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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가을호(제147호)

비-인간의 함성 ― 김혜순 시의 ‘무한한 여성’과 ‘중립’의 정치

강동호 문학평론

198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 취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이후 평론 활동 시작.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 젊은평론가상, 대한민국 예술원 젊은예술가상 등 수상. 저서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문학과지성사, 2022) 등이 있음.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중

 나는 하나의 사실을 명명한다. 나는 하나의 이름 아래,
즉 여기서 중립이란 이름 아래 여러 가지 것들을 결집시킨다.
— 롤랑 바르트1)



1. 김혜순의 이름들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김혜순의 시가 차지하고 있는 의미와 그 위상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예술가로서, 시에 대한 철학자로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교육자로서 그가 한국 시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 흔적의 깊이와 넓이를 한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 40년 동안 문학 언어의 정치적 급진성에 있어 김혜순보다 뜨거운 언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2)는 평가처럼, 김혜순의 시만큼 오랫동안 한국어의 최전선에서 맹렬히 타올랐던 현재성의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극도로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여성 시인으로서 그가 남성 중심적 질서와 제도에 대항하여 보여왔던 시적 항쟁의 이력은 그 자체로 여성 시의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시적 저항이 단지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온 그의 급진적 언어는 문학이 도모할 수 있는 미학적·정치적 투쟁의 한계선을 지속적으로 넓혀왔다. 이른바 김혜순이라는 고유명은 현실의 위계를 낳는 모든 이데올로기(가족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자본주의 등)에 대한 전방위적 불화와 항거를 지시하는, 시적 동시대성의 첨예한 최전선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김혜순 시의 정치적 동시대성을 구성하는가? 김혜순 시의 정치적 저항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단어들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위반, 전위, 전복, 실험, 비판, 파괴, 해체, 부정…… 이러한 단어 목록은 김혜순의 시가 실천하는 시적 정치성의 중요한 단면들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의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폭넓게 사유하는 데 기여했던 이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김혜순 시의 정치성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가 요구되는 이유는 단순히 앞서 거론한 미학적 개념들이 김혜순의 시 세계를 조명하는 데 부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김혜순의 시는 분명 전위적이고 위반적이며, 특유의 전복적이고 해체적인 상상력으로 가부장제를 포함한 모든 남근 로고스적 질서에 대한 해체를 개진한다. 문제는 모더니즘의 전통적 계보에 속하는 이러한 익숙한 개념들의 이항 대립적 원리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장소를 가시화하는 데 더는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목록들을 포괄하면서 이항 대립에 귀속되지 않는 다른 이름을, 적대와 대립에 기반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을 좌초시키는 새로운 정치적 장소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김혜순의 시가 현재 우리에게 던지는 동시대적 메시지에 다가가기 위한 여러 키워드를 고안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그 일환으로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과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 2022)에서 보다 전면화되고 있는 시적 비전(비–인간)에 집중할예정이다. 그 과정을 경유하여 ‘문학’이라는 불완전한 기호로 간신히 지시될 수밖에 없는, 모래–언어로 이루어진 무한한 언어의 사막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학이라는 장소, 재현될 수없고 표현될 수 없는, 장소 없는 장소를 가리켜 최종적으로 (그러나 영원히 잠정적으로) ‘중립the neutral’이라고 명명하게 될 것이다.



2. 새하는 말


  우선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날개 환상통』 도처에서 탄생하고 날아가고 추락하고 지저귀는 새, 언어의 경제를 지속적으로 교란하며 시적 주체의 삶에 관여하는 ‘새’란 어떤 존재인가? 시집 곳곳에서 범람하는 새, 기호로서의 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체적인 실체나 무언가에 대한 은유적 상징으로 특정해서는 안 된다. 『날개 환상통』의 새는 언제나 ‘하다’의 동시성에 결부되어 있다. ‘새+하다’의 연동, 이접, 공명으로 발생하는 시적 시간성 속에서 새는 행위를 주관하는 주체나 행위의 대상이 되는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새란 무엇인가?’에서 ‘새하다로 인해 추동되는 사건은 무엇인가?’로 질문의 초점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 「새의 시집」 부분


  ‘새하다’는 주체와 객체, 주어와 목적어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사태를 지시하며, 모종의 독특한 리듬을 창출하는 사건이다. “새하는 순서”가 촉발하는 기이한 시간성은 『날개 환상통』을 ‘책’이 아니게 하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책’은 저자의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담아냄으로써 저자 –주체의 영혼과 정신을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매체이다. 책 이전에 저자라는 주체가 선재하며, 주체의 정립 이후에 비로소 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새’가 어떤 실체 또는 가치에 관한 은유나 상징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오롯이 책에 담겨 있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재현의 언어로 포박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책에 대한 부인을 표명하고 있는 『날개 환상통』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사건(“새하는 날의 기록”)은 주체에 의한 사유의 전개, 의견의 표명, 감정의 고백에 의해 밝혀질 수 없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시집에 시인만의 독창적인 의견, 사유,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날개 환상통』의 세계관을 관통하고 있는 급진적 의견과 거대한 스케일의 사유,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첨예한 감정의 계열들을 도출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개, 표명, 고백과 같은 능동적 행위의 계열과 거리를 두는 것은,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이 주체에게 우발적으로 발생한 갑작스러운 사건,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떤 사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개 환상통』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적 발화로서의 “기록”이 엄밀한 의미에서 ‘쓰기’와 구별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여기서 김혜순의 기록이 책을 쓰는 것, 글을 쓰는 것, 시를 쓰는 것과 미묘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날개 환상통』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크게 두 층위로 나뉜다. 새하는 날과 새하는 날의 기록.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분에 불과하다. 기록의 대상과 기록의 주체는 ‘새하다’의 동시성 속에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일찍이 시인은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시는 쓰는 것도, 짓는 것도 아닌, ‘하는’ 것이다.”3) 같은 맥락에서 『날개 환상통』의 기록 역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새의 시집」)에 직면한 시인에게 기록의 언어는 어떤 거대한 일어섬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주체의 탈주체화, 그러한 극단적 수동성의 상태에서 돋아난 타자의 언어를 수행적으로 받아쓰는 과정dictation에 가깝다.

  분명 누군가는 김혜순의 ‘새하기’를 통해, 성급히 들뢰즈의 ‘동물–되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혜순의 ‘새하기’가 ‘새되기’와 유사한 뉘앙스를 공유하기는 하지만, 둘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하기’라는 어휘에 내포된 독특한 시적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되기becoming와 하기doing의 차이를 좀더 신중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다. 

