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청색종이 2024년 봄호(제11호)
서로가 서로와 겹치는 자리를 발견하는 일 — 이종민, 민구, 강혜빈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공동의 자리에 관하여
— 이종민, 민구, 강혜빈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공동의 자리에 관하여
시 한 편을 읽는 일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이종민의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이다.
바다를 잘 그리는 손은 길고 가늘다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은 걸음이 빨라서 나와 걸을 때면 가슴속에 하늘 천 자를 크게 두번 그리며 걸었을 것이다 겨울을 기다리는 일이 비를 피하는 일보다 몸이 더 젖고 선뜻 우산을 함께 쓰고 싶은 사람과는 오이냉국 한그릇으로 오래 더위를 달랠 수 있다 그럴 때 등골에 스미는 한기에는 오뉴월에 잡은 손으로 모여들던 웃음이 있다 조곤조곤한 말투가 탐나서 읽은 책은 두껍고 제목이 길었고 길을 찾으러 들어간 숲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났다 숲을 나와서야 그곳에 사시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부르는 내 이름에는 뜻이 없고 소리만 있었다
— 이종민,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창비, 2021) 전문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시의 목소리는 “바다를 잘 그리는 손”의 모양을 묘사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이어서 그 손이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는” 움직임을 닮은, ‘그리는 사람’의 ‘나’와 함께 걷는 모습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모습을 가리켜 “가슴속에 하늘 천 자를 크게 두번 거리며 걸었을 것”이라 말한다. 이 시의 제목에는 “문성식,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80cm, 2006.”이라는 주석이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미술 작품의 작가와 제작 형식에 관한 정보를 제시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렇다, 이는 시의 제목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을 화가 문성식의 작품 이름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히기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종민의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는 그림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와의 만남으로부터 비롯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측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문성식의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는, 시에서 노래하는 바다의 이미지라든가 그에 잇따르는 장면들이 직접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는 그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게다가 바다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곤 하는 ‘파란색’과 같은 색채를 그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에서 ‘바다를 잘 그리는 손’에 관한 이야기를, 또 그 손에 의해 그려지는 물이랑과 갈매기의 비슷한 모습에 관해 말하는 목소리와 만나게 된다. 이와 같은 정보들만 나열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어째서 나무를 그린 작품과의 만남에서 시인이 바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의 목소리는 그림과의 만남에서 비롯한 바다에 관한 이야기들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은, 바로 그 만남에서 기계적 인과 같은 것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독특한 움직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독특한 움직임에 시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주제에 곧바로 진입하기 전에,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바다 자체에 관해 직접 이야기하는 대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에서의 ‘나’가 전하는 ‘바다’의 모습은, 그이가 실재로서 마주하거나 현실에서 경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림과의 만남에서 떠오른 일종의 상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에는, “걸었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나’의 추측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추측이란 미루어 짐작하는 막연한 판단을 이른다. 즉 뚜렷하지 못하고 어렴풋한 것이기에 또한 불확실한 동시에 한 가지 모습으로 획정할 수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경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판단은 때때로 인간의 인식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인지과정은 연속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들을 분절하고 틀을 씌움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떤 대상 하나를 명확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이 분명한 경계로 둘러싸임으로써 다른 무엇과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종민의 시에 제시된 것과 같은 일종의 모호한 말하기의 방식은 때때로 서로를 구분되도록 하는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서로 겹치는 곳을 발견하고, 떨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을 서로 포개어 보도록 하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상상을 표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세계의 실상 가운데 하나로 하여금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한다.
