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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가을호(제13호)

남아 있는 것들 ― 마윤지와 박소란의 시

최선교 문학평론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1. 문제


  자신의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류의 오래된 욕망이라면, 역설적으로 쓰레기만큼 역사상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한 존재는 없다.1) 인간이 쓰레기를 분류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쓰레기 같은 삶과 인간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쓰레기는 강력한 실존이자 비유이다. 쓰레기를 통한 사유는 대개 어떤 존재가 폐기되거나 위생적이며 진보적인 삶에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되어 비가시적인 장소로 이주되는 과정에 작용하는 폭력을 주목한다. 인간의 현실을 형성하는 설계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사유에서는 쓰레기를 범주화하는 권리를 가진 힘이 존재하며, 그러한 힘이 유용한 생산품과 쓰레기의 구분을 관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설계가 있는 곳에 쓰레기도 있다”2)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어떨까? 폐기되어야 한다는 본분과는 별개로 쓰레기만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우리의 삶을 (이미) 침범한 것이 없다는 것. 우리는 쓰레기를 보이지 않게 처리했으며 그럴 수 있다고 믿지만, 한편 이 사실을 완벽한 진실로 믿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우리의 삶과 쓰레기 하치장의 구분이 가끔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풍경은 쓰레기 풍경”3) 이다.


  2024년에 20~30대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가 70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쉬었음’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 중에서 질병이나 장애 등의 이유 없이 ‘그냥 쉬었다’고 응답한 경우를 가리킨다. 쓰레기가 현실을 육박하고 있다는 서술 뒤에 노동하지 않는 인간과 관련된 사례를 덧붙이는 것이 어쩐지 부적절해 보인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가치를 재생산하는 서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쓰레기─잉여와 여분으로 취급되며 공인받지 못한 인간 집단─를 분류하는 강력한 기준이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다방면으로 재고되어야 하는 당위이다. 그러나 가치 없는 것,폐기되어야 할 것을 가르는 당위를 재설정하기도 전에─그리고 그러한 당위들이 재설정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안은 없다는 확신으로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서─인간쓰레기로 분류된 자들(혹은 현상들)에게 필요한 것이 쓰레기라는 가치 체계의 폭력에서 구제되는 것‘뿐’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어떤 것을 쓰레기로 분류하는 힘을 재배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쓰레기로 분류되지 않을 경우에 달성될 목표 자체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표의 모호성(그리고 종종 기만성)이 문제”4) 가 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쓰레기로 분류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이미 쓰레기로 분류된 것들이 육박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복원하지 않고 방기하는 힘에 대한 비판일지도 모른다.5)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쓰레기에 관한 이야기는 욕망과 가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동하는 욕망과 변경되는 가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본주의라는 ‘생태 질서’가 붕괴하고 부패하면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그것의 유효 기간과 대체품을 고안하는 이야기는 포화상태이다. 가치가 소진되어 욕망이 회수된 것들로 가득한 현실에서 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쓰레기가 없는 곳은 없다. 쓰레기는 가장 깊은 바다에서부터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 살아 있다. 쓰레기는 “공기 중에도, 물속에도, 키치적인 물건으로 그득한 뒤뜰 벼룩시장 좌판에도, 잡동사니들이 서까래 높이로 쌓인 집에도, 유독성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구름이 퍼져 나가는 우주 공간에도”6)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방식의 서술에는 사실과 비유가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물질적인 쓰레기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옳고 선한 가치를 묻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비유로 전환될 수 있다. 일상을 침범한 쓰레기 앞에서누구든 ‘일단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공유하게 된다. 안 보이는 곳을 찾아서 다시 쓰레기를 폐기하든, 쓰레기를 소각하면서 배출되는 화학적 잔여물들을 아직까지 우리의 지구가 감당하리라 믿든, 그것을 재활용하든, 아니면 아예 쓰레기를 만들지 말자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가든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현실이 용량을 훌쩍 초과한 거대한 폐기물 더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지금 현실의 쓰레기 풍경과 한때 위엄을 자랑했던 웅장한 도시의 멸망이 남긴 폐허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쓰레기가 침범하는 현재의 풍경은 폐허를 감상하듯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현실 앞에서 폐허나 종말의 단어를 떠올리는 일은 인간 종 절멸의 구호로 공포심을 자극하며 글로벌 자본주의적 맥락을 삭제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문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낭만주의적인 소구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다. 고대 건축물의 잔해를 바라보는 과정에는 일종의 경이로움이나 시적 영감을 불어넣는 낭만성, 시간과 물질의 유한함을 목도하며 경험하는 슬픔, 절망 등의 강렬한 감정 등이 삽입된다.7)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라는 쓰레기 풍경은 명백하게 파괴된 것, 폐기되기를 기다리는 것, 유해하고 성가신 것,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왜 이것이 쓰레기로 분류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는 일과 함께, 이미 유해하다고 분류된 것들이 완전히 폐기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생명력을 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적거려야 한다. 문학의 관심이 언제나 변두리였다면, 현실을 덮친 쓰레기의 감각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장소 역시 그곳이다.



