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제121호)
한국문학의 위상 — 우리 비평의 자리 2
1. ‘선진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고,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태어나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당연하다고들 했지만, 나는 지난 10월 10일 이후에야 한국(인)의 ‘선진국 됨’과 관련된 실감을 좀 한 것 같다. “후진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며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아직까지 한국문학이 선진 외국문학의 모방이며, 그 모방은 한국을 문화적 식민주의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1)고 했던 반세기 전의 진단이 여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도. 심지어 그 옛날 백범 선생이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면서 부력富力도 강력强力도 아닌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한 얘기까지 그 시점에 불현듯 떠올랐던 걸 보면, 그간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을 거치고도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던 민족 지사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못했었나보다. 특히 ‘문학’이므로, 비로소 ‘문학’에 이르러서야 우리 문화의 진정한 힘을 세계에 떨친 것으로 인정한다는 투로, 오만해진 문학인처럼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닐지도 모르는 게, 올여름에 아래와 같은 의견을 개진했던 평론가는 올가을 노벨상으로 마침내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달성’될 것을 예상했을 리 없다
지금까지의 세계문학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해 ‘세계-내-문학 Literature-in-the-World’이라 불러도 좋겠다. 서구의 근대문학이 만든 규범과 체계, 문학적인 것의 척도에 맞게 한국의 문학을 구성하고 조절하는 기능이 그 핵심에 있다. 이른바 ‘세계적’이라 부르는, 서구적 기준에 맞춰 글을 쓰거나 읽고, 평가하고 정전화하는 이 과정은 문학적 근대성의 승인/인정과 거절/부정의 체계에 다름 아니다. 최근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구 문학의 인정에 여전히 목말라한다는 점이고, 그 승인 체계에 입장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이 과거보다 한결 나아졌다는 점이다. ‘그들만의 보편성’에 들어가기 위한 욕망, 그로써 ‘세계문학’의 타이틀에 한국문학을 포함 시키려는 욕망을 주의깊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2)
「세계문학의 시차, 혹은 세계-외-문학을 향하여—비동시성의 시대와 한국문학의 자리」라는 이 글의 실질적 의도는, 1970~80년대의 민족문학에 대한 강한 애착과 향수가 여전히 ‘세계문학’의 타이틀을 욕망하는 한국문학의 기묘한 열등감과 관련있음을 지적하고, 지역과 민족, 국가라는 근대적 분류법에 따라 문학의 내용과 외연을 규정짓는 ‘한국문학’(이라는 명칭)의 “근대적 척도” 너머에서 “낯선 글쓰기의 영토”를 찾아보자는 데 있다. 이에 이 글은 편의상 ‘세계-외-문학’이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시한다. “세계-내-문학이라는 개념이 문학장의 출입을 통제하고 승인과 배제의 역학을 작동시켰던 근대문학을 뜻한다면, 세계-외-문학은 그러한 척도 바깥의 문학, 즉 서구라는 유일무이한 기준에 의거하여 다양한 지역적 문학들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겨왔던 질서 너머의 문학을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대별되는 용어로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 문학을 가리키고자 한들, “인종과 민족, 국가와 사회, 성별과 취향, 감각적 다양성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소수 문학들minor literatures”은 끝내 각각의 이름들로만 존재하는 문학들일 것이다. “어쩌면 근대적 척도에 의해서는 ‘비문학’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는 낯선 글쓰기의 영토”들을 “여전히 세계문학이라 부를 필요는 없을 일”이고 말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예견하지 못하고 쓰였을 것이기에 이 글이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하고 이와 관련한 여러 ‘전문가’들을 인터뷰한 뉴스와 기사들에서 이른바 ‘한국문학의 쾌거’를 환호하며 발산하는 기쁨이 우리가 더이상 “서구 문학의 인정에 여전히 목말라”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안도감 또는 자부심으로 이어지는 것일 때, 노벨상 수상 전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관련하여 저 글에서 제안하였던 ‘세계-외-문학’이라는 목표 이전에 이미 한국문학은 ‘세계내-문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며 깨닫게 될 뿐이다. 