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꺾이고 나란한 세계 : 박문영,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문학과지성사, 2024) 이종산, 『벌레 폭풍』(문학과지성사, 2024)
진동하는 돌봄
박문영의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은 광장에 모여 춤을 추며 해방감을 만끽하는 여자들의 장면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그러나 처음과 끝에서 느껴지는 흥겹고 명랑한 분위기와는 달리, 소설은 유구히 반복되어온 문제를 집요하게 들추는 데 보다 관심을 쏟는다. 소설 속 남성 인물들이 다소 평면적일 정도로 시종일관 무례하고 비열하며 공격적인 성격을 띤다면, 여성 인물들은 서로 “배려 배틀”(p. 55)을 벌일 만큼 상황과 맥락을 빠르게 파악해 언제든 세심하고 다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극도의 대비는 단순히 여성을 남성보다 우위에 올려놓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서 여성 인물의 꼼꼼한 성미는 (반)자발적인 “순응과 굴종”으로 여겨진다. 즉 소설은 “덜 허약한 인간이 허약한 인간을 이용”(pp. 193~94)해 여성들로 하여금 “헌신하려는 각오를”(p. 124) 가지도록 만드는 질서를 문제 삼는 것이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중노년 여성들이 이러한 희생에 중독되게 만드는 일은 생각할수록 쉬운 짓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부당한 헌납과 기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착취를 착취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어디까지나 자신이 기꺼이 원한 기쁨이라고 말한다. (p. 194)
이때 등장한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 즉 나노봇을 동원해 육칠십대 여성들의 피와 뼈를 비약적으로 강화해준다는 의료 사업은“여성분들에게 시간을 돌려드리는 수술”(p. 82)이라는 홍보가 암시하듯, 그간 비대칭적으로 돌봄 노동을 제공하며 쇠약해진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일종의 보상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소설은 이내‘레테타’ 수술이 치러진 후의 시점으로 이동해 “가볍고 산뜻하고 편안해진 몸”(p. 171)을 얻게 된 여자들이 어떤 삶을 선택해나가는지를 그려낸다. 그중 노보금은 스스로 ‘야자수’라는 이름의 야간 자율수색대를 만들어 레테타 수술을 받은 여자들과 함께 동네를 순찰하며, 강도를 잡거나 동물을 구해주고 무거운 짐을 대신 날라주는 등 마치 히어로물 속 주인공처럼 약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실현한다. 그런데 이들의 모범적 선행이 다름 아닌 누군가를 ‘지키고 돌보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더욱이 주어진 힘을 보살피는 데 사용하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 같았다”(p. 170)는 노보금의 고백은 앞서 “희생에 중독”(p. 194)된 여자들의 모습과 다시금 겹쳐지기도 한다.
다만 소설은 이러한 자발적인 돌봄 행위가 단지 가부장적 메커니즘하에서 헌신의 태도를 수동적으로 내면화한 결과라고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그 이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보려는 듯하다. 여자들은 야자수 활동을 하며 생기와 활력을 되찾고, 각자의 의지에 따라 결혼 생활을 그만두고 혼자 살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와 살기로 결정해 새로운 삶을 꾸려나간다. 특히 이와 같은 “특유의 투지와 생활력 그리고 현실적인 시야와 성격”을 곧 여자들이 “수술 전에도 갖고 있었던”(p. 150) 특성으로 명명함으로써 돌봄에 부착된 여성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려는 시선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야자수 모임원들 사이에서 온기와 사랑을 체감하던 노보금은 마침내 타인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게 꼭 자기를 잃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기에 이른다. 이처럼 소설은 여성들의 돌봄이 오로지 “일방적이고 이타적인 ‘상실’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자기 보존적인 ‘선택’”1)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해나간다.
“……그 심정이 성만옥 마음의 창문들인 거야. 너를 썩지 않게 하는 환기구인 거야. 공기가 통해야 깨끗하지. 꽉 닫아두면 곪지. 그러니까 연민 품어. 내버리지 말고.”
“언제까지? 내 주제에 남을 언제까지 챙겨? 이 뒤치다꺼리를 도대체 언제까지 하라고.”
“창문이 없어지면 다시 내. 그리고 다시 닦아. 그 창이 있어서 너도 살 수 있으니까. 응?”
