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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현대시 | 2024년 9월호(제417호)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4) ― 김종삼 : 교섭운동의 미학적 형식

정과리 문학평론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정과리’라는 필명으로 ‘조세희론’이 입선하여 평론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부터 2004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한국 현대문학 및 현대 문명에 관한 평론 및 저술들을 발표해 왔다. 주요 저서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2005), 『문신공방, 하나』(역락, 2006),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문학과지성사, 2008), 『네안데르탈인의 귀환』(문학과지성사, 2008), 『들어라 청년들아』(사문난적, 2008), 『글숨의 광합성』(문학과지성사, 2009),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2014), Un désir de littérature coréenne(DeCrescenzo éditeurs, 2015) ,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문학과지성사, 2016),『문신공방, 둘』(역락, 2018), 『문신공방, 셋』(역락, 2019) ,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문학과지성사, 2020),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2023)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1992), 팔봉비평문학상(2000), 현대문학상(2000), 김환태평론상(2005), 대산문학상(2005), 편운문학상(2015)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 문화관광부에서 기획한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위원으로서, 디지털환경과 문학의 공존 방식으로 모색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언어의 새벽’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2001-2002년에 KBS ‘TV 책을 말하다’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2000년 이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으로 있다. 1984년부터 2000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불문과에서 재직하였으며, 2000년 9월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옮겨 2023년 8월 은퇴하였다. 주요 강의 분야는 한국 현대시, 정신분석 비평,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간의 상호관련성 연구, 디지털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등이었다. 현재 『현대시학』 주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 삼성호암문화재단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김종삼과 서정주


  김종삼의 죽음-삶의 병치가 상호교섭적이라면 그건 어떤 미학적 형식을 낳은 것일까?

  먼저 한 가지 점에 주목해보자. 그가 죽음의 현실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태도를 표명한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런 태도를 공언으로써 표명하는 게 아니라 형상적으로 그것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상력의 물질성이다.

  물질적 상상력은 생생한 사물을 묘사하는 것으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의 촌철로서도 가능하다. 지난 호에 읽었던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에서 그것은 ‘오다’라는 어휘에 집약되었다. 내가 그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떠나 어디로 갈 게 아니라, 그 꿈을 여기로 데리고 와야 한다, 는 것이다.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았던 제 3연에 선명히 지시되어 있다.


누구나,
모진 서름을 잊는 이로서,
오시어도 좋은 너무
오래되어 응결되었으므로
구속이란 죄를 면치 못하는
이라면 오시어도 좋은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다시 언급하자면, 제 3행의 “오시어도 좋은 너무”는 “오시어도 좋은 / 너무”로 끊어 읽어야 한다. 그것을 붙여 쓴 까닭은 호흡이 급해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꿈을 여기서 이루고 싶은 마음과 이 땅에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이 격렬하게 부닥쳤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몸의 자연발생적 촉구(促句)가 시적 효과가 없다면 오문(汚文)이 되리라. 이 시행에서는 난데없이 붙은 “너무”가 독자의 읽는 호흡 안에서는 앞 부분의 “오시어도 좋은”에 연결되어 일종의 도치처럼 느끼게 한다. 그 때문에 ‘오심’의 감격이 증대된다. 그러나 잠깐 어딘가 어색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읽으면 ‘오심’의 무한한 지연을 가리키는 한정사이다. 따라서 “너무”는 교묘하게 양극을 순환한다. 물론 이것이 시인의 의도적 작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평이 들여다보는 곳은 의도가 아니라 ‘무의식적 기도intention inconsciente’이다.

  아무튼 ‘오다’에 특별히 눈길이 간 까닭은 이것이 필자가 이미 풀이하였던 서정주의 ‘왔다’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정주의 ‘왔다’가 김영랑이 조성한 ‘기다림’의 시학을 이어받으면서 근본적으로 뒤집는 사정을 자세히 풀이한 바 있다1). 그 핵심에는 “고난의 자리가 상명당”이라는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