2. 죽어서 사는 것들 : 마윤지 『개구리 극장』 (민음사, 2024)


  『개구리 극장』이 펼쳐 놓는 공간에는 빈틈이 많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충분히 보아 왔던 것을 그리는 최소한의 언어로부터 시가 탄생한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완감이 되레 새롭다. 이런 특징은 자칫 시집의 얕은 밀도나 묘사의 평이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혹은 여름의 계절감이나 “투명 위에 투명을 엎지르는 기쁨”(「가을 인사」)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최근의 젊은 시집들에서 으레 발견되곤 하는 공통된 미감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윤지가 구사하는 최소한의 언어는 사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용히 불어난다.


군용지 주변의 땅이 꺼지면서 교통사고가 났다

물렁거리지 않게
무덤은 깊고 넓을수록 평평해야 한다고 했다

작년 동해에서 가져온 돌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이들이 비린내 나는 강가에서 돌을 주워 왔다
사람들이 며칠씩 고기를 못 먹었다
― 「연천」 전문


  이 시는 충분히 “깊고 넓”게 파지 못한 무덤 때문에 지반이 붕괴되어 교통사고가 난 상황으로 시작한다. “교통사고”에서 연상되는 (어떤 의미에서) 일상적인 사건은 평평하게 마감되지 못하고 묻힌 어떤 종류의 다량의 “고기”들이 만든 “물렁”거리는 땅과 연결되며 불쾌하고 찝집한 기분을 남긴다. 현대 사회에서 ‘무덤’이 연상케 하는 죽음은 일상적이며 그만큼 신속하고 완전하게 처리되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죽음(“무덤”)은 또 다른 죽음(“교통사고”)으로 연결되며, “사람들이 며칠씩 고기를 못 먹”을 정도로 비위를 상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연쇄한다. 연쇄하는 죽음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기괴한 생명력을 반영한다.8) 매장된 죽음이 죽지 않고 기어코 삶을 육박하는 현상 속에서 폐기되고 묻힌 것들의 존재가 되살아난다.


  마윤지의 시집은 대체로 까다롭지 않고 단출한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와중에 느껴지는 뒤숭숭한 정서는 ‘묻혀 있는 것’들로부터 탄생한다. 어떤 물건/정서/존재를 보이지 않게 쌓아 덮어 두면서 그것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방식의 서술로부터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동지」)라고 하는 시적 태도가 배어 나온다. ‘묻는다’는 행위는 어떤 존재의 생살권을 소유할 때 가능한 것이지만, 「연천」과 같은 시에서처럼 비가시화된 “고기”는 죽어서 묻힌 뒤에도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언가를 묻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로 수렴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고 그것이 사라졌다고 믿고 싶은 대상이나 정서가 마윤지의 시집에 등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묻힌 상태에서 끝나지 않은 생명력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소리를 낸다고

