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제146호)
읽는 노동 : 구병모, 『단지 소설일 뿐이네』(문학실험실, 2024) _명학수,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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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문학과사회 하이픈』에 실린 「문학의 경제학」에서 강동호는 “작품을 읽는 행위도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1)라는 질문을 던진다. 구병모의 중편소설 『단지 소설일 뿐이네』(이하 『소설일 뿐』)와 명학수의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이하 『말의 속도』)을 나란히 읽으며 지금–이곳에서 소설을 읽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내내 떠올렸던 단어가 ‘읽는 노동’이었던 터라 그의 문장을 (뒤늦게) 읽은 후 내가 느낀 첫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이미 이와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책을 구입하고 작품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들인 후였기에 희소성이 사라진 나의 생각은 가치가 떨어진 것처럼 여겨졌고 또 다른 시간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감정적 어려움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같은 글에서 ‘문학적 배움’이라는 말을 통해 강동호가 설명한 대로 나는 이를 “새로운 주체화의 기제”(p. 166)로 삼아 그의 글과 갈라지는 지점을 보다 강조하는 방식으로 두 소설을 해석하는 새로운 경로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와 내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조합을 떠올렸음을 짐작하게 하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발견에서부터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읽는 행위와 노동을 엮은 후 그는 이것이 “이상한 비유처럼 들린다”(p. 153)라고 적는데, 이에 반해 나는 두 단어를 처음 연결하던 시점에서도 어떤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 차이는 단편적으로 말해서 ‘노동’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문학의 자체적 역량”이 “활성화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관측하”기 위해 “경제라는 비유적 모델을 채택”(p. 134)한 그는,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라는 개념적 용어로서 이를 사용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문학을 읽는 행위가 “임금이 제공되”거나 “작품의 물리적 생산에 기여”(p. 153)하는 것은 아니므로 저 조합은 당장은 어색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문학의 사용가치가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 증명되고 활성화되는 문학의 특유한 경제에서는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임을 그는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반면, 나는 ‘노동’이 최근 하나의 레토릭으로서 자주 사용되고 있음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다. 예컨대, 힘든 일을 하기 위해 들이는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로서, 읽기를 고역으로 여긴다는 의미로서의 ‘읽는 노동’을. 구병모가 “호모 스키펜스Homo Skipens”(p. 7)라는 말로 가리키듯 무엇이든 스킵하는 신인류가 등장한 지금, 이와 거의 반대되는 행동을 요구하는 소설 읽는 일에 대한 『소설일 뿐』의 묵직한 고민에 대해서, “소설의 시대는 끝났다”며 “현실이 온통 흥미진진한 스펙터클 어드벤처로 넘쳐나는데 누가 그런 따분한 거짓말에 시간을 낭비하겠느냐”(「은하」, p. 98)고 말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명학수의 『말의 속도』를 같이 읽으며, 오랫동안 유희의 대상이었던 소설이 지금은 왜 유희하기 어렵고 읽는 일이 수고처럼 여겨지는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물론 그들의 소설에서도 다뤄지는 것처럼 이러한 현상은 지금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긴밀히 관련된다. 그러므로 ‘읽는 노동’을 단순한 레토릭에서 시작하여 누군가에게는 가치 없고 불필요한 행위로 간주되는 현상이 심화되는 양상을 이 말을 통해 짚어보려는 애초 이 글의 계획은 결국 강동호가 경제학을 경유하여 사용하는 노동의 개념과 겹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겹침 가운데 끝내 포개지지 않는 지점은 문학 내부의 작동 원리에 집중된 그의 서술과 달리 내가 되도록 그 밖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읽는 일을 노역으로 느끼는 이들, 그리하여 끝끝내 문학의 경제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문학 밖의 이들에 대해. 그런데 이렇게 쓰자 다음과 같은 물음이 떠오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이 글을 읽으며 문학의 경제에 참여하고 있는 당신은 세계의 안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밖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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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소설일 뿐』에서 S 선생의 위치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 것이다. 소설은 중견 소설가 S 선생이 북 콘서트를 앞두고 여행을 떠났다 ‘이터널 브리지’라는 이름의 다리 위에서 사라진 사건을 다룬다. 화자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 『소설일 뿐』에서 자신의 실종 경위를 직접 이야기하는 S 선생의 목소리는 소설의 앞뒤에 배치되고, 오랫동안 그의 원고를 담당해왔으며 이번 콘서트 업무를 맡아 그의 실종을 최초로 발견한 편집자가 수사관에게 S 선생의 직전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목소리는 그 사이에 담긴다. 물론 작품의 “시놉시스”와 “로그 라인”(p. 132) 중간 정도의 이러한 요약만으로는 『소설일 뿐』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이 추리소설과 달리 실종자를 찾아내는 데 목적이 있지 않으며 S 선생의 “끝없는 더듬거림”과 “중얼거림”(p. 36)으로 전개되는 작품의 특성상 그것을 함께 더듬어가는 방식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설일 뿐』은 읽는 행위를 어려워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노동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가령 첫 문단부터가 그렇다.