  독자가 놀라는 것은 김종삼의 ‘오다’도 기본 주제가 같다는 것이다. 그 주제가 아니라면 그가 죽음과 생을, 부정적 세계인식과 새 세상에 대한 꿈을 병치시키고 교섭시킬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밀구조가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차이를 낳게 된다. 서정주에게 있어서 저 깨달음은 ‘사실적 확언’으로 제시된다. 즉 고난의 자리에 상명당을 ‘실재’로서 구축한다. 따라서 고난의 장소=상명당에는 분리가 없다. 반면 김종삼에게는 그 둘이 명백하게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고난의 장소=상명당’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대신 등식이 아니라 조건이 붙는다. 조건은 ‘당위’이다. 즉 “~이다”가 아니라 “~이어야 한다”가 둘 사이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서정주의 확언 명제는 훗날 그가 ‘신라’에 귀의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반면 당위형 조건이 붙으면 귀의할 데가 없다. 그리고 현실과 이상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당위라는 조건은 연산식을 요구한다. 상명당 = F(현실)이다. 이 함수가 어떤 연산식을 가질 것인가?

  나중에 이런 현실인식이 정현종에 와서 다시 솟아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통의 축제’ 역시 고난의 자리=상명당론이라는 무의식적 기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도 서정주와는 다른 길을 간다. 등식을 거부하고 함수를 구성한다. 그의 함수의 기본 출발점은 ‘당위’라기보다는 ‘다짐’이다. ‘~이어야 한다’라기보다 ‘~이어야겠다’이다2). 바로 그 점에서 그의 연산식은 김종삼의 연산식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진다. 때가 되면 다시 보게 되겠지만 이 자리에서 굳이 얘기하는 것은 시의 개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큰 주제가 같다고 해도 시인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세계를 만든다. 통시적으로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해도 후대의 시들은 결코 원본과 같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닮은 꼴을 이루지 않는다. 그 과정이 시의 진화사다.



● 김종삼과 샤갈


  필자는 김종삼과 샤갈Marc Chagall의 유사성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 점을 좀 더 자세히 풀이해보자.

  유럽의 예술사에 있어서 샤갈은 19세기 후반기 이래 지속적으로 추구되어 온 한 경향의 변곡점에 위치한다. 그 경향은 바로 시공간의 한계에서 탈출하는 것, 즉 근대의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 어떻게 진실의 세계를 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후반기부터 서양의 지식인들은 근대를 이끌어 온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에 대한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이 있었는데, 샤갈은 그것들을 끌어모아 도약하는 일종의 특이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앙드레 브르통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 점에서 읽을 만하다.


  오래전 랭보로부터 시작된 공간 구도들의 전복을 감행하고 동시에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대상을 해방시키기 위해, 샤갈의 메타포는 단박에 최면적 이미지 그리고 직관적인(혹은 미학적인) 이미지 속에서 저와 상응하는 조형물을 발견한다. […] 각기둥 모양의 경탄할만한 색깔들은 현대의 고통을 쓸어가면서, 동시에 쾌락원칙이 자연 속에서 공공연히 표출하는 천진난만한 표현들(꽃들과 사랑의 표현들)을 통해, 그것에 빛을 입힌다3).


  물론 샤갈만이 그 특이점의 주체는 아닐 것이다. 20세기 전반기는 ‘벨 에포크Belle-Époque’의 넘쳐나는 풍요의 분위기를 타고 예술적 혁신에 대한 열망이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비등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4). 다만 샤갈이 그에 대한 가장 선명한 이미지를 제공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요점은 샤갈로 집약되는 충격적 영상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는가, 일 것이다. 인용문에서 독자는 곧바로 “최면적 이미지”, “쾌락원칙이 자연 속에서 공공연히 표출하는 천진난만한 표현들”에 눈길을 갈 터이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대상을 해방”하는 이미지의 창출 방식이다. ‘최면적 이미지’, 혹은 ‘초현실적 이미지’를 출현시킨 방법은 무엇인가? “중력의 법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표현에 그 단서가 숨어 있다. 그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비시간적 이미지”(장-미셸 몰프와5))의 난입이다. 첼란의 연구자인 로셀 토비아스는 첼란과 샤갈을 연동시키면서 “샤갈의 작품에서 일관된 모티프 중 하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지금은 사라진 세계에 속하는 슈테틀Shetetl[=유대인 촌락]6)”임에 주목한다.

