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들 2024년 봄호(제75호)
얼굴 없는 목소리 ―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 쓰기
1. 나와 마주하는 시간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Personal branding writing). 이것이 2020년대 한국에서 첨예한 글쓰기의 목표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기업의 이윤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브랜딩처럼 개인의 수익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나’, 자신의 직업과 경력, 특별한 기술과 경험, 차별화된 정체성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나’만의 상품 가치 창출을 목표로 삼는다. 특정 분야에서 ‘나’ 스스로를 고유 상품 브랜드로 만들어서 소비자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표상’ 작업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나’의 경험 속에서 축적한 직업 기술과 능력, 성공 사례와 세계관, 실패담의 서사를 친근하게 정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폭 넓은 선호도와 높은 인지도 확보를 목표로 삼는 글쓰기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을 구축한다. 무엇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미디어의 발달, 그 중에서도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등의 손쉬운 SNS 채널 개설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수행할 수 있는 인터넷 온라인을 바탕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평생직장과 정년제의 소멸, 노동 수입만으로 영위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연봉 향상을 위한 이직에서 ‘나’의 정체성과 장점을 강조할 수 있는 ‘나’의 브랜드 필요성 등의 노동 환경 변화에서 요청된 것이다. TV와 SNS에서 쌓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온라인 클래스를 개설해서 고수익을 얻고 있는 어느 소설가의 경우처럼 개인의 글쓰기가 미디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개인의 브랜드 구축과 경제적 수입을 마련해주는 유용한 기술이 된 것이다. 미디어의 독점 체제에서 미디어 민주주의로 이행되면서 글쓰기의 민주주의와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미디어 사회가 전개한 개인의 글쓰기와 미디어 민주주의의 효능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나’의 상품 가치와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많은 개인들과 자본 사이에서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 ‘나’의 노출 빈도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 시각 이미지와 음악, 전문성과 분위기 연출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것은 익명의 대중들 속에서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품 브랜드로서 ‘나’의 ‘드러냄’을 만들어내는 소외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있음 자체, 실재의 ‘나’는 사라지고 브랜드가 된 ‘나’의 이미지, 상품의 물신성이 만들어낸 환상의 ‘나’가 나타난다. 소비자와 구독자가 매혹되는 것은, 상품 물신성의 신비에 휩싸인 ‘나’이다. 상품 물신성의 신비와 환상 속에서 실재의 ‘나’는 부재하다. 지속적인 유용성과 상품 가치를 창출하려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속에서 실재의 ‘나’와 상품가치의 ‘나’ 사이의 간극은 심화된다. 그 간극의 심화를 불러일으키는 무한 경쟁에서 퍼스널 브랜딩에 성공하는 ‘나’의 유용한 글쓰기는 당연하게도 소수이다. “부자나 유명인사와 같이 ‘이미지가 있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소유하고, 상징 시장과 명성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게 이미지를 관리”1)하는 소수이다. 소수의 성공담은 화려하게 드러나고 다수의 실패담은 조용히 사라진다. 화려한 성공담의 ‘나’는, 상품 물신성의 환상 연출 노동으로 더욱 치닫는다. 실패담의 ‘나’는, 성공한 소수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면서 우울과 자괴감에 빠진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문화 산업 구조 속에서 수많은 나‘들’의 드러남과 사라짐은 무한 반복된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 ‘나’의 표상들은 저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생산 구조와 일정한 상동성을 지닌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나’처럼 1인칭의 ‘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일상의 삶에서 길어 올린 소소한 경험과 상처의 풍경을 나열하고 재현한다. 1인칭의 시적 주체, ‘나’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동영상에 노출된 일상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일상적인 나의 경험과 기술적 능력은 화려한 이미지와 감성적인 음악으로 편집된 글과 영상으로 편집되어 소비자와 구독자가 즉각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매혹과 난이도의 글쓰기로 노출되듯이 1인칭의 시적 주체인 ‘나’가 진술하는 시적 정서와 시적 언어의 양상도 유사하게 노출된다. 그것은 유용한 재현의 시쓰기이다. 그러나 백은선의 시는 일관되게 ‘나’의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재현’의 시쓰기를 넘어서서 ‘암시’의 시쓰기를 실천한다. 백은선의 암시의 시쓰기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시대에 유용성의 글쓰기와 거리를 두면서 어떻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2)을 발명하는지를 제시한다.
