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옷의 메커니즘 : 환유 경제의 뉴블루칼라들
1. 뉴블루칼라의 탄생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은 한 나그네를 두고 이루어지는 힘겨루기를 다룬다.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자가 이기는 이 싸움에서 바람은 있는 힘껏 숨을 불어대고 해는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빛을 내리비친다. 그 결과, 누구나 아는 대로 승리는 해에게 돌아가면서 이 이야기는 지금껏 ‘부드러움의 힘’을 가르쳐왔다. 그런데 해의 현명함을 상찬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나그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는 해와 바람이 자신을 두고 모종의 경쟁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서 옷을 여미거나 벗는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믿으며. 그를 통제하고 부추겼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 해와 바람의 공작과 저들 간의 다툼에 그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제 나그네의 자리에 우리를 놓아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우리가 옷을 입고 벗는 일이, 더 나아가 오늘 아침 옷장에서 꺼내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였을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정말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은.
사실상 옷은 작동 원리가 감춰진 시대의 산물이다. 그간 패션업계는 유행이라는 말로 우리가 특정 옷을 선택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올드머니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류층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올드머니’를 상속받은 이들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 이 유행은, 부를 타고난 이들은 이를 애써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으며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는 현상이다. 승계된 부에 대한 동경은 그 기원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간의 보편적인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유행은 그리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효한 비유로 활용되고 있는 수저론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계층적 질서의 엄연함을 재확인하게 하는 또 다른 비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올드머니룩이 타겟으로 삼은 대상이 ‘뉴머니’라는 점, 즉 자신의 세대에서부터 부를 축적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부에 대한 보편적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이 얽혀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고소득 근로자가 된 뉴머니들은 장시간 고강도 몰입 노동을 견디거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란 기치 아래 높은 위험성을 감수하며 주식이나 가상화폐와 같은 금융투자를 감행한다. 건강과 가능성을 담보로 불안하게 카지노 칩을 만지작거리기보다 자기 몸을 모두 비빌 수 있는 안정적인 언덕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패션계는 상상한다. 능력과 노력만으로 사회적·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지던 시대가 저물고 태생적 조건이 능력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래 확산된 능력주의에 대한 불신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있는 뉴머니들의 박탈감을 패션사업은 은밀히 이용한다. 물론 그들이 올드머니룩으로 입는다고 그 결핍이 채워질 리는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력을 통해 부를 거머쥔 자들마저 타고난 탯줄을 동경하는 현실을,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신화가 사라지고 어느새 신분제가 회귀한 지금을 옷이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옷의 미학이 사실상 경제학과 긴밀히 관련된 채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패션계와 유착한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따라 뉴머니들이 자신들이 그간 무너뜨렸던 신분 질서를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이러한 옷 갈아입기 현상은,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 프레카리아트층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시기의 프롤레타리아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 하나를 선택하여 대체로 평생 같은 옷을 입었던 것과 달리, 최근 일부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거나 한때 입었던 하얀 옷을 푸른색으로 갈아입은 후 필요에 따라 다양한 푸른 색감의 옷을 골라 입는다. 어느 날 갑자기 ‘블루칼라’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화이트칼라’를 보는 일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다. 1) 플랫폼은 옷장을 활짝 열어놓고 옷을 갈아입을 이들을 기다린다. 그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서로 큰 차이를 갖지 않던 프롤레타리아들과 달리 프레카리아트층의 내부 풍경은 다채롭다. 앞선 분류법대로 구분해 보자면 올드블루칼라, 그러니까 원래부터 블루칼라 계층에서 태어나 변함없이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과 뉴블루칼라,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태어났거나 과거에는 사무노동을 했지만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 혹은 학력 수준이 높아 장기적으로는 화이트칼라로서 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기를 꿈꾸지만 잠시 꿈을 미뤄두고 단기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모두 프레카리아트층에 섞여 있다.
최근 우리시에서 그려지는 노동자의 전례없이 다양한 면모는 이러한 프레카리아트 분화 현상이 반영된 결과물로 보인다. 2) 가령, 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에서 다뤄지는 프레카리아트들은 “돈이 없는 자라서 일할 수밖에 없었”(「최저의 시」)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해야”(「문제와 문제의 문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에 비해 류휘석의 『우리 그때 말했던 거 있잖아』(문학동네, 2023) 속 이들은 일은 하되 “사회의 기준치로 봤을 때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 정도만 하면서 “엄마의 전재산으로 얻은 전셋집”에서 대부분 “놀고먹는”다. 이들은 자신들을 “도망의 왕”(「이 글에는 옮긴이만 등장한다」)이라 지칭하면서 장기적·정기적으로 일을 하는 미래를 계속해서 유예한다. 두 시집 속 청년들은 모두 프레카리아트로 분류되며, 어쩌면 플랫폼에서 배분받은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노동에 대한 태도, 노동자로서의 자기 인식, 무엇보다 불안정한 지위로 인한 그들의 내면 풍경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최근 현대시에서 나타나는 프레카리아트의 특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한데 뭉뚱그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은 이들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를 제기하며, 우선 ‘뉴블루칼라’들, 그러니까 젊은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한재범의 첫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에서 다뤄지는, 임시로 프레카리아트 되기를 선택한 이들 중 일부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시에서 노동의 프레카리아트화 혹은 플랫카리아트화(플랫폼 기반의 프레카리아트화)3)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물론 이들에 한정된 이 글의 논의는 계층 내 또 다른 선 긋기라거나 그들 사이 연대의 어려움이 문제 되는 지금, 프레카리아트를 또 한 번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지인의 올드블루칼라들이 지금의 시대를 19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감각하듯(“2020년대에 먹고 사는건 1980년대에 노동자로 사는 것과 다르다 해도 자본가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고”, 「서사」) 올드블루칼라가 지난 세기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이들이라면, 한재범의 뉴블루칼라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노동자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섬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한 권의 시집이지만 한재범은 어느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복합적 내면과 지금-이곳의 작동 문법을 새로운 방식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따라서 이 시집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최근 등장한 뉴블루칼라의 얼굴의 일면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노동시의 면면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겹쳐 입으며 안전해지는 ‘나’
그런데 한재범의 시를 (궁극적으로는) 노동시의 계보에 위치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노동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는 그간 여러 평자들이 노동시의 개념과 그것의 함의 변화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며 이룬 빛나는 성취 덕분이다.4)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실시간 노동이 이루어지고, 노동이 “쟁의에서 생계로 가라앉”5)은 지금, 다분히 사용법이 한정된 채 쓰이고 있는 ‘노동시’라는 말을 가져와 ‘시’와 구분 짓는 일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 글의 초점이 이 용어의 유용성을 따지는 데 있지 않기에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한재범의 등장은 노동시의 유효성을 심문하기 위해서는 이제 노동의 양태 변화와 연계된 재현 내용만이 아니라 재현 그 자체, 그러니까 변화된 서술 방식을 ‘노동시’라는 개념이 감당할 수 있는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명령하는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진다. 지난 노동시들의 현실 재현 성격과 언어의 직접성을 계승하여 최지인, 유현아, 이용훈의 시가 노동의 현장을 핍진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재현해 왔다면, 한재범의 프레카리아트 화자는 노동 현장 재현보다는 노동하는 자의 내면을 상징적인 언어로 발화하기 때문이다.6)
손 앞에 종이 상자(③)가 있다
― 「 」 전문(밑줄 및 번호는 인용자)
그의 시집 첫 페이지에 수록된 인용시가 그 대표적 예다. 고백건대, 이 시를 읽는 일은 당혹스럽다. 종이 상자 모양을 형상화한 제목의 낯섦도 그 요인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주문한 종이 상자가 오지 않았음에도 “손 앞에 종이 상자가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나’의 말이 특히 의아하게 들린다. 마치 여러 시점에서, 혹은 불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작성된 문장들을 접붙여놓은 듯 우리를 교란하는 이 문장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각각의 문장들을 따로 떼서 읽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선 이 시를 화자가 시간의 순서대로 말한다고 가정하고 읽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그의 손 앞에 놓인 종이 상자(①)는 그가 종이 상자를 주문한 후 그의 앞에 놓이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종이 상자(①)가 있었음에도 그는 종이 상자(②)를 주문하여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둘째, 2연의 종이 상자(③)는 시간이 흘러 드디어 도착한 상자(②)일까, 아니면 이는 상자(②)와 무관한 것으로 ‘나’는 다시 한번 종이 상자(①)의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질문에 확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7) 다만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시에는 한재범의 화자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문했지만 오지 않고 있는 상자(②)와 손 앞에 있어 그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상자(①), 이렇게 두 종류의 종이 상자가 있으며 그가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은 종이 상자(②) 앞에 ‘내가 원하는’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모순을 발생시키는 셈인데 이러한 전략은 ‘종이 상자’를 동일한 하나의 개체로 생각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물건을 보관하거나 옮기는 기능만 생각해 보면 모든 종이 상자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규격과 모양은 사실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 상자를 구해와 그 안에 물건을 넣기도 하지만 도처에 있는 상자를 두고도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신이 원하는 상자를 신중히 골라 구입하고 그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도착할 기약이 없는 상자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닿는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이후 수록된 시들은 종이 상자에 대한 하나의 독법, 그러니까 상자를 일자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한재범의 화자가 이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자인가를 보여준다.
