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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딩아돌하 | 2024년 겨울호(제73호)

시간의 착란과 시의 확장

김태선 문학평론

2011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간의 착란과 시의 확장


  “장미꽃을 지나친 것 같다// 호랑이처럼 아름답다”, 정재학 시인의 신작 「사파리」의 전문이다. 단순한 문형의 문장 둘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다. 일견, 길을 걷다 문득 지나쳤을지도 모를 장미꽃을 떠올리며 그 감상을 표현하는 평범한 전언처럼 보인다. 길을 걷듯 자연스럽게 시의 문장을 지나치게 되면 그렇게 읽는 데에서 그치고 말았을 터이다. 그런데 눈앞에 두고 가만히 살피다 보면 조금씩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평범하게 보였던 문장들이 스스로의 틈을 내며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장미꽃’을 두고 어째서 “호랑이처럼 아름답다”고 하였는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장미’와 ‘호랑이’ 사이의 연관을 짐작케 하는 정보를 우리는 시의 안에서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시의 제목이 ‘사파리’라는 점에서, 시에서 노래하는 이에게 장미꽃을 지나친 일이 사파리에서 호랑이를 보았던 경험과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고 상상해볼 수는 있겠다.

  사파리에서 본 호랑이를 떠올렸다는 점에서 ‘장미꽃’은 노래하는 이에게 만질 수 없을뿐더러 지나가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표상되는 사물이다. 지나치며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대상은 또한 일시적 혹은 한시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장미꽃’은 또한 노래하는 주체에 손에 쥐어질 수 없고 그렇기에 장악하거나 소유할 수도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성격은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우리에 가둘 수는 있으나 끝내 온전히 길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일정한 공통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것들과의 마주침을 일컬어 시의 목소리는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아름답다는 것, 이는 단순히 주체로 하여금 감각적인 쾌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머무르지 않는다. 주체에게 장악되지 않을뿐더러, 언제나 물러남을 통해 스스로를 표상하기에 그 사물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때 “아름답다”는 말은 그와 같은 객체의 독특한 존재적 성격을 가리키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파리」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사항은, “장미꽃을 지나친” 일을 일컬어 시의 목소리가 “것 같다”라고 말함으로써 불확실한 것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마주친 사물의 존재 혹은 마주침 자체를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시의 목소리는 체험 자체를 일종의 미결정적인 사태로 유보한다. 이와 같은 언어의 운용은 “장미꽃을 지나친” 일을 불확정적인 무언가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목으로 쓰인 ‘사파리’라는 말로 인해 혹시 ‘장미꽃’과 ‘호랑이’의 자리가 뒤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도록 우리를 이끈다. ‘호랑이를 지나쳤다// 장미꽃처럼 아름답다’라고 표현되었어야 할 일의 순서가 뒤틀리며 시에 쓰인 말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만일 둘의 자리가 바뀐 채 발화된 것이라면, 이는 그 목소리로 표현된 시간의 배열 혹은 장소와 사물의 순서에 착란이 일어났음을 일러준다.

  이때, 시간의 흐름을 교란하며 언어의 배열마저 순서를 달리하도록 하는 움직임을 추동하는 사건이 ‘장미꽃’을 지나쳤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정재학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문학동네, 2022)에는 ‘장미’라는 이름이 제목에 쓰인 시 세 편이 있다. 그 가운데 「장미를 묻고 아버지를 묻고」는 고정시킬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과 아버지를 떠나보낸 일에 관해 노래한다. 그리고 이 작품 바로 앞에는 「시계를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와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연작 세 편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모래처럼 쓸려가는 아버지를 붙들기 위해”(「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2」) 노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정재학 시의 목소리는 또한 시간과 시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독특한 연결을 환기한다.

