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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작 | 2024년 여름호(제88호)

공범들: 거짓말하는 자와 고발하는 자

방승호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국제어문학회 연구이사. 2022년 계간『시작』에「지옥에서 남겨진 시체 : 허수경 유고시론」을 발표하며 신인상으로 등단. 디아스포라, 정동 이론을 바탕으로 기성 시인의 시를 다시 읽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연구서로『김남조 시의 정동과 상상』이 있다.

  ―박은정 시집, 『아사코의 거짓말』, 타이피스트, 2024.

  ―휘민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한나 아렌트는 세계의 황폐화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개념으로 탄생성을 제시한다. 그는 기존의 것을 타파하고 다시 시작할 능력을 지닌 행위 주체로서 인간의 역량을 강조한다. 탄생성은 인간의 행위능력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인간을 죽음으로 치닫는 존재로 간주한 하이데거의 철학과는 다르게, 인간 행위를 하나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아렌트의 탄생성은 환멸과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의 부정적 연쇄를 끊어 낼 수 있는 개념이자 선험적 질서를 변형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잠재성을 함의한다.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가두어진 희망을 세계로 다시 꺼내 보이는 하나 의 메타포다.

  문학은 하나의 탄생이다. 문학은 세계 곳곳에 퇴적된 비극적 잔해를 추출하여 새로운 체계를 구축한다. 이것은 세계의 것을 토대로 생성되지만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흔히 말하는 ‘문학적인 것’의 개념 역시 이러한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학적인 것’이란 현실의 모방으로서 문학을 지칭하기보다 현실과 불일치를 일으킴으로써 오히려 본질에 다가가는 문학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듯 문학은 ‘문학적인 것’ 일수록 더 유동성을 지니며 우리에게 주어진 질서의 경계 너머를 향할 수 있다. 문학은 거짓된 세계의 진부한 원리를 말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진부한 현실의 이미지에 물음을 던지게 하는 예술이다. 문학은 현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빼고는 다 알았다

  내가 훔친 운동화를

  네가 신고 다닌다는 소문


  훔친 운동화는 모르는 길도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더위에 숨을 헐떡이는 개

  시소 위에 놓인 돌멩이 하나

  가끔은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

  지루한 자신을 훔쳐 갈 도둑을 기다리듯


  …(중략)…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선한 눈을 하고

  서로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이 가지고 놀다 버린

  작은 경이를 훔친다


  ―「작은 경이」 부분


  박은정의 『아사코의 거짓말』(타이피스트, 2024)은 세상의 거짓을 이야기한다. 조금 덧붙이자면 시인은 현실에 잠재한 거짓들을 소재로 하여 그 이면에 새겨진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세계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직면 하는 이미지들이 거짓임을 밝히는가 하면, 그 거짓을 시 쓰기의 도구로 삼아 이미지가 파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을 언어화한다. 시의 중간에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해서 그려 봐”라는 화자의 언급은 박은정의 시가 이뤄지는 방식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가로수들이 휘청이고/ 사람들의 우산이 뒤집어지”는 광경, “투명하게 창문을 관통하는 울음”소리, “공중으로 떠오르는 파도/ 넘어지면 서 쏟아지는 나무들”(「We Lost The Sea」)의 이행, 그리고 “투명한 물방울이 오색으로 빛나는”(「문진問診」) 순간처럼, 시인은 고정된 사실 보다는 유동하는 흐름과 순간의 이미지에서 시적인 것을 추출한다.

  위 시는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소문과 함께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둘만의 비밀이 소문을 타고 세계 곳곳에 스며 드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의 사실로 인해 파생되는 사태와 이미지의 흐름을 꺼내 보인다. 훔친 운동화로 야기되는 사태들은 여 러 통각과 접합되는가 하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과 직면하게 한다. 소문처럼 퍼지는 이미지의 세계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꿈꾸듯이 도주하는 거짓된 세계와 다름없다. 이번 시집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양상은 거짓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세계를 꼬집는 구조적 알레고리면서, 이러한 모순만이 역설적으로 시적인 것에 닿아 가게 한다는 문학의 본질을 대변한다. 박은정에게 시는 기표가 다른 기표의 이미지를 훔치고 도주하면서 파생되는 거짓된 유희나 다름없다. 시는 “신이 가지고 놀다 버린/ 작은 경이를” 훔치는 또 하나의 작은 경이驚異다.


  천천히 사라지려다

  기어이 무너지고 마는


  빗금으로 번지는 세계의 노면


  ―「파양」 부분


  모든 것이 선명하게 타올라서 끝내 희미해지는 마음. 희미한 것들 이 오래 쌓이면 재가 되기도 할까. 재가 녹으면 낡은 해변이 되기도 할까.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설익은 마음이 쌓여 갈수록 우리는 계속 걸어야 할 것이다. 생각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흔적이 그림자를 훔쳐 달아날 때까지.


