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작 2024년 봄호(제87호)
보호하지도, 파괴하지도 않는 사람들 ― 식물 SF에 나타난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와 생존
새로운 식물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슐러 K. 르귄의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식물 행성에 도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헤인 우주를 탐사하는 열 명의 지구인 탐험가들이 주인공이다. 헤인 우주란 르귄이 만든 세계관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주 먼 옛날 헤인 행성의 개척자들이 온 우주를 누비며 정착지(혹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우주는 너무 광활했기 때문에, 헤인의 개척자들은 다른 항성계의 정착민들과 적절히 소통할 수 없었다. 아주 먼 시간,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지질학적·천체물리학적인 시간이 흐르고 나서, 대다수의 행성인들은 자신의 기원을 잊어버렸다. 아득한 시간 뒤 헤인인들은 자기 행성에 고립된 조난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금 모험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헤인인들은 심신이 행성의 환경에 맞춰 진화·적응된 형제자매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수많은 세계의 탄생을 기꺼이 탐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낯선 환경을 탐사하는 모험소설의 플롯과,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SF의 문법이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의 주인공들은, “헤인의 개척자들이 일구고 정착한 땅이 아닌, 진정으로 낯선 세상”1)을 찾아다니는 ‘극한 탐사단’의 승무원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헤인 우주가 아닌 헤인 우주의 바깥을 찾아 나선 몽상가다. 그들의 목표는 “4470 세계라 불리는 녹색 행성”에서 ‘헤인인’의 후손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러한 타자를 만났다. 4470 세계는 인간이 사는 행성이 아니었다. 그곳의 주인은 “개개의 나무 모양을 한 것들이 일종의 뇌세포”를 형성하고 있는 식물 군집체였다. 즉 4470 세계의 숲은 지표면의 모든 나무들이 모여 이루어진 생명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였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자아(self)와 개체(individual)의 개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숲은 아무런 천적도, 경쟁자도, 조력자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러나 이 자족적인 세계는 10명의 불청객들이 찾아오고 나서야 처음으로 타자를 갖게 되었다. 그것의 즉각적인 반응은 긴장과 공포였다. 이는 창세 이래 처음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모범적인 SF로서,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르귄은 지구와 전혀 다른 생태적·물리적 환경을 고안하고, 거기에 적응한 지적·인지적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는 사실 르귄의 장기다. 그녀는 번식기에만 성별 분화가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행성(『어둠의 왼손』),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분할된 문명(『빼앗긴 자들』), 동성애와 이성애가 결합한 폴리아모리 가족(「선택하지 않은 사랑」), 남성들이 일종의 트로피이자 번식 기능으로 전락한 극단적 가모장 사회(「세그리의 사정」) 등을 보여 준 바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규범들을 상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다양한 인간들의 문명을 상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 너머(post-human)의 세계를 정교하게 형상화했다. 식물들의 군집이 형성하게 되는 의식이란 무엇인가. 르귄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그것은 “감각 기관 없이 얻는 자각. 눈 멀고 귀먹고 신경도 움직임도 없는 상태. 접촉에 대한 약간의 짜증 반응. 태양, 빛, 물, 뿌리 부근 땅에 존재하는 화학물질에 관한 반응. 동물적 마음에 관한 몰이해. 마음 없는 존재. 객관이나 주관 따위는 없는 존재”다. 그것은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자이니, 말 그대로 물아일체의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포스트휴먼의 우주 및 그것과의 만남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줬다.
또한 이 작품은 대안적인 서사를 만들어 내는 데도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정신을 가진 식물이나 군집 생명체로서의 식물은 르귄의 발명이 아니다. 잭 피니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1)과 돈 시겔의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5)은 이미 ‘하나이자 여럿인’ 식물 외계인의 아이디어를 실현한 바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식물-외계인들은 개체 간 의식이 연결된 군집체다. 한편 이 식물 외계인들은 인간의 적이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낸 인간들을 사냥 하여 개성 없는 복제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여기서 식물이 하나 이자 여럿이라는 특징은 정확히 적대적인 괴물의 특징으로 활용 되었다.
