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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봄호

매력의 두 문제 ― 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이희우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2021년 '문학과사회' 에 평론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쓴 논문으로 「매력의 미학사―칸트에서 랑시에르까지」(2025)가 있으며, 옮긴 글로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2023)가 있다.

매력reiz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 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1)

매력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병적인”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2)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 비서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 있어〉(2012) 가사


  1. 모호성과 취약함

  나는 지난 몇 년간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선 것,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막연한 생각 속에서 이 년 전에도 ‘매력의 경제’에 대해 썼다.3) 그 글에서 나는 매력의 경제가 지적(이론적) 관심, 도덕적(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의 ‘칸트적’ 분리가 함몰된 문화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는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가 흐려지고, 지적·도덕적·미적 관심과 육체적 자극, 성적 끌림, 경제적 이해 관심, 정념 등이 마구 뒤섞인다. 반대로 말해 매력의 경제는 주목의 흐름, 휩쓸림, 끌림, 공감, 혐오감, 수치심, 열등감이 뒤섞인 정동적 흐름을 설명하려는 동학이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을 통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실 정치’는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변해온 듯 보인다. 한국의 여러 사회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없는지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또 어느 연예인의 도덕적 논란은, 즉각 그의 ‘인성’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그의 외모에 대한 조롱 혹은 성희롱과 뒤섞여버린다.4) 이러한 고발과 조롱은 행위만을 겨냥하지 않고 존재를 사방에서 포획하기에, 훨씬 치명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줄 수 있다. 즉 발언이나 행위에 대한 처벌·판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종류의 공격과 모욕에 매우 민감하다. “많은 학자가 동시대의 ‘젊은 세대’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오찬호, 2013) 같은 책도 있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런 세대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냄새’와 같은 감각적 차원의 일로 번역되면 여전히 충격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불평등이나 계급성이라는 추상적 사실보다는 감각적 번역에 가장 민감한 세대일 것이다.”5) 즉 이 세계에 거대하고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훗날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러나 누군가―영화 〈기생충〉(2019)에서처럼―내 몸에서 나는 냄새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내 행위나 처지에 대한 비난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모욕처럼 느껴진다.

  그런 모욕을 마주해서 주체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기 혐오·수치심을 내면화하거나, 〈기생충〉의 기택처럼 돌이킬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리거나. 그도 아니면, 모욕을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모욕이 자신을 파괴할 수 없게 자기를 배려하거나. 이 자기 배려가 우리에게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줄 것이다.


  매력의 불평등은 당연히 경제적 불평등과 뗄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 둘의 관계가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아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악뮤의 천재적인 노래 가사에서처럼, 나를 홀린 사람은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 비서’만큼 유능한 사람이 아니어도 그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게다가 매력은 외양상의 조화로운 배열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객관적인 조건들로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기에 매력은 마법이나 마술처럼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신비함과 모호함 때문에 매력은 갈급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이 끌림과 욕망의 동학은 어떤 부정적 명령도 발신한다(“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이 명령은 호감과 비호감을 나누는 기준에 예민해지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나 수치심, 조급함을 주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홀리는 이 모호함을 제거할 수도 없다. 매력을 탈신비화하고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라. 매력에 ‘비판적 거리’를 두려고 해보라. 매력을,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을 숨기고 있는 물신fetish이라고 고발해보라. 그것은 가능하겠지만 무력한 일인데, 매력이 자본의 이차적 효과나 그 자체 ‘상징자본’일 뿐이라고, 혹은 물신이라고 파악한다고 해서 매력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현혹이, 매력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지 무지해서 현혹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은 아우라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매력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일찍이 먼 유럽 땅의 철학자 칸트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매력의 이러한 모호함과 변덕스러움이었다. 칸트에게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합목적적 조화이지만 매력은 대상이 주체에 행사하는 지배력이다. 매력과 감동은 대상의 영향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의 취미판단으로는 부적절한 ‘야만적’ 관심, 미성숙한 관심이다.6) 그러나 매력의 불순함과 모호함, 신비로움을 축출하려는 것은 그것대로―마녀사냥처럼―탄압과 억압적 안정화, 관심들의 위계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열거한 조짐들은 마치 매력이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중요한 기제이자 기준이 되었다는 착시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면, 주체와 대상의 완고한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 특이한 ‘막간극’이 끝남에 따라 매력이 다시 공공연한 경험적 힘으로 부상했고, 그에 따라 비로소 비근대적인 미학이 작성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자극에 취약하고 감정적이며, 관심사들을 엄밀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문학은 이 사실을 늘 말해왔지 않은가?). 단지 영역들, 관심사들의 관념적·제도적·규범적 경계가 흐려짐에 따라 이 사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배움이 매력으로부터 촉발된다고 주장7)하는 것은―칸트라면 필시 ‘야만적’이라고 했을―동시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즉 새로운 미학을 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근대적으로 규정된 아름다움, 자유, 도덕, 계몽, 성숙, 교양의 관념을 철저하게 재고해야만 한다. 매력과 순수한 취미판단을 분리하는 문제에, 칸트가 인간적이고 문명적이라 생각한 그 모든 소중한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말했듯 매력은 대상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조화이다. 즉 매력과 아름다움의 분리는 대상과 주체의 근대적 분리와 맞물려 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대상에의 의존이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또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일치’, 즉 미적 공통감각은 지적 공통감각과 도덕적 공통감각의 근거이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8)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이 매력에 휘둘리고 오염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적 공통감각이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말은 굳건한 지적·도덕적 공통감각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배움은 대상에서 주체를 분리하는 ‘선험적 형식’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경험적인 세계의 불순한 감각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촉발’된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발적으로’ 배우려 드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가 아님을 의미한다.9)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경험적 자극들에 지적·도덕적으로 거리 둘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휩쓸리고, 방황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 출발점이다.


  2. 교실 알레고리


  나는 배움이 ‘매력과 실망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그 연장 선상에서, 이 글에서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인 재현 논리로서 매력의 경제를 면밀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에 의해 촉발되는 배움들을 긍정하고, 보호하고, 촉진할 수 있는가? 이 이중의 과제를 위해서는 매력을 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매력의 경제학」에서 나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 재현 논리’로서의 매력과 ‘감성적 배움을 유인하는 인력’으로서의 매력을 애매하게 혼동했다. 그 애매한 교착 때문에 소설들을 다룰 때도 좀 우왕좌왕했다.

