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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창작21 | 2024년 봄호(제64호)

문학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해야 할 역사

심영의 문학평론, 소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5·18광주민중항쟁소설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2020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소설집 『그날들』, 장편소설 『사랑의 흔적』, 『오늘의 기분』, 『옌안의 노래』 평론집 『소설적 상상력과 젠더 정치학』, 『5·18, 그리고 아포리아』 문화연구서 『광주 100년-시장과 마을과 거리의 문화사』등을 펴냈다. 2014년 아르코 창작기금과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기금, 2023년 제2회 ‘광주 박선홍 학술상’을 수상했다. 조선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오랫동안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등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을 강의했다.

1. 문학적 기억과 태도


   지난 계절에는 유난스럽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많았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징후적 사건이 합의된 역사에 대해 부정하고 비틀고 정치적 목적에 맞게 가공하는 일일 게다. 일찍이 박근혜 정권에서 시도하다 끝내 좌절되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윤석열 정권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전면적인 사상투쟁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우고1) 그 위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 백선엽의 역사적 복원과 박정희와 이승만의 우상화 작업을 넘어 제주 4·3과 광주 5·18 2)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문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관심은 문학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 곧,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겠다.

   우선적으로, 문학은 기억의 소산이다. 그 이유는 문학적 기억이 인간의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3) 그런데 기억은 왜곡과 변형이 그 숙명이라 할 것인데 까닭은 시간의 경과와 기억하는 자의 선택의 문제(관점)가 함께 뒤섞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몇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이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독자와 함께 숙고해 보려 한다.



2. 김훈 역사소설들의 매력과 불만


   소설『하얼빈』은『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극한적 상황에 직면한 개인의 파편화된 고뇌를 그린다. 다른 하나는 사실 혹은 사건에 대한 의견보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인다. 전자는 그가 역사의 총체적 인식이나 전망을 신뢰하는 대신 언어가 객관적인 실재를 재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자는 실증주의 사학에서 견지하는 것처럼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미덥게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훈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분법으로 구획해서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훈은 비루할지언정 죽음보다는 생존을 보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 그리고 생존의 욕망이 그의 무의식에 작동하고 있다.

  『하얼빈』(2022)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대의명분보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의 행위가 교리에 어긋난다는 점에 더 고뇌하는 듯 보인다. 아내 김아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아이들 특히 그의 어머니와 함께 하얼빈으로 오지 못하고 명당성당 수녀원에 맡겨진 딸아이에 대해서도, 어머니 조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는 연민을 드러내지 않는다.『칼의 노래』(2001)에서 이순신은 명군의 뜻을 거스르고 일본을 쳐도 명군의 뜻을 좇아 일본을 보내도, 임금은 일본을 막을 장수가 필요치 않은 시간에 그 죄를 물어 죽음을 내릴 것을 그는 예감한다. 그는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64쪽)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죽어서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현의 노래』에서 ‘아라’가 순장에 처 해질 때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싸우다 화의를 모색할 것인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화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한다.

  『하얼빈』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이는 대목 중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무엇보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 살해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소설의 서술자는 마치 무심한 목격자인 듯 다음처럼 묘사한다.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두 걸음 정도의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이토가 보였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할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166-167쪽)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그의 서술전략은 허구로서의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장치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갈등구조 이면에 자리 잡은 김훈의 정치적 무의식, 곧 계급적 분리다. 김훈은 권력의 허망함과 폭력에 대해『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예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64쪽) 그러나 그 권력의 생산과 작동이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측면을 애써 무시한 채 고립무원에 빠진 이순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불가항력의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장면만을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남한산성』(2007)의 세계 역시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는 세계다.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얼핏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주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신세계(=우국의 세계)에 속한 김상헌과 최명길의 갈등과 이념이 결코 아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보다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인 ‘사공’ 같은 민초의 세계와 조정-사대부 간의 대립에 더 주목해야 한다. 김상헌은 뒤늦게 남한산성을 찾아가는 길에 얼어붙은 강에서 그를 안내하던 사공의 목을 벤다.(46쪽) 밤새 강물이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어도 강을 건너올 것이지만,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김상헌은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묻고, 갈 곳이 없고 갈 길이 없어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한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43쪽) 하고 한탄한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그의 행위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238쪽) 재판장 마나베와 검찰관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범죄는 자국의 영고성쇠와 그 유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의 결핍과 이토의 인격과 일본의 국시에 대한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된 무지의 산물”(239쪽)임을 강조함으로써 안중근의 행위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동기가 아닌 무지와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한 살인 행위로 격하하고자 하는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살인하지 말라는 천주교 교리(빌렘 신부)와 국가의 독립을 위한 전쟁(안중근)이라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통해 안중근의 인간적 갈등과 회오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계급적 분리라고 나는 본다. 

   의병을 일으켰던 신돌석이 결국 배신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거나, 이인영이 거사를 일으킨 후 부친의 부고를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후 그의 수하 이은찬이 세력을 일으켰으나 배반한 부하들에게 유인을 당해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거나 하는 민초의 배신과 관련한 사실들의 전언이 3페이지에 걸쳐(56-58쪽) 기록되어 있다. 의병 참여 주체의 목적과 지향은 주체별로 각기 달랐다. 투쟁의 양상이 국권 회복이라는 현실적 투쟁의 목적 앞에 단일한 대오를 형성했지만, 각자가 생각했던 지향점은 각자의 위치와 조건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그것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해서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주에서, 동학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지나가면 관군이 들어와서 동학군에게 식량을 내준 백성들을 잡아갔다. 동학군이 관아를 불 지르고 아전들을 죽이면 아전의 아내가 동학군의 은신처를 밀고했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동학군의 아들이 밀고자를 죽였다.『하얼빈』에서의 이런 서술은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때 집안의 어른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위협하는 동학군을 쳐부수었는데, 그때 “열여섯 살 난 안중근이 그 선봉 역할을 했다.”(179쪽) 왜 농민들이 동학군을 조직해서 관아를 불태웠는가 하는 점에 대한 이해의 흔적이란 없다. 

   안중근은 해주 일대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남아라는 자부심을 토대로 장부가를 부르며 이토 살해에 나선다. 그렇다 보니 소설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임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그의 이념이 자칫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왕국의 패망보다 오래 지속하게 마련인 민중의 건강함을 김훈은 간과하거나 비릿하게 보고 있는 듯 싶다. 이는 소설에서 김훈은 조선 천주교회의 수장인 프랑스 주교 ‘뮈텔’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김훈은,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생겼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251쪽)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김훈이『남한산성』(2007)서문에 적은 것-“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엄밀하게 말해 객관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적 맥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언어를 매개로 한 글에서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닐 수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현의 노래』(2005)에서,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신라의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 

   소설『하얼빈』의 ‘작가의 말’에서 김훈은,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303쪽)고 쓰고 있거니와 그가 말하는 ‘순수성’이란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은… 청춘의 언어”(303쪽)인 것이니, 이는 김훈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의 강박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역사 허무주의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는 소위 강한 자, 강한 것에 대한 선망, 혹은 힘을 갖지 못한 자의 무력감이 무의식에 깊게 침윤되어 있다. 