  고대의 고향은 시간성을 초월한다. 그로 인해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두 개의 층위가 한 공간에 마분지 공작처럼 끼워진다. 파블로 피카소는 “샤갈이 그림을 그릴 때 그가 자고 있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받아 모리셔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말콤 드 샤잘Malcolm de Chazal은 이렇게 풀이한다. “샤갈은 이렇게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시킨다. 따라서 마르크 샤갈은 살바도르 달리보다도 더 편집증적 방법에 가깝다.7)” 피카소의 혼동이나 샤잘의 ‘편집증적 방법’은 샤갈이 두 어긋나는 차원을 대립시키기보다 공존시키면서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미술사가 빅토리아 샤를르에 의하면, 샤갈은 “‘스타일 상의 무염성immunité’이라고 부를 법한 것을 타고난” 화가이다. 그는 “모순을 제시하거나 분할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개방성 속에 머무른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고 자기가 만든 구조를 풍요화한다.8)”

  기념비적인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를 썼던 곰브리치E.H. Gombrich는 자신과 동시대인이었던 “그로피우스, 코코슈카, 피카소, 헨리 무어, 샤갈 및 달리”를 마지막 장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말았는데, 훗날 1965년의 「후기」에서, 이들이 “오늘 이 시점에도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미술가가 아니”라 “계속 참신하고 심지어 논쟁의 대상까지 될 수 있는 신기한 창조를 기대해 볼 수 있다9)”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이에 근거하면 샤갈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스타일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숱한 병행본을 생산하면서 계속 진화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의 인용문들에서 보듯, 그것은 회화를 넘어 첼란, 콕토 등 문학에까지도 연결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기이한 공존 구조가 샤갈에게 있어서는 행복감의 충만이라는 양태로 표현되었으나, 다른 이들에게서는 다른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토비아스는 첼란의 시에서 찢겨지고 피를 흘리는 “떠도는 천사roaming angel”의 이미지를 거론한다. “첼란의 시는 떠도는 천사를 통해 이 슈테틀의 운명을 가리킨다. 그의 발은 ‘불타는 석탄 위를 걷거나 연기가 자욱한 들판을 걸어온’ 것처럼 ‘피부가 벗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사의 상처 입은 발만이 온전한 신체 부위이다. 날개와 머리는 줄 바꿈으로 인해 수식어와 분리되어 찢겨 있다: ‘천사 / 요동 / 머리 / 축 처진 비행’10).”

  독자가 보는 것은 날개와 머리의 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상처입은 발과 그 둘의 삐걱거리는 공존이다. 이 공존은 세계의 파멸 앞에서 힘겹게 몸을 이끄는 고통하는 육체를 느끼게 한다. ‘벨 에포크’에서 ‘소하SHOAH’의 시대로 시간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존의 구조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저항의 의지를 “축 처지면서도” 결코 놓지 않았다는 것을, 놓기는커녕 날틀을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11)‘상처입은 발’은 방향키를 위로 올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추락 중의 천사12)”인 것이다.



● 김종삼의 언어굴절론


  김종삼의 시가 샤갈과 공분모를 이루는 부분은 명백하다. 그가 구축한 삶과 죽음의 병치는 이미 말했듯이 시대의 절망과 저항의 의지를 공존시키는 방법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존의 구조이다. 즉 어긋난 두 차원의 기발한 끼워짐이다. 이것도 공분모에 속한다. 그러나 구조의 운동은 다르게 전개된다. 유럽의 샤갈적 추세가 이성에 기반한 근대의 물리적 구조를 넘어서고자 한 시도라면, 김종삼에게 있어서 그것은 죽음과 다를 게 없는 현실에 생의 기미를 끼워넣고자 하는 필사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차후의 시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미리 말해두어야 할 것이다. 유럽적 시도가 이성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면, 그 다음은 이성적인 것을 훼쇄(毁碎)하는 격렬한 과정(초현실주의에 와서 극점에 달했던)을 거친 후에, 근대적 척도 너머에 있다고 가정되는 것들을 향한 매우 다양하고도 어지러운 분산(인디언 풍습, 아프리카 예술, 선[禪]...그린피스... 그리고 A.I.)으로 나아간다.

  반면 한국의 경우엔 ‘무’(전쟁에 의한 모든 것의 파괴와 망실)에 대한 거부로 시작한다. ‘무’에 ‘생’을 도입하는 게 가장 단순한 수식인데, 그 ‘생’은 처음 ‘혼돈’의 형태로 유입되다가 차츰 일종의 ‘맑게 갬’의 상태, 즉 정돈된 구조의 확립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혼돈 자체의 해체·재구성이라는 방법적 형태를 띠게 되기 때문에, 이 역시 다양한 기형적 시도들로 점철된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언제나 구조적 안정성을 ‘가정13)’하고 전개되며, 그로부터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데올로기’들로 빈번히 고착화되는 한편, 또한 ‘열린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가 복류한다14). 이런 흐름이 김수영·김춘수 세대를 거쳐 4.19세대로 나아가는 길의 역선을 형성한다.