  ‘동물 –되기’란 무엇인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 대한 들뢰즈의 독창적 해석(『감각의 논리』)이 보여주듯, 그것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식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체(고기)의 발견이자, 경계 너머의 새로운 주체성의 정립이다. “베이컨의 회화가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태적인 상응 대신에,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은 동물이 된다.”4) 아무리 우발적이고, 파괴적이고, 탈주적이라고 해도 ‘되기’를 추동하는 것은 주체의 욕망과 강렬도, 즉 욕망의 경제이다. 주체의 해체는 ‘되기’라는 변화의 공정을 통해 정립된 주체의 새로움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때 이항 대립은 (비록 그것이 이항 대립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고 하더라도) ‘되기’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윤리적·정치적 근본 원리이자 형식이다. 다수자와 소수자,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보편과 특수의 대치 국면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이른바 정상적인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저항을 전위적 ‘되기’의 소수성과 타자성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5) 

  반면 김혜순의 ‘새하기’는 인간 너머의 ‘동물 –되기’, 즉 새가 되는 단계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새하기에 함축되어 있는 비전은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도처에서 새가 출몰하지만, 의외로 『날개 환상통』의 시적 화자가 온전히 새로 변신하는 장면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이를테면 시인은 이렇게 기록하는 중이다. “내게는 새가 있다 나를 혼자 두면 둘수록 새가 되는 새가 있다”(「작별의 공동체—새의 일지」). 내게 있는 새는 ‘이미’ 있는 새이다. 새의 출현으로 인해 새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분할되는 것이 아니다. “새가 되는 새”라는 지속성의 형식으로 실천될 수 있는 ‘새하기’는 결코 ‘새 되기’로 완수될 수 없는, 중단 없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원히 진행 중인 리듬 비트 벼락”(「리듬의 얼굴」)이다. ‘새되기’는 탈주체화를 통한 주체의 타자되기의 가능성을 목표로 제시한다. 반면 ‘새하기’는 ‘인간–새’, 혹은 ‘새–인간’으로서 주체가 받아들여야 할 주체화의 내재적 불가능성을 운명으로 현시한다. 따라서 ‘새하기’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동물, 주체와 타자,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이항 대립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대립의 국면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새가 될 수 없는 새’와 ‘영원히 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새’라는 이율배반적 이중성의 형식을 통해 간신히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날개 환상통』에서 전개되는 ‘새하는 순서’, 이 영원히 진행 중인 리듬이 글쓰기의 시간성으로 포섭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글쓰기의 주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연대기적 원리, 또는 원인과 결과라는 분명한 논리를 통해 세계를 파악한다. 하지만 『날개 환상통』의 “새는 이미 이별부터 시작했으므로 미래가 없다고 했다” (「이별부터 먼저 시작했다」). “우린 시작을 시작했으므로/이미 작별이었는데 그땐 몰랐다”(「작별의 공동체—작별의 신체」). 미래가 없는 세계, 그리하여 시작과 끝의 분별이 어지럽혀진 현기증의 세계. 이처럼 ‘새하다’는 끝없는 현재라는 하나로 응축된 시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뒤늦은 후회의 기록”(「새의 시집」), 즉 시적 애도이자 증언이다. 

  무엇을 증언하는가? 반복하거니와 그것은 나에게서, 당신에게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방위적으로 출몰하는 새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은 우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새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 관한 증언이다. 우리 모두의 삶과 연관되기에, 김혜순의 새하기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차이의 향연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들의 공존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무한성의 도사림이다. “저는 우리에게, ‘나’에게 한 사람 또는 개인의 것이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복수적

이고 집단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우리는 연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내’ 영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 ‘내’ 영혼일 것이라는 겁니다.”6) ‘새하기’는 바로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것의 흔적, 그러나 내가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것,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증언이다. ‘새–인간’, ‘인간–새’에게 있는 보이지 않는 날개, 그리고 그 날갯짓으로 인한 실제적 고통을 경유하여 마주하게 될 그것을, 앞으로 ‘비–인간in-human’이라고 부를 것이다.



3. 고통을 말하는 몸: ‘비–인간’의 증언


  예술가들은 그 무엇보다도 비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통스럽게 비인간성의 흔적들을 찾는다. 이러한 흔적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리티 바깥의 진실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7) 


  김혜순의 시와 ‘비–인간’을 함께 거론하는 것은 다소 새삼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곤충, 식물, 짐승, 시체, 쓰레기 등 인간의 영역 바깥에 유폐된 존재들에 대한 시적 형상화, 근대적 이성의 질서 체제에서 배제되고, 장악되고, 배척되었던 대상들abject에 대한 사유는 김혜순의 초기 시부터 일관되게 견지되어온 시적 테마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대략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시절 무렵부터] 김혜순의 시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비–인간’에 대한 시적 탐구와 관련해서는 좀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비–인간을 인간과 대립되는 어떤 것(反인간), 즉 어떤 인간성의 결여(未인간) 나 초월(脫인간), 더 나아가 오늘날 항간에 유행하는 포스트휴먼 같은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김혜순의 비–인간을 인간과 이항 대립 관계를 형성하는 ‘인간 아닌 것non–human’으로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얼굴을 한 새”(「새들의 영결식」)는 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인간, 새와 중첩되어 있는 인간의 근원적 비 인간성을 가리킨다. “새와 인간이 눈을 마주칠 때 누가 누구를/만물의 영혼이라 생각할까 궁금해졌어요”(「작별의 공동체—새 샤먼」). 관건은 인간과 비–인간의 마주 봄을 통해 본격화되는 모순·갈등·분 쟁이고, 그것을 통해 존재의 근원(‘만물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다시 표명하는 일이다. 요컨대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새의 시집」)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감각하고 자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비–인간에 공통적으로 연루되고 포괄되어 있음을 탐구 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 김혜순의 ‘새하기’가 몸, 더 정확히는 아파하는 몸과 긴밀하게 관련 있다는 사실은 각별히 중요해 보인다.


그 작은 새가
이불을 박차고 내 몸을 박차고
흙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
—「새의 시집」 부분


몸은 새가 다녀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이별부터 먼저 시작했다」 부분


우리의 몸을 파고드는 우주에서 온 통증 같은 것
—「비탄 기타」 부분


매일매일 내 몸을 조여오는
이 새장을 벗지 못하는 나는
—「바닥이 바닥이 아니야」 부분


  김혜순의 ‘새하기’는 거의 언제나 몸의 느낌, 구체적으로는 육체의 고통과 함께 발생한다. “너무 섬세해서 징그러운 깃털이 몸 전체로 올라오는 것”(「올빼미」), 다시 말해 아픈 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가 말하도록 (새)하는 것이다. 이때 정신과 몸, 언어와 육체의 관계에 있어서 역전과 전복이 이루어진다. 물론 정신에 대한 육체의 우위 또는 말로부터의 해방이 목적이 아니다. ‘말하는 몸’이라는 표현 역시 말을 통해 이루어진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원히 가능하지 않다. “교관은 전직 시인이다/그는 감옥 밖에서 쓴 시를 외우는 것을 좋아한다/전직 시인 아닌 자가 드문 마당에/그는 여전히 전직 시인이다”(「합창대」). 언어는 존재의 감옥이며, 여전히 시인은 그 안팎의 경계를 넘나드는 언어의 수인이자 교도관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말과 정신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이 아니라 정신에 의해 온전히 통제 불가능한 것에 또 다른 말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몸에서 심장이 혼자 뛰쳐나온 것처럼/나는 위독한 새”(「작별의 공동체—새를 앓다」). 김혜순의 ‘새하기’는 새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끝내 통치 불가능한 것으로 인해 영원히 새를 앓아가는 과정이다. 고통하는 몸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동시에 인간이 귀속해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전해지는 신호, 비–인간의 징후이다.  