최진석의 글을 인용하여 더 말하면, 어떤 지역의 문학이 세계적인 권위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그것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상과 감정, 또는 형언 불가능한 감응의 방식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임과 동시에, ‘세계문학’이라는 “근대성을 전제로 서구적 진보를 표상하는 제도이자 그 표현물”로서 “서구 세계의 ‘내부’를 구축하고 존속시키는 포함과 배제의 장치”의 일원으로 승인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벨문학상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챗지피티의 답변에서 선별, 교정, 교열을 거쳤다).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깊이와 독창성을 갖춘 작품을 선정하여, 문학적 성취와 혁신의 기준을 제시한다. 노벨문학상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문학의 표준은 각국의 문학계에 영감을 제공하고, 신진작가들이 창작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된다. 또한 노벨문학상은 문학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한다. 수상작들은 주로 사랑, 고통, 희망, 상실 등 인간 경험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전 세계의 독자들이 자기와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공감하도록 한다. 이러한 인식 일반에 비추어 말해보자면, 노벨상을 받은 한강의 문학은 변방의 언어인 한국어로써 인류의 ‘보편적’ 경험과 감정을 형상화하여 ‘세계문학’의 새로운 표준이 될 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세계 내 문학’일 뿐만 아니라 그 문학을 가능하게 한 한국어 또한 세계적 표준에 기여한 만큼 세계적으로 주요한 언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간 서방 세계, 서구 유럽, 또는 ‘선진국’의 권위에 달려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적’ ‘보편적’ ‘중심적’이라는 그 승인들을 이제부터 한국문학은 갈구하지 않아도 된다. ‘문학성’의 권위를 챙겨온 서구적 ‘보편성’을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중심부’에 진입한 것인가? 아니면 서구 유럽이라는 ‘중심’에 있던 세계문학이 동아시아의 한국이라는 ‘주변’으로 움직여온 것인가? 이렇게 된 이상—여하간 중심이 바뀐 이상—세계문학은 더이상 “서구적 진보를 표상하는 제도이자 그 표현물” 또는 “서구 세계의 ‘내부’를 구축하고 존속시키는 포함과 배제의 장치”는 아니게 된 것일까? 사실상 근대성을 전제로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경계가 문학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해질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지역/민족/국가의 문학을 대타항으로 하는 ‘세계문학’이란 어떤 규정으로도 적실하게 작동시키기 어려운 대상이자 용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아니면 이제부터, ‘선진국’의 권위로 형성된 ‘세계문학’이라는 것의 일부로서 한국문학을 이야기하는 데는 여러 부적절함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이제 이 나라 사람들은 적어도 “후진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반세기 전 질문의 열등감에서는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지금 표해지는 한강 문학에 대한 상찬과 긍지가 우리로 하여금 ‘선진국에서 하는 문학 활동의 가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로 바뀐 질문 속에 얼마간 자중감을 품게 하리라고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여하간 여기서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들과 관련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이른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다시금 입체적으로 생각해보려 할 때 이는 선진국 됨, 즉 한국이라는 지역/민족/국가의 선진화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혹여 그 이전에 이를 선진, 후진으로 구분하여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었는가, 또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말에서 ‘한국’과 ‘세계’가 구분되거나 이어지는 지점을 어떤 위상에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가, 등등.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20세기 근대 문화의 후발 주자(?)로서 오랫동안 소수 언어/문학의 정체성을 자처했던 한국의 ‘국어국문학과’ 출신 작가가 ‘세계 문학계에 한국문학의 위상을 드높인’ 이 사태에 대해, 국문과의 출세, 민족의 쾌거, 한국문학의 약진 등으로 표출되는 자긍심 외에도 이 기회에 생각해볼 만한 것들이 있지 않겠느냐고.
