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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가을호(제120호)

우리 비평의 자리

백지은 문학평론

2007년 계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비평 시작했다. '독자시점'(2013), '건너는 걸음'(2021), '그때 그 말들'(2022)을 출간했으며, 공저 '문학은 위험하다'(2019), '비평포럼'(2025) 등이 있다.

  시인들이 시를 가장 좋아하고 소설가들이 소설을 가장 많이 읽듯이, 비평가들이 비평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생각한다. 글을 읽는 이유와 쓰는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을 하는(읽는/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변에 자문을 구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본다. 첫째, 더 나은 삶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인식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을 모색하고 개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둘째, 더 올바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부정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불공정과 불균형을 조장하는 사태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셋째, 더 적합한 길을 찾기 때문이다. 고정된 단선적 사고에 맞서 다양한 관점의 다각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혁신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해놓고 요즘 읽은 비평을 대응시켜보자니 첫째 이유와 셋째 이유가 좀더 유력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러자 그 둘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1. 사람의 자리


  인문학적 사고에 지구라는 행성의 위기 담론 또는 인공지능 과학기술의 미래 담론을 겹쳐보는 경향, 이것은 첫째 이유로 생겨난 비평이다. 인간의 행위(력)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인식이 ‘인류세’ 담론이나 ‘인공지능’의 활약상과 시너지를 낸 것은, 지금의 현실을 위기로 느끼고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경향의 비평은 무엇을 비판하느냐가 아니라 비판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그 역할이 있다. 인간(중심)주의 탈피 또는 극복이란 테마는 그 궁극적 목적이 (이를테면 인간이라는) 대상을 잘 비판하는 데만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더 나은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비판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이를테면 인간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데서 그 테마는 비롯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여 삶을 개선하기 위한 비판(의 논점, 관점, 논리 또는 근거 등)에 요청되는 타당성이, 그간 인간을 이해해온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데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다. 그럼에도 ‘신유물론’을 참고한 최근의 비판 기획들이 현재의 정치경제적 실태와 실천윤리적 국면에서 작동하기까지의 거리에 끼어드는 회의감은, 공허함 또는 책임감 같은 인간적 자세에 실려 또다른 방식의 성찰을 촉구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했다.

  한 문예지의 특집 기획 ‘다시 비판이란 무엇인가’ 중 「인간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요즘 ‘비판’에 대한 소박한 단상」이라는 김항의 글은 최근의 비판 기획—“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물질의 행위성 혹은 존재적 지위를 새로이 평가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비판을 재구성하겠다는”1)에서 문제시되어온 ‘인간’을 구조적, 역사적으로 조망하여 ‘인간 비판’과 그에 제기되는 회의감을 재조명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비판이 사실상 ‘인간 비판’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면 ‘물질적 전회’에 관한 이론과 담론들이 “인간을 특권적인 행위자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자는” 기획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나, 자칫 그것이 ‘인간중심주의’라는 “실체 없는 허상을 상대로 구음진경급의 무공을 뽐낸것”(같은 쪽)이 되고 말리라는 우려에 반대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을 강조하는 주장이 인간의 지위를 자연에게, 동물에게, 사물에게 주어버리자는 말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자연적인, 동물적인, 사물적인 부분이 있음을 알자는 취지임을 이해한 이라면 이 글의 신중한 논의가 명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제목으로도 암시되어 있는 주제이자 “새로운 비판 기획이 제시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가 유의미한 것은 인간이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신체를 가지고 발화 아닌 발화를 반복하는 사람의 흔적을 추적할 때 뿐”(같은 쪽)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 글에서 논의된 바를 따라가본다. 인간학의 고고학적 발굴에 착수한 푸코가 특정 지식 산출의 조건—노동, 생명, 언어—위에서 등장한다고 했던 ‘인간’의 자리는 “비판 문법의 주체와 객체가 인간이었던 한에서”(25쪽) 아직 사라진 적이 없다. 인간 출현의 세 가지 계기, 노동–생명–언어는 유한한 지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매개 개념으로서 18세기 인간학적 구조의 전도를 분절하는 새로운 인간학의 영역이 되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객체로 만들어 유한 세계를 의미화할 것이고, 생명은 저차원에서 고차원의 생물까지를 아우르며 유한성을 가시화할 것이며, 언어는 로고스를 참조하는 일 없이 지시와 소통을 역사화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지식 지층에 스스로의 흔적을 새기기 시작한다.”(33쪽) “지식이 신의 무한성을 원천으로 삼아 조직될 수 있었던 시대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했던 인간의 유한성에 기초하여 조직되는 시대, 이 이행 속에서 인간은 출현한다.”(32쪽)

