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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와 문학 | 2024년 여름호(모두모아 187호)

선한 영혼들의 숨은 길 찾기

오세란 문학평론 (아동청소년문학)

2007년 <창비어린이>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충남대에서 <한국 청소년소설 연구>로 박사논문을 받았다. 단행본 <한국 청소년소설 연구>(청동거울, 2013) <청소년문학의 정체성을 묻다>(창비, 2015)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사계절,2021) <읽기와 흔들기>(창비, 2025) 현재 계간 <창비어린이>편집위원 (사)어린이도서연구회 자문위원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1. 다시 출발하는 작품 읽기


  이금이 작가는 1984년 단편 동화 「영구랑 흑구랑」으로 ‘새벗문학상’ 에, 1985년 단편 동화 「봉삼 아저씨」로 소년중앙 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데뷔 40년 만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주관하는 이 상 은 1956년 『작은 책방』(이도우 옮김, 수박설탕 2023)의 작가 엘리너 파전이 첫 번째 수상자였으며 수상자 명단에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에리히 케 스트너, 토베 얀손, 스콧 오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데이비스 알몬드, 우에하시 나오코, 차 오원시엔, 가도노 에이코, 재클린 우드슨 등 우리가 사랑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은 격년마다 글 작가와 그림 작가로 나누 어 시상하며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인 KBBY가 한국 후보 를 지명한다. 2022년 그림책 부문에서 이수지 작가가 수상했지만 글 부 문 작가의 수상은 시일이 더 필요하리라 개인적으로 예상했기에 최종 후 보 지명은 더욱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금이 작가는 2018년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사계절 2016))로 IBBY 아너리스트가 되었는데, 아너리스트 는 각 나라에서 작가와 작품을 지명하면 국제 명단에 그대로 등재된다.

  이금이 작가는 2020년에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한국 후 보였다. 그렇다면 2020년과 2024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일단 그의 대표작이 영어권 국가에서 출간된 상황이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 다. 또한 이번 심사를 위해 수출되지 않은 그의 대표 작품도 영문 번역하 여 보냈다. 글 작가의 경우 영어 번역본이 있어야 해외 심사위원들의 시선 을 붙들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한국 작가들의 뛰어난 작품 을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번역의 제도적 지원이나 아동문학 종사자들 의 국제적 소통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번에 최종 수상하지 못했다고 하여도 우리는 이 벅찬 기쁨을 누리며 우리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이금이 작품이 가진 이야기의 저력, 매력과 한계를 꼼꼼히 살피는 비평 작업이다. 우리가 가슴을 졸이며 기대했던 이번 국제적 이벤트의 출발 지점도 결국 ‘작품’ 이었다. 이금이 작가는 오래 꾸준히 활동한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을 한 번에 살피기는 어렵다. 오늘은 이금이 작품 중 ‘가족’과 ‘여성 성장서사’를 중심으로 조명해 보려 한다.


  2. 보살핌의 가치, 돌봄의 방향


  이금이는 새로운 문학 실험 보다는 친숙한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온 전통적 스토리텔러다.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친근하게 여기는 까닭 은 40여 년 동안 우리 곁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기도 하 지만 술술 읽히는 작품의 자연스러운 가독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소재나 스토리가 엇비슷한 다른 작품과 비교하여 어떤 성취 의 변별력이 있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금이의 작품은 소재나 서술 방식이 튀지 않으면서도 소위 ‘한 끗 차이’로 달라지는 문학성을 보여준 다. 그리고 때로는 한 끗 차이로 대중 드라마에서 본 듯한 스토리가 재 현되기도 한다.

  이금이 작가는 주로 인물 대비를 통해 플롯의 큰 줄기를 세운다. 미르 와 소희, 큰 유진과 작은 유진, 수남과 채령, 버들과 홍주 등의 대비다. 여 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작품 속 인물들을 주섬주섬 모아보면 몇 개의 유형 으로 나눌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가 떠오른다. 큰 인형 안에 크기가 조금씩 다른 인형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 카처럼 여러 인물이 모여 하나의 큰 모양을 이룬다.

