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부서진 신체들이 우리 앞에 떠오를 때 ― 최세라, 김사이의 시에 대하여
1. 불안정의 일상화
2007년 일본에서 출간된 『生きさせろ!(살게 해줘!)』의 저자 아마미야 가린(雨宮處凜)은 살기도 힘들고 살고 싶지도 않다는 일본 젊은이들의 호소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며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이머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터(freeter)로 살면서 불안정한 삶을 경험했던 저자는, 살고 싶지 않다는 절규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프레카리아트의 확산이라는 세계적 현상과 맞물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라고 보았다. 이 책은 2011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유명인들의 추천을 받으며 꽤 알려졌는데, 이 책이 화제가 된 배경에는 불안정 노동(precarious work)2)이 우리를 ‘일회용 노동력’으로 호출하다가 폐기해버리는 진행형의 현실이 있었다.
그 이후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의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난장, 2013),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박종철출판사, 2014) 등 프레카리아트의 개념을 소개하고 시대적 증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논의들이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그러나 프레카리아트 담론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에 제동을 걸만한 대중적, 정치적 의제로 확산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차별이나 기업의 횡포보다는 노조 내부의 갈등과 비리, 노조의 도덕성 등을 심판하며 노조를 노동운동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해온 언론과 자본의 책임도 없지 않다. 이들의 공모 속에서 프레카리아트 담론의 핵심인 불안정성은 위기가 아닌 자유주의와 노동 유연성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지목되는 자기책임론과 능력주의가 사회 질서의 강력한 준거로 채택된 한국 사회에서 프레카리아트는 노동자 일부의 선택의 문제, 능력의 문제로 해석된 것이다. 그 결과 대다수의 삶을 지배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적 불안정성은 개인의 몫이 되었다. 프레카리아트는 우리의 삶과 노동을 위기에 빠뜨리는 불안정성을 사회적 증상으로 볼 수 있는 유효한 개념적 틀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 빠르게 힘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프레카리아트 시대를 다시 사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의 비연속성과 그에 따른 불안정성의 일반화가 1970년대 중반 대량실업을 동반한 ‘노동사회의 위기’에 이어 도래한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연동된 개념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안정성이 해결 가능한 사회적, 생산적 관계의 일시적 단계가 아니라 근대 이후에 도래한 시대정신이라고 간주하는 베라르디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불행, 질병, 죽음에 노출시켰다고 지적한다. 근대 문명이 사회적 삶에 대한 보장을 구축하여 죽음의 공포를 밀어냈다면 신자유주의는 근대 문명이 만든 피난처를 날려버렸으며, 그 결과 종신 계약 없이 일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불안정한 상태, 즉 사회적 문명으로부터 보호 받지 못한 채 죽음에 노출된 벌거벗은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 그의 통찰에 기대어 보면 프레카리아트는 신자유주의가 창출한 광범위한 계급적, 계층적 범주로서 비연속적이고 분열된 상태로 내몰린 신자유시대의 존재 양식이다. 형성 중인 계급이자 탈계급(postclass)4)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프레카리아트로서의 삶은, 개인을 비계급화하고 사회적 피난처 없는 취약한 생명으로 내몬다. “아직 굶어죽지 않았으”(김사이, 「계속 다음」,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 아시아, 2023)나 다음 순간에 닥쳐올 죽음을 예감하는 삶 또는 “1시간”을 “75리터 종량제봉투 다섯 장 값”(최세라, 「세라의 시급」, 『콜센터 유감』, 도서출판 b, 2022)으로 환산하는 삶은 노동의 주체를 사회적 관계망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공동체 안에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한다. 베라르디의 말처럼 불안정함은 사회적 연대를 생성해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며, 이제 우리가 불안정한 조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불안정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화 속에서 ‘우리’를 추구하는 실존적, 미학적, 문학적, 예술적 생산물이 등장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불안정성에 대항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이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불안정성을 강요받는 노동자의 삶이 분열과 고립으로 죽음에 노출되어 있고, 노동하는 신체와 정신의 변형과 기형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이상 징후를 문학이 포착하고 있다면 그 구체적 양상을 살피는 일은 비평에 주어진 최소한의 역할일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최세라의 『콜센터 유감』(도서출판b, 2022), 김사이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아시아, 2023)는 불안정 노동이 초래하는 분절된 삶의 감각과 신체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자 신자유주의적 차별과 불평등이 파괴해버린 삶에 대한 증언이다. 특히 두 시집은 가이 스탠딩이 말한 바처럼 불안정 임금노동에 진입하는 여성의 증가가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특징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5)
그런데 여성 노동에 대한 시적 재현과 관련하여 주목해볼 만한 사실은,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에 대한 문학적 관심과 접근이 질적으로 달라지고 그에 힘입어 여성 노동자의 현실이 소설에서 다각도로 다루어진 데 비해 시에서는 집중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점이다.6) 여성 노동에 대한 시적 발화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노동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재현하기 어려운 시의 장르적 특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노동’이라는 말에 이미 기입되어 있는 젠더적 차별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노동시가 사회변혁운동의 물결 속에서 각광받았던 1980년대에도 여성 노동자의 시적 발화는 제한적이었다. 노동계급을 진보의 주체로 간주해온 진보진영의 신념 속에는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남성 주체가 상정되어 있었고 노동 문학 역시 남성중심주의에 함몰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의문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자라는 핏줄은/어디에 서건/동료였던 적이 없다”(김사이, 「불안한 동거」,『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진술이 환기하듯이 노동계급 내에서조차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되지 못했던 데에는 계급적 연대감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젠더적 차별과 불평등이 다시 말해, 가부장적 질서와 구조가 있었다. 노동운동이나 노동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20세기 말의 계급적 각성조차도 젠더적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임금에서의 차별, 취업과 승진 기회에서의 차별로 이어지고, 임금노동에서의 차별은 여성 노동을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노동으로 간주하게 했다. 그리고 여성이 가사와 돌봄을 맡는 성별분담이 합리적인 역할 분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병시중이 절실한 식구가 있고” 아직은 “홀로 두고 일하러 갈 수”(김사이, 「계속 다음」) 없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한 더 나은 노동의 기회는 ‘계속 다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데도 그것이 차별이라는 것에 우리 사회는 그리고 노동시는 둔감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시의 종언7)이후 새로운 노동시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안정한 삶을 재생산하는 자본의 질서와 그것을 실현시키는 기제로서 젠더적 차별과 불평등을 중심에 둔 장르여야 한다는 전제에 이르게 된다.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문학이 여성 노동에 대한 시적 발화와 재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여성 노동의 현실이 계급, 성, 인종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삶이 가장 예각화된 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발화하는 최세라와 김사이의 시는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불안정한 삶이 창출한 효과인 동시에 젠더적 평등을 회복하고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전망으로서의 공동체를 요구하는 수행적 텍스트이다. 그리고 자본에 의해 분열된 개인이 아닌 생명의 공동체로서 ‘우리’를 추구하는 예술적 생산물이다.
