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제61호)
사랑으로 다시 쓰기
편지지 틈에서 말린 제비꽃잎 하나가 떨어졌을 때
아, 이런!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탄식하며
그것을 붙잡으려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편마차 안에서」
(『충분하다』,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제비꽃잎과 눈
‘나’는 스워바츠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다. ‘나’는 자신이 아는 것, 이를테면 미래에는 그의 시가 사랑과 흠모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가 죽어서는 바벨성에 안장된다는 것을 털어놓고 싶다. 고개를 떨구고 걷던 시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어쩌면 이 상상 여행을 가능케 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스워바츠키가 ‘나’의 존재를 감각하게 만들 만큼 위력적이지는 않다. ‘나’는 그가 담담하게 제비꽃잎을 다시 편지지 사이에 끼워 봉투 안에 넣고 그것을 여행 가방에 집어넣는 모습을,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열심히 좇을 뿐이다.
과거의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편마차 안에서」의 화자는 여행을 떠나기 전 아마도 오랜 기간 마음을 다해 스워바츠키의 흔적을 더듬고 쓰다듬은 듯하다. 그 손길은 스워바츠키가 존재했던 곳으로 ‘나’를 옮겨다두고, 그가 보는 것을 ‘나’ 또한 보게 하였으리라. 그러나 상상의 마주침에서조차 ‘나’는 스워바츠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미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존재하는 시공간을 온전히 감각한 채 그의 멀어짐을 바라볼 뿐이다. 이것은 마치 연구자가 과거의 텍스트를 들여다보며, 텍스트에 담긴 시대와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체온을 감각해보려 노력하는 것과 유사하게도 느껴진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텍스트가 가진 결을 쓰다듬기, 거리를 유지한 채 예의와 존중을 갖출 것. 이러한 태도란 우리가 아무리 어찌하더라도 결국 과거로 돌아가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무기력함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으나, 기실은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는 의지적 노력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범람할 듯 출렁이는 마음을 누른 채 ‘차이에서 비롯되는 타자성을 번역’1)하기 위한 노력이라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엎어질 듯 기울어지는 마음을 바로잡아 곧추세우고, 좁혀지려 하는 거리를 애써 벌리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일 리 없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므로. 이를테면 주민현의 시 「그레텔과 그레텔」에서는 ‘우리’의 손을 잡고 눈 내리는 길을 떠나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를 건설하자 말하는 시의 화자를 만날 수 있다. 화자는 펑펑 내리는 눈이 쌓여 지나온 길이 지워지고 발이 푹푹 빠지는 곳에서 옛날 옛날의 이야기를 다시 쓰자고, “처음 보는 방향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 멀리멀리 가자고 말한다. 쉼 없이 쌓이는 눈이 세계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죽은 마녀가 몸이 붙은 쌍둥이가 / 굶주린 늑대가 / 이해받지 못한 괴물이 등장하고 // 그들은 얼마든지 사랑을 하고 / 싸움을 하”는 이야기를 써볼 수 있다. 그리하여 “흰 실로 새 이야기를 직조”하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2)
이것은 옛이야기가 출현하여 거듭 유통되었던 당대의 맥락으로부터 이야기를 잠시 건져 올려 그 이야기를 ‘우리’의 삶의 맥락과 다시 직조하는 방법론이다. 새로운 씨실과 날실로써 새로운 패턴을 교차해나가는 다시 쓰기를 통해, 텍스트text란 그것을 읽고 쓰는 자와 얽히며 무한 가지의 수로 갈라진다는 명제를 살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가 건네준 자그맣고 단단하게 빛나는 용기를 손에 쥐자니 어떠한 이야기든 새로이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든지 과거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실로 삶이 “다시 쓰기의 역사”라면, 그것은 수월하게 살아지는 것일 리 없다. 내리던 눈은 그치며, 쌓인 눈은 녹고, 흰 눈 위로 뱉어진 가래는 더러운 흔적을 남기며, 무구했던 세계는 실체를 드러내고, 삶은 구구하게 이어지므로. 그 흔적들을 모두 껴안고도 이어지는 것이 삶의 지난함이므로.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러하기에 이전 세계와의 단절이 당장이라도 가능해지는 듯한 산뜻한 선언이, 필연적 지난함을 행간에 묻어두고 직조된 압축적인 시어의 공간이, 시인의 언어로 빚어낸 빛나는 세계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지난한 다시 쓰기의 작업을 수행하는 소설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난하다’라는 표현은 사전적으로는 지극히 어렵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나, 어쩐지 나에게는 너저분하고 더러운 상태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실제로 수행되는 다시 쓰기의 작업이란 너저분하고 더러운 흔적을 꼼꼼히 살피고 챙기는 일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지. 아무래도 다시 쓰기란 잘 드는 면도날을 이용해 더러운 것을 깔끔하게 잘라내는 일이나, 잘 떼어지는 스티커를 떼어내고 새로운 리무벌 스티커를 붙이는 것과는 다른 작업처럼 느껴진다. 그보다는 끈적끈적하게 달
라붙어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에 입김을 불어가며 지워보려 하다가도, 끝내 그 흔적을 보존하며 그와 더불어 전혀 뜻밖의 그림을 그려보는 일에 가깝지 않을지. 이로써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여기 지극한 어려움과 지극한 사랑이 포개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소설들이 있다. 이들 소설에서 사랑은 다시 쓰기를 추동하는 강한 힘이 되는데, 그것은 쓰는 자의 몸과 쓰이는 자의 몸의 감각에 동시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들은 사랑을 재현하는 동시에 사랑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사랑은 텍스트의 안과 밖을 얽는다.
이주혜의 「누의 자리」(『누의 자리』, 자음과모음, 2023)는 ‘나’가 연인 ‘너(희원)’의 죽음 이후, ‘너’가 남긴 뜨개옷과 일기장을 태운 재를 한 쓸쓸했던 왕비의 무덤 옆 빈자리에 묻으려 하는 이야기다. 소설에는 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그 나라 역사상 왕비의 자리에 가장 오래 앉아 있었다’거나, ‘숙빈 최씨(왕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등의 표현에서 유추해본다면, 이 소설에서 ‘여자’로 호명되는 이는 정성왕후로 볼 수 있다. 즉, ‘나’가 구멍을 파는 장소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弘陵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셈이다. 홍릉은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영조 없이 정성왕후의 시체만 안치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찾는 이들은 이 공간을 쓸쓸함의 정서로 받아들이곤 한다.
물론 이 쓸쓸함에는 정성왕후의 생애에 관한 이해도 겹쳐져 있다. 정성왕후는 13세 나이에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혼인하고 66세에 승하하기까지,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중전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영조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살았고 자손을 생산하지 못했기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살아 있는 내내, 죽는 순간, 그리고 죽어서까지 쓸쓸하고 외로웠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3) 그녀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정성왕후가 죽기 직전 검고 괴이한 피를 한 요강이나 토했다면서, “어려서부터 해마다 쌓인 것이 다 나온 것인지 놀랍기 이를 데 없더라”라고 적기도 했다. 이 짧은 문장에는 혜경궁이 감히 넘겨짚어 본 정성왕후의 생애가 담겨 있다.