그러면 상주와 가족들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을 받는다고

사흘장이 끝날 때면 목이 아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했습니다

(...)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초여름

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
―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부분


  “우리는 농담을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집단 상담을 하기 위해 모인 듯한 사람들을 그리다가 문득 안동 지역의 조문객들이 사흘장을 치르는 내내 소리를 내어 우는 장례 풍습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슬픔의 뿌리를 뽑아낼 것처럼 과장된 소리를 내며 우는 시간을 매듭짓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독대 안에 “분명”히 있는 매실이 익어가고 있다. 가시화된 곡소리라는 형태는 암묵적인 재현 수단일 뿐이고, 가시화된 형식을 통해 해소되지 않은 정서의 잔재는 장독대 안의 매실처럼 조용히 익어가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둥글게 둘러앉아 나누는 내밀한 이야기나 주고받는 곡소리는 모두의 암묵적 합의 아래 진행되는 불완전한 주고받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쓰고 쓰고 쓰다가 남은 정서의 잔재이다.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이라는 시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불완전한 주고받음 속에서 모종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묻혀 있는 것의 정체를 상상해 본다.


  「여름 촉감」은 여름날에 분수 광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그리면서 문득 “광장 밑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름 햇빛과 투명한 물에 젖은 아이들의 몸 이미지를 그리는 와중에 불쑥 삽입된 묻혀 있는 사람들은 “몸의 몸/ 더 끝에 있는 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섬약하지만 강렬하게 반짝거리는 아이들의 살아 있는 몸의 생동감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몸, 형체를 그릴 수 없는 묻힌 사람들의 몸과 겹쳐지며 극단의 비현실감을 통해 묘사된다. “한없이 예쁜/ 저 입체가 두렵다/ 바라볼 뿐인데”.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젖은 몸과 묻혀 있는 사람들의 더 이상 몸 아닌 몸이 포개지며 한 공간에 존재할 때, 다시금 그 공간에 잔존하는 비가시적인 존재들의 역동성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모르는 묻혀 있는 것들의 역동성은 경쾌한 생명력보다는 불길함을 자아내는 종류의 것이지만, 오히려 마윤지의 시집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눈 한 번 깜빡 할 때마다/ 새 한 마리가 죽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유리 벽은 어디에나 있지만/ 부딪친 새는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훨씬 기괴하기 때문이다(「새에 대한 믿음1」).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혀 죽은 새들의 사체는 어디로 갔을까? 불결한 것, 유해한 것, 가치를 훼손하는 것들은 쉽게 사라진다. 그것과 그것들이 남긴 흔적이 말끔하게 치워질 때, 우리는 무엇이 그 존재의 살아 있음을 박탈했는지를 잊어버린다. 「새에 대한 믿음1」에서 화자는 “한 번에 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 있는 생명을 쓰레기(사체)로 만드는 유리벽에 “동그랗고/ 하얀/ 스티커를 붙인다”. 스티커가 붙는 순간, 잘 보이지 않던 투명한 유리벽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쓰레기가 발생하는 빈도 혹은 시간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지연되기 시작한다. 마윤지의 시집에는 무엇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잠시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묻힌쓰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처리된 것일 뿐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묻고 싶어”(「우리 영혼의 바닥까지 줄을 내려 사랑을 길어 올리는 동안」)하는 이유이다. 잃어버린 것을 환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시들에서도 드러난다.


이사 온 집에는 작은 쪽문이 있다
그 문으로 부엌도 가고 옥상에도 간다

이번 여름
텃밭의 토마토는 내내 연두색

이 골목의 집들은 마루 같은 큰 창이 있어
앞집 옆집 무얼 들여오는지
무얼 버리고 떠나는지 다 들리고 다 보인다

윤지야 왜 또 문을 닫아 맞바람이 시원한데

아빠가 1층 계단 앞에 써 붙인 글씨

모종은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생활은 액자, 안마기 가져가세요

집집마다 모종이 많다
집집마다 모종이 많이 죽는다

내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지만
아빠는 처음 보는 씨를 얻어 와 심으며

알아?

