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진짜인 가짜 ― 성해나 소설을 읽는 몇 개의 키워드
#장편이라는 방법
성해나의 첫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은 기하와 재하라는 두 인물이 일인칭시점으로 서술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기하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재하는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어머니와 따로 살았던 과거를 가진 한부모가족의 아이이다. 원인은 다르지만 상실과 결핍으로 인한 은밀한 상처를 공유하는 두 사람은, 그러나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한 가족’을 위한 부모의 노력은 각각의 아이에게 어딘가 온전하지 않은, 상처가 낫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자신의 현재를 확인시키고 부각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새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가족이 꾸려지지 않았더라면 평온하게 지속되었을 현재가 마치 그들의 침입으로 인해 훼손되었다는 듯이. 그렇게 ‘새로운 구성원’은 유일한 나의 것을 분유하려 들면서 결핍감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애초의 구성이 온전한 것이라는 감각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모두 좋은 사람인데 서로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야기는 분명히 비극적이며, 때문에 비극이라는 판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두고 온 여름』은 이 이야기가 ‘두고 온 것’에서 출발해, 이게 비극이라면 어째서 비극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얼핏 줄거리만 놓고 보면 이런 이야기는 구태의연하다. 기성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결속의 실패. 그러나 거듭 읽으며 그동안의 성해나 소설들에 비추어, 이 첫 장편은 서사보다는 소설의 형식을 강조하며 그 특장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기하와 재하의 말이 번갈아가며 두 번씩 이어지는 이야기.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으로 보이나 서로를 언급할 뿐 호명하지 않고 직접 묻기보다 따로 짐작하는 이야기. 같은 경험에 대해 굳이 반복해서 언급하게 하고, 사진—이미지를 생산하고 해석하는 입장 간에 시간차와 해석 차가 있을 수 있다—이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인용하고, 누군가와 경험을 공유하거나 확인받지 않은 채 일인칭시점으로만 일관되게 과거를 서술하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공백과 어긋남을 형식–내용화한다.
내용과 형식의 역학 관계에 대한 여러 비평적 논의와 연구가 있지만, 『두고 온 여름』의 그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이 장편의 핵심 장치가 사진–이미지와 서간체(재하의 경우)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고 싶다. 우선 사진이라는 도구의 활용. 이 장편은 마치 네 롤의 필름을 현상하듯이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고, 각 장의 이야기는 그 장의 제목이 되기도 하는 인물 (기하와 재하)이 자신의 기억을 통해 가족의 과거를 반추하는 방식으로 씌어지며,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설적 장치가 사진–이미지다. 두 초점 화자의 아버지가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을뿐더러 가족 구성원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 시도는 사진관 쇼윈도에 내걸린 액자 속 사진으로, 훗날에는 덜 채워진 사진첩으로 남는다. 이로써 사진이라는 비교적 분명한 이미지–대상으로 남은 기억은 인물의 서사를 돕는다. 기하의 장 (章)에서도 재하의 장에서도 이야기의 도입에 사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 이미지–대상이 궁극적으로는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역할하는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있던 장면을 포착한 것은 사진으로 치면 한 장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남은 하나의 이미지–대상에 대한 기억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소설에서는 그 이미지–대상을 ‘중국 냉면’에 대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기억으로 포착한다.2) 사진에 의한 이미지–대상은 하나의 사실을 확보하고 증명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다른 복수의 기억을 모두 긍정하는 장치로도 작동한다. 사실과 거짓이 아닌, 사실과 사실의 충돌을 포착하려는 서사의 욕망은 자주 개인들의 기억을 대상으로 삼아왔지만 성해나의 장편은 사진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듯하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들의 충돌은 중대한 하나의 사실을 향해 협동하기보다 그 하나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면서 어떤 진실을 그려 보인다. 누군가의 기억을 배제하며 이뤄내는 매끄러운 이해도, 오해를 포함하는 너그러운 이해도 아닌 서로 다른 모든 이해의 거친 결집은 필름 카메라로 찍어 현상한 사진처럼 미세한 결함을 무수히 내포하지만, 그로써 오히려 더 많은 사실, 즉 다른 기억들을 불러내고 그들을 내버려둠으로써 진실을 보존한다. 성해나 소설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할 때 한국 현대시론에서 시의 자유를 ‘내용=대상에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질적 이미지들의 병치나 음성·음소·음운의 반복 등 기법적인 형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하는 경우를 참고해볼 만하다. 특유한 시적 형식에 대한 의식과 표현으로 발견되는 새로운 의미에 대한 논의는 성해나의 장편이 본격적으로 취한 사진이라는 장치와 이미지–대상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서간체 형식. 편지는 소설의 내적 형식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장치로 언급되어왔다. 앞서 본 사진처럼 편지 역시도 서사를 전개하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작가 –텍스트–독자’로 이어지는 소설의 관계망은 ‘발신자–편지–수신자’로 이어지는 편지와 소통 구조상 친연성을 가지며, 무엇보다 편지는 시대적 의미를 포함한 문제적 개인의 소설사적 맥락을 담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한다.3) 이러한 편지는 소설에서 단순히 부수적 장치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내적 형식’이 된다. 성해나의 장편에서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씌어진 공통의 경험이 소설의 말미에 편지의 형식으로 거듭 언급될 때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형식화된 지점에 집중하게 된다.