자연을 걷는 사람처럼
일시적이다 일시적이지만 자연스럽게 고궁을 걷는다 고궁을 걷지만 영원은 아니다 깃발을 들고 서 있지만
점령은 아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나는 꽤 여행객스럽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 마음 내켜 한번 와봤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고궁을 걷는다 그런 마음들과 자연스럽다 그런 마음들은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왔다 시급 9,160원*을 받고 지금 밟고 서 있는 오백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어요 이젠 건너편 공사장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거 같다 왜냐면 설명은 나의 직업이고
건너편 공사장은 몇년째 저 자리다 함부로 영원하다 영원 사이에서 나는 꽤 자연스럽다
시멘트를 섞으며 달리는 레미콘처럼
영원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 2022년 최저시급.
― 「레디믹스트콘크리트」 부분
손에 쥔 휴대폰으로 언제든지 플랫폼에 접속하여 구할 수 있는 일자리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둘 다 돈을 벌게 한다는 점에서 그 기능은 사실상 같다. 최저시급을 받고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이 시 속 ‘나’가 스스로를 “여행객스럽다”라고 하거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라고 가리킨다는 점에서 보건대 그는 손 앞의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단기 고용된 그의 상황을 한층 부각한다. 그는 숙련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연신 신경 쓰이는 양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반복하거나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가 자신이 잠시 이 일을 하고 있음을 여러 방법으로 강조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일시적’인 노동임을 되뇌며 이 일과 선을 긋는 그의 말에는 주목할 만한 속내가 있다. 그는 이러한 선 긋기를 통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미래에는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며, 굳지 않은 상태로 배달되는 “레디믹스트콘크리트”와 같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그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며(“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영원히 공사 중인 시 속 공사장처럼 장기 노동이 유예된 상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도 그는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을 분리하여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나’를 임시의 ‘나’로 봄으로써 우울한 가운데 명랑함을 유지한다.
지하철부터 탔군요
[……]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 「나는 내일부터」 부분
지옥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어도, 어제는 보였던 출구가 지금 ‘나’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그런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덕분에 그는 명랑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그의 말에는 한때 유행했던 본캐와 부캐처럼 지금 힘든 ‘나’는 부캐로서, 그런 ‘나’가 상처를 받았다면 마치 입고 있는 옷에 상처가 난 것일 뿐 진짜 ‘나’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8) 물론 그가 여러 겹의 ‘나’들을 껴입는 까닭은 옷의 본 기능대로 본질적인 ‘나’를, 꿈을 가지고 미래에는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는 무림을 벗어나 강호를 견제하고 세간을 수호해왔다 나 김정배는 은둔 고수 겸 은둔의 고수 내가 나임을 김정배임을 무림의 은둔 고수임을
철저히 숨겨 온 존재
김정배를 부정해야만
김정배는 실재할 수 있다
―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부분
‘김정배’로서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나’, ‘무림의 은둔 고수’, ‘김정배’로 분리하여 자신을 대상화하는 한재범의 화자를 이수명의 설명대로 “삼인칭 자아”라고 말해보자. 이것이 새로운 “우리의 자아의 현주소”9)라면, 이렇게 새로이 형성된 자아는 젊은 청년 프레카리아트로서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그와 같은 청년들은 자신에게 “뜯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여러 페이지가 있는 듯 스스로를 분리하여 “연습장”처럼 사용할 수 있는 “연습생”으로서의 ‘나’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보다 더 많은 굴”을 파서 숨는 “토끼”(「연습생」)처럼 미래를 꿈꾸는 ‘나’를 겹의 ‘나’들로 숨기는 방식으로 유예된 미래를 안전하게 보존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주”는 데에서 “안전”(「유원지」)감을 느끼며. 주문한 종이 상자가 도착하여 그것을 사용할 미래를 기다리며 그들은 임시 ‘나’를 여러 벌 겹쳐 입는 방식으로 본체 ‘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3. 벗겨지는 옷과 사라지는 ‘나’
이런 그의 전략은 상상 속에서는 분명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들이 입은 임시 ‘나’는 본체인 ‘나’와 한몸이 되거나 끝내 벗겨진다는 데 있다.