그렇지만 설마 모른 척하시진 않겠지요?
당신 몸속엔 당신보다 훨씬 어려운 음악이 들어 있다는 것

나는 당신들에게 사랑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실 절망의 패턴을 만든 것뿐입니다

나를 쫓아와 나를 연주하는 나선형 계단을
—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부분


  당신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당신보다 훨씬 어려운 음악”을 듣는 일. 고통을 감각하는 일은 이처럼 인간 내부inhuman에 잠재되어 있는 ‘비–인간’을 증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을 모른 척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언어로 포섭될 수도, 이해될수도, 재현될 수도 없는 그것을 장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몸의 고통을 부인, 망각, 타개, 정복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비–인간’을 무력화시켜야 할 것이다. 몸의 고통을 정상성의 결여, 건강의 결핍으로 간주하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회복을 약속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바로 이러한 결여와 결핍을 주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인간의 역량을 향한 믿음과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휴머니즘이 가진 가장 결정적인 역설과 아이러니는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부정적 반대항으로서의 무수히 많은 비인간inhuman의 범주를 양산한다는 데 있다. 개발, 발전, 진보 등의 온갖 환상을 명분으로 인간은 고통의 현재성을 타개하고, 부인하고, 망각함으로써 현재를 식민화해왔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그 미래주의적 흐름에 동참할 수 없는 자들은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인간, 더 나아가 무언가 부족한 인간,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inhuman으로 배척받기 마련이다. 리오타르의 지적처럼, 자본주의는 인간을 능력을 갖추도록 끝없이 몰아세움으로써 인간의 궁극적 탈주체화를 촉진하는 휴머니즘적 미래주의의 결정판이다. 휴머니즘적 이상 속에서 비인간은 이처럼 결핍, 결여, 부재의 형식으로 몰아세워진 인간의 고통, 즉 극단적 수동성에 대한 배제와 탄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비–인간’을 드러내는 일은 “절망의 패턴”을 마주함으로써 근대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 즉 주체의 불능을 자인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때 불능의 자백은 무능의 고백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무능한 주체에게 고통은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역량의 부재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고통은 역량의 되찾음이라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봉합될 수 있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반면 주체의 불능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고통은 제거될 수 없는 무언가이며, 미래라는 시간성으로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불가능성의 사태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한번 반복해야 한다.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의 기록이다. 이때 새와 내가 맺는 관계가 단순한 소유관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은 고통에 내포된 본질적 성격을 한층 심화시킨다. 

인간은 고통을 소유할 수 없다. 고통은 인간의 역량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역량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특정할 수 있고, 어떤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고통은 모든 인간주의적 소유관계를 무화시키면서 정체성의 무너짐undoing을 다그친다. 따라서 불능의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는, “내 영혼을 벗겨 가는 이 음악이”(「리듬의 얼굴」) 유발하는 고통을 감각하며‘비–인간’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비–인간’에 무한히 귀속되어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나는 새 속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나는 새 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죽었다고 했다
—「새의 반복」 부분


  새 안에서, ‘새하기’의 시간 속에서 나의 탄생과 죽음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나라는 주체는 비로소 그 어떤 인간주의적 환원론으로 규명될 수 없고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에 결부되기 시작한다. “누구도 이름 붙이지 않아서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는”(「작별의 공동체—피읍 피읍」) 그것. 그러나 이름의 부재와 존재의 부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개와 물범처럼 우울에 젖은/내 벌거벗은 몸은 이름이 없고//그러나 우리는 다 죽음이라는 라스트 네임이 같고”(「작별의 공동체—이 상자에 손을 넣을 수는 없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벌거벗은 몸’은 부재라는 형식을 통해 압도적인 부재의 현존성에 포괄된다. 그리하여 시인이 이상(李箱)을 패러디하며 언급한 “오늘은 없는 이 날개”(「오감도 31」)는 단순히 과거에 잃어버린, 그래서 현재에 없는 날개가 아니라 부재라는 형식으로 실재하는 현재의 날개, 부재의 현존이다. “내 얼굴이 있던 자리엔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은은한 부사의 울림만 남았다”(「작별의 공동체—부사, 날다」). 나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존재와 나의 부재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잉태할 수 있는 제3항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현시하는 것. 불능의 인간, ‘비–인간’의 불능성은 무능도, 부재도, 없음으로 무화되지 않는, 무능의 무능, 부재의 부재, 없음의 없음이라는 이중성으로 실재하는 무한한 것이다. 이때 무한은 단순히 한계의 초월, 한계의 없음이 아니라 한계로서의 무한, 인간들의 유한성을 가시화하는 무한이다. 이 무한한 것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란 그저 자신의 역량을 사용

할 수 있는 능력에 그치게 될 것이며, 인간은 언제든지 비인간으로 귀결될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비–인간’의 표식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날개의 흔적이 있다. 김혜순의 ‘새하기’는 그 부재하는 현존으로부터 개진되는 언어의 거대한 비상, 다시 말해 무한성의 옹립이자 무한성을 향한 봉헌이다.



4. 무한한 여성: 여성적 숭고의 경제


동물성은 저의 내적 세계의 비유의 산물이 되거나
초월이 필요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동물 자체가
자연에 내재하듯 저라는 시인의 내재성이 되었습니다.
잠재성을 무한히 넓힐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어색해하고, 무한히 뻔뻔스럽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로서
무한히 커진 퀸콩 (Queen Kong) 같은 존재 말입니다.
—김혜순8)


  이처럼 ‘비–인간’을 감각하고 사유하는 것, 내 안에서 ‘비–인간’을 일으키는 것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하는 과정을 예비한다. 아니 고통이,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죽음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매혹과 더불어 거대한 ‘비–인간’이 일으켜 세워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있으면 묘지가 거인으로 일어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산책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일어선 묘지의 커다란 몸엔 당연히 식물들과 새들이 매달려 있었고
묘비들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물조리개로 물까지 주면서 나를 불렀다
— 「숨을 은」 부분


  거인의 형상으로 일어선 이 기괴하고도 장엄한 스케일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압도적으로 호명당하는 중이다. 이처럼 김혜순의 독자는 ‘새하기’와 더불어 일어서는 ‘비–인간’의 “거대한 기척을”(「뾰족한 글씨체」) 느껴야만 한다. 주체를 제압하는 이 힘에 대한 호소, 거대한 것들의 출현을 우리는 시집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아아 나는 날개가 너무 커서 태어날 수가 없는 새입니다
— 「날개 냄새」 부분


새 떼의 새들이 저마다 내 몸만 하게 큰다
그다음 어마어마한 거인처럼 큰다
이것은 새가 아니라 내 죽음을 알리는 펄럭이는 부고장이다 만장이다
— 「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부분


