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작 2024년 여름호(제88호)
공범들: 거짓말하는 자와 고발하는 자
―박은정 시집, 『아사코의 거짓말』, 타이피스트, 2024.
―휘민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한나 아렌트는 세계의 황폐화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개념으로 탄생성을 제시한다. 그는 기존의 것을 타파하고 다시 시작할 능력을 지닌 행위 주체로서 인간의 역량을 강조한다. 탄생성은 인간의 행위능력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인간을 죽음으로 치닫는 존재로 간주한 하이데거의 철학과는 다르게, 인간 행위를 하나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아렌트의 탄생성은 환멸과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의 부정적 연쇄를 끊어 낼 수 있는 개념이자 선험적 질서를 변형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잠재성을 함의한다.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가두어진 희망을 세계로 다시 꺼내 보이는 하나 의 메타포다.
문학은 하나의 탄생이다. 문학은 세계 곳곳에 퇴적된 비극적 잔해를 추출하여 새로운 체계를 구축한다. 이것은 세계의 것을 토대로 생성되지만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흔히 말하는 ‘문학적인 것’의 개념 역시 이러한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학적인 것’이란 현실의 모방으로서 문학을 지칭하기보다 현실과 불일치를 일으킴으로써 오히려 본질에 다가가는 문학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듯 문학은 ‘문학적인 것’ 일수록 더 유동성을 지니며 우리에게 주어진 질서의 경계 너머를 향할 수 있다. 문학은 거짓된 세계의 진부한 원리를 말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진부한 현실의 이미지에 물음을 던지게 하는 예술이다. 문학은 현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빼고는 다 알았다
내가 훔친 운동화를
네가 신고 다닌다는 소문
훔친 운동화는 모르는 길도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더위에 숨을 헐떡이는 개
시소 위에 놓인 돌멩이 하나
가끔은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
지루한 자신을 훔쳐 갈 도둑을 기다리듯
…(중략)…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선한 눈을 하고
서로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이 가지고 놀다 버린
작은 경이를 훔친다
―「작은 경이」 부분
박은정의 『아사코의 거짓말』(타이피스트, 2024)은 세상의 거짓을 이야기한다. 조금 덧붙이자면 시인은 현실에 잠재한 거짓들을 소재로 하여 그 이면에 새겨진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세계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직면 하는 이미지들이 거짓임을 밝히는가 하면, 그 거짓을 시 쓰기의 도구로 삼아 이미지가 파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을 언어화한다. 시의 중간에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해서 그려 봐”라는 화자의 언급은 박은정의 시가 이뤄지는 방식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가로수들이 휘청이고/ 사람들의 우산이 뒤집어지”는 광경, “투명하게 창문을 관통하는 울음”소리, “공중으로 떠오르는 파도/ 넘어지면 서 쏟아지는 나무들”(「We Lost The Sea」)의 이행, 그리고 “투명한 물방울이 오색으로 빛나는”(「문진問診」) 순간처럼, 시인은 고정된 사실 보다는 유동하는 흐름과 순간의 이미지에서 시적인 것을 추출한다.
위 시는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소문과 함께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둘만의 비밀이 소문을 타고 세계 곳곳에 스며 드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의 사실로 인해 파생되는 사태와 이미지의 흐름을 꺼내 보인다. 훔친 운동화로 야기되는 사태들은 여 러 통각과 접합되는가 하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과 직면하게 한다. 소문처럼 퍼지는 이미지의 세계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꿈꾸듯이 도주하는 거짓된 세계와 다름없다. 이번 시집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양상은 거짓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세계를 꼬집는 구조적 알레고리면서, 이러한 모순만이 역설적으로 시적인 것에 닿아 가게 한다는 문학의 본질을 대변한다. 박은정에게 시는 기표가 다른 기표의 이미지를 훔치고 도주하면서 파생되는 거짓된 유희나 다름없다. 시는 “신이 가지고 놀다 버린/ 작은 경이를” 훔치는 또 하나의 작은 경이驚異다.
천천히 사라지려다
기어이 무너지고 마는
빗금으로 번지는 세계의 노면
―「파양」 부분
모든 것이 선명하게 타올라서 끝내 희미해지는 마음. 희미한 것들 이 오래 쌓이면 재가 되기도 할까. 재가 녹으면 낡은 해변이 되기도 할까.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설익은 마음이 쌓여 갈수록 우리는 계속 걸어야 할 것이다. 생각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흔적이 그림자를 훔쳐 달아날 때까지.
―「여름 감기」 부분
거짓이란 사실 옆에 기생하는 가상의 테제이다. 거짓은 플라톤 에게는 사실을 위장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본질을 위장한 세계의 모든 이미지, 다시 말해 ‘시뮬라크르simulacre’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다시 세계에 은폐된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세계의 거짓을 들춰내기 위해, 세계의 거짓을 끌어모아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든다. 그러므로 때로 문학은 위태로움의 경계를 오간다. 문학은 “허공에 불시착하던 소리들”(「새 와 여자의 출근」)처럼 무의미하게 세계를 떠돌다가 소멸하거나, “머 나먼 도착을 기다리는 철길 위에 소리 없이 내리”(「눈송이가 찢어 버 린 늙은 맹수처럼」)던 풍경처럼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배회하다가 잊히기도 한다. 박은정 시인은 이러한 잔해들을 또다시 그 질서의 경계로부터 훔쳐 온다. 이것은 한 편의 시를 위해 다른 장르의 잔해들을 텍스트에 접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번 시집에서 다큐멘터리나 소설, 시 텍스트를 부분 인용하거나 특정한 개념을 추출하여 시적 언어에 포개 놓은 장면이 목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천천히 사라지려다/ 기어이 무너지고 마는” 이미지를 훔쳐서 “생물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빛”(「아사코의 거짓말」)으로 다시 재생시키는 일이 박은정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작업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에게 문학은 선명하게 부여된 질서를 태우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타오름으로 희미해진 잔해들을 다시 모으는 일이다. 이것은 “동쪽으로 흐르던 시간이 서쪽에서 되돌아오는”(「여름 감기」) 회억처럼, 혹은 실패를 거듭하여 온전하게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늘 우리 마음 한곳을 신경 쓰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슬림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질서 너머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잃은 것”을 회억하고 “가닿을 수 없는 곳”(「We Lost The Sea」)을 향해 우리를 부단히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이 박은정 시인이 말하는 예술이면서 그가 늘 바라보고 있는 위태로움의 정체일 터이다. 그런데 시인이 생성하는 위태로움의 정체, 그 이미지의 이면에는 어떠한 시간을 공유했던 존재들의 미묘한 정동이 함께 새겨져 있다. “구분할 수 없는 너와 내가 술잔을 내밀고/ 어깨를 붙잡고 울고 있었”(「광화문 에서」)던 시간의 어렴풋한 흔적처럼, 시인이 생성하는 거짓말에는 은밀한 서정의 힘이 겹쳐 있다.
