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제204호)
비평, 또는 반복과 번복 사이의 대화
1. 대화의 비평, 그 가능성의 기록
‘의사소통 행위이론’으로 잘 알려진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상적인 대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 대화는 모두에게 공평무사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참여자의 발언권은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된다. 둘째, 대화자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 논변의 타당성에 대해 따질 수 있어야 한다. 누구의 주장이든 검증에 문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셋째, 대화는 참여하는 각자의 입장과 소망을 투명하게 담는 진정성을 띠어야 한다. 거짓을 전제하거나 기만의 의도를 숨기는 발화는 용납되지 않는다. 넷째, 대화는 언어의 규범적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소통 자체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논리는 한편으로 ‘정상적’ 의사소통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이상적 상황’을 조건짓지만, 다른 한편으로 계급과 성별, 인종, 성적 지향 등에 의해 차별화된 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상적’이라 비판받는다. 일종의 공유재로서 언어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듯싶지만, 실상 우리는 저마다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내뱉으며 소통 불가능한 장벽에 가로막히는 탓이다. 가령 부와 권력의 차이는 법정의 발화조차 비대칭적으로 만들고, 성별의 차이는 제도적 보장에도 불구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성한다. 관건은 단지 언어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는 원론적 가정에 있지 않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불균등하게 나뉘어져 있으며, 동일하지 않은 언어가 맞부딪히는 불평등한 관계 자체가 문제이다. 소수자가 엄존하는 현실과 더불어, 비인간 타자가 화두가 된 우리 시대에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비평은 곧 대화라는 명제를 거부할 비평가는 없다. 모든 비평가는 글쓰기를 통해 작가와 텍스트, 세계와 만나고 소통한다. 하지만 그 대화가 언제나 공평무사한 ‘이상적 상황’ 속에서 진행되지는 않는다. 존중과 신뢰에 기반한 대화는 서로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가운데 대칭적인 관계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평적 대화는 이상을 전제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실을 두루 살피고 거듭 다시 확인할 때 간신히 성립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과정은 결코 안온하거나 순탄하지 않다. 읽기의 반복은 쓰기의 번복을 낳고, 번복된 쓰기는 다시 읽기를 강요한다. 어쩌면 대화로서의 비평이란 그 같은 쟁론의 되풀이로 정의해야 할지 모른다.
조대한과 박동억의 첫 번째 비평집 『세계의 되풀이』(민음사, 2024)와 『침묵과 쟁론』(푸른사상, 2024)은 공통적으로 비평의 반복과 번복을 거론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반복과 번복은 불가능한 대화의 악무한적 과정이 아니다. 거꾸로 이들은 지금까지의 비평적 대화가 작품에 대한 공평무사한 태도나 참여의 규범적 원칙을 과신한 나머지 현실의 비대칭성이나 불평등, 혹은 독해의 일면성을 간과했던 게 아닌지 되묻는다. 비평을 이상 혹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 위에 정초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머뭇거림과 주저 속에 왔던 길을 되짚어보고, 다시 돌아가 보는 반복과 번복의 행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평적 읽기와 쓰기는 언제나 거듭되는 쟁론의 되풀이 가능성을 함축하게 된다. 이 두 비평집은 그 가능성에 관한 기록이다.
2. 반복, 되풀이되는 세계의 형식
‘예상표절’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바야르가 제안한 흥미로운 개념이다. 후대의 작가가 전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통념과 달리, 전대의 작가가 후대를 모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왜 이런 역설적인 개념을 조대한은 비평집의 화두로 삼았을까? 아마도 지상에 탄생한 모든 것, 특히 문학작품이 겪어야 할 ‘운명’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것은 거창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작품이 인지되고 평가받기 위해 거쳐야 할 시간의 과정을 말한다. 언어적 구조물, 허구적 창작물의 외형을 벗어나 반복적으로 읽힘으로써 억압된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의 발견이 그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문학을 오랫동안 동경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한 되새김질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늘 늦되지만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약속처럼 되짚으며 등장하는 여러 작품들 덕분에 나는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급작스러운 사건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7면). 이는 투명한 의사소통의 규칙들로는 환원되지 않는 읽기의 비밀, “누군가 애써 읽지 않으면 영원히 독해되지 않는 공백의 상태”(같은 면)에 관한 내밀한 고백처럼 들린다.