  『현의 노래』에서 가야 순장자들의 죽음과 백제 포로들의 죽음은 ‘우륵’의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라’가 순장에 처해질 때 이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또한 백제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신라 장수 ‘이사부’가 평생 꿈꾸고 추구하는 세계란, “거칠고 피 흘리는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해주는 하나의 ‘질서’”다.(141쪽) 이사부가 무자비한 살육을 지속하면서 ‘합리적이고 냉혹한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질서’를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는『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에 죽은 이토가 한국에서 이루려 했던 꿈-망상과 다르지 않다.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시운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리는 것이 김훈 소설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구축하는 서사의 내용이나 문체, 어조가 그의 역사소설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작가의 자기 동일적 세계관의 반영-정치적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칼의 노래』에서 그랬던 것처럼『하얼빈』에서도 김훈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대신 그가 마주한 상황에서 갖게 된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밀도 높은 문장과 섬세하고 구체적인 세부묘사로 독자를 그의 이야기 세계로 흡인하는 데 능한 그의 소설의 매력이다. 다만 ‘있었던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재현에서 그는 둘 다(안중근과 이토) 내세우고 지키고 실행했던 이념의 쓸모 없음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얼빈』에서 김훈은 어떤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가. 안중근의 총에 이토가 죽지만, 그래서 안중근의 이념이 얼핏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아 여순 감옥에서 죽는다. 사실의 충실한 제시라는 그의 서술전략은 선명한 이분법 구도 내부에 양비론적인 태도가 은폐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남긴다. 안중근이 꿈꾸는 세계와 이토가 꿈꾸는 세계를,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통해 이념의 허무함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 아니 마땅치 않다. 역사소설은 무엇보다 당대의 삶과 현실에까지 힘을 미치는 과거의 현재성을 살릴 수 있어야 그 몫을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김훈의 역사소설에서는 니체가 말한 ‘실천적 역사의식’이 부재한다. 아니 김훈은 그러한 종류의 거대담론 자체를 일종의 억압으로 보고 혐오한다. 작가와 독자의 해소되지 않는 불화가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다. 까닭은 여타의 독자가 그의 소설에 매료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일상적 불안과 경제적 공포 앞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분산되거나 분담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인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감정이 되고 있다. 김훈 소설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에의 의지다. 이것은 비루한 삶을 살게 만든 구조나 혹은 실패한 거대담론에 대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현실 변혁 가능성을 부정한 냉소적 허무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오직 개인(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독자들은 김훈 소설 속 인물과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하니 이러한 현상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김훈의 탓은 아니지만 나는 김훈이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작가로서 그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본다.『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행위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대신 종교적 갈등을 더 많이 부각하는 방식의 서술은 건강한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의 군더더기 없이 밀도 높은 건조한 문체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자로서 그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3. 관념과 재현, 정찬과 임철우 소설들


   언어(문학)를 통한 역사의 복원은 사실의 복원이 아니라 사건의 실재와 마주하는 ‘접촉’의 복원과 그것의 공유가 된다.4) 그런데 문제는 4·3이거나 5·18이거나 난징대학살이거나를 막론하고 어떠한 형태이든 학살의 재현은 항상 경험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아감벤이 제시한 ‘레비의 패러독스’에는 학살을 재현하는 행위에 대한 아포리아적 질문이 함축되어 있다. 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은 그것 자체를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극단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희생자이기에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사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그 경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 즉 생존자이다. 그러나 생존자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희생자의 ‘말로 할 수 없는 경험’을 현전시키지 못한다.5) 

   그러므로 ‘학살’에 대해 쓴다는 것은 왜곡과 오인의 가능성, 바꿔 말하면 재현 행위로부터 비롯될 지시대상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학살에 관해 써야 하는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으로부터 배태될 수 있는 왜곡과 오인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 해결 불가능한 질문 속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밀어 넣어야 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의 미학은 사실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수용자들의 해석적․윤리적 판단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6)

   정찬은 그동안『기억의 강』(1989),『완전한 영혼』(1992),『아늑한 길』(1995) ,『광야』(2002)등의 소설을 통해 ‘광주’로 은유되는 역사적 현실의 비극에서 출발하여 권력과 언어의 본질에 대한 관념적 성찰로 나아가는 독특한 서술전략을 선보여왔다.7) 그런데 정찬은 장편『광야』에서, ‘절대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 꿈이 삶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절대적 신념(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집『기억의 강』에 수록된 중편소설「슬픔의 노래」에서 주요 인물인 연극배우 ‘박운형’은 오월의 기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연극공부를 하러 갔던 뉴욕에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을 보고 난 뒤 아우슈비츠의 야만, 아우슈비츠의 잔혹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처음에는 광주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을 느낀다. 그러나 곧 광주에서의 참혹함을 마침내 무대에서, 곧 세상에서 견뎌내는 힘의 원천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5·18때 계엄군으로 광주에 왔던 ‘박운형’이 그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서 다다른 ‘운명’이라는 나름의 깨달음은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뿌리칠 수 없었던 그날의 고통과 그로 인한 죄의식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성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운명론적 허무주의일 것인데, 이는 정찬 소설 대부분을 관류하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소설「슬픔의 노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에 대해, 그것이 아우슈비츠에서든 광주에서든,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라는 것, 그것은 다만 ‘슬픈 일’이라는 인식만이 남는다. 그러한 태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한 감정만 가지고는 폭력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기에 역부족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의 죽음에는 그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이들의, 제각기 고유하고 특별한, 비통한 슬픔이 있다.8) 그러나 정찬 소설「슬픔의 노래」에서는 그러한 일들(죽임과 죽음) 모두를 모든 죽음을 단지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묶어버린다. 그리고는 이제 그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의 문제로 이동한다. 강을 건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작가에 의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탄다.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탄다. 그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란, 광주에 계엄군으로 왔던 ‘박윤형’의 입을 통해 광주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에 대해, 그것은 광주를 소설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다만 부끄러움일 뿐 진실은 형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결국 ‘박운형’처럼 그날의 고통의 기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일까. 진정석의 경우 그것은 “고통의 거부나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수락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려는 자세이며, 비극을 벗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비극 안에서의 꿈꾸는 방식”이라고 해석한다.9) 그러나 한편, 소설이 세계를 바꾸지 못하는 한, 이제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정찬 소설에서 5·18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한 방식이다. 소설의 화자가 여행하는 장소가 굳이 아우슈비츠인 까닭도 그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작가가 그날 계엄군에 저항했던 시민의 시선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원으로 광주에 왔던 이의 시선으로 광주의 비극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역사 허무주의의 관념으로 후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준다.10) 그가 역사적 사건을 서사화한 소설 대부분에서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체제 옹호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리얼리티를 상실한 유미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인데, 정찬이 즐겨 쓰는 알레고리기법이 갖는 속성에서 비롯된다. 

   알레고리는 가시적인 것의 형상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알레고리에서는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추상적 관념이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다. 알레고리를 통해 묘사된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재현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의미와 형상의 불일치로서 알레고리는 비감각적 유사성으로 특징되는데, 이 유사성은 의미가 불확정적이서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다. 루카치의 경우 알레고리적 기법은 결국 종교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정찬 소설의 경우에 적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그는 최근에 펴낸 장편소설『발없는 새』(2022)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에 의한 난징학살과 중국공산당의 문화혁명기를 겪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워이커싱과 첸카이거와 아오키, 그리고 그들과 만나 난징학살과 히로시마 원폭과 문화혁명이 개인에 끼친 관계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서술자(베이징 특파원)가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광주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위에 언급된 역사적 사건의 가해자인 일본군과 홍위병의 공통점을 그는 “신적 존재를 향한 숭배”(241쪽)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80년 5월 광주의 진압군과 그에 맞서 총을 들었던 시민군도 결국 각자의 신념을 위한 죽음과 죽임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완전한 영혼』(1992)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완전한 영혼」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완전한 영혼」순결한 한 영혼의 기억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깊은 상처의 근원에 광주의 기억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1)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성수라는 매우 신뢰할 만한 운동권 활동가를 통해 80년대 운동에 대한 반성 및 새로운 이념적 지평의 제시를 시도한다. 서사는 장인하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성수의 관심과 의미 부여를 축으로 전개되지만, 그것은 지성수의 새로운 변혁 이념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기능한다. 그래서 지성수가 장인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단지 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장인하는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이며 식물적 정신의 소유자”다.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 악의 힘을 알지 못하는 인간, 혼돈과 광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볼 수 없는 인간이자, 악이 가하는 고통에도 식물적으로 순응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성수에게 장인하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보완해 줄 요소를 지닌 것”12) 으로 보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장인하라는 인물의 창조는 분명 새롭고 따라서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소위 식물적 정신이라는 것이 1980년 5월에 있었던 국가폭력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효과적 대응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식물적 정신을 양보적 저항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종교가 그러한 것처럼 이 소설 또한 폭력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으로 양보적 저항이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있는 것처럼 믿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3) 또한 이 작품이 “1980년대 변혁 이념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운동에 대한 나름의 방향 제시인지”14), 아니면 5월 그 자체(대항 폭력으로서의 광주 민중의 저항-폭력)에 대한 비판인지 그 초점이 석연치 않은 것도 문제로 남는다. 장편소설『광야』에서 볼 수 있는 이념 자체에 대한 회의와 혁명이 끝난 후의 분열에 대한 염증은 사실 정찬 소설 곳곳에 편재해 있다. 