요컨대 르귄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식물-외계인이라는 소재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익숙한 재료를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직조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귄의 이야기에서 군집체는 분명 공포의 대상이다. 이러한 괴물의 계보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의 외계 식물, 『스타쉽 트루퍼스』(1959)와 『엔더의 게임』(1985)의 곤충, 《스타트렉 뉴 제너레이션》(1987~1994)의 기계, 심지어 《스타크래프트》(1998)의 하이브 마인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SF들에서 타자와의 조우는 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르귄의 인물들은 접촉의 공포 속에서도 전혀 다른 만남을 수행한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오즈딘은 공감능력(empathy)을 가진 생태학자다. 그의 역할은 극한 환경에서 인지적·감정적 존재를 감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은, 오즈딘 개인에게는 고통에 다름 아니다. 그는 타인의 경계심, 긴장, 슬픔, 분노, 경멸, 충동, 좌절 등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거기에 감응(affect)된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그는 공적 생활을 지탱하는 사생활을 가질 수 없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individual)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과 연대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오즈딘은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4470 세계가 인간들에게 느끼는 공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오즈딘은 공포의 분위기가 꽉꽉 충전된 행성 위를 거닐어야 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버텨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스케일의 시련이었다.
여기 아주 익숙한 이야기의 재료가 있다. 한쪽에는 특수한 능력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다른 한쪽에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시련이 있다. 많은 독자들은 오즈딘이 그의 특수한 능력 (super power)을 발휘해서 타자(alien)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혹은 오즈딘이 숲의 의식을 설득하거나 길들이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이때 오즈딘은 이 새로운 세계의 정복자 혹은 수호자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는 정확히 《스타트렉 더 오리지널 시리즈》(1966~1969)에서 스팍이 걸었던 길이다. 그는 일종의 텔레파시인 마인드 멜드(mind meld) 능력을 활용하여 다양한 외계 종족을 제압하거나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즈딘은 그러한 영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능력을 비우는 법을 익혔다. 그는 행성에게 감정을 투사하거나 반사하지 않는 법을 연습했다. 그는 무심無心을 연마했다. 그는 행성의 아무렇지도 않고 특수할 것이 없는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두려움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초월해 버렸다”. 그는 “자신을 외계에 스스럼없이 내던져” 버렸다. 그렇게 오즈딘은 식물 세계의 진정한 정착자가 되었다.
오즈딘의 이야기 안에는 아주 낯선 서사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픽션들이 다루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과 식물의 만남을 연출한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의 정복자도 숭배자도 아니다. 그리고 숲은 인간에게 보호받지도 않으며, 혹은 많은 나무 괴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만나고, 긴장하며, 서로를 관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함께 유능해지기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SF의 쾌락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는 것이면서, 또한 새로운 서사의 방식을 경험하 게 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즉 다르코 수빈의 ‘노붐novum’이나 데 이비드 나이의 ‘기술적인 숭고’ 등의 SF적 요소들은, 새로운 방식 의 서사 안에 배치되었을 때 미학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은 그러한 의미에서 좋은 SF다. 김초엽의 이야기가 인간의 세계관을 쇄신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이것은 김초엽이 포스트휴먼(post-human)에 대한 관심 속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예컨대 김미현은 김초엽 단편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지구 되기’라는 여성적 수행성을 통해서 타자의 취약성을 배려하고, 상호 간의 집단적인 책임감을 회복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주목했다.2) 연남경은 김초엽의 여성 인물들이 “보편-단일의 과학 담론의 허상을 고발하고 세상의 편견에 저항”한다고 주장했다.3) 김은주의 경우 김초엽이 “근대적 세계관을 비평하는 동시에 다른 방식의 세계를 사유하는 방편이 되는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 준다고 보았다.4) 여기서 김초엽은 특히 ‘남성 중심의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 세계관’을 상대화하는 대안적 서사의 이야기꾼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김초엽의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은, 이러한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정치와 윤리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오길영에 따르면, 김초엽은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비인간 존재들을 “무시한 결과 발생한 파국 앞 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5) 이양숙은 이 작품이 “인간-사이보그-식물의 얽힘과 연결이 결국 지구를 행성적 위기에서 구출한다는 ‘희망적 서사’”를 보여 준다는 것이 대중적 성공의 원인이라고 평가했다.6)