2. 중심의 포섭인가 정체성 탐구인가
제주시의 인터넷 신문 ‘제주의 소리’는 지난 10월 7일 ‘유명 소설가 한강의 4·3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판적으로 읽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고명철의 글 「‘4·3수난사’ 중심, ‘애도의 서사’와 작별하자」(『지구적세계문학』 2024년 상반기호)를 소개하기 시작하여, 이후 삼 일 동안 총 네 번에 걸쳐 연재를 완료했다. 절묘한 시점에 알려진 이 글의 주요 문제의식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3)의 프랑스어 번역작 『불가능한 이별 Impossibles adieux』(최경란, 피에르 비지우 옮김, Grasset, 2023)이 작년 프랑스에서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을 수상했을 때 그것에 쏠린 외신의 관심이 “서구의 유수 문학상 수상자이자 유력한 후보 작가로서 곧잘 언급되곤 하는 아시아의 한 작가가 아시아의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서구의 문학이 갈고 다듬은 미학의 유산을 자신의 문학 세계로 어떻게 잘 소화해내고 있는지, 그리하여 서구의 미학을 좀더 새로운 차원에서 어떻게 전유하고 있는지 그 새로운 진취적 노력에 대해 미학적 차원에서 포용적·시혜적·진보적 모습을 보일 따름”3)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작별하지 않는다』의 ‘미학’을 문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다루는 제주 4·3사건이 유럽인들에게 읽힐 때, 이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서 그들이 자행한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의 대참상이 아시아의 한반도에서 고립된 제주 섬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의미화되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조우했던 제국과 근대 국민국가의 폭력에서 야기한 반인권적 야만과 포개지는 끔찍한 역사의 비극적 한 사례”4)로서 수용된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소개된 외신 보도를 종합해보면,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이 작품이 꿈과 현실 사이의 매혹적인 연속체로 독특하고 신빙성 있는 정신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특히 눈의 이미지가 거느리고 있는 시적 산문은 20세기 한국 역사의 정치적 폭력의 기억을 응시하고 피해자를 향한 애도의 윤리를 재현하고 있는, 기억과 기다림에 관한 소설의 매혹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5) 그렇다면 “유럽 문학(제도)이 발전시킨 ‘애도의 서사’의 문학적 이념과 미학에 대한 아시아 작가의 그것이 얼마나 참신하고 밀도 있는 개성적 서사로 그들의 문학상 결정에 적합한 ‘물건’으로서 자족하는가”6)에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적합하다는 의미이고, 그러므로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비판은 ‘유럽 문학계에 대한 비판의 수행’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수행하게 된 직접적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밝혀진다. “분명 작품 서두에서 ‘소년이 온다’와 절연되지 않은, 오히려 ‘소년이 온다’의 서사적 분투를 바탕으로 한강의 또다른 역사적 진실을 향한 글쓰기임을 암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7)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를 계기로 한강의 문학이 그 이전의 서사보다 진전된, 말하자면 구미 중심의 소설 미학으로부터 환골탈태함으로써 구미 중심의 세계문학과 다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문학의 새 지평을 모색·추구·실현”하는 것이었기에, 『작별하지 않는다』의 미학적 성취가 유럽 문학계가 상찬하는 ‘애도의 서사’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약소자를 향한 연민의 정동이 과잉된 나머지 정작 마주하고 분투해야 할 역사의 파행과 사건들의 고갱이를 ‘애도의 서사’로 가둬놓을 수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이 비평의 주요 입장이다.
이 관점이라면,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구미 중심의 소설 미학”을 달성하여 “문학상 결정에 적합”하게 된 사례일까, 아니면 혹여 “구미 중심의 세계문학과 다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문학의 새 지평을 모색·추구·실현”한 사례일 수도 있을까. 이렇게 따져 물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한림원의 노벨상은 프랑스의 메디치상과는 다르고 한강 작가의 수상이 곧 『작별하지 않는다』의 우수성만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추하건대 이 비평의 논리에 의하면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비로소 ‘소설 미학’을 제대로 ‘인정’받은 한국문학이 어떤 ‘표준’에 가까워졌다고 하면 바로 그 이유로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후진국의 문화적 열등감’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해도, 근대적 표준처럼 작용하는 ‘소설 미학’을 의식한 문학들이 항시 좋은 문학이 될 수 없는 건 아니며, 혹여 그 미학이 진정 올바르지 못한 기준에 불과하다 해도 그 까닭은 ‘중심’의 권위나 편협 때문이지 ‘중심’의 포용과 개방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들이 노벨상의 희망을 고은에게 품었던 시절, ‘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 이라는 글에서 황종연이 고은의 문제로 파악한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문학의 의미는 “동시대 사람들의 자아를 둘러싼 경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아 정체성의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연관들을 헤아리고, 정체성들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현대 한국의 “계급, 지역, 성, 세대,종교, 직업에 따라 달라지는 많은 정체성들의 복합체”는 고은이 사용하는 80년대적인 ‘민중’ 개념으로는 묘사하기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의 발전을 보지 못한 한국의 정치와 문화”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다. “지난 십여 년 사이 한국문학은 여성을 비롯한 정체성들의 사회적 출현에 응하여 그 욕구와 소망을 진지하게 다루어왔지만 정체성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철저한 탐구에는 이르지 못했다”8)는 것이다. 