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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들 | 2024년 봄호(제75호)

깊이와 넓이 ― 안윤과 성해나의 소설

한영인 문학평론

1984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1970년대 ’창작과비평‘ 민족문학론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시인 장정일과 함께 쓴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가는군요』(2022, 안온북스)와 문학비평서 『갈라지는 욕망들』(창비, 2024)이 있다.

특집 • 2020년대 젊은 작가들의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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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대 젊은 작가들의 좌표’를 그려 달라는 청탁을 받고 작성되었지만 여기서는 단지 2020년대에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작가 중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두 명의 소설가의 작품 세계를 독립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2020년대 들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여러 작가 중 안윤과 성해나를 비평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각 소설의 깊이를 확보해 내고 소설의 넓이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1. 갇힌 존재들의 수직 운동 : 안윤의 소설


  안윤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은 ‘윤’이 라리사 니칼라예브나 이그나바타로부터 나지라 하미돕나가 유품으로 남긴 노트를 전달받은 경위를 설명하며 시작한다.1) 라리사는 윤이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어학연수 받을 때 머물던 집의 주인이며 나지라 하미돕나는 라리사가 어린 시절부터 딸처럼 돌보던 여성이다. 윤이 비슈케크를 떠난 지 벌써 8년. 라리사는 왜 나지라가 남긴 유품을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 윤에게 보낸 걸까? 라리사는 동봉한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기록을 모두 읽고 나서 윤, 너를 떠올렸다. 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니까. 이야기는 살아가고, 어떻게든 우리 곁에 살아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니.”(20~21쪽)

  라리사의 메시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야기는 어떻게든 우리 곁에 살아남는다. 둘째,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를 위해서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 바로 당신이 필요하다. 라리사의 말처럼 어떤 이야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를 복음처럼 전파할 사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왜 하필 윤이어야 할까. 윤이 라리사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지라의 노트를 번역하는 윤의 수고로운 작업에는 아무런 세속적 보상의 약속도 없으며 윤과 라리사는 어떠한 계약 관계로도 묶여 있지 않다. 그럼에도 윤은 라리사의 일방적인 요청을 받아들여 나지라의 노트를 “여덟 달에 걸쳐 더디게 읽고 사 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한국어로 번역”(17쪽)해 낸다.

  우리는 이 장면을 안윤이 제시하는 인상적인 소설론으로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안윤에게 이야기는 인간의 삶과 더불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공속된 이야기의 존재 조건은 인간의 소멸과 함께 흩어질 위험에 처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가는 그렇게 흩어지는 무수한 이야기 안에 거주하면서 어떤 이야기는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무엇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어 펜을 쥐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비로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기적에 가까운 일”(18쪽)이 발생하게 된다. 안윤에게 소설 쓰기란 그와 같은 작은 기적을 발생시키는 일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사지가 마비된 카탸는 좁은 방에 갇혀 있고 그런 카탸를 지켜보는 남편 쿠즈만은 무기력과 슬픔에 갇혀 있다. 나지라 역시 젊은 시절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사산하면서 절망에 갇혀 버렸던 적이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상실했거나 상실해 가고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카탸는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쿠즈만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보낼 찬란한 날의 가능성을 상실했다. 라리사 아주머니는 아들 줴냐를 잃었고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린 나지라는 자신의 동일성을 보증할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나지라는 상실의 고통을 간직한 채 “적요와 고독 속에 파묻혀 오롯이 혼자라고 확신하며 살아”(51쪽)가는 인물들을 응시하며 삶과 죽음, 지속과 견딤, 기억과 소멸에 관한 서늘하고 진중한 사유를 펼쳐 나간다.

  그 인물들은 저마다의 감옥에 갇혀 있지만 제한된 자신의 반경 안에서 필사적으로 운동한다. 물론 갇힌 존재인 그들은 자유롭게 수평운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은 유일하게 점유가 허용된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수직 운동의 형태를 띤다. 나지라가 보여 주는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시선은 견고하게 갇혀 본 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수직 운동에 힘입은 것이다. 그녀는 비록 자유롭고 분주하게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넓고 멀리 보지 못하지만 대신 깊게 본다. 온몸이 마비된 카탸를 보며 “마비가 곧 시간의 정지라고”(45쪽) 경솔하게 판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나지라는 살아 있는 신체는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한 유기체로서의 생장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그 생장은 눈부신 성장과 무관하며 차라리 나아질 기미가 없는 현실을 무한히 반복하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가깝다. 나지라는 그 지독한 싸움에서 “그들이 언젠가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혹은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을 본다.(42쪽) 그 희망은 슬프고 처연한 것이지만 인간의 육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명백히 존재하여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희망에는 손쉬운 절망보다 지독한 면이 있다.

