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청색종이 2024년 봄호(제11호)
‘빈’자리의 시학, 거기 있는 마음 ― 유희경론
‘빈’자리의 시학, 거기 있는 마음
-유희경 론1)
1. ( )을 잃고 나는 쓰네
원고를 준비하며 다섯 권의 시집을 읽는 동안 남쪽으로 며칠의 명절 휴가를 다녀와야 했다. 어려서 가만히 책가방을 메고 오가던 길가에는 이른 봄꽃이 피고 가족들의 온기는 그에 더해져 계절을 한껏 당겨 놓은 듯 온몸과 맘을 훈기로 휘감았다가, 나를 내려놓았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만난 것은 진눈깨비였다. 그것은 곧 폭설로 이어져 마음을 우두커니 서 있게 했는데, 오래 반복한 여정이면서도 돌아오는-떠나오는- 일은 온몸으로 쿨럭이며 감기를 앓게 했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 김기림, 「길」 부분2)
그런 여정은 너의 진짜 자리가 거기가 맞느냐고 묻는다. 느닷없는 의심은 돌아온 자리와 떠나온 자리의 위치를 삽시간에 뒤바꾼다. 그러면 문득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주머니를 뒤적이게 되는 것이다. 어딘가 삐끗했다는 마음의 연원은 상실로부터 오고 그건 ‘빈’자리로 남아 상실이라는 지난 사건을 반복적으로 주시하길 요청한다. 계절이 온 땅에 함께 오지 않고 생활의 터와 위안의 자리가 공명하지 않아 돌아오는 일이 떠나오는 일이 될 때, 말고도 숱한 시간은 나와 별 상의도 없이 지나가 버린다. 홀홀해진 마음으로 남겨질 때, 누군가는 쓴다. 그럴 때 남겨진 마음이란 삐딱하게 벼린 것이기는커녕 과거도 현재도 잃어버린 탈-시간적 ‘나’, 그 가여운 것에 가깝다. 마음은 그렇게 어둔 회색빛으로 한참을 머무는 것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문장은 문학적으로 가히 참인 명제다. 그건 저 문장구조와 성분의 얼핏 어긋난 듯한 ‘사이’로 인해 더욱 빛나는 통찰로 두고두고 읽힌다. ‘사랑을 잃고 나서 시를 쓴다’ 혹은 ‘사랑을 잃어서 시를 쓴다’로 읽힐 때 그것은 인과라는 관계나 시간상의 순서를 포함한다. 그러나 저 문장은 간명한 도치로 인해 사랑의 잃음이라는 사건 가운데 나라는 주체의 권한을 무참히 박탈한다. 그리하여 저 문장으로부터 사랑은 제 발로 총총 매정하게 걸어 나가버리고 나만 오도카니 남긴다. 그럴 때 남겨진 나는 쓰는 일밖에는 달리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럴 때 사랑은 이미 없고, 그 빈자리와 나에 대한 연민은 쓰기를 통과하며 점점 더 또렷이 각인된다.
상실, 그 탈각의 결핍감이 숱한 문학을 잉태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희경의 시도 그 언저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우리가 더듬을 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니라 ‘빔emptiness’이라는 사건과 ‘빈empty’의 상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건, 그의 시들이 어떤 대상의 재건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남아있는 마음을 두고 발길을 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실과 상실감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상실함-빔-상실감-빈’이란 도식이 가능하겠다. 이 분할은 상실이 고유의 시차를 내포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빔’의 찰나, ‘빈’ 상태를 ‘사건’으로 인식하는 지점이 바로 유희경 시가 고유성을 써나가는 자리이다. 상실 그 자체보다 비게 된 사태가 일으키는 소요는 한 시인의 마음을 붙들고, 그 마음은 사건의 시간을 무한으로 붙들고 늘어뜨린다. 내 곁에 이미 없는 상실을 향한 칭얼거림이 아닌, 지금 남겨진 것이 빈자리라는 데서 오는 도저한 마음의 모양새를 한 ‘이야기’이다.