시를 다시 반복하여 살펴보자.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는 시인이 나무를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쓴 시이다. 그렇게 쓰인 시에서, 노래하는 ‘나’는 “바다를 잘 그리는 손”을 떠올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 함께 걸을 때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듯 “가슴속에 하늘 천 자를 크게 두번 그리며 걸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상상의 움직임은 일견 시인의 시쓰기 가운데 이루어지는 자율적이고 미학적인 움직임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자율적’이라는 말로 가리킨 움직임은, 그 일이 다른 무엇과 구분되어 고립된 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그렇게 나타난 존재의 고유함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른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난 고유한 존재는 또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라는 작품의 자율성과 그것을 감상하는 ‘나’라는 존재의 자율성이 만나 이루어진 예술의 장에서 서로의 힘이 교통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자율성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자신과는 다른 무엇의 침범을 가로막는 모습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고유한 무언가로 표현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나타남은 언제나, 그 존재 자신과는 다른 타자들이 이루어낸 만남으로부터 비롯한다. 나아가 스스로를 고유한 무언가로 표현하도록 하는 움직임 역시 그 자신과는 다른 타자와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라는 객체가 회화 작품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상하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도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자율성을 표현하기 위해선 해당 작품을 독자가 읽고 있어야 한다. 이는 비단 이 글에서 다루는 작품들만이 아니라, 이 글의 존재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누군가 감상하거나 읽지 않는다고 하여, 혹은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존재들이 없는 것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행사하는 힘은 자신과 다른 존재와 만나지 않는 이상 잠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다, 자율성이라는 것은 타율성 즉 타자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 타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이종민의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우리는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라는 회화 작품의 자율성과 만날 때 이루어지는 독특한 미학적 연쇄과정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미학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단순히 어떤 감성적인 기호를 발산하고 있음을 이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는 또한 그렇게 발산된 기호들이 그 기호와 만난 이의 정서와 함께 변용됨으로써 스스로의 모습과 다르게 되어가는 과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는, 그림과 만나 떠올리게 된 바다의 모습이 그림 그리는 사람과 함께 걷는 이야기가 되고, 이 이야기는 곧바로 “겨울을 기다리는 일이 비를 피하는 일보다 몸이 더 젖는” 상황으로 바뀐다. 또한 ‘젖는’이라는 말로 불러일으켜진 감각은 “우산을 쓰고 싶은 사람과는 오이냉국 한그릇으로 오래 더위를 달랠 수 있다”라는 특별한 경험의 나눔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며 이어진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시의 목소리가 전하는 풍경들은, 이렇듯 그림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와의 만남에서 비롯한 정서의 나눔과 변용, 그리고 그 감각적 이미지가 이웃해 있는 곳으로 흘러가며 스스로와 달라지는 과정을 표현한다. 우리는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를 함께 읽는 과정에서, 시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았던, 마치 살아있는 듯한 바다의 모습과 그 감각이 전하는 다양한 풍경들의 정서와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만남이 이루어내는 독특한 문학의 공간에 참여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만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변화를 일으키며 달라진다. 나아가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며 계속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간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변화의 움직임은 단순히 작품과 독자라는 두 항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시의 문장은 시인 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올 터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우리가 작품이라 부르는 것이 나타나는 과정에는 한 인격 혹은 주체가 행사하는 능력의 실행만이 아니라, 그러한 움직임을 이행할 수 있게끔 한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라 여겨지는 것들과의 수많은 만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여러 영향의 얽힘이 또한 함께한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 ‘사람’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시에 제시된 다른 이미지나 요소들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이거나 “선뜻 우산을 함께 쓰고 싶은 사람”이라며 인간 아닌 것들과 접속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가 “부르는 내 이름에는 뜻이 없고 소리만 있었다”라고 하는 말처럼, 인격적인 성격보다는 물질성이 부각된다. 여기서 강조된 ‘소리’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물질성은, 앞서 “숲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났다”라는 감각적 이미지를 받아 이루어진 반복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장의 배열은, 인간이 인간과는 다른 무엇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으면 또한 함께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와 다른 하나의 연결을,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달라짐의 과정을 기술하는 까닭은, ‘시’가 수행하는 독특한 나눔의 과정과 연대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녹색’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온 일련의 생태적 사유 흐름이 ‘육지의 상상력’으로 머무름으로써, 다른 존재자들과의 조화를 인간 중심에서 꾀할 수밖에 없었던 태도에 대한 반성과 그 대안으로 제안된 ‘지구환경과 블루 인문학’이라는 것을 요청받은 데(이 글은 계간 『청색종이』 2024년 봄호의 기획특집 ‘지구환경과 블루인문학’에 싣기 위해 쓰였다)에서 생각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지구환경’이라는 것에 대해 그동안 반복해 논의되어온 방식을, 이를테면 기후위기라든가 탈성장 등을 살피는 생태학적 접근법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과 조화라는 길 역시 모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방식은 여전히 인간과 자연을 서로의 대립물로써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틀에 기대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간 아닌 것들을 살피는 것 역시 이 글에서는 수행하지 않는다. 