  나지라는 자신이 카탸를 좁은 방에 가둬 두고 있다며 괴로워하는 쿠즈만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끝끝내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다면, 내가 타자가 되는 일이 결단코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 각자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견디는 방식은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에 갇히는 것, 갇힌 채로 타자의 곁에서 기꺼이 또 한 번, 함께, 이중으로 갇히는 것이 아닐까.”(125쪽) 갇힌 존재는 실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자에게 닿을 수 없지만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갇힘으로써 비로소 삶을 견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나지라의 깨달음은 자신의 한계에 정직하게 절망해 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냉혹한 체념의 진실이 서려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가둔 실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해방의 가능성은 죽음으로 완성될 자아의 소멸뿐이다. 나지라는 기억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다만 내가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공책을 펼쳐”(188쪽) 본다. 그것은 자신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감옥의 둘레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기 안에 갇힌 채 고립되어 소멸해갈 것이고 그녀의 기록만이 남아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 줄 것임을 예감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왜 윤이 나지라의 기록을 번역하는 작업에 그토록 매달렸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녀의 번역-글쓰기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고립과 소멸의 운명을 향한 실존적 저항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담담」의 주인공 혜재 역시 자기 안에 갇혀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점에 절망하는 인물이다.2) 스물셋에 만나 서른넷에 헤어진 동성 연인 수윤과의 지독했던 사랑과 이별 이후 혜재는 “다소 뒤틀리고 미쳐 있는” 상태로 “자기혐오와 도파민, 엉망진창과 성과, 죄책감과 뻔뻔함”(168쪽)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맴돌게 된다. 혜재의 방황은 그녀가 수윤을 그토록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음에도 “끝내 수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169쪽)다는 자책으로부터 온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혜재는 “관념과 단어를 모으고 분류하고 재배치해 대체 불가능한 적확한 표현을 발견하는”(168쪽)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일들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적확한 표현을 찾은 적이 없었다.”(168쪽)고 토로한다. 그럴 때 혜재는 매우 투명한 사람이거나 혹은 투명함이라는 환상에 매혹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니어서 거기서 발생하는 불가해한 일들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언어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168쪽)을 찾아 방황한다.

  그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시켜 주는 정체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혜재는 바이섹슈얼이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언제나 예민하게 의식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성정체성이 자신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이라는 듯 본질화하기도 한다. 회사 대표인 현수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나간 소개팅에서 만난 은석에게 느닷없이 “저는 바이예요.”(170쪽)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무의식적인 실수는 그러나 혜재가 자기 자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혜재는 은석이 “불쾌감을 억누르며 왜 이 자리에 나온다고 하셨어요?”(171쪽) 같은 책망의 말을 던지고 차갑게 돌아서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반응은 혜재의 예상과 달랐다. 은석은 다만 조심스럽게 이렇게 되묻는다. “근데 혜재 씨한테는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 혜재는 은석의 질문을 받고 당혹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는 은석의 질문이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은 아니다.


혜재 씨, 저는 결혼을 했었잖아요.
네.
사실 이혼이 아니에요.
아니군요.
네. 보통 사별이라고 하죠.
은석이 뒷말을 잇지 않아 나는 괜스레 손끝으로 유리잔 표면을 매만졌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 저한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유가족이었어요. 여전히 중요한 정체성이고요. 근데 이제 ‘가장’이란 말은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육 년 걸렸네요. (172~173쪽)


  술에 취한 은석의 고백을 들은 혜재는 성정체성과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같은 정체성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해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희석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정체성은 그런 노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며 그렇게 빠져나오길 바라는 마음조차 일종의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혜재는 은석과 자신이 “어떤 관계로든 오래도록 알고 지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예감”(172쪽)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이 된다. 혜재는 어째서 그 순간 은석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은석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은석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상실의 고통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사람이라는 것, 거스러미를 뜯어내듯 자신의 상실을 곱씹으며 그 안에 자족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을 가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그와 같은 용기라는 걸 혜재가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연인이 되었지만 혜재의 속마음은 여전히 복잡하다. 바이섹슈얼이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과거 연인들에게 어떤 의심과 비난의 빌미가 되었는지 알고 있는 혜재는 이성애자인 은석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의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혜재는 은석이 바이섹슈얼인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이 이성애자인 은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과연 은석에게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은석이 이해하는 바가 자신이 이해하는 바와 일치할지 확신하기 어렵다. 혜재의 불안과 염려는 “레즈비언인 수윤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수윤을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174쪽)에서 비롯되었던 지난 사랑의 실패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서로에게 온전히 닿을 때 발생하는 순도 100%의 충족감 없이도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혜재는 은석과 만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조금씩 깨닫게 된다. 은석이 울산으로 발령받아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만남을 이어가던 혜재는 울산으로 내려가던 어느 날 수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은석 앞에서 오열한다. 그렇지만 은석은 혜재에게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건 은석이 말하지 않아도 혜재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때로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가만 안아 주는 것이 사랑의 최선일 수 있음을 은석이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가닿고 싶다는 투명한 열망은 상대에 대한 통제와 통치의 기제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석은 상대에 대한 투명한 앎과 순도 높은 일치의 정념을 혜재에게 함부로 투여하지 않는다. 혜재가 어느 순간 은석에게 자신을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안달하지 않”으며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의심, 혼란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183쪽)게 된 것도 그와 같은 투명함의 미망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혜재가 투명함의 미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면 은석은 죽은 아내와 딸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마침내 함께 살기로 결정한 혜재와 은석은 서울에서 함께 살 집을 고른 뒤 은석이 아내, 딸과 함께 7년 동안 살았고 그 이후로 은석 혼자 10년 동안 살았던 집으로 가서 함께 짐을 정리한다. “딸아이가 그려놓은 색색의 낙서, 아내와 장식장을 옮기다 생긴 강화마루의 흠집, 싱크대 상부 장 문짝 모서리의 갈리진 틈들”(182쪽)이 남아 있는 그 집을 떠나는 것은 아내와 딸이 “남기고 간 보이고 만져지는 흔적들이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뜻했으므로 은석은 아내와 딸이 죽고 나서도 그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던 은석이 이제 혜재를 만나 그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짐을 정리하다가 가족앨범을 발견한 은석이 사진을 넘기며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을 본 혜재는 이사를 마치면 은석과 함께 아내와 딸이 있는 용인의 추모 공원에 방문하자고 제안한다. 추모공원에 간 혜제는 그곳에서 “아무 말 없이 유리문을 연신 문지르다가” “울고 싶으면서 울고 싶지 않은 것”(185쪽) 같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은석을 먼저 보내고 그곳에 남아 “그의 아내와 딸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 깊이, 죽은 은석의 아내와 딸을 향해 온 마음을 담아 인사와 안부를 건넨다.