  “태엽이 풀려 지금 정지한 벽시계/ 12에 멈춘 초침과 2에 멈춘 분침 사이로/ 벚꽃이 피어나더니 꽃잎이 휘날리고”(「시계를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라며 노래하는 대목과 같이 그 움직임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움트는 모습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운동이라는 것이 연대기적인 흐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간들이 서로 교호하면서 독특한 관계를 맺고 또 관습적 시선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특별한 움직임을 예비하고 또 펼쳐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의 발견이기도 하다. 때문에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3」에서 정재학 시의 목소리는 “가끔은 내가 왜 아버지를 선택해서 태어났을까,/ 아버지는 왜 저를 선택했을까 생각해봅니다”라고 함으로써 시간과 인과를 뒤틀어 봄으로써 그에 숨어 있던 새로운 관계와 그 운동을 펼쳐 보이기에 이른다. 관습적 시선에서는 일종의 착란처럼 보였던 언어의 배열이 역설적으로 그 틀에 은폐되어 있던 존재에 관한 관계의 진실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매개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파리」에서 시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사태는, 그러한 불확실한 마주침에 대해 미적 판단을 내리는 독특한 상황을 연출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장악되지 않음’과 ‘물러남’이라는, 사물의 존재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움직임을 가리켰던 ‘아름답다’는 말이 또한 관습적인 인식 혹은 사유의 질서와는 다른 차원을 지금 여기로 끌어당기는 선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언어의 흐름과 인식의 지평에서는 열리지 않았던 문학의 공간을 펼쳐내고, 이를 통해서 현실에 은폐되어 있던 측면들을 드러나도록 한다. 나아가 우리를 가로막았던 벽을 무너뜨리며 잠재해 있던 힘들을 탐색하는 데에 이른다. 그 한 예를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라는 말로 형용된 어떤 날들에 관한 노래에서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사이키델릭한 월요일」은 출근을 위해 탄 버스에서 겪은 마치 착란처럼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전하는 인물의 목소리를 전한다.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옆자리의 여자는 버스 안에서 이진법의 냄새가 난다고 중얼거렸다. 버스가 노선을 바꾸더니 낯선 언덕길에서 갑자기 멈춘다. 옆자리의 여자가 일어나 모두 다 내리라고 한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여행 가이드였다. 승객들은 모두 여행객이었다. 난 지금 출근해야 한다고 하자 그 여자는 스케줄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다들 버스에서 내려 거대한 도서관으로 들어가더니 편히 앉거나 푹신한 바닥에 누워서 책을 본다.

  ―「사이키델릭한 월요일」 부분


  「사이키델릭한 월요일」에서 노래하는 ‘나’는 평소처럼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버스가 노선을 바꾸더니 낯선 언덕길에서” 멈추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그와 함께 일반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옆자리의 여자’가 돌연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한다든가, 승객들이 자연스럽게 버스에서 내려 도서관에 들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나’가 탄 버스가 ‘관광버스’였다면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터일 것이다. 그러나 그이가 탄 버스는 ‘시내버스’라고 한다. 출근하는 길이면 반복하여 오르내렸을 버스이기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착오가 일어나지도, 지금 그이가 겪는 것처럼 돌발적인 일들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시에서 펼쳐지는 지금 여기에선, 노래하는 ‘나’가 마치 착란 상태에 놓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출근길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이처럼 「사이키델릭한 월요일」에서 ‘나’가 마주한 지금 여기의 상황은, ‘출근’과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각각의 다른 시간대가 한 곳에서 만나 부딪히며 통제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통제 불능은, “10분 후면 지각인데 관광객들 속에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노래하는 ‘나’에게만 한정된다. “난 지금 출근해야 한다”는 호소에 “스케줄을 바꿀 수 없다”는 ‘옆자리의 여자’의 응답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정해진 일정을 잘 지키며 순조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일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만이 지켜야 할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나게 될 것만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는 시의 제목으로 쓰인 ‘사이키델릭한 월요일’에서 ‘사이키델릭’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처럼 그 나타나는 모습들은 마치 환각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정재학의 시에서 이러한 모습들은 단순한 착란의 표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이러한 상황들이 일어나기에 앞서 제시된 ‘옆자리의 여자’의 중얼거림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옆자리의 여자’가 말한 직후 ‘나’에게 시간의 어그러짐과 같은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옆자리의 여자’가 한 중얼거림은 “버스 안에서 이진법의 냄새가 난다”라는 말이다. 이 표현에서 ‘이진법의 냄새’가 눈길을 끈다. ‘이진법’은 0과 1 혹은 숫자 두 개만을 이용하는 수 체계를 가리키는 개념어이다. ‘옆자리의 여자’가 발화한 언어의 배열은 이러한 관념적 성격의 것을 ‘냄새’라는 감각적인 것과 만나게 함으로써 그 충돌을 통해 서로의 이질성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이와 같이 어긋난 것만 같은 단어의 배열은 또한 이후에 벌어지는 ‘나’와 다른 승객들 사이의 부조화에 대한 전조 역할을 그려내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편, ‘옆자리 여자’의 말은 ‘출근’ 시간의 ‘버스’라는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양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환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진법’은 단순히 ‘냄새’와의 충돌을 의도한 낱말의 선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진법’은 또한 ‘디지털’을 이르는 다른 말이다. 즉 ‘이진법의 냄새’는 곧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승객들이 만들어내는 ‘버스’ 안의 공기를 가리킨다. 비단 출근 시간대가 아니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많은 이들이 이동 시간 동안 스마트 기기를 이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에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시간과 장소―를 불러오는 일이기도 하다.

