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여름호(제119호)

내가 알아차리는 곳까지 ─ 황유원론

최선교 문학평론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2023년 제6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황유원의 「하얀 사슴 연못」 등이 실린 시집 『하얀 사슴 연못』은 극도로 절제된 표현에 담긴 “차갑도록 환하고 환하도록 차가운”1) 이미지로 가득하다. 황유원은 『하얀 사슴 연못』을 닫는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 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을 모두 가보기로 한다.” 첫 시집 이후 대략 육칠 년 동안 두 작업은 완전히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전자의 결과물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후자의 결과물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 (……) 이제 앞서 말한 두 길을 모두 가본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시의 길을 두 가지로 한정한 것도 좀 우습군. 길 아닌 곳도 걸어가다보면 길이 되어 있겠지.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것이다. 계속.2)


  명확한 글이다. 그는 2022년부터 연달아 발표한 두 시집이 정확히 다른 의도로 묶였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두 시집이 각각 소음의 증폭과 감소를 시도한다는 차이의 바탕에는 존재가 소음으로 가득하다는 공통 전제가 고집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그는 이 전제에 대해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소음—불규칙하게 뒤섞여서 많은 경우에 불쾌하게 느껴지는 시끄러운 소리—을 최대한 키우거나 줄이는 방식의 작업을 시도했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이 상반되는 작업은 “완전히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성공했는지를 검열하는 대신, 『하얀 사슴 연못』이 “‘하얀(백색)’과 ‘사슴(+사슴벌레)’과 ‘연못(물)’이라는 세 요소의 협력을 전시해보는 개념적 작업”이었으며, “이 시집이 그 자체로 하나의 전시회 공간처럼 읽”히기를 바란다는 기대를 적는다. 어느 전시회의 도록처럼 읽히기도 하는 이 글에서 그는 입장해야 하는 위치나 관람 방향 따위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은 전시회로 우리를 밀어넣는다. “독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요소들의 생성과 변환을 느껴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완고하게 배치된 전제(“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와 명확한 기획의도를 밝히고 작품세계의 프레임을 구성하면서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시의 길을 두 가지로 한정한 것도 좀 우습군”이라는 말로 선수를 칠 때, 그는 자기가 설계한 다소 이분법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건축물이 스스로 허물어질 수도 있음—그리하여 확장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황유원은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그 의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것이 어떤 면에서 실패할 것 역시 미리 예측하고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키우거나 줄여보았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전부는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꾸민 기획에 가까이 다가오도록 독자를 유혹하면서 한편으로는 온전히 그 선언에 갇히지 않도록 유도한다.

  인용한 시인의 말을 경유하여 읽게 되는 것은 이분법적으로 나뉜 작품세계가 아니라 “마음대로 돌아다”닐 때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작품세계가 전개되고 좌절된 흔적이다. 그리하여 가닿게 되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고백한 기획 의도의 전제일 것이다. 존재가 소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이것이 황유원의 시가 출발하는 지점이자 도착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도착하는 지점에서 깨닫는, 존재가 소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은 출발지의 전제와는 사뭇 다른 것일지 모른다.


*


  황유원이 소음의 최대화와 최소화를 시도하기 전에 발표한 첫 시집의 제목이 ‘세상의 모든 최대화’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음을 증폭하거나 최대한 잠재워보려 했던 기획은 “최상급이 모든 나머지를 무력화시켜 버리는 밤”(「지네의 밤」) 같은 문장에 어렴풋하게 새끼를 치고 있다. ‘최상급’과 짝을 이루는 ‘무력화’는 첫 시집을 여는 기도문에서 엿보이는 그의 관심과 연결된다. 도달할 수 있는 최고도의 지점과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의 무력함. “허락하소서 우리에게/더 이상 계단이 없는 지고至高의 옥상을”.

