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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창작21 | 2024년 여름호(제65호)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소설들 ― 2024년 주요 신춘문예 당선작 읽기

심영의 문학평론, 소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5·18광주민중항쟁소설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2020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소설집 『그날들』, 장편소설 『사랑의 흔적』, 『오늘의 기분』, 『옌안의 노래』 평론집 『소설적 상상력과 젠더 정치학』, 『5·18, 그리고 아포리아』 문화연구서 『광주 100년-시장과 마을과 거리의 문화사』등을 펴냈다. 2014년 아르코 창작기금과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기금, 2023년 제2회 ‘광주 박선홍 학술상’을 수상했다. 조선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오랫동안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등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을 강의했다.

   지난 계절에는 2024년 주요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었다. 마침 한국연출가협회에서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 8편을 대상으로 제33회 대한민국 신춘문예 페스티벌(공연)을 연다는 소식도 있었다. 연출가협회에서 선정한 작품은 강원일보, 경상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당선작과 한국극작가협회에서 별도로 선정한 작품 등이라고 했다. 

   나는 주요 신문의 당선작들, 서울신문, 문화일보, 세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었다. 신춘문예 당선소설들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면서 소설의 새로운 감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한 자료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선을 목적으로 오랜 훈련을 거듭한 작품들이라 대체로 새로움과 익숙함의 경계에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한국 문단의 오랜 경향성이기도 한데, 주요 신문사 소설 당선자의 성별 분포를 보면 여성이 더 많고1), 90년대 문학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공동체에 대한 관심에서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동 현상”2)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대 첨예한 문제의식을 서사화하는 소설이(비록 단편이고 신춘문예 당선작이긴 하나) 왜소해진 반면 자신만의 세계 내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일상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중요하겠고, 이 우려는 작가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많은 것과는 물론 상관없는 일이겠다. 

   벌써 몇 년 전에 임철우 소설 『백년여관』(문학동네, 2017)의 한 대목에서, 출판사 근처 한 카페, 대부분 이삼십 대의 젊고 낯선 얼굴들- 출판사의 편집자, 신문사의 문학 담당 기자들은 “역사나 정치의식의 과잉이라는 것도 한참 지난 시절의 이야기”(20쪽)라거나, “요즘 젊은 친구들 사전엔 ‘우리’라는 어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만 있다고, ‘우리’니 혹은 공유해야 할 무슨 엄숙한 가치니 따위는 말짱 헛것이라고, 우리 세대한테 현실이란 건 컴퓨터 게임 배경만큼도 리얼하지 않다”(20-21쪽)는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들은 “앞세대한테 빚진 것 없다고,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21쪽)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엄숙한 가치 따위는 말짱 헛것이다.”(21쪽)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든 국가폭력이든 혹은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질병이든 어떠한 재난이라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균질적이지 않지만, 또 누구든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 보면 이제 소설이 더 이상 꿈꾸는 장르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세상과 맞서지 못하거나 맞서지 않는, 자아 속으로만 침잠하는 문학을 건강하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긴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선거가 무산되거나 학생회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는데, 그 까닭 중 하나가 학생들이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스펙(specification) 쌓기에 몰두하다 보니 관심이 없다는 것이라 했다. 해마다 총학 주관으로 진행하는 대학 축제가 최정상급 가수를 초청하는 연예인 콘서트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고, 그 비용으로 수억 원씩을 경쟁하듯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광주에서는, 5월 27일은 1980년 신군부의 광포한 폭력에 맞서 싸우던 시민군이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역사적인 날이다. 열흘 동안의 저항이 마침내 무력진압되었던, 5월 항쟁 기념주간 마지막 날이다. 그런데 2024년 5월 27일, 그 전남도청 인근의 어느 사립종합대학교에서는 인기 절정의 가수들을 초청한 대학 축제를 시작했다. 도무지 역사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태가 저러한데, 공동체의 문제나 거대담론을 우리 소설이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문학이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주장은 그 자체로 오류거나 또 다른 억압이기는 하겠다.


