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작 2024년 가을호(제89호)
나는 지금, 어미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 정지용문학상 수상자 이재무
1. 짧고 단아한 서정적 기품의 연속성
이재무李載武 시인이 올해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정지용문학상은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인 정지용(1902~1950) 선생의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9년에 제정되어 올해로 서른여섯 번째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수상작은 근작 시집 『고독의 능력』(천년의시작, 2024)에 실린 「3월」이라는 단형 시편이다. 정지용 시편 가운데 짧고 단아한 서정적 기품을 간직한 명편이 많거니와, 선정위원들은 아마도 그러한 문학사적 연속성에 주목하여 이 시편을 수상작으로 선별한 것일 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재무의 시는 경험적 실감을 서정의 구심으로 바꾸어내는 동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펼쳐져왔다. 선명하고 다양하고 기층적인 언어들이 그려내는 파생적 이미지군群 아래 이재무 버전의 형상들은 꾸준히 인간 보편의 정서적 기둥과 결을 생성해왔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의도된 난해함이나 의뭉스러움 반대편에서, 친숙하지만 새로운 발견의 순간을 중시하면서 줄곧 쓰여왔다. 또한 이재무는 선험적 담론으로 시를 써가는 일에 첨예하게 반대해온 시인이다. 물론 그의 시에도 어떤 담론적 지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자신의 성장 서사가 고스란히 담긴 고향과 그곳을 떠나 정착하여 살아온 객지를 확연한 대조적 형상으로 노래하는 기율이라든지, 우주적 기원을 사유하면서 생명을 옹호하는 생태 지향이라든지, 주변부 목숨들에 대한 가없는 연민이라든지, 자본이나 권력에 대한 매섭고도 단호한 비판이라든지, 그의 시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가치 지향의 진경進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속성들조차 어떤 연역적 차원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실감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내는 귀납적 차원에서 구축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 이재무를 단연 생래적인 서정시인으로 만들어주는 둘도 없는 힘일 것이다.
정지용의 우수한 시편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재무의 시는 서정의 원리를 충실하게 구현하는 경험의 언어에 자신의 수원水源을 두고 있다. 예컨대 그는 뚜렷한 인과론적 질서를 가진 서사적 얼개를 거의 짜지 않는다. 또한 시집 전체를 치밀한 기획에 의해 구성하는 이른바 주제 시집이나 연작 시집에도 별 관심이 없다. 특정 심상이나 순간을 완성해놓고 미진하다 싶으면 몇 편 더 써서 동일한 제목 아래 순서를 붙일 뿐이다. 그만큼 그는 그때그때 찾아오는 ‘시詩’의 기척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순간적 충실성을 투명하고 실감 있게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재무의 시 한 편 한 편은 삶의 이야기narrative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말이 그가 어떤 서사 지향의 모색을 꾀해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한 편 한 편의 완결성을 중시하되, 그것들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충실하게 반영하게끔 투명성의 언어를 일관되게 견지해왔고, 그만큼 그의 시는 자연스럽게 그가 살아온 삶의 내력을 환기하는 일정한 내러티브적 속성을 띠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첫 시집으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흐름을 이어왔다. 이제 우리는 이미 시력詩歷 40년을 넘긴 중진 시인의 이번 수상을 축하하면서, 수상작을 비롯한 『고독의 능력』 소재 시편을 통해 삶의 구체성에 가닿은 이재무만의 서정적 차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선명한 자연 서정의 빛과 ‘홀로의 힘’
최근 이재무의 시는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원형을 광폭으로 만나면서 그 풍요롭고 신성하기도 한 형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붙잡아두는 데 적공積功을 들이고 있다. 물론 시집에 들어선 ‘강화江華’라는 구체적 지명이 그 한 축을 거들고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 나라 자연이면 어디든 해당될 원형적 처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속성은 자연스럽게 오랜 기억의 세목들을 한 축으로 거느리고 있고, 생명 지향이라는 보편 덕목의 의지를 다른 한 축으로 삼고 있다. 비교적 서정적이고 포용적인 시선에 의해 형상화되고 있는 이 시편들은 한결같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그리움에 바쳐진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수상작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순耳順을 지나 귀가 순해지고 눈이 너그러워진”(나희덕, 뒤표지글) 시인이 나지막하게 부른, 우리로서는 소리 내어 읽는 게 적격일 듯한 음률적 시편이다.
