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겨울호
불화하는 ‘나의 이야기’ ― 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0.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
지난 6월 인터넷방송인 김현지(김사슴)의 공론화가 있었다. 정지돈 작가의 전 연인이라고 밝힌 그는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2019)의 ‘H’와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의 ‘권정현지’가 자신임을, 혹은 자신을 참조하여 만들어진 인물임을 주장했다.1) 그 이후로 김현지와 정지돈이 몇 차례의 입장문을 발표했고, 논쟁이 진행 중이다.
논쟁의 추이를 정리하고 추적하는 기획과 글 들은 이미 없지 않으니 이 글에서 재차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작가에게 얼마나 잘못이나 책임이 있는지도 따지지 않으려 한다. 다만 많은 사람이 지면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채널에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문학이 주목받고 ‘공론’에 부쳐지는 것이 종종 훌륭한 작품보다는 논란에 의해서라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달라지고 있는 공론의 성격과 증가하는 발화의 다양성은 문학의 환경―일종의 진화적 압력을 가하는 환경―을 이룬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다.
관련해서 중요한 텍스트 하나를 불러와 보자. 칠여 년 전에 김미정은 “흔들리는 재현·대의”를 이야기했다.2) 김미정이 주목한 것은 『82년생 김지영』과 그에 대한 독자들의 광범위하면서도 역동적인 반응이었다. 평론가와 같은 ‘전문독자들’이 작품의 미학적 결함을 지적할 때 독자들은 다르게, 또 훨씬 다양하게 반응했다. 그 당시 많은 여성 독자가 그 소설을 읽고 다음처럼 호응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일련의 평론가들이 인물의 평면적인 ‘전형성’을 지적했는데, 김미정은 바로 그 전형성이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이입할 수 있었던 원인임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인물과 감응하면서 독자들은 누군가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대신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표현하고 상호작용했다. “독자들이 직접 말하기 시작했다.”3)
김미정이 이를 중요한 변화로 주목한 것은, 문학의 역사에서 독자들이 오랫동안 직접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독자들이 소설의 인물에게 적극적으로 이입하고, 그에 대해 평가하고, 표현하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며 연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SNS와 블로그, 인터넷 커뮤니티 등 말할 수 있는 공간의 현저한 확장을 배경으로 한다. 2010년대의 정치적 사건들, 즉 촛불집회와 페미니즘 리부트 등에서 시민들과 여성들이 대의하는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민주주의’적인 역량을 경험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4)
주지하다시피 재현으로 번역되는 ‘representation’은 대의(代議)를 의미하기도 한다. 직접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이들과 그들을 대변해 권력을 가지는 사람들의 분리는 정치 제도로서 대의제representative system의 기본적인 전제다. 즉 대의제는 대변되는 자들(민중)과 대변하는 자들(정치인)을 분리한다. 이 정치적 분할은 또한 말할 권위authority를 가진 저자author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분리와 유비적으로 연결된다. 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평범한 삶은 (작가 혹은 정치인의) 재현·대의하는 언어의 근거이자 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언어에서 소외된다. 철학적으로 확장해보면 이는 재현의 재료(질료)를 제공하는 수동적 감성과 그것을 총괄하여 형식(형상)을 부여하는 능동적 지성의 분할과도 상관적이다.5)
재현 체제의 안정성은 말할 수 없는 자들(재현의 대상)과 대의하는 자들(재현의 주체)의 분할에 토대를 둔다. 제도는 그 둘을 매개하는 동시에 분리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이를테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 ‘제도’는 직접 말할 수 없는 사람들(민중)과 그들을 대변해서 말하는 사람들(정치인)을 분리하는 동시에 매개한다. 그러한 대의의 과정에서 소수 의견은 배제되고, 시민의 의견은 반영되더라도 쉽게 왜곡된다. 문학 제도도 마찬가지다. 문예지와 같은 문학 제도는 장에서 말할 권한을 가진 저자와 그렇지 못한 독자를 분리하는 동시에 매개해왔다.
김미정이 말한 “흔들리는 재현·대의”는 이러한 분리의 혼란을 의미할 것이다.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은 촛불집회 이듬해에, 2010년대 중반의 페미니즘적 물결이 진행 중일 때 쓰였다. 그 시간 속에서 시민과 여성 들은 적극적으로 발화하고, 조직하고, 연대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분위기 속에서 김미정은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던 독자들의 욕망과 정동을 중요하게 조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한을 달았다. 재현의 위기는 단순히 작가나 비평가보다 독자의 의견을 우선시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독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독자는 균질적이지도 않고 일관되지도 않은 존재”6)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적극적인 발화를 하고 있다는 그 글의 논의는 변화에 대한 낙관이나 비관이 아니라 문학을 둘러싼 환경의 불가역적인 변화에 대한 진단에 가깝다.
