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 예소연에 대한 노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 예소연에 대한 노트1)
1. 돌봄과 고독
예소연의 소설을 읽으면 상충하는 힘들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상대적으로 긴장을 해소해 주고 화해의 국면에 도달한다. 반면 어떤 소설은 완강한 충동,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도가 두드러지며, 그것이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다정하게 헤어짐을 그리지만, 어떤 소설은 비장하게 고통스러운 공생을 그린다. 애틋한 공감을 자아내는 일상의 묘사가 있는 한편, 세속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연도 있다. 물론 한 작가의 소설들을 두 측면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예소연의 소설을 따라 읽다 보면, 그의 소설이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이 모순이 작품들에 뜨거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이 에너지는 모순이 모순이 아니게 되는 지점까지, 양극단에 있는 듯 보였던 것이 엉키고 뒤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막 주조되고 있는 작품 세계의 생명력과도 같은 이 뜨거운 불순함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의 방법으로, 이 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돌봄과 고독이다.
돌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을까? 먼저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에 대해서. 「우리 철봉하자」에서 동갑내기 친구 맹지는 ‘나’에게 자기를 돌보라고 촉구한다.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pp. 162~63). 여기서 맹지가 ‘나’에게 주문하는 것은 ‘너 자신을 알아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돌아봄, 반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 돌봄을 위한 관문이다.
왜 맹지는 ‘나’에게 자신을 돌보라고 말했을까? 맹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나’도 채팅 앱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데 소설에 그려진 정황을 보면 남자들은 사랑할만한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님을 알면서도 남자와의 일회적 만남을 반복해왔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섹스하며 견딜 수 없는 마음을 키워”(p. 163) 왔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로움 혹은 공허함을 자신과 닮은 동갑내기인 맹지와의 관계로 해소하려 한다. ‘나’는 맹지에게 같이 살자고 어필하는데, 그러면서 다소 무턱대고 맹지의 생활에 침투(?)한다. “너를 돌봐야 해”라는 맹지의 당부는 ‘나’의 구애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당부는 다정한 것이지만 뼈아픈 구석이 있다.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
둘째는 아픈 가족의 간병처럼 가까운 타인에 대한 돌봄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나’는 자신의 아버지 ‘태수 씨’를 돌본다. 태수 씨는 암 투병 중이다. 여기서 돌봄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이다. 그러나 돌봄이 가까운 이를 간병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그 개와 혁명」이 감동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돌봄이 누군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러한 앎은 더 풍부하게 관계할 수 있게 하고 더 공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드 라 벨라카사가 “돌봄의 문제matters of care”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돌봄은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계를 두텁게 하는 실천이면서, 앎과 무지의 경계에 개입하고 관여하는 인식론적·정치적 실천이기도 하다.3) 소설에 그려진 정황은 태수 씨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범주화(86세대, 운동권……)를 허용하지만, 그러한 범주화가 “한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태수 씨의 장례식에서 독자적인 연극을 진행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그 역사를 이어 쓰면서 변형을 가하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새롭게 해볼 수 있을까? 돌봄과의 관계 속에서 고독은 특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돌봄은 관계 지향적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고독한 사람이 보살핌과 관심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하고, 고독 속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고립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고독이 해소되려면 누군가의 삶은 보일 수 있고, 이야기될 수 있고, 설명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번역-설명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손실이, 모종의 소외가 일어난다. “아빠가 그런 내 어깨를 붙잡고 얼른 설명해보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는 계절마다」, p. 317). 고독은 우선 ‘설명할 수 없음’으로 체험되고, 고독한 자는 설명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단념의 시간을 거친다. “친구에게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며 고작 그들이 원할 만한, 그럴듯한 비밀만 털어놓는 청소년이 되었다”(「아주 사소한 시절」, p. 80).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고독한 자의식은 ‘어차피 말해봐야 너희들은 모를 거야’ 같은 오만함과 연관되는 것도 사실이다. 설명 불가능성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특권적으로 과장하는 면도 있고, 반대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어떤 오만에 의해 보상되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독한 사람은 설명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데, 애초에 설명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을 이해해야만 해소될 수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고독은 이러한 모순 속에 기거하는 상태이다.