우리가 만든 이 패배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손을 뻗으면 무연히 사라지는,
진창의 사랑을 받아먹으며 발이 푹푹 빠지다
폭죽처럼 터질 생애에서
무너지기 위해 치솟는
단 한 번의 신이 되는 것
―「스투키 연습」 부분
시인은 연습한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고 발이 푹푹 빠지는 현실의 장막을 허물기 위해서 시인은 계속 거짓을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은폐하고 있는 비밀들을 가장 ‘거짓된’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 단 한 번의 신이 되기 위해 거짓을 활용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면, 그 단 한 번의 신이 되기 위해 시인은 거짓을 말하기를 연습한다. 이러한 그의 거짓말은 아폴론적 질서에 균열을 내며 솟아나는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함께한다. “한 줌의 빛이 주문처럼 자라나”(「프리즘으로 쓴 편지」)듯 펼쳐지는 이미지의 향연. 잔존 하는 이미지에 리듬과 서정을 포개면서 나타나는 정동(affect). 시인의 거짓말이 위태롭게 비밀을 이어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거짓말이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는 자신의 비밀을 한 겹 더 쌓아 올릴 수 있다.
박은정이 눈앞의 거짓을 시적으로 활용하여 질서에 균열을 내 는 시인이라면, 휘민은 세계 곳곳에 스며든 비극에 물음을 던지는 방식으로 시적인 꿈틀거림을 일으킨다. 휘민의 『중력을 달래는 사 람』(걷는사람, 2023)에서는 세계의 불온한 지점들을 응시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시집을 여는 시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에서 화자가 “장마로 흙탕물에 휩쓸렸던 백합들이/ 쓰레기가 뒤엉킨 덤불 속에서 시든 꽃술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거나, 「무심천」에서 “[폐업 개인 사정]”이라는 간판을 바라보는 모습은 이러한 특징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 주지하다시피 휘민은 그동안 세계에 스며든 고통의 뿌리와 질서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단면을 꾸준하게 조명해 왔다. 동일성의 원리에 포획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타자의 위치에서 바라본 삶의 고달픔과 그 지점을 잠식한 불안을 말해 온 시인의 언어. 이번 시집에서는 그 불안과 고투의 한계선에서 다시 시작하여 그곳에서 허덕이는 존재와 함께 세상에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숲으로 갔다
없는 주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여기 어디쯤 아니었니?
그때 우리가 이곳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심었잖아.
나뭇잎들이 허공을 움켜쥔 채 오그라들고 있었다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중략)…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든.
주머니가 있었다면 빵 조각이라도 넣어 왔을 텐데…….
우리가 찾으려 했던 나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사이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수목한계선」 부분
“물을 계속 마셔도 목이 말라”(「그 밖의 계절에는 다소 어두운」). 시인은 채우려 해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은(는) 것에 대해 말한다. 물을 마셔도 계속 목이 마르는, 그렇게 해소할 수 없는 갈증처럼 계속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무엇과 시인은 끊임없는 고투를 벌인다. 이는 위 시에서 해수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난된 자들의 비유로 나타나며 그들의 공간이 조금씩 삶의 한계선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갈증을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라는 고백에 이어서 발화되는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라는 화자의 진술에 있다. 시인은 어른이 되었음 에도 계속 잔존하는 삶의 문제들을 결국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해소되지 않은 갈증처럼 계속 유보되기만 하는 삶의 비극을 꼬집는 부분이면서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자의 냉정한 시대 인식이기도 하다. 목이 마른 자가 있는 공간에서 여전한 것은 더 뜨거워지는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스스로 자신의 부고를 발송”(「수목한계선」)해야 만 하는 고달픈 삶의 임계 지점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꿈속에 심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찾는다. 설령 “우리가 찾으려 했던 나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더라고 시인은 기어코 그 이름을 찾으려 애를 쓴다. 휘민이 이번 시집에서 고달팠던 기억을 회억하고, 타자성을 간직하고 있는 대상을 제목으로 적어 놓거나, 현실의 비극을 알레고리로 전하는 이유는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다. 휘민은 잊었던 존재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이러한 회억이 자신에게 심한 갈증을 일으키고 마른 목구멍에 송곳이 박히는 듯한 고통을 부여하더라도, 시인은 이미 세계 곳곳에 흩어진 타자들의 탄식과 비명을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일까. 어떠한 고통은 갈증보다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목소리는/ 유리잔이 깨지는 순간 움츠러드는/ 고통의 맥놀이로 마음에 새겨진다”(「삭朔―시절인연」).
어쩌다가 당신은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어쩌다가 당신은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당신이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가
…(중략)…
어쩌자고 당신은
저 하늘의 별들에게 세 들려 하나
온종일 당신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지만
꽃말은 떠오르지 않네
당신의 손끝에서 저무는 계절만
발굴지의 어둠 위로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있네
―「발굴지에서」 부분
발굴지는 유품이 되어 버린 누군가의 흔적이 놓인 장소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는, 그렇게 세상의 질서로 호명할 수 없는 사람의 자리가 곧 시인의 발굴지다. 시인은 발굴지에서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품들을 바라본다. 이 유품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도 쉽게 기억될 수 없는 질서 바깥의 존재나 다름없다. 휘민은 “지상에서 사라진 네 흔적을”(「다시, 봄」) 다시 발굴하고 은폐된 층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그들의 이름을 곱씹는다. 물론 “꽃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눈빛 속에서 떨고 있는 엇박자의 리듬”(「상고대」)을 대신 적어 본다. “응어리진 기억이 돌아다니는 상처의 회로”(「부정맥」)에서 꿈틀거리는 언어들을, 어떻게 해서든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꽃말”로 대신 말해 보려 한다. “응답 없는 너의 시간은 언제나 미지”이며 그 끝은 “해석이 유보된 채 고통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미분」)을지라도 말 이다.