  「사이키델릭한 월요일」에서 ‘옆자리의 여자’가 ‘여행 가이드’로 돌변하고 또 ‘승객들’이 모두 ‘여행객’으로 갑작스레 바뀌는 움직임들은 마치 ‘나’가 환각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상황들을 연출하는 것처럼 보일 터이다. 그런데 정재학의 시에서 이러한 착란적인 언어의 흐름은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현실이 또한 바깥으로 열려 있고 또한 다양한 시간과 장소와 중첩되어 있는 것임을 드러나도록 한다. 이와 같은 특징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예를 기발표작 「사이키델릭한 일요일」에서 만날 수 있다. 「사이키델릭한 일요일」은 아내와 아들의 말에 연주를 멈춘 후 기타를 바라볼 때 그에 얽힌 시간들이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되는 일을 전한다. 이를 시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30초 전 기타를 치던 나는 3초 전 기타를 내려놓는 나를 바라본다. 그 사이로 30년 전 중고 일렉기타를 사는 내가 보인다.

  ― 「사이키델릭한 일요일」 부분


  30초 전의 시간이 3초 전의 시간을 바라보는 일은 일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재학 시의 언어는 단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로 30년 전 중고 일렉기타를 사는 내가 보인다”라고 함으로써 실상 어떤 시간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응시와 대화라는 사실을 또한 표현한다. 이러한 흐름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위반하고 뒤틀기에, 제목에 쓰인 ‘사이키델릭’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듯 환각적이고 착란적인 언어의 운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지금 여기의 시간을 이루는 것들, 그리고 그러한 시간 가운데 있는 존재자들은 단순히 일정한 어떤 흐름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표현한다. 즉 “30초 전 기타를 치던 나”가 “3초 전 기타를 내려놓는 나를 바라본다”고 하듯 어떤 한 상태의 존재라는 것은 끊임없이 다양한 시간들이 함께 바라보고 대화하는 것이자 또 그러한 다양함의 상호 교호와 중첩임을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다양한 시간의 대화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 시간들이 얽혀 있는 ‘기타’ 역시 ‘나’와 관계를 맺기 전 다양한 시간과 이야기를 간직한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자들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만을 간직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래와도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타에 이어 행운목을 노래할 때 시의 목소리는 그 존재와 얽힌 과거의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뼘도 안 되던 어린 행운목이 지금은 내 키보다 더 크다. 웅장하다. 천장에 닿으면 어쩌지?”라고 하며 미래를 지금 여기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시의 목소리는 다시 ‘기타’와 ‘행운목’과 관계했던 시간들 가운데 그 처음 만나는 때를 함께 포갠다. “30년 전 노란 기타를 사던 내가 15년 전 초록색 잎이 돋아난 행운목에 물을 주던 나를 바라본다. 그들이 눈을 마주치고는 서로 방긋 웃는다”고 함으로써 시간과 시간이 그리고 기억과 기억들이 서로 인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을 이루어낸다. 첫 만남의 순간들이 함께 포개어짐으로써 그 시간들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내일을 여는 새로운 만남을 펼쳐내는 것이다.

  정재학 시의 언어가 펼치는 ‘사이키델릭’한 움직임들은 착란적인 언어의 배열을 통해 관습적인 시간과 시선에 틈을 낸다. 이를 통해 규범적인 언어의 운행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이키델릭한 월요일」에서 “버스 안에서 이진법의 냄새가 난다”는 중얼거림으로 촉발된 장면들은, 일견 ‘출근’이라는 일상의 유용성에 복무하는 삶과 ‘여행’이라는 유토피아적인 바람을 충돌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한편으로는 “익숙한 불안감이 전속력으로 몰려왔다”고 하는 상황을 반복하게 되는 ‘월요일’이라는 현실적 고단함을 극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충돌은 또한 지금 여기의 삶이 유용성을 위한 것으로만 소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한 표현한다. 즉 닫힌 것처럼 보이는 지금 여기에 틈을 내어 그와는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나아가 계속 창출할 수 있는 힘이 현실을 함께 구성한다는 걸 노래하는 것이다.

  정재학 시의 ‘사이키델릭’한 언어들은 다양한 시간들이 서로 중첩하고 소통하며 열리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일상적 시선에 숨어 있던 세계로 시야의 확장을 도모한다. 정재학 시의 언어에서 ‘사이키델릭’이라는 말로 연상하게 되는 환각적인 이미지는 단순히 어떤 착란 상태에 다른 유희적인 움직임을 서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로 무관한 것으로 여겼던 시간과 시간, 존재와 존재가 함께 소통하는 길을 열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관계’라는 것의 근원적인 모습과 그 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기발표작 가운데 「히말라야 크리스탈」에서는 ‘히말라야 백수정’이라는 사물을 세심하게 살피는 과정에서 서로 무관한 것처럼 여겨졌던 존재들의 이야기가 서로 중첩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특별한 관계맺음을 전한다.

