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제119호)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 영매가 된 주체들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렸지만 영혼을 얻었다.
—티머시 모턴, 『하이퍼객체』
멸망이라는 디폴트
멸망할 것이다. 이것은 지독한 저주도, 도저한 비관과 냉소도 아니다. 몇 년 전 박쥐와 천산갑을 비롯한 동물들이 선언했듯 인류가 갈 길이 비로소 정해졌을 뿐이다. 푸른 별의 주인이라 자만했던 인류가 “절멸의 재료”라는 사실이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지금처럼만 해라.” 머지않아 “절멸의 레시피”로 만든 “절멸의 성찬”1)이 차려질 것이다. 또한 이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과 사건을 예언하는 묵시록이 아니다. 멸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부지런히 진행되고 있다. 평등한 종말이라는 헛된 기대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로 멸망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멸망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디폴트다. 적이 없는 멸망전을 계속해온 인류는 결국 ‘끝의 끝’에 도달했다.
요컨대 “발아래 아무것도 없는 상황”, 당연하다 생각했던 “지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의 공유”2)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장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는 세계감이자 “새로운 보편성”3)이다. 크로노스적 시간관과 진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미래’는 태평한 시절의 유물이 되었다. 인류의 탐욕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자연과 생태의 거대한 연결망은 미래 그 자체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전 세계 7억 명의 확진자와 700만 명의 사망자를 남긴 팬데믹4) 이후 인류가 도달한 새로운 보편, ‘뉴 노멀’이 아닐까. 다시 시작된 일상과 마스크를 벗은 얼굴에는 전례없는 공포가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증발해버렸다는, 이렇게 쉽게 사라져버릴 것을 유일무이 절대불변의 세계라고 믿었다는 후회와 두려움이다.
시대의 감각과 길항하는 문학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 시에서 두드러지는 경향 중 하나는 주체와 타자가 만나는 장으로서의 세계가 불안정하다는 인식이다. 세계는 폐허이거나 환상이다. 수렁이거나 허공이다.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의 현장이거나 깔끔하게 멸균된 실험실이다. 이렇듯 세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주체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왠지 모르게 자폐적이고 어딘가 무력한 주체의 모습5)은 그러한 혼란의 증상이다. 이에 대해 박동억은 “2020년대의 시 전반에서 반복하는 정조는 세계 상실”6)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무엇이 소중한 자연이고, 무엇이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자연”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를 “‘생태적 아노미’”라고 명명하며, “생태적 아노미란 ‘나’를 지지하는 타자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존재론적 빈곤의 상태를 뜻한다”7)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상실과 타자의 부재와 주체의 빈곤은 일련의 연쇄 속에 있다.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문장이 겨냥하는 마지막 심급은 주체 자신이다.
한편 인아영은 “인간이라는 종의 재발견”에 주목한다. 그는 “심오하고 알 수 없는 내면을 지닌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태학적인 관계망 속에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는 만연하고 상대적인 존재”가 동시대 문학이 그리는 인간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세계를 인간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된 사정은 2020년대 문학이 공유하고 있는 시대적 공통 감각”8)이라고 덧붙인다. 흥미로운 부분은 최근 시의 “생태학적 사유”를 “문학의 오랜 테마인 ‘타자’라는 개념”9)과 연결하는 대목인데, 기후생태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들을 둘러싼 근래의 비평적 흐름은 확실히 ‘인간-주체’가 ‘비인간-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인아영은 “타자에 대한 사유가 결국 ‘나’라는 주체의 문제로 회귀될 수밖에 없는 현시점의 비평적인 장력”을 정확하게 짚어내며, “주체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면, 타자와의 화해 불가능성을 윤리의 결정적인 준거가 아니라 하나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10)라고 묻는다.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문장이 겨냥하는
마지막 심급은 주체 자신이다.