  첫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에는 착하고 성실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사 건 앞에 선 인물이 모여 있다. 리얼리즘 서사가 그렇듯 이금이 작품 또한 중도적 인물이 주인공이며, 자기 내면을 찬찬히 돌아보는 성찰형 캐릭터 이기에 그의 최대 강점인 심리묘사가 이때 빛을 발한다. 1999년 출간된 『너도 하늘말나리야』(밤티)는 동화임에도 어린이 인물인 미르나 소희의 내면묘사가 탁월하여 이금이의 청소년소설 집필을 예고한 작품이다. 이 중 소희는 미르와 함께 작품의 중요 인물이다. 이 작품의 제목으로 삼은 ‘하늘말나리’도 바우가 소희를 닮은 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라는 하늘말나리는 소희를 은유한다.

  『너도 하늘말나리야』에서 소희가 할머니와 사는 바짝 철든 아이였 다면 『소희의 방』(밤티 2010)에서 소희는 재혼한 엄마의 집에 옮겨 심어 진 외로운 청소년이다. 소희는 오래 떨어져 살아 서먹한 엄마와 낯선 가 족 사이에서 처신이 조심스럽다. 제목이 ‘소희네 집’이 아니라 ‘소희의 방’ 인 것은 넓은 이층집 한쪽에 자리한 소희의 작은 공간이 곧 소희의 마음 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희가 최선을 다해도 새로 만난 이들 과 ‘찐가족’이 되기 어렵다. 새 가족과 어울려야 하는 소희의 과제는 가 족 구성원 각자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 기 어렵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에 등장하는 수남도 어려운 환경에서 성실 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이금이 작품의 주인공답다. 수남은 일곱 살에 “거 기 내가 가면 안 돼요?”라고 말하며, 넓은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딘다. 채 령의 몸종으로 출발해 일본, 중국, 미국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 수남은 자 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수남의 노력에 비하여 그에게 닥친 사건이 너무 커서, 수남은 감당하기 버겁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학』(현대지성, 2021)에서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 이는 인물과 플롯을 연결하는 개념으로 연구자들은 인물의 운명, 실존, 인물의 실수나 과오 등을 대표적인 하마르티아로 든다. 수남의 하마르티아는 그가 아무 리 노력해도 파도처럼 밀려드는 ‘운명’에 의해 좌우되는 듯 보인다.

  이금이 작품 속 인물 유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마트료시카 인형에는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들어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은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의 채령이지만, 밤티마을 시리즈의 영미나 『너 도 하늘말나리야』의 미르도 어느 정도 까칠한 성격을 드러낸다. 채령은 일제 강점기 부잣집 딸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며 타인의 삶까지 자기 것으로 가져간다. 욕망은 악 역에게 어울릴 듯하지만, 악역이 아니라도 욕망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창비, 2020)에서 홍주 역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솔 직하게 움직인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후 배우자의 죽음으로 친정에 돌아 왔을 때부터 시종일관 씩씩하고 당차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는 버들의 곁을 지키는 화끈한 의리파 친구이자 주인공을 받쳐주는 든든 한 조역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 속에는 자신의 환경과 운명에 휘 둘리지 않고, 선함과 지혜로움으로 어려움을 돌파하여 성장하는 인물이 모여 있다.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시리즈를 다시 읽어보니 첫 번째 편 부터 큰돌이에 비하여, ‘영미’나 ‘팥쥐 엄마’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팥쥐 엄마는 단순히 그냥 착한 새엄마가 아니다. 팥쥐 엄마 는 결혼 전의 삶이 상세히 설명되지는 않으나 힘들게 살아왔을 것으로 짐 작된다. 그는 어려웠던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환 경에 감사하며 더욱 깊고 단단해지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들은 타인을 돌 보며 자신을 함께 회복시킨다. 팥쥐 엄마가 매우 착한 캐릭터임에도 정형 적이거나 교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우리를 키웠던 이 땅의 엄마들을 닮았기에 설득력 있고 생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주인공 ‘버들’도 유사하다. 이 작품은 백 년 전으로 시간의 축을 이동시킨다. 열여덟 살의 청소년인 버들은 사진 신부 로 하와이에 가서 태완과 결혼하고, 태완이 조선 독립을 위해 아시아로 떠나자 하와이에서 홀로 가족을 돌보며 실질적인 가장이 된다. 또한 버들 은 출산 후 자신의 딸을 사고로 잃고 친구 송화의 딸, 펄을 키우는 엄마 가 된다. 착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세상의 운명에 굴절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에게 닥친 난관과 싸워나가는 버들은 이금이 작품의 정점에 선 인물 이다.