  혜재와 은석은 ‘온전히 자신 안에 갇혀 그렇게 갇힌 채로 타자 곁에서 기꺼이 또 한 번 갇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상실과 아픔을 딛고 자신의 굴레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혜재 씨, 경험이라는 거 참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해요?
내가 경험한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그 경험들 때문에 내가 갇혀 있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은석이 대청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솔방울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예전에요, 솔방울 같은 거 주울 일 이젠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장담했네요.
장담했죠.
그가 몇 걸음 앞서 걸어가 솔방울을 또 하나 주워 올렸다.
또 하겠죠. 앞으로도. 근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184쪽)


  경험은 한 인간의 실존을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지만 우리를 과거의 경로에 의존시키는 구속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혜재는 은석과의 사랑을 통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개방해 낸다. “어쩌면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184~185쪽) 모른다는 깨달음은 그 열림의 순간 도달하게 된 중요한 깨달음이다. 우리의 삶은 새롭게 닥쳐오는 시간 앞에 열려 있기에 우리 스스로를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으로 고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거나 스스로를 “단 하나의 무엇”이라는 허상에 가둬 두는 결과를 낳기 쉽다. 하지만 소설은 투명하고 적확한 무엇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185쪽)을 헤아리고 짐작하는 마음 안에서 고유한 깊이를 획득해 내기에 뜻깊다.



2. 불안정한 존재들의 수평운동 : 성해나의 소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을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가서,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3)로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없는 곳에 가서,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을 타자와의 마주침에 개방적인 성해나의 소설을 ‘관광객’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광’이라는 용어에 깃든 가벼움과 산뜻함 때문에 그 용어의 기능은 성해나 소설에 드러나는 만남의 우연한 성격을 강조하는 수사에 국한된다. 가령 「오즈」의 주인공은 하우스 셰어링에 참여하게 되면서 ‘오즈’라는 이름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도박 중독으로 인해 거액의 빚을 남긴 채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굳이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셰어하우스)에 가서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오즈’ 할머니)을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4) 성해나의 인물들이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가서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건 변덕스런 기분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저마다의 복잡한 속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성해나는 우연한 상황에서 발생한 인물들의 마주침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는 걸 즐기지만 그 과정에서 대면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무거운 실존적 얽힘 속에서 탐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타자를 대면하는 방식은 아즈마 히로키가 이론적 대타항으로 삼았던 실존주의적 타자론으로도, 그로부터 가뿐하게 이탈한 ‘관광론’으로도 온전히 설명되기 어렵다. 굳이 아즈마 히로키의 구분을 차용해 말하자면 성해나의 소설은 ‘무거운 타자’와 ‘관광객’의 어느 중간 어름에서 만남과 관계, 접촉과 이해의 국면을 탐색한다고 볼 수 있다.

  성해나의 인물들은 대부분 현실의 어려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짓눌려 있는 ‘프레카리아트’ 계열에 속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불안정한 유동성으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지만 바로 그 불안정한 유동성 때문에 타자와 깊이 뒤얽히지 못한다. 타자와 깊이 연루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타자에게 정박시켜야 하는데 불안정하게 유동하는 인물들에게는 그와 같은 정서적, 물리적 투자가 허락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는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티프는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취하는 회피적이면서도 방어적인 태도가 남기는 무의식적 상흔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독해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티프를 구성하는 서사의 화소(話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공과 독립된 채 존재하는 타자의 세계가 있다.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에 그 타자의 세계와 접촉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타자의 세계에 정박하지 못하고 이내 그 세계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거기에는 타자와의 뒤얽힘이 야기하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결과 ‘떠난 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회한과 그리움, 죄책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남은 자’를 회억하게 된다.

  그 모티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 「화양극장」이다. 주인공 ‘경’은 7년 전 임용고사에 연거푸 낙방한 뒤 고향 상주에 내려와 침잠의 시간을 보내던 중 “동네에 하나뿐인 단관 극장”(62쪽)에서 우연히 이목이라는 중년 여성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관한 이야기로 번져 가고 경은 이목이 1970년대 후반 영화계에서 스턴트 배우로 활동했으며 그때 만나던 동성 연인이 부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이목과 헤어진 후 어떤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까지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이목과 경 사이에 옛 연인 연수의 존재가 개입되면서 낡은 극장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정기적인 만남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목은 경에게 옛 연인이 동지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알리며 함께 팥죽을 끓여 먹자고 제안하지만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목과 옛 연인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불화와 다툼이 있었다는 정황이 암시되지만 경은 이목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조차 던지지 못한다. 위태로워 보이는 이목을 보며 경은 자신이 “이목씨의 곁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82쪽) 잠시 고민하지만 “단지 극장에서 영화평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에 불과한 자신이 이목 씨와 옛 연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다 참견이고 불필요한 관여인 것 같”(82쪽)다는 생각에 제풀에 돌아서고 만다.

  이목과의 관계를 “단지 극장에서 영화평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로 과소 진술하는 경의 태도에서 어떤 심리적 방어기제를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목은 경에게 자신의 성정체성과 자신이 살아온 내력은 물론이고 자신이 기거하는 집까지 모두 열어 보여 준 사람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둘의 관계는 “단지 극장에서 영화평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를 분명 넘어서 있다. 그럼에도 경은 어째서 이목과의 관계를 축소함으로써 부인하는 걸까. 그와 같은 방어기제는 무엇에 맞서 발동되는 것일까.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면 사랑이 아닌 ‘러브’가 되고, ‘그거’가 되고 마는”(79쪽) 동성애에 대한 무의식적인 터부 때문일 수도 있다. 동성애에 대한 내면화 된 금기가 서사의 표면에 드러난 방어기제의 원인이라면 그 이면에는 경이 어떻게든 상주를 떠나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하나의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목은 경에게 상주를 자신의 “마지막 정착지”(77쪽)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언뜻 비치지만 경에게 있어 상주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벗어나야만 하는 공간일 뿐이다. 마지막 생의 정착지를 구하는 중년의 이목과 달리 청춘인 경은 아버지와 언니가 닦달하듯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라도 상주를 떠나야만 한다. 이 ‘남들처럼’이라는 말에 이성애적 규범성이 전제되어 있음이 물론이다.