2. 이피게네이아의 얼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은 근친 살해와 복수의 폭력으로 치닫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3)의 첫 작품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일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로 떠날 때 출전을 방해하는 폭풍과 직면한다. 그는 폭풍을 달래기 위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살해하고 희생 제물로 바친다. 마침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귀향하고 욕실로 향한다. 지난 10년 동안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복수의 칼날을 품고 있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남편 아가멤논을 욕조에서 무참히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첩으로 삼고 데려온 전쟁 포로 캇산드라도 함께 살해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아가멤논」 비극적 서사의 기원에는 무엇보다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있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수반이자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체현자이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신의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아 살해한다. 그는 전쟁의 승리자로서의 명예를 향유하면서 적군의 딸 캇산드라를 첩으로 삼고 귀환한다. 동시에 그는 귀환한 국가의 권력자이자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향유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두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폭력적이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일 만큼 국가주의자이다. 그는 전승자의 지위를 통해 적국의 딸을 첩으로 삼고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성폭력 가해자이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여성을 첩으로 삼는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자이다. 이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쓴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지배적 이념이다.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 정의의 여신 아테나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181)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아버지 아가멤논을 위해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고 복수한 아들 오레스테스를 처벌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 점에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을 정의로 판결하고 폭력의 성(gender)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선언한 작품이다. 그 판결에 이르기까지 「아가멤논」의 여성들은 희생 제물(이피게네이아), 부정(不貞)을 저지른 암살자(클뤼타이메스트라), 성적 노예(캇산드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 비극의 기원, 이피게네이아는 비극의 무대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국가주의와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진술에 의해서만 기억된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희생된 그녀의 얼굴은 무대 위에 없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이 자행되는 세계의 무대 위에 이피게네이아의 얼굴은 없다.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억울한 희생을 진술하는 동안만큼만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죽음과 아테나의 판결 이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망각된다.
지금 한국 현실에서도 매일 희생되고 망각되는 여성들, 이피게네이아들은 많다.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는 여전히 한국에서 지배적이며 그 폭력은 지속적이다. 다름 아닌 백은선의 시적 주체는 그 폭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피게네이아의 부서진 얼굴로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을 암시한다.
3. 얼굴의 파토스
백은선의 시집4)에서 시적 주체의 실존과 가족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적 주체 ‘나’의 아버지는 폭력적이다. “입을 틀어막는 아버지 허리띠를 풀어 쥐는 아버지 벽에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는 아버지 포르노를 보는 아버지”(1:141)이다. 아버지에게는 새엄마가 있다. 나는 “새엄마가 즐겨 입던 어두운 초록 재킷을 훔”(1:63)친 적 있다. 나에게는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죽었다. 나는 “죽은 언니를 생각할 때의 죄책감과 은밀한 기쁨”(3:50)을 동시에 느낀다. “왜 내가 아니었을까,”(3:50)라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감과 안도감이다. 쉬운 영어만 할 줄 아는 엄마는,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1:180)에서 “검은 남자가 오면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나의 등을 슬며시 떠밀”(1:180)었다. “여고생 때 일기장을 펼치면, 선생님 널 죽여버릴 거야, 라고”(1:176) 쓸 만큼 나는, 선생님에게 살의를 느낀 적 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던 나는, “매일 혼자 벤치에 앉아”(3:30) 있었다. 나는 동급생들에게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리고” “#죽어. 죽어. 죽어.#” “발신자 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3:30)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 임신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것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1:100)었다. “아이가 닫힌 문을 두들고 있었”기에 “세 번 목을 매고 세 번 실패”(3:167)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의 엄마, 너는 아이의 아빠”(2:80)가 되었는데, 남편이 된 남자, “네가 뺨을 때리던 날”, 나는 “그것을 지옥이라고 생각”(4:36)하였다. 끝내 나는 “협의이혼”(3:154)한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엄마. “아이가 새근거리며 몰아쉬는 숨소리만”(3:54) 가득한 방 안에 있다. 나는 “모로 누워 핸드폰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고 “팔 년을 돌아보며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이토록 많은 시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해서 눈물이 날 거”(4:52) 같다. “맨발로 찾아간 날에는 꼭/양말을 신겨주던”(4:128) 할머니의 기일에 “누구나 태어날 때 한 권의 책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 “넌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4:128) 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이것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적 주체,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한 여성의 실존적 초상이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내 기억의 상상 속에서만 있다.