편지는 일정한 거리감을 내장하는 형식이다. 거기에 담긴 내용과 무관하게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는 대면/대화하지 못하는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놓여 있다. 그 거리에 놓인 이야기(편지)는 그 자체로 ‘사이’의 형식이 된다. 더불어 편지는 결코 응답하지 못하는 말하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편지는 여타 형식의 글쓰기에 비해 적극적으로 청자/독자의 응답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의를 기울일 만한 형식이다). 대부분의 편지가 답신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지만, 혹여 답신이 있더라도 그 글은 대화에 비해 지나간 말 (편지)에 온전히 부합하는 응답이라고 하기 어렵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입장 모두에서 말을 고르고, 문장을 다듬어 전하고, 문장을 읽고 문맥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애초의 생각과 감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편지는 독백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두고 온 여름』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재하의 이야기는 ‘형’이라는 명확한 수신자를 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 역시도 분명해 보이지만 실은 그것 역시 주소 불명의 편지일 뿐이다[“빈 우편번호 칸 앞에서 저는 조금 곤란해졌습니다”(p. 142), “곰곰이 고민하다 저는 봉투의 공란에 오래전 우리가 함께 살던 집의 주소를 적었습니다”(p. 143)].
이렇게 사진과 편지라는 장치를 통해서 성해나의 장편은 분명한 누군가에게 확실히 전해지기를 의도하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두고 온 여름』의 이러한 형식–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음과 같은 소설(가)의 논리를 세우게 한다. 수신자가 불확실해도 발신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를 믿는다. 이것은 형을 부르며 쓴 편지를 마치며 “누가 이 편지를 받을까요”라고 쓰는 자의 진심이기도 하다. 이 진심은 허구의 상상으로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모두가, 모든 것이 진짜다.
누가 이 편지를 받을까요.
재하야, 다정히 부르며 이마를 쓸어주는 아버지일까요. 희고 따듯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서서 해바라기를 하는 어머니일까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다 가만히 미소 짓는 형일까요.
(『두고 온 여름』, p. 143)
#가족
제도적으로는 여전히 미진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문학에서도 가족의 형태는 인식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공동체가 형성되는 방식에 집중되어 있었던 가족 역사는 공동체가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근대적 핵가족의 형태와 기능을 초월하는 다양한 공동체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학에서만 하더라도 실상 수십 년 전부터 포스트모던한 가족으로서 유연 가족permeable family이나 바이털 가족vital family 같은 용어들이 소개되며 그것이 작품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를 관찰하고 그로써 인간 사회 안팎의 변모를 기대해오긴 했다.4) 최근 코로나19로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되어 있던 인간 사회에 대한 세부적 논의와 더불어 가족에 관한 관심이 새삼 불거지지 않았다면, 가족제도와 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여전히 답보적 혹은 퇴행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혈연 중심의 근대적 핵가족의 형태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혹은 그것에 무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최근 한국 소설 속 공동체의 형상은 무척 이상적이다. 여기서는 급격한 변화를 겪은 현대사회를 풍경으로 두고 복잡 다양해지는 가족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근대적 핵가족주의를 벗어난 다양한 가족의 양상은 이혼 가정의 분화와 자립을 통해 새로운 모성을 그리거나, 비정형 가족의 유동적인 결합과 해체라는 운동성에 주목하거나, 비혈연 가족으로의 변모 과정을 다루거나, 다문화가정의 해체와 복원의 양상을 사회적 이슈와 관련지어 그린다. 이러한 소설들은 혈연 중심의 가족 형태나 출산과 양육이라는 기능을 위주로 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고 현대적으로 변모하는 중인 가족의 현실태를 구체적으로 반영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거듭 새로운 관점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을 핵심에 두고 있는 최근의 소설은 일종의 운동성을 지닌 이야기로 읽힐 필요가 있다.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어느 쪽으로든 현실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발휘하는 소설로서 말이다.
