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봄호(제118호)

이어져 있는 세계에 대하여

유희경 시, 문학평론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 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이다음 봄에 우리는』 『겨울밤 토끼 걱정』,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나와 오기』 『사진과 시』 등을 펴냈다. 올해의젊은시인상,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현대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오믈렛』 『몽상과 거울에 대하여

 

 

그 일요일 저녁. 나는 서점에 있었다. 평소와 같이. 창밖은 아직 겨울. 빈 가지 아래 오가는 두껍고 어두운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 달라졌다. 그렇게 느꼈다.

무엇일까. 책상, 책장들,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시집들. 오늘은 손이 많았다. 비어 있는 책장의 일부를 채우고 진열을 가다듬는다. 가만두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오래된 종이 냄새. 아마 내 몸 곳곳에 배어 있을 것이다. 이 냄새로 내가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적어도 책과 친숙한 사람이라고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꽤 멋진 일이다.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책은 고루하고 케케묵은 물건이니까. 책의 아오라는 옅어지고 있다. 이제는 거의 투명하다 할 만하다. 창문을 열어본다. 찬 공기가 든다. 잠시 기다려보았지만 새가 들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닫고 귀를 기울여본다. 히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 그 소리마저 거두어내면 서점은 단단한 조용함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런 상태를 좋아하지만 아직은 온기가 필요하다. 말라 보이는 화분 식물들. 내일은 물을 주어야지. 곳곳에 자리 잡은 소품들.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개수대. 비어 있다. 시옷의 모양으로 엎어둔 시집 몇 권.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전표. 그 밖에 서점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물질과 현상들. 사라진 것도 나타난 것도 없다. 그런데, 비어 있다. 그렇게 그것이 있다.

겨울이 끝난 거구나. 가난하고 춥고 오롯한 계절, 겨울. 가만히 물러가고 있다. 없다. 있지 않다. 그리고 잠시 비어 있는 것이다. 겨울이 비워놓은 자리를 다음 계절이 곧 채우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공백. 계절과 계절 사이, 아무 계절도 아닌 시간. 주인이 없는 세계. 그런 때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겨울이 끝났구나. 가볍게 탄식한다. 이맘때면 각오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새삼스러움을 맞닥뜨릴 작정이, 당연한 당면에 휘둘리거나 떠밀리지 않을 결심이 필요하므로. 함부로 무기력해지지 말 것이며, 함부로 슬퍼하거나 즐거워하지도 말 것이며, 그러나 마음의 준비란 낱장처럼 가벼울 뿐이다. 다시 나는 나의 일부를 잃어버릴 것이다. 소진되고 상실하겠지. 아마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안다. 모든 겨울의 끝은 그랬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지. 의사는 신경이 약해졌다고 했다. 나는 말라붙은 샘을 생각했다. 나을 수 있을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을 체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땅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그래도 애써 표현해본다면, 이해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되어버린 나를 이해한다.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잃어버림은 과거로부터 연유하겠으나 시간과는 무관하다. 겨울 다음 봄이 오지만 겨울이 봄의 원인이 아니고 봄이 겨울의 결과는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다음은.

그다음. 한때 기대하고 희망했었고 더러 배반과 절망을 선물하기도 했던, 그것은 이어진다. 이제 나는 끝을, 종말을 믿지 않는다. 잠시 간격이 생기고 그 사이가 비어 있을 뿐이다. 이어져 있다는 감각은, 그러므로 소중하다. 계절과 계절이. 서점의 사물과 사물이. 나와 당신이. 우리가 우리와. 대책 없는 낙관이라고 해도,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어떤 밤에는 다시 쓸 용기를 얻었으며 조금 울기도 했다. 회복은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다음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난겨울 내가 읽었던 시집들 중 많은 시집이 나를 붙들어주었다. 세대나 계보와 같은 직렬의 체계 바깥에서 마치 손에 손을 잡고 긴 띠를 이루는 것처럼 그 시집들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놓을 수 없는 손. 놓지 않는 손. 내가 생각하기에 시의 임무는필요한 것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공동의 감각이 존재함을 믿는다. 그 감각의 동시적 작동을 의식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외딴 자리에 앉아 혼자가 되어. 읽고 쓰는 행위를 빌려 시를 함으로써. 그 시집들과 함께하는 어느 순간, 그러니까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아니했을 때 나는, 내 손의 뜨거움을 확인했다. 그 온도는 바깥으로부터 와 내 것이 되는 에너지였다. 이토록 기묘한 동질감이라니. 강제도 의무도 없이 닿아 있다는 공동성. 나는 세 권의 시집을 이야기하려 한다.

