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제119호)
나는 시를 읽는다. 나의 목소리를 읽는다.
- 이장욱, 숙희, 남지은, 박연준의 시집에 부치다.
면도를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무리해 통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지난 계절 내가 리뷰를 썼던 시집의 저자였다. 전날 밤 마침 잡지가 도착했던 참이다. 리뷰를 읽은 모양이구나. 결례가 될 만한 내용이 있었나. 불편한 심사라도 토로하고 싶은 건가. 잠시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면도 거품이 여전한 채로 통화를 마쳤다. 결과적으로 혼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시 읽기는 결국 오독과 오해일 뿐이다. 그가 전한 감사 인사가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짐작에 마음이 다 복잡했다. 적어도 시 읽기에서 나는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바람직해지고 싶다. 행과 행, 행간과 행간 사이에 숨어 있는, 그러리라 짐작되는 의미를 말끔하게 밝혀내고 싶다. 그럼으로써 시인을, 시인의 시를 깜짝 놀래주고 싶다.
나는, 나뿐 아니라 정말 많은 시인이 시의 진정한 면모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제대로 시를 읽어내겠다는 나의 오기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이해하지 못함, 이해할 수 없다는 막막함에서 오지 않나. 맞다 하면 아니다가 되고 그렇다 하면 그렇지 않다가 되어버리는 시. 그리하여 시 읽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때문에 나는 매번 후회하면서도, 읽은 시에 대한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시 읽기는 시 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 쓰기는 불가능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더 들여다볼 수 없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와 좌절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시에서 사랑을 기대하고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사랑이나 아름다움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 아니고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는데 아름답지 않다. 시가 무언가를 콕 집어 사랑이라고 아름다움이라고 말하지 않으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에의 집착은 그런 의미에서 옳지 않다. 시로 가득한 세계는 불가능으로 가득한 세계에 다름없다. 시는 수단이자 통로이고, 형식인 동시에 껍데기, “예외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장욱, 『음악집』, 문학과지성사, 2024)일 뿐이다. 시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혹은 목적이 되려 하지 않는다. 시에는 입증해낼 무언가, 밝혀내야 할 무언가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그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를 고민하고야 만다. 시 읽기는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내내 괴로워하면서. 자가당착의 무한루프인 셈이다.
신비로운 것은 시를 읽은 후에는 그저 빈손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시를 읽고 쓰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쥐게 된다. 그 ‘무언가’는 회귀하듯 결국 나로 돌아오는 ‘무언가’이다. ‘무언가’는 소리이기도 하다. 소리는 종류가 다양하다. 혼자 중얼거리고 누군가를 부르고 더러 들으려 하는 소리. 몸으로 퍼지는 소리. 시에는 소리가 있다. 아니, 시는 소리이기도 하다. 소리는 사라져버린다. 다시 나타날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시도 사라진다. 다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반드시 사라져버린다. 이에 수반되는 현상이나 노력은 사후적이다. 모두 지나가버린 다음의 애씀이다. 그러나 무망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 면도 중에 전화가 걸려오더라도. 그에 겁을 집어먹게 되더라도. 결국 후회 비슷한 감정만 남게 되더라도. 나를 위해서 나는 시를 읽는다. 나를 잊는다.
유령의 물건
이장욱, 『음악집』(문학과지성사, 2024)
쉿!
잠깐만,
잠깐만,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못 들었다니까.
-「재즈 싱어」 부분
나는 시집을 유령의 물건으로 이해한다. 물론 나는 유령이 무엇인지 모른다. 유령은 실재 너머에 있는 존재다. 유령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달리 규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말해질 수 없는/ 규정되어질 수 없는 존재로서의 유령이라고 하자. 말해질 수 없는/ 규정되어질 수 없는 유령은 감각 밖에 있다. 실재가 유령에 관여할 수 없듯, 유령도 실재에 관여할 수 없다. 유령은 놀래지 않는다. 실재의 세계에 속한 존재들이 놀랄 뿐이다. 유령으로 짐작되는 것에 놀라 계단에서 구르는 사람. 그의 사인은 실족이다.