반면 성해나 소설의 가족 형상화는 현실을 추수하는 쪽이다. 가족에 대해서라면 변화하고 있는 쪽으로, 가장 전위적인 지점에서 이야기 하는 편이 새로울 것이나 성해나의 가족은 여전히 고리타분한 인식에 발이 묶여 있기 일쑤다. 가족은 여전히 혈연관계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구성원의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족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토대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다소 보수적인 작가 인식이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한국 소설이 가족을 다루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 관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성해나의 소설은 저마다의 현실이라는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거듭 변화한 무엇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애초에 주어진 것, 운명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잊지/놓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이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인간을 형성한다는 인식이 그의 소설에서는 더 힘이 센 것 같다.
성해나의 소설이 가족을 형상화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밖에서 관찰하기.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에서 ‘나’는 친구 ‘오수’의 부탁으로 오수의 할아버지 상수연을 영상으로 촬영하게 된다.5) 오수 일가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성공한 기업의 오너인데 ‘나’는 그들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에 몹시 위화감을 느낀다. 그들 간의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말투나 태도, 심지어 옷차림까지도 ‘나’로 하여금 외부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감각하게 하는 형식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소설은 ‘오수의 가족’과 그 밖의 사람들로 구별된 세계를 그리면서 혈연가족이라는 경계가 얼마나 위태롭고 허위적인 상징에 불과한지를 묘파한다.
그런 맥락에서 소설의 중심 갈등은 무엇보다 오수의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킨 집안의 가보를 한낱 외부인에 불과한 감별사에게 ‘감별’을 요청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감별사는 그것이 ‘진품’은 맞으나 동시에 친일의 잔재이기도 하다고 답하고, 그의 말에 오수의 할아버지는 잠시 당황하지만 이어진 오수 아버지의 변호를 통해 검의 양가적 의미 중 그것이 진짜라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남으며 이후 감별사는 원래 그 자리에 없던 사람인 양 사라진다. 오수의 가족을 상징하는 검을 거리낌 없이 외부인에게 넘기고 감별을 맡기는 그 자체(이것은 나에게 가족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해달라는 요청과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로 오수의 가족은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의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혈연 가족)이 진짜라는 사실, 따라서 그것이 대대손손 유구히 지키고 보전해야 하는 가치를 가진 것임을 그들이 함께 확인하는 데 있지, 그 밖의 또 다른 사실은 손쉽게 편집해버릴 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영상은 오수의 요청대로 깔끔히 편집했다. 크고 아름다운 조부의 자택,
응접실에서 여유롭게 시가를 피우는 남자들, 화려한 오찬 장소에서 음식을 즐기고 케이크를 나눠 먹는 가족들의 모습. 감별사가 등장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덜어내고, 그 편집본을 오수의 메일로 보냈다. 오수는 애초 불렀던 것보다 더 큰 금액을 입금해주었다.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p. 204)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종일관 바깥의 존재로서 ‘나’와 카메라는 가족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에 있는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감정의 파고를 감지하는 ‘나’는 렌즈를 움직이고, 카메라는 ‘나’가 미처 감각하지 못하는 지점까지 기록한다. 카메라를 든 외부인은 완벽한 바깥으로서 가족 내부를 철저히 사실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야기 바깥의 독자는 소설의 형식으로 기록된 표면이 그 전부가 아님을, 또 다른 사실로서의 내적 서사가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내용과 카메라라는 형식의 연결(촬영과 편집)에서 새롭게 생성될 다음 장면을 기대한 채로 씌어진 게 아닐까. 감별사의 말에 충격을 받아 어안이 벙벙해진 ‘나’가 한순간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을 때에도 거기에 ‘나’의 공백을 포함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형식(카메라)이 있었다는 점을—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에 오수의 할아버지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친다— 부러 일러주는 대목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가족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것에 ‘나’ 역시 동의하는 순간으로 비친다. 이렇게 위대한 가족의 역사는 바깥의 공모로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을 누군가가 잠시 잊었을 때조차 성해나의 소설은 계속 기록하고 있다.
