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시가 되는 것 : 김동균, 『재재소소』(아침달, 2024) 차호지, 『시작법』(문학과지성사, 2024)
김동균의 첫 시집 『재재소소』에 수록된 「이조악기」는 어떤 진술이 시로 발생하는 순간을 체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오보에 다모레는 오보에와 잉글리쉬 호른 사이에 있는 악기다. 모양은 잉글리쉬 호른에 가깝다”라는 두 문장으로 시가 열릴 때, 이것은 “백과사전에서 찾은 사실”처럼 지극히 단순한 진술로 읽힌다. 하지만 뒤이어 “마리는 오보에 다모레를 불고 나는 잼을 바른다”는 문장이 따라오므로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시라는 사실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알아차리게 된다.
오보에 다모레는 오보에와 잉글리쉬 호른 사이에 있는 악기다. 모양은 잉글리쉬 호른에 가깝다. 마리는 오보에 다모레를 불고 나는 잼을 바른다. 마리에겐 여러 개의 오보에족 악기가 있고 나는 잼을 바른다. 마리에겐 여러 개의 오보에족 악기가 있고 내게는 식빵이 많다. 상하기 전에 잼을 발라서 마리도 주고 마리가 먹을 때 같이 먹을 생각이다. 마리는 오보에 다모레를 토요일마다 꾸준히 분다. 오보에 다모레는 이탈리아 말로 ‘사랑의 오보에’라는 뜻이다. 악보에 적힌 것보다 낮은 소리를 내는 이조악기다. 백과사전에서 찾은 사실이다. 뚜껑을 열어 놓으면 천천히 위에서부터 굳어 버리는 잼처럼 오보에 다모레도 불지 않으면 실력이 준다. 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오랜만에 마리가 오보에
다모레를 부는 날이면, 높은 ‘솔’에서 소리가 샜다. 그럴 때마다 마리는 한쪽 구석에 악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다음 내 얼굴을 꼭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몹시 기분이 상한 마리 특유의 표정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잼을 발라 건네도 먹지 않는다. 마리는 오보에 다모레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 마리의 입술 아래서 오보에 다모레는 반짝거린다. 식빵 위에 올라간 잼도 반짝거린다. 이것 말고는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가 가진 공통점을 더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무도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의 공통점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잼을 누가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겠다. 잼을 바른다. 다 쓸 때쯤이면 투명하고 둥근 바닥이 드러난다.
─「이조악기」 전문
좋고 싫음을 떠나 무엇이, 언제, 어떻게 시가 되는가에 대한 감각이 설명을 앞질러 제공되는 것이다. 단순히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 사이의 격차가 이 진술을 시로 만드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이 시의 화자는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가 가진 공통점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시를 읽는 동안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백과사전에서 찾은 사실” 같은 진술과 “마리는 오보에 다모레를 불고 나는 잼을 바른다”라는 문장이 결합하며 발생하는 묘한 시성의 정체와 이유이다.