2. 부재의 형식
기억은 과거를 이미 떠나왔다. 그것은 현재에 다다르지만 결코 현재가 포착할 수 없고 현재를 획득할 수도 없다. 현재에 포섭되지 못한 기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만 이제 기억에는 그러는 순간조차 현재완료의 형식이 되고마는 새로운 시간이 덧입혀질 뿐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기억과 달라진 그것은 주체가 망각할 때까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무한히 왕복 운동한다. 그런 한 기억은 현재성의 의미를 재구성하며 새롭게 성립되는-정립되지 않는-과거의 사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푸코를 닮은 인식의 와중에 소실과 강화를 거듭하는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과 함께 왜곡을 향해 걸어간다.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아픔(algos)을 고대인들은 노스탤지어라 이름 붙였다. 이는 상실한 것을 되찾으려는 정신의 작업 즉 기억과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욕망의 대상 부재와 장소 상실은 불가능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빔’으로 내밀어지며 상처적 기입으로 포개어진다. 그런 향수, 기억하기는 글쓰기라는 또 다른 부재의 형식과 공명 가능성으로 열린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나는 코트 속 아버지를 발견한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젖은 발처럼 내 코트 속 아버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낯섦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버지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흐릿한 자국들
-「코트 속 아버지」 부분,①
“어떤 기억들은 끈질기게 희미해지”는가 하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그 기억들을 영영 잃어버렸음을 직감”할 때, 우리는 적잖이 당황한다. (「이야기-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⑤) 잃을까 두려운 기억이 있다. 잃으면 안 되는 기억이 있다. 코트 주머니는 지갑이 있던 자리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빈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아버지가 느껴진다. 그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전의 흔적, 아버지를 닮은 나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아버지의 빈 자리이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내게서 아버지를 확인하는 것은 낯선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아버지에게서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비의 부재란 내게서 그의 지난 젊음을 확인하게 하고, 어느 미래에는 아버지가 살지 못한 늙음을 확인하게도 한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빈 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확인함은 마치 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와 내가 손을 잡는 듯한 환각을 부른다. 어떤 자국들은 아무리 흐릿해도 분명히 보이는 것이겠지만 부재의 깨달음이야말로 앞에 놓인 어둠 속에서 날아 가버리는 새, 즉 아버지의 부재를 수식하며 그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것이다. ‘나’와 관계된 것, ‘나’의 모습을 한 것들은 차마 잃기 힘들뿐더러, 잃을지도 모른다는 영구적 원본 상실에 대한 불안은 바로 ‘나’의 존재론적 복제를 일깨우는 사건, 그 부재의 지독한 형식이다.
나는 아주 작고 아득한 단어를 날리고
세어본 것이다 쓸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단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것은
날아가버렸고 도저히 돌아올 수 없으니
-「단어」 부분,②
문학이 발화의 형식이라 할 때 그것은 애초에 불확실성으로 감싸여 있다. 쓰는 자가 감내해야 할 이 불확실성은 둥둥 떠다니는 단어를 낚아채 표현의 수단으로 삼되 그런 행위로 발생하는 결과물은 쓰는 자를 즉시 문밖으로 내쫓는다. 기호일 따름인 어렴풋한 단어의 예감이란 단 한 번도 진실로 쓰는 자의 것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쓰기가 운명적으로 소외에 다가가는 행위라 할 때 다음과 같은 시는 쓰는 자를 소외시키는, 시의 운명으로서 윤리적인 시라 말할 수 있다.