  『발없는 새』에서 난징학살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살아남았던 워이커싱은 “마오쩌둥의 홍위병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와 일본 천황의 군인들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229쪽)가 결국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정찬의, 역사적 폭력에 개입되어 있는 이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것은 작가의 역사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에 그 자체를 나무랄 것은 없겠다. 문학이 이러해야 한다는 규정이야말로 또 다른 억압이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사라진 자리에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벌레로 만들어버리는 것, 곧 자본이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그 자체로 독자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신념을 위해 아버지를 죽인 문화혁명의 폭력과 물질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폭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참혹한가”(241-242쪽) 하는 물음 끝에 소설의 화자는 ‘장자의 나비’를 상기한다.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다는 것, 그 관계를 역사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 물론 전제가 없지는 않은데, “장자가 나비를 보듯이, 나비가 장자를 보듯이,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는 것(240쪽)이다. 

   이는 소설집『기억의 강』에 수록된 중편소설「슬픔의 노래」에서 80년 5월 광주에 진압군으로 파견되었던 ‘박운형’이 그날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시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구원의 방식이 아닌가. 곧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허무는 것, “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아오키15)의 고백(241쪽)이 명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적인 역사적 사건이 인간들의 삶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천착하고 있는 정찬 소설(들)의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찬 소설『발없는 새』에서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알레고리는 무엇인가. 장국영(장궈룽) 주연 영화《패왕별희》중에서 한 대사를 인용하고 있는 소설은,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90쪽)라는 인용. 즉, 역사와 현실을 초월한 세계, 무구한 식물성의 세계 혹은 역사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래전 발표한『아늑한 길』(1995) 속에 수록된 단편「아늑한 길」의 인물 김인철의 발화에서부터 반복되고 있는 알레고리적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난날의 자신을 지탱해 주었던 절망, 증오, 치욕, 부끄러움과 열정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같은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새」에서도 광주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박영일은 당시의 끔찍한 기억 탓에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방황을 하지만 마침내 황폐한 정신을 만져주는 생명성에 동화됨으로써 치유에 이른다. 무구한 식물성의 세계 혹은 역사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 속에서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평온에 이른다. 

   정찬은 역사와 인물을 단선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역사적 폭력을 인간의 욕망의 문제와 결부해서(권력의 절대화와 언어의 함수) 그 복잡한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드문 작가이기는 하지만, 그가 취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결국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무화하는 곧, 양비론적 세계관이라 하겠다.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뿐 아니라 일상화된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환기도 필요하고 그것은 그것대로 소중하지만, 사실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새처럼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오히려 자신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야스퍼스는『책죄론』에서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뒤에도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고 말한다16). 5·18의 기억을 원죄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아직 살아있음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이 죄의식- 부끄러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날의 피해자는 말할 것 없거니와 가해자들 못지않게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외상 변증법의 지배17)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5·18에 대한 소설적 재현과 윤리적 해석을 말하는 맨 앞자리에 임철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임철우는 고유한 개인을 넘어선 80년 5월 광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봄날』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산물이다.18) 광주항쟁에 관한 기념비적 소설『봄날』다섯 권(문학과지성사, 1997)을 통해 5·18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남겼던 임철우의 소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날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다. 그러한 정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봄날』이전에 발표한 단편「봄날」(1987)이다.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임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주를 그의 친구들인 나와 병기와 순임이 찾아간다. 명부의 죽음은 상주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상주가 바라본 자기 밖의 사건이 아니라 그의 속에 있는 그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상주는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그 사건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주는 명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피해망상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중이다. 


   오월, 그 마지막 날 새벽, 명부는 죽음을 당하기 바로 전에 정말 상주의 집을 찾아갔었을까. 그리고 명부가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으면서도 자신은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노라는 상주의 말은 사실일까19). 


   ‘나’는 상주가 입원한 병원을 향해 가면서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러면서 음울하기 짝이 없는 환상에 시달린다. 


  상주야아…  상주야아…  나야, 내가 왔어. 문 좀 열어줘…  상주야아.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귀에 잡히지 않는다. 두두두두두…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고 명부는 더욱 다급히 상주를 부르며 문을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상주야아…  상주야아… 나야, 문 좀 열어달라니까. 대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상주야. 살려 줘. 늦기 전에 나 좀… 제발… 문득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순간 명부는 흠칫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비칠비칠 골목을 빠져나와 도망치기 시작한다. 남빛 어둠 속으로 명부의 몸뚱이가 지워져 버린 후, 오래지 않아 그쪽으로부터 콩 튀기는 듯한 요란한 발사음이 터져 나온다…. (봄날, 188쪽)


   상주는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임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상주는 그날 명부가 애타게 자신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었으면서도 자신은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동생 상희는 “그건 오빠의 피해망상이 빚어낸 엉뚱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도 “그날 새벽에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명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한다. 상주의 식구들은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고 그때 상주는 뒷방에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명부의 죽음은 적어도 상주의 방기 때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거듭 묻는다. 명부가 죽은 곳이 하필 상주의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일 뿐일까? 

   ‘나’와 함께 상주를 찾아가기로 한 병기는 “단정한 양복 차림에 목을 넥타이로 단단히 졸라 묶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은행에 갓 입사했다. 탈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상주가 온몸에 유리 조각을 긋는 자해 끝에 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난 뒤 병기는 말한다. “허, 참, 바보 같은 자식 같으니라구. 아니, 벌써 이 년이 지난 일이잖아. 남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잘들 살고 있는데 대관절 그 자식만 왜 아직도 그 지경이야?” 이십 년도 아니고 겨우 이 년이 지나자 그렇듯 모두들 전처럼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명부의 죽음과 상주의 입원에 대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건들에 대해서 ‘나’만큼의 심리적 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학교 선생이 된 순임 역시 별다른 징후는 없어 보인다. “제법 선생님 티가 나는군, 아주 의젓해졌어.” 라고 인사를 건네는 나를 향해 순임은 “어머, 그렇게 보여요?” 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니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심리적 거리가 가장 가까운 것은 상주의 시점이며 그 다음은 나, 그리고 병기와 순임의 순서다. 

   시점의 차이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개입의 차이를 말함인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은 시점의 차이에 따라 의미의 편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어낼 듯 울려 나오기 시작한다. 으애애애…  앵. 그 사이렌 소리는 그들이 모여 있는 도로의 맞은편 도청 건물 옥상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민방공 훈련의 날이었고, 하필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잠시나마 당황하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자신들을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그들은 서로 멋쩍게 웃는다.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이 똑같이 경험한 것은 죽음과 파괴에 대한 공포,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들 모두 오월의 비극적 상흔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상주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었다. 어제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따로 격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를 감안해서 유추해보면, 5·18에 대한 진실규명이 그 접근조차 금기시되던 상황의 은유로 읽힌다. 끝내 상주를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나’의 뇌리속에 자꾸만 상처 입은 한 마리 들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햇빛도 들지 않는 산속 기도원의 음침한 골방에 틀어박혀 벌거벗은 채 제 손으로 살가죽을 저며내고 있는 상주가 그의 일기장 속에 써놓았던 자폐적 독백의 언어(기록)다. 어디에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어느 흙더미 속에 산 채로 묻어놓고 너 홀로 돌아오는 것이냐. 