  이 “유한성의 구조적 전도”(33쪽)란 보다 길고 깊은 “인간학적 장치 anthropological machine”의 계보에 속한 것으로, “스스로를 동물과 구분하면서 존립해온 이 장치의 산물”인 ‘인간’이란 “모종의 분할과 배제의 효과”(34쪽)라고 지적한 것은 아감벤이었다. 자연으로부터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했던 “즉자적 사람”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대립하는 “대자적 인간”(36쪽)으로 변모해온 것이다. “유적 존재로 스스로를 추상화하여 이해”(같은 쪽)하는 이 존재는 유한성을 모른다. “동물로서의 자신을 분리시키고 배제하는 한에서 성립하는 유로서의 인간은 죽지 않”(같은 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역시 어디까지나 유한한 존재이다. “신체의 활동을 매개로 자연 및 세계와 교섭하는 사람은 유한한 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같은 쪽)이 분열적 존재, “포함과 배제가 중첩되는 비식별역 그 자체”(같은 쪽)인 ‘유적 인간’이야말로 여러 이론적, 실천적 국면에서 문제적이었다. 인간은 유적 존재이고 노동은 유적 생활을 대상화한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이 “필요에 종속되어 자연과 스스로를 분리하지 못하는 동물적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화하여 자유로이 작품화할 수 있는 인간”(같은 쪽)의 노동을 양적으로 환원된 가치로만 다루게 했을 때, 알튀세르가 ‘이론적 반인간주의’로 맞서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인간’이었다. “마치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처럼 포함과 배제의 위상 속에 갇혀”(37쪽)버린 노동 가치론의 문제성, 즉 “노동계급을 인간이라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가늠하는 치명적 오류”(31쪽)를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노동 생산물에는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흔적, 생산자의 고유한 손길 같은 어떤 물신성이 남아 있다. 계급투쟁이란 화폐적 물신과 구분되는 이 ‘사물의 물신성’을 발굴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한다면 “계급 투쟁과 식민주의가 만나는 지점”(38쪽)이 선명해질 수 있다. 스피박의 논의에는 발화 자격을 가진 이들, 가령 서발턴을 대변representing하여 생각하고 발화하는 ‘좌파 지식인’ 같은 ‘투명한transparent’ 주체들이 한편에 있고, 또 한편에는 생각과 발화가 그 투명한 주체들에게 흡수되어버린 서발턴이 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서발턴이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서발턴의 외침이 안 들린다는 문제를 뜻한다. 왜 안 들리는가? “흡수당하기 때문이다.”(39쪽) “상처 입은 고유한 신체를 가진, 환원 불가능한 사정과 맥락을 가진 사람”에게서라면 튕겨 나왔어야 할 그 목소리는, 생각하고 말하는 저 투명한 ‘인간’ 주체에게로 흡수되며 “사물의 물신성과 유사한 음성의 주술성”(같은 쪽)을 그 흔적으로 남긴다. ‘인간’의 출현과 실존에는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는 식민주의가 연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면, 파농이 말하는 “신체와 영혼이 세계 속에서 합일되는 삶”(43쪽)이란 철학이나 이론으로 제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논리의 서사로 재현되기도 어렵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폭력적 관계를 그저 주체와 객체의 분리 혹은 행위의 독점으로 해석”(같은 쪽)해서는 좀처럼 갱생의 길을 가지 못할 ‘인간 비판’의 기획에 대해 이 글에서 권고하는 상상은 이런 것이다. “쓰러지고 짓밟힌 자를 소환하는 굿판을 통한 공포와 전율의 경험”으로 “인간human은 작동을 멈추고 사람a man과 삼라만상이 공속한 세계”(같은 쪽)가 열리게 하는 것.