소설은 자신이 쓴 문장(“강풍이 다리를 어루만진다”)에 대해 따져보는 S 선생의 말로부터 시작하여 그에 대한 길고 긴 설명, 그 과정에서 사용한 또 다른 말에 대한 부연 설명들의 연쇄로 6쪽가량 이어진다. “서어함”(p. 9), “글겅”(p. 11), “눌언”(p. 13) 등과 같은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단어들이 포함된 그의 독백은 지루하고 현학적이다. 물론 우리는 그가 말을 건네는 대상이 편집자라는 사실과 소설 장르에 대한 S 선생의 엄정한 태도를 뒤늦게 알게 되면서 그 개연성과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러한 발견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을 읽기 시작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라는 점에서 작품에의 진입이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일 뿐』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이 읽지 않는 시대로서의 현재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전략이다. 소설의 읽히지 않는 첫머리는 우리가 지금의 시대를 역으로 체감하게 하는 데 절묘하게 성공함으로써 그 전략성을 증명한다. 굳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반문자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은 보편적인 이해가 되었고 유희의 대상은 도처에 있다. 쇼츠나 릴스와 같은 숏폼 콘텐츠는 우리를 권태롭게 할 틈을 주지 않으며, 광고를 스킵하는 시간과 노력마저 들이지 않기 위해 유튜브 프리미엄을 결제할 만큼 속도는 가치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책장을 빠르게 넘기거나 성큼 건너뛰기가 불가능한”(p. 27) 소설을 읽는 일만큼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은 없다. 이러한 내용이 중견 소설가인 S 선생의 목소리로 직접 서술된다. 그러므로 처음의 진입 장벽만 넘는다면 『소설일 뿐』은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대한 씁쓸함을 다루는 작품이란 말로 매끄럽게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 도처에 있는 S 선생의 말들은 “어떤 결말도 눈앞의 문장 한 줄보다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p. 49)지게 할 만큼 사태를 꿰뚫어 보는 적실한 것이기에 소설은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호모 스키펜스’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그러한 문장의 가운데에 서 있다 보면 S 선생이 머물렀던 ‘이터널 브리지’라는 상징적 공간에 대해, S 선생의 사라짐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된다. 특히 S 선생의 실종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던가를 물으며.