둘째, 안에서 관찰하기. 『두고 온 여름』에서 아버지가 고집스럽게 촬영한 가족의 사진이 그렇다. 기하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하며 매년 직접 찍은 아들의 사진을 쇼윈도에 전시하고 “누구나 가장 귀하고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것을 눈에 띄는 곳에 두는 법이다”(p. 9)라고 말한다. 재혼을 한 후에는 보란 듯이 네 식구의 사진을 “사진관에 있는 액자 중 가장 튼튼하고 비싼 것”(p. 20)에 넣어 사진관에 걸어둔다. 재하 모자와 헤어진 후에도 기하의 아버지는 졸업식처럼 특별히 기념할 날이면 그들을 찾아가 사진을 찍는다. 아버지에게 가족은 한 장의 사진 속에 함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한 그의 이상과 다르게 기하와 재하의 현실은 가족사진이라는 프레임 바깥의 시간이다. 그들이 가족이라는 그립고도 허약한 구심력을 반만 채워진 사진첩 속의 사진들로 경험할 때, 서사는 드문드문 이어진다. 의미심장하게도 사진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해 사진의 미래를 기약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인 성해나의 첫 장편은 그러므로 기하와 재하라는 개인들의 남다른 가족사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내용을 구성하고 전달하는 형식에 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다른 언어로 부르기. 성해나의 여러 단편에서 근대적 의미에서의 가족은 그 형태가 해체된 상태로 개별 삶의 중요한 국면에서 그것의 존재 의미를 의심받는다. 「언두」에서 일가친척이 부양하기를 마다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청년 도호의 삶은 겉보기엔 누구보다 반듯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수어로만 소통할 수 있는 할머니는 ‘나’에게 도호와 완전히 연결될 수 없는 일종의 경계로 존재한다.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라면 ‘다른 언어’에 적응해 “눈치껏 행간을 읽고 분위기를 파악하며 그들에게 하나하나 맞춰나”(p. 37)가는 번역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집 식탁 한편엔 양념통과 수저통, 전기 포트와 함께 알루미늄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 도호의 중학교 졸업 사진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찍은 몇 장 안 되는 사진이었다. 액자는 식탁이 들썩이거나 누군가 팔꿈치로 벽을 치면 곧잘 엎어지곤 했다. 가끔 식탁이 움직여 틈이 벌어지면 바닥으로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도호가 재빨리 팔을 뻗어 그것을 잡아냈다. 벽걸이용 고리가 버젓이 붙어 있는데도 도호와 할머니는 그것을 벽에 걸지 않고 식탁에 세워두었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묻자 도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저렇게 두다 보니까 이젠 저게 더 익숙해졌어. (「언두」, p. 35)
눈치껏 맞춰주는 예외적인 시선 바깥의 현실과 소통하지 못하는 그 가족의 형상은 알루미늄 액자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와 시간의 포착은 가벼운 프레임에 갇혀 바닥을 나뒹굴거나 거듭 추락할 위기를 맞는다. 가족은 식탁이 들썩일 때마다 엎어지고 누군가에 의해 “별생각 없이 다시 집어 세워”(p. 135)지며 거기에 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이렇듯 무심함을 가장하면서도 집요하다.
성해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가족으로 묶이지 않은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오즈」, p. 326)라고 자조하는 ‘하라’의 이 말은 「언두」에서의 ‘나’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게 들린다. ‘나’는 합의하에 별거하며 남편의 외도를 묵인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차갑게 대하면서도 아빠에게는 무심하고도 다정하게 다가선다. 이 소설의 마지막[“아빠가 튀김용 젓가락을 깁스 안에 찔러넣을 때마다 악취가 미미하게 풍겼다. 이제 곧 익숙해질 그 냄새를 맡으며 나도//큭큭, 웃는다”(p. 53)] 장면은 그래서, 가족은(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번역한 난센스 퀴즈처럼 보인다.