치우친 무덤이 있는 이 공간은 「누의 자리」 속 ‘너’와 ‘나’에게 있어서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 수북한 흙길을 밟을 수 있는 좋은 산책로다. 그 소리를 특별히 좋아하던 ‘너’는 ‘나’와 함께 이곳을 산책하며 두 여자의 무덤을 지날 때면 “두 여자는 왕이 없어서 쓸쓸했을까?”라고 묻기도 한다.4) ‘나’는 그때마다 딴지를 걸듯 “왕을 따돌리고 편안했을걸?”이라 답해준다. 이러한 딴지는 어쩌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 여자가 삼백여 년 전의 여자에게 전할 수 있는 위로의 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쉽게 개운해지지 못한 채 오래도록 비어 있던 ‘빈터’에 마음을 쓰고, “그럼 저 자리는 영영 비어 있게 되나? 수백 년간 내내 기다리기만 하면서?”라고 묻는다. 그리하여 ‘너’의 죽음 이후 남겨진 ‘나’가 이 무덤의 빈터에, ‘너’가 스스로 뜬 수의와 ‘누’의 일기장을 태운 재를 묻어주려는 것이 이 소설의 얼개다. ‘너’와 함께 살던 연인이자 동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뼛가루를 한 줌도 데려오지 못한 ‘나’는 이제 자신만의 방식으로 ‘너’를 위한 애도를 수행하려 한다.
살아생전의 ‘너’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와 ‘너’는 학원강사 동료로 처음 만난다. ‘너’는 학원 원장의 “학교 선배이자 대학 강사 출신 박사, 그리고 이혼(당)한 여자”다. 이 ‘약력’은 ‘너’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원장에 의해 “씨발년들”로 호명됨으로써 순식간에 ‘너’와 한데 묶이기도 하고, 빨판처럼 들러붙는 ‘너’를 조심하라는 조언을 듣기도 하며, 이따위의 말들로 설명할 수 없는 ‘너’와 점점 더 얽힌다. 이후 ‘너’와 ‘나’는 오 년간 함께 살고, 사 년간 한 침대를 쓰는 연인으로 지내게 된다.
그러나 두 여자의 세계가 안온하고 다정한 유토피아였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나’는 오직 두 사람만이 함께하는 ‘누의 자리’에 자신을 초대하는 ‘너’의 열렬함에 부담을 느끼며 팔의 소름을 조용히 쓰다듬었던 적이 있으며, 함께 써나가는 공동 일기에 조롱과 냉소를 감추지 않았고, 그 일기장이 ‘너’만의 기록장이 될 때까지 그것을 내버려두었으니 말이다. 역사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말갛고 투명하기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가 장례식장에서 ‘너’를 버린 ‘너’의 남편과 아들에게 품는 적대감은 어쩌면 ‘나’ 자신이 그들과 닮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 또한 사랑과 무관심, 책임과 부담스러움, 그리움과 죄책감, 그 모든 것이 어느 정도는 겹치고 흐려진 채로 ‘너’와의 관계의 역사를 축적해온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사랑에 이렇듯 수많은 ‘불순물’이 끼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나’의 애도를 추동하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애도란 단단하게 엉켜 질기게 뿌리내린 것들을 끊어 파고드는, 비밀스럽고도 험난한 구멍 파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구멍은 좁고 길어야 한다. 제법 깊이 박힌 원통 속 흙을 모두 파내고 거기에 질척거리는 너의 재를 부었다. 이제 파낸 흙을 다시 채우고 흔적을 지울 차례다. 수백 년 동안 왕을 기다렸던 빈자리 한 귀퉁이가 이제 너의 자리가 될 것이다. 너는 이곳에서 왕을 따돌리고 느긋해진 한 여자와 나란히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휴식할 것이다. 나는 사계절 내내 이곳을 찾아와 너와 함께 산책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이곳은 누의 자리로 완성될 것이다. (「누의 자리」, 31~32쪽)
소설의 첫 장면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흙 범벅이 된 호미를 사용해 이어진 잔디 뿌리를 끊어내며 긴 구멍을 만들던 ‘나’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기어코 ‘너’의 흔적을 태운 재를 구멍 안으로 흘려보낸다. 질기게 얽힌 잔디 뿌리를 조선사로 읽는다면, 그것을 겨우겨우 끊어내며 ‘너’의 재를 흘려보내는 행위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역사의 작디작은 뿌리털,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르는 가느다란 한 가닥, 그나마도 또다른 여자의 기록을 경유하여 그 내면을 조금이나마 더 들여다볼 수 있던, 평생을 외롭게 살다 간 한 사람의 이야기와 접속해보려는 노력으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외로운 여자의 무덤은 ‘너’의 흔적을 태운 재와 함께 누워 땅속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통해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다시금 시간을 쌓아갈 것이다. 시체로, 타버린 일기장과 수의로, 산 채로.
세자빈 봉씨의 이야기는 역사 관련 매체에서 기상천외한 ‘스캔들’로 반복 호명되며 재생산되어왔으며, 여러 차례 재창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삼색도』는 각별하다. 그 각별함이란 스캔들 이면에 숨겨진 권력의 쟁투를 드러내거나, 숨겨진 음모를 파헤치는 차원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이야기story가 아닌 서사narrative의 층위에서 발견되는 것인데, 특별한 방식으로 조작되어 펼쳐지는 서사가 지극히 관능적이고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는 이 인물에게 ‘큰 사랑’이라는 의미의 ‘태애’라는 이름을 준 데에서부터 정향된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대부분은 태애의 인지와 감각을 좇아 서술되는데, 초점화자로 설정된 태애가 큰 사랑을 하는 사람이므로 소설 또한 더없이 특별한 색감과 촉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태애는 스스로를 규율하는 데 길들여진 세자 ‘향’이 기쁨과 쾌감을 짐짓 억누르려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를 위로해주고 싶어하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소쌍’을 향해 한없이 끌리고야 마는 인물이며, “피가 나는 상처의 딱지를 일부러 벗기고 피멍을 꾹 눌러보는 마음으로” 소쌍 앞에서 단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내는 인물이다. 태애의 사랑은 때로는 격정적이고 파괴적이며,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기도 하다. 그 크나큰 사랑은 범람하여 경계를 흐리고 이곳저곳을 섞으며 넘실넘실 흘러 다니면서 소설 전체를 적신다.
기실 『삼색도』의 서사는 태애가 코끼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모험 서사의 형태를 띠게 된다. 태애는 코끼리라는 동물이 자신의 어머니가 태몽에서 보았다던 그 괴물이 아닌가 생각하며, 창덕궁 후원에 있다는 코끼리를 보러 나선다. 태애와 소쌍 그리고 단지가 코끼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제법 험난하므로 셋 모두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세 인물이 각자의 동기와 목적하에 기묘한 균형을 이루며 사뿐사뿐 이야기를 굴려가는 모습은 소설의 제목과도 잘 어울린다.