당시 고은 문학을 말할 때 기저에 깔릴 수밖에 없었던 노벨상에 대한 한국인들의 염원을 고려하면 바로 이 점,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그때로서는 ‘아직’ 한국문학이 ‘달성’하지 못한 주요 문학적 가치였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 한국인들의 그 염원이 한강에 의해 실현된 지금, 우리는 비로소 ‘여성을 비롯한 정체성들이 드러내온 욕구와 소망을 통한 문학적 탐구’에 성공하였고, 그리하여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그렇게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그의 소설에 대한 관심을 넘어 문학이라는 것의 존재이유, 문학은 왜 필요한가를 일깨워줬다. 그것은 한국문학의 우뚝한 존재를 드러낸 것이었다”고 말해질 때 “문학에서의 달성과 ‘선진’”이 이런 것일 터이다.9) 단,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라는 문학적 성취는, 이를테면 ‘세계문학 공간’이라고도 불렸던 전 지구적이면서도 서열적인 복합체 내의 경쟁에서 ‘한국’문학이 승리한 자리가 아니라 한국‘문학’이 이뤄낸 자리라는 사실이다. 옛날이야기지만, ‘세계문학 공간’이란 이십여 년 전 파스칼 카자노바의 『세계문학공화국』이라는 책에서 제시되었던 것인데, 그 유럽 중심적 ‘국제 문학 질서’에 의하면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문학들은 “군소 국가가 자국의 민중적 전통이란 이름으로 행한 정치적, 문학적 존재 주장의 예에 불과”하게 된다. 황종연은, 당시 카자노바에게 한국문학은 “자국의 국민과 민중의 대의에 봉사하며 출현한, 국제 문학 질서상 열세에 놓여 있는 “소문학”의 한 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10) 「국민문학과 세계문학 사이—2000년대 한국소설 소묘」(『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라는 글에서 당대 한국소설들을 통해 “국민문학의 담론적 구성의 핵심” 혹은 “한국문학 텍스트를 쓰고 읽는 조건을 형성한 양극들”(490쪽)의 해체를 목도했던 황종연은, 이를 “한국어 문학 창작이 정치적, 문화적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미 한국문학에 근대적 ‘국제 문학 질서’ 와 무관한 “창조적 가능성의 근원”(491쪽)이 작동함을 입증하고자 했다.
노벨문학상 이슈로 철 지난 혹은 식상한 국가/민족주의가 재창궐할까 걱정하는 이야기처럼 들릴 것 같다. 이제 와서 그런 걱정이야 여타 국제적 사안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우려에 불과할 것이고, 요점은, 앞에서 읽은 글에서 최진석이 오늘날 세계문학의 자리에 대해 진단한 대로 “역사시대를 넘어서는 거대한 지구사적 변환을 목전에 둔 지금, 한국문학은 더 넓고 먼 길을 바라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11)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 의식은 올해의 노벨상으로 현재의 한국문학에 갑자기 요구된 인식이 아니라 실상 올해의 노벨상을 가능하게 한 현재의 한국문학이 그동안 유지해온 인식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민족주의의 쇠퇴와 함께 한국사회에 나타난 사회적 문화적 다원화의 움직임을 어떻게 국문학의 탈구축과 재구축 속에 반영하느냐”12)는 과제를 통과한 자리에서 쓰이고 읽히는 중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내일이라도 당장 국적과 민족의 구별이 소멸하지는 않을 테고, 근대성의 유산은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럼에도 오늘날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감각은 이미 변화를 겪고 있으며, 어느 순간 더이상 이전과 같은 인지적 지도를 통해서는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이 앞서 포착하고 표현했던 것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어느새 “근대의 망령으로부터도 멀리 벗어나 새로운 문학, 세계문학의 자리에 도달”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 우리의 한강은 여기
2024년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중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13)라는 문구는 한강의 작품 중 『소년이 온다』(창비, 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다루어지는 ‘한국적 역사’와 그 국가적, 정치적 대의를 상대적으로 더 주목하게 만든 효과를 낳은 듯하다. 앞에서 언급한 고명철의 글에서 4·3사건에 대한 작가의 ‘역사적 시선’을 강조한 이유도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국적’ 특수성을 ‘세계사적, 혁명적’으로 인식하길 촉구한다는 것이었고, 한강 문학의 ‘역사 인식’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항간에는 있다고 한다.14) 한강 문학을 읽는 여러 가지 관점과 방법이 있고 한강의 수상에 관한 다양한 의견도 있겠으나, 유서 깊은 서구 문학계의 권위를 드러내는 문학상 수상의 의미와도, ‘한국적’ 성장 또는 확산에 따른 (탈)식민적 시선의 범주와도 긴밀한 관련 없이, 한강의 문학이 (쓰이고) 읽힌 한국문학의 자리를 먼저 되짚어보고 싶다. 필요한 일일 것 같다.