칠 년 전의 글에 대해 이처럼 길게 이야기한 것은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을 정교화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통과한 어느 시점에 재현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면, 그로부터 칠 년이 지난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때로부터 무엇이 변했을까, 혹은 변하지 않았을까? 이 글은 김미정의 논의로부터 “포스트 대의제”7)라는 말을 빌려오되, 그 표현에 약간 다르게 접근해보려 한다. 나는 ‘포스트 대의제’를 재현의 주체와 대상의 분할이 안정화되지 못하고 그 분할의 경계 자체가 끊임없는 불화와 쟁론을 부르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은 문학의 조건, 작가의 권위, 비평의 역할, 심지어 창작 과정을 심대하게 변화시킨 듯하다.
1. 불화
앞서 한 이야기에 비추어 근래의 사안을 생각해보자.
먼저 김현지의 공론화는 말할 권한을 가진 작가와 권한 없는 자의 분할을 문제 삼고, 또 그 분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주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피해·가해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자리를 둘러싼 불화의 역학이다. 피해/가해와 유죄/무죄의 확정이 법적인 사안이라면, 말할 권한의 점유와 재분배는 정치적-미학적 문제다.
김현지는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H’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사과문에 ‘현지’라는 본명을 써줄 것을 작가에게 요구했다. 작가는 두번째 입장문에서 이러한 요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8) 소설에 자신의 삶이 그려져 괴롭다면, 더더욱 그 인물이 자신으로 특정(혹은 오인)될만한 여지를 피해야 하지 않는가? 만약 사안의 핵심이 작가의 ‘무단 도용’이 야기한 피해에 있다고 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이 ‘나의 이야기’에 대한 권리(주권) 주장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후자의 경우 김현지는 H가 자신임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당사자는 소설의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소설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 아니라 소설이 나의 이야기―혹은 내 삶에 대해 직접 이야기할 권리―를 침탈했다는 주장으로서 발화된다. 그 권리를 둘러싼 분쟁이 이 사건의 핵심적 측면이다.
김현지의 공론화에 정치적 쟁투의 성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언어를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사안을 그렇게 보았을 때 그의 주장을 단순히 법적 인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제도와 장르에 중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시사하는 정치적 주장으로서 숙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 쟁투가 어떤 ‘감정’과 ‘느낌’에 의해서 강하게 추동된다는 것도 그 언어의 정당성을 약화하지 않는다. 어떤 언어가 (가령 수치심이나 박탈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에 의해 추동된다는 주장이 자동적으로 그 언어의 정당성을 약화하는 것은 아닌데, 나름의 감정으로 추동되지 않는 발화는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에서 정지돈은 자신이 충분한 변형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 변형의 적절성이나 성패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작가가 변형을 얼마나 잘 해냈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러한 편집·변형의 권한이 어떻게 할당되어 있고 그 할당이 어떻게 변하고 있느냐이다. 누군가 자신의 삶과 유사한 면모를 소설의 인물에게서 발견할 때, 심지어 자신과 같은 이름을 자신과 관계가 있었던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할 때―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그는 당혹스러움이나 수치심,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편집하고 말할 권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있음을 볼 때의 박탈감, 자신은 그 경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박탈감. 그 경험이 민감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수치심이나 박탈감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작품의 미적 수준이나 변형의 정도, 작품의 메시지와 상관없이 엄습할 수 있다.