마종은은 자신을 꽉 끌어안은 성만옥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대신 처음 창문은 성만옥, 너를 위해서 내는 거야. 깨끗한 공기를 너부터 들이마셔야 하는 거야. 알겠지?” (p. 163)
한편 여성들로 하여금 온갖 살림을 도맡아 소진되도록 하는 부정적 요소로 여겨지던 ‘연민’ 역시 그 의미가 반전된다. 스스로가 가진 ‘연민’이 자기를 자꾸만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라며 한탄하는 성만옥에게 마종은은 바로 그 ‘연민’으로 인해 “너도 살 수 있으니” 없애려 애쓰지 말고 품으라고 조언한다. 즉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에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포함시킴으로써 돌봄의 수행이 곧 주체가 자기 서사를 전개하는 일과 대치되지 않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2) 그러므로 “처음 창문은 [……] 너를 위해서 내”라는 목소리는 ‘연민’을 시혜가 아닌 존재들의 상호의존적 본성으로 읽어내 오히려 자기 돌봄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로 열리는 전환을 말하는 관점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이는 돌봄을 ‘노동’의 범주에만 한정하는 대신 정동적 ‘활동’으로 확장하여 사유하려는 시도3)에 가깝다.
하지만 희망적인 여성 연대를 도모해가는 듯 보였던 이야기의 흐름은 거듭 뒤집힌다. 레테타 수술자들은 두 차례의 사건에 휘말리는데, 모두 여성을 위협하는 남성을 막는 과정에서 신체 능력이 극대화된 수술자들에 의해 가해자가 다치게 된다는 레퍼토리를 공유한다. 일련의 일들로 인해 자연스러운 노화의 섭리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거나 “인간 병기는 군대로”(p. 112), 북한으로 보내라는 식의 반대 진영 논리가 다시금 끌려 나오고, 레테타를 둘러싼 실효성과 안전성 논란이 거세게 불거진다. 수술을 받은 여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수술자를 알아 볼 수 있는 표식을”(p. 202) 만들어 구분해야 한다며 혐오와 낙인의 대상으로 내몰리기까지 한다. 변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세상이 그대로인 기분”(p. 180)은 이로부터 비롯한다.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레테타 수술자들은 크고 작은 통증과 피로를 겪던 과거의 연약한 신체를 그리워하기에 이른다.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오직 중노년 여성들만이 레테타 수술의 “특권 수혜층”(p. 187)으로 상정된 이유가 다름 아닌 그들이 가장 약자이기 때문이었다는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들이 남자들처럼 힘이 세지 않으며, 젊은 여자들처럼 부작용을 자세히 따져보지 못하고, 무엇보다 “평생 일하라고, 죽을 때까지 쉬지말라고” 하는 요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만만해서”(p. 196) 첫 임상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섬뜩한 추측에 그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무혈 월경을 할 거라던 의사의 설명과는 달리 월경을 시작한 여자, 일을 관둔 남편과 아들 대신 청소 일을 늘리게 된 여자의 이야기는 여기에 신빙성을 더한다. 트랜스휴머니즘적 환상과 결합한 기술을 그리면서도 윤리적 문제 자체를 전면화하지는 않는 소설의 태도 또한 이러한 맥락에 놓인다. 그리하여 “약자이되 약자가 아니었고, 약자가 아니되 약자였”(p. 190)던 여자들의 야자수 모임은 해체되고 만다.
이렇듯 소설은 레테타라는 신기술을 매개로 달라질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전히변하지 않은 현실을 틈새에 개입시킴으로써 계속되는 단절들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소설조차도 내부의 충돌과 모순을 구태여 갈무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코미디언이란 “수상한 틈과 균열을 포착하는 데 비상하고 민첩한 사람이어야”(p. 163) 한다는, 다소 돌출되는 노보금의 직업적 특성이 바로 이 지점에서 접속된다. 더불어 소설을 읽는 내내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연속적 묘사, 즉 여자들의 움직임을 핍진하게 나열하는 장면들도 이와 맞닿는다. 폐지를 줍거나 버스를 기다리고, 짓무른 귤을 까먹거나 지쳐 울고, 죽은 쥐를 수건으로 고이 덮어주거나 우체국에서 테이프를 슬쩍 훔치는 여자들. 소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들 간의 미묘한 갈등과 불화를 은폐하지 않은 채 전부 내놓는다. 그리고 이처럼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짓기보다 끊임없이 판을 전도함으로써 긴장을 유지하는 자세야말로 이소설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비)접촉을 가로질러
이종산의 『벌레 폭풍』은 벌레 폭풍으로 인해 전 지구적 재난에 처한 2100년경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곤충들의 대륙이동이라는 감염 원인과 잠복기를 거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고열증상,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된 광경 등은 지난 몇 년간의 익숙한 풍경을 떠오르도록 한다. 다만 집 안에서조차 어항처럼 생긴 헬멧을 쓰거나 가족과도 마주치지 않으며 자기 공간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흔해졌다는 설정은 그 재난의 강도와 기간을 체감하게 만든다. 이렇듯 물리적 거리 두기가 완전히 일상화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들은 ‘스크린 윈도’라는 언택트 시대의 새로운 발명품을 통해 소통한다. 이는 영상통화나 라이브 방송이 가능한 오늘날의 스마트 기기 개념에 더해, 실시간 시뮬레이션을 구현해 소리와 냄새, 감촉을 동반한 타인과의 가상 산책까지도 지원하는 일종의 ‘창문’으로 묘사된다.