문학은 거짓이기도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문학은 거짓을 위시한 사실이다. 휘민의 시는 거짓을 위시한 현실을 꼬집고 질서에 은폐되었던 사실을 들춰낸다. 현실의 모순을 감각의 층위로 꺼내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휘민은 감각의 층위에서 떠돌다 미처 하나의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태들을 다시 고발한다. 이것은 이번 시집에서 태양으로 비유되는 현실의 질서 속에서 고투하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사태 가운데 휘민은 사건의 제보자로, 때로는 행위를 공유하는 존재가 되어 말한다. 이번 시집의 차별점은 여기에 있다. 『중력을 달래는 사람』의 화자는 발화자와 발굴자의 위치에 동시에 선다. 그러면서 그 비극의 발굴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슬픔의 중력을 온전히 느끼고자 한다. 슬픔에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가는 방식으로 슬픔의 무게를 말해 본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이 나를 등지고 떠나갈 때
차마 당신의 심장만은 보낼 수 없어
흙 묻은 심장을 직박구리와 참새 몰래
내 등골에 묻어 둔 것을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지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오늘도 내가 살아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부분
시인은 발굴지에서 말한다. 시인은 말하는 순간 탄생한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기 위해 시인은 살아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말함으로 탄생한다. 거짓된 질서에 은폐된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말할 때, 언어를 다루는 자는 비로소 인간으로서 새로운 행위능력을 지닐 수 있다.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 은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지 않을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서 가능성은 거대한 비밀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함구하지 않고 발설하고 발굴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범인이기를 자처한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어코 거짓의 세계로 다가가 그곳에서 삶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자들. 그렇게 자신이 범인 이기를 자처한 두 공범이 우리 곁에 있어, 누군가의 두근거림은 기억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하루를 더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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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하나의 실천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Persona)’도 있지만 늘 일상 속에서 글쓰기를 실천하며 텍스트를 구현해 나가는 주체도 존재한다. 여기서 글을 쓰는 주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필자(Scribens)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필자의 글쓰기는 삶의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삶과 유사성 관계를 유지하며 시간에 축적된 가치를 형상화하는 작업과 다름없다. 한 사람의 문제적 삶이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런데 바르트가 주목하는 글쓰기는 삶과 일체화된 결과물보다 끊임없는 변형과 분열 속에 파생되는 알레고리에 더 가깝다. 삶과 글을 온전히 일체화하지 않고 그 서사 이면을 건드리며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바르트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인 셈이다.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창비, 2025)은 바르트가 말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를 잘 보여 준다. 시인은 삶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기보다는 의미의 어긋남을 일으키며 그 이면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화자가 “아침에는 냄새 맡고, 코가 맞는 거지?”(「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라고 말하며 통사에 어긋난 반응을 하거나 “글자 없는 바다를 날아다녔어요/ 이렇게 믿고 싶어요”(「닫힌 마음」)라고 말하며 비가시적인 현상을 신뢰하는 장면은, 그의 발화가 일체화된 삶의 모습을 직조하기보다 “물먹은 마음”(「그냥 바다」)처럼 풍경 이면의 사유를 말하는 데 쓰임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언어가 자아를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억압적 탈승화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시인은 시점과 목소리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표면과 이면,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일성의 권력에 균열을 일으킨다. 지난밤 비가 쏟아졌다 연못 관리실에 유감을 표하고 친근함을 표방하는 문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구나 쫓겨난 금붕어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구나 닫힌 창을 바라보며 창밖에서 신문지를 깔고 김밥을 먹는다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을 때 내가 좀 처절한 것 같아 공원 모기가 발목을 초토화했다. ―「가족과 먹는 여름 김밥」 부분 이번 시집에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순간들이 행간에 혼재해 있다. 만약 그의 시에 여러 느낌의 목소리가 함께 다가온다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화자가 동시에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한 명의 화자가 말하는 시점과 각도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시적 정황을 낯설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경계가 불분명한 행간을 두고 독백과 고백을 섞어 가며 장면 속에 미묘한 정서적 움직임을 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은 무엇인가를 전경화(foregrounding)하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발화와 장면들이 동등한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객체를 무조건적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다른 시각과 온도로 발화되는 언어가 윤유나의 시를 이끈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다는 말은 종이에 새겨진 작은 시니피앙의 비유이면서 익숙한 대상을 곱씹어 낯설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의도다. 화자는 창밖에서 김밥을 먹으며 창 안으로 비춰지는 자신의 과거 이미지(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의 모습)를 객관화한다. 이는 창유리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을 반추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지만, 이보다 돋보이는 것은 고백과 독백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목소리로 공간과 시간의 격차를 허무는 기술에 있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거나 과거에서 다시 현재를 향해 발화를 이어 간다. 이렇게 “여기/ 저기”(「피를 뒤집어쓰다」)를 넘나들며 연대기적 시간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무실 커튼 너머로/ 사무실 난간 너머로”(「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 층층이 쌓이거나 혹은 흩어지며 행간을 채운다.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내 눈동자에 담겨 나를 바라보지 않는 바다를 보았다. 봉고차에 앉아 내 안의 차오른 감정에 만족하던 찰나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물이 들어오는 때의 바다였고 아직 갯벌인 바다였지만 바다는 그 어떤 바다도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구나.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 창밖의 바다를 더 멀리 바라보았다. 정말 몰랐어. 바다는 그냥 바다야. 그냥 거기에 있는 아무렇지 않은 바다야. ―「그냥 바다」 부분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 언어 없는 언어 있고 먼 밭에 저 먼 바로 ―「고유 감각」 부분 언어는 시가 되기 위해 행과 연이라는 형식 안에 놓이지만 시적인 것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에서 촉발한다. 주어진 의미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시적 언어의 잠재성이라면 윤유나는 정의하지 않음으로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삶의 무게를 쉽게 단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언어가 지닌 무게를 덜어내어 기표에 자유를 주려는 시인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윤유나 시의 또 다른 기술記述이다. 