  김종삼은, 전봉건 등과 함께, 한국적 정신 세계의 초기 우주에 속한다. 그에게는 우선 죽음 속에 생명을 끼워넣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미 말했듯 그 작업이 무작정 결합시키는 일로 될 수가 없다.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을 끼워넣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난한 사업이다.

  비교적 분명히 눈에 띠는 시를 읽어보자.


슈 사인들의 눈보라가
밀리어 갔던 새벽을
기대려 갔던
아스팔트
安全地帶와

하늘 같은 몇 군데인
안테나의 아침과

청량리로 가는 맑은
날씨인 다음인
다름 아닌 맑으신
당신이었읍니다
그 보다

오래인 日月이 지니어 온
苦膒의 꿈인 연류이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ㄹ 하는지
나는 모르며

그 이는 인간에 依하여 지는
누구의 힘도 아니었으므로

빛깔 깊은 꽃 피어 있는
시절에 대한 그이의
이야기 ㄹ — ( 「빛깔 깊은 꽃 피어 있는 시절에 대한 이야기」)


  이 시는 한국시가 오래도록 되풀이하고 있는 ‘임’에 대한 연모를 이어받고 있다. 이는 김종삼의 시가 엉뚱한 데서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 한국시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가리킨다. 이미 누누이 설명했듯이 한국인의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서도 그의 시는 절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시사적으로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여하튼 이 시의 기본 구조는 ‘현실의 사람들’과 ‘님’의 대치이다. 현실인들은 “슈 샤인들”이 제유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슈 샤인들”은 물론 역전 등 노상에 자리를 깔고 앉은 ‘구두닦이들’을 뜻한다. 새벽이 되자, 이들이 어디론가 “눈보라가 / 밀리어” 가듯이 거리를 비웠다. 화자는 그 시간을 기다려 거리로 나가(“기대려 갔던”, “기대려”는 “기다려”로 읽어야 한다), 평탄하게 나 있는 아스팔트 길에서 몇 군데 님이 오시는 기척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안테나(들)를 점검한다. 그 안테나들은 새들일 수도 있고 나뭇가지일 수도 있고, 꽃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여하튼 ‘슈샤인 보이’들이 점령하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것들을 ‘나’는 말끔한 아스팔트 거리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화자는 그 님이 계신 장소가 “청량리”라고 짐작하는데, 이 청량리는 분명 한자어 ‘淸涼里’(맑고도 맑은 장소)에 근거해서 설정한 것이 틀림없다. 청량리는 그래서 ‘맑은 날씨’보다도 더 맑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 독자는 왜 “슈 샤인들”이 등장했는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 현실인들 중에서 가장 청결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겨우 구두를 닦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온몸에 검댕을 묻힌다. 청량리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제 3,4연이다. 문자적 의미를 복원하면,


청량리로 가는
맑은 날씨[의] 다음[엔]
다름 아닌 맑으신
당신이 [계셨습니다].
그보다(=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드려야 하는 말씀은)

(당신이 거기 계시기를 바라는 꿈을)
오래(도록) 일월(=온 세상)이
쓰디쓴 굳기름이 되도록 [지니어 온] 연유(가)
(청량리로 가기 위해서였다는 점입니다.)


  이 두 연의 뜻은 분명하다. ‘나’는 청량리로 가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소망은 나만의 소망이라기보다 모두의 소망이다. 청량리로 가기 위해서는 ‘당신’(님)을 만나야 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그런 소망을 정말 오래도록 간직해왔다.

  이 분명한 의미를 도저히 짐작할 수조차 없이 문면의 구문들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는 한국어 재학습 세대의 서툰 오문 탓인가? 필자가 보기엔 그보다 더 심오한 효과가 산출되고 있으며, 이는 분명 시인이 의도했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 점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제 3연에 와서 ‘님’이 목표가 아니라 매개자로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걸 지적해두고자 한다. 이는 한국시사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아니, 좀 더 너른 시각으로 보자면, 만해의 ‘님’에서 그 단초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탐구할 문제이다.)

