪽)
④세호씨는 그날의 학술대회가 끝날 무렵 해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을룡씨와 함께 아시안게임을 보러 갔다. 마침 그날은 북한과 이란의 축구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메인스타디움인 <공인 체육장>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서로 어울려서 꽃밭을 이루었고, 태산이 무너질 듯 남북이 합동 응원을 하고 있었다.(140쪽)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에서-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1950년 6.25 전쟁부터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까지 40년간의 현대 한국 역사가 배경으로 포함되어 있다. ①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이루어진 흥남 철수 작전, ②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 시위, ③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④1990년 9월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 등에 따라 주인공 고아 세호는 흥남철수 때 어머니와 헤어져 부산 고아원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결혼하고 대학교수로 성공하고, 늙은 어머니와 상봉하기 위해 베이징에 가지만 어머니의 병환으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
나. 상징적인 인물화 제시
화가 심규섭은 「보편적 상징과 생태적 상징」(《통일뉴스》 2013.11.15)이라는 글에서 “세상의 모든 미술 작품은 시각적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을 그리든, 풍경이나 동식물과 같은 자연물을 그리든 관계없이 미술의 소재는 모두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화에도 화가가 표현하고 싶은 숨은 상징이 들어있다. 그래서 독자는 그림 작품 속에 녹아있는 깊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동화에도 회화의 상징과 유사한,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방향을 암시하는 의도적인 복선이 깔려있다. 복선이란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미리 그 사건의 가능성을 암시해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손동인의 5편 중․장편 모든 동화에는 놀랍게도 괴이한 상징적인 인물화가 등장한다. 필연적인 사건의 암시 등 소설의 복선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치한 인물화가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가 5편 중 딱 한 군데,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 그것도 숨은 그림찾기처럼 슬쩍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상적인 붓놀림으로 완성한 인물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가 그리다 만 미완성 그림이다. 당연히 유치한 낙서 그림이다. 이상하게도 서로 다른 5편의 동화에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판박이처럼 닮은 그림이다. 그러나 전문 화가가 그린 인물화처럼 깊은 의미를 가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석민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벽에는 아직도 석남이 그려 붙여논 그림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손발이 목에 붙고 이가 엉성성하고 3자를 붙인 듯한 두 귀를 갖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꽃수레」 중(167쪽)에서-
그 종이에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가 엉성하고 손과 다리가 턱 아래에 바로 붙어 목과 가슴과 배가 없는, 해골과 같은 이상한 그림이었다. 지훈이는 그 그림은 어린 꼬마가 그린 인물화라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중략) “그렇지. 이 그림은 6.25 전쟁 때에 어느 꼬마가 그린 그림이란다.”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4쪽)에서-
성규는 눈깔이 빠진 석이가 그린 그 그림을 보자 이상하게도 자기 고아원의 꼬마 아이 분이의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벽에다 그려 놓은, 다리가 목에 붙고 두 팔이 다리에 붙은 그림이었습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25~26쪽)에서-
영규 아저씨는 그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빨이 엉성하고 팔과 다리가 턱 아래 바로 붙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 옆에 서투른 글씨로 비뚤비뚤 <엄마>라고 적혀 있었다.(중략) 그 그림은 틀림없이 죽은 이 아이가 그린 그림이요, 또한 핏자국을 보아 얼마 전의 전투에 희생이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74쪽)에서-
「꽃수레」에는 석민의 어린 여동생 석남이가 그린 이상한 인물화 ‘손발이 목에 붙은 그림’이 등장한다.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도 쇠머리산 할아버지가 지훈이에게 주신 괴이한 인물화 ‘목과 가슴과 배가 없는 해골 같은 그림’이 있다. 「언덕 너머 햇살이」에도 고아원 꼬마 분이가 그린 그림 ‘다리는 목에 붙고 팔은 다리에 붙은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도 ‘이빨이 엉성하고 팔과 다리가 턱 아래 바로 붙은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그 유치한 그림은 곧 <엄마>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하늘에 뜬 돌토끼」 등 3편에는 그림보다 더 직접적인 피범벅 아이의 시신이 등장한다.
세호였습니다. 그 아이는 틀림없는 세호였습니다. 박기자는 얼른 다가가 세호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세호는 멀거니 뜬 눈으로 박기자를 바라본 채 통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세호의 다리와 배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그 일대의 잡초들은 피에 젖어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에 뜬 돌토끼」 중(165쪽)에서-
“꼬마 아이가요?”