윤유나는 어떠한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그냥 바다」에는 대상의 모습을 눈 안에 담는 화자와 그 화자를 다시 바라보는 윤리적 자아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러한 메타성은 대상을 특정한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과 거리를 두며 언어가 발화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이 경우 윤유나 시의 주체는 화자도, 대상도 아닌 그 둘을 사이에 두고 발화되는 그 시니피앙이 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때로 표현이 맥락에서 이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화용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 이면에 잠재된 여러 가지 심리적 양태들을 표현하는 기제가 된다. 이렇듯 시인이 말하는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는 기의의 둘레에서 조금씩 벗어남으로 드러나는 기표를 가리킨다. 언어를 포장하여 희망을 말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언어 없는 언어’가 되기 위한 방식으로 말하기. 이는 맥락에서 한 걸음 벗어난 모호한 시어를 배치하거나 그 배치로부터 다시 언어를 도치하는 ‘어떤 기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 비린/ 짐승/ 어린/ 비/ 냄새”(「맑은샘이비인후과」)라는 언어적 증상처럼 하나의 행에 하나의 시어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앙장브망(enjambement)’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무는 서 있기로 한 건가 인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으니까 어젯밤 기록한 문자를 나열한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다 무지개 나비와 무지개 새가 무지개를 이루는 동네 세상을 미워할까 지금 달리고 있는 저 차가 인간을 치기 위해서 달리는 거라고 생각할까 ―「삶의 어떤 기술」 부분 그럼에도 이번 시집은 자신에 대한 시인의 기술임에는 분명하다. 발화와 형식의 모호함도 사실은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노력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방식이 자신만이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늘 자신 또한 어떠한 시점과 장소에 놓이는지에 따라 충분히 달리 보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윤유나의 언어가 가리키는 곳에는 절대적 토대가 없다. 그저 언어가 쓰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리고 시점과 목소리에 따라 달라지는 파토스의 연약함이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약함이 오히려 건강함에 다가서고는 한다. 일련의 특징은 때로 “나와 내가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긴 생머리, 민소매 티셔츠의」)가는 듯한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낯설게 하는 독백과 질문들은 기어코 정상적으로 비춰지는 세계의 (비정상적인) 증상을 수면 위로 가시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미워할까”라는 짧은 독백에 담겨 있듯이,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자신에 대한 기술이자 이러한 메타성으로 반사되는 세계에 대한 윤리적 자아의 기술이다. 이렇듯 윤유나의 독백은 자신에 대한 고백이면서 세계를 향한 질문이 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비록 시인이 가진 건 연약하고 취약한 세계 속의 언어일지라도 윤유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글쓰기는 현실과의 일체화된 기술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시인의 언어는 세계의 비정상성을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는 것처럼 의미가 떠나간 자리에도 언어는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시인의 독백과 고백 사이로 ‘있음’과 ‘없음’의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삶의 어떤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유나가 일관된 발화 방식에서 이탈하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남현지는 일상의 모습을 알레고리하여 불편한 지점들을 다시 텍스트 바깥으로 꺼내 보이고자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은 시적 건강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시집이다. 여기서 ‘건강(athleticism)’은 신체적인 건전함을 함의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들뢰즈는 익히 문학적 건강에 대해 현실의 병든 구조를 직시하는 일로 비유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이 보여 주는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사실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으로 말하는, 온 우주의 건강에 대한 바람에 더 가깝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삶의 구조적 모순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증식되는 불온한 감각들을 형상화하여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다.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 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호수 공원」 부분 조용해진 방 안에서 이명이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면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하면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 무한한 빌라 ―「골목의 증식」 부분 시인이 구현하는 삶의 모습은 구체적인 공간성을 지닌다. 뒷산, 호수 공원, 동물원, 중앙공원, 산책로와 같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장소가 이번 시집의 배경이 된다. 이렇듯 시인은 공공의 지점에서 포착되는 현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현실에 잠재한 구조적 폭력을 은밀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설령 그곳이 자연성으로 가득한 공간일지라도 시인이 주목하는 그 이면에는 질서 속에 묶여 있는 현실의 모순이 잠재한다. 가령 「호수 공원」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라고 말하거나 「산책로」에서 “소속이 있다 증명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직조된 자연성 곁에 내포한 인위적 질서와 억압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렇듯 남현지는 일상성을 형상화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모순을 들춰낸다. 마치 건강에는 늘 병듦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려는 듯이 시인은 반복에 내재된 구조적 폭력을 역설한다. “거기서 들려오는 소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중앙공원」). 시인은 짐작 가능한 것이라도 인식하려 하지 않으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남현지가 말하는 것이 정황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차원이라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마치 이명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귀를 괴롭히면서도 그 실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증상과 같은 것.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멈추지 않는 외부의 자극들. 이러한 점에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라는 말은 반복되는 인간 문명의 이기와 폭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아픔을 무디게 하는 질서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기도 하다. 삶의 공간에 드리운 구조적 모순을 재현하는 방식은 이번 시집에서 청각 이미지와 더불어 선형적 이미지로도 드러난다.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고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이번 전시회는 생명이 테마라고 소중한 난이 푸른 화분을 가진 난이 휘어진 방을 나와서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했다 곡선과 곡선의 복잡한 교차를 만들어 내는 모션의 생동감이 필요하다고 …(중략)… 상사에게 마트 전단지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물의 편에서 ―「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부분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다는 말은 현실을 비추는 화자의 냉소이면서 계약서의 획일화된 형식 자체가 불가피한 현실을 대변한다는 단서다. 그러므로 직선 속에 곡선을 강조하는 모습은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유이기보다, 우리가 여전히 직선의 틀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구조적 아이러니다. 이 경우 선형 이미지는 직선화된 삶의 틀과 수단화된 곡선의 한계를 동시에 꼬집는 비유가 된다. 곡선을 바라지만 직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는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남현지는 현실의 모순과 그 모순을 다시 메타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중적 아포리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치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에서 현실의 삶은 바뀌지 않고 오로지 공만 자꾸자꾸 돌아오는 궤적의 비유처럼, 시인은 자연과 일상을 잠식한 대조적 삶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시인의 말은 증식되고 반복되는 삶의 모순 안에서 무엇이든 해 보겠다는 의도로 다시 읽힌다. 