2. 기형화되는 신체, 분절되는 삶
비정규직의 개념에 관해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은 없다. 개념과 범위가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비정규직은 프레카리아트의 범주에 포함되는 대표적 고용형태로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1996년 12월 노동법 개정안이 통과된 노동법개정파문으로 파견근로제, 변형근로제가 도입된 후 비정규직 양산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비정규직의 개념 및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자 2002년 노사정위원회는 고용형태에 따른 분류 기준에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비정규직이란 고용의 지속성이 없는 한시적 근로자 또는 기간제근로자, 시간제근로자 및 비전형근로자를 포함하는 고용형태로 범주화되어 있다.8) 그러나 애초에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입된 비정규직은 사회 환경적 변화나 기업의 전략에 따라 새로운 노동 형태로 분화되고 있으므로 고용형태만을 준거로 프레카리아트를 규정하거나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것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노동과 삶의 현실을 포착해야 하는 이유이다.
최세라의 『콜센터 유감』에 등장하듯이 고용형태가 산발적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신체는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시집에는 편의점 시간제 근로자, 패스트푸드 알바, 전단지 알바 등 말 그대로 하루를 일하든 십 년을 일하든 최저 시급을 받는 각종 시간제 노동자에서부터 도배사, 애견 미용사와 같은 자영업자 그리고 배달 라이더나 대리운전 기사, 콜센터 노동자 등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한 호출에 종속된 플랫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최소한의 인간이 되려 했지만”(「완료형」)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노동 속에서 “대역 배우”(「대리운전」)나 “우산처럼 접힌” “유실물”(「노선버스」)로 전락한 이들의 신체는 프레카리아트가 유일하게 시간의 분절로부터 비롯되는 존재의 시간의 분절로부터 비롯되는 존재의 불안정성임을 역설한다.
삶의 위기에서 오는 불안과 함께 위태로운 신체의 형상들 가운데 단연 주목되는 건 콜센터 노동자이다. 플랫폼 기업의 성장과 맞물리면서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증가한 ‘콜센터’는 ‘상담사’로 명명되는, 여성에 편중된 비정규직 노동력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현장이다.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높은 서비스 노동의 경우 비정규직인 생산직 노동에 비해 소득불안정과 사회적 임금의 불안정이 높다는 실증적 연구9)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아웃소싱을 통한 간접 고용방식이나 감정노동에 대한 보호체계의 부실, 노동환경의 열악함 등을 태생적 조건으로 삼은 콜센터가 이 시대의 콜센터를 불안정 노동을 대표하는 장소라는 것을. 그런 점에서 「콜센터 유감」 연작시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이미 사회적으로 공유된 것이지만 무겁게 다가온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서만 접촉하는 상담사들이 스마트폰 너머 ‘고객님’과 분리된 어딘가에서 드러내는 신체적 이상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기묘한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고객으로서의 독자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
헤드셋의 검은 쿠션 사이에 끼어서 존재할 때
나는 목이 없다 좌우를
둘러볼 목이 없다 거미처럼
머리가 가슴으로부터 솟아올라 있다
입술은 심장에 연결돼 있어 말할 때마다
피가 가열된다
(중략)
3
거미가 붙어 있다
조그만 소리가 날 때마다 한 줄에 하나씩 분배되는 콜을 받는다
거미는 가슴이 머리고 머리가 가슴이라서
가슴이 시키는 말만 할 수 있지만
그물에 걸린 저의 소리를 찢고 삼키면서도
거미는 거미줄을 그만둘 수 없다
- 「콜센터 유감 뮤트」부분
콜을 받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상담사인 ‘나’의 신체는 인간에서 ‘거미’로 퇴행한다. 목이 사라지고 머리와 가슴이 붙자 입술이 심장에 연결된다. ‘나’는 “말할 때마다/피가 가열”되어 터질 것 같은 응급 상황에 이르기를 반복한다. 피가 가열되어 온몸이 터지지 않도록 상담사들은 ‘뮤트’ 키를 누른다. 잠깐의 ‘뮤트’ 상태에서 흐느끼고 분노를 드러내는 인간이었다가 다시 고객과의 통화가 시작되면 한마디 말에도 치명상을 입고 죽음에 이르기도 할 만큼 취약한 목숨인 ‘거미’가 된다. “한 줄에 하나씩 분배되는 콜을 받는” ‘거미’는, ‘뮤트’ 버튼 외에는 안전지대가 없는 매순간 위기를 경험하는 콜센터 노동자가 처한 삶의 위기가 곧 생명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거미로의 퇴행이 그렇듯이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불안정성이 신체를 변형시킨다는 점은 「콜센터 유감」 연작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콜센터와 같은 플랫폼 산업 이면에는 무한 클릭에 가까운 마이크로 테스크(micro-task)를 수행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가 있지만 웹을 기반으로 하는 특성 때문에 노동하는 신체는 비가시화되고 노동력은 실제의 삶과 단절된다. 최세라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비가시화되고 단절된 채 무방비상태에서 변형되는 노동자의 신체이다. 콜을 받을 때 신체가 가장 취약한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형상화한 위 시와 마찬가지로 「콜센터 유감」 연작에는 신체의 이상 반응과 신체의 변형, 기형화가 폭로되고 있다. “몰아치는 콜을 조금 받아냈다고 겨우 식욕도 못 참아서 겨드랑이 아래 조그만 부유방이 자라고 있다고 곧 네 개의 젖꼭지를 장착하게”(「콜센터 유감 재즈콰르텟」)된 신체를 비롯하여 밀집된 환경에서 “고객의 몰아붙이는 소리”, “팀장의 다그치는 소리”,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 “울면서 전화 받는 옆자리 동료의 목소리”까지 빨아들이는 “흡음재”(「콜센터 유감 흡읍 시스템」)로 변형되는 신체는 플랫폼 산업의 실체와 자본의 위력을 고발한다.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h Eisenstein)의 말처럼 자본은 노동을 생산하는 신체와 교차한다.10)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은 노동하는 신체를 변형시키고 탈인간화하는 방식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이윤을 창출한다.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 2023)가 낱낱이 고발했듯이 콜센터 노동자의 불안정한 고용 상태와 열악한 처우, 극한의 감정노동은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위기상황에 빠뜨리고 있다. 2022 국가인권위 실태조사에 따르면 콜센터 노동자 48%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극단적 선택을 고민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11) 불안정 노동에 처한 노동자들의 신체가 부서지고 찢어지며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상황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공공연한 일이라는 얘기이다.
