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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여름호(제146호)

공원과 거실에 남겨진 것 : 이장욱, 『음악집』(문학과지성사, 2024)_장수진, 『순진한 삶』(문학과지성사, 2024)

김나영 문학평론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등단. 2023년 평론집 『말과 말 아닌 것』(문학과지성사) 출간. 현재 반연간지 『쓺』(문학실험실) 편집위원,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재직중.

창문을 생각한다. 창문이 있어서 이곳은 저곳으로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더욱이 이곳에 있는 사람은 저곳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거나 보고자 한다. 투명한 창문은 누군가가 이곳에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곳에서 그 너머를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로서 이곳과 저곳이 벌써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저 바라봄으로써, 이곳에서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그 자체로 엄연한 한 세계를 관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창문은 영화관의 스크린과 같은 기능을 하는 동시에, 창틀로 나눠진 투명한 단면 너머 조금씩 움직이는 풍경 속에서 개인의 기억이 거듭 새로운 관찰과 의미를 길어 올리게 되는 장소다. 이렇게 창문은 3차원 이상, 어쩌면 무한에 가까운 깊이와 너비를 담지하는 공간(空間)으로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 세계의 이상함을 유심히 바라보는 이는 흔치 않다. 이상한 것이 거기 있으나 그것을 발견하는 이가 드물다는 말이 아니라, 세계의 이상함이란 애초에 그것을 발견하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의미는 언제 어디에서나 없었던 적 없지만 자주 잊히고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생활에서도 관계에서도 삶에서도 그렇다 (“실은 모든 것을 거기서 잃어버렸다./나의 무방비한 가족들을/아름다운 인간관계를/그리운 문장을”, 이장욱, 「슈게이징 포에트리」). 하지만 그것이 있고 없어서 우리의 생활과 관계와 삶이 거기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새삼스럽지만 드물다. 『음악집』은 시인이 발견한 세계의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가 이 세계의 낯섦을, 즉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누구나 그 의미를 말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이미지와 언어 이후의 침묵이 제시하는 공간을 말이다.

  그 세계에는 자신을 “조금씩 자신이 아니”라고 감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의 장면들에, 그보다 더 급변하는 저 너머의 의미에 “적응하는 사람”이다. 앞서 공원처럼 텅 빈, 없음으로 있는 공간이라고 했지만 이장욱의 시에서 이 공간은 형이상학적인 사유가 작동하는 추상의 세계보다 현실의 구체적인 요소들이 작용하는 세계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은 “빌딩들 사이”(「적응하는 사람」) “객석의 어둠 속”(「극적인 삶」), 와본 적 없는 산책로의 “다정한 편백나무들”(「개 이전에 짖음」) 사이, 잠에서 깨어난 “새벽 두 시”(「변절자의 밤」), “생각해보면 에펠탑에서도 광화문에서도 몽골의 사막에서도”(「무지의 학교」), “오후만 있는 일요일”(「월요일의 귀」)에도 있다.

  이 세계의 틈에서 ‘나’는 언제나 불안하다. 자주 무언가를 잃/잊고 불신과 불가능과 무의미의 고통에 휩싸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언제나 무엇이 빠진 채로 있어서 비/현실적이다. 온전한 것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풀밭에는 아주 작은 음악들의 우주가 펼쳐져 있고/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 그에게는 어떤 잃/잊음도 ‘아주 작은’ 것이 되지 못하는 풍경이다. 그러므로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은 이상하다. 어째서 자전거의 바퀴가 계속 빛나며 구르는 것이 불안하고 무섭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이 세계의 불안과 공포는 ‘당신’을 잃/잊어버린 데에 연유한다. 달리 말하면 『음악집』에서 세계는 당신을 잃고 잊는 일에서부터 발생하는 곳이다. 이곳의 ‘나’들은 저마다가 가진 구멍, 그 허공을 채우기 위해 창문 너머의 풍경을 유심히 보고 움직이는 것들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지만, 어제와 다름없이 바퀴는 구르고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사람들은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언제나 오늘 죽은 사람이 있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공백을 지닌 채로도 아무렇지 않게 지속되는 이 세계는 거대한 공원 같다. 비어 있음으로써 의미를 갖는, 어느 곳이든 머물렀다 금세 떠나는 자리일 뿐인. 따라서 불안과 공포는 특정한 상실과 망각에 있다기보다 잃/잊어버린 한 존재의 공백을 포함한 세계에 ‘나’들이 적응을 하고 있다는 엄연함의 확인에서 피어오른다.