그의 말처럼 언젠가부터 ‘주체와 타자’는 시 비평의 주요한 분석틀로 자리잡았다. 수많은 담론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지만 그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던 건 다름 아닌 주체와 타자라는 방법론 자체였다. 그러나 최근의 시들은 그러한 이분법적 도식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시적 주체와 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상실한 주체는 타자 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고, 언어를 갖지 못한 타자는 주체 없이 자신의 존재를 발화할 수 없다. 시라는 형식 속에서 주체와 타자는 ‘공생존’한다. 2000년대의 시적 주체가 ‘타자 되기’의 미학을 실험했고, 2010년대의 시적 주체가 ‘타자 되지 않기’의 윤리를 지켰다면, 2020년대의 시적 주체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는(존재한 적 없는) 자신의 근원적 조건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그러므로 주체에게 타자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구분되지 않는다. 주체는 유령, 귀신, 요괴, 요정, 동물, 식물, 행성, 로봇 등,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줄 타자를 향해 자기의 존재를 열어둔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를 주체의 권력을 타자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열린 주체’는 애초에 자신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관계 속에 연루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주체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시적 주체가 타자와의 연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정은, 인류가 세계의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속에서 종種의 위상을 재형성하는 과정과 오버랩된다.11) 그렇다면 멸망한 세계에 남겨진 주체가 어떻게 (자신을 포함한) 무언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지 구체적인 시를 통해 살펴보자. 미리 말하자면 주체는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존재가 그곳에 있음을 알리는 “기이한 낯선 것”12)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앎과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그것들은 종종 인식을 초월해 주체를 “공존의 언캐니한 낯설음”13)에 빠지게 하지만, “항상-이미 출몰”14)해 있는 그것들이야말로 발 딛고 서 있을 세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주체가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예측할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 그것은 주체를 통제되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다.
거대한 나무와 요괴의 발자국
멸망한 세계의 주체가 가장 먼저 상실하는 것은 미래라는 가능성이다. 내일이 없다는 감각은 주체를 무력하게 만드는데, 이는 박은지의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구경”하던 주체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저게 우리의 미래야”(「눈을 뜰 수 있다면」). 불타는 미래를 앞둔 현재 역시 안온할 리 없다. “마른장마”가 계속되는 바깥에는 “사이렌 소리”(「비를 쏟아 낸 얼굴」)가 여전하고 “검은 우박”과 “폭발음”(「텐트 앞에서」)은 익숙할 지경이다. 일상과 재난을 구분할 수 없는 세계에서 주체는 언제에도, 어디에도 안전하게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없다.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마을이 시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매일 허물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정말 먼 곳」) 세계에서 주체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멸망을 느끼는 중이다. 바로 그때 꿈은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준다. 주체는 시시각각 무너져내리는 현실로부터 도망쳐 꿈이라는 무의식의 시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주체는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듯이 “속수무책으로 꿈을”(「짝꿍의 자랑」) 꾼다.
하지만 꿈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하다. 꿈은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꿈과 현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몰락한 세계의 주체는 꿈을 꾸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현실의 상실을 보고 듣고 느낀다. 요컨대 현실에 개입하는 꿈이 아니라, 꿈에 개입하는 현실 때문에 박은지의 시적 주체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소리’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은 박은지의 시가 지닌 특징인데, 사라진 존재가 남긴 낯선 소리는 “한 계절 내내 꿈의 기록을 뒤져도”(「녹지 않는 눈」) 그 의미와 행방을 해석하고 추측할 수 없기에 주체는 다시금 현실로 소환된다. 이때 꿈이 남긴 잔해는 ‘돌’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꿈속에서 주운 사라진 것들의 이름은 현실의 돌이 되고, 주체는 그 돌을 “마을 사람들의 집 앞에 쌓”(「짝꿍의 이름」)는다. 주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상실의 흔적을 부지런히 운반하며 꿈과 현실의 이음매가 된다.
따라서 박은지의 시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단지 환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연결 속에서 현현하는,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이미지다. ‘거대한 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환상과 실재를 겹쳐 보는 주체는 나무를 볼 때도 눈앞의 나무만이 아니라 나무의 너머를 함께 본다. 「죽은 나무들」에서 멸망의 징조인 나무는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러시안룰렛”처럼 인간의 능력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다. “축축하고 딱딱한” 나무는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마치 계시처럼 발견될 뿐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체가 나무를 개별의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나무로 본다는 점이다. 존재를 수많은 존재 간의 연결로 바라보는 총체적 시선으로 인해, 나무는 현상만으로는 전부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존재로 그려진다. 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모두를 삼킬 만큼 거대한” 불길과 연기 역시 나무라는 객체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줌아웃시키는 장치다. 다시 말해 거대한 나무는 주체의 인식과 현실을 초월하는 거대한 타자다.