보살핌과 관심을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독한 사람은 그야말로 어려운 “돌봄의 문제”다. 「사랑과 결함」의 화자에게 고모는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 아닐까? 고모는 연민을 자아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위엄을 지닌 사람이다. 고모는 ‘나’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힘겹게 하고 미움을 느끼게 하며 심연에 휩쓸리게 하고, 관계를 가학적인 게임으로 만든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모순은, 고독이 매혹과 관련 있으며, 때로는 그 자체 매혹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에서 화자는 말한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일 강렬하게 나를 매혹했던 주제는 그것이었다. 죽음과 은총. 완전히 생을 망각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p. 69). 「사랑과 결함」의 어린 화자는 고모의 향정신성 약을 한 움큼 삼킨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잃어갈 때 “몹시 충만하고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p. 94). 형언할 수 없는, 세속의 언어를 초월하는, 끔찍하면서도 황홀한 죽음의 경험. ‘죽음의 경험’이라는 말은 가장 오래된 모순을 품고 있는데,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경험, 다른 모든 경험의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론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소통할 수 없는 경험이다. 고독은 이러한 경험에 강박된 트라우마적 매혹과 관련이 있다.4) 일찍이 모리스 블랑쇼는 이 점을 간파하고 깊이 파고들었다. 이미지에 대한 애착인 매력은 고독에 상반되지만, 기이하게도 가장 강렬한 매혹은 고독 그 자체이다. 그러한 매혹이란 “고독한 전능과 마주하고 있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어떤 종류의 해방인데, “사실은 자신을 벗어나 빠져들게 되는 데서 오는 해방”, 즉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5) 블랑쇼가 암시하는 것은 매혹의 본체가 다름 아닌 죽음 충동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소연의 소설에서 매혹과 고독과 죽음의 묘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지니면서부터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주변을 맴도는 애타는 방황의 과정이 된다.
「사랑과 결함」의 고모가 ‘나’에게 전승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런저런 요인으로 설명되는 병(우울증)이 아니라 설명할 길 없는 고독일 것이다.
2. 나의 말이 아니면서 나의 말인 것
우리가 고독을 느끼거나 죽음에 매혹되는 이유는 우리가 ‘나’의 한계(이것은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문학의 원동력인 것도 같다. 소설에는 일인칭을 사용하면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이 있다. 먼저 간단한 방식은 복수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재」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독자는 교차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화자들을 통해 할머니와 손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도 그의 마음속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좀더 복잡한 방법도 있다. 「사랑과 결함」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나’가 말한다. 그러나 이 ‘나’는 이미 한 사람이 아니다.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랑과 결함」의 첫 문단을 보자.
잠을 많이 자면 머리가 이상해진다. 그런데 나는 그 이상해지는 느낌이 좋다. (p. 72)
그리고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고모가 나에게 한 말 중 유일하게 동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곳)
독자는 이 세 문장을 연달아 읽으며, 소설의 화자가 어쩌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리라는 것, 그리고 이 소설에서 고모가 중요한 인물이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단의 연속된 배치는 한층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 문단의 ‘나’는 고모인가 화자인가? 그러니까 저 두 문장은 고모의 말인가 나의 말인가? 물론 “고모가 나에게 한 말”이다. 분명 저 문장을 화자가 말하기 이전에 고모가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아닌 고모의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 말은 화자가 의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어서 화자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 앞서 타자의 말이었지만, 이제 나의 말이기도 하다. 고모의 입에서 ‘나’의 입으로 전해지는 성찬식 빵처럼, 고모의 말이 ‘나’의 말이 될 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을 겪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구성하는 타자를 미워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에게서 부모와 닮은 부분을 발견하고 몸서리치듯이. 하지만 그것을 도려내 없애려 한다면 ‘나’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타자가 없다면 애초에 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증보다 더 복잡한 관계 속으로 말려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타자의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하는 일, 그러면서 타자의 말이 나를 구성하도록 하는 일―거기서 오는 모든 치명적인 뒤엉킴을 감내하는 책임과 정직함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 특히 핵심적인 윤리이다. 또한 (유전자나 재산이 아니라) 말의 전승, 이것은 특히 문학적인 가능성인데, 그러한 전승은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과 「우리는 계절마다」는 연작으로, ‘어둠의 성장소설’이라 불릴 만하다.6) 상승이나 화해보다 갈등과 고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대해서는 가능하다면 별개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싶다. 이 글에서는 「우리는 계절마다」의 마지막 부분만을 살펴보겠다. 거기서는 독특한 ‘교육’의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이 연작소설에서 선생이나 부모는 스승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위험하고 내밀한 스승이 존재한다.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은 미정 엄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순리를 강요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희조[연작소설의 화자]의 세상에 그렇지 않은 단 한 명의 존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7) 미정 엄마는 다른 어른들과 좀 다르다.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이 마땅히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체면이나 권위, 도덕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담대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힘은 그의 삶이 정상적인 궤에서 이탈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딱 갖출 것만 갖춘 전형적인 젊은 엄마”(p. 318)처럼 보였으나 남편의 죽음 이후 주체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미정 엄마는 미정의 병실에서, 병문안하러 간 윤다혜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부른 건.”