   그러므로 그날 새벽 상주의 집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명부가 아니래도 아벨이다. 따라서 상주를 미치게 한 것은 “단순히 명부의 죽음이 아니라 형제 아벨로 표상되는, 명부와 같은 광주 사람들이 저항 끝에 죽임을 당하고 있던 그 날 새벽에 뒷방에서 삶을 구걸하고 있었다는, 그 죄의식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쓸쓸한 심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격한 것은 무수히 떠내려오고 있는 죽은 물고기들이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쉴 새 없이 둥둥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들을(그것은 처참하게 죽어간 그 날의 아벨들의 모습을, 끔찍한 형제살해의 기억을 연상케 하는 한 상징이다.) 바라보던 순임이 갑자기 흑,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어쩌면… 어쩌면 말에요. 그건 혹시 사실인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상주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마지막 날 새벽에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식구들이 분명하게 들었다는 말, 하지만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는 말을 순임은 다시금 환기하고 있는 참이다. 

   순임의 말은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학살이 자행되는 공포와 죽음의 상황, 그 속에서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죄의식은 1980년대를 살아온 모든 이의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로 확대된다. 문을 열어 달라는 명부의 다급한 절규를 거절한 이들은 누구인가. 마지막 날 새벽에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목숨을 구걸했던 이들, 즉 카인은 누구인가. 그날에 살아남은 우리를 향한 윤리적 질문을 이 소설은 던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 그것은 질문을 넘어 차라리 심문에 가깝다. 

   임철우는 저 단편「봄날」로부터 장편『봄날』다섯 권의 완성을 보지만,『백년여관』에 이르러 비로소 제주 4·3의 비극과 만난다. 『백년여관』의 서사는 “정체불명의 음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술자인 이진우는 “시간이 없어! 시간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듣고 홀리듯 영도의 갯가 모퉁이에 혼자 불쑥 돌출해 서 있는 해묵은 왜식 목조 적산 가옥 한 채. 그리고 그 집 앞 흐릿한 골목 어귀에 내걸린 간판 하나, 백년여관을 떠올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다.

   『백년여관』의 주요 인물은 5・18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 제주 4・3, 베트남전 등의 사건과 관련된다. 백년여관은 이러한 각 사건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자력의 공간이다. 특히 백년여관을 운영하는 주인 강복수의 가족은 제주 4・3과 직접 관련된다. 이진우의 첫 번째 환청이 제주 4・3 특별법안이 가결된 1999년 12월 16일에 발생했다는 점은 이진우를 비롯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환청과 연결하면 제주 4・3 특별법안 가결이 소설 속 각각의 환청이 발생하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을 지으면 “시간이 없어”는 시간 곧 때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 환청이 계기가 되어 이진우는 영도로 향한다. 

   백년여관의 또 다른 손님인 김요안도 “돌아와! 이젠 때가 되었다!”라는 환청이 계기가 되어 40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영도로 돌아온다.(101쪽) 이들은 “그들을 부르는 소리” 즉 “무엇인가로부터 똑같이 호출되어” 백년여관에 이르렀다. 영도의 무당인 조천댁 또한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렇듯 ‘시간이 없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백년여관』 속 각 인물에게 행위의 동인으로 작동한다. 한국현대사에서 제주 4・3은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4・3은 말할 수 없음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제주 4・3만이 아니다. 이 사건의 토대 전환은 그와 유사한 사건들을 재현의 차원으로 함께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하니 소설 속 인물들의 저 “시간이 없다”는 외침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혹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외부에서 주어진 가능성(정치적 혹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힘입은 것이다. 

   그런데 소설 『백년여관』에서 ‘영도’ 라는 공간 혹은 ‘백년여관’이라는 장소는 어떤 의미인가. 서술자 이진우에게 영도와 백년여관은 ‘케이’(k,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죽은 임철우의 친구 故 박효선)의 장소이다. 영도는 케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으로서 케이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어느 해 가을 이진우와 케이는 함께 이 섬을 우연히 찾아가 묵은 적이 있다. 케이가 암 선고를 받고 보름 정도 종적을 감추었을 때 머물렀으리라 추정되는 곳 또한 영도이다. 이진우에게 이러한 영도는 케이를 환기하는 장소다. 하지만 그곳에 케이는 없다. 영도의 백년여관에서 이진우는 케이가 아닌 다른 이들을 만난다. 그중에는 이진우와의 경험을 공유한 양순옥이 있다. 양순옥은 케이를 대신하여 이진우의 고백을 듣는다. 즉 영도를 찾아간 이진우는 케이에게 해야 할 말을 결국 순옥에게 한다. 이진우가 고백을 하는 대상은 케이가 아닌 순옥이다. 

   『백년여관』은 이진우와 케이의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인물들의 서사로 확대된다. 그런데 목소리의 모호성은 영도 혹은 백년여관이라는 장소의 특성과 맞물린다. 프롤로그에서 영도는 “현재도 과거도 아니고 낮도 밤도 아닌, 미망과 백일몽이 지배하는 허허한 중음(中陰)의 영토”라고 소개된다. 중음은 『백년여관』의 세계 혹은 시공간의 특성을 함축하는 은유다. 원래 중음(中陰, Antrabhara)이란 사람이 죽은 뒤 왕생 윤회하기까지의 시간 곧 49일, 혹은 이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를 가리키는 불교의 용어다. 불교의 중음 혹은 중유는 신체 혹은 시간의 개념이다. 이를 세계 혹은 공간 개념으로 변용하면 중음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동거하는 장소가 된다. 중간 신체 혹은 중간 시간보다 중간 세계라고 할 때 삶과 죽음의 관계와 공존의 성격은 더 부각된다. 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이진우의 세계는 전형적인 중음이라 할 수 있다. 이진우가 빨려 들어간 영도 또한 중음 그 자체의 장소이다.

   영도의 백년여관에는 미지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함께 거주한다. 이러한 존재는 곧 죽은 자들이다. 허미자는 어렴풋이 이들의 존재와 시선, “은밀한 숨소리와 입김, 낮게 읊조리는 두런거림”을 느끼고 그로부터 비롯된 “매우 특별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체험”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 숲을 떠나지 않는 것인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미지의 존재’는 설명 가능한 세계에 끼어든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중음의 장소인 백년여관은 탈구 혹은 이접의 장소의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백년여관의 이러한 장소성으로 인해 이진우의 서사가 케이와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낯설고 이질적인 미지의 다른 인물과 연결되고 또 그들의 서사로 확대될 수 있다. 

   소설에서 이진우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와 각각의 사건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지만, 이는 동시에 5・18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상징화된다. 문제는 이것이 보여주는 자폐적 양상에 있다. 이를 드러내는 것이 ‘신지’의 자폐증인데, 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획득한 이름으로서의 5・18의 상징화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임철우는 『백년여관』 쓰기를 통해서도 5・18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이 남긴 고통을 온전히 허구화하거나 상징화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20). 신지의 자폐는 『백년여관』 전체 서사의 구조와도 맞물린다. 전체의 서사 구조 또한 자폐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 그것은 결코 환상도 허구의 이름도 아니다.” 이는 『백년여관』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프롤로그는 이진우가 집에 돌아가 써야겠다고 생각한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처럼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동일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맞물림은 서사의 시간을 순환하는 고리 즉 원환 속에 가둔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의 서사는 시간의 원환에 갇혀 순환한다. 이진우는 이 시간의 사이클 속에 갇힌다. 그는 곧 잔여로서의 목소리를 쓰는 원환의 시간에 갇힌 시지프스이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 속 다양한 사건들 또한 반복되는 원환의 틀에 유폐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데리다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비극적인 것의 필연적 반복성”이다. 즉 『백년여관』 속에서 다루어진 역사적 사건과 당시 그들이 겪은 고통은 고유한 일회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외상(trauma)이 되는 순간, 이는 반복 가능한 일회적 사건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고유한 시간이지만 달력이라는 틀을 상정하는 순간 그 날짜는 해마다 반복해서 돌아온다. 이는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의 “유령 같은 귀환”이다. 데리다에게는 이와 같은 유령적 귀환을 통해서 기억은 탈구의 가능성을 얻는다. 