이들의 여정에는, 태애가 발목을 삔 소쌍을 업으며 어쩐지 상쾌함을 느끼는 장면도, 역신으로 추정되는 한 사내가 놀라운 침술로 소쌍의 다리를 고쳐주는 가운데 소쌍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도, 그 사내와 세 여자가 함께 떡을 구워 먹는 장면도 깃든다. 역신이 액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호를 해주는 복신으로 그려진다는 점, 역신과 함께 세 여자가 어울려 떡을 구워 먹는다는 점 등은, 무서운 역병인 천연두를 치료의 신으로 환대하는 손님굿의 윤리와 더불어 굿판에 참여하는 이들이 공명하는 순간을 떠올리게도 만든다.5) 이러저러한 의례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태애와 소쌍, 단지는 마침내 코끼리와 마주하게 된다.
각자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지니고 있던 감정들이 확 터져 압도적으로 커다래졌다. 태애는 거대한 사랑을 느꼈는데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경이롭고도 아름다운 크기의 사랑이었다. 태애가 울먹이며 가까이 다가서자 코끼리가 작게 피리 소리를 냈다. 이에 태애가 멈췄고 코끼리가 다시 피리 소리를 냈다. (『삼색도』, 112~113쪽)
소설 속 코끼리와 관련된 서사는 실록에 기록되어 전하는 코끼리에 관한 기사를 변주하고 덧대어 태애의 서사와 접붙인 것이기도 하다. 역사 속 코끼리는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 이를 밟아 죽이고, 사람을 보며 눈물 흘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쓸데에 유익한 점이 없는데 먹는 것은 다른 동물의 열 갑절이나’ 된다면서 코끼리를 경내에서 치워버리려 했고, 그 존재가 발산하는 근원적 곤란함은 통치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압도적인 크기로 인해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다가도 이내 처리하기 어려운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코끼리는, 그 압도성의 속성에서 태애와 닮아 있다. 그것은 두려움과 곤란함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속성을 지닌 존재를 경이롭고도 애처롭게 만드는 것이다.
향을 사랑하고 동시에 소쌍을 사랑하는 마음이 뒤엉켜 커지며 나날이 부풀어가는 태애는 이렇듯 더없이 큰 사랑을 ‘하는’ 큰 사람으로, 압도적 규모로 우리 앞에 당도한다. 이것은 커다란 사랑으로 다시 써 내려간 이야기, 역사적 기록 속 ‘혹애酷愛’라는 단어를 지우지 않겠다고, 그것은 지독하게 커다란 사랑이었다고 꾹꾹 눌러 다시 쓴 이야기다.
- 1) 이우창, 「옮긴이 해제」,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 오월의봄, 2020, 297쪽.
- 2) 주민현, 「그레텔과 그레텔」,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50~53쪽.
- 3) 정성왕후의 삶에 관해서는,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 53~65쪽 참고.
- 4) 같은 경내에는 ‘또 다른 여자’, 즉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가 묻혀 있기도 하다.
- 5) 손님굿과 굿판에 관해서는, 조현설, 『신탁 콤플렉스』, 이학사, 2024, 130~142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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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하고 사건에 관한 사회적 기억의 구성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또다른 재난참사의 피해자·유가족과 연대하며, 상실의 비통함을 우리 모두가 보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희망의 몸짓으로 전환해내고 있다.2) 그러므로 미래란 애도를 완수한 이가 비로소 맞이하는 삶의 다음 단계 같은 것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 열어젖히게 될 새로운 가능성이라 할 것이다.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온 재난참사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최근 소설에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거듭 마주할 수 있었다. 애도의 서사화가 거듭하여 창안되는 것은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한 문학의 필연적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례식장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어쩐지 딴청을 피우며 한참을 에둘러 걸어가는 이들의 발걸음에서(김채원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우산을 보며 세상에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뒷모습에서(최예솔 「토니」,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제대로 읽지 못할 책을 들고나와 길가에 놓인 소파에 앉는 마치 의례와도 같은 행위 속에서(윤단 「남은 여름」, 『현대문학』 2024년 12월호) 상실이란 과거완료의 사건이 아닌 남겨진 이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현재적인 것이 된다. 다만 짧은 소설의 형식에서 애도란 다소간 미학적인 것으로 완결되는 듯 보이기도 하기에, 좀더 긴 시간을 통해 애도를 수행하는 서사, 모순과 간극을 섣불리 메우지 않고 상실을 끌어안고 사는 삶의 버성김과 지난함까지 다루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그러한 서사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삶으로서 보여주었듯, 부정적 감정으로 치부되곤 하는 슬픔과 우울, 고통의 정동이 지닌 운동성을 새롭게 사유할 매개가 되어 어쩌면 인물들에게 미래를 지어 먹이려는 소설적 움직임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을 살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허기진 공동체에 애도의 감정과 연대의 상상력을 전하며 보살피려는 문학적 돌봄의 실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늦은 노력들의 형식 문진영의 소설 『미래의 자리』(창비 2024)는 ‘미래’라는 인물의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체 8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장마다 초점화자가 전환되며, ‘지해’와 ‘자람’ 그리고 ‘나래’ 세 사람의 내면 풍경과 그들이 통과하는 삶의 국면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소설은 미래의 꿈에 관하여 미래와 지해가 대화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꿈과도 같은 장 ‘0 미래’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1 지해’의 장에서는 해져 닳아버린 듯한 지해의 마음결이 도드라지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의 여파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2 자람’의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래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미래는 지해와 자람과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이자, 나래의 쌍둥이 동생이다. 미래의 죽음 이후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은, 미래의 죽음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소급하여 재현하지 않거니와 남겨진 인물들 역시 죽음의 순간 미래가 얼마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웠을지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남겨진 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전개되는 이 소설은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래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낼 뿐이다.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나름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세 사람이 미래의 자리를 되짚는 방식과 밀도 역시 상이하다. 다만 미래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감정만큼은 모두가 공유하는 듯 보인다. 미래는 지해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자람에게 난생처음 오롯이 이해받았다는 기분을 선물해준 사람이고, 쌍둥이 언니 나래에게는 섬세하게 이해받는다는 느낌과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기억 속의 미래는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98면)고 누구보다 섬세하게 감각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지해와 자람, 나래가 고교 시절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던 미래는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 시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기록해나간다. 스무살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희열에 젖은 나래가 그 사건을 조금씩 자신에게서 밀어낼 즈음, 미래는 사건의 여진 속에 들어가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미래의 죽음 이후 지해와 나래는 조그만 징후라도 발견하고 싶어서, 미래의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싶어서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일기를 샅샅이 읽어나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래가 치열하게 통과했던 외로움과 슬픔, 기쁨을 각자의 방식으로 되짚는다. 자신의 살아 있음을 미안해하며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싶어하는, 자신이 누려온 삶의 여유로움에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혼란마저 있는 그대로 껴안고 기꺼이 자신을 더 큰 혼란과 열망 속으로 밀어넣는, 그리하여 “충분히 살아 있다”(175면)는 감각과 함께 삶의 아름다움 또한 생생하게 느끼던 미래의 시간은 장의 전환 지점마다 삽입된 미래의 일기를 통해 기록되어 독자들에게도 전해진다. 소설에서 지해와 나래를 절망에서 건져올리는 분명한 서사적 계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극적인 회복의 서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길 수 있지만, “삶 쪽을 향해 반짝이고 있는”(125면) 미래의 문장들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던 지해와 나래가 천천히 삶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은 충분히 개연적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보건대 ‘미래의 자리’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을 후회와 죄책감으로만 잡아끄는 수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때나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79면) 전하고 싶어 지해에게 건네는 자람의 자그마한 선물들과,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204면)라며 나래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지해의 마음에, 이렇듯 서로를 살피며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연결고리들마다 무한히 창안되는 장소에 가깝다. 소설은 그 연결고리를 미래와 남겨진 세 친구의 관계로만 한정하지 않고, 조금씩 보태어지고 때로는 끊어지며 유동하는 관계의 여러 모습을 통해 그려낸다. 