나는 이러한 비평들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관점을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해석들을 강화하고 싶다. 『지구 끝의 온실』이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와 동맹을 새롭게 서사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플롯은 대체로 인간의 관점에서 독해되었다. 예컨대 『지구 끝의 온실』의 이야기는 인간이 비인간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은 바로 비인간의 입장이다. 요컨대 인간이 비인간과 연대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새롭게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연대하거나 동맹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그들에게 인간과의 동맹은 어떠한 이득이 있는 가. 그들은 진실로 인간과의 공생(symbiosis) 혹은 공산(sympoesis)에 참여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지구 끝의 온실』의 주요 소재인 모스바나에 대한 주목을 끌어낸다. 모스바나는 식물학자 레이첼이 유전자 편집을 통해 만들어 낸 덩굴식물이다. 모스바나는 세계의 재앙인 ‘더스트’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더스트에 자연 적응한 식물들”과 “증식 속도가 가장 빠른 야생 잡초들을 조합해 편집한 키메라”다.7) 그런데 이 GMO는 인간에게 유리한 형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체에 독성이 있고, 침입성이 매우 강해서 숲에 풀어놨다간 숲의 생태를 전부 파괴”할 것이다. 따라서 “더스트를 제거하는 게 확실해도 인류를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정리하자면 모스바나는 환경독소에 대해 내성을 갖추고 있고, 심지어 그것을 정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 및 인간의 거주환경을 파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스바나의 가장 가까운 SF 친척은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부해腐海일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부해는 오염된 지구를 정화하고 있는 식물과 곰팡이의 군집체다. 그런데 부해는 이러한 정화 과정에서 인류에게 유해한 독소를 뿜어낸다. 즉 모스바나와 같이 인간의 구원자이며 파괴자라는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비교할 때 『지구 끝의 온실』이 갖고 있는 흥미로운 특성은, 부해와 다르게 모스바나의 파괴적 성격이 억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사 안에서 모스바나의 위험성은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 예컨대 모스바나의 독성은 치명적이지 않아 인간이 약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모스바나가 다른 식물들, 특히 식용 작물에 미칠 수 있는 영향 역시 최소한으로만 암시되었다. 이는 김초엽 SF가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위주로, 적대와 불화를 겪는 인물과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다거나8), “지구를 구하는 영웅 서사의 익숙함”을 환기하고 “남성적이고 인간 중심주의적 과거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비판적 평가9)와도 관련이 있다. 즉 모스바나는 김초엽 SF가 인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나 비판보다는, 낭만적이고 더러는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대표적인 표징일 수 있다.
하지만 『지구 끝의 온실』을 모스바나의 입장에서 재구성해 보면 어떨까. 이때 모스바나의 무해성은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모스바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GMO라는 태생이다. 모스바나의 모든 특징은 식물학자 레이첼이 인위적으로 편집한 것으로서, 그것은 자연계에서는 볼 수 없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단정’한 유전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스바나의 제한적인 독성은, 식물학자 레이첼의 섬세한 조정과 통제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단계에서 모스바나는 비인간 행위자로서의 식물 혹은 ‘자연’의 대표자가 아니다. 오히려 모스바나는 인위의 산물이다. 여기서 인간과 식물의 동맹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인간이 자연을 일방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재)생산한 결과일 수 있다. 레이첼이 더스트폴의 주범인 솔라리타 연구소의 일원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혐의를 강화한다.
모스바나가 자율적인 행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그 자신의 유전적 강점이 빛바래는 시점부터다. 모스바나는 모순적인 생물체인데 “그 자신의 경쟁력을 만드는 더스트라는 환경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순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으로, 인위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모스바나는 더스트를 정화한다는 목적을 이루고 난 뒤,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 속에에서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대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다. 즉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덩굴식물과 얽힘으로써 더스트 이후의 시대에 적응하게 되었다.
김초엽은 이러한 모스바나의 끈질긴 생명력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모스바나가 맺었던 동맹의 실체에 대해 암시한다. 요컨대 “인간이 모스바나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모스바나가 인간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모스바나는 원래의 유전적 자원만으로는 절대 생태계의 우세종(the dominant)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스바나는 레이첼과 유전공학의 도움을 통해 지구를 뒤덮었다. 그리고 인간의 도움을 얻어 획득한 유전자원이 더 이상 강점이 되지 않는 순간이 오자, 자연계의 다른 형질들을 받아들여 번성했다.
이러한 시나리오 속에서 인간과 모스바나는 진정한 협력 관계 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모스바나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시혜를 베푸는 자애로운 자연의 표상이 아니다. 반대로 모스바나는 인간 에 의해 통제된 자연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모스바나는 인간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모스바나는 인간을 통해 번성하지 만, 결코 인간에게 예속되지 않는다. 모스바나는 인간을 보호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서 발생하는 일이다.