 

 

  뒤섞임-분간 없음의 소용돌이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한여진의 첫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문학동네 2023)를 읽는 내내 나는 내가 이 시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는데 나는 시를 읽을 때 시인에 대한 앎과 모름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를 읽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정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한여진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자각은 특별했다. 한편 알지 못한다는 자각의 여실함은 시인의 빈자리를 더듬는 일이며 즉 그를 알고 싶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 사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흐릿함, 너무 흐릿해서 느낌이라기보다는 예감에 가까운 감각이 있었다. 애써 표현하자면 그것은 시인과 나 사이 연결에 대한 것이었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 느낌 아니 예감은 점점 더 또렷해져갔고 끝에 다다라서는 거의 확신이 되었다. 나와 이 시인은 어떤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다. 분명히.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의 제목으로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두부를 떠올린다. 그 상상의 처음은 아직 잘리기 전의 두부이다. 하얀 광목에 싸여 틀 속에 담겨 있는 두부. 그것은 눈처럼 하얗고, 차가운 물속에 잠겨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두부. 구체적이지도 추상적이지도 않은 두부. 신비로운 물질. 고소한 관념. 두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두부일까. 그 순간 누가, 그는 시인일 것이다, 그 위에 칼을 대고 반듯한 선을 긋는다. 두부는 가만하고도 단호한 힘에 의해 부드럽고 조용하고 정직하게 구분된다. 비로소 완성 되는 두부적 형식과 질감이라 이를 수 있을 기억-상상-서술. 나는 이것이 한여진이 시를,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경험하는 일상의 풍경, 누군가와의 대화 혹은 들은 이야기, 그로부터 촉발된 상상은 텍스트의 틀 안에서 가지런히 응고된다. 시작과 끝이 없는 세계에 시작과 끝을 도입하여, 그제야 온전히 인식의 대상으로 가능해지는 언어적 세계. 이 역설은 물론 한여진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탁월하다 여길 만큼 정밀하게 다루는 솜씨가 그에게는 있다. 나란히 똑같은 두부를 재료삼아 구워도, 누군가의 두부는 겨울을 불러온다.

한여진 시의 매력은 문학적 사건에 특유의 깊이를 갖게 하는 시적 전개 방식에 있다. 그의 시는 내부에서 내부로 더 내부로 바닥 없이 울려 퍼진다. 하나의 목소리가 다성(多聲)이 되는 흐름을 나는 소용돌이로 느낀다. 그 소용돌이는 중심이라든가 본질이나 진리와 같은 절대성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닿거나 끌어들이려는 목적이 없이 소용돌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소용돌이. 그런 의미에서 첫 시 은 다분히 계시적이다. 큰 할머니에서 할머니로, 엄마와 이모로. 언니를 거쳐 내게로 이어져오는 계보의 상징물로서의 솥. “한없이 검은 아득한 솥의 내부는 가 태어난 곳이며 마침내 돌아갈 곳이다. 솥의 의미에 대한 해석 시도는 기각된다. ‘도대체 솥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는 대답이 너무 많고 아예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시인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가 불에 태워질 때, 그것마저 삼킨 솥의 저 깊은 안쪽은 한여진 시의 걸출한 메타포이다. ‘에서 시작해 으로 끝나는 시에서는 삶과 죽음의 분리 따윈 없다. 그것은 한몸을 이룬 채 깜깜하게 있다. ‘에 대한 부정마저 삼켜 제 것으로 만든다. 그 속에 뿌리 깊은 소용돌이가 있다.