  팥쥐 엄마나 버들은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가부장제의 성역할 규범에 따르는 인물이지만 이러한 여성의 삶은 최근 사회에서 ‘돌봄의 윤리학’, ‘보살핌의 가치’가 주목되며 재해석의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평생을 살며 어느 한 시절에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다. 보살핌 없이 홀로 삶을 지속 할 수는 없다.1)돌봄의 영어 표현인 케어(care)는 나의 외부(자연, 타인) 세 계에 관심을 두고 염려하고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2)팥쥐 엄마나 버들은 보살핌을 실천하여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한 인물이다.

  그러나 보살핌, 노동이 오랫동안 성별 분업화를 통해 이어져 왔으며3) 여성 성역할로 일방적인 폄하 혹은 미화4)되어 온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 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 있는, 팥쥐 엄마나 버들이 보여 준 보살핌의 가치 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여성, 인물, 돌봄 노동의 방향은 어떠해야 할지 함 께 고민해보면 좋겠다


  3. 더 큰 가족을 꿈꾸는 이야기들


  아동·청소년 문학 중에 생활 동화는 어린이의 생활 반경이 가족과 학 교, 마을 정도이기에 대체로 가족 내에서 벌어진 사건을 중심에 둔다. 청 소년소설도 가족이나 학교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많은 편이다. 물 론 최근의 장르 서사는 어른 인물이나 가족을 가급적 배제하고 청소년 인물만 등장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금이 작품의 경우 동화나 청소년소설은 물론 역사 서사로 시공간이 확장되어도 기본적으로 ‘가족서사’를 토대로 삼는다. 즉 이금이 작품은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이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작품 인 『너를 위한 B컷』(문학동네, 2023)에서도 주인공 선우가 유튜브 동영상 편집 과정에서 드러난 학교 폭력 문제에 용기 있게 대응할 수 있었던 이 유는 아버지가 경험한 내부자 고발 사건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가족서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그중에서도 특히 가족 해체 및 새로운 가족의 탄생, 그로 인해 파생되는 혈연이 아닌 아이 돌보기 등 을 주목해 왔다.

  1994년 출간된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밤티)부터 작가는 일반적인 가족의 모양이 아닌 해체된 가정과 그런 가족 내의 어린이를 등장시켰다. 이 작품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고 큰돌이의 친엄마가 집을 나가며 시작 된다. 또한 그 여파로 영미는 입양을 가게 된다. 영미는 친엄마, 영미를 입 양한 엄마, 새엄마 등 세 사람 사이를 오가며 갈등한다. 이 작품은 동화로 는 보기 드물게 어린 영미의 이런 상황을 정직하게 담아내며 입양, 가족 해체, 새로운 가족 만들기 등의 소재에 돌직구를 던졌다. 이런 소재를 단 순히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큰돌이와 영미의 상처 난 내면을 알뜰히 거 두었다. 영미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작가의 작업은 최근 출간된 『밤티 마 을 마리 집』(밤티, 2024)에서도 이어진다.

  『너도 하늘말나리야』 역시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둘이 살게 된 미 르의 이야기이며 미르가 아빠의 재혼으로 겪는 상실감이 곡진하게 나타 나 있다. 또한 미르가 달밭 마을로 이사 한 뒤 알게 된 바우는 엄마가 죽 은 후 아빠와 살고 있고, 소희 역시 아빠의 죽음 후 재혼한 엄마와 살지 못하고 친할머니와 산다. 이후 『소희의 방』(밤티, 2021)의 소희에게는 재혼 한 엄마가 만든 새 가족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놓인다. 이 연작의 마지 막 작품 『숨은 길 찾기』(밤티, 2021)에서는 미르 엄마와 바우 아빠가 결혼 하며 새로운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든다.