양배추에서도 꽃이 난다

모종은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생활은 액자, 안마기 가져가세요
씨앗 소량 양배추
―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부분

  

  창이 크게 난 집들이 모여 사는 골목길에서는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없다. 있는데 없는 듯이 살아 있는 것들도 없다. “앞집 옆집 무얼 들여오는지/ 무얼 버리고 떠나는지 다 들리고 다 보인다”. 화자는 이 큰 창으로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모두가 아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창을 닫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아빠는 “맞바람이 시원”하다며 다시 창을 연다. 이 골목에 사는 동안 자기에게 필요가 없고 가치가 다한 것은 더 이상 보관하거나 돌봐야 할 이유가 없는 폐품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집집마다 그 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을 그려 놓고 정작 사람들을 그리진 않는다. 다만 “1층 계단 앞에” 놓인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액자, 안마기” 따위의 사물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그린다. ‘가져가세요’라는 글씨를 써 붙여두면 버려지는 것들도 추가의 구제 과정을 거친다. 마치 앞선 시에서 동그랗고 작은 스티커를 붙여 지연시킨 죽음의 시간처럼, 필요가 다한 물건들은 “1층 계단 앞에”서 연장될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을 가져갈 누군가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창을 열면 맞바람이 칠 수 있게 연결된 공간들에서는 굳이 사람이 그려지지 않더라도 사람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려진 사물들 이면에서 연결된 사람들이 보인다.


  옮겨심기 위한 식물인 ‘모종’의 본분은 옮겨 심어지는 것인데, 그렇지 못할 경우 “집집마다 모종이 많”고 그래서 “모종이 많이 죽는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지 않는 모종은 재산이 되지 못하고 썩어 버린다. 하지만 어디선가 “처음 보는 씨를 얻어 와 심”는 ‘아빠’ 같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양배추에서도 꽃이 난다”는 사실이 가능해진다. 효용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옮겨 심어 살릴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창을 열면 맞바람이 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려지는 사람이 없이도 생명력이 가득하다. 숨구멍이 송송 뚫려 아무것도 쉽게 죽지 않을 것만 같다. 없던 생명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집에서 화자의 집으로 이동되어 그제야 살게 된 양배추는 다시 ‘가져가세요’ 목록의 맨 아랫줄에 추가된다. “씨앗 소량 양배추”. 이 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지는 동안 사라지지 않고 증식하는 생명력이 소박한 풍경 속에서 최대의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3. 감히 미래를 기약하는 법 : 박소란 『수옥』 (창비, 2024)


  박소란의 시집 『수옥』이 그리는 일상의 삶과 정서 속에는 완벽하게 걸러지지 않은 잔여물들이 섞여 있다. 일관성이나 항상성이 파괴된 현상으로서의 삶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하다기보다, 진짜에 가까운 묘사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도 나오고 결국 사랑은 아니었던 거지, 도 나오고”(「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는 것처럼 깨끗하게 건져 올리고 싶은 일관된 정서에는 언제나 잔존하는 잔여물들이 지독하게 따라붙는다.


상수도 공사 후 수돗물에 이물질이 섞여 나온다
민원을 넣는다
살 수가 없어요 이대로 도무지,

흙이 나오고 쇳조각이 나온다
누가 저질렀는지 모를 알들이 쏟아져 나온다
알은 부서지기도 한다
알에서 뭔가 태어나기도 한다 살 수가 없어요 살 수가, 울먹이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의 요령을 알 수 없다

사랑도 나오고 결국 사랑은 아니었던 거지,도 나오고

그 물에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군다
밥을 말아 먹는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고 키가 자라는데

특집 쓰레기 인문학 · 85

점점 흐려진다 나는 차가워진다
물 흐르듯 흘러
어디든 당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지체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잠을 한 컵 떠들면 미세한 꿈들이 순순히 가라앉고