창밖엔 꽃눈
내다보지 않아도
왼쪽엔 단풍, 오른쪽은 앙상한 가지
그 아래 젖어드는 낙엽, 그 옆으론 바람꽃
더 멀리는 초록이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나무
모든 계절을 살아 내는 거대한 나무가 좋아
거대한 나무도 예전엔 평범한 나무였을걸
나무줄기를 두 팔로 안을 수 있는 평범한 나무
바람의 곡선을 따라 하나의 계절만 살아 내고 말이지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며 창을 닫았다
우리의 몸 위로 흔들리는 거대한 나무의 그림자
—「몽타주」 중에서
인용한 시의 주체 역시 한 그루의 나무 앞에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무는 여러 겹의 시간이 하나의 개체 안에 ‘몽타주’된 나무다. 주체는 봄–여름–가을–겨울, 과거–현재–미래가 겹쳐진 나무를 바라보며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나무”라고 말한다.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시간보다 훨씬 광범위한 시간을 내재한 나무는, “평범한 나무”라는 인식으로부터 멀어지는 한편 새로운 시간감을 선물한다.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오리 배”가 그 증거다. 오리 배는 “물결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밀려나는” 존재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갈 수 없는 곳과 돌아갈 곳은 명확”하다고 말하는 주체는 오리 배에 올라 “땀을 흘리며 페달을 밟”는데, 그 순간 주체는 정해진 방향대로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안간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한 계절에” “모든 계절이 뒤섞여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주체에게 현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다. 지금 여기는 수많은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주체가 현재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든 계절을 한 번에 살아 내는” 나무가 선물한 상상력 덕분이다. ‘범시간적’ 존재인 거대한 나무는 멸망한 세계의 주체가 다시금 현실에 발붙일 수 있는 말뚝이 되어주고, 그에 따라 주체는 개체를 초월한 시간의 풍요를 깨닫는다.
왼쪽 창문이 마을과 사과밭, 갈대숲과 작은 폭포를 지나는 동안
오른쪽 창문은 이름 모를 산을 통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아름다운 창문을 보았다
얼어붙은 강을 모두 지날 때까지
요괴와 요정 중 누가 더 현실적인지 우기다가
요괴의 종류에 대해 들었다
사람을 돕는 요괴, 사람에게 장난치는 요괴, 사람을 해치는 요괴
(……)
나무를 자세히 봐 봐 요괴의 발자국이 보여
질주하는 열차 안에서 어떻게 그게 보이냐는 코웃음에도 너는 진지한 얼굴을 잃지 않았다
나는 자꾸 나무와 나무 사이만 보게 되었는데
우리를 따라오는 요괴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아 겁이 났다
아직 잊지 못한 잘못이 빠른 속도로 뒤따라와 빈자리에 앉았다
왼쪽 창문이 동백 군락지 위로 쏟아지는 볕을 지나는 동안
오른쪽 창문은 여전히 이름 모를 산이었다
우리 어디서 내리지? 얼마나 남았지?
너는 아무 대답 없이 오른쪽 창문만 바라보았고
요괴 앞에 늘어놓을 잘못의 종류를 헤아리다 나는 괜히 억울해졌다
터널로 들어서자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
그제야 너는 나를 바라보고 악수를 청했다
—「횡단 열차」 중에서
저 멀리와 지금 여기를 모두 감각할 수 있게 된 주체가 느끼는 기척은 “요괴의 발자국”까지 확장된다. 인용한 시에서 열차 안의 ‘우리’는 한자리에 앉아 두 개의 풍경를 바라본다. 왼쪽으로 보이는 생의 풍경과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산”은 요괴와 요정의 차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데, 둘 중 “누가 더 현실적인지 우기”던 대화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요괴는 사람이 만든 이야기에나” 등장한다는 대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선문답처럼 흘러가던 대화는 나무를 자세히 보면 요괴의 발자국이 보인다는 ‘너’의 말과 함께 현실의 풍경과 접속한다. ‘나’는 “질주하는 열차 안에서 어떻게 그게 보이냐”며 코웃음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괴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아 겁이” 난다. 결국 이 시의 진실은 열차가 좌우의 풍경을 일순간에 어둠 속에 빠뜨리는 터널 속으로 진입했을 때 드러난다. ‘나’가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 남아 있는 질문이 있다. ‘나’가 본 것은 창에 비친 승객들의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발자국의 주인인 요괴들의 얼굴이었을까. 섣부른 인간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서두르고 싶겠지만, 대상의 너머를 보는 주체는 기이하고 낯선 존재들이 이미 우리 곁에 가득하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것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를 횡단하는 열차 안에서 주체는 비로소 그것을 깨닫는다.