또 다른 소설에서는 가족을 더 구체적으로 다른 언어로 번역해본다. 그에 본격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괸당」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부부는 당숙의 먼 친척이었다. 촌수로 따지면 남이나 다름 없었으나, 아버지는 구태여 내게 그들을 재종숙이라 부르라 했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들도 여지없이 한 뿌리씩은 걸쳐 있을 테고, 그 정도면 괸당이나 진배없다며, ‘숙부’와 ‘숙모’는 너무 친밀하게 여겨지고, ‘아저씨’ ‘아주머니’는 예의에 어긋나는 듯해 고심하다 나는 그들을 ‘재종숙 부군’과 ‘부인’,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괸당」, p. 129)
큰아버지나 아버지의 육촌 형제 대신 당숙이나 재종숙이라는 낯설고 도리어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 친밀하고 가까운 가족 구성원을 이르는 말이라는 역설이야말로 이 소설의 사건이다. 이 소설은 괸당이라는 생경한 언어를 통해 그동안의 무감하게 가족이라 이름하며 의미화해온 것의 정체에 대해 자각하도록 이끈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에서 나고 자라” “한국에 마땅한 일가친척”(p. 129)도 없는 이가 죽은 아버지를 고향에 묻겠다는 일념으로 차별과 멸시를 감당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변주된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이에게 괸당도 “씨먀”(p. 168)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낯선 말일 뿐이듯, 누구에게나 가족은 그것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이의 말과 경험으로 번역해야만 겨우 명목상 전달되는 것에 불과하다. 소설의 말미에서 ‘재종숙 부군’이 힘겹게 내뱉은 씨먀라는 말은 ‘나’의 삼촌과 아버지가 그토록 주장하며 권력처럼 휘두른 바로 그것, 가족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그들은 그 말에 아무 감응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네들 무신 거 믿엉 도와주나? 신용도 어신 사람들을?
응?
그 말에 부군이 힘겹게 답했다.
씨먀 아입니까, 우리.
씨먀. 나는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우리 식구가, 더 나아가 이 마을 사람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고 정답게 여기는 말이었다. 애정과
약간의 미움, 끈적끈적한 정이 뒤섞인 말. 그렇게 숱하게 쓰던 말인데도 왜
인지 부군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해서는 안 될 말처럼 여겨졌다.
(「괸당」, p. 168)
#세대
가족을 다른 언어로 써보고자 하는 시도는 「당춘」에서처럼 혈연관계에 대한 언급 없이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구상해 보여주는 방식으로도 그려진다. 근대적 가족 개념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지만 이들 삶의 방식은 그것의 역할 없이도 건강하게 유지된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도래할 미래에 있을 어떤 가능성—구체적으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영상 촬영과 편집을 학습하고 결과물을 인터넷 공간에 올려 마을 프로젝트의 규모를 확장함으로써 기대할 만한 영향력 등—도 없지 않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맞물리게 만든 식탁이 훨씬 튼튼하다는 설명이나 “나한테는 그 비빌 언덕이 여기 할머니할아버지들이고 또 너희들이고, 너희한테는…… 나였으면 싶네”(p. 228)라는 고백에 담긴 믿음과 기대는 소설의 초반에 삼촌으로부터 한 번, 소설의 말미에 ‘나’로 하여금 한 번 똑같이 반복되는 “그래도……”라는 접속사와 그 뒤에 붙은 말줄임표에도 있다. 이전의 사정을 수긍하는 동시에 이후의 사정을 비교적 긍정하는 말의 힘은 지금까지의 가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다음을 상상하는 이야기의 동력이 된다.
제가 뒤에서 받치고 있을 테니까 저한테 기대서 찍으세요.
할머니를 일으켜 세운 뒤, 나는 그녀의 뒤에 서 몸과 손을 받쳤다. 할머니는 망설이다 내게 몸을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뗐다. 화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카메라에 담는 풍경이 내게도 언뜻언뜻 비쳤다. 버려지고 썩어가던 것들이 부엽토가 되고, 기세 좋게 흙과 섞여 땅을 꿈틀거리게 하고, 그 땅 위에 모두가 한데 뭉쳐 거름을 내고 밭을 갈고 두둑을 짓는…… 바람이 불자 축축하고 신선한 흙냄새가 풍겨왔다. 밭이 제법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당춘」, p. 268)
소설에서 아이들과 삼촌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봉합되지는 않지만 서로가 서로의 비빌 언덕이기를 바라는 삼촌의 말은 아이들이 알려준 “안정적인 화면비”(p. 242)에 맞춰 흔들리지 않고 촬영하기를 어려워하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기대라는 ‘나’의 말로 이어진다. 그렇게 할머니의 화면에 담기는 것들은 삼촌과 ‘나’와 할머니로 이어지는 마음의 표현과 그것의 결과가 된다.