유령은 물건을 가질 수 없다. 물건은 물질로 이루어진 구체적 형상으로 실체가 있어 경도硬度, 강도剛度 같은 성질을 포함한다. 유령의 손은, 유령에게 손이 있다면, 물건을 지나친다. 유령은 사물의 성질에 관여하지 않는다. 물건을 들지 못한다. 유령은 물건을 소유할 수 없다. 시집은 유령의 물건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집을 유령의 물건으로 이해한다. 시집을 들거나 읽거나 책장에 꽂거나 주고받을 때 나는 시집의 소유 주체를 의심한다. 시집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네 것도 아닌 것 같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없는 듯하다.
이장욱의 시집 『음악집』에서 나는 시집의 소유될 수 없는 성격을 강하게 느꼈다.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시집을 ‘듣고’ 있구나 생각했다. 시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럴 리 없었다. 내가 『음악집』을 읽던 버스 안이나 서점의 내 자리, 집 안 소파 근처에 시인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목소리도 아니었다. 구체적인 목소리가 아니었으니 성별도 나이도 있을 리 없다. 시집을 덮으면 시집을 듣고 있다는 기분은 사라졌다. 사방은 조용했다. 나는 다만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를 ‘들으면서’ 나는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편으로 건너올 수 있다면 저편으로도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오갈 수 있다면, 나의 질문은 시집 속에 도착하는 것일까. 시 속에서 시인은 묻는다. “당신인가요. 당신인데 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요. 뭐라고 불러야 당신에게/ 기도를 할 수 있어요.”(「기도의 탄생」 부분) 『음악집』에 대한 나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 『음악집』을 읽는 나는 내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거기 힌트가 있다.
소리와 음악은 반향이다. 부딪쳐 온다. 부딪치지 않는 소리는 없다. 피아노는 현과 해머의 뒤섞임으로, 색소폰은 색소폰 리드를 자극하는 호흡과 손가락으로부터의 압력이 만든 사이로, 시는 언어와 언어의 다른 발음 다른 의미가 부딪침으로 소리와 음악을 만든다. 소리와 음악은 해석의 영역에 있지 않다. 해석은 내 감각과 감정에 있다. 소리와 음악은 이해되지 않는다. 소리와 음악은 귀를 통해 온몸에 퍼진다. 온몸에 부딪친다. 온몸으로 안다. “아주 작은 음악들의 우주가 펼쳐져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 진실로 그것을 느끼는 것은”(「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나 자신이다. 소리와 음악은 내가 만든다. 나로부터 비롯된다. 소리와 음악과 시는 나의 것이다.
하지만 소리와 음악과 시는 물건이 아니다.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의 내가 실재 너머의 말해질 수 없는/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갖는다는 말인가. 그들은 나를 통과한다. 나는 그들에게 관여할 수 없다. 다만 “예외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허공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그러하듯이. 당신이 그러하듯이.”(뒤표지 글) 보이지 않아도 채우고 있고, 애를 쓰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는 영역이 그곳이다. 소리와 음악이 (곧 시가) 각자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작은 “우주”에 닿을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눈을 감는 것이다.
눈을 감는 건 읽기에 반하는 행위가 아니다. 적어도 『음악집』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더 깊숙한 울림을 갖는, 스스로의 악기화를 수행하는 한 방법이 된다. 적어도 『음악집』에서는. 눈을 감는다. 반복과 변주의 문장. 이야기를 월담하여 다른 이야기로 건너가는 남다른 리듬. 흘러가는 개울처럼 반짝이는 라임들. 즐겁다. 나는 이 시집에서 들리는, 느껴지는, 유령이, 목소리가 이윽고 음악이 되는 시가 즐겁다. 무엇보다 그것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즐겁다. 이 순간, 신체는 시가 연주되는 악기다. 한밤에 나는 울리고 있다. (나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른다.