한여진의 시 속 조용한 소용돌이는 사적 기억과 공통의 감각을 뒤섞는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문학적 사건으로 표출되며 이 팽창과 압축의 반복적 현상은 대비로서의 비유가 아닌 초대로써의 환유로 작동한다. 그리고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세계의 무의미한 반복”(조대한, 해설 미선 언니와 나」)의 출구는 가 아닌 타자, 시인이 아닌 시를 읽고 있는 독자이다. “의 저 깜깜한 내부에서 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사적 연결성은 타자()에게 닿아 각각의 방식으로 무한히 확장-전개된다. 어차피 솥 안 그 어둠 속에서 피아 식별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여진은 끊임없이 지나친 것들을 기억하고 확인한다. “기억나? 지나온 것들이라는 질문은 외부에 있지 않다. 내부에서 생성되고 내부에 머문다. 이 폐쇄성은 그러나 내외부의 뒤섞임 안에서 열려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목소리가 빚는 수갈래의 목소리이다. 그것이 솥 안에서 메아리쳐 울린다. 소용돌이친다. 시작된 곳과 돌아갈 곳은 같다. 과거로 수렴될 뿐인 시간 위에서 그럼에도 목적지를 확인하는 일. 시의 임무는 그것이다. “계속해서 지나치는 것들을 어떻게든 기억하려는 노력과 그래도 가도 가도 끊없는 도로는 계속 가볼 것”(「목적지를 입력하세요」)이라는 각오가 그 뒤를 잇는다. 비록 그 결과가 어둠 속의 메아리일지라도.

그러니 살려고 쓰는 나와 쓰기 위해 산다는 너의 분간은 필요 없다. 그런 노력은 필요하지 않다. “어제와 엊그제와 모든 삶은 모두에 대한 거대한 기록”(「겨울 소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가 우리가 되는 깊이로의 침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힘. 참으로 아뜩한 회전. 아마도 내가 그에게서, 그의 시에게서 느낀 연결감의 확신은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터다. 시 쓰기와 시 읽기는 한 점에서 만날 것이다. 아직 한참 남았지만 저 끝에 있다. 그것이 끝인지 시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여진의 첫 시집 최종에는 다시 이 등장한다. 초기화될 수 없으나 끊임없이 초기화를 의식하면서, “변함없는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의심하면서도 눈을 뜨면 다시 빈 노트 앞”(「초기화」)인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도저한 가능성을 짚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빈 노트에서 나는 조그마한 기쁨을 느낀다. 시작의 문이 거기 있는 것 같기에.

 

 

 

  시의 바깥과 헤테로포니적 목소리
    -임유영, 『오믈렛』


 