[……]
이 꿈이 지루하다
뛸수록 바깥과 멀어지는 숲이다 뒤로 손을 넘겨도 닿지 않는 등이 서늘하다 꿈속에서 만져지는 건 나뿐인데 외출복이 젖고 있는 걸까 숲의 나는 외출복을 입지 않았는데
[……]
일어나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누군가 나를 흔들수록 나는 외출복을 끌어안는다 이불을 파고들 듯이 천사들은 다가와 식물원의 사람들처럼 지루한 얼굴로 나를 자세히 본다
― 「직물과 작물」 부분
‘외출복을 입은 나’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를 구분한 그는 밖에서 하는 일, 즉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등의 역할은 ‘외출복을 입은 나’가, 집에서 침대에 눕거나 (미래를) 꿈꾸는 일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담당하도록 했다. ‘직물과 작물’이라는 제목의 두 단어가 단 하나의 획으로 완전히 다르게 활용되는 것처럼 그는 한 겹의 외출복을 가지고 자신을 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이러한 전환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출복을 입은 나’는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바로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로 변환되어야 하지만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 있으며 그때에는 오히려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바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외출복을 입고 나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땀에 젖는 일을 겪거나 “나를 아무리 뒤집어도 나의 등은 나의 등”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자신을 쪼개 완벽히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우며, 애써 이를 구분하려고 해도 어떤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나머지 ‘나’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외출복을 끌어안는 시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방어 논리와 희망이 깨졌음을 깨달은 그가 끝내 방어막을 놓지 못하며 하는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어쩌면 고학력 중산층 청년들이 같은 단기 노동이라도 플랫폼에 기반한 작업을 대체로 선호하는 것은 이 경우처럼 본체 ‘나’와 지금의 노동을 하는 ‘나’가 전도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교육이 필요한 고숙련 노동이 그럴 가능성을 높인다면, 쉽게 할 수 있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플랫폼 기반 노동을 할 경우 ‘나’는 본체인 ‘나’의 꿈에 조금 더 신경을 쏟은 채 기회가 왔을 때 원하던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입되, 마치 몸의 절반에는 옷을 걸치고 나머지 반은 걸치지 않은 것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사력을 다하지 않으며 언제든 옷을 벗을 수 있는 순간을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절반을 허공에 입혔는데 춥진 않았다 지나친 사람마다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언제부터 잠바가 유행했는지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가 나는 좋아서
벌써 몇바퀴째 공원을 돌고 있었다 앞으로 더 추워질 거라던데 코끼리 코는 계속 제자리였다 다음 계절이 이미 온 것 같아 뭐라도 걸쳐야 했다 흔해지기 싫었다 절반만 걸쳐야 했다 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
[……]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도록
그러나 다시 코끼리 코 앞에서
멈췄을 때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는 사라지고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지압을 하듯이 센 손아귀로 잠시 끌려가는데 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뭐라도 걸쳐야 했는데 절반을 걸친 이 풍경이 꽤 추웠는데 코끼리 코 끝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았다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부분
생계를 위해 “뭐라도 걸쳐야” 하기에 자신의 학력 수준과 집안 자산 등과 맞지 않는 잠바를 입고 있지만(“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하에 언제든 그러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말하자면 언제든 그러한 옷을 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잠바를 ‘절반’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청년 프레카리아트들과 (고학력 중산층인)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흔해지기 싫었다”).
그러나 몸에 꼭 맞지 않는 잠바는, 심지어 어정쩡하게 절반만 입은 옷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그들이 직면하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결코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던 ‘나’가 노출될 때 그는 임시 ‘나’가 받은 상처를 같이 받기도 하고 본체 ‘나’가 임시 노동을 하는 지금의 ‘나’와 정말 다른가를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또 하나의 진실은 자신이 어떤 것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과(“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 잠시 끌려가는데”) 그럼에도 이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무력함(“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이다. 코끼리에 코가 달린 것이 아니라 코끼리 코에 코끼리가 달린 듯 그는 코끼리 코와 같은 일부의 ‘나’를, 부캐로서의 ‘나’를 앞세워왔지만 그 둘의 사실상 분리 불가능성 앞에서 본캐와 부캐는 섞이고, 부캐인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가는 데 점차 적응하며 본캐는 어느새 사라진다(“코끼리는 사라지고”). 이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들이 정규 노동시장 진입을 왜 점차 포기하게 되는지, 프레카리아트 상태에서 왜 점점 벗어날 수 없는지를 짐작하게 한다.10)
아주 자연스러운 옷이다 이 옷은 겨울옷도 되고 여름옷도 된다 계절은 순환되고 유니폼은 반복된다 매일 입는 이것은 이제 나 같다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
내가 아닌 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런 몸을 갖고 싶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 유니폼은 일정하고 내게 자연스럽기에
유니폼을 입고 집까지 간 적도 있다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 저는 이미 충분해요 바깥의 유니폼이 말한다
― 「유니폼」 부분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슨 옷이라도 걸치는 것뿐이다. 「유니폼」의 ‘나’는 잠바를 절반만, 그것도 걸치는 방식으로 아무렇게 입기를 선택한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속 ‘나’와 옷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일할 때 입는 유니폼을 어느 계절에나 입고 집에까지 입고 가며 유니폼을 입은 자신만을, 이와 같은 노동을 하는 자신만을 ‘나’라고 인식한다(“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자신 아닌 다른 몸을 부러워하지도, 다른 몸을 갖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는 본체의 잠재성을 긍정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입체적인 ‘나’는 없다. 다만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두고 사실상 몸과 붙어 있는 한 겹의 옷만을 입고 있는 납작해진 ‘나’만이 있을 뿐이다. ‘김정배’는 죽었고(“김정배는 이미 몇시간 전부터 시체에 불과하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미래를 꿈꾸던 ‘나’는 “할 일을 하고 나니” 사라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볼 낯이 없어”질 만큼 절망한 그들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됐습니다/ 실망해주세요 저를”(「재건축」)과 같은 말로 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이제는 그만둬야겠지// 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시인의 말」).
4. 환유 경제의 메커니즘
이것이 그들 내면의 한 풍경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짚어두어야 할 점은 한재범이 점차 본질적인 자신을 잃어가는 ‘나’에 대해 적을 때 자주 문장의 단어 하나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가령,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라는 구절은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의 잠바]가 자꾸 흘러내렸다’는 문장을 줄인 것이고,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유니폼」)의 경우 ‘저는 정말 [불만이] 없어요 사장님’이라는 문장이 줄이지 않은 원 문장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이와 같은 환유는 물론, 임시 노동으로 ‘나’가 없어진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수사다.
해설에서 최다영도 지적한 대로 한재범의 시에서 환유는 유독 자주 사용된다.11) 이는 저 두 문장에서처럼 그들이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갈 때 본체 ‘나’가 점차 사라지는 양상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당겨 말하자면, 시인은 환유의 잦은 사용을 통해 지금의 세계가 환유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동시에 그런 작동 구조가 ‘나’라는 실체 등을 결과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그의 환유적 상상력이 세계의 메커니즘과 관련되어 있음은 표제작인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확인된다.
우리 안에 동물이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긴 꼭 버려진 것 같네 우리는 분명 동물원을 걷고 있었는데 너는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우리 안에서 바나나를 까먹는 침팬지를 만날 순 없었지만 거대한 담장 안을 빙빙 돌았다 걸을수록 기억에도 없는 옛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는데 우리 밖에 바나나 껍질이 버려져 있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그거 같은데 원숭이가 먹는 바나나요 그런 웃긴 이름도 있군요 그건 사람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어쩌면 침팬지보다 바나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사주고 마트에 들렀다 정육 코너 옆 신선 코너에는 바나나가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바나나를 향해 손을 뻗는데 누군가 가로막았다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가끔 내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의 바나나 줄기에선 바나나가 여럿 자라니까요 그의 이름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벌써 문 닫을 시간이네 이러다 여기 갇히겠어요 이제 그만 나갈까요 바나나를 도로 신선 코너에 놓았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네가 없다 우리가 아니었구나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쥔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바나나는 거기 있다 두 개 이상의 바나나가 들어간 음료다 빨대를 빙빙 돌려 그것을 섞는데 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사람이 만든 건데 컵 안에 갈린 바나나가 절반 채워져 있다 나의 손이 그것을 둘러싼다 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부분
지금 ‘나’와 ‘너’는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일까. 동물원을 걷던 ‘나’와 ‘너’는(“우리는 동물원에 갔다”) 갑자기 마트를 걷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며(“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동물원에는 없던 침팬지가 마트에 나타나기도 하는 등(“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외부의 우리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와 더불어 몇몇 문장들, 예컨대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와 같은 전언 역시 선뜻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서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환유가 작동한다. 먼저, 마트와 동물원이라는 전혀 겹치는 지점이 없는 두 장소는 내적 정의가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외부 사물에 의해 연결된다. 기실 ‘몽키 바나나’ 역시 ‘몽키가 좋아하는 바나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환유의 산물인데 그것은 마트에도 팔고 동물원에도 있기에 두 장소는 그에 인접한 대상을 통해 이와 같이 연결되는 것이다. ‘바나나와 사람이 절반이나 같다’라는 엉뚱한 말 역시 ‘몽키 바나나’로 연결된 환유의 결과물이다.