반복과 읽기, 읽기와 반복의 실례를 우리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바, 예컨대 유진목 시인의 작품들에 대한 독해를 보라. 조대한은 시인의 여러 시편으로부터 ‘문장 단위의 반복’, ‘작품 단위의 반복’, ‘시집 단위의 반복’을 재치있게 밝혀내는데, 여기서 초점은 비슷한 구절이나 단어의 동형적 되풀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조대한은 시인이 말하지 않은 것, 쓰지 않은 것,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여주면서, 그것들이 “선형적으로 긴밀하게 이어진 이야기라기보다는, 가능했던 삶의 순간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배치된 장면들”(103면)이 아닌지 반문한다. 다시 말해, 시적 언표로 노출됨으로써 오히려 표현되지 않은 삶의 각이한 장면들, 사건의 순간들이 서로 다른 시편들 속에 자신을 표명하고 얼굴화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다. 그것은 “단발로 완결되지 않을 잉여의 이야기가 있을 때 또는 발화를 덧붙여야 하는 필수적인 연유가 있을 때 행해지는 수행”(105면)으로서, 한 편의 텍스트로는 언명되지 못하는 또 다른 텍스트들의 몸이 내뱉는 “분신들의 메아리”(150면)에 가깝다.
가상의 신체를 의미하는 분신은 주체로 호명받지 못하는 타자의 이미지, 생존의 전략을 뜻한다. 조대한은 주체든 타자든 일방의 표상 속에 머물 수 없는 시적 윤리가 분신의 이미지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모호함은 우리 시대의 언어가 ‘자격을 갖춘 주체’, 또는 ‘대신 말해주어야 하는 타자’ 사이의 불투명성으로부터 발생하기에 빚어진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벌어졌던 현실의 파열은 규범과 규칙의 이상적 상황 ‘바깥’으로부터 들려온 낯선 소리였다. “내밀한 시적 주체가 외밀한 타자와 겹쳐지는 발화의 시작점”(155면)인 그곳‘들’로부터 언어로 정제되지 않은 비명을, 불확실한 소문을 청취하고 문자로 옮길 때 글쓰는 자는 비평가가 된다. 아니, 비평가로서 자신을 의식할 것이다. 이 같은 자기의식은 작가와 작품, 세계를 마음대로 규정하거나, 언표 불가능한 사건에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을 이상적인 주체로 구축하는 것과 다르다. 자기를 지우면서 타자를 받아들이되 타자에 함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새로운 감정을 위한 텅 빈 시간의 가능성을 획득”(209면)하는 과정의 주체에 비견된다. 비평가 역시 한 명의 분신으로서, 글쓰기를 통해 세계와 작품, 작가를 만나고 자신이 누구인지 되물어야 한다.
반복은 그 과정의 형식이다. “일종의 고집처럼 작동하는 힘”(331면)과 같이, 늘 되풀이되는 세계를 마주하여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을 거부하며, 불화의 태도를 유지하려는 나의 모습”(같은 면)이 빚어진다. 이 점에서 반복은 또한 ‘재발명’이기도 한데, “전에 없던 것을 창조한다는 뜻보다는, 잊혔던 것을 재발견하고 그에 다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261면)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반복과 읽기의 되풀이야말로 조대한 비평의 대화적 소임일 것이다.