여기서 인간과 모스바나는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던 함께 유능해지기의 관계를 적시하는 것 같다. 도나 해러웨이에 따르면 지구의 반려종들은 서로를 유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종의 동맹은 결코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시혜와 원조의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동맹은 ‘손상된 땅’ 위에서 함께 생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즉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능력을 끌어내고, 상대방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함께 유능해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10) 정리하자면 『지구 끝의 온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연대를 서사화하고 있다. 이 간단한 문장은 보다 심오한 수준에서 사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초엽이 선보이고 있는 이야기는 다만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익숙한 패러다임으 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은 언제나 인간의 혹독 한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우리의 세계를 반성 하는 하나의 방식이지만, 반대로 자연을 동등한 수준의 파트너로 대하기보다는, 낭만적인 예속자로 대상화할 위험을 늘 가지고 있다.
요컨대 김초엽은 우리에게 새로운 서사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서 모스바나는 생존과 자신의 번영을 위해 인간을 이용한다. 그것에게 인간은 훌륭한 파트너이자 자원이다. 모스바나는 인간을 떠나기도 한다. 인간이 자신에게 준 전략적 자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지자, 그것은 생태계의 다른 파트너들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다. 그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다시금 번성한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맹 관계로 엮여 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연합할 수도 있으며, 때가 찾아오면 다시금 각자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이러한 서사 안에서 비인간은 인간만큼이나 오롯한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 이후
김초엽의 첫 번째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을 식물 SF라고 부를 수 있다면, 두 번째 장편인 『파견자들』은 버섯 SF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파견자들』의 인류는 외계로부터 도래한 ‘범람체’ 때문에 지하로 도피했다. 이 범람체란 “한때 지구의 흙 아래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균류의 균사체”를 닮았는데, “보라색, 파란색, 빨간색의 범람 산호들”11)을 외형적 특징으로 한다. 즉 범람체는 균류와 그것의 자실체(fruit body)인 버섯을 차용하여 고안한 외계 생명체라 할 수 있다.
한편 범람체들은 자아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마치 균사체 네트워크의 버섯들처럼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자아를 상실한다. 이는 인류의 존속을 위협 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버섯 SF는 생각만큼 드물지 않다. 우선 앞서 살펴봤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부해가 포자를 퍼뜨리는 균류를 연상시키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비디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Last of Us》(2013)와 HBO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2023)는 포자에 감염된 인간의 형상을 으스스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파견자들』의 직접적인 선배라 할 수 있다. 이 세계관의 인간들은 동충하초에 감염되었다. 그들은 몸 위에 돌출된 균사체 각질과 비정상적인 폭력성으로 인하여 식별된다. 이는 『파견자들』에서 범람체에 감염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한편 알렉스 가랜드의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 역시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 준 바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쉬머(the shimmer)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1927)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지역이다. 그곳은 명백히 비자연적인 색채로 뒤덮여 있으며, 방문자들을 DNA 차원에서 변형시켜 식물 인간, 혹은 균사체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요컨대 『파견자들』은 최근 대중문화에서 재생산되고 있었던 버섯-인간 복합체의 이미지를 재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버섯 인간들은 살갗 위를 뒤덮는 형형색색의 각질을 신체적 특징으로 하며, 자아의 상실을 정신적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인간 아닌 무엇인가로 변이한다는 것.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엠 어 히어로》 (2009~2017), 가까이는 CD PROJEKT의 《사이버펑크 2077》(2020) 이 보여 주는 것처럼, 비인간적 전이(transition)는 언제나 공포의 단골 주제였다.
요컨대 『파견자들』의 범람체는 (인접) 장르의 관습을 차용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새롭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김초엽은 이러한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여 대안적인 이야기를 전개한다. 요컨대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변이가 그저 공포의 대상이라면, 『파견자들』에서 변이는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파견자들』의 범람체들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침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인간 아닌 다른 것으로 변모시킨다. 그런데 『파견자들』의 행위자들은 이러한 변이를 통해 생존 역량을 극대화한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파견자들』의 주인공 태린은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에 범람체를 수용한 인간이다. 그녀는 자아를 유연하게 만들어, 몸과 정신을 범람체와 공유하는 법을 습득했다. 이것은 태린이 다른 인간에 비해 범람체에 대한 내성이 높은 이유가 되었다. 즉 태린은 자기를 타자와 공유하였기 때문에, 타자를 몰아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태린은 자아의 개념을 양보함으로써, 자기를 지킬 수 있었다.