물론 이 소설의 또 다른 무게 추는 세대라는 말이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짚어볼 것은 세대 간 갈등이 가르치는 청년과 배우는 노년 사이의 기술적 경험에서 발생하기보다 아이들이 영식 삼촌에게서 전해 받는 ‘진심’에 있다는 점이다.
갈 만한 사람만 간다는 농활에 자진하고 주위 친구들을 독려하며 훗날 한국형 지트Gite를 만드는 게 꿈이었던 두루가 농촌 생활을 중도에 포기한 데에는 영식 삼촌의 진짜 마음이 있었고(“사람이 이상만 꽉 차 있다고”, p. 219), 바로 여기에 해소하기 어려운 간극이 놓여 있다. 이 차이를 단순히 세대의 역사로 보편화하거나 개인의 경험으로 개별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해나의 소설은 인물 간의 차이를 그릴 때 그들의 관계를 연령이나 성별 혹은 계급적으로 매끈하게 나누지 않는다. 전 세대를 인정하는 마음과 그 세대에 속한 누군가에 대한 염오가 동시에 일 때 혹은 그 반대일 때를 여러 단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성세대를 존중하는 자와 그런 태도를 가식이라고 의심하는 자가 같은 세대를 이룬다. 「OK, Boomer」에서 ‘조합’에 가입한 흔치 않은 젊은 교사 ‘곽’을 두고 그의 태도에 대해 뒷말을 나누는 ‘카풀 메이트’인 ‘나’와 ‘오’가 그렇다. 오는 조합에는 가입해놓고 개인의 실리를 추구하는 곽의 속내가 어딘가 불온하며 그 마음은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하지만, 더 의심스러운 것은 성과급에 대한 오의 질문에 “그게 뭐 중요한가요, 허허”(p. 100) 하고 넘기며 화제를 돌리려 애쓰는 ‘나’의 내심이다.
진짜에 대한 질문은 이 소설을 포함해 성해나의 많은 소설을 관통한다. 「OK, Boomer」에서 아들은 기계로 음악을 만들지만 ‘나’는 음악이라면 무릇 진짜 악기를 연주하고 진성의 한계를 내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교사는 교사로서 조합원이기도 하지만 이전 세대의 교사들이 만들어놓은 기성의 규칙에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거듭 갈리는 입장과 판단에서 진짜가 아니지 않은 것은 없어 보인다. 이 틈과 어긋남은 식사 후 이 사이에 낀 음식물의 이물감처럼 불편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의 속성이기도 하다. 억지로 메꿀 수 없으며 수시로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누구의 삶에나 있는 그 빈틈은 성해나의 소설에서 “큭큭” 하는 소리로 쓰인다. 이 비언어적 표현은 앞서 언급했던 「언두」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후에 볼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OK, Boomer」의 클라이맥스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서도 쓰인다.
니들 마음대로 할 거면 당장 나가라.
녀석은 기죽지도 않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더 완고하게 일렀다.
여긴 내 집이야.
와, 진짜 대박이네.
녀석이 실소를 터뜨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상황을 관망하던 다른 녀석들도 한 명씩 따라 웃었다.
웃어? 녀석들은 뭐가 우스운지 계속 큭큭댔다. 큭큭. (「OK, Boomer」, p. 122)
이 표현은 “실소”조차도 틀어막으려고 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 놓여 있다. 별안간 발생하는 ‘큭큭’ 소리는 소설의 인물 간에 대립과 긴장을 유발하는데, 소설 밖에서 제3자로 존재하는 독자는 그 소리가 가로지르는 양쪽의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분해놓은 어느 편에도 ‘진심’으로 동의할 수 없게 된다. 얼핏 세대 갈등을 전면화하지만 단순히 어느 편에 동조하기를 요구하는 식의 이야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판결의 형식을 취하는 해석보다 해소될 수 없는 틈을 감각하고 받아들이기를 요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틀어막아도 기어코 새어 나오는 소리처럼, 그 소리가 발생시키는 또 다른 균열처럼 인간관계에는 언어를 통해서 명백하게 확인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그런 지점이 있다는 확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바로 거기서 출발하려고 한다는 점이 성해나 소설의 미덕일 것이다. 「언두」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에게서 풍기는 냄새와 그 ‘악취’에도 익숙해지리라 여기는 나의 믿음/체념의 표현과 “큭큭” 사이에 행을 구분하면서 의도적으로 마련해놓은 여백이 그렇고, 「OK, Boomer」에서 인용한 장면 바로 다음에, 켜놓은 인스타그램 라이브 화면에서 형형색색의 하트가 폭발하는 것을 보고 모두가 속수무책 그 무의미의 공동 영역에 매몰되어 대립하는 목소리가 지워진 듯 각자의 생각과 감정이 동일한 부호로 표시되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다.