탕의 영혼들과 나눠 쓰는 몸
시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향한 말 건넴이다. 그런데 만약 말을 걸 대상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면 시적 주체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손유미의 주체는 모두가 떠나간 세계에 홀로 남아 있다. 불 꺼진 방안에 홀로 남아 “영원히 혼자일 것 같은”(「저 먼」) 시간, 어제는 이미 끝났지만 내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을 견디는 중이다. “평화롭지? 평화로워라 우리 평화롭지? 안전하다 대수롭지 않다 의연하다 나란하고 가지런하다”(「모두 모여 태양 모양」) 같은 중얼거림은 주체가 정반대의 감각, 즉 거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도리어 강조한다. 이렇듯 손유미의 시는 재난과 멸망,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이미 끝나버렸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체에게 ‘타자 없음’과 ‘세계 없음’이 사실상 동의어라는 점이다. 인간이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주체는 타자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각할 수 없다. 따라서 고립된 주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 가구의 마지막 주민으로서 이런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어떤 행인이라도 마주치고 싶다 행인 몇이라도 행인 몇이라도……”(「밤 시절」). 주체는 세계를 복원하기 전에 먼저 타자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 주체에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비인간의 기척이다. 귀신 쫓는 음식으로 알려진 팥죽을 끓이던 주체는 “누군가, 왔다 인기척이 들렸다”고 말하며, “한눈을 팔지 않았다면 맞이할 수도 있었을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렸다”(「팥알만큼이나 팥알만큼이나」)고 덧붙인다. 요컨대 손유미의 시적 주체는 철저한 고립을 견디는 동시에, 언제 어디에서 불현듯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둔다. “폐쇄 폐쇄 폐쇄 폐쇄……”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열몇개는 된”(「령 영 넋」)다고 고백하는 주체는 마침내 ‘손(손님/귀신)’을 맞는다.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로 무작정 달리던 주체가 “마침내/멈추고 시간을/죽이며 서/있을 때” 느닷없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너를 알아 내가”(「쓰르라미 울 무렵」). 이때 낯선 목소리는 자신의 존재가 거기에 있음을 알리는 목소리일 뿐만 아니라, 주체 역시 그곳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목소리다. 주체는 정체 모를 타자의 호명에 의해 역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자신을 알아보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그 사이에 숨어 있을 목소리”(같은 시)를 찾아 달린다.
이제 주체는 신 대신 “귀신의 손을 잡는다”(「수의壽衣 같은 안개는 내리고」). “신은 하나였지만/내 것은 아닌 것 같았다”고 말하는 주체는 기약 없는 구원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와 기다림 대신에 늘 존재했으나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인 세계의 이면, “거울의 뒷면”(같은 시)과 손을 잡는다. 귀신과 자연을 겹쳐놓은 듯한 “수의 같은 안개” 속으로 손을 뻗으며, “저 안엔 친구들이 많”(같은 시)다고 되뇐다. 그렇게 혼자 남은 밀실인 줄 알았던 세계는 수많은 귀신들을 응접하는 거실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마주침은 더 많은 존재와의 만남을 촉진한다. 예컨대 「애관극장 앞에서」의 주체는 별안간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애관극장 앞에서 만나’”.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연락에 주체는 “뭐라 답장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잠시 후 한 통의 문자가 더 도착한다. “‘꼭’”. 결국 주체는 “안내자”라고 불리는 존재를 따라 길을 나서고, “나를 따라와요/갈 데가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안내자는 마치 모든 전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주체를 이끈다. 심지어 “삼각 깃발”까지 흔드는 안내자에계 주체는 “우리 둘뿐인데 그러지 말아요”라고 말하지만, 안내자는 “누가 둘이래요?” 하고 반문한다. 그리고 안내자를 따라 길을 걷던 주체는 갑자기 안내자가 “둘, 셋, 넷, 여섯……”이 되는 것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길을 가득 채우는 것을 목격한다. 이렇듯 귀신과의 이웃 됨은 만남이 만남을 부르고 존재가 존재를 낳는 기이한 행렬에 함께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분포해 있는 존재‘들’의 틈바구니에서 주체는 “고장난 영사기”처럼 “별안간 보이지 않아야 할 게 보이기 시작”(「상영」)한다.