나는 계단을 올라 까마귀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곤 합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억 조 경 해보다 먼 숫자들의 끝을 보곤 합니다
—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부분


나에게는
저수지에 내려앉으려는
5천 마리의 철새를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지
나에게는
밤중에 우리나라 개들이 다 일어나
짖어대게 할 수 있는 냄새나는 구멍들이 있지
— 「몬스터」 부분

나는 늘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저 풍경보다 크다
나는 내 코 양쪽에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이고
여덟 손가락을 새의 볏처럼 편 다음
서울의 높은 산보다 더 높이 나는 큰 새가 될 수 있다

하루 종일 창가에 서서 내가 커지는 놀이
심지어 서울 풍경과 일대일 할 수 있을 것만큼 나를 키우는 놀이
— 「작별의 공동체—그 사진 흑백이지?」 부분


  이렇듯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를 기록하는 『날개 환상통』은 죽음 앞에 선 주체가 직면하게 되는 이례적인 거대함의 체험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행숙은 『날개 환상통』이 선사하는 시적 경험을 규명하는 짧은 글에서 그 미학적 원리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언급한 적이 있다. “김혜순 시의 가장 강력한 미학적 동기는 숭고의 경험이다.”9) 그의 직관적 분석은 『날개 환상통』이 인간의 수용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과 크기를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주체를 위협하는 이 “거대한 기척을” ‘숭고sublime’라는 미학적 개념과 연결시켜 조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대리 보충이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숭고라는 미학적 경험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요소들에 관해 그동안 적지 않은 비판이 개진되어왔기 때문이다.

  숭고란 무엇인가? 『판단력 비판』에서 규정된 숭고란 “단적으로 큰 것 [……]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큰 것”10)이다. 물론 ‘크기’는 상대적인 개념이기에, 그 어떤 비교도 허용하지 않는 큰 것이란 대상에게 귀속되어 있는 물리적 속성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으로 큰 대상을 통해 절대적으로 큰 무언가를 도출해낼 수 있는 주관의 정신적 능력이다. “숭고한 것이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마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11) 숭고가 증명하는 것은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힘이다. 거대한 것, 강력한 것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받게 되는데, 이러한 한계에 대한 반성적 자각이 결과적으로 주체로 하여금 그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게 하고, 불쾌를 쾌(감동)로 전환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높은 것으로의 고양과 승화, 위대한 것에 대한 존중을 촉발하는 숭고는 초월적인 것, 보편적인 것, 총체적인 것에 대한 정신의 지향성을 대변해왔다. 숭고와 더불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칸트의 주장은, 오랫동안 숭고를 ‘남성성’에 의해 전유되도록 만든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비판기 시절 이전의 초기 저작에서 칸트가 미를 아름다운 여성, 숭고를 고상한 남성의 감정으로 귀속시켰던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여성에 관한 모든 다른 특성이 결합하여 (모든 특성의 ) 연관 지점인 아름다움의 특성을 돋보이게 해야만 하고, 반대로 남성의 특성 가운데 숭고함이 그 성의 특징으로 부각하는 식으로 각각의 성이 두 특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 아름다운 성(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다만 아름다운 지성이고, 남성의 것은 심오한 지성—이는 숭고함과 동일함을 뜻하는 표현이다 — 이어야 한다.12)


  물론 우리의 관심은 칸트가 보여준 성차별적 젠더 인식을 비판하는데 있지 않다. 좀더 중요한 것은 미적 효과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젠더화된 담론의 원리를 밝히는 일이다. “숭고함은 감동을 주고, 아름다움은 매혹한다.”13) 예술이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두 층위의 다른 효과 (감동과 매혹)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성차에 기반한 주체화의 원리가 개진되고 있다. 아름다움 앞에서 주체는 매혹‘되고’, 숭고함 앞에서 주체는 감동‘한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은 대상에 이끌리는 자신의 일시적 수동성을 경험하는 주체이다. 반면 감동하는 사람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반성할 수 있는 주체이다.


  칸트의 숭고는 주체화의 원리 측면에서도 분명 남성적이다. 왜냐하면 숭고의 주체는 ‘확장’과 ‘고양’이라는 남성적 주체화의 기제와 목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는 주체를 일시적으로 위협하지만, 온전히 주체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주체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험과 위기 속에서 극도의 전율과 공포, 즉 불쾌를 경험하지만, 스스로의 안전에 대한 확신 속에서 그 불쾌를 쾌의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해야만 한다. 따라서 숭고의 주체는 자신의 한계(유한성)에 대한 반성적 역량을 바탕으로 그 유한성을 극복하는 주체, 정복하는 주체이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경제적 원리’가 작동한다는 리오타르의 분석은 숭고의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칸트가 발견한 숭고의 경제는 ‘희생의 경제학’에 가깝다. “무릇 희생의 의도가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이익에 대한 계산과 감정들에 대한 일종의 선불 할인 제안이 개입되어 있다. 애호를 포기하라. 그러면 존중을 얻게 될 것이다.”14) 주체가 경험하는 불쾌라는 만족의 손실은 더 큰 만족 (존중)이라는 미래의 대가에 대한 기대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불쾌는 더 고상한 쾌로 진입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잠정적 투자이다. 결과적으로 숭고는 더 거대하고, 총체적인 주체를 향한 욕망의 경제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김혜순의 시를 숭고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으려면, 숭고에 내포되어 있는 이와 같은 남성적 욕망의 경제학과 단절시켜야 한다. 리오타르가 칸트의 숭고를 대체하는 진정한 숭고, 희생의 경제학이라는 변증법적 원리와 구별되는 숭고의 경제를 제안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요컨대 숭고에는 모독적인 면이 있다. 달리 말하면, 존중은, 규범의 밝은 면이라는 그것의 순수 이상에 의거할 때, 결코 희생의 경제학이라는 영역 안에서 거래되거나 할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성성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일종의 ‘무’의 경제학 (an–economie)에 속한다. 그것의 어두운 면, 다시 말해 존중이 손실을 내포한다는 사실은 경험 주체가 성자가 아니라 한계를 지닌 자라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유한성으로 인해, 희생은 신성성을 사는 데 소용되지 못한다. 실천 이성은 결코 그런 초월적 착란을 대가로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15)


  희생의 경제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無)의 경제학’. 전자가 만족의 희생과 손실을 매개로 한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면, 후자는 교환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신성성의 영역’을 전경화한다. 주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숭고는 그러므로 발전·진보·상승·고양이라는 휴머니즘적 이상의 시간성과 연동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무수히 많은 ‘비인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경제에는 무언가 숭고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한한 부와 힘이라는 이념에 의해 규제받는 경제이다”.16) 

  반면 절대적으로 교환 불가능한 ‘무’, 주체의 욕망에 의해 장악될 수 없는 ‘무’의 무한성을 가시화하면서, 욕망의 경제(불쾌의 쾌로의 전환)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또 다른 숭고가 가능하다. 이를테면 “왜 나는 산산조각 날수록 커지는가/왜 나는 끝없는 검은 광물의 들판인가”(「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라는 말처럼 주체화할 수 없는 거대한 고통과 더불어 끝없이 펼쳐지는 공간, 그리고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날개 환상통」)로 증식하는 기이한 시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엔 너무 많은 이름이 있어/그보다 더 많은 영혼이 있어/울고 싶은 여자야”(「우체국 여자」). 세상에 존재하는 너무 많은 이름보다 더 많은 영혼에게서 울려 퍼지는 “너무 커서 내 귀가 머는 비명”(「리듬의 얼굴」)이 (전통적 숭고의 남성성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김혜순의 시가 현시하는 ‘여성적 숭고’이다.