  ―「여름 감기」 부분


  거짓이란 사실 옆에 기생하는 가상의 테제이다. 거짓은 플라톤 에게는 사실을 위장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본질을 위장한 세계의 모든 이미지, 다시 말해 ‘시뮬라크르simulacre’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다시 세계에 은폐된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세계의 거짓을 들춰내기 위해, 세계의 거짓을 끌어모아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든다. 그러므로 때로 문학은 위태로움의 경계를 오간다. 문학은 “허공에 불시착하던 소리들”(「새 와 여자의 출근」)처럼 무의미하게 세계를 떠돌다가 소멸하거나, “머 나먼 도착을 기다리는 철길 위에 소리 없이 내리”(「눈송이가 찢어 버 린 늙은 맹수처럼」)던 풍경처럼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배회하다가 잊히기도 한다. 박은정 시인은 이러한 잔해들을 또다시 그 질서의 경계로부터 훔쳐 온다. 이것은 한 편의 시를 위해 다른 장르의 잔해들을 텍스트에 접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번 시집에서 다큐멘터리나 소설, 시 텍스트를 부분 인용하거나 특정한 개념을 추출하여 시적 언어에 포개 놓은 장면이 목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천천히 사라지려다/ 기어이 무너지고 마는” 이미지를 훔쳐서 “생물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빛”(「아사코의 거짓말」)으로 다시 재생시키는 일이 박은정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작업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에게 문학은 선명하게 부여된 질서를 태우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타오름으로 희미해진 잔해들을 다시 모으는 일이다. 이것은 “동쪽으로 흐르던 시간이 서쪽에서 되돌아오는”(「여름 감기」) 회억처럼, 혹은 실패를 거듭하여 온전하게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늘 우리 마음 한곳을 신경 쓰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슬림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질서 너머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잃은 것”을 회억하고 “가닿을 수 없는 곳”(「We Lost The Sea」)을 향해 우리를 부단히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이 박은정 시인이 말하는 예술이면서 그가 늘 바라보고 있는 위태로움의 정체일 터이다. 그런데 시인이 생성하는 위태로움의 정체, 그 이미지의 이면에는 어떠한 시간을 공유했던 존재들의 미묘한 정동이 함께 새겨져 있다. “구분할 수 없는 너와 내가 술잔을 내밀고/ 어깨를 붙잡고 울고 있었”(「광화문 에서」)던 시간의 어렴풋한 흔적처럼, 시인이 생성하는 거짓말에는 은밀한 서정의 힘이 겹쳐 있다.


  우리가 만든 이 패배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손을 뻗으면 무연히 사라지는,

  진창의 사랑을 받아먹으며 발이 푹푹 빠지다

  폭죽처럼 터질 생애에서


  무너지기 위해 치솟는

  단 한 번의 신이 되는 것


  ―「스투키 연습」 부분


  시인은 연습한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고 발이 푹푹 빠지는 현실의 장막을 허물기 위해서 시인은 계속 거짓을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은폐하고 있는 비밀들을 가장 ‘거짓된’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 단 한 번의 신이 되기 위해 거짓을 활용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면, 그 단 한 번의 신이 되기 위해 시인은 거짓을 말하기를 연습한다. 이러한 그의 거짓말은 아폴론적 질서에 균열을 내며 솟아나는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함께한다. “한 줌의 빛이 주문처럼 자라나”(「프리즘으로 쓴 편지」)듯 펼쳐지는 이미지의 향연. 잔존 하는 이미지에 리듬과 서정을 포개면서 나타나는 정동(affect). 시인의 거짓말이 위태롭게 비밀을 이어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거짓말이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는 자신의 비밀을 한 겹 더 쌓아 올릴 수 있다.

  박은정이 눈앞의 거짓을 시적으로 활용하여 질서에 균열을 내 는 시인이라면, 휘민은 세계 곳곳에 스며든 비극에 물음을 던지는 방식으로 시적인 꿈틀거림을 일으킨다. 휘민의 『중력을 달래는 사 람』(걷는사람, 2023)에서는 세계의 불온한 지점들을 응시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시집을 여는 시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에서 화자가 “장마로 흙탕물에 휩쓸렸던 백합들이/ 쓰레기가 뒤엉킨 덤불 속에서 시든 꽃술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거나, 「무심천」에서 “[폐업 개인 사정]”이라는 간판을 바라보는 모습은 이러한 특징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 주지하다시피 휘민은 그동안 세계에 스며든 고통의 뿌리와 질서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단면을 꾸준하게 조명해 왔다. 동일성의 원리에 포획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타자의 위치에서 바라본 삶의 고달픔과 그 지점을 잠식한 불안을 말해 온 시인의 언어. 이번 시집에서는 그 불안과 고투의 한계선에서 다시 시작하여 그곳에서 허덕이는 존재와 함께 세상에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숲으로 갔다

  없는 주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여기 어디쯤 아니었니?

  그때 우리가 이곳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심었잖아.


  나뭇잎들이 허공을 움켜쥔 채 오그라들고 있었다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중략)…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든.

  주머니가 있었다면 빵 조각이라도 넣어 왔을 텐데…….


  우리가 찾으려 했던 나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사이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수목한계선」 부분


  “물을 계속 마셔도 목이 말라”(「그 밖의 계절에는 다소 어두운」). 시인은 채우려 해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은(는) 것에 대해 말한다. 물을 마셔도 계속 목이 마르는, 그렇게 해소할 수 없는 갈증처럼 계속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무엇과 시인은 끊임없는 고투를 벌인다. 이는 위 시에서 해수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난된 자들의 비유로 나타나며 그들의 공간이 조금씩 삶의 한계선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갈증을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라는 고백에 이어서 발화되는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라는 화자의 진술에 있다. 시인은 어른이 되었음 에도 계속 잔존하는 삶의 문제들을 결국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해소되지 않은 갈증처럼 계속 유보되기만 하는 삶의 비극을 꼬집는 부분이면서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자의 냉정한 시대 인식이기도 하다. 목이 마른 자가 있는 공간에서 여전한 것은 더 뜨거워지는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스스로 자신의 부고를 발송”(「수목한계선」)해야 만 하는 고달픈 삶의 임계 지점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꿈속에 심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찾는다. 설령 “우리가 찾으려 했던 나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더라고 시인은 기어코 그 이름을 찾으려 애를 쓴다. 휘민이 이번 시집에서 고달팠던 기억을 회억하고, 타자성을 간직하고 있는 대상을 제목으로 적어 놓거나, 현실의 비극을 알레고리로 전하는 이유는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다. 휘민은 잊었던 존재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이러한 회억이 자신에게 심한 갈증을 일으키고 마른 목구멍에 송곳이 박히는 듯한 고통을 부여하더라도, 시인은 이미 세계 곳곳에 흩어진 타자들의 탄식과 비명을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일까. 어떠한 고통은 갈증보다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목소리는/ 유리잔이 깨지는 순간 움츠러드는/ 고통의 맥놀이로 마음에 새겨진다”(「삭朔―시절인연」).