3. 번복, 침묵 사이의 쟁론
법은 보편성을 내걸지만, 판결의 언어는 대개 원고나 피고의 일방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쟁론은 공평무사한 보편이 부재할 때 생겨나는 갈등으로, 애초에 불평등과 비대칭을 인지한 채 시작하는 대화를 가리킨다. 비평집의 문을 여는 자리에서 박동억은 리오타르의 이 개념을 빌려오며 문학의 언어는 과연 어떤 것인지 묻는다. 가령 묘사 대상이 발언할 수 없는 죽은 자이거나, 동물이나 기계처럼 공통의 언어를 갖지 않은 비인간 존재일 때 문학은 어떻게 그들을 정당하게 언어화할 것인가? “말은 곧 인간의 법정이다. 시인이 말할 수 없는 타자를 시에 재현한다는 것은 타자를 쟁론의 무대에 올린다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시 쓰기는 말할 수 있는 시인과 말할 수 없는 타자 사이의 불평등한 대화를 입안하는 일이다”(11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시인의 언어는 공평무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그 기울어진 대화로부터, 비평은 시인이 남겨놓은 공평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분별”(같은 면)의 모험을 가동시킨다.
하지만 비평가는 재판관이 아니다. 시인의 실존 조건이 초래한 대화의 불균형을 교정해 준다거나, 옳고 그름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초월적 지위에 올려두는 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인의 언어가 도달한 곳에 어떤 불가능성이 있고, 어떠한 가능성이 남겨져 있는지 탐문한다. 예컨대 김혜순 시인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문학과지성사, 2019)에 관해 이야기하며, 박동억은 시인이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완수 불가능한 고뇌와 대결”(65면) 중임을 밝힌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인간 아닌 실존으로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시인의 언명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증언이 된다. 인간은 동물이 되어 말할 수 없고, 동물은 인간이 되어 언어를 가질 수 없다. 문학은 이토록 도저한 이분법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평의 과제는 시인이 길어내지 않은 텍스트의 이면마저 읽어내는 데 있다.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탈주체가 가능하다거나 인간이라는 ‘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또 다른 타협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고백하며, 인간이라는 죄악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감당해야 한다”(66면).
일견 ‘징후적 독해’를 연상케 하는 이런 독법은 이론적 정치함이나 논리적 설득력을 지향하지 않는다. 박동억에게 비평이란 타자의 침묵을 향한 어떤 자세, 무언(無言)이 노정하는 불평등과 비대칭의 상황에 대한 개입을 뜻하기 때문이다. “침묵”과 “침묵의 능력”에 대한 분별을 예시해 보자.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증언할 능력도 없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침묵과 침묵의 능력을 구분해야 하며, 때로 시인들이 침묵하는 자로부터 어떤 의미를 읽어내려 할 때, 그리고 때로 시인 자신이 도리어 침묵하는 자세를 취할 때도 각 자세가 지닌 고유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하여 넓게 숭고한 타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숭고한 타자를 ‘향해서’ 말하는 것을 구분하도록 하자”(96면). 말할 수 없다는 현사실성의 한계에 머무는 것과 언표되지 않는 진실을 침묵 속에 구분짓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해서’와 ‘향해서’의 차이는 그에 있을 터. 타자의 침묵을 향해 시인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그로써 무엇이 드러나고 다시 침잠하는지 분별할 때 비평의 윤리가 성립한다.
물론, 윤리는 도덕의 정언명령일 수 없다. 비평가는 시인의 초자아를 자처하지 않고, 스스로 초월자로 나서지도 않는다. 읽기와 쓰기에서 ‘번복’은 그러한 자기 부정과 성찰의 지지대를 표시한다. 분별의 책무를 떠안고 있음에도, 그것조차 언제나 번복될 가능성에 열려있노라고. “몇 해 전의 문장을 번복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믿어왔던 신념이 깨어지기도 한다. 문장 속에서 어떤 확신을 길어올리려 하다 보면 오히려 길을 잃는 것만 같다. 어쩌면 글쓰기란 하나의 이론과 신념을 세우는 과정이라기보다 헤매는 과정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그럼에도 왜 쓰는가. 쓴다는 행위의 본질은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일지도 모른다. […] 그렇게 말 건넴의 행렬에 동행하는 것이다”(6면).