  이러한 시인의 염원은 극점의 관념을 향해 가는 와중에 자꾸만 헛발질하는 것 같은 작품들에서 거칠게 드러난다. 첫 시집의 2부에는 「구경거리」 「지네의 밤」 「개미지옥」 같은 작품이 실려 있다. 주로 벌레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다. 해설을 쓴 성기완 시인은 2부의 시편들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나는 통관 업무를 멈추고 이걸 연금술로 간주해야 하나? 난감했다. 포기하기 일보 직전. 이걸 통관시켜 말아?”3) 

  작품세계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시편들의 궁색함을 구태여 환기하는 일이 언뜻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황유원의 일부 시편들을 읽으며 느끼는 (유쾌하지 않은 의미에서의) 당혹감은 그가 의도적으로 소음을 통제하여 증폭(혹은 감소)하기 전에 연주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굉음과 잡음으로 이루어진 전혀 조화롭지 않은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언급된 시편들에서 눈앞의 벌레에 대한 묘사는 곧장 너무 큰 관념을 향해 돌진한다. 와인잔에 빠진 그리마의 움직임을 보고 “저 물결조차 없다면 육신은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구경거리」)라고 곱씹거나, “나는 인류의 미래보단 지네에게 할당된 다리 수를 믿겠네”(「지네의 밤」) 같은 말로 지네를 그린다. 시인은 자기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극한의 관념을 붙들고 끙끙댄다. 벌레의 묘사와 ‘인간’이나 ‘미래’ 같은 관념 사이의 이음매는 계속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낸다.

  보잘것없는 존재인 벌레가 내면의 극점을 향해 돌격할 때, 그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생겨난다. 읽는 사람은 그 간극을 미처 차근차근 건너지 못한다. 결국 허술한 건축물은 붕괴되고 남는 것은 벌레, 그리고 도통 공감할 수 없는 관념의 흔적뿐이다. 문제는 “갑자기 모든 게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무질서한 그 상황의 끔찍한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그것이 “그네라도 타는 것처럼” “쉽고 간단”(「지네의 밤」)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지고의 옥상’에 근접하려는 불가능해 보이는 욕망은 엉뚱하게도 모든 것을 통달한 듯한 어조로 발화된다.

  벌레에서 시작한 이미지의 동력으로는 아직 그의 내면에서만 꿈틀대는 웅대한 관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황유원의 시작 과정에는 지독하고 집요하게 반복되는 집착이 있다. 그는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해 막대한 사유를 투입한다(“아무리 감아 봐도 눈이 자꾸 안으로 떠지는 밤, 내가 헤아린 수천수만의 양 떼들이 부풀고 있었다”, 「양 모양의 수면 양말」). 가만히 내면으로 파고드는 돌격의 고된 반복은 때로 다음처럼 강력한 이미지의 향연을 낳기도 한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 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세상의 모든 최대화」 중에서


  극점을 향한 돌격은 긴 철로를 달리는 기차의 이미지에서 동력을 얻는다. 우리는 이 시에서 그것이 질주하고, 견디고, 희망에 부풀다가 추락하고, 끝내 탈선하고 마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목격한다.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의 무게를 얹고 있는 철로는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딘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리는 듯한 고통이 육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리지 않는다(“그런다고 박쥐는 죽지 않아/그건 죽지 않지/애초에 없는 것이 죽을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 아니겠어?”, 「골 때리는 아름다움—문제의 핵심」). 금방이라도 거칠고 사나운 소리를 터뜨릴 수 있는 일렉기타 역시 덜컹거리는 기차에 실려 으르렁거린다. 끈적하게 눌어붙은 이미지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극점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돌진한다. 통제할 수 없는 이미지의 볼륨이 너무 커서 귀가 먹먹해진다.