이 시집에서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시대적 증상은 불안정한 노동이 삶의 시간을 재편한다는 것이다. 절묘하게도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의 계약 기간은 2년을 넘길 수 없고, 전세 기간도 2년을 기준으로 한다.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에 속하지 못한 이들에게 ‘2년’은 삶의 토대가 되는 노동과 주거를 분절하는 주기인 것이다. 2년을 주기로 리셋(reset)되는 삶의 패턴은 왜 우리의 삶이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초조한 시간인가를 말해준다. 최세라는 “서리 내리는 들판에 선 두해살이풀들은/저의 뿌리를 지키느라 몸부림치”지만 그럼에도 두해를 넘길 수 없듯 벗어나려고 애써보아도 벗어날 수 없는 2년짜리 삶의 한계와 모순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먹고 자고 아이를 기르는 집도, 노동을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일터도 2년을 넘길 수 없는 뒤틀리고 파괴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비정규직의 삶은 “두해살이풀”(「두해살이」)처럼 취약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냐고 묻는다.
불안정한 삶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러한 물음이 곧바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삶의 주체를 탈구위치(dislocation)12)에 이르게 하는 한다는 점에 이 물음의 의미가 있다. 탈구위치는 주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게 만드는 어긋난 위치이다. 불안정한 노동은 노동하는 주체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고 삶을 불안정화하며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이탈, 분절되는 삶의 위기를 가져오지만 이 위기는 불안정과 불평등에 처한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당해고 노동자가 가장 불안정한 자리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맞서듯이 말이다.
크레인에서 바라보면 땅에는 자기만의 렌즈를 낀 사람도 많았어요
누군가 탄식했습니다
우리에게 거미만큼의 지혜만 있어도 안전망을 짰을 텐데
걷다 보면
풀 잎사귀 가운데 나란히맥 하나쯤은
우리의 길과 같은 방향으로 나 있었을 텐데
(중략)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꺼내 나누고 나누어
무한소수에 가까워질수록
이 자리는 나뉘지 않고
문득 사라지는 듯 보였던 희망들이 사실은
죽을 것 같은 삶을 살·아·지·게 만들려고
안녕을 물으며 흩어지는 풀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미만큼의 지혜가 있다면
머리 가슴 나뉘지 않은 사람들 모여 내가 아닌 것들과 인사하겠지요
안녕, 당신은 안녕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우리에게 거미만큼의 지혜가 있었다면」부분
대기업의 부당해고에 맞서 고공농성을 펼친 노동자들을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지닌 사회적 기억을 되짚어보면 “크레인”은 해고노동자의 마지막 보루이자 삶의 마지막 장소였다. 노동 현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공중에 깃발처럼 내걸었던 장면들을 톺아보니 자본의 힘에 맞선 노동자에게는 지상의 땅 한 뼘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살만한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땅 끝까지 내몰아 크레인으로 올라가게 만든 건 기업과 공권력을 앞세운 자본이었다.
김주익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은 노조를 향한 무차별적인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부산 영도 조선소에 있는 35미터의 85호 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는 129일을 견디다가 크레인 위에서 죽음으로 투쟁했다. 8년 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바로 그곳에서 불법 해고에 맞서 복직을 요구하며 309일동안 싸웠고, 37년만에 복직을 쟁취하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한 평 정도의 크레인 조종실은 사람이 살 수는 없는 장소지만 그들은 크레인을 저항과 투쟁의 영토로 바꿔냈다. 위 시에서 크레인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화자에게도 땅에서 보던 것과 다른 것이 보이고 새로운 질문과 새로운 전망이 생겨나듯이 ‘크레인’은 위기의 장소인 동시에 저항의 전략을 수행하는 일종의 탈구위치를 상징한다.
‘크레인’ 위에서 화자는 “죽을 것 같은 삶을 살·아·지·게 만”드는 삶의 방식을 생각한다. 먹고 사는 일에 실패할지언정 죽음으로 추락하지 않는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고, 각자가 “가진 것을 모두 꺼내 나누”는 공산(共産)의 삶을 말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렌즈를 낀 사람”들은 사회적 안전망과 자본을 분배하는 복지와 지원에 반대하며 그러한 제도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든다고 우려할 테지만 불안정한 삶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화자는 “나누고 나누”는 셈법이 오히려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길이라고 말한다. 최세라는 이 시에서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불안정한 삶을 거부하는 공동체의 최소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연속적이고 분열된 삶이 분산된 개인을 제각각 죽음으로 밀어넣을 때,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는 안전망은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꺼내 나누”는 공동체 뿐이다.
3. 가난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역설
김사이의 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일회용품”으로 전락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로부터 “내가 버려”(「역공」)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을 전면화하며 노동과 삶을 지배하는 불안정성의 일상화에 접근한다. 우리가 불안정성의 일상화에 종속되어가는 생명정치적 상황 한가운데 서 있음은 더이상 새로운 얘기가 아니지만 불안과 절망에 대한 응시는 우리가 놓쳤거나 싸우기를 포기한 것들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따르면 불안정성의 일상화는 비정규직 노동과 사회복지의 약화 등으로 구조화되어 나타나며, 이로 인한 불확실성과 절망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시장가치를 목표로 삼는 기업가적 사고를 긍정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잔존하는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킨다.13) 버틀러는 불안정성이 개인의 내면까지도 신자유주의에 종속시키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정체성이라 말할 수 없는 불안정성이 “다양한 분류들을 가로지르면서, 서로가 서로의 일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 어떤 잠재적 연대를 만들어낸다”14)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받아들일 때, 불안과 절망에 대한 시적 발화는 불안정성을 넘어서기 위한 연대를 구축하는 목소리로 읽힐 수 있다.
김사이에게 현실은 조금도 에두를 바 없는 전장이다. “애초부터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어/차별은 평등하고//인공지능에게 밀려나도/이름을 달리한 노동은 계속”되며, 그에 따라 “자리를 달리한 죽음”(「간극」)도 계속 진행 중이다.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을 감지하는 데서 생기는 불안과 초조는 개인으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위해 자기 자신을 경쟁에 밀어넣고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라고 명령한다. 정규직으로의 이동 가능성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경쟁시키는 전략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부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는 동료보다 우월한 혼자가 되기로 결정하곤 한다. 안정된 삶이 각자의 책임으로 떠맡겨진 사회에서 서로를 밀쳐내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애쓰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가 긍정하는 도덕적인 삶의 자세가 아닌가. 김사이는 지금의 현실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전쟁터처럼 절망적임을 돌려 말하지 않는다. 김사이의 시는 그동안 말해지지 않은 사실에 근접하고 있을 뿐이다. 기후 위기나 전쟁과 같은 재앙이 멈추지 않는 지구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 ‘극한 직업’이라는 표현 역시 수사적 표현이라 말할 수 없다.