스크린 윈도를 누구보다 적극 활용하는 인물 포포는 스스로를‘접촉 혐오’자, 즉 “스킨포비아”(p. 98)로 정체화한다. 벌레 폭풍이 시작된 이후 20년 넘게 혼자 살아온 그는 7년째 사귀고 있는 애인 무이마저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않았을 정도로, 언제 위험에 노출될지 모르는 ‘진짜 바깥’을 극도로 싫어한다. 남은 인생을 무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그가 둘의 결혼 생활 보금자리로 선택한 곳 역시 겉으로는 하나의 집이지만 그 안은 공간이 벽으로 분리된 ‘2인용 집’이다. 소설이 스킨포비아 및 스크린 윈도 부부의 존재나 사람보다 기계를 친숙하게 여기는 현상 등을 특이한 예외가 아닌 보편의 세대적 감각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듯, 포포에게는 상대가 아무리 사랑하는 무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살갗을 맞대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부재한다. 이에 둘은 2인용 집에 같이 살되 직접 만나는 일 없이 따로 지내기로 합의했으나, 문득 “한 번도 안 만난 사람이랑 결혼한다는 게”(p. 148) 이상하다고 느낀 무이는 포포와 결혼식 전에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레 표한다.
“응, 누구든 스크린 윈도가 아니라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면 손이 떨려.
만나는 생각만 해도 불안하고 겁이 나.”
“뭐가 겁나는 건데?”
“직접 만나는 것 자체가 싫고 무서워. 근데 나한테는 이게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야. 고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야.”(p. 223)
그러나 이 같은 무이의 제안은 포포에게 있어 단순한 호오를 넘어 실존적인 차원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무이를 직접 만나면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릴 것 같다”(p. 150)는 불안, 다시 말해 실제로 만난 무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스크린 윈도’를 통한 삶이 포포의 엄연한 “사는 방식”이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즉 포포에게는 누군가를 ‘직접’ 만나는 행위 자체가 곧 자신이 발 딛고 있던 세계가 와해되어버리는 경험에 해당하는 것이다. 포포가 스크린 윈도 속 세상을 또 하나의 “현실”(p. 223)로 받아들이고 있음은 앞선 무이의 의견과 달리 포포는 그들이 “한 번도 안 만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도리어 이미 언제나 일상을 함께하면서 “사실은 매일 봤”(p. 148)다고 생각한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스크린 윈도로 구현된 가상 세계는 그저 환상에 불과한 현실 세계의 대체품이 아니라 “둘 다 진짜로 존재하는 현실”(p. 228)이며, 비접촉에 기반한 생활 또한 단절과 고립의 상징이라기보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pp. 142~43) 반증이다.