  「히말라야 크리스탈」에서 ‘나’는 “녹지 않는 얼음을 보고 싶어서/ 히말라야 백수정을 주문했다”는 말로 노래를 시작한다. 주문한 물건이 택배로 도착한 날 공교롭게도, 아내가 ‘나’에게 “히말라야에서 몇백 년 동안 죽지 않고 살고 있다는/ 초월한 성인(聖人)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일에 대해 시의 목소리가 “히말라야 수정과는 무관하게”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아내가 히말라야의 성인에 관해 이야기한 일과 ‘히말라야 백수정’이 택배로 온 일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일어난 것들이다. 그러나 그 둘을 동시에 겪게 된 ‘나’에게 각각의 존재는 더 이상 연관 없음으로 머무를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당신 말을 믿기는 어렵지만 지금 히말라야 크리스탈이 왔어./ 동시성처럼.”

  아내가 전한 히말라야 성인의 이야기에 담긴 시간과 히말라야 수정의 시간은 저마다 다른 시간대를 이루는 것들일 터이지만, “동시성처럼”이라는 ‘나’의 말과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중첩되며 독특한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이렇게 ‘나’의 손에 들어온 히말라야 수정은 또한 그 자신의 시간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이루어지는 시간들을 품어내는 문을 연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는 손안에 들어온 히말라야 수정에서 ‘작은 산맥’을 보며, 그에 “관악산, 도봉산, 매봉산 정도 밖에 못 가본”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보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그 시간들을 덧입으며 히말라야 수정은 “숨 쉬는 투명한 돌”과 같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그 시간들을 덧입으며 “차가웠다가 온기가 느껴”지는 존재가 됨으로써 “히말라야 냄새”를 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지금 여기에 먼 곳의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일로 다가오기도 할 터이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는 아내에게 “우리 히말라야 가볼까?”하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말과 함께 시의 목소리는 “그 말과 무관”했던 낮의 일을 떠올리며 그동안 ‘나’에게 망각되었거나 은폐된 채 머물러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말과 무관하게

  그날 아내는 낮에 이미 히말라야 소금을 샀다.

  핑크빛 수정 같다.

  아들 머리칼에서 히말라야 허브향이 난다.

  몇 년째 쓰는 샴푸였는데 문득 알았다.

  그러고 보니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이란

  긴 연작시를 쓴 적도 있다.

  ― 「히말라야 크리스탈」 부분


  그렇다. 분명 ‘히말라야’라는 이름 혹은 장소와 관련 있는 사물들은 “우리 히말라야 가볼까?”라는 말과는 무관하게 이미 ‘나’의 일상 도처에 자리하며 나름의 시간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나아가 ‘히말라야’라는 이름이 들어간 ‘긴 연작시’를 쓴 일을 떠올리기도 한다. 시의 목소리는 이러한 일들이 서로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무관’으로 표현되는 그 관계들이 무엇보다도 그 서로 다른 시간의 이야기들을 강한 연관으로 엮음으로써 지금 여기에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열어간다는 사실을 그려낸다. 그리하여 노래하는 ‘나’는 그렇게 “가보지도 못한 히말라야가/ 우리 집 안에 꽉 차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일을 겪게 된다. 이 이야기는 히말라야 백수정이라는 작은 사물을 살펴보며 그에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여러 시간들이 포개어짐으로써 일어난 일들이기도 하다.

  「히말라야 크리스탈」에서 시의 목소리는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있어서/ 더 이상한 오후”라는 소감을 밝히며 노래를 마무리하지만, 실상 우리 곁에 있는 사물들에는 저마다 그 크기보다 거대한 시간의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언어로 펼치는 일은, 일견 ‘사이키델릭’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재학의 시가 그려내는 모습처럼 환각 혹은 착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운용이 펼쳐내는 운동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상상의 힘에 의해 발동되는 것들이다. 상상의 힘이 유감없이 그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선 제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상상의 힘을 구속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태를 기성의 것으로 만드는 움직임,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일 터이다.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에 수록한 여러 시편에서 시의 목소리가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무언가를 아는 자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재학 시인은 네 번째 시집에 쓴 ‘시인의 말’에서 “다행히 아직 지겹지는 않다./ 시 쓰는 법을 매번 까먹기 때문이다”라고 시 쓰는 일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잘 잊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신작으로 제출된 「그 위는 상상이야」에서 시인은, “아이는 지금 기억 못 하지만” ‘여섯 살 무렵’ 했던 아들의 말들을 “시처럼 아름다워 적어두었다”하며 제 노래에 가져온다.