그러나 『재재소소』의 시성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느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어떤 이유”와 “또 다른 어떤 이유”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유”가 서로 구분되며, 그중에서 유일하게 유효한 하나의 이유가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수많은 경우의 이유는 “정숙한 열람실”이라는 시의 공간에서 동일하게 “주의를 받”으며 차이가 삭제된다. “어떤 남다른 이유”(「이유가 있었다」)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각자의 정체성이 뒤섞이며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거나 더 많은 이유로 불어난다. 그렇다면 홀로 유효한 이유를 탐색하는 일을 그만두고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시가 시로 발생하는 순간을 느끼며 이 진술들을 따라가는 것이 『재재소소』를 읽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다시 「이조악기」로 돌아와보자면 ‘마리’와 ‘나’는 “상하기 전에 잼을 발라서” 많은 식빵을 해치울 수 있을 만큼 자주 보는 사이이며, 마리가 “오보에 다모레를 토요일마다 꾸준히 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오래된 사이처럼 보인다. ‘오보에 다모레’가 “악보에 적힌 것보다 낮은 소리를 내는 이조악기”라는 사실은 이 시에서 사물이 자신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와도 같다. 악보에 표기된 음을 그대로 연주하더라도 ‘오보에 다모레’는 그것과 다른 음을 낼 수밖에 없다. ‘마리’가 ‘이조악기’를 연주하는 이상 결과적으로 악보의 지시와 실제 연주되는 음 사이에는 얼마간 차이가 발생한다. ‘마리’가 임의로 옥타브를 바꾸어 연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일뿐더러 시 속에서 ‘마리’의 연주를 듣는 ‘나’ 역시 알 수 없는 진실이다. 김동균이 『재재소소』에서 수행하는 진술은 악보에 표기된 음을 그대로 연주해도 그것과 다른 음이 날 수밖에 없이 설계된 ‘이조악기’ 같은 것이어서, 단순 기술에 가까운 진술로 엮인 한 편의 시가 시로 읽히게 되는 자연적 시성을 암시한다.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가 가진 공통점을” 찾으려는 화자가 발견한 것은 고작해야 “마리의 입술 아래서 오보에 다모레는 반짝거”리고 “식빵 위에 올라간 잼도 반짝거린다”는 사실이다. 시적 사유와 연상이 시작되는 첫 지점에 놓일 법한 이 기본적인 발견은 「이조악기」의 후반부에 놓인다. 그러나 이 시의 결과물이라고 부를 법한 시적인 순간의 발생은 “아무도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의 공통점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는 진술에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진술이 합쳐지며 이루어지기도 한다. 아무도 부탁한 적이 없기에 외부적 당위가 없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어떤 이유’로 “오보에 다모레 연주와 잼 바르기가 가진 공통점을” 찾아야 할 내부적 당위도 없는 상태에서 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 쓸 때쯤이면 투명하고 둥근 바닥이 드러난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다 쓴 것’은 식빵에 바른 잼일 수도, 시인이 써낸 한 편의 시일 수도 있다. 이 시의 끝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럴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잼을 (그리고 시를) ‘다 썼을 때’ 마땅히 거기에서 드러나야 하는 “투명하고 둥근 바닥이”다. 이변이 없는 사실이다. 『재재소소』가 담백한 기술을 이어나가는 과정 가장 밑바닥에 깔린 ‘시의 발생’이라는 믿음이다. 그렇게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방금 읽은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한 편의 ‘시’라는 사실이다.
『재재소소』에 수록된 다수의 시편을 구성하는 진술을 외따로 떨어뜨려놓을 경우, 그것은 “백과사전에서 찾은 사실”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정확히 말하면 화려한 미사여구를 덜어낸 가장 최소의 진술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출한 문장들이 엮이며 시가 될 때, 의심의 여지 없이 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만들어진다. 이 시집은 자신이 본 것을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쓴다. “거리에 아주 많은 게 피었고/그중에 한 가지를 골라 얘기하자 말한다”(「꽃집에 대해서」). 따라서 이 시집에서는 ‘오보에 다모레’와 ‘잼 바르기’의 공통점이 시를 만들지 않는다. ‘오보에 다모레’와 ‘잼 바르기’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자세가 시를 만든다.