②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침팬지→바나나)
③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사람≒침팬지→바나나)
화자의 연상이 흘러가는 대로 적어 보자면, 사람과 침팬지는 유전자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사람≒침팬지)12) . 그런데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하므로 바나나는 침팬지를 환유한다(침팬지→바나나). ‘침팬지→바나나’라는 관계가 성립한다면 침팬지와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 역시 바나나와 절반이나 같다는 말도 성립된다(사람≒침팬지→바나나).13) 이렇게 볼 때, “몽키 바나나 아세요?”라는 시의 첫 문장은 해당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는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말이 생긴 작동원리를 아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그러니까 이 세계가 환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를 묻는 질문처럼 들린다.
환유의 문법은 전통적 고용구조의 해체가 심화된 지금의 노동 시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통용되고 있다. 이를 ‘환유 경제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최근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중심에 있는 플랫폼은 이를 작동시키는 주체로서 그 자체로는 어떤 생산도 하지 않은 채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며 노동의 유통을 담당한다.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는 플랫폼의 방식 역시 다분히 환유적이다. 플랫폼은 오래 교육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단기 노동을 원하는 이들을 쉽게 끌어모아 플랫폼 밖에서는 전혀 연관관계도 연결고리도 없는, 사회적 지위, 계층, 젠더, 학력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을 느슨하게 연결한다. 유사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연대하여 프레카리아트 처우에 대한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다른 각각의 상황이 주되게 작용한다. 한편, 플랫폼의 이와 같은 구조를 프레카리아트는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그들은 옷을 갈아입듯 쉽게 일자리를 옮겨 다닌다. 이와 같은 환유 경제의 풍경을 한재범은 「소재지」에서 다룬다.
[……]
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창고의 짐들은 종이 상자에 담겨 있는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지
[……]
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혼자 남은 나는 상자를 열어본다
상자 안에는 빈자리가 조금 많고 이것은 이미 하나의 창고처럼 보인다 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텅 빈 이곳은 더 이상 창고가 아니다 창고는 내 손안에서 유일하다 흔들면 무너지는 소리가 날 뿐
― 「소재지」 부분
자신에게도 “목장갑”이 꽤 어울린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목장갑을 끼고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나’는 이쪽 창고의 짐을 종이 상자에 넣어 다른 창고로 옮기는 작업을 막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맡은 이 일은 프레카리아트들이 통상 하는 노동의 단순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동되는 짐처럼 고정된 ‘소재지’가 없는 그들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으며, 더욱 확대하여 해석해 보자면 무언가를 산하지 않고 옮기기만 하는 작업의 특성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자주 선택하는 컨시어지 노동처럼 실체 없는 노동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4)
그런데 무엇보다 이 시에서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은 이러한 작업의 와중에 일하는 이는 사라지고 일만 남는다거나(“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일하는 공간이 사라지는(“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등 무언가 사라지는 현상을 시인이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유의 원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앞서 우리는 인접성이 환유를 작동시키는 원리임에 주로 주목했지만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체물과 피대체물 사이의 말을 생략하는, “생략 가능함, 곧 괄호를 칠 수 있음이 바로 환유를 낳는” 또 다른 “비밀”이다.15) 한재범은 환유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계가 결국 무엇을 생략하는가를 두 작품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소재지」 속 두 종류의 사라짐은 환유 경제의 문제처럼 여겨진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누가 해당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일자리와 노동만을 빠르게 결합하여 노동자를 괄호 치는 방식으로 노동을 유통함으로써 중개료와 같은 불로소득을 얻는다. 한편,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다수를 차지하는 컨시어지 서비스는 무형의 노동이자 수요자에게 맞춰진 노동인 탓에 뚜렷한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수요자가 없으면 언제든 저 창고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미래를 유예한 젊은 청년들에게 환유 경제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한재범은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바나나 냄새의 사라짐을 통해((“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나타낸다. 환유의 세계에서 결국 사라진 것이 ‘냄새’라는 점은 특별히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냄새가 존재를 환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 <기생충>(2019)에서도 그러했듯 이는 개인의 계층적, 정치적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시의 장면은 그들이 올드블루칼라들과 다른 학력, 자산 등을 내세우며 프레카리아트층에서 자신을 구분 짓고 미래를 꿈꾸었지만 결국 원 정체성을 잃고 프레카리아트로 장기간 머물게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시의 가볍고 유머러스한 설정 아래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이와 같은 서늘한 미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대체로 지난 노동시들에서 노동자의 문제가 은유와 제유를 통해 나타났다면,17) 한재범의 시가 새로이 등장한 프레카리아트의 문제를 환유를 통해 제시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플랫폼과 일자리 사이에서 괄호 쳐지는, 노동의 유통이 만들어내는 “공적(公的)인 환영물”18)에 불과한 그들을 환유를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환유라는 새로운 작동 원리에 노출된 그들의 존재 양식을 효과적으로 표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러 벌 옷을 겹쳐 입(게 하)고, 옷을 벗(기)고, 한편으로는 자주 옷을 갈아입(게 하)는 환유 경제 속 그들은 점차 낡아가는 푸른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며 희망하던 미래의 ‘나’를 잃어간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시장의 작동 원리를, 그 시장 속에서 점차 꿈을 잃어가는 뉴블루칼라를 보여주기 위해 한재범은 지난 노동시에서 흔히 보기 어려웠던 환유라는 장치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는 새로운 노동자의 얼굴을, 새로운 노동시의 탄생을 목도한 셈이다.
- 1) 이러한 선택에 작용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에 대해 나는 지난가을 어느 글에서 쓴 바 있다(인간 없이 일(하지 않)기」,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자발적으로 프레카리아트가 되어 저숙련 노동을 하는 것을 ‘팬시’하게 여기는 양상은 최근 ‘공구벨트세대’라는 용어로 개념화될 만큼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 중에서도 고정 직장을 갖기 전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이들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 2) 고봉준은 2010년대에 발표한 글에서 이미 오늘날의 ‘노동자’가 단일한 형상이 아니며 그들 간의 욕망이 겹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그가 대상으로 삼은 노동자란 내국인/외국인 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프레카리아트의 경우, 그는 이들이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안정적인 노예를 희망한다고 설명하며 단일한 집단으로 서술한 경향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프레카리아트 역시 보다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다. 고봉준,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비인칭적인 것』, 산지니, 2014, 366-367쪽.
- 3)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도시연구》제18호, 2020.
- 4) 대표적으로 고봉준, 「노동시여, 안녕」,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앞의 책; 소종민,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 《창작과비평》2024년 여름호.
- 5) 소종민, 앞의 글, 41쪽.