지해와 엄마, 그리고 지해와 용이씨, 나래와 재원, 자람과 가족, 그리고 자람과 민서까지, 소설은 세 사람이 갖가지 연결과 만남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미래의 자리』는 남겨진 자들이 미래의 자리를 서서히 지워버림으로써 그 시절을 ‘극복’해가는 모습이 아니라, 이들이 미래의 흔적을 묻힌 채 상실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는 쪽에 가깝다. 세 인물의 이야기 모두 확실한 종결 없이 마무리되며 그 어디에도 미래의 자리에 대한 확고한 고정값이 부재하다는 점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미진한 느낌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미래의 자리를 섣부른 의미화로 고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숨탄것3)으로서 숨탄것을 끌어당기는 한 그 의미화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의지를 내포하는 듯 읽힌다. 예소연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현대문학 2025)는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 ‘석이’를 찾기 위해, ‘나(동이)’와 ‘혜란’이 캄보디아로 향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석이를 찾는 여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0년 전 대학시절 세 사람이 캄보디아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함께 보낸 시간과 이후 점점 멀어지게 된 세 사람의 관계에 관한 회고가 교차하며 삽입된다. 이러한 전개 가운데 세 사람의 우정의 역사뿐 아니라 ‘나’의 비틀린 마음,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 “보편적인 행운을 단단히 쥐고 있는”(10면) 듯 보이는 석이를 향한 날선 마음과 질투, 적의 같은 것들이 함께 끌려 올라온다. 회고조의 서술을 통해 간간이 드러나듯 석이를 찾는 여정이란 기실 ‘나’ 자신의 못난 마음을 마주보는 시간이자, 판단하기에만 급급했을 뿐 애써 이해하려고 해본 적 없는 석이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되짚어보려는 노력의 여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석이의 실종이라는 사건은 ‘나’와 혜란의 삶의 관성을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요청되었던 서사적 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실종과 같은 충격적 사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타자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굼뜬 노력이 시작된다는 점을 드러낸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석이를 찾기 위해 떠난 이들의 여정이 결국 석이를 만나지도 못한 채 결말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를 의미하기 어렵다. 오히려 석이와의 만남이 지연되는 것이야말로 석이에 대한 이해를 거듭 수정해나갈 기회를 허락하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엄마를 간병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된 삶에 시달리던 ‘나’가 이태원참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석이에게 공감하는 대신 “너 너무 격양되어 있어”(65면)라며 그녀를 제어하려 했던 기억은 서사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소환된다. 캄보디아행에서 ‘나’가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교육봉사로 캄보디아에 머물던 시기 한국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일과, 캄보디아인인 ‘삐썻’이 그 사건에 대해 위로하며 꺼삑섬에서 벌어진 압사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석이가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앞질러 단정한 일, 그리고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꾸벅꾸벅 졸며 이태원역을 지나치던 석이의 머리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일과, 이후 석이가 뒤늦게 삐썻을 찾아가 사과한 일들 사이의 희미한 연결성이다. 세월호참사와 꺼삑섬의 압사사고, 그리고 이태원참사 등의 사건들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고유한 역사정치적 맥락 위에 놓인 개별적인 사건들이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 의해 차이를 초월하여 특히 정동적 층위에서 연결될 수 있다. 이때의 연결이란 구체적 사건의 맥락을 지워 책임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연루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작동하는 쪽에 가깝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은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64면) 된다는 느낌으로, 고통과 무력감, 수치심과 우울의 정동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석이는 그 느낌으로써 주변의 사람들과도 연결되려 하지만, 정치색이 너무 짙다며 석이를 피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 역시 “크나큰 불행을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사람”(122면)처럼 느껴지는 석이를 부담스럽게 여겨 부재중전화를 외면하면서 석이가 자신에게 미칠 정동적 전염을 피하려 한다. 결국 캄보디아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야 석이의 마음을 상상해보게 된 ‘나’가 “석이가 하고자 했던 일을 할 것이다.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다”(125면)라고 다짐하게 되는 극적인 전회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렇듯 석이의 자리에 대신 서보려는 듯한 ‘나’의 포즈에 주목해본다면, 『영원에 빚을 져서』는 『미래의 자리』와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이야기를 끝맺게 되는 셈이다. 이는 『미래의 자리』가 장마다 초점화자를 전환하며 이야기를 독점적인 인물의 담론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피하는 한편 미래의 일기를 삽입함으로써 미래의 내면을 고유한 영역으로 보존하려 한 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는 두 소설의 결정적 차이, 즉 미래와 달리 석이는 잠시간 자취를 감추었을 뿐 분명 생존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나’와 혜란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인 게임의 주최자와도 같다는 점, 즉 두 사람이 삐썻의 도움을 받아 되짚게 될 여정을 한발자국 앞서 지나감으로써 그들이 지나올 길을 미리 마련해둔 것과도 같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석이가 하고자 했던 것을 하며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나’의 다짐은, 추후 ‘나’가 다시금 석이와 대면하는 가운데 부대끼게 될 시간을 괄호 안에 묶어둔 위에서만 가능한 일시적 봉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지만 불가결한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발견되는 얼마간의 비약을 동반한 실선의 연결감은 『미래의 자리』에서 그려내는 점선의 연결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남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두 소설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두 이야기에는 첫째, 죽음 혹은 실종으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진 ‘그녀’가 있다. 둘째, ‘그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녀 타인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자신을 성찰하던 사람이었다. 셋째, ‘그녀’의 마음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였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녀’의 마음을 더듬으며 헤아리려 한다. 그리고 이렇듯 뒤늦은 이해의 시도라는 것이 서사를 끌어나가는 소설의 전체적인 추동력으로서 작동한다. 세월호참사의 고통을 향해 뛰어들어간 미래가, 이태원참사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던 석이가 사라진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소설은 예민하게 타인의 고통을 청취하고 감응하며 세계와 불화하던 이들을 서사에서 가장 먼저 퇴장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조금쯤 둔감하거나 이기적인 덕분에 생존해 있는 자들의 서사를 상대적으로 많이 조명하는 가운데 이들로 하여금 사라진 자들에 대해 회상하게끔 한다. 이는 이야기에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재난참사의 당사자가 아니라 재난참사에 대해 섬세하게 공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 그러고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다루는 대신 그 사람의 상실 이후를 경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 이것은 몇 개의 겹을 걸친 ‘관찰자’의 위치에 선 인물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전략처럼 보인다. 사건을 직접 다루는 방식에 대한 큰 부담을 방증하는 듯한 이와 같은 서사전략에는 비판이 가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미래와 석이가 사라진 세계가 어떠한 혐의를 가지는가에 대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해온 미래와 석이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내면을 자세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 과연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상실 이후에서야 후회와 반성을 여실히 내비치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는, 사라짐을 택한 인물이 아니라 그 상실에 대해 곱씹는 자의 내면으로 서사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과 독자들 사이의 공감을 강화하고, 끝내는 독자들의 동질적 자기연민으로 이어지는 나르시시스트적 소설 향유를 강화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근래 한국소설과 소설 독자들의 주요한 경향성으로 누차 지적되어온, 예상 가능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텍스트의 읽기란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들 소설이 이러한 구도를 통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들 소설이 발생시키는 효과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읽는 방식에 대한 미세조정을 통해 같은 텍스트로부터도 서로 다른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읽는 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서사에서 진동하고 있는 운동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읽어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그려내는바, 남겨진 자들의 위치에서 상실을 돌아보는 일이란 매끈하게 자기를 완성하며 현상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작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 변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4)까지 품고 미래를 고민하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읽기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지지대로서 황정은의 근작 「문제없는, 하루」(『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를 세워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도 앞서 살핀 두 소설과 유사한 관계구도가 발견되고 있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일상과 노동의 감각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영인’과, 세계의 커다란 고통에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어쩌면 그래서인지 점차 고립되어가는 듯 보이는 ‘인범’이 등장한다.