나는 불은 때를 밀고
영혼들은 제 뼈에 내 근육을 다진다
나는 없애고
영혼들은 불린다
아 아 아
나의 근육과 영혼들은 비누를 묻힌 채 탕 사이를 오가고
서로가 마시는 음료를 나누다 자기들끼리
자, 이제 탕을 나갈 시간이야 모두 모여 오늘은
누가 집엘 갈 거야?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모여 앉아 의논을 하다가 먼저
나가버린 건
젖은 머리의 내가 아니고
나를 다진
큰 몸이
텀벙
텀벙
집으로 돌아간다
아
아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니? 나는 묻는데
아 아 아 모두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목욕탕의 울림만 남아서
저렇게 돌아가면 집이 다 젖겠는데……
나 혼자 걱정을 하고
—「탕의 영혼들」 중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기 시작한 주체는 자기 안에서도 수많은 영혼을 발견한다. 그리고 때때로 ‘보는-인간’과 ‘보이는-영혼’의 지위가 역전되는 것도 경험한다. 인용한 시의 공간적 배경은 목욕탕인데, 그곳은 “나는 없애고/영혼들은 불”리는 공간, 즉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타자에게 양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그런데 “자, 이제 탕을 나갈 시간”이라며 영혼들이 모여 앉아 의견을 나누는 장면에서 이 시의 숨겨진 내막이 밝혀진다. “오늘은/누가 집엘 갈 거야?”라는 물음에 “먼저/나가버린 건//젖은 머리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큰 몸”을 가진 영혼이 “텀벙/텀벙”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며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니?”라고 묻지만, 영혼들은 대답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로써 몸의 주인이라 믿었던 주체는 과거에 먼저 목욕탕을 나갔을 영혼 중 하나의 지위로 강등된다. ‘나’라는 주체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나눠 쓰는 무수한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상대적 존재인 것이다. 요컨대 손유미의 시적 주체는 “기어코 자신이//없어질 때까지 서 있”고 나서야 “수많은 얼굴들”(「접속」)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주체의 인식을 초월하는 존재와의 접속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을 야기하지만, 그로 인해 주체의 인식이 더 큰 세계로 확장되기도 한다.
어느 날 물속 같은 낮잠 속에서 그이는 근미래 얼굴을 만났다 무너진 미래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을 만났어 미래의 그이가 말했다
여실히 보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허망과 무상을 이길 만한 힘이 필요해 내게도 네게도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포기할 수 없으므로 네가 그곳에서 그런 것들을 준비해달라 근미래에서 기다릴 테니
그러므로 그이는
산으로
묘목을
심으러
다녔다
(……)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나날도 생기네 꿈속 같은 어지러움과 혼동 이게 다 무엇인가 내팽개치고 싶은 나날이 그렇지 않은 나날보다…… 많아지네 그러므로 그이는 무력해졌지 그이가 할 수 있는 힘이란 심긴 걸 죄 뽑을 수 있을 정도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실패하지 않은 이가 될 수 있을 정도 그리하여 그이는
두려워졌다 이런 식으로 미래의 나를 만나도
되는 것인가 두려웠다 만나야 하는 것인가
두려워…… 어느새,
산그늘 속에서도
두렵고 괴로워
그이는
그이의 몸을 나무 몸통에 묶어버렸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그러므로 미래에도 갈 수 없네
도저히 그이는 미래의 그이를
만날 수 없었으므로 이런
모습으론 그 누구도
기꺼울 수 없어
그러나 이젠
모두
지난 이야기로 우리가 신경 쓸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다만
가네 산에 오래전 그이가 심어둔
시간 아래 뜻하지 않게 자란
버섯 그래서 수확하기 위해
누구도 침범하지 않은
우리 수확 미래가
있는 곳으로
우리에겐 작지만 여실한 미래가 필요해 그러므로 유심히 바라본다 습한 땅을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수확 미래 하기 위하여 개나리광대버섯 독우산광대버섯 흰알광대버섯 댕구알버섯 붉은사슴뿔버섯을 피해 두루 평이한 시간을 찾네 이 그늘과 습기의 어지러움을 찔러
—「우리 수확 미래」 중에서
인식의 확장은 미래의 ‘나’와 조우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인용한 시에서 현재의 ‘나’는 마치 유령을 만나듯 미래의 ‘나’를 만난다. “무너진 미래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근미래 얼굴”은 현재의 ‘나’에게 “허망과 무상을 이길 만한 힘”으로서 “여실히 보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그의 요청에 따라 나무를 심던 현재의 ‘나’는, 그러나 눈앞에 맞닥뜨린 절망이 너무 크고 깊다는 사실에 “어지러움과 혼동” 그리고 “무력”을 느낀다.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절망 앞에서 현재의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뿌려둔 희망을 다시 거두는 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실패조차 하지 않는 일 정도다. 결국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다시 만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나무 몸통에 묶어버”린다. 하지만 이 시의 희망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오래전 그이가 심어둔/시간 아래 뜻하지 않게 자란/버섯”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버섯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서 ‘우리’가 함께 수확해야 할 미래가 된다.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우연의 중첩인 버섯은 주체의 인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주체의 시야는 넓어진다. 거대한 산을 훼손하는 사람들과 그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자연은 계속될 것이라는 잊고 있던 깨달음이 되살아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 얼마간의 잠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체의 반성과 각성은, 그리고 “버섯의 마음씨”로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늦게나마 모여드는 군중의 모습은, 시간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와의 연결 속에서 시가 수확한 인간의 현재이자 미래인 것이다.