그럴 때는 문학이 얼마간 침해이자 도용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사실을 최대한 인정하더라도 의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권한이 작가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 때, SNS나 블로그는 자신이 ‘직접’ 말하기 위해 선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매체다. 그러한 매체들을 통해, 김현지의 공론화는 자신을 주장하고, 표현하고, 서사를 만드는 말의 역량을 드러냈다. 그 역량은 ‘공동의 경험’을 재료로 삼는 작가의 권한을 문제 삼고, 그것을 전복적으로 취하려 한다. 공론화 직후 김현지가 이 사안과 관련한 ‘습작’을 블로그에 게재했던 것9)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10)
따라서 누군가의 삶이 도용당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피해가 발생했는가가 아니라 삶에 대해 말할 권한이 어떻게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소유권을 지닌 개인’이라는 자본주의의 전제와 달리 경험이란 개인의 소유일 수 없으므로, 작가는 타인과 공유한 경험에 대해―문학적 변형을 거쳐―쓸 수 있다. 많은 이가 말해왔듯 작가는 그러한 경험을 반영해 쓸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다면 문학 창작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그 권리가 ‘작가에게만’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그리고 그러한 권한 혹은 자격의 기준이 확고한 것으로 여겨질 때이다. 그리고 아마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그러한 권한이 작가에게만 있음이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지돈의 작품이,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문학동네, 2018)에 대해 제기되었던 혐의처럼 김현지에게 ‘아웃팅’ 피해를 입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사안은 특정한 방식으로 식별될 수 있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전승민이 분석한 것처럼 ‘자기 서사 편집권’에 쟁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11) 자신을 표현하고 전시하는 일이 거의 누구에게나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이나 정치적 표현으로도 이어지는 시대다. 누구든지 자신의 서사를 편집하고 구성할 권한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경향은 작가와 작가 아닌 자를 분리하는 문학 제도의 작동 방식과 불화한다. 콘텐츠 시장에서뿐 아니라 취업 시장에서까지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경험은 잠재적인 ‘자산’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소수자성이나 약자성, 살면서 겪은 우여곡절과 상처조차도 서사화할 수 있는 일종의 자산으로 여겨질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동시에 타인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권한’은 점점 더 용인될 수 없는데, 그것은 다른 이가 취할 수도 있었을 잠재적 자산을 독점하여 현금화하는 일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소유’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경험의 본질적인 모호성은, 공유한 경험에 대해 작가가 쓸 수 있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왜 그 경험에 대해 작가만 쓸 수 있냐고 반문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편 문학의 위상에 대해서는 상이한 관점과 욕망이 길항하고 공존하는 듯하다. 제도의 기준,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은 자명하거나 엄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문학은 다른 가치들과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그것의 ‘자율성’을 보호받아야 할 만큼 대단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많은 이가 여전히, 혹은 점점 더 작가의 위치를 욕망한다.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자리를 작가의 위치라고 한다면 말이다.
제도는 특정한 집단에 특정한 방식으로 말할 자격을 부여하고, 이 한정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독자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언어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을 ‘선별’하는 제도의 작동은 있을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출판사나 문예지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어쨌든 선별과 평가의 장치로서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말할 역량 혹은 욕망이 그보다 훨씬 많은 이에게 있다는 점이다. 자격과 역량의 이 불일치로부터 끊임없는 불화의 가능성이 나온다. 문학의 권위와 위상이 부침을 겪을수록, 자신의 ‘서사’에 대한 욕망과 권리 주장이 일반화될수록 이 불화의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2. 하나가 아닌 독자
김현지의 주장들이 그 자체로 사실인가/정당한가와 별개로, 블로그를 통한 그의 공론화가 SNS에서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논쟁을 불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견들이 나타나고 모이고 번지는 방식은 따져봐야 한다. 논쟁의 속도와 의견들의 ‘화력’이 충분히 숙고되지 못한 부작용을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근 십여 년간, 문학장에서 발휘되는 독자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커졌다는 사실에는 거의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독자의 부상에 관해 현재 비평장에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비평이 수평적인 ‘독자-비평(가) 공동체’의 어셈블리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다.12) 다른 한편에는 ‘심판관’으로까지 승격된 독자들의 의견을 견제하면서 그것과 비판적으로 마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작년 겨울 심진경은 김봉곤 작가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논란 혹은 ‘오토픽션 스캔들’을 다루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지금의 문학장에서 독자는 문학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13) 오토픽션의 ‘진정성’에 대한 판단뿐 아니라 재현의 윤리에 대한 심판조차도 ‘대중 독자의 의견’에 맡겨져 있다는 진단 이후, 심진경은 비평가의 역할과 “비평의 몫”을 진지하게 재고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마찬가지로 김봉곤의 오토픽션을 다루는 글에서 전승민은 (심진경의 진단을 수용하며) 독자성에 대한 근래의 긍정적 담론과 날카로운 각을 세운다.
출판사 관계자들과 편집위원들의 ‘신속한 대응’ 그리고 피해와 가해의 구도에 대한 성찰 없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작품 판매 중지 조치는 독자성에 관한 절대적으로 선한 믿음에 기인한다. 당시의 비평과 독자들이 강하게 욕망하고 믿었던 독자-소비자 주체의 윤리성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비판적으로 접근해보지 못했다는 맹점이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당시 현실의 페미니즘적인 윤리가 신성시되고, 흠결없이 무해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믿음, 그래야만 이성애 중심의 페미니즘 비평이 목표로 하는 폭력적이고 패권적인 남성성을 문학장에서 정화할 수 있다는 집단적 단결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과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14)
전승민이 독자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는 독자들의 적극적인 발화와 개입이 문학계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 감사함을 표하면서도, “독자의 권리와 의지가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과잉”15)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과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문제가 된 작품들에 대한 숙고의 여지를 봉쇄하고 판매 중지 조치나 문학상 회수 등의 ‘신속한 대응’만을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독자의 부상이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동인이었다는 사실이 그 이면을 비평하기 어렵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의 이면을 말하는 것이 그것의 정당성이나 가치를 부정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독자성’이 하나의 균질한 힘이나 경향인 것처럼 싸잡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최근 선우은실이 쓴 것처럼, 비평이 호명하고 주목해온 ‘독자’는 변화하는 비평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기 위해 세워진 다분히 상상적인 형상이었을 수 있다.16) 독자의 부상을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그 ‘상상적 형상’에 대한 칭송이나 공격일 것이다.17)
이 글을 준비하면서 문단 안팎의 다양한 평자가 쓴 글을 따라 읽었는데, 현 사안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른바 ‘문단 권력’과 ‘독자의 권리’의 대립 구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구도에서 종종 비평가는 권력의 하수인이자 문지기이고, 기술자이자 관료이며 때로는 부패한 권력의 육화이기까지 하다. 제도 내 비평가는 언어를 승인하고 선별하는 보수적인 기준을 보존하고 재생산하고 땜질한다. 내 경험을 돌아보건대 실로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분히 그런 면이 있다(이렇게 말하면서 진술의 대상에서 나를 면제하지는 않겠다).