  여기서 시인은 “부적응자들” “먼 신호를 기다리는 그이들”을 부른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사라진 뒤의 세상”에 살고 있을, ‘나’의 없음에 적응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적응하는 사람」).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세계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나’의 없음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결코 역사와 현실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로, 무지한 채로, 적응하지 못한 채로 ‘나’라는 이 세계의 공백을 상대하게 된다 (“나는 결국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신경정신과에서 살아남기」).


*


나는 선인장 옆에서

해를 기다린다

최선을 다해

인간의 느낌을 덜어낸다

—「하루」 부분


장수진의 『순진한 삶』에 실린 시들은 공통적으로 ‘순진한 삶’을 질문한다. 순진함은 무엇이며 더군다나 삶에 있어서 순진함이라는 태도나 지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순진하다는 것은 자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때의 무지와 언어를 갖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지닌 무구를 동의어로 취급할 수는 없다. 『순진한 삶』 속에 인간의 언어 밖에 놓인 존재들, 가령 인간 이외의 생명체로서 식물과 동물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 역시 순진하다는 속성과 판단을 가르는 무지함과 무구함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를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선 ‘순진한 삶’을 특정한 삶 자체의 속성이라고 볼 때 이러한 삶은 누구의 것인지를 묻게 된다. 다음으로 그것을 삶을 대하는 누군가의 방법이나 태도라고 볼 때 ‘순진하게 사는 일’은 어떤 것인지를 질문하게도 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앎의 문제가 개입한다. 무엇을 알기 이전, 모르는 채로 있는 원래의 상태를 순진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인간의 언어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동물들, 아이와 개와 고양이처럼 인간 사회를 주요하게 구성하지만 거기에 주체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두고 순진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수상하다.

  『순진한 삶』에서 “순진한 삶”이라 말해지는 대상은 오로지 언어를 가지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앎을 드러낼 수 있는 인간 종족의 그것으로만 국한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앎을 무기로 삼아 다른 삶의 무구함에 순진함이라는 오명을 덧씌우며 자신의 소유물처럼 함부로 다루는 방식을 포함해서 말이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장수진 시의 독자들은 ‘순진하게’도 삶이라는 말 앞에서 문득 낯섦을 느끼게 된다. 직전까지 알고 있다 여겼던 그 말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앎이라는 완고한 명사형에 균열이 생기고, ‘나’의 소유라 믿었던 자리에서 무구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던 그것이 가장 멀고도 낯선 언어가 되어 ‘나’를 깨우친다.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라 짐작해보지 못했을 때와는 달리, 그 말에 대해 순진하기만 했을 때와는 다르게 생경한 앎의 발견 이후의 삶은 매번 어제까지의 믿음을 의심하는 방식으로만 지속된다. 이런 방식은 응당 힘겹고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글을 쓰는 일과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쓰는 일을 상상을 포함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일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떤 삶을 쓰기의 대상으로 삼을 때 쓰는 자는 그것을 한 번 더 살아보는 자이기도 하다. 『순진한 삶』의 여러 화자가 보여주는바, 쓰는 자에게 있는 ‘그 삶’을 진정으로 들려주고자 하는 의욕이 때로는 이야기를 완성하기도 전에 그를 무너지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하면/완전히 무너지는지,/잘 알고 있는 개새끼들의 이야기를/쓰고 싶었죠”, 「침대 선생님」).