  문제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이런 이상한 구문이 씌어졌는가? 구문의 왜곡 상태를 들여다 보면, 앞의 복원문에서 [ ]로 가두어진 부분들에 왜곡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 )로 가두어진 부분들은 표현이 감추어진 곳들이다. ( ) 부분의 감춤은 [ ]가 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 ]를 해독하면 ( ) 부분은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 ]의 왜곡은 단숨에 말해,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청량리로 가기 위해서, ‘맑은 날씨’를 지나 그 다음에 당신을 만나야 하는데, ‘맑은 날씨의 다음에는’이 “맑은 날씨인 다음인”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는 구문을 축약해서 ‘맑은 날씨’와 ‘당신’을 실질적인 동의어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날씨인”을 바른 구문으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다음엔’이 “다음인”으로 표현된 점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그 다음, ‘계셨습니다’가 “이었습니다”로 바뀐 것도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꾼 것이다. “지니어 온”은 놓여야 할 문법적 위치를 미리 쓴 경우인데, 오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고구의 꿈”을 강조하는 효과를 위해서 특별히 처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꾼 까닭은 무엇인가? 인접성은 양자 간의 다름을 전제로 한다. 즉 ‘당신’이 계신 차원과 ‘슈샤인 들’이 있는 차원은 엄격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 나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게다가 “그이15)”는 “인간에 의하여 지는[=만들어 질 수 있는] / 누구의 힘(‘에 의한 것’, 혹은 ‘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등가성은 차원이 다른 두 대상을 슬그머니 같은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당신’이 현실 속으로 틈입하는 것이다. 주제상으로는 암시가 지시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구문론적 효과는 이런 주제적 효과를 동반하지 않으면 느껴지기가 어렵다. 5,6연에 와서 ‘그이’의 존재의 모호성을 부러 강조한 것은 바로 암시를 강조하기 위한 무의식적 기도로 보인다. 심리학적으로 암시가 지시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간지럽힌 결과이며, 따라서 쉽게 달성되곤 하는 효과이다. 이는 슬쩍 언어를 굴절시키는 양태로서 움직인다.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꾸는 것은 환유에 은유의 기능을 입히는 것과 같다16). 이 기능 변환을 통해서 꿈이 현실과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공존은 서로의 ‘다름’을 각인시키는 효과도 갖는다. 만일 그게 없다면 이 기능변환은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다름에 대한 인지는 시의 윤리학에 속한다. 바슐라르는 샤갈의 그림에서 “윤리적 가치”를 읽었다. 그가 본 것은 샤갈의 그림이 제시한 ‘낙원’이 무조건적인 행복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낙원에의 유혹만을 보지 않고, 낙원에 도사린 유혹의 위험이 표지되어 있음을 보았다.


  여자는 사과를 따버리고 말았다. 이 한가지 행위만으로 낙원은 망가지고 만 것이다. 조물주인 신은 이제 심판해야 할 신이 된 것이다. 샤갈은 그의 그림 속에서 신과 인간 쌍방에 있어서의 전환을 그리고 있다. 신은 복수의 둘째 손가락으로 하늘에 나타난다. 이브와 아담은 ‘노여움의 신 (Dieu du Courroux)’ 이 가리키는 손가락 앞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샤갈적인 선의로서, 신이 이브를 저주하는 색채판화 속에서, 자신의 잘뭇으로 떨고 있는 여자 앞에 샤갈은 한 마리 놀란 어린양을 그려 놓고 있다. 한마리의 어린양? 아니 오히려 이 샤갈적 동물은 당나귀와 염소의 혼혈인 남녀양성의 동물로서 샤갈의 수많은 작품에 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짐승들의 평화스런 순진함을 가리키는 이 조그만 표시는 삶의 기쁨 앞에서의 인간들의 극적인 책임을 강조하는게 아닐까17)?


  바슐라르가 추출한 샤갈의 윤리학이 낙원에 대한 성찰이라면, 김종삼의 윤리학은 이상향 그 곳에 대한 요구로부터 나온다. 이상향이 존재해야 할 절박한 까닭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김종삼에 의해서 한국인은 ‘꿈꿀 권리’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폐허인 세상에서. 죽음 그 자체인 세상에서 말이다.