부름과 기다림
-숙희, 『오로라 콜』(아침달, 2024)
우리는 또 시 써요
밤인데 잠도 안 자고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부분
한쪽 시력을 상실한 이후 나는 ‘보기’에 집착하게 되었다. 보기에의 집착은 듣기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보고 듣는 일에 있어서 나는 욕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오로라’ 현상에 절박해져 있다. 빛의 몸이 추는 춤을, 보고도 보았다 믿을 수 없을 착각을 마지막 남은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는 열망은 점점 강해진다. 한편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오로라를 보면 더 볼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다. 오로라 관찰은 내 최후의 바람이다. 미련하다. 최후가 언제인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로라에 대한 나의 바람을 곳곳에서 말하곤 한다. 입 밖으로 꺼내놓은 말은 기필코 실현되고 만다는, 혹은 지켜야 하는 약속이 된다는 믿음이 나에겐 있다. 오로라를 몇 차례 보았다는 한 시인은 오로라가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아는지 물었다. 오로라의 노래라니.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로라의 노래를 상상한다. 신호이기도 하고 울림이기도 한 사실적이고도 몽환적인 소리. 두 눈을 부릅뜬 채 들어야 하는 오로라의 노래. 어쩌면 최후의 바람을 나는 꼭 실현할 것이다.
숙희의 첫 시집 『오로라 콜』(아침달, 2024)에는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 한밤중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으면 전화기 건너편 낯선 목소리가 당신을 부른다. 드디어 오로라가 나타났다고 알려준다. 꼭 그런 목소리이다. 꾐이다. 설득이다.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부추김이다. 채비를 마친 뒤 신발을 꿰어 신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로라라니. 바라고 기다리던 것이 나타났다니, 문득 의심하게 된다. 방 밖은 겨울과도 같은 찬바람뿐일지도 모른다. 칠흑처럼 암담하고 쓸쓸하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로라라니.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들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모든 부름은 과정에 놓여 있다. 부름의 종결(도착)은 마침(죽음)이다. 오로라의 아름다움은 바람과 기다림에 있고 그 절정이 오로라 콜에 있다면. 오로라를 보고 오로라의 노래를 듣는 일은 바람과 기다림의 종결일뿐이라면. 오로라는 중간 어디쯤 떠 있는 환상이다. 이 순간 어째서 나는 시를 생각하나. 시가 이와 같기 때문이다. 시를 찾아가는 과정이 곧 시이다. 시집을 읽는 우리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의 죽음을 목도한다.
숙희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이다. 잠들지 못하고 오로라 콜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충분히 캄캄하지 않은” 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밤에. “거짓말”처럼 “전화벨이 울”(「오로라 콜」 부분)리기를 기다리면서. 세이렌의 노래일지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그리하여 『오로라 콜』은 부르는 목소리와 기다리는(듣고 싶은) 마음이 중첩되어 있다. 부름과 기다림은 깊은 골을 가진다. 둘은 어긋날 뿐 마주치지 않는다. “그렇게 가까워지고/이내 멀어지면서”.(「기린 터널」)
『오로라 콜』 속에서 ‘나’는 ‘너/당신’과 반복해 어긋난다. 아슬아슬하게. “경보음이 들려” “잡았던 손을 놓”는 형식으로 우리가 되지 못한다. 앞 문장의 성립을 다음 문장이 배반한다(“얼굴로는 거짓말을 고백하고 밑으로는 그 짓을 하고 싶다”, 「랩소디」 부분). 마음의 결정을 행동이 무효화한다. 은밀한 결합은 반드시 해체된다. 그런데 위화감이 없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공평하다. ‘나’와 ‘너’를 가를 것 없이 모두 오로라 콜을 기다리는 사람들.
화해, 영원한 결합, 따뜻한 이해는 꿈속의 일이다. 잠깐. 하지만 꿈을 꾸면 안 되잖아. 잠이 들면 안 되므로. ‘오로라 콜’은 언제 올지 모르고, 부름에 늦은 응답은 약속의 위반. 꿈같은 경험을 위해서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삶에는 있다. 아름다움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아름답지 않은 세계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 숙희는 잠들지 않는다. 모든 슬픔과 정직하게 대면한다. 그의 시는 잠들지 않는 세계에 있다. 고스란히 내비춰 보인다. 그것이 숙희의 시. 『오로라 콜』의 세계. “무엇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되기 위해서”(「오로라 콜」 부분) 부름을 기다리는 자세.