  조금 복기해보자면, 내가 이 문제에서 늘 참조해온 손보미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감지한다. 매력의 경제를 배우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매혹과 동경, 수치심과 혐오감을 느끼며, 이 감정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품행과 감수성, 젠더 규범을 학습하도록 종용한다. 교실에는 혐오와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가 있고, 반대로 눈길을 끌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가 있다. 이중 전자의 경우를 보자.


그 애는 목욕을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머리카락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고, 얼굴에는 언제나 버짐 같은 게 피어 있었다(그게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 그 애의 이름은, 그래, 고장연이었는데, 내가 여전히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반의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 애를 ‘고장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면, 무리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깨끗한 버전’의 고장연이 되고 말 것이라고.11)

  어떤 신체(정확히 말해 신체가 발신하는 기호들signs의 특정한 조합)를 “고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의미화를 둘러싼 과정이 매력의 정치이고, 교실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화자가 몸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다. 이 경제는 신체적 기호들에 차별적인 의미를 할당한다.

  위 소설에서 고장연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이고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인 듯하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혐오하는데, 그 사실이 신체적 기호들(기름때, 버짐, 냄새 등)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실의 무리들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화자는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까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완전히’ 본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두려움은 사회적인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의 배움에서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도덕적, 인지적, 정치적, 육체적, 성적 관심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를 온몸으로, 감각적으로 배운다. 바로 그렇기에 아이들의 배움은 강렬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종종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사춘기 시절 교실의 아이들은 교과서나 선생의 말보다 또래 집단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배운다.

  이처럼, 매력의 경제는 끌림과 동경과 흥분을 낳는 한편으로 혐오감disgust과 수치심shame도 낳는다. 수치심은 죄책감guilty과 밀접하면서도 다른데, 죄책감이 행위에 대한 것인 반면 수치심은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도덕적 위반이 발생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라고 생각한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존재다’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12) 혐오와 수치심은 신체적인 반응이지만,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감정(사회 질서와 도덕을 내면화시키는 감정)이기도 하다.13) 혐오는 신체적 오염이나 질병을 회피하기 위해 진화된 행동 면역체계이지만, 문화적·도덕적 ‘순수성’에 집착하면서 소수자·약자를 배척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들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낄 때 도덕적으로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중 어떤 것은 농담 같은 것인데, 이를테면 방귀 냄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타인의 품행에 대해 더 엄격한 도덕적 판단을 했다.14) 이는 신체적 관심사bodily concerns와 도덕적 관심이 쉽게 호환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또 혐오감이 도덕적 엄숙주의의 형태로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혐오감이 행동 면역체계에서 기인한다면, 수치심은 어디서 비롯할까? 어떤 심리학자들은 ‘수치심의 기원’을 매력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찾는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매력도attractiveness는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며, 수치심은 매력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상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15) 혐오감이 오염된 것을 피하도록 진화된 심리적·신체적 반응이라면, 수치심은 자아를 오염된 것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간단히 말해 수치심은 내면에 반영된 혐오이다. 혐오가 종종 소수자와 타자를 배척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감정이다.16)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에 노출되기를 꺼리게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낮게 평가하는데, 이 의기소침함 혹은 자기비하는 그의 매력도를 더욱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오늘날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신의 매력을 당당하게 전시하면서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17)

  소설과 관련해 이제 새롭게 논해보고 싶은 내용은, 손보미 소설에 그려지는 배움/성장이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배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화자는 실망을 겪고, 실망을 통해 배움의 경로가 매력의 경제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점이다.18) 이때 실망은 어떤 대상이나 자신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의 자의성과 허약함에 대한 것이다. 매력이 매력적인 대상의 본성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상황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작은 동네』에서 이러한 배움은 특히 고장연과의 관계에서 온다). 그런 실망을 겪고 나서 화자는 교실의 정치에 어느 정도 무관심해진다. 냉소적으로 될 위험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무관심은 화자가 ‘자기와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어 교실의 분위기에 덜 휘둘림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기와의 관계는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주체화로 해석할 수 있다.19)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의 경제에 저항하고 개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경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삶의 재현되지 않음’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어린 화자는 작가가 된다. 즉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실망은 매력의 경제 내부에 구멍을 내고 그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배움으로 화자를 인도한다.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망한 사람은 단지 냉소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그것에 저항할 주체성을 부여하는 그 배움이 매력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중요하다.

  손보미의 소설 속 교실은 아주 구체적이지만, 그 교실의 동학,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을 놓고 벌어지는 매력의 정치는 오늘날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다. 매력의 정치는 소설 속 초등학교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애 시장에서, 금융 시장에서, 현실 정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에게 어떤 말투, 품행, 사고방식, 가치의 서열들을 가르친다. 거꾸로 말해서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所與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전시장이나 투기投機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사춘기 아이들의 교실이기도 하다. 이 은유적 교실에는 셀 수 없이 많은―매력의 정치의 입법자이자 집행자인―‘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존재라면, 교실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바로잡을 권위주의적 선생은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러한 선생의 회귀를 욕망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매질을 통해 제대로 된 ‘자유’와 ‘합리’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화자처럼.

  따라서 나는 이러한 문화적 조건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과제를 위해 이 글에서 새롭게 주장할 가설은, 앞서 말했듯 매력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20)


  3. 첫 번째 종류: 재현적 매력

  매력의 두 종류를 잠정적으로 ‘재현적 매력representative attraction’과 ‘감각적·정동적 매력affective charm’이라고 불러보겠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관념과 정동을 구분하면서 정동을 ‘재현되지 않은 사유’라고 했다.21) 관념이 고정된 격자라면 정동은 그 격자들 사이사이에 유동하는 흐름이다.