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은 아버지의 폭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첫 시집 『가능세계』(2016)에서 네 번째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2023)까지 8년 동안 집중 출간된 4권의 백은선 시집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한 권의 책, 하나의 얼굴로 읽힌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5)이 깊이 새겨진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갈가리 찢겨 있어”(1:195) “구겨진 얼굴”(2:94), “비틀린 얼굴”(4:41), “허물어진 얼굴”(2:134), “물 위를 떠가는 뒤집힌 얼굴”(1:23)이다. “낯설고 차가운 얼굴”(1:189), “민둥 얼굴을 하고 표정 없이 말없이”(1:201) “텅 빈 얼굴”(3:167)이다. “미친 것 같은/얼굴”(3:16)이고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2:144)이어서 “문득 얼굴/나는 지워지고”(2:167) 싶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에 의해 부서지고 깨어지고 파괴되어 구겨지고 허물어져 비틀린 한 사람의 얼굴이다. 남성의 폭력은 나의 얼굴에 기록되어 지속된다. 현재 나의 얼굴은 폭력이 자행된 과거의 현존이며 지울 수 없는 미래의 현전이다. 얼굴에 새겨진 흔적은 잔존하는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나쁜 기억력을 소망”(1:17)하면서 내가 나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 폭력이 잔존하는 얼굴의 파토스(pathos)6)는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나는 나의 얼굴과 전면적으로 마주설 수 없다. 나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폭력으로 일그러져 부서진 얼굴의 파토스를, 고통의 총체적 기억과 파괴된 실존의 성채를 한꺼번에 출현시키고 ‘나’를 고통의 심연으로 침몰시키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얼굴을 텅 비우고 거의 죽은 사람의 얼굴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서지고 구겨지고 비워지는 얼굴의 조각들을 바라본다. 살아남으려는 힘과 죽어버리려는 힘이 단속적으로 교차하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순간 솟아오른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얼굴의 조각들 배후에서 얼굴 없이 죽은 여성들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백은선의 시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섬광처럼 솟아오르는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를 붙잡는다. 얼굴의 조각들이 불러일으킨 얼굴의 파토스를 통해 ‘폭력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증언 욕구와 ‘나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모두 말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표출한다. 얼굴의 파토스에서 솟아오르는 폭력의 기억과 부서진 얼굴 조각들의 시. 완전한 사라짐을 거부하는 얼굴 조각들의 시. 가려지고 흐릿해진 얼굴들을 기억하고 파편적으로 재현한 조각 형상들의 시. 그녀의 시쓰기는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얼굴 조각들의 잔존 기억을 지닌 한 사람의 살아있음, 살아있음이 저항이며 삶의 지속이며 지속된 폭력을 증언하는 몸의 발언임을 환기한다. 그녀의 시에서 얼굴 조각들은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노출하고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얼굴 이미지가 ‘지금-여기’의 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현시하는 심미적 정치성을 발현한다.
4.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 언어의 몽타주
첫 시집 『가능세계』는 백은선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적 입장과 언어 방법을 응축하고 있다. 얼굴은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마음의 근육이 새겨져서 나타나는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다. 얼굴은 시간의 흐름과 피부의 변화가 새겨진 주름과 피부 빛깔의 형상으로서 한 사람의 인상을 드러낸다. 현재의 얼굴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도착한 형상의 인상(人相)이며 미래의 시간에 흔적으로 남는 형상의 인상(印象)이다. 그 얼굴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으로 무참히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비틀린 형상의 인상으로 지속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은 파괴되고 부정당한다. 파편적인 얼굴의 조각들에는 폭력의 흔적과 고통의 기억이 잔존한다. 폭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얼굴에 깊은 상흔을 남길 만큼 강력한 것인데, 폭력에 대한 그녀의 시적 입장은 아이러니하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알지 못합니다”로 시작해서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다고 끝맺는 원환(圓環) 구조의 변론7)을 통해 인간의 무지(無知)를 아이러니로 드러낸다면 백은선은 “나는 모른다네”(「어려운 일들」)로 시작해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도움의 돌」)고 끝맺는 나선형적 원환 구조의 진술을 통해 남성의 폭력을 아이러니로 드러낸다. 그녀는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낱낱이 기억하고 폭력의 상흔을 체현하고 있는 얼굴의 담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폭력을 기억해내는 고통의 강도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정하는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한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더한 폭력을 감내한 엄마와 언니의 고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증언의 불가능을 인식하고 ‘나는 모른다’, 선언한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생존자의 안도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폭력의 모든 진실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의 윤리 속에서 폭력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집요한 욕구에 휩싸인다. 그녀는 끝까지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백은선의 시쓰기는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과 ‘우리는 그것을 안다’는 인식 긍정 사이의 무한 왕복과 충돌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의 섬광,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을 포착한다.