  경과 이목의 관계는 화양극장이 문을 닫고 경이 몇 달 후 고향을 떠나면서 완전히 끊어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후일담의 서사적 필요 조건이 갖춰지게 된다. 후일담은 누군가를 떠나온 자가 여전히 그곳에 남은 자에 대해 지니는 죄책감에서 출발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후일담은 회억의 대상 없이 쓰일 수 없으며 그때 회억의 시선은 주체가 과거에 억압했던 모종의 정동과 결부된다. 그래서 다소간 감상적인 슬픔의 정조를 띠기 쉬운데 실제로 이 소설의 결말에는 이목의 마음을 뒤늦게 헤아리게 된 경의 슬픔이 감상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상주를 떠난 뒤 경은 다른 직업을 구해서 “자기 취향을 알아가고 생활을 정성껏 돌보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만족”(92쪽)을 누리며 ‘남들처럼’ 번듯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어느 극장 앞을 지나다 <어둠 속의 댄서>의 재개봉 포스터를 보게 되면서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귀환하게 된다. 그 영화는 경이 이목과 처음 만난 날, 낡은 극장의 화재 경보기가 오작동하면서 결말을 보지 못한 영화였다. 경은 그날 이목으로부터 그 영화의 결말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경이 실제로 본 영화의 결말은 이목이 말해 준 것과 크게 다르다. 슬픈 영화의 뻔한 결말은 보기 싫다는 경을 위해 이목이 원작과는 다른 “밝은 결말을 이야기”해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은 이목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미소”(95쪽)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경의 슬픔 속에서는 회억하는 자의 자리와 회억되는 대상의 자리가 강고하게 분리되어 있다. 경이 고백하듯 그녀는 이목의 얼굴을 떠올리면 “눈이고 코고 입이고 모든 것이 흐릿”(94쪽)해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경의 시선에서 회고되는 이목은 이토록 형상과 정체가 불분명한데도 그날 이후 경이 이목을 자꾸 떠올리는 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그건 ‘남들처럼’ 살기 위해 버리고 떠나야 했던 자신의 한 시절에 대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지니는 죄책감이 슬픔으로 가장한 채 거듭 귀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편 「언두」에서는 주인공 유수의 옛 연인 도호와 농인이었던 그의 할머니가 회억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유수는 틴더를 통해 도호와 만났는데 당시 유수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화면을 가볍게 밀어 거절할 수 있는 관계”(9~10쪽)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깊은 관계는 그만큼 서로의 비밀을 내밀하게 공유할 것을 요구하지만 서로의 비밀이 연루되는 순간 관계는 질척해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곤경에 처하기 쉽다.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불행하고 이상한 가족사를 고백했지만 어느 순간 그 고백이 자신의 약점이 되어 버린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유수로서는 가볍고 일회적인 관계가 쾌락 이전에 안전의 문제로 다가왔을 법하다.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진지한 관계보다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20쪽)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할 수 있는 관계를 더욱 편하게 느끼는 유수에게서 「화양극장」의 경에게 엿보였던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성해나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작품에도 소통을 둘러싼 오해와 단절이 갈등의 핵심에 놓여 있다. 유수는 도호를 처음 만난 날 도호가 보여 주는 대화 매너에 매료된다. 유수가 보기에 도호는 “만나본 이들 중 가장 풍부하고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말을 들을 때면 “고개를 주억이거나 안면 근육이나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11쪽)하는 사람이었다. 도호의 그런 매너는 농인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이지만 도호와 달리 수어를 할 줄 모르는 유수는 도호의 할머니와 소통할 수 없다. 처음에 유수를 매혹시킨 매너의 기원으로부터 정작 그녀는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결말 부분에 유수가 목격한 할머니의 춤은 그 매혹의 기원에 서려 있는 불가해한 낯섬(uncanny)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상주(와 이목)을 떠났던 「화양극장」의 경처럼 유수 역시 도호(와 그의 할머니)를 떠난다. 도호의 세계가 가하는 ‘무거움’의 압력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거워. 다 너무 무거워.” 50쪽) 그런데 이 소설에서 ‘떠나는’ 사람은 유수 말고 또 있다. 유수의 아버지 역시 가정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유수는 떠난 아빠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그럴 바엔 엄마도 아빠를 버리고 떠나면 되지 않냐고 화를 내지만 엄마는 그렇게 누군가를 훌쩍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비겁한 사람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수는 어떨까. 이 작품은 유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온 아빠와 싱거운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채널을 돌려 코미디 영화를 보며 함께 큭큭 웃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 공모된 웃음은 유수 역시 아버지처럼 비겁한 사람의 자리에 기꺼이 서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도 회억하는 자의 자리와 그 대상으로 존재하는 남은 자의 자리는 분할된 채 외따로 존재하고 있다. 「화양극장」의 결말에 드러난 감상적인 슬픔의 자리에 “아빠가 튀김용 젓가락을 깁스 안에 찔어넣을 때마다” 미미하게 풍기는 “악취”(53쪽)가 들어차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당춘」과 「괸당」에도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구도가 전제되어 있다. 먼저 「괸당」을 살펴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인 보현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제주를 방문하는 당숙의 먼 친척을 가이드하게 되었다며 그 자리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는다. 보현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제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일가친척이 ‘남은 자’라면 당숙의 먼 친척인 ‘올레크 고’는 ‘떠난 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올레크 고’의 할아버지는 원래 월정리에서 농사를 짓던 농군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연해주로 떠난 것으로 소개된다). 한편 당숙과 재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중의 사업을 이어받지 못하는 등의 차별에 시달리다 당숙이 죽자마자 제주를 떠난 보현의 당숙모 역시 ‘떠난 자’에 속한다. ‘올레크 고’와 ‘당숙모’는 모두 ‘떠난 자’에 속하지만 그들이 제주에 대해 지니는 감정은 상이하다. ‘올레크 고’에게 제주가 자신의 조상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소중한 삶의 터전이자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면 당숙모에게는 허울 좋은 가문의 위신만 내세우는 환멸의 공간일 뿐이다. ‘떠난 자’의 정체성이 복합적이다 보니 당숙이 생전에 보인 이중적인 면모가 폭로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남은 자’ 역시 단일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 작품은 보현이라는 ‘남은 자’의 시선에서 ‘떠난 자’를 바라보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보현은 당숙모의 떠남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조카라고 부르는 ‘올레크 고’를 보며 복잡한 마음에 잠기지만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여전히 ‘남은 자’와 ‘떠난 자’의 분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보현은 한 방에 열두 명이 묶는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푸는 ‘올레크 고’에게 “괜찮으시다면 우리집에서 지내시겠냐고 청하려다”(169쪽) 관둔다. “하룻밤이면 몰라도 이틀은”(같은 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때 보현은 “이틀이 사흘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될 수도 있다고. 그건 나뿐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괴로운 일일 거라고.”(같은 쪽) 생각하며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알다시피 자기정당화는 가장 친숙한 심리적 방어기제에 속한다). 보현은 이런 말로 스스로를 설득한 뒤 “왜 우리는 누군가에겐 관대하면서도 누군가에겐 한없이 매정해질 수밖에 없는지”(171쪽) 묻는다. 그렇지만 ‘남은 자’와 ‘떠난 자’ 사이의 분할을 재공고화 하는 가운데서 알리바이처럼 발설되는 보현의 물음은 감상적인 자기합리화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당춘」은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연결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모티프를 공유하는 작품들과 조금은 다른 결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물론 코로나 사태로 인해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여행사에서” “경영 악화를 이유로 권고사직”(215쪽) 당한 채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두루와 “간간이 배달 기사로 일하면 돈을”(216쪽) 벌고 있는 헌진은 모두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학 시절 품었던 연대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왔지만 불안정한 그들의 처지가 역설적으로 예전에 품었던 그 이상의 곁으로 그들을 데려간다.