나는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듯하다
몹시도 아득한 절망이다
억겁을 떠돌다 사람으로 태어난 건
사람이 사람으로 불어넣은 선한 숨이었다
불안과 불안이 치고받는 일상의 통증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안이 있다
지구에 가장 오랜 불안은 사람일까
지구에 가장 오랜 미래는 사람일까
잘사는 나라 가난한 나라 가리지 않고
폭우로 폭설로 폭염으로
내전으로 외전으로
하늘에서 바다에서 전쟁 같은 재앙들
사람에게 사람의 얼굴로 총부리를 겨누었다
- 김사이, 「극한 직업, 사람」 전문
인류가 자초한 전지구적 재앙을 거론하는 이 시를 관통하는 건 베라르디가 시대적 정신으로 명명한 불안정성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불안정성은 신체적 통증이나 정신적 불안 등과 같은 병리적 증상으로 나타나고 타인과의 관계마저 단절시키며 마침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파국으로 몰아간다. 불안과 단절의 감각을 매 순간 경험하는 화자는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듯”한 존재론적 불확실성마저 표명하는데, 이 또한 시적 수사가 아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2013년 한국 여성노동자회는 “‘투명인간’ 여성비정규직, 여기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국회에서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투명인간’이라는 표현은 콜센터 노동자, 청소노동자처럼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인격적 차별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위 시에서 화자가 느끼는 존재론적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절망감은 자기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여성비정규직 노동자가 겪는 병리적 현상이다. 자본의 증식을 위해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자에겐 이름도, 동료도, 이웃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15)
불안정 노동과 불안정 고용이라는 노동조건에서 비롯되는 불안정성의 내면화는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사례에서 더 선명하게 관찰된다. 한 연구는 대부분 중년 여성으로 구성된 캐셔 노동자들이 마트로부터 고객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과와 자기반성을 요구받으며 마트의 전략을 내면화하는 상황을 보고한 바 있다. 자신이 친절하지 않아서 고객이 화를 낸다는 생각에 웃을 때 입꼬리 올라가게 연습을 하는 노동자의 사례나 이 연구를 위해 임시로 캐셔 일을 했던 연구자 자신조차도 짜증을 내는 고객 앞에서 자기반성을 하게 되더라는 경험담은16) 불안정성의 일상화가 자본의 요구와 전략을 내면화하며 자기를 반성하고 변화시키는 과정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노동자의 자발적인 자기반성은 해고에 대한 자기 방어적 의미도 있지만 자기반성의 수행은, 그것이 노동자 자신을 위한 제스처라 할지라도 자본의 규범을 내면화하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자본의 종속과 무관하지 않다. 미소를 연습하는 노동자의 사례가 말해주듯이 자본의 권력은 노동자를 통제하고 규율하는 억압적 감시체계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동의와 참여를 통해 규범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행사된다.
그런데 삶의 불안정성이 극대화될수록 규범에 대한 자발적 동의와 같은 비억압적 메커니즘에 포섭되기가 더 쉬워진다. 자기반성을 하는 주체에게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하고도 타협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정규직이 아니어도 좋다
계약직이어도 좋다
단기 알바라도 좋다
병시중이 절실한 식구가 있는데
아이를 홀로 두고 일하러 갈 수가 없는데
어정쩡하게 가난해서
학자금 보조도 청년주택자금 지원도
자격이 안 되는
너라는 시간은
산소호흡기 낀 가난이라고 증명해야
다음 너를 대출받는
가난은 자본의 밑천
그러니까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
(중략)
오늘 양식은 어제로 소진되고
엄살도 사치여서 가릴 것이 없다
오래전 함께 나누었던 눈물조차 마른
나라는 시간은
굶지는 않아도
아직 굶어 죽지 않았으니
-김사이, 「계속 다음」부분
밥을 먹었는지 굶고 있는지 관심 없는
나는 폐경에 접어든 노동력
아파서 달마다 며칠씩 뒹굴며 지나온 여자의 시간
완경의 가치보다 불안정한 내 자리가 우선이다
달라진 건 없이 한 번뿐인 나는 유한하고
-「미완」부분
「계속 다음」에 등장하는 화자는 돌봄노동과 임금노동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이다. 화자에게는 자본과 타협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도 선명하다. 사회적 지원과 복지라는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의 삶은 언제나 “산소호흡기 낀” 아슬아슬한 고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고비를 견디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시스템 내부의 작은 부품이라도 되겠다는 자세는 자본에 대한 타협과 동의를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만든 삶의 위기에 맞서 살아남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읽힌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경험하는 불안정성, 즉 자본에 의해 호명되었다가 버려지는 반복적인 삶의 위기는 화자를 수행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다. 불안정한 노동이 야기하는 가난과 삶의 위기를 경험하는 화자는 자신의 삶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절망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난이 “자본의 밑천”이라는 비판적 통찰에 이른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동력이며 자신의 삶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음을 짚어낸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도출된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라는 진술은 두 가지 맥락을 갖는다. 하나는 가난이 자본의 밑천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자본은 필연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자의 가난을 창출함으로써 더 비대하게 몸집을 부풀린다. 다른 하나는 가난을 유지한다는 것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거부한다는 말인데, 의역하자면 가난을 유지함으로써 삶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의 실체를 마주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자본이 밑천으로 삼는 건 가난만이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역시 “자본의 밑천”이 된다. 「미완」에서 말하듯이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자리라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나’에게 “폐경”은 “여자의 시간”을 완성시키는 “완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과 결부되는 사건으로 간주된다. “알바에서 알바로” 자리를 옮겨가며 “소진”해버린 청춘의 시대를 지나 “정규직”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 화자는 결국 비정규직으로 남았다. “퉁퉁 부은 다리는 외로워져서 시간을 잃었다”라는 환유적 표현이 말하는 것은 비정규직의 삶이 삶으로 축적되지 않는 소진되는 시간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폐경에 이른 신체뿐이다. 자칫하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밥을 먹었는지 굶고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신체가 낡은 기계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화자는 자본의 합리성에 맞추어 따져보기로 한다. 자본의 셈법으로 보자면 “아파서 달마다 며칠씩 뒹굴”어야 하는 여성 노동자의 생리 기간은 비생산적 시간이므로 여성의 신체는 효율이 낮은 기계로 간주된다. 자본의 셈법으로 따지자면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 기회의 차별은 합리적 계산에 따른 것이고 여성 노동자의 불안정성은 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직면한 폐경이란 사건은 신체가 효율성을 높이는 계기인 셈이다. 그러나 합리적 계산과 달리 폐경에 이른 ‘나’의 신체는 곧 폐기될 낡은 기계인 것만 같아 ‘나’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화자가 경험하는 이 모순은 인간의 신체나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자본의 합리성이 무차별적 동일성을 강요하는데서 비롯된다.
두 시를 통해 김사이가 말하고 있는 가난은 계급과 젠더가 교차하는 데에서 심화되는 차별의 결과이다. 버틀러의 논의처럼 젠더가 가난을 차별적으로 할당하는 기준이라면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진술은 계급적, 젠더적 차별과 불평등을 함의하는 문장으로 읽어야 한다. 아울러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가 가난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역설 또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거부로 해석되어야 한다. 김사이의 시가 집요하게 응시하고 지속하는 가난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살만한 삶(livable lives)’(주디스 버틀러)을 요구하게 하고, 가난의 원인에 대하여 사유하게 하며, 가난과 죽음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대안을 생각하게 만드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밥, 차별받지 않아야 할 밥, 나의 해고는 오늘이 될까 내일이 될까. 잠자는 척해도 깨어 있어도 불안한 하루 걸러 고통스러운 시간. 물러설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공존하기 위한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여전히 수많은 이들은 망루에 올라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다. 대화는 하는데 소통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합리적 개인주의란 명분으로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의 연대는 무엇일지. 공사(共死)하지 않고 공생(共生)하기를, 내가 먹는 밥이 무슨 밥이고 어디에 맞닿은 밥인지 다시금 생각한다.