   소설 『백년여관』에서도 각 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기억은 이러한 방식으로 귀환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사건이 서로 접합하지만 귀환은 원환의 시간 속에서 지속적 재래를 통해 반복된다. 즉 『백년여관』의 시간 속에서 계열체 속 비극은 되풀이하여 발생한다. 원환에 갇힌 시간은 흐르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이를 통해 과거는 현재가 된다. 즉 『백년여관』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된다. 동일한 비극적 사건이 부단히 재래하는 역사, 이것이 『백년여관』의 시간이요, 임철우가 백 년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요, 국가폭력 이후에도 여전한 통증으로 재현되고 있는 ‘이후’의 소설이다.



4. 공선옥 5·18 소설들의 성취와 한계

                         

   우리가 사진기나 캠코더 등으로 어떤 순간을 담고자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이미지를 통해 당시의 상황이나 느낌과 같은 배경, 즉 그와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21) 공선옥 중편소설「은주의 영화」(2019)에서 서술자 ‘나’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영화관엘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두 번째로 아버지와 영화관에 갔을 때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영화를 보고 짜장면집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짜장면을 시켜 먹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75쪽) 

   그렇게 아버지는 은주에게 캠코더 하나를 사준다. 아버지에게 영화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인 아직 어린 딸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관이 있는 길모퉁이 찻집에서 딸아이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이고 자신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탄성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딱 저런 길모퉁이였다, 내가 너희 엄마를 처음 본 게. 나는 저런 길모퉁이에서 파란 제복을 입고 호각을 불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길을 건너오던 너희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가더라. 예뻐서 호각 소리를 더 크게 냈다. 너희 엄마가 한 번 더 돌아볼까 봐, 가슴을 졸였지. 정말로 돌아보더라. 숨이 멎을 뻔했지.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74-75쪽)

   아버지에게 영화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연인을 바라보던 맨 처음, 그래서 곧 숨이 멎을 것 같던 장소와 시각, 무엇보다 이미지의 세계다. 그것은 막연한 추상이라기보다 그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딸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가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라고 했을 때, 저런 영화란 또 무엇인가. 둘이서 본 영화는 중국의 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지아장커(賈樟柯) 감독의 영화 ‘삼협호인’(三峽好人)이다. 영화는, 중국 장강의 대역사인 삼협댐 공사를 배경으로 삼협 위에서 펼쳐지는 두 쌍의 부부, 한산밍 부부와 쉔홍 부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한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과 욕망을 반영하며 이를 그 내용과 형식적 차원에서 구조화한다.22)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처럼 엉망이 되어버리기 이전의 세계, 곧 자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화양연화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은주의 영화를 통해 재현해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재 혹은 상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바꿈함으로써 얼마간의 치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아내를 두들겨 팬 나머지 아내가 집을 나갔고, 아내를 찾으러 다니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잘렸고, 병에 걸려 골골거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돈 없는 생활의 공포를 견디느라 은주에게 거친 언사를 자주 퍼붓는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주 역시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했던 순간이 내 영화의 시작이었다.”(75쪽)라고 말하고 있다. 은주의 진술 역시 아버지의 욕망과 닮아있다. 은주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동기의 이면에는 어쨌거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는 감정과 또 그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지나온 삶을 변모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23) 

   대학에 떨어진 선물이라고 아버지는 딸에게 캠코더 하나를 사준다. 그러나 소설의 서술자 은주에게 영화의 길은 요원했다. 다만 골방에 틀어박혀 수 없이 돌려본 영상물 하나가 그녀의 내부에 심연을 만든다. 그녀는 매번 이 영상물을 보면서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상한가. 그 영상물의 첫 장면 때문일 것인데, 영상물의 첫 장면은 이모가,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어. 하늘의 해, 닭백숙이 끓고 있는 솥,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는 나, 양손에 닭 날개를 잡고 햇빛 속을 뚫고 걸어오는 아버지, 장독, 나뭇잎, 흙도 다 뜨거워서 나는 숨을 다 못 쉴 지경이 되어부렀단다.”(76쪽)

   그래서「은주의 영화」는 저 뜨거웠던 1980년 광주의 5월을 기억에서 복원해 내고 있는 소설이다. 은주는, “나의 이모가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라든가, 이모가 세 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든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고 집을 나갔는데 우리 아버지 오중철 씨가 집 나간 우리 엄마 이상순 씨를 찾으러 갔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잘린 이야기 같은 것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76쪽) 결국 소설은, 곧 영화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고 말하는 이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우선은 카메라 밖에서 이모를 관찰한다. 

   근대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관찰자이다. 관찰자가 되는 인간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자기 자신처럼 객관화한다. 관찰한다는 것은 거리, 탈육체화를 포괄한다. 관찰하는 자는 시간의 강을 넘어선 사람이다.24) ‘5·18’이라는 비극적 드라마에는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관찰자가 등장한다. 가해자나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과잉의 혐의가 있다. 그들의 기억에는 망각과 왜곡의 흔적이 드러난다. 관찰자는 그런 쪽에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들의 회상기억은 재생의 수동적인 성찰이 아니라 새로운 지각의 생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옥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은주의 영화」에서 서술자 ‘나’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인물들과의 감정적 동일시를 택한다. 그러다 보니 공선옥의 5·18 소설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만 두드러지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선과 악이라는 규정 외에 그들을 매개할 공간이 부재하게 된다. 독자가 인물들의 그 마음과 선택한 행위에 공감할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공선옥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 혹은 결핍상황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에게 차별을 당하고 매를 맞는 아이들이 자주 나온다. 물론 대체로 그의 소설 속 아버지들은 지나칠 만큼 술을 좋아하고 아내를 두들겨 팬다.「순수한 사람」(2019)에서도 중학교 2학년인 ‘영호’는 엄마와 이혼하고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아버지’를 상대로 양육비 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그는 가난한 집 아이들만 골라서 깐죽대는 민수와 교실에서 싸우다가 담임한테 걸렸는데 싸움의 진짜 원인을 민수가 제공했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담임에게서 오히려 더 많은 야단을 맞는다. 그 원인은 단지 “돈 때문”(22쪽)이라고 생각한다.「은주의 영화」속 인물 ‘철규’도 비슷한 사정이다. 김학수와 축구를 하다가 자꾸만 태클을 거는 김학수가 얄미워 김학수의 다리를 걸게 되고 그가 넘어져 얼굴이 긁히자 선생님은 그 까닭을 묻는다. 사정을 이야기하는 철규에게 선생님은 대뜸 “니 아부지 뭐해?”(117쪽) 하고 묻는다. ‘돌아가셨다’는 철규의 대답에 선생님은 마음 놓고 철규를 모욕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 구도는 선명하게 제시되지만, 아니 피해자의 억울함은 부각 되지만 그뿐, 복합적이며 다양한 내면과 인물들 사이의 차이 대신 단선적인 피해자 의식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작가 공선옥의 정치적 무의식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정치적이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의 담론이며, 무의식이란 모순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사적인 반응”25) 이라고 말한다. 공선옥은 등단작인 중편소설「씨앗불」(1991)에서부터 그 참혹했던 봄날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의 강박에 시달리며 날마다 제 몸에 화형식을 하는 꿈을 꾸는 인물이 그 ‘씨앗불’의 힘으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으며, 그렇게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남편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예각적으로 그린다. 공선옥의 소설 내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에 위치한다. 