  어쩌다가 당신은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어쩌다가 당신은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당신이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가


  …(중략)…


  어쩌자고 당신은

  저 하늘의 별들에게 세 들려 하나


  온종일 당신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지만

  꽃말은 떠오르지 않네

  당신의 손끝에서 저무는 계절만

  발굴지의 어둠 위로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있네


  ―「발굴지에서」 부분


  발굴지는 유품이 되어 버린 누군가의 흔적이 놓인 장소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는, 그렇게 세상의 질서로 호명할 수 없는 사람의 자리가 곧 시인의 발굴지다. 시인은 발굴지에서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품들을 바라본다. 이 유품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도 쉽게 기억될 수 없는 질서 바깥의 존재나 다름없다. 휘민은 “지상에서 사라진 네 흔적을”(「다시, 봄」) 다시 발굴하고 은폐된 층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그들의 이름을 곱씹는다. 물론 “꽃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눈빛 속에서 떨고 있는 엇박자의 리듬”(「상고대」)을 대신 적어 본다. “응어리진 기억이 돌아다니는 상처의 회로”(「부정맥」)에서 꿈틀거리는 언어들을, 어떻게 해서든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꽃말”로 대신 말해 보려 한다. “응답 없는 너의 시간은 언제나 미지”이며 그 끝은 “해석이 유보된 채 고통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미분」)을지라도 말 이다.

  문학은 거짓이기도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문학은 거짓을 위시한 사실이다. 휘민의 시는 거짓을 위시한 현실을 꼬집고 질서에 은폐되었던 사실을 들춰낸다. 현실의 모순을 감각의 층위로 꺼내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휘민은 감각의 층위에서 떠돌다 미처 하나의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태들을 다시 고발한다. 이것은 이번 시집에서 태양으로 비유되는 현실의 질서 속에서 고투하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사태 가운데 휘민은 사건의 제보자로, 때로는 행위를 공유하는 존재가 되어 말한다. 이번 시집의 차별점은 여기에 있다. 『중력을 달래는 사람』의 화자는 발화자와 발굴자의 위치에 동시에 선다. 그러면서 그 비극의 발굴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슬픔의 중력을 온전히 느끼고자 한다. 슬픔에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가는 방식으로 슬픔의 무게를 말해 본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이 나를 등지고 떠나갈 때

  차마 당신의 심장만은 보낼 수 없어

  흙 묻은 심장을 직박구리와 참새 몰래

  내 등골에 묻어 둔 것을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지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오늘도 내가 살아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부분


  시인은 발굴지에서 말한다. 시인은 말하는 순간 탄생한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기 위해 시인은 살아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말함으로 탄생한다. 거짓된 질서에 은폐된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말할 때, 언어를 다루는 자는 비로소 인간으로서 새로운 행위능력을 지닐 수 있다.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 은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지 않을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서 가능성은 거대한 비밀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함구하지 않고 발설하고 발굴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범인이기를 자처한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어코 거짓의 세계로 다가가 그곳에서 삶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자들. 그렇게 자신이 범인 이기를 자처한 두 공범이 우리 곁에 있어, 누군가의 두근거림은 기억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하루를 더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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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지 말이 달리는 방향