  작가는 가족서사에 앞서 언급한 여성의 돌봄 서사를 겹쳐 놓는다. 여 성서사 중에는 수난담 혹은 성장담으로 ‘여인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고전 문학이나 근현대 소설이 있는데 이금이의 몇몇 작품은 이러한 플롯을 보 인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주인공 버들의 성장담에 모계 중심의 가 족 서사가 연결된다. 지난 몇 년간 한국문학에 전통적 부계 중심의 가족 서사에 대항하는 모계 중심의 몇몇 가족 서사가 등장했다. 모계 중심의 가족 서사는 여성의 강한 생명력과 생활력, 책임감, 연대 의식을 여성의 특질로 부각한다. 최근 소설에서 ‘여인의 일생’은 여성 자손을 통해 구전 되는 한 세대의 역사와 전통, 새로운 혈육의 의미 등으로 확장되면서 주 제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5) 『알로하, 나의 엄마들』 역시 여성이 주도 하는 ‘가족 만들기’를 보여준다.

  나아가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가족서사에 버들의 비혈연 아이 키우 기를 결합하여 가족의 경계를 확장한다. 이 작품은 하와이 이민을 다룬 이주민 서사지만 기본 토대는 버들과 태완이 가정을 이루며 하와이에 뿌 리를 내리는 가족서사다. 버들은 둘째 아이인 딸을 사고로 잃고 친구 송 화의 딸을 자신의 아이로 맡아 키운다. 흥미롭게도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에서 영미가 세 명의 엄마 사이에서 갈등하듯 펄 역시 세 엄마의 정체 와 출생의 비밀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세 엄마가 전 하는 가치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에서 어린 영미에게 세 엄마의 존재가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면 『알로하, 나의 엄마 들』에서 펄이 발견한 것은 세 엄마에게 나누어 받은 세 배의 사랑이다. 타 향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친구였다가 펄의 엄마 역할까지 나누어 맡은 버들, 홍주, 송화는 가족 이상의 가족이다.

  올해 출간된 『밤티 마을 마리네 집』(밤티, 2024)에서 주인공 고마리는 네팔인 엄마와 둘이 사는 초등학생이다. 마리 아빠는 한국에서 취업이 종료되어 현재 고향 네팔에 머물고 있다. 마리와 마리 엄마는 자신이 사 는 집 2층으로 이사 온 영미와 교류하게 되고, 결국 마리네는 밤티 마을 로 이사를 한다. 할머니가 된 팥쥐 엄마 정옥순 씨가 이번에도 그들을 넉 넉히 품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 부부가 밤티 마 을에 뿌리를 내리는 모습에 하와이로 이주한 버들이네의 이민사가 겹친 다. 밤티 마을에서 마리 네 집과 팥쥐 할머니 네 집이 서로 이웃하며 사는 풍경 또한 혈연 가족을 넘어 더 큰 동심원을 그리려는 작가의 꿈을 담은 듯하다. 작가에게 가족이란 한 영혼을 새롭게 품으며 커져가는 넉넉한 보 따리다.


  4. 가족의 정의를 묻다


  이금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이야기 원형에 나타나는 화소의 차용 이다. 두 인물을 대비하여 이야기의 축을 세우는 것부터 그렇고 『거기, 내 가 가면 안 돼요?』에서 수남과 채령의 ‘신분 바꾸기’도 그렇다. 『알로하, 나 의 엄마들』에서는 펄의 ‘출생의 비밀’이 등장한다. 동화 『하룻밤』(사계절, 2016)은 용궁에 다녀오는 모험과 ‘세 가지 소원’ 화소를 가져 와 죽음과 삶의 의미를 대비한다. 『망나니 공주처럼』(사계절, 2019)에서 ‘공주이야기’ 도 어린이 독자에게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읽도록 만들며 나아가 기존 공주서사의 전복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오랜 원형을 의식하는 이금이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자연스 럽다. 이금이 작품에서 이러한 구도는 장점으로도 작용하지만, 간혹 전 형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문제가 많은 가정의 틀을 지키려는 엄마들이 등장할 때 특히 그렇다. 『소희의 방』에서 소희의 친 엄마는 경제적 형편이 넉넉한 남편과 재혼하여 부잣집 사모님이 된다. 소희네 새 가정은 영화에 나오는 듯한 전형적인 부잣집이다. 그런데 소 희의 새 아빠는 타인의 눈에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나 배우자를 상습 폭 행하는 습관이 있고 이 비밀은 가족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소희 엄마 는 두 번째 결혼이 깨지지 않도록 매 맞는 아내 역할을 감수하는데, 그 의 내면 갈등이 드러나지 않아 심리묘사가 풍부한 이금이 작품에서는 다소 의외다.