- 김사이, 「고해」부분
우리가 먹는 “밥”이 차별없는 평등한 몫이 되도록 “생존하기 위한 새로운 저항의 방식”과 ‘연대’와 ‘공생’을 생각해야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는 불안정한 삶에서 ‘우리’를 추구하는 예술적 생산물이 나타난다는 베라르디의 예고를 떠오르게 한다. 시인은, 스스로를 “물러설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최후의 “망루”에 올려놓고서라도 “이 시대의 연대는 무엇일지. 공사(共死)하지 않고 공생(共生)하기를, 내가 먹는 밥이 무슨 밥이고 어디에 맞닿은 밥인지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생각했듯이 우리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레인을 환기하는 ‘망루’는, 자본의 부당한 착취와 횡포에 맞선 노동자들이 삶을 요구하기 위해 선택했던 최후의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노동자들의 연대를 궤멸시키기 위한 기업의 탄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노동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죽음의 장소였던 ‘망루’는 누구나 목격할 수 있도록 자신을 출현시키는 거리요, 광장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죽음의 장소인 망루에 다시 오른 해고 노동자 김진숙을 지지하기 위해 망루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망루는 그 어떤 곳보다 자유로운 광장이었다. 자본으로부터 불법이라는 낙인이 찍힌 해고 노동자들은 ‘망루’에 오름으로써 말했다. 우리가 요구하는건 “공생”과 평등한 “밥”이라는 것을.
구로노동자문학회를 문학의 근거지로 삼고 출발했던 김사이의 시는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된 자본의 진화를 노동시의 새로운 조건으로 삼았다. 그리고 첫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2008)에서 계급적 각성과 자본에 대한 반성의 중단을 표명했다. 김사이는 이제 노동문학이 돌아보아야 하는 건 자본에 저항하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에 잠식된 노동”17)이라고 고백함으로써 모든 노동에는 자본을 향한 욕망과 자본에 대한 적의가 뒤섞여 있다는 점을 정식화했다. 김사이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수행적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자본의 규범과 요구에 따른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노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범을 재생산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의 모순을 드러내며 규범을 균열시킴으로써 자본의 실체를 폭로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김사이의 시가 1980년대 노동시를 갱신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노동시로 명명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대안과 전망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자본과 젠더에 대한 이원론적 대립을 넘어서서 계급적 불평등과 젠더의 불평등이라는 교차점을 사유하는 가운데 불안정한 노동자의 내면이 자본에 대한 욕망과 저항으로 뒤섞여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4. 부서진 신체를 보라
아침에 먹을 샌드위치를 현관 앞에 가져다주는 라이더, 어제 주문한 책과 원두를 배송해준 택배 기사, 정수기 필터를 교체해주러 온 코디, 상품을 계산하고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마트의 캐셔, 화장실 한 칸에서 식사와 휴식을 해결하는 청소노동자, 인터넷 서비스 품질에 대한 문의에 응대하는 콜센터 상담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친다. 이들의 공통점은 불안정 노동에 종사한다는 사실이다.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에는 무용하다는 비판을 수용하더라도 우리가 속한 이 체제가 프레카리아트로 명명되는 불안정 노동을 양산하고 그들의 노동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함으로써 비대해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2018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불안정 노동자는 이미 확장 경제활동인구(잠재경제활동인구+경제활동인구)의 60%에 육박했고, 일명 정규직이라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안정적 노동자는 확장경제활동인구의 10%에 불과했다는 사실은18) 자본의 성장이 불안정 노동에 기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신체는 부서지고 있는데도, 끈질긴 가난은 나아지지 않고 삶은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IMF를 계기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면화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살게 해줘!”라고 외치며 불안정 노동과 가난과 생명의 위기로 위축된 삶을 매순간 견디고 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싸움은 시작되었으나 누가 누구와 연대할 것인지 분명치 않은 프레카리아트 시대에 여전히 정체되어 있다. 이 싸움에 개입한 최세라와 김사이의 시는 불안정 노동을 수행하는 신체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다양한 비정규직 형태처럼/시간도 요금도 감정도/가지가지인” 서비스의 편리함 너머에는 오로지 “네 몫”으로 남겨진 “피로에 후들거리는 고통”(김사이, 「편리를 사다」)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고 발화한다. 또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진 노동과 가난, 그로 인한 고통이 실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현장실습 나온 19살 콜센터 노동자의 죽음이 사회 구조적 차원의 죽음임을 인정한다면 서둘러 아직 살아있는 이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증상이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공통의 전제로 삼고, 최세라의 시는 신체의 변형을 통해 플랫폼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삶이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처한 삶의 위기를 일인칭으로 발화하는 김사이의 시는 가난을 유지함으로써 가난에 저항하겠다는 역설적 의지를 표명했다.
프레카리아트 시대와 불화하는 두 시인의 시가 또 다른 전제로 삼은 것은 자본의 시초축적에서 시작된 여성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급과 젠더의 교차점이다. 불안정한 노동을 매개로 더 노골화된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은 “가난의 밑바닥에 흐르는 원죄”(김사이, 「몸의 기억」)처럼 노동하는 주체에게 내면화되고 자기 자신을 비정규직 인간으로 정체화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를 기계처럼 여기고 삶을 시급으로 환산하여 분절시키며 자본의 질서에 철저히 순응하는 내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라는 유연한 혹은 기형적인 고용형태는 시적 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서진 신체와 영원한 가난을 사유하게 하는 탈구적 자리이기도 하다. 아무리 계약을 거듭해도 비정규직의 일은 영원히 한시적인 일이며 “일이라고 할 수도없”(최세라, 「대체로 흐림」)는 일로 취급될 때 노동하는 주체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이 일이 제대로 된 노동인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노동자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말이다. 이 질문은 노동자의 계급성을 해체시키는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질문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질문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장르에서 벗어나”(최세라, 「라이더」) “영원한 기계를 위해 임시로 고용되었”(「대체로 흐림」)음을 의심하게 하고, 오래된 기계처럼 낡고 부서진 자신의 신체를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그리고 ‘너’의 부서진 신체를 마주하는 것은 불안정 노동에 종속된 우리가 빼앗긴 것, 우리가 잃은 것 그리고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 무언지를 알게 해주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최세라와 김사이의 시가 부서진 신체에 깃든 고통과 저항을 동시에 발견했듯이 그것을 대면하는 일은 취약한 신체들과 연대함으로써 불안정한 삶을 거부하는 목소리로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한 노동자가 이미 말했다. “우리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고.