사회가 충분한 대화를 연습할 겨를 없이 월드 와이드 웹 체제로 진입한 것은 어쩌면 재앙이 아닐까. 표현의 자유와 의사 개진의 평등이 얼굴을 가린 채로 재빠르게 닮은 꼴을 찾아 커뮤니티란 이름으로 뭉칠 수 있는 곳은 기어이 ‘다크’한 것을 필연적 찌꺼기처럼 만들어낸다. 특정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통신망을 의미하는 다크 웹은 마약 거래, 성 착취 콘텐츠의 온상으로, 그 자체 범죄이면서 파생적으로 하위문화를 양산하곤 한다. 근자에 이런 다크 웹 문화는 음지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는 지상으로 올라와 사이버불링(cyberbullying), 악플, 온라인 성 착취 등을 하나의 놀이 문화로 만들고 있다. 범죄-놀이 문화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데, 더해서 기저에 깔린 것이 혐오의 정동이라는 점은 더 많은 악재를 내포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사용자들을 한데 묶는 공통 감각인 동시에 사용자들끼리는 도덕성을 내세워 특정인을 처벌한다는 일종의 사회정의 실천이라는 명분의 기제가 다름 아닌 혐오인 것이다. 2021년 한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게임 업체의 광고에 쓰인 집게 손 모양이 남성의 신체를 조롱하는 것이라며 문제 삼은 사건은 성별 기준에 따른 혐오의 생성과 편 가르기, 유명인에 대한 마녀사냥, 악플 공격이 순차적으로 실행된 대표적인 예인데, 이를 기점으로 혐오 심벌 캐기는 걸핏하면 사건화된다. 사용자들은 ‘사냥꾼’을 자처하며 먹잇감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타깃으로 ‘찍히면’ 사이버불링, 즉 온라인 집단 괴롭힘이 시작된다(때로 위협은 사이버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 사냥과 고발의 진정성은 전혀 담보되지 않은 채로 사냥꾼들은 사람을(동물을) 잡는다. 그러니까 WWW 체제는 ‘댓글 부대’와 같은 명칭에서 보듯 매체 사용자가 언어 주체에 포개지면서 쉽사리 권력화되는 시스템이다. 조진주의 「초모랑마는 바다였다」(『현대문학』, 2025, 6월호)에서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인터뷰 도중 ‘중심이 서지 않는다’는 표현을 해 남성성 비하 혐의를 쓴다. 타깃이 되자 사냥꾼들은 지수의 과거 발언들까지 탈탈 턴다. 반추하다는 고추가 반 토막 났다는 뜻으로, 평등과 계급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공산주의로 호도되는 식. 말도 안 되는 유추래도 상관없다.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데 맥락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말에는 발화자의 욕망이 묻어있고 그건 발화자를 떠남과 동시에 수용자(수신자)의 욕망이 붙을 자리를 새로이 마련한다. 발화자와 수신자, 각자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말은 자주 불일치와 오역 가능성이 짙은 텅 빈 기표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부쩍 늘어나는 여성 혐오 담론과 그와 함께 등장하는 남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는 불안정한 남성성의 위기를 보여주는 예라는 바넷 와이저(Banet-Weiser)의 말을 가져오면 이런 사회적 현상은 상실했다고 믿는 무엇, 자신의 몫인데 가지지 못했다는 패배 의식을 증오나 배척으로 돌려세움으로써 허약함을 방어하려는 거부의 방식으로 설명 가능해진다. 우리는 혐오의 기원이 위험에 대한 인식과 결부됨을 아는바, 어렵고 불확실한 영역에 대해서라면 혐오의 차원으로 밀어버림으로써 그 단단한 덩어리에 의존해버릴 수 있게 되므로 바넷 와이저의 저 문장에 동의는 어렵지 않다. 신지수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스스로 곡을 만들어내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으로 온라인 공격을 마주하면서 그들이 왜곡해 던지는 질문이 제 속에 정말로 있진 않은지 자문하고 검열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금하는 어휘가 늘어나고 허용되는 어휘는 그만큼 줄어든다면 말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질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그럴 때마다 지수는 티베트인 어머니와 한국과 미국 혼혈 아버지를 둔 루시 윌리엄스의 인터뷰 영상에 접속한다. 티베트어를 해석할 수는 없지만 지수는 그 영상에서 어떤 질문을 들은 것만 같다. 어쩌면 수신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를 그 문장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67쪽) 루시가 지수에게 보낸 이메일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루시에게 티베트 말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당장에 쓸모도 없는 그 말을 얼마나 배우기 싫었던지. 그런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어머니에게 남은 단 한 줄기의 언어는 티베트어이고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이는 루시뿐이다. 아버지에게는 건너가지 못하고 루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뇌 손상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을 한 사람의 정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며 어떤 이유에서든 삭제되거나 삼켜지는 맥락이 있을 것인데, 더군다나 그것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경유할 때 말은 무엇을 전달하는 중일까? 아버지에게 건너가며 삭제되는 듯 보이는 말은 실은 번역을 위해 듣고 있는 루시의 온몸으로 흡수되는 중이고, 그건 말이 더 나중을 향해 건너간다는 뜻이 아닐까. 당장에는 번역되지 않을지 모를 그 말은 루시의 몸과 시간을 느리게 통과한 뒤 어느 날 불현듯 기억되는 식으로 번역될 것 같다. 지수가 자신의 내부로 질문을 던진 것은 퍽 윤리적이고 성숙한 태도랄 수 있다. 타인에게 말의 고삐를 간단히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기를 노래하기 시작한 터이지만, 소설이 끝난 뒤에도 혐오 심벌을 조장하고 마녀사장을 일삼는 온라인 집단은 여전하다. 온라인이라는 매체 자체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운용되는 말은 발전의 방향과 전혀 상관없이 비이성적 활용은 물론 그것을 정식화하여 도덕률로 삼고 심판의 권위를 거머쥐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맥락에서 말을 오려내어 읽는 중일 때, 말은 상징계의 질서 안에 있지 않다. 그럴 때 말은 차라리 상징계에서 누락 되는 식으로 실재계로 이동하여 제멋대로 움직이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잘려 나간 말은 이제 주인 없이 떠돌며 마구잡이로 오염된다. 그렇다면 보다 엄정한 말 앞에 선 연구자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일까? 최은미의 「김춘영」(『창비』 2025, 여름호)에서 ‘운탄고도’로 불리는 폐광촌을 꼬박 1년째 찾고 있는 아카이브 연구팀 박정윤은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여성을 주체로 놓는 생애사 기술 작업에서 김춘영의 구술 채집을 맡았다. 기존의 탄광과 광부를 중심에 놓는 구술자료를 위한 면담이 김춘영이란 여성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거라 장담하는 정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윤은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243쪽). 면담 내내 신중함을 견지하며 김춘영의 심기를 살피는 것을 포함한 그러한 태도는 정윤의 연구 윤리와 닿은 것일 테다. 