  두 종류의 매력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지적으로 분별된다면 둘은 모두 재현적 매력으로 수렴될 것이다―그것이 어떤 주체화에 관여하느냐에 따라 분리된다. 즉 동일한 대상의 매력이 재현적 매력이 될 수도 있고 정동적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전자는 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회화 작품 표면에서 물감층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화가가 되려면 그 기호를 감각적으로 해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준다.22) 아이돌 문화 역시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3-1. 금융적 매력도


  재현적 매력이란 수치화 가능한 것, 평가·식별·계산 가능한 것으로 ‘이미 표상된 매력’을 뜻하기도 하고 (무엇이 더 많이, 더 중요하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는) 재현의 문법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투자자들이 어떤 대상에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가늠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이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페어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투자 대상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로 환원된다.23) 그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생산되는 주체성은 ‘피투자자investee’이다. 국가, 기업, 스타트업 창업자, 자영업자, 대출을 받는 가계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 연구자 역시 피투자자다. 자기 프로젝트의 전시와 자신의 가치 상승24)을 통해 투자(국가, 대학, 문화재단, 연구재단, 출판사, 전시기관 등의 지원)를 유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꼭 ‘돈’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목과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작업이나 자산의 가치를 상승시키려 하는 경우 우리는 피투자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피투자자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생산한다고 여겨진 ‘기업가 주체’와 다르다. 기업가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삶과 자산을 관리하지만, 피투자자는 당장의 이윤을 감축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려 한다. 실질적인 ‘이윤’은 금융적 매력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매력도는 투자받을 가능성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매력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분투하게 된다. 페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의 대항 투기 액티비즘이 ‘무엇이 매력적인가’의 결정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

  매력도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과 주목의 흐름을 견인하는 지배적 기제이다. 페어는 감정이나 정동에 대해 주요하게 논하지 않지만, 만약 그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혐오나 수치심도 심각하게 가중될 것이다. 매력도의 지배적 기준은―이 기준이 다원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분류들(빈곤, 신용불량, 빈약한 포트폴리오, 나쁜 평판, 낮은 생산성, 낮은 디지털 접근성, 인기 없음 등)을 끊임없이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3-2. 기호, 장르, 메타장르


  이런 관점에서 매력의 경제를 기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는 ‘장르들’의 문법, 즉 메타장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선별·등록·재생산·유통·서열화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combination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사조가 아니다,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26)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코드화될수록 그 존재는 더 많이, 더 빠르게 재현·유통·패러디·모방된다. ‘뉴진스는 하나의 장르다’와 같은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장르는 기호들을 조합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서 (재)생산될 수 있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

  동시대의 문화는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예술의 탈장르화(예술의 삶 되기)’를 목표로 했던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과 반대되는 공식이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즉 기호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장르를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 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적 조합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취미,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냉소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대중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27)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경험적 조건 속에서 시작된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 학습하며, 그 기준을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선 토론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영역마다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가 고려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는 현재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매력과는 다른 매력적인 것을 제시할 수 있느냐이다. 그다음 고려할 수 있는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혹은 구성적 외부), 즉 ‘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이 있느냐이다.


  4. 두 번째 매력: 감각적·정동적 매력


  첫 번째 매력이 장르들의 문법을 관장하는 경제적 논리라면, 두 번째 매력은 장르화되지 않은 개별적 기호들의 인력이다. 이 인력은 예측할 수 없는 배움들을 유도하고, 우리는 이런 배움들을 통해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확보할 수 있다. 즉 두 번째 매력은 첫 번째 매력에 저항할 가능성이다.

  감각적·정동적 매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짧게 이야기해볼 텐데, 하나는 섹슈얼리티와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배움과의 관계이다.


  4-1. 매력의 성적인 토대


  젊은 시절의―‘비판’을 쓰기 전―칸트는 아직 매력을 순수한 취미판단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격하하지 않았다.28) 훨씬 비체계적이고 유연한 텍스트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칸트는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rührt, das schöne reizt)”라고 썼다.29) 이 짧은 텍스트에서 칸트는 수치심이라는 “본성의 비밀”이 매력과 관계있으며,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다면서 매력의 기원이 성차(性差) 혹은 섹슈얼리티와 불가분하다고 확언했다.30)

  그러나 원숙기의 칸트는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매력에 좌우되는 것은 ‘야만적’이고 ‘미성숙’한 관심이라고 규정했다. 이로부터 취미판단의 지붕 위에는 숭고가 있고 바닥 아래에는 매력이 있는 미학적 위계질서가 확립되었다.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체계적으로 분리하고, 대상에의 애착attachment과 초연함detachment을 분리할 때 미학의 저택 아래로 쫓겨난 것은 육체, 수치심, 여성적인 것, 동물적인 것, 몰입, 습관,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고이다(칸트의 몇 텍스트만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대미학의 형성 과정 전반을 염두에 둔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서두에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기입할 때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함의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방황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혹은 거꾸로 말해서 우리는 상처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매혹되는 것이다. 이 취약함의 기저에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있다. 섹슈얼리티는 장르/젠더가 아니며, 그렇게 식별·재현할 수 없는 잔여이다.31)

  배움의 이야기는 복잡하게 뒤섞이는 성적 계열들을 형성한다. 배움이 없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르들/젠더들/분류들만이 있을 것이다. 배움은 한 장르의 문법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앎의 축적이지 배움이 아니다). 배움의 운동은 기호들의 새로운 연결, 새로운 마주침의 공간32)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장르들의 경계를 해체한다.


  4-2. 감각적 매력과 배움의 관계


  칸트 이후에 ‘매력’에 다시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들은 니체와 들뢰즈이다. 일단 여기서는 들뢰즈의 텍스트만을 짧게 인용해보고자 한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듦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33)


  일반적인 기준에서 약점인 특징도 어떤 독특하고 우연한 조합 속에서는 강점이 된다. 누군가의 억양이나 촌스러운 옷차림, 자기비하가 그런 것처럼.