이제 다시 말하겠다. 저 아래 우리나라 전체의 그림자만큼 큰 치마를 입은 여자가 바로 나다. 나는 내 안의 일부에서 내 안의 일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크다. 치마가 다 물이다.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다. 젖은 치마 위에 우리나라의 모든 기차의 은빛 레일이 올려져 있다.
—「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부분


내가 어둠을 걸친 밤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블랙 원피스가 펼쳐진다
내 목에 묶인 검은 리본이 길게 풀어지다가
하나둘 원피스에 불이 켜져서 서울의 야경처럼 반짝이는 이 기분
마치 발광 가오리 한 마리가 심해를 유영하듯이
끝이 없는 날개가 서서히 이륙하는 이 기분
그다음 청천 하늘에 거대한 반짝이 원피스가 고요히 떠가는 이 기분
—「원피스 자랑」 부분


  ‘새하기’는 단연코 여성과 함께 촉발된다. 새하는 사람은 사실상 “새하는 여자”에 다름 아니다. 여성을 제외하고, 괄호 치고, 소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하기’는 ‘비–인간’으로부터 이루어져서 무한하게 커져가는 (“저 아래 우리나라 전체의 그림자만큼 큰 치마를 입은 여자가 바로 나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증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무한한 여성을 전체로서의 여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의 무한성은 여성의 위대한 본질도 혹은 여성의 초월적 보편성도 지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여성시인의 시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거부 반응을 거부의 문장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공동체는 여성인 ‘나’를 포함시키길 거절해왔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내가 내 의지로 더 이상 체제 내부에 존재하기를 거부할 때,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새로운 시적 체험을 시작할 때, 그 허약한 존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보잘것없는 세계가 아니었던가? 나는 시 속의 ‘내’가 탈주체화된 존재라는 사실, 내가 영토 없는 장소에 머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남성적 동일화의 세계는 ‘내’가 원하던 세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나’는 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반동일시가 아니라 너의 세계 너머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단호한 거절이 새로운 시적 언술의 발견의 단초가 된다. 거절함으로써 여성시인은 존재의 취약성 너머 우주적 웅대함을 전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곳을 방황하는 외로운 넋들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여성시인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관계의 비주체적 설정, 익명적 설정, 바로 그 관계 자체, 사이 자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17) 


  분량상 일부분을 인용했지만, 위와 같은 사유에 도달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 시인이 통과해야 하는 세 층위의 죽음을 주목해야 한다.18) 첫번째 죽음은 여성으로서 시인이 자신의 가족과 주변에서 받게 되는 배제와 폭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주체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며, 여성–주체에 가해진 수많은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표출한다. 두번째 죽음은 첫번째 죽음이 지닌 사회적 맥락과 구조적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세계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성들의 고통과 연동되어 있음을 자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남성적 질서가 강요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들의 허상이 폭로되고,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과 더불어 그 사회적 정체성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여성적 숭고가 가능해지는 결정적 단계는 위에서 인용한 세번째 죽음이다. 남성적 동일화의 세계를 거절하는 ‘나’는 사실상 남성을 부인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지탱하는 주체와 객체의 남성적 변증법이라는 이항 대립의 논리를 넘어선, 넘어서려는 존재이다. 김혜순의 여성이 수행하는 “단호한 거절”은 단순히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라, 이항 대립적 원리 자체의 철폐를 야기하는 절대적인 거절에 가깝다. 여성 시인의 언어는 이 절대적이고도 단호한 거절을 이행하는 다채로운 ‘시하기’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한성(“우주적 웅대함”)의 옹립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 층위의 죽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소 단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세번째 죽음이 앞서의 죽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김혜순의 숭고를 통해 현시되는 무한이 언제나 여성적 무한임을 말해준다.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은 여성의 사회학적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왔고 앞으로도 끝없이 직면하게 될 팔루스적 폭력에 가시성의 빛을 비추며 그에 저항할 수 있는 토대를 제시한다. 새를 길들이고, ‘비–인간’을 억압하려는 남성적 동일성을 향해, 그들이 영원히 알아들을 수 없고 장악할 수 없는 비명의 리듬

을 선사한다.


왕자는 고뇌하고 공주는 고통한다
왕자는 애도하고 공주는 고통한다
왕자는 정신하고 공주는 신경한다
왕자는 연설하고 공주는 비명한다
왕좌의 고뇌는 공주, 공주의 고통은 이름이 없다
왕자는 멜로디하고, 공주는 리듬한다
왕자는 내용하고, 공주는 박자한다
—「리듬의 얼굴」 부분


  위 시에서 왕자와 공주는 서로 대립하는 중이 아니다. 공주의 ‘고통하기’ ‘신경하기’ ‘비명하기’ ‘리듬하기’ ‘박자하기’는 왕자의 ‘고뇌’ ‘애도’ ‘정신’ ‘연설’을 이미 내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숭고가 전체Whole의 논리를 따른다면, 여성의 숭고는 무한Indefinite의 논리를 분만한다. 전체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욕망의 경제이자 (불쾌를 쾌로 전환시키는) 쾌락의 경제Economics of Pleasure이기에, 전체의 동일성에 귀속될 수 없는 수많은 예외를 양산하고, 그것들을 배제적으로 포섭하기에 이른다.19) 한편 무한의 논리에서 예외는 전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체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결코 메워질 수없는 구멍the Hole of the Whole, 비–전체의 표식이다. “오려낸 자리로 /구멍이 들어온다/내가 나간다”(「고잉 고잉 곤」). 이처럼 실재하는 구멍, “순수하게 존재하는 부재”20)로 인해 고통, 죽음, 없음을 상회하는 무한성이, 무한한 반복과 변주의 리듬 (주이상스의 경제 )이 출현한다.21)


줄넘기 줄이 땅에 닿을 때 타! 소리가 난다. 줄이 아프다. 아픔이 만개한다. 곧 줄이 공중으로 떠난다. 바로 지금이다, 살아나가자. 그러나 또 타! 줄이 땅을 치고 아픔은 치솟는다. 다시 고통이다. 죽음보다 더하다. 없음보다 더하다. 그러나 줄은 다시 올라간다. 그 순간 하늘이 커지고 적멸보궁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다시 타! 매 맞는다. 내 두 손에 줄이 묶여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손을 놔! 내가 소리친다. 그러나 나는 다시 타! 고통이 밀려온다. 서커스단의 난쟁이가 채찍을 갖고 논다.
—「리듬의 얼굴」 부분