...아이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라고 적은 문장은 지우기로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조마조마하다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깨질 듯 종내 깨져버리지 않고 거기 어둠이 있어 좁고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너무 많다 그런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무사」 부분,②
“한 아이에 대해 쓰는 시는 앞을 보지 못한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일종의 고해성사에 가깝다. 그것은 시의 무능이자 마음의 불능을 가리키는데, 실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시의 능력이 아닌 아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길을 배우는 저물녘은 시를 쓰는 일처럼 깜깜할 테지만 아이를 염려하는 마음은 문자 기호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시는 앞을 보지 못하고, 아이가 돌아오는 길은 “어둠이 있어 좁고 아득”할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저 아이의 어둠은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다. 시를 빌려 말하자면 “눈을 감은 채 바라보는 빛은 사람의 내부”(「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③)이기에 아이의 어둠은 아이만 볼 수 있다. 이때 시어도 시력도 사건도 우리 앞에 모두 부재할 뿐이지 않겠는가. 그 현존하지 않음 앞에 시는 고독의 형식이 된다. 그런 타자성은 언어, 시어의 한계이면서 시인의 언어 윤리를 압박하며 숨막히는 고뇌를 추동한다. 그럴 때 아이를 향한 짐작으로의 어둠은 기호화되는 즉시 저 아이를 약자로 배치하는 시선의 권력을 확보할 위험으로 성립한다. 일면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적 책임을 지닌 주체를 발견한다는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감각은, 유희경 시의 선(善), 즉 시선의 위계 없음에 기대어 있다.3)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나의 윤리적 감각을 발견하는 장소라 할 때 타자가 나의 시각적 상관자로 연결됨은 현상학자가 아닌 시인에게 되레 엄정한 윤리적 잣대를 한 번 더 작동케 한다. 유희경의 시는 시선의 권한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내가 볼 수 없는 자는 내 권한이 거머쥘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다.4) 시는 아이만이 자신의 어둠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할 뿐이다. 시인은 그 자리를 위해 시어를 싹싹 긋고 지운다. 그렇게 염려를 ‘빈’ 자리로 내어준다. 거기만이 시인의 마음이 머물 약간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믿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 시선을 지운 자리에 귀를 대어 본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귀는 평온해 보인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사원 만월 빛에 젖어서. 귀는 소리없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으려 한다. 누가 나를 부른 것도 같지만, 귀는 아닐 것이다. 귀는 듣는다. 귀는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사월 만월」 부분,⑤
시선에 대한 욕망 대신 거머쥐는 것은 듣는 일, 소리를 좇는 일이다. 쓰는 자와 읽는 자는 하나가 아닐 수 있지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하나 될 가능성은 확률 면에서 압도적이다. 듣기, 그건 책상에 귀를 대보는 기울임의 자세이자 위계의 시선을 방지하는 겸허한 태도로도 보인다. 왼쪽과 오른쪽을 ‘당신’ 혹은 ‘그것’에게 조심스레 내미는 일, 그것은 일말의 낯가림마저 지우고 함께 나란한 수평선을 닮았다. 그런 ‘귀’는 아버지에게 받은 것인데, 아버지가 준 것 중 가장 믿을만하고 괜찮은 유산이랄 수 있겠다. 귀는 애초에 타자를 향해 한껏 열려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리하여 그것은 혈연의 연대기로 부여받은 역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바깥’을 감각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인 듣기를 수행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깥은 시인에게 모호한 곳이다. 대체로 ‘창’을 경유해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깥에 있는 것 중 믿을만한 것은 ‘나무’인데, 나무는 시인의 대리물이며 시적 화자의 분신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심어준 호두나무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밑동만 남긴 채 잘리지만 “나는 나무를 품고” 살고, “나와 나무의 시간은 같다”고 여기는 식이다. “어떤 시간이 아득하게 지나가도 거기에 있는”(「잊기도 찾기도 하는 나무의 시간」, ②) 나무는 제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타인을 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지워 보이는 형식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
3. 텅 빈 죽음
묵은 단어들을 나무의 가지처럼 잎사귀처럼 우렁우렁 키우고 빈자리를, 떠난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 여미고 챙기던 시인의 고왔던 필치는 여전하지만 가만가만 오래 묵은 마음을 한 겹 접어두는 시는 ‘살해’를 말하기도 한다.