‘최근 한국소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라는 부제를 단 노태훈의 「연결되는 ‘우리’와 회복하는 ‘나’」(『문학동네』 2022년 봄호)에서, 역사소설로 다뤄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한국 역사소설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읽힌다. 노태훈이 보기에 이 시대에는 “선이 굵고, 거대하고, 유구하고 장대한 ‘대하소설’ 형태의 역사소설”이 아니라 “현대사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에 주목해 그것을 화두로 삼는 소설”이 쓰이며,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역사가 ‘되는지’, 그리고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논의일 것이다”.15) 소설에 ‘역사’가 들어올 때, 역사란 것은 지금-여기의 ‘나’와 떨어져 있다는 의식과, 역사와 현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의식이 양가적으로 개입하며 역사에 대한 소설적 감각을 조정해가는 것일 터인데,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말하자면 “소설가 ‘나’를 통해 시간과 사람을 ‘연결’시킨다는 것”(128쪽)에서 그 감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관점이다.
한강이 재현하는 역사는 광포한 학살의 참상 자체라기보다 그 폭력에 짓밟힌 고통을 지독하게 따라가는 것이고, 이는 그 “끔찍하고 절망적인 경험이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127쪽)임을 끝까지 말하는 것이며, 이 연결의 ‘연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서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눈’으로 집약되는 이 소설의 이미지들”이다. “쏟아지는 땀과 찬물 샤워, 밀려드는 바닷물과 쌓이고 녹아내리는 눈, 사람의 몸에서 마구 흐르는 피와 눈물 등 소설에는 ‘물’이 흘러넘친다.”(같은 쪽) 결국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작별하지 않는다』, 133쪽)라고 말하는 “이 압도적인 순환”으로써 작가는 역사와 인간과 고통과 시간을 연결해내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 실체를 무화시키거나 이를 보편적인 고통으로 수리하지 않는”(같은 쪽) 경지에 이른다
역사에 대한 소설적 감각이 시간과 사람, 사람과 고통 등을 매개하는 언어로 체화되고, 눈과 바닷물, 땀과 피와 눈물의 겹침을 연결하는 인식으로 순환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이와 같은 독해는 한강의 다른 작품이 읽힐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채식주의자』(창비, 2007)를 읽는 심진경의 짧은 글 「저들의 고통이 내 몸안에 있다—한강, 『채식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먹는’ 행위는 반드시 ‘먹히는’ 대상의 죽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점에서 잔인하고 사악한 것이다.”16) 이 세계, 고도로 문명화된 이 질서를 떠받치는 것이 바로 이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야만의 논리임을 의식할 때, 즉 불면과 거식으로 바싹 마른 영혜를 향해 그녀의 어머니가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채식주의자』, 60쪽)라고 외칠 때,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의 의미가 단지 육식만 거부하는 게 아니라 육식으로 대변되는 인간 중심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임을, 그리고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며 정상을 강요하는 모든 일상의 폭력을 비판하는 것 임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심진경은 말한다.