  공부 삼아 길게 인용하며 따라온 이 글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평화롭게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흔적이 차라리 ‘유령’처럼 나타날 ‘사람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불러내야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도달한 듯한 모종의 안도감과 동시에 이 당위가 약간 의외로 여겨지는 당혹감도 없지 않은 듯하다. 김항의 글에서 제시한 논리 그대로 “철학이나 이론의 쇄신으로 제시”(같은 쪽)하기 어려운 ‘인간 비판’의 길이 ‘사물의 물신성과 ‘음성의 주술성’을 탈환하는 것이라 할 때, 그것이 바로 ‘문학’의 막중한 힘이자 오랜 역할이었음이 새삼 ‘소박’하게 환기되기 때문일 것이다. 부르주아의 자기파괴가 ‘인류세’의 정치로 구현되어가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이론적 계급투쟁이 바로 그러한 문학의 길이라고 한다면 더욱, 최근 여러 국면의 위기들을 고민해온 문학(비평)은 제대로 적중한 담론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비판’이 반드시 가야 하고 갈 수 있는 기획에서 가장 유력한 담론이 될 것이다


  2. 시의 자리


  김항의 글이 문학(비평)의 입장을 두둔한다거나, 문학(작품)의 영역을 옹호하는 논리적 근거가 될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요즘 비판’을 “사회과학의 영역이 문학적 감수성을 요청하며 둘 사이의 매개 가능성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2)으로 진단하는 관점에서라면,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공포와 전율의 경험’으로 불러낼 만한 문학적 형상화에 관심이 기울 것이다. 만약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 부상한 포스트휴머니즘이 시와 접점을 갖는 주된 이유”가 “반反·비非인간중심주의를 지향하는 시가 지닌 특징 때문”(같은 쪽)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예컨대 「경이의 세계, 시라는 경이」라는 글을 쓴 김보경에게는 저 권고가 적중할 것 같다. 근래의 ‘흔한 의구심’—“동시대 문학에서 나타나는 비인간 타자의 재현이나 독법이 과연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다고 볼 수 있는가. 탈인간중심주의적 재현이나 독법이라는 것이 기실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재생산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97쪽)라는—을 타파하기 위해 김보경이 서기로 다짐한 ‘시’의 자리가 바로 그런 상상의 형상화를 잘 전해줄 것 같다.

  “‘시’의 자리로, 정확히는 시를 읽는 경험적 차원으로 돌아와” 김보경은 “시가 되는 순간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시를 읽고 무엇을 느끼며 시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같은 쪽)라는 질문의 대답으로서 ‘시적 경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라 아메드가 “주체가 어떤 대상을 마치 처음 조우하는 것과 같은 감정”(같은 쪽)으로 정의한 ‘경이’는 김보경의 글에서 ‘시’와 만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공회전하는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 가능성”(98쪽)을 장착한 것이 된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에 주목하는 일이 문학적 재현 또는 독법과 연결될 때, 비인간 주체의 등장이나 인간의 행위력 축소를 유의미화할 것이 아니라 세계 내에 공속共屬하는 존재들의 인간적, 동물적, 사물적 조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사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기도 할 것이다

  김보경의 글에서 ‘시적 경이’의 체험과 그 개념의 정교화를 도운 시집에 대한 분석을 따라가본다. 신이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2023)에서 시의 화자들은 “인간적인 세계로부터 추락하며, 혐오스러운 ‘나’를 마주하며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된다”(101쪽). 이때 경험하는 “추락과 붕괴로서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전환”(같은 쪽)이 곧 경이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자기 붕괴와 상실을 수치스러워하는 ‘나’는 다른 ‘나’가 되는 반복적 체험을 함으로써 인간을 하나의 수행적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한연희의 『희귀종 눈물귀신버섯』(문학동네, 2023)에는 “식물과의 상호작용 혹은 식물 되기를 보여주는 이미지에서 연결의 감각이 선명하게 드러나”(103쪽) 있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생성되는 세계에서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받아쓰고, 이어 쓰는 일”로서 “인간의 행위성을 소거하거나 인간을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면제하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105쪽)로 여겨진다. 또한 임유영의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에서는 “인간의 감정적·관념적 개입을 최소화하는”(107쪽) 이른바 ‘반인간주의’라고 명명되는 시적 전통—김춘수의 무의미시론으로 대표되는—이 감지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예컨대 「파」「라」 「목」 「토」 연작에 그려진 ‘버섯’ ‘채취꾼’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손길이 거둬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을 통해서 변화하는 자연과 자연을 통해 변화하는 인간”(111쪽)이 있는 자리다. 지금 분명하게 여기에 있게 함과 동시에 다른 ‘우리’가 되도록 하는 가능성이 곧 ‘우리’를 다르게살게 하는 사랑의 힘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보경의 글에서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탄 그 이상의 의미”(112쪽)를 지니는 경이라는 체험이 실천적 역량을 발휘하는 감정으로 파악된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다. “미적이고 개인적인 범주로 여겨지는 감정이 지닌 인식론적, 실천적 역량으로서의 가치를 활성화하고 이론화하는 일이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같은 쪽) 경이를 발견함으로써 “‘반인간주의’라는 단일 회로로 향하지 않으면서세계와의 관계를 재편하며 비인간 타자와 함께 살아가게끔 하는 역량”(같은 쪽)을 시의 것으로 돌릴 수 있고, 비로소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문학은 더욱 왜소해지고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진 않았는지 우려하는 풍문”(113쪽)에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시대이건 사람이 문학을 하고 문학이 문학의 일을 하는 한 왜소해지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3. 행위의 자리