관계의 회복과 사랑의 확인 –서울과 문화  


   서울신문 당선작「북바인딩 수업」(이지혜)은 서술자 ‘나-민정’과 그녀의 한 살 많은 사촌 오빠 윤재와의 미묘한 감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민정이 여섯 살 때 아빠가 돌아가신다. 홀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그녀의 엄마가 이모 집에 민정을 맡긴다. 이모부는 이년 간 ‘나’를 맡아 키우면서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윤재와 윤석(윤재의 형)을 대할 때는 태도가 엄격했고, 자녀의 교육과 생활지도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확고했다. 불편한 일이 없지 않았다는 뜻이다. 

   민정과 윤재는 호텔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겪는 마음의 상처라든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기쁨과 좌절 따위 각자에게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서로에게 알리면서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관계가 어색해지고 부담되어 연락이 뜸해졌다. 그런데 윤재로부터 민정이 사는 곳 근처 책방에서 북바인딩(bookbinding, 낱장의 종이를 묶어 책으로 꾸미는 일) 수업을 하게 됐다고 연락이 온다. 이모의 병환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서, 또 자신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으면서 참가자들에게 책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윤재를 바라보는 민정의 마음이 복잡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인물 사이에 자연스레 형성된 연민과 애정이라는 감각을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호텔에 근무하는 민정의 경우 업무규정 탓에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지 못하는 대신 윤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랬듯이 자주 화장품 가게에 들러 매니큐어를 사고 그것을 발톱에 바르는 행위를 통해 윤재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윤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발톱에만 바를 수 있는 매니큐어 같다고 민정은 생각한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이종사촌이 아닌가. 여전히 고루한 관습이 작동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종사촌 간의 사랑은 터부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윤재의 글쓰기나 책 만들기는 책방에 온 사람들이 “그걸 왜 만드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윤재의 ‘북바인딩 수업’이란 일종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윤재의 책 만들기 수업에 참여한 민정이 그의 안내에 따라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도달한 곳은 상처의 치유 혹은 관계의 회복을 통한 사랑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나 그것은 복잡미묘해서 감정인지 신체적 접촉을 통한 감각인지 그 둘인지를 변별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생각하면서 만나기를 원하고 그리워하는 감정과 애정을 기본 감정으로 하는 다양한 층위의 인지적 판단과 정서적 요소, 관계적 양식과 태도가 결합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3) 이 소설의 두 인물이 그러한 것처럼.

   신춘문예 당선소설들의 일종의 패턴을 이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래전부터 문신을 새기는 과정이나(천운영,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바늘」) 광어회를 뜨는 과정(백가흠,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광어」) 혹은 질그릇을 만드는 과정 등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 형태를 만들면서 주제를 형상화해 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더 멀리는 이청준의『서편제』나 이문열의『금시조』와 같은 장편소설이「북바인딩 수업」과 같은 소설구성의 원형으로 여겨질 법하다. 