  2004년에 출간된 『유진과 유진』(밤티)도 유사하다. 이 작품에서 유진 과 유진은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성폭력에 노출되었던 청소년이다. 동일 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두 아이가 다르게 성장하는 이유는 엄마들의 태도 때문이다. 작은 유진의 기억이 억압된 까닭은 그의 엄마가 보인 행동으로 귀결된다. 작은 유진의 엄마와 『소희의 방』의 소희 엄마는 가족 내 갈등 을 표면화시키지 않고, 가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한다. 작은 유진의 엄마 는 남편의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혼을 한 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다 가 작은 유진에게 벌어진 사건을 함구하는 조건으로 시부모의 지원을 받 게 된다.


  “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알겠어?”

  엄마가 소리친다. 세게 틀어 놓은 물 소리 속에서도 엄마 목소리를 크게 들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엄마 품에 얼굴을 묻으려고 한다. 엄마는 그런 날 떼 놓으면 말한다.

  “앞으로 다시는 그 얘기 꺼내지 마. 그럼 너 죽고 엄마도 죽는 거야.알겠어?”

  나는 너무 무서워 최대한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지러울 만큼 오래 끄덕인다. 비로소 환영 속 장면이 완성되었다. (169쪽)


  엄마와 시가의 갈등이 작은 유진에게로 이어져, 작은 유진이 겪은 경 험과 상처는 강제로 억압된다

  『얼음이 빛나는 순간』(밤티, 2013)은 청소년으로 부모가 된 은설과 석주 의 사연을 담고 있다. 이들은 어린 나이지만 힘든 과정을 통과하며 새로 운 가정을 만든다. 이때 석주의 원가족인 석주 엄마의 말과 행동 또한 가 족의 체면과 아들의 장래에만 연연하는 이기적인 모성을 보여준다. 반면 이 작품의 또 다른 청소년 주인공 지오의 엄마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매 맞는 아내였으나 지오, 지윤 남매와 캐나다로 떠난 후 그곳에서 자신 의 삶을 찾고 공부와 일, 그리고 새 가정까지 이룬다. 그가 허울뿐이던 가 족을 떠나는 순간, 지오는 가정 해체로 번민하는 청소년이 되고, 지오 엄 마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가 된다.

  이금이 작품은 인물이 체면 유지를 위해 허울뿐인 가족 안에서 버틸 때 전형적인 클리셰가 나타나며, 인물은 진부한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보인다. 작가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가는 인물에게 공을 들이는 반면 복잡한 사정을 무마하며 가정을 유지하는 인물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 는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의 경우 미국 유학을 하고 중국에서 강휘와 독립운동을 하며 주체적으로 살던 수남의 태도는 일본 패잔병들에게 성 폭행을 당한 뒤, 강휘의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채령에게 맡기는 시 점부터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아들에게 사회적으로 더 나은 가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아들 진수를 채령에게 보낸 후 수남 자신은 조용히 세 상의 뒤편에 머무는 길을 택한다. 채령은 그런 진수의 입양마저 성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며 결국 이 입양은 비극으로 끝난다. 수남의 이야기는 수남의 출산 이후부터 성장담이 아닌 수난담이 된다.