이 고통의 리듬이 유발하는 “아직 멈추지 않은 음악”(「얘야 네 몸엔 빨대를 꽂을 데가 많구나」)이 무한성으로 나아가는 시적 계단을 만들어낸다 (“내 음악이 계단을 발명한 것”,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비–인간’이 남성의 세계에서 외부에 (비인간으로서 ) 존재한다면, 여성의 세계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미와 미리 사이에서”(「작별의 공동체—부사, 날다」)라는 설명할 수 없고, 특정할 수 없는 내부적 시공간에 있다. 따라서 남성의 숭고가 외부로의 초월과 승화를 의미한다면 여성의 숭고는 알려지지 않은 내부, 그 장소 없는 장소로의 망명을 촉구한다. “나는 어디서나 태어나는 새입니다/땀구멍만 있어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날개 냄새」). 이처럼 도처의 구멍에서 태어난 “새마다 비명은 기선처럼 크다/사람의 마음에 담긴 소리는 이보다 더 크다”(「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이른바 ‘비–인간’이 세계를 장악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에 의해 점령당한 세계가 ‘비–인간’에 의해 되찾아지는 것. ‘비–인간’의 함성은 무한한 여성에 대한 선포이자 ‘비–인간’적인 것들의 회집을 이행하는 무한한 명령이다.



5. 중립의 봉기


가다가 서고
가다가 울고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는 멀리 갈 수 있답니다
노래도 아니고
메아리도 아니고
아주 멀지만 자유만 있는 장소에서
나는 그곳을 나는 새입니다
—「10센티」 부분


  끝으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이 개시하는 정치적 급진성이다. 동시대의 현실 속에서 ‘비–인간’의 옹립과 선포는 미학의 문제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대면해야 할 최대의 정치적 전선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비인간에 대한 저항을 제외한다면, 정치에 남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끝없이 탄생해야 하는 이 비참하면서도 놀라운 비결정성, 즉 또 다른 비인간으로부터 진 빚이 우리의 영혼에 없다면, 도대체 무슨 수단으로 비인간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22) 인간중심적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비인간’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이다. 그러나 비인간을 척결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주의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 관건은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저항 수단으로서의 “끝없이 탄생해야 하는 이 비참하면서도 놀라운 비결정성”을 증명하는 ‘또 다른 비인간’, ‘비–인간’의 급진적 저항성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의 ‘비–인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최근 김혜순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영원히 의견을 내지 않는 태풍 속의 저 나무들처럼, 혹은 부과된 정체성과 제 이름을 벗겨버린 제 몸처럼 중립, 중간의 장소입니다. 저는 문학이란 이 텅 빈 사막, 저 맹렬하고도 무관심한 중립성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순간의 체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3)


  ‘중립’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시가 놓여 있는 장소에 관한 자기 지시적 증언 속에서 언표된 이 이례적인 단어는 김혜순의 시학적 비전뿐만 아니라, ‘문학의 자율성’과 연관된 결정적 본질(“맹렬하고도 무관심한 중립성”)로까지 확장되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왜 중립인가? 일반적으로 급진적 정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중립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한 여러 일반화된 오해 및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중립은 특정 사안에 대한 분명한 입장의 부재, 주장의 결여, 의견의 회피처럼 간주된다. 양비론 또는 양시론으로도 일컬어지는 중립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어떤 결정도 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회피이다. 물론 중립은 오늘날 대체로 후자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중립을 표방하는 자는 많은 경우 현실에 관여하기를 포기한 우유부단한 인물, 심지어는 기회주의자로 비난받기 쉽다. 특히 무수히 많은 대의가 정치적으로 난립할수록 중립이 서 있을 수 있는 땅은 더욱 비좁아지기 마련이다. 정치적 억견들이 저마다 정의의 이름으로 극도의 대치 국면을 형성할 때 중립은 성립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애초부터 존재한적 없다는 확신 속에서 망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립은 그런 소극적 포기,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중립의 원리를 사유할 수 있고 , 나아가 중립의 급진적 정치성을 탐구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중립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한다. “나는 중립에 대해 구조적 정의를 제시하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볼 때 중립이 ‘무미건조’ 중성, 무관심의 인상들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립—나의 중립—은 강밀하고, 강력하며, 전대미문의 상태들로 귀결될 수 있다. 패러다임을 좌절시키는 것은 열정적이고 불같은 활동이다.”24) 패러다임의 좌절은 단일한 의미, 전체적인 가치의 위계에 대한 거절을 뜻하며, 의미를 낳은 이항 대립의 원리에 대한 투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중립은 단지 특정한 패러다임에 대한 반대로 충족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좌절, 해체, 붕괴는 세계의 모든 패러다임성 자체에 대한 단호한 거절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립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열렬한 관심과 맹렬한 지성, 무엇보다 지난한 용기가 요구된다. 세상의 모든 의견·주장·입장·이념 들에 의해 온전히 점령당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모든 억견들의 불가능성을 스스로의 존재로서 증명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중립은 하나의 고정된 입장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유동적인 활동, 명사가 아니라 동사 (중립하다)에 가깝다. 중립하기는 일종의 봉기하기이다. 중립은 단순히 상반된 의견들 가운데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中]의 도저한 일어섬[立]이기 때문이다.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숭고는 이른바 모든 의미의 패러다임들을 좌초시키는 거대한 가운데, 세상을 억압하는 그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허물어뜨리는 무한한 ‘사이’의 출현, 절대적 중립의 사건이다.


두 몸 사이가
오히려 살아 있는 듯
너무 귀해서 만질 수도 없는
투명하고 뭉클한 새가 우리 사이에 있는 듯
—「안새와 밖새」 부분


나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5천 마리로 들끓는 한 마리 새다. 5천 개의 그
림자다. 새와 새의 사이가 다 새인 새다.
—「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부분


  김혜순의 새하기, 시하기, 리듬하기는 이처럼 안과 밖, 언어와 언어, 개체와 개체 간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이’에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몸짓이다. 사이는 그러므로 단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고, 관계 짓는 “오히려 살아 있는 듯”한 부재이다. 그래서 수많은 새로 이루어진 김혜순의 거대한 새는 그 안의 “새의 사이가 다 새인 새다”. 이 사이를 감각하려면, 사이에 존재의 형식을 부여하려면 그것을 부재, 없음이라는 존재의 대립항으로 묘사할 수 없다.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의 언어는, 그 사막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모래에 대해, 그리고 모래와 모래가 배태하는 사이의 무한성에 관해 말한다. 여기서 “새는 사이이기도 하다”(「새는 왜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는 결정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나는 지금 모래가 한 알 한 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자라는 사막에서