   문화일보 당선작은「유명한 기름집」(기명진)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경기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연 지 삼십 년도 더 지난 ‘기름집’이라는 공간과 ‘하루’라는 시간을 설정하고, 관절이 굳고 온몸이 통증으로 몸이 아픈 서술자 나(희경)와 아이를 잃은 뒤 조카를 돌보는 한 인물(해수)이 만나는 이야기다. 대학 때 친구였던 ‘해수’는 소설의 서술자 나에게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깨끗하다는 참기름과 들기름을 산 뒤 근처 민물매운탕집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전화를 해왔다. 기껏 참기름 들기름을 사겠다고 먼 곳으로 왕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하던 나는 결국 해수를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십오 년만에 만나게 된다. 매운탕도 먹고 기름도 짜고 무엇보다 근처에 있다는 절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대학 때 해수의 외할아버지가 암에 걸렸는데 그 절에서 새벽마다 예불을 올렸고 일 년 만에 암이 완쾌되었다는 말이 기억났다. 해수와는 십오 년 동안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초중고를 같이 다녔던 주영을 만나 해수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영은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길 때도 울지 않았던 친구였는데 해수의 죽은 아이 이야기를 전하다 눈물을 보였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나를 보고 주영은 내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를 차례로 치르는 동안 나(희경)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과 멀어진 사이 내 소개로 알게 된 해수와 주영은 서로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낸 모양이다. 나는 소외감을 느낀다. 주영을 통해 해수가 인터넷을 통해 호두과자를 만들어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모자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해수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다. 만으로 아직 쉰 살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사이 젊음이 지나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해수는 자신도 기름 짜는 기술을 익혀 기름 가게를 열고 싶다고 말한다. 가게 이름은 ‘서준기름’으로 정해 두었다고. 서준은 해수와 열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그의 형 막내아들로 해수가 돌보고 있다. 헤어지기 전에 해수에게 묻는다. 왜 나한테 기름집을 보여줬는지. 해수는 “친구 중에서 너만 한 눈썰미를 가진 얘가 어딨냐?”고 답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으나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대체 인물의 성 씨 구별이 이름만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소설도 그러한 점에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 ‘희경’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소설을 한참 읽다 보면 희경이 남자고 해수는 여자가 분명한데, 남자인 희경이 참기름과 들기름을 사기 위해 먼 곳까지 걸음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다. 소설을 읽을 때 세 인물, 희경과 해수와 주영 모두 여성 인물인 듯 보였으나 희경이 남자라니, 그럼 희경과 해수는 대학 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으나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또 그들은 모두 이혼을 한 처지라서 오랫동안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무려나 오랜 친구(그것이 이성이든 동성이든)가 각자 상처를 안고 있고, 오랜만에 참기름을 매개로 만나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는 이야기로 읽었다. 미안함의 연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지쳐 오랫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한 무심함? 고맙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애매모호 하기는 하지만(사랑의 정체 자체가 애매모호 하거니와)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사랑해왔다는 것인가? 실로 사랑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설렘, 또는 고통 등의 감정은 ‘당신’이 결코 ‘나’와 동일자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늘 타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이렇게 비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것, 계산 불가능한 것, 통제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4) 

   그렇게 읽고 나면 소설에 대한 독해가 좀더 편안해지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다행인 것은 해수가 기름집을 열겠다는 것으로, 그러니까 자신 앞에 놓인 어려움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 두 인물이 오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의 상처를 위무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 역시 신춘 소설이 갖는 결말의 특징이겠다. 따뜻한 마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긍정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하라는 일종의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다. 


상징을 활용한 주제 제시-세계와 경향


   세계일보 당선작은「붉은 베리야」(유호민)다. ‘붉은 베리야’는 소설의 서술자 가족이 열대식물인 ‘부겐빌레아’를 ‘붉은 베리야’라 부른 데서 가져온 제목이다. 추운 겨울 붉은 것이 꽃처럼 피는데 정작 그것은 꽃이 아닌 꽃받침이고, 가운데에 꽃술처럼 아주 작고 하얀 것이 꽃이다. 서술자 ‘나’의 가족은 다양한 지식을 갖고 여러 책도 펴낸 공대 교수 출신의 그러나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서해안에 가서 바지락죽을 먹고 온다. 마지막 가족여행이다. 

   그해 아빠의 생신 선물을 갈색의 푸들로 샀는데, 까닭은 시간 맞춰 밥을 주려면 머리도 써야 하고 산책을 시키며 운동도 하고 정서 안정에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굳이 ‘초코’라 불렀던 푸들을 데리고 노부부가 산책을 할 때마다 아빠가 초코에 끌려다니다 엄마가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 후 노부부는 바깥에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강아지 대신 화분을 돌보도록 했다. 