  이 구절은, 기호가 조합되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현재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특징들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또한 문학에서 전시되는 수치심의 윤리적 함의를 숙고하게 해준다. 진화심리학적 설명에서 수치심은 인간 주체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수치심의 전시 자체가 매력적인 것, 저항적인 것,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자처럼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방출하는 기호를 해독하는decoding 일이다(장르가 삶을 ‘코드화’한 것이라면 배움은 장르들을 개별적, 감각적 기호들로 ‘탈코드화’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넘실대는 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34) 이때 수영하는 신체가 파악하는 기호들, 즉 물의 리듬, 물결의 세기, 온도와 깊이 등은 감각적인 것이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물결’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전쟁 같은 분위기’처럼 은유적으로 사용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실천적으로 배우려면 우리를 휩쓸어가는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캐치해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35) 이런 의미의 배움은 필연적으로―숭고가 아니라―매력과 관계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면 모든 기호와의 모든 감각적 마주침이 반드시 그 기호를 해독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기호가 우리를 감각적으로, 심지어 폭력적으로 휘어잡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자 한다. 캐이팝 해외 팬들이 먼저 가사나 대사를 외운 다음 의미를 이해하듯이(그러면서 순식간에 한국어를 배우듯이). 교실의 아이들이 신체적·언어적 기호들의 의미를 해독하듯이(그러면서 그 의미화의 과정에 개입하듯이). 사랑했던 사람의 차가워진 태도가 한참 나중에야 이해되듯이. 주체를 무장해제시키고 배움을 강제하는 미학적 힘/관심이 숭고가 아니라 매력인 이유는, 숭고는 이미 세계를 ‘풍경’으로 볼 수 있는―즉 대상에 거리 둘 수 있는―주체를 미리 전제하기 때문이다.36) 이런 전제는 배움이 경험적 세계에 휩쓸려 있고 얽매여 있는 아무개에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내가 들뢰즈에게서 가져온) 전제와는 어긋난다. 배움은 비자발적으로 발생하지만, 한번 발생한 배움의 선에 충실하면서, 그만두고 싶게 하는 유혹들, 한계들, 지배적인 기준들과의 마찰에 자신의 배움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배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인격/개인이 아니라 최소한의 일관성(충실성)을 갖는 집단적 배치이며, 앎의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배움의 운동 속에서 파악된다.


  p.s. 차후의 과제


  우리가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만, 모든 상처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배움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나는 정동적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명문화된 교육보다 그 자체로 ‘진보적’이리라는 보장은 없다(단지 더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 스승의 필요성이 나온다. 즉 스승은 특정한 앎을 전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배움이 삶을 향한 배움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배움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승이 일이 (앎을 통해) 배우는 자의 매혹을 깨뜨리는 것, 즉 계몽하고 탈신비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식한 스승은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을 잘 분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는 매혹과 실망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하고, 이 배움의 과정이 스승의 앎보다 중요하다. 특정한 앎의 기준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아직 앎에 못 미친 것, 지양해야 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을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두면 앎이야말로 배움의 잠정적 단계들, 수단들이 된다. 가장 큰 틀에서 나의 제안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식론적 질문이지만 후자는 인식·실천·미학의 경계를 무화하는 질문이다. 앎을 통해 배움들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들을 통해 앎을 수정해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뭍에서 수영하는 올바른 자세를 시연하는 사람은 참된 스승이 아니다. 오직 물결을 함께 해쳐 나가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많은 집회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가 울려 퍼졌는데, 집회 현장에서 듣는 그 노래는 ‘운동’의 감각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내가 중학교 때 많이 들었던―멜로디와 가사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했다. 나는 작년 923 기후정의 행진에서 그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췄는데, 비록 내가 춤을 너무 못 추는 나뭇가지이긴 해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오늘날 현실 정치가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되어가고 있다면, 반대로 팬덤 문화에서 모종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특히 북미에서 BTS의 공식 팬클럽 ‘아미’가 정치적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7) 최근 아르헨티나의 BTS 팬클럽은 자국의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와 강하게 대립하면서 다른 팬덤이나 야권 정치인과 연대하기도 했는데, 이런 연대를 촉발한 것은 밀레이가 트위터에 올린 BTS 비하(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긴) 발언이었다.38)

  매력의 경제 그리고 배움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문학적 사례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문단에서 많은 비평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소설의 ‘정치성’과 ‘미학성’에 대한 논쟁을 재점화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음의 두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로, 어떤 행위자들의 어떤 말과 행동이 그 작품에 대한 대중적 주목도를 끌어올렸으며, 그 책을 둘러싸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어떤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가? 고(故) 노회찬 의원이 그 책에 대해 남긴 메시지가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레드벨벳의 아이린과 배우 서지혜가 SNS에 그 책을 읽었다고 인증했다가 심한 악플 세례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화화 후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는 ‘#82년생김지영홧팅’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영화에 대한 응원이 쏟아지기도 했다.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둘째 문제는, 여러 계기로 그 소설을 읽게 된 수많은 독자가―한국의 정치적 지형과 성차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사회 분위기, 비평적 논쟁, 사회적 논란, 반페미니즘적 비난들과 분리할 수 없는―독서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이다.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첫 번째 문제는 작품을 접하거나 그것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여러 문화적 자극(홍보, 입소문, 인플루언서의 추천, SNS에서의 논란 등)과 독자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문화기술지적 접근을 허용할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러한 문화기술지를 수용하면서도, ‘우리가 작품에서 배운 것’에 대한 비평적 탐구의 가능성을 보존할 것이다. 배움의 운동은 매력을 통해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초과한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않았다 해도 매력, 배움, 실망 등의 개념들로 읽어볼 수 있는 많은 작품이 있다. 내가 여러 번 다룬 손보미의 작품들이 그렇고, 예소연이 최근에 쓴 연작소설들39)도 그러하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40)같은 작품도 그러하다. 이들을 비롯해 지금 성장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혹은 휘말릴 수 있는) 성장/도야의 방식들을 예증한다. 이런 소설들에서 우리는 니체적이라고 할만한, 약간 광적이고 ‘귀족적’인 가치전도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자기 입법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보편 이성’이 아니라 삶의 시련들―배우는 자를 광기로 몰아가는 시련들―을 통과한 자의 자기 확신이며, 이 확신이 배우는 자에게 지배적인 가치와 도덕을 괄시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들은 배움이 안온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배움의 과정은 동시에 실존적 상처의 치유와 관련된다.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를 통해 인물을 짓누르던 지배적 가치들은 무의미해지고, 무가치한 시간, 유예된 젊음, 허송세월, 외롭고 비참한 순간들, 자신을 상처 입힌 진실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치유는 고통을 억압하고 적대를 숨기는 ‘치유 이데올로기’와 반대되는 것이다. 성장소설들은 우리 자신의 실존적 상처가 얼마나 많은 타자와 연루되어있는지, 얼마나 많은 폭력과 연루되어있는지 드러내는데, 이 드러냄의 과정이 곧 치유이다. 이러한 연루됨 없이는―특정한 앎의 축적은 있을 수 있어도―배움은 있을 수 없다.