시인은 시 속으로 사라져버린 뒷모습이다. ‘는 시인이 사라진 줄도 모른다. 그가 들려준 시에 빠져 있을 뿐이다.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임유영의 첫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읽기는 이와 같은 상황을 반복해 연출한다. 시집 속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시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질문이 남았고 대답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임유영의 시는 말[語辭]이고 글이다. 임유영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의 시가 자신의 읽힘을 거절한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시집 속 시들은 문자의 형식을 빌려 적혀 있지만, 적힘의 출처는 구술된 말이며 그러므로 마땅히 들어야 할 목소리임을 소원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의, 의미론적인 회문palindrome이라 할 만한, 「시인의 말은 몹시 흥미롭다. ‘시인의 말의 구조를 따르면 시인은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벽에 붙이고 적당한 값을 받고”1) 판매한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벽에 붙이고 적당한 값을 받고판매한다. 이 무구한 반복 중에 무언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주체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의 말도 글도 아니고 의도도 아니다. ‘손에 쥐여진 것. “적당한 값이거나 종이에 옮겨 적”(「시인의 말」)힌 이야기도 아닌. 가만히 손을 펴보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바로 그 무언가가 결국 목소리로 만든, 임유영의 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시집의 놀랍기까지 한 매력은 여기 있다. 세상천지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넘치고 임유영은 잠자코 받아 적는다. 이야기 속에는 과장과 은폐가, 가속과 정지가, 축소와 확장이 있는데, 그런 일에는 필연적인 수상함이 숨어 있는 것이다. 저 깊은 강바닥을 훑으며 유유히 헤엄 치는 바다거북과 같은 사건이. 임유영은 그런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수상함이 있다. 그것은 읽는 내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반목, 반전 그리고 기기묘묘함에 흥분하게 된다. 나는 그 짜릿함의 출처를 시의 바깥”(「기계장치강아지」)으로 짐작한다. 시인이 시를 규정되어 있는 형식으로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시를 통해 시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배면에서 드러나는 복잡한 의미로서의 시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짐작이다. 이로부터 시를 찾는 것은 결국 종이에 옮겨 적힌 이야기를 사는 사람, 바로 당신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임유영은 무척 영리한 시인이다. 그의 고군분투는 나누어 짊어질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가 가진 유쾌한 태도도, 그의 시가 지닌 아이러니도, 쓰라리기까지 한 결정적 문장도 쓰는 자와 읽는 자의 분간 없음-뒤섞임을 위해 배치된다. 그야말로 오믈렛이다. 입맛을 돋우는 온갖 재료가 한데 섞인” “아침의 오믈렛”. 여기 어떤 비법이 존재한다. 독毒이기도 한 설탕잽싸게 뿌려놓는 어떤 손”(「오믈렛」)이다. 그 손은 시인의 손이 아닐 수도 있다. 읽어내는 당신의 손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시를 숭앙하는 사람의 손일 수도 있고, 시를 배척하는 사람의 손일 수도 있다. 마침내 우리 앞에 놓인 비법의 오믈렛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하여간 비법의 오믈렛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다.

열려 있음안에서 대척은 허락되지 않는다. 마주앉거나 나란히 앉거나 따로 앉아도 식탁 앞에선 모두 우리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게 될 뿐이다. 태양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는 더 쪼개기 어려울 만큼 작은 점에 불과하듯, 시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협화음은 헤테로포니heterophony. 규칙(화성)은 필요 없다. “교탁 위에 올려놓은 사과 한 알이 봄에 피는 꽃이나 여름에 우는 새가 될 수 있듯이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헤테로포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보자.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흙속에 파묻혀 있는빛나지는 않고 푸르스름하게 흐린 유리병인가. 그 속에 담긴, 한 번 쏟아진 뒤 더는 나오지 않는 짙고 신비로운 향내”(「부드러운 마음」)인가. “성당 뒤뜰 감나무에 걸린, 눈이 뒤덮어 희미해지다가 사라지고천사”(「정확한 죽음의 시각을 기록하기」)인가.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일은 모두 시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세상천지 넘쳐나는 이야기의 말을 그저 종이에 옮겨 적벽에 붙이고 적당한 값을 받고판매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시인의 뒷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보이지 않으니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다만 나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읽는 이의 자리에 있다. “그날” “본 것” “겪은 것” “불평하지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이야기하기 위해서. 낱낱이 살피기 위해서 시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시의 바깥에 있는 것. 그것이 임유영의 재능이다. 한편 시의 바깥에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들어낼 귀. 그 귀가 듣는 것이 시집 오믈렛의 구성이고, 구성의 핵심은 온통 뒤섞여 있는 이야기 즉 우리 자신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시의 다음이 아닐까. 빠져나오지 못한 시집 속에서 나는 여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 ‘나’ ‘나’……의 혼재
  -양안다, 『몽상과 거울』


 