미정의 엄마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네는 결코 걸레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어쩐지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미정 엄마에게서 어떤 어른다운 힘을 느꼈다.
“자, 따라 해봐. 나는, 걸레가, 아니다.”
(……)
나와 윤다혜는 뜻 모를 그 말들을 천천히 따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자 윤다해도 훌쩍거렸다.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이상한 주문을 외며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미정 엄마가 침대를 빙 둘러 와서 나와 윤다혜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살아. 그렇지만 결코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단다.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활력을 되찾았어.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pp. 327)
이 대목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기묘한 (매우 치명적으로 뒤틀릴 수도 있는) 의존 관계를 보여준다. 미정 엄마는 아이들이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바로 그 말(“걸레”)을 과감하게 취하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준다. 이것이 그의 “위엄”이자 “어른다운 힘”일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당당함은 자기 삶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기묘한 공모 관계다. 가르치는 자는 분명 배우는 자에게 어떤 힘을 주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었던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줌으로써 비로소 자신도 힘을 얻는다. 스승의 말은 아이들이 끔찍한 현실을 직면케 하지만, 동시에 말의 반복을 통해 그 현실의 지배력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말의 놀라운 힘이 아닌가? 사람을 예속하고 상처 입히는 그만큼 치유할 수도 있는 악마적인 힘. “걸레”라는 말이 ‘나’를 예속시키고, 호명이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수치스럽게 한다면, 그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할 때, 말이 갖는 예속의 힘은 경감될 뿐 아니라, 나를 강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반복을 지시하는(“따라 해봐”) 타자의 말이 필요했다. 몇 페이지 뒤에 나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치유의 현장에서 벌어진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p. 328)
소설의 결말인 이 자립의 다짐은 타자와 자기의 온건한 화해와는 사뭇 다른 결론이다. 출발점에 있는 자기가 자기의 부정(타자)을 마주해 갈등과 분열을 겪고 더 높은 수준에서 통합(화해)되는 것이 가장 상투적인 도덕적 변증법이다. 예소연의 연작은 그러한 도덕적 교훈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연작에 그려진 윤리적 변화는 타자의 압도적인 우선성으로부터 ‘자기’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기원에 있는 자기란 없기에 자기는 양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되어야 하는 무언가이다. 하지만 이 창조는 철저하게 타자에 빚지고 있다.
분명 우리를 자기로 ‘만드는’ 것은 타자의 말이다(미정 엄마 같은 ‘어른’은 아니었지만, 또 어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철봉하자」의 맹지도 이러한 타자이다). 이렇게 자립을 명령하는 타자들을 스승이라고 한다면, 한 인간의 자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스승이 필요할까? 마치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같다. 예소연의 소설에 그려지는 전이와 전승은 다음의 역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자립한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이다. 자립을 돕고, 촉구하고, 명령하는 타자에 대한 의존 없이 인간은 자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립은 의존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왔고, 그만큼 (의존성을 격하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비판받기도 했다. 예소연의 소설은 자립이나 의존 중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함이란 곧 의존함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한편 예소연의 소설에 종종―사연 있을 뿐만 아니라―‘위엄 있는’ 어른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예소연 소설의 어른들은 모범적인 ‘롤모델’이나 귀인들로 이상화·낭만화되어있지 않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기득권’처럼 단순히 적대시되고 고발되는 대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은 표면적으로 애증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의 양상을 뜯어보면 ‘사랑과 미움’의 양가성보다 더 복합적이다.
3. 말 없는 포옹
「사랑과 결함」에서 고모의 고독은 “소박맞은”(p. 80) 그의 처지라든가, “모계유전”(p. 96)이라든가, 호르몬 이상에 대한 의학적 진단이라든가, 이런저런 사회적 이유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설명될 수 없는데, 고독한 자는 그러한 환원과 설명 때문에 더욱 소외될 뿐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악화시킨다면, 그것은 유익하거나 좋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더 잘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할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는 식으로 겸허하게 물러나야 할까?