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그걸 보게 돼./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라는 인범과 “뭘 그렇게까지 해,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해”(244면)라는 영인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소설은 두 사람의 버석거리는 관계를 적나라하게 다룬다. 초점화자인 영인을 통해 독자들마저도 피로해지게끔 만들면서, 인범에게 전하지 못한 영인의 마음이 닳아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해져가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잔존하는 사랑과 끊어질 수 없는 이들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이 버성김과 부대낌을 재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음에도 태풍이 휩쓸고 간 날 인범에게 전화를 거는 영인과, 그 전화에서의 침묵이 마음에 걸려 영인의 집으로 찾아오는 인범에게는 서로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 오랜만의 만남 이후 해가 뜨는 것을 함께 보기 위해 나선 길에서, 그들은 터널 안에서 위험한 상태에 놓인 차량과 그 안의 노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영인은 터널 속 쓰러진 노인을 구하려는 인범을 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차들을 향해 제발 멈추라고, 그들을 믿는지 믿지 못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저 경적 울리는 일을 한다. 인범은 아직 영인의 곁에 생생히 살아 있으며, 영인은 불가피한 두려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다시,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와 같은 소설들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문제없는, 하루」 속 영인이 경적을 울려대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를 멈추어 세우는 일이 아닐까. 관찰자의 위치란 독자들을 안전한 곳에 위치시켜 위안을 주기 위해 설정되는 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당겨 연루시키기 위한 절박한 유인책에 가까워 보인다. 최선을 다해 상실을 쓰다듬어보려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에서야 그것을 수행하고 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멈추어 상실을 쓰다듬는 행위의 중요성을 역설하려 한다. 혹자에게는 이것이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기만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혐의를 안고도 그 태도를 취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타인의 상실을 그만의 사적인 경험이라며 지나치지 않고 곁에 멈춰 서서 그의 고유한 상실과 연루되는 삶의 형식을 감히 상상해내기 위하여, ‘우리’가 함께 상실한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가를 멈추어 되돌아봄으로써 지금-여기의 세계를 당연하지 않게 느끼기 위하여. 이로써 조금 다른 형태의 미래를 “지금-여기에서 밀어 올”5)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 도식화된 이해와는 달리, 관찰자의 위치란 사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부동하는 점으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덕지덕지 묻히고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더듬으며 때로는 침잠하여 간신히 기어나오지만 때로는 비약을 감행하는, 요란하고도 사나운 움직임에 가깝다. 지금의 한국소설이 그려내는 그 움직임이 독자들을 정동할 만큼 강력한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이렇게 바뀌어 던져지는 편이 온당할지도 모른다, 그 관찰자들을 관찰하려는 ‘우리’들은 정동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나와 동일한 상실을 경험하였기에 가능한 연결이 아니라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와 불가피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차이와 간극으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연결로 이어지는 형태를 상상해낼 수 있는가? 이는 곧 지금 들리는 작고도 또렷한 경적소리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귀 기울이고 멈춰 설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1) 영화에서는 간결하게 처리되었으나, 장민경 감독의 인터뷰(「“시간이란 약은 없다”···가족 잃은 고통 ‘안고 사는’ 이들이 손잡을 때」, 경향신문 2024.3.24)에서는 배은심 여사의 말을 빌려 그 의미가 좀더 자세히 풀린다. 배은심씨는 아들의 죽음 후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 2022년 타계했다. 2) 이태원참사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2024)에서도 이태원참사의 유가족들이 상실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길을 내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는 서술이 확인된다. 혹 이와 같은 진술이 재난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사회운동의 책임과 부담까지 지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정확히 기입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이 보다 강조되는 쪽이 온당하지 않은가 한다. 3) ‘작가노트’에 따르면 ‘숨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인 ‘숨탄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될 뻔했다고 한다. 이 표현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본문에서도 인용하여 사용했다. 4)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93면. 5)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24면.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 윤영광, 『칸트와 푸코―비판, 계몽, 주체의 재구성』, 북콤마, 2025.02. ― 윤은주,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세창출판사, 2025.04. 윤영광의 『칸트와 푸코』는 저자의 박사논문을 근거로 하여 ‘비판·계몽·주체’라는 세 가지 개념이 칸트와 푸코의 철학 ‘사이’에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양상을 연구한 논문 모음집이다. 특히 윤영광은 현상 자체만 보는 것을 지양하는 칸트적 의미의 초월적 위치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초월적 읽기’의 자세를 연구의 기본 토대로 삼고 있다. 이는 “지금 현실화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의 잠재적 상태를 상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것, 그러하여 텍스트를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액체화되어 있거나 언제나 이미 해체된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으로 봄으로써 “텍스트의 잠재적 차원과 관계하여 새로움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실천’”1)을 행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 칸트 철학이 ‘종합(Synthese)’을 중심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이미 주체가 반드시 종합을 거쳐야 할 정도로 이질적인 능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이루는 고유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질적이고 (아직) 비인간적인 능력들의 맞붙고 흩어짐만이 인간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처럼 본성상 다른, 고유하게 인간적이지 않은 요소들의 공존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비인간적인 요소를 고려함으로써만, 그러한 요소들 간에 관계라는 관점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같은 인간학에서 인간성은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러한 개방성은 주체 내부에서 능력들의 불일치라는 형태로 경험된다. (21쪽) 윤영광은 이 지점에서 ‘인간’이라는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칸트의 동일성의 주체 내부에 이미 비동일적 운동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짚어내는 방식으로 그는 “유한성과 무한성이 불일치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지점”인 한계를 “인간의 자리”(46쪽)로 지정한다. 안도 바깥도 아니고, 안인 동시에 바깥인 이 ‘한계’는 정확히 지젝이 말하는 칸트의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1)와 동일한 영역이다. 또한 이곳은 분명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 기이한 괴물성들이 도사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절대적 이질성을 사고하는 이성의 사용자인 인간은 언제나 틈이 있는 존재로 자신을 (재)구성해내는 운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에서 윤은주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주체의 행위인 공론장에서의 ‘저항’이 힘을 잃은 현실을 돌아보며,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인 ‘생각함’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생각함을 본질적 특성으로 갖는 인간은, 세계를 지켜보고 생각한 뒤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세계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간다. 