“그렇지. 그런데 말야, 그 아이는 한쪽 팔이 달아나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단다. 그리고 두 눈은 하늘을 노려보고 죽어 있었어. 그리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6쪽)에서-
영규 아저씨는 머리 끝이 쭈뼛했다.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의 시체였다. 한쪽 팔은 떨어져 나갔고, 배도 총상을 입었는지 그 일대에 피가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은 치켜뜬 채 그때까지도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시신이었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73쪽)에서-
「하늘에 뜬 돌토끼」나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이나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아이가 각각 등장한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는 ‘다리와 배는 이미 떨어져 나간’ 피범벅인 세호의 시신이 나오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한쪽 팔이 달아나고 얼굴은 피투성이 두 눈은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이의 시신이 나오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한쪽 팔은 떨어져 나갔고 배도 총상을 입었고 두 눈은 치켜뜬 채 하늘을 노려보고’ 죽은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의 시체’가 나온다. 모두 6.25 전쟁으로 인해 피투성인 채 비극적으로 죽은 아이들이다. 그런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전문 화가인 영규 아저씨가 그린 유치한 낙서 그림 같은 괴기스러운 인물화 한 점이 전시회 벽면에 걸리고, 많은 관람객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왜 전문 화가가 유치한 낙서 그림을 그렸을까? 그것은 바로 어린 생명 유린의 잔혹한 전쟁에 대한 고발 때문이었다. 손동인의 중⋅장편 동화 5편에서 그림과 관련된 사건을 통합 정리해 보면 ①어린이들의 유치한 엄마 그림(전쟁 전)→②피범벅의 어린이 시신(전쟁 중)→③화가의 괴기스러운 인물화(전쟁 후)로 단계별 도식화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어린이들의 서투르고 유치한 그림 속에 내재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평화로움이라는 깊은 상징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의 다음 장면을 보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아저씨, 왜 하필이면 그 전쟁터에서 본 그 아이의 그림을 회상해 그리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셨어요?”
“응. 세호야, 그건 내 자그마한 작가 정신이야, 그 그림을 완성함으로써 그 아이의 간절한 염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였지. 동족 상잔의 비극과 민족통일의 염원이, 그 아이의 비참한 주검과 그 아이가 그린 어머니 그림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리라 믿고 있어.(중략) 그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시체를 묻어주지 못하고 서부 전선에서 후퇴한 뒤로 그 아이의 영혼을 달래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저 그림을 그리려 애를 썼지.”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76쪽)에서-
아이가 그린 유치하고 괴상한 어머니의 그림을 통해 ‘동족 상잔의 비극과 민족 통일의 염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즉 작가는 ‘자그마한 작가 정신’으로서 첫째 잔혹한 6.25 전쟁의 실체를 고발하고, 둘째 민족 통일의 염원을 이루고, 셋째 죽은 아이의 영혼을 달래고 싶어서 상징적인 인물화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입체적 구성 방식 도입
소설이나 동화에서의 입체적 구성은 역순행적 구성이라고 하는데 사건의 전개 방식을 자연스러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개하지 않고 시간을 뒤바꾸어 진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꽃수레」에서 석민이 아버지한테 쫓겨난 친어머니의 편지 이야기,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 6.25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한 할아버지 이야기,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다리를 다친 지훈이 할아버지 이야기, 「언덕 너머 햇살이」에서 살인죄 누명으로 10여 년 복역한 성규 어머니 이야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 6.25 전쟁 중 흥남 철수 때 어머니와 헤어진 세호 이야기 등 과거의 사건이나 지나간 이야기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이에 끼워 넣고 있다. 주로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과거-현재 형태로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더 이상을 너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나는 10년 전에 그러니까 네가 아직 두 살 때였지만 너의 아버님께 쫓겨난 너를 낳은 친어머니란다.>
10년 전에 너의 아버님께 쫓겨난 너를 낳은 친어머니…….
석민이는 두 눈이 금방 똥그래지면서도 이 대목을 몇 번이고 눈으로 되훑어 읽었습니다. 이상한 노릇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입니다.