내 안의 도깨비와 미치광이버섯
“우주는 절대 비어 있지 않다”(「기계 속 유령」).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들의 목소리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낯선 존재로 가득한 우주에 비해 인간의 주파수는 좁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한연희의 시적 주체는 구천을 떠도는 억울함과 원통함을 듣기 위해, “내다버린 마음”(「광기 아니면 도루묵」)을 먹고 자란 귀신들의 응어리를 듣기 위해, 스스로 귀가 세 개인 요괴가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귀 둘로는 모자라/커다란 귀 하나를 들여왔습니다”, ‘시인의 말’).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세상이 외면하는 존재들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한연희의 시에서 일상은 나날이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주체는 썩을 대로 썩어버린 딸기를 바라보며 “딸기 안에는 구더기가 있고, 구더기 아래엔 이야기가 있을 것”(「딸기해방전선」)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지독한 악취를 뿜어내는 부패한 존재들 사이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말 못한 사연”(같은 시)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부패는 타락인 한편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체는 짓무르고 터져버린 이야기와 함께 지금껏 마주한 적 없는 “새로운 딸기에 진입”(같은 시)한다.
이렇듯 한연희의 시에서 끝은 또다른 차원의 시작이기도 하다. “끝이 난 시점/거기엔/경계선이 있고/넘어서기에 딱 좋”다고 말하는 주체는 생과 사,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분방하게 넘나들며 “와글와글한 이야기”(「손고사리의 손」)를 수집한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분해놓은 경계와 구획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며 “종횡무진 누비는”(같은 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존재, 즉 괴물이다. 한연희의 시는 그러한 ‘괴물-이야기’ 앞에서는 주체 역시 이야기를 받아 적는 손님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발화의 주체가 이야기의 주인이 되지 않는 것은 가능할까.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말할 때 ‘괴물-이야기’는 불가피한 오역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한연희의 시는 그러한 오역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호기심 같은 건 꾹 눌러놔야 한다”(「공포조립」)고 말한다. 이른바 ‘인간적인 시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복을 불러온다고 알려진 두꺼비가 주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시(「타오르는 손잡이」)나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한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가 주체를 조롱하는 시(「아주 가까이 봄」)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망각한 채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풍자다. 한연희의 시적 주체는 여태껏 인간은 대상의 “겉면만 뚫어지게 쳐다”봤을 뿐이라고, “안쪽엔 도통 관심 없었”다고, “막상 아주 가까이 다가가면 불확실했던 마음이 이렇게나 선명”(「인절미 콩빵」)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실내’는 세계의 괴물성으로부터 인간을 과보호하는, 그리하여 대상을 왜곡하고 변형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인간이 “환상을 버리”고 “목적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실내를 벗”(「실내 비판」)어야 한다. “폭력을 보호할 실내”(같은 시)가 없을 때, 인간은 비로소 혹독한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와 소음과 간섭이 없”는 안온한 “유리 돔” 안에서 인간은 기껏해야 “방부제에 절어버린 꽃”(「미드웨이 섬」)에 불과하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주체는 유리창과 벽을 깨고 “야생의 경계선”(「야생식물」) 앞에 선다. 물론 날것의 자연이 가진 위력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은 공포와 불안을 동반한다. 특히 한연희의 시에서 계곡은 인간의 계획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낯선 것이 출몰하는 예측 불허한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상징하는 장소다. 예컨대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뜻을 가진 “무수골”은 인간이 지은 이름과는 무관하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계곡 속 원혼」)린다. 이때 발화자를 특정할 수 없는 중얼거림은 주체를 불쾌하게 만드는데, 이 불쾌함은 자신의 인식을 초월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감각이다. 자연은 “희귀종 눈물귀신버섯”(같은 시)처럼 언제나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존재를 남긴다. 명명할 수 없는 혼과 원한으로 가득한 ‘계곡’은 결코 ‘캠핑장’이 될 수 없다. 풍경의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더 멀어지고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는 계곡은 말 그대로 ‘불쾌한 골짜기’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미간을 잔뜩 찌푸리게 된다고