  이 시대의 문학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지는 않았다고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을 우리가 문학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바꿔 생각할 수도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맞서는 문학의 역량을 ‘시의 자리’에서 찾은 앞의 논의를 통해 ‘미적 체험에 의한 감정의 인식론적 전환과 그 실천적 가치’를 생각하자니, 오래전에 읽었지만 시의 자리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시적 체험’에 대한 논의가 떠오른다. 황현산은 「시 쓰는 몸과 시의 말」이라는 글에서 바타유와 랭보가 말하는 ‘내적 체험’에 대해 사유하면서, 바타유에게서는 그 체험이 오직 육체에 국한되는 반면, 시인인 랭보에게서는 육체적, 감각적 “착란”의 밑바탕에 “육체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되는 자’의 육체”3)인 말이 있다고 본다.

  황현산의 글에 따르면, ‘내적 체험’이라는 말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체험하는 자가 체험하는 자신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성적 인식’이나 ‘과학적 사실’과 다르고, “외부적 자극을 요구하면서도 그 원인과 효과가 사실상 한 자아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18쪽) ‘신비적’ 체험이나 ‘주관적’ 체험과도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적 체험이라는 자기 안의 효과를 통해 자아는 ‘객관적 사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체험의 가능성을 시에 대해 말했던 랭보는 “투시자, 곧 시인이 되는 것은 모든 육체적 감각의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착란을 통해 가능한 일”(19쪽)이나 그 착란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다시 말해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랭보가 “나는 타자Je est un autre”(20쪽)라고 말했을 때 ‘나’라는 주체는 “그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게 될 하나의 장소”(19쪽)일 뿐이다. 진정한 ‘나’는 “주체가 다른 것으로 바뀌는 이 내적 체험을 수시로 가능하게 하는 한편 그 과정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참관하는 자”로서 “일체의 주관성 내지 주체성에서 해방된 자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타자”(20쪽)라고 랭보는 생각했다.

  이렇게 시적 체험의 주체를 ‘객관적 타자’로 여기는 의식은 최근 비평들에서 ‘객체지향’ 또는 ‘행위자 연결망’ 등의 이론을 이해하고 참고하려는 취지와 근본적으로 통한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정립에 있어 인간의 존재적 지위나 물질의 행위성,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 등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보자는 기획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특정 시기, 특정 조건에 한해서만 유의미한 과제일 리 없다(어떤 인간의 행위성은 언제까지나 높은 지위를 갖는다거나, 어떤 동물, 어떤 사물은 행위성을 발휘중이나 다른 동물, 사물은 그렇지 않다거나, 기후변화의 위기를 절감할 수 없었던 시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이 중요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착각은 타당하지 않다). 십여 년 전, 시 쓰는 몸을 살펴 시의 말이 건넌 자리를 내다보는 이가 ‘상호 육체성’에 대해 말하는 다음 문단에는, 세계 속에 하나의 육체로 존재하는 주체의 지위가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게, 논리적으로 명징하게 그려져 있다.


  주체는 세계라고 부르는 거대한 몸에 둘러싸여 있으며, 한편으로는 제 시선으로 그 거대한 육체를 끌어안는다. 주체가 이 세계의 육체와 소통하는 것은 그에게 부속된 육체를 통해서이다. 내가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손가락 끝으로 세계와 만난다. 오래된 자판은 내 손가락을 알아본다.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이 손가락이며 자판이고, 자판이 놓여 있는 책상이다. 책상까지 연결된 나의 몸은 또다른 몸과 만난다. 보는 자이며 보이는 자인 주체는 자기 시선의 주체이면서, 타자의 시선에 주제가 된다. 게다가 나의 손가락과 자판과 책상의 관계에서처럼 주체와 주제의 경계는 모호하다. 몸은 이 복잡한 상호 육체성에 간여하여, 한 자아의 몸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몸 이상의 것이 된다. 주체는 주체 이상의 것이 된다. 말은 이 상호 육체성의 약도와 같다. 말은 자판이나 책상처럼 한 육체의 연장이지만, 주체의 생각에 육체를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떠나는 순간 벌써 다른 육체를 형성하고 다른 육체에 간여한다. 상호 육체성이 말을 통해 전개될 때 주체는 상호 주체성에 복속하는 주체가 된다.(22~23쪽)