못자리 볍씨들 파랗게 눈뜨리
풀풀 흙먼지 날리고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날아든
꽁지 짧은 새
숲 흔들어 연초록 파문 일으키리
이마에 뿔 솟는 아이
간지러워 이마 문지르리
― 「3월」 전문
‘3월’은 봄날의 도래를 알리는 시간이다. 3월에는 “못자리 볍씨들”이 눈을 파랗게 뜨고, “꽁지 짧은 새”가 흙먼지 날리면서 순식간에 날아든 나온다. 어디선가 던져진 돌멩이 처럼 날아든 그 새는 이제 숲을 흔들고 연초록 파문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마에 뿔 솟는 아이”도 성장통痛인 듯 간지러움을 느끼면서 이마를 문지를 것이다. 이처럼 「3월」은 봄날의 생명력을 다양한 각도로 부조浮彫하고 있는 가편이다. 그런데 꽁지 짧고 몸집 작은 새는 어떻게 그 가녀린 날갯짓으로 숲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 파문을 따라 전해진 생명력이 어떻게 뿔의 솟아남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러한 이재무의 창의적인 연쇄 심상은 생명력 그득한 봄날의 빛을 단연 투명하고 실감 있게 복원해간다. 하지만 ‘3월’이 작년에 지나간 그 ‘3월’은 아닐 것이다. 일회적 사건으로, 반복 불가능한 순간으로, 지금 ‘3월’은 홀로 우뚝하다. 그리고 그것은 정지용이 노래한 봄날의 송가頌歌처럼 “봄바람이 허리띠처럼 휘이 감돌아 서서/사알랑 사알랑 날러오노니,/새새끼도 포르르 포르르 불려왔구나.”(「이른 봄 아침」) 같은 심상을 오롯하게 환기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의 근원 심상을 새롭게 담아낸 시편들은 『고독의 능력』 안에 자욱하게 실려 있다. 다음 작품도 그러한 의미망에 걸쳐 있는 사례일 것이다.
한 무더기 꽃마리 보았네
바람이 불 때마다
산을 흔들고 있었네
지상에 피어난 푸른 별들
꺾고 싶었지만
뿌리째
정원으로 옮겨 오고 싶었지만
애써 욕망을 누르고 비웠네
태어나 자란 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권리라네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
존재를 지켜 주는 것
찾아가 바라보는 것
언제든 보고 싶을 때
산을 오르면
한 무더기 꽃마리가 있다네
― 「산을 오르다가」 전문
이 시편은 산을 오르다가 문득 만난 ‘꽃마리’라는 예쁜 이름의 존재자를 통해 자연 생명에 대한 한없는 외경의 마음을 노래한 결실이다. 산을 오르다가 만난 “한 무더기 꽃마리”는, 마치 숲의 파문을 만들어낸 새 한 마리처럼, 바람이 불 적마다 산을 흔들고 있다. 그 “지상에 피어난 푸른 별들”을 꺾어 자신이 사는 곳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시인은 욕망을 누르고 “태어나 자란 곳에서/살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권리”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소유하지 않고 그저 존재 자체를 지켜주고 그저 찾아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사랑 아니겠는가. 언제든 보고 싶을 때 산을 오르면 당연히 “한 무더기 꽃마리”는 시인을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그러한 생명 발견의 흐름이 말하자면 이재무의 시쓰기 과정일 것이다.
저녁이 슬며시 다가와 옆구리를 찌른다
여봐, 친구, 왜 표정이 어두운가?