- 6) 이러한 변화 역시 프롤레타리아에서 프레카리아트로의 변화, 프레카리아트 층의 다양화 등과 연계되며 시의 독자층 변화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에 대한 보다 심화된 논의는 다음을 기약한다.
- 7) 특히 종이 상자(③)에 대해서 그러하다. 그러나 어제 주문했던 종이 상자(②)가 도착하였다면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상자를 활용하는 행위가 뒤이어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종이 상자(②)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 8) 「커피는 검다」를 비롯해 한재범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나’에 대한 모순적인 서술들, 가령 잠을 자는 ‘나’와 잠이 깨어난 ‘나’가 동시에 있는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사실상 그가 본체 위에 여러 임시 ‘나’들을 껴입고 있는 상태와 연결된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9) 이수명, 『웃긴 게 뭔지 아세요』추천사, 창비, 2024.
- 10)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익숙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의 어려움은 「유원지」의 화자가 어느새 익숙해진 “놀이기구”의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하고서도 한참 헤맨 끝에 “출구”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런 세계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기 위한 사회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 11) 최다영, 「일인극 튜토리얼」 , 앞의 책, 133-139쪽.
- 12) 해당 기호는 권혁웅의 『시론』에서 빌려온 것이다. 권혁웅, 『시론』, 문학동네, 2010, 338쪽.
- 13)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라는 구절 속 ‘절반’에 주목한다면 저 구조는 보다 복잡해진다. 시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숭이와 침팬지가 절반 정도 같다’는 문장을 이 구조 속에 하나 더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 14) 컨시어지 노동이란 플랫폼을 통해 위탁받는 “택시운전, 청소, 수작업이나 배달서비스”를 가리킨다. 가이 스탠딩, 『불로소득 자본주의』, 김병순 옮김, 여문책, 2019, 287쪽.
- 15) 권혁웅, 『환유』, 모악, 2017, 23-24쪽.
- 16) <기생충>을 비롯한 냄새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혜영의 「수석과 냄새는 계급적 상상력이 될 수 있는가?―「기생충」(2019)의 계급 재현과 그 실패의 징후」(《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와 이희우의 「매력의 경제학」(《문장웹진》 2022년 2월호)를 참조할 만하다.
- 17) 예컨대, 「어쩌면」과 같은 시에서 박노해는 “수천번이고 로봇처럼 반복동작하는” 자신을 “기계”에 빗대는가 하면(은유), 「지문을 부른다」에서는 “지문”의 사라짐을, 「손무덤」에서는 손의 훼손을 이야기했다. 지난 노 동시에서 사용된 비유의 종류에 대해서는 물론 보다 구체화한 논의가 필요하다.
- 18) 권혁웅, 앞의 책,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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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1. 1968년 6월 김수영이 세상을 떠나기 전 「풀」을 탈고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몇 편의 유고작이 더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한 편인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 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 - 김수영,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1연 집에 의자와 테이블이 많아 거기에 계속 걸린다는 화자의 고백에 대해 지난 연구는 어느덧 집 안에 자리하게 된 많은 물건에 집중하며, 현실의 번화함이 집 안까지 밀고 들어온 상황과 그 번다함이 소리의 증폭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주로 논의해왔다. 그런데 이 시가 김수영이 죽기 두 달 전에 썼던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이 시에서 시간이 흘러간 흔적을 본다. 의자와 테이블이 하나씩 집 안으로 들어오고, 테이블 밑에 있는 "엮음대"가 그러하듯 '나'가 점차 많은 것과 얽히고 얽히는 동안 흘러갔던 시간. 그래서 '나'가 의자와 테이블에 걸리는 사건은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맺게 된 관계들로 인해 머물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지연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김수영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였기에 자신의 생이 곧 끝날 것임을 그가 짐작했을 리는 없지만, 마치 사십육 년 동안 그러모은 것인 양 집 안에 놓인 수많은 물건을 열거한 이 시를 읽으며 그의 전(全) 생애가 압축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미제", "삼팔선", "탱크", "관청"과 같은, 시에 적힌 다분히 정치적으로 해석 가능한 단어들조차 잊을 만큼. 그것은 이 시가 다음과 같이 끝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음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 - 김수영,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9연 물건들로 가득하여 "바닥이 없는 집", 집 안을 돌아다닐 때에도, 가만히 있을 때에도 소리가 울려("소리만 남은 집")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집. 이것이 적지 않은 세월을 지나는 동안 자신의 안에 많은 것을 들여오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은 '나'의 생에 대한 비유라고 한다면, 저 소리들을 눈에 보이는 선으로 '나'와 이어지게 그어볼 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란 해마다 복잡한 연결선들이 더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래 생을 산 자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매번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아무것도 없는 방에 머물렀던 젊은 시절과는 또 다른 맥락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고 김수영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반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살아가는 일이란 어딘가에 '걸리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정호승의 시에서 다시 마주한다. 2. 나는 거미줄에 걸린 거미 먼동이 틀 때까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 사이로 거미줄을 만들어놓고 내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린다 버둥거릴수록 거미줄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동안 내 거미줄에 걸려 죽어간 각다귀야 모기야 하루살이야 미안하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남을 사랑할 줄 몰랐던 나를 용서해다오 이제 내가 거미줄에 걸려 맞이한 이 고죄의 차디찬 새벽 거미줄에 걸린 새벽이슬만은 살아야 한다 당신이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환승해서 저 멀리 인간을 벗어나 살아가듯 거미줄에 걸린 아침이슬도 저 멀리 절망의 거미줄을 벗어나야 한다 거미줄에 걸린 오늘의 세계는 죽음뿐이나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은 햇살을 찬미하고 햇살은 아침이슬을 찬송한다 - 「거미줄에 걸린 거미」 전문 지금껏 다른 이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쳤던 거미줄에 이제는 스스로가 걸려버린 거미의 상황을 다룬 이 시에서 앞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생의 끝에서 이 시의 화자가 깨달은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로부터 시작해보자. 파국은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한다. 그의 뉘우침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생을 시작하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리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거미줄에 걸린 새벽이슬만은 살아야 한다") 정호승이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반성과 연민의 태도를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고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정호승의 시가 지금껏 보여주었던 성찰과 윤리라는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정호승의 시적 갱신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어서 조금은 냉정한 눈으로 이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기실 아침햇살을 받은 거미줄의 아름다움 역시 「거미줄」(『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비, 1999)과 같은 작품에서 이미 한차례 이야기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가 오랫동안 정호승의 시를 읽어왔으며, 그의 시적 문법과 사유에 익숙해진 상태임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 익숙함과 그의 작품이 갖는 대중성을 빌미로 언젠가부터 우리는 김수영의 시와 같은 전위적인 시를 읽을 때와는 달리, 그의 시를 세밀하게 읽기보다는 그에 담긴 메시지만을 뭉뚱그려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 반성은 물론 나의 것인데, 여기서 새삼 그의 시를 읽어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것은 이 시의 아주 사소한 언술에서 지나온 시간만큼 그의 시에 더해진 깊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미와 이슬이 거미줄에 얽히는 사태를 그가 '걸리다'와 '맺히다'라는 두 가지 동사를 사용하여 적는다는 것. 