  태양이 너무 밝아서 뚝뚝 떨어지고 있어

  우리가 미래에 있었는데 우리가 기억 못 하는걸 수도 있어


  미래는 우주 위야

  미래의 위는 아직 옛날이야

  그 위는 상상이야


  난 빛의 몸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지금은 기억 못 하지만,

  ― 「그 위는 상상이야」 부분


  시에서 이탤릭체로 쓰인 표현들은 “아들이 여섯 살 무렵” 했던 말들을 옮긴 것일 터이다. 어린 아이의 상상을 담은 말들이기에 그 의미를 무엇이라 해명하는 일을 불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재학의 시가 실어 나르는 아이의 말에는 시간에 관한 특별한 인식이 나타나는 대목이 있어 주목을 요한다. 특히 ‘미래’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미래에 있었는데 우리가 기억 못 하는걸 수도 있어”라는 표현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미래’라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러한 때를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났던 일처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간의 순서를 교란하는 상상의 말들은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에 착란을 일으키며 균열이 일어나도록 한다. 불가역적인 흐름으로 생각되던 닫힌 시간의 흐름에 틈을 냄으로써 시간 자체가 다양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길들을 여는 것이다. 이 길은 또한 그 말을 함께 나누는 이들로 하여금 관습적인 생각의 틀을 허물어 시간과 존재에 관한 새로운 인식과 그 관계 맺음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미래의 위는 아직 옛날이야/ 그 위는 상상이야”라는 아이의 말처럼, 지금 여기의 현실에 새로움을 불러들이는 관계 맺음과 그 생각을 일으키는 힘은 ‘상상’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상상하는 일에서 중요한 움직임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억 못 하는” 일이다. 「그 위는 상상이야」 시의 목소리는 아이의 말을 옮기기에 앞서 그에 대해 “아이는 지금 기억 못 하지만”이라 하고, 또 아이가 여섯 살 무렵에 한 말 가운데 등장하는 “우리가 기억 못하는걸 수도 있어”라는 말을 또 그대로 전한다. 아울러 시에서의 ‘나’ 역시 아이의 말에 감응한 자신에 대해 “난 빛의 몸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지금은 기억 못하지만,”이라 말하며 노래를 마무리한다. 새로운 상상을 하기 위해선 앞서 했던 상상들을 또한 잘 잊는 일이 중요하다. 앞서 했던 상상들을 ‘기억 못 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상상이 나아갈 길을 가로 막지 못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망각의 움직임은 단순히 그 기억의 소멸을 이르지 않는다. 망각은 앞서 이루었던 것들을 잠재적 층위로 옮겨 놓으며 도래할 상상을 위한 힘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정재학 시의 목소리는 “그 위는 상상이야”라는 아이의 말과 함께 그 상상을 태동케 하는 “지금은 기억 못하지만”이라는 상태를 긍정한다.

  충분히 잘 잊을 수 있을 때에야 잘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을 유감없이 표현할 때 우리는 현실에 은폐되어 있던 새로운 관계의 진실들과 만나게 된다. 모르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시간과 시야는 새롭게 확장된다. 그러니 앞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자. 그렇다, 잘 잊는 일이 중요하다. 잘 잊는 일과 함께 우리는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모르는 것과의 만남을 즐거운 것으로서 긍정할 수 있다. 그렇게 또한 지금 여기의 실존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모르는 것과 만난다는 사실이야 말로 문학이 약속하는 행복 가운데 하나이다. 때문에 정재학 시의 언어는 끊임없이 시 쓰기가 무엇인지 물으며 시를 쓸 것이다. 이룬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자리를 허물고 모르는 곳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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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지 생동하는 ‘것’들의 크레디트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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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김영삼 아름다운 헤테로토피아 ― 정택진, 『곳』, 문학들, 2025.