   이번에는 아빠가 화분에 물 준 것을 잊어버리고 물을 또 주고, 주고 했다. 화분은 썩거나 말라죽거나 했다. 그 와중에 뜻밖에도 빨간 꽃을 탐스럽게 피우는 식물이 있었다. 아빠가 사 들고 온 것으로, 이름이 ‘부겐빌레아’라고 했다. 식구들은 발음하기 까다로운 그 이름 대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붉은 베리야’로 부른다. 아빠의 치매는 느리게 진행되었고 그러다 평온한 척 십 년을 버티던 엄마가 아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언니네 집 근처로 거처를 옮기느라 옆집에 맡기고 간 푸들 ‘초코’도 이년 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안락사시킨 후 아빠에게는 말하지 않았어도 뭔가 통하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빠의 전신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더니 40일간의 입원 끝에 아빠도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49재가 지나 아빠의 마지막 요양보호사가 집에 방문한다. 아빠가 소중하게 쥐고 있다가 자기에게 건네주었다는 상자 안에는 어린 시절 내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유리구슬로 만든 ‘왕다이아 반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생전 아빠가 들려주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열대에 살던 저 ‘붉은 베리야’가 왜 한겨울에 꽃이 피는 걸까. 아빠가 말씀하셨다. “열대에 살면 항상 여름이거든. 열대지방엔 다만 우기와 건기가 있을 뿐 사계절의 감각 자체가 없다. 그러니 춥고 덥고 여름 가고 겨울 오고가 아니라, 물을 안 주면 건기가 왔나보다, 물을 많이 주면 우기가 왔구나, 열대 꽃들은 그리 생각하고 꽃을 피운단다.” 그러하니 이 소설은 한겨울에 붉은 꽃받침이 만개한 후에 조그맣고 하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편적인 어떤 기준이 아니라 다른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라는 작은 깨달음으로 혹은 나이 들면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치매라든가 사별 또한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이라는 담담한 주제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신춘 소설뿐 아니라 노령인구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 현실을 반영하듯 소위 노년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암과 치매를 비롯한 질병으로 생의 전환기를 맞는 인물들의 등장 역시 익숙해졌다. 일찍이 박완서와 오정희의 노년 소설에서 나이 든 인물은 점점 낯설어져만 가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를 견디거나, 앞선 죽음들을 목격한 이후에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하고 공포스러운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오로지 겪어낼 뿐 반추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노년의 시간은 ‘견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시험한다.5) 그런데「붉은 베리야」는 계절이 순환하듯 그러한 질병과 사별을 오히려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담담한 서술로 주목을 끈다.

   경향신문은 알파벳 소문자「i」(허성환)를 제목으로 한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한 독자는 우선 임신 12주 차인 아내와 서술자 ‘나’가 산부인과에 함께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첫 장면을 읽으면서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i-아이’를 떠올려도 괜찮을 듯싶다. 소설의 서술자는 연차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포장 용기를 대량으로 발주하는 매장에서 일한다. 한 명이 쉬게 되면 업무강도가 살인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라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병원에 같이 가 줄 수 있느냐는 ‘아내와 연차는 어림도 없는’ 사장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속을 끓이던 ‘나’는 다행스럽게 사장의 의외의 선심 덕분에 산부인과에 가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 아이는 아내의 뱃속에서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 

   그 전에 아내는 임신했다는 말을 하면서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다. 생필품 하나를 구매할 때도 의논할 만큼 신중한 아내의 그 말에 서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겠다거나 하는, 통장 잔고를 확인해야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묻는다. “그래서 뭘 쓸 건데?” 아내는 의자에 대해 쓰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의자라니? 하루에 적게는 28만 개, 많게는 42만 개까지 종일 포장 용기를 배달하는 서술자에게 의자는 사치일 뿐이었다. 피곤해서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려 해도 의자가 없으니 테이블도 없고, 그래서 허름한 상자 두어 개를 포개서 탁자처럼 썼다. 아내는 기절한 듯 잠에 취해 있던 주말에 “왜 의자를 달라고 말하지 못하냐?”고 나를 다그쳤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는 의자가 있다고, 의자 없는 회사나 직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예전에 자신도 계약직으로 시청에 근무할 때 의자가 있었고,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해도 의자가 있지 않느냐고,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의자가 없어도 된다고, 앉아서 쉴 시간이 없다고, 그 시간에 물건을 더 날라야 한다고 울다시피 말한다. 