이번 시집의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자연을 주체의 자리에 두는 생태 텍스트적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과정에서 병들어 있는 암흑 지점을 포착한다. 무뎌진 감각 속에 여전히 선험적인 폭력이 잠재함을 직시하는 냉소가 남현지 시를 이끄는 힘이다. 이것이 이번 시집에서 발견되는 건강한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면, 시인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시인의 시를 펼치고 함께 “들어가자 더 해 볼 수 있을 것이다”(「하나의 문만 열린다면」).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중략)…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시는 세계에 잔재하는 그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일탈을 갈구한다. 시는 정의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으며 한정하지 않고 답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인 것은 단지 어긋남을 전유하여 어긋남을 말할 뿐이다. 설령 그 모습이, 그 삶이 여전히 몇 마디의 언어로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확정적 세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인간은 늘 현실의 가능태로서 정의와 숫자 사이에서 한없이 고민하고 실패하지만, 시인은 그 삶의 허무와 소외 속에서 다시 그것을 비틀고 재현하고 증식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이번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건강의 또 다른 의미 아닐까. 일상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강함으로 언젠가는 온 우주가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역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학의 아이러니와 함께 펼쳐지는 시적인 것의 향연. 로고스와 파토스 사이에서 펼쳐지는 두 시인의 에토스가 더 기대된다면 당신에게도 시적 건강함이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두 시인이 말하는 ‘건강한 삶의 기술’이다.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의 첫 문장(「아주 환한 날들」 9면)이다. 생각해보면 저 문장은 이 책에 묶인 백수린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요청 같기도 하다. 가령 혹시 당신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처럼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은 물론 피붙이의 마음 또한 방치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지, 그로 인해 뒤늦게야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과 자식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닌지를 묻는다. 소설 「흰 눈과 개」의 화자처럼 자신과 닮은 가족이 마음을 몰라주어 억울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힘들어하다가도 우연히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운 풍경을 함께 마주하며 과거의 상처를 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들은 분명 부모세대를 향해 쓰이지만 교감에 참여하는 자식세대를 향하는 물음으로도 보인다. 물론 백수린의 소설이 가족을 둘러싼 갈등과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소설은 마음의 바깥에서 마음의 형성에 간섭하는 어떤 현실의 압력을 넌지시 심어놓는다. 왜 어떤 마음들은 차가운 현실 앞에 감상적이라는 말로 폄하되는지, 어째서 종(種)과 국적 같은 경계를 넘어선 관계에서 마음을 더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는지. 결국 백수린의 소설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가 거주하는 세계의 역사와 개인의 삶의 기록을 더불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밖에 또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작가의 얼굴을 마주보러 가며 나의 마음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분주했다. 감정의 서사학 2011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백수린은 올해로 15년차 소설가다. 최근 출간한 『봄밤의 모든 것』은 네번째 소설집이고, 산문집과 역서를 빼더라도 중・장편을 포함해 일곱번째 책이니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권의 책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꾸준히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먼저 『봄밤의 모든 것』을 낸 소감을 물어보았다. 2023년에 낸 첫 장편소설(『눈부신 안부』 문학동네)을 쓰고 나서 제가 십여년 동안 다룬 주제와 관심들을 한데 응축해 모아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작은 문 하나가 닫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봄밤의 모든 것』에 실린 단편소설들을 쓴 시기가 장편을 쓴 시기와 일정 부분 겹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소설집을 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렇게 한단락을 잘 갈무리하고, 다른 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말하는 소설의 주제와 관심사는 내밀한 갈등을 둘러싼 것들이었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 상처와 회복의 문제, 식민과 피식민의 문제, 세대갈등과 젠더갈등 등. 그렇다면 단편을 쓰면서 가져왔던 생각이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현장에서 더 묻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다른 인터뷰1)를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단편을 통해 하려 했던 것들이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미세한 감정들. 일상의 언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감정의 기척을 포착하려 하는 시도가 단편 작업의 주된 것들이었습니다. 감정의 기척들, 감정이 일어나고 주저앉는 순간들에 대한 관찰은 백수린의 확실한 장기이다. 이 장기는 이번 소설집에도 빛을 발한다. 가령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서먹한 딸과 통화를 하고 나서는 늘 몸 쓰는 일을 찾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그녀가 오이를 잔뜩 사서 오이지를 담그거나 베란다 화분들을 한번에 분갈이하는 일은 이른바 ‘K모녀’라는 관계 속의 복잡한 심사를 잘 드러낸다. 「빛이 다가올 때」의 바닷가 풍경도 잊을 수 없다. 인물들 사이의 마음의 일렁임을 해질녘 육지와 바다 사이를 오가는 파도의 움직임으로 그려낸 장면은 감정과 풍경을 연결하는 모범답안 같았다. 이렇듯 인물에게 발생한 감정을 행위나 장면으로 전환하여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대목들이 이번 소설집 곳곳에 섬세하게 자리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섬세한 감정의 탁월한 묘사로만 평가할 사안이 아니다. 다양한 서사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억울함이나 후회의 정서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에서는 내 삶이 어딘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다.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에는 삶의 방식이나 과거를 정정하고 수선하며 미래를 현재의 자리로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백수린 소설의 감정들은 삶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게 하는 촉매들이며 삶을 수선하며 지속하는 힘의 잔향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낯선 길 위에서 서로를 돌보는 자리 백수린 소설이 자주 다루는 이국적인 공간은 “민족・국가・언어적 정체성에 급진적인 파괴성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래의 한국적・민족국가적 프레임에 갇혀 있지도 않으면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의 문제, 특히 외국어의 문제”2)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된 바 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빛이 다가올 때」와 「봄밤의 우리」에서, 우리는 또 한번 외국의 거리와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두 소설을 쓰면서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부분에 크게 방점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경험상 외국인과 내가 서로 낯선 존재처럼 느끼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오히려 한국사람들과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할 때도고요. 