*
이상적 대화에 관한 비평의 명제는 근대 문학의 허상일 수 있다. 말하는 입과 듣는 귀 사이의 부조화와 불균형이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임을 떠올릴 때, 타자를 향한 공평무사한 읽기와 쓰기는 여전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반복과 번복은 비평이 아직도 대화적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타자를 향한 다시 듣고 다시 쓰기의 자세가 여전히 놓여 있는 지평을 증거한다. 조대한과 박동억의 비평집은 그 무수한 자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추천 콘텐츠
1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광장에서 들었다. 친위쿠데타를 획책한 대통령의 파면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부러 광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쿠데타는 대한민국 사회에 꽤 긴 감정의 침전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을 통해 그동안 은폐된 채 현존해 있던 충격적인 우리 사회의 일면이 드러난 사태는, ‘윤석열의 시간’이 ‘박근혜의 시간’과도 또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게 각인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동의 그림자가 넓고 깊었다는 사실 앞에서 적잖은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했다. 예컨대 현실로 존재하는 윤석열 지지세력 혹은 극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으면서 적대시를 경계하고 ‘대화’나 ‘공존’을 주장한 글들1)과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갈피없이 치솟아오른 실례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때’와 다른 지점이다. ‘박근혜 때’는 나름대로 한뜻을 모아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지만, ‘윤석열 때’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이재명’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만들어 나타나는 착시 같지만, 아마도 이번 현상의 뿌리는 깊은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현상이라는 이파리는 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쿠데타와 동시에 떠오른 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적 분석과 그 역사적 계보와 관념의 토대를 찾아나서는 정신적 노고를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와 실천들이 부족했기에 이런 사태와 현상이 터졌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우리의 자세와 수련에 따라 천우신조의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어느새 성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1677)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서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자체나 신체의 어떤 부분이 가지는 활동력이나 존재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나 정서에 대한 신체(몸)의 우선성이다. 즉, 감정이란 것은 신체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칸트를 읽으며 ‘직관’과 ‘사유’를 인식의 요소로 파악하면서 사유는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3) 직관의 능력은 마음이 가지는데 사유가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감정에 의존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스피노자처럼 그 중간에 신체가 개념적으로 자리잡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에게 있어 감정, 즉 마음의 작용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이 몸과 몸의 연결이라는 차원을 갖는다면, 마음 차원에서도 그 연결을 유추하는 일에 논리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클리셰나 혹은 지적 나태로 읽힐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논파당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윤석열‘들’이 기도한 쿠데타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감정의 공동체’라는 말은 모두가 갖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차별적인 동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강압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며, 민주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때는 도리어 비추는 빛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른, 즉 내적 구조와 밀도가 다른 구슬들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연합적인 조화를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조화는 부단히 해체되려는 힘과 서로 곁이 되려는 힘이 공존하는 관계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구슬’이 환기하는 것에는 감정이 제외될 수도, 제외될 리도 없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서 집단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시의 역량과 책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시의 역량과 책무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냉정한 조건을 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적 조건이 시의 역량과 책무를 축소시키거나 은폐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시 자체의 위의와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실적 조건의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수록 시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워진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작품의 현실성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개인인 독자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2 김해자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은 사람의 삶에서 사람 아닌 존재의 삶까지, 구체적인 생활의 세목에서 역사적 상황과 우주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해자의 시에 독자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의 감정의 동요가 고스란히 작품에 전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동요라는 것이 좋은 시에서는 항용 그렇듯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동요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김해자의 시에는 집단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집단적인 감정이란 추상적이고 평균화된 전체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감정 자체가 집단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해자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복수인 그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월식」 부분 인용 부분(4~7연)은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했던 여인이다. 작품은 전체가 화자의 입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 5, 7연은 제목인 ‘월식’에 걸맞게 달이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화자가 혼잣말처럼 내뱉고 있지만 청자가 숨어 있는 구조를 취하는 서정시의 형식이다. 