이 문제는 화자의 전 남자친구 수와의 관계에서 어떤 딜레마,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딜레마로 나타난다. 화자는 수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수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정해둔 한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너머의 문제는 회피하는 듯하다.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p. 85). 화자는 수가 고모의 ‘금융 문제’를 도와준 일에 대해 그의 진의를 추궁한다.
“귀찮았잖아. 괜찮아. 나도 귀찮았어, 평생.”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평생 그 외로움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니?” (p. 95)
반대로 수는 화자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듯하다. ‘진정함’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타인에 대한 일상적 배려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지 않은가. 타인의 외로움을 완벽하게 책임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완전하게라도 보살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화자가 자문하듯이, 수에게는 심연이 없고 그런 것을 들여다볼 마음도 없다는 생각이 ‘나’의 독단이었을 수도 있다. 수는 자신이나 타인의 심연은 제쳐놓더라도, 어쩌면 얼마간 위선적일지라도, 불완전한 배려나마 성실히 해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태도란 건 내가 평생 시달릴 고통과 우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p. 95).
고독한 자는 소통을 단념하려 하지만(혹은 단념할 수 있는 척하지만) 사실 정말로 단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고독한 사람이 정말로 단념에 이르렀다면 그는 해탈한 상태일 것이고, 이해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야기하려는 욕망도 없을 것이고, 더 이상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간청하지 않아도 자신의 심연에 사랑하는 사람이 도착해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수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뒷걸음질 친다. 심연이 지식이나 의미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으로 전염되고 전승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궤를 이탈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안전하고 편안한 일이 아니다. 화자는 수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내몰린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만큼 마땅한 일은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고 수가 벼랑 끝에서 자기보다 나를 위해주길 바랐다”(p. 99). 이렇게 ‘나’는 단념과 호소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내 안에 이식된 심연이 나를 결정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상 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것인 듯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자는 자신의 고독을 어른스럽게 감추고 그럴듯한 비밀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자신이 하는 일이 허위이고 공허한 연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진정성은 어두운 충동으로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인간의 관점에서 고독은 분명 관계에서의 이탈이지만 고독이 단순히 비(非)관계인 것은 아니다. 「사랑과 결함」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고독과 사물의 관계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인간 배우/행위자actor가 등장하는데, 바로 로봇청소기다. 처음에 로봇청소기는 꽤 ‘개연성 있는’ 사물로 보인다. 화자는 엄마에게 식기세척기를 선물하는데, 고모가 그것을 질투하는 듯하다. 그래서 화자는 고심 끝에 고모에게 로봇청소기를 선물한다. 중년 여성에게 (이를테면 태블릿이나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제품이 아니라) 가사의 편리를 위한 가전제품(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을 선물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있을 법함/개연성probability은 선(善)이나 합리성을 의미하지 않고, 사물이 자연적 사실에 부합함을 뜻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는 일상적 편견에 부합함을 뜻한다.8)
그러나 이렇게 매우 일상적이고 있을 법한 사물로 보였던 로봇청소기는 도구적 역할을 벗어나 괴물로 귀환한다. 고모에게서 수의 손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그것은 청소하지 않고 마치 시위하듯 벽에 ‘머리’를 힘껏 찧는다. 사물의 이러한 변신은 절묘하면서도 놀랍다.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올 때, 있을 법함/개연성 자체가 내파되어 공포로 변한다. 수는 고장 난 청소기를 두려워하는데, 이유 없는 두려움은 아니다.
“겁이 났구나?”
“겁? 그게 다가 아니야. 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 로봇청소기는 나한테 화를 내고 있었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거라고.” (p. 99)
수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다. 사물에 별문제가 없는데 자신이 주관적으로 과장된 감정(“겁”)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물이 정말로, 진짜로, 이상하다고. 어떤 도구가 기능에 맞게 잘 작동할 때는 그것을 걱정하고 살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문제”처럼 주어져 있다. 사물이 고장 나 목적과 기능에서 이탈할 때, 비로소 그것은 “돌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물이 예측 가능한 질서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위기’이다. 달리 말해 위기는 사물들이 개연성을 잃어버렸거나 초과한 상태이다.