이때 시의 발생은 온전히 우연성에 몸을 맡기고 시인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일까? 「네트」는 문득 “멀리서 누가 테니스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정말로 공이 날아”오는 상황을 그린다. 그리고 뒤이어 테니스와 상관없는 ‘모자’ ‘새’ ‘소파’ ‘무거운 신호등’ 따위가 날아온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다”. 시인의 의도와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들이 연출되고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시의 공간으로 침입할 때, ‘나’가 선택하는 것은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무언가 넘어와서 쌓이는 시간을 견디는 일. 원하는 것은 날아오지 않는다. 시의 공간에 쳐들어오고 그렇게 시를 발생시키는 물체와 사건은 시인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다가 시에 침입하는 온갖 우연성이 소진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이제 저쪽에는 창고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아”), ‘나’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네트를 넘어”간다. 물건을 쳐서 넘기기 위해 필요한 “아주아주 튼튼한 라켓”을 구하려고 하지만, “아주아주 커다란 문을 열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시가 끝난다. 이미 한 편의 시가 다시 한번 발생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는 최소의 진술은 우연성 너머의 실체를 겨냥하려는 최고의 방식일 수 있으나, 결국 그 너머의 공간마저 또 다른 우연성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패배감은 개입할 수 없다. 『재재소소』의 시작(詩作) 행위는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진술하는 사건의 연속이며, 그 연속 가운데 탄생하는 시성이 제어의 바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으므로. 이것은 성공의 문제도, 실패의 문제도 아니다. 읽는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한 나열 속에서 발생하는 시적인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시인의 수행성을 무력화하는 일과 시를 신비화하는 일의 정확한 중간 위치에서 『재재소소』는 시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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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호지가 설계하는 시의 공간은 철저하게 통제된 것처럼 보이는 아주 좁은 장소로 그려질 때가 많다. 『재재소소』와 마찬가지로 절제된 진술을 나열하며 통제할 수 있어 보이는—그래서 때로는 통제당하고 마는—범위 내에서 시를 완성하므로 범박한 공통점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시인이 각자만의 자세로 시를 쓰는 것처럼, 『시작법』은 시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친구 동생은 방에 굴러다니는 옷가지며 인형, 이불, 종이 박스 같은 것들을 발로 차고 다녔다. 짐을 챙기려는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찾을 게 있다고 했다. 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버스를 타야 해. 해가 곧 저물 것이고 그게 마지막 버스였다. 놓치면 끝이야. 친구는 조바심을 담아 말했다. 개수대 밑을 손으로 더듬거리던 친구 동생이 갑자기 왁 소리 질렀다. 건너편에 있네. 친구 동생은 창문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틀에 한 발을 걸쳤다. 창밖을 내다보자 건너편 건물의 창문이 보였다. 창틀에 우산이 걸려 있어 우산 손잡이 폭만큼 창문이 열려 있었다. 동생은 창틀에 구겨 앉은 채 손을 뻗어 건너편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간격이 넓어 거의 상체 전부를 바깥으로 빼야 겨우 손이 닿았다. 끽끽거리는 문을 반쯤 열었을 때 동생은 건너편 창문으로 기는 것처럼 움직였다. 머리와 어깨까지 들어가자 건너편 창틀을 잡고 구르듯 그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건너편으로 사라진 동생을 보고 있었고 친구는 없는 시계를 찾으며 빨리 가야 하는데, 말했다. 얼마 뒤 동생은 건너편 창문에 다시 나타났다. 누가 쓰다 버린 것 같은 낡은 보스턴백 하나를 들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동생은 이쪽으로 가방을 건넸다. 양쪽 창문에 서서 힘껏 손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친구는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이 없다고!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동생이 내민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전하게 잡으려면 손잡이를 건네받아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멀었다. 내가 몸을 앞으로 좀더 내밀었다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창문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가방을 내밀었고 내 손은 손잡이를 스쳤다. 잠깐 그것을 잡았을 때, 생각보다 무거워서, 혹은 그 안에 있는 게 물건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라서, 어떤 이유로든 손이 굳었고, 가방은 떨어졌다. 멀리서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고요하여 잘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은 건너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뒤로 온 친구가 창문을 닫았다. 이제 가자. 시간이 없어. 친구는 내 손목을 잡았다.
─「이사」 전문
「이사」는 ‘끝이 임박한’ 와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 촉박한 시간을 지연시켰으나 결국 찾아낸 무언가를 ‘확인하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시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재촉하는 사람, 무언가를 찾는 사람, 지켜보는 사람. “마지막 버스”가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분주한 와중에 무언가를 찾으려 창문을 넘어가는 짧지만 긴 순간을 그리면서, 이 시는 차호지의 시 세계에 공존하는 세 가지 충동을 넌지시 알린다.