한편 스벤과 같은 ‘혼합체’는 정반대 방향에서 유사한 주제를 형상화한다. 스벤은 범람체에 감염되었지만, 비교적 인간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범람체가 스벤의 두뇌가 아니라 사지에 깃들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결집된 범람체들은 의식을 갖게 된다. 그들은 생명체에 침투하려는 본능을 지키면서도, 최대한 대상의 본래의 삶을 존중하고자 했다. 요컨대 스벤은 범람체의 자비 덕분에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서 범람체들은 자신이 일으키는 변화가 타자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탐색하는 주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견자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포스트휴먼의 서사가 된다.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육체와 정신의 변형은 인간의 세계가 끝났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세계의 버섯 인간은 다른 인간을 멸절하는 힘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나 『파견자들』에서 변이는 생존을 위한 핵심적 역량이다. 여기서는 유연한 자아 개념을 가진 자만이 오래 살아남고, 윤리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태린은 자기 자신의 몸을 기꺼이 범람체와 함께 공유하고자 하며, 다른 감염자들에게도 그러한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자 했다. 범람체들의 경우 자기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며, 지구에 인간의 자리를 마련해 줬다. 그리하여 태린과 범람체는 인간 이후의 세계를 마련해 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을 다른 종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새로운 행성의 환경과 질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멸망의 이야기는 새로운 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됐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서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악역은 인간 세계의 수호자다. 태린의 보호자인 이제프는 유능한 군인이자 관료이다. 그는 수양딸인 태린에 대한 애정과, 인류에 대한 측은지심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가 지상을 탈환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러한 선한 마음의 발로다. 그는 지구를 다시 인간의 행성으로 되돌리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동족들이 지하 세계를 벗어나, 지상이 줄 수 있는 경험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동포애는 필연적으로 모든 범람체들을 제거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이제프의 이야기에는 공존의 결말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에서 ‘탈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지구의 우세종이라는 자만심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관념 자체를 상대화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세계를 상상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파견자들』은 우리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포스트휴먼의 난제를 내민다. 이 수수께끼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 너머의 지점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여전히 지구의 지배종으로서의 책임감을 잃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유에 따르면 인류세, 혹은 자본세를 살아가는 인간은, 세계를 폐허로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지구 끝의 온실』을 관통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지구가 폐허가 된 것은 온전히 인간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중요하면서 핵심적인 행위자다. 레이첼이 만든 모스바나, 그리고 세계의 과학자들이 만든 ‘디스어셈블러’가 아니었다면 더스트 문제는 결국 지구의 모든 유기체를 살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견자들』에서 지구에 닥친 재앙은 인간과 무관하다. 범람체들은 인간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먼 우주로부터 도래했다. 또한 그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유해하다. 인간 외에 다른 동식물들은 범람체들의 기생에 적응했다. 오로지 강대한 자아를 가진 인간만이 범람체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광증을 발현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간과 범람체가 공존할 방법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12) 오히려 인간이 범람체의 세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적응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가깝다. 인간이 지하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지구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범람체들의 행성”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포스트휴먼’으로 변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인정의 문제”에 불과하다.
즉 『파견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마침내 인간이 지배종이기를 멈추고, 비인간 종에게 지구의 권력과 권리를 이양한 시대를 상상하고 있다. 이것은 김초엽이 『지구 끝의 온실』에서 모스바나를 통해서 보여 주었던 삶의 방식이다. 김초엽은 레이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영광의 시대가 끝났을 때, 모스바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인간이 우점종으로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김초엽은 『파견자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인간은 영광의 시대가 끝났을 때,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는가?’ 인간 가족과 인간성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고, “개인 혹은 작은 집단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성 전체를 고려”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파견자들』, 나아가 김초엽의 SF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식물을, 자연을, 비인간을 파괴하지도, 그렇다고 하여 보호하지도 않는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에 대한 여하한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과 연대하거나 그들에 게 적응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존재다. 그럼으로써 김초엽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너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인혁 문학연구자.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창작학부 조교수.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 1) 어슐러 K. 르귄, 최용준 옮김,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북스, 2004, 321쪽.
- 2) 김미현,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49, 한국여성문학학회, 2020, 11쪽.
- 3) 연남경, 「여성 SF의 시공간과 포스트휴먼적 전망-윤이형, 김초엽, 김보영을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79, 한국현대소설학회, 2020, 125쪽.
- 4) 김은주, 「어떠한 이야기들이 세계들을 만들고, 어떠한 세계들이 이야기들을 만 드는가?: 동시대 페미니즘과 SF의 조우로서 김초엽의 「관내분실」, 『문화과학』 111, 2022, 118쪽.