1. 정택진의 소설 『곳』은 기억의 심층에 박힌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을 소환하면서 시작된다. 청산도의 어느 낡은 집, 윗목 모서리에 걸린 등잔에는 ‘초꼬지불’이 졸고 있는 저녁이다. 대대로 가난했을 것이 분명하건만, 여느 때와 달리 걸게 차려진 밥상이 풍성한 밤이다. 밥상머리 앞에 한 꼬마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서 있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꼬마를 재촉하는 밤이다. “아들, 얼른 노래 한 자리 해 보니라.”(7쪽) 어른들의 재촉을 못 이기는 척 꼬마는 시시하고 젖내 나는 노래 대신 자랑스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가사를 선율에 싣는다. 특별할 것도 없는 노래건만, 그 순간만큼 이 가족과 청산도의 모든 존재들이 힘껏 숨죽여 귀 기울이던 시간이다. 어떤 언어로도 재현할 수 없는 그 시간의 온도를, 소설의 그 어느 장면에서도 다시는 쓰이지 않은 그 시간의 아련함을, 아마도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보존되었을 원형적 시간의 이미지를,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기록해 두었다. 꼬마는 노래의 강변에서 빠져나와 살며시 눈을 뜬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이다. 아마도 물이 찐 저 아랫동네 모랫벌에, 노을은 져 꼭두서니로 붉은 그 모래밭에, 호미로 금을 그어가며 캐내던 하얀 무명조개와, 소금을 넣으면 구멍을 솟구치던 맛조개와, 갯벌을 헤적여 캐내던 바지락과,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 가득 고이던 기다란 진줄과, 모래톱의 석양에 어우러졌던 이웃들과, 그리고 생각하면 다사롭고 아늑했던 옛날을 거닐고 있는 모양이다. 방 안의 풍경에 초꼬지불이 다숩다. (8~9쪽) 차라리 시에 더 가까운 인용문의 아름다운 풍경은 신화적이며 유토피아적이다.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가혹한 세계의 문법이 이 가족의 작은 평화를 무참히도 뭉개버린 후, 다시는 세계의 숨결이 이들 가족의 삶과 공명하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그러니까 어느 깊은 밤에 “검은 잠바 차림”(12쪽)의 사내들에게 아버지가 끌려가고, 독한 매질에 몸이 굳은 아버지를 위해 “예로부터 장독에는 똥물만한 게 없다”(19쪽)면서 구덕에 고인 액을 모아 화덕에 달이던 할머니의 허리가 굽어지고, 골병을 치료하기 위해 뱀과 지네를 찾아 온 산을 헤집던 꼬마와 그 동생을 사람들이 “뱀 성제”(25쪽)로 부르던 시간 이후로는,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보존되었을 것이 분명한 저 아련하고 그리운 시간들은 다시는 재현될 수 없었으므로 더더욱, 저 인용문의 풍경은 유토피아적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정택진의 『곳』이 재현하는 장소는 헤테로토피아적이다.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지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그 배치에 이의제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아버지의 신념이 세계의 문법에 의해 무참히도 깨져버렸던 장소, 그로 인해 모든 가족의 꿈이 조각나 버린 장소, 갖은 상처로 단단한 옹이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트라우마적 장소, 역사의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기억의 연대기가 피 흘리던 장소, 바다의 짠 내를 머금은 해풍의 농도보다 슬픈 이야기들의 밀도가 더 높았던 장소, 거짓의 유토피아를 구획하기 위해 사회의 외부로 배치된 헤테로토피아의 장소, 그 곳이 바로 정택진의 『곳』이다. 2. 마르트 로베르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을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아 ‘가족 소설’에서 소설의 기원을 규명했다. 어린 아이의 쾌락과 욕망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초자아와의 갈등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가족 소설’은 그 형식을 갖추어 간다. 이때 억압된 욕망은 스스로에게 ‘날조된’ 역사를 부여하면서 서사적으로 자아 형성 과정에 관여한다. 날조되는 서사는 현실원칙의 억압을 상징하는 현실의 부모를 가짜 부모로 격하시키고, 자신은 모종의 신적 존재의 자손으로 격상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아이는 진짜 부모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모험을 겪으며 세계의 문법과 갈등하면서 성장한다. 스스로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이 과정은 자기징벌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성장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대부분의 영웅서사가 그렇듯 이러한 서사의 마지막이 결국 귀환의 과정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행복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아이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이러한 시련과 극복의 서사가 바로 가족소설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루된 인간의 심층적 욕망과 심리적 동기들이 ‘가족 소설’의 형태로 승화되는 통과의례의 입구인 셈이다. 로베르에게 소설은 의식의 어두운 곳에 감추어진 그 날조된 역사를 교묘하게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가족소설의 연장이자 그에 대한 사회적 환기의 서사인 소설의 양식은 사회적 금기와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자유와 절대를 갈망하는 영혼의 모험 양식이기도 하다. 3. 장택진의 『곳』은 이러한 가족로맨스의 경로를 두 가지의 방식으로 비틀면서 실현한다. 첫 번째, 소설은 아버지의 처절한 실패 서사를 그의 아들의 언어로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이의 무의식적 욕망이 현실 부모를 부정하고 모험을 떠나면서 성장하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아이의 아버지가 세계와 반목하면서 거대한 괴물과 맞서는 서사로 변화시키는 구조로 변주되고 있다.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와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아버지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신 아버지가 세계와 대결하고 상처받으면서 쇠약해진 신체로 깨지고 부서진다. 