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문학인 | 2024년 가을호(제15호)

이렇게 넓은 세상인데 우리의 두 팔에는 너무나 좁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

전철희 문학평론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저서로 『배드 엔딩이 어때서?』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알려준다면, 나는 그 작품에 대해 몇 시간이든 수다를 떨 수 있다. 허나 내 주변에는 애니메이션 ‘오타쿠’가 드물다.(유감스럽게도 나는 <명탐정 코난>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정도를 좋아하는 분들을 오타쿠로 분류하지 않는다.) 내 고독을 달래주는 곳은 인터넷 뿐이다.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에서 다양한 애니메이션 제목을 검색하면서 ‘집단지성’을 마주하기도 한다. 버튜버가 애니메이션 관련 라이브 방송을 할 때에는 채팅창에 불특정 다수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인터넷 속의 인간관계는 휘발적이다. 나는 특정한 화제에 대해 떠들고 싶을 때에만 관련 커뮤니티를 들어간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신상을 모른다. 서로를 깊이 알고 책임질 일을 만들 일도 없다. 인터넷 창을 닫는 순간 관계는 바로 단절된다. 만약 내가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는다면,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의 타인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인터넷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관계에 집중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강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입주민끼리 관계를 맺고, 농민과 대기업 노동자들 또한 끼리끼리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지역, 계급, 직업의 사람들의 독점적 유대는 돈독하다. 다만 온라인의 존재는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장을 제공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의 주변인보다 인터넷의 타인을 의식하고 신뢰한다. 과거의 학생들이 부모, 선생님, 친구 정도만을 보면서 가치관과 장래희망 따위를 정했다지만, 이제는 인터넷 사이트(유투버)에서 영향받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종종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주조하고 억누르는 권력 기제가 된다. SNS를 들어가 보면 10대 때부터 명품을 입고 20대에 외제차를 모는 영앤리치(Young and Rich)들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억대 연봉을 과시하는 인간들의 사연이 자주 올라온다. 이들이 한국인의 평균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게시물들을 보면 명품과 아파트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박탈감은 우리에게 ‘성공’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어쨌거나 세계는 넓어졌다. 넓어진 세계는 새로운 지식을 전파해 준 한편 속물적 이데올로기에 빠지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많은 한국문학이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도 그렇다. 이 책에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소재로 삼은 단편 「세상 모든 바다」와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다룬 단편 「롤링 선더 러브」이 있기 때문에만 하는 말은 아니다. 꼭 그런 소재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넓어진 세계에 대한 사유를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띈다.

 

*

 

「보편 교양」은 교사 ‘곽’이 ‘고전읽기’ 수업을 둘러싼 소극을 그린 작품이다. ‘곽’의 커리큘럼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점 때문에 ‘곽’은 동료들에게 진정성 있는 교사로 인정받았으나 또한 학부모의 항의에 포의되기도 했다. 학교 수업에 매몰된 학생들은 대부분 수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범생 은재는 예외였다. ‘곽’은 은재의 생기부에 성심성의껏 상찬을 나열했다. 그래서인지 은재는 서울대에 합격했다. 이후 학교는 ‘곽’의 수업이 서울대 입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며 치켜세웠다.

소설의 말미에서 ‘곽’은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고전읽기’ 수업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가다듬는다. 이는 진정성 있는 모습이다.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왜곡된 지금의 상황에서 그는 전인교육의 이상을 추구했고, 학부모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자 했다. 과거에 유행한 리얼리즘 이론의 명명법을 빌리자면, ‘곽’은 “문제적 인물”이며, 이 작품은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의미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독법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측면을 다뤄보려고 한다.

한국 고등학교의 최종 목표(어쩌면 유일한 목표)는 입시이다. ‘곽’의 인문학 교육은 그런 상황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시작됐다. 그래서 ‘고전읽기’ 수업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물감을 줬다. 그런데 이 수업의 ‘효용성’과 ‘가치’를 방증할 준거는 수강생의 입시결과 뿐이었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저항하고자 생겨난 수업이 명문대 입시로 인해 인정을 받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아이러니는 한국 사회의 다난한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좌익사상은 유통이 금지됐다. 마르크스를 자주 인용한 사르트르, 에리히 프롬, 레이먼드 윌리암스 등의 글은 1970년대에 이미 번역됐지만,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은 1980년대에야 지하 서점들을 통해 유포됐다. 좌익적 지식이 통제됐던 그 시절, ‘운동권’들은 정부가 금지한 책들을 갈구했다. 대학가에서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한계,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 정권의 노동 탄압, 광주에서의 학살 등등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흥미롭게도 당시의 대학생들은 이에 대한 교육을 ‘교양’이라고 불렀다. 정부가 금지하는 지식이 ‘교양’이라면,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 작업 또한 ‘교양’이었던 시대였다. 당시의 ‘교양’이 저항운동의 확산에 기여했으리라고 확언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당시의 운동권들은 저런 책을 읽어서 투사가 된 것이 아니라, 투사가 되겠다는 결의를 했기 때문에 저런 책들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레닌 등등의 책이 정식으로 유통됐지만, 이 책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활동을 촉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은 사회에 강하게 맞선다고 인정받는 사람들(노조원, 정치인, NGO 등)에게 용기를 주는 서적이라기보다는, 인문대와 사회대의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하기에 적합한 학술서로 취급받는다.