- 5) 오길영, 「SF문학에 기대하는 것: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와 『지구 끝의 온 실』」, 황해문화 118, 새얼문화재단, 284쪽.
- 6) 이양숙, 「인류세 시대의 유스토피아와 사이보그-‘되기’: 『지구 끝의 온실』을 중 심으로」, 『도시인문학연구』 15(1), 도시인문학연구소, 2023, 165쪽.
- 7)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2, 323쪽.
- 8) 복도훈, 「SF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서: 김초엽과 박문영의 소설을 중심으 로」,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창비, 2019, 56쪽.
- 9) 이양숙, 앞의 글, 165쪽.
- 10) 도나 해러웨이는 특히 ‘인류세’와 ‘자본세’라는 적대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 해, 파트너들을 유능하게 만드는 관계들을 강조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 는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 28쪽 을 참조.
- 11) 김초엽, 『파견자들』, 퍼블리온, 2023, 71쪽.
- 12) 이러한 특성을 심완선과 소영현은 ‘대안적 공존’이라고 명명했다(심완선·소 영현, 「장애학과 조우하는 SF: 범람하는 균사체 상상력과 변이·공존·공진 화」, 문학웹진 림 LIM(https://webzinelim.com/2803; 2024. 01. 31.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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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하나의 실천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Persona)’도 있지만 늘 일상 속에서 글쓰기를 실천하며 텍스트를 구현해 나가는 주체도 존재한다. 여기서 글을 쓰는 주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필자(Scribens)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필자의 글쓰기는 삶의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삶과 유사성 관계를 유지하며 시간에 축적된 가치를 형상화하는 작업과 다름없다. 한 사람의 문제적 삶이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런데 바르트가 주목하는 글쓰기는 삶과 일체화된 결과물보다 끊임없는 변형과 분열 속에 파생되는 알레고리에 더 가깝다. 삶과 글을 온전히 일체화하지 않고 그 서사 이면을 건드리며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바르트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인 셈이다.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창비, 2025)은 바르트가 말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를 잘 보여 준다. 시인은 삶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기보다는 의미의 어긋남을 일으키며 그 이면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화자가 “아침에는 냄새 맡고, 코가 맞는 거지?”(「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라고 말하며 통사에 어긋난 반응을 하거나 “글자 없는 바다를 날아다녔어요/ 이렇게 믿고 싶어요”(「닫힌 마음」)라고 말하며 비가시적인 현상을 신뢰하는 장면은, 그의 발화가 일체화된 삶의 모습을 직조하기보다 “물먹은 마음”(「그냥 바다」)처럼 풍경 이면의 사유를 말하는 데 쓰임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언어가 자아를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억압적 탈승화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시인은 시점과 목소리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표면과 이면,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일성의 권력에 균열을 일으킨다. 지난밤 비가 쏟아졌다 연못 관리실에 유감을 표하고 친근함을 표방하는 문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구나 쫓겨난 금붕어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구나 닫힌 창을 바라보며 창밖에서 신문지를 깔고 김밥을 먹는다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을 때 내가 좀 처절한 것 같아 공원 모기가 발목을 초토화했다. ―「가족과 먹는 여름 김밥」 부분 이번 시집에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순간들이 행간에 혼재해 있다. 만약 그의 시에 여러 느낌의 목소리가 함께 다가온다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화자가 동시에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한 명의 화자가 말하는 시점과 각도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시적 정황을 낯설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경계가 불분명한 행간을 두고 독백과 고백을 섞어 가며 장면 속에 미묘한 정서적 움직임을 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은 무엇인가를 전경화(foregrounding)하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발화와 장면들이 동등한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객체를 무조건적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다른 시각과 온도로 발화되는 언어가 윤유나의 시를 이끈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다는 말은 종이에 새겨진 작은 시니피앙의 비유이면서 익숙한 대상을 곱씹어 낯설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의도다. 화자는 창밖에서 김밥을 먹으며 창 안으로 비춰지는 자신의 과거 이미지(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의 모습)를 객관화한다. 이는 창유리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을 반추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지만, 이보다 돋보이는 것은 고백과 독백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목소리로 공간과 시간의 격차를 허무는 기술에 있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거나 과거에서 다시 현재를 향해 발화를 이어 간다. 이렇게 “여기/ 저기”(「피를 뒤집어쓰다」)를 넘나들며 연대기적 시간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무실 커튼 너머로/ 사무실 난간 너머로”(「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 층층이 쌓이거나 혹은 흩어지며 행간을 채운다.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내 눈동자에 담겨 나를 바라보지 않는 바다를 보았다. 