—????????
—??????
—????????? (「OK, Boomer」, p. 122)
#글-쓰기, 별종의 말하기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해해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인격적으로 특별한 부류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성의 공통된 특성이다. 가령 모녀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각자 내면을 갖는 인간이 서로 간의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게 일시적으로나마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성해나의 소설은 개인의 어쩔 수 없음과 관계의 틈이 동시에 작용하는 사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글-쓰기’라는 형식을 활용한다. 「김일성이 죽던 해」는 모녀 관계를 포함한 여성 연대를 내용으로 삼으면서 침묵이 감당하지 못하는 역사가 글-쓰기로 발휘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엄마가 놓고 간 다이어리에 씌어진 글과 엄마의 글을 읽은 ‘나’의 목소리로 씌어진 이 소설로서 반복된다. 이처럼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이해할 수 없음을 글-쓰기로 해소하는 듯한 서사는 어딘가 익숙하다. 하지만 성해나의 소설은 침묵에서 글-쓰기로 이어지는 행위 사이에 ‘응답’이라는 장치를 마련해두며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음을 말하는 데에 특별히 지면을 할애한다. 이 응답은 일대일대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한 남다른 의미가 있다. “김일성이 죽던 해”(p. 363)로 시작하는 엄마의 글은 ‘나’가 온라인으로 진행한 글쓰기 수업에서 수강자들에게 내준 숙제에 대한 예기치 않은 응답이다. 엄마의 글 속에서라면 오래 글-쓰기를 잊었던 ‘순이’(엄마)가 다시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이 ‘나’(딸)의 이유 모를 울음을 살피다 발견한, 모르는 새 돋아난 젖니에 대한 응답이다. 글-쓰기는 ‘말(할 수) 없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성해나의 소설에서라면 나를 향하지 않은 물음에 대한 나의 적극적인 응답처럼 보인다. 그 별종의 행위야말로 성해나의 소설이 씌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엄마, 엄마는 꿈이 뭐였어.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는 내 앞에 사과를 한 조각 올려준다.
햇사과라 달더라.
사과를 먹는 대신 나는 껍질을 집는다. 한 번도 끊지 않고 깎아 길고 긴 껍질을.
그걸 왜 먹냐?
나도 이게 더 맛있더라.
니도 참 별종이다.
웃는 엄마에게 나는 머뭇대다 말한다.
엄마 딸이잖아.
단단한 어금니로 길게 이어진 사과 껍질을 씹는다. 누구도 먹지 않는 그것을 아삭아삭아삭.
(「김일성이 죽던 해」, p. 394)
생살을 뚫는 예측 불가의 고통 (젖니)을 바라보던 눈은 질긴 껍질을 씹어보는 단단한 입으로 이어진다. 모든 고통은 유일하다는 인식과 그 하나의 고통을 짐작하려는 감정의 운동과 연결이 겨우 과육 대신 껍질을 씹어보는 ‘별종’의 일로 대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해나의 소설은 ‘진짜’가 하나 대 하나의 완벽한 교환과 같은 이해와 정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님을, 유일한 고통 같은 진짜에 완벽하게 대응하는 언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언어 이전의 경험과 믿음이 같을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말로 쓸 수 있을까. ‘진짜’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혼모노」의 세계는 무속 신앙이라는 불가해한 지점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서사이지만, 도래할 무엇에 대한 믿음과 가능성을 상상하기 위해 개연과 핍진으로 꾸려지는 서사에서 누락된 지점을 언급하고 감당하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거듭 섬세한 독해가 요구된다. 이른바 메타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이야기는 우선 초점 화자를 통해서 ‘이야기하(되)는 인물’에 대한 편견을 깬다. 갓 신내림을 받은 어린 무당을 시기하는 ‘나’는 중년의 남성이다. 이는 소설 밖에서 문화·역사적으로 부각되는 무당은 대개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경험적 편견을 자각하게도 하지만, 경험(현실)과 언어(소설)의 어긋남을 경유해서 무당이라는 이름에는 실상 현실적인 모든 구분과 판단이 무용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몸은 신내림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갖는다. 이 젠더리스한 존재에게는 국적도 나이도, 정체를 규정하는 어떤 차이와 구분도 무용하다. 심지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 존재는 그 자신이 유일한 종 (種)이 된다. 「혼모노」의 세계는 바로 여기서 출발하며, 이것이 성해나 소설이 소설에 건네는 질문이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몸을 억지로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 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혼모노」, p. 222)