거미줄에 '걸린' "오늘의 세계"와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을 그가 분명히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걸리다'와 '맺히다'라는 서술어는 둘 다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지만 '걸리다'의 경우 (앞서 김수영의 시에서 보았듯) 대상과 보다 결속된 상태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며 대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를 거느린다는 점을 유념해보자. 이렇게 「거미줄에 걸린 거미」에서 정호승이 사용한 두 동사를 구분해볼 때, 이번 작품들에 담긴 사유의 새로움은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생(生)에 걸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맺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오랜 숙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다. 늦은 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당신을 만나다니 당신은 맥주를 사러 왔고 나는 라면을 사러 왔는데 편의점에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죽기 전에 잠깐 당신을 만날 수 있다니 [……]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 결국 무엇이 순익(純益)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오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다시 만났으나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 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한다 편의점에서 사랑을 판매한다 해도 할인가(割引價)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 오늘 밤 편의점의 흐린 불빛은 우리가 함께 거닐었던 항구의 불빛처럼 쓸쓸하다 잘 가라 우리가 비록 편의점에서 잠깐 만났다 할지라도 부둣가를 밝히는 검은 불빛을 따라 또다시 밤배는 떠나간다 - 「편의점에서 잠깐」 부분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과의 우연한 만남을 다룬 이 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이 마련한 공고한 이분법적 구도다. 시인은 '나'와 '당신'을 중심으로 "맥주"와 "라면", "사랑"과 "미움", "교만의 손"과 "겸손의 손"을 나누어 적고, "오늘 밤 편의점"과 과거의 "항구"라는 시공간 역시 구분한다. 이와 같은 구도는 각자 계산이 끝난 맥주와 라면처럼 서로의 관계에 대한 계산 역시 오래전 끝났으며, 이제는 각자 분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상황을 강조한다. 오래전 연인이었던 그들은 잠시 서로의 삶에 맺혔던 것일 뿐 그 만남은 영원하지 않았고, 헤어진 후에 시간이 흘렀듯 지금의 짧은 해후 후에도 또다시 시간은 지나갈 것임을 화자는 담담히 적는다. 지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서로가 다시 멀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이치라는 것을 알아버린 자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길을 가다가 공중전화 부스를 만나면 얼른 들어가 부스 품에 안긴다 따스하다 설거지하시던 어머니 냄새가 난다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건다 그리운 수화기를 들고 예전에 집에 계신 어머니한테 전화를 하듯 어머니 접니다 전화를 건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부스 밖에 보름달은 떠 있는데 나는 달을 가리키던 내 손가락을 자른다 누가 지옥으로 떨어지듯 갑자기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신호음이 툭 끊어진다 어머니 접니다 전화 받으세요 밤길을 가다가 만나는 공중전화 부스 그리운 어머니 - 「공중전화 부스」 전문 이 시는 일차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지만, 어머니와의 상상적 만남이 지금은 쉽게 보기 어려운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연결된 전화가("갑자기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곧장 끊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이 작품 역시 우리의 생에서 이루어지는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관계를 그리는 데 치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늑한 품을 떠올린 화자가 끝내 마주하는 것은 어머니의 생이, 그리고 이승에서 어머니와 다시 만날 가능성이 전화 "신호음이 툭 끊어"지듯 끊어졌다는 참담한 사실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에 한때 맺혔다가 떠났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별한 관계조차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는 실제적으로 영원히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 거미줄에 잠시 맺혀 있다 사라지는 아침이슬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란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 누군가에게 잠깐 맺혀 있는 일이라는 것. 이것이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정호승이 알게 된 생의 비밀이자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아닐까. 3. 일흔이 되던 해 정호승은 어느 산문에서 "시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그 무엇이라면, 죽음 또한 이해하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적었다.1)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그의 시를 통해 삶은 물론 죽음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이 진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어떤 삶의 방향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거미줄에 걸린 거미」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맺히다'와 '걸리다'를 구분하여 읽어보자. 그는 시의 말미에 "거미줄에 걸린 아침이슬도 / 저 멀리 절망의 거미줄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며 "거미줄에 걸린 오늘의 세계는 죽음뿐이나 /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은" 그렇지 않다고 적어두었다. '걸려 있는 일'보다는 '맺혀 있는 일'이 우리의 삶을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는 이 서술은 생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 것을 권하는 말로 들린다. '거미줄'이 사실상 생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할 때, 그는 거미가 그 자신을 옭아매어 죽음에 다다랐음을 보여줌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를 우리에게 제안하는 셈이다. 우리의 삶이 어딘가에 잠시 맺혔다 사라지는 것이라면, 생에 대해, 그리고 관계에 대해 조금은 덜 전전긍긍하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라고.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면서도 우리에게만은 자신과 같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듯 그가 건넨 이와 같은 조언에서 나는 그가 지나온 시간의 깊이와 진정성을 읽는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순간과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아버린 정호승의 화자에게서 우리는 삶에 대한 욕망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낙엽을 쓰는 사람」에서 그가 되고 싶은 사람이 "낙엽을 쓸면서 마지막으로 가을이 되는 사람"이나 "낙엽을 태우다가 그만 불타는 낙엽이 되는 사람"인 것을 보자.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인식이 허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짚어두고 싶다. 이것은 그가 생에서 발견한 또 다른 맺힘의 시간들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빈 술병만 보면 꽃을 꽂는다 빈 술병에 꽃을 꽂으면 죽은 꽃이 살아난다 죽은 모든 꽃이 살아나 향기롭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꽃을 보면서 나는 빈 술병에 가득 든 술을 마신다 밤새도록 마신다 마시면 마실수록 빈 술병에는 술이 가득하다 부디 말리지 마라 나를 사랑한다고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도 만취의 순간이 나의 일생일 때가 있다 죽은 꽃이 계속 피어날 때가 있다 - 「빈 술병」 전문 이 시의 비유에 기댄다면 우리의 삶은 술병에 담긴 술을 마시는 것, 그리하여 술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빈 술병"에 가득 든 술을 마시는 행위란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일과 같다. 이러한 비유는 술을 다 마신 술병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란 사라지는 것임을 앞선 시에 이어 다시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지나온 "일생"에 만취한 '나'를 두고 "죽은 꽃이 계속 피어난"고 시인이 적었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운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생에서 '나'와 함께 할 수 없지만 그를 떠올릴 때만큼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지나온 날들을 떠올릴 때 시간을 함께했던 각별했던 누군가는 마치 꽃봉오리가 맺히는 것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맺히다 환하게 피어난다. 이런 순간이 시간의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그는 적어둔다. 우리가 생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더라도 누군가의 기억에 잠깐 맺힌다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향해간다는 사실은 그리 쓸쓸한 일만은 아닐지 모른다. 이것이 그의 시에 잠시 맺혀있는 지난 계절 동안 내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생의 비밀이다. 1) 정호승, 「일흔에 생각하는 인간의 시」, 『계간 시작』, 2019년 여름호.