아침을 깨우는 드릴처럼 말끔한 수도사업소의 안내문처럼

보란 듯 파헤쳐진 골목을 유유히 걸어갔다 걸어온다
번쩍이는 파이프가 가리키는 하나의 방향으로
집은 여전하고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해결하지 않는다

철썩거리며 흘러가는 매 순간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둥둥 떠 있다
― 「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 부분


  “상수도 공사”를 하고 난 어느 날부터 “수돗물에 이물질이 섞여 나”오기 시작한다. 모든 불순한 것들이 걸러진 결과물이 흘러야 할 곳에서 “흙이 나오고 쇳조각이 나온다”. 위생에 유해한 것들을 말끔하게 걸러내던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갈라진 틈 사이로 이전까지는 말끔하게 차단되었던 불순물들이 새어나온다. 화자가 넣는 민원의 내용은 “살 수가 없어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순물이 섞여 나오는 수돗물에는 “누가 저질렀는지 모를 알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뭔가 태어나기도”하는 장소로서의 알. 깨끗하고 완전한 수돗물로 유지되는 삶과, 그 삶의 질서가 깨졌을 때 가시화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삶의 기이한 공존이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어지는 삶에서 화자는 “그 물에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군다/ 밥을 말아 먹는다”.


  상반된 것이 혼합되어 구성하는 삶은 “아름다웠다고/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더러웠다고 지옥만큼 끔찍했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는”(「그냥 걸었다는 말」) 종류의 것이다. 이런 지독함은 우리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삶과 정서의 잔인한 진실이며, 그 가운데서 지속되는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구고 “밥을 말아 먹는” 행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고 키”를 자라게 만든다.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긍정과 체념의 중간에 걸쳐 있는 미진한 삶의 태도이다.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체화함으로써 이어나가고 있는 삶의 원리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살 수가 없어요 이대로 도무지”라는 울먹거림에도 불구하고 불순물이 걸러지지 않은 삶은 “여전하고” 그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해결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사실 앞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 일시적으로 삶의 주도권이 화자에게 주어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해결하지 않는다’는 선언만으로 삶의 키를 쥐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해결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이 시집에서 삶이 굴러가는 모양을 살피는 일이다.


  위의 시를 포함하여 박소란의 시집에서는 ‘물’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물이 흘러서 삶의 잔여물이 쓸려나가는 위생적인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행이 섞인 삶은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되짚어봐도” 그것은 “다만 흐를 뿐”이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쪽으로”(「그 병」). ‘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라는 민원의 답변처럼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요령”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 (물이 흐르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지속된다’는 ‘흔한’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 시집은 “고인 물 썩은 물 악취가 진동하는 물, 그런 물에서도 알은 태어난다”(「물과 구슬」)는 사실에 주목한다. 흐르지 않을 수도 있는 물, 고여 있어서 썩어 버리기 쉬운 물에서도 가능한 생명을 상상한다. 썩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이다. “썩는다,/ 가짜는 썩지 않는다”(「여름 노트」). 썩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아이러니한 진실 앞에서 폐기된 것, 불순한 것, 유해한 것의 혼합물로서의 삶은 정수된 상태로 재탄생되지 않고 당분간 어떻게든 조금씩 연장되는 방식으로 지속된다.


변기를 바꿔야겠어요 언제 이렇게 낡은 건지,
아버지는 말이 없다
잠에서 깨어 진통제를 한알 털어 넣고서 미지근한 물을 머금고서
나를 본다 선산 구덩이만큼 퀭한 눈으로

내 너머 구부정한 창이 부려놓은 캄캄한 골목을

아버지는 망설인다
변기, 변기라니

매시간 화장실을 드나들면서도
사는 게 암병원 같다고 끝없이 이어진 흰 복도 같다고
꺼지지 않는 빛
그런 게 얼마나 잔인한지

아버지는 화를 낸다 대장을 한뼘 넘게 잘라낸 뒤

미래, 미래라니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는 거냐?