  단 하나의 이야기를 짓기 위해 삶의 무너짐을 경험한 자의 고백 앞에서 지금까지 ‘나’는 삶을 대할 때 얼마나 순진했는가를 알게 된다. 아니,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순진하게 이어나가는 일로써 다른 삶의 단절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게 된다. 더불어 그러한 자기반성이 그저 타인과 외부 세계만을 향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장수진의 이번 시집이 공동체적 삶에 대한 기약을 향해 있다고 말해볼 수 있다. 어떤 삶의 순진함에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자신일 수도 있다는 ‘나’의 깨달음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제 ‘나’는 다른 삶의 곁에서 그것을 알고자 한다는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삶에게 ‘나’에게서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의 본성과 닿은 강렬한 감각의 차원에서 다른 삶을 지키려는 안간힘 같은,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를 상상해보게 한다(“난 하루도 빠짐없이 너에게 우유를 먹이고/첼로를 연주할 거야”, 「도망쳐」). 이처럼 『순진한 삶』은 순진한 것에 닿아 있는 애정과 폭력성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속성을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자주 언어 이전의 의미를 형상화하고자 한다. 가령 누군가의 이야기가 침묵이나 이미지로 대체될 때 그 공백이 일러주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이어질 또 하나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일stand by로서 언제나 이후의 사건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한다/아무도,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를 만드는 법」).

  삶의 기획에서 순진함은 그것을 돌보게도 하고 반대로 훼손하게도 한다. 무구하지 않은 누구나 이러한 삶의 딜레마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장수진 시의 ‘나’들은 벗어날 수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해로운 시간인 이 삶에서 그 바깥을 상상하는 힘을 언어의 공간으로 보여준다. 그 자리는 『순진한 삶』에서 ‘거실’로 자주 형상화되는데, 거기서 ‘나’는 당신과 만난다. 그곳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각자의 역사와 현실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시간에 있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때로는 잠시나마 함께 머물며 공동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곳에는 서로의 흔적이 있고 저마다의 ‘나’들은 그 흔적으로 공동의 삶을 감각한다. 다시 말해 그곳으로 형상화된 삶에서는 당신이 남겨둔 것이 ‘나’의 삶을 구성하고 그렇게 여럿의 삶이 연결되고 확장되고 지속된다. 삶이라는 것은 앎이나 등가교환의 차원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채로 물려받은 것들 속에서 풍요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대는 좋은 땅에서 난 올리브유를/거실에 남겨두었네/신선하고 푸릇한 빛과 건강을/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거실엔 볕이 잔뜩 쏟아지고/단순하고 복잡한 사실들”, 「사랑은 거실의 것」).


*


이장욱과 장수진의 이번 시집은 시는 언제나 인간의 삶이라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재발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들은 누구나 우연하게 상실하고 망각하게 되는 삶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그런 삶에 대한 인식이 불러오는 분노와 불안과 무지와 무감각에 대해, 그러니까 잊/잃음을 잊/잃은 순진함에 이르는 감각까지를 말한다. ‘나’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무수히 잃/잊은 것에서 유일하게 잊/잃지 않고 남겨두었기에 그 흔적은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있는 곳으로부터 당신과 나는 이전과 이후로 헤어져 있지만, 이때의 이별은 종결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운 사건이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난”이라는 말을 ‘자라나다’와 ‘나’라는 의미가 만나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면 ‘그대는 좋은 땅’에서 그리고 ‘난 올리브유’로 대별되기도 해서 ‘당신’과 ‘나’의 분리는 각자의 좋음 속에 위치하게 된다. 올리브유는 좋은 곳에 있는 당신이 나에게 물려준 나의 안녕이기도 하다. 그것을 거실에 둔 당신은 아마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공동의 자리에서 내가 발견함으로써 전해 받은 그 말 속에 당신의 사랑(러브 유)이 있다. 때로 인간으로서의 삶에 혐오와 환멸을 느끼게 되더라도, 삶에 대한 앎이 도리어 삶을 해치려 들어도 누군가가 남겨둔 “물건으로 둘러싸인 거실”(「사랑은 거실의 것」)이 있다면 한참은 더 괜찮을 것 같다.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불가능한 곳이라도” (이장욱, 「더 멀고 외로운 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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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 끈의 감각, 금의 시선 ― 오은경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