실종 직전 그가 발송한 마지막 이메일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단서다. “영화를 목적으로 하는”(p. 125) 소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며 쓴 그의 답장에는 “영화가 문학의 종착지”(p. 94)인 것을 넘어 “콘텐츠의 원천 소스”(p. 96)가 된 세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하는 S 선생의 심리가 여실히 드러난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가리켰듯2) 자본주의의 바깥이 없다는 감각이 팽배한 이곳에서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다른 차원의 세계밖에 없어 보인다. “기하학과 천문학의 현실로 규명되지 않는 공간”(p. 120)인 다리 위는 소설 장르에 대해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가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이는 그의 실종을 한편으로는 타의적인 밀려남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리 위를 걷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긴 했으나 그는 “한 줄의 다리에 불과했던 공간이 어느새 수많은 굴곡과 회로의 겹을 지닌 미궁이 되어” 자신을 “가두었”(p. 53)음을 절감하며 난감함을 감추지 않는다. 자신이 기꺼이 기거했던 문학이란 세계를 이 세계가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현실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S 선생의 사라짐은 단지 개인의 실종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내 소설가와 소설 자체의 실종으로 읽히며 구병모의 소설은 그러한 소설의 자리에 대한 깊은 응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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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작품이 세계를 잠식한 자본주의와 그로 인해 변화된 소설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말의 속도』에서 명학수는 현실과 허구를 반복적으로 섞는 방식으로 그러한 세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화하려는 시도는 「은하」에 인용된 보르헤스의 『허구들』에서도 나타날 만큼 소설의 오랜 장치이지만 그것이 매번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예컨대, 『소설일 뿐』에서 S 선생이 지금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맞는가를 물으며 편집자의 목소리를 소설에 “실재하는 인간”의 것인지 스스로의 “고립감이 빚어낸” “환청”(p. 119)인지 헷갈리게 두어 상상과 실제의 경계를 뒤섞어버릴 때 발생하는 혼란이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다리의 고립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면, 『말의 속도』에서 명학수가 현실과 허구를 섞으며 “아무리 애를 써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수 없”(p. 169)는 상황을 만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무너지는 실감이다.
가령, 「은하」에서 세 소설의 겹쳐지는 양상을 유심히 살펴보자. 장편소설 『은하』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관계에 균열이 생겨 헤어진 ‘나’와 미영은 오랜 시간이 지나 미영이 소설집 『은하』를 출간한 후 다시 마주하고 ‘나’는 그 만남을 계기로 오랜만에 다시 소설을 쓴다. 그런데 그것이 『말의 속도』에 수록된 「은하」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세 ‘은하’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겹침은 1차적으로는 소설의 재현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소설 밖의 우리가, 명학수가 쓴 「은하」가 아니라 사실은 소설의 주인공이 쓴 「은하」를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작품의 말미에 드러날 때, 그의 소설이 전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세계가 전복될 때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난데없는 차원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는 한편,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세계를 의심하게 하는 데 명학수 소설의 힘이 있음을 알려준다.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에서 작가는 이 세계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세계를 공고한 실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끊임없이 교란하기도 한다. “국가관리국”(p. 46) 조직원인 ‘나’는 “햇빛로 32단지”(p. 42)의 미친개를 처리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곳에 투입되어 단지 내 각 세대에 통지문을 전달한다. 근엄한 말투의 ‘나’가 시종 엄숙히 업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그의 업무 기록은 언뜻 르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실 모든 행위들이 우스꽝스럽다. 예컨대 통지문이 전달되었음을 인증하기 위해 각 세대주는 전달받은 통지문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은 녹음된다. 우습기는 통지문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완전한 공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이곳에 미친개가 있다는 증거도,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이가 왜 이곳의 “십대 청소년들뿐”인가에 대한 근거도 없으며, 그들이 왜 “다른 세대의 개만 식별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은 채 통보와 겁박만이 있는 이 문서의 내용은 상당히 허술하다. 지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통지문을 전달하는 ‘나’나, 그에게 임무를 맡긴 부장도 마찬가지다. “명확한 공식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최종 책임 기관에 호소할 가능성이 원리상으로도 없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언제나 이미 (대타자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결정을 언급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다시 마크 피셔의 말을 빌리자면, ‘새로운 관료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3) 자신의 개가 미친개인지를 판별하는 방법이 수의사의 정밀 검사와 같은 과학적인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개들의 상태에 달려 있”고 “만약 다른 집의 개들이 모두 정상이면” 자신의 개가 “미친개가 되는”(p. 49) (엉성한) 원칙을 따라야 하는 이곳에서 ‘사실’로 일컬어지는 것은 논리로 이루어진 허상에 불과하다. 만약 누군가가 이사하거나 미치지 않은 개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저러한 논리를 조금만 건드려도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붕괴”(p. 74)될 수 있는 모래 위의 집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임을 명학수는 이 소설에서 폭로한다. 이곳이 “이성적이고 합리적”(p. 60)인 완전한 체계라고 착각하며 그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모습과 함께.