여기서 ‘나’는 모시던 신이 모두 떠나고 그 자신이 무당으로서 더 이상 ‘진짜’가 아니게 된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땀과 피로 흥건히 젖은 채로 작두를 타는 ‘나’를 보고 굿판을 주도하던 진짜 무당도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비로소 ‘나’는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에서도 벗어나 그 자신이 된다. 이 해방은 무당으로서 ‘나’가 “진짜 가짜”(p. 223)가 됨으로써 도달한 지점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진짜와 가짜라는 양자택일의 억압에서, 진짜 진짜라는 믿음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도 의미 있지만 언제나 진짜와 가짜를 동시에 체화하는 존재라는 무당의 정체성을 비로소 스스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마지막은 ‘나’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소설이 작가에게 하는 말이자,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 된다.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 (「혼모노」, p. 223)
마침내 성해나의 소설은 미리 주어진 것들에게 구속된 존재들에 대한 변호처럼 읽힌다. 가족을 포함해 인간 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들에 대한 그의 이야기들이 말이다. 또한 이 변호가 더욱 흥미롭고도 소중한 이유는 이 편과 저편을 단순히 가르는 이분법 자체를 무화하는 전략에 과거와 미래를 아울러 보는 통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현실이 각각 허구와 사실을 담당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인식을 딛고, 성해나의 소설은 ‘진짜 가짜’의 역할을 담당하려고 한다. 내용과 무관한 형식, 개인을 무화하는 역사라는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설의 임무라는 것을 보여주듯 성해나의 소설은 별종의 말하기가 되어 그동안 안다고 믿었던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언두」 「오즈」 「청춘」「당춘」 「괸당」 「OK, Boomer」 「김일성이 죽던 해」(『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두고 온 여름』(창비, 2023), 「혼모노」(『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재하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날이면 형제는 근처 중국집에서 그것을 먹었다. 기하는 재하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재하는 기하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기억하는 그것은 영영 오해를 남긴 채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지속하게 한다. 그들이 헤어진 지 오래된 어느 날 기하는 구글 어스를 통해 재하 모자가 어느 동네에서 중국집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고, 우연을 가장해 찾아간 그곳에서 재하가 기하에게 만들어 내놓은 음식도 중국 냉면이다.
- 3) 임형모, 「내적 형식으로서의 ‘편지’와 한국 근·현대문학의 소설사 기술의 가능성」, 우리문학연구 제67집, 2020 참고.
- 4) “근대의 핵가족은 낭만적 사랑, 부부끼리의 유대, 모성적 사랑, 가정성 등을 중시하면서 생계 유지자로서의 아버지, 가사 담당자로서의 어머니, 유년자로서의 어린이와 십대 청소년으로 구성되는 parenting, 반면, 포스트모던한 유연 가족은 합의적 사랑, 양육의 분담, 도시성을 중심으로 맞벌이 부부 가족, 편모나 편부 가족, 재혼 가족, 다세대 가족, 동성 가족, 결혼하지 않는 가족, 대리 가족 등의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핵가족은 일체감을 중심으로 개인보다는 가족에 대한 현실을 우선시하는 가치를 낳은 반면, 유연 가족은 개별성을 중심으로 개개인의 자아 성취와 자아 완성을 중시한다. 이 두 가지 가족 형태의 장점만을 취한 미래의 가족 형태로서 바이털 가족은 책임 있는 사랑, 진지한 양육, 지역 공동체, 상호 의존성 등을 강조한다”(데이비드 엘킨드, 『변화하는 가족』, 이동원 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9, pp. 54~81, 256~79 참조).
- 5) “백세를 경하하고 더 오래 살길 기원하는 잔치”(p. 175)를 상수연이라고 부른다. 상용어라고 하기 어려운 한자어는 성해나의 소설에서, 특히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를 호명하는 명칭이나 특별한 가족의 역사와 문화를 내세우기 위해서 쓰인다. 이러한 언어 자체가 한 가족과 그 밖의 인물을 구분 짓는 도구가 되는데, 성해나 소설에서의 이 경계의 언어에 대해서는 차후의 지면에서 다시 분석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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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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