그러니까 자기 유년의 기억을 소설의 양식으로 재현하는 작가 정택진의 언어는 자기 대신 아버지의 서사를 통해 아버지의 욕망과 그의 백일몽을 대리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무참히 깨지고 무기력하게 부서졌던 아버지의 모험 서사를 통해 이 불합리한 세계의 문법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정상적 성장 과정을 겪으면서 자아를 형성할 기회마저 박탈당함으로써 아이의 성장 서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대한민국의 폭력적 시대상을 고발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쓰인 ‘나’의 언어들은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서 폭력적으로 유년을 거세시켜버린 시대에 대한 고소장이기도 하다. 덧붙여 이 비틀어진 가족로맨스에서 부정되는 부모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나’에게서 정상적 성장과정을 앗아가 버린 시대 또는 국가라는 이름의 존재들이다. 4. 의도적으로 가족로맨스를 비트는 소설의 두 번째 방식은 원양어선을 타고 돌아 온 아버지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 군부독재의 문법과 불화했던 아버지는 원양어선 선원들의 불합리와 부패와도 불화했다. 결국 구금과 구타를 겪은 후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현실의 부모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모험의 세계로 이끄는 가족로맨스의 경로에 『곳』의 화자를 강제로 진입하게 한다. 마치 스스로를 업둥이의 저주에 내모는 오이디푸스처럼 『곳』의 ‘나’는 스스로를 모험의 경로로 이끈다. 아버지의 패배와 죽음을 겪은 ‘나’가 중학교 입학을 미루고 뱃사람이 되어 거친 세계의 문법과 부딪치는 서사는 힘이 없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기징벌과 아버지의 빈자리를 자신이 메우고자 하는 성장과정에 준한다. 물론 미처 덜 자란 아이에게 세계의 문법은 거칠고 차갑고 매섭고 가혹하다. 할머니의 눈귀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란 걸 나는 안다. 식구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특히나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있는 손자에 대한 짠한 마음도 거기에 보태어졌으리라.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딱히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슬픔은 온 곳에서 밀려와 나를 울게 했다. 나는 나만의 현실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 안 가고 배를 타고 있는 것이나, 얼떨결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발목이 잡혀버린 담배의 늪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엄니와 동생들을 둘러싼 것들은 끝내 나를 눈물짓게 했다. 그것들은 도저히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내 키 너머의 것들이었다. 마당에 팽개쳐져 짓밟히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이빨만 갈고 있었듯, 쇠기둥에 묶어 놓고 때리는 그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 빌기만 했듯, 세상에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선창 여기저기에 버려진 삼치대가리만큼이나 많았다. (120쪽) 아버지의 공백은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세상의 벽 높이로 체감되고, 불합리한 세계의 문법 앞에서 아직 여물지 못한 ‘나’의 신념과 육체는 무기력하고 허약하기만 하다. 얼떨결에 배우게 되어버린 담배와 배가 쉬는 중간간조 때 선배 선원들을 따라 간 색싯집 등과 같은 어른 흉내 또한 자신의 뒤를 파고들었던 어느 남성동성애자의 성폭력 앞에서 한 번도 저항하지 못했던 무기력함으로 무너져 버렸다. 무엇보다 이러한 무기력은 장소상실(placelessness)과 연관되어 있다. 배를 타고 오는 길에서 우연히 중학교에 진학한 동무들이나 여자애라도 보이면 시나브로 걸음을 늦추거나 길을 에돌아 시선을 피하던 장면들은 ‘나’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장소를 갖지 못한 존재, 자신이 속한 곳이나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존재, 머물러도 좋은 자리나 마땅히 점유할 위치를 가지지 못한 존재, 장소상실의 예외적 존재이다. 이러한 장소상실은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고, 다시 섬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원양어선을 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과도 연관되면서 이 가족들의 삶이 지속적으로 정상적 장소 바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의 장소에서 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은 근대적 자아가 경험한 근본적인 충격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시초축적의 과정에서 토지를 잃고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로 흡수되면서 장소를 상실한 농민들, 고향을 떠나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전락했던 1970년대 경제개발시대의 사람들처럼, ‘나’는 공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토대로서의 사적 영역을 상실한 정신적 외상의 경험자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맘껏 불러도 되는 가정 공간의 결여,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계획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배치 과정에서 제외된 채 다시 복습되는 누대의 가난,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 가혹하기 만한 세상의 문법, 이러한 사정들이 허락한 ‘나’의 장소는 정상 공간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유토피아 건설의 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자리일 뿐이다. 