(1) 재촉하는 사람. ‘친구’는 “해가 곧 저물 것이고 그게 마지막 버스”라며 ‘동생’과 ‘나’를 재촉한다. 어디로 가는 버스이며, 왜 타야 하며, 그걸 놓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런 것은 당연히 알 수 없다. 오직 어떤 ‘끝’이 존재하고 그것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감각할 뿐이다. 바꿔 말하면 주어진 시간—혹은 공간—에는 늘 어떤 제약이 존재하는 것이다. “없는 시계를 찾으며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하는 ‘친구’는 정말로 어딘가에 가야 해서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시계”가 알려주지 않는 미지의 시간에 쫓기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을 실제의 제약이라고 볼 수 있나? 다시 말해 무언가를 통제하기에 유효한 제약인가? 하지만 “조바심”이 나거나 심지어 “시간이 없다고! 화를” 낼 정도로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무언가 끝나버린다는 감각의 실체는 분명 유효하다. 차호지의 시가 환상적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없는 시계”는 시간과 공간에 분명한 제약을 가한다.
차호지 시를 두고 자주 언급되는 특징은 그의 시가 비좁고 유폐된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점인데, 이는 대개 어떤 공간을 한정함으로써 발생하는 차호지 시만의 특이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이사」에서도 ‘나’와 ‘동생’을 재촉하는 ‘친구’, 즉 시에서 할애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약하려는 충동은 오히려 시의 첫머리에 놓이며 이 시를 발생시킨다. 차호지의 시가 정해둔 끝은 시작과 바투 붙어 서 있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지극히 한정적이며, 가볍게 흘깃 보는 동안에 처리될 만큼 좁고 짧다. 손가락으로 각설탕을 들어 올려 찻잔 안에 집어넣는 동안에(「안내」) 혹은 방에 들어온 나방을 잡는 순간이나 (「면적」) 원운동을 반복하는 새 모양 모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동안(「모빌」) 진행되는 시는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 없으며, 그럴 가능성이 차단된 듯한 공간에서 진행된다. 끝이 시작과 가깝게 붙어 있을 때, 차호지의 시가 발생하는 공간은 그 사이에 있다.
(2) 무언가를 찾는 사람. ‘친구’의 ‘동생’은 끝이 가쁘게 다가오는 그 시간을 지연한다. 무엇을 찾는가? “개수대 밑을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돌연 어째서 그것이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역시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생’은 그것을 찾기 위해 건너편 건물로 넘어간다. 그 건너편은 창문과 창문 사이를 몸으로 넘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기보다 간격이 넓어 거의 상체 전부를 바깥으로 빼야 겨우 손이 닿”는 거리에 있다. 끝이 바싹 다가오는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과 공간을 길게 늘이는 ‘동생’은 그 제약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재촉하는 끝 (‘친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상반된 두 충동이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실제로 맞닥뜨린 제약 속에서의 지연은 “보기보다 간격이 넓”을까?
저 사람들은 갑자기 무서워졌을 거야. 저기 화병에 꽃이 꽂혀 있다는 것이. 저 서랍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것이. 앉아 있는 의자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바닥이 타일로 구획되어 있다는 것이. 오토바이가 바깥을 지나간다는 것이.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의 뼈가 만나는 곳에 흉터가 있다는 것이. 네가 거기 앉아 있다는 것이……
─「그네」 부분
문득 응시하게 된 말끔한 결과물로서의 현상, 예컨대 “화병에 꽃이 꽂혀 있다는” 사실이나 “서랍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오묘한 자연의 신비 따위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결과물 (끝)이 완성된 후에는 생략될 수밖에 없는 무수한 중간 과정의 존재 자체 때문이다. 다소 강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시작법』의 이러한 미시적 시각은 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집의 욕망을 추동한다. 시인에게는 생략된 결과물이 덜렁 놓여 있는 상황 자체가 기묘하게 오싹하다. 바투 붙어 선 시작과 끝 사이 시간의 프레임을 연장하는 동안, 그 프레임에서 찰나와 영원은 공존하게 되며 두 감각은 뒤죽박죽으로 섞인다. 이는 차호지의 시가 사각의 면으로 이루어진 유폐된 공간을 주로 그리는 한편, 그곳을 빠져나가거나 새로운 공간을 상상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그 공간 자체를 시로 만들 수 있는 이유이다.