  이 처절한 여정이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온다. 끔찍하게 길고 무거운 기차, 광폭한 소리를 내기 직전인 만 대의 일렉기타들, 발가락이 없이 기어가는 애벌레의 끈적함 등이 순식간에 눈 내린 하얀 들판으로 처박힌다. 부여잡을 수 없는 알약들이 압도적으로 황홀하게 쏟아져내린다. 힘이 탁, 풀리며 무한정으로 쏟아지는 가벼운 알약의 무거운 무게. 여기가 끝인가? 이 여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어진다.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기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철로는 견딘다. 그리고 또다시


  (……)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떨어진다. 모든 것이 다시 한번 흔들리고, 쏟아지고, 엎질러진다.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이 시는 실패의 현장 그 자체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넘어져 모두 엎질러 버”린 것들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 떨어지는 그것들이 둥, 둥 하고 울린다.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 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 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 본 적 있니!


  기차가 아니라 기차가 밟고 달리는 철로의 감각이 생생하게 다가붙는 이 시는 하나의 몸뚱이로 세상의 모든 무게를 더한 무게를 견디다가 어느 순간에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엉망의 리듬을 고백한다. 일정한 규칙 따위는 없지만 불규칙한 파열로 뒤범벅된 시의 리듬이 압도적이다. 폭주하는 기차의 선율이 철로라는 무대에서 연주된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연주에는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견”디는 연주자가 있다.

  황유원의 시에서는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음악이나 비 내리는 소리에 몰두하는 장면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이런 장면에서 그는 꼭 어떤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자신이 연출한 상황에 스스로를 가두고 오로지 듣게 만든다. “아주 깊은 기타 한 소절 정성 들여 친 후/거기 고립되기 좋은 밤이다/그 속에 밤새 눈을 내리게 한 후/철저히 나 혼자 되어/밤새 눈 내리는 소리나 듣게 하기 좋은 밤”(「인벤션」). “눈을 내리게 한”다는 대목에서 보이듯 화자는 자신이 설 무대를 준비하는 연출자처럼 ‘듣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상황을 꾸민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외부의 소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소리를 인식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황유원이 작업하게 될 음악의 재료이자 무대가 된다.


*


존재의 소음과 독대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시편에서는 자신이 의도한 극점으로 가기 위한 발버둥이 잠시 중단된다. 폭주하고 탈선하던 기차처럼 길게 내리는 “이 비는 나와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점에서 화자의 의도를 벗어났지만, 이런 계열의 시에서 화자는 오히려 “내가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비가/나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비로 남아/오로지 내리고 있다는 사실”(「1시 11시」)에 고요히 집중한다.


나의 슬픔은 내리는 이 비와는 무관하게 슬프고
내리는 이 비는 나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내린다는 사실이 무한해져서

그 무한한 간격 속으로
거의 온갖 것들이 끼어들고 있을 뿐
그 틈은 무척이나 고요해
너와 나 사이를 제집처럼 들락날락거리고 있을 뿐
(……)
그 사이엔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고
그건 모두 우리의 것이다
이 비는 소리를 잘못 낼까 두려워하지 않고 내리고

지금 이 장면을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으면
바지까지 홀딱 젖어 버리겠지

—「1시 11시」 중에서


  으르렁거리던 리듬이 잠잠해진 자리에 규칙적인 빗소리가 내린다. 이 풍경은 되레 “무한한 간격”을 만들며, 그 간격 속으로 “거의 온갖 것들이 끼어”든다. ‘지고의 옥상’에 닿으려던 욕망의 속도를 잠시 줄이고 시인은 “지금 이 장면을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어본다. 일시 중단. 빗소리를 듣고 있는 적막한 화자를 둘러싸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않을 것 같은 시간이 흐른다. 그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무 생각이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것은 그가 말 그대로 그냥 전진하기만 했다는, 아무 생각 없이가 아니라 아무 생각도 없게 하기 위해 오로지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였다”(「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

  가만히 존재의 소음을 견디고 앉아 있는 시간 동안 접어둔 장면들은 안을 향해 뻗어나간다. “우리는 그 화면을 접었고 다시는/펼치지 않았다/그 화면이 영원히/속으로 접히는 줄도 모르고”(「거울 대잡설」). 그가 잠시 주머니에 쑤셔 넣어둔 재료들은 이후 그가 준비하는 무대에서 점차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구깃구깃 접어놓은 어떤 장면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여하튼 그 안에 모든 발광과 기쁨과 통곡과 신경쇠약을 가둘 수 있는”(「초자연적 3D 프린팅」) 공간에서 상연될 것이다. “여기서 저-기로/저-기서 여기로 마음껏 건너뛰며 놀 수 있는”(같은 시) 무대의 탄생. 그 무대에서는 가령 이런 율동이 가능해진다.