듣는 목소리
-남지은, 『그림 없는 그림책』(문학동네, 2024)
딴짓하듯 꿈 밖에 시를 만든다
그럼 좀 가벼워진다
-「새벽 탈출」 전문
옛날 옛적에,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는 이야기. 내겐 그런 기억이 없다. 할머니는 있었는데 이야기는 없었다. 이야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할머니는 오래 앓으셨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조각 나 있었다. 온전한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야 했다. 조각을 이어붙이는 바느질은 서툴렀다. 덕분에 여태 간직하고 있는 조각보는 그저 누추하다. 그런 조각보도 나름 소중해서 추울 적마다 나는 누추한 조각보를 꺼내 덮어보곤 한다. 할머니의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 결국 나에게로 도착한 이야기. 나의 조각보.
그림책을 대할 적이면 나는, 나의 조각보를 뒤춤에 숨긴다. 그림책은 언제나 아름답다. 성의 있게 솜씨 좋게 기워진 알록달록함은 참 따뜻해. 몇몇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 것 마냥 가져볼 때도 있다. 어쩜 그리 순순한지. 그림책은 잘도 내 것이 된다. 말없이 웃는다. 나의 할머니 이야기가 되고 나의 아버지 이야기가 되고 결국 나에게로 도착한 이야기가 되어주는 그림책. 이야기는 이야기를 사랑해서 서로 기꺼이 어울리고 나의 누추한 조각보와 그림책의 알록달록한 조각보는 사이가 좋다. 뒤춤에 감추려는 노력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남지은의 첫 시집을 기다렸다. 남지은은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이고 세상에는 들어주는 이야기도 있다. 들어주는 이야기는 들어주는 목소리. 들어주는 목소리가 펴낸 들어주는 시집을 책장에 꽂고 싶었다. 마침내 시집이 태어났구나. 제목을 보고는 가만히 놀랐기도 했다. 몰래 간직한 바람을 시인이 알고 있었나. 바람을 들키는 건 부끄럽고 기분 좋은 일이다. 아니, 기분 좋고 부끄러운 일이다. 어째서 시집을 내지 않느냐고 그간 내내 채근을 그치지 않았다. 시집을 펴보고 알았다. 차곡차곡 쌓인 빈 페이지들. 이런 일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쌓는 중에는 모르고 덜어낼 적에 알게 되는 사정이 있다. 구조나 행간 같은 딱딱한 표현 말고 조용함이라고 적어본다. 나무의 조용함. 오후의 조용함. 빈 곳의 조용함. 수많은 조용함 중에 내어주는 조용함이 있다. 가만 들어주기. 들어주는 이야기가 들어주는 목소리와 연결된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이 더 많은 시. “사랑 많은 손을 붙들고” “무어든 받아 적는”(「혼자 가는 먼 집」) 시. “다오 다정히 묶어줄게”(「성호를 그으며」) 기다리는 시. 그런 시는 나를 나에게 되찾아줌으로써 감동시킨다. 기꺼이 말해보려는 내가 기특하고 스스로 이야기가 되는 마음이 기뻐서.
그러므로 『그림 없는 그림책』의 빈 페이지는 거울-이미지. 시집을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되비친다. 말이 없는 거울은 듣는다. 듣는 것을 보여준다. “맨몸의 천사들이 공중에 걸어둔 손거울/ 그것이 반사하는 세계”는 “어느 허름한 골목”이지만 그곳에는 “푸른 제비꽃 한 송이” (「그림 없는 그림책」)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있으면 세계는 더 이상 허름하지 않고 누추한 조각보는 알록달록 근사해진다. 거울 속 변신은 속임수가 아니다. 발견이다. 거울 속으로부터의 발견은 거울을 보는 자의 것이다.