한 여자가 손가락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가 내려놓기까지의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무언가 진행될 때, 차호지 시의 화자는 “끝내기 위해서는 계속하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끝」)고 말한다. 따라서 「이사」에서 끝을 재촉하는 ‘친구’와 그 사이의 시간을 늘리는 ‘친구 동생’은 모두 필요하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차호지의 시가 제약하는 시공간의 의미가 발생한다. 미리 정해진 ‘끝’은 시를 제약하는 동시에 추동하는 동시적 충동이다.
(3) 지켜보는 사람. 그렇다면 ‘나’는 이 시에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지연된 시간의 목적과 결과물을 건네받는 사람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이 다가오는 와중에 확인할 수 없는 무엇을 찾는 이 기묘한 사건의 정체를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약 (‘친구’)과 지연(‘친구 동생’)이 공존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생’이 건넨 가방 (결과물)을 건네받을 때, ‘나’ 역시 특정할 수 없는 이유로 (“생각보다 무거워서, 혹은 그 안에 있는 게 물건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라서, 어떤 이유로든”) 그것을 놓쳐버린다. 가방이 떨어지는 대목에서는 ‘가방이 떨어지는 이유’보다 ‘가방이 떨어졌다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앞에서 ‘끝’이 환기하는 기묘한 오싹함과 별개로, 필연적으로 다가온 ‘끝’이 실현되는 순간에 남는 것은 가방이 떨어졌다는 ‘단단한’ 사실 그리고 그것이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이다.
‘나’는 “멀리서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바로 건너편에서 소리를 지르는 ‘동생’이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알 수 없는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이다. 바로 맞은편에서 지르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리는 소리. 이 소리는 오직 ‘나’에게만 들린다. ‘나’는 제약과 지연의 충동이 길항하며 설계된 좁은 공간에 함께 있을 때만 목격할 수 있는 것을 증언한다. 「설계자」에는 “기계로부터 송출된 문장을 이어 붙여 네 개의 모서리를 만”들고 “네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워 여덟 개의 꼭짓점을 만”들어 상자를 설계하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그것이 “지루한 것만 빼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 모서리를 본” 순간, 이제까지 만들고 있던 상자 같은 공간에 ‘나’ 역시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런 순간들에서 차호지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시를 만든다. 이 공간을 빠져나가거나 새로운 공간을 만들지 않고,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구멍”을 만들기 위해 “그럴 수 있을 만한 말을 생각”하고 “아주 많이 생각해내”는 것이다. 시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처지라기보다, 그 통제 속에 말하는 사람을 놓아두면서 무언가 발생하는 순간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차호지의 시집이 만드는 유폐된 공간은 제한이나 제약으로 점철되었다거나 끝이 정해져 있어서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대신, 오히려 무언가 발생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나는 모든 게 가만히 있는 줄 알았어. 여기 있는 모든 게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여기 있는 건 모두 가만히 있을 거라고 그러셨단 말이야.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을 하면 갑자기 움직이니까. 움직이는 사람이 되니까”(「제자리」).
무엇이, 언제, 어떻게 시가 되는 것일까.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 시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우연성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것만이 시인 것은 아닐 것이다. 김동균과 차호지의 첫 시집은 시라는 장르 자체를 이해하게 하며, 더욱 이해하고 싶게 만든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화려한 미사여구나 즉각적인 정서의 추동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두 시집이 간결한 진술로 시를 설계해나갈 때, 읽는 이는 어떠한 강요도 없이 시가 발생하는 순간을 종종 목격할 것이다. 목격자가 되어 그 발생을 지켜보며, 시는 정말로 신기한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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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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