이렇게 만들어진 체제의 허상은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과 「폴이라 불리는 명준」에서도 재차 폭로된다. 우연히 경마공원에 간 ‘나’와 영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해서 베팅에 성공한 후 큰돈을 벌게 되고 이후 주말마다 그곳을 찾는다. 그러나 ‘나’가 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마공원을 가지 못했던 때를 기점으로 승률은 점점 떨어지고 그들은 전패를 거듭하다 자연스레 이별한다. 그들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몇 번의 우연을 겪으며 서로가 함께 베팅 공간에 있어야지만 우승을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새로운 연애 상대와 함께 경마공원에서 베팅을 하며 관계의 정도를 실험하였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논리로 구축된 환상에서 본질과 비본질이 어떻게 오도되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만들어진 논리에 사로잡히기는 「폴이라 불리는 명준」에서 아들 진욱이 죽은 원인이 앤디 워홀에게 있다고 믿는 명준의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명학수는 실체적인 진실 없이 상상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에서는 정체성 역시 체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더 공을 들이는 듯하다. 소설은 오리지널리티를 흔드는 작품들을 내어놓은 앤디 워홀을 등장시킴으로써 지금의 우리에게 고정된 정체성은 없으며 단지 어느 체계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것이 달라질 뿐임을 강조한다. 미국 이민 2세대인 이명준이 ‘Paul Lee’가 되어 더 이상 명준으로 불리지 않고, 이후 앤디 워홀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연극이 끝난 후에도) 앤디 워홀의 가명인 ‘밥 로버트’나 ‘앤디’라고 불릴 때, 무엇이 진짜 그의 이름이며 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소설에서 다룸으로써 명학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저 어떤 체계로 구성된 산물에 불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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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호의 유용한 설명 틀에 기대어 정리해보자면, 구병모의 소설은 자본주의로 인해 소설의 달라진 위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명학수의 소설은 공고해 보이는 세계가 사실은 구조화된 허상임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내파할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용가치를 산출하며, 그들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다시 문학적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문장을 쓰면서 내가 ‘이터널 브리지’ 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소설의 힘을 알게 하는 명학수의 소설과 소설을 읽으며 멈추어보는 순간의 중요성을 짚는 구병모 소설의 효용은 읽는 행위에 참여하는 이들만이 오롯이 체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자면, 소설에 대한 그들의 소설을 읽으며 “거대한 원 안을 끝없이 순회하는 감각”(『소설일 뿐』, p. 120)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어딘가의 안에서만 순회하고 있다는 감각은 ‘읽는 노동’을 논하는 데 있어 또 다른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진다. 이를 일단 고립감이라고 가리켜볼 수 있겠다. 물론 이때의 고립이란 카프카와 보르헤스와 밀란 쿤데라를 누군가가 “과연 [……] 읽을 수 있는가”(「은하」, p. 111)를 의심하며 자신 밖으로 성벽을 쌓을 때 발생했던 과거의 것과는 달리, 지금껏 세계의 안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점차 밖으로 밀려나 결국은 지금, 자신이 세계의 밖에 있음을 깨달을 때 느끼는 소외의 감각에 가깝다. 이는 읽지 않는 이를 어떻게 읽는 일에 참여하게 할 것인가를 묻는 계도적인 태도로 행해진 고전적인 질문 방식이 우리가 어떻게 이런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묻는, 절박한 감정이 담긴 질문으로 자리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질문의 방식이 바뀐 만큼 이에 대답하는 자의 새로운 위치 선정이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이때, 구병모가 소설의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이터널 브리지’는 다시 좋은 비유가 된다. 다리 위에서 좀처럼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선택한 자나 다리를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다리의 안과 밖이, 그러니까 소설과 현실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다리 안에서 외치는 말이 다리 밖에 있는 이에게는 좀처럼 들리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그러나 다리는 “단서군 초입면”과 “종지도”(『소설일 뿐』, p. 16)라는 구체적인 지명의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의 내부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작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의도와는 달리 문학과 현실의 분할선을 더욱 공고하게 그을 수 있음을 염려하는 태도가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명학수의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에서 “인도인과 한국인의 혈통을 반반씩 이어받은 소년”(p. 48)이 체제의 논리를 간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다소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다리의 내부를 충분히 어루만지는 시선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의 외부를 조감하는 자가 있어야 다리의 구조가 온전히 파악되며 누군가와 함께 그 위에 올라가는 방법이 더욱 효과적으로 모색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소설을 읽은 후 나는 ‘이터널 브리지’에 머무르는 즐거움을, 그들의 문학의 역량에 대해 감탄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다리 밖으로 나간다. 다리에 올라가기조차 꺼려 하는 이들과 ‘읽는 노동’을 함께할 방법을 고민하며. 이것이 읽는 행위를 통해 실제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서 내게 부여된 또 다른 책무라고 생각하며.