‘그림 없음’은 부재가 아니다. 그림을 비운다는 의지로 읽어야 한다. 들어주기 위해서 말을 지우듯. 그림이 없는 자리에 말간 여백이 있다. 나는 거기에 ‘가족’을 ‘살의’를 집어넣고 ‘슬픔’을 표현하고 마음을 키운다. 잊고 있었다. ‘비어 있음’은 공평하다. ‘비어 있음’에는 무슨 일이든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자주 ‘비어 있음’을 잊는다. 견디지 못하고 채워 넣으려 한다. 다 못 할 이야기를 모두 말해버리려 한다. “낙관도 포기도 아닌 말”(「테라스」)을 어리석게도 잊는다. 나는 여전히 여백인 시집의 마지막 장을 차마 넘기지 못하고 오래 들여다본다.
비우기 위하여 들였을 시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움은 안을 밖에 세우는 일이다. 있던 것을 치우는 일이고, 그사이에 갖은 애가 있다. 시인은 “비우고 나면”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을 위해 “커피잔을 들면 남는 둥그란 자국” 같은 빈자리를 마련해둔다. 그 자리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마트료시카」)의 차지. 어쩌면 행복은 나의 차지일지도 모른다고 여겨본다. 『그림 없는 그림책』은 거울이니까. 시인이 내어준 빈자리이고 곁이니까. 그러곤 조용히 들어주는 목소리이니까. 시집이니까. 더는 누추하지 않은 기분으로 내 조각보를 매만진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그랬다는 얘기를 시인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다.
울음의 소리
박연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2024)
한사코 기억할 거다
착한 당신의 뒷모습
어떻게 살다 어떻게 갔는지를
어떻게 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당신은 다 살아보았다
-「죽은 새」 부분
어릴 적엔 잘 울었다. 툭하면 울어서, 가족들 사이에선 ‘찔찔이’라 불렸다. 찔찔 운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 아버지는 내가 울면 싫어했다. 사실은 걱정이었겠지. 운다는 건 항복이니까. 못 하겠다는 포기니까. 저가 저를 이기지 못했다는 못된 성질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리고 나약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중 어느 것도 부모 마음에 들 리 없다.
나이가 들어서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눈물샘이 다 말라버렸나 싶게. 마지막 눈물은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모두가 우는데, 혼자만 울지 못해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슬픔은 잘만 느낀다. 슬프지만 울지 못할 뿐이다. 울어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울고 싶을 때도 있지 않은가. 쏟아내지 못한 감정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답답할 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때. 그럴 때의 울음은 포기나 못된 성질이나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살고 싶음, 살아 있음이다.
박연준의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을 읽었을 때, 나는 다 울어버린 기분이 되었다. 너무 울어서 쾌快하기까지 했다. 시가 울렸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시가 대신 울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의 다 울어버린 기분은 꿈에서 평생을 살다 깨어난 사내의 백발을 닮았다. 나는 박연준의 시집에 이끌려 가 한 생을 산다. 박연준은 시인 김혜순의 말을 빌려 ‘하는 것으로서의 시’, ‘시하다’를 말하곤 하는데, 나는 박연준의 시로부터 ‘사는 것으로의 시’, ‘시 살다’를 읽는다. “그걸 쓰느라 죽을 시간이 없었”(「시인하다」)으므로 그는 ‘시 산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나는 한 생을 살았고.
‘울음’은 행위가 아니라 반응이다. 외부로부터 온 자극을 내부로 수용할 때의 작용이다. 출생자는 폐부를 찌르는 공기에 운다. 아기는 기저귀의 척척함에 운다. 청년은 실연에 운다. 시인은 무엇 때문에 울까. 생각해보면 나의 다 울어버린 기분은 마음을 자극하는 소리, 시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닌가. 기실 울음소리는 어디에나 있다. 쉽게 들을 수 없을 뿐이다. 한편 삶은, 외부로부터 내부로의 틈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늘 외부를 상대해 내부를 키운다. 울음은 세계의 배면이고 박연준의 시는 나의 닫힌 신체를 열어준 셈이다.