즉 위의 인용문은 행복했던 유년의 유토피아적 장소를 상실한 예외적 존재가 경험하는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사생아의 위치로 격하하는 방식으로 가족로맨스의 환상을 비틀고 있다. 5. 연이은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불합리함으로 가득한 세계와 마주하던 소설의 어둡고 무거운 문장들은 교회에서 종을 치는 ‘진만이형’을 만나면서부터 고난 극복의 서사로 전환된다. 섬에서 한두 명만 가는 대학까지 나왔지만 군대에서 전기고문을 당한 후, “팔십 된 노인처럼 지팡이를 짚으며 는지럭는지럭 걸어 다녔고, 말을 할 때면 입귀로 늘축하니 침”(195쪽)을 흘리는 ‘진만’ 또한 자기 장소를 상실한 예외적 존재에 해당한다. 그런 ‘진만’이 불편한 몸으로 사지를 비틀어 줄을 당기고 놓는 “처절한 몸부림”(198쪽)으로 종을 치는 장면은 ‘나’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의 장소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턱대며 교회에 들어서서 보니 그 형이 종을 치고 있다. 그런데 줄을 당기고 놓는 폼이 좀 특이하다. 어지간한 국민학생도 두 손으로 줄을 당겼다 놓을 수 있고, 어른들은 한 손으로도 너끈히 종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형은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형은 온몸으로 종을 치고 있었다. 몸에 줄을 감아 오른쪽으로 비틀며 당기면 종이 울렸고, 몸을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줄을 주면 종은 또 소리를 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더니,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틀며 똑같은 동작을 계속했다.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힘겨운 걸음마처럼, 는질는질 흐르는 침 사이로 간신하게 만들어내는 말의 마디처럼, 그 형은 몸 전체를 틀었다 바루며 종을 치는 것이다. (197~198쪽) 진만의 불편한 신체와 어눌한 말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가 경험한 시대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두 인물 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편한 몸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진만의 행위는 ‘나’의 무기력과는 대비된다. 따라서 소설에서 ‘진만’의 존재는 시대적 외상에 노출된 존재라 할지라도 사건 이후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재정립하느냐에 따라 삶의 복원가능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복원의 장치이다. 즉 ‘나’와 ‘진만’의 만남은 한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마주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와 무화되고 서로 스며들며 변화하는 변곡점인 셈이다. 특히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그렇게 치요?”라는 질문에 ‘진만’이 “그,라,믄,너,같,으,믄,치,다,안,치,다,그,라,것,니?”(200쪽)라고 대답했을 때, 소설은 명백한 복원의 방향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나’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말들(남이 훔칠 수 없는 자신만의 유산, 복수심보다 강한 집념, 반드시 지켜야할 어떤 신념을 가지라는)과도 맞닿아 있었다. 6. 변화의 증거로 세 가지만 언급해 보자. 하나는 중학교에서 발생한 불합리한 사건(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의 불행한 죽음)에 대해 눈 감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응징을 한 것이다. 이는 ‘나’가 이제 덜 자란 아이에서 세계의 문법과 당당하게 맞서는 소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자신만의 집념과 노력으로 섬을 떠나 육지의 고등학교로 국가장학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소년이 진학한 그 학교가 아버지의 죽음을 야기했던 박정희가 세운 학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섬을 떠나 육지로 모험을 떠나는 한 평범한 영웅이 자신만의 세계와 삶의 궤도를 만드는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가족로맨스의 진정한 목적,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회복이라는 진정한 목적으로 소설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증거는 다음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소년은 몇 걸음을 더 걷는다. 마음속에 그런 꿈을 꾸고 있지만 그 길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과연 그런 꿈을 꾸어도 되는 것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뭐가 되고 싶냐니까?” 돌멩이 몇 개가 발부리에 채여도 대답이 없자 소녀가 재촉한다. “소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원양에서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사다주었던 『노틀담의 곱추』나 『장발장』이나 『죄와 벌』 같은 이야기를 쓴 사람들의 이름 앞에, 개울가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로 어우러지고, 몇 날을 기다려도 소녀가 안 나타나 소년은 애가 타고, 그러다가 소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누운 채 눈물을 흘리는 소년과 소녀의 슬픈 이야기를 쓴 사람의 이름 앞에, 분명히 ‘소설가’라고 붙어 있었다. 소년은 정말 그 이름이 되고 싶었다. (299쪽) 인용문의 문장들은 아버지의 꿈과 소년의 꿈이 다시 만나 공명하면서 소설의 초반에 배치된 행복했던 어느 밤의 시간들을 다시 복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상처로 무너진 한 소년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기어이 이야기꾼이 되어, 시대의 폭력성으로 인해 무너졌던 누군가의 꿈을 결국은 회복할 것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고가 현실로 실현되면서, 슬픔의 언어가 가득했던 장소는 언어를 초과하는 기억의 밀도가 가득 채워진 이야기의 장소가 되었다. 그 장소가 바로 정택진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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