-「꽃수레」 중(79~80쪽)에서-
지훈이는 터질 듯이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할아버지의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지훈이의 눈은 더 휘둥그래지며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중략)
-지훈아, 좀더 그때의 얘기를 적어 줄게. 내가 부상을 당해 전쟁터에서 돌아오니, 네 할미는 어린 네 어미와 고생고생하며 살고 있었어. 그러나 제대를 한 내가 취직도 못하고 상이군인이 되어 구걸이나 하자 네 할미는 참다못해 네 아비를 두고 그만 도망을 가 버렸어.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118쪽)에서-
「꽃수레」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는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직접 쓴 편지 형식을 이용해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두 동화의 주인공 석민과 지훈이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편지 속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에 큰 놀람과 함께 충격에 휩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꽃수레」 발단 부분에서 주인공 석민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벌어진 사건을 친어머니 편지를 통해 알게 된 후 전개, 절정 부분까지 종횡무진 미친 듯이 친어머니를 찾아 나서게 된다.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 할아버지의 편지는 6.25 전쟁부터 현재까지 불행하게 지내왔던 가족의 내력을 소상히 밝히면서 지훈이의 자립을 위한 거액의 저금통장과 함께 멀리 떠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아픔을 담고 있다. 이처럼 두 동화에 등장한 편지가 사건의 입체적 전개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이의 할아버지 박창덕은 그때(=6.25 전쟁) 바로 이 종군기자였습니다. 그리하여 박기자는 부대를 따라 38선 근처의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때 강원도 철원 근처에선 산봉우리 하나를 놓고 그것을 서로 빼앗고 지키느라, 많은 피를 흘리며 오래도록 싸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늘에 뜬 돌토끼」 중(146~147쪽)에서-
그러면 성규의 어머니는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까닭을 밝히자면, 이야기는 성규가 이 세상에 갓 태어났던 옛날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194쪽)에서-
한편으로는 6.25 전쟁으로 인해 자신(=세호)의 넋이 여태 그늘에 잠겨 있었다고 원망하며 당시를 회상했다.(중략)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UN군과 국군은 흥남에 주둔할 수 없게 되어 해상을 통해 12월 16일부터 철수를 개시하게 되었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15쪽)에서-
「하늘에 뜬 돌토끼」, 「언덕 너머 햇살이」,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는 각기 다른 과거 회상 수법을 적용해 입체적 구성을 하고 있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주인공 민이에게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여한 과거 이야기를 직접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고, 「언덕 너머 햇살이」에서는 작가가 3인칭 관찰자 입장으로 개입을 해서 성규의 어머니가 남편 살인죄 누명을 쓰고 복역하고 있는 전체 사건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는 중학교 3학년인 주인공 고아 세호가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된 흥남 철수라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라. 다양한 예화 및 비유담 삽입
일반적으로 동화나 소설에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진행 속도를 조절한다. 독자들은 사건의 흐름에 따라서 재미를 느끼면서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이야기의 진행 속도가 작품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며 독자들의 평가도 달라진다. 사건의 완급 조절은 사건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은 작가의 역량에 해당한다.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사건의 흐름이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소설이나 동화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생동감있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서사를 빨리 진행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인물, 배경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는 사건 진행 속도에 비하여 풀어가는 설명 과정이 포함되어 있기에 전반적으로 속도가 느려 독자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설명 기법은 독자들에게 인물이나 이야기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이 기법은 인물이나 사건 이해에 도움 되는 필수적인 정보라는 조건에 맞아야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손동인의 동화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한 가지는 예화나 비유담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동화 속에 등장하는 예화나 비유담은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예화나 비유담이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나 사건의 흐름에서 앞의 설명 기법처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필수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동인의 동화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의도적인 교화성(敎化性)’이라는 이재철의 유효한 지적도 어쩌면 예화나 비유담을 많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손동인의 5편 중․장편 동화에서 예화나 비유담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작품은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새벽 3시 장례식 이야기, 중국 설화집 <설원>의 올빼미 이야기, 휴머스 중세 신화 이야기,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 고사, 고사성어 미생지신 이야기, 아르키메데스 유레카 이야기, 일본 모모타로 전래동화 이야기, 송시열과 정적 허목의 약방문 고사, 당뇨병 통계 이야기 등 9가지 이상의 예화나 비유담이 실려 있다. 중편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동요 <가을이라 가을바람>, 동요 <우리의 소원> 등 2편, 낭패 고사 등 3가지가 배치되어 있다. 동요는 이 외에도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와 「언덕 너머 햇살이」에 최순애의 <오빠 생각>이 각각 실려 있다. 또한 전래동요는 중편 「하늘에 뜬 돌토끼」에 <달아달아 밝은 달아>와 함께 당나라 시인 이태백 고사가 실려 있다. 가요로는 중편 「하늘에 뜬 돌토끼」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로 전개된 설운도의 <잃어버린 삼십년>, 「언덕 너머 햇살이」에 인용된 정수라의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는 <아, 대한민국> 등이 있다. 또 「언덕 너머 햇살이」에는 소록도 시인 한하운의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가 소록도 통계 자료와 함께 실려 있다. 중편 「꽃수레」에는 주인공 석민이가 같은 반 삼덕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에도 사건의 진행보다는 불국사 석가탑, 토함산 석굴암과 십일면관음보살상, 첨성대 등 여러 가지 역사적인 유물과 사적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지. 옛날에 ‘낭’이란 짐승이 있었는데, 몸뚱이가 왼쪽 반만 있었대. 그리고 ‘패’란 짐승도 있었는데, 패란 짐승은 몸뚱이가 오른쪽 반만을 가지고 있었대. 그러므로 낭과 패는 각기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늘 낭과 패가 함께 붙어야 한 놈 구실을 했대.” “참 괴상한 짐승들도 다 있군요.”