제도는 경직되어 있고 완고하고 느리다. 그에 비해 독자의 요구와 욕망은 다양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독자의 권리는 대체로 소비자의 권리로 표현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소비자 주체성’을 ‘제도의 권위’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대립 구도는 결국 서로를 강화한다. ‘문단 권력’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그것에 계속해서 결정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독자-소비자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권위를 행사하는 괴물로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와 완고한 위계를 상정한다면, 비평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뿐이다. ‘권위’를 포기하고 독자의 요구에 복종하거나,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선도하려 하는 엘리트주의18)로 회귀하거나. 이 대립 구도와 ‘위아래’의 구도를 벗어나 생각하자는 제안은 권력의 차이를 없는 셈 치자는 주장은 아니다. 이런 대립 구도를 넘어설 때만 ‘복종 아니면 선도’라는 터무니없는 선택지를 벗어날 수 있기에 대안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제도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소비자 주체성에 의존하고 소비자 주체성을 비판하기 위해 제도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을까?
분량과 능력의 한계로 지금 이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그저 초점을 옮길 질문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독자의 위상과 비평의 몫에 대한 글들을 따라 읽으며 떠오른 질문이다. 때로는 비평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독자이기도 한 작가의 자리는 어떻게 변해왔는가? 지금 작가의 자리는 소위 ‘문단 권력’에 의해 충분히 비호받지도 못하고 ‘독자-소비자’에게 충분히 지지받지도 못하는, 그러나 종종 권력을 가졌다고 상정되고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상하고 쓸쓸한 자리가 아닌가.
독자의 부상과 비평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비평이 잘 말하지 않았던 것은 작가들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 속에서 작가들 역시 미증유의 어려움을 맞닥뜨려왔다. 독자나 비평의 부침에 비해 작가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비평이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비평가들이 이 어려움을 모르거나 무관심한 것은 아니겠지만 독자나 비평의 자리에 주목할 때는 그저 괄호 안에 넣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제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에서 창작하는 자의 곤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이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한 명의 작가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며, 문학장의 구조적인 변화 속에서 많은 작가가 겪을 수 있는 불안과 어려움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3. 소설가의 진퇴양난
김현지의 문제 제기와 정지돈의 입장 사이에는 넓은 ‘회색 지대’가 있고, 그곳에 사안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발언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글을 쓰면서 고민이 정리되기보다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느꼈다. 고민할수록 초점이 선명해지기보다는 문제가 다양한 층위로 분산·확장되었다.
나는 일부 작가들이 (정지돈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선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발언하지 못하며 망설이는 경우를 보곤 했다. 이 망설임의 이유는, 한 작가에게 닥친 곤경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이런 망설임―세속적인 고려가 필연적으로 섞여 있는 망설임―이 회피가 아니라 강도 높은 고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지돈 작가의 부주의함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정지돈의 자기 변론을 최대한 수용하더라도, 가까운 지인에게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읽힐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지금 작가가 겪는 곤경이 단순히 개인의 ‘예외적인’ 실책 때문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오늘날 소설가들이 공유하는 위험, 점점 커지고 있는 위험이 또한 있다.