한편, 이 글이 실리게 될 코너의 주제어이자 ‘녹색’에 대한 대항 개념으로 제시된 ‘블루’라는 낱말 역시 인간중심적인 시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색’이라든가 ‘푸름’이라는 색채의 상징 역시 ‘녹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공통감을 전제하며,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의 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인간의 수준에서만 살펴보더라도 ‘청색’이라는 말로 바다라든가 지구와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은 해당 색채를 지각할 수 있는 이들에 한정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인간적인 조건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에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스스로가 완벽하게 비인간에 관해 사유하고 또 표현한다고 말하는 일은 기만적인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녹색’이라는 이름으로 사유되어온 일련의 흐름에 대한 반성으로, 인간과 자연을 서로 대립된 개념으로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시선에 이르고자 시도하는 일은 중요해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아온 일들로 인해 은폐되거나 망각된, 혹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존재에 관해 생각하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관해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을 서로 분리되고 대립해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사유하는 일과는 다른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일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다른 자리에 이르는 움직임을 연습하는 일, 이는 기성의 척도 및 사회적인 선과 같은 규율을 반복적으로 신체에 각인함으로써 능력을 함양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즉 인간중심적인 시선의 틀과 능력을 덜어내는 움직임을 되풀이하며 시도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습에 반(反)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보는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반-연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연습’의 예를 안태운의 시 「시퀀스를 연습하세요」(『산책하는 자의 기쁨』, 문학과지성사, 2020)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해당 작품에 관해서는 졸고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딩아돌하』 2023년 봄호)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살피지는 않겠다.] 시를 쓰는 일, 그리고 시를 읽는 일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반-연습을 수행하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 그리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는 다른 무엇으로 되어보는 일을 반복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무언가가 되어보는 연습을, 즉 반-연습의 한 예를 민구의 시 「마리모」에서 만나보자.
마리모가 말했다// 슬플 땐 슬픔이 약이라지만/ 오늘은 맛있는 걸 먹자// 식사가 끝나면 네가 잠들 때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마리모는 작지만 또렷하게/ 자기의 탄생 배경과 좋아하는 온도/ 번식 방법과 물갈이 주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물속에 잠긴 기분이 들었지만/ 그가 일 년에 얼마나 성장하는지/ 홋카이도 호수가 사진과 어떻게 다른지 또한 알 수 있었다// 마리모는 말했다/ 내가 물에 뜨면 소원을 빌어/ 그는 그것이 마리모 세계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라고 했다// 나는 너희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상술이라고 반박하려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초록 생물이 귀여워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정말 백 년을 살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만약 네가 백 년 동안 살아 있다면/ 수조를 준비해야겠지// 그땐 이 방이 수조 속에 들어가서/ 모형 풍차처럼 조그만 기포를 만들며/ 내가 너의 마리모가 되겠지// 그게 마음이 들었다
— 민구, 「마리모」(『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 2023) 전문
위에 인용한 시의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마리모는 일본 홋카이도의 아칸 호수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공 모양으로 뭉쳐 자라는 담수성 녹조류의 일종이다. 한자 표기로는 ‘구조(毬藻)’라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 모양의 마름(조류)’라는 뜻이다. 일종의 파래와 같은 수초인 마리모가 시에서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일에서 「마리모」의 노래가 시작한다. 그 건네는 말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듯, ‘나’에게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난 듯하다. 그런 ‘나’에게 마리모는 “오늘은 맛있는 걸 먹자”며 따뜻한 말을 건네고 또 “네가 잠들 때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만 본다면, 마치 마리모라는 식물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관습적인 문학 독법에 따른다면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을 일컬어 의인법이라 할 터이지만, 시에 나타나는 마리모의 모습이나 행동 등을 사물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수사법과 온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 마리모가 말을 건네는 장면을 전함으로써 시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바는, 인간과 비인간의 대립 구조를 허물고 둘 사이에 자리해 있으리라 여겨지는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일을 시도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시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대립 구도를 허무는 일이 둘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 차이 자체를 지워서도 안 될 것이다.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개체로서 저마다의 자율성에 따라 움직이고 또 그래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물에 뜨면 소원을 빌어”라고 마리모가 건네는 말에 “나는 너희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상술이라고 반박하려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초록 생물이 귀여워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라고 하는 대목이 바로 그 한 예이다. 마리모가 수면으로 떠오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풍문이 있다. 