  두루와 헌진은 마을 어른들에게 유튜브 영상 촬영 방법을 가르쳐주면 40만 원을 주겠다는 영식 삼촌의 제안을 받고 진천에 있는 괸돌마을로 향한다(영식 삼촌은 두루와 진헌이 아직 대학생일 때 참가한 농활에서 알게 된 마을공동체 활동가다). 하지만 인당 40만 원인 줄 알았던 페이는 총액 40만 원이었고 강좌에 참여한 노인들은 영상은커녕 스마트폰 작동도 힘겨울 만큼 ‘디지털 문맹’이라서 둘의 아르바이트는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만다. 영식 삼촌은 불평불만 가득한 두루와 헌진을 달래기 위해 예의 장대하고 구체적인 마을 살리기 계획을 늘어놓지만 현실에 짓눌린 그들이 보기에 영식 삼촌은 그저 철없는 “몽상가”(219쪽)일 뿐이다.

  이 소설은 소생의 희망보다 소멸의 위험으로 가득 찬 농촌의 현실을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서로 다른 시선의 교차 속에서 입체적으로 재현해 낸다. 그 과정에서 영식 삼촌을 물정 모르는 몽상가로 치부해 온 두루와 헌진의 시선에도 미묘한 변화의 기미가 감지된다. 가령 헌진은 서울대를 나온 영식 삼촌을 향해 “삼촌 정도면 더 나은 곳에서 한자리 점하고 살 수도 있는데, 왜 이런 데서 되도 않는 일 벌이며 개고생하세요?”(256쪽)라며 빈정 섞인 힐난을 던지지만 영식 삼촌은 그 질문에 담긴 모난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지난 몇 년간 마을 사람들과 이뤄온 혁혁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작당 모의를 하나하나 회고”(257쪽)한 뒤에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삼촌은 여기가 좋아.” “좋아서,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258쪽)

  영식 삼촌의 진심은 ‘떠난 자’의 눈에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을 “그제야 조금씩 보이”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70쪽) 물론 영식 삼촌의 진심이 불안정한 미래에 짓눌린 두루와 헌진에게 얼만큼 든든한 “비빌 언덕”(234쪽)이 되어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장의 생활이 빠듯한 ‘프레카리아트’ 청년에게 “느리지만 하나하나 일궈가는 즐거움”(257~258쪽)은 여전히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루는 자신에게 “몸을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겨우 움직이면서도 마을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해조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오래 방치되어 냄새도 독하고 토성도 퍽퍽하던 밭을 모두가 달려들어 제법 쓸만한 땅으로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성급하게 떠나온 세계에 여전히 희망을 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두루는 영식 삼촌으로부터 약속된 수당과 단체 사진 한 장을 전달받는다. “누구 하나 제대로 찍히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모두가 앵글에 들어가 있”(274쪽)는 그 사진은 ‘떠난 자’와 ‘남은 자’가 함께 모인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그 풍경은 길례 할머니가 ‘숙근’을 캐는 장면과 겹쳐 읽을 때 더욱 생동한다. 길례 할머니는 “잎사귀는 모조리 떨어지고 줄기도 시들었는데, 뿌리만은 땅 밑에서 생생히 월동”(266쪽)하고 있는 풀을 ‘숙근’이라 부른다고 일러주며 두루에게 이렇게 덧붙인다. “죽은 것처럼 봬도 이렇게 다 살아 있잖아.”(같은 쪽) 길례 할머니의 말은 마치 ‘떠난 자’의 회억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고하는 듯하다. ‘떠난 자’는 떠나온 시절과 장소, 사람을 다채로운 감정에 빠져 추억할 수 있지만 ‘남은 자’가 살아가는 바로 그 현실을 보지는 못한다. 그 현실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떠나온 타자의 세계와 접속해야 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해조 할머니가 보낸 링크에 접속”(274쪽)하는 두루의 행동은 이처럼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연결(link) 가능성을 보여 준다.