이렇듯 소설은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위계를 두는 대신 그둘이 단지 토대만 다를 뿐인 “일종의 평행 세계”(p. 228)임을 역설함으로써, 나란한 두 겹으로 이루어진 “이중의 세계”(p. 284)관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로 차용해 온다. 그리하여 양쪽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가능한 여러 ‘사랑’의 형태를 그려내고자 시도한다. “사람과 사람의 피부가 맞닿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p. 29) 여기는 민정은 상대와 ‘직접’ 대면해 눈을 보고 대화를 나누며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몸의 경험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이때 서로를 만질 수 있는 관계를 필요로 하는 언니 민정과 접촉을 혐오하는 동생 포포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수 없을 듯 보인다. 그런데 민정이 평소처럼 “뜨거운 체온”(p. 135)을 나누고 싶어 찾아간 애인의 집에서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음에도 “몸이 따뜻해”(p. 196)진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은 왜일까. 다른 누구도 아닌 민정이 스크린 윈도를 통해서만 서로를 확인하고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사랑을 감각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한편 소설은 이와 정반대의 모습 또한 대칭적으로 펼쳐 보인다. 포포는 망설임 끝에 무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다짐하고, 마침내 2인용 집 한가운데를 가르던 벽의 문을 열어 무이를 마주한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냄새를 맡고 숨소리를 듣는 게 의외로 “나쁘지 않다”(p. 263)고 느낀 포포는 심지어 무이의 생생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스크린 윈도가 얼마나 평면적인 세계였는지”(p. 247)를 새삼 깨닫기도 한다. ‘포포(包包)’라는 이름이 가진 폐쇄와 개방의 양가적
의미가 동시에 드러나는 지점이다. 여기까지 읽는다면 소설은 결국 스크린 윈도 바깥의 ‘진짜 세상’ 쪽에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포포와 무이가 직접 접촉하는 순간은 그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년의 시간을 거쳐 서로를 대면한 이들은 비접촉의 가상 세계가 가지는 결핍을 인정하고 현실 세계에서 접촉의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가기로 약속하는 대신, 오히려 지금까지처럼 “무이는 무이의 공간에, 포포는 포포의 공간에 있을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할 것”(p. 288)임을 다시금 새긴다.
그러니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이들에게 스크린 윈도의 안과 밖이라는 차이는 더 이상 대단한 문제가 아니며,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p. 249)다는 사실 자체이다. 어쩌면 둘은 앞으로도 영영 서로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살아 있음’을 감각할 수 있고, 이러한 방식의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 바로 여기로부터 소설이 내내 견지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탐구의 동력이 발견되는 듯하다. 물론 이 사랑은 소설 곳곳에 삽입된 장애와 퀴어, 인종의 교차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혈연가족의 복잡다단한 애증 관계에 기대고 있으며, 제목에서 연상되는 인류세적 함의 역시 소략하게 처리된다는 점에서 다소 익숙한 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에 무이와 시간을 보낸 포포와 ‘그’의 집에 다녀간 민정이 각자 “사랑으로 충만”(p. 262)해지며 “이름 모를 수많은 이에게 사랑을 느”(p. 272)끼는 장면은 일면 급작스러운 정념의 과잉으로 보이나, 벌레 폭풍으로 인해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황폐한 세계라는 소설의 배경을 떠올려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벌레 폭풍이 몰려올 조짐은 끊임없이 언급되고, 결말에 이를수록 벌레 떼로 뒤덮인 새까만 하늘의 묘사와 함께 끔찍한 피해들을 알리는 뉴스가 재생된다. 이렇듯 수많은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랑을 품는다는 건, 나아가 “생명이 피어나기를”(p. 262) 소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결국 참혹하게 무너지는 도시의 한가운데서 소설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랑’이란 누군가 “부디 살아주기를”(p. 267) 바라는 마음과 상통한다. 즉 폐허가된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가 생존해 있음을 알아보고 기억하는 일은 곧 죽지 않고 함께 살아남자는 뜻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이로써 소설은 현실의 거리에서든 가상의 공간에서든 각각이 격리된 채가 아닌 한데 모여 연결된 복수의 ‘우리’로서 존재하는 한 삶은 여전히 계속될 수 있다는 데 기대를 건다.4) 망가져버린 이곳에서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입증해줌으로써 관계를 지속해나가려는 끈질긴 믿음이 빛난다.
- 1) 김미현, 「정의에서 돌봄으로, 돌봄에서 자기 돌봄으로」, 『더 나은 실패』, 강지희 엮음, 민음사, 2024, p. 274.
- 2) 같은 책, pp. 275, 303.
- 3) 대표적으로 김미정, 「가치로서의 돌봄: 자본주의 가치 법칙으로부터 돌봄 해방시키기」, 『돌봄의 시간들: 돌봄에 관한 9가지 정동적 시선』,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 모시는사람들, 2023. 해당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2024 제1차 번역교육포럼 〈세대의 이름으로〉(한국문학번역원 )에서 진행된 발표 (조연정)와 토론 (김미정)을 통해 접한 바있다.
- 4)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p. 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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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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