고독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탈해 있고, 고장 난 사물은 사물의 질서에서 이탈해 있다. 그런데 정작 둘은 서로 독특하게 관계하고 얽매여 있다. 일상적 관계에서 물러나 있는 ‘심연 속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로봇청소기는 고모 삶의 심연으로부터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듯 보인다. 거기에는 어떤 고통과 외로움으로 응축된 혼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도대체 고모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로봇청소기는 어떤 고독한 시간을 통과했던 것일까? 사물은 사물에 대한 앎의 질서(과학과 기술)에서 벗어날 때 위기로 육박해온다. 그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며 직면을 요구하는 세계의 “기괴한 얼굴”이다. 반대로 인간은 관계의 질서(사회와 문화)에서 이탈할 때 고독하다. 인간의 고독한 부분은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인간(人間)이 아니다. 사물은 위태로울 때 인간이고, 인간은 고독할 때 사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사물과 사물이 된 인간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괴물이다. 그것들은 일상적 관계 바깥의 불가해한 관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심연 속에서만 가능한 말 없는 포옹이 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달려가서 끝내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청소기를 끌어안았다”(p. 101). 예소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윤리적 태도를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을, 그저 품에 안기. 마지막 장면에서, 고모와 엄마 사이에 오가는, 화해라고도 인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통 아닌 소통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죽기 전 고모는 엄마에게 “민애야”하고 이름을 부를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말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엄마는 그 부름에 응답한다. “저도요”(p. 101). 그 공백 속에서, 침묵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어떤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음의 사실에 대한 불가피한 인정일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추기(追記)
이 글에서는 작가의 일부 작품만을 다뤘을 뿐 아니라 작품들에 나타난 여러 흥미로운 측면 중 극히 일부만 짚어보았다. 아쉽지만 벌써 주어진 분량을 꽤 초과했으므로, 본문에 포함하지 못한 메모들을 붙여 글을 마감하려 한다.
(1) 예소연이 그리는 관계의 양상에는 시의적인 독특성이 있다. 「도블」9) 「내가 머물던 자리」10) 「분재」 같은 소설들에서는 계획에 없었던 돌연한 합석이 그려진다. 「통신광장」11)에서 ‘나’는 대화방에서 만나 며칠 대화를 나눈 여인2에게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p. 121)다면서도 만나자고 한다. 이렇게 종종 등장하는 우발적 관계들에는 물론 시대적인 이유와 맥락이 있을 것이다. 혼자 사는 청년들의 외로움,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들, 고립을 벗어나려는 소망, 우발성이 허용하는 어떤 솔직함, 일시적 공동체……
(2) 젊은 여성이 조직에서 혹은 가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자기 의심도 눈에 띈다. 「우리 철봉하자」에서 강의 영상들을 검토하는 일을 했던 ‘나’는 자신이 “페미 같아”(p. 152) 보이는지 검열하고, 「그 개와 혁명」에서는 “요즘 여자들”에 대한 태수 씨의 말에 분개하기도 한다.
(3) 예소연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관계에 적극적인데, 이 적극성은 잘못 비칠까 봐 미리 조심하는 점잖음이나 손익을 따지는 신중함,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식의 ‘쿨함’과는 대조된다.
(4) 전반적으로 ‘개인’을 넘어서는 거대한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이것은 작가의 최근작 「영원에 빚을 져서」12)의 제목처럼 ‘나’의 주관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자신의 관점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오해와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은 작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대한 의식은 ‘나’와 세계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고민이고,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뇌이면서, ‘나’의 언어를 넘어서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 소망은 관계에 대한 희구가 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립과 외로움, 소통 불가능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5) 개인을 초과하는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은 한편으로 삶의 본질적인 수동성·피동성에 대한 회의로도 연결된다. 즉 주체는 삶을 결정하지 못하고 삶에 휩쓸릴 뿐이다. “삶은 지독히도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아니, 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그 개와 혁명」).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한 말처럼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13) 이렇게 태어남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면, 피동성은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가 된다. 다만 그것이 각자에게 다른 장면으로, 다른 강도로, 다른 형태의 질문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이 문제는 특히 삶에서 겪는 고통의 인과를 따지고 들 때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건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뺏겼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인데. (「아주 사소한 시절」, p. 67)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냥 적당히 돈 없고 적당히 뭘 모르고 살아온 것일 뿐인데. (「그 개와 혁명」)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지만, 그 고통에 합리적인 도덕적 인과는 없다. 즉 고통은 잘못의 대가가 아니다. 삶이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고 존엄이란 무엇인가? 예소연의 소설 저변에는 이렇게 본질적인―너무나 본질적이어서 잊어버리거나 없는 셈 치기 쉬운―문제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사색적 집념이 있다. 이 집념이 시의적인·감각적인 구체성과 어우러져 독특한 에너지가 되는 것 같다.