   소설「은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밖에서 이모를 관찰하던 은주는 이제 카메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모 자신이 된다. 따라서 소설의 이야기는 이제 이모의 시점으로 그녀가 왜, 어떻게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독자를 향해 말을 건다. 실로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많은 경우 다리를 전다. 「목마른 계절」의 ‘미스 조’가 그러하거니와「은주의 영화」에 나오는 은주 이모도 그러하다. 5·18 때, 군인들이 광주 도심 외곽으로 일시 퇴각하면서 오인 사격으로 같은 군인들끼리 사격을 하다 몇이 죽고 몇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자, “뿔다구가 좀 났는지 마을의 아무 곳에나 총질을 해대는 바람에 아이들이 죽고 장독아지도 깨지고 닭 몇 마리 개새끼 몇 마리도 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심적 타격을 입은 모양으로, 그때 사춘기 소녀였던 이모는 충격을 먹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78쪽)이다. 시내에만 안 나가면 군인들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줄 알았던 이모는,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가, 개가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것을 목도한다. 닭들이 살점이 너덜너덜한 채로 도망치는 것을 본다. 개한테 총을 쏜 군인이 이모를 돌아보고 개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그 순간, 이모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이모는 열일곱 살 여름부터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런데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이모의 경우도 은주와 다를 것 없이 아버지가 엄마를 두들겨 패서 집을 나가고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얘기 낳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5·18을 이야기하는 공선옥의 소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패턴의 반복, 엄마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은, 곧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의 억압적인 폭력과 5·18이라는 국가폭력(가부장적 국가)을 등치시키는 작가의 무의식의 산물이다.「은주의 영화」에서 은주의 아버지는 경찰인데 그도 그의 아내를 두들겨 팬다.「목숨」(창비, 1992)에서도 아버지는 “천장에서 늘어진 전등줄을 잡아당겨 엄마의 뺨을 후려 갈긴다.”(124쪽)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의하면, “순 오입쟁이인데다 독사같은 의처증 환자”(124쪽)였다. 다만 공선옥 소설의 한 패턴으로 굳어지다시피 한 가정폭력, 아내 구타의 원인을 군사독재 폭력 문화의 산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는, 여성에 대한 억압은 계급 내지 민족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남성 지배의 문제, 여성과 남성 간 권력 관계의 산물26)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공선옥은 그의 소설 대부분에서 여성성을 넘어선 보편적 윤리로서의 모성을 통하여 상처의 치유와 연대의 모색이라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폭력과 무장저항이라는 5․18 소설의 담론에서 타자화되고 분열된 ‘나’의 파괴된 삶이란 역사의 폭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자매애(Sisterhood) 혹은 모성성을 통해 그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것은 다시 제임슨의 말처럼 모순적인 현실과 역사를 살아내기 위한 무의식적이고 필사적인 반응(무의식)이다. 다만 그것은 자칫 모성에 대한 강박일 수도 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모성이라는 논리는 여성 문제의 하나로 다루어야 할 어머니의 문제를 역사 담론 속에 지워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27), 억압의 시간들을 모호하게 통합하고 여성을 본질주의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환원주의를 반복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28)도 사실이다. 

   공선옥의 모성성에 대한 집착이 하층계급에게서 일상을 빼앗고 그들을 부랑의 길로 내모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목소리29)라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배려와 보살핌의 원리를 여성다움의 중요한 가치로 내면화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부분의 가부장제 문화권에서 자기희생적인 여성을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선옥의 소설 내 여성 인물들은 가정폭력, 아내 구타의 구조적 뿌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작가 공선옥의 그러한 문학적 태도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는 점이다. 폭력의 근원을 헤집어 메스를 대신 대신 모성성으로 껴안음으로써 미봉의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그의 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프로이트는 자책감을 우울증의 결정적 특징으로 취급한다. 그에 따르면 가버린 자와의 동일시는 상실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그러한 동일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데, 이러한 사람은 가버린 사람의 일부를 취해 자기 것으로 삼되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함께 취함으로써 일종의 자기 처벌로서의 죄의식 상태에 빠지는 우울증을 앓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한다.4) 

   공선옥의 5·18 소설 내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책감, 자기 처벌로서의 죄의식에 침윤되어 있다. 까닭은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데 있다. 등단작인「씨앗불」의 ‘위준’이 그러하고, 「목마른 계절」에서 죽은 애인(그는 5·18때 시민군이었다)의 뒤를 따라 자살한 ‘미스 조’가 그러하고,「목숨」의 ‘재호’가 그러하다.「떠도는 나무」의 ‘남편’이 그러하고,「흰달」의 순의 ‘남편’이 또한 그러하다. 

   사실 공선옥의 소설뿐 아니라 많은 5·18 소설들에서 그러한 인물을 볼 수 있는데, 참혹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이후 생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트라우마인 까닭에 그것 자체를 문제 삼을 건 없겠다. 모든 애도 과정에는, 홀로 남겨지고 상실과 타협하여 어쩔 수 없이 삶을 새롭게 꾸려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내재되어 있다. 문제는, 상실의 체험이 강렬할수록, 그것이 그것과 관련된 공격성이 억압될수록, 미처 다루지 못한 갈등이 많을수록, 갈등을 감내할 수 있는 자아의 능력이 부족할수록 우울의 반응은 더욱 병리적으로 나타난다.30)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공선옥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일상이 고통스러우며 더러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부재와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써 죄의식의 과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동일시 속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험은, 자신이 걱정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바로 자기 자신이 무너진다는 점이다.31) 특히 「목마른 계절」에서 죽은 애인의 뒤를 따라 자살한 ‘미스 조’가 그러한데, 5·18때 시민군이었던 그녀의 애인의 자살은 그렇다 하더라도, 돌보아야 할 남동생이 둘이나 있는 ‘미스 조’가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32)”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설정인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주의 영화」2부는 5·18 때 죽은 ‘철규’라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철규는 이모가 세 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였다. 은주를 업어주었던 아이, 그러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다. 은주는 철규의 엄마, 박선자를 만나 철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필름에 담는다. 옆에는 박선자의 친구이면서 은주의 이모인 이상희가 거든다. 박선자의 남편은 5·18때 역전 세차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직장 사람들이 군인들한테 잡혀가고 난 다음날 어떻게 된 건지 가본다고 집을 나간 뒤로 10년 넘게 소식이 없다. 그러니까 철규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남편은 ‘행방불명자’가 된 것이다. 철규가 그보다 어린 은주를 업어주고 노래해주고 춤춰주었다는 것을 은주는 이모와 이모의 친구 입을 통해 알게 된다. 