소설이 소환하는 것은 일명 ‘사북 사건’으로, 당시 전국 최대규모의 민영 광산에 일어난 어용노조와 광부들 간의 충돌에 공권력이 개입하면서 사상자를 내고 광부들은 고문을, 그 아내들은 성고문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1980년 4월의 일이니 시절의 흉악함을 조심스레 짐작해봄직하다. 면담의 마지막 날, 4월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폭설로 정윤은 발이 묶이게 되고, 거기에 트래킹을 하던 부부와 대민 지원을 나온 군인 둘이 합세하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김춘영이 응당 광부의 아내 아니면 여성 광부(선탄부)일 거라 여기며 존중하려는 듯 말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김춘영은 시종일관 주춤거린다. 그는 동네에서 술을 팔던 사람이었던 것. ‘막장 인생’, ‘한센인 다음 광부’라는 자조로 운을 떼는 한 광부의 회고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속으로 제 목숨을 매일같이 밀어 넣어야 했던 광부들에게 김춘영의 술집은 숨구멍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광부의 아내 입장에서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으리라.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데 일종의 사원증인 인감부를 맡기고 내일도 없이 외상술부터 마셔버리니 월급날이면 자동으로 먼저 김춘영에게 술값이 공제되고 그 나머지를 받는 형국이라 광부의 아내들에게 김춘영은 눈엣가시였을 테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면 김춘영을 좀 덜 싫어하더라는 이야기 속에서 김춘영은 탄광촌의 가장 바깥, 탄광촌의 타자다. 사실 아카이브 팀은 조심스러운 한편 김춘영에게 사북 사건에 대한 증언을 얻고 싶어 늘 질문을 준비해 다니는데, 이 질문의 목록을 들여다보자니 김춘영을 관찰자 내지는 목격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 김춘영이 목격자가 아니라면? 김춘영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누락 된 설정값을 다시금 세팅한다면 저 물음들은 가해의 언어로 뒤바뀔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더해서 김춘영을 증언자로만 대할 때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은 김춘영이라는 사람이 아닌 김춘영의 ‘말’이 될 수밖에 없기에 정윤의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자-증언자의 구도에서 모종의 위계를 배제하기란 어려워진다. 무언가를 물을 때 어떤 말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자리를 벌려놓는다. 그런데 그 자리란 게 미약하여 판단이 미리 점치는 쪽으로 마련되기 십상. 김춘영의 포지션이 광부의 아내나 여성 광부 중 하나일 거라 의심치 않는 저 악의 없는 부부의 태도에서 김춘영은 자신의 자리 없음만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식이다. 분명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공동체로부터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있었을 김춘영에게 그들의 목격자로서 진술을 얻고 싶어 기회를 살피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 정당할까, 얼마나 윤리적일까? 그건 소설 밖 우리의 현실, 증언이 유일한 통로인 역사들이 산재하기 때문이기에 간절한 한편, 누군가의 기억을 돌이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당부한다. 김춘영이 광부들에게 숱하게 팔았을 돼지두루치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손님상’에 어울려 앉지 않는 것은 과도한 엄정성일 수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려는 모종의 태도, 실낱같은 자존을 막장의 바깥에서 붙들 유일한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사건의 목격자이길, 그리하여 쓸모 있고 충실한 증언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바람은 지워질 뻔한 역사의 복원이라는 선(善)의 차원에서 발원한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저 예비 된 질문에서마저 바깥에 놓인 미처 짚지 못한 김춘영의 고통이 더 깊은 곳에 있다면 어쩌나. 쉽게 꺼낼 수 없이 몸에 각인돼 버린 그 기억 앞에서 면담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 눈치 밝은 사람이 모를 리도 없겠건만. 기다리는 답과 말할 수 없는 상황, 그 앞에 나타난 군인의 얼굴이 겹쳐 만든 이 4월이 김춘영을 바닥에 주저앉히고 오줌을 줄줄 흘리게 만들었을 때 그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모양새가 김춘영이 그날 겪거나 보았을지도 모를 일을 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타게 기다리는 증언의 한 줄보다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할 사람들은 소설 밖에 있다. 김춘영의 회고에는 언변이 좋았던 그가 마을 여자들이 탄광에 바람을 공급하는 압축기실 온수로 목욕할 수 있도록 탄광 관계자와 다리를 놓아주는 장면이 있다, 냉각수가 데워지면 그 물로 여자들이 탄가루가 묻은 몸을 씻곤 했던 것인데, 춘영은 “쓸데없는 건 다 빼줘요”(257쪽)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빼라 마라 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말미에는 김춘영의 이 이야기만 유독 구술 채집록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어쩌면 김춘영이 자신의 생애사에 남기고 싶은 순간은 단 한 순간, 진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 한 토막의 이야기, 마을 여자들이 옷을 훌훌 벗고 빈 몸으로 오롯이 자신을 환대했던 순간, 그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수 있는 자신의 효용을 증명한 그 순간, 그때가 아닐까, 더도 덜도 아닌 그 순간 광부의 아내도 여성광부도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김춘영이라는 사람도이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소설은 증언과 채집의 순간, 그 분위기를 소설로 엮어내며 누군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사실을 밀어 올림과 동시에 침묵의 이유를 사려 깊게 짚는다. 어떤 말은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는 듯이. 증언자-연구자라는 일대일 구도는 폭설의 밤, 증언자-연구자-(소설 안)청자로 확장되며 거기에 (소설 밖) 청자를 자연스레 불러들이고 말의 이동 범위를 한껏 넓혀 놓는다. 그런 장면에서 어떤 말들은 끝내 말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말할 수 없는 말ㄹ을 그렇게 우리 앞에 내민다. 그런가 하면 어떤 말은 날조된 채로 우리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물질로 환원될 가능성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도덕은 역사적 감정의 산물이라 했던가. 성해나의 「신포도밭」(『문학동네』, 2025, 여름호)은 (거짓)말이 인간을 어떻게 직조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삼대에 이어지는 가계도로 전승되며 계보학적 형성과 변이를 추적한다. 동란의 틈에서 세 살 매석의 뇌리에 남은 희미한 기억 한 줌은 기와집 솟을대문과 그것이 사대문 안이었다는 것이다. 매석은 그것을 악착같이 자신의 기원에 대한 씨앗으로 붙들고 일가를 일군다. 전국을 돌며 약을 팔던 매석은 직업에 걸맞게 ‘약 파는’ 재주, 즉 말재간이 뛰어났고 엄정성 없이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는 식으로 자기를 재정립할 줄 알았다. 장녀 매돈규와 그녀의 아들 호림이 이혼 후 성씨를 바꾸며 매씨의 대를 잇는 과정을 통해 이들의 ‘종자’는 반복 재생산된다. 