(6)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는 이러한 본질적 피동성을 조건으로 윤리적 주체의 ‘발생’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7) 앞서 말했듯 예소연의 소설에서 돌연한 마주침·출현이 종종 그려지지만, 더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오래된 것의 낯선 회귀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진돗개 ‘유자’가 태수 씨의 장례식에 난입하는 일이나 「사랑과 결함」에서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일처럼. 갑자기 시야에 들어와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 배우/행위자들은 일상적 관계의 연극성을 극적으로 폭로하는데,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재현되지 못하는 심층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1) 이 글을 탈고하고 나서 예소연의 소설집 『사랑과 결함』(문학동네, 2024)이 출간됐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예소연의 소설들은 최초 발표한 것을 따르며, 출처는 다음과 같다. 「분재」(『현대문학』 2021년 12월호, pp. 80~99), 「사랑과 결함」(『현대문학』 2022년 11월호, pp. 72~101), 「아주 사소한 시절」(『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6~82), 「우리는 계절마다」(『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그 개와 혁명」(《문장웹진》 2024년 1월호), 「우리 철봉하자」(『문학들』, 2024년 봄호). 이하 인용 시 제목과 페이지를 본문에 병기.
- 2) 이 소설에서 ‘나’와 맹지가 헬스장에서 만나 함께 운동하는 친구가 된다는 것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말해지는 자기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 혹은 자기계발과 어떻게 겹쳐지거나 분리되는 것일까?
- 3) 벨라카사가 말하는 돌봄의 문제는 브뤼노 라투르의 “관심의 문제matters of concern”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가 한낱 도구로, 이미 구성되었기에 다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는 자신의 복합성을 드러낼 때 관심의 문제가 된다. 벨라카사가 라투르에 제기하는 문제는, 관심의 문제 역시 이미 관계망 안에 들어와 가시화된 사물/문제라는 것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들어오지 못한 것,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관심의 문제로 만드는 적극적 실천이 돌봄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벨라카사는 돌봄이 관심의 집중된 분배라고 주장하며, 또한 그렇기에 돌봄이 항상 잔여와 공백을 남길 수밖에 없는 실천이라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Maria Puig de la Bellacasa, “Matters of care in technoscience: Assembling neglected things”,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41, No.1, pp. 85-106 참조. “관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참조.
- 4) 매혹이 근본적으로 트라우마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작품이나 풍경, 아이돌 등에 대해 느끼는 매력은 이러한 근원적 매혹의 대체물일 것이다. 하지만 재현적 매력도 극한에 이르면 근원적 매혹에 버금가게 된다.
- 5)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6, p. 60.
- 6) ‘어둠의’라는 수식의 의미는 무엇보다 예소연의 연작들이 규범적인 의미의 ‘성장’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장’은 집합적 차원에서 발전과 개발, 팽창을 뜻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부정성이나 부조리와의 타협과 화해, 그로 인한 성숙을 뜻하기도 한다. 근대의 성장소설을 세계의 부정성을 마주해 방황을 겪는 근대적(부르주아적) 인간 주체가 부정성을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면서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런 해석을 일반화해서 성장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근대화/자본주의화하는 국가와 주체를 화해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가 이런 주장을 담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이 분석은 완벽하게 설득력 있지만, 소설 장르에 대한 이런 비판적 해석―멀리서 읽기―의 결과에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이런 비판적 방식은 실증 가능한 지식으로 자신의 설득력을 보충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본주의적·국가적 논리로 실증되고 표상될 수 있는 ‘성장’만을 유일한 성장으로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실증 가능한 것과 이미 실증된 것을 재차 확증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설득력을 강화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성장’의 전형적 방식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지금 성장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실증되는 종류의 성장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성장’이 있느냐이다.
- 7) 「예소연·최선교 인터뷰」, 『소설보다』 2023 겨울, p. 178.
- 8) 이러한 편견은 누군가의 개인적 잘잘못을 판단하는 도덕적 문제가 결코 아니다. 편견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개연성’은 일상적이고 상상적이며, 동시에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집단적 감수성이다.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긴 하지만, 근대소설의 규범인 개연성이 특히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아미타브 고시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참조.
- 9) 『현대문학』 2021년 6월호, pp. 200~16.
- 10) 엔솔러지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안온, 2023, pp. 79~110.
- 11) 『LIM: 옥구슬 민나』 2024년 봄호, pp. 112~140.
- 12) 『현대문학』, 2024년 4월호, pp. 188~251.