   은주의 카메라에서는 은주의 입을 빌린 철규의 목소리가 간단없이 튀어나오고, 철규의 엄마는 까무라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죽은 아들 철규에게 용서를 구한다. “철규야, 이 엄마를 용서해라.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버려라. 나도 인자부터 너를 잊어버릴 테다.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갈 거다. 너도 다 털어놓고 훨훨 날아가거라.”(122쪽)

   그런데 그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선자의, “그 순간까지도 속을 못 차리고 친구들하고 스트레스도 풀 겸 꽃놀이를 다녀올 테니 엄마 없는 동안 우유하고 빵을 사 먹으라고 돈을 줬네, 미친년이 밥해줄 생각은 안 하고 돈을 줬어.”(123쪽)이라는 발화를 통해 그녀의 회한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박선자는, “돈 번다는 핑계 대고 젊은 삭신이 애먼 사랑에 눈이 멀어 지 새끼가 학교를 가는지 밥을 먹는지 모르고”, 철규는, 자꾸만 시비를 걸고 괴롭히는 학교 친구 김학수와 축구를 하다가 그만 김학수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일이 생긴다. 담임은 그러나 “너는 이대로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가 된다.”(118쪽)는 폭언을 하면서 김학수에게 사과하지 않는 철규를 구타하고 내일 엄마를 학교에 데리고 오라고 위협한다. 그날 엄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철규는 학교 대신 버스를 차고 무등산 자락으로 간다. 마침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조선대학생 이철규를 좇던 경찰의 수런거림과 불빛과 외침에 두려움을 느끼고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다. 이철규도 수원지에서 퉁퉁 부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박선자는 그래서 아들 철규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에 강박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역할을 방기하고 한 여성으로서 욕망에 잠시 눈먼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것은 작가 공선옥의 내면에 자리 잡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설화하는 데 항상 작동하는 도덕적 강박의 무의식이다. 

   한편 은주의 이모 이상희도 그동안 가슴속에 품어두었던 비밀을 풀어놓는다. 박선자가 석 달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때에 이상희는 친구의 아들인 철규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긴다. 이상희는 은주를 업고 철규를 데리고 바다로 여행을 간다. 선창에서 아무 섬에나 가는 배를 탄다. 아이들을 업고 걸리고 섬 가운데로 난 길을 걷고 있는데, 남자 둘이 그들을 따라온다. 이상희는 섬 가운데 소나무 숲으로 끌려가 사내 둘에게 윤간을 당한다. 사내들은 바지를 추켜 올리며 애가 둘이나 있어서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고 선심 쓰듯 말한다. 그때 철규가 나를 살렸다고, 이모는 절규한다.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철규가 은주를 업고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철규는 울지 않았고 은주도 울지 않았어. 나는 아뭇소리 안 했어. 그냥 가만히 있었지, 울지도 않고. 그것이 다여, 자네 안 들어오는 동안 우리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125쪽) 박선자를 외려 다독인다.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의 확인, 생명에 대한 사랑의 강조, 희망적인 결말의 화해와 용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착시를 불러온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모순과 대면하고 있는 이들 여성 인물들의 부재와 결핍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비극, 5․18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고 그 해결책이 ‘어쨌거나 살아서 견뎌내야 한다.’ 는 것만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공선옥의 한계요, 5·18 소설의 한계다. 그래서 소설「은주의 영화」는 다음처럼 다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은주는 아버지의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라는 발화로부터 시작하여, 철규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을 은주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오랫동안, 철규는 카메라 밖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이 너무 단단해서, 뭐라고 말을 붙여볼 수조차 없는 그런 침묵이었다. 오랜 침묵의 뒤에 소년 철규는 카메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 영화가 소년 철규의 그 오랜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135쪽)

   공선옥 소설에서 아버지 혹은 남자는 대부분 자신의 일에서 실패하고,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시며 급기야 아내를 두들겨 팬다. 여인들은 다리를 절고, 아내들은 삶의 신산함에 몸서리를 친다. 아이들은 돈 때문에 학교에서 조롱을 받거나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다. 그래도 여인 혹은 아내들은 그 모든 것을 껴안고, 무엇보다 살아내는 것이 다행이고 중요하다고 위로하거나 다짐한다. 물론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장면들을 통해 여성성을 구현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그것은 큰 잘못을 범한 것으로 스스로를 단죄한다. 하나의 패턴이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 선과 악의 선명한, 그러나 지극히 단순하게 제시되는 이 윤리적 패턴은 작가의 광주체험에 그 기원이 있는 듯 보인다. 실로 ‘광주’와 ‘모성’은 공선옥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축이다. 그것은 공선옥 소설 인물들의 상처의 근원이며 또한 삶의 원동력이다33).

   문제는 광주를 해석하는 틀도 그렇고, 모성을 해석하는 관점도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는 점이다. 5·18을 제재로 한 소설들에서 공선옥은 한결같이 국가폭력의 상흔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대체로 남성 인물들이 그러한데, 그들은 그날 동지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혼자서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의 과잉으로 남은 삶을 스스로 해치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1980년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몸서리치는 광기의 폭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분노의 감정을 지녔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했고, 그것에 대항해 총을 들었던 이들 중 또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몸을 상하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결같지는 않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훨씬 복잡한 마음과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이해타산적이다. 우연한 고초나 작은 참여를 크나큰 공으로 치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너무나 단순하게 정형화되어 있다. 국가폭력을 대하는 인물들에는 두려움보다는 정의로움이 넘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들은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강박 되어 있다. 도무지 살아남았다는 데에 안도하는 인물이 없다. 어떻게 모두가 한결같이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역부족이라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공선옥 소설에서 모성성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인물들의 상흔을 치유하고 화해로 나아가는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사태의 일시적 봉합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모성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자신이 잉태한 개체의 보호자로서의 본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확장되었을 때 타인에 대한 이타심, 연민, 연대의 감정으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혹은 어머니에게 부과된 희생과 헌신의 윤리가 그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던 기왕의 남성 중심적 지배 논리의 재생산에 부지불식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통찰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공선옥의 모성성은 가족에 대한 헌신에서 나아가 타자를 끌어안는 일종의 박애주의의 면모로 확장된다. 다만 그러한 모성성이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의 윤리로 강제될 때, 아니라도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되지 못할 때 그것은 가짜라는 것이다. 물론 여성에게서 본질적인 모성을 떼어내라고, 그것이 보다 주체적인 개인의 삶이라고 주장할 것은 없다. 모성성은 여전히 이 세계의 냉혹한 차가움을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모성은 자연이 주는 한계 지워진 삶을 그 자체로 독특한 향유의 기회이자 유일무이한 선물로 맞이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앓을 제시34)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볼 때 모성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은 타인들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결단35)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Kristeva)의 논의를 빌려 말하자면, 공선옥의 여성들은 ‘타자를 품고 있는 주체’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문제 삼는 것은, 공선옥 소설과 그의 소설적 태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의 상흔 혹은 죄의식을 갖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이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성 인물들의 모성성 역시 그들의 상흔을 완전하게 치유하지 못하며, 따라서 진정한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왜 5·18의 고통과 상흔은 ‘광주’를 넘어 모든 지역에서 그들이 아닌 우리의 고통과 상처로서 공감하지 못하고 불편한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일까?”36)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5. 문학의 윤리- 타자를 향하여


   홀로코스트가 도덕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조건과 과정을 분석한 제프리 알렉산더(Jeffrey Alexander)는 사건 자체로부터 충격, 공포, 정신적 장애 등의 외상이 유발된다는 심리학적 접근의 자연주의적 인식론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사건의 외상적 성격이 재현 과정을 통해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문화사회학적 관점을 제안한다. 나아가 고통의 성격, 희생자와 가해자에 대한 재현 방식이 일반 시민들과 희생자와의 일체감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37) 

   문학은 역사적 기억 속의 인간 존재의 고통을 말함으로써 역사 속의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도대체 왜 우리는 거기에서 고통을 느껴야 했으며, 나아가 그것은 왜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지속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데 유용한 텍스트다. 까닭에 역사와 문학은 상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5·18 소설에서 역사적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구멍 뚫린 역사적 기록의 빈 곳을 채우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적인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미래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즉 역사적 고통에 대해 5·18 소설이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의 해결이나 제거가 아니라 고통을 주었던 부정적 역사와의 간격을 지탱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변질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반복해서 겪지 않으려는 눈뜬 성찰이다. 문학은 고통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역사적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지속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이것이 가장 ‘사실’적이지 못한 문학(문학적 상상력)이 역사적 기억과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에도 말해온 것이며, 앞으로도 말해야 할 것이다.38)