반면 그 사이의 2, 4, 6연은 행의 구분 없이 화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형식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방식은 김해자 시인이 자주 활용하는 형식구조다. 이는 아마도 이야기와 노래 둘 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는 자발적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서서히 삶의 영역 쪽으로 옮겨오는 화자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여인이 처음에는 자살의 장소로 강을 택했다가 “맴만 젖”고 만다. 물이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고 말아서 죽으러 갔다가 도리어 삶의 부력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역설적이게도 몸의 고통을 통해서 삶을 느끼게 된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자신이 죽어서 보일 “흉한 꼴”을 포기함으로써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며 죽음으로 난 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몸의 역할이다. 2연에서는 물에 들어간 몸이 수면 위로 붕 뜨고, 4연에서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죽을 맛”이다. 몸이 고단해진 것이다. 그 몸의 실감을 통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다는 구체적 진실을 깨달으면서 삶의 방향 쪽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른바 ‘객관적인 눈’은 화자의 증언에서 과장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증언을 작품으로 빚어내면서 녹아 들어간 시인의 진실한 마음이—설령 화자의 증언이 과장일지라도 그것마저 넘어선—삶의 의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1, 3, 5, 7연은 달의 사라짐(죽음)에서 다시 나타남(부활)까지 노래의 형식으로 독자의 감정에 물결침으로써 더욱더 화자의 증언이 진실임을 밀어올린다. 특히나 마지막 7연의 “야아 달이 살아났네 /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는 개인의 경험을 훌쩍 넘어서는 자연의 본질, 즉 은폐와 생성(poiesis)의 반복이라는 진리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 진리의 영역이 가능했던 것은 화자의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작용을 시인이 세밀하게, 하지만 과잉되지 않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마음 변화, 즉 죽음에 기울었던 비탄에서 삶을 향한 자기보존(혹은 극복)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은 일면 화자 개인의 것인 듯하지만, 이 시의 이면에 흐르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운동하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해자가 파악한 민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자신의 몸이 다른 몸과 연결돼 있다는 실감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된 긍정의 감정이다. 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월식현상을 어떤 부활로 노래하는 짝수 연은 홀수 연에서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비극양식에 비유하자면 디티람보스(dithyrambos)의 역할을 한다. 디티람보스는 본래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기간 중 마지막 행사로 벌이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각 부족 대표로 참가하는 민중 합창단을 뜻하지만, 니체(F. Nietzsche)는 디티람보스가 비극 전체에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즉 디티람보스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4)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개별자라 하더라도 감정은 복수의 갈래가 뒤엉켜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의존하는 몸 자체가 이해(利害)를 떠난 여러 생명의 복합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 울어주러”(「버버리 곡꾼」, 『집에 가자』, 삶창 2023) 온 경우에서 보듯, 김해자의 시는 시인 자신의 감정과 민중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울리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몸에서 한 감정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혹은 단수의 감정인데 복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기획’하는 이른바 현대시의 ‘다성성’은 몸과 마음의 관계망이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차원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월식」이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니들의 시간」은 한참 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 귀속돼 있는 시간과 공간과 차원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들어오면서 시의 선형적 구조는 흐트러지고 만다. 즉 작품에 다른 기(氣)가 내유(內有)함으로써 「월식」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3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도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 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니들의 시간」 부분 먼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이 부른다는 “니”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우데게족에게 ‘니’는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존재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깃든 모든 영혼”이다. 그러니까 ‘니’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을 떠나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도 그런 ‘니’에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니들의 세계’는 이미 깨어졌다. 1절에서 그런 징후를 드러내다가 2, 3, 4절에서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니’가 사라진 세계 또는 ‘니’의 의미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마치 “고수레”하듯 읊조린다. 그런데 ‘고수레’의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마치 혼자만의 넋들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작품의 복판격인 2절과 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고수레’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절 1연의 (우끄라이나)전쟁 상황과 2연의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찬 현실은 이어져 있는 인과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조각보를 기우는 듯한 방식을 쓰고 있기에 전쟁과 미움의 연관관계는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기도 한다. 그 뒤 이어지는 3절 2연에서도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현실이 지금 시인의 마음을 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든가 “니는 대체 왜 그래”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뱉어내고 또 듣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원망의 언어 “없이”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라고 묻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의 “니”는 다 파괴되었다. 