  결론적으로 그의 가족서사는 옛이야기처럼 원형적이다. 버들이나 팥 쥐 엄마 같은 여성은 근대사회가 제시하는 성역할 규범을 가지고 있음에 도 설득력 있는 성장을 이룬다.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의 엄마들이 보여준 돌봄이 생생하게 존재하며, 이를 통한 여성 성장 역시 오래 반복되며 각 인된, 부인할 수 없는 원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가족서사의 플롯을 주조로 하는 이금이 작품 속 인물의 성장은 가족주의에 머무르지 않는 새로운 가족 만들기를 지향하며 성취된다. 반면 가족의 문제를 알면서도 유지하려는 인물은 옛이야기 속 인물처럼 플랫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망나니 공주처럼』은 오늘 논의한 작품 중 가장 짧지만 새 세상을 지향하는 작가의 소망이 응집되어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앵두 공주는 ‘망나니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는데 그 이야기는 고정관념에 쌓인 공주 스토리다. 어느 날 앵두 공주는 자두네 집으로 가서 망나니 공주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앵두 가 자두와 함께 자두의 할머니한테서 듣는 공주와 왕자 이야기는 기존 의 가족 이야기가 아닌 신선한 ‘가족이야기’다. 앵두 공주가 자신의 삶에 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던 이금이 작품 속 인물을 닮았다면, 친구 자두는 주인공을 끌어내는 인물을 닮았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손잡고 새로운 이 야기의 문턱을 넘는다. 앵두 공주가 기존에 살던 집, 자두네 집, 그리고 그 들이 집을 떠나 나아가는 새로운 세계라는 세 공간은 이금이 작품이 보 여주는 방향과 일치한다. 집과 가족의 ‘정의’는 앵두와 자두가 찾을 자유 로운 세계에서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망나니 공주처럼』은 오늘 논의한 작품 중 가장 짧지만 새 세상을 지향하는 작가의 소망이 응집되어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앵두 공주는 ‘망나니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는데 그 이야기는 고정관념에 쌓인 공주 스토리다. 어느 날 앵두 공주는 자두네 집으로 가서 망나니 공주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앵두 가 자두와 함께 자두의 할머니한테서 듣는 공주와 왕자 이야기는 기존 의 가족 이야기가 아닌 신선한 ‘가족이야기’다. 앵두 공주가 자신의 삶에 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던 이금이 작품 속 인물을 닮았다면, 친구 자두는 주인공을 끌어내는 인물을 닮았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손잡고 새로운 이 야기의 문턱을 넘는다. 앵두 공주가 기존에 살던 집, 자두네 집, 그리고 그 171평론 이금이특집 들이 집을 떠나 나아가는 새로운 세계라는 세 공간은 이금이 작품이 보 여주는 방향과 일치한다. 집과 가족의 ‘정의’는 앵두와 자두가 찾을 자유 로운 세계에서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5. 숨은 길을 찾아서


  이금이는 1984년 등단 때부터 작품의 주요 무대를 농촌으로 삼던 중 1994년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에 이르러 가족 해체의 위기에 놓인 농 촌 현실에 집중한다. 1999년에 출간된 『너도 하늘말나리야』 역시 서정적 인 문체로 어린이들의 성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성장에 가족 해체로 인 한 아픔이 숨어 있음을 짚어낸다. 또한 그는 2000년대부터 한국 청소년 소설 장르를 개척한다. 2004년, 『유진과 유진』으로 청소년소설 집필을 시작한 그는 일상의 청소년을 그리는 작업을 넘어 한국 근대사의 청소년 을 탐구하며 작품의 시공간을 확장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 세계 를 스스로 돌파하며 문학의 길을 만들어 왔다.

  한편 그의 작품은 현실적 소재의 직시, 자연스러운 스토리, 서정적이 며 내밀한 심리묘사 등의 강점을 가졌으나 때로 근대사회에서 규범화한 젠더의식과 친연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우리 사회의 변화한 성인지 감 수성은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기존 작품 중에 현재에 맞지 않는 작품 속 서사, 문장, 어휘를 수정하는 작업을 지난 몇 년간 지속하고 있다.

  많은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들이 행복한 어린이보다 소외된 자리에 있 는 어린이를 비추려고 한다. 그것은 근대사회의 성인 중심주의로 인해 어 린이와 청소년이 소수자이자 타자로 자리매김 되어온 것을 작가들이 어 느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한 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수상 작가들을 예로 들면 그들은 대부분 소 외된 어린이와 청소년 인물의 상황을 더욱 과감하게 짚어낸다. 2020년 수상자인 재클린 우드슨은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와 흑인 여성의 문제가 관심사다. 또한 그가 참여한 『엠 아이 블루』(휴머니스트, 2021)와 2022년 수상자인 마리 오드 뮈라이유의 『오, 보이!』(바람의아이들, 2022)는 퀴어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이금이 작가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 인간의 소외된 자리를 비추며 여기까지 왔다.