   물론 미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잘못된 과거가 만들어 놓은 뒤틀린 매듭을 올바로 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가려 해도 매듭은 더욱 꼬이기 마련이다.39)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상당하다.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에는 피해자의 존재, 행동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폭력은 혼돈의 위협을 이끌어 내며, 그 혼돈의 위협 속에서 인간 본래의 정체성을 파괴하게 한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피해자들의 온전한 치유와 진정한 역사적 화해의 길이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가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사의 문제로 인하여 오랫동안 내면의 고통으로 고착화된 트라우마를 치유의 프로그램을 통한 완전 치유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야 과거사 청산은 완성될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궁극적 목적은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 발전적 미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40) 라는 주장은 온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치유의 대상에 가해자는 제외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90년에 발표된 이순원 단편소설「얼굴」은 광주 청문회가 방영되었던 시기를 배경으로 진압군으로 참가한 7공수 출신의 은행원 ‘김주호’의 고통과 죄의식,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그리고 있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소설이다. 그것은 작가 이순원이 강원도 출신이면서 서울에 거주하던, 비교적 객관적으로 광주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까닭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가 인간 개인끼리 ‘소통’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평등을 강조한다. 랑시에르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형이상학”에 내재한 정치(politics)이다. 이런 정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 개인의 평등 문제를 분자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가난한 자나 노동자가 요구하는 평등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존재론적 평등이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식 너머에서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개념인 공감(compassion)과 연결시킨다.41) 

   다만 역사적 폭력을 서사화한 소설적 재현에서 “누구의 기억과 감정을 들을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정동의 이행 속에서 확인할 것인지 구별해야 하”며, “피해자, 희생자의 고통이 어떻게 전염, 접속, 공유하며 고통의 연대를 이루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좀더 섬세한 말의 배치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42)는 지적은 경청해야 옳다. 

   역사적 폭력을 서사화한 문학은 ‘고통’의 기록이자 ‘고통하는’ 장치라는 것, 고통은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의 양태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감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공통성을 발견한 기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다루었던 김훈과 정찬과 임철우 그리고 공선옥 소설들은 역사적 폭력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과 공감하면서 사건 ‘이후’의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를 분별하고 있는 소설들이다. 그것은 문학의 책임 윤리가 자기 고통을 넘어서서 타인의 고통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에토스, 곧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고 증언하고 연대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문학적 태도(관점)에 따른 얼마간의 차이 역시 분명하지만.

  • 1) 육사 교정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 등 항일지사 5인의 흉상 이전과 광주 출신의 의열단원으로 항일 독립지사이며 중국이 추앙하는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메카시즘적 비난이 2023년 내내 계속되었다.
  • 2) 여야 정치권에서는 5·18 국립묘역을 참배하고 헌법 전문 수록 등의 구두선을 남발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5·18에 대한 부정과 폄훼를 지속하고 있고 그것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징후라 할 수 있다.
  • 3) 변학수,「문학과 기억」,『독일어문학 제15권 제3호, 한국독일어문학회, 2007, 5쪽.
  • 4) 손정수,「진행 중인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도입되는 방식들」,『현대소설연구』제66호, 현대소설학회, 2017, 187쪽.
  • 5)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문서고와 증인,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3-18쪽.
  • 6) 김명훈,「‘학살은 재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역사화하기」,『동악어문학』제79집, 동악어문학회, 2019,16쪽.
  • 7) 진정석,「고통의 환기와 구원의 모색 : 정찬의『아늑한 길』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제9권 1호, 문학과 지성사, 1996, 330쪽. 
  • 8) 오카 마리,「우리는 누구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것인가」,『당대비평』제17권, 생각의 나무, 2001, 184쪽.
  • 9) 진정석,「고통의 환기와 구원의 모색 : 정찬의『아늑한 길』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제9권 1호, 문학과 지성사, 1996, 335쪽. 
  • 10) 심영의,「살아남음과 살아있음의 간극 : 5·18소설들의 경우」,『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6, 166쪽.
  • 11) 심영의,『5·18과 문학적 파편들』, 한국문화사, 2016, 118쪽.
  • 12) 방민호,「광주항쟁의 소설화」, 『5·18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2006, 208쪽.
  • 13) 김현,『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3, 361쪽.
  • 14) 정명중,「‘5월’의 재구성성과 방식에 대한 연구」,『5·18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 2006, 297쪽.
  • 15) 그는 난징학살 때 일본 군인의 성폭행으로 태어난 중국 여인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정체(신원)를 알수 없으나 그의 생물학적 친부는 일본 군인인 것. 그가 피해자면서 가해자라는 인식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고백이다.
  • 16) 모치다 유키오,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기억과 망각』, 타나카 히로시 외, 이규수 역, 31-32쪽에서 재인용.
  • 17)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최현정 옮김, 플래닛, 2007, 17쪽.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회상, 이미지, 생각, 지각, 꿈, 플래시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위 ‘사건에 대한 재경험’으로 심각한 심리적 고통과 생리적 반응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 18) 우미영,「목소리, 죽은 자들의 비명과 5·18의 이름: 임철우의『백년여관』을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4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 55쪽.
  • 19) 임철우,「봄날」, 한승원 외,『일어서는 땅』, 인동, 1987, 187쪽. 
  • 20) 우미영,「목소리, 죽은 자들의 비명과 5·18의 이름: 임철우의『백년여관』을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4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 77쪽.
  • 21) 남수영,『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 새물결, 2008, 11쪽.
  • 22) 이희승,「정주하는 모성의 기호들」,『언론과학연구』제13권 1호, 2013, 360쪽.
  • 23) 보리스 시륄니크 (Boris Cyrulnik),『관계』, 정재권 옮김, 궁리, 2009, 192쪽.
  • 24)알아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기억의 공간』, 벽학수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3, 120-121쪽.
  • 25)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정치적 무의식-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 이경덕․서강목 옮김, 민음사, 2015, 397쪽.
  • 26) 정희진,『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6, 136쪽.
  • 27) 김경희, 한국 현대소설의 모성성 연구, 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131쪽.
  • 28) 김은하,「90년대 여성소설의 세가지 유형」, 《창비》 27권 4호, 1999, 242쪽.
  • 29) 김은하, 같은 글, 260쪽.
  • 30)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애도』, 채기화 옮김, 궁리, 2007, 101쪽.
  • 31)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 같은 글, 110쪽.
  • 32)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 같은 글, 13쪽.
  • 33) 황도경,「세 개의 불, 두 개의 알리바이-공선옥 론」,《실천문학》2000.2, 68쪽.
  • 34) 이경아,「모성에 대한 여성주의 재사유」,『한국여성철학』제11권, 한국여성철학회, 2009,190쪽.
  • 35) 이경아, 같은 글, 194쪽.
  • 36) 박선웅·김수련,「5·18민주화운동의 서사적 재현과 문화적 외상의 한계」,『문화와 사회』제25권, 2017,119쪽.
  • 37) 박선웅·김수련, 같은 글, 120쪽에서 재인용.
  • 38) 한순미,「고통, 말할 수 없는 것: 역사적 기억에 대해 문학은 말할 수 있는가」,『호남문화연구』 45권,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9, 93-94쪽.
  • 39) 오수성,『국가폭력과 트라우마』,『민주주의와 인권』제13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3, 5쪽.
  • 40) 엄찬호,「과거사 청산과 역사의 치유」,『인문과학연구』제33권,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263쪽.
  • 41) 이택광,「문학과 정치: 랑시에르의 문학론」,『새한영어영문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새한영어영문학회, 2010, 182쪽.
  • 42) 박숙자,「5·18 ‘이후’의 문학: 고통과 책임:『소년이 온다』(한강)를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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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최진석 요절의 윤리와 미학 ― 차도하와 김희준,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로부터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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