  잠깐 곁길로 새자면 내가 통계적으로 속한 세대(소위 MZ)의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애매한 위로가 아니라 진정한 치유이다. 즉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남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사세요’라는 위로의 말은 이미 상처받고 분열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중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나는 왜 남의 시선을 자꾸 신경 쓸까? 나는 왜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까?’ 이런 죄의식은 쉽게 냉소나 원한으로 전치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등용, 결혼, 취업, 육아, 정치활동, 공적인 발화 기회 등)는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고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 어른으로 정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적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상태로 유예되고, 이중화된 형상으로―한편으로는 조숙하고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로, 한편으로는 다른 이를 보살피거나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로―재현된다. 역사적으로 성장소설은 이렇게 어른도 아이도 아닌 ‘미성년 상태’41)를 배움의 주체적 가능성으로 취해왔으며, 우리가 방황하거나 허송세월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정말로 중요한 배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배움이 있었음을 증언해왔다. 배움의 이론은 이러한 증언을 집단적·시대적 수준에서 보호하고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주어진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되느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지 재현되는 대상, 통계적 분류의 대상일 것이다. 이러한 재현/대표, 통계적 분류들―이를테면 ‘이찍남’ ‘일찍녀’―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러한 재현을 통해서는 기성 권력의 재현적 틀을 공고히 하는 갈등과 반목, 분열이 끝없이 깊어질 뿐이다.

  ‘세대와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내가 다시 다뤄보고 싶은 주제는 나 자신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의 페미니즘적 배움에 대한 것이다.42) 이미 많은 사람이 다룬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논할 수 없었는데, 매력과 배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선행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후에 그 문제를 별개의 글로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실망은 매력만큼 중요하게 이야기될 가치가 있다. (그런 이론을 정말로 구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배움의 이론의 윤리성과 정직성을 담보하는 것은 매혹보다는 실망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실망의 공동체’가 우리를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고, 모든 갈등이나 적대가 사라진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품게 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강한 정치적 조직화를 허용하는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력에 대한 충분한 고찰을 한 다음에야 실망을 논할 수 있다는, 그렇게 차례를 지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매혹되기도 전에 실망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배우는 자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이다. 매력은 우리를 휘어잡는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를 예속한다. 그러나 매력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매혹이 실망으로 끝날지라도, 매혹과 실망을 통해 우리가 얻은 배움은 허상이 아니다. 하지만 배움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쓰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지 못한다.