   이 소설에서 ‘의자’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의자가 주어지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주어질 뿐 의자에 앉아서 쉴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상기한다. 

   ‘나’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나와 막내(라고 부르는 동료 노동자)는 고졸에 토익 점수가 없다. 경기가 나빠서 다른 일터를 알아볼 겨를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사장은 에어컨 설치 작업과 수백만 원의 견적이 나오는 창고 물건 정리 따위 잡무를 떠안긴다. 몸은 천근만근 무너질 듯하지만 그래도 나는 막내와 달리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 곧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좁은 곳에 사는 남자와 작은 곳에 사는 여자가 만나면 좁고 작아져서 삶은 더 비참해질 거라고 판단한 나는 아내와 되도록 빨리 헤어지려 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혼자 사는 3평과 혼자 사는 4평이 합해지면 7평이 끝이 아니라 서로 껴안고 있으면 14평처럼 쓸 수 있을 거라 했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두 사람은 가난을 견디고 있다. 나는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때우고 아내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느냐고 물으면 보아두었던 식당의 메뉴를 말한다. 나뿐 아니라 시장에서 일하는 나와 비슷한 노동자들이 앉는 유일한 의자는 공용화장실의 변기 의자다. 나는 변기 의자에 앉아서 흑백으로 된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서 딸과 통화하거나 아내와 영상통화를 한다. 

   소설을 쓰겠다는 아내는 내가 가져다준 허름한 나무를 가지고 작고 귀여운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 소설에서 아내가 만들어둔 의자는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다. 의자는 누구나 알다시피, 편히 앉아서 무언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든 사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서술자가 그렇듯 많은 불완전 노동자들은 의자가 없거나 의자가 있어도 그것은 형식적으로만 주어진 사물이어서 노동환경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러하니 이때 의자란 고용과 노동의 불안, 그것이 초래하는 경제적 공포에서 벗어나서 안정된 노동환경을 염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상징을 활용한 좋은 서술기법이다. 

   그런데 아내의 소설 쓰기란 또 무엇인가. 소설이란 현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허구를 본질로 하는 문학이다.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를 통해 주제를 표상하는 장르다. 소설이라는 허구가 망상은 아니지만, 실현 가능한 현실도 아니라는 점에서 아내의 소설 쓰기가 의자 만들기로 제시되는 것은 현실에서의 실현 여부와는 관계없는, 아니면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다만 강력한 소망의 표상일 뿐이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포획당하고, 노동시장으로부터 퇴출되더라도 국가가 안전판을 제공해주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개인의 철두철미한 노력 외에는 다른 대안이 마땅히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 아닌가.6) 

   그렇다면 소설의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아이(세대)는 의자로 표상되는 안정된 삶이 가능할 것인가 묻는다면, 그러하기를 소망할 뿐이겠다. 문학은 무엇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꿈꾸는 자의 것이므로. 