18cm 검정칼새들이
이구아수폭포를 향해 돌진
난기류를 뚫고서
전속력으로 돌진하다
돌연 폭포 앞에서 속력을 줄이곤
폭포의 빈틈을 찾아


그곳으로 들어간다
마치 폭포 속으로
사라지듯이
그 속으로
뛰어듦
(……)
물은 새의 온몸으로 퍼져
비행이 되어 소멸함


새가 입을 다물자
대기가 정지했고
내 귀가 사라졌고
이윽고 
세상이 사라졌다


폭포수는 이미 새의 몸속에 없고
폭포에도 없음
—「새들의 아침 운동 연구」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로 알려진 날렵한 검정칼새들이 이구아수폭포를 향해 뛰어든다. 형용 불가능한 압도감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습관이 여전하다. 하지만 도달해야 할 최고도의 지점 앞에서 새는 돌연 속력을 줄인다. 온몸으로 부딪치는 두 물체가 맞닿는 압력 전과 같지 않다. 새는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는 폭포수 앞에서(“매번 바뀌는 입구”) 미세한 빈틈을 찾아 “사라지듯이/그 속으로/뛰어”든다.

  뛰어드는 운동의 결과로 발생한 사라짐처럼, 새의 몸을 지나간 물 역시 “비행이 되어 소멸”한다. 이내 대상(“새”)과 관찰자(“내 귀”)와 세상(“대기”)이 일순간에 정적으로 빠져드는 고요함. 하지만 전속력으로 돌진하던 에너지가 일순간 사라진 자리에는 기묘한 운동성이 얼룩처럼 남아 있다. 폭포 속으로 돌진한 새가 자취를 감춘 이후에도 그것의 기민한 몸놀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흔적도 남지 않는 삶이 아니라/다 살아낸 삶이 남아 있는 흔적”, 「새들의 선회 연구」). 이 현장에 남겨진 것은 운동일까, 소멸일까?

  시에서 자취를 감춘 검정칼새는 폭포 뒤에 자리를 틀고 새끼를 기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폭포수는 이미 새의 몸속에 없고/폭포에도 없음”. 하지만 시를 읽으면서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세상의 모든 최대화」) 같은 새의 돌격을 목격한 이상, 그것이 남긴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믿을 수 없다. “나라고 영혼 같은 걸 믿고 싶어서 믿는 줄 알아?/그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야/그것마저 없으면 정말/어쩌지?/하는 심정에/그게 있다고 무작정 우겨대는 거란 말이야”(「지껄이고 있다」).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영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고백은 다르게 들린다. 이제 후자는 깨끗하게 사라진 영혼을 보기 위한 상태로 진입하려고 한다.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아르보 패르트 센터」)라고 황유원은 썼다. 한 편의 시가 끝난 이후에, 그러니까 대상과 관찰자와 세상이 모두 “사라”진 뒤에 남겨진 ‘비행이 된 소멸’ 혹은 ‘소멸된 비행’은 시의 바깥으로 뻗어나간다(“화선지 밖까지/뻗어 가기를”, 「돌고래시」). 시 한 편을 구성하는 글자를 제외한 장소로서의 여백과 같은 그곳. 황유원의 시를 읽는 과정은 시를 읽을 수 있는 상태에 스스로를 머무르게 하는 일이다. 들리거나 들리지 않을 소리를 기다리며 존재의 볼륨을 0으로 맞추는 일.