두 소설에 외국과 외국인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는 각각 달랐는데, 어쨌든 제게는 두편 모두 결국엔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씀으로써 자기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독자가 지레짐작하는 이국적 공간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는 답이었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 배경이 발휘하는 특수한 효과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수린 소설의 타자들은 국경이나 종과 같은 경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찾아온다. 「빛이 다가올 때」나 「봄밤의 우리」가 보여주듯 뉴욕과 빠리 같은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인물간의 관계 맺음이 국적과 무관하다는 설정은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무수한 타인 중 특히 경계 너머의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화자의 서사가 흥미롭다. 「봄밤의 우리」에서의 ‘유타’와 ‘나’ 또한 그렇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인 ‘나’와 일본인 유타는 그들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문화적 관습을 벗어나 있어서인지 함께 경험하고 깊게 교감하는 순간을 드물지 않게 맞이한다. 유럽을 방문한 동아시아인이라는 범주도 이들의 친밀함에 기여했겠지만 아마도 그들 사이의 친밀함은 서로를 돌보는 과정이 빚었을 것이다. 낯선 타지의 삶을 꾸리기 위해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돕게 된다. 한끼 식사를 나누는 힘조차 이들의 삶에서는 더없이 각별하다. 긴장과 갖가지 우연성이 증대하고 더불어 취약함과 상호의존성까지 높아진 상황은 일상적인 일들도 특별하게 가동시키며 두 사람 사이 경험의 밀도를 상당히 높이게 된다. 둘 사이에 공유된 언어가 적은 만큼 대화에 더 깊이 참여하며 말을 맞추어가는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흰 눈과 개」에서 언급되는, 반려견을 입양하기 위해 필요한 “애정과 훈련”(127면)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애정을 가지고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훈련 말이다. 그렇게 도시를 걷다 보면 그녀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불멸이 된 죽은 이들이 떠올랐다. 막이 내리면 사라져버리는 일회적인 것이라 연극을 좋아한다던 유타와 달리 그녀는 미래에도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에 연극이 좋았고, 같은 이유에서 길을 걷다 골목이나 다리의 이름으로 남아 영속하는 빛나는 이름들을 마주치면 마음이 일렁였다. 그런 밤들엔 이따금씩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기온이 충분히 낮지 않아 닿는 순간 덧없이 녹아버리던 눈송이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구시가지에 눈송이가 흩날리는 풍경은 그녀의 눈에 그저 아름다웠고,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기꺼이 눈을 맞았다. “너무 아름답지?” 그녀가 돌아보면 평소보다 얼굴이 환해 보이는 유타가 말없이 웃었다.(「봄밤의 우리」 82면) 애정과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삶의 깊이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는 걸까. 백수린의 이번 소설집에는 몇몇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그 장면들은 대개 혼자가 아닌 순간에 찾아온다. 인물들이 내적 독백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들은 무엇인가를 방어하려는 듯 촘촘한 일상의 시간표 위에 자리하거나 고통어린 사건들을 반추하고 있다. 반면에 잘 통하지 않는 대화라 할지라도 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삶에 찾아온 낯선 존재와 일정한 시간을 보내고 그 존재에게 내 삶의 한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세상은 마치 감춰놓았던 것만 같은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때로는 떠맡겨진 앵무새와 함께(「아주 환한 날들」), 외국인 친구와 함께(「봄밤의 우리」),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아버지와 함께(「흰 눈과 개」) 대화를 나누려 애쓴 시간들이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는 차원으로 그들을 슬그머니 옮겨놓는 것이다. 「빛이 다가올 때」에 그려진 뉴욕에서 만난 사촌언니의 생생한 삶의 경험들도 더불어 볼 만하다. 한 문화가 부여한 특권적 자리(교수)와 관습적 책임(장녀)에서 놓여나자 언니의 삶은 비로소 어떤 해방을 맞이한 듯 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은 이처럼 자신의 이력을 내려놓을 때 상실했던 삶의 감각이 회복될지 모르며 불안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의 찾아온다는 것을 일러주기도 한다. 외국이란 나를 이상한 평등의 자리에 옮겨놓는 무대와도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언니가 스무살이나 어린데다 아직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대에게 이끌림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물론 외국은 인종차별 등 예상 가능한 불평등이 작동하는 장소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전 소설집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에서 동양인 여성에게 캣콜링을 하는 남성들에 대해서나(「시간의 궤적」) “인종차별이 나쁜 것임을 아직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아이들의 무구한 장난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흑설탕 캔디」 180면)를 상기하는 장면을 분명히 새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외국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작가는 다른 강조점을 언급한다. 제가 더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인물들의 나이의 간극이에요. 「봄밤의 우리」에서 유타가 외국인이라는 것보다는 나이가 많고 특이한 남자라는 점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와 ‘나’의 나이차를 일부러 강조해서 썼어요. 「빛이 다가올 때」에서 개리는 ‘나’와 언니의 일상에 공평하게 등장하지만 ‘나’와 달리 언니에게 큰 영향을 주죠. 인물간의 나이차를 통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타자나 약자로 보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적인 시선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던 시기였다. 갈 수 있는 데가 줄어들고 만날 수 있는 인원이 적어지면서 좁아진 생활 반경으로 인해 답답함을 느낄 때 한 지인이 그 곤란함은 노인이 평소에 느끼는 몸의 감각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말의 둔중한 충격이 오래 남았다. 한국사회 대부분 주류문화의 신체 감각은 젊은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언어화된다. 백수린의 소설은 최근으로 올수록 그러한 낙차와 공백을 언어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확실히 눈에 띈다. 몸과 마음의 시차 이모할머니는 또 무슨 소리를 냈던가? 모과나무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 다혜를 놀라게 한 것은 이모할머니에게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온갖 소리였다.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앉았다 일어날 때 내는 신음 소리. 이모할머니는 잡초를 뽑거나 다림질을 하면서 혼잣말을 했고, 걸어 다니면서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었으며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갈 때는 문을 꼭 닫지 않은 채 볼일을 봤다.(「눈이 내리네」 180~81면) 「눈이 내리네」에서 대학에 막 입학한 ‘나’는 이모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전에는 몰랐던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할머니의 늙고 둔감해진 육체가 무심결에 내는 그 사소한 소리들을 통해 ‘나’는 늙음의 속성을 유심히 생각해보게도 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러니까 둘의 동거가 막 시작됐을 무렵에 화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타인의 눈에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 주어진 실로 놀라운 특권 같다”(181면)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점차 정정된다. 흔히 신체가 노화하면 내적으로도 약화되거나 상실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에 걸린 몸에 전신마취를 하는 게 극도로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당장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고 싶어서 어깨 수술을 결심하거나 이제 막 한글을 배우며 기뻐하는 이모할머니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최후의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204면)던 이십대 화자는 젊음과 늙음의 전형을 기준으로 삼아 보면 명백히 뒤바뀐 듯하다. 몸이 낡아가더라도 정신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게 인간이며, 어린 시절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노년이 되어서라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머리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몸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그려 보이는 그의 소설 덕분에 새삼 앎 또한 ‘몸의 일’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내 몸이 최근 몇년 사이에 정말 달라졌구나, 이제는 정말 젊음을 비껴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특히 육체적으로요. 