자전적 글쓰기와 문화적 기억의 확장 - 조선


   조선일보는「러브레터」(권희진)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서술자 ‘나’는 한 건물 16층 옥상으로 와서 한 노인을 생각하다가 문득 ‘서태지’를 떠올린다. 가수 서태지가 아니라 서태지와 목소리가 비슷했던 30대 후반의 아저씨다. 그 아저씨는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 비디오 가게 사장님으로, 내 친구의 삼촌이었다. 그런데 또 나는 16층 옥상에서 죽은 노인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어쩌다 이 16층 옥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서사라고 말하면서. 독자는 하릴없이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열 살쯤 두통이 심했다. 엄마의 편두통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자신도 늘 머리가 아팠다. 아버지는 일 년 중 집에 머무는 날보다 밖으로 나도는 날이 더 많았고, 그래서 엄마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니네 아빠가 없으니까 잠을 잘 수가 있니?” 하며 하소연을 하곤 했다. 어쩌다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엄마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식사 준비를 했다. 그런 아버지가 열세 살 무렵부터 집에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우는 날이 많았다. 자식의 아픔보다 자신의 슬픔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나는 편두통 때문이 아니라 어금니가 심하게 썩어서 그 통증 때문에 머리까지 아팠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도 집에 들어가는 날이 줄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눈치를 하는 친구네가 있으면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순일 네 집에 가서 자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순일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하라는 대로 ‘남의 것을 훔치는 기술’을 배웠다. 순일은 소년원에 들어갔고, 나는 변호사를 선임한 덕분에 그렇지는 않았으나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 해외 화장품을 직수입하는 회사에 취직해서 구매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곳에서 나보다 열 살 많은 ‘안과장’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안과장의 일곱 평짜리 원룸에 들어가 산다. 안과장과 헤어지고 목수일 배달 일 다 하다가 지금 이 건물에서 경비업무를 맡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은 요즘 젊은이들답게 쿨하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의 불꽃이 꺼지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현실을 발견한다.7) 저 두 사람의 만남을 사랑의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둘 중)어느 쪽이든 재빨리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지 독자는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더구나 단편소설 아닌가. 그래서 어쩌라고? 가끔 폐지나 박스 따위를 주워가거나 유리병을 훔쳐 가곤 하던 노인을 3년 가까이 지켜보았는데, 수도가 얼어붙을 만큼 혹한의 어느 겨울 노인이 결국 죽어버렸다. 그런데 다시, 이 소설의 서술자는 16층 옥상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언가 생각(회상)을 하고 있다. 옥상에서 얼어 죽은 노인과 홀로 살아가는 엄마를 생각한다. 잠시 살다가 헤어진 안과장도 생각한다. 그래서 결론은? 죽기 위해서도 애도를 하기 위해서도 아닌, 안과장이 언젠가 했던 말, 높은 곳에 올라오면 모든 것이 이해된다던 그녀의 말처럼, 무언가를 이해해 보기 위해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가 “잠시 살다가 헤어진 안과장”이 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난감하다. 안과장이 무언가 이해하고 생각해보기 위해 옥상에 올라온 하나의 계기 정도로만 그 쓰임이 부여되고 있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다.  

   이 소설의 경우 자전적 글쓰기를 통한 자아정체성의 (재)확인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없지 않다. 주제 역시 각박한 세상에서 생의 의지라는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은 바람직한 태도겠다. 단편소설 결말의 공식이기도 하다. 다만 서술자의 회상작업이 ‘자서전적 저장고’에 보관된 개인적 기억을 ‘의식적으로’ 불러냄으로써8) 그 기억의 서술이 개인을 넘어 당대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한 점은 아무래도 불만족스럽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한국