- 13) 「예소연·최선교 인터뷰」,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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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1 시인 허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시작은 이 문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 이후 13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에 담긴 시. 이 시를 허연의 대표작이라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허연의 오랜 독자인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으로 첫손에 꼽기도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허연의 시를 음미할 때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하는 문장과 함께 이 시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나’ 자신에 대한, 지나온 삶에 대한 몹시도 내밀한 사색이 서린 때문일까.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는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 시인의 시론 같다. 처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을 수도 있다. 혼자란 어째서 “시원한” 것인지, 고독이란 어째서 “다행인” 것인지. 스무 살 무렵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끝내 명징해지지 않는 문제들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시에 그 낯선 매혹에 속수무책 빠져들었을 수도. 혼자라는 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얼마큼 오롯한 것일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곱씹다 보면 지독한 고독이 자아내는 맹렬함, 아득함, 서늘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곤 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이는 인생에 대한 직시에 가까운 것이다. 결국 ‘나’는 세상의 무엇도, 누구도 아닌 ‘나’이므로. 이 하나만이 살아 있는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진실이므로. 아울러 이는 자신의 방향에 대한 시인의 선언이자 시인 스스로 아로새긴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 세 권의 특기할 만한 시집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매서운 선언과 다짐은 유효한 듯하다. “세상엔 늘 나만 있”는 자에게 ‘나’는 곧 세계다. 존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셈. ‘나’로써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물론, 이는 철저한 고독을 의미한다. 홀로 동떨어진 상태. 누구 하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비뚤어진 세계관”조차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 ‘그대’는 어째서 감감무소식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간다(「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밖으로, 더 밖으로. 이로써 허연의 화자들은 일반의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괴리된 상태에 있다. ‘안’이 아니라 ‘밖’에 위치한다는 것. 얼핏 안에 있는 듯 보여도 실상 밖을 산다는 것. 언제든 밖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한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스스로가 채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에서 고백하듯, 끊임없이 “중력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연의 고독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군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 고독은 지금껏 허연의 시적 자양이 되었으리라. 묵은 고독은 때때로 섬세한 내면을 짓누르는 병인(病因)이기도 했겠으나, 그럼에도 다름 아닌 고독으로 인해 계속해서 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2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연히 분리시키고자 하는 태도. 안에 있지만 밖을 살아간다는 인식은 허연의 레테르라 할 수 있는 ‘소년(성)’과도 유관하다. 허연의 소년은 흔히 말하는 비성년의 아슬아슬 들끓는 에너지, 그 이상의 무엇을 담지하고 있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역시 앞선 시에서 언급한 문장과 함께 시인의 선언으로 읽어도 좋겠다.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세속에 몸을 담글지라도 종내 슬그머니 한 발을 빼는 태도. 섞이지 않는 푸른빛. 그러나 그 빛, 즉 허연의 소년은 주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으로 현현한다.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기억을 지금까지 투철히 간직하는 것으로 “무슨 넥타이 부대”와 같은 일상의 그렇고 그런 권태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는 것이다. 근작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발문에 인용된 시인의 발화를 끌어오자면 이렇다. “어느 날부터 나이 먹고 뻔해지는 게 싫더라고…… 사회가 원하는 딱 들어맞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정리된 착함’ 이런 게 싫었고…… 하지만 사실 나는 착하고 싶었어…… 기름기 없는 착한 소년으로, 권력에 어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점잖은 어른이 아닌……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같은…… 누군가가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 사람의 살을 찌르는……”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즉 허연이 간직한 소년이란 일종의 반골 기질 같은 것으로 읽히기 쉽겠지만, 이는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체득한, 단련한 삶의 자세로 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사실은 착하고 싶었던, 여리고 외로운 한 존재가 자신을 지키고자 발악하듯 꺼내 든 유리 조각.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나쁜 소년”이 되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공화국’을 스스로 설계하고 거기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나가듯이. 시인에게 이는 그저 “사과를 베어 무는 것” 만큼이나 예사로웠을지도. 소년은 어째서 나쁜 소년이 되었을까. 시인 스스로가 규정한 “나쁜”이라는 말 속에는 모종의 자책, 죄책감이 스며있는 것도 같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시인이 여러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린 시절 집안의 오랜 기대를 배반하고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단편적인 사실로써 한 시인의 내력을 모조리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시인의 탄생을 둘러싼 이런 식의 극적인 비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후 자연히 생겨난 죄의식, 그리고 낙망이나 허무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어린 소년의 근간을 뒤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흰 말뚝을 찾아냈지만 / 화살표도 숫자도 / 모두 지워져 있었습니다 / 말뚝을 탓하진 않았습니다 / (원래 길은 없었으니까요)”(「희망」)와 같은 부정의식은 자연스레 배양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통념으로부터 비켜서고자 한, 고독한, 나쁜, 소년. 