시적 입장의 아이러니는 시의 언어에 대한 성찰을 수행한다.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은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재현할 수 없고 자신의 발언이 모두 진실한 증언이 될 수 없다는 시적 인식을 표출한다. 그것은 폭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고통의 기억 속에서 재현 가능한 것과 재현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구획 짓는다. 그녀의 시쓰기는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에 한정된다. 폭력을 기억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파편적으로 재현하고 조각의 진실을 지닌 언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뜨겁지 않은 불 속에 있는 것”이라는 페트라르카의 시처럼 온전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과 고통의 상흔은 시인이 비워둔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폭력의 사태, 그 현장으로’ 진입하여 조각들의 진실을 유추하고 언어의 공백을 채워가는 시쓰기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인식의 긍정, 목격자의 장소에 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백은선의 시적 언어는 폭력에 대한 전면적인 폭로와 고통의 사실적 증언을 목표로 삼는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언어의 장소에서 발원한다. 그 언어는 폭력의 실재를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암시하는 언어이다. 재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행간의 침묵과 언어의 공백으로 암시하는 언어이다. 암시 언어는 피학적 타자가 된 여성들의 몸을 폭력의 포르노그래피로 전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몸을 사물처럼 전시하거나 끔찍함의 충격을 전파하려는 재현 언어의 유용성을 폐기한다. 재현 언어가 폭력의 진실을 파편적으로 품은 조각 형상들의 ‘가능 세계’를 전시한다면 암시 언어는 ‘가능 세계’의 공백과 배면에서 잔존하고 있는 총체적 폭력의 재현 ‘불가능 세계’를 상상력으로 현시한다.
백은선의 시에서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임계점을 넘어선 빛들이 차례로 얼굴을 부”(1:67)수고 “등 뒤에서 칼날처럼 꽂히는 빛들”(3:100), “빛들은 찢어발긴 얼굴”(1:200) 같다.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4:47)한다. “빛 속에서/관절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1:18)이다. “유리를 관통해 들어오는 빛이/심장을 찌”(4:150)르고 “빛의 칼로 귀를 자”(4:145)른다. “가장 아픈 건 빛”(2:31)이다. 네 권의 시집에서 시적 주체가 ‘비혼 여성―아들의 엄마―이혼 여성―육아 여성’으로 변모하는 동안 지속되는 폭력의 상흔은 일관된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되기에 폭력의 총체적 진실은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면서 유예되며 유예되는 만큼 그 폭력의 강도는 강력한 것으로서 시적 주체의 외상과 증상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
빛과 함께 시적 주체에게 폭력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촉발하는 것은 ‘소리’이다. “만 명의 울음소리를 겹치고 웃음소리를 겹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짖음을 얻게”(1:150)되는데, 그것은 울부짖음8), “의도하지 않은 언어와 같은 형태”(1:150)이다. 신체 폭력이 유발하는 타격 소리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언어폭력, 그것을 체험하거나 목도한 자의 울부짖음, 그 “모든 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 가장 아픈 형식으로 소리는 있”(2:100)다. 소리는 “귀가 쫑긋한 나를 키워준 공포”(1:148)이기에 “나의 청각에 대해,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만 생각”(1:138)해야 할 만큼 폭력적이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청각에 잔존하면서 보이지 않는 폭력의 순간을 연상시키고 재생하며 현재로 현전한다. 소리가 재생하는 폭력의 기억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울부짖음, 언어 이전의 폭력 사태 자체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체험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과 소리 이미지로 구축한 백은선의 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산문 언어 안에서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단어의 재배치와 언어의 몽타주를 적극 실천한다. “디귿의 마음”(1:10)처럼 ‘ㄷ’의 문자(文字) 형상을 통해 시적 주체의 어떤 재귀적 마음을 암시하거나 “짖는다. 쏟아지는 비, 구겨진 얼굴, 입속의 말”(2:94)처럼 서로 다른 문맥의 언어들을 재배치하고 몽타주함으로써 맥락 없는 조각 언어들 사이에 시적 긴장의 섬광과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이중나선//파란 깃털//모자를 쓴 구름//불면의 밤//쓸수록 멀어지는 것”(3:129) 역시 연관 없이 멀리 있는 언어들의 병치와 몽타주를 통해 백은선의 고유한 언어 방법을 창안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초록은 누가 잊은 기억”(4:79)처럼 ‘초록’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색채 상징을 부여한다. 언어의 몽타주는 백은선의 시를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시의 행위와 장소에 정초한다.