어쩌면 ‘나’의 생각처럼 소원을 빌라는 마리모의 말은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상술”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와 같은 생각은 ‘나’에게 말을 건네며 자율성을 지닌 모습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마리모의 실존적 성격이 ‘상품’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문제 하나는 마리모가 상품이라고 하여 존재론적으로 인간 혹은 다른 자연물보다 낮은 위계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고파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이 시에서는 그와 같은 점이 그에 대해 마음껏 처분을 내릴 수 있음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에서 마리모는 ‘나’에게 있어 돌봄의 대상이자, 또한 나를 돌보는 행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떠받들며 함께하는 흐름에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때문에 시의 말미에 제시된 바와 같이 ‘나’와 마리모의 관계와 환경이 역전되는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내가 너의 마리모가 되겠지/ 그게 마음이 들었다”라며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마리모가 ‘나’에게 따스한 말을 건넨 것처럼 그때는 ‘나’가 마리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될 터이니 말이다. 이렇듯 ‘나’와 마리모는 단순히 인간과 인간 아닌 것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져 있다.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역할을 대신 떠맡는 일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은 상상의 영역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현실의 우리를 비롯해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은, 민구의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 「미래」에서 “씨를 뿌리면 십 년 뒤에 거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는데/ 당장 내일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발가락만 꼬물거리는데”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가 보이는 태도와 같이 당장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상한다는 것, 이러한 일은 주어진 현실의 조건과는 다른 관점에 이르도록 하는 첩경이자 타자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통로를 연다. “먄약 네가 백년 동안 살아 있다면/ 수조를 준비해야겠지// 그땐 이 방이 수조 속에 들어가서/ 모형풍차처럼 조그만 기포를 만들며”라는 시간과 상황에 참여하는 일은 상상의 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시에서의 ‘나’는 상상의 힘과 함께 ‘마리모’가 되는 연습으로써,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이를 수 없었던 곳에 도달하고자 시도한다.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인간과는 다른 관점에서 상상해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상상은 단지 공상적인 것을 머릿속에서 그리는 활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와 함께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이로 하여금 주변과 맺는 관계에 대한 태도를 그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도록 이끈다. 시는 그와 같은 반-연습을 이행하는 훌륭한 형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연습을 이행하는 또 다른 사례를 우리는 강혜빈의 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에서 만날 수 있다.
[……]//3D 프린터는 빠르고 정확한 피자를 만들 수 있다는데/ 어쩌면 기쁨이나 슬픔도 자세하게 조립할 수 있을까//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버리게 되었어도/ 미래의 토마토만은 변질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마음은 얼려두는 게 좋아/ 빛의 속도로 달려 나가서/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면// 원래는 원래를 지키려 하고/ 새로움은 새로움을 밀고 나가려 한다면// 머지않아 종이 책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 그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것에 특화된/ 어떤 종이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납작한 마음이 두꺼운 마음으로 변모할 때/ 진짜 토마토와 가짜 토마토는 차츰 비슷해지고// 지구는 지금도,/ 우리의 발바닥을 밀어내는 중이다// 나는 밀어냄의 반동으로/ 무게를 갖고 싶어진다// 토마토 박스로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삶보다 근사하다면// 나는 기꺼이/ 덩그러니
— 강혜빈,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미래는 허밍을 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부분
강혜빈의 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는, 보낸 사람을 알 수 없는 토마토 한 상자가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걸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시의 제목에는 주석으로 신문 칼럼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는데, 해당 기사의 제목 역시 시의 제목과 동일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이다. 인용된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당도 8브릭스(brix)를 기준으로 그 이상을 ‘대저 짭짤이 토마토’ 그 이하는 ‘대저 토마토’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것, 그리고 “시중에 가짜 대저 토마토가 너무나 많다”(문정훈,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 《한국일보》 2019년 5월 10일, 29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런데 주석에 인용된 이러한 문구를 발견하는 순간 그 내용을 읽지 않았더라면 생각해보지 않았을 물음, ‘시에 등장하는 토마토는 진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일까’와 같은 생각을 잠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본문에 ‘대저 짭짤이 토마토’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듯, 그 진위여부를 생각하는 일은 무용해 보인다.
“3D 프린터는 빠르고 정확한 피자를 만들 수 있다는데/ 어쩌면 기쁨이나 슬픔도 자세하게 조립할 수 있을까”와 같은 시의 물음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보다는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 혹은 마음을 보다 잘 살피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3D 프린터’라는 인공물로 물질적인 것과는 대척점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 혹은 마음을 “자세하게 조립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태도에는 이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릿하거나 지워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시의 목소리가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까닭은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버리게 되었”는데 그에 반해 “미래의 토마토만은 변질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에 이른 어떤 발견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친구의 마음이 예전과 다르게 변해버린 모습을 마치 감자에 싹이 난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 일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눈에 보이는 식물의 모습으로 비유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서로 별개의 것이라 여겨지던 존재자 간의 경계를 허무는 미학적인 움직임의 이행으로 이어진다.