   한국일보는「말을 하자면」(김영은)을 당선작으로 선보였다. 서술자 ‘나’와 나의 친구 ‘너’는 기숙사 룸메이트로 대학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이다. ‘너’는 경쟁률이 높기로 소문난 H신문사 입사를 준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졸업을 앞두고 준비할 게 많아 직접 만나기보다는 SNS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형편이다. ‘너’의 SNS에는 캣맘 사건, 민식이법, 스쿨 미투, 동성결혼합법화, 공정무역과 케냐 어린이노동착취,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 사진 등 정치적인 이슈 관련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오랜만에 조우한 ‘나’와 ‘너’ 사이에는 ‘형우’라는, 낡은 기계에 팔이 잘렸고 봉합수술을 시도했으나 쇼크사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한 노동자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정확히는, ‘너’는 “우리 모두 형우다”라는 단단하게 쓰인 문구와 그 아래 정의연대연합이라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러 간다. 나에게도 동참을 묻고 망설이면 거부로 보일까 봐 나는 장소와 시간을 묻는다. 그러나 나는 졸업 전시에 내놓을 작품준비로 여유가 없다. 재룟값만 해도 한 학기 등록금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라 신경도 날카롭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알게 되지만 그 ‘형우’가 지난 여름방학 무렵 구미의 한 휴대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알게 된 동료 노동자였다.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육안으로 검사하는 일이었는데, 숙식 제공에 두 달만 일해도 한 학기 등록금을 벌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노동강도가 장난이 아니었고, 허허벌판에 있는 공장인 탓에 일이 끝나고 나면 캔 맥주 하나 사 먹을 조건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두 달만 버티자고, 그러면 생활비와 노트북과 세부 여행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게 ‘형우’다. 형우는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실업고등학교를 나와 곧바로 취업해서 벌써 삼 년 차라고 했다. 누님이라 부르면서 친근하게 굴던 형우. 줄곧 엄마와 함께 살아왔고, 두 살 터울인 형은 트럭운전을 하며 일찍 독립했는데 그가 아빠가 되었다고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된 조카의 사진을 보여주었던 형우. 공장 기숙사 앞 정자에서 그가 사 온 캔맨주를 함께 마시곤 했던 형우. 형우는 두 사람에게 친절(한 척)했으나 그들 사이에는 성별 구분과 학력에 따른 이질감이 존재했다. 

   형우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돈이라고 믿으며, 대학 나와봐야 취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라고 비아냥거리며, 사귀던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눈이 맞아 헤어졌다면서 그때부터 자신은 여자를 믿지 않으며,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형우는 공장 ‘남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 신념 혹은 정서를 대표하고 있다. 이 여성 혐오의 언어는 결국 굴절된 성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일베 현상은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임계치가 한계에 달했을 때 여성을 전면적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소해 온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9) 나중에 ‘나’에게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서도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듯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 결코 이성으로 사귈 수 없는 여자 대학생인 ‘나’와 ‘너’에 대한 선망과 질시 그리고 왜곡된 성 의식을 표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너’는 형우에게 발끈하고 만다. “고졸 새끼 주제에”라고 내뱉곤 그날 밤 공장을 혼자 떠났다. 형우가 여자대학생에게 갖는 선망과 질시와 왜곡된 성적 욕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너’ 또한 부지불식간에 고졸의 생산직 노동자인 형우에게 학벌은 물론 남성 혐오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무단퇴사는 공장 직원들의 오랫동안 뒤 담화 재료는 물론 형우가 ‘나’에 대해 이죽거리는 빌미가 된다. 

   그런데 형우가 죽은 후 ‘너’는 유가족들과 함께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그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표하고 있다. 어정쩡하게 시위에 동참한 ‘나’는 형우를 소개하고 있는 팸플릿 속의 글, 다재다능한 착한 막내아들이었으며, 음악을 좋아했으나 집안 형편 탓에 공장 일을 하게 되었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또래들과 달리 유독 성숙했고 철들었던, 그러나 그 대가가 죽음이었다는 문장을 읽다가 그만 둔다.