난 저녁의 찬 손 떼어 놓고
신이 막 붓 칠 끝낸 묵화를 바라본다
난 결심한 게 있다네
얼마 후 저 묵화 위에 달이 떠올라 낙관을 찍으리라
속이 시끄럽군
머릿속 자욱한 발자국을 지우게나
저녁은 가래 뱉듯 핀잔을 던지고는
바삐 골목을 돌아 나간다
― 「독백」 전문
황혼이 찾아오면서 시인은 “신이 막 붓 칠 끝낸 묵화”를 바라본다. 막 어둠이 내린 순간이 “왜 표정이 어두운가?” 하고 묻자 시인은 자신의 최근 결심을 고백한다. 그것은 바로 그 ‘신의 묵화’에 참여하는 일이다. “얼마 후 저 묵화 위에 달이 떠올라 낙관을” 찍는 순간을 기록함으로써 말이다. 속이 시끄러울 때면 머릿속 자욱한 발자국을 지우고서 말이다. 그러자 시인을 채근하던 저녁은 바삐 골목을 돌아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 시편은 시집 제목처럼 ‘고독의 능력’에 대한 독백의 외관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물과의 대화이고 ‘시’를 향한 미학적 기록이기도 하다. “꽃도/귀양 사는 곳”(정지용, 「구성동九城洞」)에서 느낀 ‘홀로의 힘’을 노래한 것으로서, 아마도 당분간 이재무 시의 원류는 이러한 고독의 적소(謫所)에서 태동할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정지용이 이루어낸 한 세기 전 선명한 자연 서정의 빛을 오랜 후에 다시 이재무만의 섬광으로 우리에게 건넨 것일 터이다.
3. ‘고향=어미’를 향한 근원 지향의 상상력
두루 알다시피 이재무의 시에서 ‘고향’은 그의 존재론적 태반이자 궁극적 귀의처로 줄곧 등장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분주하고 피로한 삶이 관류하는 삭막한 객지로서 도시가 줄곧 형상화된다. 이러한 ‘고향/객지’의 이원적 구도構圖는 첫 시집 『섣달 그믐』(1987) 이후 오랫동안 일이관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도 ‘고향’을 사유하고 그리워하는 이러한 속성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고향도 나와 더불어 늙어 가더라
열 살 때는 열 살 때의 고향이
스무 살 때는 스무 살 때의 고향이
서른, 마흔, 쉰 지나
예순에 드니
고향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처럼 간데없더라
기다리는 사람이 다가올수록
화색 도는 얼굴에
피는 꽃처럼 눈빛
발하는 이들이 사는
고향은 눈 감아야
더욱 또렷하게 잘 보이더라
― 「고향」 전문
정지용은 「고향」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썼다. 산꿩과 뻐꾸기는 그대로 있지만,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는 고향은 그만큼 변해 있었다. 물론 「향수」에서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토로함으로써 정지용은 고향에 대한 불멸의 기억을 항구화한 바 있다. 그렇게 고향이란 변해가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심상으로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이재무 역시 고향을 가장 분명한 시의 표지標識로 상정해온 시인인데, 여기서 그는 “고향도 나와 더불어 늙어 가더라”라는 유의미한 표현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시인이 나이 들어가는 흐름을 따라 고향도 자라고 늙어 이제 의구依舊하지 않고 인걸처럼 간데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도 결국 늙어 사라지려는가. 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이 다가올 때 화색 도는 얼굴에 피는 꽃처럼 눈빛을 발하는 이들의 고향이야말로 “눈 감아야//더욱 또렷하게 잘” 보이는 곳이라고 노래한다. 그럼으로써 그곳에서 한없이 확산되어갈 “눈 감으면 보이는 추억들”(「산책 속으로」)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여전히 이재무는 고향을 떠나 고향으로 회귀해가는 시인인 셈이다.
알곡이 들어있는 곡식 줄기는
아무리 세게 잡아당겨도
부러지거나 꺾일지언정 뽑히지 않는다.
그러나 알곡 빠져나간 곡식의 줄기는
힘들이지 않아도 쉽게 뽑힌다.
밤알 들어 있을 때
밤송이 가시는 날카롭지만
밤알 떠나고 난 뒤
밤송이 가시는 무력하고 무용해진다.