서러움이 뭔지를 알려거든 그들을 보라.
우리가 잃은 게 뭔지를 알려거든 그들의 눈빛을 보라.
연대를 말하려거든 100일째 펄럭이는 천막엘 가 보라.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149쪽.
- 1) 아마미야 가린, 김미정 옮김, 『살게 해줘!』, 미지북스, 2017.
- 2) ‘불안정노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1970년대 포드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실업과 함께 노동과 생존의 불안정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에 주목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와서 불안정성, 불안정화에 대한 개념은 부르디외, 고르츠 등에 의해 체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부르디외는 불안정성을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불확실성에 기초하는 새로운 지배형태인 ‘유연한 착취’로 정식화했다. 곽노완, 「노동의 재구성과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프레카리아트의 계급 형성과 진화에 필수적인가?」, 『마르크스주의 연구』10(3),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3, 100-102쪽.
- 3)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정유리 옮김,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난장, 2013, 74쪽
- 4) 이진경은 ‘탈’이 ‘노동자계급’ 다음에 오는 것을 지칭하는 동시에 ‘벗어남’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현행 계급적 조건에 포함된 이탈의 벡터를 지칭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후마니타스, 2012, 336쪽.
- 5) 정부에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성별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2013년에 여성 40.6%, 남성 26.4%, 2019년에 여성 45%, 남성 29.4%, 2023년에 여성 45.5%, 남성이 29.8%로 나타난다. 2003년부터 2023년까지 통계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남성을 약 10% 정도 웃돈다. e-나라지표(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477)
- 6) 오현경, 「전진하는 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여성시」,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https://magazine.changbi.com/MCQuarterly/Item/6986)
- 7) 노동 형태만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대립 양상이 변화했고 진보세력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이 후퇴한 상황에서 20세기의 산물인 노동시 개념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논의한 고봉준은 “‘노동’과 ‘노동 아닌 것’의 경계를 확정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서 새로운 ‘노동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제기한 바 있다. 고봉준, 「노동시여, 안녕」, 『비인칭적인 것』, 산지니, 2014, 355쪽,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비인칭적인 것』, 산지니, 2014, 365-382쪽.
- 8) OECD는 통상 임시직근로자(temporary worker)를 비정규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임시직근로자에는 유기계약근로자(worker with fixed-term contract), 파견근로자(temporary agency worker), 계절근로자(seasonal worker), 호출근로자(on-call worker) 등이 포함되어 있다. e-나라지표(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477)
- 9) 서비스 경제사회로의 진입 이후 한국의 노동 시장에서 나타난 고용불안정성, 소득 불안정성, 사회적 임금의 불안정성을 실증적으로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서비스 노동자 계급과 생산직 노동자 계급은 고용, 소득, 사회적 임금 세 가지 차원에서 지속적이고 중첩적인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소득불안정성에서는 서비스 분야에서 저숙련 노동자들이 격는 불안정성이 높게 나타났고 사회적 임금에서도 서비스 노동자 계급의 불안정성 생산직 노동자 계급보다 더 높았다. 그런데 프레카리아트의 규모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한국사회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백승호, 「서비스경제와 한국사회의 계급, 그리고 불안정 노동 분석」, 《한국사회정책》 21(2), 한국사회정책학회, 2014, 76-79쪽.
- 10) Eisenstein Zillah, “An Alert: Capital is Intersectional; Radicalizing Piketty’s Inequality.” The Feminist Wire, May 26, 2014. 패트리샤 힐 콜린스, 시르마 빌게, 이선진 옮김, 『상호교차성』,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42쪽 참조.
- 11) 김준, 「콜센터 노동환경 여전히 열악 “다음 소희 막기 위해 지금 소희부터」, 《노동과세계》, 2023. 3. 16.(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2071)
- 12) 사회학적으로 혼란, 변화, 이탈, 분절과 연결되는 개념인 탈구는 주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게 만드는 주체의 위치이다.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 사례를 연구한 살레냐 파레냐스는 그들의 불완전한 시민권, 가족과의 별거로 인한 정서적 고통, 사회적 지위 하향으로 인한 모순적인 계급이동, 이주민 공동체 내에서의 차별과 배제로 인한 무소속감 등을 탈구위치(dislocation)로 지적했다. 파레냐스는 탈구 위치에서 구성된 주체는 그것에 종속된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주체임을 강조하며, 그들 스스로 자신이 구성된 과정인 탈구위치를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므로 탈구위치에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문현아 옮김, 『세계화의 하인들』, 여이연, 2009.
- 13) 주디스 버틀러, 김응산, 양효실 옮김,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창비, 2020, 25쪽.
- 14) 위의 책, 85쪽.
- 15) 2018년 정부가 발표한 노동시간 단축(주52시간제) 정책과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참여 연구자가 일한 대형 마트에서도 노동 시간을 단축했다. 마트측은 주말에는 -고용주가 주휴 수당 및 퇴직금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주14시간 이하로 근로계약을 맺는 ‘초단시간 노동’을 적용한 노동자를 고용했다. 연구자는 캐셔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반가워할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휴게시간과 식사시간의 단축, 근무 시간 배치의 세분화로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노동현장을 삭막한 공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이소진,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갈라파고스, 2021, 211-244쪽) 이 사례가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 불안정 노동과 불안정 고용에 처한 노동자일수록 노동현장을 거점으로 한 수평적 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 16) 위의 책, 195-210쪽.