물론 우데게족의 ‘니’와 한국어 ‘니’의 실제 의미는 다르지만 소리를 빌려와 동일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가 가진 특권의 문제이며 시인은 그것을 근사하게 해냈다. 그런데 “니가 나와 섞”이지 못하는 현실과 ‘니’를 향한 원망과 미움은 막연한 심리적 뒤틀림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가 차곡차곡 쌓아온 업(karma)에 다름 아니다. 4절 2연의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 아무리 헤엄쳐 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에서 그 일면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그 업에 무릎 꿇고 비는 대속(代贖)행위를 한다. 누구에게? “한낮에도” 출몰하는 귀신—다름 아닌 ‘니’들—에게. 우리는 지금 귀신마저 원망에 차 “안전 안내 문자”처럼 출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귀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귀신의 목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 대신 빌고 있는 것이다. 근대가 자신의 업을 고쳐보겠다고 더 쌓고야 만 업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고수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절인 5절에서 다시 무너지듯 내뱉는 탄식은 그런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우린 어쩌다 앞으로 올 존재들과 그들의 시간을 다 먹어치워버렸나. 그렇다면 ‘고수레의 마음’은 죽었다 살아나는 달(「월식」) 같은 자기치유와 닮은 마음 아닐까. 귀신에게 비는 마음이 일종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벽이 아니라 ‘나’로 향하게 함)’라면 결국 자기 마음에 비는 행위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월식」과 「니들의 시간」은 그려내는 시공간의 폭이나 그 형식은 다른 작품이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민중의 자기치유를 통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통치만이 결국 ‘니’(타자)에 대한 성찰과 ‘니’(귀신)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죽임과 좌절, 원망과 혐오로 얼룩진 우리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경신년(1860) 4월 종교체험을 할 때 들은 첫 말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최제우는 가뜩이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제국주의가 괴이한 언어(기독교)를 앞장세워 무력까지도 불사하며 밀어닥치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려는 바람과 기도가 깊고도 깊었던 것일까. 급기야 신다전한(身多戰寒), 즉 몸이 심하게 떨리고 춥더니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인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찾아왔다. 이때 들려온 말이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였고, 이어서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知天地而無知鬼神)”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서 ‘귀신’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으로는 “천지의 또 다른 영묘한 이름”이라 했거니와 최제우가 몸으로 접한 새로운 기운(接靈之氣, 신령과 맞닿아 합일하는 기운)을 일컬을 것이다.5) 그런데 최제우의 ‘귀신’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의 “니”와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해자의 시는 ‘니’로서의 ‘귀신’이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산산이 부서지면 “안전 안내 문자”같은 악귀(惡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기(氣)는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영원회귀하는 실체로서, 그 기의 운동에 괴변이 생기면 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과 마음도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신령이요 인간 밖에는 기의 운동”(「동학론」, 『동경대전』)이라는 말은, 기(氣)와 영(靈)은 내재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래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변화하는데 그중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은 신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인간을 일러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라고 했던가. 따라서 우주 전체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지역의 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생명·사물에 깃든 영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인간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도 위태로워진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한 것은 이런 상태일수록 우리 안의 신령을 배신 혹은 불신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 하라는(修心正氣) 바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어의 타락과 타자를 혐오하는 영혼이 절정에 달해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기의 운동 변화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일단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연히 기후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한 탓이라는 것에 이제 다른 토를 달 수가 없게 됐다. 생태계의 교란·파괴라는 것은 결국 “니들의 시간을” 먹어치워버린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사물과 타자 또한 기의 형체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영, 즉 ‘니’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아니 “앞으로 올 니들”까지 먹어치웠으니 그 ‘니’가 다른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악귀’이고 그 악귀의 파토스는 원한과 혐오이며, 그 파토스의 로고스 형태가 언어의 타락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고 시인이 ‘언어의 파수꾼’이라면, 김해자의 「니들의 시간」은 목자의 역할과 파수꾼의 임무에 응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도 지당한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은 점점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자도 자본가도 관료들도 그리고 파시스트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증명 방식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주인된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방식을 계발해 나아가면서 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과연 ‘주인된 민중’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에 대해서는 묻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저는 자연과 신성(神聖)의 파괴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자연과 신성이 곧 민중의 삶의 거처이며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사물을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킨 근대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물은 