  •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219.
  • 2)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5. p. 198. ‘파토스적’이라고 번역된 pathologique를 ‘병적인’으로 수정함.
  • 3) 「매력의 경제학」, 《문장웹진》, 2022년 2월호.
  • 4) 안희제, 『망설이는 사랑―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오월의봄, 2023, pp. 38~40 참조. 이 책은 ‘덕질’의 경험 속에서 아이돌 팬들이 어떤 매혹과 실망을 경험하고, 윤리적 고민과 자기 배려를 하는지 알려준다. 이 책은 ‘매혹의 네트워크’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조사이기도 하다.
  • 5) 「매력의 경제학」
  • 6) 칸트, 『판단력비판』, pp. 218~19.
  • 7)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년 하반기호, pp. 102~09.
  • 8)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pp. 191~92.
  • 9)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p. 47~50 참조.
  • 10) 한편으로 이 주장이 모든 비판적 가르침/교육법pedagogy을 ‘배타적’으로 거부하면서 배움의 다양성과 수평성을 상찬하는, 듣기 좋은(기만적인) 소리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듣기 좋은 주장은 또한 비평에 어떤 급진적인 변화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대한 엄격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배움과 비판 사이에 ‘배타적 이분법’을 설정하지 않았다. 일전의 글(「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서 나의 진단은 단순히 비판이 너무 약해져서 강해져야 한다거나, 너무 지나치므로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진단은 “‘비판이야말로 정당하고 엄정한 방법’이라는 식의 전제가 많이 약화됨에 따라 그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게”(p. 92)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누차 강조했듯 어떤 의미에서든 비판을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침체되고 관습화되어 힘을 잃거나, 왜곡되어 범람하는 비판이 배움을 통해 적실성을 얻고 활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판은 비판을 통해 긍정될 수 없고 배움을 통해 긍정될 수 있다”(p. 107). 다만 나는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근거로 배움을 내세웠으므로 어떤 비판적 문법이 관습화되어 배움을 경색시키는 경우라면 그 비판적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11) 손보미, 『작은 동네』, 문학과지성사, 2020, pp. 115~16, pp. 116~17.
  • 12) John Terrizzi Jr, NAtalie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Does Shame Emerge From an Evolved Disease-Avoidance Architecture?” Front. Behav. Neurosci, 14, 2020 참조.
  • 13)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참조.
  • 14) Simone Schnall, Jonathan Haidt, Gerald Clore and Alexander Jordan, “Disgust as embodied moral judgment”, Pers Soc Psychol Bull. 34(8), pp. 1096–1109 참조.
  • 15) J. Terrizzi Jr, N.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p. 2에서 인용한 폴 길버트Paul Gilbert의 주장. 물론 매력적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진화된 ‘본능’일지라도,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다.
  • 16) 따라서 소수자는 특히 수치심에 취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인상적인 글로는 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퀴어 부정성과 시각문화』, SeMA, 2023의 「들어가며: ‘젠더 문제’」(pp. 7~15)와 「슬픈 퀴어 초상」(pp. 17~43) 참조.
  • 17) 이 문제에 대한 생각에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가 많은 도움을 줬다. 아마 매력의 경제는 ‘생명 정치’와 다르면서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 같다. 푸코에게 생명 정치는 국가가 보건과 건강을 이유로―발전한 근대 의학과 촘촘한 사회 기반 네트워크,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인구’ 전체를 통치 대상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전혜리 옮김, 난장, 2012 참조). 매력의 경제는 그러한 안정적 관리를 넘어―특히 발전한 인터넷망과 SNS를 통해―어떤 존재/콘텐츠가 문화에 더 많이, 더 쉽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고, 그러한 기준에 맞는 기호들의 가속화된 소비와 생산, 변덕스러운 투자를 부추긴다. 이러한 경향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전시하는 알고리즘과 그것을 활용하는 플랫폼들, 신체와 관련된 산업 복합체(성형, 피트니스, 콘텐츠, 식품 산업 등)과 체계적으로 관련된다.
  • 18)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pp. 120~38 참조.
  • 19) 질 들뢰즈, 「작품으로서의 삶」, 『대담』, 신지영 옮김, 갈무리, 2023, p. 185.
  • 20)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매력을 둘로 나눈다는 이 과제가 번역상의 모호함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가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미셸 페어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국에서 “매력 자본”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이다(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이런 개념들이 지금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기묘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여러 자극과 관심이 분화되지 않은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개념 자체에 체계화될 수 없는 모호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21)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서창현 옮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pp. 21~35 참조.
  • 22) 하지만 두 매력 사이의 번역이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젊은 화가는 당장 감각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회화 작품을 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매력적인 투자 상품이 되려면―예술가 자신의 자기 홍보, 다른 예술가나 기관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평론가들의 평가, 전시와 경매 이력, 구매자들의 입소문 등을 거쳐야 하기에―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반드시 그렇게 번역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 23) 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페어의 논지와 ‘피투자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피투자자의 시간』의 역자이자 사회학 연구자인 조민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페어의 주장은 명쾌하고 유익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음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무엇이 그러한 저항을 ‘욕망’하게 하는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우리에게 단지 투자나 자기 홍보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하는가? 무엇이 매력의 지배적인 기준을 갈급하게 좇기보다 그 기준에 저항하기를 욕망하게 하는가? 한마디로 어떤 과정, 어떤 사건, 어떤 마주침이 우리에게 그러한 저항적 주체성을 부여하는가?
  • 24) 미셸 페어,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욕망」, 조민서 옮김, 『문학과사회』, 2023년 봄호, pp. 358-81.
  • 25)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p.56.
  • 26)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참조). 그런데 사실 장르의 문법들을 결정하는 상위의 메타장르는 존재한다. 그것은 금융자본주의이고, 나는 매력의 경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다.
  • 27)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되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이기 이전에 정동적인데, 이런 정동적 차원을 배움·교양의 동시대적 조건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지식인에게는 그런 감정에 휩쓸린 사람들이 ‘반지성주의’에 빠진 바보들이나 괴물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바로 그 ‘야만적’인 차원 속에서 다른 배움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느냐이다.
  • 28) 『판단력비판』, 백종현의 56번 역주(p. 218) 참조.
  • 2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 30) 같은 책, p. 66, p. 67.
  • 31) 알렌카 주판치치, 『왓 이즈 섹스?』, 김남이 옮김, 여이연, 2021, 특히 3장(pp. 72~143) 참조.
  • 32)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73.
  • 33) 질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 34) 들뢰즈, 『차이와 반복』, p. 72.
  • 35)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3, p. 50.