거기에는 자신과 상관없는 자기가 서 있다고
시옷이 말한다
곧 도깨비로 변해버릴 것처럼
붉으락푸르락 화가 나서는
외모의 결함에 대해 지껄인다
그러나 나는 안다
(……)
사실 너를 낳은 것이
도깨비라는 것을 말이다
거울 속의 네가 너를 본다
엉킨 너의 머리를 연신 빗질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도깨비가 어떻게 해서 너를 주고 갔는지를 떠올린다
멍청한 도깨비라고 놀려대는 인간들이 살았더랬죠, 인간과 도깨비들은 원래 한마을에서 잘 지내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그만 욕심이 그득그득한 몸을 불리기 위해 인간이 인간성을 버리기로 했고요, 그래서 도깨비의 것을 빼앗기 시작했더랬죠, 마지막엔 도깨비를 불에 태워 구워먹은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대요, 죽으면서 사립문이 되거나 빗자루가 되거나 요강으로 변해버렸어요, 생명이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죠, 유일하게 여자애만 도깨비 살을 먹지 않았고 그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대요, 사실은 도깨비가 살기 위해 변한 여자애였다는 것은 전설처럼 남아 떠도는 이야기, 뭐, 그런 거예요, 그러니 도깨비 살을 먹고 죽은 멍청이들에게 분노하며 여자애는 살았어요, 영영 문손잡이 같은 곳에 영생을 가두고 자신을 잊어버리게 된 엄마를 찾으며, 자신이 인간인지 도깨비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살아온 이야기, 깨어나서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
한입 먹은 그 비릿한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뱃속에 있던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그게 혼자 섰고 말을 했다
그러다 훌쩍 커버린 네가
오늘처럼 온종일 거울을 들여다본다
—「시옷과 도깨비」 중에서
자연의 불가해함과 불가항력을 경험한 주체는 거울 앞에 서서 “거기에는 자신과 상관없는 자기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마주한 자연의 민낯이 인간성이라는 개념 역시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인용한 시는 도깨비 전설을 시 속의 이야기로 포함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인간성을 버렸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성은 본래 도깨비와의 친연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성이 인간 중심성과 동의어가 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기이하고 낯선 존재들에 대한 친밀함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성의 새로운 측면을 부조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보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도깨비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 그들을 불태워 살점을 나눠 먹은 인간들은 모두 죽거나 사물로 변한다. 구약의 대홍수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살기 위해 여자애로 변장한 도깨비뿐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 도깨비라는 사실은 모든 인간이 도깨비의 후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체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던 것도 “너를 낳은 것이/도깨비”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이렇듯 한연희의 시에서 주체는 세계의 괴물성을 긍정하고 괴물인 타자와 친밀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괴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거울 밖으로 일제히 튀어나오는” 도깨비를 바라보며 “시시한 옷꾸러미를 벗”듯 인간(人)이라는 탈을 벗는다. 그렇게 시시한 인간이(ㅅ) 된 주체는 자신의 팔뚝 살을, “여리고 연약”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는 힘이 있”는 “도깨비 살”을 만지작거린다.
회색깔때기버섯을 먹고 싶어요
그 이름을 차근차근 발음하다보면
어둡고 창백한 면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몸 바깥으로 나온 기다란 촉수를 잡아 뺐어요
어쩌면 버섯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것처럼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
(……)
힙사이지거스 마모레우스
프로클로로코쿠스 마리누스
다른 차원에서 유래한 것 같은 이름을
찾아내고 읽어보았어요
누군가는 미치광이버섯을 먹고 심장이 멎거나
탑 아래로 그저 온몸을 내던져 곤두박질치거나
그렇게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어서
새하얗고 투명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러 다녀요
(……)
때때로 버섯은 순하고 여린 치유자로서 식탁에 놓이지만
그런데도 생명은 너무 빨리 사그라들어요
그게 자연의 순리이니 뭐니 하면서
내버려두기만 할 순 없어서
버섯을 채취한 자에게 누가 벌을 내리지요?
총을 든 자를 누가 막아내지요?
왜 심연은 여길 들여다보지요?