다소 쉬운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윤은주가 가장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행위가 가능한 곳”이 형성되었을 때 도래할 “아렌트의 정치가 필요 없는 사회”(153쪽)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염두에 둘 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재고하고 인간의 힘과 역량을 다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최근의 문학적 상상력들이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는 작가들은 특히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다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런데 이때의 신들은 보편적 의미에서처럼 초월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없이는 현실화할 수 없기에 인간을 욕망하고,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이 닮아 있기도 하다.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잉여성을 내부에 지닌 신들의 허물어짐은, 인간이 자신을 부수고 능력과 요소를 다른 패턴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제 공백과 무를 내부로 끌어안은 신과 인간이 거듭 쇄신하는 과정을 살펴볼 차례다. 신과 인간의 배후, 운동하는 생명력 신종원, 『불새』, 소전서가, 2025. 신종원의 『불새』는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를 주제로 한 그의 장편소설 기획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물’과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던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과 달리 『불새』는 ‘불’과 ‘생명’을 소설의 골조로 삼는다. 『불새』는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방대한 분량, 지역과 인종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역사의 삽입, 다채로운 형식, 신과 인간을 아울러 터져 나오듯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무수한 목소리 등 읽는 이를 곤란하게 만들 법한 요건들이 이야기 속에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범박하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소설은 ‘성배 도난’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인 신부 ‘바오로’는 모종의 이유로 신을 섬겨온 기존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었던 ‘베드로’ 신부와 갈등을 겪는다. 늙은 신부는, 젊은 신부가 진품 성배를 들고서 예수의 성령을 현재에 체현하는 성체 성사를 행하는 모습을 꿈에서 목격했다고 말하며, ‘바오로’에게 스페인에 안치된 성배를 직접 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런데 때맞춰 성배가 도난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소설은 사라진 성배의 행방을 추적하는 동시에 “진짜 성배”(27쪽)의 신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끈질기게 탐문한다. 이러한 과정은 앞서 질문했던 ‘신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 성배를 빼앗고 빼앗기며 적대를 형성하는 역사를 환원적으로 구성한다. 성배를 신의 영성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거머쥐었을 때 신과 같은 권세와 영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종원은 바로 이러한 믿음 속에서 무엇이 배제되었는가를 질문한다. ‘바오로’의 회의는 삶이 신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신격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성당의 소년부 성가대원 ‘헬레나’의 죽음을 계기로 싹튼 것이다. ‘헬레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중절 수술을 고려하면서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생명을 중시하는 가톨릭의 교회법에 얽매여 적극적으로 조처하지 못했고, 이후 그가 자살한 데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와 가치의 최상단에는 언제나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기원을 은폐하고 신과 진리의 이름으로 살아야 할 이와 죽어 마땅한 자를 구분한다. 즉, 『불새』는 일종의 ‘믿음의 계보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습이 축조한 특정한 삶을 형성한 뒤, 이를 강조하고 반복해 온 인간의 역사야말로 신앙이 지닌 민낯임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성배가 단순한 그릇 또는 컵 이상의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 역시 이러한 인식과 동궤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도 신종원은 형이상을 전적으로 몰아내고 형이하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신적이고 영성을 지닌 존재들을 거부하고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인간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소설은 신성의 의미를 재설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종원의 새로운 믿음에 의하면 권능은 지상을 초월한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라앉고, 죽은 뒤 다시 일어서고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생명 자체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삶은 신의 의도에 따라 정해져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삶은 우연과 영원 속”, “반복과 무한”2)(395쪽)의 틈에서 끝을 모르고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그칠 줄 모르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력만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무언가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반드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를 필요로 한다. 신성은 육신이라는 그릇에 소복이 부어져야만 현실에서 발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서만 현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 지대에서 신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다. 소설적 상상력에 의해 신 ‘야훼’에게 영광을 안겨준 존재로 설정된 또 다른 신은 ‘헬레나’와의 독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별들은 항행하고, 돌들은 굴러떨어지며, 새들은 노래하고, 인간은 살 것이다. 인간은 싸울 것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자기 앞의 혼돈을 거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와 빛 쪽으로 걸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움직임이고, 생명은 항력이며, 생명은 노래하고, 생명은 날아오른다. 그러니 아이야, 어서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삶을 개시하라. (177쪽) 신의 말에 따르면 삶은 그 자체로 목적적이다. 생명에 대한 정언명령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그저 ‘살아라’라는 문장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는 ‘헬레나’에게 신은 곡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네가 죽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171-172쪽) 신이 음성으로 현현한다면, 그것을 세계 내에 역사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육체와 영이 결합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뿐이다. 신의 음성이 “명령이 아니라 요청”(369쪽)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신과 인간이 포개어진다. ‘바오로’가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 이유가 신을 등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더라도, 당신을 섬길 방법을 찾고 말겠”(21쪽)다는 다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과 인간은 타오르는 빛을 삼키고 자기 자신을 무너트림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쇄신할 수 있는 생명력을 서로 공유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위치는 일방적으로 믿는 자에서 역동적으로 행하는 자로 옮겨간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바오로’는 늙은 신부의 꿈처럼 성배를 쥔 채 ‘헬레나’의 영을 기꺼이 믿음의 성당 안으로 포용하여 새로운 성찬례를 거행한다. “죽은 바오로의 몸 안에서 또 다른 바오로가 일어”설 때, “이 바오로는 한낱 일꾼이나 몸종, 대리자 따위가 아”(372-383쪽)닌 한 세계의 주인이자 일종의 신으로 좌정한다. 신종원의 소설은 신과 인간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 가는 방식으로 둘을 겹쳐둔다. 둘은 서로 믿음과 행위의 근원이자 배후가 되어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신성의 다른 이름은 곧 생명력이고, 이는 영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가 결합하기를 반복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성은 현실에 존재하는 균열을 가시화하고 틈을 더욱 크게 벌려 놓는다. 신과 인간의 사이, 괴수가 되는 꿈 김보나, 『나의 모험 만화』, 문학과지성사, 2025. 김보나의 첫 시집 『나의 모험 만화』에는 신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신들은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고, 사람들은 난데없이 기이하게 돌변한다. 물놀이를 즐기는 작고 어린 신(「휴무」), 견디고, 갇히고, 훼손되는 신(「물에 빠지는 이 모든」), 인간과 내기를 하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 가호를 내리는 신(「여기 지팡이 있어요」)과 같은 형상은 진리의 보증자요, 근엄한 실체라는 보편적인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끓는 유황천에서 다시 태어나고(「탕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 방사선에 노출된 후 괴수로 변한 인간(「춘일광상(春日狂想)」, 「「미친 봄날 생각」」)들 역시 범상치 않다. 그래서 김보나의 시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신과 인간으로 명료히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 그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말이나 글로 전해 내려온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내가 가진 단 하나뿐인 것 중에 아무것도 바치지 않아서 신은 화가 난 것일”지도(「차이나타운」) 모른다고 추측하고, 불운 앞에서는 “불경을 저질러서 이렇게 된 걸까?”(「천도복숭아 나올 무렵」)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는 신을 이루는 기존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금기를 세울 수 있는 초월적 권능에 의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자라는 해묵은 설정 말이다. 하지만 시인의 관심은 만지거나 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신적 가치보다 함께 맞붙어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를 향해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 집중한다. 