  성해나 소설이 앞으로 달성할 성취는 「괸당」의 결말 부분에 드러난 연결 (불)가능성을 어떻게 생동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인간들 사이의 연결이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문학적 선(善)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인물들이 만나고 엇갈리는 과정에서 서사적 핍진성이 확보되지 않을 때 「Ok, Boomer」에서 나타난 것 같은 노골적인 작위성이 연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성해나는 첫 소설집 ‘작가의 말’에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 어쩌면 영영 겪지 못할 – 사랑과 생애를 상상과 짐작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오래간 품을 들여 그것을 해나가고 싶다는 염원을 갖는다.”(424쪽)라고 적었다. 그의 말처럼 타자의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 위험을 회피하지 않고 “파고 파다보면”(424쪽) 그의 바람처럼 분명 한 인물에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독자는 그 인물과 연결되는 생생한 순간의 기쁨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1) 이하 페이지는 안윤,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에서 인용.
  • 2) 이하 인용문은 안윤, 「담담」,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에서 인용.
  • 3)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36쪽.
  • 4) 성해나, 「오즈」,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이하 언급되는 작품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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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정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성해나 소설집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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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슬픔에 대한 주석 ― 류근,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 『에게서 에게로』(2024) 그 사이 어디쯤

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계간 문학들 정원 응시감각상처주석윤리 2025
김영삼 아름다운 헤테로토피아 ― 정택진, 『곳』, 문학들, 2025.