  나, 손가락, 자판, 책상, 글, 시선의 주체, 타자의 주제, 주체와 주제, 자아와 몸, 자아 너머의 말, 생각의 육체, 다른 육체…… 이들 각각의 행위성과 각각의 지위 또는 이들을 잇는 행위성과 거기에 부여되는 지위, 이런 것들이 다 여기서 ‘주체’라 불린 ‘행위자’이고 ‘객체’이고 ‘연결망’이다. 이를 유념하지 않고 말해지는 ‘인간 주체’란, 분열과 모순을 ‘착란’ 없이 봉합하여 “몸의 텍스트가 주체의 텍스트와 다른 것일 수 없다고 믿는 주체의 환상”(22쪽)에 불과하다. 육체로 존재하는 사람, 신체의 지각과 활동을 매개로 세계와의 유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계 속의 모든 사람 외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과 더불어, 행위하고 행위당한다. 행위자의 교섭을 매개하는 신체들의 주체성은 “주체를 자기 안에 있으면서 자기 밖에 있는 낯선자로—동일자이면서 타자로”(23쪽) 만드는 것과 같다. 내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그 주체성은 “가장 깊은 진실, 따라서 가장 객관적인 진실을 제 몸이 세계의 몸과 맺는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같은 쪽). 관계에서 발견되는 객관적인 주체성,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과도한 주체성을 축소하고 비인간과의 연결에서 주체성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론(가)의 믿음일 것이다.


  4. 창작의 자리


  세계와 교섭하는 사람(의 몸)은 내적 체험을 통해 자신을 타자에게로 연다. 육체는 이 체험의 주체에게 온전하게 속하지 않고, “그 육체로 존재하는 주체 역시 온전하게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같은 쪽). ‘시 쓰는 몸’의 내적 체험과 ‘시의 말’에 대한 황현산의 논의를 따라가며 ‘주체를 넘어서는 몸’과 ‘몸을 넘어서는 주체’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생각하다보면, 누구도 더는 ‘내적 체험은 자기지향적 성찰’이라거나 ‘시적 체험은 자아의 특별한 관점에 종속된 명징한 의식’이라는 등의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식 주체의 내적 체험은 자기이자 타자인 제 몸의 내부에서 상호 육체성을, 그리고 제 몸이 세계의 몸과 맺는 관계에서 상호주관성을 만나는 일임을, ‘시의 말’을 통해 우리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대 ‘시의 말(들)’을 따져 살펴본다면 최근의 이론, 담론으로 포착하지 못한 세계 내 (비)인간의 존재 조건과 관계 양상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다영의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은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4)하는 시(들)의 경향을 분석하여 “동시대 시의 지형도”(81쪽)를 그려보고자 한다.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의 속성에서 차용한 ‘가속류’라는 용어는 특히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 일군의 시적 경향”(83쪽) 또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84쪽)을 가리킨다. 최다영의 글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으로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배시은의 『소공포』(민음사, 2022), 이런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뉘연의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등을 살피며, 이런 특성이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91쪽)이 아닌지 추론해본다.

  그 추론대로 이 “가속류의 의의”—“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같은 쪽)—라 말해진 것들은 아무래도 이 시대에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는 시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이 곧 ‘시’라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대, 바꿔 말해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인간의 창작물인 예술의 고유한 지위를 위협한다’는 인식이 파다한 시대니까 말이다. 고유성보다 익명성을 지향하고, 내밀한 욕망이나 감정의 표현보다 깊은 통찰이 휘발된 기계적 발화를 추구하는 듯한 시의 낯선 말들에서, 최근의 ‘비인간 담론’에 이끌린 비평적 관심의 기울어짐 또는 심화/확장의 가능성을 빗대어볼 수 있을 듯하다.