양안다의 여섯 번째 시집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은 다섯 번째 시집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문학동네, 2023)와 십일 개월 간격을 두고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두 권의 시집 사이 긴밀함을 예상해보는 일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실제로 두 시집은 강력하게 연결된다. , 무의식, 서사 흐름의 왜곡, ‘의 다자화(多者化). ‘느슨하게폭발하는 말, 말들. 그로부터 비롯되는 아름다운 혼란은 비단 두 시집뿐 아니라, 양안다가 구축해나가고 있는 세계의 면모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아무래도 양안다의 시에서 일관성과 구체성, 그로부터 발현되는 안정적이며 완결된 구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양안다가 구가하는 이미지들은 독립적이며, 한 행에서 다른 행으로, 한 연에서 다른 연으로 이행될 때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때론 의미를 포기하며 독백과 고백의 형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끝없는 이전과 전이, 변신과 변형 중에 항상성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시의 배경이 될 만한 시공간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의 주체는 순식간에 이탈하고 천연덕스럽게 돌아온다. 시인 스스로도 시 읽기로부터 비롯되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일반적 교통交通(그런 것이 있다면)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직접 밝혔듯 그에게 시 쓰기라는 게임혼자 하는 게임이고스스로 만든 게임”2)이다. 독자의 게임 참여, 즉 양안다 시 읽기라는 특수 체험은 그러므로 주고-받음이나 허락-수용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자는 읽어나갈 것이며, 원하지 않는 자는 덮을 것이다. 그 과정에 시인의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관여할 수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게임에 몰두할 뿐이다.

이 게임의 룰은 그러므로 양안다 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 자폐적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세계를 아우르는 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 속에 그저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할 뿐이다. 그에 속해 있다고 믿으며 그에 의지하고 소외되어간다. 양안다는 룰에 대한 믿음 그 자체를 폐쇄해버린다. 룰이라는 신화를 제외함으로써 그의 시에서의 교류는 완전한 개인 대 개인, 타자와 타자의 사이를 꿈꾼다. 이제 양안다의 시 쓰기(“게임”)는 이러한 교류의 적극적 실천으로도 읽힌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저 안쪽으로, 온전한 혼자의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의 이 년에 한 권 꼴로 펴내고 있는 시집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공통의 룰이 아닌 다른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고갈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할 것이다. 쓰는 이와 읽는 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약속되어 있는 감각, 나는 그것을 순간적인 것에서 발견한다. ‘들이 꾸려가는 이 은밀한 세계에서 발생하는 충동. 충동적 감정, 충동적 신앙이 그의 시집에 있다. 시인, 시적 화자는 순간에 영원을 건다. 약속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의미가 존재하는 찰나에 그의 시는 놓여 있다. 양안다가 만들어놓은 게임에서 ’ ‘’ ‘’……의 읽기(참여)란 그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양안다의 시가 다분히 텍스트적임을 확인한다. 포착과 제시의 의미론적 박제에 있어 가장 좋은 도구일 뿐 아니라, 수많은 에게 동시에 적용/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몽상과 거울거울은 그의 시가 가진 텍스트성을 보여주는 적확한 단어이다. 문학에서 거울 이미지는 잔뜩 소비되어 거의 너덜너덜해진 클리셰cliché이다. 그만큼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절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시인이 모를 리 없다. 그가 이 시집에서 사용하는 거울은 반영하는 객체이여, 거기 있는 존재를 되비치는 물체로서의 거울 너머의 것이다. 일종의 요경妖鏡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거울은 와 가장 가까운 대상인 를 드러낸다. “거울 밖에서 내가” “거울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하고 묻는 시인의 말의 한 장면은 이 시집에서의 거울이라는 지극히 텍스트적인 영역을 정의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울 속으로 초대받는다.) 여기서 우리란 이 게임에 동참하고 있는 다양한 를 가리킨다.