봉고차에 앉아 내 안의 차오른 감정에 만족하던 찰나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물이 들어오는 때의 바다였고 아직 갯벌인 바다였지만 바다는 그 어떤 바다도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구나.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 창밖의 바다를 더 멀리 바라보았다. 정말 몰랐어. 바다는 그냥 바다야. 그냥 거기에 있는 아무렇지 않은 바다야. ―「그냥 바다」 부분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 언어 없는 언어 있고 먼 밭에 저 먼 바로 ―「고유 감각」 부분 언어는 시가 되기 위해 행과 연이라는 형식 안에 놓이지만 시적인 것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에서 촉발한다. 주어진 의미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시적 언어의 잠재성이라면 윤유나는 정의하지 않음으로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삶의 무게를 쉽게 단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언어가 지닌 무게를 덜어내어 기표에 자유를 주려는 시인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윤유나 시의 또 다른 기술記述이다. 윤유나는 어떠한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그냥 바다」에는 대상의 모습을 눈 안에 담는 화자와 그 화자를 다시 바라보는 윤리적 자아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러한 메타성은 대상을 특정한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과 거리를 두며 언어가 발화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이 경우 윤유나 시의 주체는 화자도, 대상도 아닌 그 둘을 사이에 두고 발화되는 그 시니피앙이 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때로 표현이 맥락에서 이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화용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 이면에 잠재된 여러 가지 심리적 양태들을 표현하는 기제가 된다. 이렇듯 시인이 말하는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는 기의의 둘레에서 조금씩 벗어남으로 드러나는 기표를 가리킨다. 언어를 포장하여 희망을 말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언어 없는 언어’가 되기 위한 방식으로 말하기. 이는 맥락에서 한 걸음 벗어난 모호한 시어를 배치하거나 그 배치로부터 다시 언어를 도치하는 ‘어떤 기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 비린/ 짐승/ 어린/ 비/ 냄새”(「맑은샘이비인후과」)라는 언어적 증상처럼 하나의 행에 하나의 시어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앙장브망(enjambement)’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무는 서 있기로 한 건가 인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으니까 어젯밤 기록한 문자를 나열한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다 무지개 나비와 무지개 새가 무지개를 이루는 동네 세상을 미워할까 지금 달리고 있는 저 차가 인간을 치기 위해서 달리는 거라고 생각할까 ―「삶의 어떤 기술」 부분 그럼에도 이번 시집은 자신에 대한 시인의 기술임에는 분명하다. 발화와 형식의 모호함도 사실은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노력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방식이 자신만이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늘 자신 또한 어떠한 시점과 장소에 놓이는지에 따라 충분히 달리 보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윤유나의 언어가 가리키는 곳에는 절대적 토대가 없다. 그저 언어가 쓰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리고 시점과 목소리에 따라 달라지는 파토스의 연약함이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약함이 오히려 건강함에 다가서고는 한다. 일련의 특징은 때로 “나와 내가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긴 생머리, 민소매 티셔츠의」)가는 듯한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낯설게 하는 독백과 질문들은 기어코 정상적으로 비춰지는 세계의 (비정상적인) 증상을 수면 위로 가시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미워할까”라는 짧은 독백에 담겨 있듯이,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자신에 대한 기술이자 이러한 메타성으로 반사되는 세계에 대한 윤리적 자아의 기술이다. 이렇듯 윤유나의 독백은 자신에 대한 고백이면서 세계를 향한 질문이 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비록 시인이 가진 건 연약하고 취약한 세계 속의 언어일지라도 윤유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글쓰기는 현실과의 일체화된 기술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시인의 언어는 세계의 비정상성을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는 것처럼 의미가 떠나간 자리에도 언어는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시인의 독백과 고백 사이로 ‘있음’과 ‘없음’의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삶의 어떤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유나가 일관된 발화 방식에서 이탈하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남현지는 일상의 모습을 알레고리하여 불편한 지점들을 다시 텍스트 바깥으로 꺼내 보이고자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은 시적 건강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시집이다. 여기서 ‘건강(athleticism)’은 신체적인 건전함을 함의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들뢰즈는 익히 문학적 건강에 대해 현실의 병든 구조를 직시하는 일로 비유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이 보여 주는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사실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으로 말하는, 온 우주의 건강에 대한 바람에 더 가깝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삶의 구조적 모순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증식되는 불온한 감각들을 형상화하여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다.