우리는 부재로 가득 차 세상을 살아간다는데, 지구상 생물은 공중에 흩어진 나의 몸짓들처럼 부재의 서식처라는데, 부재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고, 부재자들이 심해에서 부재를 내뿜고 있다는데, 부재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는데, 마찬가지로 부재자도 존재자 없이는 살 수 없다는데, 존재하는 것이 모두 사라진다면 부재자 또한 살지도 죽지도 못한다는데, 그러면 부재자는 존재자가 나타나기를 천년만년 기다려야 한다는데

시인은 왜 부재의 집을 짓고, 부재와의 사랑을 하고 싶은지, 시인은 어째서 존재 속에서 부재를 펼치고 싶은지, 나는 왜 너에게서 존재하는 것보다 부재하는 것을 달라 하는지, 존재하는 것과 부재와의 키스는 존재의 균열이라는데. 그렇다면 존재자를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라 꼬드기는 것은 누구인가. 부재자가 아닌가.
—「모래의 머리카락」 부분


  어째서 시인은 이토록 끊임없이, 처절하게, 파편화된 언어로 부재를 증명하려 하는가? 그가 표출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의 무의미(허무)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는 어머니의 죽음이 일으킨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태어난 시집이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의 슬픔으로 인해 마치 육체와 정신이 산산조각 나듯 모래 알갱이처럼 분자화된 언어들로 힘겹게 시하기(모래하기)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김혜순의 시학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새라는 형상–이미지조차 더는 유지할 수 없는 시인의 고통을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시인이 계속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안의 어머니를 발견해나가는 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자기 안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기나긴 도정 안에서 쏟아지는 말이다.”25) “나는 시인은 무조건 어머니로서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26)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김혜순이 언급하고 있는 어머니는 실재하는 어머니를 지시하지 않고, 제도가 구축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모성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시의 어머니, 어머니로서의 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기원, 바로 그 무한한 여성에 대응하는 불완전한 환유적 기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혜순 시의 어머니는 언제나 본질의 부재, 더 나아가 부재하는 것으로로서의 실재에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내 어머니는 내 안에서 이미 죽은지 오래다.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순간, 내 안에서 나에게 생명을 주고 죽었다. 죽은 어머니가 내 안에 있다. 어머니는 죽음으로써 현존한다.”27)

  그러나 ‘죽음으로써 현존하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상실’은 여전히 시인에게 별개의 사안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집은 무한한 여성을 환기하는 환유적 기호, 그 구체적 현실로서의 ‘엄마’의 부재를 시인이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개인으로서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엄마’라는 기호가 지시하는 존재의 부재, 그 엄연한 사실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인의 ‘모래하기’는 이처럼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며, 독자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시인의 사적인 기억·추억·애증 등을 파편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는 ‘엄마의 부재’라는 구체적 현실을 다시 한번 ‘부재하는 엄마’의 무한성으로 전환시키며, ‘지구’라는 중심의 부재를 ‘부재하는 중심’이라는 현존하는 사태로 되돌린다.

  위 인용한 시의 발화자가 필사적으로 부재를 전경화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부재는 단지 존재의 결여나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불)가능성이다. 그 모든 있음의 사태로도 영원히 몰아낼 수 없는 없음이 있음을, 오히려 있음이 없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재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는데”) 입증하는 중이다. 

이러한 없음의 무한성을 향한 호소는 부재에 내포된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킨다. “부재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고, 부재자들이 심해에서 부재를 내뿜고 있다는데” 모래–언어로 씌어진 이 처절한 비탄의 메아리에 내포된 고통의 무한성은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생명들의 기나긴 생멸의 시간을 증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소멸하지 않는 이 절망적 생명력을 증언한다. 이 지점에 집중할 때 비로소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의 무한한 사막이라는 시적 공간은 시인의 개인적 상실의 고통을 표출하는 언어의 무대를 넘어, 누군가에게는 과거였고 누군가에게는 미래일, 그리하여 내밀하게 사적이지만 동시에 광범위하게 공적인 애도의 지평으로 확장된다. 그곳은 시작도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사막, 무수히 많은 모래로 구성된 모래인들이 살아가는 장소, 모래–언어로 무한히 증언되는 침묵의 광활한 ‘사이’이다.


공주와 눈 맞추면 다시는 세상을 못 봐. 죽은 것만 봐. 삶으로 돌아가는 입구를 못 찾아. 침묵으로 살아. 이 침묵은 죽음에서 온 것. 두 개의 세상 사이에 있는 것. 그곳은 흰 상복을 입은 기린의 서식지. 네가 살아 있던 순간과 네가 살아 있지 않은 순간, 그사이. 호리지차. 페이지의 낭떠러지. 날 선 흰 침묵. 이름조차 없는 그사이. 그 사이를 운항하는 제 키보다 높은 꽃을 머리에 올린 여자의 배 한 척. 흰 장갑을 끼고 너와 나, 열 손가락으로 깍지 끼면, 그 사이를 비집고 운항하는 장의차를 실은 배.
—「시인의 장소」 부분


눈을 뜨면 불타오르는 모래바람
모래알몸 두 구具가 속절없이 엉킨 몸을 푼다.
언제 다시 만날까,
손가락이흩어지는 사막. 몸의털들이흩어지는 사막.
소스라치는 영혼들의 회오리.
모래 한 알과 한 알이 살을 비비는 사막.
—「사막의 숙주」 부분


  “두 개의 세상 사이에 있는 것” “이름조차 없는 그사이” “호리지차”라는 극소의 차이가 ‘시인의 장소’이다. 이때 사이는 경계가 아니다. 경계가 존재를 분할함으로써 인간의 인간됨(정체성)을 생산해내는 것과 달리, 김혜순의 사이는 오히려 그것들의 구분 불가능성을 활성화함으로써 정체성의 허물어짐을 낳는 장소, 즉 영원한 중립지대이다. 그렇다고 사막이 단지 인간의 폐허인 것은 아니다. 사막의 사이는 빈 공간이지만, 이 빈 공간이라는 부재를 매개로 현실에서와는 다른 만남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래 한 알과 한 알이 살을 비비는 사막.” 사막이 머금고 있는 무한한 사이라는 저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인해, 모래는 영원히 하나가 되지 않고 “그렇게 수억 조 경. 조용히. 저마다 혼자서”(「진저리 치는 해변」) 무한한 분열의 음악을 낳는다. “기침은 모래처럼/뭉쳐지지 않는다//기침은 떠나면서/존재하는 것//지금 나의 기침은 유한한 것의 무한한 분열”(「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무한한 포옹」).

  이처럼 무수히 많은 존재가 자신에게 부여된 의미의 정체성을 벗겨내고 모일 수 있는 익명의 장소, 그리하여 현실에서와는 다른 만남을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게 하는 광대한 세계가 김혜순의 모래–사막이다. “나여! 이 나는 희게 눈먼 채 너를 만나려고 이리 기다리는가”(「시인의 장소」).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특정한 ‘너’가 아니라, 전혀 다른 만남 그 자체이다. “자, 우리 테두리 없이 만나는 연습!”(「불면의 망원경」). 이러한 만남과 연대의 연습이 가능한 경이로운 언어적 공간이 바로 김혜순의 시일 것이다.