한편, 서로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보이던 존재자들이 각자를 가두고 있다고 여겨지던 경계를 허물고 넘는 일은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에서 ‘종이’라는 것이 지닌 의미와 물성으로 종횡무진하며 이루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을 시에서는 이미 “토마토 한 박스”라는 시어와 “프린터”라는 시어 등으로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면”이라는 대목에서 그 외형에 빗댄 비유로 등장했던 것이, “머지않아 종이 책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 그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될 거라고 대답했다”라는 대화 가운데에서는 어떤 끝(대화에 제시된 상황만이 아니라 그러한 말을 나누는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의 종언을 이르는)에 대한 결정적인 장치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시에 산세리프 이탤릭체로 제사처럼 씌어진 “마음은 열 번 이상 접을 수 없다는 실험 결과로,/ 더 평평하고 얇은 마음만이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됩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접다’라는 말이 ‘거두다’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종이의 물성을 또한 끌어당기며 ‘꺾어서 겹치다’라는 의미로도 겹쳐서 나타난다. 이렇게 잇따르는 과정과 함께 시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어떤 종이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라고 하며 ‘나’와 ‘종이’라는 존재를 포개어 놓는다. 시에서 노래하는 이로 하여금 이와 같은 생각에 이르도록 한 계기는 아마도 가깝게 여겼던 누군가와 서로의 생각이 달라짐으로 인해 일어난 말다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경험에서 시에서 노래하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것에 특화된” 존재라 여기게 되었을 터이다. 아울러 종이를 접듯 상대에 대한 마음을 접는 과정에서 ‘종이’와 ‘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하기에 이르렀을 터이다.
‘나’는 항상 같을 것이라 여겼던 마음의 변화를 헤아리는 상황에 놓이며,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의 모습과 그 ‘미래’로 도달하게 된 지금 사이의 괴리 혹은 간극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가 반드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지금 이루어지는 일들의 자취가 누적됨으로써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나타나지 않게 되더라도 그와 같은 일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그려봄으로써 현재의 조건을 보다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한 일이다. 이처럼 변하려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시간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시에서의 ‘나’가 마음을 접는 일은 상대에 대한 감정을 거두는 일에서 토마토를 담는 상자처럼 자신과 다름을 담아내는 종이접기와 같은 움직임으로 변모한다.
“납작한 마음이 두꺼운 마음으로 변모”하는 그때 “진짜 토마토와 가짜 토마토는 차츰 비슷해”질 것이다. 하나와 다른 하나를, 그리고 진짜와 가짜라는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의 희미하게 만들며 서로가 서로에게 겹쳐질 것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겹치는 자리에서 개체 간의 분리를 뛰어넘어 저마다의 존재를 서로 나누는 소통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원래’ 변치 않으려는 힘과 ‘새로움’이라는 변화하려는 힘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사랑’과 ‘미움’을 서로 넘나들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접는 일은 이제 토마토를 담은 상자와 같이 ‘나’와 다름을, 그리고 ‘나’를 이루는 다름을 함께 담을 수 있는 용기처럼 “두꺼운 마음”이 되어간다.