시적 인식의 아이러니,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의 암시, 언어의 몽타주.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1:85),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폭력을 산문의 재현 언어가 아니라 시의 암시9) 언어로 저항한 백은선 시의 언어 방법으로서 시의 심미적 정치성을 고도의 언어로 실천한 것이다.
5. 조각 형상들의 섬광: 상자의 어둠과 나무의 뿌리, 성냥의 불꽃
백은선의 시적 주체에게 빛의 세계는 세계의 어둠이다. 세계는 폭력의 빛이 점령한 어둠의 삶을 강제한다. 폭력의 빛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어둠 속에 ‘나’를 존재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이 중단되지 않는 한 살아있는 그녀의 거처는 어디서든 세계의 어둠 속이다. “이 밤은 너무 길다 아니 너무 멀”(1:171)다. 폭력의 빛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숨어든 ‘상자들’ 내부 또한 어둡다. 그 상자들은 작은 방과 여성의 몸, 관(棺)을 암시한다.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심해처럼 어두운 파란 빛이 사방을 흐”(1:180)르는 작은 방은, 열쇠 구멍이 있는 상자로 비유되는데, 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밀고 들어온 열쇠에 의해 상자는 강제로 열린다. 그것은 동의 없이 여성의 몸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남성의 폭력을 암시한다. “눈물에 눈물을 더하고/절벽에 절벽을 더해/상자는 가득 차”(2:15)오른다. 빛의 폭력을 피해 숨어든 상자 속조차 눈물과 상처로 인해 어둡다. 폭력의 흔적과 눈물의 기억은 작은 방, 강제로 열린 상자의 어둠처럼 여성의 몸, 어둠 속에 남아있다.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4:70)한 존재로서 “나는 단지 상자들로 이루어진 부패 덩어리”(3:31)이다. “누군가는 결코 끝까지 상자를 열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게 나”(4:53)다. 몸의 상흔, 상자의 어둠과 마주서는 것은 폭력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폭력의 순간은 ‘나’에게 영원한 것으로 기억되고 몸속에서 지속된다. 여성의 몸, 상자의 어둠은 남성의 폭력적인 “열쇠들 혹은 너무 많은 열쇠들”(1:181)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상자의 어둠은, “이 도시는 너무 어두워서 너무 밝”(4:26)은 ‘지옥’이다. “존재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지옥이 필요한가요”(4:65)라고 되물어야 하는 도시. 상자의 어둠 속에서도 죽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 있어/지옥의 뜻”(4:138)을 지닌 도시. “지옥에는 돈이 있다//지옥의 집값은 비싸”(4:139)다. “모든 일이 상자로부터 시작”(1:186)된 것이다. 폭력의 “빛들이 관여할 수 없는 지하 세계는 얽힌 관들, 한없이 길어지는 관들, 텅텅 울려 퍼지는 거기가 내 몸속”(1:177)이라는 현실 인식에 다다른다. 작은 방과 상자의 어둠, 여성의 몸속은, 살아있는 한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를 암시한다. 세계에서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는 지하 세계의 관(棺)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다르지 않다.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나’는 어떤 안식도 취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 살아있다. 지하 세계의 관 속에서 나는, 죽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호흡하고 있다. 두려워서 “뜯지 않은 선물 상자 속에는/호흡이 있”(1:191)다.
관 속에서의 호흡. 그것이 백은선 시의 존재론이다. 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존재. ‘죽음’, ‘없음’이 아니라 ‘죽어감’,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존재하는 영(零). “나는 0, 0과 0 사이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0”(3:194)이다. “나는 0입니다 나는 이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나는 존재합니다 다만 무대 안에서 있을 수 없”(3:196)는 존재. 오직 세계의 무대 바깥, 지하 세계의 ‘목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나, 0이다. 거기에서 나는, 세계의 빛이 아니라 지하의 어둠 속으로 뻗어있는 나무의 뿌리를 발견한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대지의 숨결을 호흡하면서 뻗어가고 이어져 있다.