텍스트로서의 거울. ‘우리-나와 나와 나의 세계. 선택적인 한정. 꿈과 몽상의, “공포가 사랑일 줄 알고 오랫동안 더듬거”(「돌림 사랑과 절망 노래」)리게 되는 세계. 사랑과 절망이 뒤섞인 자낙스xanax의 세계. 입구와 출구가 같은 무한 환상. “나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잉걸불」)인지 묻는 무기력한 시도와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는 자조 섞인 포기의 반복. 텍스트의 거울. 그것은 실재적인 것은 비추지 않는다. 그러니 거기에는 얼굴이 없다. “I can’t feel my face” “얼굴을 할 수 없다차라리 나의 뇌를 꺼내서 입술을 그려주”(「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는 것이 가능한 방법이다. 뇌가 말을 한다. 뇌가 만든 미로 속에서 무작위로 출몰하는 캐릭터들 히나토’ ‘’ ‘듀듀’ ‘s’ ‘이드’ ‘이들 역시 텍스트로서의 거울의 산물이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거울과 거울」) 여섯 명의 가 뒤섞인다. 그 착시와 착란은 말해진다. 입술 달린 뇌의 말이다.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는 거울을 본다. 그것은 나를 비추고 있지 않다. 내가 있다. 내가, 내가 있고 그것들은 뒤섞인다.

같은 해 출간된 두 시집 간에 차이는 분명하다. 양안다의 두 시집은 병렬적이지 않다. 일종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몽상과 거울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를 계승한다. 보완하고 삭제하며 배반한다. 그러는 사이 (어느 정도는) 극복한다. 『몽상과 거울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의 완전한 다음 시집이며, 다음 걸음이고 미래에 놓인 시집이다. 빙글빙글 돌며 결국은 나아가게 되어 있다. 시간에 등 떠밀려 가는 것이든, 비틀걸음이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든. 물론 양안다는 그런 일 따윈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포털사이트에 로르샤흐 테스트Rorschach Test’를 검색해본다. 로르샤흐 테스트란 데칼코마니적 잉크 얼룩inkblot이 담긴 열 장의 카드로 사회 심리를 확인하는 검사 방법이다. 양안다는 이 카드 속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시집의 제목으로 삼고 싶었다고 했다(출판사와의 논의 끝에 포기했지만). 해석할 수 없는 이 그림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읽느냐, 라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제. 그 자체가 그에게는 시로 여겨졌으리라 짐작한다. ‘혼자이며 정답 없이 마련된 혼돈이므로. 내게는 열 개의 슬픈 얼굴이 보였다. 너무나 개별적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봄. 이제야 나는 내가 봄이 올 거라는, 오고야 만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끗이 지우고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겨울의 연장을 바라거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다. 이전과 다름없는 서점에서, 그러나 텅 비어버린 서점에서 나는 손을 펼쳐본다. 그것의 의미를 한참 생각해본다. 역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알아내야 할 것도 없다. 지금 서점에 자리 잡고 있는, 문을 열고 나서면 바깥 세계로도 확장되어 있을 이 비어 있음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어떤 의미도 찾을 길 없이 그저 기다려야 하는. 그러고 나면 나타날 것이다.

  • 1) 『오믈렛』의 시인의 말은 시집에 담긴 시 「꿈 이야기」의 마지막 연과 동일하다. 이 시는 한 여자아이의 죽을 징조를 보았다는 “교복집 하는 늙은 남자”의 주장을 옮겨 적는다. 시 속 화자는 느닷없이 “꿈”과 “해몽”의 믿을 수 없음을 설파하며 이 이야기를 적어 걸고 판다. 꿈같은 이야기(대낮)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죽음)의 말미를 시인의 말로 남긴 것은 이 시집의 시의 바깥에서 온 이야기성에 대한 강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2) 2023년 12월 16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진행된 <위트 앤 시니컬 시 낭독 84 양안다> 중 필자의 질문에 대한 양안다의 대답에서. (출처: https://shorturl.at/hBEIV)

추천 콘텐츠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월간 현대시 류수연 서윤후나쁘게눈부시기어둠양안다이것은천재의사랑불안 2025
최다영 오렌지 셰이밍 ― 김나현, 「공중정원」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양수빈소설계간평리뷰가족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