  5. 쓰는 자리


  시는 근본적으로 낯선 말이다. “말이 낯선 것은 그것이 주체의 예견을 벗어나 있고, 주체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그 말이 지닌 특별한 효과를 이르기도 한다.”(황현산, 25쪽) ‘시 쓰는 몸’이라는 의식 주체와 연결되어 있으나 그 몸의 끝에서 ‘시의 말’이라는 다른 주체가 되는 이치, 다시 말해 “시쓰기의 타자”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소질”(33쪽)은 말의 어떤 품행이 이루어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 쓰는 몸’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화가 인간의 주체성을 위협할 만큼의 품행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인공지능이 생성한 어떤 말이 인간 주체의 예견을 벗어나 있고 인간 주체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시인/창작자의 자리에서 그것은 인간이 부러 낯설게 만들어놓은 어떤 고유한 말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모든 낯선 말이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낯선 말이 시가 되는 경로는 창작자에게서만 출발하는 게 아니고 감상자에게서부터 열릴 수 있다는 점도 언제나 고려되어야 한다.

  조금 더 황현산을 참고하면, 자의적으로 수집된 말들처럼 보이는 초현실주의 시에는 사실상 의식 주체라고 할 만한 화자가 없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체험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의 주체와 체험은 사후에야 온다”(26~27쪽). 그러나 “이 체험은 환상이나 자기기만이 아니다”(27쪽). 낱말들이 일체의 문맥—사회적, 학술적, 익숙한 미학적 문맥—에서 떨어져나와 얻게 된 생생함이 그 관계를 증명할 때 낱말들 사이, 사물들 사이, 낱말과 사물들 사이에 관계가 이미 있었고 그 속에서 꿈꾸는 주체 하나가 뒤늦게 일어섰을 뿐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이때 이 낱말들을 처음 말 배우는 사람처럼 의식하고 “말 한마디에 사물 하나가 솟아오르는 현장을 참관”할 때, “나는 나와 무관하였던 일체의 사물과 사건에 꿰뚫린다”(같은 쪽). 이 꿰뚫린 이가 시인이다. 시 속에서 의식 주체로 재현되지 않았으나 실로 그 시를 쓴 사람 혹은 읽은 사람 양편이 다 시인일 것이며, 이들 사이에서 혹은 이들을 연결하며 드러난 것이 시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관심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산출해낸 어떤 말들이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5) 할 때, 인간이라는 의식 주체의 외부에서 생겨난 그 ‘타자’의 말들에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받고 어떤 꿈의 주체를 경험하게 될까, 라는 물음을 생각해보는 데 있다. ‘시쓰기의 타자’와 관련하여 이어온 논의에 따르자면 얼핏 그렇게 되지 못하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도 하고, 그럼 그렇게 되었을 때 시와 시인의 자리에 인공지능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아니,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헷갈릴 필요가 없다. 저 앞에서 ‘인간 말고 사람’에 대해 논의했던 것을 한번 더 끌어와보기만 해도 될 것 같다. “인간은 결코 비인간과 동등한 의미의 행위자, 혹은 행위소가 아니다. 사태는 거꾸로이다. 사물과 동물을 비롯한 모든 비인간들이 행위해왔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결코 행위하지 않았다. 무수한 사람과 사물과 동물과 삼라만상의 행위의 효과 속에서 특권적인 텅 빈 자리를 차지하여 강렬한 빛으로 스스로를 은폐했을 따름이다.”(김항, 40쪽)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다. 사람이라는 의식 주체가 ‘인간’이라는 (행위하지 않는) 텅 빈 지위를 만들었던 것이고, 이제 그 자리에 인간 대신 인공지능을 데려다 앉힐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단순 명료한 사실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언어는 사물의 발화가 아니고 사물들의 신체에 쓰인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사람)–손가락–자판–인터넷–챗지피티–문장–시선의 주체…… 이런 식으로 각각의 행위가 자리하는 연결망 위에 놓여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으로 숙고된 의미와 재현을 양보하고, 글쓰기의 상호 활동 속에 자기 밖 맞은편의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말해서 말과 사물의 물질성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황현산,30쪽)는, 즉 쓰는 몸이 세계의 몸과 섞여 발생하는 저 ‘시쓰기의 타자’와는 생성의 동기 또는 욕망이 결단코 다르기 때문이다(시를 쓰고 싶은 사람이 시인이고, 챗지피티는 시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행위하는 ‘사람’이 소거된 ‘유적 인간’으로 스스로를 추상화하여 이해해온 인간학의 장치가, 이제 ‘인간을 대신하는 인공지능’이라는 국면을 맞아 또다시 텅 빈 지위의 위상에 갇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삼라만상 속에서 삼라만상과 더불어 지각과 행위를 매개하는 우리 신체가 되찾아야 할 말, 혹은 도모해야 할 비판이란, 마지막으로 황현산의 글을 한 번만 더 인용하여 반복하자면 이런 것일 터이다. “그것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일이며,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는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볼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는 것과 보고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의 경계를 되풀이해서 바꾸는 일이다. 돌들의 소통 능력, 또는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사물의 상호 육체성이 거기 있다. 사물이 저마다 그 자리에서 우뚝 서게 하고 낱말이 제가끔 그 문맥을 넘나들며 생생하게 빛을 뿜게 하는 이 기획은 그 자체가 문학의 원리이다.”(황현산, 36~37쪽)