  • 36) 칸트, 『판단력비판』, pp. 275~77 참조.
  • 37) 김영화 기자, 「전 세계 풀뿌리 운동 에너지원 BTS 팬덤 ‘아미 액티비즘’」, 시사IN, 2022.08.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128
  • 38) 조성호 기자, 「BTS·테일러 스위프트 팬, ‘아르헨의 트럼프’ 집중포화」, 조선일보, 2023.10.31.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mideast-africa-latin/2023/10/31/TDUXWIPG2BCPDJMOMZ3RHK4OZ4/
  • 39) 예소연, 「아주 사소한 시절」, 『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4~80; 「우리는 계절마다」,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pp. 308~28.
  • 40)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pp. 273~312.
  • 41)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 대립시켰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 28 참조.
  • 42) 나는 지금으로부터 칠여 년 전에「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의 진단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모순(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에서 기인한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성의 특정한 환상―즉 여성혐오―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불거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그 글은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을 과장되게 모방하고 있는데, 현재 나는 그런 이데올로기적·구조적 분석보다 집단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배움들에 더 관심이 있다.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 《월간 틀》,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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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요절의 윤리와 미학 ― 차도하와 김희준,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로부터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월간 현대시 최진석 요절죽음윤리미학종말형상화응시실존부재 2025
오형엽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월간 현대시 오형엽 미분적 시선시차(視差/時差)적 공백모티프미학적 특이성구조화 원리안태운 2025
유계영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1) 유계영 오래되고 낡은 여관 서윤후는 끝을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을 본다. 설명하자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일에 대하여 정말로 그렇게 한다. 내가 윤후에게 자주 놀라고 믿을 수 없어 하는 부분이다. 대체로 나는 안팎에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작심하는 일이 드물다. 설령 작심한다 해도 3일은커녕 3시간도 마음먹은 것을 지키지 못하는 작심삼일 유형의 표본이 나이고,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오십보백보라는 안일한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윤후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뒤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변모한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김소연 시인은 윤후의 이런 점을 가리켜 나보다 훨씬 정확한 언어로 앞서 표현한 바 있다. 서윤후는 내가 오래 상상하며 기다려온 시인의 초상에 아주 근접한 사람이다(…) 원칙을 만들고 원칙을 지키며. 인간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며. 유연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근본적이게….2) 그런데 고쳐 쥔 마음을 행동과 태도로 번지게 하여 부지런히 자기 갱신을 이루는 윤후를 떠올릴 때, 나는 숭고하기까지 한 존경심과 함께 슬픔에 빠진다. 내게 각인된 친구 서윤후의 몇 가지 장면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인 서윤후의 저작을 천천히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이 어떤 고요한 짓눌림을 동력으로 삼는지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고요한 짓눌림을 존재통이라고 부른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내면의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심지어 육체의 생명감으로부터, 고요히 짓눌린 감각. 다시 말해 존재통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걸 알기 때문에 윤후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세운 원칙들과 그것을 지켜나가며 이륙하는 생활이 활발해질수록 나는 좀 슬프기도 한 모양이다. 서윤후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좌절이나 힘든 일에 대해 좀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없어 내게 문책당하곤 했다. 나름대로 친하다고 믿는 사이이므로 짜증스러운 일부터 깊은 고민에 이르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내가 밑진다고 느껴 심술을 부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으레 산다는 게 그렇다는 듯 노승처럼 허허실실로 웃곤 하는데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집요하도록 자극하긴 해도 늘 어른스럽게 보였다. 나한테 말해주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이 어딨어? 따위의 말로 나의 경박함을 자인한 후, 요즘 윤후와의 대화는 생활의 귀여움과 사소한 재미를 나누는 방향으로 산뜻하게 옮겨갔다. 부정적인 판단에 근거한 가십거리를 늘어놓지 않겠다는 결심이 마땅한 상처를 계기로 수립되었겠거니. 윤후가 그러기로 한 것은 좀체 흔들리는 법이 없으므로 새로운 대화의 장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군.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부지런히 내어놓는 저작들을 따라 읽으며 몰랐던 그의 마음을 선명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느끼는 존재통은 친구와 키득거린 뒤 홀가분해지기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담의 형식과 문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개방된 여관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 마음을 여관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떤 방에는 수년째 장기 투숙을 하는 친구가 살고, 어떤 방은 금방 왔다가 떠날 사람들이 쓴다. 공실. 방안을 쓸고 닦으며 빈방에 홀로 있는 내가, 이곳에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아프고 기억하고 싶지 않고 화도 난다. (…)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오면, 언제나 영업 정지 위기에 놓여 있는 마음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마음에 관여하는 일. 그것이 나의 오래되고 낡은 여관, 여인숙 같은 것을 운영하고 지켜 가는 일이다.3) 그의 시집들을 톺으며 시인 서윤후의 시 세계에 따뜻한 표지를 세워주는 일은 이다음 이어지는 지면의 몫이겠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산문 세계를 말해보고 싶다. 시인에게 시 세계의 방위는 현실 너머다. 거칠거칠한 현실의 표면에 상처투성이 발을 심고서 탐스럽고 뽀얀 발꿈치 같은 달을 향하여 고개를 치켜드는 일이 시 쓰기다. 그렇다면 산문 세계는 현실의 표면에 넓게 드리워져 있다. 짐작건대 거칠거칠한 현실의 표면을 걷다가 문득 마주하는 삶의 싱싱함과 애틋함에 환한 눈길을 건네는 일이 산문 쓰기일 것이다. 투박한 가늠이겠지만 다섯 권의 산문집을 출간한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가 자신을 에워싼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정성스러운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어림할 수 있다. 서윤후에게 현실의 중요한 영역으로써의 마음. 그는 그곳의 문을 언제나 개방해 두며 성업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밀접하기보다 스스로 내밀해지기를 택해왔다. 직접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훌쩍 떨어져 사람들을 추억하는 것 또한 새로운 만남이라 믿는 것이다. 윤후에게 산문 쓰기란 자신을 몰아세우는 괴로운 일들과 힘에 부치는 날들을 백지 위에 고백하는 것으로 마음이 허름해지지 않게 깨끗이 닦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실책을 정비하고 조약을 세우고 사랑의 순간들을 목록화하여 그것을 지켜내는 날들. 윤후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을 정말로 그렇게 하며 마음의 내벽을 튼튼히 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쓰기를 통해 변모한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서윤후의 오래된 일상의 제의인 일기 쓰기, 나아가 산문 쓰기는 도약을 위해 움직임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내밀한 쓰기를 들여다볼 때 나까지도 희망에 들뜨는 것이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세우고 나 자신을 부축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다고 삐죽거리던 나는 윤후의 산문을 읽으며 자주 부끄러웠다. 여행지에서 크게 다투고 격조한 두 청년이 서로의 시를 맞바꿔 읽으며 말없이 화해하는 별난 모습은, 내가 서윤후의 첫 산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 중 하나다. 