  우리는 김종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오해된 게 얼마동안인가? 무엇보다도 그를 한국 현대시사의 주추로 재정위할 필요가 있다. 전봉건과 더불어 김종삼 편을 이번 호에 끝내려고 했는데, 다른 일들에 밀려 마지막 마무리 부분을 다음 호로 이월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 1)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 - '님'은 '머언 꽃'을 어찌 피우시는가』, 문학과지성사, 2023.02를 참조하라.
  • 2) 필자는 앞의 책의 한 부분에서 정현종의 태도를 ‘당위’로 보았었다. 여기서 수정한다.
  • 3) 『André Breton, 『전집 4. 예술론, 기타 Œuvres complètes IV - Écrits sur l'art et autres textes 』(coll.: Pléiade), Paris: Gallimard, 2008, p.426.
  • 4) 이 열기는 결국 ‘다다’를 거쳐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화려한 불꽃놀이를 펼치게 된다.
  • 5) Jean-Michel Maulpoix, “Jean Cocteau l’illusionniste”, Serge Linarès (direc), Cahier Jean Cocteau (coll.: Cahiers de l'Herne No. 113), Paris: L'Herne, 2016, epub version
  • 6) Rochelle Tobias, 『파울 첼란의 시에 있어서 자연의 담화, 비자연성의 세계 The discourse of nature in the poetry of Paul Celan : the unnatural world』,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6, p.72.
  • 7) Malcolm de Chazal: “Confession d'un écrivain qui est devenu peintre”, in Bernard VIOLET, À la rencontre de Malcolm de Chazal, Paris: Philippe Rey, 2011, p.151
  • 8) Victoria Charles, 『1천 점의 걸작 그림 1000 Chefs-d'œuvre de la peinture』, New York: Parkstone International, 2021, epub version
  • 9)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 하』, 최민 옮김, 열화당, 1980, p.602
  • 10) Rochelle Tobias, op.cit.
  • 11) 토비아스에 의하면 “축 처진 비행”이라고 번역된 “lastig getrimmt”의 ‘getrmmt’는 비행기의 무게가 부분들마다 다르게 나뉘면서 비균질적 하중으로 작용하는 현상에 근거한 항공용어라고 한다.
  • 12) loc.cit.
  • 13) 한국의 식자들에게 빈번히 표출되었고, 표출되고 있는, 개념 선취를 향한 ‘욕망’은 이로부터 발원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필자가 이 ‘개념주의’(혹은 ‘조념사’ 경향)에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는 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교정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한국인 내면의 거대한 집단무의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몇 마디 개처럼 컹컹 짖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요즘 와서 깨닫게 된다.
  • 14) 이는 대수학에서 ‘x’의 설정과 유사하다. ‘x’가 미지수로 설정되면 방정식의 개발이 촉진된다. 반면 x를 미리 확정하면 수식이 x에 의해서 재편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성립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신동엽(에 대한 해석)·김춘수·김수영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신동엽은 x의 확정, 김춘수는 x의 미지화, 김수영은 x의 가상적 설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신동엽의 시를 ‘민족주의’에 근거해서 해석하는 기존의 관행을 떠나, 그의 입장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면, 신동엽의 입장은 김수영에 가까워진다. 왜 김수영이 신동엽을 그렇게 고평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어서 4.19의 문학은 x의 새로운 설정 단계로 돌입하게 된다. 기억을 위해서 미리 적어두지만, 이 얘기는 차후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 15) “그이”를 “그 이”로 띄어 썼다. 조판 상의 오류인지 아니면 시인이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마지막 연에서는 “그이”로 붙여 썼다.
  • 16) 통상 이해되고 있는 것과 달리, 은유와 환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고등과학원 감정연구단’의 공동저서로 10월초에 출간될 『은유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시선』에 수록될 필자의 「문학에서의 은유, 제유 그리고 환유」를 참고해주기 바란다. 또한 필자의 「정신분석에 있어서의 은유와 환유」(정과리 평론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 - 존재의 변증법 · 4』, 역락, 2005)도 도움이 될 것이다.
  • 17) 바슐라르, 『꿈꿀 권리』, 이가림 옮김, 열화당, 1980, p.41; Gaston Bachelard, Le droit de rêver,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0,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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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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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월간 현대시 이은지 김기형사육제동물능동성폭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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