독이 든 포자를 퍼뜨리려고 주름을 펼쳤어요
꼭꼭 숨겨둔 내면이 훤히 드러나 보여요
죽음을 끄집어내요
그렇게
나는 버섯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버섯 누아르」 중에서
“어둡고 창백한” 세계의 이면을 경유한 한연희의 시적 주체가 멈춰 선 대상은 다름 아닌 “버섯”이다. 획일화된 이분법을 벗어난 버섯을 바라보며 주체는 자신 역시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한다. “다른 차원에서 유래한 것 같은 이름”들은 끝내 번역할 수 없는 타자성을 깨닫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섯과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하며(“새하얗고 투명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는 주체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 응달에서 눈에 띄려고 점점 새하얘”지는 버섯의 모습과 겹쳐진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인간의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다고 말하는 주체는 “버섯의 일원”이 된다. 버섯과 인간 사이에 ‘우리’라고 부르기 어려운 간극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연희는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 산 자와 죽은 자, 주체와 타자를 마치 “주먹밥”처럼 “끈적끈적”하게 뭉쳐서 “예측 불가능한 쪽으로”(「주먹밥이 굴러떨어지는 쪽」) 굴려나간다. 어쩌면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세계의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을 직시한 ‘미치광이’ 주체들이 벌이는 “작은 소동”(같은 시)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 수많은 타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인간이었다가 이내 영혼이었다가 깜빡깜빡하는/혼란 속에서”(「12월」) 한연희의 시적 주체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의 불가사의함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인간이라는 디폴트
지금까지 살펴본 세 권의 시집을 연결해 하나의 별자리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별자리의 이름은 ‘영매’가 아닐까. 비단 이 시집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시의 주체들은 영혼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매처럼, 인간의 인식과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두고 있다. 그들은 멸망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예측할 수 없는 타자와 만난다. 폐허 속에 현현하는 번역할 수 없는 목소리는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만남의 한쪽 끝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2020년대의 시적 주체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 적 없는 자신의 근원적 조건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주체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시공간에 분포하는 객체들은 더이상 ‘인간=세계’가 아님을 깨닫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손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무한한 힘의 인식과 무한한 사물들의 존재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의 감각”15)은 인간을 “생물권이라 불리는 거대한 개체 내부”에 새롭게 “발붙이고 서 있게”16)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인간은 인간의 두 발로 서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러한 한계를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황정아는 “지금은 ‘영광의 시대’를 뒤로하며 ‘우점종’ 자리에서 우아하게 물러날 때가 아니라 ‘영광의 시대’에 만든 온갖 폐해를 바로잡는 우점종으로서의 마지막 책무를 이행할 때”17)라는 적확한 문장을 통해서 지금 여기의 인간이 이행해야 할 역할과 의무를 지적한 바 있다. ‘신유물론적 전회’ ‘물질적 전회’ ‘비인간 전회’ 등 인간의 위치와 위상을 재고하는 담론들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요즘, 그러한 고해성사가 너무 쉽고 빠른 반성문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간으로의 재전회’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반만 옳다. 우리는 한 번도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체로의 회귀’는 비단 시의 문제, 인간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에 대해 선언했듯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18) 다만 존재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 자연과 생태의 거대한 연결망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사유하는 인간, 해석할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는 타자와의 무한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감각하는 인간이다. 인간에 대해 증언할 단 한 명의 인간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인간은 인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를 잃은 대신 영혼을 얻은 시적 주체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듯이 말이다.
- 1)동물 임시 연대, 「절멸 선언문」, 이동시 엮음, 『절멸』, 워크룸프레스, 2021, 10쪽. 이 선언문은 2020년 8월 20일 창작 그룹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벌인 ‘절멸—질병×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이라는 제목의 릴레이 퍼포먼스에서 낭독되었다.
- 2)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38쪽.
- 3)같은 책, 28쪽.
- 4)코로나19 실시간 상황판(https://coronaboard.kr/). 인용한 수치는 2023년 9월 기준으로, 통계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최솟값’에 불과하다.
- 5)뒤에서 살펴볼 세 권의 시집에서 예시를 찾자면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그러니까 약간 죽은 체하고 있으면/괜찮아/숨 쉴 구멍이 생기고/월급도 나오고//조금 죽은 체하고 있어야 하지만”(박은지, 「( )에게」), “어른이여, 나는 하는 일이 없고 할 일이 없고 계획한 일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른이여, 나는 살아 있는 사람 역할입니다”(손유미, 「아는 어른을 지날 때 드는 생각」), “어리둥절한 상태/나를 지워버린 상태/기쁨과 슬픔을 개나 줘버린 상태//나는 도저히 지금 뭘 해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아무것도……”(한연희, 「나의 찬란한 상태」).
- 6)박동억, 「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 『침묵과 쟁론』, 푸른사상, 2024, 54쪽.
- 7)같은 글, 45쪽.
- 8)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2020년대 시에 나타난 ‘타자’와 비인간 물질의 정치생태학」, 『문학동네』 2022년 봄호, 93~94쪽.
- 9)같은 글, 94쪽.
- 10)같은 글, 95쪽, 97쪽.
- 11)“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구조에 의존할 수 없는 우리는 가변적인 배치로 내던져지고, 이로써 우리와 관계된 타자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재형성된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의존할 수 없다.”(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52쪽)
- 12)티머시 모턴, 『하이퍼객체—세계의 끝 이후의 철학과 생태학』,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 19쪽.
- 13)같은 책, 51쪽.
- 14)같은 책, 61쪽.
- 15)같은 책, 50쪽.
- 16)같은 책, 42쪽.
- 17)황정아, 「물질과 문학, 그리고 인간-되기」, 『문학동네』 2022년 봄호, 167쪽.
- 18)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4, 303쪽. ““아, 차라투스트라여.” 짐승들이 이어서 대답했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는 달아난다. 그리고 되돌아온다. /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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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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