- 17) 김사이,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지난 시간을 견뎌왔다」, 《실천문학》 2013년 가을호, 141쪽
- 18) 강남훈, 『기본소득의 경제학』, 박종철출판사, 2019, 130-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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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비평 작품론1) 2) 1. 전환 서사들과 포스트 비평 최근 ‘포스트 비평’의 담론 지형3)에 동물·몸·정동·존재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turn) 서사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사유 및 원리와 부대끼는 과정에서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잠정적으로는 사물 세계의 ‘얽힘·연루됨’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질문을 전환해 가던 차였다.4) 문제는, 이 전환의 사유들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볼 실마리를 명백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글쓰기로 육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체감에 있었다. 우선 어떤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유의 관점을 조정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글쓰기는 여전히 근대의 제도적 지식 체계나 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과 교섭하며 쓰는 몸 스스로의 행위 도식이 바뀌어야 가능할 터이지만, 몸이야말로 결코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관성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개인적 딜레마로 여겨진 것이 실은 어딘가에서 차근차근 내파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업을 다시 살피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내내 ‘독자’ ‘읽기’ ‘쓰기’ 등의 문제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문학 비평 현장을 풍요롭게 증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비평 행보를 찬찬히 살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독자-읽기-쓰기를 주제화해 온 그녀의 작업이 실은 스스로의 몸을 바꾸고 그 몸과 연결된 배치를 바꾸는 과정 자체이기도 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식 하에서 조금 구부러뜨리는 일이 허용된다면, 예컨대 어떤 연루됨(이때의 연루됨은 주체/객체를 넘어서는) 속 자기 위치를 감각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드는 과정을 글쓰기 자체가 수행해 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과거 그녀의 말도 떠올려본다. 그녀는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5)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거느릴지는,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지은 글쓰기의 이러한 수행적 의미를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징과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비평이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주체/대상(객관)이라는 근대적 도식이 선명하게 구현되는 장르인 것 같다. 비평의 ABC에 대한 글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 비평은 대상(객관)으로 놓여 있는 텍스트를 경유하면서 말해지는 주체의(주관적) 형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자기를 말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출발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주체/대상’ 구도의 긴장과 역학이 놓여 있는 것이 비평이다. 대상이 선행되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의미가 감상하는 이의 주관과 연동된 장르라는 특징 탓에, 종종 비평에 덧씌워진 고압적 이미지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백지은 비평에서 언젠가부터 이러한 ‘주체/대상’의 도식성이 여러모로 미미해지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예컨대 (본문에서 다루겠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산책’을 주제화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의 도입부는, 대상 텍스트와 필자가 어떻게 얽히고 서로 스며들어 가는지 생생하게 감각시키는 퍽 드문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다 읽고 나서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산책이 뭐가 좋은 것일까”와 같은, 평범한 말들인데다가 어딘지 비평의 단호하고 명료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 진술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호흡에 밀착한 이 조곤조곤한 말들은 읽는 이마저 부지불식중 그 활자에 스며들게 한다. ‘주체(필자)/대상(소설)’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서술 장면, 그리고 그러한 문장에 읽는 이까지 연루시키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비평은 텍스트와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최근 에세이적 비평 경향 같은 것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문장은,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언표화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이전의 웅성거림을 감지시킨다. 기존의 장르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백지은의 글에는 여느 비평에서와 같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말로 스스로를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향도 백지은의 비평과 거리가 멀다. 이런 특징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백지은의 글에서 ‘마음’ ‘감정’ ‘기분’ ‘정동’ ‘객체’ 같은 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물론의 사유가 백지은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음도 확인해 두자. 그것은 ‘글 속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글 자체로 체화’되고 있는 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종국에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성격마저 갱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앞서 적었듯, 비평 장르가 강하게 전제해 온 주체/대상의 근대적 도식은, 그녀가 천착한 ‘마음론’이 오히려 질문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녀의 글쓰기는 곧 그러한 마음론의 사유를 체현한(emboded)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쓴다’는 일을,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자기를 세우는 과정으로 설명했던 백지은의 말은 지금 스스로의 비평 궤적에서 활물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글쓰기의 특징이 그녀 자신이 골몰해 온 비평 주제와 관련해 필연적이리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겠다. 2. ‘마음’의 조건에 대해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2024) 읽기 백지은 비평의 주제와 방법을 최전선에서 확인시키는 글의 하나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이다. 이 글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마음’의 존재론을 그려간다.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통해 작동하는지 고찰하는 글이다. 이 글의 화두인 ‘마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최근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통해 언표화되어 왔다. 그것을 ‘감정’ ‘정동’ ‘감응’ 같은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 비평적 논의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지은의 글은, 그러한 개념, 이론들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마음’의 정체를 섬세히 풀어나간다. “적다보니 ‘마음은 대체 뭘까’ 싶은 의문이 소박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스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솔기없이 노출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글에는 마음을 둘러싼 최근의 인지과학, 정동이론, 문화연구 등의 사유가 행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경하게 전경화하지 않으며 정합적 논리로 이어가는 이런 장면에서, 비평도 하나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마음이나 감정 등과 같은 것이 어떤 개체적 신체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온 우리의 통념을 먼저 뒤집는다. 이 글에 따르자면 마음은 단지 개인의 내부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누군가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한다. 마음이나 감정이 누군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실은 어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마주침과 연결 속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는 통찰이 저 말에 담겨 있다. 이때 “마음”이란 “이러한 연결 작용 및 상호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로 된 결과물”에 가깝다. 즉 “마음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내 마음은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내가 처한 상황과 나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생겨난 사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생겨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집단의 또는 공동의 조건 안에서 복잡하게 출몰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움직인 결과이므로 또한 사회적인 산물”이다. 단,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첫째, 백지은이 말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은 어떤 균질적 덩어리(mol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론은 마음의 보편성이나 균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마음들이 단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기 이전 구체적인 마주침과 연결을 통해 각각 다르게 발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는 “우리가 몸짓이나 표정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마음에 보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주요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처럼 구체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 마음이나 감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마음, 감정, 정동 등은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지니고 있다해도, 그럼에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나 특정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되게끔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마음 이야기는 어딘지 불순하고 불철저한데, 백지은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그녀의 마음론이 존재의 자기구성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정동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저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론’은 기계적 구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관련하여 ‘나’라는 감각 행위자의 고유성 역시 각별히 강조되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잠시 이런 대목을 보자. “우리의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도, 어떤 공동의 지평에서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내’게 지어져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고유한, 중요한 사실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으로 인해 ‘나’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백지은의 말, 즉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던 것이 오버랩된다. 