불변하는 가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라고 행동하는 인간의 간절함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신이 보증하기에 마땅히 행할 만한 ‘어떤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이 진정한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다. 시인이 시집 속에서 신들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대신 그것을 목격한 인간이 대신 이야기하도록 설정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시력을 포기했으니까 박쥐는 어둠을 헤쳐나갈 초음파를 얻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둠 속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이 진화하자 겨우 날개가 달린다고 해서 천사가 되지는 못할 테지만 양팔과 날개를 교환할 기회가 생긴다면 두 팔을 남겨 사람을 안아보자 검은 날개를 달고도 악마가 될 수 없다면 사람과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하자 산에서는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서면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포개지는 그림자의 윤곽 무언가가 강림하는 저녁이다 ― 「윙스팬(Wingspan)」 중에서 인용한 시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닌 신성은 두 차례 부정된다. 시인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꿈꿀 때, 천사와 악마라는 선악의 대립 구도를 가뿐히 벗어날 때가 그에 상응한다. “사랑의 전문가가 아니면서/ 한 사람의 손을 잡기도 했”던 시인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위의 두 가지 방향을 선택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 한 사람이 타자와 함께 포개지는 순간 “무언가가 강림”한다. 다른 이와 더불어 계속해서 삶을 이어 나가는 생동하는 인간만이 세계의 진정한 근원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이 행하는 사랑이 신성의 진정한 배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자세히 살펴본 이라면 시인에게 신과 인간은 대립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과 인간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틈, 사이에 머무른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인다. 시인은 이 확정 불가능한 미결정의 상태야말로 곧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을 단연한 태도로 전달한다. 이러한 전언은 「물에 빠지는 이 모든」에 잘 담겨 있다. 시의 서두에서 “신년”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던 화자는 미래를 알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기도할 것이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뒤이어 기도실에 자리한 성상(聖像)의 사진을 찍던 화자가 새롭게 덧붙이는 신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의 일은 고개 숙인 시선을 견디는 것. 나는 파인더에 신의 얼굴을 가두었다. 빛에 잠기면 훼손되는 신성의 표정.” 시인에게 신은 기도와 믿음을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욕망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야 하고, 쉽게 손상되기도 한다.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하는 신이라는 별다른 존재 양태는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시인의 인간관과 연결된다. 화자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상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담기고 어리는 모든 형상을 일그러트리고, 묵은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행위가 바로 설거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유황은 나를 태울 만큼 충분할까” 자문하던 화자는, 물이 들어찬 설거지통의 표면에 비추어진 자신의 “물에 갇히는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한다. 이 지점에서 파인더에 갇혔던 신의 얼굴과 화자의 얼굴이 겹친다. 온전히 재현하거나 반사될 수 없기에 불안정한 존재들로 밝혀진 인간과 신은, 그렇게 흐릿해진 만큼 존재론적 층위에서 같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오직 이 땅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육체를 지닌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과 함께 시집 곳곳에는 믿고 바라기보다 행하고 나아가는 이들의 행보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티칸에서 온 사람」의 화자는 어디에 뿌려도 효험이 분명하다는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 성수보다는, 성수를 사려는 “아무 데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다. 많은 면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비행운 인간”이지만 화자는 성수를 “마실 수도 피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말한다. “나는 나아간다. 소음을 끌고 달리는 열차를 나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고. 「슈베르트 방은 말한다」 역시 비슷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시인의 관심은 인간을 향해 있다. 조금 더 명료히 말하자면 시인은 행위하고 변화하는 인간을 눈여겨본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인간의 생이 몇 장짜리 악보이고/ 하나의 곡을 반복하는 것이 연습이라면/ 하나라는 고통을 되풀이하는 인간은 어떤 악기인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화자가 질문하는 이유는 “손 안에 흰 달걀을 쥐고” 살아가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인간 중에는 “그것을 지키려는 자도, 깨뜨릴 각오로 두드리는 자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두 종류의 인간상 중 “마지막까지 노른자로 손을 적시는” 이를 더욱 궁금해한다. “흰 달걀”처럼 주어진 것을 본래 모습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믿음은 살아가면서 마땅히 수호해야 할 순결하고 깨끗한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 신이 표상하는 법과 질서 역시 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시인에게 불변하는 가치란 없다. 우리는 이미 여러 시편을 통해 신은 완전하지 않고, 신성은 변형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심지어 신의 권세는 인간에게 의지해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문을 발명”(「바티칸에서 온 사람」)하고, 첫 제의를 앞둔 “수습 사제는 기억에 의지하지 않을 때까지 연습한다”(「수련 일지」). 이처럼 “어떤 이의 목표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잊는” 데 있다. 인간은 주어진 섭리를 체득하고 체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삶의 양식을 수련한 뒤, 그것을 기꺼이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또 다른 삶을 불러들인다. 김보나의 시가 유독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집의 이곳저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인은 죽은 이들을 다시 세계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사이처럼,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서 있다. 모두가 “한 번쯤 죽었다 돌아온 사람”(「장수민해독센터」)처럼 보인다. 기억해? 전학 간 너의 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나를 너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나를 명동성당 뒤편에 딸린 여고에서 너는 만화부였고 나는 클래식 기타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단 거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 십자가 형태의 길에서 성호를 긋지 어른이 된 네가 여기 있다면 너를 납치해 걸어갈 텐데 기자들과 카메라가 화동처럼 뒤따르는 행진이야 스물셋에 처음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고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늘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자랐어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을 병상에 모아놓고 안녕 나 암이래 말하고 싶었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어 성당에 못 들어간다면 사각사각 창밖에서라도 미사를 구경하고 싶네 고딕 첨탑에 기대 낮잠 자고 싶네 하다못해 절 마당을 비로 쓸면서 발등부터 목덜미까지 누군가 필사한 경전의 글자로 뒤덮이고 싶네 마취총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도 감당하기 힘든 마음처럼 몸이 불어나도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기다릴게 만날 수 없는 사람 ― 「「미친 봄날 생각」」 부분 그냥 인간이 아니라, 죽었다 다시 돌아온 인간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이 기존의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다른 존재가 되길 욕망하는 건 결국 사랑하기 위해서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학창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친구의 퀴어한 마음을 모르는 척해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뒤늦은 답장을 쓰고 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에 답할 수 없었던 건 “십자가 형태의 길” 위에서 살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고백”이 당도하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마땅하다고 선별한 것들만을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암을 겪은 뒤 방사선에 노출된 화자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괴수”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규정된 의미에서의 사람이 그동안의 마음을 가로막아왔다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인의 꿈이 “괴수 김보나가 되는 것”이고, “힘이 센 짐승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손을 흔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과거의 자신에게/ 화약이 터지는 광경을/ 불꽃놀이라고 부르는 여름”(「춘일광상」)처럼 기존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 다른 존재가 되겠다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은 시인에게 “키 작은 주인공이/ 딱 한번 용기를” 내는 만화를 끊임없이 그리게 만든다. 시인의 “주인공은 그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혼자 돌보는 사람”이다. 