   ‘나’는 형우의 무미건조하던 마지막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너’가 무단퇴사하고 난 다음 날 형우가 찾아와 ‘너’를 비난할 때, 나에게 술을 권하고 그와 함께 어정쩡하게 술을 마실 때, 내 손가락과 손등을 만지고 기습 키스를 하고서도 그게 무슨 문제인지 모른다는 그 태도를 나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다음날 공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나를 비웃던 작업반장의 헛웃음도 공장을 나오고 나서 곧 잊기로 했다. 나중에 나는 너를 만나 형우가 내게 했던 일을 두고 실컷 욕하면서 공장에서 벌었던 돈을 다 써버리자고 실컷 욕하고 술을 마셨었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남긴다. 젠더와 계급을 가로지르는 혐오의 정서가 그것의 부당함을 말하는 우리에게 여전한 잔여로 남아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사회(노동)운동의 이름으로 치켜든 깃발 이면에 놓인 내부의 폭력에 대해 어떤 대응이 가능한가 하는 난망한 질문이다. 우선 소설에서 두 여성 인물 ‘나’와 ‘너’는 ‘여자’대학생이다. 노동현장에서 죽은 인물 형우는 고졸의 ‘남성’ 생산직 노동자다. ‘너’는 형우에게 고졸이라는 학벌과 여성 혐오 정서를 갖고 있는 데 대한 반발로 남성 혐오라 할 만한 차별적 인식을 보인다. 그런데도 그가 죽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의 죽음이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은 회사-자본가의 책임이라는 시위에 나선다. 그리고 형우가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세운다.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형우가 내게 했던 성추행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고, 그가 누구보다 성실한 젊은이였다는 데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결국 그동안 우리 문학에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했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의제기로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정의롭고, 깨끗하고, 올바른 상황만을 지향하는 문화적 경향성을 ‘살균된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오염되고 더럽고 모호하고 애매한 것들이 살균된 자리에 자신들이 믿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올바름이 들어선다. 하지만 이 살균된 문화는 사실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것을 살균시킴으로써 이 문화는 살균된 깨끗함 너머에 있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 하며, 올바름을 외치는 ‘나’의 모순과 분열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0) 

   나는 특히 ‘형우’를 향한 혐오의 정서를 갖고 있던 ‘너’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죽음이 자본가의 노동 착취에 있다고 분노하는 ‘너’를 보면서 “지금 분노하는 자가 가장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을 작가가 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다. 일정하게 공감하고 동의하면서도, 이 논쟁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스러운 일은, 기득권과 맞서려는 친페미니스트, 친장애인, 친이주민, 친동성애 등과 같은 소수자 혹은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의 등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세력에 대한 즉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장된 경계와 비판, 반대, 혐오의 분위기가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11)에 나는 좀더 주목하고자 한다. 한국일보가 이 소설을 신춘 당선작으로 꼽은 까닭은 저러한 논쟁에서 기왕의 소설 담론을 비판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작가의 도전정신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 1) 더스쿠프 Lab. 뉴스페이퍼 이민우 기자의 2024년 신춘문예 통계 기사를 보면, 성별은 여성이 66.5% 남성이 33.5%로 여성이 2배 이상 많았다. 시 소설 수필 등 전 장르를 합한 통계수치인데 소설만의경우도 비슷하다. 
  • 2) 김소륜,「신춘문예를 통해 바라보는 90년대 한국 문단의 경향성 연구」,『현대소설연구』제89호, 현대소설학회, 2023, 8쪽. 김소륜은 199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주목되는 것은 단연 ‘탈이데올로기성’이라고 말한다. 누구라도 동의하는 지적일 것인데, 문제는 2천년대에도 그러한 ‘중산층 시각의 응모작’ 경향이지속하고 있다는 점이겠다. 
  • 3) 김경호,「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고 의미화 하는가」,『동서철학연구』제75호, 2015, 12쪽.
  • 4) 김주은,「사랑의 존재론 : 오늘날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소고」, 『Homo Migrans』제13권 2015, 106쪽.
  • 5) 손유경,「노년의 시간과 ‘견딤’의 감각」,『한국현대문학연구』제68권, 2022, 186쪽.
  • 6) 정수남,「공포, 개인화, 그리고 축소된 주체」,『정신문화연구』제33권 제4호, 2010, 338쪽.
  • 7) 보리스 시퀄니크, 『관계』, 정재권 옮김, 궁리, 2009, 220쪽.
  • 8) 신지영,「자서전적 글쓰기와 문화적 정체성」,『독일어문학』제75집, 2016, 89쪽.
  • 9) 윤보라,「일베와 여성혐오」,『진보평론』제57호, 2013, 38쪽.
  • 10) 문형준,「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비교문학』 제73집, 2017, 103-104쪽.
  • 11) 이윤복,「'정치적 올바름' 논쟁에 관한 비판적 고찰」,『철학논총』제110집ㆍ2022,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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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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