자기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단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러한 마음론이 어떤 사유와 고민으로부터 전개된 것인지 그 시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론은 단지 비평에 소용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한 발현인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내 몸 어딘가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신체 활동에서 구성된 산물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나 경험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움직이고 또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는 이 논의의 정합성은 ‘이론’이라는 말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 같다. 더욱이 대상으로 다뤄진 김화진 소설이 마음론의 매개, 도구로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소중하다. 백지은의 글은 쓰는 이(주체) 스스로 소설(대상)에 스미고 얽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대상(소설)의 고유성은 내내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따뜻한 공감을 상찬하거나 낭만화하는 식으로만 읽히기 쉬운 김화진 소설을 구출하고, 작품이 지닌 “‘마음’에 관한 탐구 서사”로서의 의미를 풍부히 드러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각 텍스트가 지니고 있을 고유한 의미를 발하도록 하면서, 그럼에도 저변의 관통하는 논리를 발견-전달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전환(turn)하는 한 사례로 읽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감각하는 역사에 대해 : 「안으로 나가는 역사」(2019) 읽기 한편 백지은 식의 마음론은, 역사를 보는 관점과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보다 앞서 발표되기는 했으나, 텍스트를 따라 걷는 이의 심상과 호흡을 그대로 노출하며 시작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글은 박솔뫼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을 통해 역사와 나/우리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찬찬히 짚어간다. 이 글 역시, 무언가를 장악하고 자기화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겠다는 비평적 자의식 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백지은 글의 특징, 즉 텍스트와 나란히 혹은 그것에 스며들어 발화를 이어가려는 비인칭적 발화자의 흔적도 이 글에서 어김없이 엿보인다. ‘비재현’ 사유와 역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특정 개념이나 이론이 박솔뫼 소설을 압도하거나 유리시키는 법은 없다. 『미래 산책 연습』에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제재로 등장하지만 박솔뫼 소설이 그러하듯 그것은 직접 재현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단지 ‘산책’이라는 행위와 그 동선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백지은의 결론부터 적어두자면, 소설 속 산책은 단지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리로 하는 명상”이고 사유의 기반이자 감각-접촉의 형식이다. 그녀의 분석을 통해 주인공의 산책은 부산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과거 사건과 접속하고 미래를 기억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역사적 행위성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서 부산 역시 단순한 소설적 배경이 아니다. ‘부산’은 사건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며 구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부산은 과거의 역사-현재의 만남-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서로 얽히는 시/공간적 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세계가 복수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증거하는 장소다. 박솔뫼 소설 속 자기, 나, 역사 등에 대한 백지은의 설명은 예컨대 일종의 연결신체(assemblage)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론’과 연동되는 것임도 물론이다. 이 글의 출발지점은 ‘이야기가 곧 역사/세계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지점이다. 도입부는 “소설에 드러난 역사/세계는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일뿐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박솔뫼 소설과 역사 제재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등장함직한 ‘재현’ ‘표상’ 같은 개념은 일절 구사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백지은의 글에서 개념이나 이론은 구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감각과 경험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의 글을 포함하여, 그간 많은 비평은 강단(논문)의 언어와 친연성을 떨치지 못하며 본의 아니게 개념과 이론의 생경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비평의 독자와 장(field)을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도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많은 비평 논의가 근대적 재현·표상 너머를 역설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재현·표상의 언어를 경유하고, 의도치 않게도 다시 기존 재현·표상의 원리가 강화되거나 재생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적었듯 여전히 비평이 근대의 제도적 글쓰기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탓이 우선은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백지은의 글은 이러한 곤경을 가뿐히(물론 치열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한) 넘어서는 듯 보인다. 아예 비재현, 비표상의 언어를 고안하고 발명하는 과정 자체가 그녀의 글쓰기에 함축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의 글은, 박솔뫼 소설 속 ‘역사’는 “생각-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가정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지은 식 조어(造語)인 ‘생각-가정’은 단지 “상상으로 꾸며진 가상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기록, 증언과 같이 익숙한 재현 개념의 한계를 사유하면서 그 너머를 말로 움켜쥐려는 그녀의 고투는 분명 박솔뫼 소설을 포스트 재현, 포스트 메모리의 개념을 통해 읽는 방법과 닿아 있지만 그 목적이나 효과는 분명 다르다. 이 “생각-가정하는 역사”는 어떤 유일무이한 진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탈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때 ‘역사적 사실’은 “다만 느슨하게 연계되어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전체를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부분의 합이 전체라거나 전체가 곧 부분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이 글에서 낡은 것이 된다. 백지은이 부상시키는 이러한 연결적 관계들은 어떤 중심/주변의 위계도 없고 총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병렬적인 흐름으로 이미지화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주체/대상 도식 속에 배치되어 사유되던 이 세계를 다르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백지은은 박솔뫼 소설 속 “‘나’의 생각-가정”은 “대상에 대한 통제나 지배의 가능성을 거의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관점을 주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도 중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곧 ‘자기’에 대한 근대 이래의 서사를 다시 쓰는 장면의 하나임도 기억해 두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가정’은 흔한 ‘자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너머로 개방되며 연결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거나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하는 상이한 위상”이 두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나가는 역사’라는 제목의 수수께끼도 이제 풀리는 듯하다. 공식 기록 혹은 객관화된 기록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역사는 그녀의 글에서 오히려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을 향해 접속하려는 움직임,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은 어떤 진공 상태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산책자 역시 단지 걸으며 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안의 감각, 사유, 몸의 미세한 반응 속에서 사건을 감지하는 자다. 이때 역사는, 바깥에 그저 놓여 있는 진실이 아니다. 역사는, 삶과 함께 유동하며 점점 안으로 향해오는 감각의 기원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역사/내면’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주들이 이 글에서는 서로를 향해 작동하고 있고, 그 얽힘의 관계가 섬세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이제까지 살핀 백지은의 글과 말에도 상응한다. 그녀가 밀어붙인 비재현·비표상의 말들은 곧 이 세계의 원리를 찬찬히 응시해 온 그녀의 마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만든 것이 또한 재현·표상을 흘러넘치는 어떤 세계였을 터였다. 비록 재현 체계 안에서 쓰여지는 글이지만, 그럼에도 재현 체계·제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감각시키려는 고투가 백지은 비평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4. 균열을 내고 거기에서 장소를 만드는 비평 백지은의 글들을 읽으며, 이 세계 속 존재나 사건의 연루됨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더 밀어붙여도 될 용기를 얻는다. 읽기-쓰기의 순환적 수행성에 대해서도 큰 자극을 받는다. 읽기(듣기) 없이 쓰기(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하지만 오늘날 새삼 중요한 사실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사실 전환(turn)을 둘러싼 이론, 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말과 담론은 자주 인플레였고, 정작 그것이 제대로 체현, 수행되어 본 일은 썩 많지 않았다고도 생각된다. (과거라면 ‘실천’ 같은 말로 표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체현과 수행이 어쩌면 늘 이 세계의 궁극적 과제이자 관건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좀처럼 관성과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글은 종종 제자리를 맴돈다.지금, 백지은 작업의 극히 일부분만 읽은 셈이지만, 제도적 비평의 현장에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엿보았다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유례없는 고민이 이어진 지난 십여 년을 백지은의 행보가 이렇게 증거해 주는 것 같다. 포스트 비평의 형질 변환이 선언이나 논쟁이 아니라 이렇게 글자의 안쪽에서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제도의 관성, 시스템의 회로에 균열을 내고 빈틈을 만들며 그곳을 장소화해 온 그녀의 작업에 많은 언어들이 닿고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을 기존 방식의 ‘비평’ 같은 말로 반드시 명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어서 적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한 것은 늘 각 시대마다 요청되거나 그 시대와 정합적인 글쓰기 양식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백지은의 작업에서 엿본 것도 바로 그에 대한 도약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1)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2)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백지은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 /「안으로 나가는 역사」(『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다. 3) ‘포스트 비평’이라는 말의 문제의식 및 그 정황에 대해서는 2010년대 이래 영미 비평-이론계 맥락에서의 논의가 선행한다. 예컨대 브뤼노 라투르의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Critical Inquiry Vol. 30, No. 2, Winter 2004)이 제기한 쟁점이 서구 비평-이론계에서 본격 맥락화되는 것은 Elizabeth S. Anker, Rita Felski, Critique and Postcritique(Duke University Press, 20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론을 한국적으로 맥락화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 인아영, 「비평과 사랑 :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어 문학 비평에서 기존과 다른 패러다임의 글쓰기가 전개되고 있는 양상 전반을 지칭한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 플러스 알파 : ‘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마음의 유물론」(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해설) 등. 5) 백지은,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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