물론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불온성이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남아 있는 분단국가이다. 수업에서 마르크스 운운했다가는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좌빨’ 교사로 단죄받을 여지가 있다. 마르크스를 교육하는 것은 혁명적인 선동은 아닐지라도 나름 용매한 행동이다. 하지만 상기했듯, 1980년대에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제의였을지언정, 지금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세련된 ‘교양’을 다지기 위한 지적 노동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운동권’이 아니라 ‘교양인’들이 읽는 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은 행위가 이제 속물적 ‘교양’을 뽐내는 일로 전락했다. 곽이 ‘고전읽기’ 수업을 시작할 무렵에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의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편 교양」의 독자는 그를 통해 이 점을 깨닫게 된다.

상황이 이러한데 전인교육의 이상이 가능할까? 아니, 과거에 전인교육으로 여겨졌던 것(가령 마르크스 책에 대한 교육)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곽’은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를 읽혀서 풍부한 교양을 제공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그 교양은 학생의 명문대 입학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결과가 어떻든 참교육을 실현하려는 교사가 있다면 좋은 일이고, 독자는 그렇게 성실한 교사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결기는 개인의 자기만족에 그친다.

한편 「로나, 우리의 별」의 주인공 로나는 진정성 있고 정의로운 음악인이다. 그녀는 온라인 플랫폼(아마도 쇼트 영상을 퍼트리는 틱톡)을 통해서 유명해졌다. 온라인은 피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도파민이 넘쳐나는 이미지를 부각한다. 로나는 인터넷 시대에 걸맞은 스타였다. 그런데 그가 ‘의식 있는 아티스트’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진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activist)로 변복한 순간, 세상은 관대함을 거둬들인다.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

「보편 교양」과 「로나, 우리의 별」은 진정성이 의미를 되묻는다. ‘곽’과 ‘로나’는 진정성의 소유자였다. 진정성(Authenticity)이란 사회적 허위를 투시하고 자신만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실존적 결의를 뜻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읽으려는 교사의 진정성이나 사회비판을 하려는 락스타의 진정성은, 어쩌면 정치경제적 권력의 사회적 통제가 명확히 가시화될 때에만 의미를 가졌던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진정성의 추구는 결국 마르크스 독해가 서울대 진학에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계량되고, 락스타는 유투브 쇼츠에서 화제가 될 정도의 ‘소신발언’을 할 때에만 미덕이 된다. 권력의 가시적 억압이 투철했던 시대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만으로도 저항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조차도 이채로운 소극으로 취급받는 세계가 도래했다. 이 넓은 세계에서는 고독하게 진정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두각을 나타낼 여지가 없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타이틀을 과시하고 사치품을 걸친 후 사진빨 잘 받는 외모를 만들어서 SNS에 자신을 노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눈에 띄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렇다면 진정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인가? 속물적 세계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무의미할까? 김기태의 소설집에서 표제작이기도 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설핏 암시한다. 이것은 권진주와 김니꼴라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권진주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여성이고 김니꼴라이는 구소련에서 태어난 부모님을 둔 남성이다. 둘은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 상납금을 늦게 냈다는 이유로 담임에게 불려 갔을 때, 선생님은 둘에게 이렇게 말했다. “둘이 친하게 지내.” 선생님은 별다른 생각 없이 배려심 없는 말을 했던 것이고, 두 학생도 딱히 그 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이후 진주와 니꼴라이는 그냥저냥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 최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불우한 환경 속에서 건실하게 경제적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둘은 다시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몇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사실혼에 가까운) 동거 관계가 됐다.