- 1) 강동호, 「문학의 경제학: 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p. 153. 이하 인용은 본문에 쪽수만 밝힘.
- 2)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24.
- 3) 같은 책, 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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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1.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의 갈라진 틈에 흘려보냈어야 할 때가 박혀 까맣게 굳어 있다. 더는 손 씻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작은 비누를 차마 버리지 못한 연한 마음. 한낱 비누 조각에 담긴 손때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섬세한 시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그뿐.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에 과할 만큼 환한 조명을 비춰 부유하는 듯 피사체를 연출한 사진술에 불과하다고. 삶은 어찌할 바 없이 낡아가기 마련이고 그 사실 자체는 대단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동원하지 않으면 포착할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조명을 비추고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도 메마른 비누가 다시 수분을 머금고 유선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저 모양과 저 색으로 머무르는 비누의 한순간이 존재하고, 때때로 예술은 부드럽고 환한 조명을 비춰 그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영원의 빛을 부여하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잘 짜인 베일 위에 손때 묻은 비누 조각을 올려 섬세한 조명을 비춰보는 일. 말라붙은 비누는 놀랍게도 영롱한 빛을 뿜고,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다. 2.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p.36)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기에 놀랍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라고 잊었기에 새삼스럽다. 현란한 타임라인에 무한한 현재가 피드되는 오늘날에도 소설은 삶이 연속적임을, 젊었던 내 모습은 절대 돌아오지 않고 그 비가역성이야말로 삶이 지닌 잔인하고도 엄연한 속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삶이 단속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내 앞에 돌아와 놀라운 기시감을 선사해주라는 것 또한 알려준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아주 환한 날들」, p.33) 하고 작은 경악을 느끼는 것처럼, 마흔이 넘은 여자가 “일렁이던 특별한 빛”을 가졌던 한때를, 그 시절 품었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빛이 다가올 때」, p.65, 71)을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기억에 남은 몇 장면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인생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장면들로 엮어낸 사슬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는지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 순간 이후 나는 달라졌다’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진실은 ‘그 순간을 떠올린 이후 나는 달라졌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반복해 살고, 그때 비로소 그 순간의 적확한 좌표를, 그 순간이 인생에서 차지한 위치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아채게 된다. 이야기의 형태로 순간은 영원을 획득하고,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선물처럼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삶을 관통해왔음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환희가 그때의 내게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그곳’은 ‘지금 이곳’에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1) 모습으로 펼쳐진다. 오래되고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생하는 이 뒤늦은 행복의 수확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예컨대 다시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믿었던 노인이 앵무새를 사랑하게 되었거나(「아주 환한 날들」), 뉴욕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사촌 언니의 때늦은 첫사랑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빛이 다가올 때」), 당혹과 감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이미 충분히 고독하기에 발생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노인이 젊은 엄마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첫사랑의 추억에 무감해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에게 뉴욕은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속의 교차, 고독한 사람이 길을 걷고 서길 반복하는 모습이야말로 삶에 관한 정확한 비유로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길은 끊기지 않고 다만 종종 정지되고 자주 되감길 것이다. 그렇게 백수린 소설의 행로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서. 과거의 한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잃어버린 조각처럼 박힌다.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닌, 방금 만들어진 자리. 박히는 순간 이 자리가 바로 제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렇다고 사랑이 이별로 마무리되고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지당한 진리가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녹아 사라지거나 말라비틀어져 버려지는 것이 비누의 운명인 것처럼. 인생이 비극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비극에서 실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가의 고군분투가 존재할 따름이다. 