“그런데 지훈아, 우리나라도 꼭 이 ‘낭’과 ‘패’와 같지. 남⋅북 중 어느 것이 낭이고, 패인지 물을 것도 없이 서로 붙어야만(통일이 되어야만) 잘 살 수 있지. 만약 서로 떨어지는 날이면 그야말로 낭패요, 대낭패란 말야.”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9쪽)에서-
오경탁 씨는 소록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소록도는 처음엔 그 생김새가 사슴의 머리와 같다 해서 녹두도라 했으며, 면적은 4,909,064 평방 미터이고, 1916년부터 나환자 수용소가 됐다는 것, 현재 환자 수는 2,261명이며, 외국인 의료 봉사대로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수녀가 5명이나 와 있다는 것, 치료는 다 나라에서 부담하며, 환자들은 모두가 종교를 믿어 장로회가 약 1,800여 명, 천주교가 약 500여 명, 원불교도가 약 20명이나 된다는 것, 그리고 오경탁 씨는 디디에스, 람포레인, 리팜피신 등의 최신 의약품을 쓰기 때문에 나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어 90년대 초에는 환자가 거의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있는 말을 했습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157쪽)에서-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 들어 있는 ‘낭패 고사’와 「언덕 너머 햇살이」에 실려있는 ‘소록도 현황 자료’이다. 낭패 고사에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떨어져 살면 안되는 이유를 ‘낭패’라는 동물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소록도 현황 자료는 소록도 병원 복지과 직원인 오경탁 씨가 흥렬이 아버지에게 소록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데 이 동화의 인물이나 사건 이해에 도움 되는 필수적인 정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 않나 싶다.
4. 덮으며
손동인은 평생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에 몰두한 아동문학가이다. 시 80여 편, 수필 370여 편, 소설 90여 편을 발표하였지만 그의 진면목은 장편 2편을 포함하여 동화 120여 편, 한국 전래동화 연구 논문 47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먼저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효시이자 전래동화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한, 한국 전래동요 연구가로서 손동인의 면모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은 중요한 5편의 중⋅장편을 대상으로 6.25 전쟁과 고아 등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 배치, 괴기스러운 상징적인 인물화 제시, 시간을 넘나드는 입체적 구성 방식 도입, 일본 모모타로 전래동화 등 다양한 예화 및 비유담 삽입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특성을 분석하였다.
아직 물들지 않은 동심(童心)이 우리 곁에 있음은 우정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이 동심을 각자의 마음속에서 불러와야 한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마음속에도 동심은 잠재(潛在)되어 있는 법이다. 인간이 이런 상황일수록 돌아가야 할 인간다운 마음의 고향은 바로 이 동심이다.
-수필집 『이 외나무 다리 난 우얄꼬』 중(97쪽)에서-
이처럼 손동인은 평생 ‘인간다운 마음의 고향은 바로 이 동심’이라고 여기고 동심이 가득한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에 매진하였던 것이다.(끝)
- 1)문학평론가 문광영의 글 「손동인 문학론」에서 언급한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시는 1956년 이전에 발표하였고, 소설은 대표적 단편소설 「인간경품」(1965), 「잉여설」(1957)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뛰어라 젊은 갈대들이여』(1979), 『이 외나무다리 난 우얄꼬』(198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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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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