재현 체제의 혼란 혹은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은 단순히 독자들이 직접 말할 수 있게 되고 작가나 비평가의 권위가 부침을 겪어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이 창작되는 방식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 한계 짓고 유도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에나 작가가 수용자들의 반응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오늘날의 작가는 특히 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즉각적으로 노출된다. 작가가 수용자의 반응과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작품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진화하기도 하지만, 이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노출과 소통은 독자의 기호와 요구에 따르도록 작가를 구속하기도 한다. 수용자의 다양한 반응에서 어느 정도 분리된 채 움직일 수 있는 시공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작가들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가설적인 수준에서 간략한 스케치를 시도해 보겠다. 지금 소설은 어떤 방식으로 쓰일 수 있는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쓰이기 어려운가?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먼저 대의의 어려움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즉 ‘~에 대해’ 말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작가는 누군가를 대신해 말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럴 권한도 없다. 이제 무언가를/누군가를 대변해서 말한다는 생각 자체가 낡은 오만처럼 여겨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주의 문학이 있지만, 어떤 작품이 여성들을 대의/대표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여성’ 자체가 일관된 집합일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집합으로서의 여성보다 여성 개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정체성으로 묶이는 집합 내부의 차이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공통항으로부터 여성 ‘개인’이라는 각자의 개별항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19)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역시 다양한 발화의 부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자신을 직접 표현하는 발화들은 하나로 여겨지는 집합 내부의 차이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를테면 같은 ‘여성 서사’에 대해 어떤 여성 독자는 자신의 이야기인 듯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지만, 다른 여성 독자는 그것이 특정한 여성(가령 서울에 거주하는 2·30대 여성)만을 대변하는 서사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식별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선택할 때 작가는 누군가를 대변해서 말한다는 거만한 책임으로부터 겸손하게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방향에서는 물론 ‘당사자성’이 중요해진다. 에세이 장르의 부흥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일련의 작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20)
그렇지만 여기에는 어떤 기묘한 반비례 관계가 있다. 작가가 ‘나의 이야기’를 할수록 그 이야기는 독자들이 함께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 즉 작가가 쓸 수 있는 경험과 독자가 일상에서 하는 경험이 점점 더 질적으로 구분되기 어려워진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쓸 때,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인가 하는 반문이 따르는 것도 거의 필연적인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경험도 누군가의 소유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설의 소재나 배경, 감수성이 독자들이 경험하는 현실과 긴밀하게 중첩됨으로써 허구의 작품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이 사라진다. 이 거리의 소멸은 독자가 작품을 친밀하게 느끼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허구적 창작물의 논리/윤리를 일상적 현실의 논리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소설가가 많은 작위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담백한 수준으로 가공·서술한 이야기는 많은 독자의 공감을 사지만, 이른바 ‘일기장 소설’이라는 비하를 받기도 한다. 무단 도용 혹은 아웃팅 혐의를 받았던 김봉곤의 소설에 대해서는 ‘나도 쓰겠네’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를 왜 소설로 쓺?’ 따위의 공격이 (트위터에서) 쏟아지곤 했다.21) 이러한 방향의 난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오토픽션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몇몇 오토픽션뿐만이 아니다.
둘째는 현재를 반영하기보다 조작된 과거나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안적 역사를 구성하며 공식적 역사를 비틀고, 한편으로는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대안적 미래를 구성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현실과의 관련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려운데, 작품은 현실 속에서 현실의 독자에게 말을 걸고, 또한 현실을 수행적으로 구성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방향의 한 범례를 보여준 작가가 정지돈이라고 생각한다. 정지돈은 픽션과 현실의 ‘닮음/닮지 않음’의 긴장과 이격으로 유희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이번 사태는 이 두 가지 방향 혹은 전략 역시 위험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문제의 ‘스토커’ 장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에 착안하여 변형을 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레이브 뉴 휴먼』의 경우 SF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고 권정현지라는 인물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만한 특성을 갖고 있기에 현실의 개인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작가의 이러한 자기 변론은 재차 비판과 비난을 불렀다. 작가가 ‘공유한 경험’에 대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하는 일은 앞서 언급한 이유에서 어려워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기반을 둔 SF 소설 역시 현실과 접점이 존재할 텐데, 작가는 충분히 변형을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읽는 이의 관점에서는 다를 수 있다. 정지돈이 현실/픽션 경계의 모호성으로 유희하는 작가임을 고려하면 논쟁의 여지가 오히려 더 커진다.
문제가 되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얼마나 좋건 나쁘건 간에, 그것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과 논란이 되는 방식은 다른 작가들에게 심한 자기 의심과 불안을 부를 수 있다. 정지돈의 작품들이 취하는 방법이나 전략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도 부분적으로 취해 왔거나 취할 수 있기 때문이고, 정지돈의 작품들보다 현실과의 접점이 더 크고 깊은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한편 누군가의 폭로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때 비난과 즉각적인 판매 중지 조치 등에서 작가를 보호해줄 만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작가들의 불안을 가중할 것이다.
물론 나는 소설가가 아니고, 지금 말하고 있는 곤란을 직접 경험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아닌 이들이 겪었거나 겪을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해’ 쓰고 있고, 여기에는 도용과 왜곡과 투사의 위험이 있다. 소설가들이 심정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이나 불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분수를 넘은 지레짐작으로 비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지금 창작하는 작가들의 ‘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비평적 논의는 현실의 행위자들이 느끼는 바와 동떨어진 규제적 당위의 수준에서 맴돌게 될 위험이 있다. 나 역시 그렇지만 많은 평자가 이런저런 당위와 윤리에 대해 말한다. 물론 우리는 창작 과정을 검열하고 옥죄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과연 소설가들도 그렇게 느낄까?