집 근처 놀이터에는 아직 정글짐이 있다. ‘아직’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 놀이기구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가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정글짐을 타다 팔이 부러지고, 이마가 깨지고, 온몸에 멍이 들곤 했다. 그 결과 더는 정글짐을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안전한 놀이터. 그것은 유년 시절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정글짐 가로축에 매달려 몇 번 몸을 흔들다가 손바닥 살갗이 벗겨지고, 가장 낮은 봉에서 그다음 봉으로 발을 옮기다가 땅으로 떨어진 뒤, 이 소망은 약간의 이기심과 함께 생겨났다. 정글짐 위를 자유롭게 오르는 아이들의 유연함과 용기를 부러워하면서도 그것의 위험성을 성토하는 것으로 나의 용기 없음을 감추며. 이것이 정글짐에 대한 오래된 나의 기억이다. 그런데 아직 정글짐이라니! 물론 이 감탄은 놀이터의 정글짐만을 향해 있지 않다. 백가경은 첫 시집 『하이퍼큐비클』에서, 윤지양은 두번째 시집 『기대 없는 토요일』에서 나란히 첫 시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이하 「하이퍼큐브」)과 「살기」에 정글짐을 세워두기도 하였거니와, 독자에게 모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시집은 이 위험천만한 놀이기구와 닮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들의 실험적인 시를 정글짐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정글짐 위에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몇 번 놀다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세 자리를 떠나기도 하듯, 한때 열렬히 소비되다가도 돌연 낡았다고 취급되며 외면당했던 것이 그간 수많은 실험시의 운명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두 시집은 그러한 수순을 따를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이 될지 미결정된 상태로 나란히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 두 시집의 운명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을까. 두 가지 거친 질문을 손에 쥐고서 말이다. 먼저, 이들이 왜 ‘서정’이라는 안전한 장치를 두고 굳이 이토록 위험한 장소를 마련했는지를 묻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너무도 크고 본질적인 것이라서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수많은 놀이기구 중 그들이 왜 ‘정글짐’을 모델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이 글에서 사용하는 정글짐 비유가 모든 실험시의 은유가 아니라 두 시인의 실험이 구현된 구체적 형태를 일컫는 것임을 정확히 가리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글은 두 시인이 구축한 서로 다른 정글짐을 살펴보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왜 그들의 정글짐에 올라야 하는지를—그것이 불필요한 일인지 혹은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를—사유해보고자 한다. 1. 응시하는 바깥과 갇혀 있는 안 우선, 정글짐이 세 방향으로 확장되는 3차원의 입체 구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백가경은 다음 시에서 “세바스찬 힐튼”이 정글짐을 발명한 이유가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1920년 변호사 세바스찬 힐튼은 어린이들의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리 재지 못한 x의 발이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괏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랫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추가 비용 청구 예정 z의 현잿값: 중위소득 85퍼센트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건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부분 힐튼은 누군가가 좌푯값(x, y, z)을 말하면 아이들이 정글짐에서 그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도록 함으로써 물리적으로 3차원 공간개념을 이해하도록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3차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이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왜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차원’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n차원의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최소 n+1차원에 위치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3차원 물체를 보더라도 실제로 망막에 맺히는 이미지는 2차원이므로 이를 3차원의 이미지로 구성하는 데에는 뇌의 도움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은 실상 뇌가 구성한 가상에 가깝고, 진정한 의미의 3차원 경험은 불가능한 것이다. 백가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시를 통해 4차원의 “하이퍼큐브”(「하이퍼큐브」)를, 나아가 5차원인 ‘하이퍼큐비클’을 구축함으로써 세 어린이의 좌표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연구소장”의 시점을 독자에게 부여한다. 우리가 그의 시를 난해하게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차원 세계에 속한 우리가 그의 시를 읽으며 난데없이 그 이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지기 때문이다. 「하이퍼큐브」 속 어린이들(3차원)이 연구소장(4차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듯, “최신 휴대전화로 바꾸”기 전까지 누군가가 보낸 문자를 “X”(「벽돌공의 벽돌벽」)라는 이미지로만 볼 수 있듯 말이다. 시인이 이와 같은 난해함을 의도적으로 감수하면서까지 시에 고차원의 구조를 구축한 것은 3차원의 현실을 외부에서 보다 명확하게 조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고차원의 도입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전략적 구조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집에서 (고차원의 껍질을 벗겨내면)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현실의 구체적 모습이다.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사무실 칸막이나 원룸과 같은 “정육면체 안으로” 몸을 “구겨 넣”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끝내 말라붙은 “혈액”으로 그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하기도 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 「하이퍼큐브」에서 시인이 좌표축을 생계형 노동자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이 세계가 사실상 이들로 인해 유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폭염과 폭우와 / 폭력”(「영화 「보이지 않는 영사기사」」)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일하”는 “트랜스패런트칼라”TC(「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 칼라」)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듯 말이다. 몸을 갈아 넣은 그들의 노동이 결국 “브이아이피를 위한”(「호텔 엑셀시오르」) 것만이 된다 하더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된다 하더라도(「기둥 세우기」 「신당역 사망 사고 관련 재발 방지 대책 아이디어 제출 양식」) “네 면의 벽에 가로막혀”(「옥탈」) 살아서는 탈출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세계. 죽음조차도 자본주의의 논리에 잠식된(「사이파이 비문에 넣을 간단한 메모」) 현실의 민낯이 3차원의 바깥에서 세세히 까발려진다. 백가경이 차원을 확장하여 3차원의 현실을 본다면, 윤지양은 반대로 차원을 축소하여 현실을 묘파한다. 뼈로 남은 사람 일기장을 마주한 채 앉아 있다 태양이 뜨고 구름 한 점 없는 유리 좀 먹은 냄새가 늑골 사이에 끼어 있지만 영혼이 잡아당기다 놓쳤다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은 정글짐 유리는 그 안에서 논다 —「살기」 전문 이 시에서 그려지는 앙상한 ‘나’의 형상을 먼저 살펴보자. “뼈로 남”아 있는 ‘나’는 “좀 먹은 냄새”와 같은, 생존을 증명하는 가장 최소한의 흔적조차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생의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로 보인다. 그가 마주하는 “일기장” 또한 온기 없는 생의 잔재일 뿐이라는 점에서 ‘나’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말하자면 ‘나’는 정글짐과 같은 3차원적 현실에 속하면서도 “그 안에서”만 노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삶의 가능성을 봉쇄한 채 평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염두에 둘 때 이 시의 제목이 “살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시인은 저처럼 감각도 기억도 기대도 부재한 삶이 과연 살아 있는 삶인지를 제목을 통해 되묻는 것으로 보인다. 윤지양의 『기대 없는 토요일』에는 이처럼 2차원적 삶을 살고 있는 ‘나’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기할 점은 「살기」를 포함한 그의 시들이 극도로 절제된 말들과 간극이 넓은 문장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형식이 그들의 2차원적 삶과 닮아 있다는 점이다. 구를 원으로 그릴 때 많은 것이 생략되는 것처럼 마치 뼈(선분)만으로 구성된 것 같은 그의 시는 그 자체로 2차원의 형태를 띤다. 가령, 시집의 한 면에 “구”라는 단어를, 다른 한 면에는 “원”이라는 단어를 배치한 「소원」에는 각주를 제외하고는 본문이 없다. 또한 시집 곳곳에 기호들이 등장하는 여러 시는 그 자체로 내용이 압축된 상태임만을 표기한다. 다시 말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고요하고 편평한 평면 아래, 말들을 한껏 눌러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의 축소가 『기대 없는 토요일』의 주요한 시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형식이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의 납작함을 떠올리게 한다는 데 있다. 