오직 모래

그러므로 모래인은 눈을 뜨고 미래를 볼 수 없지만

오직 원점에서

아직 그 누구도 아직 말을 시작하지 않은

수억 조 경
그 원점에서

아니 왜 이렇게 원점이 무수히 많아?
—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언어」 부분


모래인의 국가
모래인의 가정

[……]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모래인은

모래인과
작별한 다음
다시 작별합니다

모래인의 강령은
큰 작별 안에 작은 작별
수많은 작별의 별
—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결국」 부분


  시라는 이름의 나라에서는 이처럼 모래인들이 사이를 촉발하고, 사이가 모래인들을 탄생시킨다. 김혜순의 시하기는 언제나 원점으로의 귀결이자, 원점으로부터의 시작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러한 동시성 속에서 김혜순의 시는 중립을 선포한다. 중립은 단 하나로의 결집을, 전체로의 응집을 절대 유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 중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동일성도, 비동일성도 아닌 무한성, 원점의 무한성이다. 시의 중립, 나아가 문학의 중립은 무수히 많은 이질적인 것의 평등한 회집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이자, 원점 그 자체에 대한 불굴의 의지이다. 물론 그 장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그

러나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재의 무한성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다시 갈등과 대립만이 가득한 의미의 전체주의로 회귀할 것이다. 의미의 패러다임들끼리 벌이는 증오의 내전 속에서, 인간은 언제든지 비인간으로 축출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시는 언제나 모든 이념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 의미의 원점, 언어의 영도에서 다시, 인간 내부로부터의 봉기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렇게 모든 주의(이념)에 대한 반대를 배태하고, 의미의 독재에 항거하며 시는 고통으로서 함성을 지른다. 모든 중립을 허용하라. 그 어떤 이념으로도, 자아로도 귀속되지 않는, 세계들의 무한성을 인정하라. 이것이 모래국의 유일한 헌법이자, 모래인의 최대 강령이다. 적대로 가득한 오늘날의 현실 정치에서 중립은 정치의 무능력이지만, 문학에서의 중립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범위의 급진적 정치를 표방한다.

  • 1) 『중립: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77-78』,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p. 36.
  • 2) 이광호, 「새하기와 작별의 리듬: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 『작별의 리듬』, 문학과지성사, 2024, p. 295
  • 3) 김혜순, 「병: 여성이라는 이름의 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문학동네, 2002, p. 107.
  • 4)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8, p. 32.
  • 5)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의 철학이 은폐하고 있는 보편주의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들뢰즈에게서는 항상 그렇듯이 정적(또는 양적)인 대립을 넘어선다는 것은 언제나 그 대립항들 중 하나의 항이 질적으로 상승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끝난다. [……] 이렇게 볼 때, 동등을 중요시하거나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을 권하는 모든 규범과는 정반대로, 사유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은 극도로 귀족적이다. 즉, 들뢰즈에게 있어 사유는 오로지 서열hiérarchie이 매겨진 그 어떤 공간안에서만 존재한다”(알랭 바디우, 『들뢰즈: 존재의 함성』, 박정태 옮김, 2001, 이학사, pp. 49~53).
  • 6) 김혜순, 「몸과 죽음」,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마음산책, 2023, pp. 41~43.
  • 7) Guillaume Apollinaire, “Pure Painting”, The Modern Tradition: Backgrounds of Modern Liter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p. 114.
  • 8) 「타자와 동물」,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pp. 47~48.
  • 9) 김행숙, 「새하는 시간」, 『문학과사회』 2019년 가을호, p. 258.
  • 10) 이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253.
  • 11) 같은 책, p. 257.
  • 12)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비판기 이전 저작 Ⅲ(1763~1777)』, 박진 외 옮김, 한길사, 2021, pp. 94~96.
  • 13) 같은 책, p. 69.
  • 14)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뤽 낭시 외 7인, 『숭고에 대하여: 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p. 233.
  • 15) 같은 책, p. 235.
  • 16) Jean-François Lyotard, “e Sublime and the Avant–garde”, The Inhuman: Reflection on Times, trans. Georey Bennington·Rachel Bowlby, Polity Press, 1991, p. 105.
  • 17) 김혜순, 「쓰레기와 유령」,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pp. 40~41.
  • 18) 여성 시인이 경험하는 세 층위의 죽음에 대해서는 같은 책 참고.
  • 19) 이러한 무한성을 염두에 둔다면 김혜순의 숭고는 과거 페미니즘 미학 전통에서 정초하고자 했던 여성 숭고, 즉 기괴한 것, 섬뜩한 것, 그로테스크한 것의 현시를 통한 불화와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겠지만, 기존의 여성 숭고 개념이 ‘불쾌의 쾌’로의 전환을 지연시키는 논리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부정적 이항 대립의 원리로 수렴될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여성적 숭고에 대한 페미니즘 미학계에서의 오래된 고민과 논쟁,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좋은 참고 대상이 될 것이다. 김남이, 「여성적 숭고의 (불)가능성」, 『미학』 제89권 제2호, 한국미학회, 2023.
  • 20) 「쓰레기와 유령」, 『여성, 시하다』, p. 42.
  • 21) 유사한 맥락에서 자크-알랭 밀레르는 라캉의 악명 높은 성차 공식(‘성적인 관계 같은 것은 없다’)을 설명하면서, 욕망의 경제와 차별화되는 주이상스의 경제와 더불어 여성성의 논리를 사유한다. “성적 관계 같은 것이라는 공식은 기원도 종결도 없는 끝없는 대체 과정으로서의 주이상스의 경제를 스케치해야 한다. [……] 프로이트의 충동 이론은 남성적 성차 이론을 따른다. 그것은 충동을 전체화 하는 논리이며, 모든 요소들을 전체의 부분으로 위치시키는 논리이다. [……] 반면 라캉의 주이상스의 경제학은 비–전체(not-all)의 규칙을 따른다”(Jacques-Alain Miller, “e Economics
  • of Jouissance”, Lacanian Ink 38, Wooster Press, 2011, pp. 45~46).
  • 22) Jean-François Lyotard, Ibid, p. 7.
  • 23) 김혜순, 「어머니의 죽음, 남겨진 달」,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p. 94.
  • 24) 롤랑 바르트, 같은 책, p. 39.
  • 25) 김혜순, 「어머니: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p. 53.
  • 26) 김혜순, 「뻐꾸기와 잠수함의 토끼」, 같은 책, p. 18.
  • 27) 김혜순, 「어머니: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 같은 책,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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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솜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월간 현대시 박다솜 김혜순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말미잘시하다모든 종류의 슬픔 2025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계간 문학과사회 정의정 유령언캐니애도기억아카이브츠베탕 토도로프환상 문학윤성희느리게 가는 마음정한아3월의 마치 2025
인아영 당신을 향한 리듬 : 조시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문학과지성사, 2025) / 현호정,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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