작가들이 마주하는 위험이 커지는 동시에, 작가를 향한 비난과 ‘신속한 대응’을 견제할 안전장치는 빠져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논란이 불거질 때 출판사는 작가의 작품을 판매 중지하고, 행사도 거의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다. 출판사로서는 책의 출간이나 행사 등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인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회사의 운영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논란이 되는 작가를 충분한 인내심과 숙고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도가 권위를 가졌다면(정말로 권위가 있다면) 그만큼 역할과 책임도 있다. 그중에는 성급한 조치와 비난들로부터 작가를 비롯한 당사자들을 보호하는 것도 있을 테다. 출판사나 잡지가 숙려의 시간 없이 문제가 되는 작가나 작품을 ‘버리는’ 방식으로 일을 빠르게 처리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소비자이기도 한 독자들이 가하는 압력.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단 안팎의 많은 평자가 ‘소비자 정체성’이나 ‘캔슬 컬쳐’를 비판적으로 경계하지만, 지금 그런 압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4. 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에서 불화는 예외상태가 아니라 항구적인 것이 된다. 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 있어서 어디가 전위이고 후위인지도 알기 어렵다.
현 상황을 보면 말할 권한을 가진 작가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분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와해되어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분할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낡은 일로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지금 ‘공론장’에서 발언하고 영향력을 갖기 위해 반드시 작가나 비평가라는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지면과 매체들 사이에, 발화자들 사이에 권위와 권력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때때로 현저하다. 그렇지만 대체로 그것은 말할 수 있음/없음을 결정할 정도로 완고하지 않다.
이제 말할 수 없는 자와 말할 권한을 가진 자의 분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상정하는 경우에서조차도―지나치게 경직된 이분법으로 보인다. 그러한 틀은 등단이라는 제도가 여전히 주요 등용문인 한국 문단의 안팎을 분석할 때는 유용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하고 모호한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형성되는 권력과 세력, 영향력을 분석할 때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초점은 다양한 채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이들 사이의 차이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언어에는 다른 언어를 왜곡하거나 변형할 더 큰 권력이 있다. 더 무거운 물체가 공간을 휘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언어가 어떤 자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많은 목소리를 결집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이 힘의 차이는 특정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의 유무와 무관하지 않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여전히 작가 아닌 이들보다 더 큰 말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모든 상황과 맥락에서 작가가 강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또 독자의 의견은 결집했을 때 출판사나 문예지 같은 제도적 장치들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가령 트위터의 흐름이 문학 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때 여론의 흐름은 인용의 연쇄가 구성하는 ‘타래’로 가시화된다.
비평은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의 기준과 작동을 반성할 뿐만 아니라 SNS를 비롯한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작동하는 ‘인정’의 셈법을 검토해야 한다. 이 인정은 ‘좋아요’나 팔로워 수, 리트윗 수를 통해 표시되곤 한다. 비평은 제도의 ‘포섭과 배제’의 논리에 대해서는 많은 (자기)비판적 논의를 해왔다. 그러나 인용과 인정의 경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마 후자의 논리가 전자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복잡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이 반복되고 있는 ‘재현의 윤리’라는 말 자체가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재현은 말할 수 없는 자(재현의 대상)와 말할 수 있는 자(재현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만약 말할 수 없는 자/말할 권한을 가진 작가의 분할이 완고하다면, 작가는 ‘어떻게 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윤리적으로 재현·대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분할이 완고하다면,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독자의 직접적 현시는 그 자체로 전복적인 의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그렇지가 않다. ‘재현의 윤리’라는 말 자체가 완고하고 비현실적인 이분법을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적으로 말해, 나는 그것이 재현 체제나 대의제의 윤리이지 ‘포스트 대의제’의 윤리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22) 또 재현의 윤리는 ‘재현물’을 창작하는 작가에게만 윤리적 고려와 책임을 집중시키며 작가들의 부담과 불안을 가중하는 경향이 있다.23)