박연준의 시는 무구하다. 경탄한다. 탄식한다. 놀라워하고 슬퍼한다. 정직함보다 투명함이다. 자극에 반응한다. 반응한다. 투명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거기에 울음이, 울음의 소리가 있다. 울음소리를 경험하는 투명한 시인은 울지 않고 울음소리를 경험케 한다. ‘시’는 “여성성을 발휘해” 쓰는 것이라 말하는 시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에서 시인은 “바닥,/ 먼지,/ 희미한 털,/ 여자짐승아시아,/ 빈 호주머니,/ 재채기, 작은 목소리”처럼 일견 사소해 보이는, 슬픔의 코드를 지닌 단어들과 함께 “부엌 바닥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언급한다. 이어지는 “이런 것을 품은” “당신이 풀어놓은 게 시”라는 진술은 박연준의 사는 시, 시 살다의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시 말하지만, 울음의 소리를 슬픔으로 이해하지는 말자. 울음은 존재 증명이다. 여기 살아 있다는 신호다. 울음은 나를 “소금으로 이루어진 칼/ 부레를 지닌 얼음/ 가난한 수도”로 만든다. “깨지고 싶은지 버티고 싶은지/ 모르겠는 금간 도자기”(「울 때 나는 동물 소리」)로 만든다. 기존의 질서를 무효화하고 생명의 정의를 뒤바꾸는 것이 울음이다. 끝없이 자신을 찾아 헤매는 존재만이 울음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살아야 한다. 다시 산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아야 보이는 숨은 세계. 세계의 이면. 울음의 쓸모. 나는 그런 것을 읽는다.
박연준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의 시는 왜 모두 행갈이를 갖습니까. 정작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마저 투명하다. 덕분에 나는 그의 리듬을 내 식으로 이해한다. 시집의 해설에 시인 신미나가 “음악이나 춤”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리듬. 그것은 울음의 등이다. “리듬만으로”(같은 시) 알아채는 소리이다. 몸으로, 몸의 감각으로만 알 수 있는 울음의 소리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적는다. 박연준의 시는 사는 시. 살아내는 시라고.
불편하고 낯선
-짧은 연재를 맺으며
내 순진무구한 사랑은
돌연 시작하거나 끝난다.
-장석주, 「계단이 있는 집」(『꿈속에서 우는 사람』, 문학동네, 2024)
그사이 몇 번 비가 내렸고 여름이 왔다. 봄과 여름 사이 몇 번의 시 낭독회가 있었는지 세어본다. 매번, 낭독회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객석 등의 조도를 낮춘다. 세심하게, 읽기를 방해한다. 내가 방해하고 싶은 ‘읽기’는 습관이 된 읽기, 우리에게 익숙한 읽기. 빛이 읽어주는 읽기, 눈으로 따라가는 읽기. 시가 흔적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인의 목소리가 결정적 단서가 되었으면 좋겠다. 따라가는 길은 개척해가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조금 더와 덜 사이의 밝기를 찾아낸다. 이윽고 낭독회가 시작되면 나는 객석 속 귀를 살핀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를 기대하면서. 불편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시 읽기를 위해 나는 시 낭독회를 기획한다. 이따금 혼자서 읽을 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좋음을 경험했다 고백하는 독자들을 만나곤 한다. 나는 그 좋음이 불편과 낯섦으로부터 기인했다고 믿는다.
시는 불편하고 낯설게 온다. 시의 수용 또한 불편하고 낯선 일이다. 이 불편과 낯섦의 한 출처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읽는 행위에 있다고 믿는 고요와 침묵을 가르고 침입하는 소리.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소리. 들리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 시는 소리를 본격화한다. 소리를 몸으로 삼고 더러 소리로부터 발생하기도 한다. 중세의 수도자들이 단상 위에 올라가 함께 읽던 경전처럼 시는 여러 소리로 울려 스스로를 완성하기도 한다. 소리는 시가 불러오는 것이고 시의 대상이 되는 세계이며, 세계의 이면을 구성하고 있는 진솔한 속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는 나를 위한 행위. 나를 잊고 배반하는 행위. 결국 나를 읽는 행위. 시가 온다. 불편하고 낯설게 나의 목소리로. 나는 나의 목소리를 읽는다.
추천 콘텐츠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