호림에 이르러 그것은 다소 헐거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나면 철석 들러붙어 증식할 것이기에 헐겁거나 줄어든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매씨 일가의 중심에는 저 ‘포도밭’이 있다. 돈을 쥐고도 크게 투자할 줄 몰랐던 매석이 망설임 끝에 강남에서 밀리고 밀려나 겨우 마련한 땅으로, 개발의 희망만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신기루처럼 딱 눈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희망을 주는 그런 땅. 그건 언제까지고 강남인 듯 아닌 강남 같은 땅이다. 개발은 언제까지고 요원한 것이라 그 땅에 매석은 농약을 들이부어가며 포도를 키우고 매돈규는 짝퉁 명품 거래소 강남살롱을 연다. 매씨 일가가 날조나 다름없이 명명, 정의하는 포도밭이라는 장치는 여우의 우화를 연상케 한다. 포도를 먹고 싶지만 애써도 되질 않자 그것이 신포도일 것이라고 왜곡해버리는 여우의 이야기. 이것이 장기적, 반복적으로 누적 강화될 때 그리하여 그것이 분개가 될 때 이를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한다. 매씨 일가가 일구어낸 신포도밭의 계보학, 만성적이고 무능력한 르상티망에 정확하게 호응하는 이 소설에서 개발이 되지 않는 포도밭에다 줄을 죽 그어놓고 우리가 강남이라면 강남이라거나, 오렌지처럼 보이는 여성의 명품 가방이 가짜인 것을 보고는 어차피 다 똑같다며 가짜 상품이 오히려 합리적이라 믿는 행태는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위법적이기까지 하다. 르상티망이 자신의 무능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감정’, re-feeling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볼 때 대를 거쳐도 나아지기는커녕 반복되며 악화하는 이들의 계보는 근대의 합리성을 맘껏 조롱하는 성해나의 인식에 더해 소설의 축을 단단히 쌓아올린다. 호림에 이르러 이들의 지독한 자기 세뇌로 빚는 긍지는 다소 주춤하는 듯싶다가, 매돈규가 상표법 및 개발제한구역법 위반 등으로 입건되자 호림에게서 ‘매씨’의 강점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내 일가의 성정을 부정하는 듯 보였던 호림은 뜻밖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은행 청원경찰인 그가 은행 용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별 소득 없이 번호표만 반복해 뽑고 있는 이유미를 돕고 그 대가로 5천 원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한사코 거절해도 쥐여주는 돈이 큰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고, “모친이 말할 땐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던 행원이란 호칭이 생판 남의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진실처럼 와닿았”(253쪽)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통해 호림은 조금씩 ‘재개발’된다. 그러다 이유미의 욕망을 보자 그것은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 철석 들러붙는다. 미처 정돈하지도 못한 방치된 포도밭을 성급히 정리한답시고 휘두른 낫에 허벅지를 베이고 저 멀리 아른거리는 강남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그가 포효하는 장면은 매호림의 재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은 호림의 그런 변화를 이지러진 근대 괴물의 탄생처럼 그려내며 시종일관 우스꽝스럽던 소설에 서늘한 리얼리티를 툭하고 던지는 것이다. 근대성이 결코 합리성과 등가가 아님을 내내 설파하는 소설적 장치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더불어 호림의 변화를 우리는 결코 성장이라 말하지 않을지라도 증식이라고는 표현할 수 있겠다. 외부와 결탁한 음험한 자기최면의 말은 이제 겁도 없이 자라날 것 같다. 이정자로 살던 노년의 여성이 이유미로 개명한 것 역시 그녀가 여전히 욕망의 주체로서 살아감을 증명하듯 말이다. 나이 들어 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개명 후 통장 명의 변경과 같은 사소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비견해 홀로 불쑥 커 보인다. 그런 균형의 어긋남이 이유미를 기괴하게 보이게끔 한다. 묵혀 둔 고액 예금과 개발될지도 모르는 아파트가 바꿔다 줄 전원생활을 꿈꾸며 5천 원씩 5만 원씩 비밀을 나누는 그녀는 어쩌면 매씨 일가와 퍽 닮은 구석이 있다. 덮개 기억(Deckerinnerung). 사소하고 무의미한 듯한 기억이 유독 생생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일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정작 큰 것을 가린 작은 덮개일 수 있음을 뜻한다. 매석에게 기왓집의 대문이란 덮개 기억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합리를 도모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은 덮개로 일생을 가리고 “되뇌다보면 어느 순간 거짓은 진실이 되”(227쪽)는 삶을 착실히 쌓아놓은 일가가 낳은 것은 작정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술술 풀어낼 줄 아는, 거짓말을 돈으로 교환하려는 매호림이다.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본 도귀분-매돈규와 매호림-이유미 사이에서 누가 누구의 먹이가 되는가? (거짓)말의 점유, 그것만이 이들을 구분할 따름이다. 선수 치지 않으면 나와 닮은 그가 나를 속여먹는 게임, 그것이 이들이 이해한 세계의 작동 방식이다. 편집된 말이 신포도밭을 가진 한 가계를 통째로 정립할 때,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편집된 말의 세계에서 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는다. 라싸를 걸으며 그는 혐오 심벌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 적당히 삭제된 말을 하는 대신 자기 내면을 여실히 타진한다.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를 가리키는 티베트어로 대지의 여신, 세상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 이름은 영국인 측량국장의 이름인 에베레스트로 대체 되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조지 에베레스트로 대체될 때 저들이 잃은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를 가만히 헤아려본다. 그러면서 어떤 말은 영영 그 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결코 뱉어질 수 없는 침묵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어떤 기억의 자락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김춘영에게 그것은 발화되는 대신 차라리 신체에 깊숙이 찔리듯 새겨진 채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평생 돌아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제 와 대의를 위해 정치적이고 공적이 존재가 되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발 없는 말’이란 표현은 말이 얼마든지 뛰쳐나갈 본성을 갖고 있음을, 그 대단한 움직임의 위력을 함의하는 듯하다. 인간은 의미의 자장 안에서 내내 진동하는 존재일진대, 지금 우리의 말은 어디로 가는가서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중일까. 말은 이성의 산물이라는 문장을 전복하는 현실들은 이제 말을 조련할 힘을 빼앗긴 듯 보인다. 발 없는 말은 고삐 풀린 말이되고,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말의 먹잇감이 되고 자주 말의 발길에 차인다. 다시금 말의 고삐를 점검해 본다.