빌어먹을,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버렸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꼭 안아주거나 내가 당신을 밀쳐내거나 둘이 손을 잡고 도망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그것도 살해입니다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새들이 날아오르고 한가득 날리던 검은 깃털들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은 이야기를 어디에 유기했던가요 차라리 분실했습니까 왜 말이 없나요 내가 벌린 이야기 때문인가요
...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
-「이 다음 봄에 우리는-고백 6」 부분, ④
나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당신이 나를, 이야기를 유기했다. 시는 우리의 이야기를 버리는 일 그건 살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살해의 꿈을 꾸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고백의 시는 살해당한 이야기이자 살해 충동의 이야기다. 삭제된 이야기란 이 시인에게 끔찍한 것이다. 기실 ‘죽음’은 내내 시 아래 드리워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거나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기시감의 공포, 나의 질병 등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잔혹한 사건은 혈육의 죽음이라는 기필코 마주하게 마련인 필연을 가리킨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빔의 사건일 것이다. 단언코 당신을 볼 수 없다는 단 하나의 확실성의 사건, 그 자체 부정의 형식으로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선고, 그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런 죽음 말고도 이야기의 유기란 이 시인에게 죽음과 동일한 무게로 놓인다. 죽음은 내달리던 이야기를 느닷없이 중단시키고 말아, 팔다리가 잘린 미완의 이야기는 이제 왜곡과 유실의 가능성이라는 불안을 껴안은 채로 빈자리가 된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날리지 않”고, “단단하게 여물어 열리지 않는 길”로 걸어간 사람이다.(「지워지는 地圖」,①) 죽음은 그토록 끔찍한 것인데, 이제 그가 살해를 선고한다. 당신이 내다버린 이야기, ‘이야기’를 쌓아나갈 가능성을 삭제한 당신, 이미 나를 살해한 당신, 그런 당신에 대한 미움이 엉켜 “잃어버린” 계절(「잃어버린 사월과 잊어가는 단 하나의 이야기-고백10」,④), “추모”(「추모의 방식-고백11」,④), “묘지”(「산중묘지-고백12」,④), 검고 낯선 노트(「노트-고백13」,④)와 같은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 “생애란 얼마나 짙은 그림자인가”!(「연작戀作」,④)5)
4. 하지 않은 일들과 없는 당신
두 편의 시를 나란히 놓아보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는 자리를 떠났고 그 자리에는 깊숙한 발자국만이 남아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나는 내가 들은 까치 떼의 울음소리가 실제인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식어버린 석유난로에 불을 넣을 시간 누가 볼 때까지 춤을 추어야 하는
-「안가」 부분, ④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도 나의 어깨를 툭 치지 않았으므로 내게 무슨 일이냐 묻지 않았으므로. 까치 때 딱딱한 울음소리마저 어두워지고 입김조차 보이지 않을 때. 누가 문을 여는 것 같군. 식어버린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어. 그리고 겨울밤 간절함은 사람의 춤과 같은 신비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지독하게 추웠던 어느 밤」 부분, ⑤
네 번째 시집과 다음 시집에 실린 각각의 시는 주어만 바뀐 채로 같은 풍경을 소묘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안에서 밖을 조망하는 것에 대비해 밖에서 안을 기웃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이 시는 석유난로에 불을 붙여주기를 그 따스한 온기의 주변에서 누군가 춤을 추기를 소망한다. 얼핏 소망과 그 화답으로 놓일 법한 두 편의 시는, 기대와 달리 두 사람 간의 다정한 대화가 아니다. 두 편의 시에서 일어나는 실제 행위는 없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지만 그건 나의 바람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또, 그것이 발생한 일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의 어깨는 툭 치지 않았으니까” 그는 나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이들은 동일인이다. ‘시선’이 그 증거로 내밀어질 수 있는데, 모든 정황을 일치하도록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란 애초에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통의 욕망은, 행위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루어질 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타자의 빈자리만을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빈자리의 형식은 이제 정물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고 급기야 “나를 제외하기 위하여 문을 잠근다”.
그리하여 아무도 없는 오후는 이제 아무런 의자도 없고 그것은 다행의 범주에 속한다 아무런 의자가 없는 것과 아무도 없는 오후 사이 나는 잠근 문을 풀어놓는다 창밖에는 아무도 없다 오후가 끝나가고 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면서
–「의자들 있는 오후」 부분, ④
아무도 없는 오후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앉지 않는 때와 아무도 없는 때 사이에는 느닷없이 환한 창밖이 있고 여전히 아무도 없는 오후. 나는 나를 제외하기 위하여 문을 잠근다.
아무도 없는 오후는 앉으려는 의지 없이 저물어 간다. 끝나가고 있다. 어디쯤 끝인지도 모르는 채로.