일상의 무게에 눌린 채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할 틈도 새로운 감정이 발생할 여지도 없는 삶.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바빠 무언가를 오래 기다리며 발견하는 즐거움은 이내 따분함으로 바뀌고(「피아노 교습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을”(「소설」, p. 17) 필요조차 찾기 어려운 삶. 그리하여 특별한 사건 없이는 경험해온 범위 이상을 떠올리는 일이 불가능해진 삶(「은미」) 말이다. 이를 삶의 평면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단순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액체 현대’(바우만)를 넘어 ‘기체 현대’1)라고 불러야 할 만큼 더욱 복잡하고 불안정해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두 시인의 정글짐은 서로 맞닿는다. “x값”만 “무한 증폭”되는 「하이퍼큐브」 속 x의 모습은 입체감을 상실한 채 삶을 살아가는 윤지양의 시집 속 현대인의 형상이기도 한 것이다. 2. 차원 건너기 정리하자면, 백가경의 시집은 차원을 확장함으로써 현실을 외곽에서 조망하고, 윤지양의 시집은 차원을 축소함으로써 현실의 내막을 재현한다. 어떤 이는 이러한 실험을 모두 통과하고 난 끝에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TC의 삶에 대해서도 범죄의 대상이 된 여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해왔으며, 토요일조차 기대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곧 우리의 삶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실험시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결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답을 알고 다시 문제를 들여다보면 초라할 정도로 단순해 보이는 대부분의 수수께끼처럼, 이러한 결론은 그들의 시를 단 한 번 읽는 데 그치게 만들 수도, 정글짐을 직접 타기보다는 타인의 후기에 만족하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두 시집의 운명을 가늠하기 위해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앞서 제기했던 첫번째 질문, 즉 이들이 왜 굳이 실험적 형식을 택했는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 대답은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로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사람들 코끼리와 광대가 서 있는 무대로 돈을 던진다 광대는 모르지만 코끼리는 안다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광대는 두리번거리고 떨어진 돈을 주머니에 주섬주섬 구겨 넣는다 광대의 주머니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광대가 돌 때마다 주머니에서 돈이 후드득 떨어진다 광대는 회전하며 떨어지는 돈을 본다 후드득 내가 자빠지는 것보다 재미있어? 광대는 떨어지는 돈을 흉내 내며 자빠진다 오줌이 찔끔 사람들 자지러지고 휘파람 분다 [……] 춤 후드득 춤춤 후드드득 춤춤춤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광대는 본다 코끼리가 본다 —「비질」 부분 백가경의 시에 사용된 “비질”이라는 제목이 그 자체로 하나의 답변이 된다. 2010년 캐나다 동물권 단체 ‘토론토 피그 세이브Toronto Pig Save’에서 시작된 ‘비질’은 “도축장을 방문해 비인간 동물이 처한 진실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활동을 가리킨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 활동은 비인간 동물들이 도축 직전 보인 공포 어린 눈빛과 그들의 목이 곧 썰려나가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 후 그들의 고통을 증언하려는 행동이다. 여기에는 비인간 문제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비질」에서 ‘춤’의 몸짓이 반복적으로 의태되는 까닭(“춤 춤춤 춤춤춤 춤”)은 바로 그런 감각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함일 것이다. “관객”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무대를 수행하는 “광대”와 “코끼리”만이 어떤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설정 또한 독자 역시 직접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진실에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이에 기댄다면, 백가경 시의 실험적 형식은 단순히 새로운 시도라기보다 독자가 그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칸막이 모듈 밖을 내다보지 않”아야 하는 “큐비클 생태계”(「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칼라」)와 같은 현실에서 그의 시는 우리가 속한 정글짐을 외부자의 시선에서 객관적이고 상세히 살펴볼 수 있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외부적 시선을 다시 내부로 침투하게 한다. 즉 독자는 그의 시를 통해 3차원 현실 ‘밖에 있는 자’이자 그 ‘안에 속한 자’가 되어 차원을 넘나드는 가운데 공고한 구조를 무너뜨릴, 다른 차원의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이 문제 해결의 성패가 “창의적인 미치광이”(「『관내 여행자』」)로서의 자신에게도 달려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차원을 넘나드는 독자의 수행을 유도하는 것은 윤지양의 시도 마찬가지다. 나: 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 나: 하지만 대결하지 않으면 평생 지루한 회전목마를 탈 것이다 짜릿함을 모방한 테마파크에서 탈출하려는 사람 그리고 별안간 절벽으로 던져지는 때 풍선을 뒤쫓는 광대와 광대를 뒤쫓는 사자와 사자를 뒤쫓는 태양과 태양을 뒤쫓는 풍선과 풍선은 사자의 미움만 하고 사진사가 셔터를 누를 때 광대와 태양은 한순간에 담기지 않는다 찾기 위해선 사자의 뒤편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외면」 부분 이 시에서 ‘의미’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나’는, 아니 그마저도 수동적인 방식으로 바라는 ‘나’(“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는 앞서 살펴본 평면적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자일 것인데, 이 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계에는 “사자의 뒤편”이 있다는 사실, 즉 무대를 평면 사진 안에 모두 담을 수 없음을 깨닫는 ‘나’의 모습을 담는다. 『기대 없는 토요일』 한편에 “구름 한 점 없는 유리”(「살기」)가 아닌 “구멍 뚫린 유리”(「햇빛 광경」)를, “엉망으로 깨진 유리”와 같은 “사랑들이 널브러”(「빛과 소리 소문」)진 모습을 보고 있는 ‘나’가 있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깨끗하며 적절하기만 한 대답은 실체가 아”(「 」)닌 것처럼, 삶은 투명하고 단일한 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면과 선이 엇갈려 구성된 입체라는 점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의 진실인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이 진실을 누군가 발견할 때 그들의 삶이 “부풀기 시작한” “뺨”(「빛과 소리 소문」)처럼 솟아오르는 장면을 거듭 제시한다. 가령 「Nguyễn Thế Hoàng」과 「Let’s work hard!」 연작에서 비즈니스 대화를 주고받던 두 직장인이 시와 사진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일상의 뒤편이 열리는 장면이나, 자신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려 하던 “동생”의 일견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시도에 의해 새로운 사건과 만남이 생기는 「소설」(p. 102)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하다. 윤지양의 시를 읽으며 발생하는 사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독자는 윤지양이 극도로 압축해놓은 2차원의 시를 3차원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데, 여타의 시보다 더욱 힘겹게 글자 아래 눌린 의미들을 추론하여야 하는 시 읽기를 통해 독자는 백가경의 경우와 다른 난해함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를 해석하는 가운데 의미와 감각이 입체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하게 열리는 시의 뒤편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감각을 회복하고, 그 결과 시와 삶의 의미 여러 겹을 통과한 독자는 그의 시가 기호로 나타내었듯[“P=70W+,+(M1 …M5)+O+M'”, 「,=,( ) 정체」] 시는 물론 생의 더 깊은 의미에 이르게 된다. 그들의 시를 통과하며 변화되는 감각과 인식의 범위가 크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들의 시를 읽고 나서 손에 쥐어지는 것이 다소 납작한 결론이라는 사실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거듭 말하건대 두 시인은 단순히 낯선 감각을 연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감각하게 만드는 조건으로써 차원의 실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정글짐으로 할 수 있는 놀이가 무한한 것처럼 이 시집들 또한 무수한 독해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감각하고 재구성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나는 팔이 부러지고, 이마가 깨지고, 온몸에 멍이 들더라도 그들의 정글짐을 타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 한다. 시의 영토에서만큼은 안전한 장소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1) 「사이파이 사일런스관 애장품 가이드 투어」에서 백가경은 “암석과 금속”인 “고체”로 이뤄졌던 지구가 “주로 기체로 이뤄”진 “목성형 행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상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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