굳이 따지자면 이 작품은 로맨스 장르에 속할 것이다. 로맨스라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커플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달콤하게 그려내야 한다. 모든 인간이 개별적인 존재이듯 모든 사랑 또한 독자성을 갖는데, 로맨스 소설 속에서 독자들은 새롭고 특별한 사랑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미미하다. 둘의 성격이 어땠으며 어떤 대화를 나누다가 관계가 진척되었는지, 그리고 어쩌다 사귀었으며 연애 관계에 트러블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등에 대한 묘사는 아예 생략이 되어 있다.

물론 독자는 그들이 사랑하게 된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권진주와 김니꼴라이는 경제적 성공을 이루기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래도 좌절하진 않은 채 성실하고 솔직히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슷한 경제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기 마련인 오늘날의 ‘결혼시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이들만큼 때 묻지 않은 채 소박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귀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이 천생연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럭저럭 연애를 하기에 적절한 파트너일 수 있겠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 작품은 능청스럽게도 그런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은 채 이들을 둘러싼 세계를 거시적으로 조망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작품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이 이십여 년 후 파리의 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그때 상당수의 조선인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연해주로 떠났다. (...) 두 명의 스탠퍼드 대학원생이 기숙사에서 ‘구글’이라는 검색엔진을 만들고 있을 때 서울의 한 부부는 외환 위기의 여파 속에서 서로의 무능을 탓하며 악타구니를 썼다.(...) 21세기. 평양에서 두 정상은 악수를 나누었다. (...) 그리고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거의 보르헤스의 소설만큼이나 과감한 압축을 통해 200년 동안의 세계사를 요약한 이 대목은, 물론 진주와 니꼴라이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이 태어나서 공존하게 되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범상한 독자의 감각으로는 저런 역사적 사건들이 둘의 인생과 사랑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허나 어쨌든 이 작품은 둘의 관계를 기술하기에 앞서 이런 ‘쓸데없는’ 역사를 상술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세계사적인 조건이 사랑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진주와 니꼴라이에게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던 중학교 선생님은 의도치 않게 미래를 예언했던 셈인데, 이 말도 둘이 동거까지 하라는 종용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이 ‘계시’를 통해 둘이 서로를 눈여겨보고 재회하게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무관계해 보이는 사건 사이에도 섭리와 연관성이 있다는 부정신학적 명제는 오늘날 가치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온갖 SNS에서는 아무래도 화려하고 멋진 사람들의 모습이 넘쳐난다. 본래 SNS는 자기과시를 위한 공간에 가깝다. 명품이나 외제차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은 업로드를 할 동기가 있겠지만, 가난과 역경을 뽐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사회하층부의 ‘민중’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지식인의 미덕으로 여겨졌을지언정 이제 사회는 갭투자나 코인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영앤리치’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다. 멀리 갈 것 없이 인문학계라든가 문단만 봐도 최하층 계급의 처지를 다룬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다.

이는 얼마간 사회적 상황의 변화로부터 촉발된 변화일 것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제목에서부터 국제주의(사회주의)를 상징하던 노래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를 암시한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로 시작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마지막 결전이다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이라는 후렴구로 끝나던 그 노래를 말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시킬 핵심 주체는 노동자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체로 상정한 까닭은, 그들이 가장 전투적이고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노동자는 회사의 운영에서 배제된 채 상급자가 만들어놓은 영영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는 각각 창조적 개성을 발휘한 노동자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협업을 하게 된다. 농민과 자영업자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상대라면, 노동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하는 일이 일상화된 만큼 단결하여 혁명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혁명론이 21세기의 세계에서 유효한지는 확실치 않다. 애당초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려는 정치적 운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누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노동자가 언젠가 급진화되고 변혁적 사회운동에 매진하겠다고 기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때 광장에서 깃발을 들고 사회운동을 꿈꿨던 사람들과 세미나실에서 마르크스를 읽었다는 사람들도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세상에 혁명이 필요한지, 만약 필요하다면 혁명을 이뤄낼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접어두고, 어쨌든 너무나 ‘넓은’ 세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시야에서 배제된 사회하층부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지적할 필요는 있다.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매스미디어에서 배제된다. 정치인들도 ‘빈민’보다는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한 ‘중산층’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세련되게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된 사람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다. 어딘가는 이들이 손을 맞잡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한때 군부독재가 숨기던 ‘민중’을 묘사하던 문학은, 이제 인스타그램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미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됐다. 김기태의 소설은 이렇게나 ‘큰 세상(SNS와 매스미디어에서 표상되는 세상)’에서 그토록 ‘작은 세상(표상에서 배제된 이들이 사랑으로 만들어가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큰 세상’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기실 하찮은 환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현대사회의 ‘교양’이 된다면 그럭저럭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추천 콘텐츠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격월간 릿터 조예은 추리미스터리장르문학사회파추리소설 2025
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