1. 정택진의 소설 『곳』은 기억의 심층에 박힌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을 소환하면서 시작된다. 청산도의 어느 낡은 집, 윗목 모서리에 걸린 등잔에는 ‘초꼬지불’이 졸고 있는 저녁이다. 대대로 가난했을 것이 분명하건만, 여느 때와 달리 걸게 차려진 밥상이 풍성한 밤이다. 밥상머리 앞에 한 꼬마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서 있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꼬마를 재촉하는 밤이다. “아들, 얼른 노래 한 자리 해 보니라.”(7쪽) 어른들의 재촉을 못 이기는 척 꼬마는 시시하고 젖내 나는 노래 대신 자랑스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가사를 선율에 싣는다. 특별할 것도 없는 노래건만, 그 순간만큼 이 가족과 청산도의 모든 존재들이 힘껏 숨죽여 귀 기울이던 시간이다. 어떤 언어로도 재현할 수 없는 그 시간의 온도를, 소설의 그 어느 장면에서도 다시는 쓰이지 않은 그 시간의 아련함을, 아마도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보존되었을 원형적 시간의 이미지를,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기록해 두었다. 꼬마는 노래의 강변에서 빠져나와 살며시 눈을 뜬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이다. 아마도 물이 찐 저 아랫동네 모랫벌에, 노을은 져 꼭두서니로 붉은 그 모래밭에, 호미로 금을 그어가며 캐내던 하얀 무명조개와, 소금을 넣으면 구멍을 솟구치던 맛조개와, 갯벌을 헤적여 캐내던 바지락과,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 가득 고이던 기다란 진줄과, 모래톱의 석양에 어우러졌던 이웃들과, 그리고 생각하면 다사롭고 아늑했던 옛날을 거닐고 있는 모양이다. 방 안의 풍경에 초꼬지불이 다숩다. (8~9쪽) 차라리 시에 더 가까운 인용문의 아름다운 풍경은 신화적이며 유토피아적이다.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가혹한 세계의 문법이 이 가족의 작은 평화를 무참히도 뭉개버린 후, 다시는 세계의 숨결이 이들 가족의 삶과 공명하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그러니까 어느 깊은 밤에 “검은 잠바 차림”(12쪽)의 사내들에게 아버지가 끌려가고, 독한 매질에 몸이 굳은 아버지를 위해 “예로부터 장독에는 똥물만한 게 없다”(19쪽)면서 구덕에 고인 액을 모아 화덕에 달이던 할머니의 허리가 굽어지고, 골병을 치료하기 위해 뱀과 지네를 찾아 온 산을 헤집던 꼬마와 그 동생을 사람들이 “뱀 성제”(25쪽)로 부르던 시간 이후로는,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보존되었을 것이 분명한 저 아련하고 그리운 시간들은 다시는 재현될 수 없었으므로 더더욱, 저 인용문의 풍경은 유토피아적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정택진의 『곳』이 재현하는 장소는 헤테로토피아적이다.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지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그 배치에 이의제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아버지의 신념이 세계의 문법에 의해 무참히도 깨져버렸던 장소, 그로 인해 모든 가족의 꿈이 조각나 버린 장소, 갖은 상처로 단단한 옹이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트라우마적 장소, 역사의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기억의 연대기가 피 흘리던 장소, 바다의 짠 내를 머금은 해풍의 농도보다 슬픈 이야기들의 밀도가 더 높았던 장소, 거짓의 유토피아를 구획하기 위해 사회의 외부로 배치된 헤테로토피아의 장소, 그 곳이 바로 정택진의 『곳』이다. 2. 마르트 로베르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을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아 ‘가족 소설’에서 소설의 기원을 규명했다. 어린 아이의 쾌락과 욕망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초자아와의 갈등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가족 소설’은 그 형식을 갖추어 간다. 이때 억압된 욕망은 스스로에게 ‘날조된’ 역사를 부여하면서 서사적으로 자아 형성 과정에 관여한다. 날조되는 서사는 현실원칙의 억압을 상징하는 현실의 부모를 가짜 부모로 격하시키고, 자신은 모종의 신적 존재의 자손으로 격상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아이는 진짜 부모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모험을 겪으며 세계의 문법과 갈등하면서 성장한다. 스스로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이 과정은 자기징벌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성장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대부분의 영웅서사가 그렇듯 이러한 서사의 마지막이 결국 귀환의 과정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행복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아이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이러한 시련과 극복의 서사가 바로 가족소설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루된 인간의 심층적 욕망과 심리적 동기들이 ‘가족 소설’의 형태로 승화되는 통과의례의 입구인 셈이다. 로베르에게 소설은 의식의 어두운 곳에 감추어진 그 날조된 역사를 교묘하게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가족소설의 연장이자 그에 대한 사회적 환기의 서사인 소설의 양식은 사회적 금기와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자유와 절대를 갈망하는 영혼의 모험 양식이기도 하다. 3. 장택진의 『곳』은 이러한 가족로맨스의 경로를 두 가지의 방식으로 비틀면서 실현한다. 첫 번째, 소설은 아버지의 처절한 실패 서사를 그의 아들의 언어로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이의 무의식적 욕망이 현실 부모를 부정하고 모험을 떠나면서 성장하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아이의 아버지가 세계와 반목하면서 거대한 괴물과 맞서는 서사로 변화시키는 구조로 변주되고 있다.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와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아버지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신 아버지가 세계와 대결하고 상처받으면서 쇠약해진 신체로 깨지고 부서진다. 그러니까 자기 유년의 기억을 소설의 양식으로 재현하는 작가 정택진의 언어는 자기 대신 아버지의 서사를 통해 아버지의 욕망과 그의 백일몽을 대리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무참히 깨지고 무기력하게 부서졌던 아버지의 모험 서사를 통해 이 불합리한 세계의 문법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정상적 성장 과정을 겪으면서 자아를 형성할 기회마저 박탈당함으로써 아이의 성장 서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대한민국의 폭력적 시대상을 고발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쓰인 ‘나’의 언어들은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서 폭력적으로 유년을 거세시켜버린 시대에 대한 고소장이기도 하다. 덧붙여 이 비틀어진 가족로맨스에서 부정되는 부모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나’에게서 정상적 성장과정을 앗아가 버린 시대 또는 국가라는 이름의 존재들이다. 4. 의도적으로 가족로맨스를 비트는 소설의 두 번째 방식은 원양어선을 타고 돌아 온 아버지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 군부독재의 문법과 불화했던 아버지는 원양어선 선원들의 불합리와 부패와도 불화했다. 결국 구금과 구타를 겪은 후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현실의 부모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모험의 세계로 이끄는 가족로맨스의 경로에 『곳』의 화자를 강제로 진입하게 한다. 마치 스스로를 업둥이의 저주에 내모는 오이디푸스처럼 『곳』의 ‘나’는 스스로를 모험의 경로로 이끈다. 아버지의 패배와 죽음을 겪은 ‘나’가 중학교 입학을 미루고 뱃사람이 되어 거친 세계의 문법과 부딪치는 서사는 힘이 없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기징벌과 아버지의 빈자리를 자신이 메우고자 하는 성장과정에 준한다. 물론 미처 덜 자란 아이에게 세계의 문법은 거칠고 차갑고 매섭고 가혹하다. 할머니의 눈귀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란 걸 나는 안다. 식구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특히나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있는 손자에 대한 짠한 마음도 거기에 보태어졌으리라.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딱히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슬픔은 온 곳에서 밀려와 나를 울게 했다. 나는 나만의 현실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 안 가고 배를 타고 있는 것이나, 얼떨결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발목이 잡혀버린 담배의 늪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엄니와 동생들을 둘러싼 것들은 끝내 나를 눈물짓게 했다. 그것들은 도저히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내 키 너머의 것들이었다. 