*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어디까지 날아가나
언제까지 날아가나
바보같이 저렇게
날아가기만 하고 있을 텐가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낮의 행글라이더도 아니고
밤의 산토끼도 아닌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
밤의 행글라이더는 이제 힘이 다해간다
밤의 행글라이더에 올라탄 나는 그것을 느끼고 밤의 행글라이더를 쓰다듬어준다
숨막히는 행글라이더를 불쌍히 여겨준다 마치 그것이 나인 것처럼
마치 그것의 비행이 나의 비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추락하는 밤의 행글라이더를 내 무덤으로 삼아주고 그것과 함께 추락해준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오늘밤의 비행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내일 밤은 또 어떤 비행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펼쳐진다
펼쳐지는 그것이 원래 얼마나 많이 접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양날개의 균형을 닮은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시키며
나는 그만 이 시를 끝내지만
이 시는 끝나고도 계속 날아가고 있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 중에서


  이제 황유원의 시는 모든 인위적인 압력을 덜어내고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하나의 구조물과 같다. 화자는 자신이 시에 너무 밀접하게 접근하거나 개입할 경우에 발생할 ‘위험’을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기류를 타고 활공하는 행글라이더처럼 “밤의 행글라이더”라는 무게를 나란히 양옆에 달아둔 문장을 반복하며, 이 시는 정말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극점의 관념을 향해 치닫던 열기가 한풀 꺾이고 두 쌍의 날개가 자연스럽게 유영한다. 그저 바람을 탈 뿐인 행글라이더는 “이제 힘이 다해”가기도 하지만, 화자는 “마치 그것이 나인 것처럼” 행글라이더의 추락을 “내 무덤으로 삼아주고 그것과 함께 추락해준다”. 다시 솟구쳐야 한다는 열심이나 추락을 애달파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오늘 밤의 비행이 끝났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구동력이 사라진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내일 밤”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밤이라는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가 시의 장소라고 믿기로 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그래도 그것을 기다리며/하얗고 어둡게 기다리고/기대하며”(「썰매와 아들」). 따라서 오늘의 바람이 다하고 행글라이더가 추락하며 도달하는 곳에는 포기이나 패배감보다는 “여백 같은 평화”(「평화 여백」)가 있다. 돌격하다가 탈선하던 기차의 무게에 짓눌리던 화자가 이제는 “양날개의 균형을 닮은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끝나고도 계속 날아”갈 시를 믿는다.


지금 평화는 어디 높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평평하다

나는 걷는다

—「평화 여백」 중에서


  추락이 실패가 되지 않을 때 실패하는 모든 것들은 리듬이 된다. 시인이 닿길 원하던 “더 이상 계단이 없는 지고의 옥상”은 순백의 초월 상태가 아니라, 완성된 소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잡음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한 리듬 가운데 있었다. 마치 “고지라의 사운드 이펙트”가 “고지라의 것이 아닌 것들”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소나무 송진을 바른 가죽장갑과/더블베이스 현의 마찰/녹슨 문 여닫는 소리와/코끼리 울부짖음 따위의 일시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괴수 영화」)처럼.4)

  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시집 『하얀 사슴 연못』에서 빚어지는 최소화의 풍경 역시 처음부터 가장 깨끗하고 순수하고 투명한 것만을 모아서 완성되지 않았으리라. 그의 지난한 시적 여정이 틈틈이 주머니 안에 접어 넣었을 뒤죽박죽의 재료들이 모여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그토록 바랐을) 깨끗하고 투명한 상태를 완성한다.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기운에 가깝고/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하얀 사슴 연못」). 황유원이 그리는 투명의 상태가 쉽게 사그라지거나 부드럽고 약한 것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소화의 풍경은 투명한 이미지를 타고 점점 최대로 넓어진다.