앞으로도 마음은 계속 이 상태일 텐데 몸은 노쇠해지겠구나 싶으면서 저절로 노인의 삶이 궁금해졌어요. 노인의 마음에도 지금 나와 같은 게 들어 있을 텐데, 하지만 몸은 나보다 더 마음 같지 않을 텐데, 그런 노년이라는 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저절로 일었어요. 한동안 소설을 쓰면서 노년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몸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그의 이야기는 동시에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수린의 소설에서 중년이란 몸의 생기와 다소 뒤늦은 마음의 성숙이 어느정도 일치하는 데서 오는 시야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장이 아닐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마흔이 넘은 언니가 스무 살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것에 “사회 통념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일”(66면)이라는 해석을 붙였던 화자가 그 시절의 언니 나이가 되어 “이제 나는 안다”(70면)고 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 소설의 사십대 화자가 젊은 시절 자신의 성급한 판단들을 철회하면서 중요하게 덧붙이는 말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같은 면) 타인의 방식대로 세상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나와 타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식의 사고로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백수린의 인물들은 각자의 느낌과 감정에 가로막힌 채 오해의 상황을 겪지만, 늦더라도 이를 알아채고 스스로 조정하려 애쓰며 저 단절을 넘어서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백수린은 우리가 이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서사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는 작가이다. 더불어 백수린의 소설에서 그려진 사십대는 경제적 주체로서나 돌봄의 주체로서 삶의 문제에 어느정도 적응한 상황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다수의 여성 인물들은 지난 이십대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때로부터 달라진 삶의 조건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그들이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생기만이 아니다. 사회의 일원이 될 꿈을 품고 자신의 가능성의 크기에 매달렸던 그들은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라는 여성의 생애주기를 통과하며 더이상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호우」).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며 마음이 늙는 상태에 도달한 듯도 하다. 하지만 앞서 나이든 몸의 서사가 소멸되지 않는 생기를 보여주었듯 마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가족서사의 확장과 문학의 힘 이번 소설집에서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흰 눈과 개」 「아주 환한 날들」은 평생 일한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은 독립한 시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딸과의 깊은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소원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있다. 두 소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리는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몫까지 대신하려는 듯 자영업자로서 억척스럽게 가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고, 「흰 눈과 개」의 화자 역시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로서 직장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피붙이와의 정서적 유대를 지속하는 데 실패한 인물들이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근대적 핵가족 내에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 아버지의 자리까지 감당하는 데서 두 작품 모두 부녀관계 서사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모녀관계의 갈등을 다룬 여성작가의 소설들이 하나의 영역을 이루며 ‘K모녀서사’라는 명칭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에 비하자면 부녀관계의 갈등과 친밀성을 특별히 다루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문학 내에서 이런 현상은 가부장적 질서의 퇴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계 부양의 역할을 포함해 더이상 가족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아버지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이러한 면모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제 이전 작품들 중에 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은 대부분이 딸이나 손녀의 입장에서 윗세대를 보는 이야기였어요. 그런 이야기를 여러편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입장, 윗세대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해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이제껏 모녀의 갈등을 주로 다뤘다보니 다른 젠더의 가족구성원이 겪는 갈등도 들여다보고 싶어져 「흰 눈과 개」를 쓰게 됐어요. 부모세대는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대이고 심지어 저는 아이를 기른 경험도 없기 때문에 많은 부분 짐작으로 써야 했고, 그래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어요. 몰라도 일단은 써보자 하는 마음이 나와는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하는 것 같아요. 담백한 답변이었지만 문학의 본질과 관련한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하기가 극히 조심스러워진 근간의 상황은 문학이 오랫동안 해온 적극적 상상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면모가 없지 않다.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든 상황에 대해서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반 정도만 정확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착각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존재들이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때론 망상과 한끗 차이일지 모른다.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합리화를 공고히 하면 할수록 딸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듯이 보이는 이유도 그렇다. 사적 영역과 공적 세계 역시 본래 뚜렷한 구분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경계를 넘어서서 상상하고 사유하고 형상화하는 일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면, 문학은 다른 이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함으로써 공적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우리를 더 연결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문학은 사실에 기반을 두되 사실 이상의 것을 허구적으로 형상화할 힘을 갖기에, 문학에서는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타자들에 대한 상상이 값진 일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 인물의 목소리와 시선을 성급히 재단하지 않는 일도 필요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에서 딸의 자리의 목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소설들에서 딸의 자리는 듣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열심히 들어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더 꺼내어 이야기해 보이는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중요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경유하는 진실 백수린 소설에서 문학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치 중 하나는 거짓말이기도 하다. 좀더 과감하게 말해보면 그의 소설은 사실만으로 소통이 가능한가, 사실만으로 쓰인 서사가 가치있는가를 질문한다. 첫 장편 『눈부신 안부』에는 타국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2030 여성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자리한다. 