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 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호수 공원」 부분 조용해진 방 안에서 이명이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면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하면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 무한한 빌라 ―「골목의 증식」 부분 시인이 구현하는 삶의 모습은 구체적인 공간성을 지닌다. 뒷산, 호수 공원, 동물원, 중앙공원, 산책로와 같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장소가 이번 시집의 배경이 된다. 이렇듯 시인은 공공의 지점에서 포착되는 현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현실에 잠재한 구조적 폭력을 은밀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설령 그곳이 자연성으로 가득한 공간일지라도 시인이 주목하는 그 이면에는 질서 속에 묶여 있는 현실의 모순이 잠재한다. 가령 「호수 공원」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라고 말하거나 「산책로」에서 “소속이 있다 증명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직조된 자연성 곁에 내포한 인위적 질서와 억압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렇듯 남현지는 일상성을 형상화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모순을 들춰낸다. 마치 건강에는 늘 병듦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려는 듯이 시인은 반복에 내재된 구조적 폭력을 역설한다. “거기서 들려오는 소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중앙공원」). 시인은 짐작 가능한 것이라도 인식하려 하지 않으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남현지가 말하는 것이 정황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차원이라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마치 이명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귀를 괴롭히면서도 그 실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증상과 같은 것.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멈추지 않는 외부의 자극들. 이러한 점에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라는 말은 반복되는 인간 문명의 이기와 폭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아픔을 무디게 하는 질서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기도 하다. 삶의 공간에 드리운 구조적 모순을 재현하는 방식은 이번 시집에서 청각 이미지와 더불어 선형적 이미지로도 드러난다.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고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이번 전시회는 생명이 테마라고 소중한 난이 푸른 화분을 가진 난이 휘어진 방을 나와서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했다 곡선과 곡선의 복잡한 교차를 만들어 내는 모션의 생동감이 필요하다고 …(중략)… 상사에게 마트 전단지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물의 편에서 ―「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부분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다는 말은 현실을 비추는 화자의 냉소이면서 계약서의 획일화된 형식 자체가 불가피한 현실을 대변한다는 단서다. 그러므로 직선 속에 곡선을 강조하는 모습은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유이기보다, 우리가 여전히 직선의 틀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구조적 아이러니다. 이 경우 선형 이미지는 직선화된 삶의 틀과 수단화된 곡선의 한계를 동시에 꼬집는 비유가 된다. 곡선을 바라지만 직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는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남현지는 현실의 모순과 그 모순을 다시 메타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중적 아포리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치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에서 현실의 삶은 바뀌지 않고 오로지 공만 자꾸자꾸 돌아오는 궤적의 비유처럼, 시인은 자연과 일상을 잠식한 대조적 삶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시인의 말은 증식되고 반복되는 삶의 모순 안에서 무엇이든 해 보겠다는 의도로 다시 읽힌다. 이번 시집의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자연을 주체의 자리에 두는 생태 텍스트적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과정에서 병들어 있는 암흑 지점을 포착한다. 무뎌진 감각 속에 여전히 선험적인 폭력이 잠재함을 직시하는 냉소가 남현지 시를 이끄는 힘이다. 이것이 이번 시집에서 발견되는 건강한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면, 시인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시인의 시를 펼치고 함께 “들어가자 더 해 볼 수 있을 것이다”(「하나의 문만 열린다면」).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중략)…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시는 세계에 잔재하는 그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일탈을 갈구한다. 시는 정의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으며 한정하지 않고 답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인 것은 단지 어긋남을 전유하여 어긋남을 말할 뿐이다. 설령 그 모습이, 그 삶이 여전히 몇 마디의 언어로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확정적 세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인간은 늘 현실의 가능태로서 정의와 숫자 사이에서 한없이 고민하고 실패하지만, 시인은 그 삶의 허무와 소외 속에서 다시 그것을 비틀고 재현하고 증식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이번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건강의 또 다른 의미 아닐까. 일상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강함으로 언젠가는 온 우주가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역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학의 아이러니와 함께 펼쳐지는 시적인 것의 향연. 로고스와 파토스 사이에서 펼쳐지는 두 시인의 에토스가 더 기대된다면 당신에게도 시적 건강함이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두 시인이 말하는 ‘건강한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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