한 권의 시집을 열어 하나의 세계로 진입한다. 시인이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시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세계와 교호하는 내면 풍경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은경의 세 번째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는 어떨까. 그 길의 초입에 그녀는 끈을 손에 쥐여 준다. 오은경은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에서 타자―외부와의 접점에서 개인이 느끼는 모호한 윤곽을 가늠해 왔고, 두 번째 시집 『산책 소설』에서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다층적인 삶의 이야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시집에서는 끈으로 상징되는 관계의 시작과 변용, 그 이후의 상태를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처럼 조망하고 밀착하여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나와 너 혹은 나와 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거리, 변해버린 감정의 결이 포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서시 「공중제비」와 바로 그 뒤를 잇는 「끈」, 시집의 마지막에 위치한 「두 눈으로」를 경유하여 살펴보려 한다. 이건 미래이고, 손에 잡힌 건 정체불명의 노끈이다. 미래가 노끈의 형태라면 미래란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아니, 미래란 왜 이렇게 헐거워져버렸을까? 작은…… 미래, 꿈꾸던 내 모습이 아니었어. 나는 나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미래에는 당연히 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 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 잠깐 의심했지만, 노끈이 되어버린 미래는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노끈을 사용한 적 없었고 무언가를 묶거나 무언가에 묶인 적 없었다. 노끈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노끈은 바람에 흔들렸지만, 떠내려가지 않았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 아무도 끈을 사용하지 않았다 ― 「공중제비」 전문 「공중제비」의 미래는 시간의 저편에 아득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고 없이 도착한 현실이자, 감각할 수 있는 사물로 손안에 놓여 있다. 이 시의 미래가 당혹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정체불명의 노끈”이기 때문이다. 원대한 포부나 반짝이는 약속 같은 기대를 배반한 미래는 값싸고 흔한, 아무렇게나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을 가질 따름이다. 미래를 손에 쥐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정녕 그것이 미래가 맞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섦과 마주하는 것은 ‘나’에게나 독자에게나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는 것처럼. 공중제비는 화려한 도약이자 제자리를 맴도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세계를 거꾸로 볼 수 있지만, 이내 이전과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착지하는 운동. 괄호 안에 담긴 ‘나’의 독백은 어지러운 회전을 중계한다. 과거의 예상(“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과 현재의 발견(“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사이에서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라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짧은 의심을 품는 일. 이는 공중제비의 정점―세계가 거꾸로 휙 지나쳐 보이는 면면과 유사하다. 그러나 역전은 길지 않다. 손으로 만져지는 노끈을 체감하면서 이내 현실로 착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각이 뒤흔들린 ‘나’는 도무지 노끈으로 구현된 눈앞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노끈은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릴 만큼 가볍지만 질기게 현존한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라는 시구를 보라. 동시에 “아무도 노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를 겸하여, 노끈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그렇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노)끈은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끈을 잡아당겼다. 흙먼지가 일었다. 황사였다. 풀 몇 포기 마른땅에 나 있었다. 풀이 아니라 허물 같았다. 동물 사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날개 달린 것들,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거나 전에 한 번은 겪어본 일 같았다. 지금, 내 손은 핏기 없이 창백한데 이렇게까지 당길 이유가 없었다.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여기가 아닌지도 몰랐다.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통행금지 구역에 내가 와 있으며……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다. 수풀 우거진 배경은 기억에 없었다. 여름, 풀독이 오를까 봐 걱정되었는데 백구들이 논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지가 먼저 강아지들 쪽으로 향했다. 철책도 없는 논밭, 지난 계절의 벼와 새 떼, 메추리를 날려 보낸 다음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백구와 토끼를 구분하지 못했다. 수풀 사이사이 토끼가 숨어 있다는 것도. 전부 수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었다.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고 했다. 기다리라고 말했던가? 하지만 시간을 일러주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는지, 아니면 내가 찾으러 가면 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수지는 어디를 간다고 했지? 어디에 있지? 내게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 손바닥에는 실금 같은 주름이 얽혀 있었다. 