여기서 ‘채식’은 실상 “자기 바깥의 존재들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257쪽)에 다름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존재가 죽어야만 하는 질서를 응시하는 한강의 시선은, 그러나 “나의 생명을 위해 죽어가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과는 다르다”(같은 쪽)고 심진경은 말한다. “왜냐하면 연민이나 공감은 자기의 입장에서 타자의 고통과 일정한 거리를 취해야만 가능한 자기중심적인 정서”(257~258쪽)이지만, 타자의 고통에 가닿고자 하는 이 연결의 의지는 “우리가 타자적 존재가 됨으로써만 가능한, 불가능한 미션”(258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식물 되기’의 상상력은 동물성으로 대변되는 인간 중심적 가치에 대한 문명론적 비판이기도 하겠으나 인간이 자기를 버리고 스스로 아예 타자가 되어버림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타자적 존재의 표식인 영혜의 ‘몽고반점’—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은 그녀가 인간 이전 혹은 인간 이외의 것으로 퇴화 또는 변신하여 인간 바깥의 존재들과 연대할 가능성, 그 “불가능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연대의 가능성”(260쪽)을 사유하게 한다. 스스로 나무가 되었다고 착각하여 병원에 감금된 영혜는 “경계 저편으로 넘어간”(259쪽) 영원한 타자로서 인간계에서 추방된 존재이자 비로소 인간계 너머의 타자들과 공명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한강 소설에서 연약한 인물들의 변신, 이를테면 ‘식물 되기’의 상상을 통해 인간계의 질서 또는 생태계의 피라미드를 빠져나가버리는 존재의 출현은 강고한 현실세계의 한편에 구멍을 냄으로써 인간 중심적 세상의 내부를 외부로 개방해버린다고 할 수 있다. ‘인간적’ 공동체 안에서 무력하고 희미한 것 같았던 그(녀)들은 ‘인간’ 아닌 세계로 튕겨져 그대로 스러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비)인간적 생명력으로 다른 존재가 되어 부활 또는 재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 비극이나 개인의 고통 등 ‘아픔’을 주로 다루는 한강 소설에서 ‘회복’의 의미를 탐색한 전승민의 「통증과 회복의 인간학—양자역학으로 읽는 한강」(『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은 “한강에게 회복은 ‘봉합’”임을 시사하며 다음과 같이 의미화한다. “이는 아물지 않은 자리를 억지로 닫거나 그 봉합선을 깨끗하게 지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피 흐르는 상처의 자리를 계속 열어두고 지켜보는 일, 고통의 소거가 아니라 그것을 상처의 안으로 들여와 새로운 신체로 돋아나게 하는 일이다.”17) 봉합이 상처의 닫힘이 아니라 열림이고, 신체의 고통을 지우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신체로 나아가게 하는 일일 때, 한강 소설에서 ‘회복’은 “진행중인 시간의 덩어리, 회복‘기’로서”(같은 쪽) 지속되는 연결이라 할 수 있다.
한강의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연결이 시작되는 지점, 즉 ‘고통’은 “하나의 실존적 양태”(438쪽)인 신체적 통증이다. 한강의 소설은 “아픔이라는 감정과 고통이라는 관념 그 이전에 자리한, 이해와 부정 모두가 불가능한 절대적 통각(……)을 통해 ‘나’와 세계 그리고 그 관계를 인식한다”(같은 쪽)고 전승민은 말한다. 따라서 “통증은 중간태다. 중간태는 행위가 그 대상뿐만 아니라 역으로 그 행위자에게도 재귀적 영향을 미치는 동사의 양태다. 그것은 의학 담론에서 환자가 통증과 맺는 일방향적 주체-객체의 관계와 다르다”(같은 쪽). 이렇게 통증을 ‘중간태’로 파악할 때, 어떤 행위 또는 사태의 지속에서 맞이하는 위기와 극복의 과정은 인간적인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 듯하다. “치료 대상으로서 통증은 신체로부터 축출되어야 할 유독한 세력, ‘나’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 될 적대자다. 그러나 한강의 세계에서 통증은 세계를 합치고 분할하는 ‘나’의 또다른 감각, ‘나’의 살아 있는 또다른 신체다.”(같은 쪽) 통증이 합치고 분할하는 이 신체는 ‘나’라는 인간 유기체를 넘는 외부의 영역, 그간 인간이 적대했던 비인간적 세계로 이어진 감각의 주체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읽을 때, “『작별하지 않는다』는 손전등을 들고 있던 이가 누군가에게서 촛불을 건네받고 종국엔 자신의 초 한 자루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 촛불이 발산하는 ‘노랗고 둥근 빛점’은 관찰자-‘나’의 빛이며 이것은 앞에 놓인 대상의 차원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460쪽).