쓰는 거예요 그냥

꼭 사기 같다 그런 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고
나는 감히 살 수가 없어
살 수가 없다

앓다 기진한 아버지 곁에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는 기약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간은 질금질금 흐르겠죠
악취를 풍기며 역류하겠죠 때때로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
꿈이나 영원이 아니라 비유로 꽉 찬 처방전이 아니라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그런


한알의 작고 둥근,

아버지는 그만 화를 낸다 꽉 막힌 삶에 시위라도 하듯
맹렬히 잠든다
TV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먼 나라 먼 도시 먼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찢어진 텐트 속에서

채널을 돌리면 낯모를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데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
형제종합설비에 전화를 걸어요 묵은 쌀을 불려 죽을 끓이고
조금 울다가
멀고도 가까운 웃음에 덩달아 조금 웃다가

미래, 미래라니
혀를 끌끌 차면서

오늘, 그리고 오늘,

오늘의 고지서를 챙기고 오늘의 달력을 넘기고 집 앞 농협에서
얻어 온
오늘의 시를 떠올리며

조금 더 살아요
― 「병중에」 부분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현재의 생생한 고통 앞에서 정말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병이 들어 고통받는 ‘아버지’는 낡은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말 한마디로도 무너진다. “미래, 미래라니//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는 거냐?” 대장을 한 뼘 넘게 잘라낸 ‘아버지’에게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나’의 말은 미래에 대한 끔찍한 기약처럼 들린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공포. 오늘의 이 어마한 고통이 꺼지지 않는 빛처럼 지독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운 예감.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화자의 말 속에 미래가 온다는 전제는 “잔인한” 사실이다. ‘아버지’에게 미래란 무언가 나아진 새로운 시간이 아니다. 현재의 고통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연장될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병든 ‘아버지’ 곁에 있는 화자는 현재와 미래를 어떤 자세로 지낼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미래가 “꼭 사기 같”고 “그런 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고/ 나는 감히 살 수가 없”는 것처럼 다가온다면, 화자는 어떻게 미래를 그릴 수 있냐는 질문에 “쓰는 거예요 그냥”이라는 말로 대답한다. 아픈 ‘아버지’의 곁에서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화자는 감히 “꿈이나 영원”이나 “비유로 꽉 찬 처방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아버지’에게 현재란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이란 그런 추상적인 언어로 꾸릴 수 없는 생생한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히 미래를 말할 수 없는 현재와 무관하게 “시간은 질금질금 흐”른다. 찾아오는 고통으로 인해 시간은 조금씩 새어 흐르다가 그치는 방식으로 가끔은 “악취를 풍기며 역류하”는 방식으로 “간신히 아주 간신히” 흐른다. ‘아버지’와 화자에게 고통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이 연장될 뿐인 미래가 지독히도 확실하게 기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화자가 하는 유일한 기약의 내용은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이라는 말이다. 고통이 나아질 것이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은 없지만 현재에도 미래에도 “매시간 화장실을 드나”드는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사실은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이라는 단 하나의 기약을 가능하게 한다. 변기를 바꾼다는 것은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낡은 변기는 살아 있는 순간에는 기어코 오물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삶을 보여 준다.


  「병중에」는 고통스러운 현재와 변하지 않을 고통의 미래가 확정된 상황에서 가능한 단 한 가지의 기약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다. 변기를 바꾸자는 약속이 무엇을 더 낫게 만들어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약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거창한 미사여구나 모호한 희망이 진정시킬 수 없는 현재의 고통 속에서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그런/ 시”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현재의 고통이 연장되는 미래보다도, 아무것도 기약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현재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화자가 병든 ‘아버지’에게 제안하는 최소한의 기약은 그들에게 가능한 최선의 기약이 된다. 최대의 기약이 된다. “오늘의 고지서” “오늘의 달력” 그리고 “집 앞 농협에서 얻어 온/ 오늘의 시”로 연명하는 “오늘, 그리고 오늘”에 들이쉬는 “한번의 숨”은 확정된 미래가 덮쳐오는 현재에서 “조금 더 살아요”라는 기약이 기어코 가능해지는 이유이다. 시집을 닫는 산문 「병과 함께」는 “병과 함께 건강하시길. 충만하시길”이라는 말로 우리의 안녕을 빈다. 무엇도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는 현재의 삶을 그래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책임한 약속은 잠시 내려두고 삶에 달라붙은 잔여물을 격리하지 않은 채로 그것과 함께 오늘을 연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약속을 되뇌는 것이다.