-「이야기-나의 오후」 부분, ⑤
시인은 밤을 기다리며, 밤에 깨어 뒤척이는, 들끓어 오르는 이야기들과 밤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에게 밤이라는 시간은 깨어있음으로 인해 그 시간을 맞이하고 또 그럼으로써 밤의 일(잠)을 거부하는 때이다. 잠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밤을 현전하는 사람인 것이다.6)
유희경의 시는 분명 밤의 불면이라는 까마득한 감정(“까마득한 불면을 견디고 있다 불면은 생각이 아니고 감정인 것 같아”-「한밤의 기분」,④)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고독은 안팎의 말썽7)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하여 밤을 가르고 시인이 건져 올리는 것은 사건들의 현실이 아닌 그림자, 대상이 아닌 이미지라는 글쓰기의 매혹이다.8)
그러한 밤의 행위를 경유하며 이런 문장을 축출해보자. (이 문장들의 순서에는 우열이 없고, 변증법적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 당신은 없다 ( ) 당신은 나다.
- 나는 나무다 ( ) 나는 창밖을 본다.
- 나는 빈 사물이다 ( ) 나는 사물의 소리를 듣는다.
- 나는 죽어간다 ( ) 나는 살아있다.
나는 이야기를 한다 ( ) 나는 문을 잠근다.
시인의 감각과 사유 사이에 들어앉은 괄호, 그것은 어떤 것으로든 채울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없다. 저 괄호라는 빈자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누군가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욕망의 자리가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 인해 존재하는 자리, 주와 객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뭉뚱그리는 자리, 그리하여 그런 채로 놓여있을 그림자와 이야기의 자리일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이름의 기대는 상처받지 않을 가능성으로 제 마음의 문을 잠근다.
5. 비움의 형식
말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이 쓰는 행위라는 블랑쇼의 말에 기댈 때, ‘이야기’를 접사처럼 달고 있는 다섯 번째 시집의 시편들이 전작에서 미결정, 미완으로 남아있던 시어들의 흔적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미결정의 시간성이 무한한 반복으로 돌아오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끝낼 수 없게 만드는 난관이면서도, 닫혀 있는 끝없는 장소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발레리를 향한 블랑쇼의 말은 기어이 ‘이야기’ 시편을 써낸 한 시인에 대한 이해의 발판이 되어준다.9) 무한 작동의 원리,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들. 이 비서사적 이야기는 그에게 ‘굿’과 같은 제례이기라도 한 걸까?
밤의 고독 사이에 누워 그는 이야기 속으로 침몰한다. 시인은 밤과 잠의 사이에서 이야기 안에 자신을 누인다. 그런 마음은 이야기로 “소급”(「이야기-해제」,⑤)된다. 그러니 ‘이야기’ 시편은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인줄 알면서도 긴 밤 내내 걱정하는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한 시인의 자정(自淨) 행위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창밖은 짙어가는 어둠 토끼와 토끼가 아닌 것 사이에서 나는 고통스러워 더 이상 창밖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했는데 다시 혹한의 겨울밤이 되면 마른 바람이 찾아와 창문이 덜컹이고 뼛속까지 시려 잠이 들지 못하는 그런 밤이 찾아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토끼를 걱정하게 됩니다 너무 추운 것은 아닐까 토끼는 무사란 것일까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야기-겨울밤 토끼 걱정」 부분,⑤
이야기의 샘을 파고 감은 눈으로 나의 어둠을 들여다보며 기억을, 시간을, 자리를 쓸고 들이고 비우고 채운다. 그렇게 이야기는 결국 스스로의 구멍, 빈자리를 채우려는 자기 기원의 원형 서사일 테다. 어쩌면 답은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빈자리라는 사건은 발생 이전으로 돌릴 수 없다. 상태가 아닌 사건이므로. 빈자리를 서사로 채운다는 것은 의자에 앉았다 밤이 되면 떠나는 당신과 같은 것, 애초에 빈자리를 구원해줄 신은 없었던 건지도.
결국은ⵈⵈ모두 이어져 있다는 생각만 든다. 끝을 자주 의식했다. 바닥난 것은 내 인내심이었다. 이야기는 허방이다. 그저 거기 있을 뿐.