  6. 의구심의 자리


  이제 ‘문학’에 관해서라면, 인공지능의 생성물이 사람의 말을 대체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새삼 불필요한 것 같다. 챗지피티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이 새로운 시대의 글쓰기 도구로 부상한 연원이 기원전 12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글쓰기의 수학적 기원과 맞닿는 것으로 본 임태훈의 글은 그런 의구심을 급진적으로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를 사람이 쓴 것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원형”6)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마음과 기억을 외재화하는 것을 비판한 데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살아 있는 영혼은 글과 문자가 아니라, 말에서만 생동한다고 강조”(136쪽)했던 그 사상은 18세기 루소에게 까지도 강고했던 ‘음성 중심주의’로서 훗날 데리다가 비판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와 강력히 연관된 것이다. 요컨대 “초거대 AI 모델의 등장은 느닷없이 갑자기 생겨난 기술혁신이 아니라, 글쓰기의 수학적 기원으로부터 근현대 정보기술의 발달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진행 방향”이므로 “특정 시기의 문학/글쓰기를 시원으로부터 보존된 본질적인 원형인 것처럼 생각할 수 없을뿐더러, 새로운 기술의 잠재성을 타협해선 안 될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념은 생존의 위협을 자초하게 된다”(137쪽)는 이야기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 문학이 “쓰면 현실이 된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통틀어 더불어 행복해질 ‘쓰기’에 야심을 품”을수 있고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며 주체의 성찰과 실천을 고민했던 문학의 기획”(144쪽)을 귀환시킬 수 있으리라는 주장은, 이 시대 ‘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저마다 개척해보는 각각의 비전을 희망적으로 비추는 듯하다.

  동시에 인공지능에 관해서라면 여기저기서 놀라고 걱정하고 배우고 하면서 나오는 주장과 견해들이 너무나 금세 시효가 지난 것처럼 되어버리곤 하므로, 어떤 진지한 비전도 어느새 지나간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실은 챗지피티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이 글쓰기 도구로 부상한 시대의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것, 수많은 것들이 마구 쏟아지고 휘발되는 이 속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생성형 AI의 진화 방향이 리터러시 지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7) 살펴본 김성우의 글에서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술, 노동, 교육 등이 이루어내는 “속도의 생태계”(177쪽)에서 “리터러시 기반 과업의 속도가 빨라지고 생산성이 증가될 것이라는 예측”이 반드시 짚어야 할 것으로 “인공지능의 리터러시 과업 수행과 인간의 리터러시 행위 속도 간의 비대칭”(179쪽)을 꼽는다. “다양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대량의 텍스트를 단시간 내에 생산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고, 다양한 텍스트를 변형·통합·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상수’로 남는 것은 인간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다.”(같은 쪽)


  문자와 인쇄술, 펜과 종이의 제조 기술, 책 제본 기술, 스마트폰과 컴퓨터, 인터넷과 각종 데이터베이스, 전자책 단말기와 전자책, 검색과 파일 다운로드, 철자와 맞춤법 검사기, 기계번역과 생성형 AI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기술이 읽기와 쓰기의 과정에 개입한다. 말 그대로 읽기와 쓰기는 기술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 기술은 어떤 방식으로 엮이고 무리 짓고 갈등하고 분열하는가? 일련의 기술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운동은 당신의 리터러시 수행 속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생성형 AI는 읽기와 쓰기, 기술이 엮이는 현재의 리터러시 생태계의 속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단 하나의 기술이 자신의 리터러시를 지배한다면 읽기-쓰기의 속도가 삶의 속도, 생각의 속도, 몸의 속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178쪽)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문학/예술의 상관성에 관해서라면, 그 기술이 문학/예술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변화일지, 어째서 그런 변화가 필연적인지에 대한 여전히 걷히지 않는 의구심이 더 큰 것 같다. 챗지피티의 빠른 대답은 누구를 위한 속도인가, 무한정 반복해서 생성되는 문자 더미들은 무엇을 위한 생산성인가, 이 속도와 생산성이 새로운 창의성을 가능케 할 것이라면 그 창의성은 어떤 세계의 확장에 복무하는가 등을 계속해서 따져 물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시원하게 답을 얻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런 것이 인공지능 시대의 불안과 공포라면, “각자의 몸이 세계를 인지하고, 소화하고, 숙성시키는 속도”(180쪽)에 대해 나 혼자 어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생각해보자고 요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어려움과 연관 지어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해야 옳겠지만, 일단 “체제의 속도와 생산성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생성과 변화에 귀를 기울이는 리터러시, 그리하여 삶을 돌보는 읽기와 쓰기로 모두를 초대하는 리터러시”(187쪽)의 필요를 설파한 김성우의 글에 대한 동의를 담아 일부를 인용한다.