광장에 있는 나무는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우기 때 죽은 사람들은 거기에 묻혔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 나무를 불렀어. 이름이 점점 길어졌어. 이제 정확한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
물속에 잠긴 커다란 나무.
거짓과 거짓, 진실과 진실을 이어 붙인 커다란 목관.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
―「여름시」(1:127) 부분
나무의 뿌리는, ‘나’부터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이어져 있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속 목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붙인 나무들의 뿌리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긴 이름, 얼굴 없는 목소리의 숨결이 나의 호흡까지 이어져 있다. “여자아이는 모두의 어머니”(1:132)라는 시적 인식의 발견. 그것은 여자아이,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앞서 죽은 모든 어머니들 몸속, 고통의 뿌리까지 이어져 있다는 시적 인식으로의 전회이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어머니들의 목관을 움켜쥐고 있다. 뿌리가 움켜쥔 목관에서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호흡하고 있다. 뿌리의 호흡에서 기원한 나무들은 세계의 숲, 광장의 숲을 이루지만 숲은 폭력의 빛 속에서 잘 자라나지 못한다. 굴광성을 지닌 나무들의 숲조차 폭력의 빛 속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숲은 찬란한 생명의 초록빛이 아니라 지하 세계 목관의 검은빛이다. “이 숲은 휘청이고 자꾸만 실족”(2:10)한다. “이 숲은 끝났어 나무들을 봐 저 흩어진 각도와 호흡에 대해 생각”(1:136)한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잊”(3:80)는다. 나는 뿌리의 목관 속에 갇혀 호흡한다.
우리가 목도한 것은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
숲
그리고 영원이지
―「1g의 영혼」(3:88) 부분
뿌리의 목관에서 호흡으로 존재하는 나. ‘1g의 영혼’, 나와 우리 엄마, 엄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지하의 목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뿌리에서 지상의 나무로 자라나지만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없다. 지하의 뿌리에서 벗어난 지상의 나무가 직면하는 것은 폭력의 빛으로 휩싸인 숲이다. 지하의 목관을 움켜쥔 뿌리에게 지상의 초록빛 숲, 다른 세계는 절대적으로 부재하다. 그것은 다다를 수 없는 ‘영원(永遠)’이다.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숲”이다.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나는 ‘1g의 영혼’으로, 뿌리의 목관에서 숲으로, 숲에서 뿌리의 목관으로 이동할 뿐이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의 가능성과 다른 삶의 장소는 있지 않다. “길 끝을 돌면 다른 세계가 시작될 거라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걸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1:199)다는 「비신비」 연작처럼 폭력의 빛이 세계의 숲에 내리꽂히고 있는 한, “나의 노래는 0과 숲으로 가득해서/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4:111)된다.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4:167)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1g의 영혼은 상자의 어둠, 뿌리와 숲, 폐쇄된 세계에서 ‘침묵’으로 살아있다.
침묵은 남성 폭력의 빛이 강제한 것이다. 폭력의 빛은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금지하고 나는 폭력의 총체적 진실에 대하여 적확하게 말할 수 없어서 침묵에 잠긴다. 폭력의 빛이 쏟아지는 “침묵의 밖에서는 침묵을 읽을 수 없고/침묵의 안에서는 눈이 먼”(3:171)다. 침묵은 “검은 것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허방뿐인 영원을”(3:202)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폭력으로 죽은 어머니들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죽은 어머니들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이어붙인 목관에서 호흡하는 침묵의 영원을 깨뜨려야 한다. 나는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들의 죽음에 대하여, 얼굴 없는 목소리에 대하여,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할 수 없지만, 그 울부짖음을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것을 무릅쓰고 어떤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침묵과 싸우면서 언어의 한계 속에서 거듭 말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남아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3:112)10)이 된다. “나한테 시를 쓰라고”(3:42) 한 언니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3:32) 시를 쓴다. 나는 언니의 죽음과 어머니들의 목관에 대하여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1:117)이지만 “나는 최소한의 언어로 모든 것을 누설하고 최대한의 언어로 무의미에 도달”(3:54)하고자 한다. 거짓에 대한 두려움과 “가장 큰 중력이 만드는 침묵”(4:61) 앞에서 “그런데도 할 말이 있”(4:156)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거짓 속에 진실을 담은 “소설을 마저 쓰”(4:147)고자 한다. “세계가 하나의 작은 성냥갑이라는 걸 긋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딱딱한 어둠에 불과하다는 걸”(3:124) 인식하고 성냥 긋기를 멈추지 않는 것. 곧 꺼지고 말 불꽃의 섬광이라 하더라도 상자의 어둠을 사르고 목관의 뿌리에 불 밝히는 일. 호흡이 살아있음을 말하는 일. 살아있음을 저항이라 말하고 얼굴 없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 아가멤논, 남성 폭력의 지속을 암시하는 백은선의 시쓰기이다.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 「도움의 돌」 부분(1:209)
0. 사라진 마을의 나무 아래 돌이 있다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이나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p.26.