결과적으로 일상의 권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허연의 소년은 ‘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구내식당」과 같은 작품이 이를 선명히 부연한다. “지하 5층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 그렇게 시를 지킨다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 // 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 나를 소식에서 떼어놓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 혼자 밥을 먹는다”. 시를 지키기 위해 굳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중년의 사내라니.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위해 말이다. 3 허연의 푸른색은 여전히 그를 소년이게 하고 시인이게 하고, 뒷골목을 헤매게 하는 것. 그렇다면 그 푸른색을 지속하고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세상의 셈법과는 어긋난 일. 세상의 셈법으로 보자면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의 약자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권태와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허연에게 사랑은 유의미한 동력임에 분명하다. 때때로 사랑은 그로 하여금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방책으로 기능하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독을 불식하기는커녕 고독의 기미를 더욱 북돋는 데 이바지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같은 지점에서 사랑은 본연의 힘을 발휘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를 보자. 이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가장 정직한 고백 같다. “그리워하는 병”의 중증으로 인해 채 오십 미터도 걸어갈 수 없다고 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이 깃든 시.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말하자면 사랑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 지금은 이별 후다. 펄펄 끓는 그리움을 온몸으로 앓는 때이며, 이 어찌할 수 없는 병의 증상이 바로 허연 시의 중추를 이룬다. 이는 얼핏 낭만적 정취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그 열기가 걷히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므로. “때가 되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리워하는 병”의 고통이 사그라지면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기능과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허연이 그토록 경계하는 일상의 권태와 양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 그 시절”이 지나면 “저 강물 속에서 / 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는 것(「상수동」)과 같이. 그러므로 허연에게 사랑은 애당초 실패를 전제로 한다. 예정된 실패. 예정된 이별.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부분 사랑의 끝에는 그토록 몸서리치는 권태와 무료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건강을 살피고 주택 융자를 걱정하는 따위의 평범한, 혹은 끔찍한 생활의 일면들. 시간의 조류에 쓸려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생(生)’(『오십 미터』 시인의 말)은 소년의 푸른빛과 얼마나 먼 것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되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생활과 한데 뒤엉키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는, 그의 화자들은 적정한 정도로 사랑의 감각을 다스리고자 한다. “사랑해. 그렇지만 /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하고 다짐하는 이 순간의 강렬한 열기만이 사랑으로 기억된다. 활활한 사랑의 기억은 이따금 반복 재생되며 푸른빛을 한층 선연하게 만든다. 문예지 발표 당시 이 시의 제목은 ‘불타는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이후 제목은 바뀌었고, 그렇듯 ‘드라이브’는 결코 불타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허연에게 사랑은 철저히 그 자신의 것이다. ‘너’가 아닌 ‘나’의 것. 나만의 것. 때문인지, 사랑의 대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잔영으로 남거나 아니면 철저히 소거된 채다. 그리움의 얼굴조차 불분명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에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할 뿐, ‘나’는 끝내 “너를 영원히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아직 얼마간 사랑의 열기를 머금은 ‘이별’ 자체만이 “선한 의식”으로 기록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이별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후라면 더더욱. 사랑의 대상이었던 ‘너’는 “재잘거리는 소녀들 사이에서 /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금세 “먼지처럼 가라앉”는 것.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 무연고 시신처럼 /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하고 정리된다(「항구」). 이 같은 시인의 시선은 비정한 것 같기도, 지극히 천진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허연 식의 사랑은 조금 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지. 허연의 세계를 곧추세우는 ‘혼자’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하는 엄숙한 표명을. 다시 말하지만, 허연의 세계는 ‘나’로써 이미 완전하다. 무엇도, 누구도 ‘나’와 “비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완전한, 고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그는 수시로 다툴 것이다. 모진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것이다. 뒷골목을 헤매고 사람을 찾고 사랑을 나눌 것이다. 나눈다,라는 헛된 말에 잠시 기대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권태로운 일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또다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며 빚는 내적 긴장 속에서 그의 세상은, 시는 “아찔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는 자다」)에서 허연은 한결같이 쓸쓸할 것이다. 끝내 완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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