-「이야기-해제」 ,⑤
‘거기’ 있는 것은 이야기이겠거니와, 이야기가 허방이라면 시인의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 때로 방문객의 모습을 한 그것은 자주 늦게 온다. 그런데 “늦게 온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다는 생각에 뒤따르는 것은 “그것을 던져 커다란 창문을 박살 내고 싶다”(「이야기-우리는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에 휩쓸려 다닐 뿐이지요」,⑤)는 전에 없던 힘센 욕구이다. 언제나 창밖을 보고 있었던 시인이 문을 잠그고 빈집에 가둔 것들은 더는 유효하지 않은 마음일 터, 저 정지의 시간으로부터 이제 스스로를 제외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만 ‘헤어질 결심’은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제 거기 있던 시인의 마음은 어디로 가게 될까? 시인을 위하여 빈 의자를 내어주고 싶은 밤이 오고 있다. 창밖의 나무가 저마다의 이야기로 흔들린다.
- 1) 이 글에서 다룬 유희경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①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2011. ②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7. ③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④ 『이다음 봄에 우리는』, 아침달, 2021. ⑤ 『겨울밤 토끼 걱정』, , 현대문학, 2023. 인용 시 책 제목은 번호로 표기한다.
- 2) 김기림, 『길』, 깊은샘, 1993.
- 3) 그의 시에는 시선의 권위는커녕 ‘뒤집힌’ 시선이 등장하는데, 그건 가히 카메라상(像)의 원리를 닮아있다. 「위치연습位置演習」④을 참고하면 그건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카메라라는 개인의 역사에 닿는다.
- 4)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215쪽.
- 5) 2부<고백은 필요 없는 것>에는 응어리진 마음의 고백이 이어진다. 아침달에서 출판된 두 번째와 네 번째 시집에는 시집의 쪽 번호 옆에 별도의 번호가 줄곧 따라붙는다. 그건 내내 0이다가 네 번째 시집의 3부 <이야기의 테이블>의 시편에서 1로 바뀐다. 네 번째 시집 <시인의 말>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는데, 그 테이블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이제 준비가 된 모양이다. “그림자가 말했다. 천천히 들려줘요. 이제 나는 준비가 되었다.”-시인의 말.
- 6)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0, 387쪽.
- 7) “시인은 인간 속에서 하나의 뜻하지 않은 사건, 안팎의 어떤 말썽에 의해 잠이 깹니다.” 폴 발레리, 『발레리 선집』, 박은수 옮김, 을유문화사, 1999, 189쪽.
- 8) 블랑쇼에 의하면 작가는 반복적으로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며 시작을 통해 미결정의 시간 속에서 고독을 앓는다. 그런 강박적 반복은 시작하면서도 시작되지 않는 것을 보존하고, 사건들의 현재가 아닌 그림자에 대상이 아닌 이미지에 관련하고, 단어들 그 자체가 외현이 되게 한다. 모리스 블랑쇼, 같은 책, 19쪽 참고.
- 9) 모리스 블랑쇼, 같은 책, 15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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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빗소리」, 부분. “사랑”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사물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라 호명되는 사물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찰나의 사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같은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화자가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려져/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화자가 세상에서 버려져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은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실패를 단지 실패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시인의 언어를 통해 그 잔여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비로소 갖게 되며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후에도 부서지고 기울고 유예되며 미끄러지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은 사물들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잠시나마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사물들의 형상은 이제 견딤의 모습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기억을 놓지 않고자 분투하는 ‘혼자’들로 거듭난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를 읽으며 전달받는 쓸쓸함과 고독, 슬픔의 정서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며, 늘 전부를 초과하는 감정적 잔여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약 없고 대가 없는 헌신이 바로 그 쓸쓸함과 고독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 창문들은 어떻게 저렇게 환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나는 이 물병은 무엇일까 구겨진 휴지 같은 이 그림자는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2 찬미 받으소서, 먼지들은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은 빈 소주병과 노숙의 새까만 발들은 감겨진 눈의 눈물,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제 몸 하나로 저의 가난과 추위를 지키는 것들은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3 밥냄새, 살냄새 좇아왔습니다 저희 피가 이끄는 대로, 저희가 저희를 잊고 깨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는 진흙처럼 목이 쉬었고 어느 하루도 돌을 가슴에 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 「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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