- 2) 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 전영애․박세인 옮김, 봄날의책, 2019, p.55.
- 3)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Oresteia)의 이야기를 뜻하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아가멤논Agamemnon』,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Choephoroi』,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이다. 아버지의 딸 살해, 딸을 위한 복수로서 아내의 남편 살해, 아버지를 위한 복수로서 아들의 어머니 살해 서사로 이어지는 비극이다. 이하 서사 요약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2008) 참고. 인용은 면수만 표기한다.
- 4) 1987년생 백은선은 4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2.『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현대문학, 2019), 3.『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4.『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 이하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의 141면은 (1:141)로 인용 표기하기로 한다.
- 5) 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았던 장 아메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고문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의 공포에 내맡겨진다.” 장 아메리, 「고문」, 『죄와 속죄의 저편: 정복당한 사람의 속죄를 위한 시도』(1966), 안미현 옮김, 길, 2012, p.91.
- 6) 노인 요양병원 의사이자 사진가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 1954- )은 “가로세로 27cm의 정사각형 표면 위에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죽음의 문턱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우리 앞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순간들을 작업한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어떤 예술적 의도도 없이 작업한 40여명의 노인들의 얼굴들은 곧 사라지고 말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피부와 주름살이 새겨진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 붕괴되어가는 현재의 시간이며 장차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의 얼굴들이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바쟁의 몽타주 사진들에 의해 기억되며 그 얼굴들의 파토스가 발생시키는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기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앞의 책, pp.48-60 참고.
- 7)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참고.
- 8) 이집트에서 추방된 유대계 시인 에드몽 자베스는 『질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음’을 진술한다. “울부짖음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희생된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다./울부짖음의 인내에는 공(功)이 없다./어떠한 기관도, 어떠한 정부도 울부짖음을 독점할 수는 없다.” 에드몽 자베스, 『질문의 책』, 이주환 옮김, 한길사, 2022, p.109. 『질문의 책』,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사라(Sarah)는 울부짖고 유켈(Yukel)은 침묵한다.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죽었고 생존자는 기억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사라는 울부짖다가 미친다. 유켈은 고통 속에서 침묵한다.” 송승환, 「그 이름에 대하여」, 『포지션』, 포지션, 2023.6., p.244 참고.
- 9) 백은선의 시가 ‘암시’를 적극적으로 시의 행위와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테판 말라르메의 암시에 관한 시적 사유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나의 대상을 명명하는 것, 그것은 시를 즐기는 기쁨의 사분의 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시를 즐기는 기쁨은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추측하는 행복에 있습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암시는 상징을 구성하는 그 신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입니다.” Stéphane Mallarmé, l'enquête Sur L'évolution littéraire 1891, Igitur, Divagations, Un coup de dés(préface de Bertrand Marchal), Gallimard, Poésie, 2003, p.405. 번역은 필자.
- 10) 에드몽 자베스는 작가를 거짓말쟁이로 규정한다. 작가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한 사람이지만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쓸 때마다 작가는 사태의 진리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고 사태의 원천을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의 한계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언어를 통해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매번 다시 쓰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진리에의 접근을 희망하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글쓰기의 진실은 진리를 향한 거짓말 속에 스며 있다. “내가 나의 글에 애착을 가질수록, 나는 내 글의 원천과 단절된다. 내가 진심이고자 할수록, 더 빠르게 나는 말의 주도권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말들이 나 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기에.” 에드몽 자베스, 앞의 책, pp.342-34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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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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