상품생산을 위한 원료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제공했으며, 이 비도덕적 경제관념이 수탈과 식민,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고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집단무의식이 혹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웬만한 신생독립국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그 반대쪽의 암흑은 모르쇠해왔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의 상태, 즉 여타의 활동력과 존재력에 따른 것이라면, 다른 신체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이자 존재 근거인 자연상태가 변질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도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여러 병증(病症)을 통해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을 만들었을지 모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주인된 민중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락한 교의와 정치이념에 맹종하는 노예의 감정을 퍼뜨렸을 것이다. 시가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작돼 다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해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계몽에 몰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감정을 절대시하는 감정의 독재를 낳을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시대의 감정‘들’의 결을 섬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연원을 제대로 사유하는 일의 동시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현대의 철학적 경향에는 대체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또다른 기계로 보려는 관점이 강한데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인’에 한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국면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시대적 국면과 어떻게 조응해왔는지 종합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직관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는 사유와 인식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는 게 아니다. 인식의 새로움은 다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다시 자유로운 사유의 촉발로 되먹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구분법은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에 따른 것이며, 어쩌면 한계 자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마따나 시가 꿈꾸는 민주주의가 “행태들을 갱신하는” 일이나 “주체의 새로운 출현”6) 등에 머문다면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주체의 ‘분할’이나 감성의 ‘분배’ 같은 것에 치중하는, 인간 ‘주체’로 꽉 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과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권리의 횡행을 가능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근대적 주체, 곧 ‘나’는 서구의 근대 정신사에서 신과 ‘능산적 자연’(스피노자)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념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강조가 인간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체 개념을 다른 존재자에게까지 확장하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은 사실 인간 아닌 존재를 의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변종에 가깝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점점 납작해져가는 상황은 인간이 ‘니들’을 먹어치운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가, ‘니’의 회복을 어떻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 감당을 회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회피를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는 주어진 현실을 통과하며 넘어서기 위한 ‘신다전한(身多戰寒)’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신다전한이란 결국 자기 시대의 토양, 공기, 귀신, 욕망, 꿈과 한몸이 되면서 맞는 고통일 것이다.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몸에서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정이 생성되는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순간의 다중공유가 가능해진다면, 이때를 새로운 시운(時運)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1)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박권일 「윤석열의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 2025.3.24; 정희진 「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2025.3.18. 2)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202~203면. 3)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1, 127면. 4)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74면.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부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중우화(衆愚化)되면서 비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됨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극을 몰락시킨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하며 ‘그리스의 명랑성’(“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들의 명랑성”, 92면)에 대한 부박함을 비판한다. 이때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그 건강성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다. 신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이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민주정 시기에 번성했던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운명, moira)에 대한 의식이 아테네 시민들의 시민적 덕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가 확보해준 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기대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철학)와 정치를 이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통합하는 교각이 되어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그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다시 예술이 샘물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말이다. 5) 이상 원문과 번역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통나무 2021, 118~19면 참조. 6)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10~11면.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