  나아가 어린이 독자를 사로잡은 세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은 소외된 어 린이나 청소년을 단순히 사건의 피해자나 어른이 해결하는 사건의 수혜 자가 아닌, 스스로를 주체로, 씩씩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로 그린다. 이금이 작품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누구의 도움도 기다리지 않으며 스스로 숨은 길을 찾는다. 사람들은 흔히 문학과 삶을, 독서와 일 상을 분리하지만 나는 이야기와 삶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사람의 삶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닮아간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어려운 사 건에 직면하지만, 자신을 믿으며 숨은 길을 찾아 나설 이금이 작품 속 새 주인공을 만나고 싶고 그 이야기를 닮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 1) 정희진, 『돌봄이 돌보는 세계』, 동아시아, 2022, 185쪽.
  • 2) 정희진, 위의 책, 186쪽 참조.
  • 3) 정희진, 174쪽.
  • 4) 정희진, 180쪽.
  • 5) 강유진, 「‘여인의 일생’과 가족사 소설의 현대적 변용 연구 -『파친코』(인플루엔셜(주), 2022), 『알로하, 나의 엄마들』(창비, 2020),『밝은 밤』(문학동네, 2021)을 중심으로-」, <어문론집> 제 39호, 중앙어문학회, 2023,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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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 어른의 서정 :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