문학을 읽을 때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밑 소통, 바깥의 언어 질서와는 다른 방식의 깊은 소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장면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훤히 드러나 부유하는 얇은 사실 속에서, 진실의 형체를 새로이 빚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실존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의 뒤안길에서 일렁임으로 머물러 있다.4) 그리고 첫 산문집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8년 후 나온 최근작에 이르러 다른 밀도의 단단함으로 변모해 돌아올 때 시인 서윤후의 독자로서 나는 깊은 신뢰를 느낀다. 그의 언어가 어떻게 삶이 되어가는지 지켜보며 기꺼이 동참하게 만든다. 너의 알록달록 내게 적록 색약이 있다는 것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할 때 알았다. (…) 그 이후로 나는 색깔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색깔의 뚜렷한 구분에서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었고, 알록달록한 색 조합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첫 시집에 실었던 시 <퀘벡>은 그때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다.5) 서윤후가 처음 엮은 산문집은 여행에서의 사진과 산문을 엮은 책 『방과 후 지구』다. 돌이켜보면 나는 활자에 진입하기도 전에 압도되어 조금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그가 찍은 사진들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형형색색 생기 있게 조화를 이루는 색감이 마치 회화 같았다. 이 여행 산문집에서 얻은 시각적 강렬함 때문인지 나는 한동안 윤후를 세련된 감각과 아기자기한 안목을 지닌 소년 정도로 라벨 붙여두는 경솔함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출간된 산문집에서 그가 나와는 다른 색채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사진과 그의 취향으로 선택된 사물들이 왜 그렇게 화사한 채도를 가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이 그를 꼼짝 못 하도록 제약하는 일이 되기보다는 더 쨍한 감각을 향해 열리게 한다는 사실은 물론, 그가 느끼는 색채의 시야가 외려 그를 알록달록하게 비추고 있다는 것 역시, 새로 알게 된 것들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통학 버스 타러 가던 길에, 봉고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내 시를 읽어주던 선생님이었다. 창문을 내리고는 내 시가 적힌 종이를 펄럭이며 내게 무슨 말을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시에 쓴 어떤 단어 대신에 이런 단어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었고, 나는 차 엔진 소리와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알아듣진 못했으나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버스에 올라타 생각했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게 차를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6) 휴가철을 맞이하지 않아도 짬짬이 여행을 떠나는 윤후에게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물었을 것이다. 여행이 왜 좋으냐고. 일상을 벗어난 일탈 뭐 그런 것이냐고. 윤후는 내게 곰곰이 헤아려보려는 기색도 건너뛰고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을 사는 건 똑같아. 주방이 있는 숙소에서는 밥을 짓고, 그러기 위해선 시장에 가고, 세탁비누를 사 온 뒤에 빨래도 한다고. 물론 원고도 쓴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지 성실하다 말해버리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손쉬우므로 제일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반복을 지키려는 이 순정한 태도를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윤후에게 일상의 반복은, 정주하다 때때로 떠나 후련해지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떠나며 옮겨가며 부유하며 때로는 돌아오며, 일상의 둘레를 키워가는 것. 서윤후가 지키는 일상의 반복은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까지를 마땅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윤후에게 시가 있다는 것. 봉고차를 세우고 적절한 낱말을 선물처럼 쥐여주고 간 그의 선생님처럼, 일상의 반복을 잠깐 멈춰 세우고 껌뻑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시가 있다는 것. 이게 일상을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되물을 겨를도 없이 그를 일상으로부터 들어 올리는 시가 있다는 것. 사방으로 둘레를 넓히는 수평의 전진과 생활로부터 튀어 오르는 수직의 비상 사이에 책상을 하나 놓고서. 서윤후는 생각하는 듯하다.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라고. 나는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혔다가 깊이 안심한 뒤 영문 모를 환희를 느끼곤 한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이라면 나름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어서이다. 고창과 전주를 배경으로 한 윤후의 어린 시절도 이따금 상상해 본다.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돌봐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슬퍼서 우는 것이 걱정 끼치는 것이 될까 봐 아랫입술을 꽉”7) 물고 있는 서현동 어린이를. 아는 것이 많아서 혀가 묶여버린 이 어린이가 진짜 모르겠는 시의 언어를 만나 다시 천진해지는 과정을. 시의 언어를 통해 어린이를 되찾은 것은 십대가 끝날 무렵의 일이었으니,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서윤후는 일찌감치 알아버렸을 것이다. 쓰게 되었으니, 쓰기로 한다8) 대학 시절부터 친구 사이인 서윤후와 구현우, 그리고 이설빈과 나. 우리들은 ‘스물아홉 이서구’ 활동으로 만나 서로를 얄미워하고 용서하기를 거듭한 끝에 얼추 죽이 맞게 되었다. 우정과 무관심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드물게 만나는 동안, 시간은 뒤죽박죽 흘렀다. 우리들은 윤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주에 여행 간 적이 두어 번 있는데, 모두 겨울의 일이다. 비교적 오래된 일이고 심각하게 형편없는 나의 기억력에도 첫 방문에서 윤후가 고른 숙소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 그는 확실히 노련한 여행자다. 노란 장판과 붉은 나무 문틀이 정감 있지만 무척 낡은 구옥. 우리 머릿수에 비해 공간은 지나치게 넓었고, 가구랄 것 없이 썰렁했으나 지글지글한 방바닥은 참 좋았다. 그때 나는 내심 더 쾌적하고 그럴듯한 숙소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한데, 세련되고 편리하며 보기 좋은 숙소의 기억이 유독 앙상한 것을 생각한다면 윤후의 선택은 늘 나보다 옳고 재미있는 쪽으로 흐른다. 기억을 오래 다루어본 솜씨는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여행에서 늦은 밤까지 취하도록 마시거나 게임을 하기는커녕, 큰 방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 지렁이 젤리 따위를 한두 봉지 펼쳐놓고 이야기나 좀 나누다 제각각 흩어져 잠들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두 번째로 방문한 네 사람의 전주는 어쩐지 윤후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멋진 경치의 공원을 보여주겠다며 데리고 간 공원이 하필 공사 중이었다. 덕진 공원은 광활한 호수 수면이 연꽃으로 가득 뒤덮이는 곳이라 했다. 호반을 뻗어나가는 다리 끝에는 마치 수면 위에 지어진 듯 한옥 도서관이 둥실둥실 떠 있고, 일대가 모두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겨울에도 울창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물을 다 뺀 호수의 까만 흙바닥. 말라죽은 연꽃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부러져 제멋대로 꺾인 줄기들.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촉루처럼 나뒹구는 연근들. 윤후를 제외한 우리는 신나게 웃었다. 일부러 시커먼 호수의 바닥이 보이는 자리로 가 사진도 마구 찍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후는 정말이지 서운한 눈치였다.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듯이. 아냐, 이게 더 좋아. 계획대로 안 되는 게 훨씬 재미있지. 이럴 때 아니면 호수의 밑바닥을 언제 보겠어? 같은 위로에도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그때의 표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흥을 망치지 않으려 애써 마음을 누르는 표정을. 계획성이 철저한 사람이 계획과 어긋난 상황에 드러내는 초조한 그것과 달리, 마음으로 깊게 침잠하는 다른 채널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윤후는 노련한 일상 여행자가 틀림없다. 그의 킨츠기 문법으로 다시 바라보게 될 이 순간을 고대하게 하므로. 실패와 실망의 무수한 훼손에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쓰는 것이 모든 것의 제자리임을 아는 책상 앞의 시간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헤아리는 데 필요한 자기만의 도구가 있으리라고. 깨진 자리로부터 다시 깨지기 마련이겠지만, 깨진 것은 별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고 다시 깨진 자리로 도약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문법이다.9) 1) 서윤후 산문집『방과 후 지구』(2016, 서랍의 날씨) 작가 소개에서 빌려옴. 2) 서윤후 산문집 『햇빛 세입자』(2019, 알마) 표4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에서 빌려옴 3) 『방과 후 지구』, 「홈커밍데이」, 225-226p. 4) 서윤후 산문집 『쓰기 일기』(2024, 샘터), 「당신과 당신의 가장 문학적인 것」, 187p. 5) 『햇빛 세입자』, 「흑백 일기」, 194p. 6) 같은 책, 「겨울잠 주무시는 선생님」, 90p. 7) 『햇빛 세입자』, 「수직과 수평」, 33-34p. 8) 『쓰기 일기』, 「시가 쓰고 싶게」, 153p. 9) 『쓰기 일기』, 「킨츠기와 문학」, 123p.

월간 현대시 유계영 서윤후 시인시인의 산문서윤후 산문론자기갱신킨츠기 미학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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