미약한 우리가 삶의 비극성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임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예술가의 눈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 의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2)에서 유래하며, 소설의 독자이자 제 삶의 독자인 우리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은 지적인 책임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지나간 시절의 좌표를 해독하는 일인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이곳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아름다움과 진실은 함께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기억은 재구성의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고, 보정된 과거는 진실성을 잃는 대신 아름다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같지 않고, 어쩌면 기사를 작성하는 일조차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기사가 모든 일이 끝난 후 숙고하며 작성된 기사보다 진실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풍경으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속했던 나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빚어낸 거리를 통과하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편집과 윤색의 의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라도 차마 거짓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은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복기되지 않는 사실은 순결하지만 무의미하고, 삶은 끊임없이 복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도약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에 가깝다. 만약 기억을 탐사하는 자가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는 걸 잊는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3)고 있는 셈이다. 되찾은 기억은 단지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솟아오르는 현재의 이 장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시절의 보라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유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더 이상 “유타의 대책 없음이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건 어쩌면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든 개를 간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봄밤의 우리」, p.92)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 과거 유타와 함께했던 나날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타인의 말과 몸짓이 새롭게 발굴되고, 그렇게 되찾은 것들은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곳의 내 삶에 대해 알려준다. 뒤늦은 앎이 전적으로 내 덕이 아닌 것처럼, 당시의 무지도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다혜가 자신을 얼마나 성숙한 어른으로 여기든 간에,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자식들의 만류에도 어깨관절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짐짓 어른스러운 포즈로 반문한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자 희미한 깨달음과 후회가 밀려온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눈이 내리네」, pp.208~209)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를 것이고, 운이 좋다면 언젠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앎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함께할 것이다. 삶은 기억이 빚어내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작 1인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손안에 놓일 앎이 그리 대단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미한 앎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만이나 허위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잃은 엄마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처럼, 차마 바랄 수도 없던 빛, 꿈에서도 허락한 바 없던 빛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 빛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그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그것은 무엇이었을까」, pp.245~246)다. 삶의 아름다움은 감히 기다릴 수는 없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찾아온 앎이 가까스로 맺힌 물방울 같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정교한 결정에 감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곧 흩어지리라는 걸 납득하는 사람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도, 힘을 갖거나 성취를 쌓은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갓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섬으로, 다른 이들을 파도로 여겼다. 파도가 나를 치거나 감싸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길 반복한다고 믿었던 순진함. 나이를 먹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나는 바다 위에 고정된 섬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의 허위를 깨닫게 된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나이를 먹어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4)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설명하는 쿤데라의 말에 동의한다.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성숙해진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일, 서정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어른의 것이고, 소설가의 탄생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5) 여기서 백수린의 소설을 좀더 염두에 두고 말해보자면, 소설가는 그 폐허 위에 어른의 서정 세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복잡한 서정, 그러니까 무지로 빚어낸 매끈한 서정이 아닌 주름지고 비틀리고 손때 묻은 서정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와 충만이,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를 가진다는 건 달라진 그의 관측소를 공유하며 새로운 어른의 서정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다정한 공모자들처럼.”(「흰 눈과 개」, p.142) 1)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 212쪽. 2) 밀란 쿤데라, 권오룡 역,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의 기술』, 민음사, 2013, p.195. 3) 발터 벤야민, 같은 책, 「발굴과 기억」, pp.182~183.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커튼』, 민음사, 2012, p.204. 5) 같은 책, 「시인과 소설가」,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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