하지만 한 인터뷰3)에서 자신과 또래인 주인공이 앞선 세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바람과 참사의 유가족이 그 딱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던 마음이 합쳐져서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나는 후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1995년 대구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를 상기하게 하는 사건으로 ‘해미’는 언니를 잃는다. 이 사고 이후 해미의 가족은 더이상 이전의 삶의 방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중심서사는 유학을 결심한 엄마를 따라 큰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로 이주한 이후 해미가 만난 파독 간호사 ‘이모들’의 이야기를 따라서 전개되지만, 한편으로 주목할 점은 참사 이후 가족의 해체와 구성원들의 심리적 어려움이다. 유가족이나 피해자 가족이라는 호명은 이들의 삶에 무겁게 덧씌워지는데 소설은 그렇게 위축된 마음이 위선과 위악을 낳는 방식을 또한 신중히 그려 보인다. 그 시절 나는 엄마에게 무척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당시 내가 한 거짓말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눈부신 안부』 33면) 해미는 사고 이후 엄마에게 상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상처 입은 부모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매일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백수린 소설에서의 거짓말은 기대와 욕망을 품은 말이고 현재의 문제를 가상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말이다. 해나가 거짓말로 쓴 편지가 죽음을 앞둔 ‘선자 이모’를 더 살게 하는 것, 그 편지가 마침내 이모의 첫사랑에게 전해지는 것, 이후 세간의 시선과 오래 떨어져 지낸 시간으로도 훼손되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이 또한 대체되지 않는 사랑(가족)을 잃은 제삼자에게 전달되는 것. 이들 장면은 눈부시지 않을 수가 없다. 저에게 ‘거짓말’의 반대말은 ‘사실인 말’이고,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거짓말에 늘 관심이 많았어요. 거짓말을 경유해서 가닿게 되는 진실이라든지, 거짓말에 의해서 유지되는 관계들 같은 것에요. 저는 거짓말이 소통에 있어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에서는 사실적, 객관적 그런 말들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을 옹호하는 언어가 거짓말인 셈인 듯해요. 연결하는 눈과 연대하는 삶 마지막으로 연작 작업에 대해서 물었다. 「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학교 유적 답사 동아리에서 만난 이들은 사랑과 질투, 우월감과 패배감을 나눠가지며 한 시절을 치열하게 함께 보냈지만, 이후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지낸다. 누군가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다른 누군가는 미혼인 채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며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삶의 자리에 놓인 이들은 우연한 기회로 같이 여행을 가게 된다. 오래 다른 삶을 살아가던 여성들을 한데 불러모아본 이유가 궁금했다. 세 소설이 애초에 연작으로 기획된 작품은 아니었고 소설집을 묶으면서 연작으로 만들 생각에 인물들에게 이름을 새로 붙이고 조금씩 수정을 했어요. 「눈이 내리네」를 쓰는 내내 「호우」에서 다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쓸 때까지 계속됐어요. 작품집을 묶으려고 세 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이들을 연작으로 만들면 내가 원래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보통 저는 단편을 쓸 때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최대한 깊이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의 장면을 통해 집약적으로 이야기하려는 편이에요. 한 장면을 세밀하게 세공하는 게 저에게는 단편을 쓸 때 중요한 작업이었거든요. 「호우」와 「눈이 내리네」를 쓸 때는 그보다 인물의 삶을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긴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답변을 듣고 보니 세번째 소설집(『여름의 빌라』)을 출간한 즈음의 인터뷰4)에서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질문자는 백수린 소설에서 회고적 구성을 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지적과 함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유지되지 않는, 서로 처지가 달라지며 사그라든 관계가 잔상처럼 남는다고 말했다. 이에 백수린 작가는 과거를 복기하고 재해석하는 게 타인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우리는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밖에 없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능력”이 있다고 답했다. 실패하고 복기하면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을 좀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소설쓰기의 동력이었다는 말일 테다. 전체가 하얗게 비어 있는 화폭 한가운데 요나는 아주 작은 글씨로 단어 하나를 써놓았는데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것을 ‘솔리테르solitaire, 고독’라고 읽어야 할지 ‘솔리데르solidaire, 연대’라고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는 오래전 한 단편에 까뮈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인용해두었다(「꽃 피는 밤이 오면」, 『폴링 인 폴』 235면). 이번 소설집에 실린 「봄밤의 우리」에서도 까뮈의 작품이 언급된다. 그러고 보면 까뮈의 소설에서 종종 이상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던 빛과 백수린 소설의 빛이 닮아 있는 듯도 하다. 까뮈 문학의 키워드라고 할 만한 인간 삶의 부조리를 백수린 식으로 해석하면 고독과 연대에의 감각을 동시에 간직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이방인의 감각을 갖고 있기 일쑤이고, 개별적 몸의 고유한 감각과 느낌 속에 깊이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 감각을 작가는 밝음과 어둠의 속성이 절반씩 깃들어 있는 시간인 ‘봄밤’이라고 쓴다. 소설은 바로 그 희미한 빛에 기대어 ‘모든 것’을 말해보는 고투로 시작되고, 고투 속에서 기나긴 대화의 시간과 서로의 삶의 자리를 공유하는 마음이 발동한다. 그 마음이 가닿은 장소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삶의 진실 같은 게 있는지, 다소 거창하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질문을 건넸다. 제가 소설에 빛이라고 쓴 것, 그 빛을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금 영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신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모르잖아요. 이번 소설집에 질문하는 형식의 문장이 많이 나와요. 가령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65면) 같은. 왜 살고 왜 죽는지, 심지어 왜 사랑에 빠지는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살아가잖아요. 삶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도 대개는 웃으며 살고 있고.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인데, 그 알 수 없는 무엇이 삶의 진실이고 달리 말해 신비인 것 같아요. 사실은 이 소설집에 묶인 소설을 쓰는 내내 도대체 그게 뭘까 정말 궁금했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슬프고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데도 계속 살아갈까요. 그걸 알고 싶어서 썼는데 끝내 알지 못한 채로 소설을 마무리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름다움과 신비이고 곧 진실인 것 같아요. 또 진실은 알 수 없는 와중에 알 것만 같은 어떤 찰나에 존재하겠지요. 진실은 순간적이고 미끄러지는 거고요. 그러니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는 감각으로만 말할 수 있을지도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요. 대화 중에 ‘사람, 사람들 참 모르겠다’는 엉뚱한 화제로 이야기가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때 작가는 신에 대해 말했다. 신이 인간에게 뭔가를 줬다면 아마도 분투하는 마음일 것 같다고. 뭔가를 이해하려고, 사랑하려고,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분투가 언제나 미스터리였다고 말이다. 짐짓 무거운 이야기 끝에 우리는 서로 어색한 기운을 누르려는 듯 크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동조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분투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한 인간을 그 자신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힘이 아닐까 싶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나의 마음을 숨김으로써 그 자리를 비추던 이야기의 빛에 더 몰입하고 싶었다. 그 순간에 빛이 아주 환했기 때문이다. 1) 박세희 「흥미진진한 추리와 감각적인 문장의 눈부신 만남…백수린 ‘눈부신 안부’」, 문화일보 2023.6.24. 2) 이경진 「외국어로 말 걸기」, 『창작과비평』 2014년 여름호 263면. 3) 박세희, 앞의 글. 4) 김효실 「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① “내가 재현하는 인물들을 책임져야죠”」, 한겨레21 20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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