전승민은 문학적 논의가 사법적 판단과는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작가가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논란이 된 사안과 작품을 비판하고 성찰하고 논의할 수 있다. 일관된 방식으로 전승민은 판매 중지 조치에도 반대한다. 설령 범죄자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판매 중지 조치는 옳지 않다.24) 그는 내재적인 비판을 위해서라도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은―절판에 대한 독자-소비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 훨씬―읽는 이들의 평등한 역량에 대한 어떤 신뢰를 전제한다. 또 읽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무형의 이로움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다. 설령 ‘나쁜’ 작가의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을 읽는 일이 우리를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나쁜 작품이 읽는 이에게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읽는 이를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온갖 악영향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존재라면, 그 작품을 우리에게서 격리해야 할 이유는 없다. 또 독서가 (책을 삼으로써 작가나 출판사에 돌아가는 경제적 이득보다) 궁극적으로 읽는 이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읽는 이가 독서 경험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장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실’의 윤리와 ‘재현물’의 윤리가 다른 차원에 있다는 식의 주장과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오히려 지금 문제는 그러한 분할을 미리 가정하지 않았을 때 과연 어떤 자율성을 생각할 수 있느냐이다. 즉 문학과 현실, 재현과 실재, 여타 사회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의 분할이 와해되는 혼란스러운 환경을 인식하고, 그 환경 속에서 다른 움직임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자율성. 푸코의 말처럼, 어떤 예속도 없기를 꿈꾸는 자유가 아니라, 다만 이런 방식으로 예속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의 자유.25) 이것은 비판의 가능 조건이지만, 진실을 말할 용기의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이제 여론의 흐름, 경제적 이해관심, 사법적 판단 등과 분리된 문학의 영역 혹은 허구의 영역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그런 분리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면 문학작품과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현의 문제틀(현실/재현물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재현의 윤리’가 아닌 말들을 고안해보면 어떨까. 이는 ‘포스트 대의제’를 (‘포스트-’라는 부정적인 접두사로 규정하지 않고) 다각도로 의미화하자는 제안이고, 창작 과정에 대한 검열이 아닐 수 있는 더 포괄적이고 지속가능한 윤리를 고민하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재현의 문제틀과 재현의 윤리 같은 말들은 기나긴 역사와 문맥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벗어나 대안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이 김미정도 언급한 것처럼, 재현의 문제틀은 근대(근대 정치와 근대문학)의 구성 원리 자체라고까지 할 수 있다.26) 그렇지만 우리가 관습적으로 당연한 듯 사용하는 언어를 점검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는 일이 더 많은 비평적 논의와 생산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가령 ‘작가’를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삶을 공적인 지면에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자들의 언어를 다른 채널과 문법으로 번역하는 사람으로 여겨보면 어떨까? 물론 이 번역에는―실제로 문학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하는 것처럼―왜곡과 도용과 절취의 위험이, 비대칭적인 폭력의 가능성이, 또한 창의적인 변용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어쨌든 번역은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있는 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다만 둘은 같은 언어를 말하고 있지 않고, 언어들은 동등하지 않다. 출발어와 도착어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지만, 결코 완전히 일치하는 법은 없다. 또 이러한 번역은 작가만 하는 일이 아니다. 비평가도 누군가의 말과 의견을 번역한다(나는 이 글에서 많은 글과 의견을 인용했는데, 그러면서 얼마간 왜곡하거나 변형하기도 했을 것이다). 트위터에서 다른 누군가의 게시물을 ‘인용’하면서 말을 덧붙이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번역/전송trans-l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비평장에 제안하고 싶은 첫째는 ‘재현의 윤리’라는 말과 그에 대한 초점을 다른 말과 초점으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나는 대안으로 ‘번역’을 제안했지만, 더 나은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27)
두 번째 제안은 문학장과 트위터의 관계에 관한 다각도의 탐구다. 지금 다양한 발화가 전시되고, 확산하고, 연결되고, 격한 비난을 마주하기도 하는 주요한 공간은 아무래도 트위터일 것이다. 트위터는 문예지나 출판사만큼이나 현재 한국의 문학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장치로 조명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문예지를 비롯한 문학 제도가 (어디서부터는 괜찮고 어디까지는 문제가 된다는 식으로) 창작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이나 규범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불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런 지침을 성문화된 형식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창작 과정의 검열이 되지 않을 수 없고, 그 검열은 맹점과 배제의 경계들을 다시 낳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제도는 지금과 같은 분쟁 상황에서 의견들을 조정하고 당사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를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문예지는 문제 제기의 당사자와 작가가 입장을 밝힐 수 있는 (비교적 느리고 지속적인) 지면을 제공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모으고 정리할 수 있다. 논의를 일회적이거나 산발적으로 만들지 않고 거기에 긴 지속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런 시간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독자에게 설득함으로써 집단적 린치나 근거 없는 의혹, 성급한 조치들로부터 당사자와 작품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가 하나가 아닌 것처럼, 제도도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닌 독자, 하나가 아닌 제도―이 사실이 편향이나 여론, 일방적인 조치를 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1) 김현지의 블로그,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작성일 2024. 6. 23.
https://m.blog.naver.com/pasilda/223488600534 - 2)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 『움직이는 별자리들』, 갈무리, 2019, pp. 49~82. 이 글의 최초 발표지면은 『문학들』 2017년 겨울호(pp. 26~49)이다.