  기술도 리터러시도 모든 인간에게, 나아가 한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변화의 영역, 강도, 속도, 제도화 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리터러시 실천의 상황과 목적, 참여자들의 권력 차에 따라 세심히 살핌과 동시에, 계급, 연령, 젠더, 지역, 언어 등의 엮임과 엇갈림을 고려하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관점에서 파고들어야 한다.(184~185쪽)


  수많은 생물종의 지능들이 어우러지며 때로 갈등하는, 이미-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했던 세계로 리터러시의 주체를 확장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빠른 진화가 그저 인간의 지능을 강화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지능을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 계기이자,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비인간-지능에 대한 관심을 넓혀 지구와 비인간 주체의 관점을 사유하는 다양한 시도를 이어나가야 한다.(186쪽)


  0. ‘왜’를 묻는 자리


  문학(비평)이 문학(비평)을 걱정하는 일은 더이상 불필요한 것 같고, 인간(언어/텍스트/예술)이 인공지능(언어/텍스트/예술)을 불안해하는 일은 금세 시효가 끝난 문제가 될 것이다. 다만 여전히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쓰인 글을 스스로 찾아 천천히 읽거나 남들은 이미 다 알지도 모르는 얘기를 저 혼자 오래오래 써보곤 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비평을 하는(읽는/쓰는) 이유를 다시 가져와 정리하자면,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 비판’ 기획으로서 세계 내 (비)인간의 존재 조건 및 관계 양상을 살피는 비평과, 더 적합한 길을 위한 ‘사람의 말’로서 인간의 타자성에 근거한 문학의 원리를 환기하는 비평이 필연적으로 이어져 여기저기서 각자 또 서로 수행되고 있었기에, 그 논의들에 힘입은 또하나의 글이 이렇게 산만하게나마 쓰였다고 하겠다. 별로 말도 안 되는 비평의 이유 세 가지는 사실 챗지피티의 자문을 구해 말해봤던 것인데, 이 글에서는 마치 최근 비평의 경향이 그중 두 가지 이유에 해당한다는 듯이 억지 프레임을 씌워본 것뿐이고, 실상 무엇이든 우리가 쓰고 읽는 궁극적 이유는 그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있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말/글/일 등에 대해, 대체 그것을 ‘왜’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 즉 그것이 생성되는 동기 또는 욕망을 점검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일까. 대개 자동적이고 자기 반영적이고 자가 발동적인 것이지만 스스로 무지하거나 무시하기 쉬운 그 ‘왜’가 삭제된 자리였다면 인간 비판도, 문학의 타자성도, 인공지능 시대의 불안도 우리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 1) 김항, 「인간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요즘 ‘비판’에 대한 소박한 단상」, 『문학들』 2024년 여름호, 40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2) 김보경, 「경이의 세계, 시라는 경이」,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96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3) 황현산, 「시 쓰는 몸과 시의 말」, 『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20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4)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91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 수만 표시.
  • 5)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422쪽. 지지난 계절의 비평을 검토하여 지난 지면에 쓰인 강지희의 글에서 종합적으로 논평된 ‘AI 시대의 예술’이 현재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 6) 임태훈, 「쓰면 현실이 된다!—AI를 혁명적 현실 생성 도구로 사용하기」, 『문화과학』 2023년 여름호, 135~136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7) 김성우, 「생성형 AI의 부상과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변화의 지형과 비판적 메타-리터러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2023년 여름호, 171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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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양수빈소설계간평리뷰가족 2025
정의정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성해나 소설집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계간 문학동네 정의정 성해나혼모노탄핵태극기 집회근대성무속정동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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