1.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의 갈라진 틈에 흘려보냈어야 할 때가 박혀 까맣게 굳어 있다. 더는 손 씻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작은 비누를 차마 버리지 못한 연한 마음. 한낱 비누 조각에 담긴 손때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섬세한 시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그뿐.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에 과할 만큼 환한 조명을 비춰 부유하는 듯 피사체를 연출한 사진술에 불과하다고. 삶은 어찌할 바 없이 낡아가기 마련이고 그 사실 자체는 대단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동원하지 않으면 포착할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조명을 비추고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도 메마른 비누가 다시 수분을 머금고 유선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저 모양과 저 색으로 머무르는 비누의 한순간이 존재하고, 때때로 예술은 부드럽고 환한 조명을 비춰 그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영원의 빛을 부여하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잘 짜인 베일 위에 손때 묻은 비누 조각을 올려 섬세한 조명을 비춰보는 일. 말라붙은 비누는 놀랍게도 영롱한 빛을 뿜고,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다. 2.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p.36)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기에 놀랍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라고 잊었기에 새삼스럽다. 현란한 타임라인에 무한한 현재가 피드되는 오늘날에도 소설은 삶이 연속적임을, 젊었던 내 모습은 절대 돌아오지 않고 그 비가역성이야말로 삶이 지닌 잔인하고도 엄연한 속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삶이 단속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내 앞에 돌아와 놀라운 기시감을 선사해주라는 것 또한 알려준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아주 환한 날들」, p.33) 하고 작은 경악을 느끼는 것처럼, 마흔이 넘은 여자가 “일렁이던 특별한 빛”을 가졌던 한때를, 그 시절 품었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빛이 다가올 때」, p.65, 71)을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기억에 남은 몇 장면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인생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장면들로 엮어낸 사슬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는지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 순간 이후 나는 달라졌다’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진실은 ‘그 순간을 떠올린 이후 나는 달라졌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반복해 살고, 그때 비로소 그 순간의 적확한 좌표를, 그 순간이 인생에서 차지한 위치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아채게 된다. 이야기의 형태로 순간은 영원을 획득하고,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선물처럼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삶을 관통해왔음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환희가 그때의 내게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그곳’은 ‘지금 이곳’에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1) 모습으로 펼쳐진다. 오래되고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생하는 이 뒤늦은 행복의 수확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예컨대 다시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믿었던 노인이 앵무새를 사랑하게 되었거나(「아주 환한 날들」), 뉴욕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사촌 언니의 때늦은 첫사랑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빛이 다가올 때」), 당혹과 감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이미 충분히 고독하기에 발생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노인이 젊은 엄마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첫사랑의 추억에 무감해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에게 뉴욕은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속의 교차, 고독한 사람이 길을 걷고 서길 반복하는 모습이야말로 삶에 관한 정확한 비유로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길은 끊기지 않고 다만 종종 정지되고 자주 되감길 것이다. 그렇게 백수린 소설의 행로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서. 과거의 한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잃어버린 조각처럼 박힌다.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닌, 방금 만들어진 자리. 박히는 순간 이 자리가 바로 제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렇다고 사랑이 이별로 마무리되고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지당한 진리가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녹아 사라지거나 말라비틀어져 버려지는 것이 비누의 운명인 것처럼. 인생이 비극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비극에서 실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가의 고군분투가 존재할 따름이다. 미약한 우리가 삶의 비극성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임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예술가의 눈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 의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2)에서 유래하며, 소설의 독자이자 제 삶의 독자인 우리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은 지적인 책임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지나간 시절의 좌표를 해독하는 일인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이곳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아름다움과 진실은 함께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기억은 재구성의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고, 보정된 과거는 진실성을 잃는 대신 아름다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같지 않고, 어쩌면 기사를 작성하는 일조차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기사가 모든 일이 끝난 후 숙고하며 작성된 기사보다 진실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풍경으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속했던 나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빚어낸 거리를 통과하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편집과 윤색의 의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라도 차마 거짓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은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복기되지 않는 사실은 순결하지만 무의미하고, 삶은 끊임없이 복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도약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에 가깝다. 만약 기억을 탐사하는 자가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는 걸 잊는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3)고 있는 셈이다. 되찾은 기억은 단지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솟아오르는 현재의 이 장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시절의 보라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유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더 이상 “유타의 대책 없음이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건 어쩌면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든 개를 간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봄밤의 우리」, p.92)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 과거 유타와 함께했던 나날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타인의 말과 몸짓이 새롭게 발굴되고, 그렇게 되찾은 것들은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곳의 내 삶에 대해 알려준다. 뒤늦은 앎이 전적으로 내 덕이 아닌 것처럼, 당시의 무지도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다혜가 자신을 얼마나 성숙한 어른으로 여기든 간에,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자식들의 만류에도 어깨관절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짐짓 어른스러운 포즈로 반문한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자 희미한 깨달음과 후회가 밀려온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눈이 내리네」, pp.208~209)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를 것이고, 운이 좋다면 언젠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앎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함께할 것이다. 삶은 기억이 빚어내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작 1인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손안에 놓일 앎이 그리 대단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미한 앎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만이나 허위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잃은 엄마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처럼, 차마 바랄 수도 없던 빛, 꿈에서도 허락한 바 없던 빛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 빛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그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그것은 무엇이었을까」, pp.245~246)다. 삶의 아름다움은 감히 기다릴 수는 없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찾아온 앎이 가까스로 맺힌 물방울 같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정교한 결정에 감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곧 흩어지리라는 걸 납득하는 사람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도, 힘을 갖거나 성취를 쌓은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갓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섬으로, 다른 이들을 파도로 여겼다. 파도가 나를 치거나 감싸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길 반복한다고 믿었던 순진함. 나이를 먹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나는 바다 위에 고정된 섬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의 허위를 깨닫게 된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나이를 먹어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4)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설명하는 쿤데라의 말에 동의한다.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성숙해진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일, 서정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어른의 것이고, 소설가의 탄생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5) 여기서 백수린의 소설을 좀더 염두에 두고 말해보자면, 소설가는 그 폐허 위에 어른의 서정 세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복잡한 서정, 그러니까 무지로 빚어낸 매끈한 서정이 아닌 주름지고 비틀리고 손때 묻은 서정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와 충만이,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를 가진다는 건 달라진 그의 관측소를 공유하며 새로운 어른의 서정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다정한 공모자들처럼.”(「흰 눈과 개」, p.142) 1)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 212쪽. 2) 밀란 쿤데라, 권오룡 역,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의 기술』, 민음사, 2013, p.195. 3) 발터 벤야민, 같은 책, 「발굴과 기억」, pp.182~183.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커튼』, 민음사, 2012, p.204. 5) 같은 책, 「시인과 소설가」,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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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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