- 3) 같은 글, p. 61.
- 4) 같은 글, pp 78~79 참조. 또한 김미정, 「움직이는 별자리들―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움직이는 별자리들』, 2019, 갈무리, pp. 20~48 참조. 물론 김미정은 대의나 위임 없이 스스로 말하는 다양한 발화들이 일관되지 않고, 거기에 혐오와 선동, 반동적 폭력도 들어있음을 지적한다.
- 5)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b, 2008. pp 57~62 참조. 이 글에서 말하는 자리와 그것을 둘러싼 ‘불화’, 평등한 역량에 대한 아이디어는 랑시에르에 의존하고 있다.
- 6)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 p. 76.
- 7) 「움직이는 별자리들―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참조.
- 8) 정지돈의 블로그, 〈정지돈입니다〉, 게시일 2024. 08. 29.
https://m.blog.naver.com/jidon2024/223564939597 - 9) 김현지의 블로그, 〈[습작] DEAR. D〉. 게시일 2024. 7. 26.
https://m.blog.naver.com/pasilda/223526399849?recommendTrackingCode=2 - 10) 김현지의 문제 제기를 이렇게 의미화하는 것은 김현지의 모든 주장과 요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거나, 작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역량은 부당한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직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현 사태를 ‘말할 권한의 분할과 재배치’로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 재배치 과정에 말들의 혼란스러운 쟁투와 인정 투쟁이 수반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김현지는 책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인터넷방송인으로, 문학과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며, 자기 발언의 효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즉 그는 말할 권한의 분할을 문제 삼기에 일정 부분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 11)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정지돈론: 나는 너를 말하고 너는 나를 말한다」, 『문학들』 2024년 가을호, pp. 56-108 참조.
- 12) 최다영, 「‘독자-비평(가) 공동체’를 위한 제안」,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pp. 40-50 참조. 물론 최다영 역시 ‘독자성’을 단순하게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독자와 비평이 서로를 ‘함양’할 방법을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마찰보다는 공생의 방법을 지향하고 고민한다는 점에서 심진경의 비판적 진단과는 대조된다.
- 13) 심진경, 「스캔들의 문학과 비평의 몫」,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p. 48.
- 14)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pp. 198-99. 강조는 인용자.
- 15) 같은 글, p. 198.
- 16) 선우은실, 「‘독자-비평(가)’, 비평의 새로운 시계(視界): 비평과 당사자성의 확대」, 웹진 《작가들》, 2024년 9월호.
https://webzinewriters.com/%ED%8A%B9%EC%A7%91%EB%8F%85%EC%9E%90-%EB%B9%84%ED%8F%89%EA%B0%80-%EB%B9%84%ED%8F%89%EC%9D%98-%EC%83%88%EB%A1%9C%EC%9A%B4-%EC%8B%9C%EA%B3%84%E8%A6%96%E7%95%8C-%EB%B9%84%ED%8F%89%EA%B3%BC/ - 17) 선우은실은 (상상적 집합인) 독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재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비평 쓰기의 확장성을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평가도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평의 권위’와 ‘독자의 권리’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제안이다. 선우은실의 제안은 비평의 권위를 내려놓자는 식의 주장보다 더 나아가는 것 같은데, ‘작은 비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작은 자리에서부터 어떤 확장을 꾀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 18) 우리는 대중에 대한 그러한 경멸이 종종 (대중문화에서 감상 능력의 퇴화를 개탄한 아도르노의 경우처럼) ‘비판이론’의 이름으로 표해졌음을 상기할 수 있다.
- 19)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 p. 58.
- 20) 일찍이 김봉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나의 삶을 쓴다./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창비, 2020, p. 360) 작가의 말.
- 21) 나는 김봉곤이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의 소재가 매우 일상적이고 현실의 작가의 경험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에 언급한 비난을 (부당하게) 받게 되었던 것이다.
- 22) 물론 재현 체제와 포스트 재현 체제가 칼로 자른 것처럼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포스트 대의제’라고 할 만한 상황에 있다고 해도, 재현이나 대의의 논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가고 있고 이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과거와는 다른 윤리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23) 때때로 논쟁이 ‘사실’이 무엇인가, 재현물과 실재가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문제로 미끄러지는 것도 재현의 문제틀이 상정하는 실재와 표상, 사실과 허구, 질료와 형상의 이항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24)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 pp 80-81 참조.
- 25)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 수양』,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동녘, pp. 43~47 참조.
- 26)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p. 76.
- 27) 재현의 문제틀을 번역의 문제틀로 대체할 때 어떤 논의의 가능성과 난점이 생겨나는지는 별개의 글로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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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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