마당에 팽개쳐져 짓밟히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이빨만 갈고 있었듯, 쇠기둥에 묶어 놓고 때리는 그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 빌기만 했듯, 세상에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선창 여기저기에 버려진 삼치대가리만큼이나 많았다. (120쪽) 아버지의 공백은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세상의 벽 높이로 체감되고, 불합리한 세계의 문법 앞에서 아직 여물지 못한 ‘나’의 신념과 육체는 무기력하고 허약하기만 하다. 얼떨결에 배우게 되어버린 담배와 배가 쉬는 중간간조 때 선배 선원들을 따라 간 색싯집 등과 같은 어른 흉내 또한 자신의 뒤를 파고들었던 어느 남성동성애자의 성폭력 앞에서 한 번도 저항하지 못했던 무기력함으로 무너져 버렸다. 무엇보다 이러한 무기력은 장소상실(placelessness)과 연관되어 있다. 배를 타고 오는 길에서 우연히 중학교에 진학한 동무들이나 여자애라도 보이면 시나브로 걸음을 늦추거나 길을 에돌아 시선을 피하던 장면들은 ‘나’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장소를 갖지 못한 존재, 자신이 속한 곳이나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존재, 머물러도 좋은 자리나 마땅히 점유할 위치를 가지지 못한 존재, 장소상실의 예외적 존재이다. 이러한 장소상실은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고, 다시 섬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원양어선을 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과도 연관되면서 이 가족들의 삶이 지속적으로 정상적 장소 바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의 장소에서 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은 근대적 자아가 경험한 근본적인 충격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시초축적의 과정에서 토지를 잃고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로 흡수되면서 장소를 상실한 농민들, 고향을 떠나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전락했던 1970년대 경제개발시대의 사람들처럼, ‘나’는 공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토대로서의 사적 영역을 상실한 정신적 외상의 경험자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맘껏 불러도 되는 가정 공간의 결여,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계획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배치 과정에서 제외된 채 다시 복습되는 누대의 가난,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 가혹하기 만한 세상의 문법, 이러한 사정들이 허락한 ‘나’의 장소는 정상 공간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유토피아 건설의 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자리일 뿐이다. 즉 위의 인용문은 행복했던 유년의 유토피아적 장소를 상실한 예외적 존재가 경험하는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사생아의 위치로 격하하는 방식으로 가족로맨스의 환상을 비틀고 있다. 5. 연이은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불합리함으로 가득한 세계와 마주하던 소설의 어둡고 무거운 문장들은 교회에서 종을 치는 ‘진만이형’을 만나면서부터 고난 극복의 서사로 전환된다. 섬에서 한두 명만 가는 대학까지 나왔지만 군대에서 전기고문을 당한 후, “팔십 된 노인처럼 지팡이를 짚으며 는지럭는지럭 걸어 다녔고, 말을 할 때면 입귀로 늘축하니 침”(195쪽)을 흘리는 ‘진만’ 또한 자기 장소를 상실한 예외적 존재에 해당한다. 그런 ‘진만’이 불편한 몸으로 사지를 비틀어 줄을 당기고 놓는 “처절한 몸부림”(198쪽)으로 종을 치는 장면은 ‘나’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의 장소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턱대며 교회에 들어서서 보니 그 형이 종을 치고 있다. 그런데 줄을 당기고 놓는 폼이 좀 특이하다. 어지간한 국민학생도 두 손으로 줄을 당겼다 놓을 수 있고, 어른들은 한 손으로도 너끈히 종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형은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형은 온몸으로 종을 치고 있었다. 몸에 줄을 감아 오른쪽으로 비틀며 당기면 종이 울렸고, 몸을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줄을 주면 종은 또 소리를 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더니,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틀며 똑같은 동작을 계속했다.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힘겨운 걸음마처럼, 는질는질 흐르는 침 사이로 간신하게 만들어내는 말의 마디처럼, 그 형은 몸 전체를 틀었다 바루며 종을 치는 것이다. (197~198쪽) 진만의 불편한 신체와 어눌한 말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가 경험한 시대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두 인물 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편한 몸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진만의 행위는 ‘나’의 무기력과는 대비된다. 따라서 소설에서 ‘진만’의 존재는 시대적 외상에 노출된 존재라 할지라도 사건 이후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재정립하느냐에 따라 삶의 복원가능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복원의 장치이다. 즉 ‘나’와 ‘진만’의 만남은 한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마주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와 무화되고 서로 스며들며 변화하는 변곡점인 셈이다. 특히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그렇게 치요?”라는 질문에 ‘진만’이 “그,라,믄,너,같,으,믄,치,다,안,치,다,그,라,것,니?”(200쪽)라고 대답했을 때, 소설은 명백한 복원의 방향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나’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말들(남이 훔칠 수 없는 자신만의 유산, 복수심보다 강한 집념, 반드시 지켜야할 어떤 신념을 가지라는)과도 맞닿아 있었다. 6. 변화의 증거로 세 가지만 언급해 보자. 하나는 중학교에서 발생한 불합리한 사건(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의 불행한 죽음)에 대해 눈 감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응징을 한 것이다. 이는 ‘나’가 이제 덜 자란 아이에서 세계의 문법과 당당하게 맞서는 소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자신만의 집념과 노력으로 섬을 떠나 육지의 고등학교로 국가장학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소년이 진학한 그 학교가 아버지의 죽음을 야기했던 박정희가 세운 학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섬을 떠나 육지로 모험을 떠나는 한 평범한 영웅이 자신만의 세계와 삶의 궤도를 만드는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가족로맨스의 진정한 목적,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회복이라는 진정한 목적으로 소설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증거는 다음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소년은 몇 걸음을 더 걷는다. 마음속에 그런 꿈을 꾸고 있지만 그 길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과연 그런 꿈을 꾸어도 되는 것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뭐가 되고 싶냐니까?” 돌멩이 몇 개가 발부리에 채여도 대답이 없자 소녀가 재촉한다. “소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원양에서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사다주었던 『노틀담의 곱추』나 『장발장』이나 『죄와 벌』 같은 이야기를 쓴 사람들의 이름 앞에, 개울가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로 어우러지고, 몇 날을 기다려도 소녀가 안 나타나 소년은 애가 타고, 그러다가 소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누운 채 눈물을 흘리는 소년과 소녀의 슬픈 이야기를 쓴 사람의 이름 앞에, 분명히 ‘소설가’라고 붙어 있었다. 소년은 정말 그 이름이 되고 싶었다. (299쪽) 인용문의 문장들은 아버지의 꿈과 소년의 꿈이 다시 만나 공명하면서 소설의 초반에 배치된 행복했던 어느 밤의 시간들을 다시 복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상처로 무너진 한 소년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기어이 이야기꾼이 되어, 시대의 폭력성으로 인해 무너졌던 누군가의 꿈을 결국은 회복할 것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고가 현실로 실현되면서, 슬픔의 언어가 가득했던 장소는 언어를 초과하는 기억의 밀도가 가득 채워진 이야기의 장소가 되었다. 그 장소가 바로 정택진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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