초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
내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늘 나의 존재는 종소리 울려 퍼지다 희미해지는 데까지

한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
내면에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내일 나의 존재는 도자기잔 속으로부터 대기 중에 울려 퍼지다
대기와 뒤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뜨거운 물과 오렌지 향이 나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와
나의 전신에 퍼져나가는 이 겨울

지금 차가운 창밖으로 고개 내밀어
네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가 나의 내면
추위로 얼굴 온통 얼어붙고
너의 흰 뼛속에 스민 추위가 스미고 스미다
희미해지는 데까지가 나의 전신
희미해지다 마는 곳 너머까지가 너의 영혼

—「틴티나불리」 중에서


  “초겨울 추위 속에”서 “뜨거운 물과 오렌지 향”을 입안에 머금다가 삼켰을 때, 그것이 식도를 지나 가슴을 타고 퍼져내려가는 길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투명하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종소리”는 마치 한 잔의 “오렌지차”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 울려 퍼”진다. 마치 차가운 소리를 한 잔 떠다 마시는 것처럼. 이 시에서 “나의 존재” 혹은 “나의 내면”으로 불리는 것들의 범위는 따뜻한 음료 혹은 차가운 종소리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속도를 따라간다. 식도를 지나 가슴을 타고 몸속으로 서서히 퍼진다.

  “오늘 나의 존재”가 “종소리 울려 퍼지다 희미해지는 데까지”일 때, 이 희미한 상태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어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 울린 종소리는 정확히 몇 초 뒤에 끝난다고 할 수 있을까. 희미하고 투명하고 차가운 것이 내면에 울려퍼지는 감각을 따라 “나의 존재”는 점차 펼쳐진다. 좀처럼 어디가 끝나는 지점인지 알 수 없다. “대기와 뒤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이 시가 보여주는 원리에 따르면, 그것들은 들리는 만큼 확장된다.

  황유원은 들리는 소리의 내용만큼이나 소리가 퍼져나가며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는 순간에 주목한다. 이런 인식의 순간에 단단한 두 존재는 서로 부딪쳐서 상대의 범위를 가늠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범위만큼 상대를 확인한다. 단단한 경계가 풀리고 “희미해지는 데까지” 혹은 “희미해지다 마는 곳 너머까지”를 서로의 영혼으로 인식한다. 종소리가 가장 희미해지는 지점에 이르러 ‘최소화된 순간’은 그것을 가능한 오래, 그리고 멀리, 즉 ‘최대로 들었다는 증거’이다.

  앞서 그가 굳이 해명하지 않았던 전제는 이제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존재가 소음으로 가득하다면, 투명은 존재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0)일까? 존재가 소음으로 가득하다다는 말은 어쩐지 볼륨이 제로(0)에 맞춰져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상태에서 가능한 투명은 볼륨의 최소화와 최대화 모두를 품고 있는 무한대의 음량에 가깝다. 최소화는 나의 존재와 너의 영혼이 최대화되는 조건이다. 볼륨을 제로에 가깝게 만들 때, 최소화된 투명의 범위만큼 나의 존재가, 너의 영혼이, 시의 장소가 넓어진다. 희미해지는 만큼, 넓어진다. 

  • 1) 조강석, 「내밀하다」, 『하얀 사슴 연못』 해설, 159쪽.
  • 2) 황유원, 「시인의 말」, 『하얀 사슴 연못』, 161~162쪽.
  • 3) 성기완, 「조선어 연금술사 통관보고서」, 『세상의 모든 최대화』 해설, 229쪽.
  • 4) “내가 생각하는 시는 기본적으로 잡종, 그러니까 하이브리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 나는 그것이 처음부터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그런 종류의 사고방식을 용인할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떠올려 그것을 호출한다면, 그것들은 둘 다 동시에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이다. 다른 하나가 나머지 하나의 그림자나 무의식 같은, 뭐 그런 게 된다기보다는.”(「양육관의 괴로움—동대문」,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추천 콘텐츠

최다영 오렌지 셰이밍 ― 김나현, 「공중정원」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양수빈소설계간평리뷰가족 2025
정의정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성해나 소설집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계간 문학동네 정의정 성해나혼모노탄핵태극기 집회근대성무속정동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