4. 나가며


  오직 인간이 쓰레기를 만든다. 쓰레기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인류세 시대란 무엇이 쓰레기로 가치판단 되는지를 면밀하게 살피는 한편, 생산된 쓰레기로 포화상태가 된 현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마윤지는 우리가 일시적으로 격리해 둔 현상과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묻힌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쓰레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다. 무엇도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맞바람이 치는 공간 속 오가는 연결만이 모종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생명이 연장되는 소박하고 우렁찬 원리이다. 박소란의 시집은 쓰레기 자체를 가시화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달라붙어 끈질기게 삶을 구성하는 불순물을 그대로 놓아두고 흙과 쇳조각이 섞인 물을 먹고 마시는 와중에 연장되는 삶을 그린다. 아침에 눈을 떠서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최소한의 기약으로부터 지독한 현실이 계속될 수 있는 이유를 찾는다.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삶에서 연장되는 미래 정도는 기약할 수 있다. 건강하고 충만하고 싶은 소원에 따라붙는 ‘병과 함께’라는 수식을 그대로 남겨두고, 일단은 조금 더 살아보자는 최소한의 기약으로 미래를 연장할 수 있다.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어서 세계는 반쯤 질려버릴 것이다”(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라는 구절처럼 이 세계에는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다. 이건 세계가 멸망한 이유이면서, 세계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말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일단은 문학의 장소인 변두리를 두리번거리며 달갑지 않은 사물과 현상과 정서를 이것저것 손에 쥐어 본다. 소개한 두 권의 시집은 적어도 쓰레기를 처리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의 수칙을 일러 주고 있다.


  • 1) 브라이언 딜, 『쓰레기』, 플레이타임, 2017, 13쪽.
  • 2)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2008, 64쪽.
  • 3) 브라이언 딜, 14쪽.
  • 4) 지그문트 바우만, 39쪽.
  • 5) 문제는 가치가 없다는 낙인이 찍힌 자들(현상들)이 어떠한 수단을 활용해 유용함에 부합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경우 그들의 가치가 구제될 가능성이 있느냐/없느냐가 아니다. “이제 분명하게 규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발견해, 그러한 수단을 단단히 틀어쥐고 최대한 노련하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목표의 모호성(그리고 종종 기만성)이 문제이다 ─ 목표는 우리의 손이 닿기도 전에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리며, 고정되어 있지도 신뢰할 만하지도 않고, 통상 헌신적으로 매진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쪽)
  • 6) 브라이언 딜, 12쪽.
  • 7) 같은 책, 15쪽.
  • 8) 마윤지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연천」이라는 시를 쓰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힌 바 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연천에 밭일을 하러 갔어요. 더위를 식히려고 근처 천에 몸을 담그고 큰 플라스틱 바구니를 튜브 대신 가지고 놀았어요. 졸업하고 몇 년 뒤에 그 천과 천에서 이어지는 강까지 온통 핏물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사진 속 강은 너무 달라서, 알아보기 어려웠어요. 열병 유행 때문에 돼지를 마구 생매장했는데 당연히 땅은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 했어요. 물과 땅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도요. 아마 소화하지 않은 것일 수도요. 이후에 「연천」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어요. 써야만 했어요.” (마윤지 “다 사라지고 시 앞의 사람만이 있길 바라며 엮었어요” https://ch.yes24.com/Article/View/5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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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최진석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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