나는 지금,
어미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 「어미」 전문
‘고향’과 등가를 이루는 것으로 시인이 가져오는 주된 이미지가 ‘어미(엄니)’일 것이다. 이 기표는 ‘어머니’라는 육신의 원천을 환기하는 동시에 뭇 생명의 ‘기원’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암시해준다. ‘곡식 줄기’와 ‘밤송이 가시’의 생태를 통해 ‘어미’의 사랑을 들려주는 이 의미심장한 명편은 단연 ‘시인 이재무’의 속 깊은 마음을 대변하는 뜻깊은 실례로 다가온다. 여기서 ‘알곡’과 ‘밤알’은 굳세고 날카로운 어미의 힘이 지키고자 했던 자식들일 터이고, 자식들이 떠나간 후 어미의 무력하고 무용해진 몸은 모든 것을 이룬 후의 안식 혹은 평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재무의 근작에도 ‘고향=어미’를 향한 근원 지향의 상상력은 더욱 밀도 높게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달라지면서 서정의 원리는 끊임없이 원심적 확장의 길을 걸어왔다. 삶의 순간적 파악이나 심미적 관조로만 발화하기에는 복합적인 사회적 관계가 서정시의 원심적 변화를 불가피하게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언어를 통해 짧고 간명한 서정시를 쓰려는 시인들의 노력은 압축과 고요의 미학에 대한 애착을 지켜왔고 그것은 언어 과잉을 경계하려는 선택 행위로 이어져왔다. 이재무는 이러한 기율을 오랜 세월 지켜오면서 자신의 발생론이자 귀속처로서의 ‘고향=어미=생명’을 가지런히 배열해왔다. 일종의 공동체적 기억을 매개하면서 압축과 고요의 서정성을 지켜오면서 말이다. 이처럼 이재무의 시는 경험적 세부의 재현을 통해 단순한 삶의 형식과 함께 어느새 모든 사물로 나아가는 사랑의 확산 과정을 살갑게 보여준다. 온몸으로 받아들인 고독의 경지를 통해 시인이 그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도 그 점에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이재무의 시는 시인 자신이 오래도록 겪어온 절실한 경험과 기억의 층을 더 아름답고 다양하게 담아갈 것이다. 공공적 의제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주제의 확장을 가져오기도 할 것이며 서정적 응축을 통해 한없이 작고 가녀린 존재자들을 소중하게 품어가기도 할 것이다. 기억과 유목, 서정과 인식 사이를 가로질러, 여전히 새롭게, 경험의 구체성과 타자를 향한 행로에서 반짝여갈 것이다. 그 소실점에 이번 「3월」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세계가, 고독을 머금은 글썽임으로, 빛을 뿌리고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고집”(「시인」)과 방법적으로 “서정시의 내적 기율을 확장하려는 그의 예민한 감각”(임지연, 해설)이 그 빛을 둘러싸고 끝없이 서로 길항하고 협업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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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빗소리」, 부분. “사랑”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사물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라 호명되는 사물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찰나의 사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같은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화자가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려져/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화자가 세상에서 버려져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은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실패를 단지 실패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시인의 언어를 통해 그 잔여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비로소 갖게 되며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후에도 부서지고 기울고 유예되며 미끄러지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은 사물들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잠시나마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사물들의 형상은 이제 견딤의 모습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기억을 놓지 않고자 분투하는 ‘혼자’들로 거듭난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를 읽으며 전달받는 쓸쓸함과 고독, 슬픔의 정서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며, 늘 전부를 초과하는 감정적 잔여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약 없고 대가 없는 헌신이 바로 그 쓸쓸함과 고독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 창문들은 어떻게 저렇게 환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나는 이 물병은 무엇일까 구겨진 휴지 같은 이 그림자는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2 찬미 받으소서, 먼지들은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은 빈 소주병과 노숙의 새까만 발들은 감겨진 눈의 눈물,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제 몸 하나로 저의 가난과 추위를 지키는 것들은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3 밥냄새, 살냄새 좇아왔습니다 저희 피가 이끄는 대로, 저희가 저희를 잊고 깨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는 진흙처럼 목이 쉬었고 어느 하루도 돌을 가슴에 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 「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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