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위기와 극복의 양자적인 세계와 미시적인 변화율’을 읽어내고 그것이 소설의 전통적인 주객 관계—‘세계 안의 자아’가 위기와 극복을 말하는 것—와 구별된다고 하는 해석은 『채식주의자』에서 “인간 이전 혹은 인간 이외의 것으로 퇴화 또는 변신하여 인간 바깥의 존재들과 연대할 가능성”을 찾은 앞의 논의와 맥락을 공유한다. ‘회복’이라는 ‘변화율’에서 인간의 살아 있는 신체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이 반드시 함께 작용하는 변수임을 강조할 때,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상호 연결되어 행위하는 세계의 질서가 가시화된다. 이것은 한강의 모든 문학이 한결같이 품은 물음—‘인간이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과 그에 대한 탐구—‘이 고통, 슬픔, 어둠, 열기, 회복, 빛 또는 죽음 등을 인간은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가 현재 우리에게 이해되고 사유되는 한국문학의 자리를 시사한다. 바로 이곳에,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한국문학이 조명될 때 어떻게든 대항해야 했던 중심주의 또는 원근법, 혹은 그에 맞서기 위해 내세워야 했던 고유한 독자성 등을 넘어, 지금 한강 문학이 가장 정당하게 놓일 세계적인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는 세계문학에 앞서 한국문학을 누구보다 미리 읽고 오래 읽은 우리 비평이 문학의 안팎을 오가며 잇고 뚫어서 일궈낸 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 1)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그 전개와 좌표』, 문학과지성사, 1977, 194쪽.
- 2) 최진석, 「세계문학의 시차, 혹은 세계-외-문학을 향하여—비동시성의 시대와 한국문학의 자리」, 웹진 ‘한국 연구’, 2024. 7. 5. 이하 이 챕터의 직접 인용은 모두 같은 글.
- 3) 고명철,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서사와 식상함」, ‘제주의소리’, 2024. 10. 8
- 4) 고명철, 「“이제는 수난 애도를 넘어, 제주 민중이 품었던 항쟁·혁명까지 상상하자”」, ‘제주의소리’, 2024. 10. 10.
- 5) 고명철, 「유명 소설가 한강의 4.3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판적으로 읽는 이유」, ‘제주의소리’, 2024. 10. 7.
- 6) 고명철, 「“이제는 수난 애도를 넘어, 제주 민중이 품었던 항쟁·혁명까지 상상하자”」
- 7) 고명철, 「유명 소설가 한강의 4.3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판적으로 읽는 이유」. 이하 이 문단의 직접 인용 은 모두 같은 글.
- 8) 황종연,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 『탕아를 위한 비평』, 문학동네, 2012, 100쪽.
- 9) 이명재, 「한강 노벨상에 한국언론이 부끄러운 이유」,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2024. 10. 30
- 10) 황종연, 「국민문학과 세계문학 사이—2000년대 한국소설 소묘」, 같은 책, 483~484쪽. 이하 인용시 본문 에 쪽수만 표시.
- 11) 최진석, 같은 글. 이하 이 문단의 쪽수 표시 없는 직접 인용은 모두 같은 글.
- 12) 황종연, 「‘하나의 국문학’을 넘어서—국문학연구와 문학이론」, 같은 책, 379쪽.
- 13) “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2024/han/facts/)
- 14) 김민주, 「‘한강 공격’에 혈안인 극우의 광기…노벨상도 폄훼」,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2024. 10. 13.
- 15) 노태훈, 「연결되는 ‘우리’와 회복하는 ‘나’—최근 한국 소설의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현장비평』, 민음사, 2023, 129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16_ 심진경, 「저들의 고통이 내 몸안에 있다—한강, 『채식주의자』」, 심진경·김영찬, 『명작은 시대다—195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시대의 창이 되어준 희대의 한국 소설 30편』, 난다, 2023, 256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 수만 표시.
- 17) 전승민, 「통증과 회복의 인간학—양자역학으로 읽는 한강」,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437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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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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