월간 현대문학 황유지 조진주최은미성해나언어증언거짓말혐오 2025
차성환 ‘곁’의 사랑, 사랑의 ‘둥지’ : 김지윤 시집, 『피로의 필요』(청색종이, 2025), 강백수 시집, 『가라 인생』(시인동네, 2025)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계간 시작 차성환 김지윤강백수사랑인생둥지 2025
방승호 건강한 삶의 기술 : 윤유나 시집, 『삶의 어떤 기술』, 남현지 시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하나의 실천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Persona)’도 있지만 늘 일상 속에서 글쓰기를 실천하며 텍스트를 구현해 나가는 주체도 존재한다. 여기서 글을 쓰는 주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필자(Scribens)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필자의 글쓰기는 삶의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삶과 유사성 관계를 유지하며 시간에 축적된 가치를 형상화하는 작업과 다름없다. 한 사람의 문제적 삶이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런데 바르트가 주목하는 글쓰기는 삶과 일체화된 결과물보다 끊임없는 변형과 분열 속에 파생되는 알레고리에 더 가깝다. 삶과 글을 온전히 일체화하지 않고 그 서사 이면을 건드리며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바르트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인 셈이다.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창비, 2025)은 바르트가 말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를 잘 보여 준다. 시인은 삶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기보다는 의미의 어긋남을 일으키며 그 이면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화자가 “아침에는 냄새 맡고, 코가 맞는 거지?”(「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라고 말하며 통사에 어긋난 반응을 하거나 “글자 없는 바다를 날아다녔어요/ 이렇게 믿고 싶어요”(「닫힌 마음」)라고 말하며 비가시적인 현상을 신뢰하는 장면은, 그의 발화가 일체화된 삶의 모습을 직조하기보다 “물먹은 마음”(「그냥 바다」)처럼 풍경 이면의 사유를 말하는 데 쓰임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언어가 자아를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억압적 탈승화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시인은 시점과 목소리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표면과 이면,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일성의 권력에 균열을 일으킨다. 지난밤 비가 쏟아졌다 연못 관리실에 유감을 표하고 친근함을 표방하는 문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구나 쫓겨난 금붕어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구나 닫힌 창을 바라보며 창밖에서 신문지를 깔고 김밥을 먹는다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을 때 내가 좀 처절한 것 같아 공원 모기가 발목을 초토화했다. ―「가족과 먹는 여름 김밥」 부분 이번 시집에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순간들이 행간에 혼재해 있다. 만약 그의 시에 여러 느낌의 목소리가 함께 다가온다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화자가 동시에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한 명의 화자가 말하는 시점과 각도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시적 정황을 낯설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경계가 불분명한 행간을 두고 독백과 고백을 섞어 가며 장면 속에 미묘한 정서적 움직임을 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은 무엇인가를 전경화(foregrounding)하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발화와 장면들이 동등한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객체를 무조건적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다른 시각과 온도로 발화되는 언어가 윤유나의 시를 이끈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다는 말은 종이에 새겨진 작은 시니피앙의 비유이면서 익숙한 대상을 곱씹어 낯설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의도다. 화자는 창밖에서 김밥을 먹으며 창 안으로 비춰지는 자신의 과거 이미지(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의 모습)를 객관화한다. 이는 창유리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을 반추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지만, 이보다 돋보이는 것은 고백과 독백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목소리로 공간과 시간의 격차를 허무는 기술에 있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거나 과거에서 다시 현재를 향해 발화를 이어 간다. 이렇게 “여기/ 저기”(「피를 뒤집어쓰다」)를 넘나들며 연대기적 시간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무실 커튼 너머로/ 사무실 난간 너머로”(「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 층층이 쌓이거나 혹은 흩어지며 행간을 채운다.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내 눈동자에 담겨 나를 바라보지 않는 바다를 보았다. 봉고차에 앉아 내 안의 차오른 감정에 만족하던 찰나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물이 들어오는 때의 바다였고 아직 갯벌인 바다였지만 바다는 그 어떤 바다도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구나.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 창밖의 바다를 더 멀리 바라보았다. 정말 몰랐어. 바다는 그냥 바다야. 그냥 거기에 있는 아무렇지 않은 바다야. ―「그냥 바다」 부분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 언어 없는 언어 있고 먼 밭에 저 먼 바로 ―「고유 감각」 부분 언어는 시가 되기 위해 행과 연이라는 형식 안에 놓이지만 시적인 것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에서 촉발한다. 주어진 의미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시적 언어의 잠재성이라면 윤유나는 정의하지 않음으로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삶의 무게를 쉽게 단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언어가 지닌 무게를 덜어내어 기표에 자유를 주려는 시인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윤유나 시의 또 다른 기술記述이다. 윤유나는 어떠한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그냥 바다」에는 대상의 모습을 눈 안에 담는 화자와 그 화자를 다시 바라보는 윤리적 자아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러한 메타성은 대상을 특정한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과 거리를 두며 언어가 발화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이 경우 윤유나 시의 주체는 화자도, 대상도 아닌 그 둘을 사이에 두고 발화되는 그 시니피앙이 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때로 표현이 맥락에서 이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화용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 이면에 잠재된 여러 가지 심리적 양태들을 표현하는 기제가 된다. 이렇듯 시인이 말하는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는 기의의 둘레에서 조금씩 벗어남으로 드러나는 기표를 가리킨다. 언어를 포장하여 희망을 말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언어 없는 언어’가 되기 위한 방식으로 말하기. 이는 맥락에서 한 걸음 벗어난 모호한 시어를 배치하거나 그 배치로부터 다시 언어를 도치하는 ‘어떤 기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 비린/ 짐승/ 어린/ 비/ 냄새”(「맑은샘이비인후과」)라는 언어적 증상처럼 하나의 행에 하나의 시어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앙장브망(enjambement)’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무는 서 있기로 한 건가 인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으니까 어젯밤 기록한 문자를 나열한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다 무지개 나비와 무지개 새가 무지개를 이루는 동네 세상을 미워할까 지금 달리고 있는 저 차가 인간을 치기 위해서 달리는 거라고 생각할까 ―「삶의 어떤 기술」 부분 그럼에도 이번 시집은 자신에 대한 시인의 기술임에는 분명하다. 발화와 형식의 모호함도 사실은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노력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방식이 자신만이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늘 자신 또한 어떠한 시점과 장소에 놓이는지에 따라 충분히 달리 보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윤유나의 언어가 가리키는 곳에는 절대적 토대가 없다. 그저 언어가 쓰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리고 시점과 목소리에 따라 달라지는 파토스의 연약함이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약함이 오히려 건강함에 다가서고는 한다. 