미래를 지금보다 더 나아지도록 하는 일은, 그리고 그러한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와 서로의 존재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창출하는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구는 지금도,/ 우리의 발바닥을 밀어내는 중이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구 궤도 운동에 떠밀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선 또한 그렇게 발바닥이 지구와 맞닿아 소통하는 움직임이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른다. 그리고 시의 ‘나’는 그러한 상호교통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밀어냄의 반동으로/ 무게를 갖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무게를 갖는다는 것, 이는 또한 구체적인 실감을 갖는 것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바람인 동시에 그러한 실감을 통해 당신과, 그리고 타자와 만나 서로 소통하는 장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구체적인 실감으로 존재하는 일은 반드시 ‘인간’과 같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어도 무방할 것이다. 토마토 박스와 같이 ‘다름’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면, “토마토 박스로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삶보다 근사하다면”이라는 생각에 시의 목소리는 “나는 기꺼이/ 덩그러니”라고 말한다. 이 발화는 술어로 말을 맺지 않고 그 뒤를 침묵으로 남겨둔다. 이와 같은 말하기가 향하는 길이 어느 곳으로 이어지는 지는 쉽게 획정할 수 없으나, 그 길은 아마도 ‘나’와 ‘다름’ 혹은 ‘타자’를 모두 긍정할 수 있는 방향일 것 같다. 그와 같은 방향에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가,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자리해 있을 것이다.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에 나타나는 미래를 탐색하는 움직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모습은, 바로 시의 목소리가 인간과 비인간을 특별히 구분 짓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라 여기는 것들이 서로 소통가능하고 호환 가능한 존재로 시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강혜빈의 시에는 유기물과 무기물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이항 대립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와 넘나들고 또 뒤섞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생명체, 나아가 유기물이라 이르는 것들은 모두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제 안에 포함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오히려 시의 목소리를 통해 발화되는 모습이야 말로 이 세계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그동안 인간들에게 주도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했던 인본주의적 관점은 세상을 편향되게 바라보도록 하는 예외적인 동시에 공상적인 태도일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에 인간의 행위로 인해 어떤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면, 이러한 태도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비롯되었고 또 누적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시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를 넘나드는 상황을 드러내는 일은, 단순히 시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고 그에 담긴 이념을 제시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나아가 한 시인이 어떤 특정한 의도로 시를 썼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의도가 무엇인지는 시를 읽는 일에 있어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모습들과 우리가 만날 때, 인간적인 것이라 여겼던 것 안에 비인간적인 것이라 여겼던 타자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그 반대라 생각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마찬가지로 나와 타자를 이루는 경계가 고정된 것으로 견고하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한 드러내기도 한다. 인간은 인간 아닌 것들의 영향을 받으며 또 그러한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인간 아닌 것이라 여겨지는 수많은 존재자들에도 역시 인간에 의한 영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오늘날을 이른바 ‘인류세’라 부르는 까닭은, 단순히 이 지구에 인간이 끼친 영향력이 거대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인류세’라는 말에는 인간이 일으켜왔던 일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이른바 ‘비인간’으로 여기던 존재자들 역시 모두가 서로 함께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말은 또한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든 상호 소통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변화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그에 관해 탐색하고 사유하도록 요청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나아가 생명과 생명 아닌 것들이 대립적인 것으로 분리되고 고립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그리고 모두 함께 서로 겹치는 자리에 관해 살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거대한 사슬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고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그에 관한 완전한 앎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 관한 절대적인 지식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깨뜨려 돌멩이로 만들고, 그 돌멩이를 깨뜨려 모래로 만들고, 그 모래를 분해하여 분자로, 다시 원자로…… 끝없이 나누더라도 우리는 그 안을 볼 수 없다. 역으로 그 바위가 속한 세계의 전체를 보는 일 역시 불가능 하듯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인간이 지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일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과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실천해야 모두가 함께 더 나은 미래에 이르게 되는지 역시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일 역시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 여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물음을 던지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에 물음을 던지고 고정된 것이라 여기는 것에 다른 모습은 없는지 헤아려보는 일,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상상하고 또 시도해보는 일을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다른 무엇과 겹치는 자리를, 하나와 다른 하나가 공생적인 관계를 맺는 사슬의 흐름을 발견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에 관해 헤아려보며 지금과는 다른 무엇에 함께 이르는 일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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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빗소리」, 부분. “사랑”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사물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라 호명되는 사물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찰나의 사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같은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화자가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려져/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화자가 세상에서 버려져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은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실패를 단지 실패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시인의 언어를 통해 그 잔여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비로소 갖게 되며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후에도 부서지고 기울고 유예되며 미끄러지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은 사물들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잠시나마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사물들의 형상은 이제 견딤의 모습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기억을 놓지 않고자 분투하는 ‘혼자’들로 거듭난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를 읽으며 전달받는 쓸쓸함과 고독, 슬픔의 정서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며, 늘 전부를 초과하는 감정적 잔여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약 없고 대가 없는 헌신이 바로 그 쓸쓸함과 고독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 창문들은 어떻게 저렇게 환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나는 이 물병은 무엇일까 구겨진 휴지 같은 이 그림자는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2 찬미 받으소서, 먼지들은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은 빈 소주병과 노숙의 새까만 발들은 감겨진 눈의 눈물,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제 몸 하나로 저의 가난과 추위를 지키는 것들은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3 밥냄새, 살냄새 좇아왔습니다 저희 피가 이끄는 대로, 저희가 저희를 잊고 깨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는 진흙처럼 목이 쉬었고 어느 하루도 돌을 가슴에 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 「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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