영웅의 “성장소설”은 괴물과 타자를 물리치고 독단적인 인간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로 그 의미를 바꾼다.(「나의 모험 만화」) 신과 인간, 인간과 괴수, 인간과 또 다른 의미의 인간 사이를 부유하는 김보나의 시는 시인이 지금 여기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갈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모험 만화」의 마지막 연은 “(계속)”으로 닫히지 않은 끝을 맺는다. 인간만의 현실, 다가서는 힘 김동식·서수진·예소연·윤치규·이은규,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문학동네, 2025.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2025년 단편소설 앤솔러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올해도 역시 현실 속 노동하고 분투하는 인간 군상을 적실히 보여준다. 여덟 명의 작가들은 뛰어난 소설가적 기량과 더불어 회사원, 다큐멘터리 PD,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전직 주물공장 근로자라는 다양한 노동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신성을 일구는 주체로서 인간을 다시 보려는 이 글의 마지막을 노동하는 인간의 현실을 묘파하는 소설집을 추천하며 닫는 이유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소설 쓰기를 통해 무엇보다도 인간의 힘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나 투기자본주의와 같은 용어의 설정만으로는 현재의 삶에서 감지되는 위태로움과 불안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정제된 개념과 달리, 일상에서 곤궁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경험은 다만 세찬 감각만이 쏟아지듯 엉겨 붙는 혼란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원인과 대책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뚫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문학에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 있는 문학이 줄어든 것 아닌가 의심”3)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현실에 눈 돌리지 않겠다는 굳세고 치열한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권하겠다는 소설들에 우리가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획에 걸맞게 소설집에는 현재 노동시장의 상황의 실정을 반영한 다양한 직업들이 등장한다. “게임 머니 팔아서 쌀 사 먹는다”는 밈으로부터 생겨나 “게임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된 “쌀먹” 혹은 “쌀먹충”(김동식, 「쌀먹: 키보드 농사꾼」, 13쪽)인 ‘김남우’, 호주의 대기업 슈퍼마켓에서 한국인이라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으로도 균등한 승진의 기회를 받을 수 있으리라 꿈꿨으나 그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서수진, 「올바른 크리스마스」, 72쪽)로만 남은 ‘주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가름이 친구 관계라는 사적영역까지 침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선미’와 ‘지선’(윤치규, 「일괄 비일괄」), 방송을 위해 타인의 내밀한 면에까지 무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는 현실이 “진정성”으로 포장되는 것을 목격하는 시사교양 PD(이은규, 「기획은 좋으나」, 136쪽),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백화점 지하 삼층에서 직원들을 위해 마사지를 제공해야 하는 시각장애인 헬스 키퍼(조승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작가의 꿈을 접고 일본 기업에서 데이터를 관리하고 적용하여 AI의 정보력을 체계화하는 일을 했을 뿐이지만 기술력을 이용하여 저지르는 폭력과 부조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부진’(황모과, 「둘이라면 유니온」)등. 이들은 주로 플랫폼 자본주의 내에서 일관적인 노동 기회를 보장받을 수 없고, 경쟁력이 증가한 탓에 합당한 보수나 대우를 당연하게 감내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들은 이들의 힘겨운 처지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위태로운 세계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운이나 질서가 아니라 재난의 시대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생활력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사이트를 경유하여 할머니들의 돌봄 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젊은 여성 청년 ‘희지’를 그린 예소연의 「아무 사이」는 상시화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을 다르게 반복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작가는 노동의 지속 가능 여부에만 매달리게 된 나머지 인간적인 삶이 억눌리게 된 실상에서도 나지막한 희망을 본다. 혼자 지내는 할머니들의 집으로 찾아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희지’는 삼 년 만에 ‘시터닷컴’에서 일산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시급을 받는 ‘베스트 시터’가 된 플랫폼 노동자다. 할머니를 돌보는 시니어 시터 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게 항상 무서웠”(88쪽)기에 퇴사를 결정했던 ‘희지’가 버티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고 계획하고 운용하는 식”의 삶을 살기 위해 찾은 “그나마 정을 붙이고 해나갈 수 있는 일”(89쪽)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많은 할머니가 있고 나는 그 모든 할머니를 빠짐없이 사랑한다”(79쪽)는 자부와는 별개로 ‘희지’는 자신이 맡은 노동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지에 대해 자신하지 못한다. 플랫폼 회사의 교육장에서 ‘베스트 시터’로서 “돌봄 노동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보다도 시터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업무적 책임을 인지해야” 하며 “책임의 범위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라고”(89쪽) 연설하면서도 자기의 말을 거짓말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희지’에게 이 일은 임금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장에서 모멸감을 반복적으로 느끼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사직서를 냈음에도 남들처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아주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한 걸까?”(88-89쪽)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기를 거쳐 안착하게 된 소중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희지’에게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95쪽)에서 존재 의미를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회사 차원에서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도록 종용하는 사회에서 ‘희지’가 선 자리는 더없이 위태롭다. 수많은 경쟁자와 언제 끊길지 모르는 고용인의 유연하고도 아슬한 연계는 여타의 노동보다 더욱 관계적인 속성을 지닌 돌봄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부당한 처지를 감내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돈을 주고받는 관계”(94쪽)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계’가 아닌가. 한겨울에도 찬물만 쓰게 하고, 매일 얼굴을 보고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지만 휴대폰에는 ‘아줌마’라고 저장해도 되는 사람. “그저 고용된 사람일 뿐”(97쪽)인 위치. ‘희지’의 자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돌보는 할머니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참고 견뎌온 감정은 매일 두부를 사는 ‘두부 할머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느 날 터져버린다. 할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희지’는 보호자인 며느리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할머니가 갔을 법한 모든 곳을 찾아다닌다. 온 동네를 헤맨 뒤에도 홀로 돌아온 할머니의 집에서 두부를 먹던 중 며느리의 전화를 받자 ‘희지’는 그만 할머니가 집에 있다고 유려하게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사실 할머니는 그날 며느리와 함께 있었고, 침묵하는 ‘희지’에게 그녀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101쪽)기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할머니, 전화번호 아직 못 외웠죠?” “그렇지.” “내일 또 외우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별다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나름대로 할머니와 나 사이에 어떤 의의를 두고 싶었다. 함께 한 일을 만들면 결국은 같이 뭔가를 하게 된다는 그 단순한 흐름이 우리 사이에 지속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문득 할머니의 휴대폰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전화번호부 앱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희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 (103쪽) 이때 ‘희지’가 내리는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날 두부 할머니를 만나고, 교육장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미래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전부”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102쪽)을 깨달은 ‘희지’는 할머니의 휴대폰으로 며느리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전화번호를 외우기로 했던 이전의 약속을 재차 확인한다. 할머니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을 떠올리는 ‘희지’의 모습을 통해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머니들을 향한 애정을 고백할 미래의 어떤 날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자본이 관계를 압도하는 공식에 굴복하라고 사회가 강요할 때 인간은 기꺼이, 대체로, 자주 굴복하는 존재지만 힘겹더라도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 나갈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힘을 믿고 상상하며 쓰는 작품들이 있는 한 인간은 유구히 변화해나갈 것이다. 1)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214-219쪽 참조. 2) 원문에 따른 강조. 3) 장강명,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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