일련의 특징은 때로 “나와 내가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긴 생머리, 민소매 티셔츠의」)가는 듯한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낯설게 하는 독백과 질문들은 기어코 정상적으로 비춰지는 세계의 (비정상적인) 증상을 수면 위로 가시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미워할까”라는 짧은 독백에 담겨 있듯이,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자신에 대한 기술이자 이러한 메타성으로 반사되는 세계에 대한 윤리적 자아의 기술이다. 이렇듯 윤유나의 독백은 자신에 대한 고백이면서 세계를 향한 질문이 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비록 시인이 가진 건 연약하고 취약한 세계 속의 언어일지라도 윤유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글쓰기는 현실과의 일체화된 기술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시인의 언어는 세계의 비정상성을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는 것처럼 의미가 떠나간 자리에도 언어는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시인의 독백과 고백 사이로 ‘있음’과 ‘없음’의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삶의 어떤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유나가 일관된 발화 방식에서 이탈하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남현지는 일상의 모습을 알레고리하여 불편한 지점들을 다시 텍스트 바깥으로 꺼내 보이고자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은 시적 건강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시집이다. 여기서 ‘건강(athleticism)’은 신체적인 건전함을 함의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들뢰즈는 익히 문학적 건강에 대해 현실의 병든 구조를 직시하는 일로 비유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이 보여 주는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사실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으로 말하는, 온 우주의 건강에 대한 바람에 더 가깝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삶의 구조적 모순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증식되는 불온한 감각들을 형상화하여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다.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 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호수 공원」 부분 조용해진 방 안에서 이명이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면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하면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 무한한 빌라 ―「골목의 증식」 부분 시인이 구현하는 삶의 모습은 구체적인 공간성을 지닌다. 뒷산, 호수 공원, 동물원, 중앙공원, 산책로와 같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장소가 이번 시집의 배경이 된다. 이렇듯 시인은 공공의 지점에서 포착되는 현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현실에 잠재한 구조적 폭력을 은밀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설령 그곳이 자연성으로 가득한 공간일지라도 시인이 주목하는 그 이면에는 질서 속에 묶여 있는 현실의 모순이 잠재한다. 가령 「호수 공원」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라고 말하거나 「산책로」에서 “소속이 있다 증명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직조된 자연성 곁에 내포한 인위적 질서와 억압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렇듯 남현지는 일상성을 형상화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모순을 들춰낸다. 마치 건강에는 늘 병듦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려는 듯이 시인은 반복에 내재된 구조적 폭력을 역설한다. “거기서 들려오는 소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중앙공원」). 시인은 짐작 가능한 것이라도 인식하려 하지 않으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남현지가 말하는 것이 정황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차원이라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마치 이명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귀를 괴롭히면서도 그 실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증상과 같은 것.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멈추지 않는 외부의 자극들. 이러한 점에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라는 말은 반복되는 인간 문명의 이기와 폭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아픔을 무디게 하는 질서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기도 하다. 삶의 공간에 드리운 구조적 모순을 재현하는 방식은 이번 시집에서 청각 이미지와 더불어 선형적 이미지로도 드러난다.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고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이번 전시회는 생명이 테마라고 소중한 난이 푸른 화분을 가진 난이 휘어진 방을 나와서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했다 곡선과 곡선의 복잡한 교차를 만들어 내는 모션의 생동감이 필요하다고 …(중략)… 상사에게 마트 전단지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물의 편에서 ―「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부분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다는 말은 현실을 비추는 화자의 냉소이면서 계약서의 획일화된 형식 자체가 불가피한 현실을 대변한다는 단서다. 그러므로 직선 속에 곡선을 강조하는 모습은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유이기보다, 우리가 여전히 직선의 틀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구조적 아이러니다. 이 경우 선형 이미지는 직선화된 삶의 틀과 수단화된 곡선의 한계를 동시에 꼬집는 비유가 된다. 곡선을 바라지만 직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는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남현지는 현실의 모순과 그 모순을 다시 메타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중적 아포리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치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에서 현실의 삶은 바뀌지 않고 오로지 공만 자꾸자꾸 돌아오는 궤적의 비유처럼, 시인은 자연과 일상을 잠식한 대조적 삶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시인의 말은 증식되고 반복되는 삶의 모순 안에서 무엇이든 해 보겠다는 의도로 다시 읽힌다. 이번 시집의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자연을 주체의 자리에 두는 생태 텍스트적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과정에서 병들어 있는 암흑 지점을 포착한다. 무뎌진 감각 속에 여전히 선험적인 폭력이 잠재함을 직시하는 냉소가 남현지 시를 이끄는 힘이다. 이것이 이번 시집에서 발견되는 건강한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면, 시인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시인의 시를 펼치고 함께 “들어가자 더 해 볼 수 있을 것이다”(「하나의 문만 열린다면」).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중략)…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시는 세계에 잔재하는 그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일탈을 갈구한다. 시는 정의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으며 한정하지 않고 답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인 것은 단지 어긋남을 전유하여 어긋남을 말할 뿐이다. 설령 그 모습이, 그 삶이 여전히 몇 마디의 언어로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확정적 세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인간은 늘 현실의 가능태로서 정의와 숫자 사이에서 한없이 고민하고 실패하지만, 시인은 그 삶의 허무와 소외 속에서 다시 그것을 비틀고 재현하고 증식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이번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건강의 또 다른 의미 아닐까. 일상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강함으로 언젠가는 온 우주가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역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학의 아이러니와 함께 펼쳐지는 시적인 것의 향연. 로고스와 파토스 사이에서 펼쳐지는 두 시인의 에토스가 더 기대된다면 당신에게도 시적 건강함이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두 시인이 말하는 ‘건강한 삶의 기술’이다.

계간 시작 방승호 건강아렌트롤랑 바르트불온알레고리남현지윤유나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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