손은 소금빵 같았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끈을 당겨야 했다. 끈을 당길 나머지 손이 필요했다. 팔은 바게트 같았다. 끈을 힘주어 당길 필요는 없었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 끈은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 「끈」 전문 이 시의 끈은 ‘수지’와 연결된 기억의 매개체다. 「공중제비」에서의 시제가 사적 서사로 전환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헐거웠던 노끈은 더 질긴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러한 끈을 잡아당겨 마주하는 것은 숨 막히는 “흙먼지”와 “황사”뿐이다. “허물” 같은 풀이 돋아난 건조한 땅. 사체를 처리할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보이지 않는 황량함은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을 암시한다. 생명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죽음의 자연스러운 과정마저 정지된 상태는 한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기억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낸다. 그 중심에 수지가 있다. 수지는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통제라기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과잉보호에 가깝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던 수지는 위험이 제거된 안전한 장소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제 수지는 찾을 수 없다. 이 시의 후반부는 세계에 내던져진 ‘나’의 신체가 어떻게 감각되는지 기록한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던 손과 팔은 “소금빵”과 “바게트”로 비유된다. 무력함 속에서 ‘나’는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라는 고백에 있다. 이전까지 ‘나’는 수지가 만든 규칙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었으나, 규칙의 제정자가 수지에서 ‘나’로 바뀐 까닭이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최소한의 머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이 미래를 방기하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라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손으로는 미래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과거와 이어진 현재를 어루만지면서 ‘나’의 시선은 천천히 바깥을 향한다. 무엇을 “두 눈으로” 응시하는 것일까. 유리의 조각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빛이 전부였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느라 세상을 분간할 수 없었어. 세상에는 너도 있다, 통유리로 된 복도 바깥에 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바로 이곳이 처음이기 때문 아닐까? 다른 말로는 길 잃음.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때는 세상이 미로 같았고, 너와 나는 퍼즐 조각 같았지.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는 것처럼. 자꾸만 날씨를 상상하고 싶어져. 그리고 깨닫고 만다. 떠난 것은 네 쪽이라는 것을. 적어도, 너와 둘일 때는 멈춰 있었던 적이 없고 내가 복도에 누워 잠들었던 적도 없지. 빛이 이렇게나 밝고 아름다운데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 「두 눈으로」 전문 ‘나’는 “통유리로 된 복도” 안에 있고, 그 너머에 “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내가 나갈 수 없”기에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다. 볼 수는 있으나 가닿을 수 없는 유리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 시는 ‘나’와 “너”를 포함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양자의 변모 양상을 되짚는다. 세상이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았”을 때,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퍼즐 조각 같았”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 길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런데 “너”를 떠나보낸 뒤 ‘나’는 진짜로 길을 잃는다. 미로를 즐겁게 탐험하던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세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이에 ‘나’는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라고 서술한다. “금”은 “너”와의 지난날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영원한 필터가 되었다. 필터는 이미지를 왜곡한다. 아름다운 “빛”도 그러한 균열을 통과하면서 휘어서 꺾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금”은 선명히 드러난다.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가 행복이 깨진 현재의 상처를 아프게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눈으로」가 응시하는 삶의 이면이다.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한쪽 눈으로는 환했던 기억(“빛”)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금”)을 같이 바라보는 일이다. 두 개의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은 관계의 실패에 대한 뼈아픈 기록만은 아니다. 한 관계가 남긴 흔적을 자기 일부로 수용하고 이후의 나날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태도다. 외면하지 않기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규범과 통한다.

월간 현대시 허희 오은경둘이 거리로 나와현대시얽힘서평 2025
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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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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